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교섭, 대대에서" vs "강행은 위기 심화"

민주노총 주최 '사회적 교섭' 토론회 개최
"사회적 교섭 전술일 뿐, 결과 예단 말라" vs "로드맵 하나라도 받으면 치명적"

최하은 기자

 

 

민주노총이 11일 오후 2시20분 국회의원회관 1층 소회의실에서 ‘사회적 교섭,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발제와 토론에는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임성규 전진 의장(공공연맹 전 사무처장), 조돈희 전노투 상황실장(전해투 전 위원장), 박용석 공공연맹 부위원장이 나섰다.


사회를 맡은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사회적 교섭과 관련해 작년부터 각종 토론회와 중앙위원회 회의 자리 등에서는 투쟁과 교섭을 결합하고 교섭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지 쟁점과 의견이 존재했다”며 “오늘 토론회에서는 쟁점과 이견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합리적 의견 조율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토론회를 시작했다.

토론과정에서 사회적 교섭을 주장하는 강승규 수석부위원장과 박용석 공공연맹 부위원장은 “사회적 교섭을 통해 노동의 쟁점을 만들어 사회적으로 의제화하고 이를 통해 투쟁의 동력을 상승시킬 것”이라며 사회적 교섭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사회적 교섭은 하나의 전술로 비정규법안이 강행되면 폐기될 것이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적 교섭에서 도출되는 안은 중앙위나 대대를 통과한 후에 서명하는 민주적 구조 통해 관철될 것이고 사회적 교섭 구조 역시 기존 노사정위의 한계를 넘는 상이 될 것”이라며 “결국 사회적 교섭에 대한 논의를 대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 내리고 가야한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 사회적 교섭을 반대하는 임성규 의장과 조돈희 실장은 “교섭은 투쟁의 동력을 바탕으로 한 승리의 결과물인 것인데, 현장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회적 교섭을 통해 투쟁의 동력을 올린다는 것은 옳은 수순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98년 정리해고 합의의 기억을 환기시키며 “현 시점에서 사회적 교섭은 다시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로드맵을 수용하는 치명적 오류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양자 모두는 따라서 “오는 15일 대대에서 사회적 교섭안건을 철회하고 4월 비정규개악안 저지 투쟁을 힘있게 결의하는 자리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임성규 의장은 “총연맹의 사회적 교섭의 상과 의제가 구체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집행부가 말하는 내년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하기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의제를 구체적 요구로 만들고 동력을 준비해 나가자”며 “그 때 정말 동력에 자신이 있다면 사회적 교섭은 그 때 얘기하자”고 주문했다.

조돈희 실장은 “현재 집행부의 상을 면밀히 보면, ‘전술’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동 운동의 ‘전략’을 바꾸는 그림이라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고 말하고 “설사 아니라 해도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동 포섭 전략 하에 사회적 교섭은 결국 그 포섭의 길에 봉착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만약 사회적 교섭을 상정한 대대가 강행된다면 결국 다시 저지의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4시간의 논의는 결국 서로의 차이와 기존의 논리를 재확인하며 마무리 됐다.

강승규 “사회적 교섭 통해 쟁점화, 투쟁동력 끌어올려야”

[%=사진2%]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민주노총의 책임있는 지도자로서 지난 1월 대의워대회부터 빚어진 모든 부분에 대해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오늘 토론이 차이를 극복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했다.

강위원장은 사회적 교섭의 기조에 대해 “교섭전략에서 기본방향은 중층적, 총제적 교섭이다. 교섭원칙은 대중투쟁과 결합이다. 조직 내 민주주의 실현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요 의제는 중앙위, 대의원대회 결정을 통해 제출하고, 합의가능한 안이 도출되더라도 중앙위원회 또는 대의원대회를 통과한 후 서명한다는 방침”이며 “사회적 교섭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교섭의 장으로 다양한 중층적 교섭의 하나로 복무해야 하지만, 4월 국회에서 비정규개악안을 강행처리하면 사회적 교섭방침은 폐기한다”고 설명했다.

강 위원장은 이어 사회적 교섭의 상에 대해 “사회적 교섭 3대 의제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사회보장 확대,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 노동3권 강화 및 노사관계 민주적 재편 관련 제도개선”이라고 밝혔다. 강위원장은 “사회적 교섭기구는 기구의 독립성 강화와 이행담보, 업종, 지역협의회가 강화, 노사정 대등의 교섭기구 구성의 상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위원장은 “당면한 투쟁의 과제들에 대해 쟁점화 수단으로 사회적 교섭을 이용하고,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자리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투쟁의 동력을 끌어올릴 것”이라며 “사회적 교섭 참가는 사안에 따른 참여, 불참, 합의거부 등 다양한 전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교섭에 목을 매겠다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위원장은 “현 집행부는 기존의 노사정위원회는 당연히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기존의 노사정위에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고객이 바로 민주노총 조합원이다. 민주노총의 노정교섭을 책임져온 당사자로서 자존심 상할 때도 많았다. 이런 대정부 교섭들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민주노총은 새로운 교섭구조를 주동적으로 견인해서 만들겠다는 것이고, 안되면, 빠지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위원장은 끝으로 “현 집행부는 정말 현장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갖고 있다. 작은 공장에서 큰 공장까지 아울렀고, 투쟁을 선도적으로 끌어왔던 경험도 갖고 있다. 현장에서 문제제기하는 것을 겸손하게 받겠다. 15일 대의원대회는 초미의 관심사다. 2월1일처럼 끝나면 운동의 끝이라고 우려들을 하고 있다.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 겸손히 받겠다”는 당부로 발제를 마쳤다.

임성규, “사회적 교섭 통해 투쟁 동력 만들겠다는 것은 전도본말”

이어 ‘평등사회를 향해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전진) 상임의장인 임성규 전 공공연맹 사무처장의 반대토론이 시작됐다.


임의장은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사회적 교섭으로 죽어있는 투쟁력을 살려낼 수 있다’, ‘대통령까지 합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임의장은 우선 “힘이 있다면 사회적 교섭보다 더 비난받는 교섭도 할 수 있지만, 현재는 그러한 힘이 부재한 상황”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의 노동운동은 투쟁의 동력을 올리는 작업은 사전에 해왔다. 요구조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설문조사로 조합원의 의견을 묻고 결과를 모아서 안을 만들어 공청회 등을 하고 최종적으로 안을 확정한다. 그리고 나서 요구안을 가지고 또 교육과 선전을 한다. 그리고 교섭에 들어갔을 때 사용자가 안받아 들인다는 점을 명확히 밝혀서 투쟁을 호소하는 것”l라고 반박했다.

임의장은 “준비가 된 동력으로 교섭을 해도 힘든 상황에서 교섭을 통해 동력을 만든다거나, 교섭에서 합의안이 나오고 대통령 약속이 나온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다. 현 지도부는 내년 5월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을 계획하겠다고 했다. 딱 1년 남았다.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준비를 하면 된다. 정말로 동력이 자신 있으면 그때 가서 사회적 교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의장은 “2003년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노사정 토론이 있었다. 당시 연맹 사무처장으로 참가해 노사정위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 전제조건을 달았다. 이전 노사정위에서 합의했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이행하라고 했다. 그리고 노사정를 완전 독립기구로 가져가며 회의구조를 노동과 정부·자본 합쳐 1대 1로 가져가 ‘교섭’답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회적 교섭의 구체적인 형식에 대해 언급이 없다. 노, 사, 정, 공익위원과 3대1이다. 합의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임의장은 “이 구조에서 할 수 있는 건 요구조건을 안 들어주면 파업을 확실하게 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이 경우라야 10대 1로도 우리 주장을 관철 시킬 수 있다”며 “이 동력을 만드는 것이 우선적이다. 그런데 현장이 어렵다고 교섭을 통해 쟁점 만들고 ‘노사정 교섭해서 안 들어주니까 열받아라’ 하면 조합원이 열 받을 것 같나. 기껏 언론에 한 두 줄, TV에서 3분 짜리 뉴스에 ‘민주노총이 이런 요구했는데 정부가 안 들어주더라’ 다 나올 거 같나. 조합원들에게 이거 전달 안 된다. 먼저 교섭기구에 들어가는 것은 옳은 수순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임의장은 “현장 동력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무엇을 요구하고 싸워야 할 것인지 분명해 지면 조합원들은 움직인다. 3대 의제를 가지고 교섭할 게 아니고 구체적인 요구를 가지고 해야 한다. 보건의료노조가 작년에 무상의료가 아닌 의료공공성을 요구했다. 그게 현실적이다. 사회적 안전장치 안된 나라에서 하루 아침에 무상의료,무상교육이 되나. 민주노총의 의제는 무책임하다. 이걸 위해 언제까지 무얼 할지 정리하고 조합원이 구호로 외칠 수 있는 요구를 정해 정부가 알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의장은 또한 “사회적 공공성을 말하는데 정확한 상이 정리되지 못한 담론 수준의 얘기를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가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보장해주면 전부가 비정규직돼도 문제없다. 비정규직 차별철폐하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사회공공성, 무상의료, 무상교육, 비정규직 다 연관돼 있는 것인데 이를 독자적 의제로 삼는 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임의장은 “사회를 보는 김태현 정책실장도 김영삼 정권 때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들어갔다. 당시 민주노총 요구가 95% 관철됐다. 그런데 자본과 정권이 원하는 5%의 내용은 우리가 엄청나게 상처를 받을 내용이었다. 자본과 정권이 요구는 몇가지 아니다. 그러나 하노사관계선진화 로드맵 등 하나라도 받으면 한가지라도 뺏기면 그동안 피흘리며 쌓아 온 것이 무너지는 구조다. 당연히 우리에게 많은 것 주며 요구하지 않겠나”고 반문했다.

임의장은 “3.15 대대 상황을 예상해 보면 무산될 수도 있고 우여곡절 끝에 표결로 끝날 수 있다. 두 가지다 4월 비정규법안 투쟁은 물건너 가게 되는 거다. 하지만 4월 비정규법안 처리는 강행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안건을 폐기하고 대의원대회를 취소해야 한다. 민주노총 집행부 자존심이 아닌 민주노총과 이 땅 천 오백만 노동자를 위해 오늘 자존심을 버리고 과감히 가든지 이것이 곤란하다면 안건 폐기를 1번 안건으로 내세우고 2번 안건으로 4월 투쟁을 내세워 힘차게 결의하면 된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도 비정규법안 통과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승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그 한 번의 승리가 민주노총과 이 땅 전체 노동자의 미래를 밝게 할 것‘이라는 말로 토론을 마쳤다.

조돈희, “사회적 교섭은 신자유주의 자본 전략에 포섭되는 길”

조돈희 전노투 상황실장은 “98년도 전해투 의장이고 현대중공업 해고자인 개인의 자격으로 토론회에 참여했다”고 전제하고 “이 토론회가 집행부의 안을 관철하기 위해 보완하는 자리면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겠지만, 민주노총이 단결하고 당면한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떤 의견도 수렴할 수 있다고 해서 토론자로 나왔다”며 “임성규 동지가 마지막 제안이 민주노총을 살리는 길이라고 본다. 토론회에서 이것에 합의하고 보기좋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발언을 시작했다.

조실장은 “집행부는 사회적 교섭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아직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고 이 문제는 민주노총 분열의 요인이므로 신중해야 한다. 불행스럽게도 2월 1일 대대 상황을 총연맹은 (단상 점거자를 중심으로 말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치적 견해 다른 정파의 반대를 위한 세력들의 안티테제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 그건 우리의 진정성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조실장은 “작년 5월 이후 사회적 교섭 관련 토론이 충분히 됐다고 집행부는 말하지만 아직까지 조합원의 이해는 부족하다고 본다. 당면한 투쟁 때문에 혹은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조직 못해서이든 조합원들 사이에 찬반 의견이 갈라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현대중공업에서 경험해서 알지만 주요 사업장은 여지없이 현장통제와 그에 대한 싸움으로 급급한 상황이다. 현장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현장투쟁동력이 교섭으로 끌어올릴 수있나. 쟁점환기는 될 수 있지만 동력을 올리는 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비판했다.

조실장은 “사회적 교섭은 신자유주의의 관철을 위해 노사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무현 정권의 전략에 조응하고 이 안에 편입하는 것으로 노동운동의 전략을 정하는 중요한 문제”라며 “사회자도 언급했듯이 민주노총에서 하나의 쟁점으로 이처럼 장기간 심각하게 토론을 붙인 경험이나 대대에서 어떤 안건이 이렇게 첨예하게 격돌한 예가 없었다. 그만큼 중차대 하기에 집행부도 그간에 토론을 조직한 거고 그래서 반대가 조직됐던 것이고 대대에서도 일련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실장은 “발제문의 기조를 볼 때 사회적 교섭은 전략의 방향으로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쪽을 설득하기 위해 전략이 아니라 전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력화하는 일환으로 우리의 입지를 강화하고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안에서 싸우겠다, 노동의 쟁점을 만들어 동력을 올리겠다’는 말은 그 진정성을 이해한다해도 동의하기 어렵다”며 사회적 교섭의 폐기를 주장했다.

조실장은 “역사적 경험이 없었으면 모르겠는데, 98년 노개위 투쟁이 있다. 그 때 전해투 의장이으로 '노개위 해체'라는 투쟁을 전개했다. 노개위가 노사정 담합으로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반대했지만. 결국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들어가서 정리해고를 합의했고 모두 이에 대해 비판했던 기억이 남아있지 않나”며 “노사정위의 연장선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를 기억하는 동지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과정 아닌가. 집행부안을 면밀히 검토해 보니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전환하는 전략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실장은 “노무현 정권이 네델란드 모델을 이야기했는데, 네덜란드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오면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명목으로 온갖 개악안을 제출했고, 20년간 합의의 배신으로 돌리지 않았나. 70년대 사회적 합의주의를 추진했고, 사민주의 정권 협조조건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통해 사회적으론 균등화됐을지 모르지만 노동운동은 무력화됐다. 그리고 20년 지나 배신당하니까 투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실패 사례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적 교섭을 도입할 수 있겠나”고 반문했다.

조실장은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을 보면 민주노총 지도부의 순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말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하나를 합의하는 순간, 열개를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섭은 우리의 요구만으로 안된다. 정권 역시 무엇인가 얻어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사회적 합의주의에 들어가는 것이고, 이에 대한 성공사례가 없다”고 강조했다

조실장은 “교섭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나 교섭을 우선시하고 중시하는 것은 민주노조 운동 조직의 조합원과 조직원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왔다. 사회적 교섭을 투쟁과 병행한다고 하지만, 투쟁을 중심에 놓고 투쟁을 조직하기 보다 교섭을 통해 설사 합의가 된다해도 그건 소위 자판기 노조로 가는 길‘이라며 ”만약 민주노총이 비정규 노동자 문제를 합의했을 때, 실질적으로 투쟁동력이 돼야 할 비정규 동지들이 자기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제 민중의 문제는 교섭으로 합의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기조를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치세력화 사업도 하고 민중연대 전선도 형성하는 것이다. 교섭은 투쟁의 성과물로서의 교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실장은 “발제한 내용 중에 당장 비정규법안 강행처리하면 무기한 총파업 들어간다는 내용이 있다. 처리한 다음에 상황을 되돌린 경험은 없다. 96년 노동법날치기 때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투쟁을 할 수 있다고 감히 말씀 못 드리겠다. 그러나 그 때도 사후약방문 처방에 불과했다. 따라서 법안저지 수단으로라도 사회적 교섭은 아니다. 이 시기에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4월 총파업을 기본으로 중심으로 놓고 시원하게 사회적 교섭을 폐기하고 다른 안건으로 의제를 상정해서 힘있는 대의원대회를 치러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다”며 토론을 마쳤다.

박용석, "대의원 표로 결정하는 게 최선"

박용석 공공연맹 부위원장은 “이런 토론이 왜 진작에 준비 안됐나 하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다.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전체 운동전망과 민주노총의 위기해법과 관련 근본적 시각이 충돌하고 있다. 좀 더 빨리 이런 토론을 했어야 했다”는 말로 토론을 시작했다.

박 부위원장은 “임성규 의장의 마지막 제안은 오히려 더위기를 가중시킬 거라고 본다. 내부 논쟁을 해소하려면 대의원대회를 열어서 대의원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맞다. 해법이 충돌하는 속에서 가장 정확한 방법은 총연맹 최고결정기구인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며 “만약 집행부안이 근소한 차로 가결된다면 사회적 교섭안을 폐기하고 반대하는 동지들의 의견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상당한 표차로 찬성입장이 나온다면 반대하는 동지들이 70만 조합원의 뜻으로 이해하고 집행부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자세로 대회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 부위원장은 “지난 중앙위 때 정부 비정규법안이 강행 처리되면 사회적 교섭을 폐기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법안이 4월을 넘긴다해도 사회적 교섭이 사회적 합의주의에 빠지고 민주노총을 위기로 몰아놓는 결과가 된다면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조치를 해야 한다”며 “위기의 해법은 정확하게 조직내 평가로부터 도출해야 하는데, 지금 사회적 교섭에 반대하는 논리들을 정리해 보면 ‘결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박부위원장은 “전노투를 비롯한 반대하는 동지들이 제기하는 주장은 자본이 민주노총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이른바 자본의 체제에 포섭시키는 전략에 조응하는 전술, 투항하는 전술, 더 나아가서 사회적 합의주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 역시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 운영틀 속에 있고, 우리 운동도 그 틀 속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여러 가지 운영기제는 기본적으로 자본이 자기의 계급적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포섭기구들이다. 포섭기구인줄 알면서 참여해야 한다”며 “처음부터 노동계의 역량을 인정해서 판을 깔아준 기구든 포섭의 판이든 결과가 포섭일지, 활용일지에 대해서 예단하거나 선험적으로 정리할 문제는 아니다. 정권과 자본이 포섭하려 해도 제대로 원칙적으로 참여해서 계급적으로 돌파하려고 한다면 일면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역량이 모아진다면 포섭을 극복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박부위원장은 “사회적 교섭방침이 논쟁적 내용을 안고 있다 보니까 민주노총의 교섭전략이 사회적 교섭의 전부인 양 이야기되고 있는데, 다양한 교섭 중 하나의 전술이다. 상층의 전략은 따로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교섭을 ‘전략’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부위원장은 “임성규 의장이 우리가 힘이 있으면 어떠한 교섭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힘 있으면 교섭할 필요가 없다. 완벽히 압도할 힘이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얻어낼 수 있다. 단위노조에서 산별노조에서 왜 교섭하는가. 그 교섭 통해 우리의 요구를 집약하고 투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주변세력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교섭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교섭도 그 취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했다.

박부위원장은 이어서 “교섭은 기본적으로 교환법칙으로 한 가지를 줘야 한다, 또 노무현 정권의 정책기조에서 본다면 얻을게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결정적 사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 운동하는 주체들이 나름대로 자기의 고유한 판단과 경험 속에서 결과를 예단 가능하지만 평가는 70만 조합원의 의지와 권한을 위임받은 대의원이 할 수 있다”며 “나 역시 지금도 노사정위에 반대 입장을 갖고 있고, 노사정위는 자본의 포섭전략이며, 되돌아보기도 싫을 만큼 쓰라린 역사다. 사회적 교섭의 대원칙은 노사정위 해체가 맞다고 본다. 지도부의 견해와 일치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차원에서 총연맹이 추진하는 것에 지지한다”고 밝혔다.

박부위원장은 “공공연맹 토론회 때 중간 정도 입장의 중집위원이 4월 투쟁 마치고 사회적 교섭을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더라. 정확하게 말해서 사회적 교섭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다. 어차피 4월 정국은 여야가 노동악법을 처리하기로 합의한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조직결정으로서 사회적 교섭방침을 결정하기로 했다. 다양한 반대 견해가 있고, 그것이 소수인지, 다수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의원대회에서 표로 심판하는 것이 맞다. 그 결정에 대해 지도부가 과감히 책임을 지고 가는 것이 현재 민주노총이 택할 수 있는 현명하고 유력한 선택”이라는 말로 토론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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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세계의 어린이들

세계의 어린이들은 지금.

▲ 멕시코시티, 마닐라, 라고스의 쓰레기 하치장에서 유리, 캔, 종이를 찾아 모으고 음식 찌꺼기를 놓고 까마귀와 싸움을 벌인다
▲ 진주를 찾아 자바의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 콩고의 광산에서는 다이아몬드를 찾아 나선다.
▲ 페루의 광산 갱도에서 어린이들은 없어서는 안 될 두더지가 된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폐가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묘지에 묻힌다.
▲ 콜림비아와 탄자니아에서는 커피를 수확하다 살충제에 중독된다.
▲ 과테말라의 목화밭과 온두라스의 바나나 농장에서도 살충제에 중독된다.
▲ 말레이시아에서는 새벽부터 별이 뜨는 밤까지 고무나무 수액을 채취한다.
▲ 미얀마에서는 철로를 놓는다.
▲ 인도 북부에서는 유리 만드는 가마에서, 남부에서는 벽돌 굽는 가마에서 열에 녹을 지경이다.
▲ 방글라데시에서는 하루 종일 끝없이 일해도 임금을 한푼도 못 받거나 거의 못 받으며 300가지가 넘는 일에 종사한다.
▲ 아랍 왕족을 위해서는 낙타 경주를 하고,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라플라타 강 유역의 농장에서는 말을 타고 소와 양을 모는 목동이 된다.
▲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 스리랑카의 콜롬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브라질의 레시페에서는 주인의 식탁을 차리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으며 산다
▲ 콜림비아의 보고타 시장에서는 과일을 팔고, 상파울루의 버스 안에서는 껌을 판다.
▲ 페루의 리마, 에콰도르의 키토, 엘살바도르의 산살바도르 길모퉁이에서는 자동차 앞 유리창을 청소한다.
▲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와 멕시코의 과나후아토의 거리에서는 신발을 닦는다.
▲ 태국에서는 옷 바느질을 하고, 베트남에서는 축구화에 바늘땀을 넣는다.
▲ 파키스탄에서는 축구공을 꿰매고, 온두라스와 아이티에서는 야구공을 꿰맨다.
▲ 스리랑카의 농장에서는 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차나 담배를 따고, 이집트에서는 프랑스 향수 제조소로 보낼 재스민을 딴다.
이란, 네팔, 인도의 어린이들은 동이 트기 전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카펫을 짠다. 부모가 돈을 받고 빌려준 아이들이다. 누군가 구출하러 가면 아이들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우리의 새 주인이신가요?"
▲ 부모가 100달러에 팔아넘긴 수단의 어린이들은 섹스 산업에서 일하거나 안 하는 일 없이 다 한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중에서.

몇해전 외신에서 읽은 이야기. 아프리카에 베냉이라는 나라가 있다. 빈국 중에서도 최빈국이다. 노예제도는 링컨과 함께 끝났다고?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베냉의 어린이들(가난한 부모가 팔아넘긴 아이들) 200여명을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노예선'이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국제해양경찰이 정보를 입수해 배를 기습했다. 아이들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만이 알고 있다.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였나, 제목은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그 책에, 동남아의 낚시꾼들 얘기가 나온다. 지구의 어느 지역에서는, 아이를 줄에 묶어 배에서 늘어뜨려 바다에 집어넣는단다. 아이들이 미끼가 되고 갈고리가 되어 해산물을 채취한다. 아이들 몸이 물 위로 떠오를까봐 돌멩이를 같이 묶어서 집어넣는단다.

재작년 영국에선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어린 흑인소녀의 시신이 토막난채 템즈강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경찰은 종교집단이 어린 소녀(베냉 같은 곳에서 노예로 팔려왔을 것이 뻔한)를 종교의식의 제물로 삼은 뒤 시체를 버린 것으로 추정했다.

진주에도 양식진주가 있고, 천연진주가 있다. 잘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후자가 더 비쌀 것이다. 진주 목걸이 한 알 한 알이 아이들의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주 좋아하지 말자. 다이아몬드도 좋아하지 말자. 그넘의 다이아몬드 때문에 아프리카에선 '소년병'들이 살육전의 도구가 되고 목적이 되어 죽어간다. 
나이키 축구화도 좋아하지 말자. 세계적으로 '아동노동 착취' 악명 높은 기업이 나이키다. 미국에선 나이키의 아동착취 문제로 소송까지 붙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제3세계 진출해서 세계경영 하고 있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자. 어느 나라에서 어린아이들 부려먹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정력 딸리기로 소문난 울나라 남자들, 동남아 '영계 매춘' 아직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에이즈나 팍팍 걸려버렸음 좋겠다.

나 역시 무죄가 아니다. 우리 딸 한 달 유치원비 35만원. 비싸다. 종일반이라서 더 비싸다. 아직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구몬 수학에 영어 피아노 발레 가르치면 한달에 수억 들어갈 것이다. 내 아이만 잘 키우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거꾸로 된 세상', 남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다. 남의 나라 얘기 할 것 없이 돌아보면 내 주위에도 못 입고 못 먹는 아이들이 허다할 것이다. 내 아이 잘 키워서 거꾸로 된 세상에 떨어뜨려놓으면 뭐하나, 세상부터 바로 되어야지.
못나고 못된 엄마는 오늘도 생각한다. 아이야, 나는 저 책을 읽으면서 너를 생각했단다. 지금쯤 빨간 가방 메고 유치원에 갔을 너를, 그리고 너.만. 생각해왔던 나를. 엄마가 너와 함께 '네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한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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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5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chaire > 유령은 아직 살아 있다.




▲ 527일 동안 서울대학본부 정문 앞에 버티고 섰던 김민수 교수의 천막농성장이 9일 오후 3시께 지게차에 의해 서울대학본부 뒤편으로 옮겨졌다.  

▲ 김민수 교수는 천막을 따라가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손잡은 천막 모퉁이 위로 '재임용탈락 책임자처벌'이란 글귀가 선명하다.  

ⓒ2005 오마이뉴스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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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스쳐 가는 이들의 시선에서

내가 사라진지 오년

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없다

그래도 나는 그들을 본다


(중략)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내가 산자인지 유령인지

내 살과 내 몸뚱이를 만져보라고

말을 건넨다


나를 좀 만져봐요

(김민수 교수가 2003. 9. 29일 천막농성에 들어가며 쓴 시 '유령의 노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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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철거하던 날, 울어버린 김민수 교수

[오마이뉴스 2005-03-09 20:49]  

[오마이뉴스 조호진 기자]


김민수(45) 서울대미대 교수가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527일 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농성 천막이 철거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다. 지난 6년 6개월 동안 교수직에서 쫓겨나 '서울대의 유령'으로 떠돌면서 겪었던 수모와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든 것이다.

9일 오후 3시께 천막을 옮길 지게차가 나타나자 천막 안으로 들어간 김 교수는 5분 여 동안 말없이 천막 안을 둘러보다가 눈물을 훔쳤다. 지게차가 대학본부 뒤편으로 천막을 옮기자 천막 귀퉁이를 잡고 따라갔다. 그가 손잡은 천막 귀퉁이에는 '재임용탈락 책임자처벌'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씌어 있었다.

'김민수 교수 원직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9일 오후 1시 서울대학본부 앞 김민수 교수 천막농성장 일대에서 교수·학생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복직을 축하하는 집회를 열고 투쟁의 상징물인 천막을 자진 철거했다.

서울대학본부 정문 앞에는 김 교수가 연구실 겸 투쟁장소로 사용하던 2평 규모의 천막, 지난 1월 고법판결을 앞두고 공대위가 설치한 3평 규모의 천막, 재임용 탈락 5주년을 상징해 학생들이 만든 나무 조형물 등이 놓여 있었다.

이날 공대위 천막과 조형물은 철거하고 김 교수의 천막은 대학본부 뒤편으로 옮겼다가 '서울대 기록관'에 보관할 예정이다. 8일 성공회대 관계자가 김 교수의 천막을 성공회대 민주화기념 자료관에 전시하겠다는 의향을 비췄지만, 서울대가 9일 전격적으로 '서울대기록관'에 보관할 뜻을 전해오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비판과 저항정신 증거 하는 대학교수로 살아가길"


"진실과 정의, 그 자체는 힘을 갖지 못하지만 끝내 승리한다. 비판, 저항, 자유의 산실인 대학의 힘이 아닌 보수적인 법에 의해서 재임용 탈락의 잘못이 시정된 상황을 보면서 서울대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불굴의 투지로 승리를 쟁취한 김 교수의 복직을 축하하며 아울러 비판과 저항정신을 증거 하는 대학교수로 살아가길 기대한다."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 학벌없는사회 공동대표는 이렇게 강조하며 비판과 저항의 대학정신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김 교수의 복직은 패거리 문화와 친일문화 등의 집단 공격을 견뎌내고 학문의 자유를 쟁취한 귀중한 승리라고 강조했다.

강남훈(한신대) 교수노조 사무총장은 "김 교수의 승리는 재임용 문제가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라는 대법원의 판례를 뒤집으며 부당하게 재임용 탈락되거나 신분 불안에 시달리는 교수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며 "친일파를 비판하면 쫓겨 난다가 아니라 역사의 정의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갖게돼 기쁘다"고 말했다.

정규환(성공회대)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조 부위원장은 "패거리에 순응·복종할 때는 자기 편이지만 조금만 어긋나면 철저히 따돌리는 게 대학의 패거리 문화"라며 "패거리 문화를 이기고 새날을 맞은 김민수 교수의 복직이 대학사회의 개혁을 앞당기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최영찬(농업경제학과) 서울대교수대책위 총무는 정운찬 총장이 친일논란을 사고 있는 장발 서울대미대 초대학장 기념관(우석홀)을 방문한 것에 대해 "서울대 총장이 맞느냐. 동경제대 총장이 아니냐"고 지적하면서 "경성제대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울대에는 친일망령과 유신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김 교수의 소송을 맡았던 안영수(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9일 "재임용 심사는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었던 사법부가 전향적으로 사법심사 대상으로 검토해 준 게 큰 힘이 됐다"며 "우리 사회가 법치주의로 한 단계 나아가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천막 철거를 앞두고 진행된 고사에서 "서울대 비민주 귀신 물러가라(김수행 서울대교수대책위원장)", "서울대 친일파 귀신 물러가라(이상철 사학국본 정책위원장)", "서울대본부의 무사 안일주의 청산하자(최갑수 서울대교수·전 민교협 의장)"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조호진 기자
---------------------------- 이 기사를 읽는데, 나도 그만 눈물이 났다. 내가 알기로, 그는 지난 7년간 웬만해선 울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운다. 거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한 그가 이제 와 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더러 '차갑고 모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누가 말하는 것처럼 투사가 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앞에 당당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되기 위해 싸웠던 것일 게다. 그의 복직에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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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14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눈물이 나네요. 아침부터. 흑.
김민수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는 인간들이야말로 망령들이죠!

balmas 2005-03-1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지 마세요, 로드무비님, 엉엉.
 
 전출처 : 인간아 > 책벌레 멘델 - 슈테판 츠바이크 (꼭 읽어보시길!)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단편소설은 1979년 고려원에서 출판된 <유태인 대표작가 단편선> - 소올 벨로우, 이윤기 옮김, 에서 옮긴 것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이라는 희소성도 그러하지만 책 내용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진한 감동을 줄 것이라 생각이 들어 옮깁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이 단편을 읽으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등은 현재의 문법에 맞게 수정했음을 알립니다.

 

                                     책벌레 멘델

                           Buchmendel


                                                                             -  슈테판 츠바이크


  궁벽한 시골을 여행하다가 비엔나로 돌아온 나는 정거장에서 집 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워낙 억수같이 퍼부었기 때문에 행인들은 서둘러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나대로 억수도 피할 겸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비엔나 같은 대도시 거리라 구석마다 카페가 있었고, 나는 모자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어깨가 흠씬 젖었지만 가까운 카페를 골라잡을 수 있었다. 재미없는 음악(독일식의 판박이)에다 도시 중심에서나 볼 수 있는 댄싱 플로어는 구식이었고, 그 안에 가득한 노점 상인들과 노동자들은 커피나 빵 대신 오히려 신문을 더 찾았다. 이미 밤도 늦은 시간이었다. 카페 안의 공기도 날씨 탓이긴 했지만 그래도 담배연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새틴을 씌운 의자라든지 번쩍이는 금전등록기 하며, 그런대로 깨끗하여 애써서 치장한 흔적이 보였고 전체적으로도 그럴 듯했다. 비를 피하려고 허둥대다 보니 나는 그 카페 이름도 읽지 못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따뜻하고 안락한 그곳에서 쉬었다. 그러나 나는 조바심이 나서 파랗게 색칠한 유리창을 통해 소나기가 멎었는가 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나대로 갈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 앉아 다분히 전형적인 비엔나 카페의 최면적 분위기를 따른 실내장식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침침한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해보았다. 인공 조명 아래서 보이는 그들의 눈은 어딘가 음산한 빛을 띄고 있었다.

카운터에 있는 젊은 여자를 관찰했다. 자동인형처럼 그녀는 웨이터가 가져온 커피에다 설탕을 퍼넣고 있었다. 별 관심도 없이 벽에 걸린 광고 문안을 읽기도 했다. - 이런 멍청한 직업이 유쾌할 수도 있음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막연한 졸음에서 깨어났다. 내부에 이상한 동요가 일어났다. 이따금씩 고개를 들지만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아래턱인지 위턱인지 모를 치통과 같은 동요였다. 이 무감각한 긴장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정신적 피곤으로 인한 막연한 감상 같은 것이었다. 그 이유를 모르면서도 나는 의식할 수 있었다. 나는 몇 년 전에 틀림없이 이 카페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의식에 떠오르는 연상이 벽, 테이블, 의자, 생소하게 보이는 자욱한 실내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것은 집요하게 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의식이 심연에서 번쩍거리지만 미끄러워 붙잡을 수 없는 해파리 같은 것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검토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확실한 것은 내가 이전에 왔을 때는 카운터가 대리석판이 아니었고 또 금전등록기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벽도 모조 장미의 숲으로 치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최근에 만든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틀림없이 20년도 더 지난 옛날에 여기 와본 적이 있었다. 이 네 귀퉁이의 벽 안에 못으로 단단히 박아놓은 것처럼 먼 옛날에 내 자아의 일부분이 거기 걸려 있었다. 잃어버린 인연을 찾고자 실내뿐만 아니라, 내 내부의 의식까지 반추해보았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그 깊이를 잴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하고 있었으리라. 이해가 손끝을 빠져나가 정신력의 불안이 드러날 때 사람들이 유머를 잃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애썼다. 좋고 나쁜 양면성을 지닌 내 기억력은 기묘한 형태여서 가느다란 실이면 충분하리라. 한쪽 끝은 집요하게 믿을 수 없고 또 한쪽은 믿을 수 없이 신뢰할 만하다. 내 기억은 중요한 세부사항, 즉 구체적인 사건이나 사람들의 얼굴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임의적인 노력은 의식의 심연에서 그것을 토해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퍼덕거리며 대항하는 물고기에게 낚시를 먹인 낚시꾼처럼 나도 이 잃어버린 기억을 낚아올리는 데는 몇 가지 하찮은 미끼 - 그림엽서, 봉투에 씌어진 주소, 신문의 스크랩 - 면 충분하리라. 나는 한 번 본 사람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그의 입모양이며 툭 튀어나온 송곳니 왼쪽으로 난 틈새며 억지로 만들어낸 너털웃음소리, 기분좋을 때 턱수염을 잡아당기는 버릇, 그리고 즐거울 때의 표정의 변화까지도. 내 기억에 떠오른 것은 이런 신체적 특징뿐만 아니다. 나는 몇 년이 지났는데도 내게 한 그의 대답이라든지 내 말의 어조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과거를 이처럼 소상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연상의 흐름을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접점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내 기억이 추상적인 평면 위에서는 그리 만족스럽게 작용해주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내 물고기를 잡을 낚시를 제대로 걸기 위해서였다. 쓸데없는 일이었다. 헛일이었다. 낚시가 없거나 물고기가 물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성미 급한 사람이 삼키기만 하고 내뱉지는 않는다고 해서 슬러트 머신을 흔들거나 발길로 냅다 차버리는 것처럼, 내 양쪽 관자놀이 속의 사고 기관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화가 난다고 해서 한 대 쥐어박아줄 수도 있었다.

나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데 실패한 나머지 화가 나서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안을 서성거렸다. 내가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 내 기억이 반짝거렸다. 나는 금전등록기 오른쪽에 창문도 없는 방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거기에 켜진 것도 보조등이었다. 그렇다, 틀림없이 그런 곳이 실재했다. 장식은 달랐지만 구조는 그대로였다. 바아 뒤의 4각형 간막이는 카드 룸이었다. 그 방의 가구를 기억해내자 내 가슴이 뛰었다. 나는 드디어 연상의 궤도에 들어선 것이었다. 기억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엔 조그만 당구대가 놓여 있어쓴데 마치 이끼가 덮인 조용한 연못 같았다. 구석에는 카드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중 한 테이블에는 수염이 터부룩하고 직업 도박사인 듯한 사내 둘이서 체스를 하고 있었다. 난로 옆으로 <전화>란 딱지가 붙어 있는 문이 있고 그 옆에 또 하나의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섬광처럼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그것은 멘델, 야콥 멘델이 쓰던 테이블이었다! 그곳은 바로 저 책벌레 멘델, 바로 그 멘델이 쓰던 곳이었다. 나는 카페 글루크에 온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야콥 멘델을 잊을 수 있었던가? 내가 몇 년간이나 그를 잊고 있었다니! 마치 우화의 나라에서 온 듯한 특이한 사람, 이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 대학과 몇 안되는 추종자들 사이의 명물, 책장수의 마술사, 숙명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기 앉아 있던 사람, 서지학(書誌學)의 상징, 카페 글루크의 영광을? 그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게 왜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내가 어떻게 저 멘델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그의 얼굴과 모습이 생생하게 내 앞에 보였다. 나는 마치 책과 원고뭉치가 쌓인 대리석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정물처럼 앉아 그는 책장에다 눈을 박고 있었다. 그러나 꼭 정물처럼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겐 나지막한 소리로 책을 읽으며 깨끗하게 벗겨진 대머리를 앞뒤로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이것은 그의 고향인 갈라시아의 유태인 학교에서 얻은 습관이었다.) 유태인 소년들이 탈무드를 읽을 때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는 거기에서 흥얼거리며,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카탈로그와 책을 읽었다. 랍비는, 아기가 요람에서 흔들릴 때 더 깊이 잠드는 것처럼, 이 성스러운 책의 경건한 내용도 그같이 리드미컬하고 최면적인 동작에 의해 더 깊이 스며든다고 믿고 있었다.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 멘델은 아무것도 듣고 보지 못했다. 그는 틱택거리며 부딪치는 당구공도, 오고가는 웨이터들도, 울리는 전화벨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바닥을 닦을 때도, 난로에 석탄을 다시 채울 때도 몰랐다. 한번은 빨갛게 단 석탄 덩어리 하나가 난로에서 떨어져 멘델의 바짓가랑이를 몇 인치나 태운 적이 있었다.

  실내는 연기로 자욱했고 손님 하나는 불을 끄려고 물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연기도 냄새도 손님의 그런 소동도 그의 주의를 책으로부터 돌려놓지 못했다.

  그는 기도하듯이, 노름꾼들이 돌아가는 루울렛을 들여다보듯이, 술꾼들이 빈병을 기웃거리듯이 책을 읽었다. 그가 그런 집중력으로 책을 읽는 것을 본 이후로 다른 사람들의 독서는 그저 소일거리쯤으로 보였다.

  갈라시아인인 중고품 책장수 멘델은 예술가, 학자, 철인과 바보를 특정지우는 절대적 집중력의 신비를 나에게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완전한 집중의 비극적인 행복과 불행에 익숙해지게 해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를 그에게 소개해준 것은 상급학년의 친구였다. 그 당시 나는 오늘날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최면술사 메스머의 인생과 행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내 연구는 신통치 않았다. 내가 손에 쥘 수 있었던 책은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 도서관에 도움을 청했지만 그곳 직원은 풋내기 대학생에게 자료를 찾아주는 게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대학친구가 멘델을 만나보라고 제안한 것이었다.

  “책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게 없어. 그러니까 자네가 보고 싶어 하는 책을 구하게 해줄 수도 있을 걸세. 이 비엔나에선 가장 유능한 사람이고, 게다가 독창적이지.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적계의 도마뱀이야. 즉 멸종된 동물의 태고적 생존자란 말일세.”

  그래서 우리는 카페 글루크로 갔고, 거기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조금 전에 쓴 것처럼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앞뒤로 머리를 흔들고 있는 멘델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의 침입을 무시하고 머리를 끄덕거리는 중국 인형처럼 하고 앉아 책만 읽고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고리엔 검은 오버코트가 걸려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도 원고와 책과 카탈로그 뭉치가 불룩하게 들어 있었다.

  내 친구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기침을 해댔다. 그러나 멘델은 이것을 무시해버렸다. 할 수 없이 슈미트는 마치 문을 노크하는 것처럼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멘델이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올리고 기계적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진한 잿빛 눈썹 어래서 검고 커다란 두 눈이 빛났다.

  내 친구는 나를 소개했고, 나는 대학 도서관 직원에게서 퇴짜맞은 궁상을 조심스럽게(슈미트가 지시한 대로) 설명했다. 멘델은 경멸하는 듯이 웃으면서 의자 뒤로 몸을 젖히고 투박한 갈라시아 억양으로 말했다.

  “퇴짜라, 그렇게 생각하나? 그 친구는 도서관의 부적격자였어. 그게 문제야. 바보 같은 녀석이지. 나는 그 녀석을 20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지만(그것도 죄야) 그동안 공부한 건 하나도 없어요. 월급이나 닦아먹는 것, 그런 녀석을 다 그 모양이야. 책 앞에 앉아 있지 말고 도로공사나 하라지.”

  이 호통은 마치 얼음장이나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 책벌레의 손이 자리에 앉으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와 의논할 문제를 다시 반복해서 설명했다. 동물의 최면 현상에 대한 연구자료와 메스머의 이론에 대한 찬반 양론의 서적이나 소논문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멘델은 왼쪽 눈을 깜박거렸다. 마치 눈에 들어간 먼지를 닦아내려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나서는 눈에 보이지도 앉는 카탈로그를 읽는 것처럼 2, 30개의 논문 제목과 출판 날짜, 출판사 이름과 가격까지 줄줄 이야기해주었다.

  슈미트의 말을 잘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내가 깜짝 놀란 것이 그의 자부심을 간질여놓은 모양이었다. 그는 또 한번 그 놀라운 기억력의 단추를 눌러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서지학적 난외(欄外) 문제를 풀어놓았다. 몽유병자, 퍼킨스의 금속견인장치, 최면술에 대한 선배들의 실험, 브레이드, 가스너, 마법으로 악마 부르기, 기독교적인 과학, 접신학(接神學), 마담 블라바트스키 같은 것은 내가 바라지도 않던 것이었다. 각 아이템 별로 또 한번 우박 같은 책 이름과 출판 날짜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야콥 멘델이라는 사람이 대영 박물관의 도서관에 있는 일반 목록처럼 살아 있는 사전이지만 두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는 게 다를 뿐이란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서지학적인 귀재(鬼才)를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누추한 갈라시아 중고품 책장수로 변장했을 뿐인 것이다. 자그만치 80권이나 되는 책 이름을 따르르 쏟아내놓고 (그것도 별로 어렵잖게, 의외로 끗발이 좋았던 노름꾼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한때는 흰색이었을 법한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았다.

  나는 되도록 놀라움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이 많은 책 중에서 어느 책이면 어렵잖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 어디 보자. 내일 다시 오면 몇 권 구해주겠네. 그 나머지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는 시간 문제야.” 하고 그가 대답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는 공손하게 내가 바라는 책의 리스트를 적어줄 수 없겠느냐고 덧붙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슈미트가 주의를 주느라고 내 옆구리를 찔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미 멘델은 나를 힐끗 바라보고난 다음이었다. 그것은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다가 모욕을 당한 표정으로 경멸과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멕베드가 싸울 것도 없이 항복하라고 소리치던 멕더프에게 한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칠게 웃었다. 후골(喉骨)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는 모멸감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확실히 그로서는 화낼 이유가 충분했다. 처음 보는 무식꾼이 감히 야콥 멘델에게 마치 그가 서점의 점원이나 공공 도서관의 하급 직원인 것처럼 리스트를 적어 달라고 한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나의 이 자칭 공손이 얼마나 이 천재의 비위를 거슬려버렸는가를 깨달았다. 지저분하고 평번하게 보이는 이마 뒤에다 이 세상에 인쇄되어 나온 책 이름은 모조리 기록해놓은 강력 무쌍한 기억력의 소유자에게 말이다. 하루 전의 신문에 나온 것이든, 몇 백 년 전에 나온 것이든 그는 출판사, 저자의 이름, 그리고 가격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었다. 마치 인쇄된 페이지에서 읽어내는 것처럼, 그는 자기 기억 속에서 그 내용이며 그 삽화까지 고스란히 읽어내었다. 자기 수중에 있는 책뿐만 아니라 서점의 진열대에서 잠깐 본 것까지 그는 그대로 기억할 수 있었다. 마치 아직 캔버스에 그리지 않은 사물에 대한 화가의 기억처럼 그는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로젠스부르그 서적상에 의해 책이 6마르크에 들어오자 그는 2년 전의 일인데도 그는 그 책이름을 고스란히 외웠다. 그와 같은 책이 비엔나 경매에서 4크라운에 주인을 바꾸자 그는 그 구입자 이름까지도 기억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멘델은 책제목이나 모양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모르는 식물이 없었다. 모르는 적충류(滴虫類)가 없었다. 그는 모르는 별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돌고 쉴새없이 변화하는 책이라는 우주의 질서에 정통했다.

  각개의 학문적인 전문분야에서, 그는 전문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서관의 실태를 도서관 직원보다 더 잘 알았다. 그는 출판업계의 당사자들보다 각 출판사의 책이름을 더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에겐 불가사의하지만 확고부동하고 정확한 기억의 마력밖에는 그 자신을 인도해줄 힘이 없었다.

  이 한계를 모르는 능력은 그의 특수한 집중력 때문인 것도 사실이었다. 책에서 떨어지면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유형별로 분류, 정돈, 수집되고 말하자면 소독되어 책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모든 실재하는 현상이 그에게 아무 현실적인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가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이 주는 의미와, 그 내용을 적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흥미와 주의를 끄는 것은 제목과 가격과 형식과 표지였다.

  이 천재의 고물 취향의 기억력을 가진 야콥 멘델에 대한 이 마지막 평가는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인 그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만일 그의 뇌리에 가득한 것이 도서목록이 아니라 포유동물의 두뇌에 축적된 지력(智力)이었다면 야콥 멘델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가치는, 골상학(骨賞學)에 대한 나폴레옹의 선물, 언어학에 대한 메쪼판티의 재능, 장기대회에서의 라스커의 재주, 부조리의 음악적 재능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의 이 재능이 교사로서 쓰여졌더라면, 그 놀라운 두뇌는 수백만 학생들을 가르쳐내었을 것이고, 일반인을 가르쳤더라면 우리가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보물창고를 위해 그야말로 학식있고 가치있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받은 교육이라고는 탈무드 학교뿐인 이 보잘 것 없는 갈라시아 유태인 책장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류 문화세계가 자기로서는 넘어갈 수 없는 울타리였다. 그래서 그의 놀라운 기능은 겨우 카페 글루크의 골방 대리석 덮개를 낀 테이블 위에서만 쓰여졌다.

  미래에 한 위대한 심리학자가 나와 뷔퐁이 동물의 종(種)과 속(屬)을 효과적으로 분류한 것처럼,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마력의 유형을 분류하다가 한 사람이 수많은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것을 보고 야콥 멘델을 위해 특별한 분류방법을 찾아야 하리라. 15세기의 요랍기의 목록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책값과 서명을 꿰뚫고 있는 잊혀진 서지학의 대가라고.

  책의 매매나 일상 생활에서, 야콥 멘델은 소규모의 중고책장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요일마다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쎄>, <노이에스 비엔너 타블라드>에는 판에 박힌 그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고서 고가 매입. 오베레 알세르스트라쎄. 멘델>

  그 아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바로 카페 글루크의 전화번호였다. 그는 털보 짐꾼을 대동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를 열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이곳을 거점으로 귀중한 자료만 옮겨오고 나머지는 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서점을 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봇짐 장수로 물러앉게 되었고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학생들이 그에게 교과서를 팔았다. 그 책이 몇 년 뒤에 다음 세대로 옮겨지면 거기서 얼마의 이익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남의 충고는 거의, 혹은 전혀 무시했다. 그의 세계에 있어서 돈이란 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 닳아빠진 검은 코트 이외의 더 나은 옷을 입은 걸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그는 우유 한 잔과 빵 두 조각을 먹었다. 점심 때 먹는 음식은 근처 식당에서 배달되었는데 그게 그래도 가장 음식다웠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카드 노름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눈이 안경 뒤에서 끊임없이 구르고 있고 그의 수수께끼 같은 머릿속에는 책 제목이 쉴새없이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으리라. 마치 기름진 목장처럼 그의 두뇌는 이 풍부한 수도에서 쉴새없이 물을 빨았다.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흥미없는 것이었다.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열정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가장 보편적인 허영이었다.

  가는 곳마다 허탕친 나머지 지쳐버린 누군가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자화자찬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비엔나나 그밖의 지방에서 그의 지식을 존경하고, 그가 줄 수 있는 도움을 값비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지방이라고 부르는 이 단위에는, 그 단위를 반영하는 세분화된 작은 면이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다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찬가지 재주와 마찬가지 정열을 가진 감식가가 있는 것이다. 서적 시장의 애호가들은 야콥 멘델을 알고 있었다. 악보를 해독하기 어려울 때 음악계의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를 찾아간다. 그는 회색 두건을 쓰고 여러 가지 악보가 펼쳐진 곳에 버티고 앉아 이 난해한 악보를 풀어주려고 미소로 내방객을 맞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날의 비엔나 극장과 문화 전반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면 서슴치 않고 박학자(博學者) 글로시 신부를 찾아간다. 이와 같은 신뢰는 비엔나의 서지학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카페 글루크에 가서 야콥 멘델 앞에다 보퉁이를 풀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젊고 새로운 경험에 목말라 있는 나에게 그런 자문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자칭 책장사라는 사람이 보통 책을 가져오면 겉장을 깔보는 듯이 툭툭 두드리며 “오 크라운.”하고 말한다. 만일 희귀본이거나 정본이라면 그는 자리에 앉아 이 보물을 원종이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핀다. 이럴 때 그는 더럽고 잉크얼룩이 진 손가락과 때낀 손톱을 부끄러워한다.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건하게 그는 이 보물을 한 장씩 넘겨본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기나 하는 듯이 그 순간에 그를 다치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가 차례에 따라 책을 살펴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고 무게를 가늠해보는 것은 엄숙한 종교적 의식을 방불케 한다. 이런 일에 열중하는 그의 구부러진 등은 쉴새없이 들썩거리고 이따금씩 혼자서 찬탄하느라고 “아!”하고 외치거나 어쩌다 책벌레가 갉아먹어버린 페이지나 찢어져나간 페이기가 있을 때마다 “이런!”하고 안타까워했다.

  그의 손이 책을 다루는 모습은 마치 그 책이 순금처럼 극히 작은 무게 단위로 거래되기나 하는 것처럼 조심성스러웠고, 그가 책을 냄새 맡는 모습은 마치 소녀가 장미꽃 냄새를 맡는 것만큼이나 감상적이었다. 물론 이 의식과 같은 책의 검토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책주인에게는 더없는 불행한 일이었다.

  책의 평가가 끝나면, 그는 기꺼이, 아니 열심히 이 물건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었다. 거기 관련된 일화나 경매, 혹은 개인 거래에 오른 그와 같은 책값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럴 때면 그의 얼굴은 밝아지고 더 싱싱해지고 젊어보였다. 그런데 그를 굳어지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이 풋내기 고객이 전문가인 그의 의견을 돈으로 사례하려고 할 때였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물러섰다. 마치 미국인 여행자가 팁을 내밀 때의 유능한 박물관 관리인 같았다. 야콥 멘델에게 있어서 책을 대한다는 것은 신성한 것으로, 마치 여자가 아직 순진한 젊은 남자를 대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순간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밤이었다.

  책이 그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신비였다. 그러므로 유명한 수집가들이 (그 가운데는 프린스턴 대학의 저명한 교수도 있다) 이 멘델을 그 도서관의 사서(司書)로 채용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이런 제의를 감사의 말을 덧붙여 거절했다. 그는 카페 글루크에 있는 정든 사령탑을 떠날 수 없었다.

  33년 전 턱 끝에 수염이 가무스름하고 관자놀이 아래로도 제법 구레나룻이 날 즈음 그는 겁 없는 젊은이로 갈리샤에서 비엔나로 왔다. 랍비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가혹하고 질투심이 많은 여호와 섬기기에 진력이 났다. 그는 보다 생기발랄한 책이라는 다신교적(多神敎的) 의식을 택했다. 그러다 카페 글루크를 발견하고 자기 가게로, 사령탑, 자기 우체국 그리고 자기 세계로 차례차례 만들어갔다.

  천문대에 홀로 앉아 매일 밤 망원경을 통해 수많은 별들의 신비한 운행이며, 변화무쌍한 난전(亂戰)이며 그리고 사라지는 광경을 관찰하는 천문학자처럼, 야콥 멘델도 자신의 안경을 통해 책의 우주, 우리들 일상생활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 우주, 별들의 우주처럼 변화무쌍한 주기를 지닌 책의 우주를 관망했다.

  카페 글루크에서의 그의 가치는 높이 평가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명성은 비공식적인 직업의식에서라기보다는 <<알체스티스>>와 <<이피게니아>>의 작곡자인 유명한 음악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대부의식(代父意識)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낡은 벚나무 카운터나, 여러 군데 꿰맨 자국이 드러난 당구대, 놋쇠 커피 항아리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의 테이블은 성역으로 통했다. 그의 수많은 고객과 단골손님들은 <그 카페를 위해> 한 잔쯤은 마시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방대한 지식에 대한 과외 이익금은 웨이터인 도블러의 허리에 달린 커다란 가죽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인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멘델도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전화는 언제나 무료로 써도 좋았다. 그는 편지도 카페에서 받았고 소포도 그쪽으로 배달되었다. 화장실 담당인 늙은 여자는 그의 코트를 손질해주고 단추를 꿰매주며 매주일마다 속옷을 빨아주기도 했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배달되는 음식을 먹는 유일한 손님이었다. 게다가 매일 아침 그 카페 주인인 스탄트하르트너씨가 그의 테이블로 찾아와 “안녕하세요.”하고 아는 체 했다. 그러나 멘델은 책에 몰두해 있다보니 대답하는 일이 드물었다. 정확하게 7시 30분에 그는 카페에 도착했고 어두워지기까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고 신문도 읽지 않았으며 주위의 변화를 주시하는 일도 없었다. 한번은 스탄트하르트너씨가 정중하게 냄새나고 희미한 등유램프보다 자기가 갈아단 전등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제서야 멘델은 이 백열등을 보고 놀라는 것이었다. 이 시설 때문에 며칠간이나 망치소리가 났지만 백열등의 출현조차도 그의 주의를 끌지 못한 것이었다. 안경의 동그란 두 구멍, 오직 이 반짝거리며 빨아들이는 두 렌즈만이 그의 두뇌로 들어오는 수억 마리 적충류와 같은 글씨의 여과장치였다. 그 밖의 일들은 그 의미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30년간이나 이 테이블에서 잠잘 때만 제외하고, 끊임없이 읽고 비교하고 산정해온 것이다.

  카페 글루크의 바아 뒤에 있는 방을 본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야콥 멘델이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던 그 대리석 덮개의 테이블이 마치 묘석처럼 싸늘하게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이후로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 수없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그런 지루한 단조로움 속에서 독특한 인간의 고귀한 가치가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뿐이 아니라, 철없는 나의 청년시절의 직관이 책벌레 멘델을 좋아하게 했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위대한 업적과 뛰어난 능력은 정신이상에 가까운 극도의 외골수의 정신적인 집중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저 수수께끼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도 그를 관찰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위대한 시인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의 내부적 영감뿐만 아니라, 이 천재적인 중고품 책장사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나로 하여금 순수한 정신의 생활, 이데아에의 완전한 몰두, 인도의 요가 수행자나 중세기의 수도승들에게나 볼 수 있는 절대적인 몰아의 경지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게 했다. 나는 이 가능성을 전화박스 옆의 조그만 백열등의 카페에서 그 가능성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전쟁과 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느라고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비어 있는 테이블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동시에 거기 앉아 있던 사나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웨이터를 불러 물어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유감입니다만 멘델씨라고는 잘 모르겠는데요. 카페 글루크의 단골 손님 가운데엔 그런 분이 없습니다. 수석 웨이터라면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멘델씨라구요?”

  얼마간 생각해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름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혹시 만들씨 아닙니까? 플로리아니가쎄에서 철물상 하시는?”

  나는 입맛이 썼다. 되찾을 수 없는 과거로 인해서였다. 우리가 지나가자마자 바람이 그 모래 위의 발자국을 지워버린다면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30년간 아니 40년인지도 모른다. 한 사나이가 이 작은 방에서 숨쉬고 읽고 생각하고 말했다. 3, 4년이 지나가고, 이집트에는 새로운 왕이 일어서서 요셉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카페 글루크에 있는 사람은 이제 저 책장수 야콥 멘델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안타까워 스탄트하르트너씨나 옛날에 여기 있던 직원에게 물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수석 웨이터에게 제의했다.

  “전 주인이던 스탄트하르트너씨 말씀입니까? 몇 년 전에 팔았어요. 그 뒤 돌아가셨지요. …… 전 수석 웨이터요? 이제 쉴 만큼 벌어가지고 크렘스에서 행세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전에 있던 사람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 사람, 그렇죠. 스포르쉴 부인만은 아직도 화장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압니다. 그 부인은 전 주인에서부터 수십 년을 여기서 일했죠. 아마 그 부인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멘델씨를 기억하고 있지 못할 거예요. 손님이라면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 할마시거든요.”

  내 생각은 달랐다.

  “야콥 멘델이라면 그리 쉽사리 잊혀질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했다.

  “어쨌든 스포르쉴 부인과 이야기해줄 수 없을까? 조금만 짬을 내면 되니까.”

  <화장실 담당>이 지하실에서 올라왔다. 백발인데다 나이가 들어 발걸음이 무거운 이 부인은 수건에다 젖은 손을 닦고 있었다. 청소하다 불려 올라온 부인은 카페 객석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혁명 후 관헌들에게 시달리던 습관 때문에 비엔나의 시민들은 <높은 사람>이 물어볼 게 있다고 말하면 경찰관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부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겸손했다. 그러나 내가 야콥 멘델에 대해 묻자 그녀는 긴장했지만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불쌍한 멘델씨…… 그런데 아직도 그 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늙은 사람들이란 흘러간 시절이나 그 시절 사람들을 기억해내는 일만으로도 감정이 쉽사리 격앙되는 법이다. 나는 그녀에게 멘델이 아직 살아 있느냐고 물었다.

  “하나님 맙소사. 아닙니다. 불쌍한 멘델씨는 5, 6년 전에 죽었습니다. 아니 7년쯤 됐던가? 참 좋은 분이었지요. 내가 그분을 아는 게 몇 년이나 되더라? 25년이 넘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을 시작할 시각이면 그는 언제나 자기 테이블에 이미 와 앉아 있었지요. 그 사람을 죽게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어요. 암, 부끄러운 일이고말고요.”

  흥분한 이 부인은 내가 그의 친척이냐고 물었다.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 일을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냐고 반문했다.

  “모릅니다. 그래서 부인께서 좀 말씀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젖은 손을 닦았다. 그녀는 카페의 밝은 불빛 아래서 자기의 더러운 앞치마와 흐트러진 백발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 웨이터가 자기 이야기를 엿듣지 않을까 하고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드 룸으로 가실까요? 멘델이 있던 방입니다. 거기서 이야길 좀 들려주십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내가 이해해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뚱거리며 안쪽에 있는 간막이로 나를 인도했다. 그녀를 따라가면서 나는 손님들과 웨이터들이 기묘하게 어울리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 대리석판의 테이블 양쪽에 앉았고 거기에서 그녀는 야콥 멘델의 몰락과 죽음을 이야기해주었다. 여기에 그녀 자신의 말과 그 뒤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그대로 옮겨보려고 한다.

  “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그는 아침 7시 30분에 여기 와서 이 테이블에 앉아 전처럼 책을 읽었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가 전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답니다. 사실 그는 신문도 읽지 않았고 책 이야기가 아니면 남들과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신문팔이들이 (전쟁초기니까요. 당국이 그걸 금지시키기 전입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동부전선에 결전이 벌어졌습니다.” 라든지 “끔찍한 살육전이 계속된다.” 라고 소리쳐봤자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모여앉아 수군거려도 그는 자기 일만 했답니다. 그는 저기 저 당구대에서 점수 놓아주던 프리츠가 첫 번째 전투에서 쓰러져 거기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스탄트하르트너씨의 아들이 프르제미슬에서 러시아군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답니다. 빵맛이 점점 없어지고 아침저녁으로 뜨거운 우유 대신에 대용커피를 마셔야 했지만 그 양반은 쓰다 달다 소리 한번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한번은 카페로 찾아오는 학 생들이 줄어들었다고 그게 왜 그러냐고 놀라더군요. 책 빼놓으면 세상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그 양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오. 어느 날 아침 열한 시쯤엔가  경찰관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한사람은 정복을 하고 또 하나는 평복 차림으로. 그 사람들은 똑바로 멘델의 테이블로 갔어요. 이 순진한 양반은 그 사람들이 책 사러온 사람이나 책 이야기 들으러 온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 양반을 체포한다고 말하고는 데려가버렸다오. 그게 카페의 이야깃거리였습니다.

  모두가 경찰관 사이에 서서 안경을 이마 위로 걷어올리고는 영문을 모르고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멘델 이야기를 한 거라오. 이건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멘델씨는 파리 한 마리도 해칠 양반이 아니다, 하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랬더니 경찰관이 화를 벌컥 내면서 제 할일들이나 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멘델을 데려가버렸고 우리는 그 뒤 2년간 그를 카페에서 볼 수 없었다오. 그 사람 죄목이 뭔지 몰라도 나는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오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죽기를 한하고 맹세할 수도 있어요. 멘델씨가 나쁜 일을 할 수는 없었어요. 죄라면 그처럼 순진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다루는 거야말로 죄죠.“

  이 스포르쉴 부인의 말이 옳았다. 우리의 친구 야콥 멘델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가 뒤에 안 바에 의하면) 똑똑하지 못한 짓을 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의 사람됨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립국으로 내왕하는 우편물을 검열하던 군 검열기관이 하루는 해외 발송의 우표가 붙은 엽서 한 장을 입수했다. 야콥 멘델이란 서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엽서에는 적국인 파리의 그레나르 가에 있는 도서관의 쟝 라보아데씨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일년의 정기 구독료를 미리 불입했는데도 여덟 달치의 월간 <프랑스 서지학보>가 배달되지 않았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이 엽서에 하급 직원 (로만스어를 공부한 전직 고교 교사였는데 참호에서 재능을 썩힐 게 아니라 검열기관을 위해 특별히 차출된 사람이었다.) 은 놀라고 말았다. 농담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혹시 첩자들이 이용하고 있지 않나 하고 주의깊게 매주 약 2천 통의 편지를 검열해야 했다. 그러나 1914년 10월 이래의 규정을 무시하고 적국의 주소를 쓴 엽서를 수도나 지방의 우체통에 넣는 멍청한 오스트리아인은 없었다. 서로가 철책을 두르고 총과 총검,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참호에서 상대를 쥐처럼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하던 참이다. 독일을 위시한 중구제국(中歐諸國)은 러시아와 프랑스 전 지역과의 교신을 금지시켰었다. 국민병으로 동원된 이 전직교사는 이 엽서를 대단찮게 생각하고 상관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그저 호기심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주일 뒤엔 야콥 멘델 발신인 또 하나의 엽서가 나왔다. 이번엔 런던의 골든스퀘어에 있는 서적상 존 알드릿지에게 보내는 것으로 <고물 연구>의 과월호(過月號) 몇 권을 엽서에 선명하게 씌어진 비엔나 주소로 발송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푸른 군복의 검열관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누굴 놀리나? 엽서가 암호로 쓰여진 거나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상관의 자리로 가 뒷꿈치를 소리나게 붙이며 경례하고 나서 이 의심스러운 엽서를 적당하게 거만을 부리는 소령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이상한 일이었다.

  상관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주소와 같은 장소에 실제로 야콥 멘델이란 사람이 있는가 알아보고, 있으면 연행해오라고 지시했다. 한 시간 후 멘델은 체포되어 소령 앞으로 끌려왔다. 아직도 충격 때문에 멍한 상태였다. 소령은 그에게 엽서를 보여주며 직업군인다운 덜 된 태도로 그 엽서를 알아보겠느냐고 다그쳤다. 그 같은 말대접과 또 그처럼 중요한 책의 주문서가 거기 있는 데서 화가 난 멘델은 시덥잖게 대답했다.

  “물론 엽서는 내가 썼소. 내 글씨고 서명도 내 겁니다. 정기구독한 정기간행물은 발송을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닙니까?”

  소령은 회전의자를 반바퀴 돌려 그 옆에 있는 중위와 의미있는 시선을 교환했다.

  “이 친구는 돌아도 제대로 돈 모양이야.”

  이것이 그들 사이로 오고간 말이었다.

  소령은 이 친구를 주의깊게 다루어야 할 것이지 아니면 보다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 생각했다.

  사무실이면 어디나 그런 양자택일의 문제가 생기면 동전을 던져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보고서를 내어버리는 게 상례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기 책임에서 손을 씻어버리는 것이다. (풀이 :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하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자기 책임을 회피했다. 마태복음 27장 25절) 보고서야 어쨌든 자기에게만은 별 해가 될 일이 없고, 수백만 장에다 헛일삼아 그저 한 장을 덧붙이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순간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이들의 결정은 무방비 상태인 이 천재에게는 중대한 일이었다. 이 보고서가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제 삼자는 구체적인 혐의를 굳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름은?”

  “야콥 멘델.”

  “직업은?”

  “서적 중개인입니다.”

  이미 설명했듯이 멘델에게는 가게가 없다. 중개인 면허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출생지는?”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멘델의 출생지는 페트리카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소령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페트리카우, 혹은 피오르코프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전선을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었다.

  “당신은 러시아 태생이군. 오스트리아 국적은 언제 취득했소? 서류를 보여주시오.”

  “서류라니? 증명서 말입니까? 내가 가진건 서적상 면허증밖에 없는데요?”

  “그럼 당신의 국적은 어디요? 당신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인이오, 러시아인이오?”

  멘델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러시아지.”

  “그럼 당신은?”

  “러시아 병역을 기피하려고 33년 전에 국경을 넘었소. 그때부터는 쭉 비엔나에 살고 있소.”

  소령에게 있어서 사태는 점점 어렵게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국적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았던가?”

  “왜 해야 하나요? 그런 걸로 걱정해본 일이 없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러시아 국적인가?”

  멘델은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 귀찮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대답해버렸다.

  “그런 것 같소.”

  놀라고 화난 소령은 삐걱거릴 만큼 난폭하게 의자 뒤로 몸을 젖혔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적의 대공세 이후로 전쟁은 치열한, 1915년 말의 이 마당에 오스트리아의 소도인 비엔나를 러시아인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활보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에다 편지를 쓴다! 경찰도 이 음모를 모르고 있다니! 그런데도 바보들은 신문에다 콘라드 폰 훗첸도르프와 7개국 연합군을 거느리고 바르샤바로 진격하지 않느냐고 쓰고 있다. 군 고위층들은 군대의 동향이 하나하나 러시아에 염탐된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중위가 발소리를 내며 방을 가로질러 소령의 자리에 왔다. 지금까지의 친밀하던 대화가 일변하여 심문으로 변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왜 적국 사람이라고 신고하지 않았나?”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함을 모르고 있던 멘델은 유태인 사투리로 대답했다.

  “신고하다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소령은 이 대답을 도전으로 간주하고 위협하듯이 물었다.

  “아무데나 붙어 있는 경고문을 읽지 못했단 말인가?”

  “못 봤소.”

  “그럼 신문도 읽지 않는가?”

  “안 읽소.”

  두 장교는 마치 하늘에서 자기네 사무실로 달덩이나 떨어진 것처럼, 거북살스럽게 땀을 흘리고 있는 야콥 멘델을 보았다.

  그리고 나선 전화기가 울렸고 타이프라이터가 틱택거렸으며 전령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멘델은 보초의 감시 아래 가까운 막사로 옮겨졌다. 거기에서 집단 수용소로 보내어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두 병사가 따라오라고 명하자 그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금빛 레이스의 칼라에 목소리가 거친 그들이 그를 어쩔 셈이었던가?

  멘델이 살고 숨쉬고 존재하던 책의 세계에는 전쟁이 없었다.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있는 것은 이름과 저자 이름의 나날이 더해져가는 지식뿐이었다. 그는 군인들을 따라 기꺼이 층계를 내려갔다. 그들의 임무는 우선 경찰서로 데려가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경찰관이 그의 주머니에 든 책을 빼앗고 수백 가지의 중요한 메모와 고객의 주소가 적힌 서류를 조사하자 그는 이성을 잃고 주먹을 휘두르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두 손을 묶어야 했다. 이 싸움으로 그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없으면 하루도 저 책의 놀라운 세계를 볼 수 없는 이 마법의 망원경은 바닥에서 박살이 났다. 이틀 뒤 변변치도 못한 차림 그대로(입은 거라고는 가벼운 여름 외투뿐이었다), 그는 코모른에 있는 러시아 민간인 유치장으로 구치되었다.

  야콥 멘델이 책과의 인연을 끊긴 채, 돈 한 푼도 없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인간 쓰레기들과 지낸 2년간의 유치장 생활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하나도 없다. 새장에 든 독수리의 고통으로 이 기간의 멘델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 주정뱅이 같은 발작 이래로 세계는 전쟁 중에 휘두르는 권력의 횡포와 잔인성과 더불어 군대에 복무한 시기를 놓친 자들, 남의 나라를 고향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방인들, 그리고 퉁그스족이나 아로카니아 (풀이 : 칠레 중부의 중남미 토인들)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던 저 권리 - 시간이 허락하면 도망칠 수도 있는 권리 -를 박탈당하고 신성한 보호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는 철조망 뒤의 이 수백만의 무리가 사실은 가장 쓸모없고 구제할 여지없는 무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런 반문화적 죄악은 프랑스나 독일, 영국, 그리고 광란에 빠진 모든 유럽의 교전 국가에서 뻔뻔스럽게 자행되었다.

  최학의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에 그를 다시 이 정신세계로 돌아오게 하는 기회가 없었더라면, 야콥 멘델도 다른 무고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외양간 같은 유치장에서 사라지고 말았거나, 미쳐버리고 말았거나, 이질이나 체력고갈, 아니면 뇌연화증으로 죽고 말았으리라. 그가 사라지고 난 뒤 굉장한 고객들의 편지가 카페 글루크로 배달되었다. 그 중에는 쇤베르 백작도 있었고 스티리아의 주지사(州知事)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그는 문장학(紋章學) 계통의 수집광이었다. 신학대학의 전임 학장인 지이겐펠트도 있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틴의 주해서를 쓰고 있었다. 에들러 폰 피세크는 80 고령의 퇴역 제독으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었다. 이들과 그밖의 유명인사들은 멘델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의 전 거주지로 편지를 보냈다. 그 가운데 몇 장은 코모른에 있는 유치장으로 온 것도 있었다.

  그들은 유치장의 소장에게도 손을 썼다. 이 인정 많은 소장은, 안경이 깨어졌지만 돈이 없어 새 안경을 사 쓰지 못해 거의 장님에 가까워 마치 두더지처럼 가엽고 멍청하게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이 더러운 러시아계 유태인에게 그런 저명인사의 편지가 날아오는 걸 보고 크게 놀랐다. 꼴이야 어떻든 그런 저명한 고객이 있는 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소장은 앞을 제대로 못 보는 멘델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해답을 써주었다. - 해답은 멘델에게 유리하도록 영향력을 발휘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 저명인사들은 수집가의 단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군 당국에 줄을 대어 (이 적국인의 행동을 보증한다는 것이었다.) 1917년 멘델을 다시 비엔나로 풀려나게 할 수 있었다. - 코모른에서 2년 이상을 보낸 다음이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었다. 매일 경찰에 자신의 행동거지를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건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시 한번 그의정든 다락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다시 책을 만질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카페 글루크의 테이블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치장에서 돌아온 그의 모습은 스포르쉴 부인의 말을 직접 인용하기로 한다.

  “어느 날 - 아이고, 예수님, 마리아님, 요셉님. 제 눈이 어떻게 됐습니까? - 문이 조금 열리고 (그 양반의 문 여는 버릇은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그 사이로 불쌍한 멘델씨가 들어왔어요. 그는 형편없이 낡은 군복을 입고 누가 버린 것인 듯한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칼라도 없었어요. 얼굴은 꼭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머리카락도 얼마 남지 않은 채였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똑바로 자기 테이블로 걸어가 군복 저고리를 벗었습니다. 그러나 전처럼 민첩하지는 않았다오. 힘이 없어서 헐떡거렸으니까요. 책도 하나도 없었어요. 아무 말없이 자리에 앉아 움푹하고 표정이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지요. 우리가 독일에서 그 양반 앞으로 온 인쇄물을 한 꾸러미 갔다줬더니 그걸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옛날 같지 않았다오.”

  그렇다. 그는 옛날의 마술적인 도서목록의 천재는 아니었다. 그 시절에 멘델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물겨운 이야기만 내게 들려주었다. 무엇인가 회복불능이었고 그도 파면이었다. 전쟁이라는 핏빛의 혜성이 그의 조용한 책의 세계로 날아온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인쇄물만 보아온 그의 시력은 철조망이 쳐진 인간의 마구간에서 형편없이 감퇴되어 있었다. 책 속에다 그처럼 열렬하고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던 그의 눈엔 이미 한꺼풀의 베일이 씌어져, 조심스럽게 새로 맞춘 안경 속의 눈은 핏발이 서고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을 그처럼 정교하게 돌던 기억의 톱니바퀴는 부서져버린 것 같았다. 그의 기능은 전과 같지 않았다.두뇌의 구조란 정교한 것이다. (극히 부서지기 쉬운 물질로 만들어진 배전판이나 쉬 망가뜨려지는 정밀기계와 같은 것이다.) 소동맥 하나의 폐색, 신경총 한 가닥의 혼란, 세포 하나의 노쇠, 심지어는 미분자 하나의 전위조차도 두뇌의 톱니바퀴를 정지시켜 제대로 조화된 동작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멘델의 기억 속에서, 지식의 배전판 위에서 실마리는 풀려나가지 않았다. 혹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연상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씩 고객이 멘델을 찾아왔지만 야콥 멘델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대답하기도 전에 질문을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마치 세계가 전과 같은 세계가 아니었듯이 멘델은 옛날의 책장수 멘델이 아니었다. 그는 읽는 일에다 정신을 완전히 집중시킬 수 없었고 전처럼 고개를 앞뒤로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꼿꼿하게 앉아 인쇄물에다 눈을 주고 있었다. 읽는 게 아니었다. 그저 명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스포르쉴 부인은, 멘델이 이따금씩 책 위에다 머리를 떨어뜨리고 대낮에도 잠이 들거나 몇 시간이고 멍하니 백열들에서 대체된 아세틸렌 등불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석탄 기근으로 전기는 쓸 수 없었다.)

  멘델은 옛날의 책장수 멘델이 아니었다. 여덟 번째의 불가사의도 아니었다. 이제는 늙고 지치고, 그러나 아직은 숨쉬고 있는 수염과 낡은 누더기의 늙은이로 거기 옛날의 델피 탁선(託宣)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카페 글루크의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운 허수아비, 재수없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카페의 새주인 플로리안 구르트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 중에 밀가루와 버터로 돈을 번 사람이었는데 스탄트하르트너에게서 그 당시 급속하게 평가절하하던 그라운화(貨) 8만에 카페 글루크를 사들인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식으로 고쳤다. 낡은 부분을 새로 장식하고 새틴 천을 씌운 의자를 들여왔으며 대리석 포치를 만들고, 카페를 확장하고 댄스홀을 만들 수 있는 땅을 사려고 이웃과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이같이 카페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그가 기생충같은 장애물인 데다가 전쟁 중에는 당국에 고발되고, 아직도 적국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갈라시아의 더럽고 늙은 유태인 야콥 멘델을 좋아할 턱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커피 두 잔과 빵 너댓 개 밖에 먹지 않았다. 스탄트하르트너는 이 장기 고객에 대해, 멘델이야말로 중요한 인물이고 이 카페에서 영원히 보호해야 하며, 부담이기는커녕 재산 목록으로 생각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하며 새주인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플로리안 구르트너는 새가구와 최신형 금전등록기를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와 전후(戰後)의 까다로운 분위기를 노려 전 주인의 완고한 경영 방침에서 멋진 커피하우스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제거했다. 그는 이런 요소를 자기 업소에서 몰아내는 데 핑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좋은 핑계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야콥 멘델은 이미 철저하게 몰락해 있었다. 남아 있던 예금 잔고는 전후의 인플레이션으로 곧 바닥이 났다. 그의 단골손님들은 전쟁 중에 전사하거나 알거지가 되었거나 실종되었다. 그는 옛날처럼 책을 짊어지고 집을 방문하며 팔아볼 생각도 했다. 그러나 책을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거지가 되었다는 징후는 면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레스토랑에서 배달해주는 점심도 먹을 수 없었고 카페 글루크에서 먹는 점심과 저녁도 거르기 시작했다.

  그의 지불은 3주일간이나 늦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석 웨이터는 구르트너에게 “멘델의 보따리를 싸게 하자” 고 말했다. 그러나 스포르쉴 부인이 끼어들어 지불 보증인이 되었다. 그가 갚지 못할 경우에 부인의 임금에서 제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악의 경우는 면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나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언젠가 수석 웨이터는 빵이 계산보다 더 빨리 없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혐의는 자연히 멘델에게 갔다.

  수석 웨이터는 난로 뒤에 숨어 감시하다가 이틀 수 현행범으로 멘델의 덜미를 잡았다. 이 불청객은 카드 룸에 있는 자기 자리 앞쪽의 카운터 뒤로 숨어들어가 빵 바구니에서 롤빵 두 개를 들고 다시 카드 룸으로 돌아와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혐의가 굳어졌지만 멘델은 빵없이 커피만 마셨다고 주장했다. 손해액이 추정되었고 웨이터는 이를 주인에게 보고했다. 멘델을 제거할 구실에 기분이 흡족해진 구르트너는 공개적으로 그를 도둑으로 몰고 경찰에 넘기지 않은 것만도 자기 마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당신 발로 여길 나가시오. 두 번 다시 이 카페 글루크에서 당신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하고 플로리안은 소리쳤다.

  야콥 멘델은 부르르 떨었지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물건을 그대로 두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고 말았다.

  “무서운 일이었어요.” 하고 스포르쉴 부인은 말했다.

  “그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는 우뚝 서서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 올렸어요.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지요. 코트를 입을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1월이었어도 말입니다. 모질게 추웠어요. 선생님도 전쟁이 끝난 그해 겨울의 모진 추위를 기억하실 거예요. 너무나 당황한 그는 읽고 있던 책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채 사라졌어요. 처음에는 저도 그걸 보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책을 집어 그를 따라 나섰어요. 그러나 이미 문 앞에서 사라진 뒤였어요. 따라갈까 했지만 구르트너씨 때문에 겁이 났어요. 구르트너씨는 문 앞에 선 채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어요. 군중이 모여들었죠. 나는 지금까지도 부끄러워요. 전 주인 같았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지요. 스탄트하르트너씨 같았으면 배고플 때 빵 몇 개 들어다 먹었다고 해서 그를 쫓아내진 않을 거예요. 오히려 얼마든지 먹으라고 했을 거예요.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영악해졌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손님이었던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내쫓다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짓은 하나님 앞에서 대답할 성 싶지도 않아요!”

  이 선량한 노부인은 흥분한 나머지 특유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우며, 스탄트하르트너씨가 카페를 팔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막으려고 멘델은 어떻게 되었으며 그 뒤에 멘델을 다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 질문이 그녀를 더욱 흥분하게 했다.

  “선생님도 이해하시겠지만, 매일 그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간다우. 그때마다 저는 생각하지요. ‘이 불쌍한 멘델씨는 어디로 갔나.’ 하고. 여기 있었더라면 나라도 그를 불러 따뜻하게 먹을 걸 장만해줄 수 있을 텐데 - 어디서 돈을 구해 먹을 걸 사들이고 방을 따뜻하게 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는 한, 그에겐 이 세계를 온통 다 뒤져봐도 친척이 없어요. 그리고도 세월이 얼마간 흘렀지만 그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가 이제 이 세상을 하직했으며 이제는 다시 그를 볼 수 없으리라고 믿기 시작했다오. 나는 그 영혼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25년간이나 사귀어왔지만 그는 한결같이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월 달의 어느 날, 아침 7시 30분, 그때 나는 창문을 닦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며 멘델씨가 들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웃거리며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어요. 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눈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의 두 눈을 번쩍거렸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보아버리려는 것처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수염과 피부에 뼈밖에 안 남은 형색이었어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지난 날, 여기에 있던 걸 모조리 잊어버리고 있구나, 서성거리는 모양이 꼭 몽유병자 같다. 그는 구르트너씨에 의해 수치스럽게 쫓겨난 것도, 저 빵 사건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구나.’ 다행히도 구르트너씨는 출근하기 전이었고 수석 웨이터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멘델씨에게 달려가 주의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에 저 악당을, (하고 그녀는 누가 엿듣고 있을까봐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고쳐 말했다), 아니, 구르트너씨 말입니다, 또 만났다간 또 한번 길가로 쫓겨날 판이거든요. “멘델씨” 하고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무서운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낸 것 같았습니다. 그는 기가 질려 떨기 시작했어요. 손뿐만 아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와들와들 떠는 것이었어요.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으나, 나가자마자 포도 위에 그대로 쓰러져버렸어요. 우리는 전화를 걸어 엠블런스를 불렀습니다. 같이 온 간호부는 그가 고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사는 양폐렴(兩肺炎)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카페 글루크에 왔을 때부터 그랬지만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는 꼭 몽유병자처럼 카페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3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앉던 책상이 고향처럼 그의 발길을 끌고온 것이랍니다.”

  이 이상한 사람, 멘델을 마직막까지 기억하는 두 사람, 스포르쉴 부인과 나는 오랜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이 갈라시아의 책장수에게서 최초의 정신 세계에 모든 것을 바쳐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카페 화장실의 청소부이며 평생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한 이 늙은 여자는 우연히 멘델을 알게 되어 25년간이나 오버코트를 손질해주거나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었다. 우리 두 사람 역시 묘한 인연이었다. 그러나 스포르쉴 부인과 나는 버려진 그 대리석판의 테이블 앞에서 우리가 나누는 잊혀진 공동의 추억담으로 꽃을 피웠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추억들이었고 우리들의 옛이야기는 언제나 일치했다. 이런 이야기 도중에서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맙소사, 내 정신 좀 봐. 구르트너씨가 내쫓을 때 그가 책상 위에 펴두었던 책은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할까 망설였지만 아무도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없어서 큰마음먹고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었다오. 잘못한 건 아니지요, 선생님?”

  그녀는 자기 일에 필요한 도구창고로 달려가 책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책과의 대면은 한 인생의 조그만 아이러니와의 대면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고서 수집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하인의 탁월한 저서였다. 사라져버린 마술사의 유산인 이 책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기도서가 아닌 바에야 어떤 인쇄물이든 그렇게 철저하게 낡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 표정은 당황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고귀한 영혼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랐으니까. 그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책은 제가 가져도 좋은 거지요. 선생님!”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입니다. 간직하십시오. 우리의 옛 친구 멘델은 자기 책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처럼 겸손하고 단순하게 이미 고인이 된 학자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늙은 부인에게 나 자신을 비교해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배우지 못한 여인은 적어도 추억의 징표로 그의 책을 가지고 있지만 소위 교육받은 사람이며 작가라는 나를 몇 년 동안이나 그 멘델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적어도 한 사람이 책을 쓴다는 것은 사후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인생의 가혹한 운명인 무상과 망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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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5-03-1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자신도 고서 수집가겸 장서가였었죠.. 마치 츠바이크 자신의 이야기인것 같아 한편으로는 씁슬하네요(자신의 장서 모두를 포기하고 피난길에 올라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balmas 2005-03-13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처음 뵙는 분이네요. 카~~~ 아이디가 많은 걸 말해주는군요.^^
잘 읽으셨다니 다행이고, 앞으로도 종종 뵙기로 해요. :-)
 
 전출처 : 인간아 > 거대한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 허창영 /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

거대한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의 정책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나 ② - 정착촌과 고립장벽
허창영/ 인권실천시민연대 간사
[편집자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중동문제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팔 분쟁 관련 국내 보도는 외신 등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미디어다음은 이 같은 점을 감안, 인권실천시민연대가 기획한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인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인권실천시민연대(www.hrights.or.kr)는 현지 활동과 해외 언론 모니터, 학술 연구 자료 조사 등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단체입니다. 미디어다음은 이-팔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다만 이 단체의 시각은 미디어다음의 시각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미디어다음은 이 시리즈에 대한 반론도 언제든 수용할 것임을 밝힙니다.

<게재순서> 1. 팔레스타인의 땅, 이스라엘 검문소
2. 이스라엘의 정책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나 ① - 학살, 강제구금, 고문
3. 이스라엘의 정책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나 ② - 정착촌과 고립장벽
4. 언론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을 왜곡하나
5. 반가운 평화무드, 도사린 긴장감
6. 한국도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에 관심 가져야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은 영토문제다. 이스라엘은 성서의 기록을 근거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팔레스타인은 2000년 동안 살아왔던 역사적 근거를 들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이라는 땅을 놓고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학살과 고문, 자살폭탄공격 등 우리가 말하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모든 것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놀라운 변화
확장되는 이스라엘과 축소되는 팔레스타인. [사진=Health, Development, Information and Policy Institute(HDIP)]

팔레스타인 분쟁은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과 궤를 같이 한다.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지역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국가 건설이라는 시오니즘의 주장이 서구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결국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입은 UN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6.6%를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에게 56.4%를 할애하는 ‘분할안’을 채택한다. 유대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유대국가’를 최초로 인정하는 이 결정을 환영하고 이스라엘을 건국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87.5%를 소유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은 이런 ‘분할안’을 거부한다. 이-팔간 입장이 어떻든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경계가 처음으로 그어진 것이다.

이후에도 소위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고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더욱 축소된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집트를 선제공격하는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 전쟁’을 통해 가자지구, 서안지구, 골란고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고 동예루살렘까지 합병하면서 기존 이스라엘 지역의 3.5배를 점령한다. 같은 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42호 결의를 통해 점령지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유엔의 결의를 ‘일부 지역에서의 철수’로 해석한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상이 있은 후 일부 영토는 반환했지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함으로써 지금까지 분쟁의 씨앗을 낳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을 잠식하는 ‘유대인 정착촌’
1967년 전쟁을 통해 새로운 땅을 획득한 이스라엘은 점령지를 실 주거지로 만드는 ‘유대인 정착촌’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유대인 정착촌 정책은 팔레스타인 땅에 마을을 건설해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이다.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 정착촌’은 결국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으로 이어진다. [사진=The Grassroots Palestinian Anti-Apartheid Wall Campaign]
1967년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던 모세 다얀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찢겨진 도시를 재통합했다. 우리는 성지를 다시 찾았고, 이 성지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데, 이 선언이 상징하듯 점령 직후 당시 집권당인 노동당 정권의 정착촌 정책이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된 곳은 동예루살렘이었다.

이스라엘은 당시 3만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기 위해 6000명 이상을 추방했다. 워싱턴DC의 '팔레스타인 정책분석센터'는 당시 이스라엘이 몰수한 토지는 동예루살렘에서 건축이 가능한 토지면적의 약 26%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유대인 정착촌 정책은 이후 점령지 전역으로 확대된다. 캠프데이비드 협상에 따라 철수한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등을 제외하고도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가자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에 건설된 정착촌의 숫자는 분류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200개 이상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착촌 정책을 활성화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을 정착촌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비롯해 유럽, 미국,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까지 정착촌으로 이주해오고 있다. 또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들을 정착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사 비용 제공과 저리의 고액 융자, 저렴한 주택 구입 지원, 세금 7% 공제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의 정착민의 증가, [출처=이스라엘 통계청]


동예루살렘에서의 정착민 증가, [출처=Palestinian Academic Society for the Study of International Affairs(PASSIA)]

정착촌 정책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착촌 건설을 위한 토지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강압적 몰수이다. 1967년 이스라엘은 군포고령 58호를 통해 6일 전쟁 당시 피난을 떠난 모든 사람을 ‘부재지주’로 간주하고, 부재지주의 모든 재산은 ‘포기한 재산에 대한 이스라엘 관리인’에게 ‘양도’한다고 발표했다. 결국 1973년 총 431,333㎢에 이르는 땅이 이스라엘 정착민과 정착촌을 위해 ‘양도’되었고, 이후에도 정착촌 건설을 위한 토지몰수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양도는 1978년 10월 10일자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에 인용된 유대인 정착민의 증언처럼 법률로 명문화되고 제도화된 ‘강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되고 있다.

“여기 요르단 계곡에서 우리는 수㎢를 경작한다. 그 곳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토지이다. 6일 전쟁에서 요르단으로 피난한 나블루스와 투바스 주민인 이 사람들은 유대아와 사마리아(서안지구)로 되돌아 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 목록이 국경 검문소에서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착촌들을 연결하는 관통도로는 정착촌의 또 다른 문제다. 관통도로는 유대인 정착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작업장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도로들은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분할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83년 공포된 이스라엘의 군포고령 50호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이 정착촌과 관통도로들로 이리저리 찢겨진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중동판 ‘게토’라 불리는 고립장벽
보안장벽인가 인종차별벽인가
이스라엘이 건설하고 있는 거대한 ‘장벽’도 이-팔 문제의 핵심이다. 서안지구를 중심으로 건설되고 있는 이 장벽에 대해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로부터 이스라엘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한 ‘보안장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 국제사회는 ‘고립장벽’ 혹은 ‘인종차별장벽’이라며 건설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건설하고 있는 중동판 게토(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 차별정책에 따라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라는 비난도 일고 있다.

지난 2002년 6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이 장벽은 높이가 5-8미터에 이르고, 총연장이 730k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장벽 건설이 완료될 경우 서안지구 전체면적의 16.6%, 팔레스타인 사람들 약 23만7000명이 장벽 사이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완전히 고립되는 수도 16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장벽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동예루살렘 안에 있는 직장, 학교를 다니는 데 큰 불편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응급환자가 생겨 병원을 가야 하는 때에도 검문소의 ‘보안검색’에 막히는 경우가 있다. 팔레스타인 현지 활동을 벌인 홍미정 교수가 보고서에서 지적했듯 걸핏하면 검문소를 닫아 오가는 길을 막기 때문에 고용과 건강, 교육 전반이 위협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거대한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사진=The Grassroots Palestinian Anti-Apartheid Wall Campaign]

장벽 건설은 또 다른 영토 확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모니터에 따르면 장벽이 건설되는 위치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더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에 기여하고 있으며, 또한 경계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장벽 건설 부지로 이용하기 위해 가옥을 파괴하고, 농경지를 훼손하고 있다고 한다.

장벽 건설로 심각한 생존 위협을 느끼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단식투쟁을 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7월 9일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장벽이 “점령지 거주민들의 이동권과 직업선택권, 교육 및 의료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아울러 “장벽으로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의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같은 달 20일 유엔총회 제10차 임시특별위원회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스라엘의 장벽 철거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더구나 이스라엘 고등법원도 보안을 내세워 마을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렇다 할 입장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이 팔레스타인 테러를 옹호하고 있다”며 장벽 철거를 거부했고, 장벽 건설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살폭탄 공격 비판받아야 하지만...
이스라엘의 양보 없이는 평화도 없다
이스라엘이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난민으로 전락해 가지지구와 서안지구 난민촌을 비롯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으로 떠돌고 있다. 유엔난민구호사업기구(UNRWA)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 6월 30일 현재 팔레스타인 난민수가 400 만명에 이르고 있다. 만화 저널리스트 조 사코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자지구 자발리아 난민촌에는 2㎢의 땅에 65만명이 살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라고 보고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대부분 한국의 ‘달동네’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일부는 텐트에서도 생활하고 있다. 난민촌은 전기와 수도, 난방 등 사회기반시설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 바로 옆에 있는 유대인은 정착촌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진=The Grassroots Palestinian Anti-Apartheid Wall Campaign]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착촌과 고립장벽 건설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팔레스타인들의 생존영역을 파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정책변화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정책과 이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이 있는 한 팔레스타인 평화는 요원하다.

세계 각지의 비판적인 여론을 보더라도 ‘점령군’인 이스라엘이 먼저 양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힘에 바탕을 둔 일방적 점령정책은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는 사실은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또 더 강한 억압은 더 강한 저항으로 되돌아오기 쉽다. 이는 생활환경이 가장 열악한 가지지구에서의 저항이 심하고, 정착촌 정책이 강화되고 고립장벽 건설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촉발된 2차 인티파다에서 팔레스타인이 ‘자살폭탄공격’이라는 극단적 저항을 투쟁방식으로 선택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무고한 민간인까지 희생양으로 삼는 ‘자살폭탄공격’이 비난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한 인권단체 관계자의 지적처럼 “고립장벽 건설을 중단하고, 일상적인 군사작전을 중단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지적은 틀리지 않아 보인다.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인 하마스도 샤론 총리와 압바스 수반의 정상회담 이후 이스라엘측이 정착촌과 고립장벽을 중단하고 팔레스타인 자치도시들에서의 군사작전 중지와 저항단체원들에 대한 추격 중단,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을 선행할 경우 얼마든지 휴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샤론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보수 세력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존재하는 베첼렘(B'Tselem, 점령지역인권을위한이스라엘정보센터), 구쉬 샬롬(Gush Shalom), 지금 평화(Peace Now)등의 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고립장벽 건설 반대 ▲가옥파괴 대응 ▲이스라엘군의 인권침해 증거 수집 ▲수로와 수도관 연결 지원 ▲팔레스타인의 올리브 수확 지원 활동에 대해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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