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출간될 {스피노자와 정치}의 역자 해제입니다.

사실은 좀 "허접"해서 올리기가 부끄러운데, 어차피 인쇄돼서 나올 글이니까, 미리 매맞는다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발리바르의 글들을 간단하게(그런데 사실 분량이

많은 편이죠 ... -_-a) 개괄해본 글입니다.

원래는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해석과의 관련성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분량도

너무 많아지고 시간도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알튀세르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은 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두 뺐습니다. 언제 이 점에 관한 논의를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해제를 보시면 알겠지만, 지난 번에 문제가 됐던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는 번역본에

수록하기로 했습니다. 저보다는 사실 출판사 사장님의 열정이 더 큰 계기가 됐는데, 여러 군데 문의해본

결과 법적으로 전혀(또는 거의)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수록하기로 했습니다. 어찌 됐든 독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관개체성의 철학자 스피노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에 대하여



  이 책은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에 관한 주요 연구를 묶은 책이다. 이 책에는 한 권의 단행본과 세 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발리바르가 발표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들 중에서 역자가 보기에 국내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선별한 것이다1).

  1부에 수록된 {스피노자와 정치Spinoza et la politique}는 1985년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내는 “철학들Philosophies”이라는 총서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저작이다. 문고본 판형의 작은 책자이지만, 이미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 정치철학에 관한 권위 있는 해설서로 널리 인정받아 온 책이다(우리가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은 1996년에 나온 제 3판이다).

  2부에 수록된 글들 중 첫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는 발리바르가 1982년 이탈리아의 우르비노Urbino에서 열린 스피노자 탄생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가 1985년 유명한 {현대Les Temps modernes}에 수정ㆍ보완하여 실은 글이다(우리가 번역 대본으로 사용한 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97년 {대중들의 공포. 마르크스 전후의 철학과 정치La Crainte des masses. Philosophie et politique avant et après Marx}에 수록된 완결본이다). 이 논문은 발리바르가 발표한 스피노자에 관한 첫 번째 논문일 뿐만 아니라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논문이기도 하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 논문의 중요성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1981)과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에서 대중들multitudo이라는 개념의 위치를 체계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네그리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비되는 관점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이라는 글은 알렉상드르 마트롱 기념 논문집인 {이성의 건축Architectures de la raison}(1996)에 수록된 글로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관개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논문이다. 이 글은 비교적 적은 분량임에도 현대의 스피노자 연구, 더 나아가 구조주의 철학의 이론적 진전을 위해 매우 풍부한 시사점을 제시해 주는 글이다.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인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는 국제 스피노자 학회에서 내는 {스피노자 연구Studia Spinozana} 제 9호(1993)에 수록된 글로서, 스피노자에서 루소를 거쳐 마르크스 또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근대 정치학의 역사를 조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이론적 해결책의 실마리를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찾고 있다2).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결합을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이 글은 우리에게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사실 발리바르는 별도의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널리 알려진 철학자다. 발리바르는 80년대 한국사회성격논쟁 당시 이른바 PD파의 이론적 작업의 중요한 철학적 전거가 되었고, 90년대 초에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모색 작업에서도 막대한 이론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발리바르의 저작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했는데, 제일 마지막으로 번역된 발리바르의 저서가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balibar 1995)인 점을 생각하면, 10년 동안 거의 소개가 되지 못한 셈이다3). 사실 발리바르가 국내 사회과학계에 미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그의 저작들의 번역이나 소개는 상당히 단편적ㆍ선별적으로 이루어져온 편이다. 예컨대 발리바르(및 알튀세리엥)의 연구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자본”을 읽자}는 아직까지도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고 있으며4),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과 공동으로 저술한 {계급, 민족, 인종. 애매한 동일성들Classe, nation, race. Les identités ambiquës}(1988) 역시 일부만 소개되었을 뿐 책 전체가 번역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 90년대 중반 이후 발리바르가 매우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반폭력의 정치와 유럽 구성에 관한 작업들도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5).

  이는 그의 스피노자 연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발리바르는 국내에서는 주로 알튀세르의 제자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주목할 만한 이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스피노자에 관한 탁월한 연구자로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실제로 지난 80년대 이후 발리바르는 집약적인 연구를 통해 스피노자 철학 및 정치학의 새로운 면모를 밝혀줌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해왔지만, 국내에는 고작 그의 논문 한편만이 번역되었을 만큼(발리바르 1996)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발리바르의 이론 체계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또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연구의 독창성과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기 우리가 묶어서 펴내는 이 책은 그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 특히 그의 스피노자 연구의 중요한 일부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하여: 발리바르의 최근의 이론 작업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이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스피노자론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지난 10여년 간 수행된 발리바르의 연구 작업에 대해 간단히 개괄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발리바르의 철학 연구는 알튀세르의 이른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한다. 알튀세르는 1965년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를 출간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시작했다.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범주들을 이론적으로 쇄신함으로써 헤겔 변증법과 구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자성을 밝히고, 이를 기반으로 1950년대 이후 소련과 중국의 갈등으로 표출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 운동의 융합)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Jacque Rancière,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와 함께 {“자본”을 읽자}를 공동 저술ㆍ발표함으로써, 알튀세르의 작업에 동참한다. 그 이후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기반으로 역사 유물론에 관한 깊이 있고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했는데, 이 시기의 작업들은 {역사유물론 연구}(1974)나 {민주주의와 독재}(1976) 같은 저작들,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1991)와 {역사유물론의 전화}(1993) 같은 논문 선집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종의 해체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러한 연구는 현실 사회주의(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몰락한 90년대 들어 좀더 광범위한 역사적ㆍ이론적 전망 아래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폭넓은 주제의 연구로 심화ㆍ발전되고 있다. 곧 80년대 까지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범주들(잉여가치, 계급투쟁, 이행, 이데올로기, 당, 대중,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등과 같은)의 아포리아를 분석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독창성과 한계를 해명하는 데 치중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근대성의 철학적 기초에 관한 연구에서 세계화와 유럽의 구성이라는 현실 정세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발리바르가 본격적인 스피노자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일반 구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소주제로, 곧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 구조주의 운동에 대한 철학적 평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ㆍ정치적 분석 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중에서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탐구는 다시 세 가지 분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고6), 둘째는 근대철학에서 의식과 정신, 주체 같은 범주들이 발명되고 전개되어온 과정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이고, 셋째는 근대 정치철학의 범주들에 대한 재고찰이다. 첫 번째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는 뒤에서 좀더 자세하게 논의할 생각이니까 논외로 한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연구는 발리바르의 이론적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연구들이다.

  근대의 철학적 인간학에 관한 연구는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축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이론적으로 정교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 혁명의 공통점 중 하나는 사고와 활동의 중심으로서 주체라는 관점을 비판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의식을 인간의 사고 활동의 한 부분으로 국지화시키고, 무의식 개념을 정신 장치의 핵심으로 파악함으로써 탈주체적인 문제설정을 제시했다면7), 마르크스의 경우는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라는 근대의 정치적(또는 자유주의적) 이념을 경제과정의 착취를 위해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보충물로 간주함으로써 근대 주체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 이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1970)에서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좀더 정교하게 전개하고 있다(Althusser 1991/1995 참조).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문제설정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의 문제설정의 난점을 보완ㆍ정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발리바르는 하이데거 이래 현대 철학의 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른바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라는 통념이 주체에 관한 칸트주의적 관점을 데카르트로 투사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을 해명하고 있다(Balibar 1989). 곧 그에 따르면 이는 프랑스 혁명과 독일 관념론이라는 이중적인 전환점을 통해 등장한 “시민 주체”라는 개념 및 그것의 아포리아, 곧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또는 봉기적 주체와 예속적 주체로의 분할을 얼마간 (상상적으로)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주체 개념의 계보학적 재고찰은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의 관점과는 다른 시각에서 근대의 주체 철학의 주요 개념들(의식, 영혼/정신, 주체 등)의 전개 과정을 탐색하는 작업8)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등장한 “시민 주체” 또는 “인권과 시민권의 주체”라는 통념에 내재한 개념적ㆍ제도적 쟁점들을 주체화subjectivation 양식에 대한 분석의 관점에서 수행하는 작업9)으로 분화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발리바르 작업의 두 번째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세계화 및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이론적ㆍ정치적 분석이다. 사실 이 분야는 발리바르 연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가장 많은 업적들을 배출하고 있는 분야다. 발리바르의 연구의 초점은 민주주의라는 서양 근대 정치의 가장 일반적인 제도에 대한 개념적ㆍ정치적 분석에 맞춰져 있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분야의 연구는 근대 정치철학의 범주들에 대한 재고찰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발리바르의 연구는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프랑스 혁명기의 「인권선언」, 특히 거기에서 공표된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 평등-자유egaliberté 명제에서 출발한다. 우선 발리바르는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은 모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인간적ㆍ제도적 차이 이전에 인간 자체로서 시민의 권리, 따라서 정치의 보편적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확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는 근본적으로 봉기적인 언표행위이며,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형의 차별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원리로서 기능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이러한 명제와 쌍을 이루는 평등-자유 명제, 곧 평등과 자유의 상호 전제, 상호 구성이라는 명제가 인권의 정치의 근거를 제공하면서 근대의 정치적 담론과 제도의 모형을 이루고 있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명제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갈등과 분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제도적인 갈등과 분화는 두 개의 축, 소유라는 축과 공동체라는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곧 공동체의 축을 중심으로 인민의 평등한 연합이라는 관점과 민족 공동체라는 관념이 대립하는 것처럼 소유의 축을 중심으로 해서 노동의 소유와 자본의 소유가 대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의 정치적 제도와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축에 따라 전개된 역사적 형태들을 고찰하는 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성의 분할(또는 성적 차이)과 육체와 정신의 분할(또는 지적 차이)이러한 평등-자유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탈근대적인’ 정치적 모순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곧 성의 분할은 근대 공동체가 성립하기 위한 현실적ㆍ상상적 전제를 이루고 있으며, 반대로 지적 차이는 개인과 집단이 소유자가 되기 위한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두 가지 정치적 매개의 전제를 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들은 근대의 정치적 제도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고유하게 탈근대적인 정치적 과제들을 제기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발리바르는 민족 형태와 주권 같은 공동체 개념과 소유 개념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이론적ㆍ역사적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10).

  아울러 발리바르는 「정치의 세 가지 개념: 해방, 변혁, 시빌리테」(1995)라는 논문에서 근대 정치의 세 가지 유형을 분류한 이후, 반폭력의 정치 또는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문제설정에 따라, 해방과 변혁의 정치에 고유한 아포리아에 대한 분석 및 새로운 진보 정치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이론적ㆍ정치적 쟁점으로서 유럽의 구성을 둘러싼 정치적, 법적, 제도적 문제들 및 유럽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 몰두하고 있다11).

  마지막으로 구조주의 운동의 이론적 쟁점에 대한 재고찰은 발리바르 연구의 세 번째 축을 이루고 있다. 사실 발리바르는 이전부터 알튀세르를 비롯해서 라캉과 푸코 또는 캉귈렘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12), 최근에는 알랭 바디우와의 논쟁을 거쳐13) 구조주의 운동 전체에 관한 이론적 분석으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14). 이 분야에서 발리바르의 이론적 관심은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structuralism/poststructuralism”라는 전형적인 영미식 구분법에서 벗어나 구조주의 운동의 전개와 분화 과정을 좀더 내재적으로 분류하고 평가하는 데 맞춰져 있다. 주제상으로 본다면 이는 “구조 대 주체(인간)”, 또는 “구조 대 역사”라는 불모의 이분법15)에서 벗어나, 구조 안에서 주체의 발생과 재생산을 구조주의의 핵심적인 이론적 쟁점으로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16).

  지금까지 간단히 윤곽을 묘사해본 9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작업은 (탈)마르크스주의와 (탈)근대성에 대한, 더 나아가 세계화의 정세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ㆍ정치적 고찰들로 간주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의 작업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또는 문화이론) 계열의 일부 “이론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허망한 언어유희라든가 대중문화와의 거울놀이와 달리, 현실 정세(탈공산주의라고 하든 세계화라고 하든 또는 유럽의 구성이라고 하든 간에)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여 이 정세를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근대 정치제도의 아포리아를 밝혀내고, 또 이 정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이데올로기적ㆍ이론적 틀을 이루고 있는 근대의 철학적 개념들의 흐름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발리바르의 작업은 비단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자들 및 활동가들에게도 현재의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위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그만큼 체계적으로 수용되고 학습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발리바르의 이러한 작업은 그가 지난 80년대 이후부터 수행해온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들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 묶어서 펴내는 이 책은 발리바르의 최근의 작업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 읽고 공부해볼 만한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의 이론 작업의 일반 구도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 책에 실려 있는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1) 정치(학)으로서 스피노자 철학

(2) 스피노자 정치학의 아포리아로서 대중들에 대한/대중들의 공포

(3) 관개체성의 “존재론”

(4)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


이제 이 주제들을 간략하게 고찰하면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이 글들의 출전은 각 글의 앞에 표시해 두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2) {스피노자 연구}9호의 주제는 “스피노자와 근대성”이었다.

3) 그 이후 논문 두어 편 정도가 번역되었지만, 수용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4) 이 책(사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 수록되어 있는 영역본)은 지난 90년대에 번역된 적이 있으나, 심한 오역 때문에 사실상 국내의 논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5) 하지만 올해 안에 최원 씨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b에서 발리바르의 대작인 {대중들의 공포: 마르크스 전후의 정치와 철학}(1997)이 출간될 예정이고, 세계화와 유럽의 구성이라는 정세에 대한 발리바르의 철학적ㆍ정치적 고찰을 집약하고 있는 {세계화와 반폭력의 정치}(원제는 {우리, 유럽의 시민들? 국경들, 국가, 인민Nous, Citoyens d'Europe? Les Frontières, l'Etat, le peuple}(2001)인데, 책 내용의 이론적 함의를 좀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국역본 제목을 약간 바꾸어봤다)도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어서, 국내 독자들도 머지 않아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6) 스피노자에 관한 발리바르의 저술 목록은 책 뒤에 붙은 「참고문헌」을 보기 바란다.

7) 근대 주체철학의 핵심은 의식과 자기의식을 주체의 본질적인 속성 또는 활동으로 간주하는 데 있음을 고려해볼 때, 프로이트의 관점은 한편으로 의식을 부차적인 정신 활동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정신의 심급들(의식, 전의식, 무의식으로 보든 이드, 자아, 초자아로 보든) 사이의 분할과 갈등, 왜곡이 정신 장치에 내재적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프로이트 자신이 스스로 평가하듯 주체 개념과 관련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룩했다고 할 만하다. 

8) 특히  Identité et différence. L'invention de la conscience. Seuil, 1998(이 책은 존 로크의 {인간 지성에 관한 시론} 중 「동일성과 차이」 장을 번역한 뒤, 여기에 매우 긴 해설과 용어 해설, 주석 등을 붙인 책이다); “âme”, “conscience”, “praxis”, “sujet”, in Cassin 2004 등 참조.

9) Balibar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4(원본은 Balibar 1992에 수록);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 in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Homo nationalis”, “Prolégomènes à la souveraineté”, in Nous, citoyens d'Europe? Découverte, 2001;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103. 2/3, 2004; “Le renversement de l'individualisme possessif”, in Hervé Guineret et al. eds., La Propriété: Le propre, l'appropriation. Ellipses, 2004. 등.

10) Balibar 1992; Nous, citoyens d'Europe? 앞의 책; Droit de cité. PUF, 2002.

11) L'Europe, l'Amérique, la guerre. Découvrte, 2003 이외에 최근의 여러 논문, 대담 등을 참조.

12) Ecrits pour Althusser. Décourvete, 1991;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 1993; 「푸코와 마르크스: 명목론이라는 쟁점」, 「라캉과 철학: 주체성과 상징성의 이론이라는 쟁점」,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1995 등 참조.

13)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Équivocité de l'universel?”, in Le temps philosophique. no.3, 1998 등 참조.

14) 이러한 연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발리바르가 미국의 철학자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과 미국의 뉴프레스New Press 출판사에서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이라는 논문 선집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된 일이었다고 한다.

15) 이는 사실 구조주의 전성기에 독일과 영미권에서 구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제시했던 전형적인 대립항들이다. 최근에는 지젝이 자신의 일부 저작에서 이러한 대립항으로 유희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16) 여기에 관해서는 특히 “Le structuralisme: une destitution du sujet?”,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no.1/20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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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5-1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놀라운 알라딘!!
이제 드디어 각주(미주?) 기능도 추가됐군 ...

瑚璉 2005-05-19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 하지만 올해 안에 최원 씩의 번역으로 : 씨의 오자이겠지요.
6) 스피노자에 관한 발리바르의 저술 목록은 책 뒤에 붙은 「참고문헌」을 보기 바란다. : 참고문헌 부분을 보기 바란다가 적절한 표현이 아닐런지요.

aporia 2005-05-1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책이 드디어 나오는군요!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 원고는 이제 인쇄소에 넘어갔나요? 몇 가지 눈에 띄는 게 있어서요. 발리바르 작업의 두 번째 축에서 보면, '탈근대'라는 말과 '탈현대'라는 말을 혼용해 쓰고 계시는데, 'modernity'를 '근대성'으로 번역하신 듯 하니 뒤의 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equaliberte'라 쓰시고 이를 '자유-평등'이라 옮기셨는데, 우선 egaliberte나 equaliberty가 아닐지요? 영어와 불어가 섞여 있어서. ^^ 그리고 '자유-평등'의 경우 '더 나아가'로 시작하는 문단에서는 '평등-자유'로 옮기셨는데, 이 역시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관련해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전 '평등-자유'가 더 좋은 것 같아요. 발리바르가 다른 곳에서 이 말이 신조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로마 등에서 유래한 '평등한 자유' 등을 이은 것이라고 말했고, 또 (아마 [Citizen Subject]였던 것 같은데) 'egaliberte'의 핵심은 자유 개념에 평등 개념을 '단락'(이걸 '대체보충'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네요...)한 것이며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한 기억이 있어서요(사실 '평등한 자유'는 자연스럽게 말이 되는데 '자유로운 평등'은 좀 이상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에요). 즉 egalite와 liberte의 순서가 알파벳 순서는 아닌 듯 하고, 따라서 자유와 평등도 가나다 순보다는 의미의 순서를 지켜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감사합니다. 이번 책 나오면 또 사인 받으러 갈께요!

가을산 2005-05-1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balmas 2005-05-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호정무진님~, 콕 집어내셨군요. 이거 참 창피해서 원 ...
주 5)의 "씩"은 "씨"로 고쳤습니다. 그런데 주 6)은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아서
고치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호정무진님. ^^;;
아포리아님, ㅋㅋ 해제를 몇 번 읽어봤는데도 눈에 뭐가 씌었는지 그게
안보였네요. 지적하신 부분은 다 고쳤습니다. ^_________^
하마터면 또 한 소리 들을 뻔 했군요.
ㅎㅎ 가을산님, 예, 드디어 ...
고맙습니다. :-)

NA 2005-05-1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대중들의 공포'가 나오게 되었군요. 잘 됐습니다. 도서출판 b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르겠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그냥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싶군요. 뭐 다른 번역이 두 개 나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요. 번역도 해석의 문제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니 독자들로서도 도움이 될테고 말이지요. 그나저나 저도 서둘러서 이 번역일을 마무리지어야 할텐데 큰일 입니다. 이번 방학은 꼼짝없이 여기에 매달리게 생겼군요. 벌써부터 무지 덥군요.^^

balmas 2005-05-1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예, 결국 수록했습니다.
도서출판 b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어서, 더 이상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여튼 최원 님의 관심이나 배려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여기도 벌써 더위 소식이 들려오지만 미국은 훨씬 더울 것 같은데,
고생 좀 하시겠군요.
 

 

도서출판 예경에서 재고도서 50% 할인판매를 한다는군요.

관심 있는 분들은 얼렁 가보세요. ^_____^

아래 그림 누르시면 출판사 홈페이지로 바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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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14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서 알릴께요^^

balmas 2005-05-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물만두님, 며칠 못본 새에 훨씬 더 귀여워지셨네요. ㅋㅋ

stella.K 2005-05-1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댓글 짱이어요. ㅎㅎ.

balmas 2005-05-1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스텔라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추천 한 방 하셔야죠.^^;;;

stella.K 2005-05-14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마스님은 아무 때나 추천이래 흥~! 추천 남발하면 안돼욧!

물만두 2005-05-14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제가 했어요^^ 그리고 장미만두라 불러주세요. 오늘만요^^

아침해 2005-05-1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사고 싶었던 [프리핸드 드로잉과 스케칭]을 샀어요. 그런데 2권 이상 이라야 할인이 되서, 마땅히 살 책이 없어 같은 책을 2권 샀습니다. 미련한가? 선물로 누구 줘야지~

balmas 2005-05-1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장미만두님, 추천 고마워요. ^^
스텔라님, ㅎㅎ 귀엽게 봐주시고, 겸사겸사 추천 한 방도 ... ^^;;;
아침해님/ 추천 please~~ ㅋㅋ

아침해 2005-05-15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곡하게 원하시니 추천. 두번 하려고 했더니 '이미 했습니다' 나오네요.
그런데 추천하면 좋은건가요?

balmas 2005-05-1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예요, 아침해님. ^^
그리고 추천은 원래 한 번밖에는 안된답니다.
어쨌든 추천 감사드려요. ㅋㅋ

해적오리 2005-05-15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덕분에 좋은 책 구입하게 되네요.
오늘 예술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미술 공부를 좀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발마스님 덕택에 자크 드미 영화도 봤어요. 재밌더라구요.

balmas 2005-05-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날나리님.(이름이 아주 독특하세요 ... ^^;;)
정작 저는 영화를 못봤답니다. ㅠ.ㅜ 재미있으셨다니 더 배가 아프군요. 으흑.
 

 

몇 달 전 선배들과 사적인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역자 후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한 여자 선배가 정색을 하고서 자신이 최근 사서 읽은 책의 역자 후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냈다. 말의 요지는, 자신의 책도 아니고 번역한 책의 후기에다가 그동안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느니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느니, 이런 사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늘어놓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직접 저술한 책에다가도 그런 식의 이야기는 낯 뜨거워서 쓰지 못하겠는데(실제로 그 선배가 저술한 책이나 번역한 책의 서문이나 후기는 매우 짧은 데다가 사적인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내가 뭘 어쨌다고 ... -_-a).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일 것 같다. 사실 유럽의 저자와 미국(영국은 또 미국과는 좀 차이가 있다)의 저자가 서문이나 후기를 쓰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편이다. 유럽의 저자들(물론 인문학 분야의 저자들이다)은 [서문]이나 [후기]를 아예 잘 쓰지 않는 데다가, 쓴다고 해도 거기에는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또는 적어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쓰는 내용은 책의 저술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말(대개 매우 간략하다) 정도이고,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표시는 한 두 줄의 헌사(스승이나 동료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 부인이나 남편 등에게 바치는)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내가 읽은 헌사 중,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감동적이었던 것 중 하나로 “일곱 가지 재능과 일흔 가지 불운을 갖고 계셨던 아버지에게”라는 헌사가 있었다).    


반면 미국 저자들(물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 쓴 저자 서문은 마치 수첩의 한 두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고유명사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책의 저술과 관련하여 학문적으로 도움을 받은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대학의 아무개와 xx는 이런저런 점에 도움을 줬고, 또 △△△대학의 yyy는 책을 한 권 다 읽어줬고, 또 누구는 절반을 읽어줬고, 모모는 한 장을 읽어줬고, ⊗⊗ 대학의 대학원생들은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줬고, 특히 그 중에서도 aa, bb, cc, dd는 이렇게저렇게 해줬고, ▽▽ 도서관의 아무개 사서는 자료를 잘 찾아줬고, ZZ 출판사의 누구누구는 참을성 있게 오래 기다려줬고, 익명의 아무개 심사위원은 좋은 비판과 유익한 제안을 많이 해줬고 fff 부인은 타이핑을 열심히 해줬고 ... 이런 식이다. 어떤 때는 100명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수첩에다 일일이 기록해두지 않고서야 그걸 어찌 다 기억할까 ...).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 이제 가족이나 친척, 친구에 관한 감사의 말이 나올 때다. 귀여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해줬고, 사랑스러운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동생, 우리 엄마, 아빠, 맛있는 파이요리를 해준 무슨무슨 아줌마, 낚시를 함께 가준 누구누구 아저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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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14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이닷! 후다닥.... 후다닥. 근데, 뭐, 역자/저자맘이겠지만, 독자로선 왠만한 작가가 아니고서야 개인적인 얘기 쓰는건 훌훌 넘어가고 재미없을것 같은데 말이죠.

NA 2005-05-14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득키득 아마 영화 아카데미 시상식의 영향력이 아닐까 싶군요^^ 미국 사람들이 원래 인사치례가 심한 편입니다. 저도 적응을 못하는데, 하루에 열두번을 같은 사람을 만나도 열두번 모두 '하이, 하우 아 유 투데이, ...오 아임 파인, 그레이트'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집에 큰일이라도 났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죠. 아, 그리고 꼭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줘야 된다고(이 부분이 특히 저는 어려워하는 부분인데). 안 그러면 섭섭해 한다고... 좀 과장이 섞였겠지만 ... 대충 사실인 듯 싶습니다. 모두들 행복병에 걸렸다고나 할까. 셀프 에스팀 암이라는 병도 있는데, 행복병과 다를 바 없는 병이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난 내가 싫어'라는 말 하면 정신병원에 보내려 듭니다. 좀 이상한 나라죠. 후기 잘 쓰시기 바랍니다. ^^

가을산 2005-05-1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역자 후기라도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봐줘도 될 것 같아요.
근데, 역자 후기가 너무 길어서 - 어떤 후기는 20쪽이 넘는 경우도 봤어요. - 마치 후기를 빌어서 요점 정리 및 자신의 의견을 줄줄 늘어놓아서 오히려 책에 폐가 되는 경우도 봤어요.

chika 2005-05-1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의견에 한표!
제가 기억하는 감동적인 헌사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를 쓰고 아내에게 바친 헌사요. ^^

클리오 2005-05-1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 후기는 주로 조심스럽게들 쓰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요. 저자 서문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리의 치마 밑'의 서문. 장장 10여 페이지에 이르는데 그동안 자신에게 학문적 공격을 펼쳤던 사람을 실명만 거론하지 않을 뿐 집요하게 반박하고 있죠.. ^^ 저자 후기가 요즘 자세해지는 것은, 재미있기도 하잖아요.. 학문적인 면에서는 저자가 서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점'(편견)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구요.. ^^ 전 저자,역자 후기 재밌어요...

마냐 2005-05-1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자, 역자 후기 좋아해요. 그리고 무성의하게 이름 주르륵 나열하는 경우와 한 사람, 한 사람 고마움이 느껴지는 그런 경우를 비교해보는 재미두 있구..ㅋㅋㅋ

balmas 2005-05-1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ㅎㅎ 정말 그렇죠. 이름만 한 100여개 나열되어 있는 <감사의 말> 같은 걸 보노라면, <쫌> 그렇더라구요.
ctrl님/ ㅋㅋ 그렇군요. 옛날 우리나라 양반들이 서로 인사하는 것을 재현한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한 5분 넘게 서로 계속 절을 주고받으면서 이런저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미국도 조금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
가을산님/ 흑흑, 바로 그런 폐의 주범이 바로 저랍니다.(-_-v) 지난 번 [헤겔 또는 스피노자]도 그랬고 이번에도 20페이지가 넘어간다죠 ... ㅠ.ㅜ
치카님/ 가을산님과 이하동문 ...
클리오님/ 그것도 뭐 잘 써야 재미있는 게 아닐까요? ㅎㅎ
마냐님/ 글쎄 말예요, 그런 걸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구요. 여자분들 중에는
특히 아내(남편)와 아이들이나 가족, 친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써놓은
서문이나 후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stella.K 2005-05-14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재밌네요. 저는 서론이나 역자 후기에서 뒷부분은 그다지 읽지는 않죠. 근데 짧막하게 누구한테 감사한다 정도는 좋은데 주절이 주절이 이름 밝히는 건 좀 짜증나요. 그래서 뭐 어쩌라구? 뭐 그런 식이죠.
이거 2편도 있나 보죠? 언능 쓰세요!

MANN 2005-05-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차이가 있었군요- 저도 "A는 ~를 해 줬고, B는 ~를 해 줬고..." 이런 식으로 잔뜩 나열한 서문을 보고 무척 신기해했던 적이 있거든요(그 상세함에, 그리고 그걸 다 기억했다는 점에;). 물론 다 기억한 게 아니라 어디 기록해놓은 거겠지만, 그런 것까지 빼먹지 않고 다 기록해놓았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러고보니 그런 서문이 있는 책은 미국책이었던 것 같네요.

영화 크레디트가 연상되네요. 이 창작물이 완성되는 데까지 도움을 준(세세한 사항에서라도) 사람들을 기록해 놓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거기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 빼고는 잘 안 볼 것 같다는 점에서요. ^^;

balmas 2005-05-14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ㅎㅎ 재미있으시면 추천도 한 방 해주셔야죠. ^^;;;
이 글 2편도 있는데, 지금 정작 제 역자 후기 쓰느라고 2편은 조금 더 있어야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MANN/ ㅋㅋ 그렇지, 관련된 사람들이야 꼼꼼하게 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누구 이름이 거기 있는지 기억 못하겠지 ...

stella.K 2005-05-1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2편 잘 쓰시면 할께요. ㅋㅋ.

balmas 2005-05-1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 두고 보겠습니다.

chika 2005-05-1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자 후기를 길게 쓰시나요? 시시콜콜이? 그...그렇다면, 알라딘 얘기도 등장할까요? 책의 출판과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문제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과정에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신 알라딘 서재지기님들에게 감사의 인사 어쩌구... ㅋㅋㅋ
(이런 생각하니 재밌습니다! ^^)
- 역자 후기를 쓰신다고 하니 완성이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ㅎㅎ

balmas 2005-05-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역자 후기가 좀 길긴 긴데, 그런 이야기는 안들어간다죠, 아마. ^^;;

가을산 2005-05-1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폐가 된다는 말 취소! ^^;;
음... 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아요. ^^ 진짜루요.

balmas 2005-05-1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완전히 엎드려 절받기잖아요 ...
어쨌든 가을산님 말씀에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

krinein 2005-05-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후기라... 저로서는 그게 길디 긴 감사의 글이건, 신변잡기의 감상이건, 책 내용의 요약이나 서평이건, 책을 둘러싼 원저작의 사정이건, 출판을 둘러싼 일화건, 아니면 그냥 역자가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는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역자의 글이 없거나 부실하면 어쩐지 읽어보기도 전에 짐짓 번역에 대해 신뢰가 떨어졌다는.... 암튼 책 못지 않게 역자 후기도 기대해 봅죠^^

balmas 2005-05-1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크리네인님, 감사 ...
가을산님과 더불어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

가을산 2005-05-1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따우님 의견 강추입니다!

menwchen 2005-05-17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따우님 의견에 강추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런 코멘트도 없는 번역판은 우리네 출판 풍토에서 이 물건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공작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워낙에 베끼기 출판이 극성을 부린터라....
우리 출판 풍토에서 그리고 번역이 정말 신뢰를 줄 수 있을 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이런 사람인데, 어쩌구 저쩌구 해서 번역을 하게 되었습니다..뭐 이 정도는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것은 소논문을 실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요^^*
두서가 없네요T.T;

balmas 2005-05-1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하, 따우니이이이임~~~~~~~
가을산님, 멘님, ㅋㅋㅋ
그럴 줄 알고 써넣었습니다.
"신부 급구.
아래로 연락 바람. 016 xxx oooo
신부의 소재를 알려주시는 분에게는 후사함."

balmas 2005-05-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넣고 싶은 마음이야 태평양 같지만,
온동네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차마 넣지 못했나이다 ...

로드무비 2005-05-2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넣으세요, 넣어요, 넣으시라니까요.
역자후기 때문에라도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리지 않을까요?^^

조선인 2005-05-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자 서문이랑 역자 후기부터 읽고 책을 읽어요. 다 읽은 다음에 서문이랑 후기 또 읽구요. 사회과학 서적의 경우 길잡이가 없으면 워낙 헤매는 터라. *^^*

balmas 2005-05-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무비님, 정말 그걸 넣으면 더 잘 팔릴까요?
사실은 저도 잘 모르는 분야의 책에 정성스런 해제가 달려 있으면 반갑답니다.
그 정도 서비스는 있어야 할 텐데 말예요.
 

* 끝으로 용어 해설 하나 더 올립니다.

책에는 몇 가지 용어 해설이 더 있는데, 여기에는 그냥 이 정도만 올리겠습니다.

역량potentia-권능/권력/권한potestas


우리가 역량이라고 번역한 포텐샤potentia/puissance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피에르-프랑수아 모로 같은 이는 심지어 스피노자를 “역량의 철학자”로 부르기까지 했다). 이는 라틴어의 “포세posse”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보통은 “~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개념은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고유성은 당대의 이론적ㆍ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적 입장의 특징을 매우 잘 표현해주고 있다.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고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을 포테스타스potestas/pouvoir라는 개념과 결부시켜 고찰하는 게 좋다. 스피노자가 대개의 경우 이 두 개념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두 개념의 상관적인 용법은 두 개념의 차이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고유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1) 존재론-신학적 의미

존재론-신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은 대립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곧 포텐샤는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포테스타스는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윤리학󰡕에서 포텐샤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분명한 규정을 얻고 있다.

“포텐샤는 실존할 수 있는 있음이다posse existere potentia est.”(󰡔윤리학󰡕 1부 정리 11의두 번째 또 다른 증명)

“신 자신과 모든 실재가 그에 따라 존재하고 행위하는 포텐샤는 신의 본질 그 자체다Potentia Dei, qua ipse, et omnia sunt, et agunt, est ipsa ipsius essentia.”(󰡔윤리학󰡕 1부 정리 34의 증명)

  이 두 가지 규정은 각각 분명한 이론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규정은 포텐샤를 잠재력으로, 곧 실행될 수도 있고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상 현행적인 힘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포텐샤가 현행적인 힘으로 이해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실존할 수 있음”과 “실존할 수 없음”을 존재론적으로 불균등한 사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실존할 수 없음은 무능력/비역량posse non existere impotentia est”(1부 정리 11의 두 번째 또 다른 증명)이며, 따라서 실존하지 못하게 만드는 특정한 원인이 지정될 수 있는 사태이지(“모든 실재에 대해 그것이 실존하는 사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유 또는 원인을 지정해야 한다.”(1부 정리 11의 첫 번째 또 다른 증명)), 원초적인 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 규정은 신과 피조물 또는 오히려 자연 실재들 사이에 초월적인 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모든 실재들의 실존 및 행위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미 정리 18 및 정리 25의 주석 등을 통해 증명되었지만, 스피노자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포텐샤의 관점에서, 곧 원인의 관점에서 신과 자연 실재들의 내재적 관계를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은 항상 능동적이고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받은 모든 자연 실재는 항상 최소한의 포텐샤, 곧 원인으로서의 능동성을 지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 1부가 “그 본성으로부터 아무런 결과도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정리로 끝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표준화된 현실태-가능태의 구분법을 해체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포테스타스는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주로 논쟁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포텐샤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는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한다는 점에 양자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7의 주석이나 1부 정리 33의 따름정리 2 같은 곳에서 역량의 관점에서 포테스타스의 신학ㆍ존재론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신이 자유로운 원인인 이유는―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우리가 그의 본성으로부터 따라나온다고 말했던 것, 곧 그의 권능 안에 존재하는 것을 그렇지 않게끔, 다시 말해 그 자신에 의해 산출되지 않게끔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1부 정리 17의 주석)

“모든 것을 신의 어떤 무관심한 의지에indifferenti cuidam Dei voluntati 종속시키고 모든 것을 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만드는 이러한 의견은, 신이 모든 것을 선을 고려하여 실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진리에서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사람들은 신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 신이 자신의 작용에서 표본으로 삼거나 마치 정해진 목표인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을 신 바깥에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신을 운명fato에 종속시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1부 정리 33의 주석 2) 

  스피노자가 이처럼 포테스타스의 신학ㆍ존재론을 치열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유는, 포테스타스 개념을 중심으로 자연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을 구성하는 실제 인과관계 및 그 일부로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곧 비합리적인) 위치에서 자연을 지배하는 인격신이나 주권자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윤리학󰡕 1부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2) 인간학적-윤리학적 의미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용법이나 관계는 존재론-신학의 경우와 좀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유한한 자연 실재로서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에, 포텐샤 개념이 항상 능동적이고 현행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포텐샤는 코나투스, 곧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윤리학󰡕 3부 정리 6)으로 표현되며, 이러한 코나투스는 모든 자연 실재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코나투스는 “충동appetitus” 또는 "욕망cupiditas"로 제시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나 욕망으로 규정되면 포텐샤는 항상 능동적인 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능동성과 수동성의 경향적인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능동성을 얻는 길이다. 󰡔윤리학󰡕 3부 이하의 논의는 이처럼 인간이 수동적인 정서 또는 정념들에 종속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학-윤리학의 영역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는 상이한 쟁점을 갖게 되는데, 핵심적인 것은 정신 또는 의지에 대한 신체 활동의 종속이라는 문제다. 이는 특히 󰡔윤리학󰡕 3부 정리 2의 주석과 5부 「서문」에서 잘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 두 가지 대립항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으로서, 그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이며, 이것은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된다. 이로부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하나이며, 따라서 우리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본성상 우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함께 간다simul는 점이 따라나온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가상의 적수들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가 상반되며, 더 나아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포테스타스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mentis decreto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 후자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suarum actionum sunt conscii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causarum a quibus determinantur ignari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그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포테스타스, 또는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 의지로 지껄인다고 믿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5부 「서문」에서 스토아학파 및 데카르트, 특히 󰡔정념론󰡕의 데카르트 역시 이러한 가상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곧 이들은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며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absolute imperare고 믿고” 있으며, 데카르트의 경우는 “송과선”(뇌 안에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가 결합하는 부분)이라는 “은밀한 성질qualitas occultus”로 정서들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 포테스타스를 확립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역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작용을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코나투스이며, 우리 신체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은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몰인식한다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학-윤리학에서 포텐샤-포테스타스 관계의 쟁점은, 신체에 대한 정신 또는 의지의 권능으로 표현되는 포테스타스의 관점이 우리의 인간학적 조건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로막고, 이에 따라 윤리적인 능동화의 과정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3) 정치학적 의미

정치학의 영역에서도 두 개념은 체계적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지만, 존재론-신학이나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는 달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대립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고, 비제도적인 또는 선(先)제도적인 행위 능력으로서 포텐샤와 법제도에 의해 부여받은 권력 또는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정치학의 영역에서 포텐샤는 법적ㆍ제도적 질서의 존재론적 기초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의 자연적 기초를 표현한다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에 따라 규정된 행위 능력이나 권한을 의미한다. 이 점은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 모두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특히 󰡔정치론󰡕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먼저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또는 그렇다고 가정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실재들의 행위는 그가 갖고 있는 자연권 곧 그의 포텐샤에 따라 규정된다. “나는 자연권을 자연의 법칙들 자체로, 또는 모든 사물이 생산되는 규칙들, 곧 자연의 포텐샤 자체로 이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전체의 자연권 및 따라서 각 개체의 자연권은 그것의 포텐샤가 미치는 곳까지 확장되어야 한다.”(󰡔정치론󰡕 2장 4절)  

  반면 사회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은 그가 지닌 자연권을 계속 보존하고 있지만, 이제 그의 행위는 자연권 자체가 아니라 법적으로 부여받은 권한, 곧 포테스타스에 의해 규정된다. “만약 국가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갈 권리, 따라서 포테스타스[권한]를 부여한다면, 이로써 국가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셈이며, 이를 그 자신이 이러한 포테스타스를 부여한 사람에게 양도한 게 된다.”(3장 3절)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포테스타스는 법제도, 궁극적으로는 주권자에 의해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부여된 권력 내지는 권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내지 권한으로서 포테스타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오직 주권이 존재하는 국가 안에서만 부여받고 행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횡단보도를 걸어갈 수 있는 자연적 역량, 곧 포텐샤를 지니고 있지만, 교통법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 곧 포테스타스는 갖고 있지 않다.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이러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 사이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대중들의 포텐샤와, 주권, 곧 최고의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다. 󰡔정치론󰡕 3장 2절은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둘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신학이나 인간학-윤리학의 영역과 달리 대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권이 없이는 국가, 정치 질서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포테스타스는 단순한 가상이나 착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포텐샤의 철학, 곧 역량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텐샤-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일의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용법은 이 개념들, 특히 포테스타스라는 개념을 한 가지 용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포텐샤의 경우는 “역량”이라고 번역하고, 포테스타스의 경우는 각각의 영역에 따라 “권능”, “권력”, “권한” 등으로 번역하고 싶다. 

  포텐샤는 그동안 국내에서 주로 “역능”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왔다. 이 번역은 “역능”이라는 단어가 우리말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라는 점에서 일차로 포텐샤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단어가 특별히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의 의미와 용법을 잘 표현해준다면, 이를 사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이 단어는 내용상으로도 스피노자의 포텐샤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굳이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이를 “역량”(力量)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스피노자 당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변화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 시대는 거대한 과학혁명의 시대였고, 이러한 혁명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양화하는 데 있었다. 자연적 실재들이 제각각의 고유한 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자연 전체를 일양적(一樣的)인 법칙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연의 인식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각의 개체나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질이나 특성을 양적인 차이들로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능성possibilitas”이나 “실재성realitas”, “완전성perfectio”이나 우리의 주제인 포텐샤 같이 형이상학 영역에서 사용되는 통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우리는 “실재성의 정도”나 “완전성의 정도” 또는 “포텐샤의 차이”(곧 “힘의 양의 차이”) 같은 표현들을 접하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철학적인 어휘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성” 같은 관념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윤리”의 영역에서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포텐샤는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나 비교 불가능한 힘을 가리키기보다는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상호 비교될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포텐샤라는 용어는 “역량”이라는 말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두 용어는 불어로는 각각 “puissance”와 “pouvoir”이라고 번역하고 독어로는 대개 “Macht”와 “Gewalt”로 옮기지만, 영어로는 모두 “power”로 옮기고 있다. 이는 영미권 주석가들이 그동안 이 두 가지 용어의 구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네그리 번역자들 중 일부가 전자를 대문자로 된 “Power”로, 후자는 “power”로 옮기거나 전자는 “potential”로, 후자는 “power”로 옮기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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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multitudo


“multitudo”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많은”, “다수의” 또는 “큰”이라는 뜻을 지닌 “multus”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17세기 정치철학자들,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홉스의 경우 물티투도는 법제도의 틀 안에서 구성된 인민people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군중” 내지는 “무리”(󰡔시민론De Cive󰡕 영역본에서는 이를 “crowd”로 번역하고 있다. Hobbes 1998 참조)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홉스 정치학의 원칙에 따를 경우 물티투도는 적법한 정치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전혀 정치적 행위를 수행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물티투도는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불법적인 소요와 폭력으로 정치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점에서는 홉스 정치학이 꼭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홉스는 물티투도를 서로 독립해 있는 “다수의 개인들” 또는 “다수의 의인(疑人)들persons”로 해체함으로써 이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이 문제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참조). 

  반면 스피노자는 물티투도에 대해 좀더 미묘한 태도를 보여준다. 정치학에 관한 스피노자의 첫 번째 주저인 󰡔신학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단 세 차례만 사용되고 있으며, 거의 이론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6년 뒤에 씌어진 󰡔정치론󰡕에서는 사용 빈도도 늘어날뿐더러, 스피노자의 논의의 핵심 대상으로 등장한다. 󰡔정치론󰡕에서 이 개념은 한편으로 주권 또는 통치권을 규정하는 위치에 놓인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정치론󰡕 2장 17절(강조는 인용자). 또한 3장 2절, 7절, 9절도 참조)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물티투도를 결코 자기통치적인 주체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물티투도의 삶을 지배하는 정념적인 동요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이를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인 매개를 추구했다. 따라서 󰡔정치론󰡕에서 물티투도는 기본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1981)이라는 저서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반오웰」(1982)이라는 논문 덕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단지 스피노자 정치학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개념이 중요한가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이 책 2부에 수록된 「스피노자, 반오웰」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몇 가지 점만 지적하겠다.

  첫째, 두 사람은 물티투도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새롭게 고찰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네그리는 물티투도 개념이 실체, 속성 같은 초월적인 형이상학의 범주들 없이 유한양태들의 차원에서 완전한 구성의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중시하며, 이 때문에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재정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반면 발리바르에게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이 개념이 󰡔윤리학󰡕 1부와 2부에서 전개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존재론’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존재론’에서 자연학, 그리고 인간학에서 정치학에 이르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관개체성의 관점에서 재고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둘째, 네그리는 물티투도를 일종의 정치적 주체, 더 나아가 해방 운동의 주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물티투도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가 현대 사회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대중masse”이나 “군중crowd”와 구분되는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다고 본다. 곧 대중이나 군중은 자신의 독특성을 상실한 익명적인 개인들의 집합, 따라서 지배장치에 포섭되어 있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데 반해,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능동적인 역량과 독특성을 지닌 개인들의 결합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물티투도는 초월적인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 다수의 독특한 개인들의 결합체라는 점에서 해방 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는 ‘존재론적’으로 토대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집단으로서 “대중”이나 “군중”이라는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발리바르에 따르면 물티투도에 고유한 이러한 양가성, 이중성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피노자의 역량의 존재론이 관계론적 존재론이라는 것, 곧 능동과 수동의 끊임없는 변이과정이라는 것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적대와 갈등을 환원 불가능한 정치의 요소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물티투도의 양가성이라는 관점의 중요성은 정치를 막연한 유토피아적(또는 목적론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개조와 변혁 운동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적 토대가 된다는 점에 있다.    

  셋째,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이 선호하는 용어법의 차이로 이어진다.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라틴어 multituo를 줄곧 “multitude”라고 번역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국내의 네그리 연구자들은 다시 이를 “다중多衆”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물티투도가 지닌 “다수, 여럿”의 의미(곧 주권의 초월적 “하나”에 대립하는)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네그리의 주장과 일치하게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이 책 2부에 수록된 세 번째 논문의 한 각주에서 물티투도에 대한 가장 좋은 번역어는 “masses”, 곧 “대중들”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을 (단수로 쓰인) “multitude”, 곧 “다중”으로 번역하는 데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이 지닌 이중성 내지는 양가성을 보존하기 위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라틴어 원어는 하나인 데 반해, 이 용어에 대한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현대적 번역과 용법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의 경우에는 또 다른 번역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발리바르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물티투도를 몇 가지 상이한 불어 단어(“masse”와 “masses”, 그리고 “multitude”)로 번역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발리바르가 “masses”, 곧 “대중들”이라는 번역을 물티투도에 대한 최상의 번역어로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번역어들이 혼재되어 있는 점을 감안해서 발리바르가 “masse”라고 번역할 때는 “대중”으로, “masses”로 번역할 때는 “대중들”로, 그리고 “multitude”로 번역할 때는 “다중”으로 각각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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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wchen 2005-05-10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발마스님의 용어 해설을 매일 읽으면서 제가 사이버 대학을 다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무지하게 공부되네요 감사합니다.....

瑚璉 2005-05-1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순전히 우리말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대중'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다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대중들'이라는 역어는 좀 부적절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역전앞'같은 말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balmas 2005-05-1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nwchen님,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호정무진님, 좀 그런 점은 있죠. "대중들"에서 "들"이라는 게 군더더기 비슷한 셈인데 ...

그런데 또 이런 게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몇년 전에 창간된 [Multitudes]라는 좌파

학술지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네그리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는 학술지인데,

재미있는 건 네그리처럼 그냥 "multitude"라고 하지 않고 "s"를 하나 더

붙였다는 거죠. 그러니까 네그리의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또 네그리의 관점에

 함축된 "목적론"적 경향과는 얼마간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죠.

제 요지는, 불어로 "masses"나 "multitudes"라고 하는 거나

우리말로 "대중들"이라고 하는 거나,

일상적인 어법의 측면에서 보면 군더더기가 들어간 단어들이지만,

개념적인 또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필요한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뭐 이 정도의 일탈이야 해볼 만하지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 


2005-05-13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05-14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알겠습니다, 숨어계신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