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에서 paniked-83님이 스피노자 [윤리학] 영역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해서, 답변하는 김에

따로 페이퍼를 하나 써봅니다.

[윤리학] 영역본 중에서 권할 만한 책은 세 권이 있습니다.

우선 가장 값싸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번역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습니다.

 

The Ethics ; Treatise on the Emendation of the Intellect ; Selected Letters

trans, Samuel Shirley

 

이 책은 대학에서 오랫동안 라틴어를 가르치다가 정년퇴직한 뒤, 20여년 동안 스피노자 번역에만 몰두한

80대의 노학자가 번역한 책입니다. 값이 제일 싸고(10달러) 번역이 술술 잘 읽히는 게 제일 큰 장점이죠.

[지성교정론]과 일부의 편지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도 장점이구요.

다만 번역만 나와 있고 해설이 부족한 것이라든가 몇 가지 부적절한 용어 선택 같은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군요.

참고로 셜리의 번역으로 된 [스피노자 전집]도 2003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래의 책이 추천할 만합니다.

A Spinoza Reader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스피노자 연구자인 Edwin Curley라는 사람이 번역한 책인데, 이 사람은 1985년에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스피노자 저작집 1권] 을 먼저 낸 적이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초기 저작과

[윤리학], 그리고 20여통의 편지를 시간 순서상으로 편집한 책인데, 아주 상세한 역주가 담겨 있고 번역도

정확한 편이어서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판본 중 하나입니다. 2권은 10여년 동안

곧나온다 곧나온다 하면서 아직 안나오고 있죠. ^^;;

이 책은 [윤리학]을 중심으로 스피노자의 나머지 저작들을 발췌해서 엮은 [스피노자 선집]입니다.

역주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는데, [스피노자 저작집 1권]에 있는 몇 가지 오역들을 바로 잡아서

번역만으로 본다면, 이 책이 더 권할 만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권 더 추천하자면,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죠.

Spinoza: Ethics (Oxford Philosophical Texts)

이 책은 G. H. R. Parkinson이라는 영국의 저명한 17세기 대륙 합리론 연구자가 번역한 책입니다.

세 권 중에서 제일 나중에 나온 번역본인데, 역시 역주라든가 해설은 많지 않지만, 번역은 정확하고

술술 잘 읽힙니다. 값도 15달러면 비교적 싼 편이죠.  

 

제가 보기에는 이 세 권 중 한 권이라면, 어느 것을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aniked-83 2005-05-2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아~ 진짜 감사합니다~~~!!

balmas 2005-05-2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하면 추천이라도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
ㅋㅋ

paniked-83 2005-05-28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러고보니 '추천'이란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 ㅎㅎ 첫 추천 했습니다.^^

balmas 2005-05-2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그래야 인지상정이지 ... ^^;;

einbahnstrasse 2005-06-04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버 판은 어떤지 질문을 드려도 될지요?

balmas 2005-06-0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ver판은 아마도 Elwes의 번역본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이 판본은 20세기 초에 나온 판본이고, 오랫동안(셜리나 컬리의 번역이 나오기 전까지) 영미권에서 널리 사용되었죠. 그 이유는 번역이 빼어났다기보다는 다른 번역본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특히 [신학정치론] 같은 경우는 Elwes의 번역본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20세기에 영미권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철학자나 교양 대중들의 관심을 널리 끌지 못했다고 봐야겠죠.
그러니 지금 와서 굳이 Elwes의 번역본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luce 21님이 고맙게도 퍼다 주셔서 다시 페이퍼로 올립니다.

ㅎㅎㅎ 호정무진님, 이제야 제가 면목이 섭니다.

 

현상학자 폴 리쾨르, 92세를 일기로 영면

 

프랑스 철학의 주류와 거리두기, 외려 미국에서 더 인정 받아
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장 폴 구스타브 리쾨르, 92세를 일기로 영면

해석학자 폴 리쾨르
 AFP 통신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지난 20일(프랑스 현지 시간) 9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폴 리쾨르의 아들 마르크는 그의 아버지가 파리 서부, 샤트나이 말라부이에 있는 자택에서 자연사했다고 프랑스 언론을 통해 밝혔다.

1913년 2월 27일 프랑스 남동부의 발랑스에서 태어난 폴 리쾨르는 렌 대학과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렌대학 졸업 직후 교사 생활을 하던 리쾨르는 1940년,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로 잡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 야스퍼스의 감화를 받고 현상학자 후설의 ‘Ideen(이념들)’을 번역해 현상학자로서의 일생을 시작했다.

68혁명기 ‘정부의 협력자’라는 비판 듣고 미국으로 옮겨 강의

종전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을 거쳐 1948년 부터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사를 강의하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소르본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에는 파리 교외의 낭테르 대학으로 옮겨 학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 학생운동이 몰아쳤던 1968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일면 반공주의자적이기도 한 그의 보수적 면모가 학생들과 충돌했고 그는 프랑스 청년들로부터 ‘정부의 협력자’라는 비판을 들은 끝에 낭테르 대학을 사임했다. 이후 뤼뱅 대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뢰쾨르는 시카고 대학과 예일대학등지에서 강의했다.

특히 시카고 대학에서 15년간 몸을 담으며 리쾨르는 미국 철학과 사회과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쾨르는 1985년 공식적으로 대학에서 은퇴했으나 은퇴 후에도 활발한 연구, 저작 활동을 펼쳤고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시간과 이야기', '자유와 본성',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구조주의, 해체주의와 거리를 둔 보수적 면모를 지닌 해석학자

해석학자로서 리쾨르는 기존 문학 연구의 시간 연구를 종합해 시간의 주제와 형식 양 측면에서 통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리쾨르는 평생에 걸쳐 어떻게 한 사람이 그가 직면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인식해서 자신의 진실을 형성해나가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로 향하는 리쾨르의 해석학이었다. “객관성이라는 말의 정의는 ‘논리적’인 정의에서 ‘윤리적’인 정의로 변형되었다” 리쾨르가 1955년 발간한 ‘역사와 진실’의 한 구절이다.

급진적인 프랑스 현대 철학의 주류에 반해 리쾨르의 연구는 성경과 텍스트로 틈입해 들어갔고 오히려 미국등지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리쾨르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인 해석이론은 1973년 그의 강연을 모아 출간되었는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당대의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는 리쾨르의 사상 궤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리쾨르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에서부터 90년대의 보스니아 전쟁에 이르기 까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을 그의 철학적 실천으로 삼았다.

리쾨르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프랑스 대통령 자끄 시락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증명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철학자라고 헌사를 보냈다. 장 폴 구스타브 리쾨르는 1935년 시몬 르자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겼다. 또한 리쾨르는 그의 장례식에 가족과 친구만 참석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balmas님의 "사회화와 노동 265호-룰라, 한국에 오다"

로쟈님과 가을산님이 댓글들을 몇 개 달아주셨군요.

그런데 로쟈님 이야기에는 동의하기 힘든 점들이 몇 가지가 있군요.

우선 <이런 텅빈(게다가 게으른) 구호들>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좀 지나친 말인 것

같습니다.

첫째, 이 글은 국내의 사회운동에 관한 게 아니라 브라질의 정세에 관한 것이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성격에 관해 나름대로의 분석과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룰라의 정책은 브라질 대중들의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운동 역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게 요지인 듯합니다. 그리고 룰라의 교훈은 노무현에게서도 유사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죠. 그런데 국내 사회운동 단체가 브라질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자세한 내막도 모르는 브라질의 사회운동에 관해 이런저런 식의 훈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요컨대 대상이 대상인 만큼 운동의 방향이라든가

목표를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없는 거 아니냐는 말입니다.

둘째, 이런 브라질의 정세에 대한 분석에서 로쟈님은 게으르다고 말한 운동의 원칙을

상기시키는 건 제가 볼 때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사실 아직도 룰라에 대해 잘 모르는

(저같은) 사람도 여럿 있을 텐데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것은 사회운동의

근본 원칙("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건 브라질의 사태를 인식하는 데

충분하지는 못해도 얼마간 도움이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 원칙이야 늘 공허한 것이긴 하지만, 그런 공허함이 원칙의 생명력을 이루는 것

아닌가요? 때로는 현재의 사태의 성격을 진단하고 평가하기 위해 원칙을 상기해보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만 저로선 어떤 입장을 갖더라도 말에 책임을 지는 것, 다시 말해서 말에 제값의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때문에 내용없는 말들을 자기 알리바이로

반복하느니 뭔가를 보여주거나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라는 로쟈님의

말씀도 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제가 보기에 이번 사회화와 노동은 충분히 무게가 있는

말이고 자기 말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왜 로쟈님은 이 글에 내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지 저로서는 그게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룰라의 방한을 맞아서 그의 방한이

갖는 의미에 관해 이렇게 분명한 입장을 제시하는 글을 다른 데서 더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사회화와 노동은 상당히 시의적절한 분석과 지적, 일종의 성명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 주 사회화와 노동이 자기가 주제로 택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책임 있고 무게 있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로쟈님이 왜 이 글을

"자기 알리바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제가 알리바이라는 말의 뜻을 잘 몰라서

그런 건가요?  

로쟈님은 "'운동'이란 건 현실의 실제적인 변혁/변화에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사회화와 노동을 내는 분들도 아마 이 말에는 다들 공감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사회화와 노동(다른 경우들도 대개 마찬가지지만)은

이런 원칙에, 충분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 이런 중요한 때에 하필 룰라를 이야기하느냐는 말씀인지, 아니면 룰라의 교훈으로부터

좀더 구체적인 운동의 목표를 도출해야 한다는 말씀인지, 그것도 아니면 룰라에 대한 비판이

설득력이 없다는 말씀인지, 저로서는 하여튼 잘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폴 리쾨르가 사망했군요.

1913년생이니까, 향년 92세군요.

장수한 데다가 철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으니,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봐야겠죠.

우리나라에도 책이 몇 권 번역되어 있는데, 리쾨르는 외국에서도 그렇고 국내에서도 대중들에게는

별로 친숙하지 않은 철학자여서 주의깊게 읽은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군요.

 

아래는 [르몽드] 5월 22일치 기사입니다.

다 번역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는 ... 죄송. ^^;;;

 

<폴 리쾨르, 모든 대화에 참여한 철학자>

Paul Ricoeur, philosophe de tous les dialogues
LE MONDE | 21.05.05 | 13h56  •  Mis à jour le 21.05.05 | 14h01
Le philosophe français Paul Ricoeur (ici à Paris, le 11 juin 2003) ne peut pas être enfermé dans une école ou un courant précis. | AFP/MARTIN BUREAU
AFP/MARTIN BUREAU
Le philosophe français Paul Ricoeur (ici à Paris, le 11 juin 2003) ne peut pas être enfermé dans une école ou un courant précis.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2003년 6월 11일 파리에서 찍은 사진)는 어떤 특정한 학파나 사조에 결코 갇혀 있지 않았다.

Le philosophe Paul Ricoeur, âgé de 92 ans, auteur de "Temps et récit", est mort vendredi 20 mai, à Châtenay-Malabry (Hauts-de-Seine).

{시간과 이야기}의 저자인 철학자 폴 리쾨르가 (센강 상류의) 샤트네-말라브리에서 지난 5월 2일 금요일 9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Né à Valence (Drôme) le 27 février 1913 dans une famille de vieille tradition protestante, Paul Ricoeur perd ses parents alors qu'il est encore enfant. Pupille de la nation, il est élevé par ses grands-parents. C'est à son professeur de terminale, Roland Dalbiez (l'un des premiers, en France, à avoir écrit sur Freud), qu'il doit sa vocation philosophique. Devenu professeur à son tour après un travail de maîtrise sur "le problème de Dieu chez Lachelier et Lagneau" et après avoir été reçu à l'agrégation de philosophie, il est mobilisé en 1939. Fait prisonnier en mai 1940, il passe l'essentiel de la guerre dans un oflag en Poméranie. Après la Libération, il est nommé à l'université de Strasbourg où il enseigne de 1948 à 1957 : dix années qui, ainsi qu'il l'écrira plus tard dans son autobiographie, Réflexion faite (Seuil, 1995), demeurent "les plus heureuses de (sa) vie universitaire".

En 1957, il occupe la chaire de philosophie générale à la Sorbonne puis, en 1965, rejoint la toute jeune faculté des lettres de l'université de Nanterre, dont il devient doyen en 1969. Tout en faisant courageusement face à ses responsabilités administratives, Ricoeur, qui a déjà été choqué par Mai 68, vit assez mal les événements qui marquent les premiers mois de 1970 sur le campus de Nanterre, alors livré aux agissements de toutes sortes de factions violentes. Victime d'attaques injustes et même d'agressions physiques, déçu par l'incompréhension du gouvernement aussi bien que par l'impossibilité de moderniser les structures de l'enseignement supérieur français, il finit par démissionner de son poste de doyen (1970). Il s'exile alors pour trois ans à l'Université catholique de Louvain, avant de regagner Nanterre où il enseigne à nouveau jusqu'à sa retraite (1981).

Celle-ci lui permet de se consacrer plus intensément à sa seconde carrière, aux Etats-Unis, notamment à l'université de Chicago où, depuis le début des années 1970, il est invité chaque hiver. Il continue par ailleurs, jusqu'à la fin de sa vie, à consacrer une part importante de son temps à la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qu'il a dirigée) ainsi qu'à l'Institut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t à recevoir de très nombreuses invitations émanant d'universités du monde entier (entre autres, plus de trente doctorats honoris causa).

Humaniste aux vastes connaissances, attentif à la littérature autant qu'aux sciences humaines (ainsi qu'en témoignent les textes réunis dans les trois volumes de Lectures publiés par le Seuil), voyageur ouvert à la culture anglo-saxonne aussi bien qu'à la tradition allemande, Paul Ricoeur est un homme difficile à enfermer dans une école ou un courant précis. Le christianisme, la phénoménologie, l'herméneutique, la psychanalyse, la linguistique et l'histoire ont, dans des proportions variables, contribué à la formation de sa pensée. Mais si celle-ci appartient, pour le dire vite, à la mouvance de l'existentialisme chrétien et du personnalisme, elle ne se laisse pas aisément réduire à un système.

Les premières influences qui s'exercent sur Ricoeur sont celles d'Emmanuel Mounier (1905-1950) et de Gabriel Marcel (1889-1973). Dès sa fondation par Mounier (1932), il devient un lecteur assidu de la revue Esprit, à laquelle il collaborera fréquemment après la guerre. Mais c'est d'abord chez Marcel que Ricoeur découvre le modèle d'une réflexion philosophique faisant une place centrale à la question religieuse sans pour autant renoncer à la rigueur conceptuelle. C'est grâce à Marcel, également, qu'il s'initie à partir de 1934 à la phénoménologie, en particulier à l'oeuvre d'Edmund Husserl ­ dont il traduit pendant ses années de captivité le premier volume des Idées directrices pour une phénoménologie pure (Gallimard, 1950) ­ et à celle de Karl Jaspers (1883-1969), auquel Ricoeur consacre son premier livre, Karl Jaspers et la philosophie de l'existence (Seuil, 1947), écrit en collaboration avec Mikel Dufrenne.

Puis, pour obtenir son doctorat tout en donnant à ses inquiétudes de chrétien préoccupé par le thème de la faute une réponse digne des exigences de la méthode phénoménologique, Ricoeur entreprend une vaste Philosophie de la volonté dont le premier tome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 paraît en 1949, les deux suivants (L'Homme faillible et La Symbolique du mal) étant ultérieurement réunis sous un titre unique, Finitude et culpabilité (Aubier, 1960).

Au fil de ces trois volumes, les questions classiques dont part Ricoeur (comment peut-on vouloir le mal ? Qu'est-ce que la mauvaise foi ? Quel est le sens d'un acte involontaire ?) l'amènent peu à peu à explorer, derrière la couche superficielle de la conscience, les profondeurs de l'inconscient individuel aussi bien que celles de l'univers symbolique dans les termes duquel les grandes religions s'efforcent de penser le problème du mal. C'est ainsi qu'il rencontre simultanément psychanalyse et herméneutique.

A l'époque, ces deux disciplines d'origine germanique sont mal connues en France. De 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à Hans-Georg Gadamer (1900-2002) en passant par nombre de théologiens protestants, l'herméneutique s'efforce d'appliquer les outils de l'exégèse biblique aux contenus de la philosophie morale. La psychanalyse, par d'autres voies, remet en question le narcissisme du cogito classique. De l'une comme de l'autre, ainsi que des travaux de son ami Mircea Eliade, Ricoeur retient l'idée que la réalité humaine est avant tout constituée de symboles dont le déchiffrement est en droit interminable. Et c'est cette intuition qu'il développe dans ses deux livres suivants ­ qui, sur le moment, ne sont pas toujours bien compris :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eud (Seuil, 1965) et Le Conflit des interprétations, essais d'herméneutique (Seuil, 1970).

Avec la question du symbolisme, Ricoeur (qui n'ignore pas l'enseignement de Lacan mais demeure étranger aux préoccupations antihumanistes du structuralisme) touche déjà le problème du langage. Il faudra cependant le poids d'une désillusion politique (liée aux obstacles rencontrés dans ses fonctions de doyen) pour que le philosophe, partiellement expatrié aux Etats-Unis, entreprenne de se consacrer plus à fond à l'étude des sciences linguistiques.

Progressivement accompli durant les années 1970, ce "tournant" lui permet d'être l'un des premiers Français à entamer le dialogue avec la philosophie analytique alors triomphante dans le monde anglo-saxon (notamment avec la "philosophie du langage ordinaire" inaugurée par John L. Austin et poursuivie par John R. Searle). Il débouche aussi sur deux ouvrages importants : La Métaphore vive (Seuil, 1975) et Temps et récit (trois volumes, Seuil, 1983-1985). Si le premier de ces deux travaux envisage la métaphore sous l'angle de la création de sens et de l'enrichissement qui en résulte pour le texte littéraire, Temps et récit, en revanche, dépasse de loin l'analyse linguistique. Au-delà de la réflexion sur l'écriture du passé qui s'y déploie, c'est la question même de la connaissance historique, de son statut et son apport de vérité qui s'y trouve posée.

Certes, un livre d'histoire relève toujours de la catégorie du récit, même lorsque son auteur entend ­ - tel Fernand Braudel ­ - pourfendre l'histoire événementielle pour lui substituer la "longue durée". Mais ce récit n'est pas une forme narrative pareille aux autres. Au-delà de la"mise en intrigue" à laquelle s'exerce l'historien pour faire revivre le passé, c'est de notre réel qu'il nous parle. Le passé, en effet, ne nous appartient que dans la mesure où nous lui appartenons, où notre action présente s'inscrit dans la continuité d'une mémoire. Bref, dans la mesure où, pour les individus comme pour les peuples, l'identité n'est pas un donné mais une construction indéfinie, dont le temps est le seul médium possible.

Quelques années plus tard, Ricoeur s'attelle dans un livre difficile, Soi-même comme un autre (Seuil, 1990), à un effort héroïque pour sauver l'idée d'une philosophie universelle susceptible d'embrasser tous les aspects de l'agir humain. L'analyse ­ - sémantique et pragmatique ­ - de la notion de "sujet" et l'esquisse d'une ontologie de la "personne" (ou d'une "herméneutique du soi") que propose ce travail se rejoignent en effet pour se mettre au service d'une éthique dont la formulation demeure, pour Ricoeur, une exigence de la raison pratique. Cette exigence, le philosophe doit s'efforcer de la satisfaire sans pour autant renoncer à son indépendance vis-à-vis de sa propre foi aussi bien que de toute idéologie théologique ou politique : tâche ardue, dont les difficultés sont bien mises en évidence dans les dernières études consacrées par Ricoeur à John Rawls (1921-2002) et à Hannah Arendt (1906-1975), et réunies sous le titre Le Juste (éditions Esprit, 1995).

Il apparaît ainsi que l'étude du langage, bien loin d'avoir été une fin en soi, n'a jamais constitué pour l'auteur de Temps et récit qu'une autre façon de poser les questions qui le hantaient depuis longtemps : celles de l'être et de l'action. Nostalgique d'une ontologie que Nietzsche semblait pourtant avoir disqualifiée, aspirant à trouver dans la raison éthique les règles de la vie"bonne" , homme constamment soucieux de son époque même s'il s'est toujours méfié de tous les engagements, Paul Ricoeur aura en somme incarné jusqu'à leurs extrêmes conséquences les déchirements qui sont ceux de la pensée humaniste depuis le début du XXe siècle.

Cette authenticité tragique, qui éclaire d'un bout à l'autre son long parcours intellectuel, fait aussi de son oeuvre un témoignage exemplaire sur la"crise" de notre modernité. Et sans doute est-ce sa valeur de "témoignage" q ui explique que cette oeuvre, après avoir été (comme celle de son ami Emmanuel Levinas) quelque peu méconnue par le monde intellectuel français, suscite depuis le milieu des années 1980 un regain d'intérêt particulièrement vif en France, et plus encore dans le reste du monde.

Christian Delacampagne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2.05.05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瑚璉 2005-05-2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어 무번역, 나빠요~(-.-;).

krinein 2005-05-2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제 도스의 리쾨르 전기를 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실은 <<법의 힘>>은 데리다 사망에 즈음해 구입했었지요^^;;). 한데 이 책도 번역에 대한 소문이 엇갈려 망설이는 중입니다..

balmas 2005-05-2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흐흐흐흑,
호정무진님 죄송합니다. 올리지 말 걸 그랬나봐요.
쥴님은 제 서재에서는 처음 뵙는 듯한데,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죄송 ... -_-a
글쎄요, 정말. 도스 책이 있죠. 값이 무려 3만 8천원이나 하네요. 저는 절대
사서 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luce21 2005-05-2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세상에 기사가 보여서 퍼왔어요. ^^

-----------------------------------------------------------------------

현상학자 폴 리쾨르, 92세를 일기로 영면

 

프랑스 철학의 주류와 거리두기, 외려 미국에서 더 인정 받아
윤태곤 기자 peyo@jinbo.net
장 폴 구스타브 리쾨르, 92세를 일기로 영면

해석학자 폴 리쾨르
 AFP 통신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지난 20일(프랑스 현지 시간) 9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폴 리쾨르의 아들 마르크는 그의 아버지가 파리 서부, 샤트나이 말라부이에 있는 자택에서 자연사했다고 프랑스 언론을 통해 밝혔다.

1913년 2월 27일 프랑스 남동부의 발랑스에서 태어난 폴 리쾨르는 렌 대학과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렌대학 졸업 직후 교사 생활을 하던 리쾨르는 1940년,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로 잡혀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 야스퍼스의 감화를 받고 현상학자 후설의 ‘Ideen(이념들)’을 번역해 현상학자로서의 일생을 시작했다.

68혁명기 ‘정부의 협력자’라는 비판 듣고 미국으로 옮겨 강의

종전 이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을 거쳐 1948년 부터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사를 강의하기 시작했고 1956년에는 소르본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에는 파리 교외의 낭테르 대학으로 옮겨 학장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 학생운동이 몰아쳤던 1968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일면 반공주의자적이기도 한 그의 보수적 면모가 학생들과 충돌했고 그는 프랑스 청년들로부터 ‘정부의 협력자’라는 비판을 들은 끝에 낭테르 대학을 사임했다. 이후 뤼뱅 대학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뢰쾨르는 시카고 대학과 예일대학등지에서 강의했다.

특히 시카고 대학에서 15년간 몸을 담으며 리쾨르는 미국 철학과 사회과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리쾨르는 1985년 공식적으로 대학에서 은퇴했으나 은퇴 후에도 활발한 연구, 저작 활동을 펼쳤고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시간과 이야기', '자유와 본성',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등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구조주의, 해체주의와 거리를 둔 보수적 면모를 지닌 해석학자

해석학자로서 리쾨르는 기존 문학 연구의 시간 연구를 종합해 시간의 주제와 형식 양 측면에서 통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리쾨르는 평생에 걸쳐 어떻게 한 사람이 그가 직면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인식해서 자신의 진실을 형성해나가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로 향하는 리쾨르의 해석학이었다. “객관성이라는 말의 정의는 ‘논리적’인 정의에서 ‘윤리적’인 정의로 변형되었다” 리쾨르가 1955년 발간한 ‘역사와 진실’의 한 구절이다.

급진적인 프랑스 현대 철학의 주류에 반해 리쾨르의 연구는 성경과 텍스트로 틈입해 들어갔고 오히려 미국등지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리쾨르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인 해석이론은 1973년 그의 강연을 모아 출간되었는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당대의 흐름과 거리를 두고 있는 리쾨르의 사상 궤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리쾨르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에서부터 90년대의 보스니아 전쟁에 이르기 까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을 그의 철학적 실천으로 삼았다.

리쾨르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프랑스 대통령 자끄 시락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증명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철학자라고 헌사를 보냈다. 장 폴 구스타브 리쾨르는 1935년 시몬 르자와 결혼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겼다. 또한 리쾨르는 그의 장례식에 가족과 친구만 참석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0 개의 트랙백이 있습니다 
트랙백 주소 : http://www.newscham.net/news/trackback.php?board=news&id=32700

balmas 2005-05-25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감사합니다. 참세상에 기사가 실렸군요. ^_________^
제가 다시 페이퍼로 올리죠.

krinein 2005-05-26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스 책의 번역도 신뢰하기 어려운 편인가요? 강영안 선생님 서평 얘길 들으니 앞 200 여쪽은 나쁘지 않으나 뒤로 갈 수록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얘기를 하셨다고 합니다만.
 



[한겨레]

5월말 대산 문화재단 심포지엄,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시민연대 초청 강연, 고대 100주년 기념 강연 등이 겹치면서 세계적인 석학과 문호가 잇따라 방한합니다. 이를 계기로 <한겨레>는 24일부터 6차례에 걸쳐 ‘세계 지성과의 대화’를 마련합니다. 이냐시오 라모네에 이어 은구기 와 시옹오, 하스미 시케히코, 베이다오, 루이스 세풀베다, 가라타니 고진이 차례로 대화의 자리에 앉습니다.

“미디어기업 세계화 등에 업고 가진자 편들어” 홍-선출아닌 권력 IMF·WTO가 국제 표준 라-전세계 장애없이 다니는건 돈·바람뿐 프랑스의 국제문제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비판적인 입장의 대표적 논객인 이냐시오 라모네(62)가 문화다양성의 날(5월21일)을 맞아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원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파리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지정학과 국제전략에서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전문가이기도 한 라모네는 <커뮤니케이션의 횡포> <21세기 전쟁> <소리없는 프로파간다>등을 저술했다. 23일 오전 국회에서 홍세화 기획위원과 만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문제, 문화다양성과 언론의 위기에 대한 대담을 했다.

홍세화=역시 가장 큰 관심은 세계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대안세계화운동이 현재 어느 자리에 와있는가, 과연 대안세계는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라모네=세계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시장의 대립, 공공적인 것에 대한 사기업적인 것의 대립, 개인과 집단의 대립, 연대와 이기주의의 대립이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이 모든 걸 결정하게 되고 그 결과로 공공서비스의 자리는 없어진다. 교육, 보건, 문화 분야도 상품처럼 취급되면서 결국 세계화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언어와 우리의 몸까지도 말이다. 지금 여러 지역에서 반세계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아르헨티나의 키츠너 정권 등 세계화의 피해가 가장 컸던 라틴 아메리카의 시민들이 세계화에 저항하는 정부를 세웠다. 이렇듯 새물결이 일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당장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을 바꾼다는 건 힘들다. 이제 WTO, IMF 등이 주도한 세계화는 국제적 표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홍-세계화 극복 도구는 민족주의인가? 라-답은 국가다, 단 시민 통제 가능한 홍세화=라틴 아메리카의 반대운동이 정부 차원에서 일어난 건 세계화의 피해가 무척 심했던 대표적 지역이었고 유럽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은 세계화 피해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구성원들이 문제를 느낄 만한 수준의 의식이 담보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세계화의 부정적인 면이 앞으로도 가속화될 수밖에 없지 않나.

라모네=유럽인들의 의식도 현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발전한 것이다.

고용불안, 공기업의 사유화, 공공서비스 와해 등을 통해 노동시간이 연장됐고 사회보장제도가 무너지는 상황이 확대되면서 말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일개 국가의 단독 정책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니라 그 뒤에 이를 관장하는 논리, 즉 IMF나 WTO, 세계은행 등이 만들어낸 세계화 정책을 정부가 받아서 수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이에 시민단체나 미디어들도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 역시 정당이나 정부는 차치하고 미디어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만 있어도, 즉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야기해줘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미디어의 역할은 더 크고 세계화와의 싸움에서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홍세화=사회구성원의 의식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디어에 기대할 수 있을까. 미디어란 결국 사회의 반영인데 한국 상황에서 매체가 이 문제를 충분히 제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홍-스크린쿼터 미 문화 삼투압 저지 라-영화 붕괴되면 음반·공연 도미노 라모네=미디어나 정치에 기대할 수 없다면 세번째 방법으로 학계나 지식인, 예술가들이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다. 교육이나 보건마저 세계적으로 상품화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문화의 보호는 매우 중요한데 한국은 시청각 분야에서 이런 운동이 깊숙이 관련돼있음을 알고 있다. 감독, 배우들이 스크린 쿼터나 문화다양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문화계 운동을 확대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홍세화=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정부가 아닌 시장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가진 함의에 대해 기성 언론은 크게 다루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라모네=권력이 정책결정자가 아닌 세계화의 지배 아래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놀랍다. 그렇다면 세계화를 움직이는 건 무엇인가. 자본과 돈이다. 현재 전세계를 장애없이 돌아다니는 건 바람 말고는 돈, 즉 금융 뿐이다. 매일 세계에서 움직이는 자본만 2조5천억 달러에 달한다. 외환 보유고 최고국인 일본이 가진 돈이 1400억 달러인데 이에 비하면 자본의 움직임 규모는 엄청난 거다. 이제 국민이 직접 선출한 권력의 입지가 줄어들고 국민이 뽑지 않은 기구들, WTO, OECD, IMF 등이 권력의 핵심이다. 미디어 역시 세계화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게 전세계적 상황이다.

홍세화=지금 유럽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관심이 크다. 오는 29일 프랑스에서 진행될 유럽헌법 찬반 투표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53:47로 반대가 우세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 반대가 승리했을 때 세계화 흐름은 멈칫할 텐데 그 다음 상황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보는가. 이를테면 ‘유럽 사회모델(유럽 소시알)’의 진전이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인가.

홍-위기상황 종이매체 돌파구는… 라-진실일까 거짓일까 의심 없게 해야 라모네=개인적으로 ‘유럽 소시알’을 기대하지만, 지금은 극단적 자유주의 대세가 팽배하다. 유럽헌법이 거부된다면, 우리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유럽헌법에는 사회문제에 대한 작은 조항들이 있지만 결국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에서도 거부 가능성이 크고 체코, 폴란드도 거부할 수 있다.

염두에 둬야 할 건 반대를 던진 사람들이 유럽연합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지금 준비되는 것과 다른 연합체를 바라는 것이다.

 



홍세화=지금 문화 다양성과 관련하여 유네스코에서 협의중인데, 한국은 초안 작성국인데도 미국과 경제부처의 입김 때문인지 뚜렷한 입장을 내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 예외, 문화적 다양성과 관련해서 한국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스크린쿼터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과 그것의 중요성을 독자에게 전해달라.

라모네=문화야말로 민족의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크린쿼터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등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하다가 포기한 국가의 영화산업은 사장됐다. 특히 영화산업은 많은 관련 문화산업을 아우르기 때문에 영화산업의 붕괴는 출판, 음반, 공연 등 다른 문화계의 파산을 가져온다. 프랑스는 스크린쿼터보다 더 강력한 과세정책을 세워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영화 입장권 수익의 10%를 영화지원기금으로 사용한다. 라디오에서도 프랑스 음악인 샹송을 40% 이상 틀도록 법으로 정했고, 출판서적의 할인판매를 막아 문화는 다른 상품처럼 취급될 수 없다는 이념을 관철시켰다. 이런 문화시장 보호정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미국의 문화침투에 자연히 흡수될 수밖에 없다.

홍세화=프랑스에서 유독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협의가 이뤄지고 정책수립이 가능했던 배경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라모네=예술가들이 좌파나 우파같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합의를 봤다. 감독, 배우부터 가수, 음악가까지 예술가들이 공통된 입장을 가졌다. 예를 들어 오데옹 극장에서 배우 잔느 모로 주최로 모든 예술인들 연좌 데모를 벌여 “문화는 상품이 아니다”,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홍세화=연초에 당신도 사설에도 썼지만 종이매체의 위기상황이다. 인터넷, 무가지의 번성 같은 물적 조건도 있지만 ‘정보’(information)의 개념 자체도 변화했다. 한국 신문시장은 거의 광고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경영비용의 80% 이상이 광고료인데 실상은 거의 광고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한겨레>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종이매체의 올바른 길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라모네=독자들은 신문사가 정보를 독자에게 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독자들을 광고주에 파는 것이다. 신문사로서는 독자가 많으면 광고 수주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사는 점점 더 쉬워지고 짧아지고 선정적이 된다. 그리고 무료배포까지 한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는데 기사는 점점 짧고 간단해지니 허위정보도 늘어난다.

요새 시민들은 정보불안 시대를 살고 있다. 전세계 언론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보도에서 보듯 미디어 정보를 받아들이며 이게 진실일까 거짓말일까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대안으로 신문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다. 검증된 기사, 엄격한 기준으로 신뢰할 만한 기사를 제공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정리·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 한겨레

출처:(http://www.hani.co.kr)

 

**5월에 이처럼 많은 세계석학이 찾아오는 것도 참 드문 일인데..때아닌 풍년이로군요..반가운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