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유통권력,제조업체 눈물을 팝니다
납품 직원 수만명 차출
대형할인점 ‘배짱 장사’
한겨레 조성곤 기자 윤영미 기자
[관련기사]
내수 유통망 장악 발판삼아

판매원 파견 반강제 요구

추가 인건비 소비자 부담으로

두산식품사업부의 사무·생산직 인원은 315명이다. 하지만 대형마트에 차출되는 ‘노력봉사’ 인력은 500명에 이른다. 샘표식품 역시 본사 직원은 300여명이지만 대형마트에 동원되는 인력이 400여명이나 된다. 대형마트가 내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올라서면서 납품업체 직원들을 반강제적으로 징발해 노력봉사에 동원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8일 <한겨레>가 대형마트의 주요 납품업체 12곳의 파견사원 운용 실태를 조사해 보니, 회사별로 160~2200여명씩 모두 9천여명에 이르는 파견사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회사당 평균 750여명으로, 납품업체들은 파견사원 대부분을 전국 대형마트 320여곳에 보내고 있다. 대형마트 하나에 200~300명의 파견사원이 일하는 점을 감안하면 대형마트에 차출되는 노력봉사 인력은 전국적으로 적게는 6만~7만명에서 많게는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 납품업체 관계자는 “업체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파견사원의 60~80% 이상이 마트의 요구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동원되는 인력”이라며 “파견사원을 안 보내면 매장 퇴출을 각오해야 하는 탓에 제조업체들 사이에 사원 파견 경쟁이 조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납품업체들의 인건비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파견사원 한 명에 연간 2천만원꼴로, 업체 12곳이 파견사원 운용으로 부담하는 비용만 한 해 1800억원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파견사원들은 모두 납품업체에서 월급을 받지만 대형마트에 고정, 또는 순회(두세 곳 매장을 번갈아 근무)로 출근하면서 사실상 대형마트 직원처럼 일하고 있다. 상품 판매는 기본이고 매장 청소와 창고 정리까지 대형마트가 직접 고용해서 처리해야 할 온갖 잡다한 일들을 대신 처리하고 있다.




이는 대형마트들이 내수시장의 유통망을 완전히 장악해 납품업체들이 독자적인 판로를 개척할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중소업체는 물론 농심·씨제이·동원 등 상표력을 지닌 업체들도 대형마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대규모 파견사원을 두고 있다. 한 납품업체 관계자는 “제조업체가 납품에 그치지 않고 할인점 장사까지 대신해 주는 셈”이라며 “지금은 할인점만 살찌고 납품업체들은 갈수록 경영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대형마트들은 “파견사원들이 자사 제품을 판촉하고 있으며, 매출이 늘면 우리와 납품업체가 서로 이익”이라고 주장하지만, 납품업체들은 매출이 늘어도 지속적인 납품가 후려치기와 인건비 부담 증가로 남는 게 없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한 중소 제조업체는 한 해 순이익이 30억~40억원에 불과한데도 파견사원 인건비로만 80억원을 지출하고 있다.

이런 추가 비용은 그대로 납품 원가에 반영돼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 납품업체 임원은 “대형마트가 파견사원을 자신들의 인건비를 줄이는 데 악용하고 있다”며 “파견사원 비용 때문에 제조원가가 5~8%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조성곤 윤영미 기자 csk@hani.co.kr

유통시장이 개방된 지 만 10년. 대형마트가 안방을 차지하면서 유통업은 빠르게 현대화하고 성장했다. 그렇지만 대형마트들은 재래시장을 벼랑에 내몬 데 그치지 않고 제조업체까지 옥죄고 있다. ‘유통권력’의 막강한 힘에 기대 인건비를 납품업체에 전가하거나 물건값을 후려친다. 납품업체를 역마진의 처지로 내몰기에 이른 유통권력의 문제점을 3차례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기사등록 : 2006-08-08 오후 07:11:50 기사수정 : 2006-08-08 오후 07: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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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8-0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통권력이 대기업도 부려먹는군용.. 계약직들이겠지만.. (연봉을 보니 ㅡ..ㅡ;)

balmas 2006-08-0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안 이야기인데, 흥미롭네요. :-)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3> '님'과 '씨'의 사회심리학(고종석)

2006. 3. 22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3/h2006032119450882000.htm

 

[말들의 풍경] <3> '님'과 '씨'의 사회심리학

'○○○씨'대신 중립적 '님' 인터넷 타고 급속 대중화

'씨' 글에서는 존중의 뜻 있지만 윗사람이나 강자가 부르는 두사람 사이의 위계적 호칭
'님' 당신 호칭 대명사로도 쓰여 국어사전은 현실 인정 인색 사모 대상 '임'도 '님'이 대세

나이나 지위의 높낮이에 민감한 한국인들에게는 남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가 늘 골칫거리다. 썩 친해져 서로 너나들이를 할 정도가 아니면, 호칭은 흔히 긴장의 땔감이 된다.

버젓한 직책을 지닌 사람이야 이름 뒤에 직책을 붙여 부르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두루 부를 수 있는 말이 쉬 떠오르지 않는다. 이름 뒤에 붙는 ‘씨(氏)’(사전은 이 말을 의존명사로 분류해 이름과 띄어쓰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접미사로 보아 붙여 써도 상관없을 듯하다)가 꽤 널리 쓰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 말을 잘못 썼다간 고성이 오가다 마침내 주먹다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글에서는 ‘씨’가 존중의 뜻을 담을 수 있다.

이를테면 “선동렬은 타고난 투수다”라고 쓰는 것보다 “선동렬씨는 타고난 투수다”라고 쓰는 것이 더 엄전하다.(신문기사에서 여느 사람들의 이름과 달리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이름 뒤에 ‘씨’를 붙이지 않고 이름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관행은 퍽 흥미롭다. 이런 관행은 그들의 대중적 친밀도와 관련 있을 텐데, 꼭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선동렬씨와 얘기를 나누는 후배가 그를 “선동렬씨!”라고 부를 수는 없다. ‘씨’는 대체로 화자보다 나이나 지위가 아래이거나 엇비슷한 사람에게만 사용된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3인칭으로 일컬을 때야 손윗사람 이름 뒤에 ‘씨’를 붙여 얘기하기도 하지만, 본인 앞에서 손윗사람을 ‘아무개 씨’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한 분위기를 빚어내기 십상이다. 나이든 환자가 젊은 의사로부터 ‘아무개 씨’라고 불리는 것을 참아내는 것은 상대가 제 몸의 운명을 틀어쥔 강자이기 때문이지 그 호칭이 들을 만해서가 아니다. 이것은 영어의 ‘미스터(Mister)’나 ‘미스(Miss)’와는 아주 다른 상황이다.

‘미스터’나 ‘미스’에는 존중의 뜻이 담겨있다. 하기야 이 말들도 한국어 어휘목록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본디 지니고 있던 경의(敬意)를 잃어버리고 하대(下待)의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이 말들은 세력을 크게 잃어 요즘엔 듣기가 거의 어렵게 됐지만, 과거 어느 시절 홍길동이나 홍길순을 ‘미스터 홍’이나 ‘미스 홍’이라 부르는 것은 ‘홍길동씨’나 ‘홍길순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무람없는 짓이었다.

누군가가 대화 상대로부터 아무개씨로 불리는 것은 드물지 않게 두 사람 사이의 위계를 함축한다. 말하자면 ‘씨’라는 말은 다분히 계급적이다. 그런 계급적 뉘앙스가 배지 않은 말을 찾으려는 노력은 여러 세대 전부터 있어왔다. 한글학회 계열의 일부 국어운동가들이 제안한 ‘님’이 대표적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을 부를 때 두 사람 사이의 위계질서와 상관없이 서로 “노무현님!”, “정동영님!” 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이내, 한국어에서 접미사 ‘님’은 고유명사 뒤에 붙을 수 없다는 항변과 맞부딪쳤다. 아닌게아니라, ‘부장님’이나 ‘선생님’에서처럼 호칭 뒤에 붙든 ‘달님’이나 ‘별님’에서처럼 의인화한 대상 뒤에 붙든, ‘님’은 보통명사 뒤에 붙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노무현님!” 식 말투는 일부 국어운동가들의 좁다란 동아리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꼭 길이 이미 있어야 사람이 그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길이 생긴다. 한국어의 전통어법에 들어맞든 어긋나든, 이제 ‘님’은 계급적 뉘앙스 없이 사람이름 뒤에 붙을 수 있는 대표적 호칭어가 됐다.

직장 동료들끼리 직책과 무관하게 상대를 ‘아무개님’으로 부르기로 결정한 회사도 생겼다고 한다. ‘님’의 이 대중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인터넷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들은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아무개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탈계급적 호칭어를 널리 퍼뜨렸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런저런 ‘님’들은 죄다 접미사다. 현대한국어사전은 우리가 아래서 살필 대명사 ‘님’이나 명사 ‘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님’은 독립적으로 쓰일 수 없고 반드시 명사 뒤에서 더부살이를 해야 한다. ‘장관님’이나 ‘천정배님’처럼 말이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접미사 ‘님’의 생태계를 고유명사 뒤로 넓히는 데 그치지 않고, ‘님’의 품사 영역 자체를 대명사로까지 확대했다. ‘님’은 인터넷 공간에서 흔히 ‘당신’의 의미를 지닌 2인칭 대명사로, 그러나 ‘당신’이 지닌 하대의 뉘앙스 없이 사용된다. “님의 주장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어요”라거나 “님은 한나라당 지지자시군요” 할 때의 ‘님’ 말이다. 국어사전은 아직 이런 언어현실에 무심하다.

국어사전이 외면해온 것이 이런 ‘현대적’ 님만은 아니다. 지금처럼 ‘님’을 접미사로만 규정해 놓으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노래에 등장해 온 ‘님’은 본적 불명의 말이 되고 만다. 이를테면 ‘님과 함께’ ‘님은 먼 곳에’ ‘내 님의 사랑’ ‘님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들의 그 ‘님’ 말이다. 만해 한용운의 저 유명한 시 ‘님의 침묵’의 ‘님’도 마찬가지다. 이 때의 ‘님’은 ‘사모하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명사다. 현대한국어사전은 이 경우에 ‘임’을 쓰라고 윽박지른다.

실질 형태소의 첫 음절이 /ㄴ/으로 시작하고 그 뒤에 바로 /ㅣ/ 계열의 홀소리가 올 경우에 그 /ㄴ/ 소리가 탈락한다는 이른바 두음법칙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언어 현실과 큰 차이가 있다. ‘임’은 사전이나 교과서 안에 보관돼 있는 일종의 ‘인공어’일 뿐, 한국인의 입에서 발설되는 것은 ‘님’이다. ‘님’은 중세 이래로, 어쩌면 고대 이래로 그저 ‘님’이었을 뿐 ‘임’은 아니었다. ‘가시리’의 화자는 “셜온 님 보내압노니 가시난닷 도셔오쇼셔”(설운 님 보내옵나니 가시자마자 돌아서 오소서)라고 애절히 노래했다.

중세어 ‘님’은 표준현대어 ‘임’의 뜻 외에 임금이나 임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은 그것들이 일차적 뜻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셋은 깊은 곳에서 뜻이 서로 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임금은 사모의 대상이었고, 주인이었다. 정철의 미인곡 연작으로 대표되는 어용 가사문학에서 ‘사모하는 사람’으로서의 ‘님’은 임금으로서의 ‘님’이었다. 정철의 ‘님’은 권력을 나눠주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님 노래를 듣는 것은 자주 따분하고 더러는 역겹다.

거기선 ‘가시리’의 ‘님’이 품고 있는 애틋한 울림이 없다. 그 애틋한 울림을 잇고 있는 것은 현대의 대중가요들이다. 대중가요의 영원한 주제가 사랑이니 만큼, 거기서 님이 그리도 자주 불려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님이나 화자는 흔히 비를 맞고 있다.

비는 대지의 모든 곳을 적신다. ‘비 내리는 경부선’과 ‘비 내리는 명동 거리’가 있는가 하면, ‘비 내리는 호남선’도 있고, ‘비 내리는 영동교’도 있다. 비는 고모령에도 판문점에도 내린다. ‘어제 내린 비’, ‘빗물’, ‘빗속을 거닐며’, ‘봄비’, ‘빗속을 둘이서’, ‘비처럼 음악처럼’ 같은 노래들은 님(사랑)과 비를 포개는 기다란 대중가요 목록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많은 노래가 비를 사랑의 수채화 물감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내리는 비가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해 사람들을 감상에 휘둘리게 만든다는 속설이 그럴 듯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1970년대에 가수 이장희씨가 만든 ‘비의 나그네’도 비와 사랑을 포개고 있다. 노래 ‘비의 나그네’에서 화자가 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밤비가 내리는 동안뿐이다. 밤비가 내리는 소리는 님이 내게로 오는 ‘발자욱 소리’(‘발소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와 포개지고, 밤비가 그치는 소리는 님이 내게서 떠나는 발자욱 소리와 포개진다. 그래서 화자는 밤비가 끝없이 내리기를 바란다. 그래야 님이 그의 곁에 계속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비 못지않게 밤일지 모른다. 날이 샌 뒤 내리는 비는 이미 밤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자가 정말 바라는 것은 ‘끝없이 내리는’ 비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결코 새지 않는’ 밤일지 모른다. 그 점에서 ‘비의 나그네’는 고려 속요 ‘만전춘 별사’에 닿아 있다.

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망뎡

정(情)둔 오??밤 더듸 새오시라 더듸 새오시라

얼음 위의 댓잎 자리에서 얼어죽을 망정, 그 밤이 님과 정을 나누고 있는 밤인 이상 되도록 더디게 샜으면 좋겠다고 이 노래의 가인(歌人)은 말한다. 최고의 사랑은, 극도의 정열은 늘 이렇게 치명적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비의 나그네 / 이장희

님이 오시나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 발자욱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

님이 가시나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님 발자욱 소리
밤비 그치는 소리

밤비 따라 왔다가
밤비 따라 돌아가는
내 님은 비의 나그네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끝없이 내려라

님이 가시나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님 발자욱 소리
밤비 그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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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our 2006-08-07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 노래인가 궁금해서, 벅스에서 찾아서 듣고 있습니다. ^^; 정말 비나 좀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군요. 더워서 정신이 몽롱...ㅠ ㅠ
(씨, 님..드림, 올림, 혜존..한국어..때로 사람을 난감하게 하죠.)

balmas 2006-08-07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는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라서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요. ^^
올해 덥다덥다하지만, 저는 작년 여름이 훨씬 더 더웠던 것 같아요.
논문 쓰느라 시달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 ^^;

rtour 2006-08-0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장희는 '..모두 드리리?' 밖에 몰라서..이 노래 들으면서도 낯설었는데.. 세대 차이? 설마ㅋㅋ 잘 들었슴다. 다른 얘기...샘 논문, 아직 치밀하게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샘 이후 스피노자로 논문 쓸 사람들로 하여금 상당한 부담감을 갖게 할 듯 한데, 책임지삼(무슨 책임^^;;).

balmas 2006-08-0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니, 왜 이 명곡을 모르셨어요? ^^;
논문은 뭐, 천천히 읽어보시고, 궁금한 점이나 지적할 만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셈~

2006-08-07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Runa 2006-08-1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미사 님에서 시작해 이장희의 연가의 애절함으로 끝나는 고종석의 글쓰기,
새삼스럽군요. 전 중학교 소풍 때 체육선생님이 부른 노래로 알았다는,
나이 들어 대학원서 만난 어른(?)들로 인해 재발견하고,
노래방서 괜히 분위기 탈 때 한번씩 부르는 古가요 넘버지요.
어맛, 발마스님도 꽤 지긋하신 축에..ㅋㅋ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민망^^)
그건 글쿠.. 와우, 프랑스 가게 되셨더군요! 축하드려요, 부럽기만 합니당.
좋은 시간, 영양가 만땅인 시간, 덤으로 살빠지는 시간 되시길..^^;;

balmas 2006-08-1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속삭여주신 님, 어쩐답니까?
새로 제본한 것들도 이미 다 나가버렸으니 ...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두 권이 남아 있었는데, 유학 갔다
잠시 다니러 온 후배들에게 주는 바람에 또 다시 다 떨어지고 말았네요 ... -_-;;;
혹시 괜찮으시다면 파일로 보내드려도 될까요?
그래도 된다면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
죄송합니다. 전부터 부탁하셨는데 ...
caute님/ 사실 이장희 노래는 어릴 때 들어보고, 그 이후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어릴 때 인상이 강렬했던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네요. ^^;
ㅎㅎㅎ 프랑스 가게 된 건 어찌 아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던 듯 ...
다른 건 몰라도 살은 좀 빼야 할 텐데 말예요 ... ㅋ

2006-08-14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8-1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파일 보내드렸습니다. 메일 확인해보세요. :-)
 

 

당신의 똥은 안녕하십니까

바나나처럼 건강하고 싱싱한가, 우동가락처럼 흐물흐물한가… 볼일 끝난 뒤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건강검진 효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똥은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원시시대 사람의 똥은 아마도 바나나 모양에 가까웠을 것이다. 거듭된 사냥 실패로 채소류 섭취가 많기 때문에 똥은 적당히 뭉쳐졌을 것이다.


△ 언젠가부터 똥은 더럽고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대장 건강을 위해서는 먼저 똥과 친해져야 한다. 똥과 친해지는 것은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살았던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단단할 때는 지점토 같고, 부드러울 때는 튜브에 든 물감 같았을 것이다. 물에 떨어지면 가볍게 떠오를 정도. 물론 지역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지역의 사람들의 똥은 다이어트를 일삼는 현대인이 배설하는 토끼 똥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퇴보한 똥을 진보시켜라

그런데 변화는 100~200년 전에 찾아왔다. 인류는 근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고기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먹기 시작했다.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난 이래 50만 년 동안 현생 인류의 최대 섭취량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섬유질이 많은 신선식품 대신 가공식품을 찾았다. 이런 식생활의 변화는 똥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똥의 진화는 역방향이었다. 진보가 아니라 퇴보였다. 똥의 퇴보를 보여주는 징후는 도처에 나타난다. 올해 미국소화기학회 학술대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인구의 12%가 변비로 고통받고 있다. 한국인은 이보다 많은 17%가 변비 증세를 겪고 있다. 한국인은 1983년 고령인구 10만 명당 13.5명이 대장암으로 숨졌는데, 20년 뒤인 2003년에는 무려 90.3명이 숨졌다. 그리고 의료계는 한국인의 30%가 일생 동안 한 번 이상의 과민성대장증후군에 걸린다고 추정한다. 죄다 똥을 제대로 못 만드는 사람들로, 이들의 똥은 굵은 우동가락 같거나 풀어놓은 물감 같거나 못생긴 조약돌 같다.

그러다 보니 건강한 똥을 만드는 다양한 방법이 구사되고 있다. 발효유업체들은 대변 전쟁을 벌인다.


△ 똥의 모양은 대장의 수분 흡수 능력, 섬유질 섭취량, 스트레스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건강한 똥은 바나나 모양이다. 바나나형의 똥이 끊김 없이 한번에 길게 나오는 황금색 똥은 프리미엄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식생활이 점점 서구화되면서 이런 건강한 똥이 점

‘바나나변’이라고 쓴 광고 카피(매일유업 프로바이오 GG)로 ‘못 싸는 자’들을 유혹하는가 하면 ‘쾌변’(파스퇴르유업)이라는 똥이란 단어가 들어간 요구르트를 출시했다. 비데업체들은 “중앙집중식 회전기포 물줄기로 직장까지 물을 침투시킨다”는 ‘관장 비데’도 개발해냈다.

현대인들은 ‘똥 만드는 공장’인 대장을 구경하러 몰려들고 있다. 건강검진 전문병원인 하나로의료재단의 장완신 팀장은 “지난해부터 대장 내시경 검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며 “요즈음은 검사를 신청하면, 서너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대장 내시경은 항문으로 내시경을 넣어 대장에 있는 용종을 제거하고 암 발생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다.

이런 대장 열풍은 혹시 현대인의 건강염려증은 아닐까. 나이 마흔이 넘어가면 정기적인 대장 검사가 필요하지만, 불필요한 의료비를 지불하기에 앞서 습관 들여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똥과 친해지는 것. 퇴보한 똥을 진보시키기 위해서 똥에 대한 관찰력을 키우는 것이다. 대장·항문 전문 한솔병원의 이동근 원장은 “화장실에서 볼일이 끝나기 무섭게 물을 내려버리지 말고 자기 변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1차적인 건강검진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냄새가 적다

먼저 똥의 형태를 살펴본다. 가장 건강한 똥은 바나나처럼 싱싱하지만, 허약한 똥은 우동 가락처럼 흐물흐물하다. 보통 바나나 똥은 한 덩이씩 뒤끝을 남기지 않고 풍덩 떨어진다. 냄새가 가만히 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다. 똥이 바나나처럼 잘 뭉쳐지는 이유는 대장에 섬유질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섬유질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부풀어올라서 똥을 부드럽고 크게 만든다. 감자, 콩, 버섯, 해조류를 먹으면 섬유질을 많이 섭취할 수 있다.

빼빼 마른 똥은 이와 반대다. 식사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다이어트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먹는 양이 많지 않으니 대장에서 똥이 뭉쳐질 리 없다. 설사 일보 직전의 물렁물렁한 똥이나 물똥은 장에서 수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기형태다. 스트레스와 폭식, 폭음이 주원인. 냄새는 말할 수 없이 구리다.


별 이유 없이 설사와 변비가 교대로 나타나거나 동시에 나타난다면 과민성 장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한참 힘을 줘 토끼 똥을 뱉어내고 있는데, 갑자기 진흙으로 폭격하듯 머그컵 1~2잔의 물똥이 나온다면 혐의가 더욱 짙다. 스트레스와 고기와 술·커피로 점철된 식습관이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과민성 장증후군은 대표적인 현대병이다.

똥 색깔은 대장병을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똥이 붉다면, 건강에도 적신호다. 대장 위쪽에서 출혈이 있으면, 똥은 검붉은 색을 띨 수 있다. 직장이나 대장 하부, 항문에 출혈이 생기면 똥에 선홍색 피가 섞여 나올 수 있다. 변기 안이 붉게 물들 정도라면 치질이다. 아스팔트 재료인 타르처럼 검고 끈끈한 똥은 식도·위·십이지장의 출혈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들 부위에서 60cc 이상의 출혈이 발생하면, 이 혈액이 위를 통과하면서 위산과 반응해 검게 변하고 아울러 똥까지 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똥 색깔은 영양분이 지나치면 진해지고, 모자라면 옅어진다. 대장에서 오래 머물면 진해지고, 대장을 빨리 빠져나오면 옅어진다. 변비의 색깔이 탁하고, 설사의 색깔이 묽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똥의 형태를 관찰한 뒤에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본다. 건강한 사람의 똥일수록 냄새가 적다. 냄새는 장 안에 서식하는 세균의 바로미터다. 냄새가 심한 사람은 그만큼 세균이 많다는 것. 냄새를 줄이기 위해선 요구르트에 들어 있는 유산균이나 올리고당 등 좋은 균을 공급하거나 유지함으로써 나쁜 균의 발육을 억제해야 한다.

깨져버린 동물과 식물의 ‘똥 사이클’

똥과 친해지는 것은 다른 말로 지구와 친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생태 뒷간을 연구하는 이동범 귀농운동본부 도시농업위원은 “똥은 사람 몸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잉여물을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식물은 빛과 양분을 흡수해서 에너지를 만들고 필요 없는 것은 배출한다. 다른 말로 ‘산소를 배설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과 동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식물의 배설물’인 산소와 함께 다른 영양분을 섭취한 뒤 똥을 배출한다. 그리고 그 똥은 거름이 되어 식물에 섭취된다. 동물과 식물을 잇는 ‘똥 사이클’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 똥과 지구는 한 몸이었다.


△ 우리 몸은 ‘똥 공장’이라 할 수 있다. 입 안의 이는 음식물을 잘게 부수고, 위액은 이를 녹인다. 십이지장은 지방을 녹이고, 담즙은 똥을 노랗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소장은 영양분을 흡수해 각 기관에 보내고 남은 것은 대장에 보낸다.

그런데 이 사이클이 깨지기 시작했다. 도시화가 촉진돼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고, 똥은 하수구로 흘러가 쓸모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과도한 물을 쓰게 되고 막대한 정수 비용을 들여야 했다. 양변기에서 물 한 번 내리는 데 자그마치 13ℓ가 쓰인다. 미국의 문명비평가인 웬델 베리는 현대의 배변 시스템을 이렇게 꼬집는다.

“마실 물에 오줌과 똥을 섞어 넣는 비싼 기술을 개발하고 그 물을 다시 마실 수 있는 물로 정화하는 더 비싼 기술을 발명한다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일상적인 대장병도 이즈음에 왔다. 공장식 축산업이 도입되면서 육류 섭취가 많아졌고 이는 곧 대장병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의 똥에 대한 태도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농가경제의 소중한 자산으로 사랑받던 똥은 더러운 것이 됐다. 똥은 변기 뚜껑을 덮고 서둘러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 됐다. 이동범씨는 현대인들은 예전과 달리 똥을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전의 뒷간은 똥을 거름으로 재생하는 곳이었죠. 똥을 누고는 자기 똥에 왕겨나 톱밥을 부어 넣었어요. 똥과 대면하는 시간이 있었던 거죠.”

변기 뚜껑 덮기 전의 명상

사실 똥에 대한 저어함을 없애는 것도, 고기 섭취를 줄이는 것도, 양변기에 벽돌 한 장이라도 넣는 것도 모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회귀하려는 행위다. 1천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똥 사이클을 회복시킬 수는 없겠지만,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 대장은 본격적으로 똥을 만드는 곳이다. 대장 안의 세균은 똥을 분해하고, 분해된 똥은 건조된 뒤 뭉쳐진다. 직장에서 똥의 외형이 완성된 뒤 항문으로 배출된다.

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일본에서 ‘똥 박사’라고 불리는 후지타 고이치로는 “건강한 생활을 하려면 자기 똥과 매일 제대로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매일 아침 변기 뚜껑을 덮기 전 똥을 보면서 자신과 지구의 건강을 상상해보자.

도움말·참고: 서울 한솔병원, <쾌변천국>(후지타 고이치로·요리후지 분페이 지음, 시공사 펴냄)


산업화될수록 배변량은 줄어

변비와 설사 피하려면 잡곡밥·미역 등 섬유질 많은 음식 찾아먹어야

하루 동안 성인이 누는 배변량은 얼마나 될까. 식사량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200g 내외는 돼야 건강하다고 여겨진다.

한국의 성인들은 보통 하루 100~200g의 똥을 배출한다. 서유럽의 경우 100g, 파푸아뉴기니 민족은 하루 1kg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배변량이 문화와 식습관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문화권은 배변량이 많고,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문화권에서는 배변량이 적다.

선진국일수록 배변량은 줄어드는 경향도 보인다. 농경사회를 탈피해 산업화된 나라일수록 정제된 가공식품의 섭취는 늘고 섬유질 섭취는 감소하는 식습관이 퍼지기 때문이다. 섬유질 섭취가 줄어듦에 따라 배변량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이 있다. 섬유질이 적은 정제된 음식을 먹은 그룹은 하루 100g 내외, 채식을 주로 하는 그룹은 225g 정도의 똥을 눴다는 영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럼 현대인의 일상병인 변비와 설사는 어떨까. 변비는 배변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고, 설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의학적으로 변비는 하루 35g 이하 또는 일주일에 2번 이하로 똥을 누는 경우를 말한다. 하루 300g 이상 또는 4번 이상의 똥을 누면 설사로 간주된다. 설사의 양이 많은 것은 그 성분의 대부분을 이루는 물 때문이다.

변비와 설사를 막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섬유질을 찾아 먹어야 한다. 하루 성인 권장 섬유질 섭취량은 25~30g인데, 현재 한국인의 섭취량은 17∼20g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 10~15g의 섬유질을 섭취하면 배변량이 100~150g 정도 늘어난다고 한다. 섬유질이 많이 든 잡곡밥과 시금치, 미역을 먹고 화장실에서 관찰해보자. 똥이 변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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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모르고 있던 것일까?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국어사전을 검색하는데,

오, 다음과 같이 예문들이 나온다.

 

 

뒤적거리다 [--꺼--]
[동사]『…
1 물건들을 이리저리 들추며 자꾸 뒤지다. ≒뒤적대다. 2 물건이나 자꾸 이리저리 뒤집다. ≒뒤적대다.
뒤적대다 [--때-]
[동사]『…
1 =뒤적거리다.
2 =뒤적거리다.
뒤적이다
[동사]『…
1 물건들을 이리저리 들추며 뒤지다. 2 물건이나 이리저리 뒤집다. 【<뒤져기다백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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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런 예문들을 못봤던 것 같은데, 새로 추가한 것들인가?

어쨌든 보기가 좋다. 앞으로 예문들이 더 풍성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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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8-06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익숙한 이름들 ;)

balmas 2006-08-06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우시겠어요. ^^;

기인 2006-08-07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로 사전 인용을 하면 별로 사전 같지 않겠지요? ㅋㅋ
그래도 시로 예문하는 사전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문학 좋아하는 사람한테는요.
이 단어를 저렇게도 썼구나 하는 재미. :)
흐음...

천재뮤지션 2006-08-0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쌤- 맞다. 혹시 <상상 플러스>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거기서 세대공감 Old & New라는 프로그램이 있죠. 어른(?)들과 10대 청소년들 사이의 언어용례gap을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프로그램인데, 그 방송 마지막에 이런 자막이 뜨더라구요.

ㅡ 오늘 퀴즈로 제시된 단어가 쓰인 문학작품을 아시는 분들은
그 부분을 적어서 보내주십시오. 푸짐한 상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새 사전 편집에 문학 작품 인용하기가 대세인 모양입니다. 후후후.

MANN 2006-08-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ㅡ 전에 어느 인터넷 독어사전의 예문이 문학에서 인용한 것들로 되어 있어서 신기해 했던 적이 있는데... 국어사전도 그런 작업을 하고 있었군요 ㅇ.ㅇ

balmas 2006-08-10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시도 예문으로 쓸 수 있으면 좋죠. :-)
천재뮤지션/ ㅎㅎㅎ 그런가? 그거 좋은 발상이네 ...
MANN/ 국어사전에서 제일 아쉬운 것 중 하나가 예문의 부족이었는데,
앞으로는 예문이 풍부한 국어사전이 나오려나 ...
 

 

[고종석 칼럼] '안티조선'의 추억


옛날옛적에 '안티조선 운동'이라는 게 있었다.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이 김대중 정부의 정책 입안에 간여하던 정치학자 최장집씨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소동을 벌이자, 이 신문의 행태를 보다못한 시민사회 일각에서 벌인 일종의 소비자운동이다. 정치인 노무현도 이 운동에 한 발을 걸쳤다.

사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일보와 단호하게 각을 세운 것도 한 몫 했다. 냉전수구세력의 선전국과 표나게 맞섬으로써, 그는 자신을 개혁의 아우라로 치장할 수 있었다.

노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일보는 정권 핵심부의 '좋은 파트너'였다. 정권 주변에서 추문이 터져도, 제 구실 못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쳐도 모든 게 다 조선일보 탓이었다. 그것이 처음엔 어느 정도 먹히기도 했다. 한국 저널리즘 언어의 비속화를 선도한 신문답게, 조선일보의 정부 비판은 가히 저잣거리의 싸움질을 연상시켰으니까.

● 청와대의 조선ㆍ동아 취재거부

그러나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인지, 노 정권 핵심부의 말대꾸도 그리 점잖지는 않았다. 게다가 조선일보 기자들이 슈퍼컴퓨터가 아닌 다음에야, 늘 틀린 말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예컨대 노 대통령의 말에 절제가 없고 사람 쓰는 방식이 비상식적이라는 건 조선일보가 지적하든 한겨레가 지적하든 옳은 말이다.

이 정권의 흐트러진 몸가짐은 자주 조선일보 기사의 사실성을 높이며 안티조선 운동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흐트러진 몸가짐이 조선일보에 대한 일종의 '계산된 보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편, 정권의 조선일보 탓하기도 지침 없이 이어지고 있다. 늘 몇 걸음 뒤처져서 조선일보 따라하기에 바쁜 동아일보도 언젠가부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지난 주에 청와대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취재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빌미가 된 기사들이 한 인터넷 신문에 전재돼 있었는데, 읽어보고 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의 조처가 정당하다거나 부당하다는 판단을 하려는 게 아니다. 동아일보 칼럼 둘은 과연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문제삼은 조선일보 기사('계륵 대통령')는, 막말에 관한 이 신문의 오랜 명성을 생각하면, 차라리 온건했다.

지난 대선 때의 노 대통령 발언을, 경쟁자의 비열한 색깔론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맥락을 거세하고 난데없이 인용한 대목에서 말의 비수가 느껴지긴 했으나, 그것은 이 신문이 어제오늘 해온 짓이 아니다. 갑자기 이 기사에 청와대가 화를 낸 것이 뜻밖이었고, 그래서 조선일보가 '부당하게 끼워 팔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노 정권과 조선일보의 티격태격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이라크 파병에서부터 한미 FTA 밀어붙이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국가운영 철학'을 큰 테두리에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상호 증오는 유전자에 기인한 '인종적 배타성'이거나, 시쳇말로 '적대적 상호의존'에 가까운 것 같다. 노 정권은 조선일보를 계속 탓함으로써 다 떨어진 '개혁성'을 과시하고, 조선일보는 정부를 물어뜯음으로써 알량한 '비판지'의 명성을 누린다.

● 정권·수구언론 기이한 의존관계

이렇게 이념이나 철학으로 보아 안티조선 운동을 안 해도 될 청와대 사람들은 이 운동에 열심이고, 정작 안티조선 운동을 해야 할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꿀 먹은 벙어리다. 지난 주, 출판사 창비 사이트의 '창비주간논평'이라는 방에는 백낙청씨의 '시민참여형 통일과 민간통일운동'이라는 글이 실렸다.

'시민참여형 통일'이나 '민간통일운동'에 대한 이 글의 진단과 전망이 얼마만큼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가에 대해선 판단하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은, 백낙청씨가 생각하는 통일운동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 조선일보라는 점이다.

안티조선이 꼭 '운동'이 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 '태도'나 '몸가짐'으로 족하다. 백낙청씨와 창비가, 아름다운 말씀들을 늘어놓는 틈틈이, 안티조선의 '태도'나 '몸가짐'이라도 갖추었으면 좋겠다. 분열증은 미덕이 아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6/08/0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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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8-06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 씨 애독자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가 낸 책이나 쓴 글들은 적지 않게
뒤적여보는 편이다. 그의 글은 문장이 좋을 뿐만 아니라(특히 어법이 정확하고
쓸데 없는 미사여구가 드물다), 대개 전달하려는 논점이 분명하고 시선도 예리하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서 쉽게 보기 어려운 장점들이다. (물론 그가 쓴 모든 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 글도 그런 글 중 하나다.

기인 2006-08-06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보아'에 걸려 있는 링크!! ㅋ

balmas 2006-08-06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balmas 2006-08-06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을 보니까 푸하님이 댓글을 남기셨던데, 어느새 지우셨네요. ^^;
제 댓글에서 ()안의 이야기는 이 글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ㅎㅎ
저는 이 글이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