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와노동
2006.06.30 |316호

저출산ㆍ고령화 위기담론은 민중의 의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야기한 사회위기의 본질


…신자유주의 시대 성장잠재력의 확충이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포함한 투기의 활성화와 노동유연화라고 했을 때,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한 과제가 민중의 요구와 부합될 수 있는 것인가. 우선, 출산율 저하가 왜 문제가 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분명히 하자. 우선, 출산에 대한 회피는 여성에게 이중적 억압을 제공해온 가족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며, 일차적으로 여성을 우선해고대상, 비정규직으로 삼아 공격해온 노동유연화의 파괴적 결과이다. 여성이 출산을 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유는 자녀양육의 경제적 부담과 소득ㆍ고용의 불안정 문제로 드러난다. 출산을 기피하고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고통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남성가구주 빈곤가구 비율의 두 배에 달하는 여성빈곤가구주율과 배우자가 있을 때 100%, 없을 때 136%에 달하는 여성 빈곤율을 보아도 그렇다.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가족과 남성 생계부양자에 의존하게 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바닥을 향한 경주’에 몰아넣는 촉진 매개로 기능하게 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은 ? ㅓⅠ냘?과정에서 여성인력활용방안과 가족강화정책을 임금 억제와 사회 위기 책임의 회피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배세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민족 단위의 인구집단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국민적 의무로 포장하면서 출산을 기피하고 가족을 거부하는 현상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운운하며 출산을 장려하는 정부의 정책은 이미 소득수준이 하락하고 있는 가정을 지탱하고 지극히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여성들을 남김없이 쥐어짜겠다는 것이다. 또한 ‘저출산ㆍ고령화’ 위기 담론은 고령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고 있다. 역대 정권의 억압적 출산억제정책과 의료 기술의 발전, 평균 수명 연장 등이 원인이 된 고령화 문제는 이를 해결할 사회정책의 부재와 공백을 드러내는 요소일 따름이다. 고령화의 진정한 문제는 노인이 가난하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의 노동을 통해 스스로 혹은 공동체가 노후를 보장할 수 없는 구조적 요인이 고령화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 정부와 각 기업의 접근법은 노인대상서비스의 확대, 이른바 실버산업의 활성화나, 역모기지론의 도입 등 각종 빈곤층과 무관한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노인층을 부양할 노동자민중의 빈곤과 노동의 불안정성이 이에 호응하기 어려울뿐더러 가족 위기 상황과 노인인구 전반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문제를 정부는 미래사회의 일인당 노인부양인구가 늘고 있다는 인식에서 노인 일자리 확대정책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실현을 위한 노동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 각 계층, 계급을 분절화 하여 상대적 취약계층을 일차적인 목표물로 지정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이 노인인구를 빗겨갈 것이라 사고한다면 오산이다.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노인 일자리 창출과 출산 장려 정책이라는 쌍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심화되는 빈곤을 개별가족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다. 또, 고령화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를 출산률 제고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은 미래사회에 대한 ‘투자’라는 과제에 구성원들의 재생산에 대한 선택의 권리, 노동의 권리를 종속시키겠다는 엄포에 불과한 것이다.…[자세히]


사회진보연대 7월 집중 행동 제안


[자세히보기]


7월 1일(토) - 7월 8일(토) 여름 빈민현장활동 (* 사회진보연대는 6-7일 일정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참가 문의는 011-763-1669)

7월 1일(토) 한미 FTA 저지 활동가 토론회 (15:00, 대학로 서울대 보건대학원)

7월 5일(수) - 6일(목) 한미 FTA 저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

7월 5일(수) - 9일(일) 평택평화순례(* 사회진보연대는 5일, 8일 일정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참가 문의는 016-363-5825)

7월 11일(화) 한미 FTA 저지 총궐기투쟁 전야제 (19:00, 장소 미정)

7월 12일(수) 한미 FTA 저지 2차 범국민대회 (14:00) (* 사회진보연대는 12일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참가문의는 016-655-9674)

7월 13일(목) 한미 FTA 5적 규탄 대회

7월 14일(금) 한미 FTA 2차 본협상 결과 규탄 집회

7월 22일(일)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4차 범국민대회 (가안)





한미 FTA 관련 자료 총정리

지금까지 한미 FTA와 관련하여 각계 각층에서 제출된 자료를 총정리해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연결가능한 자료는 링크를 걸어놓았으니 바로 내려받으시면 됩니다. 앞으로 계속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널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pssp@jinbo.net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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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님의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singular라는 말은 자연/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죠. 그것은 자연 사물들,

유한한 실재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스피노자가 신에 대해 적용하는 단어로는 "unicus", 곧 "유일한"이라는 게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신의 유일성, 유일한 신 등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하다"는 말은 아주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대략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모델의 여러 가지 사례, 또는 표본에 대해

이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 우표는 지구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우표다"

라고 말할 때, 이런 의미로 쓸 수 있겠죠. 이 경우에 이 우표의 유일성은 우표의 본성에서

따라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우연적인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우표는 본성상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원인들의 결과(다른 우표들은 모두 화재로 불타

버렸다든가 하는)로 유일한 것이죠. 

반면에 신 또는 자연의 유일성은 신의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결과,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용어법대로 하면 "특성"(proprietas)으로서의 유일성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유일성"이라는 것은 그밖의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또다른 신, 또다른 자연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유일성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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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6-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내가 미친 건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 같아요^^ 착각인가

balmas 2006-06-30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니 미치긴 왜 미치십니까?
잘 이해하셨을 것 같은데 ... ^^;;
 

 

 

[특별 좌담] ‘월드컵 유령’을 잡고 흔들다

월드컵을 어찌할 것인가, 활동가 5인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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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석진 
결국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뜨거웠던 월드컵에 대한 전국민적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16강 진출이 좌절되자마자 급격히 식어버렸다. ‘축구와 월드컵을 사랑한다’던 그 많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일까. 이제야말로 수준급의 전세계적인 축구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는 판인데 사람들이 떠난 광장은 휑하기만 하다. 광화문을 어지럽게 장식하고 있던 온갖 월드컵 상징 조형물들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어색하게 자리잡고 있고 대형 빌딩들을 가리고 있던 붉은 색 대형 현수막들은 서울 한복판의 ‘붉은 깃발(적기)’만큼이나 ‘쌩뚱맞다’.

그렇지만 이대로 순순히 2006년 월드컵을 놓아줄 수 없다는 활동가 몇 명이 모였다. 월드컵은 2010년에도 또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쏟아지는 월드컵에 대한 문제점들에 동의하긴 했지만, 어떤 이는 월드컵에 대한 화려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했고 또 어떤 이는 축구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한편 어떤 이는 ‘자신은 축구에 일말의 관심도 없노라’고 ‘용기내어 고백’했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지만 조금씩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그들. 그들이 모여 월드컵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 월드컵, 기억, 현재

(용석) 어렸을 때부터 월드컵 진짜 좋아했어요. 98년 월드컵 때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만날 거리에서 뛰어놀았어요. 그러다가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완전히 무관심했고, 올해엔 문화연대와 함께 월드컵에 문제제기하는 캠페인을 했어요.
완 - 축구를 사랑하고, 월드컵 기간 중 집나간 이성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던 문화연대 활동가
(완) 나도 월드컵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90년 월드컵도 거의 다 봤어요.
(용석) 그 때가 언제였지?
(완) 초등학생. 86년 월드컵도 기억나요. 원래는 유로2000을 좋아했는데 당시엔 할 일이 없어서 모든 경기를 다 보며 전력분석표까지 그리고…. 하하하. 2002년 월드컵 때엔 군대에 갈까 말까 하던 중이었는데 티셔츠 장사를 했어요. (“돈 좀 벌었다면서요?”) 허허. 그땐 지금처럼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사회 분위기가 달라서였을 수도 있고…. 근데 올해엔 적극적으로 월드컵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벌였어요. ‘월드컵 기간 집나간 이성을 찾습니다’와 같은 캠페인 스티커도 붙이고 각 방송국의 월드컵 ‘도배’ 방송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조직하기도 했죠.
(꽃맘) 2002년까지는 월드컵이라는 게 내 사고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붉은악마가 ‘난리를 치면서’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죠. 여성들이 월드컵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었다고 봐요.
(재훈) ‘이중적 자아’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축구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태국 킹스컵, 박정희가 만든 한국의 박스컵 등 간혹 새벽에 축구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부터 잠을 안자고 볼 정도로 축구를 아주 좋아했어요.
(경내) 2002년 월드컵 때에는 당시 국제민주연대에 있으면서 축구공 꿰매는 아동노동 관련캠페인도 하지 않았어요?
(재훈) 그러면서 밤에는 월드컵 보고…. 하하하.
(꽃맘) 이제까지 살면서 축구를 딱 한 번 해봤어요. 여자와 남자가 짝지어서 손잡고 하는 짝축구.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 손에 이끌려서…. 진짜 재미없었어요.
(경내) 난 이제까지 살면서 축구를 딱 두 번 해봤어요. 농활 가서 마을 청년들과 축구를 했었는데 재밌었어요. 내 기억 속에 축구는 항상 북한과의 경기, 일본과의 경기처럼 국위 선양, 국력을 과시하는 장으로서의 경기들로만 뜨문뜨문 채워져 있어요.
(재훈) 3년 동안 조기축구를 했었는데, 축구라는 운동 자체에 마력이 있는 것 같아요. 축구는 11명이 다 같이 하는데 발이 맞는다 싶은 순간이 있어요. 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패스를 잘 해서 골로 연결되고 그러면 희열 같은 게 느껴지죠. 그 때 같이 축구를 했던 동네 형님들은 붉은악마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이었어요. 그거 다 미디어에서 조장하는 거 아니냐, 우리는 아무도 안 알아줄 때 축구장 지켰다….
(완) 한국사회에서 남자로 자라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 중 하나가 축구일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성들은 그러지 못한 게 현실이죠. 2002년 월드컵 때 많은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게 됐는데 여성들은 축구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퇴행적으로 김남일의 터프한 모습 같은 것들에 더 열광한 거죠.


# ‘무서운 월드컵’, 실체를 파고들다

(완) 월드컵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세계화의 대표적 표상과도 같은 월드컵이라는 창을 통해서 자본의 세계화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죠.
(용석) 세계화 자체가 다 그렇긴 하지만 월드컵은 더 그런 것 같아요. 모든 나라의 우수한 선수들은 다 유럽에 가서 뛰어야 하고 잘 하는 나라도 다 유럽이고 다른 운동에 비해 유독 백인이 더 활약하는 것도 사실이고…. 월드컵은 특히 유럽-백인 중심적인 것이 있죠.
(완) 월드컵이 98년 이후에 급팽창하게 된 이유는 그때부터 미국자본이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이거 굉장히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경내) 원래 월드컵이 유럽, 남미 중심인데 그야말로 ‘월드’컵이 되기 위해서 지역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아시아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도 하고 다음 월드컵도 아프리카에서 하잖아요. 축구와 함께 자본이 전세계적 시장을 개척하면서 ‘월드’컵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월드컵은 세계화의 한 표상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 속에서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철저히 공명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국가 대항전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흡입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다른 상품과 월드컵을 조금 더 다르게 보게 만드는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재훈) 축구를 좋아하고 월드컵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월드컵 문제가 과연 축구 때문이냐는 반론이 있는 것 같아요. 성차별.백인중심주의.기독교 중심관.서구 중심 등 세상이 다 그런데, 축구가 그런 것들을 조장하고 더 촉진시키는 게 아니라 세계가 원래 그렇기 때문에 축구에 반영되는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용석 - 축구도 야구도 좋아하지만 강요만 하는 국가는 싫어하는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용석) 자본주의에 살면서 그렇지 않은 게 어디 있겠냐마는 월드컵이 가장 심한 것 같기는 해요. 효과적으로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퍼뜨리죠. 축구 잘하는 나라들, 진짜 나쁜 나라들 아니에요? 하지만 보는 순간에는 나쁘다는 게 잊혀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정부를 그렇게 싫어하다가도 축구경기를 볼 때엔 또 한국에 열광하게 되죠. 견제해야 할 국가가 친숙하고 착한 모습으로 다가와요. 굉장히 효과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들을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시키고 있죠. 그래서 월드컵이 무서워요.
(꽃맘) 국가라는 건 그 자체가 남성이고 축구도 남성, 표상하는 것도 남성이에요. 남성으로 표상되는 축구에 여성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월드컵의 태생이나 이런 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월드컵이 국가주의, 애국주의 등 남성적인 모습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에 반대하는 거예요. 어느 스포츠는 안 그렇겠냐마는 축구가 더 심하죠. 지금도 ‘어떻게 이 대화에 끼어들까’하는 고민이 들어요. 축구나 월드컵 그 자체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별로 할 말이 없는 거죠.
(경내) 월드컵은 국가주의를 연습시키는 장이기도 하고 그 힘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월드컵이 단지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가 아니라 실제로는 4년 내내 준비하는 거대한 시스템 아닐까요. 우리는 ‘월드컵’이라는 기간을 고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월드컵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 좀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 발언하면 찍힌다?

(경내) 월드컵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단지 해석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가 고민이 돼요.
(완) 대부분의 사회단체들이 월드컵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을 저어하는 게 여전히 있는 것 같아요. 월드컵이란 게 한국 사회에서 큰 규정력을 갖고 있는데도 왜 사회단체들은 대응을 하지 않는지, 그걸 분석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모두가 월드컵에 대해 발언해야 하는 건 아니래도.
재훈 - 조기축구회 회원으로 다음 월드컵 땐 전혀 다른 해설을 해보고 싶다는 ‘경계를 넘어’ 활동가
(재훈) 한국에서는 전체주의가 가장 큰 문제 아닐까요. 월드컵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도 관심을 가질 것을 조장하고, 다른 목소리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미디어에서는 월드컵 이야기만 하고…. 국민들의 상당수가 월드컵에 빠져들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분명한 대안을 내놓고 각자 어떠한 입장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완) 월드컵이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상업자본의 마케팅 장이다…, 이런 거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너무 모범적이고 추상적인 답을 내놓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 않을까요. 개인은 수없이 많은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원칙들만 갖고서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죠. 다른 한편으로 운동단체 역시도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찍히기를 원하지 않는 곳도 있어서 입장 내놓기를 어려워 하고….
(꽃맘) 월드컵에 대해 어떻게 저항할지 실천적인 방법이 안 보여요. 어떠한 실천이 가능할까?
(용석) ‘월드컵은 이것이다’라고 하나로 정의내리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월드컵은 누구에겐 국가주의의 첨병이고 누구에겐 축제의 장이고 또 누군가에겐 거대한 시장일 수 있는데…. 월드컵에 대해 거대하게만 생각하기보다는 월드컵을 자기 일상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 거리응원과 붉은악마, 그 이면의 진실

(경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월드컵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아직까지 합의된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속에서 헷갈리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 같고. 지금까지 흐름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데 있지 않을까요?
(완) ‘2002년을 살아서 건너오지 못한 운동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 현상’을 지지하면서 ‘살아 건너오지 못한’ 거죠. 문화연대 내에도 살아 건너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월드컵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변화의 기점인 것 같은데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부족했기 때문에 붕 떠버린 것 같아요. 좀 더 세분화되고 자기 관점에 기반한 논쟁이 필요해요.
(재훈) 월드컵과 여성의 관계를 살펴보면, 여성들 자체가 축구에 관심이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거리응원을 보면 실제로 상당수가 여성들이죠. 제 어머니도 호나우지뉴 팬인데 호나우지뉴를 보며 “쟤 이빨 정말 귀엽지 않냐”는 식의 농담도 하세요. 하하하. 축구는 전쟁과 가장 유사한 형태인데 여성들이 어떻게 이런 영역에 대해 열광하고 젖어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가져볼 만하겠죠.
꽃맘 - 축구에 대해 전혀 관심은 없지만 월드컵과 여성주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활동가
(꽃맘) 여성들이 축구나 운동 전반에 대해서 접근하기 힘든 조건들이 있었죠. 사회화 과정도 그렇고…. 2002년 이후 온 국민이 열광하는 상황에서 여성들도 열광하게 되었지만 여성들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르게 봐야할 거라고 생각해요. 방송국에서는 응원할 때 예쁜 여자들만 앞에 내세워서 잘 보이게 하죠. 일종의 ‘섹스심벌’처럼. 오히려 여성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하면서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방식은 뭘까...이런 게 개발되어야 한다고 봐요.
(완) 실제로 프랑스전 끝나고 붉은악마들의 심각한 공격성이 드러나기도 했죠. 당시 서울 일부에서 ‘차 강간놀이’라는 게 유행했는데, 차 위에서 선동을 하는 사람이 ‘저 차 잡아라’라고 하면 군중들이 차 위에 올라가고 흔들고…. 차 안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공포의 도가니죠. 또 성추행, 성폭력 사건이 많이 발생했고…. ‘훌리건과 붉은악마는 다르다’고 그렇게 강조했지만 결국 다른 게 없잖아요?
(경내) 2002년 당시 한신대에서 사회학 하는 김종엽 씨 해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더라구요. 2002년에는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들에게 도덕적 계몽이 끊임없이 이뤄지기도 했고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주최국 시민이 갖춰야 할 자세를 외부에 보여주는 게 시급했기 때문에 흔히 응원문화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이 어느 정도 제어될 수 있었다는 건데…. 이젠 4년 만에 ‘아시아의 프라이드’가 됐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틈새들이 열리면서 일상에 존재했던 폭력성이 응원공간에서도 좀더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죠. 앞으로는 더 커지겠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조차 월드컵에 맞춰서 태극기 그리기 시키고 꼭지점 댄스 연습시키고 그러면서 어린이들에게 국가주의 학습이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교육과정에 대한 개입이 필요해요.
(꽃맘) 붉은악마들의 응원문화에는 그동안 억눌려있었던 여성들의 욕망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할 수도, 여행을 할 수도, 외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억눌림의 분출구가 된 거죠. 가부장제 속에서 억압되어 있던 여성들의 욕망이 분출되는 속에서 응원문화가 있었죠.
(경내) 맞아요. 하지만 굉장히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뛰어나온 것이 남성과 동일한 욕구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여성에게 거리는 위험한 곳, 사회적 성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스쳐지나가는 공간에 불과했었죠. 그런데 그 거리로 여성들이 나오는 건 하나의 시민으로서 시민성(시민됨의 자격)을 획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더 열광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또 여성들이 실제 축구에 빠져들기도 하는데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제한된 ‘재미’라는 것에 길들여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죠. 탄탄한 근육질의 남성들이 초스피드하게 치고 빠지는 경기가 주는 마력 같은 거…. 최고의 운동 엘리트들의 재간에 빠져들게 되고 거기에 몰입하게 되는 거죠. 그게 감성으로는 재미지만, 그 재미 속에 강요되고 정당화되는 질서라는 것에도 주목해야 해요. 단지 국가주의,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더 능력있는 사람들을 뽑아다가 스타로 만드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니까. 더 많은 엘리트선수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축구저변을 넓혀야 한다는 식의 성과주의적인 욕망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것 역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될 것 같아요.
(용석) 그런 성과주의적인 욕망은 한국이 특히 심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일상이 축제같고 즐겁다면 무언가 하나에 그렇게 열광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재훈) 축제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인데 팍팍한 일상에 찌들어 있는 곳일수록 축제의 의미가 있죠.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처럼. 축제가 일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문제들을 잊고 한번쯤은 즐기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겠죠. 그것을 월드컵이 제공해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거예요. 문화연대의 이번 ‘월드컵 반대 캠페인’ 활동이 정치적으로는 맞지만, 놀 때 너무 이성적으로 놀면 재미없지 않아요? 실제로 축제를 할 때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데 재미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고 봐요. 너무나 엄격한 도덕적, 계몽적 잣대를 갖고 현상을 정답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봐요. 그래도 2002년에 비해서는 사람들이 중심을 잡아가고 있다고 보는데…. ‘너무 심한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들이 사람들 내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으니까.


# ‘월드컵 반대운동’을 상상한다

경내 - 붉은 물결 속 생동하는 국가주의와 폭력성이 몹시도 불편한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경내) 월드컵에 이런 면도 있다, 월드컵 때문에 이런 사안들이 묻힌다 등과 같은 이면에 대한 반대를 넘어 월드컵 자체에 대한 반대 운동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육식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고 채식이라는 실천을 통해 대량사육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구조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재훈) 나는 도덕적, 정치적으로 옳은 것만 남은 무균실과 같은 사회를 바라지는 않아요. 월드컵과 축구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지만 월드컵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지는 않아요. 처음에는 갈등을 했죠. 축구를 좋아하지만 이런저런 문제가 있으니까 축구를 이대로 봐도 될지….
(완) ‘월드컵 반대’와 같은 슬로건만으론 별로 의미없다고 생각해요. 어떠한 실천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겠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입장에 대해 물어봐요. 너는 월드컵에 반대하는 것이냐…. 반대냐 아니냐 하는 입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월드컵에서 드러나는 부정적인 면을 알려내고 조직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슬로건과 같은 입장으로써 조직되는 게 아니라 월드컵의 다양한 측면을 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의 일치를 통해 동의를 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용석) 정치적인 구호로 월드컵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천적으로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완) 2006년을 거치면서 영국의 경우는 공중파 방송 편성 비율을 경우에 따라 정부가 통제하기도 해요. 우리나라에선 거의 하루 종일 월드컵 방송을 했는데 영국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또 옥외광고도 통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공공장소에서 광고를 안볼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거니까. 이런 것들도 운동으로 추진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재훈) 다음 월드컵 땐 거리응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월드컵에 반대하는 사람들,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아동노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분출될 수 있는 진정한 축제의 장이 되면 좋겠네요.
(경내) 소수자들은 월드컵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겠어요. 응원과정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그나마 올해 사회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응원 속에 온 국민이 하나된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걸 설득력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용석) ‘월드컵과 병역거부’와 같은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네요.
(경내) 그러한 문제들이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제기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다음 2010년 월드컵 때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인권오름 제 10 호 [입력] 2006년06월28일 9:4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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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내는 [철학논구]라는 학술지에 실린 글입니다.

[철학논구]는 사실 뭐 엄밀한 의미로 보면 학술지라고 하기는 좀 어렵고,

대개 석박사 학위 논문의 요약문을 많이 싣는 간행물이죠.

실질적인 학술지는 [철학사상]이라는 다른 학술지구요.

이 글은 제 학위논문의 서론과 결론 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만든 글입니다.

원고 마감일을 깜빡 했다가 하룻 저녁에 부랴부랴 만들었으니,

사실 독립적인 논문으로 볼 수 없는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걸 올리냐구요? 어떤 학생이 이 글을 돈 주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검색해보니까 KSI라는 국내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3천원 넘는 가격으로 팔고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혹시 비싼 돈 주고 다운 받을까봐

겁나서 여기 올립니다.

돈 주고 다운받지 마세요. ^^;

 

 

철학논구, 33권, 단일호, 시작쪽수 83p, 전체쪽수 26p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Ⅰ.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전통적 해석: 범신론


다른 모든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해석의 역사, 그 영향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 해석의 역사, 영향사 안에서만 식별되고 존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연구, 더욱이 그의 체계를 포괄적으로 재구성해보려고 시도하는 연구는 반드시 그 해석의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평가를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연구가 주장하는 관점의 독자성은 사실은 주관적인 오해와 착각에 머무르거나 아니면 이전에 제시되었던 이러저러한 해석을 진부하게 되풀이하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을 제안하면서,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이라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두 가지 주요한 해석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우리 논문의 본질적인 일부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곧 스피노자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인격적인 초월신 개념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연 중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신을 동일시하는 철학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범신론pantheism”이라는 용어를 고안하고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규정한 것은 18세기 초 영국의 종교개혁가였던 존 톨랜드John Toland였지만1), 이러한 규정은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프리트리히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와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의 논쟁을 통해 철학사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된다.2)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학 일반과 동일시하고 다시 이를 기계론적 숙명론/허무주의/무신론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원을 위해서는 철학이 아닌 신앙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활용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코비의 저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독일 철학의 중심부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야코비가 규정한 스피노자의 범신론과의 대결은 이후 독일 관념론의 중심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범신론으로서의 스피노자 철학이라는 관점은 독일 관념론의 영향력에 편승하여 19세기 이래 서양 철학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3)

범신론적 해석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스피노자 연구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 이론적 영향을 상당히 상실했다.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내재적이고 엄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헤겔을 비롯한 몇몇 대가들의 (얼마간 편파적인) 독해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영향력의 쇠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역량론적 관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범신론적 해석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입장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범신론적 해석의 주요 특징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범신론적 해석은 세 가지의 이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실체의 부동성

범신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실체를 철학사에서 보기 드문 절대자에 대한 사변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곧 자신과 다른 타자들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생산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해 산출되는 자기원인으로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순수한 실정성positivity의 개념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실체를 절대적으로 실정적인 존재자로 제시함으로써 동시에 그 대가로, 실체를 아무런 운동도 인과작용도 수행하지 않는 정태적 존재자로 간주하게 된다. 운동은 변화를 상정하며 변화는 타자성과 부정성을 전제하고 있는 데 반해, 이러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아무런 타자성과 부정성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는 결국 실체를 정태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절대적으로 실정적이면서도 아무런 운동, 아무런 변화도 수행할 수 없는 부동적이고 불활성적인 존재자라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4)


2. 유출론적 체계인 스피노자 철학

범신론적 해석은 이처럼 실체가 태초에 정립된 부동적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또한 유출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한다. 이미 절대적으로 완성되고 충만한 실체가 존재하므로 남은 것은 이러한 실체로부터 내려오는 존재론적 하강의 운동뿐이라는 것이다. 가령 헤겔은 󰡔윤리학󰡕 서두에 나오는 실체(자기원인), 속성, 양태들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하강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곧 자기원인인 실체가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주관적 관점(따라서 이미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고 부차적인 관점)을 지칭하고, 양태들은 다시 이것들보다 훨씬 더 존재론적인 실재성을 결여한, 사실은 거의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들을 나타낸다.


3. 양태의 비실재성과 주체성의 부재

이처럼 양태들이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는 아무런 주체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비롯한 개별 존재자들은 자유는커녕 실재성을 박탈당하고 만다. 스피노자 철학에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주체성이 부재한다. 우선 실체는 내적 부정성의 계기를 결여한 부동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인간들은 자연의 필연적 질서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자유의 가능성을 부정당하고 주체성도 결여하게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은 데카르트의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실체의 일원론을 통해 극복하려는 이론적 시도의 산물이지만, 데카르트가 확립해 놓은 주관성의 철학을 거부한 대가로 능동성과 자유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5)



Ⅱ. 범신론에서 역량론으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한 경향


스피노자 연구의 역사에서 20세기 후반은 매우 뜻깊은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피노자 저작의 고증본 전집들이 출간되면서6) 왕성하게 전개되었다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거의 고사 직전에 이르렀던 스피노자 연구는 1960년대 이후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나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 같은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이 1968년-69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잇달아 스피노자 연구에서 한 획을 긋는 대작들을 출간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들은 각자 상이한 이론적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연구 주제에서도 차이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7), 󰡔윤리학󰡕을 비롯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같은 성숙기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독해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선구적인 작업은 1980년대 이래 좀더 심화된 문헌학적ㆍ분석적 연구들로 계승되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스피노자 고증본 전집의 출간8)의 이론적 촉매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범신론과 대비해 볼 때 이들의 이론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역동적 원인인 실체

우선 이 관점은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를 부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범신론과 달리, 실체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는 󰡔윤리학󰡕이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잘 드러난다. 더욱이 신은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1부 정리 16이나 신의 본질과 신의 역량을 동일시하는 1부 정리 34에서 신 또는 실체의 동역학적 본성은 좀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범신론적 해석은 관념론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역동적인 실체의 철학인 스피노자 철학의 잠재력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의 발로이자 체계적인 왜곡이라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9)


2. 유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근거인 실체의 역량

그러나 이러한 신의 절대적 역량 때문에 양태들, 특히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은 아무런 내재적 역량이나 능동성을 지닐 수 없는 것 아닌가? 범신론적 해석은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유출론 철학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들뢰즈, 마트롱, 마슈레 등과 같은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를 유출론의 철학자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실체와 속성, 양태 사이에 상호 외재적인 관계가 성립해야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며, 그런 한에서 실체와 외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양태들은 실체 안에 존재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실체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실체가 절대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유한 양태들의 능동성이나 인과적 역량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주장한다. 가령 우리가 이 논문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게 될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표현주의”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체는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역량을 아무런 제약 없이 표현하는 것이며, 각각의 양태들은 이러한 실체의 본질을 양태의 수준에서 이어받아 다시 표현한다. 곧 양태들은 각자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해낸다(E I, p.36). 양태들이 지닌 이러한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은 그것들이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존재론적으로 의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의 절대적 역량, 원초적인 자기 표현은 양태들의 능동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적 주석가들의 관점이다.


3. 윤리적ㆍ정치적 실천의 기초로서 역량

유한 양태에 속하는 인간의 윤리적ㆍ정치적 실천 역시 이러한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신론적 해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개별 실재들은 유한한 양태라는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는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점에서(E I D5) 존재론적으로 비자립적이다. 하지만 범신론적 해석에서 생각하듯이 존재론적 비자립성이 실존과 행위의 차원에서 양태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비자립성, 의존성은 양태들의 역량의 원천 자체가 된다.

들뢰즈와 마트롱을 비롯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연구자들은 스피노자의 저작, 특히 󰡔윤리학󰡕 3, 4, 5부 및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등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 이 문제에 체계적으로 답변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논의의 요점은 인간은 자연적인 실존 조건 속에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원초적으로 부여받은 본질, 곧 자기 보존의 역량(스피노자의 “평행론” 또는 심신 동일성론에 따를 경우 이는 신체의 행위역량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인식역량이다)에 의거하여 이러한 조건을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주석가들은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이러한 역량을 능동적인 역량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이라는 개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1960년대 말 이후 새롭게 전개된 스피노자 연구는 이전의 범신론적 해석에 맞서 스피노자는 범신론 철학자가 아니라 “역량의 철학자philosophe de la puissance”10)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들의 입장을 “역량론puissantialisme”으로 부르고자 한다. 역량론이라는 명칭은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앙드레 토젤André Tosel이 최근 한 논문에서 사용한 것이다. 그는 근대 초기 신학-정치론의 구도를 소묘하고 이러한 구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창성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입장을 역량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역량론은 신인동형론에 기초를 둔 인격신 개념을 해체하면서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실체 개념을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11) 토젤은 역량론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적 입장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1960년대 말 이후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량론적 해석은 지난 30여년 동안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걸쳐 매우 탁월한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다. 게루와 들뢰즈,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의 창시자들 이외에도 피에르 마슈레, 에티엔 발리바르, 모로, 안토니오 네그리12) 같은 후배 연구자들이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이들의 작업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확장해왔으며13), 90년대 이후에도 재능 있는 신세대 연구자들이 계속 이들의 연구를 이어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주의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14)


Ⅲ.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몇 가지 중요한 이론적 난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자신이 공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스피노자 철학의 고유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하게 지적해두겠다.


1. 초월성의 위험

역량론의 첫 번째 문제점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역량론은 범신론에 맞서 실체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정리 16). 따라서 역량론이 󰡔윤리학󰡕 1부에서 자기원인(정의 1),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정의 6과 정리 11), 실체의 역량(정리 16과 정리 34) 등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자기원인에서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원인이 된다고 할 때, 이 자기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자기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제어하는 존재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자기원인인 실체의 행위가 자의적이지 않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실체의 행위의 필연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실체의 본질을 절대적 역량에서 찾을수록 더욱더 심각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체가 절대적인 역량이라면, 따라서 실체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라면, 실체의 행위는 그만큼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체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종의 초월적 존재자가 아닌가? 스피노자의 실체, 스피노자의 신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월적인 신이 아닌가? 이러한 신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 또는 데카르트의 신과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질문에 정확히 답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그것의 용법이 스콜라철학과 데카르트의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역동성, 실체의 절대적 역량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실체와 속성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역량론자들은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가들과 달리 속성의 객관적 실재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표현과 구성의 관계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실체를 구성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표현과 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속성은 어떻게 실체를 구성하면서 또한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가? 들뢰즈나 마트롱 같은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실체의 표현성, 곧 실체의 역동성을 구성적 측면보다 더 중시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실체의 자의성, 실체의 초월성이라는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2. 스피노자에게 인과관계는 이중적인가?

실체 개념에 대해 제기되는 이러한 의문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제기될 수 있다. 역량론자들은 실체에 대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야말로 양태들이 지닌 능동성, 원인으로서의 역량의 근거를 이룬다고 강조한다. 1부 정리 18(“신은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이 아니다”)이나 정리 25의 따름정리(“신은 자기원인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또한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는 정리 36(“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등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태들이 실체에 의존하는 존재론적 양상은 어떤 것인가? 어떤 관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양태들의 존재론적 의존성이 양태들의 실천적 역량을 낳는 근거가 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상당히 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1부 정리 18에 나오는 두 가지 원인 개념, 곧 내재적 원인과 타동적 원인 개념에 의지하여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을 이중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먼저 신과 양태의 본질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인과성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 양태들 사이에, 양태들의 실존 사이에서 성립하는 타동적 인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가 양태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동적, 갈등적, 예속적 관계의 존재론적 뿌리를 이룬다면, 전자는 이러한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 기초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한편으로 너무 편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선 이 경우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과 데카르트의 인과성 사이의 차이점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데카르트 역시 피조물들의 행위의 제일 원인은 신이며 피조물들은 신의 역량에 의해서만 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달리 물체들의 내재적인 인과 역량을 부정하고, 이를 오직 신에게만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피노자의 양태들, 특히 연장에 속하는 물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과 역량을 지닐 수 있는가? 신과 양태적 본질들 사이에는 내적 인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순환논법 그 이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곧 양태들 사이의 작용 인과성)을 구분하고 양태들의 본질과 실존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답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갈릴레이-뉴턴이 확립한 근대 물리학과의 이론적 관계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운동의 상대성은 순전히 타동적인 인과성을 구현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에 기초를 둘 경우 운동의 동역학적 원인을 사고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나 󰡔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에 나오는 자연학에 관한 논의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스피노자는 정확히 운동의 상대성 개념에 기초를 둔 동역학적 인과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학과 단절하는 운동의 상대성 또는 외재적 인과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전제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임에도, 역량론적 관점은 이 두 가지 개념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점은 개체의 개체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들뢰즈는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에 또다른 본질인 “역량의 정도”(신의 본질의 양태적 표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곧 전자가 본질의 양적 측면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질적 측면을 (또는 전자와 후자는 각각 외연량과 내포량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양자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들뢰즈는 “양태의 본질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영원하게 표현된다” (Deleuze 1969, p.191)고 말하고 있을 뿐, 어떻게 본질과 관계 사이에 서로 상응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3.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실체 개념에 대해, 또한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역량론이 보여주는 모호성은 인간학과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점만 지적해두자.

첫째, 역량론적 해석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은 이러한 이행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는 기쁨이라는 정서와 적합한 인식의 일종인 “공통 통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점이다. 문제는 그보다 좀더 기초적인 데서 생겨난다. 우선 역량론적 해석가들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동과 수동 개념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에서 능동과 수동은 각각 적합한/전체적 원인과 부적합한/부분적 원인으로 정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원인의 두 양상 내지 두 측면을 가리키며, 유한 양태들은 외부 물체와 맺고 있는 변용하기/변용되기의 관계를 통해 역량을 획득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는 수동=변용되기, 능동=변용하기가 아니며, 능동과 수동은 변용을 조직하는 두 가지 관계의 양상들이다.

하지만 역량론자들의 가정에 따르면 양태들은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인과성을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으로 분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귀결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수동력은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들이 변용=수동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변용되기=수동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렇다면 능동은 외부 실재들과 아무런 변용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 또는 외부 실재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다만 우리만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규정 없이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 경우 능동성은 자연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남 또는 그것을 초월함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동성은 스피노자가 가상 중의 가상으로 간주하는 “자유의 가상”과 어떻게 다른가? 이처럼 능동과 수동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서도 불명료함과 애매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둘째, 또한 이 때문에 역량론은 왜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역량론적 해석에 따르면 각각의 개인들은 관계와 독립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개인들의 자유 역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촉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각 개인의 자유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 59의 주석에서 “굳건함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을 정신의 힘, 곧 정신의 능동성의 본질적인 요소로 제기한 이래, 각 개인의 자유와 지복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지복을 수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량론적 관점에서는 왜 자유와 지복이 이러한 관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지 충분히 해명하기 어렵다.



Ⅳ. 관계론적 해석의 요소들


이처럼 역량론적 해석은 그것이 이룩한 업적과 여러 가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난점들은 단지 이런저런 이론적 보충이나 정정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것들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 철학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으로서 역량론이 지닌 내적 한계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역량론이 이룩한 이론적 성과를 보존하면서 그것이 지닌 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역량론과 또다른 해석의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이러한 관점을 관계론이라는 명칭 아래 제시해보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제시한 논점들은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우선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실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원인과 실체, 속성, 양태 및 인과성과 개체성 같은 스피노자 존재론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관계론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1) 스피노자 존재론의 탈실체론적 성격: 자기원인, 실체, 속성

스피노자에서 존재하는 것은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일 뿐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이 유일한 실체의 양태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를 실체론의 철학자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반대로 이는 근본적인 탈실체론적 (반실체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테제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오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실체는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될 수 없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 또는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실체론의 공통적인 논점, 곧 존재하는 모든 것(그것이 개체이든, 유한한 실재이든)은 실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립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은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탈실체론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전통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실체론적 성격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간주되어 왔다. 범신론적 해석은 이 개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실체가 부동적이고 실정적인 절대적 일자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간주한 반면, 역량론적 해석은 여기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입장은 자기원인을 궁극적인 근거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윤리학󰡕의 텍스트를 꼼꼼히 검토해보면 이 개념은 스콜라철학이나 데카르트의 경우와는 달리 비신학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의 인과 작용을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원인은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 자연의 자립성을 넘어 있음 그 자체로서의 자연의 익명적인 인과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 역시 탈실체론적이며 비재귀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실체에 대한 해석의 근본 쟁점은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속성의 주관성과 실체의 단순성을 주장하는 범신론과 달리 역량론은 속성들의 실재성을 긍정하며, 속성들을 실체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역량론(특히 게루와 들뢰즈)은 속성들과 실체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여전히 실체를 속성들을 통합하는 일종의 기체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체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실체의 내재성은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곧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의 집합, 속성들의 관계 전체와 다르지 않으며,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의 실재가 아니다. 신 또는 실체는 속성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실체가 함축하는 이러한 구성적 성격 또는 관계론적 특성을 간과할 경우, 역량론이 강조하는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 실체의 자기원인적 특성은 실체의 초월성 또는 적어도 실체의 재귀성(再歸性)(따라서 실체의 주체성)의 이론적 알리바이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내재론적이라면, 이는 그것이 관계론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 실체와 양태의 관계: 변용과 연관의 인과이론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관계론적 특성은 관철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양태 관계는 일의적으로 인과관계로 표현되며, 따라서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의 쟁점은 인과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분리하는 역량론적 해석과 달리 관계론적 해석은 내재적 인과성과 타동적 인과성을 대립시키거나 분리해서는 안되며, 양자 사이에는 이론적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은 갈릴레이가 정초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를 양태들의 인과 역량과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동역학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은 “연관”(connexio 또는 concatenatio)과 “변용affectio”이라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 저작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연구자들에게 별로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 인과이론의 관계론적 특성을 해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이다. “연관”은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고립된 개체들 사이의 관계에 기초를 둔 인과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개체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과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곧 인과계열의 최초의 항을 전제하고 있는 목적론이나 기계론과 달리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항상 이미 다수의 항들을 전제하고 있다.

“변용” 개념은 (유한) 양태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명칭이면서 (유한) 양태들이 실존하고 작용하는 방식들을 가리키는 행위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변용”은 유한 양태들이 지닌 인과 역량은 “변용하기afficere”의 역량의 표현이며, 변용하기의 역량은 “변용되기affici”의 능력을 전제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인과이론에서 변용 개념의 중요성은 역량론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은 관계와 독립적인 개체들의 내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양태들이 다른 양태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연관과 변용 또는 변용의 연관이라는 개념은 역량론적 해석에 비해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이 지닌 일의성을 좀더 정확히 보여준다.


(3) 관계로서의 개체

스피노자의 개체론 역시 관계론적 해석이 지닌 이론적 우월성을 잘 보여준다.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 및 개체화 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개체”의 어원의 함축과 달리) 개체를 분할될 수 없는 원초적인 실재로 간주하지 않고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합성체로 간주한다는 점에 있다.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의 이러한 특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인과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게루나 마트롱, 들뢰즈 또는 마슈레 같은 역량론의 대표자들은 한편으로 스피노자에서 개체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을 일종의 원자와 같은 실재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개체의 본질은 양적 측면(곧 “관계”)만이 아니라 또한 질적 측면(“역량의 정도”)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량론적 주석가들은 인과성만이 아니라 개체에 대한 해석에서도 개념의 일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에서 개체들은 부분들 사이에서 작용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체들은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이외의 다른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코나투스 내지 욕망으로 표현되는 인간 개인들의 본질 역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유한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개별성, 자신의 본질을 얻으며,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실존한다.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관계 및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과 맺는 관계 이외에 별도의 개체의 본질을 설정하게 되면, 스피노자의 인과론과 개체론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을뿐더러 개체들이 지닌 실존과 행위 역량의 원천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하는 데서 실천적 동력으로 작용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 윤리학 사이의 이론적 일관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체를 관계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스피노자의 인간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1부에서 전개된 이러한 논의는 자기원인과 실체에서 개체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일관되게 관계론적 관점에 입각해 있음을 잘 보여준다. 2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관계론이 인간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되고 있는지 해명하려고 했다.


(1) 상상적 관계: 스피노자 인간학의 모체

상상적 관계라는 개념은 2부 전체의 논의에 대해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은 상상적 관계 또는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의 윤리적 기획의 핵심을 이루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상상적 관계의 양면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간학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못한 범신론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간학에 관한 논의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맹점 중 하나는 스피노자에서 상상 개념이 지닌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은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인간의 삶 전체의 외연을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과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곧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기능(그것도 부정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연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상상은 특정한 인지적 능력facultas을 형성하기 이전에 집합적인 관계의 의미, 곧 상상계의 의미를 가진다.

집합적인 관계로서 상상계는 이중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을 구성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룬다. 상상의 자연성은 그것이 우리의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반면 상상의 가상성은 자신의 욕구는 의식하되 그러한 욕구를 산출한 원인들에는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무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상상이 인간의 자연적 조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상성은 단순히 오류로 치부할 수는 없으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조건 및 정서적 구조를 개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의 핵심 목표가 된다.


(2) 인식과 정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러한 상상의 양면성 위에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윤리학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스피노자에게 관념과 정서는 인간의 심리적인 활동의 두 축을 구성하며, 이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윤리적 기획에 따라 진행된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서 독립적인 인식론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시도다. 스피노자에서 인식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이라는 과제, 곧 능동화라는 윤리적 기획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이행의 핵심 계기를 공통 통념들의 형성에서 발견한다는 점에 들뢰즈를 비롯한 역량론 주석가들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논의는 이중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선 그는 상상과 이성의 관계, 또는 1종의 인식에서 2종의 인식으로의 이행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공통 통념들은 상상적인 지각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통 통념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실재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는 상상의 능력에 기반하여 자연의 통상적 질서에서 벗어나 실재들 사이의 일치와 대립,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둘째, 들뢰즈는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에서도 난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쁜 정념의 역할을 강조할 뿐, 사람들을 수동적인 상태 속에 고착되게 만드는 정념적 구조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놀람이라는 데카르트의 개념을 변형시켜 이러한 고착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 해석의 한계는 궁극적으로 그가 스피노자의 수동과 능동 개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스피노자에서 수동은 변용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또한 능동은 외부 물체들에 의한 변용으로부터의 탈출로 간주될 수도 없다. 수동과 능동은 모두 일종의 원인이며, 문제는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원인인 수동의 상태에서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원인인 능동으로 이행하는 데 있다.


(3) 자유 개념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이렇게 해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인 윤리적 문제에 도달한다. 자신의 필생의 저작에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에서 윤리의 문제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라 철학적 기획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쟁점이다. 특히 자유는   󰡔윤리학󰡕 5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리적 실천의 중핵을 이룬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이 해명해야 할 주요 개념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적인 윤리적 지향을 강조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량론적 해석의 중요성과 강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나 마슈레 같은 역량론 해석가들은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의 관계,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은 개인의 주체적인 행위라는 관점으로는 충실히 설명될 수 없다. 각각의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및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한다는 그의 존재론적 원리에서 일관되게 따라 나오는 결과이자, 자유를 저해하고 인간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조건에 묶어두는 가상적 조건들이 상호 개인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인간학적 조건의 귀결이기도 하다.

자유를 향한 스피노자의 윤리적 기획은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2종의 인식을 통해 각각의 개인들의 실존과 행위를 제약하는 상상적인 조건들을 해체하고 이를 신을 향한 사랑으로 대체하려는 운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원인으로서의 신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충분치 못한 활동이다. 윤리적 기획이 온전히 완수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의 윤리적 주체화의 활동을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맺음의 활동과 내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3종의 인식 및 신의 지적 사랑이 필수적이다. 신의 지적 사랑은 전통적인 신비주의 신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러한 개인화와 사회화, 또는 주체화와 탈주체화의 이중적인 운동이다.



Ⅴ. 논문의 실천적 함의


마지막으로 우리 논문의 실천적 함의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해두기로 하자.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의 차이점은 단순히 이러저러한 주제들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으며,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적인 성격 및 지향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범신론적 스피노자 해석이 윤리적 실천이나 사회적 문제들에 무관심한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스피노자 상을 만들어냈다면, 반대로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를 (마르크스 또는 그 이외의 다른 몇몇 이단적인 철학자들과 더불어) 가장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철학자들 중 하나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는 특히 안토니오 네그리가 가장 일관적이고 철저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만,15) 사실 그 이전에 이미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알렉상드르 마트롱 등과 같은 철학자들 역시 스피노자 철학을 혁명적인 철학으로 제시했다. 곧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보기드문 이론적 혁명을 수행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 실천에 영감과 동력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혁명적이라는 것이다.16)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스피노자 사후 3세기에 걸친 스피노자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20세기의 스피노자주의를 “정치적 스피노자주의”라고 부른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17)

우리가 이 논문에서 제시한 관계론적 해석 역시 그 나름대로의 실천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물론 관계론은 역량론이 제시하는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스피노자의 상을 거부하지 않으며,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고 수용한다. 다만 관계론은 역량론적 해석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주의와 그것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이론적 인간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현재의 이론적 작업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가 자율적인 지적ㆍ정치적 역량을 갖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든가 욕망과 기쁨의 무조건적 긍정성을 주장했다든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실체나 주체, 인과성, 개체, 상상, 합리성과 비합리성, 능동과 수동, 자유 등과 같은 근대 철학의 주요 범주들과 더불어 이러한 범주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 사회계약, 주권, 대표, 복종, 지배와 예속, 시민, 민주주의 등과 같은 정치학의 개념들을 쇄신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 곧 관계론적 관점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과 현재성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묘해본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지난 1960년대 이래 좌파의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방향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쳐온 역량론적 해석에 대한 자기비판과 자기쇄신을 위한 이론적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관계론이 함축하는 실천적 의미들 중 몇 가지 주요 측면만을 지적해두기로 하겠다.


(1)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위한 한 가지 이론적 모델을 발견한다. 지난 1960년대 이래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독창적인 이론적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작업은 많은 이론적 성과를 배출했고 현재에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관계론적 해석은 이들의 작업을 계승하되, 이를 좀더 일관된 관계론의 기초 위에서 정정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줄 수 있다. 가령 알튀세르의 구조 인과성 개념은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의 범주들에 직접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며, 󰡔자본론󰡕에 대한 이해나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Althusser et al. 1996 참조). 하지만 이 개념은 전체와 부분 또는 구조와 요소들 또는 구조와 정세 같은 구조주의적인 통념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과성 자체에 대한 이해에서도 상당한 모호성을 보여주고 있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이 개념을 다시 해석하고 정련한다면, 구조인과성 개념이 지닌 이론적 잠재력을 좀더 풍부하게 드러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철학의 이론적 핵심을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2)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주요 경향 중 하나는 욕망을 결핍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맞서 스피노자를 긍정적인 욕망의 옹호자로 동원하는 데 있다. 특히 들뢰즈(ㆍ가타리)나 네그리 계열의 이론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역량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충분치 못하며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무엇보다도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또다른 주체의 철학, 관념론적 전통이나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적 전통에 맞설 수 있는 유물론적 주체의 철학으로 간주하게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스피노자 철학을 일종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이론적 전거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낳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욕망의 긍정성을 옹호했다면, 이는 원리나 전제로서가 아니라 과정이나 결과로서 그런 것이다. 곧 스피노자가 옹호하는 욕망의 긍정성이나 능동 정서는 인간, 더욱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는 실제 개인 주체일 수도 있고 집단적인 개인 주체일 수도 있다)이 선험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본질이 아니라, 개인적인 실천과 집합적인 투쟁의 상호 관계 속에서 형성하고 획득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윤리적 실천에 고유한 특징인 개성화와 사회화의 이중운동이 지닌 한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욕망이나 정서의 긍정성 또는 능동 정서의 가능성에 대한 옹호는 욕망이나 정서 일반에 대한 관계론적 인식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욕망과 정서 개념을 이해할 경우에만, 심리적인 범주들을 개인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제도적 관행이나 상호개인적(또는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 행위의 차원과 결합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역량론은 관계론으로 대체되거나 적어도 보충되어야 한다.


(3)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의 의미는 반계약론적 정치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표현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을 국가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로 받아들이지 않은, 서양 근현대 정치철학 전통에서 매우 드문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특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모두 나타나는 경향이지만, 특히 󰡔윤리학󰡕의 이론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정치론󰡕에서 좀더 원숙하게 표현되어 있다.18)

네그리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스피노자를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반자유주의적인 정치이론을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고자 했으며, 이를 대표하는 것이 유명한 “다중multitudo”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다중 개념은 독특하고 자율적인 개인들의 연합 또는 공통의 연관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제국에 맞서 해방의 정치, 혁명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정치적 분석이 잘 보여주듯이 스피노자는 혁명적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주체(개인적 주체이든 집단적 주체이든)라는 범주를 알지 못했다. “다중” 또는 “대중들”19)이라는 개념 역시 집합적 주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국가의 법적 구성의 존재론적 한계를 가리키거나 또는 정치적으로 양가성을 지닌 국가의 자연적인 기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관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 정치학의 의미는 그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제시했다거나 국가 바깥에 존재하는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스피노자 정치학의 중요성은 계약론에 의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인 정치나 반계약론적이되 혁명적인 주체의 가능성에 의지하고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법적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계약론적 모델에 맞서 관계론적 문제설정을 제안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몇몇 저작20)이나 알튀세르의 몇 가지 지적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반계약론적 성격을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에 원용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좀더 보완하고 발전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진태원(2001), 「스피노자의 현재성: 하나의 소개」, 󰡔모색󰡕 제2호.

______(2004a), 「역자 해제: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Macherey 2004.

______(2004b),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철학사상󰡕 제19집.

______(2005), 「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트랜스토리아󰡕 제5호.

Althusser, Louis et al.(1996), Lire le Capital, PUF(19651).

Balibar, Etienne(2005),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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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uze, Gilles(1969),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Minuit.

Gueroult, Martial(1968), Spinoza vol. 1: Dieu, Aub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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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erey, Pierre(1992), “L'actualité philosophique de Spinoza,” in Avec Spinoza, PUF.

________________(2004),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Matheron, Alexandre(1988), Individu et communauté chez Spinoza, Minuit(19691).

Moreau, Pierre-François(1975), Spinoza, Seuil.

Negri, Antonio(1990), The Savage Anomaly, trans. Michael Hard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Scholz, Henrich & Müller, Wolfgang Erich(2004), ed., Die Hauftschriften zum Pantheismusstreit zwischen Jacobi und Mendelssohn, Spenner.

Tosel, André(2001), “Quel devenir pour Spinoza?,” in Lorenzo Vinciguerra ed., Quel avenir pour Spinoza?, Kimé.

_____________(2005),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추어본 마르크스주의」, 󰡔트랜스토리아󰡕 제5호.

Vaysse, Jean-Marie(1994), Totalité et subjectivité, Vrin.

Zac, Sylvain(1989), Spinoza en Allemagne, Klincksieck.


1) 톨랜드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Champion 2003 참조.

2) “범신론 논쟁Pantheismusstreit”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의 주요 텍스트들을 묶은 선집으로는 Scholz & Müller 2004(초판은 1916)를 참조. 이에 관한 주석으로는 Zac 1989를 참조할 수 있다.

3)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스피노자 수용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는 Vaysse 1994; Macherey 200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4) 독일 관념론에서 스피노자 수용이 물론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으로 모두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셸링은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스피노자 철학, 특히 실체 개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존재론에 대해 훨씬 호의적이었고, 또한 훨씬 세심한 독해자였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 저작인 󰡔철학의 원리로서 자아󰡕에서부터 말년의 저작인 󰡔계시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은 우리가 뒤에서 말할 역량론적 해석의 이론적 원천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셸링과 역량론적 해석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에 대한 검토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이지만, 이는 별도의 논의에서 다루어볼 생각이다. 셸링의 스피노자 해석에 대해서는 특히 Vaysse 1994를 참조할 수 있다.

5) 한편 관념론적인 입장과 달리 유물론의 노선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은폐된 유물론” 내지 무신론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적인 경향을 높이 평가했다. 유물론의 역사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평가에 대한 고찰로는 Tosel 2005 참조.

6) Van Vloten & Land. ed., Benedict de Spinoza Opera quotquot reperta sunt. La Haye, 1883-1884;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Heidelberg, 1925.

7) 게루는 󰡔윤리학󰡕 1부와 2부에 대한 매우 정밀하고 풍부한 주석서 두 권을 남겼으며, 철학사 연구의 학문적 규범에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의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매우 독창적인 입장(“표현주의”로서 스피노자 철학)에 따라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트롱은 두 사람과 달리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독해를 통해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철학 체계 전체의 관계를 엄밀하게 연역해내고 있다.

8) Pierre-François Moreau의 감수 아래 간행되고 있는 새로운 스피노자 전집은 8권으로 기획되었으며, 2005년 현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2권이 출간되었다(PUF 출판사).

9)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Macherey 2004 참조.

10) 이 표현은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Moreau 1975), 이들의 공통적인 지향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11) Tosel 2001 참조.

12) 네그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지만, 프랑스 주석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그 자신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역으로 프랑스 연구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프랑스 주석가들과 한데 묶어도 무방할 것이다.

13) 물론 이들의 작업을 “역량론”이라는 명칭으로 모두 포괄하는 것은 무리다. 이들이 매우 다양한 관심과 입장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일부 주석가들은 역량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량론적 관점과 관계론적 관점이 갈등 상태에서 혼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4) 20세기 후반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동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1; 2004a를 참조하기 바란다.

15) 이는 네그리의 주요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유럽의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주저의 제목은 󰡔야생의 별종L'Anomalia selvaggia󰡕(1981)이었으며, 그 이후에 출간된 또다른 스피노자 연구서의 제목은 󰡔전복적 스피노자Spinoza sovversivo󰡕(1992)였다.

16)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1965)에서 스피노자를 “철학사에서 전례없는 이론적 혁명”을 이룩한 철학자이며,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선조”로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뒷면 소개글에서 스피노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철학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들은 스피노자에게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다. 그는 루크레티우스나 그 이후의 니체 말고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학을 근본적인 해방과 탈신비화의 기획으로 인식했으며, 파문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고독한 사상가였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제 3종의 인식에 의해 가능해진 지적ㆍ윤리적 공동체를 “현자들의 공산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7) Macherey 1992 참조.

18) 스피노자 정치학의 반계약론적 입장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b; 2005 참조.

19) 이는 “multitudo” 개념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번역어들이다.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multitudo” 개념을 “다중”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는 반면, 발리바르는 이 개념의 가장 좋은 불어번역어로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용어를 제시한 바 있다.

20)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특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중요한 작업이다. 또한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의 몇몇 언급들도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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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28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최근에 새삼, 스피노자를 읽어야 하는 중요성을 사학을 전공하는 선배와 '주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다시 깨달았습니다.

瑚璉 2006-06-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렵습니다요(T.T).

청년도반 2006-06-2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배님, 이왕 올려주시는 김에(?) 이번 달에 서양근대철학회에서 발표하신 논문도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 발표회에 가고 싶었지만, 학기 막바지라 갈 수 없었다는;;
ㅎㅎ 기다려볼께용~ ^^;;

덧) 갑자기 이미지가 "젊은" 알튀세르로 바뀌었네요. 혹시 함의는 스피노자에게 빙의된 알튀세르? ㅎㅎ 사실 호호 할아버지 때 사진만 보다가 한번씩 저런 사진 보면 정말 적응 안됩니다. 솔직히 "The Humanist Controversy and Other Texts" 표지 사진 보고서는 기겁을 했더랬습니다. ㅎㅎ;;

cplesas 2006-06-2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행이 돈 주고 받지는 않았답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balmas 2006-06-29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호질님, 전공 분야가 아닌 건 다 어렵죠. ^^; 더욱이 이건 전체 내용을 개략적으로 축약한 거라서 더 그럴 거예요.
웅기/ 그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나중에 올릴게. :-)
무영님/ 잘 하셨어요. ㅎㅎ

balmas 2006-06-29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글쎄,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 ^^;;

Runa 2006-06-3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벌써 6월 마지막 날이군요!
저도 서양근대철학회의 두 선생님 발표문을 다 보고 싶은데..
그냥 간사한테 문의할까요? 아님 선생님이 올리시길 기다려볼까요?
그건 글쿠, 알튀세르 사진 넘 멋져요. 저는 이렇게 젊은 얼굴 첨이거든요.
들뢰즈만 멋진 줄 알았더니, 알튀세르는 색다른 맛(?)이 있군요.. ㅋㅋ

아무 소식이 없어 약간의 답답함을 양념삼아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럼, 또 들를게요.

balmas 2006-07-0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알튀세르야 꽃미남의 원조격이죠. ㅋㅋ

근대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조금 줄이고 다듬어서 나중에 [서양근대철학]
회지에 실을 예정인데, 아직 다듬지 못해서 여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발표했던 글은 간사에게 말씀하시면 얻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

그리고 후배에게 며칠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쪽에서 한번 연락을 해보겠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 메일 주소를 가르쳐줬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마
연락이 갈 겁니다. :-)

헤르베르트 2006-07-1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염:-)

balmas 2006-07-13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셈~

JC 2010-01-28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 읽었습니다. 혹시 퍼갈 수 있을까요?
 

경향신문

 

 

[대학 영어강의의 그늘]下. 교수들도 피해자

 

입력: 2006년 06월 27일 18:09:54

: 16 : 5
 
독일에서 10년 넘게 여성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김모씨(42)는 지난해 모 국립대에서 사회학과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여성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신이 있던 김씨는 면접자리에서 당황했다. 면접위원들이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무사히 면접을 마치긴 했지만 임용에는 실패했다.

김씨는 “임용된 사람을 알아보니 그 학교 출신에, 영어회화가 뛰어난 사람이었다”며 “실력보다는 영어가 중요시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유럽에서 공부한 박사들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김씨는 “사회학이나 법학은 세계적으로 독일이나 프랑스를 더 알아주지만 국내 분위기는 오직 영·미권을 우대한다”며 “같이 공부한 사람끼리 만나면 미국으로 유학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한탄한다”고 전했다.

대학들의 영어강의 확대로 피해를 보는 것은 학생뿐 아니다. ‘영어 강의능력’이 능력평가의 주요 지표가 되면서 영·미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각광받는 반면 유럽출신 박사들은 임용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

‘영어강의 능력’ 우대는 국내 학계의 영·미 편향성이 더욱 심화되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상명대 영어교육학과 박거용 교수는 “최근 유럽에서 공부해 임용되는 교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학문의 미국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며 “영어지상주의가 불러오는 폐단”이라고 지적했다. 박교수는 이어 “학자라면 외국 학문을 우리말로 정착시켜 ‘한국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번역없이 영어로 떠든다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했다.

“영어를 잘하는 것과 강의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상당수 대학들이 신규임용 교수들에게 영어강의를 의무화하고 있어 ‘울며 겨자먹기’로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임용된 고려대의 한 교수는 “내 전공은 실습위주 과목인데 억지로 영어로 진행하다보니 의사소통이 안돼 어려움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나이든 교수님들이 영어강의를 안하다보니 영어강의 부담은 전부 젊은 교수들에게 지워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영어만능주의에 대한 반발기류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대 이상신 교수는 지난 3월 어윤대 총장에게 보낸 공개 질의서에서 ‘“교수가 되려면 대학원 과정부터 미국에서 다녀야 한다”는 발언과 학문적 능력이 검증 안된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도록 여러 학과에 요구한 점, 학문을 고려치 않고 영어강의 능력을 채용기준으로 설정한 점’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지난 5월 고려대 문과대 교수회는 “문화적 정체성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진리탐구 역량을 훼손하는 영어강의 전공과목 이수 의무화 방침을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전공과목을 영어교육의 실습수단으로 여기는 발상에 대한 항의였다. 고려대도 교수회의 일부 주장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영어강의 확대 방침은 여전히 확고한 상황이다.

물론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강의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많다. 고려대 화학과 최동훈 교수는 “어느 나라에서 공부하든 국제어인 영어로 소통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교수들 역시 영어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의 한 교수는 “영어강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대학측이 운영의 묘를 살려 학문과 영어실력 둘 다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준일·이호준·임지선기자 ant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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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6-2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참.

balmas 2006-06-29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