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선비, 붓을 잠시 놓고 劍을 뽑다
[조선일보 2006-05-02 03:03]    
‘武의 문화’ 보급 나선 동문선 출판사 신성대 사장
인문서적만 만드는 뚝심의 출판인 사무실
한켠에 무예수련장 만들고 국군전통의장대에 십팔기 가르쳐

[조선일보 조민욱기자]

“칼로 싸우다 지면 깨끗이 승복하는데, 말(言)로 지면 앙금이 남습니다. 요즘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입니다. ‘문(文)의 문화’가 대세가 되면서 ‘무(武)의 문화’의 장점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찾아야 합니다.”

서울 인사동의 중견 출판사 ‘동문선’의 신성대(辛成大·52)대표는 괴짜들이 몰려든다는 인사동에서도 터줏대감이 되기에 손색없는 ‘왕괴짜’다. 그는 600여 종의 인문서적을 줄기차게 펴낸 출판인으로도 이름 있지만, 여기까지만 알았다면 그를 반도 못 안 것이다. 신씨는 37년째 전통무예 십팔기(十八技)에 정진하고 있는 무인(武人)이기도 하다. 그는 출판사 대표인 동시에 ‘십팔기 보존회장’이며 ‘동양무예연구소장’이다.

출판사 사무실 한쪽엔 아예 무예 수련공간을 꾸며 놓고는 종종 칼을 들고 수련한다. 4년 전부터는 십팔기 시범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고 있으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90여 차례 공연한 공로로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외부 활동도 문무 두 영역을 넘나든다. 어느 날은 대진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출판·편집 실무’를 강의하고, 또 다른 날엔 국군전통의장대 무예십팔기 지도사범 자격으로 병사들을 호령한다.

남이 쓴 책을 출간만 해 주던 그가 생애 첫 책을 써 냈다. 최근 나온 ‘무덕(武德)-무(武)의 문화, 무의 정신’(동문선)은 한마디로 그가 무예를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얻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신씨에게 무예 수련이란 단순한 신체단련의 차원이 아니다.

그는 “문이 사유(思惟)하는 철학이라면 무는 행동하는 철학”이라면서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을 숭상하고 무를 푸대접함으로써 바람직하지 못한 국민성을 형성한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씨는 “가령 옛날 500원 지폐엔 이순신 장군 초상과 거북선이 있었지만, 요즘 우리 돈에는 세종대왕·퇴계·율곡 등 문(文) 쪽의 인물 일색 아니냐”고 했다.

“특히 현대사에서 군사독재의 어두운 역사 때문에 ‘무’(武)가 더 폄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 변함없는 항심(恒心), 신의(信義)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무의 정신과 에너지는 이어받을 가치가 큰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선비 정신이 만든 게 아니라 우리 혈관 속에 흐르는 기마민족의 진취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그는 “내가 돈 안 되는 인문서적을 고집스레 출판하는 것도 무인의 뚝심 때문”이라고 했다. 굴곡 많은 인생길을 헤쳐온 힘도 무예로 닦은 정신력이다. 경남 마산에서 상경한 10대 시절의 신씨는 무예는커녕 동네 왈짜패들에게 괴롭힘을 받던 작은 체구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싸움 기술이나 익혀 보려고” 도장을 찾았다가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인 해범(海帆) 김광석 선생을 만나 평생 제자가 됐다. 젊은날엔 전공(해양대 부설 전문대 기관과)을 살려 외항선 마도로스가 되어 오대양을 누비기도 했으나, 한 친구의 동업 제의로 출판에 뛰어들었다. 첫 작품으로 이외수씨 책을 낼 땐 동업자가 신씨 돈을 갖고 잠적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다행히 이외수씨가 사정을 듣고는 ‘쓰다가 버린 파지’라며 건네준 원고가 ‘말더듬이의 겨울 수첩’이라는 베스트셀러 산문집으로 히트해 화려하게 데뷔했다.

“말라카 해협서 해적을 만났을 때, IMF를 맞아 출판사가 부도 직전에 갔을 때에도 저를 버티게 해준 것은 무예입니다. 칼날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살 길이 생긴다고 믿었죠.”

그가 무예 대중화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십팔기는 어느 한 문중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만든 무예로 세계에서 유일한 것입니다.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 무인으로서의 저의 사명입니다.”

(조민욱기자 [ mwc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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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6-2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후안무치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 사람은 그런 점에서는 질적 비약을 이룩한 사람인 듯 ...

이런 인사가 책 냈다고 인터뷰 기사를 실어주는 곳이

어디인가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조선일보였다.

물론 한겨레도 만만찮다. 한겨레의 뛰어난 균형 감각!

http://news.empas.com/show.tsp/cp_hn/20060501n06527/?kw=%BD%C5%BC%BA%B4%EB+%BD%C5%BC%BA%B4%EB+%BD%C5%BC%BA%B4%EB+%7B%7D

 


퍼그 2006-06-2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대로 '너무나' '특이한' 분이네요.ㅎㅎ "동武선"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도 같습니다.

balmas 2006-06-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은 원래 있던 출판사인데, 이 사람이 아마 중간에
인수한 게 아닌가 싶어요. (확실치는 않지만 ...)
그나저나 한겨례가 정말 놀랍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기사를 떡하니 실어주는지 ... -_-+

에로이카 2006-06-2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웬일로 발마스님께서 악명높은 동문선 기사를, 그것도 조선일보 기사를 퍼왔나 했습니다. 동문선이 프랑스 서적들 번역출판권을 입도선매해서, 그지같은 번역으로 책 망쳐놓고, 저작권 계약 없이 다른 곳에서 나온 번역서들 거둬서 다 소각시키기로 유명하더군요.

balmas 2006-06-2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은 후안무치하기가 이를 데 없는 출판사죠.
저는 동문선에 기생하면서 알토란 같은 프랑스 서적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하는 지식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우울하고 안타깝더군요.
동문선을 통해서 나오기도 전에 죽어버린 책들, 그것도 하나같이
귀중하고 값진 책들을 생각하면 ...

불어 깨나 하고 프랑스에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 많다는 우리나라
프랑스 학계 교수들은 뭐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저 같으면 프랑스 출판사들에게 편지를 쓰고 하소연을 해서라도
이런 사태를 막아보겠는데 ...

포월 2006-07-0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장님이 선원도 하시고 이력이 화려한 분이예요. 빛더미에 올라앉아 있던 동문선을 인수해서 그 빚 다 갚았다던데. 세상에 대한 빚은 언제 다 갚을런지...

balmas 2006-07-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이력이 다양하더군요.
왜 그런 이력을 가지고 출판계에 뛰어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_-
 

 

 

축구가 지배하는 세계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월드컵 너머 연속기고](7) - 축구가 안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

 

완군(문화연대) ssamwan@jinbo.net

땀구멍이 열리는 순간의 따끔따끔한 감촉, 하나의 허벅지가 낯선 허벅지와 엉켜 창조적 공간을 열어가는 역동성, 한계를 뛰어넘는 생동적 몸짓의 정점에 축구가 있다. 축구는 혁명적 신체, 전복적 신체을 향해 한계를 모르고 달려간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축구를 열광하는가? 또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이 복잡하고 대책없는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축구, 그 자체에 답이 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아주 어린 시절 둔탁한 공의 궤적을 따라 걸음마를 배웠고, 쉬는 시간 10분동안 쏜살같이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공을 찼으며, 수능을 앞두고서는 텔레비전 앞에 납작 엎드려 숨죽이며 월드컵에 열광했었다. 축구는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 재미를 보장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축구는 “시장과 민족국가, 기술의 통합”되어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재미의 총체이다.

짧게나마 대학물을 먹고, 민가를 배우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그런데 난데없이 2002년이 도착했다. “지루한 일과, 피곤한 인간관계, 반복되는 사물과 상품, 늘상 해결되지 않는 돈과 욕구” 등등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었다. 그것은 궁핍과 부족함의 반복이었고, 억압과 비루함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해결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무엇. 그것은 바로 일상이었다. 사람들은 어렴풋하나마 완고한 일상이 모든 실험과 혁명을 삼켜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완강히 지속되는 일상, 그것은 실로 거대한 위대함이다. 또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한 일상성은 땅에 뿌리를 박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2002년의 난데없음을 둘러싼 체계를 따지려고 했으나 하나 같이 실패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맛보는 일탈을 정치적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경멸했으며, 일탈의 체계를 분석하려드는 지식 권력을 단호히 거부했다. 또 다른 이들은 난데없음의 우연성을 필연화 하려는 시도들을 했다. 광장과 축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열정과 욕망에 관한 찬사가 난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붉은 티를 입고 거리를 점령하고 소리를 지르고 술을 마셨다. 때마침 메인무대에 올라있는, ‘태극전사’라고 명명된 ‘영웅’들까지 승승장구했다. 세상이 모든 질서와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 비껴선 듯 했다. 그 모든 것을 축구가 만들었다고 선전되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축제이든 모험이든 혁명이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일상성의 완고한 지속성과 거대한 위대함이 2002년에만 살짝 사라졌을 리 만무했다. 붉은 기운에 도취되어, 아스팔트의 해방감에 망각되었을 뿐이었다. 2002년의 기쁨과 쾌락은 또 다른 일상의 확인이었다. 사람들은 조금 늦게서야 ‘국가’와 ‘민족’에서 ‘자본’과 ‘소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지배구조가 본격적으로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이해했다.

사람들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세계화’의 실체를 확인했다. 무역 장벽이 무너지고 기술 발전으로 세계가 동네가 되고 있다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상호의존적 세계 혹은 제국 의존적 세계 질서에 사람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IMF는 극복됐고, WTO체제는 진화하며, FTA는 순항중이다. 브라질의 호나우두, 프랑스의 지단, 잉글랜드의 베컴을 인식하고 그들이 자본의 지휘아래 ‘레알마드리드’에서 함께 뛰는 것보다 더 극적으로 ‘세계화’를 설명할 수 있는 이미지는 없다. 여기에 기술의 발전까지 더해졌다. 실로 눈 시린 광경이다.

그렇게 2002년은 그리고 축구는 하나의 지향이 되었다. 우리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으며 또한 세계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심장한 약속이 이뤄졌다. 우리는 그 전환적 순간을 축제로 만들었고 대체로 흥겨웠다고 기억하고 있다. 신화는 현실이 되었고, 꿈은 이뤄진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과연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축구는 확실히 신체 감수성의 확장, 몸으로 느끼는 재미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중동에서 축구가 억압적 가부장 질서를 깨고 나가는 서구식 자유를 상징하듯, 유럽에서 축구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져가는 지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듯, 미국에서 축구가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프로그램을 상징하듯이, 한국에서 축구는 초국적자본의 지배 속에서 대한민국은 부강할 것이며, 한민족의 번영과 소비의 만개를 경험하는 개인의 등장을 상징한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모두가 동시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술이다.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착취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환상이다. 달콤하되 불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현대사회의 일상성과 소비사회의 도래라는 복잡한 인과관계와 다층적 욕망을 ‘국가의 계급적 본질, 즉 그것이 독점자본의 지배도구라는 사실’이라는 쾌쾌한 한 문장으로 독해하려는 이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딱한 일이다. 철지난 유행가가 그럴싸한 훈계와 계몽으로 둔갑 되는 한 결코 축구가 지배하는 세계에 도전할 수 없으며, 돌파할 수도 없다.

2006년 월드컵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결코 축구의 문제가 아니다. 스포츠를 통한 정치적 우민을 양산하는 국가계급의 소박한 불량함을 훌쩍 넘어서는 도발적 질문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축구는 손가락일 뿐이다. 축구가 가리키는 달을 봐야한다. “문화적으로 억눌린 동시에, 욕망하는 한편, 자본에 의해 조작되는 대중”을 월드컵이 호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세계화’를 구매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축구일 뿐이라고 선전되고 있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개인으로 호명됐던 이들을 열혈 민족주의자로 변모시켰던 축구이다. 그 퇴행속에는 근대적 억압과 지배구조의 자가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축구가 지금 다시 조건 없는 경쟁, 예외 없는 개방, 시장 우위의 사회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국가주의 장치로서의 월드컵, 구식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게임으로서의 축구를 훌쩍 뛰어넘어 2006년 월드컵이 도착했다. 자본이 깔아놓은 전지구적 꽃비단 길을 따라 신자유주의가 만개를 기다리고 있다.

완군 님은 문화연대 활동가로 '완군의 토마토 던지기'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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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으)로 검색한 결과 총 202 건의 상품이 검색되었습니다."

헉, 꽤 많네 ... -_-;;

우선 갈레아노의 [축구, 빛과 그림자]

스테판 지만스키, [왜 세계는 축구에 열광하고 미국은 야구에 열광하나]

프랭클린 포어,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리처드 줄리아노티, [축구의 사회학]

등이 읽을 만할 것 같은데,

줄리아노티의 책은 번역이 별로 시원치않은 듯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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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6-1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쟈게 많군요. 저 책들의 출판일자를 확인하고픈 욕구가...
요즘은 뭐든 '축구'만 들어가면 다 팔린다고 한던데
 

Le Monde diplomatique - English edition

 

Planetary goals

 

By Ignacio Ramonet

The planet will be submerged under a month-long tidal wave of football from June, culminating in the World Cup Final in Germany. Football as the most universal sport easily provides the best television viewing: billions of viewers will watch their choice of the 64 qualifying matches between 32 national teams.

The contest will reach its climax at the final on Sunday 9 July, at the Olympic Stadium in Berlin (built by Hitler for the 1936 Olympic Games). More than two billion people in 213 countries, a third of Earth’s entire population, will see it on television; nothing else will matter. The event will provide excellent cover for anything else that may be happening. Very convenient for some. In France, President Jacques Chirac and Prime Minister Dominique de Villepin are probably counting on this temporary obsession to distract public attention from the Clearstream affair that has brought into the open the animosity between Villepin and presidential rival Nicolas Sarkozy, and give them a breathing space.

A plague for some and an overwhelming passion for others, football is the number one international sport. Well, more than a sport, otherwise it would not arouse such a storm of conflicting feelings. The social commentator Norbert Elias called it “a social fact”. It could also be seen as a metaphor for the human condition, for it illustrates, according to anthropologist Christian Bromberger, the uncertain status of the individual and the group, the hazards of chance and destiny. It prompts reflection on the role of the individual and of the team, and debate about faking, cheating, arbitrary decisions and injustice.

In football, as in life, there are more losers than winners. That is why it has always been the sport of the poor who,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see it as a mirror of their own fate. They know that supporting their club means accepting bad times. The important thing if the team loses is to remain united and stick together. Sharing this passion, they know that, in the words of the Rogers and Hammerstein song so often sung by Liverpool supporters, “You’ll never walk alone”.

Football is a political sport. It raises crucial questions of allegiance, identity, class and even, in its sacrificial and mystical aspects, religion. That is why stadiums lend themselves so readily to displays of national or local pride, individual or group excesses, and violent clashes between fans.

For all these reasons, and for other, possibly better ones, people love football. And demagogues and admen love people. Football is not just a sport, it’s a show with a vast audience and stars worth a weekly fortune. The buying and selling of footballers is a perfect image for the state of the global market: the treasures of the South are consumed in the North, because only the North has the money to buy them. This market, full of traps for the unwary, generates a modern slave trade.

The sums of money are mind-boggling. Should France qualify for the final, the cost of a 30-second television commercial during that final would be €250,000, which is equivalent to 15 years’ pay for someone on the French minimum wage. The governing body, Fifa, will receive some €1.172bn for the television rights and sponsorship of the World Cup in Germany. Total advertising investment in the competition is expected to be more than €3bn.

Such oceans of money drive people mad. Football is a focus for shady dealers who control the transfer market and betting shops. Some teams have no compunction about cheating to win; consider the scandal in Italy, where Juventus of Turin is accused of bribing referees and faces relegation.

That is how it is with the beautiful game, caught between the glory and the mud. When the shit hits the fan, everyone gets splashed.

 
 
 
 

인상적인 구절 몇 가지.

"More than two billion people in 213 countries, a third of Earth’s entire population, will see it on television; nothing else will matter. The event will provide excellent cover for anything else that may be happening.

213개국에서 지구 전체 인구의 1/3 가량 되는 20억 이상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일은 제쳐둔 채 텔레비전으로 월드컵 게임을 지켜볼 것이다. 월드컵 게임

은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다른 일들을 훌륭하게 가려줄 것이다."

 

"In football, as in life, there are more losers than winners. That is why it has always been the sport of the poor who,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see it as a mirror of their own fate.

인생과 마찬가지로 축구에서는 승자들보다 패자들이 더 많다. 바로 그 때문에

 축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축구를 자신의 운명의 거울로 간주하는

가난한 이들의 스포츠로 존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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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6-19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가요

balmas 2006-06-1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셈. ^-^

balmas 2006-06-22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예, 지난 번에 어디선가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
 

 

 

산책님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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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라이프니츠는 물리학자가 가설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해 현존하는 데이터에 접근하듯이

철학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굉장한 관심을 가졌던 "사실들"은 힘과 물체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을 가진 세계의 현존에 대한 현상이었으며, 그의 "가설들"은 일반적인 세계관과

관련된다. 이러한 가설들은 체계적인 연관 속에서 제시되지 않고, 그것들이 마치 형이상학적 소설의

일부분인 듯 내러티브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결국 우주에서 발견되는 본질적인 연관들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기준으로 그 가설들을 판단해야 한다.


--------------------------------------------------------------------

오늘은 라이프니츠 관련 페이지를 읽었는데^^ 역시 모르겠는 부분이 있어서 여쭤볼게요.

각각의 문장들도 겨우겨우 짐작하며 읽었는데, 더 어려운 건 각 문장들의 연결이네요 ㅠㅠ

물리학자가 가설을 가지고 데이터에 접근하듯이 철학에 접근했다. "그러나"는 다음 말이 반대라는

말일 텐데... '"사실들"은 ~ 현상'이라는 게 아마 데이터와 "사실들"이 다른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보죠? 그럼 "가설들"은 일반적인 세계관과 관련된다는 말도 라이프니츠의 "가설들"이

물리학자의 가설과 같을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 건가요?

 

답변

그렇죠. 필자의 뜻은, 라이프니츠가 겉보기에는 물리학자가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에 접근하듯이

철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만, 그가 다루는 데이터 또는 소재는 "힘과 물체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을

가진 세계의 현존에 대한 현상"이고 그의 가설은 "일반적인 세계관", 곧 형이상학이라는 것이죠.

"힘과 물체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을 가진 세계의 현존에 대한 현상"이라는 말은, 사실 무슨 뜻인지

잘 납득이 가지 않네요. 원문을 보거나 번역문의 맥락을 좀더 살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림짐작으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들의 세계, 시공간 상에 실존하는 세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라이프니츠가 이러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가설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세계의 현존에 대한 현상이었으며"는 "세계의 현존의 현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군요.

 

"이러한~ 제시된다"는 라이프니츠의 "가설들"이 물리학자의 가설들처럼 체계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인지 다른 의미가 있는지요?

 

답변

"체계적인 연관 속에서 제시되지 않는다"는 말 역시 산책님의 인용구만으로는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대략적인 의미는 라이프니츠가 엄밀한 논증을 통해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하듯이 자신의 형이상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판단해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은 무슨 맥락인가요? '그렇지만'은 앞의 어떤 말과 구분하기

 위해 쓰인 건지? 라이프니츠의 가설들이 물리학에서처럼 체계적이지 않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

우주에서 발견되는 본질적인 연관들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라는 뜻인가요?

 

답변

이 문장의 뜻은, 라이프니츠의 서술 방식이 논증적이지 않고 서사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학문적인 가치가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되며, 우주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서 나름대로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고 있는지, 따라서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 도움을 주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 삼아 말하면, 위의 인용문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일단 책을 읽어보든가

원문을 보든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왜 이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하네요. 근대 철학사에 대한 개론서도 아니고

헤겔 자신의 저작도 아니고, 굳이 헤겔의 근대 철학사 강의에 대한 해설서를 통해서

근대 철학을 읽을 필요가 있을지 좀 의문이 들어서요. :-)

번역자들이야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번역했겠지만, 글쎄요,

저 같으면 근대 철학사를 읽어보려는 사람에게 이런 류의 책을 추천하지는 않을 텐데 ...

서양 근대 철학에 대한 개론서라면 차라리 [서양근대철학](창작과비평사) 같은 책이 낫죠.

조금 어려울지는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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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9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6-1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힘드시면 보지 마셈~
속삭이신 님 이야기를 들으니까 쉬우면서도 좋은 철학사책을 하나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
(그런데 언제??)

2006-06-20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6-2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세요. ㅋ
그런데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까지는 한번에 읽기는
너무 두꺼울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