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숨은아이 > ㅍ/비정규직 기간 제한만 고집하는 빈곤한 상상력

[펌]비정규직을 사용할 때는 엄격하게 사유를 제한해야.. | 좋은 글 퍼나르자
2006.02.27

"장관님, 의원님, 사유제한 하면 정말 대규모 실업 오나요?"
사유제한은 정부여당 주장대로 대량 실업을 부를 것인가
 
최근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은 “기간제 사용사유를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는 순간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있는 모든 기업에서 대량해고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뿐만 아니라 신임 이상수 노동부 장관 역시 최근 KTV와 인터뷰에서 “사유를 제한할 경우 상당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거나 사내하청, 용역전환 등의 방법으로 더 열악해질 것”이라고 밝히며, “대부분의 OECD국가에서도 기간제한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성봉 민주노동당 노동담당 정책연구원.
현재 기간제 노동자의 대부분이 100인이하 영세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게 그들이 제시한 유일한 근거이다. 정부 법안이 통과될 경우 어느 정도의 사회경제적 순익이 발생할지에 대해 단 한번도 근거를 밝히지 않았던 이들이, 오히려 민주노동당에게 “사유제한을 해도 중소기업이 지금의 고용을 유지하면서 존속할 수 있다는 입증을 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또한, 우원식 의원은 “현재 기업이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이유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즉 정규직의 60% 정도의 임금으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시급히 “차별금지, 시정절차, 기간제한(2년) 및 기간초과 시 무기계약 간주”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안, 대규모 주기적 해고 부른다

“사유제한은 불가능하며,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서 정부안을 시급히 통과시켜야 한다”는 우원식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사유제한 없이 기간제한만 하는 게 대규모 실업사태를 부를 수밖에 없다.

만약 열린우리당 안이 통과되면 2년이상 되는 기간제 노동자의 경우 무기계약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법이 통과되는 순간 2년이상 일한 사람(2005년 현재 기간제 노동자의 26.2%가 2년이상이고, 반복갱신까지 고려한다면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됨)은 즉시 해고돼 실업자가 될 것이고, 2년미만 일한 사람의 경우도 조만간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속년수를 살펴보면 2005년 8월 현재 평균 1.83년이다. 따라서 평균 0.17년만 지나면 대다수 어려운 영세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기간제 노동자들은 2년을 채우게 돼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원식 의원의 주장에 의하면 기간제 노동자들 대부분은 영세사업장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기업에서 차별시정까지 하면서 무기계약으로 전환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열린우리당에서 이를 부인하려면 ‘기간제한만 해도 중소기업이 지금의 고용을 유지하면서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미 현장에서는 정부 안(기간만 제한)이 통과될 것을 예상해 기간제 노동자를 해고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미 파견법 제정 이후 2년마다 반복된 주기적 해고를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대규모 실업사태 막기 위해 사유제한 필요

만약 정부와 열린우리당 주장처럼 “영세사업장은 조금의 부담만 가중되어도 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엄격한 사유제한이 필요하다. 사유제한이 없다면 상시적·고정적 업무라 할지라도 기간만 지나면 해고한 뒤 동일한 조건 또는 더 후퇴된 조건의 또다른 기간제 노동자를 채용할 것이 명확하다.

반면 사유제한을 하게 되면 기간제 사용의 사유가 있었던 노동자는 그대로 기간제로 사용할 것이고, 사용사유가 없는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즉, 기간제한만 할 경우 거의 대다수 노동자들이 주기적 해고를 당하게 되지만, 사유제한을 하게 되는 경우 적어도 상시적 업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는 해고를 면하게 된다.

물론 사유제한을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추가로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바로 중소기업에서 대규모 해고를 하게 될까? 적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람들은 그 기업의 상시적·고정적 업무를 담당해 왔다. 아무리 힘들다고 기업의 핵심 업무를 담당해 온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해고할까? 현재 중소기업의 경우 인력이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상황이다. 만약 하루아침에 대규모 해고를 한다면 그 기업은 곧 망하게 될 것이다.

2006년 1월 기준 실업률은 3.7%인 반면, 청년 실업률은 8.0%에 해당한다. 청년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보다 2배이상 높은 것은 대졸 구직자들의 대부분이 대기업에 취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일자리가 ‘가교’가 아니라 ‘덫’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일자리가 사유제한을 통해서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로 전환된다면 오히려 현재의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와 여당, 정말 차별해소 의지 있는가?

우원식 의원과 이상수 장관은 연일 사유제한을 하게 될 경우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또 한편 차별해소를 위해서 열린우리당 안을 시급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유제한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차별해소는 별다른 비용이 안 들어가는가?

사유제한 비용과 차별해소 비용이 도대체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사유제한을 통한 정규직화는 ‘원래 정규직으로 일해야 되는 사람’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고, 이때 발생하는 비용은 곧 차별해소 비용 아닌가? 그렇다면 거의 똑같은 비용을 가지고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말았다 하는 것인가? 실업이 마음대로 늘였다 줄일 수 있는 고무줄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부여당은 심한 말장난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정부여당의 주장처럼 차별해소 비용은 별 부담이 없지만, 사유제한 비용은 실업을 낳을 만큼 큰 부담이라면 이는 정부가 차별해소에 대한 의지가 없거나, 정부의 차별해소는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계속 동일한 주장을 할 계획이라면 차라리 열린우리당은 사용자 정당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어떨까?

사유제한이 차별 해소 방안이다

아무리 차별을 금지시키고 시정절차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상시적 업무 A는 가만히 있는데,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가→나→다”로 바뀌는 경우 차별해소에는 한계가 있다. 차별해소는 ‘차별을 금지한다는 원칙의 천명과 개별적 시정절차’를 통해서 온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온전한 노동3권을 보장해 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노동3권의 보장은 사유제한을 통한 고용보장(단계적 정규직화)이 전제될 때만 가능하다. 언제 해고될지 몰라서 끊임없이 사업주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차별시정의 기회만 덜렁 주는 게 얼마나 실효성 있겠는가?

중소영세 사업장, 왜 힘들어하는지 모르나?

‘영세사업장 노동자 노동복지 공동실태조사단’이 영세사업장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2005년 7월, 사업주 72명, 노동자 478명, 실업자 58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당시 '사업주들이 공장운영을 하는데 겪는 어려움'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임차료 및 설비 운영비 문제’(20.3%), ‘불안정한 대금 회수(결제)’(20.3%), ‘영업부진 및 판매부진’(20.3%), ‘납품 단가 문제‘(9.4%), ’인건비 부담‘(8.6%)으로 나타났다. 또한 하도급 거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하청단가 인하 요구’(35%), ‘어음할인료 미지급’(16.7%), ‘하도급 대금 60일 초과의 문제’(11.3%), ‘일방적 발주 취소’(3.3%)등으로 나타났다.

즉, 중소영세사업장의 인건비 부담은 원인이라기보다 결과로서의 성격이 크며, 중소영세사업장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불공정 하도급 거래’ 문제이다.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문제가 해결되면 인건비 문제는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불공정한 하도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놓을 때 정부에서 눈 막고 귀 닫고 있더니 이제 와서 중소기업을 끔찍이 걱정한다. 더이상 왜곡된 상상력으로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 안 그래도 무지 피곤한 세상 아닌가!

빈곤한 상상력과 빈약한 의지

‘사유 제한’을 무서워하는 것은 빈곤한 상상력, 떨어지는 응용력 그리고 박약한 의지의 발로일 뿐이다. 이상수 장관은 OECD국가들이 기간제한을 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장관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 ILO협약에 따른 권고 166호에서 “기간제 계약의 채용은 작업의 성질, 조건이나 근로자 이익에의 합치 등 일정한 ‘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정하고, 합리적 사유가 없는 경우에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또한 프랑스, 포르투칼, 스페인 등 많은 OECD국가들이 사유제한을 하고 있으며, 특히 기간제가 많았던 경우 대부분 사유제한을 통해서 규율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법은 경과 규정(이른바 ‘부칙’)이 있게 마련이며, 민주노동당도 사유제한을 도입한다면 우리 경제의 제반 상황을 고려하여 단계별로 도입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고, 동시에 중소영세사업장에 대한 지원 방안도 마련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사유제한을 통한 ‘괜찮은 일자리’ 마련을 위해 정치권이 함께 지혜를 모을 것을 주장한다. 각종 위원회 만드는 게 정치권의 특기인데 왜 국회 차원의 ‘괜찮은 일자리’ 만들기 위원회 등은 구성하지 못하는가?

조금만 새롭게 상상하고, 응용하면 괜찮은 방안이 충분히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비정규직 노동자가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윤성봉 민주노동당 노동담당 정책연구원 

  • 마주보며말하기 2006.02.27 14:05:44

    2006.2.27. 매일노동뉴스 인터넷판 기사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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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사회운동]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혹시 공적으로 인용하거나 논의하시고 싶다면,

[사회운동] 3월호를 기준으로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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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부터 3개월 가까이 나라 전체를 뒤흔든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굴절시키고 증폭ㆍ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인터넷 여론이나 신문 방송이 더 이상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법적인 처리가 이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해결책의 모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우석 팀의 논문 조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천박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엄정한 책임 추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1) 황우석 스캔들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르쿠르의 책은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 전체를 정확히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생명공학의 철학적ㆍ윤리적 함의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2)

 

  특히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시작하여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진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이 작업이 알튀세르의 초기 문제설정에 따라 역사유물론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로 뒤에 출간된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시론󰡕4)이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5) 같은 저작들은 “이론 안의 계급투쟁”이라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과학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6)에서는 논리실증주의와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과잉유물론Surmatérialisme”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7)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철학에 관한 이중의 테제, 곧 변증법(방법)에 대한 유물론(존재론)의 우위, 역사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라는 테제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근거를 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서 찾으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다.8)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르쿠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9).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생명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 데 몰두하고 있다. 󰡔공포에 반대하여󰡕나 󰡔다윈과 성경 사이에 있는 미국󰡕 또는 󰡔생명윤리와 자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저작들 이외에도 그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상사전󰡕 같은 집단 저작을 감수했는데10), 이 책들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11)

 

  20여권에 이르는 르쿠르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 1996), 󰡔진보의 미래󰡕(동문선, 2001) 정도니까, 충분히 소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2) 이런 상황에서 르쿠르의 최근의 이론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인간복제논쟁󰡕은 독자들의 아쉬움을 얼마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복제논쟁󰡕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으로13), 국내에서는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이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ㆍ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국역본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ㆍ정치적ㆍ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르쿠르가 제시하는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과학과 연루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르쿠르는 첨단과학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열광은 사실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두 극단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과 규범의 절대적 기초로서 인간 본성이라는 관점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입장에 따라 형성된 관념들을 자명한 사실로, 또는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오인하게 만듦으로써, 과학 및 기술의 역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셋째, 현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오용이 낳는 윤리적ㆍ정치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적절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다. 르쿠르는 관개체론(貫個體論)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 현대의 기술신학: 생명 파멸론과 기술 낙관론


  서론격인 「프롤로그」와 유나바머에 관한 부록 이외에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중의 비판적인 목표, 이중의 투쟁 전선을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생명 파멸론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묵시록적인 관점에서 현대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 본성을 파괴할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심지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생겨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생명공학, 특히 인간 복제 연구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연구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복제할 수 있는 사물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인간 복제는 한 개인과 동일한 사본, 동일한 클론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톨릭 교회나 다양한 분파의 생태론자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보수적인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하버마스 같은 비판 철학자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파멸적인 결과들에 관한 공포의 담론을 조장하면서,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통해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는 “기술 낙관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공 지능 연구자들이나 로봇 공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생명 파멸론과는 정반대로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컴퓨터와 로봇 공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과 우리 육신에서 비롯되는 죽음”(78쪽)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정한 본질인 지능에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가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공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공 생명 연구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주위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로봇 종(種)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결국 2099년에 이르면 ‘인간의 사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을 가진 기계의 세계와 융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심각하게 변화할 것이다.’”(82쪽)    

 

  이 두 가지 관점은 인간의 장래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혀 상이한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쿠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관점은 실제로는 동일한 한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 전통, 더욱이 천년 왕국설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신학적 운동이다. 생명 파멸론이 생명공학에서 신의 고유한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오만”(hybris)를 발견한다면14), 기술 낙관론은 오히려 신의 영광의 표현 및 원초적인 낙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통 종교와 무관해 보이는 첨단 과학들이 실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의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이 책이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2. 두 가지 쟁점: 기술과 인간 본성


  이 두 가지 관점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기술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를 이루는 두 가지 통념, 곧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 도구로서의 기술 대 구성적 조건으로서의 기술


  르쿠르는 이러한 기술 신학은 기술에 대한 특정한 관점, 곧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이래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외재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수단 내지 도구로서의 기술은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지만, 생명공학(및 정보공학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변형하고 파괴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15)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의 반란, 도구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한 반테크놀로지 혁명을 수행하는 길이다.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실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부록」) 르쿠르는 유나바머 사건은 증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기술 신학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잘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를 둔 이러한 기술 신학이 또다른 종교적 극단,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르쿠르는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맞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 곧 기술은 인간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3장). 사실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같은 기술철학의 대가들이 제창한 이래 장 클로드 본(Jean-Claude Beaune)이나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등과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그리고 강력한) 전통 중 하나다.16)

 

  르쿠르가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및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화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의해 뒷받침된다. 르루아-구랑이 체계화한 고고학적 논의에 따르면 호미니드(hominid)가 유인원에서 분화하고 다시 호미니드에서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이후 인류의 문화가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17) 다른 한편으로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 이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구성적 관계를 보여준다. 곧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18) 요컨대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 인간과 기술의 외재성을 상정하는 도구적 관점만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 역시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 본성론인가 관개체론인가


  또한 기술 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 또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자명성을 전제하고 있다. 생명 파멸론이든 기술 낙관론이든 간에, 기술신학은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성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에는) 인간 본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후자는 인간 본성의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양자는 과학기술을 평가하기 위한 본질적인 척도로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복제 기술에 대한 비판가들, 특히 생명 파멸론자들의 역설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하여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복제 기술로 생겨난 사본이 원래의 인간과 정말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유전적인 정보로 식별되는 한 개인의 유전적인 동일성이 그의 인간적인 동일성 전체를 규정한다는 점(또는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돌리의 탄생 이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거나 죽은 가족의 성원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이러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19)

 

  기술 낙관론자들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 따라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침팬지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가 똑같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환원론은 사유를 컴퓨터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두뇌의 모든 기능을 수학적 모델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과학적 정확성으로 설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인공 지능 이론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유전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토록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생명공학 및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쟁점들을 정확히 다루는 데 장애를 이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개념에 의거할 경우 한편으로 인간 본성을 인간 종에게 부여된 선험적 자질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이를 유전적 동일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르쿠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이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며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명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서, 중세의 신학적 기초를 대신하여 인간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 개념이 인간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20) 가치나 규범에 대한 절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르쿠르는 생명윤리에 관한 담론들이 부정적이고 규제적인 방향 일변도로 진행되는 근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21) 

 

  이러한 관점에 맞서 르쿠르는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22) 사실 기술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개인 또는 개체 일반에 관한 관개체론적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관개체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개체는 개체화 과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항상 개체화 과정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본성을 인공적인 또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없다.

 

  (2) 개체는 그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갖춘 개체로 성립하며, 바로 이 때문에 타자들을 자신의 동일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타자들은 반드시 인간 타자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타자들이나 심지어 인공적인 타자들, 곧 기술적인 존재자들도 포함된다.

 

  (3) 가치 규범들은 환경과 교섭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준/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규준은 선험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섭 과정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이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인간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는 기술 신학적인 관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위치를 개념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선험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 규범(예컨대 선의지라든가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첨단 과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규범적 대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도 관개체론적인 관점의 강점 중 하나다.


3.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


  관개체론에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때의 욕망은 선험적인 인간 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발하듯이 탐욕이나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실존하고 진화해가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킨다. 르쿠르는 드니 디드로 대학(파리 7대학) 교수답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디드로(Denis Diderot)의 사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을 발견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가 모든 자연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로 정의한 것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등이 주장하듯이 일종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안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영향 아래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지닌 능동적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환경과 분리하여,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구성적인 관계와 분리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곧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간주되든 능동적인 역량의 표현으로 해석되든 간에 두 가지 관점에서 욕망은 정의상 개인의 욕망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를 비롯한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23), 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정의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관점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우선 본질 개념에 대한, 그리고 개체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에서 탈피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경우 욕망은 인간이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인간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로 말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실재,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변용되며affici”(영향받고), 또한 이러한 변용되기를 바탕으로 환경을 “변용한다afficere”(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변용되기/변용하기의 관계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affectio)의 관계는 욕망과 기쁨,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공포 등과 같은 정서들(affectus)로 변이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개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존재론적 개체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변용 관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또는 관개체적인 본성을 지니게 되며, 더 나아가 항상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정서적 관계망(누구도 혼자서 기뻐하고 혼자서 슬퍼할 수 없으며, 더욱이 혼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희망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 내지 개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모습에서도 타인의 흔적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 공학의 발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거나 그것이 기존의 본성을 전혀 새로운 인공적 본성으로 대체시켜 줄 것이라고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르쿠르는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생명윤리 대신 관개체론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곧 “자신이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능력”(64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규범의 발명이라는 주장은 자의적으로 이런저런 윤리적 규범들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윤리적, 사회적 규범들이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규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점이 생명 공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를 둔 일방적인 윤리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체론적인 관점에 따를 경우 인간 개인은 항상 이미 자기 안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의상 양가성을 띠고 있다. 곧 이것은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용하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 규범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외부 대상에 대한 규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각각의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악의 요소를 어떻게 규제하고, 또 유용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 자체와 동연적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또는 폭력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발명이라는 테제는 생명공학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경계하고 대비하도록 요구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의 특성 및 규범의 문제를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 복제 및 인공 지능 또는 인공 생명의 과학적 전망이 제시되는 시기에 이러한 관점은 과학기술과 윤리의 내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을 만하다.  


4. 이론적 과제와 전망


  내가 볼 때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ㆍ과학적 발전의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가, 또는 본래적인 자유의지를 갖는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존재일 뿐인가 인격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래된 신학적ㆍ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생명윤리에 대한 대개의 논의가 이러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검토 없이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 의거하여 규제적이거나 금지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르쿠르의 제안이 얼마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이를 윤리적ㆍ정치적 문제와 결부시켜 사고해온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던 프랑스 과학철학 및 기술철학의 한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또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문제는 그동안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외론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사 분야의 부차적인 논의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24) 가령 과학기술혁명(이른바 “극소전자혁명”)이 생산구조와 노동자 계급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같은 것이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구성적 기술론에 입각하여25) 기술이 사회구조 및 인간의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좀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르쿠르 책은 (적은 분량의 저작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백을 남겨놓고 있다. 우선 󰡔인간 복제 논쟁󰡕에는, 한 논평자가 지적하듯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사회 경제적 조건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26)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특허권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거대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며, 이에 따른 자본에 대한 과학연구의 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될 공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부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좀더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또다른 공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기술에 고유한 발전(또는 “진화”)의 동역학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동역학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과학기술은 대개 생산력의 일부로 간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발전 내지 진화의 메커니즘을 갖춘 체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고 인간의 진화 과정과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함께 진화되어 왔다면, 기술은 단순히 도구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의 종속 변수 내지 생산력의 일부로 치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역학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또한 과학과 기술, 경제가 맺고 있는 상호연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27) 

 

  또한 르쿠르의 작업은 생체정치(biopolitique)의 문제설정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르쿠르는 이 책을 명시적으로 생체정치 또는 생체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키고 있지만(26쪽),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푸코가 자신의 후기 작업,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발전시킨 생체권력28) 개념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대중으로서의 인구 또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체권력 또는 생체정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규율권력의 실행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종의) 거시권력으로 볼 수도 있다. 생체정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생명을 규제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로 삼는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나 공중위생 같은 보건복지 및 의료정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인구조사 및 출산율과 사망률, 평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정책 전반이 생체정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학의 문제가 함축하는 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은 생체정치의 문제설정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공백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쟁점들이며,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들의 문제를 좀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어야 할 문제들이다.29) 이렇게 볼 때 르쿠르의 책은 좀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일종의 “서론”으로 읽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좀더 폭넓은 역사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인간 복제 논쟁󰡕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조만간 좀더 많은 르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고 그의 연구가 앞으로 좀더 체계화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1) 󰡔진보평론󰡕 26호(2005년 겨울)는 황우석 스캔들의 초기 쟁점이었던 난자제공의 윤리적 문제와 연구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과 사상󰡕은 “한국 사회를 발가벗긴 황우석 신화”라는 제목 아래 PD수첩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과학보도 관행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다. 

2) 1983년 사망한 미셸 페쇠는 담론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La vérité de la Palice, Maspero, 1975; (avec François Gadet), La langue introuvable, Maspero, 1983. 

3) 이 연구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박기순 옮김, 새길, 1995 참조. 그 외에도 그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시학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고 있는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 Grasset, 197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4) 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enine en philosophie, Maspero, 1973; 국역본은 󰡔유물론ㆍ반영론ㆍ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6의 1부에 수록되어 있다.

5)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

6) Grasset, 1980. 

7) 여기서 “과잉sur-”은 교의나 이론으로 고착화된 종래의 철학적 실천에 맞서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대체보충이다. 이 개념은 또한 바슐라르의 “surrationalisme”, 곧 “과잉합리주의”에 준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관념론적 한계를 정정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8) D. Lecourt, “Pour une philosophie sans feinte(Vers le sur-matérialisme)”, in L'ordre et les jeux; P. Macherey,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siderée comme lutte des tendances”, in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7; 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9)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37쪽 참조.

10) Dictionnaire d'histoire et philosophie des sciences, PUF, 1999; Dictionnaire de la pensée médicale, PUF, 2004.  

11) 그 외에 르쿠르는 “디드로 포럼Forum Diderot”이라는 대중교양강좌를 주재하면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생명과학 분야의 쟁점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aut-il vraiment cloner l'homme?, PUF, 1998; La bioéthique est-elle de mauvaise foi?, PUF, 1999; Les médecins doivent-ils prescrire des drogues?, PUF 2000 등 참조. 

12)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최악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엉망인 책이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13) 이 책의 원제는 “Humain, posthumain: La technique et la vie”이고, 르쿠르 자신이 감수하는 “과학, 역사, 사회Science, Histoire et Société”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출간되었다.

14) 이는 17세기 이래 또는 19세기 말이래 과학-기술 복합체를 형성해온 근대 과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르쿠르는 이전 저작에서 파우스트(악마와의 계약)와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발명)이라는 문학적 형상을 통해 과학에 대한 공포의 상상적인 기초를 검토한 바 있다. D. Lecourt,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Synthélabo, 1996 참조.      

15)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구적 이성”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6) 이들의 저작은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이러한 기술철학 전통의 면모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참조. 르루아-구랑의 연구는 초기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 André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 tome 1-2, Albin Michel, 1964-65; B.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tome 1, Galilée, 1994 참조.

18)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Aubier, 2001 참조.   

19)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는 르원틴의 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리처드 르원틴, 「복제에 관한 혼동」, 그레고리 펜스 엮음,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류지한 외 옮김, 울력, 2002. 

20)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들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이러한 괴리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 󰡔인간 복제 논쟁󰡕에서는 “규제하고 금지하는 규율”로 이해된 생명 윤리의 불모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2004년에 출간된 악셀 칸과의 대담집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부연하고 있다.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PUF, 2004 참조.

22) 시몽동에서 유래한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참조.  

23) 발리바르, 앞의 글 참조. 우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참조. 

24) 그러나 미국의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펜버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특히 시몽동의 작업)을 접목시키려는 흥미있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Andrew Feenberg,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등 참조.  

25) 이는 80년대 이후 프랑스 출신의 브뤼노 라투르나 미셸 칼롱 및 영미의 과학/기술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ism)과는 약간 다른 입장(양자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이다.

26)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op. cit., p. 51.   

27)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다. 특히 B. Stiegler, De la misère symbolique, tome 1-2, Galilée, 2004; Mécréance et discrédit: tome 1, La décadence des démocraties industrielles, Galilée, 2005 참조.   

28)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Seuil, 2004;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특히 Jean-Claude Zancarini ed., Lectures de Michel Foucault, ENS Editions, 2000 참조.

29) 또는 역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체정치의 문제설정 내에 존재하는 이단점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술(적 진화)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생체정치와 관련된 아감벤 작업의 이론적 한계 내지 공백 중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를 철학적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G.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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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3-02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런 글을 '쓰실' 수가 있나요?
읽기도 쉽지 않은데요...(제 문제인가요 ^^;;)
무지 존경하는 마음으로 추천 날리고 갑니다~

balmas 2006-03-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키티님, 읽기가 쉽지 않으셨군요. ;;;
아무래도 생소한 내용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ㅠ-ㅠ)
정말 잘 아는 사람은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다는 데, 음...
(어쨌든 추천은 고맙습니다. ^^;;)

2006-03-03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3-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장에게만 보이기로 말씀해주신 선생님,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들뢰즈/가타리, 특히 [천 개의 고원]의 들뢰즈/가타리에게 욕망이 "개인의 욕망"이라는 것은 말이 안돼죠. 제 이야기는 들뢰즈/가타리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반오이디푸스]의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영향받은 일부 이론가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는 여전히 개체와 관계의 문제에 관해 애매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제 논문에서 지적하고 싶었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입니다.

나중에 따로 출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학위 논문을 많이 인쇄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원하는 분들에게 한 부씩 드리기가 어렵네요. 올해 안에 출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논문을 좀더 추가 인쇄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언제쯤 서비스가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3월 안으로는 서비스가 될 것 같은데, 이전보다 좀더 저작권 보호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할 생각인 것 같더군요.
 

298호 2006년 2월 28일(화)


철도조합원들에게 드리는 글
-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전기를 마련하자!


노조 설립이후 크고 작은 투쟁으로 영일이 없던 철도노조가 이제 다시 새로운 투쟁에 나서고 있다. 작년 이래 말도 많던 파업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의 분위기도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한다. 집행부와 조합원이 다시 오지 않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철도를 노동자와 시민의 철도로 바로 세우고, 지배세력의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파열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몇 마디 첨언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도 함께 투쟁할 것을 약속한다.

 

노동권 악화와 공적서비스 후퇴를 부추기는 철도구조조정의 사슬을 끊어내라

IMF 구제금융 이후 진행된 철도 구조조정은 노동 강도 강화, 인력부족 및 장시간노동(주 40시간 도입에도 불구하고), 전환배치, 노동통제 강화, 비정규직화, 노조탄압 및 해고자 양산, 임금 인상 억제 등 노동권의 악화 과정이었다. 또한 철도 구조조정은 요금 인상 및 저가 열차 폐지, 사회적 교통약자에 대한 할인 축소 등 공적 서비스의 후퇴 과정이었다.

이런 노동권 악화와 공적 서비스 질 저하는 앞으로도 지속될 예정이다. 고속철도 건설 및 도입과정에서 정치인과 철도관료들의 부정과 무능에서 비롯된 철도적자를 ‘경영개선’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와 시민에게 전부 전가하려 하고 있다. 철도공사는 본사 지사 조직 개편과 ERP 및 새로운 인사제도를 시행중이거나 도입할 예정인데 그 핵심은 수익성 위주의 개편이고 이윤이 안 남으면 그것이 사람이든, 역이든, 지방노선이든 모조리 자르거나 폐쇄하겠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소유-금융의 원리를 공기업에도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2015년까지 신선개통 등으로 9,300여명의 새로운 인력이 필요로 되나 그것을 전부 기존인력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적자 노선인 적자 역 폐쇄 및 열차운행횟수 감소, 비정규직화, 직원 배치 안하기 등도 예정된 수순이다.

노동권 악화와 공적 서비스 후퇴를 부추기는 철도 구조조정의 사슬을 이번에도 확실히 끊어내지 못한다면 시민의 철도와 안정된 직장이라는 말은 이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정권과 공사에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철도노조는 그 동안 크고 작은 싸움에서 정권 및 사측과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인력산정을 위한 공동프로젝트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런 합의는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노조 탄압과 대량 해고로 되돌아왔다. 이젠 명확히 할 때다. 한 때 진보를 자처하던 노무현 대통령 및 문재인 수석과 역대 사장 및 이철 사장은 신자유주의의 착실한 집행자라는 것을!! 이들은 노동권과 공적 서비스 후퇴, 철도 상업화를 통해서라도 철도 적자를 해소하고, 그래서 커져만 가는 정부 재정 적자와 정부 부채를 줄이려는 게 이들의 철도에서의 제일의 목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진행된 과잉축적/이윤율 저하로 구조적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의 위기극복책은 그 담당자가 김영삼이든,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정권의 이름이 문민정권에서 국민의 정부로, 그리고 참여정부로 바뀌었다 한들 신자유주의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 이들은 ‘개혁’을 내세우며 자본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아니 오히려 막대한 특혜를 부여하고, 오직 노동자 민중의 제반 권리를 축소시키기에 바쁘다. 자본과 정권, 그리고 지배 언론에서는 이런 정책으로 한국경제가 살아난다면 그 정도는 참아주어야 하지 않은가 하고 선동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 달리 길이 있냐면서. 그리고선 투쟁하는 민중들을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한다.

그러나 언필칭 개혁정책의 성과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약속했던 경제 성장과 투자증가는 계속해서 정체하고 있다. 당연히 고용은 늘지 않고 있다. 그나마 느는 고용은 거의 저임금 비정규직이다. 반면 초민족적 투기자본은 증권거래소의 40% 남짓을 지배하면서 엄청난 자본 이득을 얻어가고 있고 배당을 해 간다. 2005년 한해에만 외국계 초민족적 투기자본은 증권거래소에서만 87조원의 투기이득을 얻었고, 약 75억 달러의 배당을 챙겨갔다. 사회적 양극화는 정확히 역대 정권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다. 이제 와서 노무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대로 두고(비정규 악법 통과와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시도를 보라), 세금을 좀 걷어서 사회양극화를 해결해 보겠다 하더니 가진 자들의 반발이 거세어지자 세금은 당장 안 걷고 사회양극화를 해결하는 데 얼마나 돈이 드는지 한 번 계산이라도 해 보자든지 하며 잠꼬대 같은 소리를 뇌까리고 있다.

이번 투쟁에서 필수적인 것은 노무현정권이나 공사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단호한 태도다. “책임 있는 관계자와의 면담” 운운하면서 중간에서 협상을 주선하는 일부 민중진영 인사들이나 상층 노조간부들은 특히 경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태도로 접근하는 이들은 철도노조 집행부와 조합원에게 하등의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혼란과 패배만을 선사할 것이다. 과거 몇 차례의 투쟁에서 교훈을 얻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곁눈질 안하고 앞만 보며 줄곧 파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 길만이 조합원을 단결시키고 시민들에게 철도노조의 진정성을 알리는 길이다. 조합원들의 단결투쟁, 시민의 지지, 파괴력 있는 파업의 힘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비정규직 - 정규직 노동자의 단결로 총파업투쟁 승리하자

비정규 악법 반대투쟁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철도노조는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가지고 파업을 준비해왔다. 비록 철도의 공공성 문제, 비정규직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 조합원을 비정규 악법 투쟁에 복무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비정규 악법이 통과된다면 앞으로 놓여 있는 철도 구조조정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며 현장 투쟁의 계기도 전부 사라질 것이다.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비정규직화, 기간제 및 파견제 고용이나 해고를 반대할 명분이 사라진다. 노동조합 무력화와 고용불안은 불을 보듯 뻔하다. 비정규악법은 철도조합원 문제인 것이다. 철도노조의 비정규 악법 투쟁 참여는 그 자체 비정규 악법 투쟁을 강화할 것이고, 철도노조 단사 문제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KTX 여승무원 투쟁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철도에서의 비정규직화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을 외면하고 비정규직-정규직 단결을 이야기하기 힘들 것이다.

 

철도노조의 완강한 투쟁과 사회운동의 연대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나아가자!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싸움을 가능한 한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는 철도도조 뿐만 아니라 상급단체와 사회운동단체 공동의 임무이다. 최근 몇 년간의 투쟁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투쟁에서 투쟁을 양적·질적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에게 일말의 선의를 기대하고 있는 이런 투쟁이 압력성 투쟁, 하소연성 투쟁에 그치면서 패배와 정권이나 자본의 배신으로 끝이 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보수주의자든 과거의 진보주의자든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를 훼손해서 자본과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있다. 가능한 한 투쟁을 키워 정권과 자본을 상대해야 한다. 이번에는 이것이 아주 용이한 상황이다. 비정규 악법이 환경노동위에서 통과되었고 본회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노조를 파업에 동참시킨다든가 아니면 파업은 아니라 하더라도 집회에라도 끌어들이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한 번 솟아오른 투쟁의 파고를 계속해서 낮춰가면서 협상에만 매달리는 우를 이번에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철도노조 및 운수공동투쟁과 민주노총의 비정규 악법 투쟁의 결합,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자. 이 투쟁에 철도노조의 커다란 몫이 있음을 명심하고 후회 없는 투쟁을 전개하길 당부 드린다. 물론 우리도 우리의 역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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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

[이상한제국의앨리스](9/10) - Richard Levins의 세계
홍실이 
한 달에 한 차례 글을 올리기로 편집부와 철썩 같이 약속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난달을 거르게 되어 (별로 기다리진 않으셨겠지만) 독자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레빈스 교수의 쿠바 체류 때문에 약속 일정이 미뤄져서...

떨어진 신뢰 회복을 위해 이번 회는 양(!)으로 승부할 생각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고 스크롤 압박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

레빈스의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급진적 생태주의자이면서 (저야 잘 모르지만) 명성 높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어렸을(?) 적 앵무새처럼 암기나 했던 변증법의 핵심 원리들이 저의 연구 작업과 세계 인식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해야만 하는지를 깨닫고 새삼 놀랐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된 그의 이력에도 놀랐고....

이번에 그를 만난 것은, 참세상 독자들에게 과학, 사회, 변혁 운동에 대한 ‘고수’의 이야기를 전해주고픈 마음과 더불어, 저의 연구 주제와 자기정체성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개인적인 동기가 함께 작용한 것입니다. 이전 글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길고 다소(?) 딱딱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즐겨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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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1)

레빈스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여성 실업자 평의회와 1930년대 뉴욕의 의류노동자 파업을 이끌었던 공산주의자 할머니, 1919년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의 창립회원이었던 아버지를 둔 3대째 공산주의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노동자라면 우주론, 진화,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어린 레빈스가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마르크스주의 과학자들의 저작을 읽어 주고는 했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할머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우되, 그것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으니, 1930년대 독일에서 비롯된 인종주의적 우생학과 이윤 착취에 복무하는 기존 학문의 위험성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레빈스는 노동절이면 학교를 빼먹고 존 리드 클럽이나 여성 평의회 등이 주관하는 행진에 참여했으며, 과학자이자 운동가가 되는 것을 인생의 당연한 행로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한 레빈스는 1950년대 한국 전쟁과 매카시 열풍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절, 푸에르토 리코 출신인 아내와 함께 1951년 푸에르토 리코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는 공산당 활동과 함께 농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FBI의 입김 때문에 대학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선택한 삶의 방편이기도 했다. 중간에 4년 동안 뉴욕에서 대학원 학업을 계속한 뒤 푸에르토 리코에 돌아갔을 때에는 정치적 억압이 다소 완화되어 있었고 그는 ‘푸에르토 리코 대학’에서 생태학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 활동 - 특히 1965년부터 본격화된 베트남 반전 운동 - 은 계속되었고 1966년 종신 교수직 심사를 앞두고 FBI 끄나풀이 주도한 언론 공작에 의해 ‘무능함’을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하기에 이른다.

1967년 미국으로 돌아와 이후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쿠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4년, 혁명 현장을 돌아보고 집단 유전학 개발에 자문을 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생태 농업과 생태적 경제 개발을 향한 쿠바의 투쟁과 노력에 깊이 관여해왔고 오늘날에도 이는 지속되고 있다.

학문적으로, 그는 변증법에 토대를 둔 진화생물학자로서 근대 서구 과학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배격했을 뿐 아니라 합 목적론 혹은 기능주의적 진화론, ‘자연의 조화’라는 이상주의적이고 목가주의적인 생태 운동을 비판해왔다. 평생의 학문적-정치적 동지인 르원틴과 함께 『변증법적 생물학자(Dialectical Biologist)』(2)를 저술했으며, 절친한 동료였던 스티븐 굴드의 세계를 조망한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의 ‘급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평가에 따르면, 푸에르토 리코 독립 운동 참여를 통해 반제국주의자, 국제주의자로서의 자각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제국의 이해에 복무하는 학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의 날카로운 노동계급 페미니즘은 엘리트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쿠바와의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착취적인 사회에 또 다른 대안이 있음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연구실이 조만간 보수공사에 들어간다고, 배경이 영.. ㅜ.ㅜ 마스터 제다이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가? (요다 말고, 오비완 커노비)

1. 과학과 사회


★ 제가 미국에 와서 진짜 충격 받았던 게, ‘진화론 대 지적 설계론’ 논쟁(3)이었어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지적 설계론 가르친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미국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중에 보니까, 미국인의 절반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이예요? 21세기에 이게 뭔 일이래요? (녹취한 걸 들어보니 막 따지고 있음 ㅡ.ㅡ)

☆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미국사회의 뿌리 깊은 반(反) 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들 수 있다. 미국에 처음으로 정착이 시작되었을 때, 이주자들은 대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었고 상식과 근면한 노동만 있으면 충분한 살아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본이 축적되고 은행이 생겨나고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이들 압제자들 - 교육 받은 동부 해안의 자본가와 은행가들, 그리고 지식인들 - 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강력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로는 현재 미국의 우파들이 두 가지의 다른 커뮤니티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부유한 기업가 집단 - 이들은 진화론이나 낙태 문제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윤만 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정치적 기반 확대를 위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힘을 키워왔었다. 당혹스럽게도, 지금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 관련된 이야기인데, 현재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지형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참 난감해요. 우선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극렬 반대하잖아요. 여태까지 프로테스탄트 원칙이 자본의 이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왔던 걸 본다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마치 인류를 질병에서 구원할 것 같은 엄청난 기대에다 이윤 창출의 노다지라는 생각 때문에 기업과 국가가 연구 개발에 왕창 몰려들고... 여기다 한국에서는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 열기까지 더해져...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줄기세포 연구의 윤리문제를 비판하면 친미적 배신행위로 비난 받기도 했다니까요. 이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어떻게 종합하고, 좌파 고유의 비판적 관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 이건 좀더 큰 문제, 과학의 근본에 관한 질문이다. 과학은 보편적이면서도 일국적이다. 어떤 측면에서 전체 인류를 위한 지식을 심화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관계를 가진 지식 산업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 자체가 상품화되면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과학을 하는 상황이 출현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다른 상품들을 취급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과학을 다루고 있다. 상품은 일단 생산되고 나면 빨리 시장으로 이동해야 하고, 똑같은 이유로 과학에서도 이윤과 관련된 특허권을 빨리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결과를 날조하거나 과장하게 된다. 매년 출시되는 의약품의 1/3에서 절반이 유해효과 때문에 5년 내에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는 현상은 이와 관련 있다. 5년 후에 퇴출된다고 해도 그 동안 이윤을 챙길 수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래서 과학에서의 부패는 제도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과학자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화되어 가고 있다. 기업들이 과학자를 학술 ‘인력’으로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영국의 직조공들이 경험했던 소외를 과학자들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자신을 노동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제 과학은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초점은 소유주의 관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식이 다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화학 살충제는 매년 농민들에게 팔 수 있지만, 함께 심음으로써 토마토를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작물은 매년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책에 한 번 쓰면 끝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불균등한 과학 발전이 일어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줄기세포 연구는 과거에 휴먼게놈 프로젝트처럼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를 가능하게 만드는 보증수표처럼 인식되고 있다. 급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든 인기 영합주의를 거부해야 하며, 또한 과학을 과학 외부로부터 조종하려는 어떤 것도 거부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허용을 지지하지만, 그게 모든 질병을 치료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과학 연구의 자유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언제나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모든 것을 자료로 바꾸려고 하는 과학주의 (이를테면 비용-효과 분석), 그리고 또한 과학의 신비화에 대항해서 말이다. 현재 부시 정부는 이중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과학적 근거 -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합리화시켜줄 과학적 근거 (이를테면 기후변화 문제가 결코 심각한 게 아니라는)를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신비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지적 설계론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이 대두하고 있는 거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학을 방어하고 과학을 비판해야 한다. 또한 지식 산업의 상품화된 산물을 비판해야 하고, 과학의 의제를 변화시키려는 투쟁을 해야 한다.

★ 한국에서 최근에 있었던 스캔들은 알고 계시죠? 일단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까 그야말로 무수한 학자들과 사회비평가들, 언론 매체들이 너나없이 우려를 표명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놓고 있어요.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 이를테면 과학진실성 위원회(ORI)나 기관윤리심의 위원회(IRB)를 설치하고 강화하는 방법이죠. 한편 연구자들은 그동안 ‘진실 추구자’로서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손상 받은 데 대해서 크게 낙심한 거 같아요. 그래서 과학자의 양심과 자율성 회복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런 논의에 중요한 문제가 빠진 게 아닌가 싶어요. 우선, 전문가 위원회 말고, 과학 생산 과정에 대한 대중이나 과학기술 노동자의 ‘사회 민주적 통제’에 대한 고려가 없어요. 또, 세분화와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고 있는 학술 노동의 소외와 분절화를 어떻게 다룰 건지도 이야기가 전혀 없구요. 사실 이거야 말로 과학사기를 가능하게 하는 좋은 토양 아닌가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에 의해 조건 지워진 연구자들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학이 정치나 이데올로기, 사심어린 이해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떨어져 홀로 설 수 있다는, 이건 그저 신화 아닌가요?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좌파적 대안은 어떤 게 되어야 할까요?

☆ 우선, 대학 연구로부터 이윤을 획득하는 구조부터 없애야 한다.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받지 않고도, 특허를 획득하지 않고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상품과는 무관한 장기적인 지적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학문적 자유의 기반이다.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을 유지해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정년 보장 교수라고 해도 대학원생들을 지원해야 하는 문제가 남고, 또 학생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첨단유행의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어떤 분야가 유망할지는 다른 이들이 이미 결정해 놓은 것들이다.

☆ 또한, 과학 내부에서,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의제들을 스스로 요구해야 한다. 환원주의적 접근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DDT로 말라리아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몇 년에 불과했다. 모기들이 금방 저항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항생제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세균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틀렸는지, 왜 실수를 저질렀는지 살펴보면, 환원주의적 틀에 따라 문제를 너무 협소하게 제시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들은 수의학자나 농학자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염병의 재창궐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식물, 야생 동물, 가축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지적 협소화는 과학의 상품화가 가져온 결과 중 하나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많은 등록금을 내야하고, 이걸 빨리 보상할 수 있고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학문 분야를 공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 운동이 학술 연구의 의제를 상당히 변화시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지역사회 여성들이 자녀들이 비슷한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연구자들에게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고, 소수인종 그룹이 자신의 동네에 버려지는 유해 폐기물들과 질병 발생의 관련성에 대해 연구를 요구하기도 했다. 환경 운동과 건강권 운동은 기존의 학문들이 정립해놓은 경계를 넘어서는 연구들을 요구했으며 때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정치정당과 밀착해 있을 경우에는...

☆ 우리는 좌파 정당들이 협소한 현실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적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방식에서 진정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과학 발전의 의제를 그들의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도록 요구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앞서의 답변 - 과학은 보편적이면서도 일국적이라는 명제로 돌아가게 된다. 모든 관점과 위치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위치는 자체의 통찰력과 무지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며, 우리는 우리의 과학이 어떤 측면에서 통찰력이 있고 어떤 점에서 무지한지 자문해야 한다. 농민들과 함께 일해 보면 주변 환경과 경험에 대해 그들이 매우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비교에 근거한 지식,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다.

내가 쿠바에서 배운 것을 예로 들어보자. 그 곳에는 농민들 왈, 나무들이 바람 쪽을 향해서 자란다는 계곡이 있다. 그런데 식물생리학에서는 바람이 잎을 마르게 하기 때문에 그 반대편으로 더 잘 자란다고 나온다. 실제로 그 계곡에 가보면 정말로 나무가 바람 부는 쪽을 향해 자라고 있다. 태양광이 비치는 곳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같은 방향인데, 태양의 효과가 바람의 효과보다 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자, 보자. 현지 주민은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관찰을 했지만, 일반화에는 약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외부에서 추상적 과학을 통해 접근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구체적 사실에는 어둡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이해를 위해 함께 작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반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일반화를 할 수 없다. 또한 다른 사회적 목표는 다른 종류의 요구를 낳고 연구 의제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는 대안적인 에너지 생산에 보다 관심이 많을 것이고, 미국처럼 땅이 넓은 나라는 광범위한 농업생산에 대한 전략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지형의 농업 문제는 한국 농업학자들에게 중요하지, 북미 학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보편적인 지평을 포기하지 않고도 사회 고유의 맥락과 과학적 전통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의 학술 출판이 몇몇 중심 저널이 주도하는 영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경력을 만들기 위해, Lancet 같은 저널에 출판하기 위해 실제 요구와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쿠바에서 논의한 것 중 하나가 라틴 아메리카의 고유한 독립적인 학술 저널을 출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좌파 정당들은 우리의 개발이 경제적인 발전과 함께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개발이,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우호적이면서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질병들이 노동현장과 관계있다. 특정한 화학물질이 암을 발생시킬 수도 있지만, 노동의 조직화 방식 자체가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노동자가 책임만 무겁고 자율성이 부족한 상황은 불안과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고, 무관심, 우울, 자살률과도 관계있다. 한국에는 아주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기업들이 많이 있다. 개발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복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좌파 정당이라면 어떠한 것이 진정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과학적 의제가 되어야 할지 정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공동 노력에 의해 태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한 번은, 캐나다에 육가공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퀘벡 대학의 연구자들을 찾아가 손에 사마귀가 많이 생긴다고 털어놓으면서 이 원인을 좀 밝혀 달라고 했다. 부탁을 받은 연구자들을 당신들을 ‘위해’ 연구할 수는 없다 - 다만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육가공 사업장에서는 장갑을 끼고 일하는데 그 장갑들은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금속섬유로 강화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갑이 꼭 맞지 않으면 오히려 장갑이 손에 찰과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바이러스 감염이 쉬워진다. 이런 공장의 실온은 매우 낮고, 그러면 피부 표면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면역 체계가 약화된다.

이렇게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 감염이 쉽게 일어나고 특히 냉동 육류를 다루는 노동자에게서 이런 문제가 빈발하고 있었다. 함께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에만 특정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민중 운동이, 노동 운동이 과학 의제를 정하도록 해야 하고, 과학은 그 스스로의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학술 운동과 대중 운동, 노동운동의 결합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존 스노우 연구소(4) 같은 경우만 해도,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의 참여에서 비롯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별 차별성 없는 전문 컨설팅 회사로 변해 있잖아요.(5) 한국에서도 지역사회에 토대를 둔 참여연구센터 운동(6)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 어떤 종류의 보호 장치를 마련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비전문가를 의사결정기구에 포함시키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 했을 때 문제점은 그들이 측정한 자료들의 신뢰도가 낮고 기술적 오류의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점이라면 이들이 서식지(habitat)의 좀더 폭넓은 상황,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전통적인 역학자들이 갖지 못한 것이다. 과학자와 지역사회 주민들이 실제 운영위원회에 포함되고, 노동조합들이 여기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또한, 기업과 연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독립적인 재원조달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는 정부가 이러한 자율적 연구기관들을 지원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자율 대학 지원을 위한 고정예산 편성 촉구 운동이 있었다.

예산의 일정 분율을 확보해놓으면, 정치인들이 어떤 대학이나 어떤 연구에 지원할지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을 독립 연구소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쉽지는 않다. 예산은 언제나 빠듯하고 기업의 연구비를 받으려는 유혹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는 강력한 헌신과 결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나 연구 결과가 특정 기업의 상품과 관계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연구 윤리에 관해서라면 개인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조직적인 동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 연구 센터들은, 주민의 불만이나 요청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해야 한다. 저널리스트와 학자로서의 결합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소리다.

★ 근데, 여기 미국에도 노동조합 형태의 학술 연구자 조직이 있나요? 한국에는 과학기술 노조가 있는데... (사실, 영문 이름이 기억 안나 대충 얼버무림 ㅡ.ㅡ).

☆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여 세워진 의사들의 조직 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MIT 출신 연구자들이 닉슨정부의 군사 프로그램에 저항하면서 설립한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대학의 군사연구 지원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던 ‘Science for the People’ 등을 들 수가 있다. 과학 산물의 이용과 관련하여 과학자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를 통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누가 과학자가 되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쿠바가 강력한 과학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시민 전체가 인재 모집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상 교육에, 인종 간, 성별 간 차별을 극복하면서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 사회의 구성이 바뀌어, 흑인이, 여성이 지도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다.

내가 속한 (쿠바) 기관과 연구소들만 해도 여성이 대표로 있거나 비중이 절반이 훨씬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과학자는 일부 기득권 계층 출신인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자신의 출신 배경에 따른 정치적 태도를 가지기 마련이다. 형제 중 한 명은 의사요, 하나는 농장 소유주, 또 다른 형제는 상원의원...

★ 맞아요. 한국에서 지금 바로 그런 문제가 벌어지고 있지요. 대학 등록금은 자꾸만 비싸지고, 교육이 계급을 영속화시키는...

2부 : 쿠바 이야기


★ 요즘에도 매년 겨울마다 쿠바에 가시잖아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 좀 소개해주세요.

☆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생태 농업으로의 이행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업을 농림부와 함께 진행 중이고, ‘생태 및 시스템 연구소’에서 생물다양성 보존을 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확립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 하바나 대학의 ‘건강과 안녕 센터’에서 보건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그 밖에 ‘열대의학 연구소’, ‘복잡성과 변증법을 위한 철학 연구소’에도 관여하고 있다. 서로 동떨어져 보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모두는 사회주의적 개발 (socialist development)을 의식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체 전략의 부분이다.

★ 쿠바의 ‘생태적’ 개발 성공 사례는 유명한데... 사실, ‘환경’이니 ‘지속 가능성’이니 하는 것들은 선진국들한테나 해당하지 당장 먹고 사는데 급급한 개발 도상국가들한테는 요원한 이야기로 들리잖아요. 쿠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또,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떤 게 있었나요?

☆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계급 갈등이 아니라 비전의 차이 때문에 투쟁이 벌어졌다. 어떤 식의 발전을 할 것인가? 쿠바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성공을 거두려면, 완수 가능한 임무가 주어져야 한다. 성취 불가능한 요구는 당혹과 절망감만을 낳을 뿐이다. 당시에는 지식을 축적하고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급박한 문제였다. 쿠바사회의 무지와 비효율, 경직성은 굉장히 심각했다. 러시아에서 원조 물자로 타자기 리본을 대거 보내줬는데,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몰라서 이걸 파자마 고무줄로 사용했다. 또 농림부 관료가 봐달라고 해서 가보니 독일로부터 들여오는 종자가 사실은 농사용이 아닌 빵 만드는 재료인 적도 있었다. 우리가 회의석상에서 DDT의 건강 유해성을 문제 삼으니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소련에서도 만드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했다.

정치의식이 일정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지적 자원이 필요하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필요는 절박감을 낳고 이는 때로 지름길을 쫓다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필요’와 ‘훌륭한 생각’이 만났을 때만이 긍정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소련과 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이 망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대안적 농업개발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쿠바에서 생태혁명이 가능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소련의 패망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필요’보다, 그동안 내부에서 발전 전략을 두고 투쟁하며 준비해왔었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이 쿠바의 보건의료 시스템의 성과에 놀라워하죠. 더구나 최근에 베네수엘라의 보건 프로젝트인 ‘바리오 아덴뜨로’ 사업을 지원함으로써 또 다른 찬사를 얻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미국 웹 사이트를 찾아보니까, 쿠바 보건의료 체계의 ‘진실’을 폭로한다는 것들이 꽤 있더라구요. 질 높은 의료 서비스는 다 외화벌이를 위한 거라서 외국인 환자들만 이용하고 일반 시민들은 이용할 수 없다더라. 공공 보건의료 기관들은 기본 의약품도 없고, 진짜 끔찍한 수준이라더라 등등... 전형적인 미국의 악선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도 너무 긍정적인 부분만 바라보고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쿠바 보건의료의 실체,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해주세요.

☆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에 대한 통계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현재도 문제 개선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같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무역 봉쇄조치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필요한 의약품이 1천이라면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것은 겨우 5-6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쿠바 의료 시설의 일정 부분은 의료 관광객을 위해 쓰이고 있다. 어떤 병원은 10%의 병상을 여기에 할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 10%가 병원 전체를 먹여 살리고 나머지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의사들은 어떤가요?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 의사들이 바리오 아덴뜨로 사업에 반대하고 참여도 안 하잖아요.

☆ 상황이 다르다. 혁명 당시 30%의 의사들이 쿠바를 떠났다. 남아 있는 의사들은 사회에 대한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교육을 받은 새로운 의사 세대가 성장하고 있지 않나. 많은 의사들이 돈을 버는 것 보다 사회적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쿠바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의사들이 대부분 수도 하바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교육과 수련 과정에서 오지나 빈곤 지역에서의 활동을 경험하고 있다. 의학 교육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세계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 자연, 문학을 포괄하는 기본 교육과 함께 의학 윤리 교육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 한국 같은 경우 의사들이 대개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ㅡ.ㅡ

☆ 쿠바도 옛날에는 그랬다. 지금은 아니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우에도 지금 쿠바와 New Medical School에서 새로운 의학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니 10년 안에 수천 명의 젊은 의사들이 배출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구세대 의사들은 결단을 내려야할 것이다. 미국의 마이애미 부촌으로 옮겨가서 개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고 자국에 남아 있을 것인가.

3. 삶과 운동


★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미국에서, 그리고 이 하버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나요?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내 평생, 한 번도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적인 이력’을 열망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정체성을 학계의 공식적인 보상과 인정 체계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고, 교수 사회의 상식을 공유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폭넓은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1974년 국립학술원 (National Academy of Science)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베트남 전에 대한 학계의 협력을 비판하며) 이를 거부한 것도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결정이었을 뿐이다. 또한 나는 정치적으로 항상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려면 학계 외부에 급진적 커뮤니티를 갖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대학에서도 의견을 함께 하는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버드의 S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원자론적 환원주의에 함께 반대했고, D의 경우 공해의 건강 영향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고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하려는 N과도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특히 T같은 경우 그녀의 지나친 민족주의적 성향만 뺀다면 과학과 정치에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과 따뜻한 인간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관계들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너도 대학 사회에서 누군가와 모든 면에서 견해가 일치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할 필요는 없다. 만일 어떤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면, 왜 그렇게 느끼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또한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한 인식을 하고 이를 헤쳐 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나도 학교에서 인간 생태학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철학적 지향, 원자론적 환원주의에 대한 선호, 정치적 보수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대학의 원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자체를 바꾸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으로, 하버드는 지배계급의 기구다.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는 사람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가르치고, 하버드는 ‘누구를’ 죽여야 할지 가르친다고 한다. 대학의 경우 교원을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득실을 따진다. 연구 성과가 좋거나 교육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면 정치적 문제를 좀 일으키더라도 문제 삼지 않지만, 그 수위가 점점 높아져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면 이를 다시 고려하기도 한다. 안정된 상황에서라면 다양성을 가진 게 학교의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50년대 매카시 광풍에도 하버드는 극소수의 교수만을 해직시켰다. 내가 하버드에 처음 왔을 때, 마침 경제학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쫓아낸 참이었다. 아마도 대학 당국이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정치적 관점이 별 문제가 안 될 걸로 생각했던 거 같다. 당시 진화생물학 분야를 이끌었던 우리 셋 - 나, 스티븐 굴드 (Stephen J Gould), 르원틴 (Richard Lewontin) - 모두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었나.

★ 요즘 한국의 진보 운동은 매우 힘든 시기를 맞고 있어요. 뭐 제가 이러쿵저러쿵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지요....

☆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는 시기, 혁명주의자들의 주된 임무는 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이념은 서로를 강화하면서도 모순하는, 개념의 전체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이념뿐 아니라 느낌에서도 마찬가지다. 토론을 통해, 경험을 통해, 그러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이에 대한 도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베트남 전에서 고엽제의 위험성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국 정부의 첫 번째 반응은 그저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힘들어지자 전쟁 자체가 비극이고, 양쪽 모두의 잘못이라고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것마저 먹혀들지 않자 우리의 과실(mistake)이라고 인정했는데, 이들이 인정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지 전쟁 자체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현재 이라크 전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군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학대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에 처하면 너희라고 다를 줄 아냐고 발을 빼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적군이고 아군일지 알 수 없는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도시 자체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거는 분명 잘못된 전쟁이다. 전쟁이 저지른 잘못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전쟁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의식을 전환시켜야 한다.

특히 좌파에게 마르크스주의 교육은 굉장히 중요하다. 문제는 교조적인 슬로건화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전 세계 좌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시기일수록 운동의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항이 폭력적일수록 급진적인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자포자기의 행동일 수도 있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 과연 우리가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는 대상, 우리의 상대편, 그리고 우리 운동 내부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우리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운동을 건설해야 하며, 엄격한 국제주의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과거에 걸어온 길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과오를 이해할 때만이 이를 피할 수 있다. 운동이 열망하는 바와 실제로 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어왔다. 기독교인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를 주중에 실천하지 않을까? 우리 급진주의자들은 여기에 더 나은 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 과거로부터의 유산 - 우리 자신을 포함한 - 을 가지고 미래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건설하려고 하는 사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며, 우리 삶을 이에 따라 미리 형상화하려고 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내가 처음으로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공산당 활동을 하는 건 좋은데 ‘공산당’과 ‘공산주의 사회’를 절대 혼동하지 마라. 만일 당이 공산주의적 삶을 보장해준다면, 굳이 혁명이 필요 없을 거다. 이미 자본주의 안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소리 아니겠냐!”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민중에 대한 정직성을 그 어느 순간에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혁명 운동의 장기적 목적은 결국 민중의 역량을 강화하고 그들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 대중 조작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노조 총회에서 정치적 분파들끼리 특정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얼마나 싸우나. 하지만 많은 경우, 평 조합원들한테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지도부와 평 조합원 사이의 간극, 냉소주의를 조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현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전체 노동계급이 스스로 통치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지 않는가? 그것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바보가 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롭다.

쿠바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전국 의회에서 무언가를 의결한다고 할 때, 이는 이미 지역 공동체와 조직에서 수많은 논의를 거친 것들이다. 그래서 최종 결정 단계에서는 그리 큰 논란이 벌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생태학자들 모임에서 내가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와서 내려다본다면,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했더니만 답변이 ‘모든 사람이 다 회의에 가 있는 거 보고 알지’였다. 모든 운동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성공적이든 상승과 하강 국면이 있기 마련이다. 상승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강기에 얼마나 더욱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운동의 힘이 약한 시기에 일어나는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는 제휴 (coalition) 문제다.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이냐... 만일 우리가 어떤 제휴에 대해 완벽하게 만족한다면, 그건 그 제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휴 내에는 반드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공통의 기반을 찾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서 상호작용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

내가 비록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평화운동의 상당부분이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독일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라고 이야기했다면, 오늘날의 혁명 운동은 생태운동, 민족해방운동, 페미니즘에서 그 자양분을 얻고 있다. 운동은 이러한 생각들에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제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운동에서 변증법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쿠바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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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읽느라 지친 독자들을 위한 보너스

레빈스의 진짜 매력은 평생에 걸친 이런 이론적, 실천적 단호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풍자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점! 이사도르 나비 (Isadore Nabi)라는 가공의 과학자를 만들어내서 그럴 듯하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궤변을 늘어놓아 학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풍자 넘치는 편지글과 광고로 사람들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 중 하나, 이사도르 나비 인력회사의 모집 공고를 일부 소개한다.

“우리 회사의 과거 성공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나자렛 출신의 10대 미혼모를 탁월한 신앙 드라마의 주연으로 만든 것. O. bin L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정부 기구의 대표로 채용한 것. 텍사스 기름 장수의 그저 그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맹한 아들을 위해 일류 일자리를 찾아준 것. 우리 회사는 현재 역사상 가장 도전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는데, 바로 UniverseTM의 새로운 지적 설계자를 찾는 것이다...”

이사도르 나비 인력 회사의 모집 공고



(1) 2005년 7월, 캐나다에서 열린 ‘생물학의 역사, 철학, 사회학 국제 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제목 -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째를 지칭한다(‘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 먼쓸리 리뷰 서평 참조:http://www.monthlyreview.org/0505clarkyork.htm

(3) 진화론은 그저 하나의 이론(theory)일 뿐이기 때문에 대안 이론(alternative theory)도 가르쳐야 한다면서, 일부 지역의 교육위원회에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생물시간에 가르치도록 하여, 재판 붙고 난리 났던 사건 (현재 진행형!). 지적 설계론의 옹호자들은 진화 자체는 인정한다면서, 다만 생명체라는 것이 너무나 오묘해서 우연히 발생하는 진화의 결과라기보다 무언가 고도의 우월한 존재가 설계한 진화의 경로를 따라온 것이라고 주장. ‘창조론’이라는 이름을 버림으로써, 종교가 아닌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과학자들 - 특히 진화생물학자들은 완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4) 존 스노우(John Snow)는 19세기 런던 콜레라 대유행 당시, 역학 조사를 통해 오염된 상수 공급이 콜레라 발생의 원인이라는 걸 밝혀낸 역학계의 전설적(!) 인물. 1970년대, 매사추세츠 워번 지역 주민들은 어린이의 백혈병 발생률이 유난히 높다는 걸 자각하고 그 원인을 규명해달라고 국립보건원과 질병통제센터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하버드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자체 역학조사를 수행, 기업의 폐기물에 의한 식수원 오염이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소송을 통해 피해보상과 함께 관련 법규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활동에 참여했던 연구자들과 주민들은 전설적인 존 스노우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연구소 홈페이지: http://www.jsi.com/JSIInternet/ )

(5) (부시 행정부의 아프리카 의료 인프라 지원 사업에는 Lockheed Martin, Northrup 같은 군수회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데, 존 스노우 연구소가 Northrup과 손을 잡았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음)

(6)시민참여연구센터 (홈페이지 :http://www.sciencesho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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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를 보니 무영님이 방명록에 질문을 남긴 게 2월 2일인데, 거의 한 달이 다되어서 몇 줄 안되는

답변을 올리게 되어,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은 며칠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입장들] 불어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만 더 늦어지고 말았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도 없더니, 역시 도둑 맞은 편지처럼, 책은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ㅜ_ㅜ

(ㅎㅎㅎ 이게 변명이 되나요?)

어쨌든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질문하신 걸 보니까 상당히 꼼꼼하게 읽으신

것 같습니다. 그 대목을 읽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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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님의 질문


책을 읽다 궁금한 대목이 있어 여쭙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은 아닙니다. 데리다의 『입장들』이라는 국역본 대담집 중 「함의」 부분 입니다.


1) 앙리 롱스가 차이(差移) 개념에 대해 데리다에게 묻는 대목인데요. 데리다는 차이(差移)가 경제 자체라고 말한 후,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이항 대립 …… 의 요소"(32)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이는 동일한 것과 구분됩니다)의 요소"(같은 쪽)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差移) 개념이 왜 '동일자'의 요소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동일한 것'과 구분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2)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가 차이(差移)를 유한하게 결정짓는 것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존재사유의 차이(差移) 은폐는 "예를 들어 수많은 '음성적' 비유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위나 늘 '진리의 실행'으로서의 예술로 연결되는 예술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인지"(34)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입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진리의 실행이 예술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로고스나 음성과의 …… 연계"(같은 쪽)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데리다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예술들은 '예술의 본질'인 시의 공간이나 '언어'와 '말'의 공간 속에 펼쳐진다는 사실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건축과 조각은 말하기와 명명하기의 통로 속에서만 일어나며 그에 의해 지배되며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낭독법(혹은 발성법)과 노래에 매우 고전적으로 부여된 탁월한 가치나 문학에 대한 경멸은 이런 식으로 설명됩니다. 하이데거는 "낭독법을 문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같은 쪽)


저는 이 말들이 재구성이 잘 안 되는데요. 우선 1) 하이데거는 모든 예술들이 '말(=음성)'의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고 보았다. 2) 이것은 시라는 문학예술 이외에 건축/조각예술의 경우―어쩌면 예술 일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렇게 요약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경멸"은 오히려 엉뚱하게 들리거든요. 그럼 시와 문학은 서로 다른 범주인 것인지, 아니면 문학에'만' 적용되었던 낭독법이라는 가치는 다른 예술들에까지 펼쳐놓아야 하기에 경멸스럽다는 건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문학에 대한 철학의 일반적인 경멸을 오히려 정당화해준다는 건지, 어쨌든 이해가 안 됩니다 T.T


3)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음의 논의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앙리 롱스는 데리다의 해체론적 작업이 문학과 맺는 친화적인 관계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문학적' 실천"(35)이라는 말에서 '문학적'이라는 부분에 인용부호를 붙이며, "왜 문학적이란 말에 인용부호를 붙여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애매모호함을 여기서 제거해야 하는가를 이해"(같은 쪽)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문학적' 실천이란, 어떤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같은 쪽)합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은, 문맥으로 볼 때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적 예술관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예술론의 음성중심주의적 성격에 반대하는 '문학적' 실천이 가지는 함의란, 차이(差移)로서의 기록을 부각시키는 예술론을 지지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렇게 단순화시켜서만 말할 수밖에 없네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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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관한 답변


역자가 “동일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각각 “du même”와 “l'identique”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하이데거가 쓰는 두 개념에 상응하는 불어 단어들이죠. 하이데거는 “Selbigkeit"와 "Gleichheit 또는 Identität”를 구별하지요. 전자가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이라면(하이데거는 “나누어 놓으면서 묶음Zusammenhalten im Auseinanderhalten” 이라는 식으로 뜻을 풀이합니다), 이 후자는 차이와 대립하는 동일성을 가리키죠. 따라서 데리다는 하이데거 식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봐야겠죠.

 

다만 différance는 “동일성의 요소이기도 하다”고 말할 때 데리다는 “공통된 근원으로서”라고 한정을 하고 있죠. 이것은 différance가 이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데리다는 그 이전에 이미 différance는 첫째로 “유예, 위임, 연기, 이송, 우회, 지연, 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2)에 관한 답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지만, 맥락은 이런 것 같습니다. 번역본에서 “낭독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불어로는 “diction”, 독어로는 “Dichitung”의 번역입니다. “Dichitung”은 원래 “시(詩)” 또는 “시작(詩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후기 사상에서 (특히 횔덜린의 시를 숙고하면서) 근원적인 사유를 “Dichtung”, 곧 “시작”과 동일시하지요. 시인들만이 주관과 객관의 구별에, 학문의 논리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세계 또는 존재의 근원적인 시원을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불어로 번역한다면 “poésie”가 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Dichitung”은 어원상 “diction”, 곧 “구술하다/말로 불러서 받아 적게 하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사실 하이데거 자신이 “Dichtung”과 “Diktat”를 결합해서 사용합니다. 시는 시인이 혼자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씌어진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시작에 대한 하이데거의 특권화는 음성에 대한 특권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문학”, 곧 “littérature” 또는 독어로는 “Literatur”는 어원상 “littera”, 곧 “문자”, “글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시”와 “문학” 또는 “Dichtung”과 “Literatur”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에는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보는 셈이죠.


(3)에 관한 답변


세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조금 다른 내용과 관련된 것이죠. 데리다는 “문학적”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쓰고 있고, 그 이유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한다고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와 형이상학의 역사의 연결, 양자의 연루는 반드시 하이데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고, 그보다 좀더 넓은 맥락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우선 문학적인 것을 이른바 “belles lettres”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학적인 것”을 시와 수사학, 미학 또는 비평이론 같이 순수한 또는 고급한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태도는 “belles lettres”야말로 좀더 고귀하고 본질적인 어떤 내용을 표현하거나 재현하고, 따라서 진리에 좀더 근접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죠. 또는 시가 소설보다 아니면 소설이 시보다 좀더 본질적인 문학적 형태, 문학적 장르를 이룬다는 태도도 마찬가지겠죠.

 

  데리다가 (당대의 텔켈 그룹을 포함하여) 말라르메나 바타이유, 아르토 같은 전위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구분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령 황지우(나 오규원) 같은 시인들이 80년대 초에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서 출발하자고 하면서, 이것과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죠. 그리고 구체적으로 신문의 “사람을 찾습니다”에 난 문안을 그대로 시로 옮겨적거나 글자의 크기를 달리 하거나 연의 배열을 파괴하는 등의 실험을 했던 적이 있죠. 이런 것들은 문학의 장르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적인 규범과 규칙 속에 포함시키기 힘든 것들인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울타리에 포섭되지 않는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죠.

 

* 좋은 질문에 비하면 좀 부족한 답변인데, 혹시 추가 질문이 있으면 더 말씀해주세요.

이번에는 빨리 답변을 드릴게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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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2-2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넘 감사드립니다. 불어와 독어까지 덧붙여주시니까 확 들어오네요! ^-^
다음에 또 질문 거리 생기면 또 올릴께요. 너무 감사드려요~

balmas 2006-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o^

cplesas 2006-03-0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의>부분을 다시 읽다 보면서 자잘하게 놓쳤던 의문이 다시 한 둘 떠오릅니다.
우선 저번 질문의 연장선에서 첫번째 답변해주신 부분인데요,

1)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 그리고 차이와 대립되는 동일성이 구분되는 주장은, 왠지 하이데거의 책인 <동일성과 차이>에 담겨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해서 더 힌트를 주신다면 어떤가요. 복잡하다면 제가 찾아서 책을 읽겠습니다. ^^

2) 3번의 답변에 대한 질문도 있는데, 이건 제가 생각을 조금 가다듬어 다시 여쭐께요;;

3) <함의>의 번역본 바로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절들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특히 대담자인 앙리 롱스가 <기록과 차이>의 각주에 있다고 하는 구절을 말하면서 이어지는 말라르메의 책(Livre)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까지가요;

4) 이건 좀 찾아보고 안 여쭤보려 했는데,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 또 나오는 듯 보여서, 그리고 제 무능력으로 인해 그냥 여쭙습니다. 앙리 롱스가 옐름슬레우의 '표현실질'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내용은 이해되는데 정작 표현실질과 기표/기의 관계란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각주를 봐도 잘 모르겠네요;;

balmas 2006-03-0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에 대한 답변

예,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를 보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이 나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구별이 아니니까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3)에 대한 답변

롱스는 “문제점을 이동시켜놓는 작업은 틀림없이 어떤 체계를 이룬다.”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은 당시에 데리다가 출간한 세 권의 책, 곧 󰡔목소리와 현상󰡕, 󰡔기록과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이 세 권의 책은 서로 상이한 주제, 상이한 대상을 다루고 있지만,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것”, 또는 좀더 불어에 가깝게 표현하면 “하나의 질문을 계속 전위(轉位)시키는 것”(ce qui reste le déplacement d'une question)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게 아니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들은 물론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이동으로서 그리고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작업으로서 이러한 체계는 자신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불확정적인 수단을 향해 어딘가에서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라고 답변하지요. 또는 약간 고쳐서 번역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겠죠. “그것들은 분명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전위로서, 그리고 하나의 질문의 전위로서 이러한 체계는 이 체계를 작동시키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을 향해 어떤 부분이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un certain système ouvert quelque part à quelque ressource indécidable qui lui donne son jeu).”


곧 데리다의 답변의 요점은, 세 권의 책이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체계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에 의해 작동되는 체계이고, 따라서 이 원천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체계, 말하자면 자신의 타자 또는 자신의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체계라는 뜻입니다.


4)에 대한 답변

음, 이 질문은 사실은 대답하기가 좀 곤란한데요. 옐름슬레우의 이론을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 ;;;

그리고 저같은 문외한이 어쭙잖게 설명하는 것보다 전문가들이 비교적 알기 쉽고 명쾌하게 해설해놓은 글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인철 교수가 쓴 글들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박인철, [옐름슬레우], 김치수, 박인철 외, 󰡔현대 기호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박인철, 󰡔파리 학파의 기호학󰡕 민음사, 2003 중, 1장 2절, 63-99쪽.

(참고로 책값은 위의 책이 훨씬 싸고, 내용 설명은 아래의 책이 좀더 간명합니다. ^^)




cplesas 2006-03-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감사합니다. ^^ 그런데 선생님이 다시 번역하신 대목들은 왜 이렇게,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