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와노동
2006.05.26 |312호

최저임금투쟁,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 저임금-불안정노동 철폐투쟁으로
2006년 최저임금투쟁 어떻게 할 것인가?


관성화 되고 있는 최저임금투쟁의 질적 변화를 위해, 올해 최저임금투쟁이 구체적으로 목적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몇 가지 정리해보자. 첫째, 최저임금투쟁은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이 노동자 내부의 분절화와 '바닥을 향한 경쟁'을 극복하고, 최저임금을 매개로 연대를 활성화하여 노동자운동의 주체로 성장하는 주요한 경로와 계기가 되어야 한다. 둘째, 최저임금투쟁은 최저임금의 문제를 직접적인 적용 대상인 저임금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의 문제임을 부각시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연대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업장 내부로만 집중되었던 노동자운동의 역량을 의식적으로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셋째, 최저임금투쟁은 투쟁의 요구를 임금인상폭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의 중단과 민중생존권의 사회적-국가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투쟁으로 전선을 끊임없이 확대해야 한다. 특히 앞에서 살펴본 저임금을 확대재생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노동자의 비정규직화와 여성노동의 불안정? ??의제로 만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최저임금투쟁의 핵심대오 역할을 해온 여성연맹 소속 도시철도 청소용역노동자들이 최근 도시철도공사의 구조조정 계획에 맞서 ‘전원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연일 투쟁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번 투쟁은 도시철도공사가 청소용역업체들의 3년 계약기간이 만료됨을 악용해 경비 절감을 목적으로 인력 감축과 파트타임 전환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고, 노동자의 저임금을 구조화하는 다중적 착취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이 투쟁은 최저임금투쟁이 투쟁의제를 다양화하고 전선을 확장하는 데 유의미한 정세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올해 최저임금투쟁은 그동안 최저임금제도와 최저임금위원회 협상구조에 의존해왔던 기존의 관성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간접고용의 저임금 구조, 여성 직종/직무 분리의 문제 등에 대해 적극 폭로하면서 이 투쟁에 적극 연대할 필요가 있다.


5/27(토)~28(일) 평택 농활 및 솔부엉이 도서관 개관식

평택 평화 농활

이번 농활에서는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을 재건하는 활동을 합니다.

*일시 : 5월 27일(토)~28일(일)
*장소 :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 일대

대추리 솔부엉이 도서관 재개관식

*일시 : 5월 28일(일) 늦은 3시
*장소 : 평택 대추리 평화마을 솔부엉이 도서관 앞마당

[자세히]




공무원노조탄압 백서

'공무원·교수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서 진상조사한 내용을 백서로 만든 것입니다.


사회진보연대
http://www.pssp.org | pssp@jinbo.net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02-778-4001~2 | FAX:02-778-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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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담아갑니다- ^^ 고맙습니다.

balmas 2006-05-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셈~ ^^
 

 

“다시 문혁이 필요한 시점”

문혁을 둘러싼 중국 지식인 논쟁2- ‘신좌파’ 쾅신넨 칭화대 교수 인터뷰…“종교개혁 같은 자발적 사상해방운동 없었다면 소련처럼 해체됐을 수도”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쾅신녠 칭화대 중문과 교수는 이른바 ‘신좌파’로 불린다. 1963년 후난성에서 태어난 그는 우한대학교 중문과를 거쳐 베이징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학자로, 지난 1999년부터 명문 칭화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쾅 교수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의 시작이었듯, 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종교개혁의 역할을 했다”며 “자발적인 사상해방 운동이라는 점에서 6·4 톈안먼 사태는 또 다른 문혁”이라고 말했다.

수단은 나빴지만 목적은 좋았다

문혁의 원인은 뭔가.

=마오쩌둥은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면서 몇 가지 문제를 간파했다. 소련은 흐루시쵸프 시대에 수정주의로 돌아섰고, 마오는 중국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걱정했다. 국내적 요인으로는 마오와 류샤오치 사이에 발생한 의견 대립을 들 수 있다. 당시 류샤오치는 신민주주의 질서를 공고화하고 싶어했으나, 마오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 (사진/박현숙 기자)

두 사람 사이의 의견 대립은 소련의 변화와 함께 마오에게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문혁은 ‘중국의 종교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의 시작이었고 현재 유럽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시초가 됐던 것처럼, 문혁도 중국에서는 그런 종교개혁의 역할을 했다. 당시 유럽의 종교개혁은 종교전쟁을 불러왔는데, 문혁도 중국 내부의 전면적인 내전을 초래했다.

마오가 문혁을 통해 목적을 이뤘다고 보나.

=문혁의 효과는 목적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하지만 마오는 부분적인 목표를 이뤘다. 바로 사상해방이다. 비록 문혁 이후 시장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개방 사상, 즉 우파적인 사상해방을 가져왔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사상해방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1989년 6·4 톈안먼 사태도 실은 또 다른 문혁이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사상해방 운동이었으며, 운동의 방식 역시 자발적이고 대중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마오가 문혁을 일으킨 목적을 권력투쟁으로 보기도 한다.

=권력만을 위해 문혁을 일으켰다면 군중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군중은 그것이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기 때문에 참여했다. 지난해 류샤오치의 아들 류위안은 <류샤오치의 신중국>이라는 책 서문에서 마오와 자신의 부친이 꿈꾸던 이상은 현재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인민들이 다시 피억업자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 문혁을 평가하는 부분에서, 당시 마오의 수단은 나빴지만 본래 목적은 좋은 것이었다고 했는데 나 역시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 마오의 실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인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는 폭력이나 조반(造反) 등의 방법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문혁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대부분 문혁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이라고 말한다.

=문혁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계층과 입장에 따라 충돌하고 있다. 주요 피해자였던 관료와 지식인들은 당연히 문혁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일 것이다. 그들이 문혁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상처만을 기억할 뿐 다른 계급의 상처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관료와 지식인들은 문혁의 주요 피해자이기는 해도 그들의 임금은 기본적으로 보장받았다. 문혁 이후 그들은 샤강(下崗·준실업상태)이나 실업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혁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수천만 명이 샤강을 당했고, 매년 평균 20만 명의 사람들이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자살을 하고 있다. 그들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문혁은 사회주의 환상을 파괴

문혁은 중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많은 사람들의 환상을 파괴했다. 특히 노간부와 지식청년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파괴했다. 하지만 마오의 원래 생각은 그들을 단련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대장정과 같은 과정이다.


△ ‘마오는 나의 힘!’ 문혁 당시 농촌으로 하방된 이들이 단체로 마오어록을 읽고 있다. 문혁은 많은 사람들의 사회주에 대한 ‘환상’을 파괴했다.(사진/연합)

대장정 초기에는 30만 명이었지만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불과 3만 명이었다. 문혁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과 신념을 상실한 그들은 다시는 공산주의를 믿지 않았다. 문혁 이전에 그들은 그래도 정의를 믿었고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문혁은 이런 믿음을 붕괴시켰다. 사실 문혁이 이 노간부들에게 가한 충격은 분명히 잘못되고 불공평한 것이기는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문혁의 수단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이상과 신념을 상실한 결과는 바로 관료 부패로 나타났다. 관료 부패의 시작은 개혁·개방 이후라기보다는 문혁이 끝난 직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문혁은 중국 민족의 비극인 셈이다.

문혁이 중국 사회 발전을 20~30년 후퇴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 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일정 기간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화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문혁 당시 교육·의료 등 많은 부분에서 자신들만의 체제를 만들었다. 문혁이 없었다면 중국은 소련처럼 해체됐을지도 모른다. 문혁은 비록 우파적인 것이긴 하지만 개혁·개방이라는 사상해방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시장이 생겨났다. 소련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보나.

=노동자, 농민이 권리를 끊임없이 박탈당하고 있다. 농민들은 개혁·개방 초기에는 많은 혜택을 받아서 덩샤오핑에게 감사를 했지만, 나중에는 반대로 농민들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이어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권력계층은 각종 수단을 통해 부패를 저질렀다. 개혁·개방 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들 권력계급 문제다. 중국의 권력계급은 자산계급 및 상층 지식계층과 결탁돼 있으며, 이들은 거대한 이익집단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언론매체, 관료, 지식인들이 함께 결탁돼 있는 구조로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관학상(官學商)이 결합돼 있는 셈이다. 극소수 사람들의 손에 부가 집중됐다. 이것을 빗대서 어떤 사람들은 ‘겁빈집부’(劫貧集富·가난한 사람들을 갈취해 부를 축적함) 사회라고도 말한다. 나는 지금 중국은 가장 원시적 자본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했던 영국의 18세기 원시 자본주의 사회와 비슷하다.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생활이 아주 비참했던 것처럼 중국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개혁·개방의 방향을 점검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개혁·개방 이후 각 계층 간 이익 충돌이 심각하기 때문에 이런 논쟁은 불가피하다. 개혁논쟁이 격화하면서 <인민일보> 전 논설위원 황푸핑 같은 개혁파 주류들은 개혁은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개혁의 함의는 도대체 뭐냐? 그들은 개혁을 신화화·권위화하면서 개혁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실 개혁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견해는 달라야 한다. 예를 들면,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개혁에 대한 소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현재 개혁은 지식계층과 권력계층에 의해 도둑맞았다. 이들이 고려하는 개혁의 방향은 권력계층의 이익이다. 이러한 개혁은 불공평하다. 그동안 중국은 개혁 과정에서 자유와 민주, 공평과 효율을 대립된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대립된 것이 아니라 상통한다고 본다. 공평한 정치일수록 더 공평한 경제적 효율을 낳고, 한 사회가 공평할수록 사회적 창조력과 생산력도 그만큼 높아진다. 북유럽의 스웨덴과 핀란드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문혁 같은 대비판 필요

문혁은 극복해야 할 문제인가, 계승돼야 할 정신적 유산인가.

=문혁은 마오가 현대사회를 대상으로 행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문혁을 통해 나타난 마오사상은 유럽의 60년대 학생운동과 미국, 일본 등에도 영향을 끼친 세계적인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모든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문혁은 극복되거나 회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문혁이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매일매일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마오가 문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좋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문혁 당시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대비판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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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7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퍼가요^^

balmas 2006-05-2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예 ...

에로이카 2006-05-27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앞의 시각과는 반대군요. 그리고 좋은 표현을 배웠습니다. ‘겁빈집부’(劫貧集富)!

balmas 2006-05-27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젊은 지식인이네요. *^^*

저는 특히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문혁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계층과 입장에 따라 충돌하고 있다. 주요 피해자였던

관료와 지식인들은 당연히 문혁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일 것이다. 그들이 문혁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상처만을 기억할 뿐 다른 계급의 상처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관료와 지식인들은 문혁의 주요 피해자이기는

해도 그들의 임금은 기본적으로 보장받았다. 문혁 이후 그들은 샤강(下崗·준실업상태)이나

실업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혁 이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수천만 명이

샤강을 당했고, 매년 평균 20만 명의 사람들이 도저히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자살을

하고 있다. 그들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


에로이카 2006-05-27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은 알 수 없는 다른 계급의 상처... 그런 것들이 individuality로 소급할 수 없는 singularity 아닐런지요... (잘 모르면서.. 아는척.. ^^)

balmas 2006-05-2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에로이카님,
아주 그럴 듯한 해석이네요. 철학 전공하셔도 될 듯 ... ^^;
 

 

“당시 중국은 완전히 미쳤다”

문혁을 둘러싼 중국 지식인 논쟁1- 쉬유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인터뷰…“끝내 공개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면 일본 역사왜곡 비판할 자격 없어”

▣ 베이징=박현숙 전문위원 strugil15@hanmail.net

쉬유위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은 “중국 정부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1947년 쓰촨성 청두에서 태어난 쉬 연구원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6년 문혁의 발발과 함께 조반파(造反派)로 문혁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3년여에 걸쳐 농촌 하방생활을 했으며, 1979년까지 6년여 동안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생 과정을 졸업한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방문학자를 거친 뒤 현직에서 일하고 있다.

류사오치를 타도하려면 군중운동이 필요했다

문혁 당시 홍위병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홍위병으로 활동했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조반파’라고 해야 정확하다. 문혁이 시작됐을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출신 성분이 나쁜 흑오류(黑五類·지주·부자·반혁명 분자·범죄자·우파 분자)였기 때문에, 문혁 초기에는 홍위병이 될 자격이 없었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이런 노선을 바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조반파 활동은 자원해서 참여한 것인가.


=당시 모든 학생들이 문혁에 참가하기를 원했지만 나에게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나쁜 출신 성분으로 분류돼 오랫동안 혁명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마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했다. 때문에 문혁에 참가해 마오에 대한 애정과 충성 그리고 그 누구보다 혁명을 원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오의 말처럼 ‘인민들 속에서’ 사상이 단련된다는 느낌이 들었나. =농촌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노동이 너무 고되고 힘들 뿐 아니라 때로는 먹을 식량조차 없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문혁 전에 우리가 받았던 교육은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며, 중국의 사회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도라는 것이었다. 하방생활은 나에게 그동안 받았던 교육과는 완전히 상반된 현실에 대한 충격이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사건은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망을 가려고 하다가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린뱌오는 마오 주석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이자, 마오사상의 붉은 깃발을 가장 높이 치켜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반당활동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마오에 의해 죽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하방생활을 하면서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지하에서 ‘미국의 소리’라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것을 알았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들은 원시사회의 노동과 똑같았는데, 미국의 우주선은 이미 달에 도착해 있었다. 당시 받은 사상적 충격은 엄청났다. 문혁은 왜 일어나게 됐다고 보나.

=지금으로선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과 서양 학자들 중에는 문혁을 마오가 추구한 이상적인 사회 실현과 중국을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일으켰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관점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마오가 문혁을 일으킨 가장 주요한 원인은 권력투쟁이다. 사실상 마오가 타도하려는 사람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류사오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류사오치 뒤에는 그를 지지하는 수천수만 명의 공산당 간부가 있었다. 마오는 그들까지도 타도하고 싶어했다. 마오가 문혁을 발발한 이유는 전통적인 당내 투쟁 방식으로는 그 목적을 실현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군중운동, 천하대란(天下大亂)의 국면을 만들어야만 했다.

마오를 그리워한다? 신좌파의 착각! 문혁 시기에는 아래로부터의 비판과 언론출판의 자유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민주적’이지 않았나? =마오는 군중에게 발언권을 주었고 대자보를 붙이게 하여 관료들을 비판할 수 있게 했다. 조직을 만들어도 되고, 신문을 출판해도 되며, 어떤 말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오가 사람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대민주’는 류사오치를 타도하기 위해 준 것이었다. 당시 중앙정부 공안부가 내놓은 ‘공안 6조’라는 문건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정확하게 명시돼 있다.


△ ‘30 대 70?’ 쉬여우위 연구원은 마오가 권력투쟁을 위해 천하대란의 국면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문혁은 ‘광기의 시대’다.

“마오쩌둥과 린뱌오를 공격하거나 혹은 중앙영도소조, 즉 장칭을 공격하는 자는 반혁명 분자이며 신속히 체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유의 ‘대민주’는 가짜다.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마오 시절의 평등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지금의 중국인들이 마오를 그리워하고 심지어는 문혁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심리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인민들은 현재 벌어지는 권력의 타락에 염증을 느끼면서 현실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들은 지금 마오가 살아 있어서 다시 한 번 문혁을 일으킨다면 기꺼이 참여해서 이 타락한 현실을 뒤엎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원인은 마오에 대한 상업화다. 1990년대 이후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상인들은 일반 서민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교묘히 이용해 마오를 상업화했다. 마오는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상징마크가 되었다. 신좌파들은 이러한 현실을 잘 모르고 중국인들이 정말로 다시 마오를 그리워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절 중국 정부는 마오에 대해 30% 정도의 잘못은 있지만 70%는 여전히 공이 크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 논법은 마오가 스탈린을 평가할 때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소련의 흐루시쵸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스탈린은 악인이고 폭군이라고 비판했다. 마오도 마음속으로는 스탈린을 엄청나게 증오하고 싫어했지만,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탈린이 공산주의의 상징임을 알았다. 때문에 마오는 스탈린을 평가할 때 “단지 30%만 나빴다”고 말했다. 나중에 중국 공산당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마오식 해석 방법을 이용했다. 심지어 덩샤오핑도 나중에 자신을 평가할 때 이 논법을 사용한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 마오는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인 면보다 훨씬 많다고 평가한다. 문혁 40주년을 맞은 올해도 여전히 중국 정부는 문혁에 대한 논쟁을 금기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문혁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문혁에 대해 공개적인 토론과 평가를 꺼려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문혁을 파고들면 중국 정치제도의 여러 문제점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 “도대체 누구의 죄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렇게 묻는 과정에서 결국 그 추궁이 마오에게까지 갈 수밖에 없다. 현재 당국은 (이러한 추궁에서) 마오를 보호하고 싶어한다. 이렇게 거대한 비극이 중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치 제도상의 문제 때문이다. (현 정부가) 공개적으로 문혁을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 현재의 정치제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도덕의 타락도 문혁에서 연유문혁이 결과적으로 중국인들에게 남긴 상처는 뭔가.

=첫 번째 상처는 도덕의 상실이다. 중국인들은 예전만 해도 순수했고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는 문혁을 통해 이 사람들을 기만했다. 중국인들은 이상과 순수함, 진실, 신뢰감 등을 잃어버렸다. 문혁은 모든 아들과 딸들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판하게 했으며, 학생들은 자신의 선생님을 비판하고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인성을 잃어버렸다. 서로를 불신하게 됐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도덕의 타락은 사실 문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의 문혁 세대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신앙도 이상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신뢰를 잃었으며 매일 서로 투쟁하고 싸우는 것에 습관이 들어버렸다. 한마디로 문혁은 ‘광기의 시대, 어리석음의 시대’였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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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겠다. 계속 퍼다주세요. 퍼갑니다~^^

balmas 2006-05-27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겠죠?
요번 [한겨레 21]은 특집이 풍성하네요. :-)
이런 건 한 권 사줘야지~

waits 2006-05-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가만히 앉아있어도 님들이 다 퍼다주셔서...^^;;
그리구 지금 보니 카테고리 몇 개가 늘어났네요.
제가 준비하는 논문;; 주제가 '이주노동자 인권' 관련된 건데... 앞으로 도움 많이 받을께요..^^

balmas 2006-05-2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보기 쉽게 정리하기 쉽게 좀 바꿨답니다. :-)
오, 아주 중요한 주제네요. 기대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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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가 본 월드컵…2002년의 뜨거움 뒤엔 단속의 거센 폭풍우가… 함께 환호성을 질렀지만 어느샌가 나는 이 사회에 있어선 안 될 사람

▣ 미노드목탄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스톱크랙다운밴드 멤버


꿈이었을까?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2002년 월드컵. 하나가 되는 데는 어른과 아이, 여성과 남성,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었다. 붉은 티셔츠 한 장만 입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 아무런 편견도 차별도 없었다.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미등록(불법 체류)의 신분도 잊은 채 한국인들과 함께 환호하고 기뻐했다. 참으로 소름 끼치도록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더 이상 뜨거움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우리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뜨거움은커녕 차고 거센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매몰차게 변해버린 한국 사회를 향해 우리 이주노동자들은 멈칫멈칫 손을 뻗어보지만 한국은 응원의 손을 맞잡는 대신 그 손목에 뎅그렁 수갑을 채우고 강제 추방을 명했다.

중국동포 합법화 소식을 들으며

한국 사회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모른다. 나와 같은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특히 미등록 노동자의 존재를 말이다. 그러나 많은 이주노동자, 미등록 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의 생산을 책임지고 있지 않은가. 한국인들은 이주노동자가 만든 물건을 쓰고, 이주노동자가 지은 아파트에 살고, 이주노동자가 만든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아니 애써 모른 척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주노동자의 노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왔던 우리 이주노동자들의 존재를 눈곱만큼이라도 인정한다면 차마 지금과 같은 매서운 단속과 강제 추방은 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어느 날 문득, 광화문 거리를 지나다가 나는 온몸을 쥐고 흔드는 외로움에 지독한 한기를 느꼈다. 그곳은 한국인들과 함께 즐거운 환호성을 질렀던 곳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샌지 모르게 한국인과 분리되었고, 이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그 거리에서 나는 당장 떠나야 할 사람이었고, 끌려가 강제 추방당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 되었다.

얼마 전 그동안 미등록으로 일해온 재외동포를 합법화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지난 월드컵 때 나와 함께 “대~한민국”을 외쳤던 중국인 김씨 아저씨와 영철씨였다. 한국인들은 그들을 중국동포라고 불렀다. 아, 그분들은 이제 떳떳하게 일하게 되었구나. 이제 두려움에 떨지 않고, 붙잡혀 강제 추방당하지도 않고 열심히 살 수 있겠구나. 축하해드려야겠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든 것은 야속함이었다. 그럼 나는? 그분들보다 더 오래 한국에서 일했고, 그분들 못지않게 열심히 일해온 나는 어찌되는 것인가? 단지 혈통이 다르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문화가 다르다고 이번에도 이렇게 합법화에서 배제되고 차별당하는구나. 대한민국은 정말 혈통을 벗어나 존중과 화합을 이야기할 수 없는 나라인가!

환호 속에 내가 설 곳은 없다

또다시 월드컵이 다가온다. 벌써부터 “대~한민국”이 울려퍼지고, 온 거리가 들썩인다. 그러나 나는 움츠린 어깨를 펼 수 없다. 이 힘찬 환호 속에 내가 설 곳은 없다. 대한민국에 속해 있으나 그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주노동자, 미등록 노동자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이번 월드컵엔 지난번처럼 철없이 뛰어나가 함께 환호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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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balmas 2006-05-27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예, 그러세요. :-)

비로그인 2006-05-2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도는 우리땅" 티를 입고 다니는 이주노동자를 보면 저는 그 옷이 마치 방탄복이나 보호색 같은 느낌이 들곤합니다. 우리는 "독도 우리 땅 아닌데요-" 그러면서 농담해요.^^;

balmas 2006-05-28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또 그런 재미있고도 씁쓸한 일이 있군요 ... ^^;
 

경향신문

 

[‘외국인法’ 제정] 단일민족 ‘덫’에 뒤늦은 제도정비

 

입력: 2006년 05월 26일 18:03:13

: 2 : 1
 
외국인정책의 공론화는 우리 사회가 숙제로 미뤄왔던 외국인 인권에 대한 본격적 문제제기다. 몇년새 외국인 근로자의 폭발적 유입과 여성결혼이민자 증가 등으로 인한 임금체불, 모성보호 등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데 대한 정부 차원의 접근인 것이다. 자연히 외국인정책의 밑그림은 인권문제의 ‘글로벌 스탠더드’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배경과 과정=외국인 문제에 대한 종합적·제도적 정비는 한국이 이제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들어섰다는 현실적 고민이 출발점이다. 지난 4월말 현재 82만명(인구의 1.7%)의 외국인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6일 외국인정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아닌 사람에 대해 인권을 존중하고 이를 확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진보”라며 “개방화시대에 여러 문화와 교류하고 통합하는 것은 세계 문명사의 흐름이고 국가 발전전략에도 맞다”고 말했다. 실제 노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 왔다고 한다.

초점은 이들의 인권과 생활문제 등 법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가 범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되는 것은 처음이다. 그 결과물이 이날 제정키로 한 외국인정책기본법, 즉 ‘재한외국인의 법적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가칭)이다.

정부는 지난 1월부터 학계·시민단체·관계부처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열었다. 특히 각 부처로 나뉜 업무를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외국인정책위원회’도 발족시켰다. 실무적으로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하되 위원회는 각 부처간 조정역할을 맡게 된다.

◇주요 내용=외국인정책의 기본 대상은 크게 6가지다. ▲외국적 동포 ▲결혼이민자 및 외국인 여성과 자녀 ▲난민 ▲외국인 근로자 ▲불법체류 외국인 ▲한국 국민이다. 앞의 다섯가지 외국인들의 경우 인권과 권익 보호가 초점이고 마지막 ‘국민’의 경우 ‘다인종·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국민의식 변화가 정책의 주내용이다.

이 중 핵심은 외국인 근로자와 불법체류 외국인, 여성결혼이민자들이다. 한국이 이제 더이상 인력 수출국이 아닌 인력 수입국으로 들어서면서 필연적인 결과물로 체불 등 인권침해 및 불이익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이를 해소하자는 것이다.

불법체류 외국인의 출국준비 기간을 90일로 늘리고 각 출입국사무소에 ‘인권담당관’을 지정, 인권의식을 강화키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불안정한 신분을 악용해 임금을 주지 않거나 전세금을 떼이는 등의 피해가 빈발하면서 몽골 등 주요 인력 수출국들이 정부차원에서 해결을 요청해온 것이기도 하다.

여성결혼이민자나 외국인 여성의 경우 ‘모성보호’가 중심이다. 한국 국적이 없는 경우라도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 최저생계비, 의료서비스 제공 등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 결혼이 깨질 경우 여성단체 확인서만으로 입증서류를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외국동포 대책은 전체 재외동포의 80~90%에 이르는 중국동포와 구소련 동포가 핵심이다. 방문취업제를 도입, 이들은 5년 동안 고국을 자유롭게 입출국하면서 취업할 수 있고 최장 3년까지 국내에 체류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재외동포 체류자격 부여의 전단계로 향후 ‘한민족 네트워크’까지를 염두에 둔 포석이다.

마지막으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거나 교과서를 검토·분석해 지나친 단일민족주의나 인종차별적 요소를 수정키로 한 것은 국민의식 변화를 위한 것이다. 인종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는 ‘혼혈인’ 용어를 국민 공모를 통해 바꾸고 ‘외국인의 날’을 지정하는 것도 우리 안의 ‘관용(톨레랑스)’ 문화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김광호기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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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요..^^

balmas 2006-05-27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비로그인 2006-05-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것두요 ㅋㅋ

balmas 2006-05-28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