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러니깐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에 불과한데요..
사실 우리 같은 학부생들이 '푸코'라는 사람을 그나마 개괄적이고 평이한 수준에서 접하게 되는 계기는 아무래도 푸코의 원전을 읽는 방식보다는 일종의 철학 개괄서를 통해서 많이 접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 개괄서로 가장 유명한 것은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철학과 굴뚝 청소부'라고 할 수 있지요. 저 역시 아직 푸코의 원전을 찬찬히 읽어본 적은 없거든요. (그래서 더욱 이번 수업이 기대됨!)

그리고 뭐 더 덧붙여 보자면, 적어도 저의 독서 경험 안에서는 과학사를 가르치는 홍성욱 선생이 정보감시와 관련하여 책세상 우리문고에서 출판한 '판옵티콘'관련 서적 정도? 벤담의 판옵티콘을 푸코가 어떻게 현재로 이끌어와 재해석 하는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죠. 적어도, 제가 접한 푸코에 대한 해설들은 이 정도가 전부일텐데요...

이러한 기본정보만을 보고 선생님의 강의 계획서를 봤는데, 사실 상 강의 계획서를 이해하는데 굉장한 무리가 뒤따르고 그러진 않았거든요... 즉, 제가 푸코에 대해서 갖고 있는 (혹은 갖게 된) 문제 설정이라는 것이 사실 이번 수업에서 다룰 그것과 전혀 예상하기 힘든 영 딴 판인 얘기는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지요. (아, 제가 너무 제 자신을 과신한건가요? 혹여나 건방지게 보였다면 용서해주세요)

그런데, 이렇게 '감시' 내지는 '비정상인' 등에 대한 테마로 푸코를 주로 접근하는 방식들이 저는 개인적으로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대해 언급한 것들과 푸코와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거든요. 이진경씨도 어느 인터뷰에서 이를 아주 명시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푸코를 이런 식으로 접근 하는 게 아무래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지배적인 독해법인 것 같구요.. 이런 시도들이 푸코의 여러 연구 성과들을 '사회화'라는 테마로 회귀시키는 듯한 인상도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독해법이 아무래도 푸코에 대한 '지배적'인 독해인 것 같구요. 이런 시도 속에서 사실 나오는 푸코의 주요 저작들이 이번 강의 계획서에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푸코의 '말과 사물'같은 저작을 보면 오히려 이 사회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고 하더라구요. 이 부분은 제가 직접 읽어보지 못하고 들은 얘기라서 확신은 못하지만요..

문득 카프카의 학술원에서의 보고가 떠오릅니다..

아, 길고 재미없고 영양가 없는 저의 리플..ㅠㅠ 죄송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 푸코에 대한 "지배적 해석"이 그런 뜻이었군.

내가 보기에는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혼동도 있는 것 같은데.

우선 일리가 있다는 건, 국내의 푸코 연구가 사회학적 또는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지. 사실 푸코에 대한 이런저런 석사 논문들이나 연구 논문들을 살펴 보면

아마 사회학도나 정치학도들이 쓴 것들이 제일 많을 거야.

그리고 이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푸코는 대개 1970년대 초, 중반의 푸코, 곧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권]으로 대표되는 계보학 시기의 푸코지. 이 시기의 연구들에 권력이나 지배,

감시, 규율과 같이 사회과학적인 주제들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

 

철학 분야에서 푸코에 주목했던 사람은 이정우씨인데, 그는 푸코의 고고학,

그것도 [지식의 고고학]을 중심으로 푸코를 읽으려고 했지. 그래서 "담론학"이라는 이름도 만들고

 '동아시아 담론의 고고학'이라든가 기타 나름대로 두어 가지 계획을 밝힌 적이 있는데, 박사 논문

낸 이후로는 더 이상 푸코에 관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더라구. 주로 들뢰즈를 원용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걸 보면.

 

이렇게 계보학 시기의 푸코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시기에 나온 

푸코 저작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가 되어 있고, 또 번역이 그래도 제일 무난하기 때문인 것 같아.

 

사실 [말과 사물] 같은 책은 번역이 좋지 않아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지.

[지식의 고고학]은 상당히 추상적인 책이기 때문에 관련된 분야의 논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렵고. 반면에 [광기의 역사]는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번역인데, 철학적인 논의를 다루는 부분은 오역이 상당히 많은 편인 데다가 

매우 현학적이고 과시적인  문체로 씌어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지.

 분량이 너무 많다는 부담도 있고. 또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신의학의 역사

(대부분 17세기 말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는 프랑스 정신의학의 역사지)에 관한 배경 지식도

상당히 필요하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조금 부담스럽지.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건 국내에는 푸코의 유작에 대한 연구가 거의 부재하다는 점이지.

사실 지난 1997년에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출간되고 난 후,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계속 출간되면서 서구 학계에서는 푸코에 대한 새로운 연구 붐이 일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특이하게도 이 강의록에 대한 연구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약간 혼동이 있는 것 같아. 무슨 혼동이냐 하면, 이런 경향은

사실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지. 그냥 국내 연구자들이 계보학적 작업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또는 갖고 있었다(요즘은 사실 눈에 띄는 연구가 별로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적절하겠지)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도, 푸코의 저작을 해석해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독자적인 시각에서 푸코의 저작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데, 사실 그런 작업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렵지. 이런저런 점에서 특징적인

개별 논문들이야 좀 있었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푸코 연구에서 문제는 지배적인 해석에 대해 어떻게 도전해볼까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푸코에 관한 해석을 한번 해볼까 하는 거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푸코의

계보학 작업에는 아직도 연구해봐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걸 볼 수

있느냐, 그게 일단 문제지만.

 

결론적으로, 아직 국내에는 푸코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커녕 해석이라고 할 만한 연구도

사실 없는 것 아니냐, 이게 내 생각이야. 농담삼아 말하자면, 그 많던 푸코 연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 들뢰즈에게 갔나?? ㅋㅋㅋ

 

끝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나는 역사학자들의 푸코를 연구하고 응용하면 훨씬 더

생산적인 작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물론 역사가들은 주로 사회사나 미시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긴 하지만, 푸코의 작업도 역사가들이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개념적 도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도(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푸코를 좀더 열심히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절대 제기하지 못하는

질문들을 푸코는 제기했고,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하기 힘든 조사, 연구를 직접

수행하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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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뮤지션 2005-07-26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따로 페이퍼로 올려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앞으로 수업 열심히 들을게요!

천재뮤지션 2005-07-26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 그리고 선생님.
소문에 '동문선' 출판사의 번역이 매우 안 좋다고 악명 높던데,
사실인가요?

제가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을 볼 때마다
정말 매번 절망에 빠지곤 했거든요.

(번역이 안 좋은거라고 얘기해주세요..ㅠㅠ)

balmas 2005-07-2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동문선 책들은 역자 개인의 역량이나 책임감 이외에는
기대할 게 없는 책들이지.

동문선 출판사 사장이야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나는 거기서 줄기차게 번역하고 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좀 이해가 잘 안가더라구.
그 사람들은 번역을 무슨 생각으로 하는 걸까? 하고 말이야.

balmas 2005-07-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ㅎㅎ 예, [말과 사물]은 새로 번역 중이라고 하니까 좀 기다리시면
좀더 읽을 만한 번역본이 나오겠죠.
[광기의 역사] 번역본은 어려운 대목에서는 꼭 오역들이 나오더라구요.
이 책은 (축약본 말고는-이 영어 축약본을 번역한 게 인간사랑에서 나온 [광기의 역사]죠) 영역본도 없어서, 불어 독해를 못하면 대조하기도 어렵구요.
그래도 그냥 무시하고 읽으면, 다른 부분들은 번역이 괜찮으니까
다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예, 역사학자들이 푸코를 좀더 많이 읽어야죠.
추천은 감사~~~~~

사량 2005-07-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000년에 민음사에서 '현대사상의 모험'이라는 총서로 새로 나온(그러나 이전판과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지식의 고고학]을 갖고 있는데, 그 책 뒷날개를 보면 [말과 사물]이 근간목록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는데 나오기는 나오는 걸까요? -_-
 

 

 

6월 반딧불 후기

 

삶이 계속되는 한 싸움도 계속된다.
- 6월 반딧불 <원자폭탄> 상영회 후기

우공


나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두 번의 전쟁을 보기는 했다. 걸프 전과 이라크 전. 하지만 그것은 ‘시뮬레이션 게임’ 같았다.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것만을 보여준다는 ‘뉴스’는 마치 신제품 게임을 내놓듯이 전쟁을 보여줬다. 텔레비전 속 포탄이 떨어지는 마을의 사람들은 나완 상관없는 ‘게임 속’ 사람들이었다. 그래, 게임이었다. 하지만 모든 영상들이 전쟁을 이렇게 다루지는 않는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의 풍경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기차역에서 사람들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시장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아이들은 동무들과 골목을 뛰어다녔고 할아버지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6월 반딧불 상영작 <원자폭탄>은 이런 장면과 함께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영화는 일상의 풍경 사이사이로 원자폭탄을 떨어트리기 위해 군대가 준비하는 장면들을 하나씩 집어넣는다. 그리고 곧 화면은 하얗게 변한다. 기차역의 사람들, 골목의 아이들, 담배 피시는 할아버지의 손. 이 모든 것이 하얗게 되어버렸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영화는 계속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피해자들의 참상을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 아이와 말 같이 생긴 동물이 장면과 장면들을 옮겨 다닌다. 아이의 표정은 웃는 듯 하지만 울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알 수 없다. 영화는 점점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점점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사실 특별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 였다. 머리 속에서 질문들이 마구 솟아났고, 나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원자폭탄이란,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렵고 거대한 생각들이 몰려들었다. 더 이상 그들은 게임 속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쟁은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다. 아니 전쟁은 게임이 될 수 없다.

영화가 끝난 후 난 강연자로부터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분명 나와 같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는 몸속에는 전쟁이 살아 있었다. 원폭 피해 2세. 그들은 폭탄을 맞은 당사가 아니었지만 원자폭탄의 피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유전은 2세에 이어서 3세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원폭 피해가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피해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그들은 ‘차별’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최근 원폭 피해 2세의 인권은 원폭 피해 2세인 김형률 님의 죽음으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들의 전쟁 피해의 소수자로, 역사 속의 소수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 보상과 치유는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벌써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의 상황을 알면서도 시간을 끌고 있다. 원자폭탄 사용을 ‘국익’이라는 이유로 주장했던 미국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부인하고 침묵 할 뿐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60년인 올해 원폭 피해 2세들은 부인과 침묵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들의 삶이 계속되기 위해 그들의 싸움도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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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2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부엉이 새 이미지 멋집니다.
날개님이 주신 거죠?^^

balmas 2005-07-26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예.
사실은 주지는 않으셨는데, 제가 몰래 퍼왔다죠. ^^;;
 
 전출처 : 릴케 현상 > 정운찬 총장에게 하는 고언-박상준

서울대 총장께 드리는 고언

 
교육부의 정책에 맞서는 일부 언론들을 배경으로 하여 교육계에 새로운 쟁점이 하나 부각되려 하고 있다. 고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논란이 그것이다. 그 동안의 흐름에 비춰 보면, 대학 입시에서 본고사와 고교등급제, 기부금입학제를 금하는 3불 정책에 대한 논의가 초점을 다면화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설득력 있는 근거 없이 특정 계층의 이해만 대변하는 소위 메이저 신문들을 제쳐놓고 보면, 이러한 논란의 한쪽 정점에 서울대 총장이 있다. 대한상의 주최로 열린 7월 18일의 최고경영자 대학 특강에서 정운찬 총장은, 2008년 서울대 입시안에 대한 소신과 더불어 고교 평준화 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공개했다. ‘원자재’가 좋아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비유를 들면서 그는 입학시험의 ‘솎아내는’ 기능을 지목했다.

서울대가 내놓은 2008년도 입시안은 전체로 볼 때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정 총장의 ‘원자재’론은 입시 정책과 관련하여 대학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게 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질 좋은 원자재를 써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고급 원자재를 독점해온 생산자가 그 동안 만들어낸 제품이 원료에 비해서 훌륭한 것은 못 되었다면? 그 이유가, 일류 원자재에만 눈독을 들여온 탓에 생산 기술이나 방법을 발전시키지 못한 결과라면? 그 결과, 선무당이 장구 탓하듯 원자재의 질만 따지는 풍조가 널리 퍼져, 생산의 본래 목적이 왜곡되게 되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에 따라 하청업체들의 생산 행위가 심각하게 교란되고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이들 질문에 대해 서울대는 그다지 할말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반세기 넘게 서울대는 이 나라의 최고 인재를 독점해왔지만, 비합리적인 학벌주의에서 유래된 ‘서울대 졸업생’이라는 딱지의 위력을 제외한다면, 서울대가 그 훌륭한 인재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뛰어난 졸업생으로 만들었다고는 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엘리트들 상당수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외국 대학(원)이 길러냈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 2월 한국공학한림원에서 조사한 <이공계 활성화와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한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 교육의 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포항공대,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의 여섯 학교를 대상으로 하여, 전공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학부 및 대학원 졸업생들에게 수업 환경 만족도를 묻고 있다. 전공 만족도, 교수 강의 만족도, 대학 당국의 공대 지원 정책, 지도교수와의 상담, 수업 내용 업그레이드의 다섯 항목으로 결과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서울대는 전체 항목 모두에서 꼴찌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대에 입학할 때 일류였던지라 그 졸업생들의 기대치가 높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이것이 서울대 졸업생들이 보는 서울대 교육의 현주소라 하면, 다음은 전국 대학(생)이 보는 서울대의 한 모습이다.

지난 6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를 통한 최근 2년간 전국 대학의 학위논문 이용 현황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결과, 학위논문의 원문 다운로드 횟수 상위 20개 대학 중에서, 서울대는 논문 보유 수는 1위인 반면 논문 1편당 다운로드 횟수에서는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서울대의 교육이 ‘원자재의 질’을 십분 살리지 못했고, 생산 기술이나 방법 곧 교육 방식을 개선하지도 않았음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몸집을 키우는 방식으로 원자재의 질에 기대어 자신을 유지해왔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 대학의 입시 현황을 돌이켜보면서 이러한 결과를 마주 대하면, 서울대가 주력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는 금방 자명해진다. 학생들의 성장 가능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다지 의미 없는 수치 놀음으로 ‘질 좋은 원자재’를 독점하려는 데 혈안이 되는 대신, 기왕의 과오를 반성하고 자신들의 원자재를 훌륭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방식과 여건을 갈고 닦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정 총장과 서울대는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편으로 평준화 정책을 문제시하고 한편으로 대학 자율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은 돌보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로 넘기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교교육의 질을 문제시하기 이전에, 대학교육의 질을 돌아보아야 한다. 적어도 대학 당국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학의 문제를 고등학교로 떠넘기는 문제적인 사례가 자칭 일류대들이 불법적으로 시행해왔다고 의심되는 고교등급제일 터인데, 이제 서울대는 이러한 흐름에 힘을 실어주고 스스로 그 모범이 되고자 하는 듯싶다. 이러한 행태는, 국민이 아니라 기업의 눈치만 보면서 대학교육의 목적이 편향, 실종되는 것과 맞물리면서, 이제 중고교 교육 전체를 흔들고 있다.

서울대가 일류 신입생을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는 만큼, 고등학교는 중학 졸업생을, 중학교는 초등학교 졸업생을 줄 세우게끔 내몰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오래 전에 허울만 남았기에 입에 올리기도 뭣하지만, ‘전인교육’이라는 이상도 새로운 세기에 맞는 ‘적성을 살리는 창의적인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도, 학생을 잘 가르치고 길러내기보다 ‘솎아내기’에만 급급해 하는 이러한 현실에서는 꿈꿀 수조차 없어진다. 이러한 현상을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오마이뉴스 2005.7.20 경북매일신문 200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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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기획/ 북리뷰를 리뷰한다

기획/ 북리뷰를 리뷰한다

車美禮(세계일보 논설위원)

신문마다 북 섹션을 만들고 있다. ‘북리뷰’는 문화일보의 북섹션 제목으로 처음 선을 보였다가 본지와 합쇄된 제목이고, 다른 신문들도‘책마을’‘행복한 책읽기’‘책과 사람’‘책의 향기’‘Books’‘북월드’등 다양한 제목으로 북섹션을 내고 있다. 얼핏 보면 화려한 프런트 면에 새로 나온 책정보가 가득하고 무척 고급스러운 인상이다. 매주48면이나 되는 넉넉한 분량에 책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은 필수다. 그만큼 공들인 지면들이어서 참 잘도 만든다는 느낌도 준다. 깨알같은 신간정보를 가득 채운 페이지와 까다로운 주제의 무거운 책들을 200자 원고지 한두 장으로 요약 소개한 것들을 보면 기자들의 엄청난작업량의 무게와 그 정신적 노고에 마음이 안쓰러워질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일간지의 북섹션이 독서나 출판관련 기사를 다루는 방식으로 과연 적절한가. 결국 문화면으로부터 분화돼 나온 북섹션들의 구성과 취재방식—한마디로 책을 소개하는 방법과 출판뉴스를 다루는 방식은 온당한가, 이런 스타일을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점이 많다. 담당기자들은 업무량의 살인적 과부하(過負荷)로 크게 행복하지 않다.

출판계나 저자들도 책이 크게소개됐을 때 기분 좋아하긴 하지만 크게 행복하지는 않다.북섹션 전면에 크게 소개됐다고 해서 책이 꼭‘움직여’(서점에서 잘 팔려)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각적 편집을 중시하는 섹션표지의 특성상 글 반, 그림 반으로 컴퓨터 그래픽스 등을 이용해서 만든 첫 페이지에는‘화끈한’큰 제목이 달린다. 그렇게 소개된 책들은 시선은 끌지만 튀는 편집만큼은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기사만 대충 훑어보고 책은 사지 않는다는 출판인들의 불평도 나올정도다.

북리뷰가 단순히 책에 관한 홍보 차원을 넘어‘그 책을 돈을 주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도된다. 요약기사만 읽고 책을 다 읽은 척하는 인구를 양산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프런트 면이나 큰 기사로 다뤄지지 못한 책들을 낸 출판인과 저자들은좀더 불행하다. 자신들 책이 크게 소개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데 대한 불우의식, 신문지면이 형평성과 공정성을 잃었다고 여기는 데서 느끼는억울함 때문이다. 북섹션의 대상 독자층이라 할 수 있는 저술가와 독서가등 비교적 우호적인 독자들조차 그 면이 그 면 같다며‘차별화 부재=획일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개선책은 없는가. ‘북섹션’의 先史시대일간지 북섹션의 문제는 결국 섹션화 일반의 문제로, 더 위로 거슬러올라가면 문화면 출판뉴스 지면의 문제로 귀결된다. 일간신문 전체의 지면이 8면이었던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방송 프로그램 지면을 제외한 문화면은 1일 1면 정도였고 모든 장르의 문화뉴스와 생활·여성·가정·건강정보가 함께 실렸다. 매일 데스크와 67명의 기자들이 회의를 해서 각차미례서울대 영문학과 졸업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졸업중앙일보 문화부 기자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출판저널」편집주간문화일보 문화부장,‘북리뷰’편집장세계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저서:「미술 에세이」「강철군화」(역서) 외 부문의 정보를 교환한 다음 톱기사를 정하고 뉴스가치에 따라 지면을 배분할 때 곧잘 교육이 톱기사로 다뤄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봄나물 무치기, 육아기사와 교과서 문제, 음악연주회, 문학 인터뷰가 같은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엔 책에 관한 뉴스는 문화단신으로나 취급되었다. 비중 있는 작품을 낸 문인이나 원로학자들의 저술 소식이 가끔 톱이나 큰 기사로 다뤄졌을 뿐 여러 권의 책을 한 지면에 소개하는 것조차 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 출판계와 출판물량이 그만큼 빈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출판이 문화와 달리 띠제목을 달고 버젓이 한 면을 차지하게 된 것은신문의 증면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80년대부터였다. 신문이 증면되면독자서비스 차원에서, 그리고 인건비 부담없이 쉽게(?)지면을 채울 수있다는 발상에서 경영진이나 편집국장들은 간지(間紙)지면부터 늘려놓는다. 실제로 특집이나 외고(外稿)를 싣는 편이 정치·경제·사회 등 속보성 뉴스지면을 늘리는 것에 비하면 부담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한정된인원의 문화부 기자들이 매일 23면의 문화면을 제작하게 되면서 엄청난 기사량을 비교적 편리하게 소화하기 위해 요일별로 담당분야 기사를 몰아주는 문화면의‘일간주간지’시대가 시작되었다.

대개 문학이나 학술기사와 맞물려 지면 한쪽을 갈라 책소개를 하거나‘출판화제’등 컷과 함께 간단히 소개되던 출판뉴스가 별도의 지면을 차지하게 된 것은 당시의 이런 언론환경 탓도 컸다. 더구나 80년대엔 언론탄압에 이어 출판탄압도 가장 극심해서 해직 언론인들이 내는 출판물이나‘이념서적’으로 분류된 사회과학서 소개는 어떤 신문에도 한 줄도 실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감시권 밖에 놓여 있던 경제신문에서 일하던 필자는 과도하게 여러 면을 혼자서 채워야 하는 업무량을 쉽게 해결할 겸, 끊임없이새책을 들고 오는 언론계 선배들을 도울 겸 양쪽 페이지에 걸친 널따란출판 페이지를 만들어서 그런 책들을 마음껏 소개하기 시작했다. 문화면과 경제면에서 모두‘왕따’당하는 경제학 이론서들을 비롯, 주로 신문에소개된 적이 없는 비대중적인 학술서와 인문교양서들을‘독서 다이제스트’란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비전공 분야 책을 며칠씩 밤을 새워 읽으며 요약해야 하는 작업과 엄청난 신간소개 기사 작성은 모두 나의 몫이었으니 자승자박 꼴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벌레가 아니었던들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일을 5년이나 계속했던 것은 암울했던 시대에 언론의 침묵을대신해서 우리 사회의 정체성과 진보적 세계관을 다룬 좋은 책들을 펴낸언론계 선배들 때문이었다. 특히 문학·인문과학·사회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기획력과 사명감을 가지고 꼭 필요하지만 아직 없었던 책, 남들이생각조차 못했던 창조적 기획물을 내놓던 단행본 출판인들의 열정 덕분에 나 스스로 출판면 제작을 마치 언론자유운동인 것처럼 착각했던 측면도 있다 .80년대 중반엔 314종의 책들이‘이념서적’이란 꼬리표를 달고 금서(禁書)가 됐다가 127종이 해금되는 등 엎치락뒤치락 난리가 났다. 출판인 수십 명의 구속도 잇따랐다. 에리히 프롬의「마르크스의 인간관」, 다렌돌프의「산업사회의 계급과 갈등」, 모리스돕의「자본주의 이행론」같은 마르크스주의 비판서나 오랜 대학교재들까지 금서로 찍혀 해방 이후 최대의책의 수난시대를 기록했던 시기다.

원로출판인 정진숙씨(을유문화사)등 출판계 원로들이‘출판의 자유는어떤 여건과 어려움 속에서도 보장돼야 한다’는 내용의‘출판인 17인 선언’을 발표할 정도로 탄압이 심했지만 신문의‘차별화’간판이 돼버린 독서 페이지는 계속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몇년 뒤 모든 중앙 일간지들이 12면, 16면, 24면으로 증면경쟁을 계속하면서 두 페이지짜리 독서·출판 페이지는 일간지 문화면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학술이나 문학면과 일부 중복되기는 했지만 책소개에 대한 제한이 풀리면서 출판뉴스는 문화면의 필수적인 띠제목이 되었다. 주간지나잡지에 문외한이었던 필자는 신문사를 떠나 출판인들의 권유로‘국내 최초의 서평지’「출판저널」창간을 준비했고‘책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소개하는 온갖 요리법’을 위해 머리를 싸맸다. 민주화와 함께 사회과학출판사 대표들의 구속사태도 진정되었고 다시 언론사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생각하면 출판탄압이 극에 달한 그 당시가 한국 출판계의 한 전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인류의 지적 유산으로서의 책의 보편적 가치뿐만아니라 한 사회에 있어서 책이 던지는 메시지와 지식인들의 출판활동 자체의 의미가 극대화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출판담당 기자들은 출판인들과 동지적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그런 전통은 일부 남아 있다. ‘대중성’과‘차별성’의 자가당착노트북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착으로 문화환경이 가히 혁명적 변화를 겪고 난 90년대 들어‘대중성’은 언론매체의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세계화와 개방의 영향으로 폭발적인 문화 증대, 정보의 홍수시대를 맞은 언론계는 광고의 호황으로 무한대 증면경쟁을 시작했다.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상업적 번영을 구가해보려는 대중화 경쟁도 치열해졌다. 섹션화도 그 하나다.

특히 90년대 중반부터 일간신문의 섹션화·잡지화 경향은 더욱 심화된반면, 신문마다 질적인 차별화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대중화의 기치아래 그 어느 때보다도 비슷비슷한 지면의 획일화를 가져온 것이 현실이다. 고급문화와 저급한 대중문화의 이분법도 효력을 잃었다. 양자를 혼합한‘열린 음악회’류의 TV 프로그램과 대중적 뮤지컬, 팝아트 상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탈장르 크로스오버적인 문화양태가 중심을 이루게되었다. 이런 문화적 환경 속에서‘일간주간지’형태의 문화면들은 한때 48면까지 늘어났던 비대한 신문의 몸집에 걸맞게 진짜 주간지(섹션)로 변하기시작했다. ‘대중화’에 대한 해석도 사주와 경영간부, 편집국장, 데스크,기자마다 다르게 마련이었다. 80년대 도입된 비판 커뮤니케이션 연구의패러다임은 대중문화를 단순한 미학적 관점이 아니라 좀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각들을 소개했고 대중 자체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진행되었지만, 학계에 비해 신문 종사자들은 지적 수준이 낮은 다수를통칭하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대중은 ▶되도록 많은 사람 ▶영어와 대중스타를 매우 좋아하는 1020대 젊은 독자층 ▶쉽고 재미있는 기사를 원하고 글의 내용보다는 시각 이미지에 끌리는 하향평준화된 다수였다. 이에 따라 섹션이든분리되지 않은 간지 타이틀이든 영어의 범람은 90년대 신문섹션의 가장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특히 프런트 면은 뉴스나 정보와 별 관련이 없는 젊은 스타들의 사진이나 10대가 선호할 만한 합성 이미지들로 채워졌다. 대중화로 손님을 끌려는 상업주의가 결국은 획일화를 낳은 것이다. 내용도 본지의 단신을 확대하거나 한번 보도된 뉴스를 다양하게 재구성한 리바이벌 기사로 소재발굴의 어려움 때문에 모두가 비슷한 내용을 중복 게재하는 획일화를 낳았다. 문화행사를 소개하는‘문화마당’, 여행정보를 실은‘Travel’, 재테크로 독자를 끌기 위한‘Money’섹션을 비롯,어느 신문에서 특이한 아이디어를 내놓기가 무섭게 일제히 뒤따라가는바람에 모든 신문이 똑같아져 버리는 행태는 여전했다. 지금은 핑크빛 종이로 일간지 중‘유일하고 가장 확실하게’차별화를이룬 문화일보의‘북리뷰’는 그런 배경에서 1996년 최초로 탄생했다.

후발 신문기업으로서‘고급지’를 표방하다 보니 거기에 걸맞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했고, 본격적인 서평 지면을 원하는 출판계와 고급스럽고 색다른지면을 원하는 경영진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북리뷰’는 타지에도북섹션이 줄줄이 생길 것을 염두에 두고 보통명사를 선점한 것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북리뷰는 아니다. 그것은 이 글이 모든 출판섹션을 다 읽고 통계적으로 비교분석한 리뷰가 아니어서 미안한 것과 마찬가지다. 「출판저널」이 그랬듯이 전문 서평가가 없고 전문 독서가나 애서가층도매우 얇은 우리네 풍토에서는 본격적인 서평지나 서평 지면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북섹션의 태생적 한계였다. 필자가 북리뷰 섹션 편집장을 맡게 된 이유도「출판저널」창간의 노하우로 단 1주일만에 섹션을 창간할수 있었다는 점과 출판계의 희망이 반영된 것일 뿐이다. 다양한 책소개를 통해 독서층을 넓히고 책 선택에 도움을 주는 역할에그친다는 점에서 모든 신문이 북섹션을 발행한 것은 문화적으로는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차별화’전략과 마찬가지로 북섹션 역시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게 현실이다.

프런트 면의 선정성(?), 획일화와 공정성에 관련된 문제가 그것이다. ‘출판뉴스’와‘비평적 서평’의 공유를획일성과 공정성은 북섹션 편집에 있어서는 같은 얘기다. 지난해 한국언론재단이 제기한‘보도비평—신문의 북리뷰,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북리뷰 섹션이‘신간’위주의 속보경쟁에 매몰된 나머지 매체간 차별성이없고 획일적으로 운용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옳다. 3개월간 4대중앙지 북리뷰 지면을 분석한 결과‘서평’으로 다뤄진 352종의 책 가운데74종이 2개 이상 신문사에서 중복 취급되었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당연히독자 입장에서는‘수상하게’볼 수 있다. 특히 인문교양서 중에서 똑같은출판사의 번역신간이 34개의 프런트 페이지를 차지할 경우는 출판계나독자들이 모두‘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뉴욕타임스 북리뷰’처럼 본격적인 서평도, 프랑스의 전설적 독서프로 진행자인 베르나르 피보처럼 26년간 장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철저한 책읽기도 지금 같은 북섹션 제작여건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북리뷰는 그 성격상 애초부터 속보경쟁 대상이 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지면의 권위를 담보할 수 있는 공정성과, 진지하고‘느린’지성적 성찰이 없는 북리뷰는 독자의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12명의 담당기자가 코피 나게 꾸려가고 있는 우리 북섹션의 내부사정에 가장 크게기인한다. 매주 46면의 북섹션을 꾸려간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가장나쁜 것이 프런트 면을 새로 나온 책으로 넣으려는 속보경쟁임은 물론이다. 격주간 서평전문지「출판저널」창간작업과 기자에게 전권이 주어졌던‘북리뷰’초기의 창간체험을 비교, 고백하면 프런트 면에 대한 욕심이 북리뷰 섹션 전체를 비틀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특히 출판인들과의 친소관계, 신문사 내외와 위로부터의 청탁, 다른 면에 대한 눈치보기가 작용하면 책 고르기는 기본부터 허물어진다. 한국사회의 특성상 그런 일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그래도 기본은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 공정성을 우선하다 보면 책의 가치우위가 비틀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중심은 그렇게 가야 한다. 스스로 시행착오를거듭하며 20년 가까이 터득한 몇 가지 요령(?)을 소개하면 이렇다.

①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프런트에서 끝 페이지까지의 균형, 한 페이지 안에서도 톱에서 한 줄짜리까지의 균형, 저자와 책의 무게의 균형(특히 전문학자가 오랜 세월 저술한역저를 아마추어가 쓴 같은 종류의 편집물보다 우대해서는 안됨). 시선을 끌기위한 연성(軟性)기사가 너무 많거나 별난 책, 특이한 책 위주로 프런트가제작되면 안된다. 통시적 균형도 중요하다. 지난주와 이번주 북리뷰 사이에도 가치의 어떤 일관성이 보여야 한다.

② 서평의 활성화기자가 쓰지 말고 그 책을 진정 평할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원고료와 시간을 충분히 주어 시킨다. 그 자격(전공, 학위, 그 방면 저술과 논문)은 지면에 명기한다. 부실한 책의 서평게재 청탁이나 압력을 확실하게막을 수 있는 장치다.

③ 출판사의 보도자료에 되도록 의존하지 않는다.허위나 과장된 내용의 보도자료가 나오는 것은 기자들이 폭주하는 작업량 때문에 보도자료를 베끼기 시작한 이후의 현상이다. 여러 번 중판된책이나 표지갈이를 한 책을‘최초’로 대서특필하는 실수는 출판사 책임도있지만 기자들의 책임도 크다. 원제목이나 책의 제원과 내용을 정확히 양심적으로 밝히는 출판풍토를 만들도록 언론과 출판계가 함께 노력해야한다.

④ 서평이나 기고문이 부실할 때는 필자의 명성과 관계없이 끈질기게 수정보완을 요구한다.내 기억으로는 서평 내용에 이런저런 논급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했을 때화를 내거나 개고(改稿)를 거절한 분은 없었다. 고치면 서평이 한결 서평다워지고 지면의 품위도 생긴다. 북리뷰 편집자의 신뢰와 권위도 함께 자란다.

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모르고, 내가 아는 것은 나만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기자의 속성이다.이를 탈피하지 못하고 수필 같은 기사나 서평을 마구 쓰는 기자는 장기적으로 지식인 사회의 신뢰를 잃게 된다. 자신의 독서량과 학식의 한계를드러내는 부적절한 개념어의 낭비와 논리의 비약을 자제해야 한다. 지면이나 책 고르기에 대한 변명조의 상자글도 지면낭비다. 담당기자가지면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북리뷰가 아니다. 책소개와 독후감 청탁에 치중하다 보니 출판계 뉴스나 본격적인 서평이 점점 실종돼가는 것도 문제다. 정보의 정확성와 출판계 움직임의 현장성을 모두 다룰 수 있는 차별화된 아이디어를 기대해본다.

관훈저널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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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7-23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 서평란을 몇 번이나마 읽어본 사람들은 대개 공감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잘 지적해놓은 글이다. 문제의 해법도 설득력이 있다. 오히려 상식에 가까운 해법
들이다. 그런데 이게 실현 가능할까?
 
 전출처 : 딸기 > 자살폭탄테러의 역사

영국 런던 연쇄 폭탄테러 전모가 속속 밝혀지면서 유럽은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자폭테러가 일어났다"며 충격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자폭테러는 폭약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자폭테러는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폭탄 운반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정규전보다도 잔인하고 처참한 공격이다. 특히 최근에는 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상이 자행되면서 21세기 `인류의 적'으로 부상했다.

십자군에서 알카에다까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최근 몇 년 새 늘기는 했지만, 자폭테러는 이슬람 교리와는 상관없으며, 이슬람의 발명품도 아니다. 역사 상으로는 13세기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을 침공한 유럽 성전기사단의 군함 자폭공격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2차 대전 때 일본의 `가미카제'가 원조로 꼽힌다. 이후 일본 적군파 등에게 사용되다가 반이스라엘 무장단체 하마스와 지하드 등에 이르러 중동 분쟁의 고질적인 이슈가 됐다. 스리랑카 반군 `타밀 엘람 호랑이'와 러시아 체첸공화국 분리독립운동세력도 자폭테러를 자주 사용해왔다. 2003년 미군에 점령된 이라크에서는 자폭테러가 대규모화, 일상화됐다.

사자(死者)의 스위치

팔레스타인과 체첸 무장세력은 폭약다발을 허리에 두르는 `폭탄 벨트'를 많이 썼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검문검색이 심해지면서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테러가 많아졌다. 자폭테러범의 폭탄을 서방에서는 `사자의 스위치(Dead man's switch)' 혹은 `사자의 손잡이(Dead man's handle)'라 부른다. 열차 등 대중교통수단에서 폭발했을 경우 `사자의 브레이크(Dead man's brake)'라 하기도 한다.
지난 2001년 9.11 테러범은 대형 항공기를 건물에 충돌시키는 상상을 초월한 방법을 동원했다. 2차 대전 때 일본 가미카제는 특수제작된 비행기에 `오카'라는 로켓탄을 싣고 자폭 공격을 감행했다. 지난해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테러범과 이번 런던 테러범들은 군용 폭탄을 배낭에 넣어 운반했다.

여성과 아이들까지 자폭 전선으로

자살폭탄테러가 늘고 있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동원한 공격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폭테러의 본거지 격인 중동과 체첸 등지에서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검문검색이 강화됐지만 자폭테러가 줄어드는 대신 검색을 피하기 쉬운 여성, 아동 테러범이 늘어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여성 자폭테러범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91년 인도의 라지브 간디 총리를 살해한 다누(본명 텐물리 라자라트남). 중동에서는 86년 레바논에서 처음으로 히야달리 사나라는 시리아계  여성 자폭테러범이 등장했다. 스리랑카 타밀 반군의 경우 지금까지 일으킨 자폭테러 공격 중 200여건이 여성 테러범의 소행으로 드러났으며, 자폭테러범의 30~40%가 여성이라는 외신도 있었다. 지난 2002년 10월 러시아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을 일으킨 체첸 테러범들은 상당수가 여성이어서 언론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남편을 잃은 뒤 무장게릴라전에 뛰어든 체첸의 여성들은 `검은 과부단(블랙 위도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라크에서도 지난 2003년4월 여성테러범이 자살폭탄공격을 일으킨 바 있다.
18세 이하의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자폭테러에 동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02년 팔레스타인에서는 12, 13, 14세 소년들이 자폭테러단을 구성해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감행, 세계에 충격을 던져줬다. 지난 2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직전에도 15, 16세 소년들이 이스라엘 나블루스 부근 하와라에서 폭탄을 허리띠에 두르고 자폭테러를 일으켰다. 무장단체들은 투쟁전선에 자원해 나온 `어린 순교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에서는 어린이들이 자폭테러에 동원되는 줄도 모른 채 시한폭탄 운반을 지시받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한다.



왜 `자폭테러'인가

자살공격은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집단의 전투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막강한 정부군과 정면 승부하면 밀릴 수밖에 없다는 `무력 비대칭'과 그로 인한 좌절감, 패배감이 게릴라집단을 자폭테러로 내몬다고 지적한다.
냉전이 끝나고 미국의 세계지배가 가시화된 1990년대 이후 전세계에서 자폭테러는 기록적으로 늘어났다. 미국이 소련에 맞서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키워낸 무장요원 `아프가니스'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알제리, 파키스탄 등으로 돌아가 자국 정부와 미국으로 칼날을 돌렸다. 오사마 빈라덴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오만함과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 무슬림 청년들의 절망과 분노가 결합돼 뉴욕, 런던, 마드리드에서 터져 나온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13일(현지시간) "자폭 공격을 `최대의 헌신'이라 여기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늘고 있다"면서 "이런 현상은 서방 국가들에게는 `최대의 악몽'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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