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쎈연필 > 헌책방 아줌마가 연 작은 전시관

▲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서 - 깊어가는 저녁입니다. 가로등 불빛이 켜진 배다리 헌책방거리 밤 모습입니다. 사진에서 오른편 가운데에 있는 곳이 바로 <아벨서점>입니다.
ⓒ2003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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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든 먹고 살지 못하겠어요?" 하던 <아벨서점> 아주머니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책장사 하면서 어떻게 하든 먹고 살 수는 있지 않겠느냐고, 힘들면 힘든 대로 힘듦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여서 자기 것으로 삼으면 언젠가는 조금 살림이 피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합니다.

한 평을 겨우 넘던 자그마한 책방을 꾸리던 젊은 아가씨였던 <아벨> 사장님은 이제 스무 평이 넘는 조금 넓은 책방을 꾸리는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일을 돕는 분도 여럿 계십니다.

묻히거나 사라질 뻔한 수많은 헌 책을 건져내온 서른 해가 넘는 세월입니다. 책이 좋아 헌책방을 열었다지요. 책 사러 오는 손님이 없어도 자그마한 가게를 빼곡히 채운 책과 함께 있으면 좋았다지요. 책을 사러 오는 손님이 없어 배를 곯아야 했어도 당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은 더없이 푸짐했다는 서른 해 넘는 세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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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간판 - 전시장을 알리는 간판입니다. 전시장 문을 연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뒤에 달았습니다. 낡은 사무실을 빌려서 아주머니들이 손수 공사를 다 하신 뒤 이렇게 간판까지 달았답니다.
ⓒ2003 최종규
스무 해, 서른 해 넘게 헌책방 장사를 하신 분들 가운데 `그땐 몰랐으니 그렇게 귀한 책도 그냥 헐값에 팔았다'고 `당신인들 그런 책을 왜 좀더 오래 갖고 있고프지 않았겠느냐'고, `귀하고 자료 값어치가 높은 책을 요새 팔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퍽 됩니다. <아벨서점> 아주머니는 서른 해 넘는 세월 동안 `그런 드물고 중요하다고 하는 책' 가운데 `팔지 않고 고이 모셔둔 책'이 꽤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앞으로도 팔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책이 흘러온 역사"를 "새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들이 얼마에 팔리는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하는 아주머니입니다. 지난 2003년 1월 첫머리에 문을 연 `아벨 전시관'에는 세 가지 품목을 늘어놓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줍니다.

▲ 박정희 할머님 이야기 - 박정희 할머님은 일제 강점기 때 `한글 점자'를 만든 박두성 씨 딸이자 환갑 나이에 `새내기 화가'로 등단하여 자신이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시각장애인복지관 여는데 바친 분으로 알려지기도 한 분입니다. 박정희 할머님이 당신 아이들에게 그려준 `육아 그림일기'입니다.
ⓒ2003 최종규
하나는 박정희 할머님이 당신 딸아이를 가르치고 기르면서 그려서 읽어주고 보여주었던 그림책. 원본을 전시관에 놓을 수 없어 칼라복사를 한 뒤 크게 뽑아서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림책 줄거리는 이를 잘 닦지 않아 이가 검고, 손도 잘 씻지 않아 손도 검고, 옷도 잘 빨지 않아 옷도 검었던 당신 딸내미에게 지긋한 말투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 닦기, 자기 양말이나 손수건쯤은 자기가 빨래해서 입으면 더 깨끗하게 옷을 입을 수도 있고, 빗질을 잘 하는 방법과 얼굴과 손을 잘 씻는 요령을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딸내미가 깨끗하고 인기 많고 공부도 잘하는 언니를 시샘하지만, 따뜻한 어머니 보살핌에 따라 자기 모습을 찾고 느끼면서 달라져요. 참 평범하고 어디서나 흔히 있는 집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어머니가 손수 그림으로 그려서 아이에게 읽어주고 보여주면서 잘 살아가는 길을 일러주는 그림책을 보니 콧등이 찡합니다.

▲ 그림이야기 가운데 - 딸아이에게 그려서 보여주던 그림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입니다.
ⓒ2003 박정희
다음으로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인천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가 볼거리입니다. 헌책방은 인천에 있습니다. <아벨> 아주머니는 인천에 있는 그 헌책방을 찾는 이들에게 인천이라는 곳이 어떻게 달라져왔는가를 보여주고파 합니다. 나이 어린 아이들은 인천 역사를 잘 모릅니다. 역사를 모른다고 꼭 알아야 하지 않겠죠. 다만 자기가 발 딛고 살아가는 터전을 알아가는 일이 자기를 바로 알아가면서 참답게 살아가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역사를 가볍게 보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예부터 살아오고 지내온 모습을 바탕으로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지난날 우리들 모습을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그 지난날을 바탕으로 현재가 있음을 가르치면 좋아요. 그러는 가운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은가를 아이들 스스로 느끼게 이끌면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헌책방 살림 서른 몇 해 동안 모아오신 잡지들이 볼거리예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나온 수많은 잡지 가운데 우리 역사에 굵은 자국을 남긴 잡지, 남다르거나 재미난 모습을 담은 잡지, 독재자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도 이승만과 미국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만평을 실었던 잡지, 유럽과 미국이 온 지구를 식민지로 삼고 있을 때 `지구가 병을 앓는다'는 만평을 그려서 담은 일제강점기 때 잡지, 이승만 찬가를 부르던 잡지, 미국 찬가를 부르던 잡지…. 그동안 <아벨> 아주머니가 `팔았으면 적잖은 돈을 만질 수도 있었을' 바로 그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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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나 팔라치 지음-태아에게 주는 편지,동천사(1992)>라는 책을 봅니다. 이 책은 1978년에 <사과를 따지 않은 이브,새벽>라는 이름으로 박동옥 씨가 우리 말로 옮겨서 내기도 했습니다.

... 너의 아버지가 두 번째로 전화를 걸었단다. 전화 목소리는 떨리는 음성이었다. 내가 결정을 했는지 어쨌는지를 몹시 알고 싶어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얼마 정도이면 해결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여자가 법적으로 아기를 갖게 되었을 때는 모든 사람이 축하하고 선물을 보내고, 혹시 유산이나 디지 않을까 걱정하며 몸조심하라고 권유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행복한 순간이냐.
그런데 나의 경우는 말문을 막고 서로 쉬쉬하거나 낙태시키라고 노골적으로 권유한다. 나의 심정을 공범자, 아니면 동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어느 때는 불안하기 그지없지만 또 한편으론 누가 이기는가 두고보자는 결심이 서기도 한다 ..


혼인을 하지 않은 여성이 아기를 배었을 때 세상이 그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야기합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여성이 아기를 낳아서 기르려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합니다. 일터에서는 은근히 회사를 떠나주기를 바라고 병원에서는 은근히 아기를 떼라고 부추깁니다. 아기를 배게 한 애인은 `돈을 얼마 주면 되느냐'면서 아기를 떼라고 이야기하고요.

`미혼모'라고 하는 여성은 뱃속에서 자라고 있을 아기에게 말합니다. "누가 너를 약 한 숟갈로 없앨 수 있다고 말하느냐" 세상 사람들에게도 말합니다. "당신들도 모두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느냐"고요.

▲ 낮은 걸상 - <아벨서점> 안에는 책손님이 앉아서 책을 읽도록 놓은 걸상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을 꽂아놓은 자그마한 방에는 아이 키에 맞는 낮은 걸상이 있어요. 손님이 뜸할 때면 꼬마들은 다른 걸상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기도 합니다. (2002.7)
ⓒ2003 최종규
<김 재은 엮음-교사를 위한 삐아제 입문,배영사(1974)> 상하 권을 봅니다. 이 책을 가만히 보니 겉에 `대한서림' 스티커가 붙어 있고 전화번호 국번은 두 자리로 찍혀 있습니다. `대한서림'은 인천에서 가장 큰 새책방입니다. 인천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책방이래 봤자 서울에 있는 중대형 책방 만한 크기이고 교보문고 1/4도 안 되는 크기입니다. 아무튼. 1970년대 인천 책방 흔적을 살짝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는 그 책방 모습이 어떠했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그곳에서 책을 산 사람 느낌이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합니다.

판이 끊긴 <이지누 사진-원천봉쇄,눈빛(1991)>도 만납니다. 사진책은 글책보다 훨씬 적게 팔리고 무척 빨리 판이 끊어집니다. 도서관에서도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사진책이 많다 보니 이런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아낌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을 사서 보아 준 분들이 내놓아서 헌책방에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가 잦습니다. 요즘 나오는 사진책은 주머닛돈이라도 털어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책은 보통 다섯 해나 열 해만 묵어도 찾아보기 힘들고 돈을 더 얹어 준다고 해도 찾기 힘들어요. 좋은 사진책들이 안 나오는 게 아닌데 `책소개(서평)'를 거의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그림책 소개를 퍽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사진책'을 제대로 소개하는 글이나 기사를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 책 자리 잡기 - 한창 공사하던 때(2003.1). 진열장에 놓을 잡지 원본과 속 내용 칼라복사한 것들입니다. 놓일 진열장 위에 자리를 먼저 잡아둔 뒤 자리를 보아가며 하나하나 진열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003 최종규
우리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갑고 조촐하게 담은 좋은 책이라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모두 좋습니다. 어쩌면 요즘 쉽게 만나고 들을 수 있는 책소개는 우리 삶이 녹아든 살갑고 푸진 책을 소개하지 않고 우리 삶으로 다가오는 책소개가 못 되어 살갑고 조촐한 책 이야기를 만나기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볍게만, 너무 장삿속으로만, 너무 재미로만 책을 만나고 다가가고 생각하느라 정작 우리 모습을 담은 조촐한 책은 뒤로 묻히고 헌책방에서도 묻히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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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 아주머니는 함께 일하는 다른 아주머니와 함께 반 해 동안 공사를 했습니다. 전시관 얻을 터를 얻기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셨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을 잘 간수하는 한편 전시관을 열 터를 알아보았다지요. 전시관 터로 쓰기에 알맞은 곳을 알아본 뒤 그곳을 치우고 장판을 새로 깔고 벽에 칠을 하고 진열장을 짤 나무를 맞추고 유리를 맞추었습니다. 진열장 또한 손수 못질 망치질을 해 가면서 짰고요. 전기공사도 아주머니 두 손으로 다했습니다. 전시관을 열기 앞서 한 달 동안은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다는군요. 그러고도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함께 일하는 다른 아주머니 모두 지쳐서 나가떨어지자 전시관 문 여는 걸 한 달 미루고 다 함께 `한 달 휴가'를 내기도 했답니다.

▲ 아주머니가 망치질을 하며 진열장 손보기를 마무릅니다. 돈 좀 더 주고 일꾼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서른 해 넘는 세월 동안 당신 책방의 모든 책장과 책꽂이를 당신 두 손으로 망치질, 못질해서 만들어 오셨고 전시장도 당신 두 손으로 가꿔서 열었습니다.(2003.1)
ⓒ2003 최종규
그렇게 한 달을 쉬고 다시 달라붙어서 전시관 여는 일을 마무리했고 2003년 1월에 비로소 세 가지 볼거리를 갖추고 문을 열었습니다.

전시관 구경하는 삯은 없습니다. 전시관 구경을 하신 분 가운데 `이렇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고 1000원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전시관 임대료나 그동안 준비하느라 든 돈이나 품값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 말씀하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벨> 아주머니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이곳을 찾는 분들이 `책이란 게 이런 거구나. 책이 이렇게 흘러왔구나' 하고 책을 느낄 수 있다면 좋다"고, "지금은 이렇게 어려운 속에서 전시관을 열어서 내 책방을 꾸리고 책을 파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책이란 게 어떻구나 하고 느끼고 책을 좀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전체로 봐서 우리 나라 책 문화도 좀 좋아지지 않겠어요?" 하고 이야기를 하며 전시관 구경하는 삯은 안 받겠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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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 사장님은 이제는 아주머니이고 머잖아 할머니 소리를 들을 겝니다. 가만가만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아벨> 사장님이 `소녀 적에 품은 작은 꿈'을 `나이 쉰 줄을 넘긴 아줌마'가 되어서 이루었다고요. 다만 아직 다 이루지는 않았어요. 아주머니가 품었던 자그마한 꿈 여럿 가운데 겨우 하나를 서른 해만에 이뤘을 뿐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다음 꿈은? 글쎄... 다음 꿈은 어떤 꿈일까요?

헌 책 몇 권 팔아서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 생각을 하는 일로도 힘들다는 헌책방 일입니다. 하루하루 수많은 책을 나르고 만지고 돌보고 사고파노라면 저녁엔 온몸이 쑤시고 힘들고 코를 풀면 코가 시커멓게 나온다는 헌책방 일입니다.

그렇게 몸은 고단하고 지치지만 좋아하는 책이고, 그 좋아하는 책을 여러 좋은 사람들과 즐거이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았다는 헌책방 삶입니다. 그동안은 책 파는 일로 즐거이 책을 나눠왔고 이제는 `현재 파는 책'으로만이 아니라 `책과 사람이 함께 흘러온 시간'으로서 책을 보여주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지 싶어요.

▲ 책방을 찾는 손님이 뜸할 때면 이렇게 낮은 걸상에 앉아서 책을 읽으십니다. 그날그날 들어온 헌 책 가운데 당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요. (2002.봄)
ⓒ2003 최종규
좋은 책은 언젠가는 누군가는 알아내서 헌책방 구석에서 찾아내기 마련이고, 두껍게 쌓인 더께를 닦아내고 가슴 벅차할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랍니다. 읽을거리로 책을 사는 일도 좋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고 되새기고 갈고 닦는 길잡이로 책을 곁에 두는 일도 좋습니다. 책 한 권에 묻어온 흐름을 읽고 우리 사회를 헤아리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내다보는 일도 좋겠죠. 아기자기하며 조용조용 이야기를 건네오는 <아벨> 전시관을 구경하면서 널찍한 책방 가득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삶을 살찌울 책 한 권 만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032) 766-9523

- 국철(1호선)을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린 뒤 찾아가면 됩니다. 동인천역에서 내린 뒤 찾아갈 때는 역에서 나와 십오 미터쯤 앞으로 걸어가세요. 그러면 바로 왼편 뒤에 있는 지하상가 내리막길(계단 없는 비탈길)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지하상가를 다 빠져나온 뒤 오른편으로 꺾습니다. 그곳은 한복과 이불을 파는 누비골목입니다. 이 누비골목을 조금 오래 걸어서 다 빠져나오면 큰 찻길 건너편에 있는 헌책방거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 국철(1호선) 도원역에서 내린 뒤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인천 세무서 앞과 영화여자상업고등학교 옆을 지나가는 길입니다. 첫걸음인 분들은 길 잡고 아무에게나 여쭤 보면서 찾아가시면 좋습니다. 이 길은 배다리 헌책방거리를 뒤에서 들어가는 길입니다.

- 인천에서 살고 계신 분은 동인천 `배다리' 앞을 지나는 버스를 잡아타고 배다리 철길다리 앞에서 내린 뒤 찾아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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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emuko > 저도 이벤트 함 해볼랍니다....긁적긁적....

로드무비 님의 꼬드김에 빠져^^ 저도 함 해볼라 맘은 먹습니다만,

실은 말 꺼내 놓고 아무도 아는 척 안해주심 소심한 저 크게 상처 받고 서재 문도 닫을 지 모릅니다.... ㅠ.ㅜ

생각해보면, 첨 서재란 걸 만든 것도 2003년 11월 경이니 참으로 질기게 오래오래 여기 퍼티고 앉았습니다만 왼쪽 방문객수를 보시면 아시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하루에 소소히 아는 분 몇 분들만 놀러와 주시는 조용한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제가 다른 분들 서재에 놀러가서 몰래몰래 구경만 하고 댓글조차 변변히 못 남겼던 것도 부끄럼쟁이인지라 쉽사리 말도 못 붙혀서였답니다... ㅠ.ㅜ

그럼 대체 이벤트를 할려고 맘 먹는 핑계가 뭐냐 물으신다면, 뭐 5000도 이 속도로는 한참 지나도록 못 가볼테고, 위시리스트 당첨된 책은 아직 받아 보지도 못했고..... 이벤트 핑계대면 아무래도 모르는 분들도 쉽게 인사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속셈에 저도 할랍니다.

형식은 일정치 않구요. 저에 대한 느낌이나 해주시고 싶은 말씀, 혹은 저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첨 오시는 분들도 망설이시지 말고 아무 말이라도 꼬옥 남겨주세요. 여기저기서 얼굴은 봤으나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여러분들 환영입니다. 모른척 하시면 저 정말 울어요...

기간은 2월 28일까지구요. 다섯 분 정도 뽑아서 책 선물 드리려 합니다. 만약 그 정도도 안된다면 ㅠ.ㅜ 접어야죠 뭐.

(세 분은 만원 상당의 책 사드리구요. 두 분은 제가 올린 책 중에서 두 권을 고르시면 됩니다.)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list.aspx?MCID=915792  여기서 고르세요^^

제 서재 놀러 오시는  분들 광고 좀 많이 많이 해주세요....

* 댓글로 남겨 달라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페이퍼로 남겨 주시는게 제가 담에 두고두고 보면서 고마워 하기에도 좋을거 같아요. 그러니 이 카테고리에 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첨 해보는 거라 정신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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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비 '1000만 대 0', 방학은 신분대물림의 적기

[기획] 방학과 빈곤에 얽힌 함수

 

김선영 기자 bono1523@hotmail.com

 

빵 1개, 단무지 2점, 게맛살 4조각, 메추리알 5개. 튀김 2개...
캐비어, 게살 스프, 연어 구이, 등심 스테이크, 시저 샐러드, 생과일 주스, 케이크...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 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의 교육의 양과 질의 차이는, 두 아이가 먹는 이 한 끼 점심 메뉴가 그대로 말해 준다. 사교육비 비율 '1000 : 5', 때로는 '1000 : 0' 인 대한민국의 방학.
이 처참한 비율이 양산하고 있는 것은 빈곤에 빠진 아이들이 헤어 나오기 너무나 힘든 깊디깊은 '함정'이었다.


   
가난, 가난에 의한 교육 소외, 사회적 참여 배제 그리고 또 가난... 이렇게, 한 번 빈곤에 빠진 계층이 가난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절대 빈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을 '빈곤의 함정'이라 한다.

이 함정이 사회에 존재하는 한, 그 사회에 유토피아적인 미래는 없다. 때문에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미래를 위한 정부의 '세 가지' 주요 역점 사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교육, 교육, 교육." '교육'이야말로 빈곤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요한 절단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 해 8월 서울대학교 김대일 교수가 쓴 '빈곤의 정의와 규모'라는 논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빈곤한 이들이 끔찍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확률이 고작 6% 에 지나지 않는 '빈곤의 함정'에 깊이 빠진 나라다. 김 교수는 이 글을 통해 "한국의 저소득층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은 빈곤의 세습성 때문인데, 빈곤의 세습은 고소득층과 빈곤층의 사교육비 지출 차이가 7배정도 혹은 그 이상 나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2005년 1월, 우리 아이들의 겨울방학 풍경 속에서 김 교수가 '빈곤의 늪'의 원인이라 주장했던 '사교육비 지출 차이 7배'라는 말은 참 우스운 모양새가 돼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7배... 7배? 700배라면 모를까. 상상을 초월하는 교육비 지출 차이로 인해 지금 대한민국은, '빈곤의 늪'에서 익사 직전이다.

1000의 아이들

분당에 사는 11살 원준이(가명)는 지금 한국에 없다. 미국에서 열리는 영어 교육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출국했기 때문이다. 원준이 어머니는 원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엔 연간 6개월 정도는 미국에서 영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초등학생이 되니 방학 두 어 달밖에 외국에 나갈 시간이 없다는 게 불만스럽다.

"원준 아빠 직장 때문에 한국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상황이에요. 또 어린 아이만 외국에 두는 것도 맘이 편치 않아 조기 유학 보내는 것도 마음이 안 놓이고요. 그래서 방학 때 짧은 시간만이라도 아이를 현지에 보내 언어를 배우게 하는 거예요. 근데 여름 겨울 합해도 몇 개월이 안 되요, 너무 짧잖아. 아쉬워요, 아쉬워."

원준이가 간 영어 캠프는 3주 코스다. 미국 보스턴의 -원준이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명문 학원'에서 3주 동안 '고급 영어'를 기본으로 문법, 회화, 프리젠테이션 연습 등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학원 수업이 끝나는 5시 이후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하버드의 도시 보스턴에서 프레피(미국 명문 대학에 입학 할, 미 동부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프레피 문화를 익힐 수 있다는 것도 그 학원의 장점 중 하나라고 한다.

겨우 11살인 원준이가 방과 후 혼자 보스턴의 문화를 익혀봤자 얼마나 익힐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즈음, 원준이 어머니는 다시 한 번 원준이가 받고 있는 '수준 높은' 학원 교육을 자랑한다.

"한국 학생들 많은 그런 학원하고는 차원이 좀 달라요. 거긴 일본 상류층 학생들이나 유럽 쪽 아이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한국 학생들이 많은 타 학원과는 달리 분위기도 고급스럽고, 슬랭 같은 저급한 영어도 아이들이 안 쓰고 또 한국말을 전혀 쓸 수 없는 것도 큰 장점이에요. 하버드나 MIT가 학원 앞의 강만 건너면 되는 거리에 있으니까, 아이들이 보고 느끼는 게 다를 수밖에 없고요."

이렇게 남다른 '시청각 교육'을 시키는데 드는 비용은 학원 수강료 270만원, 기숙사비 100만원, 항공료 130만원, 기타 용돈 50만원으로 총 550만원 선. "비용이 부담되시겠어요"라는 말을 건네자, 원준이 어머니는 이내 기자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보스턴 3주 코스는 미국 동부의 혹독한 영어 교육을 받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많이 힘들어하거든요. 그래서 방학 후반기 땐 스트레스도 해소해 줄 겸 다시 3주정도 스포츠를 겸한 영어 캠프에 보낼 예정이에요. 저는 공부만 강조하는 가혹한 부모들을 혐오하거든요. 애들이 좀 놀 줄도 알아야지."

미국에서 돌아올 원준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남아의 고급 리조트에서 승마와 골프, 스킨스쿠버 등의 레포츠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다시 한 번 원준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이들에게 너무나 유익한 최고급 스포츠 교육 코스'였던 것이다.

"남자아이니까 운동도 잘 해야죠. 거기다 식사시간엔 풀코스 요리로 식사 매너까지 가르쳐 주니 금상첨화에요. 거기 오는 아이들과 두루두루 친분도 맺을 수 있으니까, 부모로서 아이의 사교 영역을 넓혀 준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고요."

   
  ▲  해외연수를 떠나는 아이들
이렇게 3주 동안 원준이가 또래 친구들과 '말도 타고, 공도 때리고, 물장구 치는데' 드는 비용은 숙식, 교육 및 항공료를 모두 포함해 총 400만원 선. 그러니까, 겨울방학 동안 11살 원준이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는 대략 보스턴 3주 코스 550만원에 동남아 3주 코스 400만원을 합해 950만원 정도인 것이다. 운동 장비 준비 같은 여행 준비 비용을 합하면, 1000만원도 쉬이 넘어간다.

여전히 비용에 큰 관심이 없는, 원준이 어머니는 "방학 중 웬만한 아이들은 다 이렇게 해외 캠프에 가요. 그래도 나는 학교 수업을 많이 빠지는 행동은 안 해. 방학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하나 둘씩 빠지면 다른 아이들한테 얼마나 피해가 되겠어요?"한다. 꼭 필요한 교육 일정만 마치면, 학교 교육은 뒤로 한 채 바로 외국에 나가버리는 부모들이 많다는 비꼼이었다.

실제로 원준이네 반만 해도 방학이 시작되기 1주일 전부터 해외 연수를 가기 위해 학교를 빠지는 아이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고 한다. 학부모와 담임 선생님의 동의서만 있으면 1주일 정도는 '합법적'으로 결석을 할 수 있는 '체험 학습'이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

"체험학습이라는 게 꼭 1주일로만 한정 돼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게 '교장 재량껏'이라는 단서가 있어서 학교에 말만 잘 하면, 방학 전 2주 방학 후 2주정도 결석을 해도 출석으로 인정을 해 준대요."

원준이 어머니는 원준이 친구, 아름이(가명)가 지난 여름 한 달 가량 학교에 나오지 않고 해외 연수를 갔던 것을 예로 들며, 학교에 '잘만 부탁하면' 한달 정도 학교에 빠지는 것도 가능하다고 귀띔했다. 교육 일정도 마음대로 주무르며, 외국어 공부, 사교 매너 교육, 스포츠 활동에 열을 올리는 '사교육비 1000만원'대의 사람들.

"방학 중 교육 프로그램이요? 대부분이 사적으로 교육받으니까, 특별히 학교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방학 중 학생 참여 프로그램이라면 가끔 있는 스키 대회 같은 게 있긴 하지만, 그것도 아이들이 바빠서 참여율이 높지 않아요. 학교에서 공부시킨다고 해도 학부모들이 싫어해요. 각자 알아서 시키겠다는 분위기죠, 뭐."

서울의 한 사립학교 선생님의 말은 이렇게 '사교육비 1000만원 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교육하는지를 , 그들이 우리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를 잘 웅변해주고 있었다.

5의 아이들

문정동에 사는 예림이(가명) 엄마는 얼마 전 초등학생인 딸, 예림이와 심하게 다퉜다. 아니 어린 딸을 심하게 혼냈다.

"아이가 수학교습소에서 개최하는 스키 캠프에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비용이 25만원이나 하는 거예요. 스키복은 어디서 빌린다지만, 당장 25만원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친정에서 돈을 빌린다 하더라도, 아이 취미 활동 2박 3일에 25만원은 지금 경제 사정으로는 너무 사치였고요. 아이 아빠 밀린 월급이 나온다는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해 봤을텐데, 그것도 기약이 없고... 다른 친구들은 다 가는데 왜 자기만 못 가냐고 떼쓰는 아이를 보면서 제가 너무 무능하고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를 탓한다는 게 괜히 우리 불쌍한 예림이한테 소리를 쳤죠. 아이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엄마가 자기를 혼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눈치 챈 예림이는 쑥스러운지 엄마 뒤에 숨었고, 예림이 엄마는 아이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초등학교 2학년인 예림이는 방학 중 수학 교습소 한 군데를 다닌다.

교습료는 5만원. 사실, 요즘 소위 잘 나가는 학원은 초등학생 수학 단과 학원비만 해도 10만원이 넘는데, 예림이 엄마는 비교적 저렴한 수학 교습소를 선택했다. 아이 아버지가 다니는 화장품 수입 회사가 최근의 경제 한파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지 5개월 째. 많은 월급도 아니었는데, 그 조차도 5개월 째 밀려 있어 가정의 자금 사정이 극도로 안 좋아진 것이다.

예림이 아버지는 현재, 자신의 회사에서 간간이 화장품을 빼와 거리에서 몰래 판매를 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불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의 스키캠프는커녕, 지금 다니는 산수 교습소마저도 끊어야 하는 형편. 사실 9살짜리 꼬맹이의 '산수 교실'이 부모의 도덕성과 바꿀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는데, 아이 아버지는 이렇게 선수를 친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를 많이 하질 못했어요. 부모님이 많이 못 배운 분들이셨고, 워낙 시골 분들이라 제가 학교를 왔다갔다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남들 다 다니는 주산학원 한 번 다니질 못했죠. 꼭 핑계 같지만, 어쨌든 부모님의 그런 태도 때문에 제가 공부를 잘 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산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그래서 저는 제가 밥을 한 끼 굶는 한이 있어도 우리 예림이 산수 교실은 보내려고 합니다. 저처럼은 안 만들 거예요."

아이가 학원 가방을 들고 "열띠미 하고 오게뜸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매서운 겨울 바람도 잊은 채 신이 나서 장사를 하는 예림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에게 5만원짜리 산수 교습소는 그들을 미래로 이끌어 주는 희망의 끈이었다. 설령 밥을 굶는 상황이 와도 절대 놓고 싶지 않은 마지막 남은 희망의 끈...

예림이는 이렇게 자신의 손에 희망의 끈을 꼬옥 쥐어주는 부모님이 계시는 행복한 아이이다. 공부하고 싶어도, 가족들이 훼방을 놓는 연주(가명)에 비한다면 더더욱.

0의 아이들

청주에 사는 연주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장래 꿈이 비행기 승무원이라는 연주는 세계를 누비는 멋진 승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학원? 해외연수? 연주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쳐 주는 교회 공부방으로 간다.

"학교에서 컴퓨터나 영어 같은 것 가르치기도 하는데요, 그것도 돈을 내야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선생님이 이것저것 물어 보면 다 공짜로 가르쳐 주시니까 진짜 좋아요. 아빠랑 오빠가 집에 있으면, 공부해 봐야 뭐가 달라지냐고 미용 기술이라도 배워서 빨리 돈을 벌라고 소리만 지르는데, 여기에 와서 선생님한테 비행기 승무원 이야기도 듣고 하면 제가 진짜 승무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진짜 진짜 좋아요."

학교에서 제공하는 2, 3만원짜리 방학 교육도 너무 큰 부담이었던 연주. 아버지와 오빠의 성화에 맘 편히 집에서 책 한번 펴지 못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 몰래, 오빠 몰래 집안 살림을 다 해 놓고 공부방으로 달려오는 아이. 14살의 나이로 집안의 어머니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연주는 '가난'이라는 버거운 삶의 무게 때문에 일찌감치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연주네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이고, 어머니는 연주가 5살 때 돌아가셨다. 연주 아버지는 벽돌 쌓는 일을 너무 오래 하신 탓에 오른 쪽 어깨 골절이 다 마모 돼 큰 힘을 쓰는 일을 하지 못하신다. 건설 현장에서 오른쪽 팔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큰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 일.

연주의 아버지는 지난 가을까지, 깜깜한 새벽부터 인력 시장에 바지런히 나가보았지만, 그를 데려가 주는 고용주는 거의 없었다. 추운 겨울이라 더욱 더 일거리가 없는 요즘 연주 아버지는, 폐차 직전 누군가가 거저 준 차에 성인용 비디오 테이프를 잔뜩 싣고 도로에서 장사를 한다.

그런데 돈을 벌기는커녕 그 애물단지 자동차 때문에 연주는 이번 방학 때, 시에서 주는 무료 급식도 못 먹을 뻔했다. 방학 중 무료급식 대상자엔 '자가용이 있는 집은 제외'라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급식까지는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먹을 수 있었는데, 학교에서 하는 방학 중 컴퓨터 교육이나 영어 교육까지는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그 고물차 때문에...

담임선생님께 사정을 말해 볼 수는 없었는지 연주에게 물었다.
"저희 담임 선생님이 참 좋은 분이셔서, 우리 차 때문에 무료 급식도 안 되는 건데 되게 만들어 주셨거든요. 그런데 방학 때 수업까지 공짜로 듣게 해 달라기도 죄송하고, 또 애들은 다 학원 다니느라고 방학 때 학교 안 나오는데 나만 학교 가는 것도 싫었어요.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연주의 대답 속엔, '왜 저의 가난함을 드러내며 누군가에게 무료 수업을 '사정'을 하지 않았느냐고요? 너무 잔인하지 않으신가요?'라는 물음이 숨어있었다. 이제 곧 사춘기에 접어들 14살 연주, 그리고 학교를 일찌감치 그만 둔 연주보다 두 살 많은 오빠 연철이(가명). 한 명은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그 늪 속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빈곤의 함정에 빠진 사교육비 '0' 계층의 모습이다.

오만을 거둬내자! '교육'을 시작하자!

2005년, 한국의 교육 복지는 이와 같다. 한국교육개발원 이혜영 연구원이 '도시 저소득 지역의 교육소외 실태와 분석조사'라는 연구에서 "고소득 지역의 아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는 저소득 지역의 아이들은 (바람직한 역할 모델들의 부재 등으로 인해) 장래에 대한 희망의 부재, 성취 동기의 부재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듯이, 방학 중 사교육비 1000만원인 아이들과 5만원 정도인 아이들 그리고 0원인 아이들은 성장 환경 속의 문화적 자본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방학이 되면 교육 환경의 차이는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아이들은 급식표를 들고 저소득층 무료 급식을 광고하는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먹거나 웬만한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외면하는 방학 중 교내 수업에 쑥스럽게 끌려가 앉아있어야만 한다.

이는 교육의 '질'적 측면은 도외시한 채, '내용이야 어떻든 우리가 공급하지 않느냐'는 식의 오만하기 그지없는 일방적인 행정 편의주의에서 비롯된다. 교육 복지의 초기 단계에서 흔히 지적되는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인 복지의 폐해'가 현재 한국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지난 해 12월 교육인적자원부는‘도시 저소득지역 교육복지종합대책을 발표해 실질적 교육평등을 실현하겠다고 선포했다. 또한 50여개의 시민단체들도 빈곤의 대물림을 끊자는 취지에서 '위 스타트(we start)'운동을 시작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러한 운동들은 그동안 존재해 왔던 방과후 아이들 무료 교육, 무료 급식, 저소득층 소질 개발 교육 등을 중심으로 하고있어 그 형식에 있어서 기존의 교육 복지와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기존의 저소득층 인적 자본 형성을 통한 경제적 경쟁력 확보라는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기든스가 강조하는 폭넓은‘사회적 포용’의 단계로 바짝 다가서고 있다는 것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본다. 지역사회의 촘촘한 네트워크를 통해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배제되지 않게 이끌어 주고, 교육 환경의 평등, 적극적인 복지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전 사회로 퍼지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도 친구들도 저소득층 무료 급식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 동등한 입장에서 교육을 받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지역 사회에서 저소득층을 제대로 파악하고 국가에서 미리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을 함으로써, 그 누구 앞에서도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힘 때문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1000: 0은 너무 가혹하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빈곤의 함정에서 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Please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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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서울대 내 패거리 문화 청산부터"

"서울대 내 패거리 문화 청산부터"
제언 -김민수 교수의 승소에 담긴 의미와 교훈

2005년 02월 18일   기자 이메일 보내기

지난 1월 28일 서울 고등법원은 김민수 교수에 대한 교수재임용거부처분을 취소하라는 제1심의 판결을 수용해 피고인 서울대 총장의 항소를 기각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6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롭게 싸워온 김 교수는 물론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아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승리이다. 재판부의 판결은 대단히 명확해 김 교수가 재임용에 필요한 충분한 실적을 제시했으니 조속히 원상회복하라는 것이다. 서울대도 이번 판결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더 이상 소모적인 법정투쟁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 사건이 가져온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우선 법적으로 서울대가 김 교수의 원직회복과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보상을 원활히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고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책임소재를 밝혀야 한다. 무엇보다도 김 교수 사건이 학내에서 합리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사법적 판단을 구하게 되는 동안 대학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노정됐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짚어서 다시는 이러한 모순이 대학사회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먼저 대학 내의 패거리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 김민수 교수 사건의 발단은 아직도 대학에 존재하고 있는 패거리 문화에서 시작됐다. 그와 학문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몇몇 교수들의 돌팔매질이 시작되고 곧이어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학문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왕따로 자랐다. 김민수 교수가 속한 대학의 교수들은 여러 차례 김 교수와 같이 지낼 수 없다는 의사를 공․사석에서 피력해 왔으며 법원의 준엄한 판결이 내려진 지금도 학내의 다른 곳에 그를 소속시키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6년여 동안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서울대가 입은 권위의 손상에 대해 일언의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아직도 김 교수를 부정하고 원망하는 그들의 패거리 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둘째로 대학 행정과 제도의 합리성을 회복해야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번 사건은 군사정권에 의해 고안됐던 교수 재임용제도의 모순에서 비롯됐으며 서울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특별한 사례이다. 학내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절차상 적법성을 주장하며 약자인 김 교수의 인격과 학문의 존엄성을 7년 가까이 밟아 버렸던 것은 책임을 회피 할 수 없는 일이다. 서울대는 이번 사건을 학내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들을 모두 흘려버렸다. 2000년 1심에서 김 교수가 승소하였을 때, 2004년 4월 대법원에서 김 교수가 승소했을 때 집행부는 양식 있는 학내외 인사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몇몇 강경 법리론자들의 이길 수 있다는 간언과 미대측의 반발을 받아 들여 지루하고 무의미한 법정싸움을 이어가는 길을 택했다. 정운찬 총장은 대책위 교수들과의 만남과 학장회의에서 문제를 학내에서 풀고자 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럼에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우리대학의 제도는 유신시대의 구태와 관행을 벗고 있는가. 대학의 제도와 집행의 실체는 누구이며 책임은 누가 지는가.

 

마지막으로 대학의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의 확립이다. 김 교수 사건은 학내의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있었다면 초기에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4백명이 넘는 학내의 양심적인 교수들과 1천3백여 전국교수들이 서명해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고자 나섰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 교수들의 의견을 학내에서 반영할 만한 조직과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학내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학장회의는 물론 교수협의회 마저도 다수 교수들의 열망을 전달하기에 한계가 있는 것이 확인됐다. 다수의 평교수들의 의견을 합법적으로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보직에 대한 교수들의 미련을 키우게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이제 이런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부끄럽지 않은 대학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최영찬 / 서울대 농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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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2-2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찬 총창이 크게 잘못하는 거죠.
사표 내신 분들의 충정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부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후진 양성과 친일파 청산을 위해 어려운 결심 하셨는데, 당연히 수리를 해야죠.
정총장, 그 분들께 감사패 하나씩 드리고 얼른 사표 수리하세요, 예?
 
 전출처 : 릴케 현상 > 무법천지 깡패집단 서울대의 몽니 2월 21일 10:30

무법천지 깡패집단 서울대의 몽니
2월 21일 10:30

http://www.kimminsoo.org/bbs/zboard.php?id=notice&no=34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미대 디자인학부 교수들의 집단사표를 수리하라!”


1월 28일 고등법원 승소이후 벌써 3주가 지났다. 또한 변창구 교무처장이 1월 31일 기자회견을 통해 ‘전향적인 신속한’ 처리를 약속하며 3월1일자 복직설을 전 언론에 유포한 지도 3주가 지나가고 있다. 이제 3월 1일은 열흘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대학 본부는 아직까지 법의 판결을 겸허히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이제껏 보여준 서울대 본부와 미술대학의 태도는 가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최근 2월 16일 미대는 전체 교수회의를 열어 디자인학부 전 교수들(양승춘, 장호익, 백명진, 권영걸, 이순종 등, 디자인학부 전체 교수명단은 다음의 홈페이지에서 확인바람 - http://design21.snu.ac.kr/_prof/index.min )의 집단사표로 나의 원상회복을 저지하려는 최후의 발악을 자행했다고 한다. 또한 디자인학부 교수들은 나를 ‘기초교육원’으로 보낼 것을 주장했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란 말이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재량권 일탈 남용에 의해 위법한 재임용 거부처분을 취소하고 원상회복시키라는 법원의 판결이 났는데 내가 왜 뜬금없이 기초교육원 교수가 되어야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법대나 의대 교수는 어떠한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몽니가 버젓이 발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사표를 반려한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정운찬 총장과 본부의 태도가 있다. 나의 부당해직 사건이후 6년 반이란 외롭고 고된 법정투쟁을 통해 얻어낸 확실한 법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정총장은 법의 수행을 외면하고 있다. 국립 서울대와 디자인학부는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임을 철저히 무시하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는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가, 무법천지 깡패집단인가!

이번 디자인학부 집단사표 소동은 이성적 학문집단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거리 깡패 조직의 면모를 스스로 드러내고 범죄 공모를 자인하는 꼴이다. 이로써 그동안 무엇이 나의 부당해직 사건을 발생케 했으며 침묵의 카르텔로 학내에서 방관되고 법의 심판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를 재임용 탈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연구심사 보고서 대필의혹사건과 임용비리의 핵심에 있는 권영걸 교수를 학장으로 모셔놓은 미술대학은 스스로 범죄소굴임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당시 부수언 학장(현 명예교수)과 함께 나의 재임용탈락 음모를 획책하고 진두지휘한 실무책임자인 백명진 교수는 현재 교수협의회 부회장으로서 서울대 교수 모두를 범죄의 공모자로 엮고 있지 않은가.

디자인 학부가 집단사표까지 불사하지 않을 수 없는 속내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작년 서울대 국정감사 때 권영걸 학장 대필의혹을 제기한 민노당 최순영의원은 국회청원에 이어 부패방지위원회 제소를 통해 끝까지 전모를 밝힐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나 역시 필요하다면 민형사 소송을 통해서 범죄조직 소탕과 함께 미술대 바로 세우기에 나설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학부의 비리와 범죄공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범죄자 디자인학부 교수들은 집단사표라는 최후의 악수로 정총장을 협박하고 범죄은폐를 종용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지난 2월 3일 ‘김민수 교수 원상회복을 위한 공동투쟁위원회 성명서’에서 요구한 나의 즉각 원상회복 등 5가지 촉구사항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정총장 퇴진 운동은 물론 국립서울대의 최대 위기를 촉발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정총장은 반려했던 디자인학부 교수들의 집단사표를 즉각 수리하고 범죄 집단과의 고리를 단절함과 동시에 과오를 인정하고 시정해야할 것이다. 아직도 서울대라는 기득권 세력을 업고 범죄조직과의 공생을 은폐하고, 역사와 정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가. 그렇다면 추락하는 서울대에 날개가 있음을 전 세계에 확실히 공표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그 결과의 책임은 조직의 수장으로서 정운찬 총장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5. 2. 21.
김 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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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5-02-22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안무치, 파렴치한, 인면수심, 쌩또라이...-_-
저런 사람들에게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지 말고 physical하게 해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_-

balmas 2005-02-2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제 생각은 좀 다른데,
저분들의 뜻을 존중해서 정중하게 사표를 수리하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닐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