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에서 간행하는 [공동체문화와 민속연구] 3호에 수록될 글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에 관한 토론이나 논평을 원하는 분들은, 학술지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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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와 공동체
| 목 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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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3. 을의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4. 결론을 대신하여:유사 보편적 공동체로서 을들의 공동체 |
[국문초록]
이 논문은 을의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갑을 관계는 주요한 사회적 담론 중 하나로 존재해왔다. 갑을 관계는 계급관계에 더하여 젠더 불평등, 인종주의적 차별과 혐오, 국민/비국민의 배타적 대립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갑을 관계는 한국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모순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서 갑을 관계의 기저에는 을의 세 가지 존재론적 특성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 을은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으로 규정될 수 있다. 둘째, 을은 다시 보편의 잔여 내지 잉여로서 정의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을들이 일회용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나는 을이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유사 초월론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을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을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을의 세 가지 존재론적 특성에 기초하여 민주주의를 새롭게 사고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장-뤽 낭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지난 30여 년 동안 전개한 현대철학적인 공동체 이론은 과거의 공동체 개념과 달리 공동체의 특성을 ‘공동체 아닌 공동체’로 제시한다. 이는 곧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공동체와 개인의 이항대립을 넘어서 공동체의 새로운 개념적 기초를 사고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현대적 공동체 이론에 비춰보면, 을의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유사 보편성을 구현하는 공동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유사 보편적인 공동체로서 정치 공동체는 첫째, 자기 자신을 타자화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더 나아가 자신을 혼종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의 공동체만이 을의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을의 민주주의, 공동체, 장-뤽 낭시, 유사 보편성, 타자화, 혼종화
1. 머리말
“공동체, 배움길, 미디어”라는 큰 주제 아래 지역공동체와 배움공동체, 미디어공동체의 현황과 의미, 전망을 함께 논의하게 될 이번 학술대회에 내가 과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처음 발표를 제안 받을 때부터 고민을 해봤다. 이 고민은 지금까지 나의 학문적인 이력에 관한 성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흔히 말하듯이 서양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받았다는 점에서 보면 내 전공 분야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서양 근대 유럽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은 지금도 나의 주요 관심 주제 중 하나이고, 스피노자의 주요 저작, 특히 그의 대표작인 윤리학(Ethica)을 새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나는 1980년대에 성인이 되어 대학을 다닌, 그리고 지금은 50대 중반의 나이가 된, 이른바 586세대 또는 줄여서 86세대에 속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에 속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에 조금이나마 관여했고, 따라서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학부생이던 시절 번역된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의 이런저런 저술, 또 국가와 혁명, 제국주의론 등과 같은 레닌의 저작들을 열심히 읽었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 그람시의 옥중수고 같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저작들을, 선후배, 친구들과 함께, 또한 혼자 도서관에서 탐독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는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를 비롯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의 저작을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및 이 사상가들의 저작은 여전히 나의 연구의 주요 기반을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의 또 다른 전공 분야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학문적 이력을 언급하게 된 이상, 보통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관심 분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나는 학부생 시절부터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같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의 큰 영향을 받았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이렇게 공부를 직업으로 삼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작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연구는 내가 그전까지 즐겨 읽었던 루카치, 마르쿠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헤겔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결이 다른 것이었지만, 내 생각에는 현실을 훨씬 더 그럴 듯하게 설명해주는 연구였다. 더욱이 1987년 민주화 이행이 이루어지고 1989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이른바 “포스트” 담론들,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담론들은 직․간접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론과 연루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사실 알튀세르는 동시대의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인 자크 라캉,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또한 이 철학자들과 상당수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기원과 토대, 목적론에 대한 철학적 비판, 주체 개념에 대한 비판, 경제적 생산양식을 역사의 동력이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주의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 등이 이들이 공유하던 철학적 요소들이었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작에 뒤이어 푸코, 데리다, 라캉, 또는 들뢰즈와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열정적으로 읽고 나니, 내가 학생 시절에 심취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이런저런 한계들이 더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큰 통찰을 가져다준 이들의 철학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여러 권 번역했다. 데리다의 법의 힘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 그리고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쟁론,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정치와 철학 등이 내가 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서 번역한 저작들이다.
스피노자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나서 나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일자리를 얻게 됐다. 민족문화연구원은 우리나라 대학 연구소 가운데 가장 전통이 깊고 또 규모도 가장 큰 연구소 중 하나인데, 이름이 말해주듯이 한국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기관이다. 15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학 전문 연구기관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동료들과 함께 지낸 것은 나의 학문적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2021년 9월부터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알다시피 한국의 철학계에서는 제도적으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매우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려는 학생은 먼저 자신이 동양철학을 공부할 것인지 서양철학을 공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 가령 서양철학에서 어떤 것을 공부할 것인지, 플라톤을 공부할지, 칸트나 헤겔을 공부할지 아니면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 또는 다른 분야를 공부할지 정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전공 분야를 선택하게 되면, 특히 서양철학 전공자의 경우, 한국은 이제 학문적인 관심 영역에서 멀어지게 된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석사과정부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나는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철학사를 더 깊이 공부해야 했고, 스피노자와 관련된 서양 근대의 철학과 과학, 문화, 역사,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다보면 학부 시절에 얼핏 공부했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의 중국철학, 그리고 율곡이나 퇴계, 다산 등의 한국철학은 까맣게 잊게 된다. 한국의 역사, 문학,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이것이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을 공부한 주위의 선후배들을 보면, 그들 역시 자신의 전공 분야에 관한 공부에 집중하느라, 한국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제대로 살펴볼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한국에서 철학 연구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한국어로 이런저런 글을 쓰지만, 그것은 사실 한국의 역사나 문화, 정치 등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연구자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예컨대 오늘날 프랑스나 독일의 이런저런 철학자들은, 한국의 철학자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와는 달리, 전공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단절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스피노자를 공부하든, 칸트와 헤겔을 공부하든, 또는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하버마스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을 공부하든, 그들은 늘 자신들의 문화적․철학적 전통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공부와 연구, 교육을 수행한다. 그들에게서 전통과 근대는, 비록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연구자들처럼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 나라 학자들의 사례가 더 교훈적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본의 학문적 전통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국내에 소개된 일본 지식인들, 특히 철학자들의 작업을 보면서 가끔 신선한 충격을 받곤 한다. 특히 다카하시 데쓰야나 우카이 사토시 같은 일본의 저명한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이 일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가 직면한 실천적인 문제들(폭력, 전쟁, 차별과 배제, 기억과 애도, 책임 등)을 이를테면 을들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시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철학에 대한 독창적인 재해석을 산출하는 모습에서 깊은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다카하시 데쓰야, 고은미 옮김, 기억의 에티카:전쟁, 철학, 아우슈비츠(소명출판, 2021); 우카이 사토시, 신지영 옮김, 주권의 너머에서(그린비, 2010).] 우리가 아는 위대한 서양철학들(그것이 고대 헬라스 철학이든 근대철학이든 또는 독일철학이나 프랑스철학이든 간에)이 자기 시대의 문제를 껴안고 그것과 고투한 결과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 철학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사숙(私淑)한 서양의 철학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과 태도를 수행적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서양철학도는 자신의 문화적․철학적 전통이 아니라, 서양의 문화적․철학적 전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전공 분야를 연구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스피노자와 그의 시대, 곧 데카르트와 갈릴레이가 이룩한 과학혁명, 그 위에서 철학과 정치 영역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이룩한 토머스 홉스, 존 로크, 라이프니츠 같은 이들의 철학, 그리고 그들의 문화적 배경이 나 자신의 사상적․문화적 바탕을 이루었다.
이것이 매우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나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 들어와 한국학을 전공하는 동료들과 교유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민연에 있는 동안, 나 자신에게는 이제 사상적․문화적으로 너무나 멀어져서 마치 먼 외국처럼 되어버린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정치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그것을 나 자신의 철학적 탐구의 주제로 삼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의 한 가지 결과가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주제 중 하나인 을의 민주주의다.[진태원, 을의 민주주의:새로운 혁명을 위하여(그린비, 2017);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그린비, 2019) 및 「을들의 연대에 대하여」, 황해문화106호, 2020년 봄호를 각각 참조.]
아마도 오늘 학술대회에 참석한 분들 대다수에게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이 표현이 사뭇 생소할 것 같다. 갑과 을, 갑을 관계라는 말은 이제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 중 하나가 되어 익숙하겠지만, 을의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공동체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먼저 내가 제안하는 을의 민주주의 개념이 어떤 것인지 소개한 다음, 이것이 공동체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몇 마디 말해보겠다.
2.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장의 논의는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그동안 필자가 수행한 작업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1) (한국)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로서 갑을 관계
갑을 관계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의 주요 담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갑과 을은 원래 계약관계에서 계약의 당사자들을 지칭하던 평범한 명칭이었는데, 어느덧 위계와 차별, 모욕과 혐오, 지배와 배제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을 관계가 주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는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나름대로 발전해온 한국 민주주의의 근저에 그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잠식하는 구조적 장애가 존재함을 방증해준다. 더욱이 이러한 갑을 관계는 비단 우리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계급관계에 더하여 젠더 불평등, 인종주의적 차별과 혐오, 국민/비국민의 배타성 강화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갑을 관계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평등한 자유의 규범적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갑을 관계가 편재한 우리 사회 및 다른 나라들의 현실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실천적이고 구조적인 장애를 이루며, 심지어 그 불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갑을 관계는 근대 민주주의의 구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장애물이며, 이것에 대한 탈구축이 탈-근대적 민주주의의 향방의 핵심 쟁점 중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더 나아가 근대 민주주의가 이러한 갑을 관계를 허용하고 있고 실로 그 제도적 구조 및 실천에서 그러한 관계를 전제해온 한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그 원리에서 갑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가 19세기까지 무산자 계급을 배제해왔고, 20세기 중엽까지 여성의 참정권을 금지해왔으며, 21세기 오늘날까지 정치적 시민권의 자격을 국민 성원에 한정하고 있다는 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에티엔 발리바르는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민주주의를 “배제의 민주주의”라고 부른 바 있다. Etienne Balibar, Citizenship, London:Polity, 2015.] 따라서 갑을 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그것을 탈구축할 수 있을 때만 민주주의는 무산자, 여성, 외국인 내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배제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민주주의를 (탈구축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내가 제안하는 을의 민주주의는 20세기 한국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회에 편재한 갑을 관계가 민주주의의 구조적 가능성을 침식하고 불평등과 배제, 무시, 혐오를 확산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가깝게 본다면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재편하게 된 신자유주의가 산출하는 불평등과 삶의 불안정성, 이에 따른 각자 도생 및 혐오 정서의 확신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좀 더 근원적으로 보자면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비롯한 타율적 근대화와 수구냉전주의를 수반하는 분단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98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김대중 정부가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수행하고 뒤이어 노무현 정부가 집권함으로써 1987년 시작된 민주화 과정이 제도적 착근 및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는 식민 잔재의 청산과 분단 체제의 극복을 통한 평화복지국가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 연달아 집권한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단지 상이한 국정 목표 및 정책적 구상을 실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민주화 이행 과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反)민주주의적 통치를 실행함으로써 거센 대중적인 반대에 부딪혔으며, 결국 헌정 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및 대통령 탄핵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겠다는 목표 아래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 소득주도성장 및 혁신경제, 공정사회 건설의 국정 목표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임기 말이 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과연 문재인 정부가 이러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왔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과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2022년 3월 9일 치러진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여당 후보가 패배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지난 5년 동안 문재인 정부의 국정 활동을 비판하기 위해 촛불 정신의 일탈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특히 진보적인 성향의 지식인들이나 언론, 시민사회단체 등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할 때마다 촛불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자기 규정한 바 있는 촛불정부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보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18 광주항쟁 37주년 기념사에서 국민주권을 광주민주화운동, 촛불집회, 문재인정부를 연결하는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을 때, 사실 오늘날과 같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이미 예상된 것이나 다름없다.[진태원, 「서문」, 을의 민주주의(그린비, 2019) 참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참모들, 그 주위의 지식인들은 국민주권이야말로 촛불집회를 “촛불시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에 적합한 키워드로 간주했을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촛불집회가 국민주권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한 그것은 결코 혁명으로 전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국민주권이라는 키워드는, 우리나라 헌법에서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 명시되어 있는 국민이 실제의 정치사에서는 복종과 규율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온 현실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자각, 더 이상 통치자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복종하지 않겠다는 자각에 기대고 있다. 실제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2008년 미국산 쇠고기수입반대 집회 및 2016~17년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널리 불려온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노래는 광범위한 대중이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수동적인 복종의 대상이 아닌 주권자로서의 국민, 통치자의 부당한 통치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의 국민으로 주체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국민이라는 개념도 그렇거니와 특히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은 상상적인 것 내지 허구적인 것이다(이것은 가상이나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원리로 정립된 것이며,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으로 지칭되는 이들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실천 속에서 그 주권을 행사할 경우에만,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비로소 국민주권은 현실적인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젠더에 따라 구별되고 혈통과 지역, 학벌 및 다양한 연고에 따라 나뉜다. 예컨대 재벌 총수들 및 그 후계자들과, 그 기업들에 고용되어 여러 제품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같은 국민이기는 하되 동등한 국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른바 승계 작업과 관련하여 엄청난 불법을 자행한 재벌 기업의 총수에게 재판부가 엄정한 사법적 판결 대신에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제안한 것은, 국민이라고 해서 다 같은 국민은 아니라는 것을 사법부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같은 국민이기는 하되 동일한 국민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노동운동가 김혜진 선생이 비정규직 노동자는 “2등 국민”이라고 말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김혜진, 비정규사회(후마니타스, 2015).]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모욕과 함께 제도적․관행적으로 다양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국민 역시 남성 국민과 동등한 국민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국민이기는 하되, 특정한 젠더라는 이유로 직업 선택의 자유나 결혼의 권리 등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성적 소수자들은 어떤 국민의 범주로 분류해야 할까? 따라서 1등 국민이 있다면 2등 국민도 존재하며, 아마도 3등 국민, 4등 국민 등도 존재할 것이다. 갑과 을 사이의 구조적․제도적․관행적 분할이 국민이라는 범주를 가로지르고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촛불시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국민 주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촛불시민혁명”은 국민이라는 말에 내포된 이러한 구조적 애매성(ambiguity)을 묵과하거나 인정하는 혁명이라는 것, 다시 말해 을에 대한 다중적인 차별과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혁명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에 내재한 이러한 애매성의 한계를 실제로 드러낸 것은 바로 문재인 정부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촛불시민혁명”의 정신은 1퍼센트의 국민과 10 퍼센트의 국민, 20퍼센트의 국민을 위한 국민주권이었다고 비판한다고 해서 과도한 것은 아닐 터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 지지자들처럼 “국민주권”이나 “촛불시민혁명” 같은, 겉보기에는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을들에 대한 다중적 차별과 배제를 함축하는 용어들에 의거하기보다는 좀 더 명확하게 을의 민주주의, 을들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2) 을의 정치적 존재론
을의 민주주의를 이론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을의 존재론적 지위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좀 더 철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을이라는 정치적 주체 또는 행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해한다.
(1)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의 피통치자
1차적인 수준에서 보면 을이라는 개념은 피통치자 일반을 가리킨다. 이들은 정치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지니고 있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헌법적 원리가 명문화하듯 “국민 주권” 내지 “인민 주권”의 담지자로서 실질적으로 행위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통치자, 종속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다. 피통치자로서의 을은 국민 구성원 대다수를 구성하는 이들이되, “국민 주권” 내지 “인민 주권”이라는 근대 민주주의의 헌법적 원리와 달리 실천적으로는 주권자가 아니라 종속자(subjectus)로서 존재하는 이들을 가리킨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민주주의의 현실은 이처럼 주권자로서의 인민 내지 국민이 지배 엘리트에 대한 예속자로서, 곧 을로서 존재하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요컨대 같은 국민이되 누구는 갑으로 군림하고 누구는 을로 복종하는, 더욱이 을의 을로서 무시와 혐오,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을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통치의 주체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통치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게끔 되어 있는 사람들 일반, 곧 2등 국민을 표현한다.
(2) 일회용 인간:보편에서 배제된 이들
이러한 1차적인 수준의 을을 넘어서는 2차적 수준의 을도 존재한다. 이러한 2차적 수준의 을은 을 중의 을이며, 보편에서 배제되는 이들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그들은 “남들”, 곧 1차적 수준의 을들이 다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연애, 결혼, 육아, 휴가, 여행 등), “남들”이 다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노동권, 사회권, 심지어 인간의 권리까지도),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이들(주거, 소득, 연금 등)이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배제 내지 잔여로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불평등한 위치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없거나 극히 적으며, 그러한 항의를 통해 그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제된 이들로서의 피통치자들에 대한 연구는 특히 푸코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였다.
미국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2차적인 수준의 을에 관해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해준다. 프레이저는 최근의 여러 작업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의 “착취(exploitation)”가 가능하기 위해 미리 전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수준의 착취, 말하자면 착취의 착취에 해당하는 개념을 “수탈(expropriation)”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Nancy Fraser, “Behind Marx’s Hidden Abode:For an Expanded Conception of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 181, 2015; “Roepke Lecture in Economic Geography:From Exploitation to Expropriation”, Economic Geography, vol. 94, no. 1, 2018을 각각 참조. 또한 진태원,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참조.]
이것은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에게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생명체로서 탄생해야 하고 양육되고 교육되어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성장해야 하며, 또한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동을 맡아서 수행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을 최근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돌봄 노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후자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따라서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의 회로 바깥에 존재한다.
또한 중심부 자본주의 노동자들 및 그의 가족들이 생필품을 싼 값에 구입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부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회로 안팎에서 저임금과 초과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다른 존재들이 항상 이미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레이저가 말하는 착취와 구별되는 수탈이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탈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바로 을의 을, 을 가운데에서도 을에 속하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보편에서 배제된 2차 수준의 을들을 지칭하기에 적절한 말이 ‘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라틴 아메리카 광산 노동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주변부 국가들 도처에서, 그리고 이른바 선진국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 이외에도 ‘일회용 노동자’, ‘일회용 청년’ 같은 용어들도 쓰이고 있다. 케빈 베일스, 일회용 사람들:글로벌 경제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1999), 이소, 2003; Fred Magdoff & Harry Magdoff, “Disposable Workers:Today's Reserve Army of Labor”, Monthly Review, vol. 55, no. 11, April 2004; 헨리 지루, 심성보 옮김, 일회용 청년: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킹콩북, 2015).] 현대 사회의 노예제도에 관한 전문가인 케빈 베일스는 일회용 인간은 현대적 노예 제도의 표현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회용 인간은 우리나라에서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이 단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우리 시대, 곧 신자유주의적인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효과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신의 처지가 일회용 인간과도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비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 노동자들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3차 산업혁명(제레미 리프킨) 내지 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경제에서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비정규노동을 넘어 훨씬 더 파편화되고 불안정한 노동들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긱 경제(gig economy)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경제에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가중된 경쟁 속에서 저임금과 고용 불안을 감수해야 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고용 형태에서 노동자들이 보장받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3) 민주주의적 보편의 유사초월론적 조건
그런데 을이라는 정치적 행위자가 문제적인 것은, 한편으로 보면 을은 보편의 잔여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오히려 을이야말로 보편의 가능성의 근거와 불가능성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라고, 따라서 데리다의 용어법을 빌리면 보편의 유사초월론적(quasi-transcendental) 조건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칸트 이후의 초월론 철학이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을 탐구한다면, 유사초월론은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는 데리다가 아포리아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유사초월론 개념에 대해서는, 진태원, 「유사초월론:데리다와 이성의 탈구축」, 철학논집53(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8) 참조.] 이것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이를 포풀루스(populus)와 플레브스(plebs)라는 라틴어의 차이로 표현한 바 있다.[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London․New York:Verso, 2005.] 포풀루스가 어떤 정치 공동체의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따라서 가령 국민국가의 합법적인 성원들 전체로서의 국민)이라면, 플레브스는 포풀루스의 일부분이기는 하되, 기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종속과 차별, 배제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우리의 용어법으로 하면 플레브스는 을이 된다). 플레브스가 한 사회의 구성이면서 동시에 차별과 종속, 배제의 대상이 되는 집단들로, 곧 을들로 남아 있는 한 그 정치공동체는 그만큼 민주주의적 공동체로서의 자격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치공동체가 보편적인 의미의 민주주의적 공동체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플레브스에 근거를 둔, 곧 플레브스를 공동체의 대표, 공동체의 전체로 삼는 공동체여야 한다.
둘째, 하지만 이러한 보편성은 매우 역설적인 형태를 띤 보편성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플레브스가 포풀루스 전체가 된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정치 공동체를 해체하거나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을들을 배제하지 않기 위해 이주자와 외국인에 대한 배제를 철폐하는 정치 공동체를 생각해본다면, 그 공동체는 국경의 전면적인 철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보편적인 개방과 포용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극심한 공포와 사적인 폭력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한 플레브스가 포풀루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플레브스는 단지 투표의 권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직을 의무적으로 수행하고 모든 정치 활동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효율성에서 문제가 될 뿐만이 아니라 과도한 정치적․규범적 부담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보편이 가능하기 위해서 플레브스는 포풀루스 전체가 되어야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 공동체의 해체나 기능 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플레브스는 민주주의적 보편의 근거를 이루지만 동시에 그 불가능성의 근거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유사초월론적 역설, 데리다가 사용한 다른 용어법으로 하면, 민주주의의 자기면역(auto-immunity)은 을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다양한 규범적 함의를 가지며, 제도적인 대안들을 숙고해볼 것을 요청한다.
3. 을의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1) 전통적 공동체 개념의 난점
이제 이러한 고찰에 입각하여 공동체 문제를 살펴보자. 공동체의 문제는 꽤 긴 이론적․실천적 역사를 지닌 문제이며, 따라서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논의와 쟁점을 포함하고 있는 문제다.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의 문제는 근대성(modernity) 자체와 같은 외연을 지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철학이든 정치학이나 사회학이든, 또는 문학이나 문화이론이든 간에, 공동체에 관한 거의 모든 이론적 논의는 전통 사회와 근대성의 단절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공동체에 관한 거의 모든 이론적 논의들이 19세기 후반 독일의 사회학자였던 페르디난트 퇴니스(Ferdinand Tönnies)의 고전적인 저작 공동사회와 이익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에서 출발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이론적 기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페르디난트 퇴니스, 곽노완․황기우 옮김,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순수사회학의 기본 개념(라움, 2017).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관행적으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옮기고 있지만, 사실 독일어 단어들의 뜻을 감안하고, 또 책의 개념적 구별을 고려하면, ‘공동체와 사회’라는 번역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여둔다. 이점에 관해서는 박호성, 공동체론:화해와 통합의 사회․정치적 기초(효형출판, 2009), 98쪽의 제안을 참조.] 퇴니스의 이 저작은 제목이 말해주듯, 공동체(또는 공동사회)와 사회(또는 이익사회)의 개념적 대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전자에서 후자로의 역사적 이행이 사회 전개의 기본적 경향이라는 관점을 표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퇴니스가 이해하는 의미에서) 공동체가 혈연적․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취향이나 습관 또는 신념과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성물을 가리킨다면, 사회는 무엇보다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해서 결합된 개인들 사이의 인공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근대성 이전의 전통적인 사회적 관계의 주요 유형을 표현한다면, 사회는 근대성 이후 형성된 사회적 관계의 주요 유형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전통의 난점 중 하나는, 이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는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약화되고 급기야 상실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어촌 대신 도시가 발달하고, 전통적인 가족 및 친족 관계를 대신하여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타산적이고 익명적인 관계가 사회적 관계의 기본적인 형태로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이 향유하던 친밀성과 동질성을 더는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상실되어가는 공동체를 그리워하거나 다시 한 번 소생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된다고 가정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면, 이는 공동체의 문제를 올바르게 제기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탈)현대적 삶의 조건 속에 부합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태를 모색하는 데도 지장을 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전통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조건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와 같이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더는 혈통과 지역성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공동체 형태가 존속되는 것,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표준적인 공동체 모형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퇴행적인 요구일 뿐이다. 둘째, 이처럼 전통적인 공동체를 공동체의 원형으로, 더 나아가 모든 공동체의 근원적 본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동체라는 것이 처음부터 일정한 시공간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고, 역사적 변화에 따라 항상 끊임없이 변화되고 재구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는 완고한 민족주의자들이나 공동체주의자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잘못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몇 천 년의 역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변하지 않는 ‘공동체나 민족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민족의 불변적인 실체, 일본 민족의 불변적인 실체가 존재하고, 한민족의 불변적인 실체(때로는 생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한민족 DNA”라고 불리기도 하는)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조선부터 오늘날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수한 배달민족의 혈통을 보존해왔다고 가정하고, 이웃한 다른 민족들의 위협에 맞서 이러한 혈통과 문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는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에서도(어쩌면 훨씬 더) 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북한 노동신문 2006년 4월 27일 사설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족은 력사적으로 형성된 민족성원들의 사회생활단위이고 운명공동체이며 … 단일성은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민족의 영원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인 단합의 정신적 원천[이다].”[박명규, 「네이션과 민족」, 동방학지147권(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9), 54쪽에서 재인용.] 이 사설은 운명공동체로서의 민족의 불변하는 단일성에 기반하여 남한의 다문화주의 정책을 민족의 혈통을 더럽히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그릇된 정책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주의(nationalism)의 근본 특성을 이루는 국민=민족(nation=ethnicity)이라는 등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서, 여기에는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가정이 깔려 있으며, 다시 여기에는 전통 시대의 공동체를 공동체의 원형 내지 본질로 이해하는 관점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 문제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2부에 수록된 글들을 참조.]
셋째, 이렇게 되면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해된 공동체를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약화시키거나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악하다고 여기는 이분법적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면 기존의 공동체에 대하여 이질적이거나 타자적인 것에 관해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상이한 존재자들이나 입장들 내지 견해들에 대해서도 억압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쉽다. 공동체는 통일성이나 단일성을 지녀야 하며 공동의 목표에 대한 구성원들의 헌신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성원들 사이에서 가치나 의견의 일치가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근현대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장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일수록 늘 동질성과 조화, 통일성을 강조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치즘이 지배하던 독일 사회가 아리안 혈통에 입각한 민족적 통일성을 강조한 것이 그 사례이고,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 것이 또한 그 사례다. 그 외에도 현대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재 체제들이 가장 골몰했던 것이 내부의 반대자들, 이단자들을 색출하고 억압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여러 사례들을 통해 쉽게 입증될 수 있다. 전체주의 체제일수록 치안 권력의 힘이 막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2) 공동체의 의미 변화:공동체 아닌 공동체
따라서 우리가 현대 사회의 조건에 맞는, 더욱이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 부합하는 공동체의 형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 개념을 표준적이거나 불변적인 공동체 개념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프랑스와 이탈리아 철학자들의 논의가 공동체 문제와 관련하여 널리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 철학자들은 국내의 연구에도 이미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인 장-뤽 낭시(Jean-Luc Nancy)는 1986년에 출간된 무위(無爲)의 공동체라는 저작으로 오늘날 공동체에 관한 철학적 탐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은 바 있다.[Jean-Luc Nancy, La communauté désoeuvrée, Paris:Christian Bourgois, 1986; 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 무위의 공동체(인간사랑, 2010). 또한 이 책에 대한 모리스 블랑쇼의 답변과 그에 대한 장-뤽 낭시의 응답을 묶은 다음 책도 참조.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 장-뤽 낭시는 2003년 모리스 블랑쇼가 사망한 이후 또 다시 블랑쇼와 관련하여 공동체에 관한 주요 저작을 출간한 바 있다. Jean-Luc Nancy, La Communauté désavouée, Paris:Éditions Galilée, 2015. 이 후자의 저작에서는 블랑쇼에 관해 좀 더 비판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낭시의 이 저작 이후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Georges Agamben)이나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 프랑스의 자크 랑시에르나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같은 철학자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공동체 문제에 관해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발표한 바 있다.[조르조 아감벤, 이경진 옮김, 도래하는 공동체(꾸리에, 2014); Roberto Esposito, Communitas:The Origin and Destiny of Community, 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 2010(이탈리아 원서는 1998); Immunitas:The Protection and Negation of Life, London:Polity, 2011(이탈리아 원서는 2002);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도서출판 길, 2013);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정치와 철학(도서출판 길, 2015);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 2010);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정치체에 대한 권리(후마니타스, 2011).] 이들의 논의는 매우 난해할뿐더러 또한 상당히 사변적이기 때문에 이들의 저작을 이해하고 그것을 공동체의 실제와 관련하여 적용하거나 활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저작이 비단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 문화연구 및 문학 분야에서도 널리 논의되는 것은, 이들의 작업이 공동체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논의는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이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이론적․실천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모두 좌파적 입장을 지닌 이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은 한편으로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같이,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에 입각한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전체주의적 관점에 대한 대안이라고 간주하는 자유주의적 관점, 곧 근대 사회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들 사이의 계약 관계에 기초해 있으며, 거기에서 자신의 규범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왜 자유주의적 관점까지도 문제 삼는가에 대해서는 철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다. 가령 아감벤 같은 사람은, 전체주의가 됐든 자유주의가 됐든 모든 근대의 정치 공동체는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호모 사케르를 주권적 권력에 포섭(배제하면서 포함하기)하는 데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 정치 공동체의 기본 패러다임은 강제수용소에 있다고 이해한다. 또한 자크 랑시에르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정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치안(police) 공동체라고 이해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전체주의 사회와 자유주의 사회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성의 차이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철학자들은 당연히 전체주의적 공동체론에 대하여 비판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이를테면 반(反)공동체로서의 공동체)의 철학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왜 이들이 전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본성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만을 발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각자 상이한 논리와 이유가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 모두 공동체의 문제는 개인성의 문제와 본질상 연동되어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는 전혀 상이한 두 가지 문제이며,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곤 한다. 더 나아가 이렇게 두 개의 문제를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현대 사회의 조건에 걸맞은 공동체 형태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이나 이것을 오늘날의 조건을 무시한 채 계속 고수하려는 이들이 지닌 문제점은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거나 소수자의 차이를 억압하려고 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호하고 소수자의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개인성을 각각 별개의 문제로 분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반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득력은,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나 여기에 설득되는 사람들이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반면 이 현대 철학자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공동체 문제의 해법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문제의 일부라고 이해한다. 사실 자유주의적 관점은 개인들이 공동체에 앞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은 공동체가 성립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속성(그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든 아니든 간에)을 이미 지니고 있는 존재자들이다. 사실 개인들이 공동체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계약이 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개인들의 선행적 존재가 가정되어야, 이들 사이의 사회계약을 공동체의 정당성의 토대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은 자신이 전제로 하는 개인들이 과연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단순히 경험적 질문이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은 제기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개인들 각자는 공동체 및 다른 사람들과 무관하게 이미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주권적인(sovereign) 존재자들이다. 이들은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자들이다. 이를테면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물이 자유주의적 관점이 가정하는 개인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이러한 자율적이고 주권적인 개인들이 구성하는 공동체는 계약에 기반을 둔 인공적인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고 그것에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공동체다.
내가 언급한 철학자들이 이러한 자유주의적 관점을 공동체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기각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들 중 이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아감벤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내지 자유주의를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기는 하지만,[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이탈리아 원서는 1995);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새물결, 2008).] 발리바르나 낭시 또는 에스포지토는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랑시에르까지도) 민주주의 내지 자유주의를 분명히 전체주의와 차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앞의 책; Jean-Luc Nancy, La vérité de la démocratie, Paris:Éditions Galilée, 2008; Roberto Esposito, Immunitas, op. cit; Roberto Esposito, Terms of the Political, New York:Fordham University Press, 2013을 각각 참조. 에스포지토는 특히 정치적인 것의 항들에서는 전체주의를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정치와 대립시킨다.] 오히려 그들의 비판의 논점은 민주주의가 공동체와 개인성의 문제가 연동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론적으로 맹목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사실 양자는 이점에서는 동일한 맹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 철학자들의 이론적 독창성, 그리고 영향력의 핵심은 이들이 공동체 문제에 관해 급진적으로 반토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공동체의 토대이든 개인성의 토대이든 간에, 일체의 토대에 기반을 둔 철학적 입장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이 우리의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는 공동체에 대한 관념을 제시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공동체 없는 공동체, 또는 공동체 아닌 공동체 같은 표현들이며, 낭시의 개념을 빌리자면 죽음의 공동체(“공동체는 타인의 죽음에서 드러난다.”),[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인간사랑, 2010), 47쪽.] 또는 랑시에르에 따르면 안-아르케(an-arkhe)-아르케는 그리스어로 기원이나 토대, 또는 지배를 의미하며, 안-아르케는 말 그대로 “기원 없음”, “토대 없음”, “지배 없음”을 뜻한다-로서의 민주주의[자크 랑시에르, 불화:정치와 철학(도서출판 길, 2015) 중 특히 1장 참조.] 같은 개념들이다.
공동체 아닌 공동체 같은 개념이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탈현대적 관점에서 공동체에 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민족이든, 인종이든 아니면 공통의 계급이나 문화든 또는 주권적 개인이든 간에, 일체의 토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볼 때, 공동체가 됐든 개인이 됐든 간에, 그것은 토대적인 것, 아르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선행하는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곧 공동체와 개인은 존재론적으로 더 근원적인 어떤 것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의 효과이지, 토대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와 개인에 선행하는 이 근원적인 어떤 것은 이런저런 실체가 아니라 사실은 관계다. 공동체와 개인은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것을 자신의 유일한 토대, 하지만 토대가 아닌 토대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공동체에 관한 현대 철학적 사유의 바탕에는 관계론적 사유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관계론적 사유라는 공통점 내에서도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은 저마다 상이한 논리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장-뤽 낭시는 “공동적인 것(en commun)”을 항상 우리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따라서 개인의 실존을 초과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도(따라서 이점에서는 전체론적(holistic) 논리 편에 서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공동적인 것 또는 “함께(avec)”는 개인으로도 집단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개인들의 실존에 속하는 것”[장-뤽 낭시, 「공산주의, 단어」, 슬라보예 지젝․코스타스 두지나스 엮음, 김상운 외 옮김, 공산주의라는 이념(그린비, 2022), 271쪽.]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본질, 나 자신의 고유한 속성(propriété)은 나 혼자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공동적인 것” 내지 “함께”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며,[같은 책, 281쪽.] 개인 또는 개성이란, “복수적 단수/독특한 복수(singulier pluriel)”[같은 책, 283쪽.]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크 랑시에르는 좀 더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정체화(identification)와 주체화(subjectivation)를 구별한다. 전자가 치안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의 논리에 따라 그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일정한 정체성과 몫을 배분하는 논리,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의 아르케 공동체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이러한 정체화의 논리를 위반하고 변경하는 실천적인 활동 자체를 의미한다. 주체화의 핵심은 “자기(soi)가 아니라, 자기가 다른 자기와 관계를 맺어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도서출판 길, 2013), 118쪽.]이다. 그것은 기존의 계급적 질서의 바탕을 이루는 정체화의 논리를 깨뜨리는 것으로, 탈정체화 또는 탈계급화의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체란 관계 이전에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있는 것, 둘-사이에 있는 것”이며, 정치적 주체화는 “사이에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이 평등을 현실태로 만드는 것”[자크 랑시에르, 같은 책, 119쪽.]이다.
4. 결론을 대신하여:유사 보편적 공동체로서 을들의 공동체
공동체 문제에 관한 활동가들 및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 글의 목표는 너무 사변적인 철학적 논의 대신 가급적 평이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최대한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논의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사변적일 수밖에 없는 철학적 논의를 더 깊이, 더 상세하게 진행하는 대신, 이제 결론을 대신하여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공동체는 과연 어떤 공동체일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탐구하는 데 방금 논의했던 공동체에 관한 현대철학적 논의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간단히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해보겠다.
을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갑을 배제한 을들만의 정치 공동체가 아니다. 또는 갑을 물리치고 병이나 정을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의 주체로서 을들을 세우자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내가 너무 당연한 이 말을 굳이 하는 것은, 독자들 가운데는 을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을들만의 민주주의로 이해하는 사람들, 을의 민주주의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을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을의 민주주의 역시 을들을 또 다른 갑으로, 곧 새로운 권력의 주체로 세우려는 이론이라는 점에서는 기존의 정치 이론들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결국 갑을 관계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사라질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관점에 맞서 을의 민주주의를 견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에 걸맞은 공동체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을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공동체는 보편성, 또는 데리다식 용어법을 원용하자면 유사 보편성(quasi-universality)을 구현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명시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을, 이미 존재하는 어떤 공동선이나 이해관계 또는 기타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현대 철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공동체를 여전히 어떤 실체적인 토대 위에 구성하고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을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유사 보편적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타자화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타자화한다는 말은, 공동체에서 억압받거나 차별받는 또는 배제되는 타자들의 기준에 입각하여 자신을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뜻이다. 한 가지 의미 있는 사례를 제시해보자.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인도 출신 탈식민주의 역사학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21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과 인도를 보면서 자랑스러워하고 또한 앞으로 미국보다 더 강력한 국가가 되어 세계를 주도하기를 바라는 그의 중국 및 인도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런데 당신들이 진정 세계를 실제로 지배하게 될 때, 당신들은 당신들의 지배의 희생자들이 당신들의 지배를 비판할 수 있도록 어떤 비판의 관점들(terms of ciriticism)을 제시해줄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당신들은 당신들의 전통 내부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어떤 자원들을 생산해낼 수 있습니까? [Dipesh Chakrabarty, “From Civilization to Globalization:the ‘West’ as a Shifting Signifier in Indian Modernity”,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13, no. 1, 2012, p. 140.]
차크라바르티의 논점은, 진정으로 보편적인 공동체 또는 문명은 자신의 타자들이 자신을 비판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러한 비판을 위한 자원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서구가 세계를 주도하는 문명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또는 군사적인 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가 지닌 막강한 소프트 파워 덕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프트 파워의 핵심은 서구의 타자들이 서구를 비판하기 위해 바로 서구 자신이 생산해낸 문화적․지적 원리에 근거할 때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이런 역량 덕분에 서구 문명은 여전히 보편적인 문명으로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을의 민주주의에 입각한 유사 보편적 공동체는 자신을 혼종화(混種化, hybridization)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과 타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우고 타자의 정체성과 본성적으로 다른 자신의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고수하기보다,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혼종화할 수 있어야 한다. 출입문을 지닌 공동체(gated community)는 요새로서의 공동체로 전환되기 쉬운데, 이는 결국 공동체 안과 밖에서 위계를 세우고 차별과 배제를 제도화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을들이 생겨나고, 을들 사이에 다시 을과 병의 차이가 생겨나고, 병들 사이에서는 다시 병과 정의 차이가 생겨나고,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은 을의 민주주의에 합치하는 공동체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실제 공동체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 새로운 혁명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혁명, 문명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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