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ika > [펌]세계해방신학포럼에서 레오나르도 보프와 만나다
다음은 레오나르도 보프와 나눈 대화 전문이다.
- 당신은 이 해방신학포럼을 제안한 사람 중의 한명이다. 이 포럼을 제안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과거에 3-4년마다 한번씩 모여서 서로 성과를 이야기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1984년 바티칸에 의해서 해방신학이 비난을 받은 이후 이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바티칸은 재정적 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지원 단체들에 압력을 가하였고, 주교들은 감히 해방신학모임을 주선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 해방신학자들의 네트워크는 붕괴하였다.
그런데 세계사회포럼은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우리 해방신학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세계사회포럼의‘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정신은 사실 해방신학의 정신과 아주 흡사하다.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 국제적인 정의, 토지개혁과 토지에 대한 질문 등. 이 모든 것은 해방신학의 주제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사회포럼과 함께 이 해방신학포럼을 기획하게 되었다.”
- 현재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상황은 어떠한가? 브라질 바닥공동체와 같은 해방신학 운동의 상황도 같이 이야기해 달라.
“사실 해방신학은 빈곤에 반대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주장하는 모든 교회들의 대단히 정상적인 신학이다. 또한 인권과 소수부족과 여성과 어린이와 기타 소수자들과 함께 하는 모든 교회 안의 사회 사목자들의 정상적인 신학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신학은 그들이 참고하고 빛을 얻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브라질 바닥공동체(주:브라질 민중들이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자율적인 공동체)의 중요한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브라질에 10만개의 바닥공동체가 존재한다. 또 해방신학은 성서와 자신의 삶을 연결하려는 백만이 넘는‘성서 모임’의 중추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일상에서 살아있는 신학이 해방신학이다.”
- 80년대까지의 해방신학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계승해야 할 것과 검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의 해방신학은 주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착취 받는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에 해방신학은‘가난’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원주민들, 흑인들, 가부장제에 의해서 착취당하는 여성들, 모든 차별의 희생자들, HIV/AIDS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등등. 이 모든 빈곤은 각각의 특별한 억압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각각의 특별한 해방을 요구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이런 각각의 특별한 해방을 다루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교육학)을 만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을 해방하는 방법을 찾고 개발해야 한다. 어떻게 해방하고, 어떤 방향을 택하는 것은 우리 해방신학자들의 역할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나는 생태의 문제로 넘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를 생태-해방 신학자로 규정한다.”
- 당신이 생태-해방신학으로 관심을 옮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 특별히 해방신학은 그 동안 억압받는‘사람’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해 왔는데, 당신은 발제문에서도‘인류 전체’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비슷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사람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고 지구를 착취하고. 현재의 시스템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착취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타자에 대한 어떠한 고려와 존중도 없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부과되고 있는 현재의 착취의 방식은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마실 물이 위기에 처해 있다. 2억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석유와 다른 에너지는 고갈될 것이다. 생태 시스템은 그 내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폭력이다. 우리는 절대 자원을 끊임없이 축적할 수 없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어려움을 직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태 문제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따라서 인본주의 전통과 종교 모두에서 생태문제는 커다란 염려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신학적인 도전이다. 미래가 가능하도록 인류를 다시 교육하기 위한 요소들을 다시 찾고 소개해야 한다.”
- 어떤 사람들은 생태라는 말을 실재가 아닌 메타포로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 환경과 환경보호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생태주의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생태주의의 첫 단계는 물론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고 푸른 지구를 보존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단지 자연뿐만 아니라 전체 생태 시스템을 위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을 보살피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의 문제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진화도 열린 진화로 이해를 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삶은 진화의 순간이다. 또 진화는 삶의 순간이다. 혼란은 생성적이며, 삶을 더 정교하고 공들여 다듬는다.
생태주의는 이런 통일적인 비전이다. 지구는 내재적인 관계들로 구성된 하나의 커다란 시스템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고 서로 의존하며 엮여있다. 인류는 이런 살아있는 과정의 결과이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이것은‘지구헌장’에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는 생태와 윤리와 영성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그렇다면 운동방식에 대해 새로이 제기하는 것이 있는가? 생태주의적 운동방식, 혹은 페다고지로 제안할 것이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새로운 페다고지가 아니라 자연과 삶과 생명을 존중하는 다른 태도, 새로운 비전이다. 사실 우리는 정치적, 상징적, 공학적 폭력, 그리고 지배로 점철되어 있는 과거의 패턴을 버려야 한다. 폭력대신, 우리는 다양성 속에서의 친교, 소통 그리고 시너지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며, 같이 찾아야 한다. 핵심적인 것은 배려, 공동책임 그리고 연민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다고지를 생각하자.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시작하고 바꾸어야만 하는 것으로써 핵심적인 것은 대화다. 그리고 협상이며 교류며 나눔이다.
이런 점에서 페다고지는 우리와 공동의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다. 사실 공동의 집을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이 공동의 집에 있지 못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이들은 공동의 집안에 있지 않다. 포용과 공동의 집을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된 사람들, 주변화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생태주의는 우리 모두가 이런 공동의 집에서 살고 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울로 프레이리 연구소는 생태학교를 만들었다. 글자에만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생태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하는 학교다. 어린이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어떤 단체나 행정기관 그리고 회사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생태적으로 문맹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큰 생태학적 죄를 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