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은 실재하는가” … 텍스트의 역사성 인식을
해외동향_‘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번역 계기로 유태인 담론 새롭게 읽기

2006년 05월 22일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이메일 보내기

“유태인의 비밀을 그의 종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비밀을 실제 유태인에게서 찾자. 유대주의의 세속적 토대는 무엇인가. ‘실용적’ 욕구, 개인적 이해. 유태인의 세속적 숭배는 무엇인가. ‘거래’. 세속적 신은 무엇인가. ‘돈’. 옳거니! 거래와 돈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유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 해방이로구나.”

 
마르크스의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2부에 나오는 이 구절은 아직까지 반유태주의 혐의를 받는다. 로베르 미스라히는 심지어 ‘마르크스와 유태인 문제’(1972)에서 이 텍스트가 “인종 청소를 호소하는”, “19세기의 가장 반유태인주의적인 저서 중 하나”라고까지 말한다. 소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유태인문제고찰’(1946)이나, 알랭 바디우의 ‘정황 3권, “유태인”이라는 단어의 효력들’(2005) 역시 반유태주의 논란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사르트르의 책은 2차대전 직후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문제를 다루면서 쇼아(Shoah) 문제에 대해 함구했다는 이유로, 바디우의 책은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유태인들이 유대율법이나 전통을 통해 간직해온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다. 이런 논란 속에서 최근 장-프랑수와 프와리에의 번역과 다니엘 벤사이드의 주석으로 이뤄진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의 역간은 단순한 고전 재번역 이상의 현실적 개입의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 문제’를 다루는 위 세 저작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제목을 배신한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유태인 문제의 자리를 옮긴다. 가령, 마르크스는 브루노 바우어가 유태인의 정치적 해방과 종교 문제를 ‘철학적·신학적’ 행위로 환원하던 것을 권리담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세속적 정치문제, 나아가 인간해방의 문제로 전치시키고, 사르트르는 그것을 반유태주의 문제로 전치시키며, 바디우는 그것을 자기부정을 통한 ‘보편적 주체’의 문제로 전치시킨다. 다시 말해 유태인 문제에 유태인은 없다. 왜 그럴까. 이들은 공통되게 유태인은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맑스가 말하듯이, “유대주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 유지됐다”―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미리 가정된 유태인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아니라, 유태인을 생산하는 담론-실천 메커니즘을 추적하거나[유태인은 반유태인주의에 의해 생산됐다!], 그 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유태인도 아랍인도 더 이상 없다!]을 제시하는 데 있다.


요컨대, 유태인을 옹호하는 자들과 거리를 두고 철학적 개입을 하려는 자들 사이엔 “유태인이 (우리가 다뤄야할 문제의 대상으로서) 실재하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있는 것이다. 양 진영의 대화 불가능성 혹은 반유태주의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세 저작에서 자리 옮겨진 채 제기되는 고유한 질문들이다.


첫째, 사르트르는 “유태인은 다른 사람들이 유태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 즉 “유태인을 만든 것은 반유태인주의”라 본다. 따라서 유태인 문제의 진정한 쟁점은 반유태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다. 특히, 그는 반유태인주의를 통해 공무원, 임노동자, 소상인들이 (상상된) 유태인들에 반대하면서 그네들이 한 문화, 한 국가의 소유자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고 봤다. 이를 두고 사르트르는 “반유태인주의는 貧者의 스노비즘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이 나라는 이 나라 사람에게’라며 타자를 배척하고 자신이 그나마 나라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며 상상속에서 안도하는 인민들. 이들에 기생하는 극우파들. 여기서 “유태인”이란 이름은 반유태주의라는 인종주의 담론 속에서 만들어진, 자신과는 “다른”, 자신(의 일자리 및 생존)을 “위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유적 이름일 뿐이다. 


둘째, 바디우의 유태인 담론은 그의 이전 책,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1997)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책은 “바울이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이타성들(유태인, 그리스인, 여성, 남성, 노예, 자유인 등)로부터 출발해 어떻게 보편적 사유가 같음과 평등(더 이상 유태인도 희랍인도 없다)을 생산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정한 유태인은 스스로의 특수성(정체성을 부여하는 술어들)을 부정하지만, 이 과정에서 돌출하는 보편적 특이성을 갖게 되는 주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유태인 국가’를 자처한다면, 더 이상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반유태인주의적인 나라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 모색, 유럽통합 과정에서 기존의 국적을 그대로 유럽 차원으로 확장하는 배타적 주체화를 넘어서, ‘유럽인’이라는 기존의 술어를 버리는 과정 속에서 생산되는 도래할 ‘주체’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어떤가. 1816년 5월 4일 칙령 이후, 독일 유태인들이 공직에서 배제된 사건, 그리고 1840~42년간의 브루노 바우어의 텍스트에 대한 응답이라는 특정한 배경을 갖고 있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유태 민족’, ‘시오니즘’, ‘반유태주의’ 등이 문제되기 이전의 글임을 잊어선 안된다.


대부분의 비난들은 이처럼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것들이다. 더불어 벤사이드는 글 첫머리에 인용된 난감한 구절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제안한다. “유대주의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이라는 이름을 아직 받지 않은 체제를 부르기 위한 잠정적인 별명, 혹은 자본주의의 정신이 될 것에 대한 은유적이지만 다소 부정확하고 초보적인 명명이었다”는 것. 이제, 맨 처음에 인용된 구절에서 유대주의를 자본주의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거래와 돈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 해방”이라는 슬로건을 얻게 될 것이다.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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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5-23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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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노무현 정권의 비밀 - 손석춘

 

비밀은 전략의 고갱이다. 영국 속담이다. 기실 모든 권력은 자신의 속살을 숨긴다. 아무 것이 없을 때도 마치 뭔가 있는 듯이 어루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권이 목매는 풍경을 두고 곰비임비 추측이 이어진다. 어떤 비밀이 있을까. 보수는 물론, 수구세력 일각에서도 갸우뚱한다. 왜 그럴까. 양극화를 해소한다면서 양극화를 부채질할 협정에 저돌적인 노 정권의 깜냥을 저들조차 이해할 수 없어서다. 대한민국의 미국 예속으로 벅벅이 분단체제를 영구화할 협정을 아무런 여론수렴도 없이 강행하는 노 정권 앞에 군부독재 세력까지 입을 다물지 못해서다. 그래서다. 장안의 화제다. 언제나 정치인 노무현의 ‘깊은뜻’을 헤아리는 지지자들은 여러 가지 ‘비밀’로 풀이한다.

무엇보다 남북관계를 내세운다.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보장받았다는 ‘큰거래’설이 나돈다. 하지만 개성공단이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조지 부시 정권의 살천스런 눈초리가 풀리는 조짐은 없다. 현실은 거꾸로다. 자유무역 협상과 동시에 노 정권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까지 덥석 받아들임으로써, 동북아 정세가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진실은 미국의 ‘보장’을 받아 진전되는 남북관계는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또다른 비밀은 미국의 압력이다. 수출로 살아가는 한국 경제가 미국 압력을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다. 노 정권을 비판할라치면, 대뜸 현실을 모른다고 시쁘게 여긴다. 하지만 압력론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 손사래쳤다. “어떤 압력”도 없었다며 “우리가 주도적으로 여건을 조성하여 우리가 제안하여 성사된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결국 ‘큰거래’도 없고 압력도 없었다. 적어도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 대통령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우리 국민의 자존심이 많이 걸려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생각은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도 불거진다. 그가 “책임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며 제안한 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신감”이다. 결국 비밀이 있다면 하나다. 대통령이 거듭 밝혔듯이 자존심이다.

자신감과 자존심. 딴은 좋은 말이다. 카네기 따위의 성공처세술에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일찍이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경고했다. 어리석은 권력자들이 지니는 게 바로 자존심임을. 게다가 자신감이 무지를 밑절미로 할 때 폐해는 무장 커진다. 아니, 차라리 자신의 무지를 알면 전문가나 지식인에게 귀라도 기울인다. 가장 큰 문제는 어설프게 아는 일이다. 대통령이어서 더 그렇다. 최고의 의사결정권을 지닌 걸 마치 최상의 판단력을 갖췄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보라.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자’임을 사뭇 진지하게 자처하는 모습을. 썰렁한 희극이다.

임기 내내 자신의 실정을 언죽번죽 남 탓으로 돌려온 대통령의 언행에 비추어본다면, 최악의 ‘비밀’도 가설이 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될 때, 경제 실정을 모두 그 탓으로 돌리려는 정략은 아닐까. 임기를 마치며 진보세력의 무책임한 반대로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노라고 실패를 합리화하지 않을까.

노 대통령은 자유무역 협상을 강행하며 국민에게 자신감을 주문했다. 실소를 머금으며 명토박아 둔다. 이땅의 민중은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무책임한 자신감이 없을 뿐이다. 도박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남 탓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다. 국민의 자존심 걱정은 접기 바란다. 겸손하게 대통령 자신을 성찰할 때다.


-손석춘 칼럼-[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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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늦봄,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

[매일신문 2006-05-17 14:06]


15일 오후 5시 35분. 베트남 이주노동자 A(25)씨가 성서공단 내 한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숨졌다. 산업 연수생으로 대구에 들어와 공단 생산 현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정확하게 3년 40일이 지난 날이었다.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는 '과로사'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상담소가 입수한 그의 4월분 월급 명세서에 따르면 A씨는 4월 한 달간 단 이틀밖에 쉬지 못했다. 그는 주·야간 번갈아가며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을 일만 하다 이국 만리에서 쓰러진 것으로 상담소는 보고 있다.

지난 1월 25일에 베트남 이주노동자 B(26) 씨가 기숙사에서 잠을 자다 돌연사했다.

이주노동자 인권단체들은 "이주 노동자들이 법정 근로시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1일 8시간, 주 40시간은커녕 밤낮 없이 연장, 야간 근무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

근로복지공단 대구지역본부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의 대구·경북 산업재해 인정건수는 2003년 176건, 2004년 220건, 지난해 155건. 이 가운데 사망은 2003년 4건, 2004년 3건 지난해 3건. 올해는 성서공단 한 곳에서만 벌써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김경태 목사는 "인권단체들이 대신 산업재해를 신청해주지 않으면 업주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아예 산재사실을 모르는 이주노동자들이 허다하다."며 "실제로는 훨씬 많은 산재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대구지역사회선교협의회, 이주노동자인권문화센터, 이주여성인권상담소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근로기준법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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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저녁 6시부터 새벽 5시 정도까지 하는 야간 주방보조 알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단 3일을 하는데도 일주일 전체의 리듬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과 이길 수 없는 졸음... 과외 하면서 졸고...

지금 생각해도 그 아이와 부모한테는 참 미안하다..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주야 교대로 일하던 사람들도 야간에만 일하는 걸로 바꾸는 경우가 많아졌다.

며칠 전에 만난 N 씨는 새벽 3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한다고 했다..

이런 근무시간이라면... 대체 생활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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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일 전에 [연대 대학원 신문]에 실은 글 하나 올립니다.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한 가지 견해를 제시한 글입니다.

제 학위 논문을 '심하게'(?) 축약한 글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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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론의 철학자 스피노자



balmas



스피노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모든 철학은 항상 해석들 속에서만, 그 철학에 대한 수용과 저항, 비판과 전유의 역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어떻게 해석되고 전유되어 왔는가에 대한 검토 없이 어떤 철학을 읽고 평가한다면, 무의미한 되풀이나 공허한 자기주장에 그치기 십상이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을 읽고 해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배적인 수용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범신론의 애매성


스피노자 철학은 전통적으로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범신론”(pantheism)이라는 말은, 신이란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연 만물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왜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대의 유럽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녔는지, 왜 정치ㆍ신학 권력에 그토록 위협적인 느낌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피에르 벨(Pierre Bayle)에서 하인리히 야코비(Heinrich Jacobi)에 이르는 스피노자 비판가들이 범신론은 무신론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했으며, 반대로 디드로에서 포이어바흐, 플레하노프에 이르는 유물론 사상가들이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를 예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이 부인하고 있듯이(73번째 편지 참조), 이는 스피노자의 신 또는 실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로 읽으면 범신론은 하나의 신비주의를 뜻하게 된다. 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듯이, 󰡔윤리학󰡕에는 신에 관한 무수한 표현들이 나온다. 사실 󰡔윤리학󰡕은 「신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시작해서 신을 향한 사랑 및 특히 신의 지적 사랑을 “구원 또는 지복(至福) 또는 자유”의 길로 제시하는 5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신이 자연 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의,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범신론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애매성에 빠지는 것 또는 그러한 애매성과 유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방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량론적 해석의 난점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 역량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은 하나의 사상사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 해석은 스피노자를 애매성의 질곡에서 빼내어 근원적인 해방의 철학자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68년의 반역은 역량론적 해석의 동력이었으며, 들뢰즈, 마트롱 또는 네그리를 비롯한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르크스보다 더 탁월한 해방의 철학자로 부활했다. 

  역량론적 해석은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 놓는다. 스피노자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자연이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따라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생산하는 (󰡔윤리학󰡕 1부 정리 11, 정리 16) 내재적인 원인, 자기원인이다. 하지만 신이 이처럼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실재들, 개체들에게는 자유의 여지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해 역량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신 또는 실체의 절대적 역량이 양태들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실체와 유한한 실재들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와 양태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실체는 양태의 타동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1부 정리 18)이다. 곧 실체의 역량은 양태들의 자유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양태들 자신이 원인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코나투스 개념은 유한한 실재들이 스스로 어떤 결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3부 정리 7 및 정리 54 참조) 

  하지만 역량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 그 이론적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을까? 게루, 들뢰즈, 마트롱 또는 마슈레와 같은 대가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량론적 해석은 여전히 많은 모호함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도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지와 수동성에 빠져 있는가? 이러한 예속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이는 어떻게 개조될 수 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수동력과 능동력이라는 별개의 힘”을 가정한다. “우리의 수동력은 불완전성 또는 우리의 능동적 힘 자체의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다.”(Deleuze,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9, p. 204) 이 수동력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과 구별되는 외부 실재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원인이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다른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의 차원에서 우리는 수동적이며 이것이 우리의 예속의 뿌리를 이룬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불완전성, 유한성, 제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공통 통념(notio communis)의 이론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곧 여러 가지 마주침들 중에서 “좋은 마주침”,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을 선별하고 이를 통해 공통 통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는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존의 차원에서 인간들은 상상과 수동성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선별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 인간은 외부 실재들에 의해 변용되지 않고서는 실존할 수 없는데, 수동력이 유한성이나 제한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들뢰즈 또는 역량론적 해석가들이 추구하는 능동성은 외부 실재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남, 곧 해탈함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또는 원초적으로 주어진 능동적인 본질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목적론과 어떻게 다른가?

 

관계론으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이러한 해석들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을 관계론으로, 그것도 가장 일관되고 근원적인 관계론 철학 중 하나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역량론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열어놓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차원을 좀더 풍부하게 개척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다.

  이 제안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뜬금없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실체의 철학자이며, 따라서 관계론 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더 나아가 이는 매우 통속적으로 이해될 위험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관계론을,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세상에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관계론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무엇보다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과 목표를 좀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계론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의 대상은 개체화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의 목표는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조건을 이루는 예속적 관계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데 있다. 좀더 부연해보자.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실체는 자연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오히려 무한하게 많은 인과연관들의 체계와 다르지 않다. 실체가 지닌 절대적인 역량, 무한하게 많은 실재들을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역량은 자의적이거나 우연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밀하게 규정된 인과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인식과 실천적 지향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인식은 인과연관의 질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다른 내용을 갖지 않는다.(1부 정리 18, 정리 25, 정리 28, 2부 정리 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인과관계를 결정론적 관계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선형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는 실체와 다른 존재자, 따라서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양태들” 내지 “변용들”(affectiones)이라고 부른다. “양태”라는 명칭은 실체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주며, “변용들”이라는 명칭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변용으로서 존재하는 실재들은 명칭대로 늘 변화하며, 변화를 통해서만 존립한다. 우선 변용들은 다른 실재들에 의해 “변용됨”(affici)으로써 성립하고 실존한다. 외부 환경, 외부 실재들과 교섭하고 이를 통해 변용되지 않는 실재는 단 한 순간도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들뢰즈가 말하는 “수동력”이 아니다. 변용되기는 역량의 제한이나 우리의 불완전성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의 역량이 성립하고 축적되기 위한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용들로서 실재들은 또한 “변용함”(afficere)으로써 존립한다. 곧 변용되기를 통해 성립한 역량을 바탕으로 규정된 조건에서 규정된 방식으로 어떤 결과를 산출하면서 실재들은 실존한다.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상관적인 작용 또는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개체들로서의 실재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다(스피노자가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 스피노자의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 내지는 원초적인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변용의 인과연관을 통해서 전개되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존재론”은 개체들, 존재하는 실재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과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윤리학󰡕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스피노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존재론 그 자체, 또는 그 과학적 표현으로서 자연학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있지 않았다. 그의 철학함의 대상은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었으며, 그의 철학함의 목표는 대개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인간의 삶, 이 삶을 규정하는 예속적 관계들을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들로 개조하는 데 있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수동적이고 예속적인(스피노자에게 이 양자는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 스피노자에게 수동성은, 들뢰즈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외부의 실재들로부터 작용을 받는 것,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자연적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동성은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3부 정의 2 참조).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생산할 때, 이러한 활동이 우리 자신과 다른 것에 의해 전유되고 활용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고 예속적이다. 반대로 능동성은 외부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활동의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개인적인 역량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곧 역량이 양적인 개념이라면, 수동과 능동은 질적인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관계론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 또는 예속적인 삶의 조건을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를 부분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예속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관계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수동적으로 개체화되는 양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자의 윤리적 해방은 예속적인 관계를 개조하려는 집합적인 실천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역으로 정치적 변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은 스피노자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하나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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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2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저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철학자가 스피노자 입죠.헤헤헤. 정말 데까르트나 칸트같은 이 보다 훨씬 낯설고 어려운 철학자...

balmas 2006-05-2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스피노자가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소개나 연구가 덜 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

yoonta 2006-05-21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동성은 "부분적인 원인" 능동성은 "전체적인 원인"이라는 해석..발마스님의 독창적 해석이신가요? 님처럼 스피노자의 역량을 관계론속에서 파악한다면 그리고 위에서 님이 들뢰즈식 해석의 난점이라고 표현하신 부분..즉 들뢰즈식 스피노자해석이 역량에 의한 능동적 변용이 외부적 실제에 의한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좋은 대안이 될수있을 것같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통상적인 범신론철학으로 보는 것보다..일종의 신비주의철학으로 보는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당시의 신비주의자들과의 교감속에서 이루어진것이 분명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이부분에 대한 사료적 검토가 좀더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요..학계에서는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를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스피노자같은 비강단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자신처럼 비 강단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신비주의적 방식의)해석이 오늘날의 역량론에 의한 스피노자해석과 통하는 부분도 많다고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사상에 의하면 개체의 능동성은 인간과 만물이 바로 신이라고하는 신인동형설에 근거하고 있고..그러한 신과 인간의 상호연관관계속에서 사회나 자연전체를 사고하게 되면 님이 이야기하시는 관계론적 스피노자해석도 결국은 신비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간의 연관관계의 하나의 '변용'이라고 볼수있죠.....

여튼 좋은 글 잘봤습니다...발마스님..^^

p.s. 님의 글을 읽고보니 님이 쓰신 그 논문을 "심하게" 보고싶어지네요..혹시 볼수있는 방법없을까요?

싸이런스 2006-05-2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나 멋진 글입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적 개념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진리에 다가가는 힘을 찾는 방법들, 즉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념들이 갖는 긴장, 그 관계의 상호성, 역동성은 현재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듯...정치론에서 독립과 의존, 자유와 평등, 권리와 역량의 관계성에 대해 읽으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빼어남을 다시한번 느꼈어요. 특히 개체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신체와 정신의 통일성)이 국가에 대한 개념, 국가 자체를 하나의 개체로 보는 관점... 흥미로왔고요. 제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 스피노자 철학을 이론적 배경으로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단초들을 많이 얻었어요. 발마스님께 이점 감사드려요.아참... 언제 발마스님 학위 논문 읽어 봐야겠어요.

퍼그 2006-05-2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발마스님 논문 읽고 싶어했는데.ㅋ 출판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헤르베르트 2006-05-2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핫 왠지 예고 편처럼 중요한 순간에 딱 끝나는 느낌인데요?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론과 민주주의 대한 내용을 더 읽고 싶습니다(본론은 사서 보시라?).^^;

balmas 2006-05-22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스피노자 철학을 신비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신비주의라는 게 서양철학사에서도 상당히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측면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스피노자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글쎄요, 서울대 도서관에 PDF 파일이 공개되어 있기는 한데, 외부 사용자(곧 비서울대 이용자)들에게는 다운로드가 안되는 것 같더군요. 더구나 이 PDF 파일이 EZ PDF Reader 전용 파일이어서, Adobe Reader로는 읽을 수도 없구요 ... ;;;
싸이런스님/ ㅎㅎ 좀 도움이 됐습니까? 뭔가 단초들을 얻으셨다니 왠지 뿌듯하네요. ^^;;
pug님/ ㅎㅎ 언젠가는 출판해야 하는데, 올해가 될지 내년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빠진 부분들을 좀 보충해서 출판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분량이 너무 많아지고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서 고민중이랍니다. -_-;;
헤르베르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흐흐, 감질난다 이 말씀이신 것 같은데 ...
 

 

 

헌법재판소 기능, 쟁점별 전문가 진단
사회쟁점: 헌재와 한국사회

2006년 05월 20일   정종섭 서울대 外 이메일 보내기

쟁점 1: 헌법재판소로 인한 ‘정치의 과도한 사법화’가 문제다.


 “과도한 사법화란 없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 ©
“헌법재판의 본질은 입법작용도 아니고 재판작용도 아니고 행정작용도 아니라 정치형성적인 효과, 헌법 해석시 요구되는 정치적 관점 등을 고려할 때 입법작용과 정치작용을 사법작용의 성격과 공유하는 독자적인 제 4의 국가작용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의 판결은 정치성도 당연히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고려도 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판단에서도 ‘사법적 고려’ 외에도 대한민국에 득이 된다면 탄핵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탄핵을 불인정할 수 있는 것이 헌법재판소다.
다만, 이런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기능이기 때문에 그 구성에 있어서 ‘민주적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식, 이를테면 의회에서 재판관을 선출하는 독일 방식 등을 고려해 개선해야 한다.
‘과도한 사법화’라는 말은 없다. 주로 최장집 교수나 박명림 교수 등 정치학 교수들이 이런 비판을 하는데 이는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을 국회에서 해결하지 못했을 때, 이것이 헌재로 넘어왔을 경우 헌재는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해결 시에는 사법 적극주의를 발휘해야 한다.”

 “정치의 사법적 해결이 과잉됐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 ©
“법치주의의 확립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정치의 사법적 해결’은 필요하다. 여러 가지 정치적 분쟁들이 정치권에서 자율적으로 해결되지 못했을 때 이를 법의 잣대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에서 정치적이기만 한 분쟁은 없으며 모든 분쟁은 정치적 분쟁임과 동시에 법적 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사법부가 해결할 요인이 있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과정을 통한 해결이 너무 과잉되어 있는 데 있다.
대통령 탄핵 심판에 있어서 탄핵소추안 결의안 도출 과정상 하자를 이유로 충분히 본안판결을 하지 않고 각하시킬 수 있었음에도 헌재가 무리하게 본안판결로 들어가 기각결정을 내렸다. 이를 통해 정치의 사법과정을 통한 해결이 유행처럼 번지도록 하는 단초를 헌법재판소가 제공했다. 행정수도 이전에서도 첫 번째 판결에서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가 행정도시 건은 합헌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결을 통해 정치권이 정치적 분쟁이 터졌을 때,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려기 보다는 헌재로 가서 위헌 판결을 받아보겠다는 식으로 너도나도 헌재로 각종 사건들을 가져가게 만드는 현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제3기 헌법재판소 재판부가 정치적 분쟁의 해결에 맹목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사법 적극주의를 이런 식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사법 적극주의는 국민의 인권 보장, 특히 소수자와 약자 인권 보장과 관련한 판결에서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할 때 가장 바람직하며 정치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의 경우 정치권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쟁점 2: “헌법재판소는 최대한 국회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 존중해야"

▲김선택 고려대 교수 ©
국가의 기능체계는 권력분립원칙에 따라 형성되어 있다. 권력분립의 요체는 권력 분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남용의 경향이 있는 권력의 일탈을 억지하는 전체적인 균형과 상호통제이다. 입법기능이 오로지 국회에, 행정기능이 오로지 대통령과 정부에 배정되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권력분립적 국가조직의 요청에 부합하려면 입법기능 중 핵심적인 것은 국회에, 행정기능 중 핵심적인 것은 대통령과 정부에 순수한 사법기능은 사법부에 남아있어야 한다. 즉 권력분립에 있어서 ‘핵심영역의 보장’ 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국가기관이 다른 국가기관에 전속되어 있어야 할 핵심영역에 속하는 기관의 기능을 찬탈한다면 이는 권력분립에 입각한 국가기능 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위헌적 행위가 된다.
규범통제권한을 통해 입법권을 탄핵제도와 헌법소원 등을 통해 행정권과 사법권을 통제할 수 있어 전통적인 삼권 모두를 초월하는 권한 행사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헌법재판소의 경우 이러한 기능배정질서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유혹도 위험도 가장 큰데, 헌법재판소는 여기에 있어서 자기절제를 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헌법질서 하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헌법기관이 가지는 정치적 활동공간을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으며 정부의 입안과 국회 가결이 공조해 이루어진 정책결정의 산물인 행정수도 특별법에 대한 판단은 헌법재판소의 과제가 아니라는 인식 하에서 사법 자제를 택했어야 한다.

최고의 사법기관

▲김상겸 동국대 교수 ©
“헌법재판소란 대의제의 흠결을 보완하고, 국가 기관 간 분쟁을 합리적으로,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또한, 정부나 입법부가 자의적으로 잘못된 공권력을 행사할 때 이에 대한 국민의 인권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말하자면 다수결에 의한 입법부의 독주를 막고 정부의 과도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국민의 피해 보상을 해 줄 수 있는 기관이 헌법재판소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에게 입법부의 의사를 존중해 ‘신행정수도 특별법’과 같이 입법부의 다수에 의해 통과된 문제는 판결하지 말라는 것은 헌재를 없애라는 것과 같은 요구다. 다수의 판결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판결 내용에 법적, 논리적 설득력이 없어서 문제일 수는 있지만, 이를 이유로 그 기능까지 축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헌법재판소의 지위를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경우 헌법재판소가 사법부 최고 기관으로 명백하게 사법부에 기속돼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법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있어, 그 판결의 성격이 정치작용이냐, 사법작용이냐 논란이 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를 궁극적으로는 사법부 최고 기관으로 함으로써 지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2006 Kyosu.net
Updated: 2006-05-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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