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린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제 1년이 지났으니까 여기에 올려도 되겠죠? ㅎㅎ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에 관해 논의한 글입니다.
이 글에 관해 토론하거나 논평하고 싶은 분들은 [황해문화]에 실린 판본을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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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
[이 글은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마르크스주의 학술지 Actuel Marx 67호(2020)에 실린 “Nécessaire, mais impossible: effets althussériens en Corée du Sud”의 한글판인데, 프랑스어판의 내용을 일부 축약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2020년 7월 23일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주최로 열린 이 글에 대한 토론회에서 토론을 맡아준 정정훈, 양창렬 선생께 감사드리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제기함으로써 원고를 더 충실히 가다듬을 수 있게 도와준 청중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는 크게 네 가지 계기 속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계기, 그러니까 알튀세르의 이론이 한국의 학계 및 공론장에 실제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 최대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한국사회성격논쟁”(이하 “논쟁”으로 약칭)이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복권하고 한국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할 방법을 모색하던 이 “논쟁”에서 알튀세르는 이를테면 부재하는 중심으로 작용했다. 두 번째 계기는 이 “논쟁”에서 각각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을 충분히 체계화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파국적인 외부 원인, 곧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맞서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논쟁”의 한 당사자였던 “PD”(이것은 민중민주주의의 약자였다)의 일부 이론가들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에 근거하여, 이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전화(轉化, transformation)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이 시기는 실로 남한에서 알튀세르의 영향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하지만 짧은 절정의 순간이 지나자마자 알튀세르는 ‘포스트 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이 새로 외부에서 수입된 담론에 밀려 곧바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의 효과에 대해서는 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그린비, 2019 참조.] 이것이 세 번째 계기였다. 1990년대 이후 2011년까지 지속되었던 이 시기 동안 그는 ‘그들 중 한 명’, ‘기타 등등’에 속하는 철학자였다. 하지만 2011년 출간된 알튀세르 효과 이후[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국내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나고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있는 만큼, 아마도 우리가 알튀세르 효과의 네 번째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국면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여기에는 특히 새로 번역된 알튀세르 저작 및 최근 몇 년 사이에 잇달아 출간되고 있는 알튀세르 유고들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나무, 2018;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9;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강의, 안준범 옮김, 현실문화, 2020;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2020.] 이 글의 주요 목표는 이러한 네 가지 계기 속에서 발생한 한국에서의 알튀세르 효과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알튀세르 효과의 기원: 한국사회성격논쟁과 “PD”
우선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것은 “논쟁”과 관련되어 있는데, “논쟁”이 일어났던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한국은 1945년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곧바로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38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소련군의 관할에 놓이고 남쪽은 미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 뒤 남한과 북한이 각각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잠정적인 분단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분단, 보통 “분단체제”라 불리는 것으로 변모되었다. 이 체제 아래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그 후손인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통치 질서가 구축되었고, 남한에서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장기독재가 이어졌다. 1979년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남한에서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지만, 또 다른 군부 독재자였던 전두환이 이 기회를 강탈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 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들의 학살을 통해 자신들의 확고한 통치 질서를 구축했다고 생각한 전두환과 군부 세력의 믿음과는 반대로 광주항쟁은 몇 가지 측면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광주항쟁의 성격 및 의의에 관한 연구로는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봄, 2012; 김정한, 1980 대중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을 각각 참조.] 우선 광주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은 급진적인 운동으로 변모했다. 이전까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지식인, 기독교 지도자, 야당 정치인과 같은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반독재투쟁의 성격을 띠었지만, 광주항쟁 이후에는 군부독재만이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 원인으로 지목된 한국의 종속적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 과정에서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반미가 운동의 중심 목표 중 하나로 제기되었다.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미국 정부가 광주의 학살을 묵인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가 한국의 분단과 독재의 지속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간주했다. 셋째, 민주화운동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사이의 조직적인 연계가 시도되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소규모의 노동운동이 산발적으로 전개되었고, 1971년에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 및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많은 지식인ㆍ학생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남한에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전개된 것은 자본주의적인 경제 발전이 상당히 이루어지고 노동자들의 숫자가 획기적으로 증대한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지성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큰 변화는 남한에서 오랫동안 탄압의 대상이 되어온 마르크스주의가 한국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의 인식론적 기반으로 복권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래 남한 사회에서 공산주의(및 심지어 사회민주주의까지도)는 가혹한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와 교육, 출판 자체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하지만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연출할 필요성으로 인해 전두환 정권은 출판과 사상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으며, 남한의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출판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마르크스의 자본, 엥겔스의 반듀링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 그람시의 옥중수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을 비롯하여 한국 사회를 연구하고 분석하기 위한 다양한 좌파 서적들을 출판했다.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느낀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 서적들을 열정적으로 탐독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개론서들 및 진보적인 저술가들이 쓴 자본주의 경제와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들은 보통 ‘사회과학 서적’이라고 불렸으며, 출판되기만 하면 수천 부씩 판매가 되었다. 또한 수백명의 학생들이 수강을 할 정도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대학의 철학 강의는 사회철학 강의였는데, 여기에서는 대개 헤겔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가 다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1980년대 중반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남한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학생운동, 문화운동 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활동가들 역시 관여했다. 따라서 이는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 또는 민중운동 사이의 연합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의 근본 주제는 한국 사회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사회의 변혁의 과제 및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것이었다.[이 논쟁의 주요 문헌들은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박현채ㆍ조희연 엮음, 한국사회구성체논쟁, 1~4, 죽산, 1995.]
이 논쟁에서는 다양한 정파에서 여러 가지 입장들이 제시되었지만, 크게 본다면 ‘민족해방혁명론’(약칭 NL)과 ‘민중민주주의혁명론’(약칭 PD) 사이의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NL의 옹호자들은 한국 사회의 본질은 식민지반(半)봉건사회(colonial semi-feudal society) 또는 식민지반(半)자본주의사회(colonial semi-capitalist society)이며, 따라서 주요 모순은 미 제국주의와 남한 민중 사이의 민족모순이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계급 모순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남한에서의 혁명의 일차적 과제는 미 제국주의와 군사 파시즘에 맞서 남한의 각계 각층의 진보 세력이 단합해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남한의 민족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면, 북한과의 통일을 거쳐 한반도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NL은 더 세력이 광범위했으며, 따라서 논쟁에서도 다수파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소수파의 위치에 있던 PD의 옹호자들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으며,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을 국내외의 독점자본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모순으로 간주했고 민족 모순은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PD는 한국 사회 변혁의 과제를 독점 자본에 맞선 민중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으로 규정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한국에서 알튀세르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바로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였다. 알튀세르 수용을 주도했던 이들은 윤소영, 이병천 등(서관모는 199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알튀세르 수용에 참여했다)과 같이 PD의 논의를 이끌어가던 몇몇 이론가들(이들은 모두 30대의 젊은 대학 교수들이었다)이었는데, 이들은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 특히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에 기반하여 PD의 이론을 정교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알튀세르 효과의 첫 번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 없는 레닌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알튀세르 없는 레닌주의”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알튀세르에 대한 PD 이론가들의 준거는 매우 막연하고 간접적인 것이었으며, 여러 모로 알튀세르 및 발리바르의 이론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논쟁 당시에 PD의 이론가들은 한편으로 남한이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NL에 맞서 그것이 국가독점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남한이 순수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한 다른 정파에 맞서 남한 내 독점 자본의 종속적 성격을 강조했다. 따라서 그들의 주요한 이론적 과제 중 하나는 남한 사회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그 중심 쟁점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지 국가에서도 독점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독점 자본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당시 PD의 이론적 트레이드 마크였던 ‘독점 강화, 종속 심화’ 테제가 생겨났다. 남한에서의 독점 자본주의의 발전은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종속의 심화를 가져오며, 이것은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로서 제국주의 아래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법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텍스트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논거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단지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에 기반을 둔 소비에트 경제학자들의 저작에서, 그리고 종속적 발전을 설명하고자 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주요 논거를 이끌어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에 매혹되었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이론적 준거로 삼았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들이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북한의 주체사상의 권위와 다른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적 교조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동일한 목표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북한의 주체사상은 사실은 민족주의적 스탈린주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알튀세르는, 페리 앤더슨이 유명한 저서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또는 이 표현이 비(非)공산권 국가의 마르크스주의를 지칭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서방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가가 아니라,[페리 앤더슨,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류현 옮김, 이매진, 2003.]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파적 비판을 수행하고자 했던 철학자였다. 사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스탈린주의와 단절하고자 했으며, 좌파 레닌주의의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인간주의(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던)를 표방하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을 극복하고자 했다.[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중에서 특히 「서문: 오늘날」 및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참조.]
PD의 이론가들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지향의 구체적 함의를 해독하기 위한 열쇠를 발리바르의 저작, 특히 역사유물론 5연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에서 찾았으며, 이 두 권의 책이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알튀세리언의 저작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Étienne Balibar, Cinq études du matérialisme historique, Maspero, 1974; 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 Maspero, 1976. 이 두 권의 책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089; 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이 책들은 분명히 스탈린주의적 편향의 핵심은 사회주의 생산양식 이론에 있다는 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짧은) 이행기가 아니라 사회주의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공산주의는 스탈린주의에서 말하듯 “전(全) 인민의 국가”가 아니라 “정치의 새로운 실천”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지만, “논쟁” 자체에서 PD의 구체적인 이론적 입장을 정교화하는 데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PD 이론가들은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저작의 도움을 받아 소련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의 저작 속에서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레닌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요소를 찾기 위해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들은 소련의 경제학자인 니콜라이 짜골로프가 감수한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번역했으며, 이 번역을 기반으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작에서 직접 찾을 수 없었던 PD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니콜라이 짜골로프, 정치경제학 교과서, 윤소영 편ㆍ해설, 새길, 1990.] 이들에 따르면 짜골로프의 이 교과서야말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부합하는 과학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구체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정작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그 어디에서도 짜골로프의 교과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남긴 바 없다.
이런 견강부회야말로 당시 PD 이론가들의 이론적 관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에서 첫 번째 알튀세르 효과를 알튀세르 없는 레닌주의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PD 이론가들의 이론적 목표가 무엇보다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복권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당성, 곧 그 과학성 및 실천적 효력을 전제하는 것인데, 당시 PD 이론가들 중 누구도(또는 “논쟁”에 관여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이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당성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던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체제가 정치적 세력으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유럽 연구자들 눈에는 충격적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PD 이론가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장 탁월한 이론적 표현이라고 간주했다. 사실 PD의 이론가들에게 이 두 사람이 중요했던 것은, 이론적 과학성과 혁명적 실천성을 상실한 다른 서방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야말로 진정으로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 곧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의 첫 번째 번역본이, 원서 3장의 부록인 「레닌, 공산주의, 그리고 이주」 및 5장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이 빠진 불완전한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역자는 이 부분들이 당면한 현실적 투쟁을 사고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얼마 전에 출간된 새 번역본에는 첫 번째 번역본에서 빠졌던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 연구, 배세진 옮김, 현실문화, 2020.] 이러한 평가에는 참된 측면과 더불어 미망적인 측면도 존재할 텐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해보겠다.
알튀세르 효과의 절정: 백조의 노래
“논쟁”의 종결과 더불어 알튀세르 효과의 두 번째 계기가 도래하는데, 여기에서부터 알튀세르는 막후에서 나와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물질적 준거 자체가 사라지자, 좌파 이론가들은 “논쟁”의 지반 자체가 무너져버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PD 이론가들은 한편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표현되는 시대의 전환을 “논쟁”의 내적 맥락 및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외부 상황으로 규정함으로써, “논쟁”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과 동유럽 및 서유럽 좌파 정당 등에서 전개되고 있던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을 급진 개혁파(곧 친자본주의파)와 중도 개혁파(고르바초프로 대표되는), 그리고 보수파(사회주의 옹호파) 사이에서 전개되는 3각 논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이는 페레스트로이카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개혁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개혁운동이 사회주의 자체의 몰락으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한국의 변혁운동 및 “논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친자본주의적인 급진 개혁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체적으로 고르바초프가 대표하는 중도파 노선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오히려 소련 및 동유럽 공산당의 관료 집단이 대표하는 보수파들의 사회주의 옹호론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특이하게도 PD 이론가들은 루돌프 바로(Rudolf Bahro)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의 내재적 개혁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은 친자본주의적 성향을 띤 ‘급진 개혁파’들과 달리, 이미 1970년대부터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찾으려는 의미 있는 노력을 기울여왔지만,[이를 대표하는 저작이 바로 루돌프 바로의 대안이었다. Rudolf Bahro, The Alternative in Eastern Europe, New Left Books, 1978.] 국내에서는 거의 아무런 논의 및 수용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당시의 PD 이론가들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있었음을 방증해준다. 아마도 그들은 주체사상의 권위를 등에 업은 NL의 이론가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이 판명되면서 1992년 무렵이 되면 PD 이론가들은 세 가지 입장으로 분할된다. 첫 번째 입장은 기존의 PD 입장, 곧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및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견지하면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텍스트에 더욱 긴밀하게 밀착함으로써 한국 변혁운동 및 “논쟁”에 닥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윤소영, 서관모 및 다른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이전의 목표, 곧 한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복권 및 “레닌과의 대화”를 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이라는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더욱이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스탈린주의적 편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내재적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 더 나아가 그러한 한계는 마르크스 자신의 모순들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그들은 새로운 목표를 채택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 전화가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를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으로 이해하고, 이를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근대성의 한계와 결부시키는 입장이 존재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성격 논쟁 당시에는 윤소영 등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ㆍ발리바르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옹호했지만,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마르크스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입장으로 전회했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한 이가 또 다른 급진 경제학자였던 이병천이었는데, 그는 가명으로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와 민주주의와 독재를 번역함으로써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을 한국사회성격논쟁과 접목하려는 초기 PD의 이론적 시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1991년 그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선언 중 하나였던 「맑스 역사관의 재검토」라는 긴 논문을 통해 자신의 입장 전환을 공표했다.[이병천, 「맑스 역사관의 재검토」, 사회경제평론 제4호, 1991.] 이 논문에서 그는 PD의 초기 입장과 반대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진정한 전통에서 일탈한 교조주의가 아니라 “맑스 이론의 내적 모순과 한계를 확대ㆍ증폭시켜온 역사”[이병천, 같은 글, 110쪽.]의 일환이며, “맑스의 초월론적ㆍ본질주의적 역사관, 합리주의적ㆍ목적론적ㆍ결정론적 역사철학”[이병천, 같은 글, 148쪽.]의 논리적 귀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초월론적이고 목적론적ㆍ결정론적 역사철학은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으로 인한 공산주의로의 필연적인 이행이라는 관념을 중핵으로 삼고 있다. “스탈린주의는 '제2인터내셔널의 사후의 복수'가 아니라 맑스 역사철학의 확대, 심화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리하여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는 단지 스탈린주의의 종말만이 아니라 바로 이 역사철학에 지배된 맑스주의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병천, 같은 글, 141쪽.] 따라서 그는 이제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복권이나 “순수한 혁명적 마르크스로의 복귀”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이 그 불가결한 한 가지 구성 부분을 이루기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비마르크스주의적 진보 이론의 풍부한 유산을 흡수하는 더 일반적인 역사이론을 구성”[이병천, 같은 글, 114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독자적 탈구축의 기획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후 그의 작업에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가 점차 사라졌으며, 지난 30여 년 간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보다는 한국 경제의 개혁을 위한 경험적 연구에 몰두해왔다. 따라서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기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산의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를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위기 또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도, 첫 번째 입장과 달리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철학에 근거하지도 않고 두 번째 입장과 달리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 입장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오히려 푸코와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또 다른 철학적 자원에 의지하여 좀 더 좌익적인 또는 무정부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진경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그와 그의 동료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 대한 집단적인 연구를 통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성의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일종의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하지만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를 구성하려고 시도했다. 오늘날 이진경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작업은 확실히 좌파적이며 탈근대적인 무정부주의의 특징을 견지해오고 있다.
이들 가운데 1990년대 초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첫 번째 집단이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의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상당수의 인문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한국 사회 분석의 과학적 토대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공동의 합의가 존재했다. 특히 PD의 이론가들은 동유럽 사회주의가 해체되던 바로 그 시기에 국내에 밀어닥친 포스트 담론의 급류에서 마르크스주의 및 PD의 근거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이론이라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학술지를 창간하고,[이 저널은 1992년에서 1996년까지 출간되었으며, 제 16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여러 글들을 묶은 편역서들을 출간했다. 이론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해체의 충격을 딛고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보존하고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20여 명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마르크스주의 학술지였다. 이들은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문학, 신문방송학, 지리학 등과 같은 다양한 분과의 학자들이었고 그 이론적 배경도 다양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편집위원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이론을 지지했으며, 이 새로운 학술지를 열광적으로 수용한 젊은 독자들 중 많은 이들도 그들의 작업을 환영했다. 따라서 이 저널에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관한 논문들과 함께 발리바르의 여러 논문도 번역ㆍ소개되었다.
또한 윤소영ㆍ서관모를 중심으로 한 PD의 연구자들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여러 글을 묶은 편역서들을 출판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글들은 주로 알튀세르가 197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발표한 팜플렛, 논문들 및 강연들, 대담 등이었으며, 1980년 알튀세르가 공적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 발리바르가 1980년대 발표한 대부분의 글들이었다.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맑스주의의 역사], [마키아벨리의 고독],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역사적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전화], [알튀세르와 라캉] 같은 10여 권의 저작들이 불과 3~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출간되었다.[에티엔 발리바르 외, 루이 알튀세르, 윤소영 외 옮김, 민맥, 1991; 루이 알튀세르,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옮김, 새길, 1992; 루이 알튀세르,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에티엔 발리바르 외, 맑스주의의 역사, 윤소영 옮김, 민맥, 1992; 에티엔 발리바르 외,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이론사, 1993;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의 전화, 서관모 엮음, 민맥, 1993; 루이 알튀세르 외, 역사적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새길, 1993; 에티엔 발리바르 외,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옮김, 공감, 1995.] 이들 작업의 이론적 기초를 이룬 것은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1977),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1978), 「로사나 로산다와의 대담」(1978) 같은 70년대 후반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이었다. 이 텍스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첫째,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더 나아가 이러한 위기는 우연적이거나 외재적인 요인에 의해 도래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및 마르크스 사상 자체의 내적 모순과 한계, 공백에서 생겨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내재적인 모순 및 그로부터 생겨나는 한계와 공백을 인정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진리성 및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모순이 존재하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또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판정한다면, 그것은 너무 실증주의적인(또는 당시에 많이 쓰던 표현대로 하면 너무 “형식논리학적인”) 관점일 것이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고유성은, 마르크스 사상에 내재적인 모순과 한계 및 공백을 파악하는 것을 올바른(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근본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곧 모순은 사회적 관계 자체의 객관적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후기 텍스트는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에 부친 서문 「종결된 역사, 종결될 수 없는 역사」다. Louis Althusser, “Histoire terminée, histoire interminable”, in Yves Sintomer ed.,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essais, PUF, 1998.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미완의 역사」, 당 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앞의 책. 또한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알튀세르와 라캉, 앞의 책도 참조.] 다소의 강조점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이것이 초기 저작에서부터 후기 저작, 그리고 유고집에 이르기까지 알튀세르 사상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근본적인 특성이다. 반면 알튀세르의 비판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대개의 지지자들까지도 알튀세르 사상의 이러한 핵심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는 PD 연구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알튀세르 수용의 기본적인 특징 중 하나는 보통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로 간주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같은 초기 저작들보다 1970년대 저술, 특히 1970년대 말의 텍스트들이 훨씬 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사실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는 번역의 문제점 때문에 제대로 이해되거나 연구되기 어려웠다. 2017년 출간된 서관모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번역은 이러한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중요한 성과이며, 자본을 읽자는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번역본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 이유는 PD 이론가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알튀세르 사상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한 마르크스주의를 구원하고 그것을 전화하는 것,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융합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와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같은 텍스트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질문들을 제기한 선구적인 저술로 여겨졌다. 그들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에는 국가 이론과 조직 이론의 공백이 존재하며, 착취를 회계적 관점에서 개념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알튀세르의 논평에 관심을 기울였다.[착취에 대한 회계적 개념화의 문제는 특히 다음 저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다. 루이 알튀세르, 「제라르 뒤메닐의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에 대한 서문」, 역사적 맑스주의」. 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번역으로는 배세진 옮김, 「제라르 뒤메닐의 저서 “‘자본’의 경제법칙 개념”의 서문」, 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198?category=718340.] 그들은 알튀세르 텍스트들이 매우 단편적이고 생략적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심지어 그가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인을 목졸라 살해했고 그 결과 공적 무대에서 배제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보기에 알튀세르가 1970년대 후반에 추구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기획은 1980년대 이후 그의 제자인 발리바르에게 성공적으로 계승되었으며, 발리바르가 1980년대에 발표한 다양한 텍스트들은 겉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구성하기 위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작업(물론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리바르의 1970년대 작업과 1980년대 작업 사이에 존재하던 불연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연속성이 알튀세르 자신의 이론적 작업의 곤경 내지 아포리아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심지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알튀세르의 비극은 매우 가슴 아프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이론적 기획이 “그의 가장 중요한 제자”인 발리바르(대부분의 PD 이론가들은 이렇게 생각했다)에게 훌륭하게 계승되고 발전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비극은 개인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PD 이론가들, 특히 윤소영과 서관모를 중심으로 한 이론가들에게는 1970년대 후반에 발표된 알튀세르의 몇몇 텍스트들과 1980년대 발리바르의 다양한 텍스트들(논문, 학회 발표문, 공동 저서에 수록된 글, 대담, 심지어 짧은 서평들까지)을 함께 묶어서 읽고 연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두 사람의 텍스트는 사실은 하나의 일관된 기획의 연속적 표현이며,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내적 모순이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 결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90년대 초의 몇 년 동안 알튀세르와 발리바르(그리고 그와 관련된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묶은 10여 권의 저작들이 출간되었으며, 이것이 알튀세르 효과의 두 번째 계기의 핵심을 이루었다.
1995년 출간된 윤소영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PD 이론가들의 새로운 이론적 작업을 잠정적으로 결산하는 저작이었다.[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알튀세르를 위하여, 문화과학사, 1995.] “알튀세르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저작에서 윤소영은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라는 관점에서 알튀세르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1980년대 이후 발리바르의 작업을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결합에 기반을 둔 “인권의 정치”로 파악하는 것, 세 번째는 알튀세르와 가까운 사이였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쉬잔 드 브뤼노프(Suzanne de Brunhoff)의 신자유주의 비판의 함의를 분석하는 것, 마지막으로 벨기에 출신의 페미니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성적 차이의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필수적인 페미니즘으로, 더욱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페미니즘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문제적인 저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알튀세르 효과의 두 번째 계기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책을 “문제적인” 저작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보다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사상에 관한 그의 재구성이 거의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서 시도된 것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사상에 대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재구성이라고 할 수 없다(적어도 우리가 “재구성”이라는 것을 체계성과 더불어 비판과 선별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오히려 그것은 두 사람의 여러 저술들 및 관련된 다른 사상가들의 저술(예컨대 캉길렘, 라캉, 장-클로드 밀네, 데리다 등)에 대한 조악한 요약 및 심지어 인용 표시 없는 인용문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필수적인 토대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변했을 뿐이다. 더욱이 그는 왜 이리가레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상과 가장 일관성 있게 결합될 수 있는 페미니즘 사상가인지 결코 설명하지 못했다. 한국의 여러 독자들은 윤소영의 이 책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저작이라고 간주했지만, 그것은 그의 재구성 및 분석이 심오한 통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술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른 사상가들, 곧 캉길렘, 라캉, 데리다, 이리가레 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결과, 당시 한국 독자들은 접하기 어려웠던 이 사상가들 및 그 연구자들의 원서의 본문을 자의적으로 (인용 표시 없는 채로) 인용하여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윤소영의 책은 여러 측면에서 짜깁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책의 외관상의 난해함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윤소영의 책은 당시의 정세에서 PD의 이론가들이 직면했던 정치적ㆍ이론적ㆍ심리적 상황을 상징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복권시키고 민중민주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순간에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부숴버렸던 외상적인 사건에 맞닥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처럼 전향을 선언할 수도 없었고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의 길을 따를 수도 없었던 이들은 알튀세르의 후기 저술 및 발리바르의 1970~80년대 작업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건설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은 너무 단편적이었고, 발리바르의 저술은 그들이 소화하기에는 너무 난해할뿐더러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가령 그들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연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왜 이러한 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해 본질적인 이론적 요소가 되는지도 납득하지 못했다.
알튀세르의 실추: 알튀세르 퇴장, 포스트 담론 입장
PD 이론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알튀세르-발리바르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위한 작업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으며, 오히려 새로 등장한 포스트 담론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에서 단절의 시기였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수십 년에 걸친 군사 독재에서 벗어나 한정된 형태로나마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만이 아니라 급진 운동 세력들의 분할 및 위축을 가져왔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한국 사회에 소개되기 시작한 포스트 담론은 한국 학계 및 공론장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단절’을 산출했다. 사실 포스트 담론의 소개 및 확산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누구도 몰랐던 용어들과 관념들, 담론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누구나 다 알고 있는(또는 아는 척해야 하는)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담론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민중민주주의혁명’, ‘민중’ 같은 용어들, 그리고 과잉결정(또는 ‘중층결정’)이나 약한 고리, 이데올로기, 호명 같은 알튀세르의 개념들이 대학 및 사회운동의 공용어로 통용되었지만, 포스트 담론 이후에는 담론, 텍스트, 해체, 시뮬라크르, 판옵티콘, 리좀 같은 용어들이 이를 대체하여 새로운 유행어로 군림했다. 이에 따라 불과 몇 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는 아주 먼 시대에 속한 낡은 유물처럼 간주되었고, 데리다, 푸코, 들뢰즈, 보드리야르와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저작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번역되어 학계 및 문화계의 전면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 및 PD 이론가들이 포스트 담론에 적대감을 드러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포스트 담론은 1980년대의 급진적인 민주화 운동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종의 애도 작업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의심스럽고 이론적으로는 매우 비일관적인 애도 작업이었다.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웠던 이유는,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군사 독재의 정치적 계승자들의 영향력은 막강하게 남아 있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비롯한 불평등과 착취의 문제는 여전히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40여 년 동안 지속된 남북한 간의 적대적인 대립은 냉전의 해체 이후에도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여성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 이주자의 문제 같은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 담론의 주창자들은 이제 무거운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고 가볍고 즐거운 ‘문화’와 ‘예술’이 시대정신이 되었노라고 선언했으며, 불평등, 착취, 분단, 통일, 차별과 배제 같은 문제들을 중요한 의제로 다루기를 거부했다. 이론적으로 비일관적이었던 이유는, 1990년대의 포스트 담론은 진정한 이론적 탐구 작업의 대상으로 간주되기보다는 문화적 유행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누구나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보드리야르를 인용했지만, 그들의 사상을 면밀하게 분석하려는 작업은 극히 드물었으며, 1980년대 민중운동 및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따져보려는 작업은 더 드물었다. 그 결과 19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와 1990년대의 포스트 담론 사이에는 상호 불신과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진태원,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앞의 책 참조.]
이러한 새로운 경향 속에서 알튀세르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일반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알튀세르는 점차 잊혀갔으며, 인문사회과학 담론장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상실해갔다.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알튀세르 사상의 실추는 마르크스주의의 쇠퇴를 상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시기는 알튀세르 효과의 세 번째 계기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이르러 PD 이론가들의 알튀세르 전유와 독립적인 새로운 알튀세르 독해, 특히 이번에는 철학적 독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독서를 대표하는 책이 문성원의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이었다.[문성원,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 백의, 1999.] 이 연구에서 저자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알튀세르의 철학을 검토했다. 철학에 대한 정의의 문제, 마르크스주의 과학과 그 대상,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 알튀세르의 역사관과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발성의 유물론이 그것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의 무기’로 활용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엄밀한 구별에 기초하여 청년 마르크스와 노년 마르크스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철학의 본질을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경계선을 긋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저자는 주장하기를,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같은 텍스트가 보여주듯이,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이를 부인하게 되었다. 곧 알튀세르는 초기 저작에서 잉여가치 개념이야말로 역사유물론을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단절하게 해주고, 그리하여 그것을 역사과학으로 구성한 핵심 개념으로 파악했지만, 1970년대 후반의 여러 텍스트에서는 마르크스 자신이 여전히 착취에 대한 회계적 개념화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자본과 같은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저술에서도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구별이 불명확하다면, 이러한 구별에 기초를 둔 알튀세르의 철학은 모순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및 ‘마르크스의 모순’에 관한 후기 알튀세르의 선언은 사실은 그 자신의 이론적 모순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문성원의 저작은 한국에서 알튀세르 연구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저자의 비판적 재구성이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알튀세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알튀세르가 초기에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실증주의적 구별을 고수한 반면, 후기에는 이러한 구별의 타당성에 회의적이게 되거나 그 구별을 폐기했다는 점에서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초기에도 저자가 가정하는 바와 같은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견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 개념은 지속적인 단절의 작업을 의미하며, 따라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과학 내부에서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작업 속에서 형성된다고 간주한다. 이데올로기는 과학 내부에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의 존재 조건으로서) 존재하며, 이러한 내부의 이데올로기와의 지속적인 투쟁이 역사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고유성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역사과학을 구성했다는 것과 마르크스가 지속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알튀세르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저자 자신은 곧바로 알튀세르를 포기하고 그 대신 데리다와 레비나스에게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2000년대에 알튀세르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독해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논쟁은 1990년대 한국에 처음으로 라캉 정신분석을 소개했던 사람 중 하나였던 홍준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라캉과 알튀세르의 관계를 주제로 한 독일 브레멘대학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하여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시작했다. 그의 테제는, 알튀세르가 라캉의 정신분석을 역사유물론의 영역에 적용하려고 했던 라캉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스승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알튀세르의 무능력으로 인해 이러한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홍준기,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 라깡과 알뛰쎄를 중심으로」, 창작과 비평 22권 2호, 1994.] 그는 특히 라캉의 “상징적 질서의 논리”(홍준기에 따르면 이는 프로이트의 위버데테르미니어룽(Überdeterminierung) 개념을 이론적으로 확장한 것이다)의 불완전한 적용의 한 사례로 알튀세르의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 개념(그는 프로이트의 위버데테르미니어룽과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을 “중층결정”이라고 번역한다)을 비판한다. 곧 과잉결정 개념이 위버데테르미니어룽 및 “상징적 질서의 논리”가 지닌 비환원주의적 측면(심급들의 탈중심적 체계로서의 정신작용)은 잘 포착하고 있는 반면, 알튀세르는 “환원주의적 객관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 ‘구체적인’ 개인들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홍준기, 같은 글, 356쪽.]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다른 라캉 연구자들 역시 또 다른 각도에서 알튀세르의 이론을 비판했다. 가령 영문학자인 양석원과 박찬부는 각각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교하면서 전자의 기초 위에서 후자의 한계를 비평한 바 있다.[양석원, 「이데올로기의 주체와 무의식의 주체: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이론」, 문학과 사회 51호, 2000; 박찬부, 「상상계, 이데올로기, 주체의 문제: 라캉과 알튀세르」, 자크 라캉: 표상과 그 불만, 문학과 지성사, 2006.]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두 가지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재계는 제외하는 알튀세르의 이론은 라캉 이론에 대한 불완전한 “차용”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서는 오직 이데올로기적 주체만 가능할 뿐 “무의식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간에, 200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슬라보예 지젝의 알튀세르 독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는 몇몇 글에서 알튀세르와 라캉 또는 알튀세르와 지젝의 관계에 대해 토론한 바 있다.[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근대철학 3권 1호, 2008(스피노자의 귀환, 서동욱ㆍ진태원 엮음, 민음사, 2017에 재수록) 참조. 또한 최원, 라깡 또는 알튀세르, 난장, 2015도 참조.] 간단히 요지만 말하자면, 첫째, 알튀세르에 대한 이러한 비판들은 그의 메타이론적 기획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알튀세르의 몇몇 유고들이 말해주듯이, 그는 1960년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동시에 라캉의 이론은 메타이론 또는 (알튀세르 자신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일반이론”의 차원에서 보면 “애매성” 내지 “객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간주했다.[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Louis Althusser, “Trois notes sur la théorie des discours”, in Écrits sur la psychanalyse, Paris : Stock/IMEC, 1993 참조.] 알튀세르를 라캉의 제자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알튀세르가 라캉의 정신분석의 이론을 빌려와서 그것을 역사유물론에 적용했다고 보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1964년에 발표한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알튀세르가 라캉을 찬양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1970년에 발표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거울구조라든가 상상계 같은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프로이트와 라캉」과 거의 같은 시기에 쓰인 유고들은 첫 번째 사실이 제한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 또는 적어도 그것의 이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쓰인 유고들에서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을 역사유물론의 “일반이론”의 기획 속에 포섭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획에 입각하여 라캉 이론의 강점과 한계를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시 유고로 발표된 1975년의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이라는 글에서 알튀세르가 1964년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라캉을 찬양했던 것과 달리 라캉의 이론적 한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모종의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 알튀세르와 라캉, 앞의 책.] 그것은 오히려 초기부터 알튀세르가 라캉 이론에 대해 갖고 있던 비판적 관점이 후기 라캉의 작업에 대해 더욱 고조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둘째, 비판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알튀세르의 상상계 개념은 라캉에서 차용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래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1973년 출판된 자기비판의 요소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essais, op. cit.]이나 정신분석과 인문과학 또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같은 유고들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이 자신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이론적 모체라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지만,[Louis 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ianes (deux conférences), LGF, 1996;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이매진, 2008.]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알튀세르의 논평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스피노자 연구자이기도 한 파스칼 질로는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해 훨씬 더 명료하고 균형잡힌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Pascale Gillot, Althusser et la psychanalyse, PUF, 2009; 알튀세르와 정신분석, 정지은 옮김, 그린비, 2019.]
셋째, 알튀세르 비평가 중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알튀세르에게 미친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한 사람이 바로 슬라보예 지젝인데, 그는 다른 비평가들과 달리 오히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받은 나머지 주체를 수동적 행위자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사실 19세기 초 독일 관념론에서 전개된 ‘범신론 논쟁’(Pantheismusstreit) 이래(또는 그 논쟁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피에르 벨(Pierre Bayle)의 비판 이래)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낡은 비판을 새로운 용어법으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지젝의 스피노자 및 알튀세르에 해석에 대한 더 상세한 비판은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앞의 글을 참조.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스피노자 수용의 문제는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 및 프레더릭 바이저,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의 독일철학,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18 중 2장과 3장 참조.]
결론을 대신하여
이제 간략한 몇 마디 논평을 제시하면서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해보겠다. 우선 내가 이 글에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저작이 때로는 교조적이고 상상적인(심지어 망상적인) 방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되기도 했지만,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진리 효과를 산출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진리 효과와 미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한국에서 알튀세르 전유는, 감히 말하자면,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했던 바를 상기시킨다. “만약 스피노자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단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면, 이단적 스피노자주의가 되는 것은 거의 정통 스피노자주의인 것이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p. 182.]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이단적 알튀세리언이 되는 것은 알튀세르 사상 자체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따라서 알튀세르 같은 철학자에 대해 “적용” 운운 하는 것은, 알튀세르가 어떤 유형의 이론가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마키아벨리가 됐든 스피노자가 됐든, 아니면 바슐라르나 캉길렘 또는 프로이트나 라캉이 됐든, 아니면 레닌이나 마오, 심지어 마르크스 자신이 됐든 간에, 알튀세르는 자신이 활용하는 사상가들의 사상을 비틀고 때로는 뒤집어서 활용한다. 이처럼 이단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활용하면서도, 알튀세르는 그 사상들에 관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진리 효과를 산출한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 사상가들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이는,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불가피한 것으로 비쳤을 때 PD의 알튀세리언들이 수동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했던 알튀세르의 저술에 의지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을 추구했으며, 나중에는 한국의 국민적 역사의 시간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할 수 있는 길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려고 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상적인 (어떤 사람들은 “망상적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막대 구부리기’ 덕분에 알튀세르는 상아탑 속에만 현존하는 ‘서방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 또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198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과학 및 사회운동 속에 깊이 지속되어온 정치적ㆍ지적 효과의 부재하는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미망과 오류를 피하지 못했고, 때로는 진리 효과만이 아니라 교조적 효과도 산출했던 전유 방식이었다.
나는 1980년대의 “논쟁”과 뒤이어 전개된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을 통해, 또한 윤소영 교수를 비롯한 PD 지식인들이 수행했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저작의 집단적 번역 작업을 통해 정치적으로ㆍ지적으로 교육받았던 세대에 속한 사람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나 자신을 비롯한 젊은 세대의 알튀세리언들은 새로운 선택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이전의 PD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심지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의 알튀세르-발리바르라는 관념을 고수하면서 포스트 담론의 사상가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아니면 말하자면 이제 포스트 알튀세리언이 되어야 하는지의 선택 문제였다.[포스트 알튀세리언이 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85년 라클라우와 무페가 고안해낸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은, 그 이후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저자들이 이 개념에 부여했던 의미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좀 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런 넓은 의미로 이해하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론적ㆍ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구성 요소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좌파적인 사상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이 비어 있는 기표가 어떤 기의를 지닐 수 있는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이것은 포스트 알튀세르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후자를 택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더 적은 알튀세르를 선택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제부터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옹호해야 하는 진정한 정치와 철학의 유일한 또는 가장 참된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더 많은 알튀세르를 선택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단지 마르크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키아벨리언이자 스피노자주의자이고, 프로이트주의자이자 에피쿠로스주의자이며, 발리바르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바디우와 랑시에르의 스승, 데리다와 푸코의 스승이자 동료이며, 또한 경제학자 쉬잔 드 브뤼노프와 화가 크레모니니의 친구 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네 번째 알튀세르 효과는 포스트 알튀세르 효과였던 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