[벼리 2] 평택에서, FTA에 맞서, 불복종을!

 

2006년 하반기 대중적 불복종운동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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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올해 한국의 사회운동은 평택 전쟁기지 건설 저지 투쟁에 이어 한미 FTA 협상 저지 투쟁에 집중하였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이 한국에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 위의 두 사안으로 표출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사회운동은 정파나 입장 차이를 떠나 이 사안들에 적극 대처해왔다. 지난 7월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 FTA 2차 본 협상을 저지하기 위해서 장대비 속에서도 수만 명이 청와대로 진격하였고, 이런 투쟁은 일정 정도 정부의 태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택이나 한미 FTA나 정부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전면적이고 한국의 국가권력이 총동원되어 이를 관철하려 하는 사이 생존권마저도 위협받는 민중세력들과 시민세력들이 오랜만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총체적인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소위 ‘87년 헌법 체제’의 실질적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성과마저도 잃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공세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에 비해서 사회운동은 조직된 대중들을 동원하는 군중집회와 시위, 또는 기자회견과 같은 형식의 관성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권력을 긴장하게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운동의 무기력함에 대한 회의가 사회운동 진영에는 광범위하게 깔려 있다. 수만 명이 운집하는 집회라고 해도 경찰의 차벽 안에 갇혀서 고립적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정책적 반영도 거의 되지 못하고, 영향력 있는 언론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어떻게 하면 위력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불복종운동 사례를 살펴보면서 지금 현 시기 불복종운동의 의미와 방안에 대해 고민해본다.

한국의 사회를 변화시킨 불복종운동

불복종운동은 법이나 정책에 대한 불복종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하는 운동이다. 이런 불복종운동은 법의 이름으로 또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법률이나 정책이 결정되고 실현되는 과정을 문제 삼는다. 그렇다고 모든 운동이 불복종운동은 아니다. 그 경계는 애매하지만, 불복종운동이기 위해서는 법적인 한계를 넘으려는 의도적인 직접행동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예상되는 피해나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불복종운동은 사익이나 일부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만큼 제기하는 문제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국내 불복종운동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는 1986년부터 4년간 진행된 KBS 시청료 거부운동이다. 군부권력에 장악돼 일방적으로 정권의 주장만을 방송해댄 언론을 더 이상 참지 못한 한 농민이 시청료 납부 거부를 선언했다. 부당한 군부 정권에 동조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항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에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 운동에 동참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세력의 언론 통제 수단이었던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방송법이 제정되는 등의 성과를 낳았다.

불복종운동인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현장.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혼자선 일반 버스를 탈 수조차 없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공공 교통수단은 그 자체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야기한다.<출처;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최근의 불복종운동의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운동 중 하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다. 이 투쟁은 2000년부터 4년간 집중적으로 터져나온 불복종운동이었다. 대중 교통 서비스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 부문이지만 현실적으로 장애인들은 공공 교통 서비스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버스나 전철은 장애인들의 속도를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들의 경우에는 아예 버스에 오를 수도 전철을 탈 수도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며 장애인들이 직접 나서 버스와 전철을 타기 시작했다. ‘버스와 전철을 탄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이 장애인들에겐 그 자체로 비장애인들의 손가락질과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커다란 ‘불복종’이었다. 중증장애인이 직접 문제제기를 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이동권의 문제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통 약자들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대중적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버스·전철 타기 등의 합법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도로 점거, 지하철·버스 점거 등과 같은 불법적인 점거농성도 과감하게 이어졌다. 법 제정과 정부당국, 서울시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 등에서 주목해 볼 사례다. 4년간의 지속적인 투쟁 과정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역량과 연대하면서 진행되었고 결국 관련 법률 제정과 정부와 자치단체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역 군인으로 복무하다 이라크전쟁에 항의해 입영을 거부한 강철민 씨<출처; 전쟁없는 세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도 불복종운동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징병제 사회에서 징집을 거부하는 행위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위한 군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군 입대를 거부하는 단호한 개인들의 양심은 이제 특정 종교인의 범위를 넘어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병역거부라는 불복종의 대가는 가혹했다. 평화를 향한 양심에 따라 징집을 거부하면 최소 1년6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된다. 그런데도 군대 대신 감옥이라는 불복종을 택하는 양심은 늘어만 가고 있다. 불복종운동으로서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외에도 지문날인 거부 운동, 2000년 롯데호텔 파업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는 롯데 상품 불매운동, 부안 핵폐기장 반대 주민투표 운동 등으로 이어지며 불복종운동은 우리 사회 저항운동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불복종운동은 기존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의도적으로 주류 질서를 어겼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권력의 부조리함에 대한 정치적 각성 과정을 거친 후 부조리함에 동참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존의 규율을 거스른다. 기존의 규율을 거스르는 과정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행동에서부터 대규모의 대중적인 실천까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불이익과 불편이 예상되더라도 이를 감수하고 불복종을 감행한다. 최초로 불복종을 감행한 사람들은 소수이더라도 불복종이 하나 둘씩 진행되는 동안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동참하는 운동으로 나아감을 역사적으로 성공한 불복종운동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불복종운동, 한계를 넘어야

불복종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부조리한 권력 질서에 저항할 수 있는 행동에 동참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중운동으로서의 큰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불복종운동의 우려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대중들의 정치적 각성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불복종운동은 자칫 ‘불발된 기획’으로만 그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불복종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효과적이고도 적절한 행동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고, 불복종에 따른 일정 정도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데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불복종운동은 운동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명멸해간 다른 운동의 전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불복종운동을 합법의 영역에만 가두려는 일부 시도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불복종운동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운동이 아니라 불복종을 통해 대중들의 행동이 적극화되고 대중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할 때 위력적인 저항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다. 대중들을 선험적인 한계에 가두지 않고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려는 노력, 불복종운동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을 확장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획 역시 끊임없이 고민되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불복종운동이 미완의 운동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부안 핵폐기장 반대 운동의 경우에도 비록 부안에서 핵폐기장이 건설되는 것은 주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막아냈지만 결국 경주에 핵폐기장이 들어서기로 결정되면서 핵폐기장 반대 운동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적인 불복종운동을 상상하자

현재 평택 전쟁기지 건설에 대한 저항과 한미 FTA 체결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전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평택에 미군기지를 이전·확장한다는 것은 곧 미군의 전세계적 전략적 유연성 정책에 따라 주한미군의 선제공격 전략을 한반도에서 구상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한국정부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또 한미 FTA가 추진될 경우에는 단순히 생존권만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질서 자체가 부정된다. 한국의 의회나 사법기구들의 법적인 절차는 모두 쉽게 무시된다.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해 대표권을 위임받은 권력자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추진한다는 것은 이미 대표권의 위임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러한 사안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총체적으로 제기하고 이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나아간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하지만 민중이 배제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합법적인 권력은 기존의 지배적인 권력만을 대변할 뿐이다. 누구나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부당한 질서에 대한 불복종은 적극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2006년 하반기 대중적 불복종운동을 상상한다.<출처; www.bigfoto.com>


평택 전쟁기지 건설을 막아내고 한미 FTA를 저지하기 위해 채택할 수 있는 불복종운동의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지금 평택에서는 강제철거를 앞두고 지킴이들이 빈집을 점유하여 생활하는 불복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파괴된 대추분교를 재건하는 작업도 불복종운동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강제철거를 저지하기 위한 미군기지 앞 촛불집회도 계획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사회적인 여론화를 위해서 불법적인 비폭력 거리시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영국의 ‘트라이던트 핵 잠수함 보습 만들기 운동’과 같은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시민들이 쉽게 참여하는 방법들로부터 선도적인 투쟁 방법까지 불복종운동의 방법은 기획하기에 따라 무척 다양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사회운동 진영이 써왔던 관성적인 투쟁방식을 넘어 시민들의 정서에 맞는 투쟁의 방법들을 상상력을 동원해 고안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느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아마도 올해 하반기는 이렇게 중요한 상황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 최소한 평택 전쟁기지 건설이나 한미 FTA 추진을 지연시키기 위해서라도 권력에 의해 관리되는 집회와 시위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운동의 기획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권오름 제 17 호 [입력] 2006년08월17일 0: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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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1] 불복종운동의 새로운 발견

 

순응을 거부하며...합법적 불법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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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아 
7월 14일 1만5천여 명이 서울로 운집한 한미 FTA 반대집회에서 경찰의 물리력을 넘어 광화문 사거리를 뚫고 청와대로 가기위해 싸웠던 그 시위대는 정작 미대사관 앞에서 조용히 마무리 집회를 끝내고 흩어졌다. 공식적인(?) 광화문 사거리까지의 행진 이후, 프로그램의 부재는 각각의 운동진영이 알아서 분노의 수위를 조절해가며 행사를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그 현장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답답함은 참여자로서 나 스스로 어떤 실천이 가능한지 되묻게 했다.

‘집회로 인해 교통체증을 느끼는 시민들에게 직접 찾아가는 운동의 기획은 힘들까? 차벽 안에 갇힌 집회의 자유를 넘는 시위는 어떻게 가능할까? 많은 사람의 동의와 지지를 얻는 운동의 전략은 무엇일까?’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불복종 운동’을 떠올렸다. 불복종 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참여’ 속에서, 광범위한 ‘동의’를 확보하는 가운데, ‘직접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실천전략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또한 ‘합법’의 테두리에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경계를 뛰어넘는 운동의 기획과 실천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특히 민주주의 법치국가라는 틀에서 ‘적법 절차’를 가장해 권력자들이 남용하는 자의적이고 부정의한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불복종 운동’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야할 운동의 전략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의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라

자유인의 피난처가 되기를 자임하던 나라에서 전체 국민의 6분의 1이 노예상태에 있고 그 국가가 멕시코를 점령해 군법으로 지배할 때, 저항을 일깨운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시민불복종』을 통해 ‘불복종 운동’의 영감을 오늘까지 전파하고 있다.

소로우는 “우리는 모두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며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 그 가운데 그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이 중지되도록 호소했다. 소로우는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 폐지와 멕시코와의 전쟁중지 라는 소신을 가져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의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그 법을 어기라”고 강조하며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실천의 방법으로 도망치는 노예를 캐나다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1847년 멕시코 전쟁에 반대해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소로우의 『시민불복종』은 노예제를 반대하며 다양하게 저항을 일구어온 퀘이커교도와 평화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탄생되었고 이들의 노고는 1830년대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전술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중적인 불복종운동을 보여준 간디, 마틴 루터 킹

영국 식민통치의 부도덕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대중적인 불복종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한 간디는 소로우의 불복종을 새로운 면모로 탄생시켰다. 소로우가 불복종 운동을 의로운 개인의 결단으로 시작했다면 간디는 소수에 의한 영국 식민통지에 대한 저항을 다수 인도 민중의 불복종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1930년 3월 소금세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진실에의 헌신) 운동을 시작했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불복종 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무려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대중적 불복종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간디<출처; www.temple.edu>


간디에게 있어서 불복종은 법을 초월하는 가치체계이며 불복종의 힘은 진리추구에서 나온다. 간디는 법에 매몰되지 말고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라고 주문한다. 간디에게 있어서 악법은 인간이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요하는 법이거나 마땅히 할 것을 억지로 금하는 법으로, 도덕과 정의의 원칙을 위반한 법을 구분해내고 필요하다면 그것에 불복종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 의무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간디는 악의 존재 자체는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자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한다. 악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악법을 만든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의해 고통 받는 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악법에 대한 저항은 불복종으로 협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는 불의와 부정의에 협조하지 않는 불복종을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하며, 대중의 힘으로 지배 집단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불복종 운동을 실천하면서 혁명적인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천은 억압받는 전 세계 민중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흑백분리주의에 협력을 거부한 버스안타기운동

불복종 운동의 대중적인 힘을 보여준 또 다른 사례는 미국 몽고메리에서 불붙었다. 1955년 12월 1일 로사 파크스 씨는 버스에 올라타 백인전용좌석 바로 뒤에 앉아있었다. 조금 후에 백인남성이 타자 운전사는 그녀에게 뒤로 가라고 명령했으나 그녀는 거부했고 결국 흑백분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백인전용으로 지정된 좌석에 백인들이 모두 앉아 있는 상태에서 백인이 더 승차할 경우 운전사는 백인전용석이 아닌 좌석에 앉아있는 흑인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고 이런 명령을 따르지 않는 흑인은 체포됐다.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한 혐의로 연행된 로사 파크스<출처; en.wikipedia.org>


로사 파크스 씨의 불복종을 계기로 흑인사회에서는 흑백분리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버스안타기운동이 전개되었다. 흑인들은 집에서 학교, 일터까지 2-3시간이 걸리더라도 걸어서 가거나 자전거, 카풀 등 대체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버스안타기운동은 흑백을 분리하는 사악한 제도에 협력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마틴 루터 킹은 항의할 권리가 있음을 알렸고 항의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법률을 바꾸어 내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마틴 루터 킹은 두 번이나 감옥에 수감되고 협박, 폭파 등 일상적인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으나 불복종 저항을 고수했다. 불복종 저항운동의 한복판에서 마틴 루터 킹은 끊임없이 대중들과 소통했고 반차별 인식의 저변을 확산시켰으며 불복종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연대했다. 마침내 1956년 11월 13일 미연방최고법원이 흑백분리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12월 21일 흑백통합버스가 몽고메리를 달렸다.

불복종운동의 인권법적 정리

저항운동의 역사 속에서 실천적으로 발전해온 불복종운동은 일부 인권법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자유주의 법학자 존 롤스는 ‘불복종이란 정부의 정책이나 법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일반적으로 법에 반대해서 행해지는 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인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는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부정의한 법률에 불복종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도덕적 의무로 강조했으며 시민불복종이 성립되기 위해서 △불복종 행위가 심각한 부정의에 대한 항의 행위이고 △가능한 충분한 법적 수단을 강구한 이후 △불복종 행위가 헌법질서의 기능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쉴러 슈프링고룸은 불복종을 ‘공적으로 선언되고 윤리적·규범적으로 근거 지워진 상징적 항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의 의식적인 법 위반’이라고 보았다. 그는 시민불복종이 성립되기 위해서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가 의식 있는 법 위반으로 나타날 것 △공공성을 띌 것 △비폭력행위일 것 △정치ㆍ도덕적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일 것 △중대한 불법에 항의하는 행동일 것 △항의수단이 목적과의 관계에서 상당성을 지닐 것을 제안했다.

자유주의적 불복종운동의 한계를 넘어

서구의 자유주의적 법학자들은 저항운동의 일부로 성장해온 불복종운동을 법 중심적으로 해석하면서 또다시 법의 테두리 속으로 가두려 하고 있다. 존 롤스의 주장처럼 불복종 행위는 어디까지나 ‘헌법질서의 기능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충분한 법적 수단을 강구한 이후’에만 가능하다거나 쉴러 슈프링고룸처럼 기준이 불명확한 ‘중대한’ 불법에 항의하는 행동이 ‘법’ 위반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불복종운동의 요건으로 ‘비폭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비폭력’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서구 자유주의 진영의 ‘비폭력’ 개념은 일정 정도 제한적인 개념으로서 저항운동과 긴장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법을 넘어선 저항은 민주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한 핵심이다"<출처; www.organizedresistance.org>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정책이나 법률이 항상 옳다는 관념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법학자들이 일정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부의 정책이나 법률이 위법하거나 민주주의의 원칙에 위배될 때 이에 저항하는 것을 ‘저항권’이라는 인권의 이름으로 규정했다. 저항권은 자연법사상을 통해 근대시민혁명을 가로질러 나타나 봉건질서를 타도하는 혁명적 힘을 가진 근대시민혁명의 이론이었지만, 혁명 이후 저항권은 ‘엄격한 제한’을 통해 점차 형식화 되었다. 근대국가에서 저항권은 ‘극히 예외적이고 한정적’이며 ‘극도의 불법’을 교정하기 위한 조치로서만 승인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저항권은 그 어떠한 부당한 제한으로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복종운동 역시 대중운동의 역동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떠한 특정한 조건으로 가둬질 수 없다. 오히려 저항운동 중에서 불복종운동은 △기존의 주류 권력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예상되는 불이익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갖고 △의도적으로 위반 행위를 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현실 속에서 불복종운동은 어떠한 틀거리에 갇히지 않고 대안적인 질서를 ‘향하는’ 운동으로 움직여왔음을 떠올린다. 오히려 불복종운동은 ‘복종에 대한 거부’를 넘어 ‘주류적인 권력 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운동으로의 변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주류 권력 질서와 이를 지탱하는 구조에 대한 일상에서의 저항은 불복종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불복종의 권리는 헌법뿐 아니라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인권기준에서도 인정되고 있는 ‘인권 옹호를 위한 권리’이다. 세계인권선언은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저항권의 행사를 인정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전문에서 밝힌 저항권은 인간의 권리를 억압하고 폭력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저항을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한 것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戰犯)재판은 아무리 자국의 법률과 명령이 행위의 이유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부당한 법률과 명령에 불복종하는 저항권의 행사를 국제법상 권리이자 의무로까지 승격시킨 바 있다. 이어 세계인권선언 제정 50주년 해인 1998년 유엔 총회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인권 및 기본적 자유를 증진, 보호하기 위한 개인·단체·기관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선언문'(결의안 53/144, 이하 인권옹호자 선언문)을 채택했다. 인권옹호자 선언 12조는 모든 사람은 인권침해에 '평화적으로 저항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권옹호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국내법에 의해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비록 형식적으로 민주적인 법과 질서가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이 지속적인 이해와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하기 위해서, 불복종 운동은 ‘더 나은 질서를 향한 호소’로 작동한다. 이것이 때로는 ‘실정법을 향한 도전’으로 때로는 ‘합법적인 불법’으로 등장한다. 불복종의 권리는 빼앗긴 인권을 되찾고 새롭게 만들어질 인권의 지도를 그리게 한다.
인권오름 제 17 호 [입력] 2006년08월17일 0: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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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8-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짝 얻어 가옵니당^^

balmas 2006-08-1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러세요. 이미지 귀엽네요. ^^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49576.html

 

시계추 거꾸로 돌린 헌법재판관 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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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6년 동안 헌법재판소(4기)를 이끌 새 소장과 재판관 후보 다섯 사람이 확정됐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헌재 소장에 전효숙 현 재판관이 지명된 것이다. 첫 여성 헌재 소장일 뿐아니라 기존의 서열 위주 인선 관행을 벗어난 적잖은 파격이다. 전 내정자는 재판관 시절 양심적 병역거부자나 노동권 문제에서 전향적인 소수 의견을 낸 반면, 국가보안법이나 이라크 파병 위헌 다툼에선 다수의 합헌 의견을 따랐다. 보수색이 뚜렷한 헌재 구성을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균형과 소신을 갖춘 것으로 평가한다. 현 재판관 중에서 처음으로 내부 승진한 것도 독립적인 헌법 기구로서 헌재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긍정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번 인선에서 ‘인적 구성의 다양화’라는 시대적 흐름은 오히려 크게 후퇴했다. 재판관 내정자들은 모두 주류 법조인 출신으로, 재야와 학계 등 외부 인사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나마 과거에는 퇴직 법조인이나 변호사 출신이 한둘 있었지만, 이번에는 철저히 현직에 있는 고위 판·검사 출신들로만 채웠다.

대법원장 추천 몫은 대법관 탈락자들을 배려하는 데 활용됐고, 관행적으로 이어져온 검찰 몫도 유지됐다. 꽉 막힌 헌재의 폐쇄적 구조를 개혁하자는 요구와 정반대로 정통 법조인 중심의 충원 구조만 더 공고해진 것이다.

헌재의 보수적 색채 역시 한층 강화됐다. 유일하게 개혁적 성향의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재야 변호사는 막판 검찰 몫에 밀려 탈락했다고 한다. 법조계 내부에서조차 얼마 전 대법관 인사 때보다 다양성과 이념적 균형성 측면에서 훨씬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이처럼 성역화한 ‘그들만의 사법부’가 광범위한 사법불신의 주된 이유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기본권을 적극적으로 구제하고 이를 침해하는 위헌 법률들을 제어할 막중한 권한과 책임이 있다. 그러나 헌재는 그동안 폐쇄적인 구조와 이념적 편향, 나아가 왜곡된 사법 만능주의 탓에 이런 소임에 충실하지 못했다. 건강한 헌법 정신과 인권 감수성, 다양한 이해 관계에 귀기울일 줄 아는 헌재 재판관들의 자질과 태도가 절실한 이유다. 국회 인준 과정에서, 보수냐 진보냐라는 이념적 성향을 떠나 국민들이 위임한 소임과 헌법 정신을 제대로 실현할 인물인지 철저히 검증해야 할 것이다.

기사등록 : 2006-08-16 오후 06:23:50 기사수정 : 2006-08-16 오후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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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엇갈리는 양쪽 대리…잦은 ‘양다리’ 시비

 

진로 법정관리·SK 경영권분쟁 등 구설수

김앤장 “로펌 대형화따라 선진국 기준완화 추세”

 

 

한겨레 김인현 기자 최혜정 기자
» 새로운 권력 ‘김앤장’ - (하)‘쌍방대리’ 논란
[관련기사]
[새로운 권력 ‘김앤장’ - (하)‘쌍방대리’ 논란]

진로 법정관리 · SK 경영권분쟁 등 구설수
김앤장 “로펌 대형화 따라 선진국 기준완화 추세”

김앤장은 그동안 몇차례 ‘쌍방 대리’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쌍방 대리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당사자 양쪽을 모두 대리하는 행위다. 변호사법 31조는 수임한 사건의 상대 쪽에서 맡기는 같은 사건의 수임을 금지하고 있다. 또 변호사 윤리장전 17조 1항은 현재 맡은 사건과 이해가 저촉되는 사건을 맡는 것을 포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김앤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2003년 대한변협에 진정을 당하고 형사고발이 된 적이 있다. 진로는 1997년 법원에 화의신청을 하면서 김앤장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다음해 화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진로의 채권 일부를 인수했던 골드만삭스가 2003년 진로의 법정관리 신청을 냈다. 쌍방 대리 논란은 골드만삭스의 법정관리 신청 대리를 맡은 김아무개 변호사가 법정에 제출한 문서가 김앤장한테서 팩스로 받은 문건임이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진로 쪽은 “진로의 화의와 구조조정 업무 등을 대리·자문하는 김앤장이 김 변호사를 앞세워 진로에 적대적인 골드만삭스를 사실상 대리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라며 “이는 쌍방 대리일 뿐 아니라 업무상 배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앤장은 쌍방 대리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김 변호사에게 보낸 팩스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김 변호사와 골드만삭스와의 연락을 도와준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은 그 뒤 검찰과 변협에서 무혐의로 처분됐다. 당시 징계심의를 맡았던 변협 관계자는 “진로 쪽에서 김앤장이 골드만삭스를 대리하는 데 동의한다는 문서가 제출돼 무혐의 처분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동의서에 대한 김앤장과 진로의 설명은 서로 다르다. 진로 쪽은 당시 쌍방 대리 문제가 불거진 뒤 김앤장 쪽에서 “골드만삭스와의 화해를 주선할테니 동의서를 써달라”는 제의가 와 ‘화해를 주선하는 범위 안에서 김앤장이 골드만삭스를 대리하는 것을 동의한다’는 취지로 써준 것일 뿐, 그 전에 김앤장이 골드만삭스를 대리한 것까지 동의하는 취지는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김앤장은 “당시 진로를 대리하고 있던 법무법인 쪽에서 ‘화해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해 동의서를 받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를 대리하지 않았다면서도 왜 동의서를 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자꾸 쌍방 대리라며 시비를 걸어와 귀찮아서 ‘시비를 걸지 않겠다는 동의부터 하라’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쌍방 대리 논란이 불거진 뒤 김앤장의 요구로 동의서가 작성됐고, 이 동의서가 김앤장에 유리한 증거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앤장은 2003년 에스케이와 소버린자산운용의 경영권 분쟁 때도 쌍방 대리 시비를 불렀다. 분식회계 혐의로 구속된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의 변호를 맡았던 김앤장이 소버린의 주식취득 신고를 대행해 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소버린은 에스케이 지분을 14.99% 사들였다. 15%가 되면 에스케이가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분류돼 에스케이텔레콤에 대한 의결권이 축소되는 상황이었다.

김앤장은 “당시 소버린의 주식취득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다만 소버린이 주식을 다 산 뒤 주식취득 신고만 대행해달라고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버린이 에스케이와의 경영권 분쟁을 자문해준 별도의 법무법인을 놓아두고 굳이 김앤장쪽에 주식취득 신고 대행만 요청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이에 김앤장은 “우리가 보기에도 소버린이 단지 행정적 절차만 우리에게 맡긴 게 이상하지만 소버린이 허술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해관계가 갈리는 세 당사자를 김앤장이 모두 대리하다 당사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 문제가 된 경우도 있다. 97년 제이피모건은 동남아 외환관련 파생 금융상품을 개발해 에스케이증권을 판매간사로 국내 증권·투신사 등에 팔았고, 이 과정에서 국내 은행들이 지급보증을 섰다. 그러나 동남아 외환위기로 타이 바트화 등이 폭락하면서 이 파생 금융상품을 매입한 회사들이 큰 손실을 입었고, 결국 다음해 소송 사태로 번졌다. 김앤장은 애초 판매자인 제이피모건과 매입자인 증권·투신사, 지급보증을 한 은행들까지 모두 대리해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랬다가 계약상의 지급보증 범위 등을 둘러싸고 3자 사이에 다툼이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해 김앤장은 “정형화된 거래 때는 당사자 모두의 동의를 받아 계약서를 작성해주는 경우도 있다”며 “동의를 받은 만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이 밖에 97년 기아자동차의 화의를 대리한 김앤장이 다음해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는 포드를 자문한 것도 문제가 됐다. 화의를 대리하면서 알게 된 기아차의 정보를 포드를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김앤장은 “법률적인 문제만 검토했을 뿐이므로 쌍방 대리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태도다.

김앤장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재매각과 관련해서도 사려는 국민은행과 팔려는 론스타를 함께 자문하고 있다. 김앤장은 “양쪽의 동의를 받아 국내 은행법에 관한 해석 등 지극히 중립적이고 제한적인 업무만 수행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김앤장 쪽은 “쌍방대리 문제는 사안에 따라 치밀하게 따져봐야 할 전문적이고 복잡한 문제로, 단순히 정서적이거나 획일적 논리로 비판할 성질이 아니다”라며 “최근 기업과 로펌의 대형화, 글로벌화에 따라 선진국에서도 그 기준을 완화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한다. 김앤장은 또 “그동안 불거진 쌍방 대리 논란은 소송 과정에서 상대방의 변호인을 공격함으로써 소송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며 “소송이 아닌 자문 과정에서는 의뢰인의 동의가 있고 법무법인 내 변호사들끼리 소통을 막는 정보 차단벽(차이니스 월)을 치면 쌍방 대리가 허용되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라고 말했다.

김인현 최혜정 기자 inhyeon@hani.co.kr



기사등록 : 2006-08-15 오후 07:42:42 기사수정 : 2006-08-16 오전 09: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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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꼬 2006-08-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기사 중 "구성원들의 소득도 국내 최고를 자랑한다. 2005년 6월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연 소득 6억960만원(월 소득 5080만원) 이상인 150명의 변호사 가운데 76%인 114명이 김앤장 소속이었다." 꽥~

수퍼겜보이 2006-08-1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앤장은 법적으로 하나의 법률 회사가 아니라, 여러 사업자(변호사 개인)의 조합으로 활동하는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김&장은 국내 최대 로펌 순위 등에는 들어가지 않을 걸요. 사실상 '로펌'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쌍방대리가 아닐지도... 좀 어이없지요.

balmas 2006-08-1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 ㅋㅋㅋ 오랜만에 오셔서 괜한 걸로 충격받으시는 듯 ... ^^;
수퍼겜보이님/ 그런 꼼수가 또 있군요.
 

 

누가 영국 무슬림 청년들을 트로이목마로 만드나?

 

 

한겨레 이본영 기자
» 서유럽 무슬림 인구
영 무슬림사회 청년들 나날이 급진화
알카에다와 무관한 ‘자생조직’ 번성
서구사회 ‘무슬림 급진화’ 본격 성찰

영국 무슬림 청년들의 여객기 공중폭파 음모가 들통난 뒤, 무엇이 어마어마한 일을 꾸미게 만들었는지를 두고 영국 정부와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책임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서구 언론과 정부는 무슬림 청년들의 급진화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스 켈리 영국 공동체·지방정부 장관은 14일 무슬림사회 지도자들과 만나, 청년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영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슬람 공동체를 존중하는 정책을 펴라고 요구했고, 양쪽은 “솔직하고도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다고 한 관리가 전했다.

언론들이 조명하는 일부 무슬림 청년들의 대담함은 “영국이 바로 테러기지”라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다. 테러조직들은 국립공원에 훈련캠프를 차리는가 하면, 대학 사무실을 음모를 꾸미는 데 쓰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브루넬대 앤서니 글리스 교수는 지난 15년간 이슬람 극단주의 학생조직 20개가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적발되는 테러 음모들은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수행했다기보다는, ‘자생적 테러세력’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위기감을 더욱 높인다. 이웃의 성실하고 수줍은 무슬림 청년이 어느날 ‘트로이 목마’ 속의 적병으로 표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가 일부 영향을 준 점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가담자 대부분은 알카에다를 접촉한 적이 없다. 알카에다가 이제 ‘사회운동’이 됐다거나, 사실상 이름만 빌려주는 식의 ‘프랜차이즈 조직’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알카에다를 박멸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대테러 전략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영국 사회 주류는 테러리즘이나 순교를 영예로 여기는 광신적 태도가 문제라는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160만명 규모의 영국 무슬림사회가 나날이 급진화하는 가운데, 이런 접근법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지적도 강하다.

일간 〈가디언〉은 극단주의자들이 청년들을 꾀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이번 음모로 체포된 청년 여럿이 다니던 체육관 관장 말을 전했다. 그는 “지난해 7·7테러 뒤 긍정적 방향으로 젊은이들을 이끌려는 취지의 행사에 수백명을 모았는데, 급진적 단체 사람들이 접근해 왔다. 극단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무시받는 무슬림 청년들을 파고든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처참하게 죽은 레바논 어린이 사진 등이 전자우편으로 돌아 무슬림사회를 술렁이게 만들기도 했다. 한 이슬람 인권단체 관계자는 “영국 정부는 폭발장치로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엠피3를 기내에 휴대하지 못하게 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레바논을 강타할 폭탄을 미국이 스코틀랜드 공항을 통해 나르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종교적 배경 외에 다른 영국 청년들에 견줘 두 배 이상인 무슬림 청년들의 실업률이 보여주는 사회경제적 처지도 불만의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 미국행 항공기 테러음모 혐의로 체포된 파키스탄계 영국인 타이브 라우프(왼쪽)가 체포 몇시간 전인 지난 10일 영국 버밍엄의 식품 도매점을 찾은 모습이 이 상점 폐쇄회로 텔레비전에 찍혔다. 버밍엄/AP 연합

영·미 무슬림사회 왜 다른가

영 ‘파키스탄계 밀집형…우애돈독’ - 미 ‘구심없는 산개형’

52명이 숨진 지난해 7·7 런던테러를 비롯해 영국에서는 해마다 무슬림 청년들에 의한 테러 기도와 실행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알카에다가 기획한 9·11사건 말고는 영토 안에서 미국인 무슬림들에 의한 별다른 이상동향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은 두 나라 무슬림들의 정착 형태가 차이나는 게 그 원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만~300만명으로 인구의 1% 가량을 차지하는 미국 무슬림들은 한 곳에 모여살기보다는 뿔뿔이 흩어져 그들만의 문화를 유지하거나, 서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만들 기회가 별로 없다는 분석이다.

이에 반해 160만명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 영국 무슬림들을 비롯한 유럽 무슬림들은 따로 모여사는 경우가 많다. 동부에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런던은 이슬람 국가 이름에 많이 쓰이는 ‘스탄’(땅)이 붙은 ‘런더니스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 영국 무슬림 인구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75만명이 파키스탄 출신이기 때문에 유대관계가 한결 돈독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국적과 종교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 정체성인가’를 묻는 국제 설문조사에서 영국 무슬림의 81%가 종교를 들었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파키스탄계의 신앙심과 종교적 유대감이 깊다는 얘기다.

이본영 기자



기사등록 : 2006-08-16 오전 07: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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