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 한대만 있었더라면, 낙산사만은… 

[도깨비 뉴스]5일 강원도 양양군에서 일어난 산불로 천년고찰 낙산사가 잿더미가 돼 버렸습니다. 보물 제 479호인 낙산사 동종도 불길에 녹아 내렸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우리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 <도깨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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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4-07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기사가 있길래 하나 퍼왔습니다.
엄청난 놈이군요 ...

딸기 2005-04-07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3)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측면, 사실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측면이 남았는데,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 책에 나오는 단어들을 세심하게 따져가면서 읽는다는 걸 뜻하지. 여기에서 나는 개념이나 범주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단어라고 말했는데, 그건 개념이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단어에 고유한 물질성(따라서 비순수한 역사성) 같은 게 있기 때문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된 예를 하나 들자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représent.”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마지막 단어 “représent” 또는 그것의 동사원형인 “représenter”를 “표상한다”라든가 “표상하다”로 번역해서 사용하지. 그런데, 수업 시간에도 말했듯이, 이 단어를 이렇게 “표상한다”나 “표상하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정의에 사용된 이유, 또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의 정의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지. “représent”을 “표상한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기껏해야 인식론적 측면에 따라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 사람들은 여기에서 엉뚱하게 비약해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인식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과학의 대립물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과학주의자다라는 멋진(?)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곤 하지. 이런 생각은 실제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데,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알라딘 서평 중 하나에서도 이런 생각을 볼 수 있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문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명한 호명 테제를 들 수 있지.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지. “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 이 문장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끝에서 두 번째 단어인 “en”이지. 이 단어는 다른 나라 말, 가령 영어에는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지. 그래서 영어 번역자나 주석가/비판가들이 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지. 하나는 “as”로 번역하는 것이고([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의 영역본에는 바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 다른 하나는 “into”로 번역하는 거야(몇몇 주석가들이 이 번역을 택하지). 전자의 경우라면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지.


그런데 이 두 가지 번역 각각의 경우에 원래의 테제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지게 되지. 전자처럼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하게 되면, 이것은 이미 이데올로기 이전에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는 어떤 담론 또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왜냐하면 이 경우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기능은 이미 구성되어 있는 주체 내지는 주체의 기능을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되므로, 이 때의 주체로서의 주체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영역, 다른 담론 또는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벌써 구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반대로 후자처럼 “into”로 번역하는 경우에는, 바로 이데올로기 자신이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 두 번째 번역이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기능을 해명하는 데 좀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번역이 과연 전적으로 충실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  


어쨌든 “en”의 사례는 얼핏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단어가 개념의 이해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지. 물론 (지젝을 포함한) 대부분의 알튀세르 주석가/비판가들(특히 국내의 ‘논평자들’)은 이런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지. 가령 우리가 이런저런 철학책들, 특히 유럽철학 관련 책들을 읽다보면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나 “자기의식의 철학”이라는 표현이지. 전자는 하이데거에서 유래하고 후자는 헤겔에서 유래하는 표현인데, 지금은 거의 관용적인 용법이 되었지. 그런데 헤겔과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기의식의 철학”이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근대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또 이러한 근대철학의 특성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라고 말하지.


그런데 우리가 데카르트의 저작을 실제로 읽어보면(사실 데카르트의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 읽더라도 (가벼운) 소설책 읽듯이 하거나), 위와 같은 표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그런 표현에 부응할 수 있는 개념 또는 단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콘스키엔치아conscientia”, 곧 우리가 흔히 쓰는 “의식”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고(한 차례를 제외하면), 또 “수브옉툼subjectum”이라는 단어, 곧 우리가 쓰는 “주체/주관”이라는 단어도 별로 사용되고 있지 않고, 그 의미도 근대적인 “주체/주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고대와 중세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지.


그러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 데카르트는 실제로는 “의식”이나 “자기의식”, 또는 “주체”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왜 데카르트가 “자기의식의 철학자”고 “주관성의 형이상학자”지?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 매우 유치하고 사소한 질문 같지만,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근대철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매우 상이한 관점을 낳을 수 있는 질문이지. 실제로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이런 질문을 탐구해서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관점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해오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의식” 개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랄프 커드워스와) 로크가 발명한 개념이고, 근대의 “주체” 개념은 칸트의 창안물이라는 점을 엄밀한 문헌학적 고증과 철학적 논증을 통해 밝혀내지. 아직도 탐구가 진행 중에 있지만, 이건 참 근대철학 전반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결론이지.

 

이제 그만 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군. 어쨌든 나는 독자들이 이런 의문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독자적인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적절한 훈련을 거친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또 독자들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철학책이 좋은 책이고, 또 학생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 선생이 좋은 선생이지.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려면, (1)과 (2) 같은 측면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3)과 같이 텍스트에 나오는 단어들에 주목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철학책, 철학 텍스트는 의미론적으로 잘 정의되고 규정된 개념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이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숱한 단어들로도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어들은 앞의 “en”이라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개념들의 차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철학자의 논변의 숨은 차원(푸코라면 “비사고”라고 하겠고, 정신분석가들이라면 “무의식”이라고 하겠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


더 나아가 우리가 개념에서 단어들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면, 철학 텍스트가 지닌 또다른 탐구의 층위를 발견하게 되지. 곧 개념들이나 논변의 의미론적 질서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는 통사론적이거나 화용론적 차원, 또는 수사학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지. 가령 우리가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책을 읽을 때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논변들을 분석하고, 개념들의 의미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가 별 의미없이 사용하는 듯이 보이는 단어들의 빈도와 용법(가령 1부 속성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구성하다constituo”라는 단어가 󰡔윤리학󰡕 전체에, 또 각각의 부에서 몇 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그 용법들은 어떤 것인지)을 살펴보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비롯한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헉,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좀 어려운 문제에까지 도달했는데, 어쨌든 결론은 다음과 같은 거야.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으려면 논변에 주의해야 하고 맥락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꼼꼼하고 창의적으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단어들의 차원, 기록/글쓰기의 차원에까지 내려가서 책을 읽어야 한다. 너무 어렵다고??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다하려고 하니까 어렵겠지. 또 철학책에 있는 ‘모든 논변, 모든 맥락, 모든 단어들을 일일이 까발려야 하는 건가?’하고 생각하니까 어렵게 느껴지겠지. 그러지 말고 이 책에 나와 있는 하나의 논변이라도 한번 재구성해서 검토해보자, 이 개념, 이 논변의 맥락이라도 한번 살펴볼까? 또 이 단어가 궁금한데, 한번 검토해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라구. 실제로 이런 식으로 책을 한번 읽어본다면, 지금까지 읽었던 것과 새로운 차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나는 이 세 번째 항목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좀 했다구. 중요하긴 중요하지만, 이건 사실 번역본(국역본이든 외국어 번역본이든)을 읽는 독자들로서는 실행하기가 좀 힘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뭐 내가 이런 걸 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만 이런 측면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정도지. 어쨌든 나중에라도 더 공부를 하게 되면, 이런 점들에 유념하면서 책을 읽으면 책을 좀더 꼼꼼히 읽을 수 있을 거야.


매버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걸로 대신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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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4-06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지식수입국 한국, 특히 그 속에서도 타인의 번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저같은 지식소비자에게는 참 우울한 말씀입니다(-.-;).

클리오 2005-04-0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 글을 읽고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보죠.. 저도 이 글을 읽고 처음에는 진짜 철학책(글) 같다.. 라는 생각을 했고. 두번째는 학문을 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언어부터 죽도록 공부해야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되나, 어쩌나 고민을 해봤습니다. 영어는 몇 년을 열심히 해도 오역이 난무하고, 그나마 다른 언어는 접근할 엄두조차 못내니.. 휴휴...

로쟈 2005-04-0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는 알튀세르를 한국어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숭고한 알튀세르!..

aporia 2005-04-0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심정이군요. TT. 열심히 공부하는 수 밖에 없겠네요. 참, 그런 의미에서,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 마지막 각주 '비폭력'에 관한 언급은 무엇이었는지요?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루루 2005-04-0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ㅜ.ㅜ 번역서를 읽으면서 오역이 의심되도 그냥 "외국어를 못하는 내 죄네;" 하고 넘어간 적이 많았는데- 역시 그게 쌓이고 쌓이다보면;; 문제가 되더군요.
이제 서툴더라도 사전 뒤져가면서 원서 읽는 법을 익혀야 겠네요.
암튼 답변은 무지무지 감사드려요^^ 제 미니홈피에 가져다 놔야겠습니다. ㅎㅎ

아. 그리고 제가 이름을 바꿨지요;; 식목일날 하늘이 너무 이뻐서- 가장 이쁜 하늘은 뭘까 하다가요^^ 근데 오늘은 날이 영 흐려서리- 우중충이네요.

balmas 2005-04-07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닐라스카이, 깜찍한 이름이군. ㅋㅋ

아포리아님, 찾아보니까 해당 구절의 원문은 "une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ne

peut être <non-violente> par principe"이더군요. 그러니까 한글 번역본처럼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 없다"로 번역해야죠.

그리고 다음 문장의 첫번째 단어인 "이 때문에" 역시 원문이 "cependant"이니까,

"하지만"으로 고치는 게 옳습니다.


aporia 2005-04-0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정말 결정적 오역이군요! 처음 읽었을 때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좀 충격을 받았었죠(그때는 영역본이라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다음 대목으로 서둘러 넘어가면서 이 문구를 '억압'해 버리긴 했지만 폭력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이 대목이 항상 다시 돌아왔었는데. (무슨 '전술'도 아니고 강조표시한 '원칙'이라고 말하니까요!) 오랜 체증을 푼 것 같아 무척 기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NA 2005-04-07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선배, 아포리아님 안녕하십니까? '인권의 정치는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라는 그 구절이 정반대의 오역이었었군요. 문제가 훨씬 알기 쉽게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 그건 그렇고, 진선배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représent 를 '표상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다음에, 대신 사용할 말을 말씀하지 않으셨더군요. 대표한다? 재현한다? 전자는 좀 곤란한 것 같고, 후자는 표상한다와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군요. 좀 더 부연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전출처 : chika > 저도 프란치스코랍니다.
프란치스꼬 저는
까를로 깔레또 지음, 장익 옮김 / 분도출판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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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흔히들 미션스쿨이라고 하는 그런 종교재단의 학교를 들어갔지요. 중학생이 되었을때요. 담임선생님이 수녀님이었고 종교수업시간이 있어도 성당을 다녀야지..라는 생각을 특별히 해 보진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제가 세례를 받게 되었을까요....?

조금 시간이 흐르고 어쨋건 저는 혼자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다 금방 관둬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생이 되긴 했지만 집에서 용돈으로 받는 것은 차비로 쓰는 '회수권'이 전부였고, 일주일에 한번 성당에 가면 꼭 주일헌금이라는 걸 해야 하는 것이 어린시절의 저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거든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단지 '헌금'때문에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불편한 일이었답니다. 제게는 헌금할 돈이 없었거든요....

그런 중에도 어느새 저는 세례를 받게 되었고, 친구들이 이쁜 이름을 고르며 세례명을 정할 때 저는 또 심심하게 고민하다가 그당시 제일 좋아하는 시로 꼽았던(제게는 그것이 아름다운 시로 느껴졌어요) 프란치스코 당신의 노래, '평화의 기도'를 떠올리며 '프란치스카'라는 세례명을 받았지요. 세례를 받으며 이름을 받는 것은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름을 받은 성인의 삶, 그니까 저로서는 프란치스코 당신의 삶을 본받고 살아가겠다는 결심도 되는거쟎아요. 그렇게 저는 평화를 꿈꾸며, 언니해님과 누나달님을 노래하며, 가난하고 소박한 그런 행복한 삶을 꿈꿨었지요.

프란치스코 저는.. 하며 제게 말은 건네고 있는 당신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순한 삶의 모습으로 분명히 보여주더군요. 가끔은.. 일치와 평화를 이야기한 당신의 제자들이 단지 다수의 요구라는 것으로 당신의 뜻과는 다른 지향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마음 아파하기도 하면서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건 우리의 교회가 아니야!’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프란치스코 당신은 일치와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느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프란치스코 저는... 하며 날마다 제게 조금씩 보여준 당신의 삶은 지금의 나를..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모든 조물을 사랑하며 주님을 찬미하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 나의 것을 더불어 나누고,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숨결을 불어넣으셨으니 여자와 남자는 똑같이 존중되어져야 하며... 이러한 삶이 프란치스코 당신의 삶이고 복음의 삶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를, 아니 나를 돌아보면 전혀 아니네요. 그래서 ‘프란치스코 저는..’하며 제게 말을 건네는 동안 내내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어요. 아, 물론 뿌듯할때가 더 많았어요. 그래, 이것이 복음이야! 라는 생각을 많이 했으니까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숲, 맨돌, 건물, 가난, 겸손, 검박, 아름다움, 이 모두가 프란치스칸 정신을 드러내는 걸작품의 하나를 이루면서 세기를 거쳐 평화와 기도와 묵언과 생명계 존중과 아름다움과 시대의 모순들을 이겨내는 인간 승리의 표본을 보여준다.

“보세요” 이 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보세요, 평화는 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집을 지으면서 호화사치를 찾지말고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세요. 그렇게 하면 이 암자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이 아름다움이 되고 자유로움을 주는 조화가 될 테니. 온갖 시설을 짓는다고 숲을 파괴하지 마세요. 실업과 불편만 늘테니. 오히려 사람들이 시골로 돌아와 수공으로 제대로 잘 된 일을 즐기도록, 침묵의 기쁨을 그리고 땅과 하늘과 접촉하는 기쁨을 되찾아 누리도록 도와주세요. 약탈자들과 평가절하가 축낼 돈을 쌓아두지 말고 형제와의 대화를 위해 또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어두세요.

한 철밖에 가지 않을 물건들을 만들어 내느라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모두 써 없애버리지 마세요. 오히려 여기 이 우물위에 놓인 두레박처럼 몇 세기가 지나도록 물을 길어 올려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그런 두레박들을 만드세요. 여러분은 소비주의를 몹시도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말로만 입을 가득 채우면서 거북한 양심은 잠재운 채 아무런 혁신도 상상도 못하고 여전히 소비주의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요.........

마음만 있다면 해 보세요. 형제여러분, 해 보시면 가능하다는 것을 보실 겁니다.

복음은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비폭력은 폭력보다 건설적입니다.

정결은 부끄럼을 모르는 환락보다 더 맛스럽습니다.

가난은 부유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 프란치스코의 꿈과 포부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핵의 파멸을 면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요. 하느님은 평화를 제안하십니다. 그런데 왜 해보려고도 하지 않으십니까.-p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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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chika > 끝나지 않은 세월[4.3영화]

http://www.sewallmovie.com/    공식 홈페이지

 




영화전문지 씨네21이 네티즌을 상대로 벌인 영화로 보고 싶은 한국현대사 조사에서 제주4·3이 3위에 오르는 등 제주4·3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설문대영상이 제작하고 있는 4·3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에도 도내뿐만 아니라 타지역에서도 후원인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17일 설문대영상(대표 김경률)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모집한 후원인에 발기인을 포함, 250여명이 참여했으며 이중 타지역 후원인은 7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타지역 후원인들은 대부분은 제주와 무관한 사람들로 영화제작 소식을 듣고 참여한 것으로 제주4·3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설문대영상측은 풀이하고 있다.

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 10∼14일 제주대에서 개최한 제4회 참교육실천보고대회에 참석했던 홋카이도교원노조 소속 교사 등 20여명도 이 대열에 동참, 성금 50만원을 설문대영상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씨네21이 ‘당신이 영화로 보고 싶은 한국 현대사의 순간은’ 제목으로 네티즌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제주4·3항쟁은 참여자 550여명중 15%인 79표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광주 5·18(41.5·222명)과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18.9·101명)에 이어 3위를 차지, 다른 지역에서도 4·3항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끝나지 않은 세월」은 전체 촬영의 7%를 남겨 놓고 있으며 후원인과 성금이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전체 제작비에는 부족한 실정이어서 더 많은 도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후원인에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인터넷 홈페이지(www.sewallmovie.com)으로 하면 된다. 문의=019-440-7039.

================================= 오늘 드디어 시사회를 했답니다. 시사회티켓은...울 사무실에서 버려졌지만(ㅠ.ㅠ), 거기 갔다 오신 분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너무 많아 못봤다나요...

볼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저한테도 '끝나지 않은 세월'이라 적힌 티셔츠가 하나 있습니다.

흑~ 그거 입고 댕기다가 오해도 많이 받았지요. '끝나지 않은 세월'이 뭐라? 하면서요...

당당하게 <4.3 영화 제목>이라 말하며 후원품으로 구입한거다!!라 해줬었는데, 그것도 물어보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었지요. 쩝~ ㅠ.ㅠ

하여튼.... 관심가져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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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verick 22의 질문


<선생님, 철학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 읽는 것인지 궁금해요;;

저는 자꾸 읽다가보면 앞에 내용까먹고, 행간도 잘 못 읽고 해서 걱정인데ㅜ.ㅜ>

 


balmas의 답변


앗, 어려운 질문이네 ... (삐질삐질)


그냥 지나가다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 (무슨 TV 광고 문구 같다 ... -_-;;;)


ㅎㅎㅎ 철학책을 이렇게저렇게 읽어라라고 말하는 건 좀 주제넘은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두 마디 조언을 해주자면,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철학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건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지.



1)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기란 일차적으로 그 책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꼼꼼하게 따져 본다는 걸 뜻할 수 있지. 다른 책들과 구분되는 철학책의 고유한 특성은 아무래도 논변 중심의 책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거야. 사실 철학이야 사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 아니고 무언가를 예측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 학문도 아니고, 타당한 논리적 형식을 갖추어서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 정합성 또는 객관성을 보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학문이니까, 이렇게 논변을 중심으로 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서 객관적인 타당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주장은 계급적 이해관계나 권력관계 등을 포함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론조차도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이런 형식의 논변을 포기할 수 없지(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버마스 같은 사람들에 동조할 수밖에는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 그의 주장을 넘어서는, 또는 적어도 그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제시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거든).

  

  따라서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건 그 책에서 제시되는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들, 예증들, 또 이를 위해 다른 이론들, 주장들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들을 꼼꼼하게 따져본다는 걸 뜻하지. 그리고 좋은 철학책, 좋은 철학논문, 좋은 철학적 글일수록 이런 것들이 밀도 있고 참신하게 제시되기 마련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해서 본다면, 알튀세르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주장하는 테제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들이 무엇인지, 또 다른 이론들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이 무엇인지 따져보면서 책이나 글을 읽으면, 그의 주장, 그의 논의를 좀더 꼼꼼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또 지젝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지젝은 좀 독특한 논변 방식을 구사하긴 하지만, 그의 책이나 글에도 역시 나름대로의 주장과 논변, 예증, 반론들이 담겨 있으니까,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책을 읽어보면,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알튀세르에 대해 지젝이 어떤 반론들을 제시하고 있고, 또 그의 반론들에 대해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재반론은 어떤 게 있을까? ㅎㅎㅎ 그런 걸 생각해보라구. ^o^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사실 철학책이 논변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방식은 철학자들마다, 또는 철학책들마다 상당히 다르지. 그리고 좋은 철학자들일수록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신의 논변 방식을 갖고 있지. 예컨대 플라톤의 대화편들이나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인 사유 흐름의 탐구,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관통하는 ‘기하학적’ 논변 방식, 또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같은 책에서 볼 수 있는 담담하고 건조한 분류와 서술 등등. 철학자들의 문체, 스타일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지. 지나친 비유들의 남발이나 멋부리는 수식어들을 나열하는 것, 또는 주관적인 감정의 토로들로 점철된 글을 훌륭한 문체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적어도 철학자의 문체, 스타일은 그런 것과는 다르지.


이렇게 좋은 철학자들일수록 논변의 내용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논변 스타일도 빼어나기 마련인데, 때로는 그 철학자의 논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변의 스타일을 이해하는 게 본질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가 있지. 데카르트의 󰡔성찰󰡕이나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고전은 물론 그렇거니와, 우리의 수업과 관련된 예를 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이 그렇지. 이 논문, 특히 “이데올로기에 대하여”라는 절에 나오는 고유한 논변 방식을 감안하지 못할 경우 알튀세르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그 때문에 지젝을 포함한 많은 주석가들/비판가들이 엉뚱한 오해에 빠지기도 하지.


그래서 때로는 철학자의 주장이나 논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논변 내용만이 아니라 논변 방식, 논변 스타일을 잘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지.  

   

2) 그 다음 꼼꼼하게 읽기의 두 번째 의미는, 맥락 속에서 읽기를 의미하지. 이건 다른 학문에 비해 철학책 읽기에 더 많이 요구되는 사항이기도 해. 왜냐하면 다른 학문들과 구분되는 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반복, 되풀이에 있거든. 다시 말해 철학에서 이전의 철학들과 절대적으로 단절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지. 철학사에서 볼 때 항상 시대마다 새로운 이론, 새로운 문제설정, 또는 (푸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끊임없이 출현하지만, 이러한 새로움은 항상 철학사 전통의 되풀이를 전제하는 새로움이지.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다면, 철학에서 무언가 새로운 주장을 제시한다는 것은, 철학사의 전통과 새로운 관계맺음의 방식들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이 때문에 철학, 철학적 사고는 다른 학문들에 비해 자신의 역사, 곧 철학의 경우는 철학사에 대한 연구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지.


가령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는 철학일수록[이런 새로움에 대한 주장은 어떻게 보면 근대철학, 특히 헤겔 이후의 철학에 고유한 특징이지. 헤겔이 자신의 철학에 이르러 철학이 완결되었다고 주장한 만큼, 정말 새로운(그만큼 종말론적인) 주장을 제시한 만큼, 그의 후배 철학자들은 더욱 더 새로운(따라서 더욱 더 종말론적인) 주장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런 새로움에 대한 주장에 담겨 있는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한번 연구해 볼 만한 주제지] 과거의 철학에 대해 격렬하고 단호하게 단절의 선을 긋기 마련이지. 또는 좀더 교묘한 경우라면 과거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간에 새로운 철학은 과거의 철학과 관련을 맺게 되고, 자신의 새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철학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한계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되지. 더욱이 철학이 언어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의 의미에서) 기록écriture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철학이 주장하는 새로움은 실은 항상 이미 되풀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 


그래서 철학책을 꼼꼼히 읽기 위해서는 이 철학자의, 이 주장이 어떤 맥락 속에서 제시된 것인지, 어떤 흐름과 결부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이건 다시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지.


첫째, 맥락 속에서 읽는다는 건 그 철학자의 저술의 맥락을 검토한다는 걸 뜻하지. 대개의 철학자들이 여러 편의 저작들과 논문들, 또는 글들을 남기고 있고, 또 대개의 경우 처음에 저술된 글이나 책과 나중에 저술된 것들 사이에는 연속성만큼이나 불연속성도 존재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청년 마르크스와 장년 마르크스의 단절과 연속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소위 사상의 전회(Kehre)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많이 논의되곤 하지. 알튀세르나 라캉 또는 지젝의 경우도 그렇고.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나 논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런 전후 맥락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지. 그의 주장이나 논변이 공백 상태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이론적 소여(所與)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차이, 다름에 대한 이해는 그 주장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많은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야. 따라서 지금 읽고 있는 이 철학자의 이 책의 논의가 어떻게 해서 제시된 것인지, 이 논의의 배경이나 전제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단순히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논의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둘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읽는 어떤 철학자의 책은 좀더 큰 맥락 속에 들어 있게 마련이지. 또 철학의 논의가 철학사의 반복과 분리될 수 없다면, 이 철학자의 책은 그것이 몸담고 있는 좀더 광범한 철학사의 맥락을 어떤 식으로든 되풀이하게 마련이지. 따라서 우리가 그 맥락을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구분하든,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구분하든, 현상학과 분석철학으로 구분하든,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로 구분하든 간에, 어떤 철학자의 책을 좀더 정확하게, 꼼꼼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철학자의 책을 철학사의 맥락에 포함시켜서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


그리고 사실 대개의 철학적 논변에는 다른 철학자, 특히 철학사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논의가 들어 있기 마련이야. 가령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논의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물론이거니와 프로이트나 라캉, 파스칼, 스피노자 같은 사람의 논의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준거하고 있지. 마찬가지로 지젝 역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기 위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라캉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카프카,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들에 준거하고 있지. 그래서 알튀세르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가 준거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논의되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특징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고, 이를 쇄신하기 위해 알튀세르가 활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의 흐름, 더 나아가 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당대의 프랑스 철학과 정치의 맥락(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립 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겠지.


또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파스칼 철학의 특징 같은 것도 이해해둔다면 도움이 되겠지. 사실 이 점은 알튀세르와 지젝의 이론적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쟁점 중 하나지. 두 사람 모두 파스칼의 논의에 준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파스칼을 이해하고, 또 활용하는 방식에는 재미있는 차이점이 있거든. ^_^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버렸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어떤 철학자의 책이나 글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그 책이나 글에서 전개되는 논변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항상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해는 그 철학책이나 글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이 점을 이해하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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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4-02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추천 감사. :-)
그런데 오타가 좀 있어서 수정했어요.^^;;;

루루 2005-04-0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잘 답해주시다니 감사요~ 저도 추천클릭^^
2편도 기대할께요 ㅎㅎ
이제 열심히 읽는 일을 해야하는데;; 이놈의 게으름이ㅜ.ㅜ

nemuko 2005-04-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선배한테 끌려가서 철학 강의를 한동안 들었거든요. 근데 공부하면 점점 더 모르는 부분이 많아지길래 결국 헉겁하면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군요. 저의 문제점은 우선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것과,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거군요... 추천^^ 좀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