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ㅋ 불교계 사람들한테는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정말 재미있는 인터뷰네. 잘은 모르지만 불교계 내부의 사정을 잘 드러낸 것 같다.

재일 재미있는 말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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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황우석 옹호, 지관 스님의 콤플렉스!

[신승근의 도전인터뷰]

‘100억원 모금’ 불교계에서 다른 목소리 내는 조성택 <불교평론> 주간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동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가톨릭과 기독교가 생명윤리를 내세워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서양 윤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엄호사격과 함께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전폭적 지원에 나섰던 한국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가 멈출 기미가 없다. 줄기세포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외부세력 음모론’을 제기했던 불교계는 줄기세포 연구가 총체적 조작과 사기극으로 판명났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고 외친다. ‘황우석 박사 지키기 재가불자들의 모임’을 이끌고 있는 동산반야회 김재일 회장은 “황 박사의 연구 재개와 원천기술 재현을 위한 100억원 재단 설립 범국민운동본부 설립” 방침을 밝혔고, <법보신문>에 따르면 성금 기탁 의사를 밝힌 스님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의 내부 인사인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불교학 전공)가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불교평론> 2006년 봄호 권두언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감싸기 중단”을 요구하며 자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겨레21>은 서울대 조사위의 발표에 대한 황 교수의 해명 기자회견이 열린 직후인 1월12일 오후 조성택 교수를 만나 불교계 내부를 향해 칼날을 세운 이유를 물어봤다.

2002년엔 나 혼자 황우석을 지지했다

곧 나올 <불교평론>을 통해 불교계의 황우석 옹호 분위기,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황우석 지지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이건 단순히 황우석씨에 대한 옹호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가톨릭은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자신들의 종교적 생명윤리에 저촉된다는 것을 파악해 반대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는 유용성을 살리려는 나름의 노력의 결과로 성체 줄기세포 연구에 1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가톨릭이 역사상 사회 문제에 관여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다. 하지만 불교계는 세속 문제에 대해 말하는 논리가 약하고 역사적 경험과 노하우도 적다. 근현대에 발생한 문제에 대한 대응도 상당히 미숙했다. 황우석 옹호는 종교 간 경쟁이 펼쳐진 현대적 다원주의 종교 체제에서 불교계가 지닌 콤플렉스가 작용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인가.

=서구에서는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종교라며 관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불교가 과학적이라는 얘기까지 한다. 황우석 감싸기는 한국 불교가 서양이 불교를 보는 이런 관점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 “우리 불교는 이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기독교보다 더 현대적인 종교다”라고 내세우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근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가 종교로서 한 역할과 비교하면 불교의 역할은 적다. 문화적으로 불교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근대 이후 불교는 극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고, 오히려 반사회적·반민주적·반민족적 행태를 보여왔다. 이런 콤플렉스가 과학의 문제(황우석 사건)를 계기로 터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불교계의 호재였다. 무의식적으로 불교계가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불교가 교리적 측면에서 이런 문제에 기독교보다 좀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좋은 지점으로 생각한 것이다. 불교와 과학은 다루는 세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일 수는 있지만 불교가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은 줄기세포 연구에서 서양 논리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며 동양 논리를 강조했다. 과학적 연구에 유용한 측면도 있는 것 아닌가.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생명 개념 자체를 창조주에 의한 것으로 신성시하지 않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다. 다만 논의를 하되, 불교적 입장뿐 아니라 다른 세속적 사항, 과학과 윤리, 인류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려를 생략한 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자기 입장을 먼저 개진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돌아가신 전임 총무원장 법장 스님도 (줄기세포 연구 지지에)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불교학계의 논의를 보면 찬반이 나뉘었다. 하나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배아가 생명이냐 아니냐는 논외로 하고 이것이 가져다줄 요익중생, 즉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자비의 윤리가 더 크고 그게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뜻이라는 이유였다. 반대 논리는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는 연장선에 있으므로 배아에 손대는 것은 ‘불살생’의 불교 윤리를 해친다는 것이었다. 불교학계에서 이 문제를 최초로 얘기한 2002년 <불교평론> 주최 생명윤리 세미나에서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한 것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동국대 교수 등 나머지 분들은 전부 반대했다. 난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대해 종교가 잘못 재단했듯 종교적 가치와 과학적 사실의 문제는 다를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찬성했다. 당시 동국대 김종욱 교수 등은 불교에서 생명은 연장의 개념이고, 배아는 생명이 될 수 있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손대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난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후 더 깊이 연구해 2005년 춘계학술대회 때 반대자가 됐다. 그런데 2002년의 반대론자들은 이제 전부 찬성론으로 돌아섰다.

전두환 보호와 황우석 보호의 차이

왜 그런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난 법장 스님의 원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우석이 불교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정말 모르겠다. 그게 이상했다. 또 지금도 이해 안 되는 것은 불교계가 기독교와 달리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면 그 연구를 지원해야지, 왜 특정 연구자를 지원하냐는 것이다. 그건 황우석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황씨 자신도 항상 염주를 두르고 다니지만, 불교계도 황씨가 불교인이라는 것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첨단과학에 종사하는 국민적 영웅인 황우석씨가 “나는 불교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교인에게는 상당한 자긍심을 주었다. 그게 (황우석 지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거기에 법장 스님, 지관 스님 등 조계종 총무원장이 앞장선 것인데, 문제 있는 태도다. 가톨릭 주교나 추기경이 거느린 스태프의 전문성은 대단하다. 반면 조계종 총무원장이 갖는 전문성은 대단히 미약하다. 교육 과정에서 차이가 나고 신부들은 재가자(속세에 머문 교인)와 연대가 밀접한 데 반해, 조계종은 재가자의 개입을 제한하고 자기들끼리 한다. 불교계가 사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고 역사적 노하우도 적다 보니 대응이 미숙하고, 이번 (황우석 교수 파문) 같은 현안에 대한 발언도 상당히 촌스럽다. 불교계가 최근 세사에서 일반 정서와 달리 행동한 게 백담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받아들인 것인데, 이번 경우도 흡사하다. 그런데 전두환 보호는 사실 종교의 역할이다. 정치적 고려를 한다면 전두환을 받아들이면 안 되지만 정치 논리를 넘어 용서와 화해라는 종교 논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황우석 감싸기보다는 더 나은 사건이었다.

전두환을 받아들인 것보다 황우석을 두둔하고 감싸는 게 훨씬 나쁜 행동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황우석은 사실의 문제였다. 모든 사실이 종결된 다음에 과학자가 아니라 인간 황우석을 불교계가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모르겠는데, 과학이라는 사실의 문제, 이미 조작이라고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자꾸 감싸는 것은 문제가 있다. 좋게 보면 우직하고 의리파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불교계가 그렇게 무분별하게 과학자 황우석을 감싸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지관 스님이 황우석을 옹호하는 태도를 바꿨다는 기미는 없다. 혹시 불교계 전반이 황우석 옹호에 공감한 것 아닌가.

=불교계의 말없는 다수는 오히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찬반이 쪼개진 상황에서 이미 돌팔매 맞고 있는 사람에게 돌 하나 더 던질 수 없어 침묵할 뿐이다.

불교계에서는 황 교수에게 원천기술의 재현 기회를 주자며 100억원 모금 운동까지 일고 있는데.

=말이 안 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도 하나의 단체고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공익적 연구에 민간기업의 돈이 투여되는 것을 우려한다. 100억원의 모금 주장은 황우석과 친한 특정 단체나 기업에서 황우석에게 100억원을 주겠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또 황우석의 연구 결과가 정말로 요익중생을 실현할 정도인가. 갈 길이 엄청나게 먼데, 100억원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다. 100억원 지원설은 그간의 지원을 볼 때 불교계의 스타 만들기 차원이지 진정으로 국익이나 요익중생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관 스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서양 윤리라고 무조건 황우석 연구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성체 줄기세포 연구 지원이라는 나름의 대안도 내놓았고, 개신교의 어른인 강원룡 목사가 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가능하다는 신학적 입장을 제기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배아가 생명이라고 해서 당장 연구 성과가 나오는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불교계도 그렇게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우린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줄기세포 연구에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교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지율의 위험한 독선주의와 폭력

불교계에서는 그런 비판적 의견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말없는 다수가 있다. 지관 스님이 얘기한 것에 대해 동국대 교수 등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감히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다. 현안 분석과 전문가적 안목이 필요한데, 그런 싱크탱크도 없이 그냥 총무원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발언을 막 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이다. 불교도 세속 문제에 전문가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 전문성 없이 자꾸 불교적 논리만 갖다대니 항상 각론에서 논리가 달리고 밀리는 것이다.

어떻게 현안에 대한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가.

=출가자와 재가자가 좀더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 출가자만의 집단, 출가자 우위는 곤란하다. 깨달음만 추구하는 조계종 중심의 출가자 집단이 아니라 일반 불교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정치·교육·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부작용을 일으켰지만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거의 무임 승차해왔다. 만해 한용운의 경우도 조계종단에서는 결코 띄우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결혼도 했고, 대처를 주장했다. 하지만 근대 정치·사상·문학에서 드문 스타고 그를 통해 불교가 가지는 사회적 이미지도 좋아지기 때문에 못 놓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자꾸 황우석씨를 붙잡아두려는 것 같다.

지율 스님의 계속되는 단식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환경 문제는 사실의 문제다. 얼마나 훼손하는지, 개발하지 않는다고 다 보호되는지 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간과한 채 자기 가치관의 심증적인 문제만 갖고 덤벼드는 게 있다. 환경과 과학 문제는 한국 불교계가 먼저 선점했다고 자부하는 분야다. 환경 문제는 더욱 그렇다. 환경이 근대화 이후에 빚어진 여러 문제를 다룬 것인 만큼 전통 종교들이 거기에 목소리 낼 지분이 있다. 실제 새만금 개발 반대 삼보일배, 지율의 단식 등 사회적 이슈를 선점해왔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숨 건 단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대중과 함께 가야 할 문제다. 또 환경단체와 달리 종교인의 환경운동은 다른 지점이 있어야 한다. 새만금 사건 때 당진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했는데, 종교인은 내 뜻을 이루겠다고 이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없는 것이다. 삼보일배도 내 뜻을 이루는 게 목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자신까지 부정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수행 과정이라야 한다.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것은 환경운동가들의 시위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부분이 전혀 구분 없이 이뤄지고,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가 한 일이 없고 사회적 지분이 없다고 하는 나름의 자책감,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율 스님의 단식이 환경과 생명 존중의 중요성을 일깨운 긍정적 측면도 있지 않는가.

=물론,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내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도롱뇽이, 배아가 생명이다 어쩌다 할 정도로 고도의 생명윤리를 가졌다면 육식 문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도롱뇽이 아파요”라고 말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간과하는 식육 고기의 도축 과정에 대해 불교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건 자기 모순이다. 또 불교 사찰 내에서 벌어지는 비환경적인 재건축 등 엉망진창인 일들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그대로 놔두면서 천성산만 가지고 그러는데, 정말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반 환경단체 활동가라면 그냥 자기 목표가 ‘천성산 지키기’고 그것만 하면 된다. 하지만 종교인이기 때문에 자기 입장도 한번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종교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인데, 그런 점에서 (지율 스님은) 차별성이 없다. 나만 죽으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독선주의고 엘리트주의다. 나 하나 죽어서 된다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이냐.

아줌마 보살들만 있으면 다다?

불교계를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불교계 안에서 생존이 가능한가.

=난 너무 궁금한 게 있다. 나는 황우석, 지율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불교가 깨달음이 아니라 행복의 종교가 돼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조계종의 본질적 문제에 바로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런 블랙홀 같은 분위기가 기괴하고 음산하다. 아는 스님들에게 여쭈면 그냥 웃고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요”라고 답한다. 기본적으로 깨달음이 가능한가란 의문이 가능하고, 조계종의 화두선은 이미 말도 안 되고 물건너간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조계종 존립의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비판인데도 그냥 가만히 있다. 달라이라마가 히트를 치는 것 등은 한국 사회가 불교에 대해 다른 방식의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데도, 조계종은 거기에 답을 못 내놓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그냥 블랙홀이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왜 그런가.

=너는 떠들어라, 그래도 우리는 아줌마 보살들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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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2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퍼갈게요.

balmas 2006-01-2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러세요.

라주미힌 2006-01-20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 귀에 경읽기가 불교에서 나온 속담인거 맞네요.
종교의 컴플랙스라.. 재미있는 현상이네욤.

balmas 2006-01-2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소귀에 경읽기 ...
어젠가 신문기사 보니까 1000억 모금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불교계에는 무슨 눈먼 돈이 그렇게 많은지 ... 그 돈이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수십만을 구제하겠구만.

비로그인 2006-01-2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0억으로

비영리 기업 세워서 장애를 가지신 분들 자활 도우미 같은 것 하면

진짜 대단할 텐데. 웬 사기꾼에게.....ㅡㅡ;;


꼬마요정 2006-01-2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가 사회에 간섭하는 건...정말 어려운 일이에요...흠...
이 글을 읽고 성철큰스님이 그리워지는 건 왜 일까요..?? ^^;;

로쟈 2006-01-2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율이나 황우석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는 무모함과 순진함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불교계 내부에도 '목소리'가 있군요...

깍두기 2006-01-20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한 마디는 참.....^^
이 분, 유머감각 있으시네요.

balmas 2006-01-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글쎄 말이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불교계도 그렇고 ...
꼬마요정님/ 종교인의 사회 관여는 사실 쉽지 않은 문제죠. 그래도 저런 식이면
정말 너무 한 것 같아요.
로쟈님/ 그 주장은 약간 편파적인 데도 있는 것 같군요. 지율 스님이야 어찌 되었든
계속 정부로부터 경원되고 기만당한 입장이니 같은 평면에 놓고 평가하기는 좀 어려울 듯 ...
깍두기님/ 압권이죠, 저 한 마디. ^^

릴케 현상 2006-01-2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네요

수퍼겜보이 2006-01-21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balmas 2006-01-2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오랜만이삼. ^^ 거침없죠. ㅎㅎ
수퍼겜보이님/ 감사. :-)

2006-01-22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술, 심지어 가장 사실주의적인 예술조차도 재현된 대상에 이타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재현된 대상은 우리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예술은 대상을 벌거

벗음 속에서, 진정한 벌거벗음 속에서 나타낸다. 진정한 벌거벗음은 옷의 부재가 아

니라 말하자면 형식의 부재 자체이다. 즉 벌거벗음은 외재성이, 형상이 이루어내는

내재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림의 형식과 색채는 사물 자체를 은폐하

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형식과 색채는 사물의 외재

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실재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세계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자연을 모방하는 동시에, 가능한 한 멀리 자연으로부터 떨

어져 나간다. 또한 이런 까닭에 과거 세계들에 속한 모든 것, 즉 고풍스러운 것, 옛것

들은 미감적 인상을 내뿜는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84-85쪽 

 " L'art, même le plus réaliste, communique ce caractère d'altérité aux objets représentés qui font cependant partie de notre monde. Il nous les offre dans leur nudité, dans cette nudité véritable qui n'est pas l'absence de vêtements, mais, si on peut dire, l'absence même de formes, c'est-à-dire la non-transmutation de l'extériorité en intériorité que les formes accomplissent. Les formes et les couleurs du tableau ne recouvrent pas, mais découvrent les choses en soi; précisément parce qu'elles leur conservent leur extériorité. la réalité reste étrangère au monde en tant que donné. Dans ce sens, l'oeuvre d'art, à la fois, imite la nature et s'en écarte aussi loin que possible. C'est pourquoi aussi tout ce qui appartient à des mondes passés, l'archaïque, l'antique produit une impression esthétique."

 Emmanuel Levinas, De l'existence a l'existant, Vrin, 1990, pp. 84-85.

 

 

 

“지각 속에서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소리, 색채, 말은 어떻게 보면 그것들이 은폐하는 대상들을 가리킨다. ... 그리고 지각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통해서 또한 주관적 의미를 가진다. 즉 외재성은 내재성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사물 자체의 외재성이 아니다. 예술의 운동은 감각(sensation)을 복원하기 위하여 지각과 결별하는 데서 성립하며, 대상을 조회하는 기능[대상에 준거시키는 기능renvoie à l'objet]을 하던 성질을 그 대상 조회의 기능[대상 준거의 기능]으로부터 떼어놓는 데서 성립한다. 지향은 대상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감각 자체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리고 감각 속에서, 즉 아이스테시스(aisthesis) 속에서의 길 잃어버림이 미감적 효과를 일으킨다. 감각은 대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리하여 감각은 더 이상 주관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감각은 지각의 질료가 아니다. 예술 속에서 감각은 [지향적 인식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요소로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감각은 요소의 비인격성으로 되돌아간다.”(85-86쪽)



“예술에서 감각적 성질은 대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상으로도 인도해주지 않으며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 감각적 성질의 방식은 감각으로서의 감각 사건, 즉 미감적 사건이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감각의 음악성이라고 부른다.”(86쪽)


“그러므로 감각과 미학은 사물 자체를 생산한다. 여기서 사물 자체란 상위 등급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대상을 제외시켜 버렸을 때 어떤 새로운 요소로 귀착하는 그런 것으로서의 사물 자체를 말한다. 이것은 ‘외면dehors’과 ‘내면dedans’의 모든 구별과 이질적이며 명사의 범주조차 거부한다.”(87쪽)



“게다가 그림이란 세계의 한 조각을 떼내에서 따로 놓아두는 것이며, 또 그림이란 서로 침투할 수 없고 서로 이질적인 세계들의 공존을 내재성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이미 하나의 적극적인 미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를] 한정짓는 질료적 필연성에서 기인하는 그림의 한계는, 이 한정에서 오는 추상적이고 돌연적인 선들에 힘입어 미학상의 긍정적 제약을 가능케 해준다. 또한 이런 것은 무관심한 덩어리, 로댕의 조각상을 빚어내는 그런 덩어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실재는 세계가 부재하는 실재의 이국적 벌거벗음 속에서 정립된다. 실재는 부서진 세계로부터 솟아 나온다.”(88쪽)



“그러나 더 이상 객관적[객체적, 대상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내재성을 가리키지 않는 예술의 이국적 실재는 그 스스로 하나의 내재성의 겉봉[겉면, enveloppe]으로서 나타난다. 예술 작품 속에서 인격성[개성, personnalité]을 획득하는 것은 우선[무엇보다] 사물의 내재성 자체이다. [...]

예술적 실재는 영혼의 표현 수단이다. 사물 안에 깃들인 영혼이나 예술가의 영혼과의 공감을 통해서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우리 세계와 통합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타인의 이타성이 타아로 유지되는 한에서는 예술 작품의 이국 정서는 공감을 통해 접근될 수 있다.”(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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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독회 모임이 있어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많지 않은 예술에 관한 논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어서 옮겨봤다.

나름대로 흥미있는 통찰이기는 한데, 초기 저작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때(1940년대)와 지금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격차가 있어서 그런지(실로 엄청난 격차가 있다!)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나 더 불만을 말하자면, 이런 글을 읽다 보면,

가령  감각과 지각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일상적인 감각

사이의 관계는? 또 왜 예술에 대해(서만) 이런 특권을 부여할까? 과연 "일상적 지각" 같은 게

존재할까? 등등

이런 물음을 묻게 되는데, 그는 자기의 체험, 자기의 인식의 경험에 기초를 둔 통찰들을 툭툭 던지지,

따져 묻고 답변하고 의심하고 새로 모색해보고 하지는 않는다.

(레비나스식) 현상학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이런 책들을 몇 권 읽다 보면 금방 물린다.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나 고진류의 저술도 마찬가지다.

 

이 책([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백미는 아무래도 1장인 것 같다. 깊이도 있고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몇군데 오역들이 엿보인다. 오역처럼 읽히지 않는 오역들도

있고 명백하게 논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오역들도 있다. 물론 뒷 장들에도 조금씩 있고 ...

무난한 번역인데, 학문적인 토론에 사용하려면 오역들을 좀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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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9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1-2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행복나침반님, 오랜만이에요. ^-^
레비나스에 관심이 있으시구나. ㅎㅎ 그런데 저도 레비나스는 잘 몰라요.
조금씩 읽고 있는데, 가끔 페이퍼를 한번씩 올릴 테니, 행복나침반 오셔서
같이 이야기해봐요. :-)
숨어계신님/ 이경신 씨가 번역한 [니체와 철학]은 오역이 꽤 있습니다. 아주 못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어려운 구절들에서는 자주 오역이 나옵니다. 불어본이나 기타 외국어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같이 읽는 게 좋습니다.
[들뢰즈 커넥션]은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두 번역본을 비교해서 말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 ...

onookoh 2006-01-2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온욱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새 불어 공부 (이제 문법 막 익힌 정도)하던 참에, 아침에 불어 한 페이지씩 독해라는 목표를 세워 놓고 괜찮은 공부사이트를 찾고 있었어요. 이런 글들 (불/한 대역) 가끔씩 올려주시면 읽는 저로서는 일석이조겠네요. 눈팅만 하다가 한 자 남기고 갑니다. 혹시 추천할 만한 불어공부 사이트 알고 있는 분 계시나요? 추천 바랍니다...

balmas 2006-01-2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
외국에서 설을 맞으시는 기분이 좀 쓸쓸하시겠어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시기 바랍니다. 공부도 잘 되시구요. :-)
직장 생활 하시면서도 공부는 여전히 열심히 하시네요.
그렇다면 앞으로는 가끔씩 불어 원문하고 번역문을 함께 올려드려야겠네요. ㅎㅎ
불어공부 사이트는 제가 별로 아는 데가 없네요. 혹시 대학 불어불문과 홈페이지
같은 데 가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종종 들르세요. ^-^
 

역시 과갤에서 하나 더!

이런 센스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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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33조 얘기하는 아그들 한번 봐봐라

 

오레오

 

진짜 뻘짓이긴 한데, 줄기세포 시장규모가 33조라는 것에 대해 이 흉아가 한번 분석해 볼께.
먼저 가정.
1. (만든 게 없다고 밝혀졌지만) 6개월 주면 황박이 줄기세포 만들 수 있다.
2. 그 줄기세포 이용해서 특허 딸 수 있고 기술료 벌 수 있다.
3. 그 무슨 연구소에서 발표한 33조 주장이 맞다.
4. (아무도 장담 못하지만) 줄기세포가 몇년 안에 임상에 사용되어 난치병 고칠 수 있다.

이 정도 가정이면 황빠들도 다들 인정하겠지? 그럼 진도 나가자.

우선 시장규모 33조라는 게 순전히 기술료 수입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어. 그걸 좀 나눠보면 줄기세포 제작비용 + 기술료 + 시술비용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

우선 줄기세포 제작비용.
황박의 구라를 그대로 인정한다 해도 17개 정도에서 줄기세포 하나 나올꺼야. 그러면 2명 정도에게서 난자를 채취한다고 치자. 김수 연구원이 얘기한 딴딴한 난자가 하나도 안나온다는 가정 하에서 말야.
불쌍하게 신용불량자 처지에 놓은 두 여성이 난자를 내놓겠지. 150씩 줬다고 쳐. 이들에게 300만원이 들어가. 우리나라가 줄기세포허브 사업해서 난자 제공하면 전세계를 상대로 줄기세포 하나당 300을 벌겠지.
줄기세포 만드는 연구원들 인건비, 기타시설사용료 등등 해서 하나당 200씩 잡자. 그래서 500만원이 고스란히 대한민국에 떨어지는 돈이라고 보자.

둘째, 기술료
너네들 무지 착각하는 게, 기술료로 엄청난 돈 벌 수 있는 줄 아는데, 기술료의 패러독스는 "비싸면 안쓴다"는 거야. LG전자 (의 자회사인 제니스)가 디지털TV 원천기술 있는 것 알지?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TV로 업그레이드 하는 이 상황에 LG가 이 원천기술로 얼마나 번다고 그래? 신화창조의 비밀에도 나오고 그래서 참 자랑스럽긴 한데, 실제로 1년에 몇천억 수준이란다. 엄청난 기술료 주고 가져오는 퀄컴의 휴대폰 칩도 개당 10만원이 안된다고 들었어.
줄기세포 특허를 이용한 기술료? 이거 껌값이라고 보는 게 맞아. 더군다나 기술은 점점 개량될 것이고, 개량된 기술로 줄기세포 만들면... 지금 내놓은 특허는 오히려 개량된 기술에게 밀릴 가능성도 크지.
어쨌든, 정말정말 인심 써서 기술료 100만원 잡자. 너무 싸게 잡았어? 그럼 천만원 해볼까? 난치병 환자들에게서 집단 테러당할 일 있니? 어차피 기술료 역시 시장에서 결정되는거야. 비싸면 안써. 합리적인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는거야.

세째, 시술비용
이게 진짜 돈되는 거야. 병원에 입원해서 각종 검사하고, 의사들 여럿 동원되어서 수술하고, 그러고 또 회복되는동안 입원해 있고...
좀 어려운 수술인 암제거 수술이랑 비교해보면 대략 5000만원? 우리나라처럼 건강보험공단이 시술료 낮게 책정하는데서는 이렇고, 미국처럼 의료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에서는 시술비용은 억을 넘어간다고 보는 게 맞지.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시술비용은 대한민국이 10%도 건질 수 없다는거야. 전세계 환자들에게 한국 와서 치료하라고 할래? 그냥 지네 동네에서 지네 의사들이 치료할꺼야. 그러니까 33조를 한국이 다 먹을거라는 착각은 제발 하지를 말아줬으면 해.

자 이제 더하기 들어간다.
제작비 (500만원) + 기술료 (100만원) + 시술비용 (5천만원) = 5600만원

이건 정말 싸게 잡은 1인당 치료비라고 볼 수 있지. 난치병 치료에 5600만원이라... 의사들이 웃겠지만...
어쨌든, 이제 33조를 5600만원으로 나눠보자.
대략 57만명이 나오네. 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는 인간이 1년에 57만명 정도라는 거지.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순수하게 벌어들일 돈은? 57만*600만원 = 3조 4천만원.

어마어마하게 큰 것 같지?
하지만 기술료로 벌 돈은 1/6인 5천7백억 정도란다. 그나마 줄기세포 제작기술이 특허로 인정이라도 받는다면 말야. 노성일이 40% 먹고, 서울대 산학연인가 그곳이 60% 먹는다.
나머지는 줄기세포 제작하는 연구원에서 1조 정도 돌아가고, 난자 기증하시는 성스러운 분들이 1조 7천을 먹지.

근데... 이까지 계산하니까 조낸 이상하지 않니? 난자 기증으로 1조 7천을 먹을 수 있다고????
아까 환자 57만명이라고 그랬지? 1인당 2명의 난자 기증자로 계산했고, 그렇다면 1년에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네!!!! 이 장사 몇달이나 버티겠어? 난자 기증할 의지가 있는 2-30대 여성이 1년에 114만명이나 있어야 한다고????

3줄 요약
----------------------------------------------
33조는 줄기세포 제작비 + 기술료 + 시술비용을 포함한다.
그 중에 시술비용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게다가, 33조 벌려면 1년에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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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1-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 33조원을 왜 5600만원으로 나눈 거죠?
33조원은 저 무슨 연구소에서 추정한 전체적인 '시장규모'이고
그걸 몽땅 '먹을 수 있는 돈'으로 치부한 것에 대해서 반박하겠다는 것 같은데,
환자의 숫자를, '33조 나누기 5600만원'으로 한 것은 이해가 안 가네요.

환자 한사람에게 치료비 5600만원씩 받는다고 치면,
33조 벌려면

딸기 2006-01-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3조 벌려면 57만명 치료해야 한다, 그러니까 114만명이 난자를 기증해야 한다
그런 논리인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엔 이 글 역시 말장난이 넘 심한 것 같아요.

balmas 2006-01-1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딸기님, 33조원을 5600만원으로 나눈 건, 33조원이라는 시장 규모를 가정했을 때, 그리고 난치병 치료에 5600만원이 든다고 가정했을 때, 난치병 환자의 숫자가
얼마인지, 그리고 치료에 소용될 난자의 갯수가 얼마인지 따져보자는 뜻이겠죠.
글을 쓴 사람은, 이런 가정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보여주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과갤은 나름대로 진지한 사람들이 많은데, 표현법들은 상당히 짓궃고
장난기가 많이 섞여 있답니다. 요즘 인터넷 글쓰기의 한 풍경이죠. :-)
 

 

심심하던 차에 DC 과갤에 가봤더니 이런 주옥같은 글이 있네!

한번들 보소. 이런 걸 혁신 정책 보고서라고 만든 놈 고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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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조의 탄생 배경

 

/꼴통 요 컴온


줄기천국! 검증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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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1-1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런 보고서만 보고 돈 던져주는 것들도 '잇속챙겨 천국티켓' 같군요.
끄아~ 어따가 '천국'을 들이대냐! ㅡ,.ㅡ

balmas 2006-01-18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 나라의 과학 정책이라는 게 정말 한심하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이죠.
저는 심사위원 명단들도 좀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포월 2006-01-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기천국! 검증지옥! 쓰러질뻔했습니다. 푸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balmas 2006-01-1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요즘 줄기교도라고 하잖아요. :-)
 

 

 

[기획] 경찰폭력 뿌리뽑기 프로젝트 ①

"전·의경제도, 폐지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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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우 
[편집자주] 경찰폭력으로 사망한 전용철·홍덕표 농민의 장례식이 지난해말 치뤄졌다. 결국 대통령의 사과와 경찰청장의 사퇴를 불러왔지만 경찰폭력의 근본원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에 본지에서는 경찰폭력을 뿌리뽑기 위한 제도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지난해 11월 15일 진행된 농민대회에서 농민 두 명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및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사퇴가 이어졌다. 하지만 뒤이어 정치권과 언론은 '폭력시위'를 문제 삼으며 정치권의 정책적 실패의 화살을 또다시 집회·시위 참가자들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

지난 7일에는 전·의경부모들과 전·의경 출신 전역자들이 경찰청 앞에서 평화시위 정착과 전·의경의 인권보호를 주장하며 시위를 진행했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전·의경들이 시위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복무과정 중 인권침해를 당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불합리한 현실이다. 전·의경제도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합리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전·의경제도의 탄생 비화

전·의경제도는 한국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후방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지구경찰대가 편성되었고 이를 모태로 1970년 12월 31일 대간첩작전 수행을 위해 전투경찰대설치법이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전투경찰대가 일반 경찰관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전투경찰대설치법 제정을 통해 병역자원을 전환복무시켜 군복무자를 대상으로 구성하게 한 것이다. 이후 1975년 12월 31일 법개정으로 전투경찰대의 임무는 대간첩작전 및 치안보조업무로 확대되었고 전투경찰은 주로 반정부시위, 파업 등의 현장에 투입되었다. 또 1983년에는 늘어나는 집회·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치안수요 증가를 이유로 전투경찰대설치법을 개정, 의무전투경찰대가 신설되었고, 전경-의경의 이원체제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전·의경제도는 한미연합사가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현실 하에서 군병력을 독자적으로 운용하기 어려웠던 군사정권이 '대간첩작전'과 '사회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값싸게 치안병력을 확보하여 대정부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정권안보 수단으로 악용하였고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전·의경을 시위진압에 동원할 근거가 없다"

1991년 당시 현역 전경이던 박석진 씨는 전투경찰대설치법 및 시위진압명령 등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결정에서 군에 입대한 자 가운데 작전전투경찰을 차출하여 전임시키는 방식에 대해 "대간첩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반면 작전전경을 시위진압과 같은 치안보조업무에 동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합헌 결정이 내려졌지만 4명의 소수의견이 존재했다. 이들 4명은 소수의견에서 "전투경찰대로 전임되는 현역병은 대간첩작전의 수행을 임무로 하고 있을 뿐이므로, 경찰의 순수한 치안업무인 집회 및 시위의 진압의 임무는 결코 국방의무에 포함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전투경찰대설치법 중 '치안업무의 보조' 부분은 헌법 제39조 제1항의 규정의 정신과 제2항 규정에 위반된다는 주장이다. 이계수 교수(건국대 법학) 역시 <공법연구>(제31집 제4호)에 실은 '2003년 한국의 군사법과 치안법:군사와 치안의 착종과 민군관계의 전도'라는 글에서 "'대간첩작전 시'에만 출동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병력을 모든 일상적 시위현장에 투입시키는 관행과 그러한 관행을 현행법에 의해 정당화하는 해석은 헌법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과 경찰의 조직 및 임무의 구분이라는 헌법상의 국가구성원리는 사실상 파괴되고 만다는 것.

게다가 현재로서는 '대간첩작전 수행'이라는 기본 목적이 여전히 실효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시민의신문>과 인권실천시민연대가 주최한 '전의경의 역할과 인권' 토론회(아래 토론회)에서 송기춘 교수(전북대 법학)는 "오늘날과 같은 남북의 화해분위기에서처럼 대간첩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군부대의 병력수준과 작전능력을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은 규모의 대간첩작전 조직을 경찰이 별도로 가져야 할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의경의 시위진압 동원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의경제도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는 전투경찰대설치법은 의경의 역할을 '치안보조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송 교수는 "시위의 진압은 가장 격렬한 형태의 범죄대응이며 그 진압의 일선에 투입되는 것은 분명 보조적인 수준을 넘어선 본연의 치안 활동"이라며 "설사 전투경찰제도를 시인한다 해도 의경이 수행할 수 있는 임무는 '보조적'인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의경의 시위진압 동원에 반대했다.


전·의경제도 폐지에 대한 반론의 반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당시 전·의경제도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치안공백 우려 및 재원확보의 어려움을 근거로 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국방부는 의경제도를 폐지할 방침을 세우고 경찰 측에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경찰은 집회·시위 관리 차질로 인한 사회혼란 우려, 재정부담 가중 등을 이유로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며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경찰청이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의경제도를 폐지하고 경찰관으로 대체한다면 현 의경인력의 2배의 경찰 인력을 증원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연간 약 2조180억 원이 추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회에서 김상균 교수(천안대 경찰행정학)는 "경찰이 수행하는 업무는 대부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와 직결되는 업무인데 이러한 일을 전문성과 책임감이 부족한 의무경찰이 수행하는 것은 치안서비스의 향상과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는 데 역부족이므로 중장기적으로 의무경찰은 폐지 내지 최소화하고 정규경찰인력을 확충하여 법집행현장은 경찰관에 의해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전·의경제도는 사실 전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걸 만큼 오랫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특히 전경제도에 대한 위헌 논란은 헌재 결정 이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대간첩작전'이라는 목적이 사실상 불필요해진 상황에서 제도의 존립 근거는 더욱더 부족해졌다. 군사독재시대에 민주화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제도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부당하게 유지되어온 전·의경제도의 폐지에 따른 사회적 공백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헌우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경찰감시팀 자원활동가입니다.
인권하루소식 제 2972 호 [입력] 2006년01월12일 7:40:12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news&id=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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