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 심지어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조차도 재현된 대상에 이타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재현된 대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예술은 대상을 벌거
벗음 속에서, 진정한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낸다. 진정한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
니라 말하자면 형식의 부재 자체이다. 즉 벌거벗음은 외재성이, 형상이 이루어내는
내재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림의 형식과 색채는 사물 자체를 은폐하
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형식과 색채는 사물의 외재
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
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자연을 모방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멀리 자연으로부터 떨
어져 나간다. 또한 이런 까닭에 과거 세계들에 속한 모든 것, 즉 고풍스러운 것, 옛것
들은 미감적 인상을 내뿜는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84-85쪽
" L'art, même le plus réaliste, communique ce caractère d'altérité aux objets représentés qui font cependant partie de notre monde. Il nous les offre dans leur nudité, dans cette nudité véritable qui n'est pas l'absence de vêtements, mais, si on peut dire, l'absence même de formes, c'est-à-dire la non-transmutation de l'extériorité en intériorité que les formes accomplissent. Les formes et les couleurs du tableau ne recouvrent pas, mais découvrent les choses en soi; précisément parce qu'elles leur conservent leur extériorité. la réalité reste étrangère au monde en tant que donné. Dans ce sens, l'oeuvre d'art, à la fois, imite la nature et s'en écarte aussi loin que possible. C'est pourquoi aussi tout ce qui appartient à des mondes passés, l'archaïque, l'antique produit une impression esthétique."
Emmanuel Levinas, De l'existence a l'existant, Vrin, 1990, pp. 84-85.
“지각 속에서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소리, 색채, 말은 어떻게 보면 그것들이 은폐하는 대상들을 가리킨다. ... 그리고 지각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통해서 또한 주관적 의미를 가진다. 즉 외재성은 내재성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사물 자체의 외재성이 아니다. 예술의 운동은 감각(sensation)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각과 결별하는 데서 성립하며, 대상을 조회하는 기능[대상에 준거시키는 기능renvoie à l'objet]을 하던 성질을 그 대상 조회의 기능[대상 준거의 기능]으로부터 떼어놓는 데서 성립한다. 지향은 대상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 자체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 속에서의 길 잃어버림이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 감각은 대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리하여 감각은 더 이상 주관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은 지각의 질료가 아니다. 예술 속에서 감각은 [지향적 인식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요소로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감각은 요소의 비인격성으로 되돌아간다.”(85-86쪽)
“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 감각적 성질의 방식은 감각으로서의 감각 사건, 즉 미감적 사건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부른다.”(86쪽)
“그러므로 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 여기서 사물 자체란 상위 등급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상을 제외시켜 버렸을 때 어떤 새로운 요소로 귀착하는 그런 것으로서의 사물 자체를 말한다. 이것은 ‘외면dehors’과 ‘내면dedans’의 모든 구별과 이질적이며 명사의 범주조차 거부한다.”(87쪽)
“게다가 그림이란 세계의 한 조각을 떼내에서 따로 놓아두는 것이며, 또 그림이란 서로 침투할 수 없고 서로 이질적인 세계들의 공존을 내재성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이미 하나의 적극적인 미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를] 한정짓는 질료적 필연성에서 기인하는 그림의 한계는, 이 한정에서 오는 추상적이고 돌연적인 선들에 힘입어 미학상의 긍정적 제약을 가능케 해준다. 또한 이런 것은 무관심한 덩어리, 로댕의 조각상을 빚어내는 그런 덩어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재는 세계가 부재하는 실재의 이국적 벌거벗음 속에서 정립된다. 실재는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 나온다.”(88쪽)
“그러나 더 이상 객관적[객체적, 대상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내재성을 가리키지 않는 예술의 이국적 실재는 그 스스로 하나의 내재성의 겉봉[겉면, enveloppe]으로서 나타난다. 예술 작품 속에서 인격성[개성, personnalité]을 획득하는 것은 우선[무엇보다] 사물의 내재성 자체이다. [...]
예술적 실재는 영혼의 표현 수단이다. 사물 안에 깃들인 영혼이나 예술가의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우리 세계와 통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타인의 이타성이 타아로 유지되는 한에서는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공감을 통해 접근될 수 있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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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독회 모임이 있어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많지 않은 예술에 관한 논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어서 옮겨봤다.
나름대로 흥미있는 통찰이기는 한데, 초기 저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때(1940년대)와 지금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어서 그런지(실로 엄청난 격차가 있다!)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 더 불만을 말하자면, 이런 글을 읽다 보면,
가령 감각과 지각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일상적인 감각
사이의 관계는? 또 왜 예술에 대해(서만) 이런 특권을 부여할까? 과연 "일상적 지각" 같은 게
존재할까? 등등
이런 물음을 묻게 되는데, 그는 자기의 체험, 자기의 인식의 경험에 기초를 둔 통찰들을 툭툭 던지지,
따져 묻고 답변하고 의심하고 새로 모색해보고 하지는 않는다.
(레비나스식) 현상학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이런 책들을 몇 권 읽다 보면 금방 물린다.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나 고진류의 저술도 마찬가지다.
이 책([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백미는 아무래도 1장인 것 같다. 깊이도 있고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군데 오역들이 엿보인다. 오역처럼 읽히지 않는 오역들도
있고 명백하게 논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오역들도 있다. 물론 뒷 장들에도 조금씩 있고 ...
무난한 번역인데, 학문적인 토론에 사용하려면 오역들을 좀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