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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제9회 인권영화제
9th Seoul Human Rights Film Festival

2005. 5. 20. fri. ~ 5. 26. thu.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005년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인권운동사랑방 주최로 ‘제9회 인권영화제’를 진행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 ' 을 주제로 한 2005 제9회 인권영화제는 개막작-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두 만담가의 행보를 쫓은 영화 ‘예스맨’ 을 시작으로 7일간 총 32여편 영화를 소개합니다. 모든 상영작은 무료 관람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의 인권’섹션
‘먼지, 사북을 묻다’로 인권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미영 감독이 네팔 현지에서 제작한 ‘사레가마 송’이 눈에 띈다. 짧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카트만투 근교의 농촌 지역, 바네빠 아이들이 처한 고된 노동과, 카스트 차별을 노래로 풀어낸 작품. 여성영상집단 ‘움’이 제작한 ‘이반검열’ 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폭력과 피해를 당한 청소녀들의 증언을 통해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소녀 동성애자 인권침해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또한 사립학교의 파행적 운영과 부당한 인권 침해를 맞서 자발적 행동을 조직하는 청소녀들의 건강한 움직임을 담은 ‘학교이야기’, 파키스탄의 어린이 노동과 착취를 고발하며 이를 국제적으로 알려내는 운동에 앞장섰던 소녀 이크발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한 ‘한 노예 소년의 죽음’ 등도 상영된다.

○국내 작품
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에서 발생했던 부정선거, 폭력 시위 진압 등의 사건을 파헤친 ‘돌 속에 갇힌 말’(나루),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다룬 ‘진실의 문 '(김희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을 그린 ‘유언 '(박세연) 등이 선보인다.

○해외 작품
소비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잉여사회’(에릭 간디니), 동북아 패권주의적 재건축을 꿈꾸는 일본의 야심을 고발하는 ‘일본평화헌법’, 미국 미디어 그룹 폭스사의 우파적 성향을 분석한 ‘안티폭스:루퍼트 머독의 미디어 전쟁 '(로버트 그린월드) 등이 주목할 만하다.

※ 문의:
인권영화제 사무국 02-741-2407 http://www.sarangbang.or.kr/hrfilm/2005hrfilm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02-745-3316 www.cinematheque.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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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에 대하여-2



그래서 이렇게 유럽의 [서문]이나 [후기]와 미국의 [서문]이나 [후기]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모든 유럽의 인문학자들이 다 유럽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은 아니며 모든 미국의 인문학자들이 미국식의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이념형”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런 의문이 든다. 왜 대개의 유럽 학자들은 [서문]이나 [후기]를 거의 쓰지 않든가, 또는 쓴다 하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흔적이 담긴 내용은 거의 싣지 않는 걸까? 또 왜 미국 학자들은 대개 [서문]이나 [후기]에 즐겨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담는 것일까?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떠오르는데, 미국의 저명한 분석철학자 중에 콰인이라는 사람이 있다(아니, 사망한 지 꽤 됐으니까, 있었다). 그 사람의 대표적인 저서 중에 󰡔논리적 관점에서󰡕라는 책이 있다. 여러 논문을 모은 논문 모음집인데, 그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영미 분석철학의 전개과정에 정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글들이다(실은 상당히 난해한 논문들이다. 이렇게 영향력이 큰 글들은 대개 난해한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이 재미있다. 이 양반, [서문]에서 왜 자기 책의 제목을 “논리적 관점에서”라고 정했는지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양반이 논리학에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이고 책에 수록된 논문들도 대개 논리학에 관한 배경 지식을 가정하고 있는 것들이다(형식 언어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분석철학자들의 글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 뭔가 거창한 이론적 배경이 나올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사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할 때에는 ‘논리학자니까 역시 책의 제목도 그렇게 다는군’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양반 왈, 자기가 언젠가 저녁 때 친구하고 동부인해서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마침 해리 벨라폰테가 즉흥곡으로 노래를 하나 연주하더란다. 그런데 그 노래의 제목이 바로 “논리적 관점에서”였다고. 제목을 얻은 단서도 재미있거니와, 유럽의 학자였다면 그런 에피소드를 천연덕스럽게 책의 [서문]에서 썼을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유럽 학자들하고 미국의 학자들하고 이렇게 [서문]이나 [후기]에서 차이가 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도 있을 듯하다. 말하자면 유럽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를 따로 잘 쓰지 않고, 또 쓰더라도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건, 그 나름대로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닐까? 곧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것은 공적인 일인데, 거기에 자신의 신변과 관련된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언급하는 건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활동 자체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 말이다. 반대로 미국의 학자들이 [서문]이나 [후기]에 사생활에 관한 흔적들을 담는다면, 그건 책의 저술이나 출판이라는 활동이 공적인 활동이긴 하되, 동시에 개인적인 삶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


가령 유럽의 철학자는 자신이 철학자로서(위대한 철학자든 사소한 철학자든 간에) 쓴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철학자는 철학교수로서 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이건 물론 유럽 철학자들은 독창적인 철학자고, 미국의 철학자는 한낱 교수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마 미국 학자들이 보기에는 칸트도 철학교수였고, 하이데거도 철학교수였고, 콰인도 그랬고 등등이었을 것 같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자’로 존재하기 전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는 치과 의사나 택시 운전수나 야채 장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인 것이다. 철학을 가르쳐서 밥벌어먹고 산다는 게 다를 뿐 ...


더 나아가 여기에는 책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담겨 있는 듯하다. 유럽 학자들이 보기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겉표지의 제목부터 뒷표지의 책소개글에 이르기까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공적인 사물 자체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출판되는 순간부터, 그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도 마음대로 어찌 할 수가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니 책의 한 부분을 슬쩍 떼어내어 자신의 사생활에 관한 내용을 집어넣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반면 미국 학자들에게도 역시 책이라는 것은 동질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고 공적으로 중요한 것이긴 한데, 단 [서문]이나 [후기]는 좀 예외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서문]이나 [후기]는 책 안에 존재하는 일종의 치외법권이어서, 거기에서는 이 책의 내용과 무관한, 책을 지배하고 있는 공적인 규칙과 무관한, 자신의 사생활이나 개인적인 친분 관계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셈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주절주절 떠들고 보니까 좀 우스운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좀 재미있는 느낌도 들어서 올려본다. 그런데 이렇게 페이퍼를 올리는 행위는 사적인 것일까 공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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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5-2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즐거운 서재질 하시네요^^

balmas 2005-05-20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예, 간만에 "즐거운 서재질" ... ^^;;

menwchen 2005-05-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즐거움은 전염되는가 봅니다.. ^^

balmas 2005-05-20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드무비 2005-05-2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인 거 아닌가요?
사적이어야 재밌고요.^^

클리오 2005-05-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밌게 읽고 갑니다~ 페이퍼는 사적인 거지요? 그거에 대해 책임지고 논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아하니까요...

숨은아이 2005-05-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적이면서 공적이지요. ^^ 그런데 "역자 후기에 대한 단상-1"에서 한 여자 선배님이 지적하셨다는 거요, 제가 아는 번역가가 늘 하는 말이거든요. 역자 후기는 그 책에서 역자가 유일하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한 역자의 관점과 해석을 독자에게 설득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런 공간을 누구나 다 하는 말-남편에게 고맙고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등등-로 채우다니! 하면서요. 사실 전 그때까지 역자 후기란 공간을 그냥 형식적인 걸로 치부했는데,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번에는 또 발마스님 글 덕분에, 책의 성격에 따라 그 책의 출판 과정을 말랑말랑하게 보여주는 것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

숨은아이 2005-05-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글 두 편 퍼가요.

balmas 2005-05-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ㅎㅎㅎ 그럴까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면 재밌죠.
마치 훔쳐보는 듯한 재미가 쏠쏠하죠. ^^;;
클리오님/ 글쎄요, 딱 부러지게 사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숨은아이님 말씀처럼 <사적이면서 공적>이라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죠.
숨은아이님/ ㅎㅎ 독자들에 따라 선호가 좀 다른 것 같더라구요. 어떤 독자들은
역자 후기나 저자 후기에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독자들은 아예 그런 거에 질색을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ㅎㅎ 퍼가세요. ^^

stella.K 2005-05-2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재를 한번 밖에 들어와 보질 못해 발마스님 글을 이제야 보는군요. 재밌습니다. 이 페이퍼는 약속대로 추천해야겠죠?^^

마냐 2005-05-2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알게모르게, 제가 미국적인 구석이 많군여. 생활인으로서의 직업의식 같은거..ㅋㅋㅋ 것참 재밌는 분석임다.

balmas 2005-05-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고마워요. 이제 보니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연세도 많으신데 ... ㅋㅋ
따우님도 고마워요. ^^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마냐님, ㅎㅎ 재미있으셨나요?
미국식이야 대세죠, 뭐. ^^

stella.K 2005-05-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있으면 발마스님을 잊게 될지도...사실은 저 메멘토거든요. ㅋㅋ.

balmas 2005-05-2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혹시 벌써 잊으신 건 아닌지 ...

stella.K 2005-05-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의 팔에 '잊지 말자 발마스!'이렇게 써놨다는...ㅋㅋ.

balmas 2005-05-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써놓은 김에 다른 글에도 추천해 주셔야죠~~
 

 

관개체성의 “존재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스피노자의 정치학, 또는 그것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자기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야말로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현대의 민주주의 일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아포리아가 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또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 역량의 부족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근본 요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경고하듯이 국가 형태 자체의 도착을 낳을 수 있는 근본 요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곧 전제정치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모로판, 61-63)하게 만들 수 있는 근본 요인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역량이 어떤 특정한 정치체가 아니라 모든 정치체, 모든 국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한에서 이러한 도착의 위험은 모든 국가에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만큼 더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발리바르가 관개체성 개념에 입각하여 스피노자 존재론을 재구성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반오웰」에서 들뢰즈를 따라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인간학적 테제 중 하나는 모든 개체들 안에는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은 단지 자연적인 개체, 그리고 개인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국가 자체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근원적인 반오웰의 철학자로 만드는 점이다. 왜냐하면 반오웰 식의 전체주의적 상상력에 고유한 가정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사고를 하고 동일한 욕망의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요컨대 어떤 (초월적) 타자와 완전한 동일시/정체화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데 있지만, 압축 불가능한 최소의 개체성이라는 원리는 이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로 표현된다. 

(1) 환원할 수 없는 개인들의 고유한 기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들의 기질의 차이를 제거하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사고하고 동일한 것을 욕망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2)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지나치면서 “언어가 우중과 지식인들 양자에 의해 동시에 보존되기 때문에”, 언어에는 적어도 신학자들의 조작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단어들의 의미―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신학정치론} 7장 9절, 모로판, 296). 이는 “지식인들”과 “무지자들”이 서로 교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언어의 공통적 사용에 의해 단어들의 의미가 규정됨을 의미한다.”(이 책, 144-145쪽) 이처럼 언어의 공통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고는 고립된 개인의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항상 한 개인의 사고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 내지는 교통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상관적인 윤리적 실천의 쟁점이 된다. 다시 말해 각자의 독특성이 줄어들수록, 다시 말해 각자가 상상적인 유사성에 따라 동일시/정체화될수록, 각각의 개인 사이에 합리적으로 교통될 수 있는 여지는 축소된다. 반대로 각각의 개인들의 독특성이 증대하고 개인들이 서로를 상상적으로 덜 동일시/정체화할수록, 합리적 교통 가능성은 더욱 증가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러한 존재론적 핵심을 “고전적인 개인주의와 대립하는 개체성의 최소의 원리 또는 개체의 최대한의 압축 가능성의 원리”(이 책, 204쪽)라고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인상적이지만 암시의 수준에 머물렀던 이 명제를 좀더 명시적이고 좀더 풍부한 이론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논문이다. 이 논문은 프랑스의 과학철학자였던 질베르 시몽동의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é” 개념을 빌려와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인과관계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매우 풍부한 이 논문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1) 이 논문은 우선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관개체성의 개념, 곧 관계론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스피노자는 대개 실체의 철학자, 더 나아가 유일실체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런데 전통적인 규정에 따라 실체를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신만이 실체, 그것도 유일한 실체가 되기 때문에, 다른 나머지 자연 실재들은 실재성을 박탈당하게 된다. 곧 스피노자의 철학은 범신론 철학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우선 실체 개념의 애매성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전통적인 실체 개념을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해 그대로 적용한 데서 나오는 결과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의 실체가 유일하다면, 이는 실체가 하나뿐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실체로 표현되는 자연 이외의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연은 내재적인 실존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며 초월적인 근거나 목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실체의 자립성을 매우 엄격하게 강조한다면(존재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인식의 측면에서도. “나는 실체를 자기 안에 있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으로 [...] 이해한다”({윤리학} 1부 정의 3)), 이는 실체 이외의 다른 실재들, 특히 유한 양태들의 실재성을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곧 개체들은 일종의 원자처럼 다른 개체들과 독립해서 실존할 수 없으며,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실체만이 자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개체들의 실재성을 박탈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체들의 실존 형식, 곧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원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발리바르가 세 가지 관념, 곧 개체성은 실재적인 실존 형식이고(반범신론), 개체는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반원자론), 그리고 “개체들의 구성과 활동은 원초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함축한다는 사실”(반기계론)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 하지만 이 논문에서 좀더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론을 “변조modulation”(시몽동의 어휘를 따르자면)의 관점에서, 또는 스피노자 자신의 어휘를 사용하면 “변용affectio”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사이의 외재적 관계가 불식될 수 있으며, 관계를 통한 개체들의 구성과 재생산이라는 의미가 좀더 엄밀하게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인과관계론을 변조나 변용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형적인 기계론이나 목적론과 다른 인과관계 도식을 제시해야 하는데, 발리바르는 󰡔윤리학󰡕 1부 정리 28에 의거하여 이런 도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도식은 우선 다수의 항들이 어떤 기원적인 항에서 파생되지 않고 항상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더 나아가 이 도식은 A의 인과작용 자체가 B의 인과작용에 의해 변용되고, 다시 B의 인과작용은 C에 의해 변용되고 하는 식으로 제시함으로써, 목적론의 은폐된 원리인 필연적인 경향이나 성향이라는 관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변용의 인과관계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개체란 변용시키는 한에서 변용되는 것들이고(왜냐하면 개체에게 활동한다는 것, 곧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으로서 작업한다는 것은 바로 다른 개체의 활동방식을 변용시키는 것이고, 이러한 변용작용 자체에서 또 다른 개체에 의해 변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용의 활동 자체, 곧 타자들과의 관계가 각각의 개체의 실존을 구성한다. 

  발리바르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하위의 개체와 상위의 개체 사이의 관계, 따라서 개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이 개체의 통일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변화시키는지, 또 이 개체는 자신보다 상위의 개체의 형성에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차 수준의 복잡성에 관해 적합한 인식을 얻을 때에만,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부터 “우주 전체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 소산적 자연이라는 관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발리바르는 두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곧 “개체가 개체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개체는 자신의 부분들을 다른 개체들과 교환해야 한다”는 테제와, “개체들의 상호합치를 수단으로 한 다양성의 통합은 개체들 각자가 자신의 자율성(개체화) 및 독특성(개성화)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테제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두 가지 테제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테제는 개체는 통일체, 더 나아가 동역학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통일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부분들을 다른 개체들과 교환함으로써만 개체로서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개체가 자율성을 얻고 하나의 개체로서 실존하게 되면, 개체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개체들과의 갈등, 적대관계를 겪게 된다. 왜냐하면 자율성 자체는 이미 독특성의 최소(곧 다른 개체들과의 구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들은 공통의 본성을 지닌 다른 개체들과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 및 독특성을 유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결합체 또는 상위의 개체의 역량의 정도는 다양성의 통합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에, 어떤 결합체가 자신의 하위 개체들의 자율성과 독특성을 더 잘 보존하면서 더 많은 다양한 개체들을 통합할 때, 그 결합체의 실존 역량은 증대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파악되면 소산적 자연은 더 이상 위계적 순서에 따라 인식되지 않고, 각각의 유형의 개체가 하위 수준으로 후퇴하면서 동시에 상위 수준으로 전진하는 복잡한 통합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관계는 내재적으로 인식된다.  

  (3)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대한 이러한 관개체론적 해석은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해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먼저 이러한 해석은 개체를 기원이 아니라 개체화/개성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곧 관개체론의 관점에 따르면 개체는 타자들과의 관계 바깥에서 미리 구성되어 실존하는 원자와 같은 항이 아니라,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변화하는 실재인 것이다. 이처럼 개체 또는 개인을 관계의 결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갖는 독창성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계약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비판은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이라는 관점을 거부하고, 오히려 개인의 실존 및 권리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성립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1).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정치학의 진정한 과제는 계약의 타당한 절차를 형식화함으로써 주권의 정당성을 근거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 대한 분석에 있다. 이는 푸코가 제안하듯이 권력 또는 정치를 분석하는 데서 법적 모델이 아니라 관계의 모델을 채택함을 의미한다2).   

  둘째, 관개체론의 관점은 역량 개념을 관계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다시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먼저 이는 개체를 모델로 하여 행위 및 행위 역량을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현대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대체로 스피노자가 역량의 철학자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힘/능력potestas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고, 그 대신 필연적으로 실행될 수밖에 없는 힘/역량potentia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용어 해설” 참조).

  그런데 스피노자의 이러한 역량 개념은 그 자체만으로는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량 개념을 주체의 역량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긍정적인 힘으로 이해할 소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역량은 다시 한번 주체가 지닌 일종의 소유물로, 따라서 주체에게 부여된 가치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힘으로 파악된다. 정치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러한 관점이 대중들의 역량이 폭력으로 전도되는 것, 곧 대중들의 역량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위해 활용되는 것(다시 말하면 파시즘)을 하나의 문제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량 개념이 주체의 역량으로, 주체의 소유물로 이해되면, 원칙적으로 역량은 주체의 자율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정치적인 역량(가령 노동자 계급 또는 다중)이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으면 부여받을수록, 그것의 도착 가능성은 점점 더 인식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파시즘과 같은 정치적 현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세계화가 산출하는 구조적 폭력(심지어 초객관적-초주체적 폭력)을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량 개념을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역량은 항상 수동성과 능동성의 차이(또는 오히려 차이의 차이)로 나타나고, 수동성은 정의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들뢰즈),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되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역량의 전도, 역량의 도착에 대한 비판과 퇴치의 노력은 정치의 가장 본원적인 목표 중 하나가 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반폭력의 정치 또는 시빌리테의 정치로 부르는 것은 역량에 대한 이러한 관계론적 관점을 요구하고, 또 역으로 이 후자는 반폭력의 정치를 정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부과한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


  지금까지 우리가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발리바르의 이 책은 스피노자의 정치학, 더 나아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 매우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 데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매우 귀중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종의 만능열쇠는 아니며, 발리바르가 세 번째 논문에서 지적하듯이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발리바르는 특히 “하나의 국가“장치”나 국가장치 전체 속에 조직되어 있는 지배(또는 소외)와 차별(또는 불평등)에 저항하는 모든 봉기가 함축하는 부정성의 측면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그리고 우리가 그를 뒤따를 때, 우리의 무능력)”(이 책 238쪽)을 지적하고 있다3). 사실 이러한 부정성은 “근대 정치의 보편성이 전제하는” 것인 만큼 이 점에 관한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중요한 이론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정치에서 이러한 부정성이 항상 주체의 관념론과 결부되어 표상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피노자의 무능력은 그의 철학적 비타협성,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엄밀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사회적 관계, 국가의 형태의 전복을 꾀하는 모든 종류의 혁명들에 대해 커다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러한 전복이나 혁명이 대중들의 공포라는 정념적인 요인에 기초를 두고 있고, 따라서 지배권력의 보유자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지배 관계 자체는 그대로 남겨두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의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주체를 전제하지 않은 가운데, 자기만족적인 해방의 주체의 가상에 굴복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정치적 부정성을 사고할 수 있을 것인가? 시빌리테의 정치는 어떻게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와 접합될 수 있는가? 이는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비껴가지 못할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흔치 않은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에 관해 한 마디 간단히 해두고 싶다. 이미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옮긴이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에는 스피노자 전공자가 극히 드문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와 들뢰즈, 발리바르나 네그리 같은 현대의 주요 이론가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신들의 이론적 원천을 얻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동안 비전공자들이 스피노자 철학을 소개하고 또 스피노자에 관한 현대의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번역하다보니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한 이런저런 이론적인 오해들이 생겨나고 스피노자의 용어들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어들이 널리 사용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책에서는 번역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 및 정치학의 용어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스피노자의 원전이 아닌 스피노자에 관한 해설서로서는 다소 많은 분량의 용어 해설을 싣게 되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그릇된 번역어들을 교정하고 앞으로 이루어질 스피노자 원전 번역을 대비하려는 한 가지 자세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제시한 번역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제안일 뿐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이런저런 주제들만이 아니라 그의 여러 용어들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며, 앞으로 더 적절한 번역어가 제시된다면 얼마든지 그 용어들을 수용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분들에게 고마움의 말을 전하고 싶다. 우선 2004년 여름/가을 동안 이 책과 관련된 공부 모임에 참여해서 부지런히 관련 글들을 발제해주고, 발리바르 및 기타 이론가들에 관한 논의에도 열심히 참여해준 000, aaa, bbb, ccc, ☆☆☆,  ○○○ 선배, ◇◇◇ 선배, ♤♤♤, ♧♧♧, ♨♨♨, ☺☺☺ 등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혼자서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점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판을 맡아주시고 이 책이 무사히 출간될 수 있도록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이제이북스 사장님에게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고가 인쇄소에 넘어가기 직전까지 역자에게 계속 시달림을 당한 편집부 직원분들에게는 위로와 감사의 말을 함께 전하고 싶다. 그들의 꼼꼼한 눈과 섬세한 손길 덕택에 거친 원고가 제법 모양을 갖추게 된 것 같다.

  책을 오래 기다려주고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여러 독자분들 덕분에 부족한 능력이지만 번역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분들에게 이 책이 유익한 독서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05. 5. 17


역자


1) 이 문제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2005 참조.

2) Macherey 1988; Remaud 1997 참조.

3) 그 외에 「스피노자, 반오웰」의 한 각주에서는 “여성들의/여성들에 대한 공포”를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의 환유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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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liee 2005-05-1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을 잡고 데려가서 보여주는것"처럼 잘 정리된 역자해제인거 같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샘솟게도 하지만 게으름피고 있다가 진선생이 정리해주는거 보면되는데 공부는 뭐하러하나 라는 유혹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는 역시 양가적인 글인게야 ㅎㅎ 아무튼 정말 고생했다. 좋은 결과들이 생겨날거라 믿어.

philliee 2005-05-19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도 한방 날렸어 ㅋㅋ

balmas 2005-05-19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까마귀 2005-05-1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출판 b에서 보유한 도서 판권의 무단 사용을 강행하겠다는 이제이북스(출판사)와 진태원씨에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용하라는 허락을 내린다. 단지 명분만이 아닌 이익을 내고자하는 사업자의 입장에서 무모한 행태를 자행하는 ‘삼류깡패를 닮은 녀석들’에게 ‘법의 힘’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린다.

충분히 잘 풀 수도 있을 일에 물색 모르고 까불어서 문제가 복잡해지도록 만든 진태원씨나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책을 발간하고도 서점에서 전혀 유통할 수 없게 된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제이북스나 둘 다 자신들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용감하게 돌파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측은지심이 들어서 내린 결단은 아니다.

이러한 결단은 도서출판 b에서 올해 하반기에 출간 계획을 가지고 있는 [대중의 공포]의 역자인 최원씨의 뜻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애초에 [대중의 공포]는 최원씨의 제안으로 도서출판 b에서 번역 출간하기로 계획된 것이며 그러한 최원씨가 도서출판 b에 더는 문제가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은 이제이북스나 진태원씨가 마치 자신들의 무지한 용맹이 자신들을 위기에서 건진 것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그들 둘에게 두 가지 당부를 한다. 물론 이 당부는 판권 사용의 허락 조건은 아니다. 최원씨의 깊고 넓은 배려에 감사하라. 그리고 최원씨의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번역본을 내라. -도서출판 b 대표

paniked-83 2005-05-1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딩 즐'~이란 말 밖에는 안 나오는 군요. 오랜만에 잘 웃었습니다. ㅋ

menwchen 2005-05-1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마귀님 정말 무례하시네요. 오랬만에 귀담에 들을 만한 학식과 식견을 가진 분들의 번역본이 나온다기에 출판사에 까지 감사하고픈 마음을 가진 독자로서 또한 열정만(!) 가진 젊은 연구자로서 실망을 금할 길 없습니다.

원저자와 그의 글을 애타게 기다리며 그의 사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왜 이런 수모를 감수해야하는 건지, 왜 이토록 무언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례한 것인지, 왜 그들은 그토록 (자본주의적)시장의 도덕에 기대어 자신이 출판하고 있는 글들의 내용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삼가하지 않는지 심히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무쪼록 자중 자애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balmas 2005-05-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까마귀님 또 오셨군요.
저는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별로 할 말도 없고 더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군요.
그러니 까마귀님도 이 문제를 용건으로 오시려거든
앞으로 서재 방문을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네요.
^_________^

NA 2005-05-2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nwchen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처음 뵈면서 이렇게 무례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의 "자본주의"적인 이권을 실제로 포기하고 있는 분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조기조님입니다. 판권을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서 피땀 같은 돈을 지불하고 사신 분도 조기조님이시고, 그것을 지금 포기하고 계신 분도 조기조님이시죠. 사실 따지고 보면, 궁극적인 책임은 저작권 문제를 전혀 챙기지 않은 이제이 북스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추어 티를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조기조님이 자신의 판권, 자신의 노동을 타협하면서, 약간의 볼맨 소리를 낸 것에 "자중자애"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게다가 소유권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문제입니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현재의 문제에 한정해서는, 조기조님께 일방적인 비난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조기조님의 어려운 결정 덕택에 법정까지 문제가 가는 안좋은 풍경 없이 문제가 잘 처리되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행스럽게 문제가 잘 처리되었으니만큼, 모두들 행복해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즐통되시길!

넝마주이 2005-05-2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이북스 편집장 서영심이라고 합니다. 그간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대중들의 공포"의 저작권 문제와 관련해 이곳에 저희 역자인 진태원 선생님을 비롯해 도서출판 b의 조기조 대표님, 최원 선생님 등의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도 저희는 한번도 여기에 댓글을 달지 않았습니다. 역자분의 개인 서재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출판사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올라온 조기조 대표님의 글과 최원 선생님의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이제이북스는 2003년 3월 말에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발리바르의 책을 정식 계약하면서, 한국어판에 덧붙인 "대중들의 공포"를 비롯한 세 편의 논문에 대해서도 계약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에이전시 쪽에서 원저자인 발리바르에게 물어 본 결과 세 편의 논문은 인세를 주지 않고 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고, 저희는 그 이메일 상의 "허가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정치>의 정식 계약서 말미에도 "발리바르의 다른 글들과 같이 출판된다"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저희는 "아마추어"처럼 계약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이 일은 프랑스 에이전시 쪽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저희에게 사용허락을 먼저 한 뒤에, 그 논문이 실린 책을 도서출판 b와 계약했으니까요. 프랑스 에이전시 쪽에서 <대중들의 공포>를 도서출판 b와 계약할 때 저희에게 사용허가한 사실을 미리 말했어야 하는 거지요.

저희가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이 실린 <대중들의 공포>라는 책이 올해 도서출판 b와  계약됐다는 사실을 안 것은 편집 작업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습니다. 저희는 분명 사용 허락을 받았지만, 도서출판 b에 이 문제를 말씀 드렸습니다. 도서출판 b에서는 그렇다면, b에서 써라 쓰지마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더군요.(이건 최종 통화에서 들은 말씀입니다. 몇 번의 통화에서 오간 얘기들은 생략하겠습니다.)  저희로서는 책의 완성도도 고려해야 했고, 오랫동안 공들여 작업하신 역자분의 노고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공부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두 번역본을 비교해 가며 읽는 것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계약의 문제에서 볼 때 저희가 포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도서출판 b보다 먼저 이 논문의 번역 수록하는 것에 대한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로 국내 저작권법 전문가들에 두 차례 조언을 구한 결과, 저희가 이 논문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하는 답변도 들었습니다.

이 일은 원칙적으로 프랑스 에이전시와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도서출판 b에서 이제이북스에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조기조 대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일은 도서출판 b에도 이제이북스에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운 일입니다. 저희가 연락을 드린 건, 나중에라도 별 잡음 없이, 서로 책을 내길 바라서였을 뿐입니다. 저희는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저희에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판단 아래, 그리고 그 논문 한 편을 저희 책에 포함시키는 일이 도서출판 b에서 나올 책의 판매에 지장이 없을 거라는 양심적 판단 아래(여러 출판계 선배들이 모두 지장 없다고, 오히려 홍보해 주니 좋은 일 아니냐라고 하더군요) 출간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에 올리신 조기조 대표님의 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조기조 대표님의 말씀처럼 논문을 "무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조기조 대표님께서 "법의 힘"을 빌리시더라도,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그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그 과정이 필경 소모전일 뿐이기 때문이지(민사 소송을 해 본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저희가 정당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조기조 대표님께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더라도 승인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었다면 저희는 "배 째라" 하는 식으로 책을 출간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는 "삼류깡패'  아니거든요. 솔직히, 천 부 팔까 말까 하는 책을 내면서, 소송 비용까지 부담해 가며 출간을 진행할 만큼, 이제이북스는 무모하게 출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이 비록 개인서재이기는 하지만, 한 출판사를 "삼류깡패"니 하는 말들이 올라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이제이북스의 무응답이 조기조 대표님의 글로 오도된 상황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입니다. 저희는 "원만하게" 출판하지는 못했지만, "정당하게" 출판했음을 말씀드립니다.

 


balmas 2005-05-2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제 관련 당사자 분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으니까 좀 공평해진 것 같네요.
저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발언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분들 모두 한 마디씩 하셨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 서재에서 더 이상 이 문제로 댓글을 달거나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입니다. 제 서재에 달린 불쾌한 댓글들 때문에 신경쓰고 싶지는 않군요.
이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시든 어떻게 하시든 그건 이제 출판사 분들이
알아서 하실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로 댓글은 달아주지 마세요.

NA 2005-05-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문제는 프랑스쪽에 있었군요. 역시 내부의 모순을 국경으로 투사 함으로써 해결하는 것만한 묘수는 없지요. 어쨌든 공은 프랑스쪽으로 넘어갔으니 우리 국내인들은 모두 헤벌쭉 행복해야 여전히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비난하는 것 그만두고 말이죠. 이제이북스 편집장님 말씀대로라면, 국내인 가운데 아무에게도 잘못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서로 얼굴 찌푸릴 이유가 없지요. 이제이북스 편집장님께서 좀 미리, 처음부터 자세한 상황을 정리해서 알려주셨으면 더 쉽게 풀릴 수 있었을 것 같군요. 다 이러면서 배우는 거겠지요. 진선배께서 답글을 달지 말라고 했는데, (아둔한 프랑스 에이전시는 빼고) 모두 행복하자는 말을 쓰는 것은 괜찮을 듯 싶어서 씁니다. 괜찮죠?^^ 마지막으로 이제이북스가 일을 "아마추어"적으로 했었다고 말한 것에 관해서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이제 정말 합죽이가 되겠습니다.^^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 또는 대상은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는 대중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1부에 수록된 {스피노자와 정치}에서부터 2부의 「스피노자, 반오웰」이나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은 발리바르가 스피노자 정치학을 해석하는 가장 중심적인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은 사실은 스피노자가 고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에서 따온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Terrere nisi paveant”는 문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스피노자는 {정치론} 7장 27절과 {윤리학} 4부 정리 54의 주석에서 각각 한 차례씩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가 불과 단 두 차례 사용한 표현에 불과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문장, 또는 이 문장을 통해 표현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사상의 이론적 핵심 및 그것이 내포하는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중적 공포야말로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온전한 민주주의의 구성 불가능성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근대 정치학에서 전개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아포리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발리바르는 네그리와 갈라지고 있다. 

  네그리는 1981년 {야생의 별종}이라는 스피노자 연구서를 출간함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주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정치론}에 나오는 물티투도multitudo 개념, 또는 국내 네그리 연구자들의 번역을 따른다면 “다중” 개념을 스피노자의 정치학, 더 나아가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 다중 개념에서 초월적ㆍ법적 매개 없이 스스로 자신의 생산적ㆍ정치적 역량을 구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론의 토대를 발견한다. 곧 이 개념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저술하면서 경험한 현실의 정치적 세계, 다중의 상상적 역량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 이전까지의 초월적 형이상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중 자신의 자발적인 구성의 역량을 표현하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이 개념이 스피노자 사상의 단절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사상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완성된 해방의 존재론의 기초를 제공해준다고 간주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다중은 자율적인 집합적 주체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반대로 발리바르는 1982년에 처음 발표된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라는 논문에서 물티투도, 또는 발리바르 자신이 제시한 번역어에 따르면 “대중들masses”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동의하지만, 이 개념의 중요성은 이중적 측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곧 대중들, 또는 대중운동을 표현하는 물티투도라는 개념은 기존의 법적ㆍ제도적 질서를 초과하는 정치적 세력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이는 그 자체로 자율적이거나 능동적인 해방의 역량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띠는 역량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리바르가 분석하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타기투스의 인용문을 통해 표현되는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개념이다. 곧 발리바르는 이 문장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통치자들이 무자비하고 걷잡을 수 없는 대중들의 소요와 폭력에서 느끼는 두려움(“대중들에 대한 공포”)이며,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이 통치자들의 권력과 압제에 대해 느끼는 공포(“대중들의 공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통치자들로서는 기성의 법적ㆍ제도적 질서 안에 존재하지만 이 질서로 완전히 포섭하거나 억압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끊임없이 이 질서를 동요시키고 위협하는 대중들의 집합적 행동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 반대로 대중들의 편에서는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처벌과 폭력으로 억압하는 통치자들의 폭력이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이러한 이중적인 공포야말로 국가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했지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이론적으로 고심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치론󰡕이 민주정을 다루는 11장에서 단 4절까지만 진행된 채 중단된 것은 그의 죽음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론적 아포리아의 표현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발리바르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이론적 강점이라고 본다. 곧 이러한 대중들의 양가성을 이상적인 규범적 모델(곧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 등에서 자주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자연적인 국가”,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로서 민주주의)에 따라 가상적으로 해소하거나 심지어 보수주의적으로 통제, 억압하려고 하지 않고, 이것이 함축하는 난점들을 끝까지 전개하면서 당대의 주어진 이론적ㆍ정치적 공간 속에서 이 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 스피노자의 이론적 독창성과 현재성이 있다고 본다.

  어떤 점에서 이것이 이론적인 강점이 될까?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점에서 이것이 스피노자의 이론적 현재성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까? 이 책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얼마간 다른 강조점을 지닌 답변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


우선 발리바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라는 이중적 공포는 사실은 대중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공포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적인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절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자율적인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대중들에 대한 공포와 대중들의 공포를 낳는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렇다.


[{정치론} 7장 27절의]이 분석은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될 수 있다. 곧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주권자와 시민들은 동등하게 다중의 일부를 형성한다. 따라서 최종 심급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항상 다중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곧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자질의 문제가 된다.(이 책 107쪽[쪽수 확인])


하지만 스피노자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절대 권력이 실존한다면, 이는 인민 전체가 소유하는 권력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계산의 논리에 따르면 군주제와 귀족제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제를 민주정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한 걸음은 용어모순이다. 곧 항상 이미 대중 전체에 속하기 때문에, 대중으로 복귀할 위험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 있는 권력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떤 것일 수 있겠는가?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대중이 본성상 “권력의 보유자들에게 가공할 만한 존재라면”({정치론} 8장 4절),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사실상 권력을 절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면, 한계(민주정)로 이행한다 해도 권력을 보유한 대중이 대중 자신에게 가공할 만한 존재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지극히 미약한 수준에서라도―어떻게 보증할 수 있는가?(이 책 179쪽[쪽수 확인])


  이 구절들에서 발리바르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우선 민주주의 개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법적 관점에서 정의된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아포리아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법적인 정의에 따르면 군주정은 군주 혼자서 주권자 곧 통치자가 되는 정체이고, 귀족정은 다수의 귀족들이 통치하는 정체이며, 민주정은 “인민 또는 대중들의 집합적 통치”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법에 따를 경우 민주정은 인민이나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스피노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대중들로의 복귀”를 피해야 한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대중들로의 복귀는 주권의 통일성의 와해, 따라서 정치체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자연상태로의 복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한편으로는 민주정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의 위치에 놓여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체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셈이다.

  따라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을 정치의 공간에서 배제하거나(이것이 바로 홉스의 노선이다) 아니면 대중들이 이미 자치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부당) 전제하거나 해야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 노선을 모두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정치론} 3장 2절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1))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자치의 불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엔 비일관적인 것으로 보이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대중들이 모든 정치체의 기초에 놓이게 되므로, 군주정이나 귀족정 역시 법적 정의와 무관하게, 또는 그에 앞서 자신의 존재를 대중들의 역량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자신의 정체政體를 보존하고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곧 정치적 “절대성”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질서 안에 대중적인 토대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곧 대중들의 욕망과 의견이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대표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군주정이나 귀족정 내부에서 항상 이미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둘째, 대중들이 그 자체로 통치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곧 대중들이 스스로의 정념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의 통치 역량을 증대시키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고유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는 모든 민주주의는 항상 자기 내부에 분열을, 따라서 갈등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중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대중들이 둘로(그 이상으로) 분할된다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구조적인 것이다. 곧 이러저러한 계몽주의적 교육이나 주의주의적인 동원 또는 제도적인 대의장치의 마련 등을 통해 온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이는 이런 방법들이 전혀 무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왜 이러한 갈등이 나타나고, 또 그 경우 어떤 정치적ㆍ제도적인 해결책이 발명되어야 하는지 좀더 체계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 {신학정치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분석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인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으므로, 좀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신정 분석의 의미


  이 책 1부 2장에 나오는 발리바르의 {신학정치론} 해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이 해석은 {“자본”을 읽자}에 나오는 알튀세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새롭게 해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écrire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c,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상당히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 또는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 이후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발리바르의 해석은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바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발리바르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신학정치론}의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이 책, 쪽[원고 파일 26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및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에서 따라나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 자신들의 욕망은 의식하되 그러한 욕망을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가상을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현실의 진정한 창조주(곧 전능한 의지와 권능을 가진 존재자)에 대한 또다른 가상을 낳는다. 이러한 자유와 목적론의 가상은 인간의 근본적인 두 가지 가상이며 미신의 온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서의 서사가 이러한 가상에 기초하여 전개된다는 것은 스피노자 인간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2).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주권자이기도 하며, 신의 계율의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신학정치론} 17장 7-8절, 282-283; 모로판, 544-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신학정치론} 17장 8절, 모로판, 546; 이 책, 76쪽)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여기서 보편적인 논점을 도출해낸다. 곧 발리바르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 분석의 요체를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리바르는 신정이 내포하는 이중적 측면에 주목한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이 책,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들은 초월적인 타자(신이나 절대 군주)와의 동일시/정체화를 통해서만 통일성을 얻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대중들의 역량은 쉽게 자기 자신에 맞선 파괴적인 역량으로 전도되기 쉽다는 점에 상상적인 동일시/정체화의 위험이 존재한다.  


1)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2)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개념, 특히 호명 테제와 이중적 거울 구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 분석에 준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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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으로서 스피노자 철학


  스피노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아마도 범신론자라는 편견만큼이나 뿌리 깊은 편견 중 하나는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편견이라면, 이는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1), 스피노자가 형이상학자라는 사실을 이유로 스피노자가 정치학자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는 형이상학자다라는 언표는 암묵적으로 스피노자에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정치학이 없다는 언표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좀더 미묘한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가 정치적 저술을 남기긴 했지만, 역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그의 형이상학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 내지는 요체는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이 아니라 󰡔윤리학󰡕에 있다고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경우 범위는 다시 더 좁혀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5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 5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부는, 상이한 제목이 달려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상이한 논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이런 식의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곧 {윤리학}의 핵심은 1부에 있는데, 왜냐하면 「신에 대하여De Deo」라는 제목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이 1부는 유일한 실체로서 신을 주제로 하고 있고, 바로 여기서 형이상학이 논의되기 때문이다2). 또는 마르샬 게루가 {윤리학} 1, 2부에 대한 기념비적인 주석서를 남긴 데서 알 수 있듯이, 존재론을 다루는 1부와 인식론을 다루는 2부가 {윤리학}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듣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경우 배제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사소한 것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요체를 담고 있는 이 책에 {제 1철학}이나 {형이상학} 또는 그냥 간단히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하필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왜 그는 1부와 2부로 끝내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길게 5부까지 책을 썼을까? 물론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더욱 더 제기되지 않는다. 왜 그는 {윤리학}의 집필을 중단하고 5년여 동안이나 {신학정치론} 같은 사소한 책을 쓰는 데 몰두했을까? 왜 그는 생애의 말년에 {정치론} 집필에 몰두했으며, 왜 그럼에도 그 책을 완성하지 못했을까?  

  이 책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이 공통의 출발점으로, 곧 공통의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편견들이다. 발리바르는 이 책 첫머리에서 바로 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와 정치. 처음 보기에는 단순한 이 정식에 얼마나 많은 역설이 존재하는가! 만약 정치가 역사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자신의 전 체계를, 인식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신은 곧 자연”이라는 관념의 전개로 제시한다. 만약 정치가 정념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인간의 욕망 및 활동을 “기하학자들의 방식에 따라 [...] 곡선과 평면, 입체의 문제들”(󰡔윤리학󰡕 3부 서문)로 인식하자고 제안한다. 만약 정치가 현재성 안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현자와 훌륭한 주권자란 모든 독특한 사물을 “영원성의 관점에서”(󰡔윤리학󰡕 5부)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순수한 사변이 아닌 정치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가?(이 책, 9쪽)


  이런 편견에 맞서 발리바르는 처음부터 자신의 과제를 “스피노자 정치학의 문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이 문제들의 통일성을 탐구하면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또 「대중들의 공포」에서는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점을 긍정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사상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일의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가령 알렉상드르 마트롱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자들 중에서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정치학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입증한 사람인데, 그에게 스피노자의 사상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은 발리바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곧 그에게 이 주장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에 함축되어 있는 개체성에 관한 일반 명제로부터, 또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전개되는 인간학에 관한 명제로부터 체계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으로 󰡔{윤리학}으로 대표되는 스피노자의 체계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마트롱은 {윤리학}의 마지막 5부에 나오는 (겉보기에는) 매우 수수께끼 같고 비의적秘義的인 내용들이 사실은 정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3)

  반면 네그리 같은 경우는 마트롱과 달리 스피노자의 체계는 연역적이고 통일적인 게 아니라, 단절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변화하지 않은 채 완전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절은 바로 1665-1670년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을 집필하던 시기에 발생했는데, 이를 통해 스피노자는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자에서 실천적인 구성의 정치학자로 변모한다. 다시 말해 마트롱의 주장과 달리 {윤리학} 1-2부에 담겨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르네상스의 신플라톤주의 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초월적 형이상학이며,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핵심은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에 담겨 있는 실천적 구성의 존재론/정치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의 단절을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택하고 있는 입장은 이 두 사람의 관점과 모두 구분된다. 우선 그는 네그리와 달리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과 정치학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곧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를 경우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스피노자 존재론을 특징짓는 자연주의적 관점에 따라 논증되고 서술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론(및 인식론)은 정치학의 주장 및 분석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인 전제 또는 적어도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정치학의 논의에 내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마트롱과 달리 존재론과 정치학의 관계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곧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학에 관한 논의는 그의 형이상학적 기초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존재론에 내재한 난점 내지는 아포리아를 드러내고, 또 더 나아가 이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이는 특히 2부 첫 번째 논문에 나오는 대중들이라는 개념 또는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네그리처럼 양자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파악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해 파생적인 위치에 있지 않고 구성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네그리에 좀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발리바르가 네그리와 공유하고 있는 또다른 점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트롱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그의 철학 체계로부터 엄밀하게 연역해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정세와 같은 ‘외재적인’ 요인들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는 반면4), 네그리와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이데올로기적 형세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변모하고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다만 네그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라는 좀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하여, 스피노자의 철학적 발전을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한 해방적 생산력의 저항과 대응이라는 노선 위에서 고찰하고 있는 반면5), 발리바르는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개입과 이론적 분석을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에 결여된(또는 마르크스를 능가하는) 정치적 존재론(다시 말해 해방적인 생산력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을 찾고 있는 반면6), 발리바르는 이 책 2부의 세 번째 논문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에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또는 일반화된 경제론)을 보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비판(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론)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라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이라는 두 가지 저서로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이 두 권의 저서야말로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주장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은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심과 개입으로부터 자신의 문제, 자신의 대상을 얻어왔으며, 이러한 문제, 대상은 󰡔윤리학󰡕을 포함한 스피노자의 성숙기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학, 더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그의 개입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이 말을 비판적인 의미(곧 칸트 이래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온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된)가 아니라 통용되는 의미에서, 곧 제 1철학적인 주제들에 관해 깊은 사변을 전개하는 철학자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인다면.

2) 이는 사실은 헤겔로부터 유래하는 태도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마슈레 2004 참조. 

3) 특히 Matheron 1969 참조. 그 이후 발표한 여러 논문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에 관한 마트롱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고 좀더 치밀하게 다듬어지고 있지만, 이런 점에서는 불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욱이 마트롱은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곧 그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4) 이런 점에서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마르샬 게루의 구조적ㆍ발생적 방법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루는 {윤리학}의 1, 2부, 곧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고(그는 {윤리학}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의 연구서 3권에서 다룰 예정이었으나, 죽음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서양 철학의 전통과 스피노자 철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대비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대비되지만, 구조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나 이론적 체계 외부의 요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트롱과 일치한다. 이는 크리스치안 라체리(Lazerri 1998)나 로랑 보베(Bové 1995) 같은 그의 제자들의 연구에서 마찬가지로 엿볼 수 있는 특징이다. 

5) 네그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지배관계와 생산력/해방 운동이라는 두 가지 대립항에 대해 매우 체계적으로(그리고 얼마간 독단적으로) 두 가지 사상적 계보를 할당하고 있다. 곧 전자는 홉스에서 루소, 헤겔로 이어지는 초월적 매개의 노선이며, 후자는 마키아벨리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노선, 다시 말해 일체의 외재적 매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하는 내재적 구성의 노선이다.

6) 이러한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 특히 다중 개념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이나 {다중}의 핵심적인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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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1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각주 기능이 있으니 정말 편하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