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법인 한국연구원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한국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이 논문은 제가 준비 중인 [을의 민주주의 철학적 기초](가제)에 수록될 일부분입니다.
논문에 대한 토론이나 인용은 [한국연구]에 수록된 최종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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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정치적 존재론
1. 머리말: 존재론적인 문제로서의 갑을 관계
갑을 관계는 최근 10여 년 사이 한국의 사회적 담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재벌 기업과 하청관계를 맺고 있는 중소기업,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차별적인 지위와 권리를 지니고 때로는 부당한 대우를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종속적인 계약관계 속에서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가맹점들, 우리나라의 권력과 부, 사회적 서비스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과 비교하여 늘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지방들, 권위적인 도제관계 속에서 교수들의 부당한 횡포를 감내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성적 불평등과 억압적 제도 및 관행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들, 더 나아가 이성애적인 규범과 제도, 관행 속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성적 소수자들,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모욕, 그리고 배제의 대상이 되는 장애인들, 인종적ㆍ민족적ㆍ국민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들(조선족, 다문화 가정, 이주노동자들, 난민들)과 같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불평등과 불공정, 차별과 배제의 구조 및 현상을 집약하는 용어가 바로 갑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갑을 관계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다양한 형태의 갑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고 을들의 고통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언론 사회면과 포털,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온라인 게시판의 논의 주제가 되고 있다. 아울러 정치권에서도 갑을 관계를 시정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13년부터 당 내에 갑을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을지로위원회’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비정규직 투쟁 현장을 비롯한 각종 갑을 관계의 현안에 참여하려는 노력을 보인 바 있다. 또한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도 ‘약자와의 동행위원회’를 설치하여 약자들인 을들에 대한 관심을 표방한 바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더불어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된 이후 ‘범정부 을지로위원회’를 설치하여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1년도 못돼 폐기되었고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활동 역시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국민의힘의 ‘약자와의 동행위원회’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제도 정치권에서 갑을 관계의 문제점을 시정하고 을들을 위한 이런저런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유익하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만으로 갑을 관계의 문제점이 해소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갑을 관계의 문제는, 우리가 뒤에서 보여주겠지만, 구조적이면서 인간학적인 문제, 요컨대 존재론적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층적인 성격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해결의 노력이란, 이런저런 형태의 갑질에 대한 임기응변적이고 보여주기 식의 대응 이상의 것일 수 없다.
더욱이 갑을 관계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중요성에 대해 ‘진보적인’ 정치 세력 및 연구자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분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급진적이라고 간주하는 정치 세력이나 연구자들일수록 “대개 ‘예외적인 것’(the extraordinary)에 기초를 둔 과거의 영광”[Facundo Vega, “On Populist Illusion: Impasses of Political Ontology, or How the Ordinary Matters”, in Bernardo Bianchi, Emilie Filion-Donato, Marlon Miguel & Ayşe Yuva eds., Materialism and Politics, ICI Berlin Press, 2021, p. 327.]에 사로잡혀, 총파업이나 무장봉기 아니면 적어도 수십만의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비상한 정세에서만 정치라는 이름에 값하는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제도적인 정치 바깥의 대중정치를 통해서만 그러한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는다.[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가 주장한 바 있는, “정치란 드물게 발생한다.”는 명제는 예외적인 것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핵심적으로 요약해준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국가권력의 장악이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의 철폐와 연결되는 투쟁만이 의미 있는 정치적 투쟁일 것이며,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나타난 다양한 방식의 좌파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따르면,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메시아주의든 공산주의든 아니면 안-아르케(an-arkhe)로서의 아나키즘이든 간에) ‘자본주의 이후’ 내지 ‘자본주의 너머’ 또는 ‘전체주의로서의 자유주의 너머’(특히 조르조 아감벤의 관점)를 추구하지 않는 정치는 진정한 정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지난 2000년대 이후 국내외 학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바 있는 좌파 메시아주의(특히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진태원,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 그린비, 2019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갑을 관계는 실로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관대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그것을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일상성의 정치’라고 규정하겠지만, 조금 더 냉정하거나 투철한 좌파 쪽 사람들은 갑을 관계를 정치의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주요 장애물 중 하나라고 일축할 수 있다. 요컨대 그것은 갑질에 대응하는 ‘을질’을 하자는 것에 불과하며, 그런 것을 할 시간이 있거든 위대한 변증법을 다시 일정에 올리는 것이 진정한 좌파가 해야 할 일이 될 터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같은 보수 정당만이 아니라 민주당 같이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에서도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갑질(특히 여성 및 성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이 발생했으며, 심지어 제도권 진보 정당의 대표 격인 정의당에서도 당 대표가 갑질로 사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아울러 노동조합이나 진보적 사회단체들 역시 이러한 갑을 관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위대한 변증법은 사소한 갑을 관계의 유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또는 공산주의)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갑을 관계의 구조를 변혁하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사회주의의 본질을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고 할 수 있다면,[여기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및 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18을 각각 참조.] 결국 현실 사회주의는, 그것을 스탈린주의라고 하든 아니면 마오주의라고 하든 또는 ‘김일성주의’나 기타 어떤 ‘~주의’라고 하든 간에,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였음이 입증되었으며, 그것이 곧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핵심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튀세르의 촌철살인의 표현에 따르면, 단순히 정치적 오류라고 비난하는 것만으로,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만으로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는 “어딘가 그 자체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 이 같은 ‘오류’에 대한 정치적 ‘필요’가 이들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고, 나아가 그 오류를 지속시켜야 할 필요가 또한 존재하기 때문”[Louis Althusser, “Histoire terminée, histoire interminable”,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PUF, 1998, p. 242; 「미완의 역사」, 이진경 엮음,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 새길, 1992, 15~16쪽. 강조는 원문.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강조 표시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이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 이것이 바로 갑을 관계 및 그것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갑을 관계야말로 인민대중에 대한 과두제 지배의 근원이자 그것의 환유적 표현, 따라서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지 못하게 하는 근원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전치(傳置, Verschiebung, displacement)의 메커니즘―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의 작업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로 규정했던 것의 의미에서[Sigmund Freud, Die Traumdeutung, S. Fischer Verlag, 1942;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3(개정판).]―으로 인해, 그 자체 원인으로서 인식되지 못하거나 원인으로 인식되는 경로 자체가 굴절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곧 갑을 관계는 갑의 지배를 위한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집합적 저항을 무력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그것의 실존 형태로서의 포스트 민주주의 역시 갑을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신자유주의 시대 자유 민주주의의 퇴락에 관해서는 Wendy Brown, “Neoliberalism and the End of Liberal Democracy”, in Edgework: Critical Essays on Knowledge and Polit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Zone Books, 2014; 민주주의 살해하기, 배충효ㆍ방진이 옮김, 내인생의책, 2017(이 책은 번역에 문제가 있다) 및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 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08; 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관리되는 민주주의와 전도된 전체주의의 유령, 우석영 옮김, 후마니타스, 2013 등을 참조. 국내 학자의 논의로는, 이승원,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집회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과제」, 황해문화 106호, 2020년 참조.] 그것은 사실 신자유주의적 과두제에 대한 정당화(이른바 TINA)이며,[Camila Vergara, “Populism: Plebeian Power against Oligarchy”, in Matilda Arvidsson, Leila Brännström & Panu Minkkinen eds., Constituent Power: Law, Popular Rule, and Politics,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0]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절차적 제도들의 준수 여부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민족적 국민주의(ethnic nationalism)에 입각한 권위주의적 통치로 변형하기 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Andreas Kalyvas, “Democracy and the Poor: Prolegomena to a Radical Theory of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26, no. 4, 2019.]
그렇다면 갑을 관계의 문제는 적어도 두 가지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갑을 관계의 문제를, 일부 비도덕적이고 몰인정한 갑들의 특정한 갑질의 문제, 따라서 기존의 포스트 민주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적 과두제의 제도 및 관행 내에서도 얼마든지 실용적으로 시정 가능한 문제로 규정하려는 경향에 맞서 그것을 구조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는 쟁점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지배적인 모델로 기능하는 자유주의적 모델이 어떤 의미에서 갑을 관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의 요소로 기능하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지닌 본래적인 의의[이것을 잠정적으로, 민주주의의 어원을 따라 ‘데모스의 통치’(demos-kratia)라고 말해두자.]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인 포스트 민주주의나 심지어 형식적 보편성(다시 말해 갑과 을의 형식적인 평등한 자유)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을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에 기반을 두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는 동시에 어떻게 을의 민주주의가 이러한 자유주의의 철학적ㆍ제도적ㆍ실천적인 한계를 넘어서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을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주로 존재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검토해보겠다. 우리의 결론은 아마도 아포리아에 더 가깝겠지만,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에 내재해 있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러한 논의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전혀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2. 정치적 존재론의 문제로서의 갑을 관계
2.1. 을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우선 을이라는 존재자에서 시작해보자. 과연 을이란 누구인가? 또는 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백해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중소기업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프랜차이즈 가맹점들, 대학원생들, 여성들, 성적 소수자들, 장애인들, 인종적ㆍ민족적ㆍ국민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들(조선족, 다문화 가정, 이주노동자, 난민 ...), 지방 사람들 ... 이들이 바로 을 아닌가? 경험적 수준에서 보면 과연 이들 모두 분명히 을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적 수준에서 규정된 을들은 다른 부문의 을들과 비교 불가능한 또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따라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비하면 분명 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함으로써 비로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자본에 대하여 종속적인 지위에 놓여 있다. 또한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그리고 하청 업체의 노동자들은 원청 기업에 해당하는 재벌 기업의 노동자들에 비해 분명 을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을은 경제적 수준에서 갑에 대하여 종속적인 또는 열등한 지위에 놓인 이들로 규정된다. 또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는 법적으로 본다면 독립적인 사업자로서 가맹점 본사와 사업적 거래관계를 맺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맹점 본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는 종속적 자영업자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이는 프랜차이즈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사업 양식의 ‘표준화’에 근거한 사업이므로 프랜차이즈에 가입한 가맹점주는 본사가 지정하는 표준화된 사업 양식을 충실히 따라야 하며 자신의 판단과 선호에 따라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랜차이즈는 종속적인 하청노동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박제성, 「프랜차이즈에 관한 시론: 지배종속적 상사관계에서 지배종속적 노동관계까지」, 노동법 연구 43호, 2017.]
하지만 을은 또한 다른 측면에서도 규정될 수 있다. 예컨대 여성은 남성에 대하여 을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가부장제 논리에 따라 결혼ㆍ양육을 비롯한 가족 구조가 규정될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질서, 곧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제의 논리가 관철되어 왔기 때문에,[이 분야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고전적인 논의로는 캐럴 페이트먼,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충훈ㆍ유영근 옮김, 이후, 2001 및 조앤 W.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공임순ㆍ이화진ㆍ최영석 옮김, 앨피, 2017을 각각 참조.] 여성은 삶의 특정한 영역에서만 남성에 대해 을의 지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갑을 관계가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인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성적 정체성을 지닌 이들, 곧 흔히 ‘퀴어’나 성적 소수자라고 통칭되는 이들은 아마도 더욱 더 열등한 을의 처지(말하자면 ‘병’이나 ‘정’의 지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갑과 을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젠더 불평등의 문제로 규정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측면에서도 갑을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측면의 갑을 관계는 결코 경제적 부문이나 젠더 부문의 갑을 관계에 비해 덜 심각한 것이 아니다. 특히 인종적 차별은 단지 사회정치적 또는 경제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차별 대상이 되는 유색 인종의 존재 전체를 왜곡하고 불구화하는, 존재론적이고 인간학적 차원에 속하는 문제다. 프란츠 파농은 이를 탁월하게 보여준 바 있다. “존재론은―만약 우리가 존재론은 실존[의 문제]을 도외시한다는 점을 확실히 인정한다면―우리로 하여금 흑인의 존재를 이해하게 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흑인은 더 이상 흑인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대면하여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Car le Noir n’a plus à être noir, mais à l’être en face du Blanc). 어떤 이들은 이 주장을 받아쳐서, 상황은 양면적이라고[곧 그것은 백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은 거짓이라고 답변하겠다. 흑인은 백인의 시선에 대하여 존재론적 저항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Franz Fanon, Peau noire, masques blancs (1952) in Franz Fanon, Oeuvres, La Découverte, 2011, p. 153;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1998, 140쪽. 꺾쇠와 강조 표시는 필자가 추가한 것이며 번역은 원문을 바탕으로 수정했다. 참고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국역본은 모두 3종이 나와 있는데, 번역본 모두 파농의 깊이 있는 논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서구 사회에서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특히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지칭하는 언어적 폭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이은정, 「코로나와 아시아의 타자화」, 황해문화 108호, 2020년 가을호.]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인 및 중국 동포들은 “짱깨”나 “다문화” 같은 혐오 명칭으로 불려왔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초기부터는 “코로나”로 불리고 있다. 대중들의 상상과 욕망 속에서 아시아인(=중국인)=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존재론적 등식이 작용하면서, 아시아인과 중국 교포의 존재론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염운옥, 「배제의 정치학: 인종주의, 국민주의와 불안전의 (재)생산」, 황해문화 110호, 2021년 봄호.]
2.2. 다면적으로 중첩되는 을의 존재론적 지위
이런 고찰은 더 많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을 터인데, 어쨌든 중요한 점은 경제적 관계에서 규정되는 을(노동자 내지 비정규직 또는 하청업체)과 젠더 관계에서 파악되는 을(여성 또는 성적 소수자), 그리고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는 을(흑인, 아시아인, 중국 교포 등) 사이에는 외관상 경험적ㆍ구조적인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경험적 관찰과 이론적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한 부문의 을과 다른 부문의 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 곧 사회경제적 부문에서 을의 지위에 또는 을 중의 을의 처지에 놓인 이들은 대개 젠더 관계에서 을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고, 인종적이거나 민족적 관계에서도 역시 을의 지위에 있는 이들인 것이다. 예컨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잘 보여준 바 있듯이, 미국 같은 다민족, 다인종 사회에서는 계급적 관계와 인종적ㆍ민족적(ethnic) 관계 사이에는 구조적 연관성이 존재한다.[Immanuel Wallerstein, “The Myrdal Legacy: Racism and Underdevelopment as Dilemmas”, in Unthinking Social Science: The Limits of Nineteenth-Century Paradigms, Polity Press, 1991; 「뮈르달의 유산: 인종차별주의와 저개발의 유산」,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 성백용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4,] 그 사회의 지배적인 인종 내지 민족은 대개 계급적 관계의 위쪽에 존재하는 반면, 피지배적인 인종 내지 민족은 계급적 관계의 아래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종별, 민족별로 대개 교육의 수준도 상이하고 하는 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별과 위계화의 구조가 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동시에 정치적 참여 기회의 박탈과 역량 형성의 조건에서의 배제를 수반하며, 이러한 박탈과 배제는 그들의 정체성의 구조적 요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부문의 갑을 관계가 다른 부문의 갑을 관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중첩되어, 한 부문에서 을(또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여 있는 이들은 동시에 다른 분야에서도 을(또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된다는 사실은 다른 부문의 고찰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확인 가능하다. 방금 원용했던 월러스틴의 분석에서는 계급적 서열과 인종 및 민족적 서열의 연관성이 강조되어 있지만, 젠더적 서열의 문제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반면 페미니즘 연구자들의 여러 저작에서는 젠더적 위계가 계급적 위계 및 인종적 위계와 중첩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부문의 위계들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특히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자연, 식민지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 및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8(2판) 참조.] 특히 이 연구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 비판 및 계급 분석에서 이른바 ‘생산적 노동’에 대해 배타적으로 관심을 집중해온 것이 대개 여성들이 떠맡아온(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젠더적 위계를 함축하는) 가사 노동 및 ‘돌봄 노동’(care work)이라고 불리는 재생산노동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국내의 연구 중에서는 윤자영, 「사회재생산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여성주의 정치경제학 이론적 검토」, 마르크스주의 연구 9권 3호, 2012 참조.]
그렇다면 갑을 관계에 대한 비판은, 각 부문 내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갑을 관계에 대한 분석과 고발로 한정될 수 없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각 부문에 존재하는 갑을 관계들이 어떻게 서로 중첩되고 서로 연계되고 또한 서로를 강화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비판해야 하며, 이러한 중첩된 갑을 관계 속에서 을의 존재론적 지위 또는 정치적 존재론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갑을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갑과 을의 존재론적 지위는 항상 이미 정치적 지위이며, 따라서 을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분석은 정치적 존재론의 분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존재론’(political ontology)에 대한 분석으로는 무엇보다도 Oliver Marchart, Thinking Antagonism: Political Ontology after Laclau,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8 참조.]
3. 을의 세 가지 존재론적 규정
3.1.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
이러한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을은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가? 을의 정치적 존재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할 때 을은 상이한 몇 가지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첫째, 을이라는 개념은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Camila Vergara, “Populism: Plebeian Power against Oligarchy”, op. cit. 및 Partha Chaterjee, The Politics of the Governed: Considerations on Political Society in Most of the Worl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4 참조.] 여기에서 내가 과두제라고 부른 것은 당연히 신자유주의적 과두제를 의미한다. 토마 피케티나 데이비드 하비, 제라르 뒤메닐ㆍ도미니크 레비나 볼프강 슈트렉 같은 정치경제학(비판) 연구자들, 그리고 콜린 크라우치나 웬디 브라운 또는 알랭 쉬피오 같은 사회학자ㆍ정치이론가, 법학자들은 각자의 분석에서 주목하고 있는 측면들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과두제 지배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최병두 옮김, 한울, 2007;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 민주주의, 앞의 책;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제라르 뒤메닐ㆍ도미니크 레비, 신자유주의의 위기, 김덕민 옮김, 후마니타스, 2014; 볼프강 슈트렉, 시간 벌기: 민주적 자본주의의 유예된 위기,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15; Wendy Brown, 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op. cit.; 민주주의 살해하기, 앞의 책; 알랭 쉬피오, 필라델피아 정신: 시장 전체주의를 넘어 사회적 정의로, 박제성 옮김, 한국노동연구원, 2012; 알랭 쉬피오,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 체제」, 노동법연구 40호, 2016.] 그것은 자산 불평등이 심화된 세습 자본주의(피케티)나 금융 과두제의 지배(뒤메닐ㆍ레비)로, 또는 “재정건전화 국가”라는 형태를 띤 “자본주의 시장경제 독재”(슈트렉)로 표현될 수 있고, “정치가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함으로써 ... 가난한 사람들은 ... 민주주의 이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차지해야 했던 위치, 즉 정치 참여가 배제된 위치로 자발적으로 돌아가는”(콜린 크라우치) 것으로 묘사되거나 “삼십 년에 걸쳐 인간 그 자체를 비롯해 인간의 모든 영역과 활동을 특정 경제적 이상에 맞춰 변형시킨 통치 합리성으로 널리 그리고 깊숙이 퍼지며 발전한 이성 체계”(브라운)로, 또는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팽팽하게 긴장시켜야 하는 죽음의 경주를 닮은” 삶의 양식을 강제하는 “시장 전체주의”(쉬피오)로 규정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표현과 묘사, 규정은 결국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사실은 광범위한 인민 대중에 대한 지배로서의 과두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으로 귀착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을이란,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의 피통치자, 피지배자, 피억압자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해된 을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부당한 억압과 폭력, 차별과 배제, 모욕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모두일 것이며, 이들은 아마도 우리 사회의 대다수의 구성원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을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des sans part)이라고 부른 이들과 같은 이들이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3.2. 보편의 잔여로서의 을: 일회용 인간
하지만 이러한 외연적 규정만으로는 갑을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을의 정치적 존재론 상의 지위에 대하여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예컨대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의 피통치자, 피지배자, 피억압자”라는 규정만으로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던, 각각의 부문 내에서의 갑을 관계와 을의 지위가 다른 부문에서의 갑을 관계 및 을의 지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제대로 해명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을에 대한 두 번째 존재론적 규정을 제시해본다면, 을은 보편의 잔여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내적 배제라고 부른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좀 더 일반화하고 심화하는 규정이다. “내적 배제의 형식적 특징은, 배제된 이가 진정으로 통합될 수도 없고 실질적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는 점, 심지어 단도직입적으로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릴 수도 없다는 점이다.”[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p. 221.] 이러한 내적 배제 개념은 우리가 을이라고 규정하는 이들의 존재론적 특성을 잘 표현해준다. 을은 공동체 바깥으로 배제되거나 공동체에서 제거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이들이 없다면 공동체는 재생산되거나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을은, 특히 을의 을은 공동체 내부에 존재해 있지만, 그 공동체의 정당한 성원으로서의 자격 및 지위를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운 이들이다. 역사적인 사례에서 본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은 고대 도시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시민의 지위에 속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나 아이들, 노예들이었다. 또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단자들이나 종교적 소수자들 역시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었던 19세기의 노동자들(말 그대로 ‘프롤레타리아들’)이나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여성들 및 흑인들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이었다. 또한 21세기 오늘날의 경우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은, 이주노동자들, 성적 소수자들,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특수한 부문에 속한 이들만이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귀족들에 비해 열등한 지위에 놓여 있었던 데모스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로마 사회라면, 로마 사회의 합법적인 시민을 뜻하는 포풀루스(populus)의 일부이지만, 열등하고 비천한 일부로서의 플레브스(plebs)도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에 해당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경우에는, 김혜진이 적절하게 표현한 바와 같이 ‘2등 국민’으로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내적으로 배제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곧 을(또는 을의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사람들, 2등 시민, 2등 국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이러한 내적인 배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배제는 단순히 빈곤함이나 특정한 자격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개마고원, 2013, 77쪽.]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남들’이 다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연애, 결혼, 육아, 휴가, 여행 등), ‘남들’이 다 누리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노동권, 사회권, 심지어 인간의 권리까지도),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이들(주거, 소득, 연금 등)이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배제 내지 잔여로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불평등한 위치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없거나 극히 적으며, 그러한 항의를 통해 그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이들은 누군가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희생되고 주변화되어야 하는 사람이며, 누군가의 권리 쟁취를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이들이다.
심지어 이들은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착취가 가능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의 여러 작업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의 “착취”(exploitation)가 가능하기 위해 미리 전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수준의 착취, 말하자면 착취의 착취에 해당하는 개념을 “수탈”(expropriation)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바 있다.[Nancy Fraser, “Behind Marx’s Hidden Abode: For an Expanded Conception of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 181, 2015; “Roepke Lecture in Economic Geography: From Exploitation to Expropriation”, Economic Geography, vol. 94, no. 1, 2018; Nancy Fraser & Rahel Jaeggi, Capitalism: A Conversation in Critical Theory, Polity, 2018을 각각 참조.] 이것은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에게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자는 생명체로서 탄생해야 하고 양육되고 교육되어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성장해야 하며, 또한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동을 맡아서 수행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후자의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따라서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의 회로 바깥에 존재한다. 또한 중심부 자본주의 노동자들 및 그의 가족들이 생필품을 싼 값에 구입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부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회로 안팎에서 저임금과 초과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다른 존재들이 항상 이미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레이저가 말하는 착취와 구별되는 수탈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적 위상을 왜 보편의 잔여라고 표현하는가? 우선 내가 보편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조금 더 정확히 밝혀두자. 그것은 근대 민주주의가 자신의 원리로 전제하고 있는 보편을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의미의 민주주의적 보편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 중 하나는 에티엔 발리바르다. 그는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발표한 「평등자유 명제」라는 논문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평등자유’(égaliberté)라고 정의한 바 있다.[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발리바르가 흔히 사용되는 ‘평등한 자유’(égal liberté, 영어로는 equal liberty)라는 개념 대신 평등과 자유를 합친 일종의 혼성어로서의 평등자유를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로 제시한 이유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는 평등과 자유라는 두 개의 개념이, 사람들의 통념과 다르게 서로 분리할 수 없게 결부되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발리바르의 논점을 간략하게 설명해본다면, 그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텍스트인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하 「권리선언」으로 약칭하겠다)의 논리적 핵심을 두 가지 명제, 곧 인간 = 시민 명제와 평등 = 자유 명제에서 찾는다. 첫 번째 명제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어떤 자연적인 토대(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든 ‘자연권’이든 간에)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는 각각의 시민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또 보증하는 권리라는 점을 뜻한다. 이 때문에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민주주의와 달리 평등을 자유의 한계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곧 고대 민주주의에서 평등의 선행적 조건은 자유 시민(자유로운 성인 남성)이라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여성이나 아이 또는 노예는 평등한 시민의 자격에서 배제되었다면, 근대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자유를 긍정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을, 적어도 그 원리에서는 시민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듯, 인권은 그 자체가 정치적 권리이며, “정치에 대한 인간의 권리”[Ibid., pp. 66-67]를 함축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는, 자유와 평등을 각각 상이한 규범적 가치, 따라서 서로 다른 것 없이 독자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그리고 자주 서로 대립하는 개념적 실체들로 간주해온 오래된 철학적 주장들과 달리, 이 두 가지 개념 각자가 자신의 성립 조건으로서 다른 개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곧 자유 없이는 평등도 존재할 수 없고, 평등 없이는 자유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Ibid., p. 71]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평등 = 자유라는 명제다. 예컨대 자유가 평등이 아니라면, 곧 자유가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성립하는 자유라면, 그때 자유는 우월성이나 특권의 표현(강자의 자유, 귀족의 자유, 갑질의 자유 등)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보다 우월한 어떤 힘이나 세력에 복종할 수 있는 자유, 따라서 실제로는 전혀 자유라고 할 수 없는 자유(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유가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평등과 결합되어야 하며, 역으로 평등은 “모든 예속과 지배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일반 형식으로, 곧 자유 그 자체의 자유화/해방(libération)으로 사고되어야 한다.”[Ibid., p. 72] 따라서 발리바르의 평등 = 자유 명제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인간 = 시민의 동일성의 의의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긍정”[Ibid.]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평등자유 명제, 곧 인간 = 시민 명제와 평등 = 자유 명제의 보편성 위에 설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보편의 잔여가 을의 두 번째 존재론적 규정이 될 수 있는 것은, 을(및 을의 을)이라는 존재자가 이러한 의미의 평등자유 명제의 보편성을 잠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잠식은 결여의 형태를 띤 잠식이 아니라 오히려 잉여의 형태, 무언가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 더 이상 필요 없는 잔여의 형태를 띤 잠식이다.[영어로 표현한다면, superfluousness나 surplusage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임에도, 그 공동체에서 내적으로 배제되는 이들, 이들은 공동체 내에서 쓸모없고 무가치한 이들, 마치 일회용 휴지처럼 그때그때 쓰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내버려도 되는 이들, 언제든지, 얼마든지 다른 이들이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이들, 따라서 일회용 인간(disposable people, homme jetable)과도 같은 지위로 규정되는 이들, 이것이 을의 두 번째 존재론적 규정을 내가 보편의 잔여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금 더 부연해보자. 평등자유 명제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성은 “부정적 보편성, 곧 절대적 비규정성”[Étienne Balibar, Op. cit., p. 72]을 특징으로 하는 보편성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비규정적 보편성으로 인해 평등자유 명제는 근대성 내내,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혁명적인 함의를 보존하고 있다. 예컨대 평등자유 명제는 19세기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에서만이 아니라 20세기 여성해방투쟁과 식민지해방투쟁, 흑인들의 인권운동, 그리고 21세기의 이주노동자 권리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적 지주로 작용해왔다. 만약 평등자유 명제가 오직 노동자들의 해방투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곧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과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만 효용이 있는 것이었다면, 평등자유 명제의 중요성은 훨씬 감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 이외에도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정치체에 대한 권리 같은 저작에서 잘 보여주었듯이,[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정치의 재발명,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및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참조.] 그리고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나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이른바 평등의 삼단논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해명한 바 있듯이,[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및 불화: 정치와 철학, 앞의 책 참조.] 평등자유 명제 또는 (랑시에르의 경우에는) 평등 명제는 노동자들의 해방투쟁만이 아니라 여성해방투쟁, 식민지해방투쟁, 이주자들의 권리투쟁과 같은 근대의 모든 해방투쟁에서 피억압자, 피지배자, 따라서 을들의 투쟁을 위한 필수적인 준거로 기능해왔으며, 이것이 바로 그 명제를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 명제로 만든 요인이다.
그런데 평등자유 명제 또는 평등 명제는 한편으로 보면 갑의 지배에 맞선 을들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훌륭한 토대가 되어 주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자신의 불가피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 이유는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평등자유 명제의 비규정적 보편성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평등자유 명제 또는 평등 명제의 보편성은, 그것이 비규정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또 다른 차이와 구별, 따라서 배제를 산출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를 인권의 역설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방금 살펴본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르면 인권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채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 자신을 포함한 이민자들, 이주자들, 난민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에서 제창된 인권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왜냐하면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는 인권이라기보다 “영국인의 권리”라고 주장했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곧 인권은 시민의 권리 또는 국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것을 근거 짓기는커녕 오히려 특정한 나라의 국민으로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실제로 인권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내전이나 기아 등을 피해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쉽게 입국할 수 없을뿐더러, 어찌어찌해서 입국한다고 해도 그 나라 국민들과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그들에 비해 훨씬 열악하고 불평등한, 그리고 부자유스러운 처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주자 내지 이민자 또는 난민들은 바로 보편의 잔여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뜻하는 바는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는 바로 그 원리 자체로 인해 이전의 정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본적인 배제, 곧 잔여 내지 잉여로서의 을들 및 을의 을들을 산출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말하듯, 어떤 나라의 국민에 합법적으로 소속될 경우에만 시민으로서의 권리,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고 실제로 향유할 수 있다면, 역으로 그것은 누군가가 어떤 나라의 합법적인 국민이 아니라면, 그는 단지 시민으로서의 권리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 자체를 부정 당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곧 누군가가 어떤 정치공동체의 성원에서 배제되는 순간, 그는 사실상 인간 공동체 전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배제의 형태가 민주주의적 보편의 원리 자체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는 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하고 경험하게 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보편의 잔여로서 을들의 지위를 표현해주는 충격적인 개념이 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라틴 아메리카 광산 노동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주변부 국가들 도처에서, 그리고 이른바 ‘선진국’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 이외에도 ‘일회용 노동자’, ‘일회용 청년’ 같은 용어들도 쓰이고 있다. 케빈 베일스, 일회용 사람들: 글로벌 경제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1999), 이소, 2003; Fred Magdoff & Harry Magdoff, “Disposable Workers: Today's Reserve Army of Labor”, Monthly Review, vol. 55, no. 11, April 2004; 헨리 지루, 일회용 청년: 누가 그들을 쓰레기로 만드는가, 심성보 옮김, 킹콩북, 2015.] 현대 사회의 노예제도에 관한 전문가인 케빈 베일스는 일회용 인간은 현대적 노예 제도의 표현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잠재적 노예의 절대적 공급 과잉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수요 공급 법칙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 노예와 노예 소유자의 관계는 그 본질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일회용처럼 되면서, 노예로부터 얻을 수 있는 수익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한 사람이 노예로서 사는 기간이 줄어들었으며, 법적 소유권이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게 되었다. 노예 구입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을 때, 그 투자는 명시적인 법적 소유권 문서를 통해 안전성을 보장받아야 했다. 과거의 노예는 훔칠 만한 그리고 탈출하면 추적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현대의 노예는 아주 값싸기 때문에 '법적' 소유권을 애써 보장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노예는 일회용 인간이다.[케빈 베일스, 일회용 사람들: 글로벌 경제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 30쪽.]
그리고 이러한 일회용 인간은 우리나라에서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2018년 9월 11일 방영된 문화방송(MBC)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피디수첩”에서는 “한국전력의 일회용 인간들”이라는 제목 아래, 공기업 한국전력에서 배전 업무를 담당하는 하청업체 직원들의 위험한 상황을 보도한 적이 있으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는 “'일회용 인간'에게 강제 노동시키는 한국 … 언제까지?”라는 제목 아래 연속 기획으로 이주노동자들이 ‘고용 허가제’ 아래에서 경험하는 극단적인 착취와 폭력, 인권 침해의 현실들을 탐사 보도한 바 있다.[프레시안 2013년 6월 28일 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2167#0DKU]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회용 인간이라는 개념이 단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우리 시대, 곧 신자유주의적인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효과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자신의 처지가 일회용 인간과도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비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 노동자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알랭 쉬피오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노동조직은 과거의 포드주의적 타협과 달리 테일러주의에(만)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오늘날의 노동 과정에서 테일러주의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대표적인 물류기업 쿠팡에서 시행한다고 하는 ‘시간당 생산량’(UPH, unit per hour) 시스템은 테일러주의의 현대적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경영”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성과경영 체제에서는 위에서 주어진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들 개개인이 지닌 노동 능력을 자율적으로 최대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더욱이 성과경영 체제에서는 노동자만이 아니라 경영자를 포함한 “모두가 제어된다.” 다만 성과에 비례하여 경영자 내지 관리자들은 보너스나 스톡옵션 등의 당근을 받는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더 많은 채찍이 가해진다는 점(고용의 불안, 고용 내의 불안)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이른바 ‘3차 산업혁명’(제레미 리프킨) 내지 ‘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경제에서의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비정규노동을 넘어 훨씬 더 파편화되고 불안정한 노동들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디지털 전환과 이에 따르는 노동 형태의 변화에 대해서는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IDI도시연구 18호, 2020; 김종진, 「디지털 플랫폼노동 확산과 위험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경제와 사회 125호, 2020 참조.] 긱 경제(gig economy)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경제에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가중된 경쟁 속에서 저임금과 고용 불안을 감수해야 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고용 형태에서 노동자들이 보장받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3.3. 유사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을
그런데 만약 을들이 이처럼 보편의 잉여 내지 잔여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실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이 더 이상 보편으로서 성립하지도 기능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들로서의 을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의 가능성 및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들 = 시민들의 보편적인 평등과 자유를 가리키는 평등자유 명제를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명제에 입각한 민주주의 공동체의 토대 자체를 내부에서부터 와해시키는 것이다. 이로부터 을의 세 번째 존재론적 규정을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보편의 잔여로서의 을은 보편이 보편으로 성립하기 위한 시금석 내지 관건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금석은 데리다가 말하는 의미에서 아포리아적인 것, 곧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이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참조.] 왜냐하면 보편적인 평등자유를 잠식하는 것,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다름 아닌 보편적인 평등자유 명제 그 자체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을은 보편적인 평등자유명제에 기반을 둔 근대 민주주의에 대하여, 데리다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유사초월론적인(quasi-transcendental) 조건으로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칸트 또는 후설의 고전적인 초월론 철학과 구별되는 유사초월론에 대한 한 가지 정의는, 유사초월론은 “가능성의 조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유사초월론: 데리다와 이성의 탈구축」, 철학논집 53집, 2018 참조.]
이점에 관해 조금 더 부연해보자. 보편의 가능성 및 현실성을 부정하는,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들에 직면하여 근대 민주주의(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의 근본 질문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내적으로 배제된 존재자인 을들을 민주주의 공동체 내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또는 을들을 공동체의 온전한 성원으로 포함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공동체는 어떻게 개조되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이 질문은 랑시에르가(그리고 또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역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포스트 민주주의적인 퇴락의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랑시에르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집약하는 「정치에 대한 10개의 테제」 가운데 다섯 번째 테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개념화한 바 있다.
테제 5.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peuple)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인민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partie supplémentaire)으로,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Gallimard, 2004, pp. 233~34;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16쪽. 번역은 다소 수정.]
이 테제의 핵심은 “대체 보충적인 부분”이라는 어휘다. 이것은 데리다의 ‘대체보충’(supplément)이라는 개념을 랑시에르가 정치철학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루소의 저작을 분석하면서 대체보충이라는 개념을 처음 고안해냈다.[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참고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국역본은 두 종이 존재하지만, 모두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국역본만으로는 데리다의 논지를 이해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문자 기록(écriture)을 “위험한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문자 기록은 음성적인 언어인 말을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점차 말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장-자크 루소,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ㆍ고병만 옮김, 책세상, 2002.] 루소는 이처럼 문자 기록의 부정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쉬플레망, 곧 대체보충 개념을 사용했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기원이라는 것의 존재론적 부재와 문자 기록의 (역설적인) 근원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했다. 우리가 기원이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현존(Anwesen, présence) 그 자체는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문자)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연différance)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이는 로고스 중심주의 및 음성 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서양의 현존의 형이상학을 탈구축하려고 했던 초기 데리다 작업의 핵심을 이룬다.
데리다의 대체 보충 개념을 랑시에르는 인민 개념과 관련하여 활용한다. 5번째 테제에서 랑시에르가 인민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때 핵심 논점은 세 가지다. 첫째,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체”를 인민으로 정의하는데, 단 이러한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우리나라의 용어법으로는 ‘국민’)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주체 = 정치의 주체는 단순히 어떤 정치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들의 전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본다면,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라는 규정은 갑과 을 사이의 차이, 곧 갑을 관계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이는 갑을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의 주체의 본질,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정의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더욱이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인민은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과 같은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랑시에르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관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역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부연해 본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정치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인민에 대한 정의를 충족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만으로는 을 전체를 온전히 개념화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만이 을이 아니라, 여성도 을이고, 성적 소수자도 을이며, 흑인도 유색 인종도, 난민도, 이주자도 역시 을인 것이다. 더 나아가 외연적으로만이 아니라 내포적으로도 노동자 계급은 을이라는 개념을 포괄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 내부에도 갑을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랑시에르는 인민을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라고 정의하는 대신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이라고 재정의한다. 이 정의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이라는 문구다.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인민은, 인구를 이루는 부분들이 공동체에서 몫을 나누어가질 자격에 대한, 그리고 이 자격에 따라 그들에게 돌아올 몫들에 대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다. 인민은 셈해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셈 또는 몫 없는 이들의 몫, 곧 말하는 이들의 평등—이러한 평등이 없이는 불평등 자체도 사고 불가능하다—을 기입하는 대체 보충적 존재다.”[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pp. 234~3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43쪽-번역은 수정. 강조 표시는 필자.] 여기에서는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라는 문구가 중요하다. 우선 “모든 실제의 셈”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 곧 각각의 개인과 집단, 계층과 계급들이 그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갖게 되는 몫에 대한 규정을 뜻한다. 이러한 몫은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익이나 권리들만이 아니라 각각의 부분이 지니는 정체성과 성질 및 자격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 인민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인민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계급이나 집단, 개인이 지닌 정체성과 무관한 것, 곧 그들이 지닌 속성이나 자격, 정체성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속성 내지 자격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실제의 셈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분배의 몫을 규정하는 데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정치 공동체인 한에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성원들이 항상 이미 지니고 있는 속성 내지 자격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1인1표’ 같은 표현이 여기에 해당한다. 재벌이든 비정규직 노동자든, 대통령이나 장관이든 아니면 주민자치센터의 말단 직원이든 민주주의 정치체에서는 모든 시민이 동등한 투표의 권리를 지닌다. 이러한 동등한 투표의 권리는,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것, 곧 각각의 성원의 자격이나 속성 등과 무관하게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는 속성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은, 재벌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또는 대통령이나 장관으로서, 아니면 주민자치센터의 9급 직원으로서 갖는 이런저런 자격이나 정체성과 무관하게, 평등한 권리들을 지닌 개인들 및 집단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인민이 “대체보충적인 부분”인가? 이러한 인민이 대체하면서 보충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러한 의미의 인민이 대체하는 것은, 랑시에르가 아르케(arkhe)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르케는 ‘시초’(기원), ‘원리’, 그리고 ‘지배’와 같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이었다. 랑시에르는 아르케라는 개념을, 앞에서 말했던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에 입각하여 인민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어떤 공동체 성원들의 속성 내지 자질과 그에 따른 분배의 몫을 규정하는 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공동체 성원들의 속성이나 자질에서는 당연히 차이(예컨대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외모의 차이 등), 더 나아가 우열(예컨대 지식의 정도, 기능의 정도, 신체적 능력의 정도, 부유함의 정도 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르케를 기반으로 구성된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불평등과 위계를 포함하는,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 정당한 것으로 허용하는 공동체가 된다. 랑시에르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 같은 근대적인 시민혁명을 통해 성립한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 전 6세기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민주주의 개혁을 “민주주의에 그것의 장소를 부여하는 중대한 개혁”[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앞의 책, 242쪽.]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아르케에 입각한 통치 체제, 곧 자연적 불평등에 기반을 둔, 몫 없는 이들(곧 을)에 대한 몫 있는 이들(곧 갑)의 지배를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통치 체제와 단절하고,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서의 민주주의 정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는 군주제나 귀족제와 같은 다른 정치 체제와 구별되는 하나의 정치 체제(regime)가 아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정치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랑시에르 식의 용어법에 따르면 오직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 정치만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이며, 나머지 정치는 사실은 치안(police)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민이란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에 따라 규정되는 인민만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이며, 나머지 인민들, 곧 민족적 특성에 따라 규정되거나 국민적 자격(국적(nationality) 내지 시민권(citizenship))에 입각하여 구별되는 인민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치안적인 집합체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의 민주주의 개념은 보편의 잉여 내지 잔여로서의 을을 민주주의 공동체 내부로 포함하기 위한, 역으로 말하자면 을에 입각하여 민주주의 공동체를 개념적으로 개조하려고 시도한 가장 급진적이고 탁월한 시도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시도는, 내가 앞서 지적했던 한 가지 아포리아에 직면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랑시에르는 데리다가 사망한 뒤 그를 기념하기 위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에서 데리다와 자신의 정치철학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조금 길지만 그 중 중요한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경악스러운 원리를 의미한다. 지배하는 사람은, 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아무 이유가 없다는 사실 말고는―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근거들 위에서 지배한다는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무정부적/무근거적(anarchical) 원리이며, 이는 권력과 데모스 사이의 이접적인 연결이다. 역설적인 것은, 민주주의의 이러한 무정부적/무근거적 원리가 정치 공동체 및 정치권력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적 대체보충 또는 과잉이 의미하는 것이다. ... 데모스는 사회적 차이화들의 집합에 대한 대체보충이다. 데모스는 아무런 권한도 갖지 않은 이들, 계산에서 아무런 단위로 셈해지지 않은 이들로 이루어진 대체보충적인 몫이다. 나는 이것을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패배자들이 아니라 아무나, 누구든을 의미한다. 데모스의 권력은 아무나의 권력이다. 그것은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 또는 차이에 대한 비차이/무관심(indifference to difference), 공동체의 근거에 놓여 있는 일체의 비대칭 원리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데모스는 그것이 사회의 몫의 계산에 대해 이질적인 한에서 정치의 주체다. 그것은 타자(heteron)이지만 특수한 종류의 타자인데, 왜냐하면 그것의 타자성은 대체 가능성에 상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Jacques Rancière, “Should Democracy Come?”, in Pheng Cheah & Suzanne Guelac eds., Derrida and the Time of the Political, Duke University Press, 2009, pp. 276-77. 강조는 필자.]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이 대목에서 랑시에르는 자신의 민주주의론의 핵심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데모스의 권력, 인민의 권력을 “아무나의 권력”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이다. 사실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음(an-arkhe)으로, 단순히 무-정부적인 것을 넘어서, 무-원리적인 것, 무-근거인 것으로 정의되면, 그리고 데모스 내지 인민이 “사회의 몫의 계산에 대해 이질적인” 것으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으로 정의되면, 데모스는 “아무나, 누구든”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에서는 아무나, 누구든 1표를 행사한다. 그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아니면 말단 공무원이든, 또는 그가 재벌이든 노숙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는 퀴어이든,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등하게 1표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주체는 개인적인 차이(성별, 인종, 고향, 직업, 나이 등)나 우열(지식의 정도, 기술적 능력의 정도, 부유함의 정도 등)과 무관하게, 그러한 속성이나 자격 또는 정체성에서 추상하여 규정된 주체, 아무나, 누구든이며, 인민은 이러한 아무나의 집합이다.
랑시에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아무나, 누구든을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 또는 차이에 대한 비차이/무관심”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규정 덕분에 아무나의 권력으로서, 보편적 평등자유로서의 민주주의가 함축하는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아무나가 무한한 대체 가능성을 뜻하고, 차이에 대한 비차이 또는 차이에 대한 무관심을 뜻한다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데모스 내지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무한하게 대체 가능한 존재자들이며, 그 개인들이 지닌 차이나 우열에 대해 무관심한 개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적인 것(modern thing), 근대적 사물이 또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상품이다. 데모스가 아무나, 누구든을 의미하는 것처럼, 상품 역시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아무 것이든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등가적이기만 하다면, 곧 평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두 개의 상품은 서로 대체 가능한 것이며, 그것들 사이의 차이(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사용가치’)가 문제되지 않는다. 실제로 상품은 매우 민주주의적이다. 그것은, 적어도 원리상으로 본다면 자신을 판매하는 이가 누구인지(여성인지 남성인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국적이 어떤 것인지), 누가 그것을 구매하는지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에 상응하는, 그것과 대체 가능한 가치를 지불할 수 있다면, 상품은 기꺼이 다른 상품과 대체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논리는 바로 상품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상품의 논리가 관철되는 시장이야말로 가장 민주주의가 잘 전개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상품만큼 서로 대체 가능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상품만큼 아무나, 누구든 가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상품 이외에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또 다른 존재자, 또 다른 근대적인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일회용 인간들이다. 사실 일회용 휴지가 다른 일회용 휴지와 아무런 차이 없이, 차이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체 가능하듯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무한하게 대체 가능한 인간, 그것이 바로 일회용 인간의 정의가 아닌가? 일회용 인간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다른 이들이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이들이며, 완벽하게 상품화된 인간이다. 그런데 랑시에르의 정의를 존중한다면, 바로 이러한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인해, 그들은 또한, 아무리 이상하고 역설적이게 들린다고 해도, 완벽하게 민주주의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데모스의 아무나와 상품의 아무나, 그리고 일회용 인간의 아무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가? 전자는 무엇보다 인격체이고, 상품은 사물이며, 일회용 인간은 존엄한 인격체여야 마땅한 인간을 사물로, 그것도 하찮은 사물로 취급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 세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자연스러운 의문이고 문제제기이지만, 랑시에르가 데모스를 “아무나, 누구든”으로 정의하는 한, 민주주의를 데모스의 권력으로, 따라서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로 정의하는 한, 세 가지가 동일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의에는 인격체와 사물의 구별, 전자는 후자와 구별하여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는 규정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오늘날 자신을 더 값비싼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값을 더 높이기 위해, 따라서 자신을 상품화, 사물화하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존엄한 인격을 지닌 데모스들 아닌가?
더 나아가 이것은 랑시에르가 민주주의를 너무 과도하게 정의한 데서 생겨나는 문제점일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실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 그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의 귀결이다. 우리가 앞서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명제를 다루면서 언급했던 근대 민주주의의 성전인 「인권선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버크는 「인권선언」에 나타난 ‘인권’의 담지자인 추상적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국민과 그가 지닌 권리만이 실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큰 혼란을 양산해온 허세뿐인 인권이 국민의 권리일 리 없다. 국민이 되는 것과 이런 권리를 갖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존재를 가정하고, 후자는 시민 사회 상태의 부재를 상정한다.”[Edmund Burke, Further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edited by Daniel Ritchie, Liberty Fund, 1992, pp. 163~64; 유벌 레빈,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보수와 진보의 탄생, 조미현 옮김, 에코리브르, 2016, 90쪽에서 재인용.] 마르크스 역시 다른 측면에서 「인권선언」의 인간 및 인권의 추상성을 비판한다. 곧 「인권선언」이 말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는 법적ㆍ정치적 영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경제 영역에 존재하는 개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 영역에서 사람들은 소유자와 비소유자, 다시 말해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살아가는 노동자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할 뿐, 「인권선언」이 말하는 평등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오히려 만약 양자 사이에 평등한 자유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계급적 현실을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혁명 이후 「인권선언」이 200년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해방운동 및 을들의 투쟁을 위한 강력한 상징적 토대로 작용했다면, 이는 정확히 「인권선언」이 말하는 인간이 이런저런 구체적 개인들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인권선언」이 사람은 국적과 관계없이, 재산 유무에 관계없이, 피부색에 관계없이, 종교에 관계없이, 성별에 관계없이, 또 연령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자로 간주되며 또 그렇게 간주되고 존중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인권선언」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인 주체, 민주주의적인 인간은 사실 그 기원에서부터, ~ 없고 ~ 없고 ~ 없는 인간, 곧 랑시에르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인간, “무한한 대체 가능성의 원리 또는 차이에 대한 비차이/무관심”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론을 대신하여
이렇게 해서 우리는 머리말에서 말했던 것처럼, 을의 정치적 존재론을 탐색한 끝에 하나의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을의 존재론적인 특성을 과두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통치자 일반으로 규정하는 것은 외연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겠지만, 을의 내포적인 특성을 해명하는 데는 미흡하다. 그리하여 을은 다시 보편의 잔여 내지 잉여로서 정의되었는데, 보편적인 평등자유 명제의 토대를 잠식하는 이러한 정의, 일회용 인간으로서의 을이라는 정의는 실로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서의 갑을 관계, 을의 존재론적 문제성을 드러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잔여 내지 잉여로서의 을들을 민주주의적 공동체 안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개조되어야 할까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스트 민주주의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대신 오히려 일회용 인간으로서의 을들의 생산을 불가피한 것으로 가정하면서 고작해야 그 잔혹성을 완화하거나 아니면 그 고통을 을들 사이에 불평등하게 배분함으로써(말하자면 을과 병, 병과 정 등을 차별화함으로써) 민주주의적 공공성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책임을 을들이 끝없는 생존투쟁을 통해 스스로 획득해야 할 개개인의 기업가적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는 만큼, 그 질문의 긴급함과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이 확정적인 답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인 하나의 아포리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아포리아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비로소 생겨나게 된 아포리아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논의가 얼마간 일리가 있는 것이라면, 근대 민주주의(고대 민주주의의 경우는 더욱 더)의 원리 자체에 내재해 있는 아포리아다. 이러한 아포리아를 확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무언가 긍정적인 또는 생산적인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텐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논점을 덧붙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다. 을의 정치적 존재론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을은 갑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고 있지만, 동시에 병이나 정에 대해서는 지배적인 위치 내지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을은 종속자이면서 지배자이고, 열등한 자이면서 우월한 자이다. 을이 갑에 의해 착취와 억압 또는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을은 또한 병이나 정 등에 대하여 또 하나의 갑으로서 군림할 수 있으며, 때로는 자신이 갑에게 당하는 갑질보다 더한 갑질을 병이나 정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을이든 병이든 정이든 또는 그 아래의 다른 개인들이나 집단들이든 간에, 이들 모두는 갑에 대하여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통의 종속성을 넘어, 때로는 그러한 공통성 이상으로 을들 사이에는 착취와 억압, 혐오와 배제의 관계가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갑과 을 사이의 갈등 내지 적대를 넘어, 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갈등과 적대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것은 원래 그런 것, 인간 사회에 내재하는 모종의 불가피한 속성일까?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다보면 원래 위계가 생길 수밖에 없고, 누구는 우월한 위치에, 누구는 열등한 위치에, 누구는 지배하고 누구는 복종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성립하는 것일까? 에드먼드 버크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반면 랑시에르 같은 급진 민주주의자라면, 그것은 정치와 치안이 더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은 결과이며,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서, 아무나의 정치로서 민주주의가 충분히 실천되지 못한 결과라고 답변할 것이다.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좌파 연구자들이라면, 그것은 계급적인 지배의 효과이거나 적어도 신자유주의적인 원리가 사회 전체로 침투한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버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갑과 을 사이의 지배와 복종의 관계 및 을들 사이의 갈등과 적대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매우 뿌리가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랑시에르와 같은 탁월한 급진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의 원리를 동어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것 이상으로 사유하지 못할 만큼 민주주의의 맹점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갑을 관계의 문제가, 을과 을 사이의 갈등과 적대가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또는 가부장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아니면 또 다른 이런저런 구조적인 요인의 결과라고 제시하는 것은 유용하고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의 존재론적 깊이에는 미달하는 것이다.
정치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평등자유의 보편성 내에서, 민주주의적인 아무나와 누구든의 보편성 내에서 차이와 독특성(singularity)을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와 독특성을 사고하고 제도화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한에서, 그것이 남긴 공백은 다른 종류의 차이와 우열로 메워질 것이다. 아무나와 누구든 사이의 차이, 아무나와 누구든이 지니는 독특성이, 아주 드문 경우들(대개 혁명의, 봉기의, 기적과 같은 연대의 순간들에서 나타나는)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경험하기 어렵고 사고하고 제도화하기는 더욱 더 어려운 것인 만큼, 그 공백은 그만큼 깊고 넓다. 하지만 포스트 민주주의에 이르러 이제 민주주의의 원리 자체가 잠식당할 위기에 놓인 만큼, 따라서 갑을 관계가 사회 전체로 더욱 확산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공백들을 사유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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