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2)

이어서 데리다가 끌어오는 것은 영어에서 address란 타동사이다. 이 동사는 연설하다 (어떤 사람을) 소개하다 (편지에) 주소를 적다 (편지를) 발송하다 구애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역자는 주로 전달하다라고 옮긴다. 그러니까 address란 동사는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란 뜻을 기본적으로 갖는다. 데리다는 자신의 이 기조연설에서 (데리다) 자신을 청중들에게 address해야 하며,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문제) address해야 한다. 정확하게 우회 없이. 여기서 특별히 정확성을 문제삼는 것은 흔히 편지/문자(letter)는 목적지에 도달하지/전달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해체(주의)의 표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러한 표어 혹은 주제를 이 기조연설에서 address해야 하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아포리아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道斷)을 뜻하는바, 해체의 지배적 관심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그에게 강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해야/전달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그는 그러한 의무를 to enforce the lawaddress란 두 가지 영어표현을 문제삼음으로써 주제화하고 있다. 덕분에 그가 갖게 된 것은 힘과 정확성, 그리고 정의의 독특한 혼합물(36)이다. 이 혼합물과의 대면은 아포리아의 경험 자체를 요구한다. 먼저, 정의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정의의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 구조가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닌 정의에 대한 인지, 욕망, 요구는 자기 자신, 곧 정의에 대한 정당한 호소가 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37) 

 

다시 반복하자면,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포리아적인 경험들은 정의에 대한, 곧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결정이 결코 어떤 규칙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있을 법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인 경험들이다.(37)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법은 정의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권리)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법의 곤궁에 대해 더 파고들어간다. 전달/주소(address)는 방향처럼, 정확성처럼, 올바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데(*주소를 제대로 정확하게 써야 편지/문자는 전달된다. 안 그러면 반송된다), 우리가 정의를 원할 경우, 정당하고자 할 경우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전달/주소의 정확성이다. 그런데,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38)

 

그렇다면, 항상 하나의 독특성과 관계해야 하는() 정의의 행위(법관의 행위)와 필연적으로 일반적 형식을 갖고 있는 정의, 규칙이나 규범, 가치 명령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법에 일치하게(=합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되겠지만, 정의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규칙은 독특성(=단독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고진의 문제틀을 가져오자면, 합법적인 결정/판결이란 건 고유명이라는 단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법은 갑, , 병을 다루지 배용준과 이나영을 다루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 단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데리다는 그러한 확신이 오직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으로만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어서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자신이 처한 언어적 상황(영어권 청중에게 영어로 연설해야 하는 상황)과 계속 비교해가면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까 불어로 말해야 했을 상황이었다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연설의 주제는 제대로 제시/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다르게 제시/전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원텍스트는 불어가 아닌 영어 텍스트이다.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그렇다. 비록 발표문이 최초의 불어원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더라도 이 연설은 영어로 행해졌으며 이 연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to enforce the lawaddress란 두 (우연한) 영어 표현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39, 나의 강조)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정의가 (불가능한) 아포리아인 것처럼.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 언어의 문제는 어떤 판결이 그것을 구성하는 고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졌을 때 발생하는 불의의 폭력을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건 (이 콜로퀴엄의 담론공간을 넘어서) 더 나아가 동물(재판)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데리다 자신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넌지시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동물의 희생은 (인간의) 주체성의 구조에 본질적이며, 또한 지향적 주체의 정초 및 (법이 아니라면 적어도) 법의 정초에 본질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법의 기저에 있는 동물 희생과, 양육과 사랑, 애도 및 사실은 모든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인 전유에서 상호주관성을 구조화하고 있는 상징적이거나 비상징적인 모든 식인 풍습 사이의 친화성(41)과 연계된다(이에 대해서는 애도식인풍습과 관련한, 역자의 용어해설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아주 복합적이며 방대하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간 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42)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걸 통째로 문제삼고 있는 해체를 정의에 관한 윤리적/정치적/법적 물음 및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대립을 유사-허무주의적으로 포기하려는 태도로 간주하는 일부의 피상적인 이해/오해는 (데리다가 강조하거니와) 해체와 무관하다(그들은 엉뚱한 주소지에 가서 해체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이와는 전혀 반대로, (1)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것과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양하고 있으며(가제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앙가제하고 있다).(43) 여기서 불어의 가제 앙가제는 영어의 gage engage로 옮겨서 이해해도 무방해 보인다. 즉 해체는 정의의 요구에 be gaged 돼 있고, be engaged 돼 있다. 그리고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것이 해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주장/변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애초에 그는 법과 힘(폭력)의 관계를 정식화했고, 이어서 정의와 해체의 (아포리아적) 관계를 진술/전달했다. 암기하기 좋게 말하자면, =(폭력)이고, 정의=해체이다. 이제 문제는 이들의 연관성이다. 정의로서의 법에 대해서 해체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에 정의와 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법은 정의가 아니다)이 진정한 구분()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문제는 거기서 종결될 테니까).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집행되어야) 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말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법은 힘 아닌가? 그러니 정의가 힘을 얻는 방도는 그것이 법 안에 자리잡는 것이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48)

 

거기서,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세 가지 아포리아의 기술이 이 연설의 결론부이다. (1) 어떤 결정(=판결)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59)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고,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요구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해서, 이러한 역설로부터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결정이 정당하며 순수하게 정당하다고, 더욱이 나는 정당하다고 현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것이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때 읽은 한 동화에서는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왕비가 되기 위해서인가(동화에서 여자들이 갖는 두 가지 명분이다), 하여간에 한 처녀가 왕으로부터 모순적인 요구를 받는다. 옷을 입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알몸이어서도 안된다. 말을 타고 와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걸어와서도 안된다. 이런 아포리아적인 요구에 대한 현명한 처녀의 해법은 이랬다. 옷을 입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걸쳤고(그건 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벗은 것도 아니다), 말을 타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말에 매달고 끌려왔던 것(적어도 걸어오진 않았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법과 정의 사이에 끼인 해체는 내게 그러한 해법의 모색으로 보인다. 해체는 지혜인가?   

 

그리고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흔히 해체는 결정불가능성과 결부되어 이해되지만, 그때의 결정불가능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와 같은) 단지 두 결정 사이의 동요나 긴장만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라는 두 번째 아포리아인바,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여 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53)

 

만약 현전하는 정의를 규정하는 확실성에 대한 일체의 가정이 해체된다면, 이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으로부터 작동한다. 물론 이 정의의 이념이 무한한 것은 그것이 환원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환원불가능성은 타자로부터, 타자의 (단독적인) 독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렇듯 결정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으며(이 또한 정당하지 않다) 오직 결정(=판결)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이 아포리아의 내용이다(그러니까 정의는 판단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판단의 실행에 있다).  

 

끝으로,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이것이 세 번째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전제로서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이다. , 신중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결정의 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이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는 하나의 광기이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56-7) 따라서 결정은 광기 어린 것이며 신들린(=수동적인) 것이다. 하긴, 정의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 혹은 불가능한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불가능한) 아포리아에 대응하는 것이 광기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데리다가 해체는 이러한 정의에, 정의에 대한 이러한 욕망에 미쳐 있다(54)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나 엄살은 아니겠다. 

 

이상의 세 가지 아포리아를 다시 암기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불가능성] (2)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만 한다.[불가피성] (3)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아주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계산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렇게 판단하고 결정/판결해서는 안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영역하면, Unaccountable justice orders us to account!)(그러니, 정의도 미쳐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해체 불가능한, 현전 불가능한, 계산 불가능한, 그래서 견적 안 나오는 정의의 구조이며 요구이다. 그리고 해체는 거기에 미쳐 있다. ?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59, 나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정의의 요구에 ()들릴 때 우리는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망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책임져 나갈 수 있다. 내가 읽고 정리한 데리다는 일단 거기까지이다

 

04. 12. 26-27.

 

P.S. <법의 힘> 2벤야민의 이름 읽기는 당분간 미뤄질 것이다. 내가 읽기에 2부는 1부보다 수월했으므로 정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1부를 밤새 읽은 것만으로도 거의 미친 짓이었다. 그건 <법의 힘> 읽기를 제안한 최소한의 책임을 떠맡기 위해서였는바, 이쯤에서 나는 그 책임으로부터 면제되고자 한다. 벤야민과 관련해서는 그의 <모스크바 일기>(1926-7)를 구해보고 싶지만, 러시아어로는 번역돼 있는 것 같지 않다(영역은 돼 있을까?). 벤야민에 대해서, 그리고 데리다의 벤야민론에 대해서 몇 마디 하는 일은 다른 계기와 자리가 필요하다.

 

더불어 하름스에 대한 글도 당분간 미뤄질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미리 손봐야 하는 일이 있어서이다. 지난번 통신문에 실은, 기적에 대한 몇 마디는 일종의 에피그라프인바, 본론은 조금 기다려봐야 도착할 수 있을 듯하다. 정의는 기다리지 않지만, 글은 기다려야 한다.

 

모스크바의 날씨가 예년 같지 않게 포근하다(하긴 최근 2년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고 한다). 비까지 내릴 정도이고, 나는 서울에서 챙겨온 내복을 아직 꺼내보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서울보다도 따뜻하다고 말해야 할 듯싶다(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왕이면 (공정하게) 모두에게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1)

아무리 크리스마스이고 연말 정서에 취해 있다고 해도, 법의 힘을 무시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읽은 대목을 정리해두겠다고 해놓고 입 닦는 건 혹 사기죄에 걸리진 않을까? 해서 입막음으로 약간의 시늉은 해두어야겠다. 책들을 펴놓으시길 바란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 책은 지난 7월에 나왔군.) 1부의 제목은 법에서 정의로이다. 제목부터 벌써 기죽이지 않는가? 역자에 따르면, 이는 또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복화술이 법에 고유한 것인지, 데리다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학부시절 법학과 경제학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은 걸 은근한 자랑으로 삼고 있는 나이지만(그러니까 나는 경제를 고의로 무시했던 것인바, 결정적으로 나는 돈 버는 법을 잘 모른다. 안쓰럽게도 이 때문에 고생하는 건 나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이지만), 이럴 때는 (무시가 발각되는 게 아니라) 무식이 탄로날까봐 긴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짐작에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정의의 권리란 말은 데리다의 의도(?)와 무관하며, 다만 프랑스어의 중의적 효과이지 않을까 싶다. 기억에, 본문에서 정의의 권리란 말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치는 않지만(한번 읽었기 때문에), 그럴 법한 것이 데리다가 일차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은 법과 정의의 차이/구별이지 않은가?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37) 법은 계산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다. 산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유한과 무한이다. 따라서 정의의 권리 혹은 정의의 법(불어의 droit권리를 모두 뜻하므로)이란 말은 무한의 유한이란 말로 번안될 수 있으며, 이것은 무한/정의에 대한 법적(?) 침해이다. 법이 정의의 상 아래에서 심판될 수는 있지만, 정의가 법정으로 소환될 수는 없다.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소환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권리를 부여받거나 양도받을 수 없으며 (법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될 따름이다.  

 

저자인 데리다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대로, <법에서 정의로> 1989 10월 미국의 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학술콜로퀴엄에서 발표된 것이고, 이 발표(영어본) 텍스트는 나중에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1992)란 단행본에 수록되었다. 나는 이 책을 제본해서 갖고 있는데, 그걸 구하러 몇 년 전에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십 몇 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법대도서관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법전들을 혐오하는 편이다. 그 일본어투의 한국어들을 말이다. 그런 내가 제 발로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 데리다의 힘이다. 어쨌든 그 영어본과 같이 읽었더라면, 한국어본도 더 쉽게 읽을 수 있었을 텐데(바꿔 말하면 효과에 기대어), 현지사정이 그러하질 못하다.

 

여담이지만, 한국어는 상대적으로 논리적인 언어가 아니다. 구문이 발달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문장에서 성(), (), ()이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남자의 말인지(혹은 여자의 말인지), 한 사람의 말인지(다수의 말인지), 수식어구가 도대체 어디에 걸리는 건지 모호할 때가 많다. 이런 모호성을 법학자나 법학도들은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나로선 궁금하기도 하다. 짐작에 영어나 독어로 옮겨놓고 이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그게 영어/독어로는 이런 뜻이야). 하긴, 우리의 근대법이란 것이 영어, 독어, 일어 법전들을 옮겨온/베껴온 것 아닌가? 법률용어들의 한글화 내지는 한국어화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는 것은 그 때문 아닌가? 거꾸로 말하면, 우리 6법 전서들의 말은 한국어의 외양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외양조차도 상당히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이어서 법의 문턱은 너무 높다(해서, 한국인들은 법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아래에 있다. 법의 발굽/발치 아래). 그건 공정하지 않다. 저명한 고시서적 저자가 곧 저명한 법학자로 통하는 나라에서는 공정한 것인가?..  

 

데리다는 먼저 자신이 기조연사로 초대된 콜로퀴엄의 주제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그는 다른 글들에서도 대부분 타이틀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곤 한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해체정의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성마른 연설자로 지칭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떤 수사법도 해체정의의 이런 연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나는 이 사물들 또는 이 범주들 각각에 대해, 그리고 이 유사범주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말해볼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질서나 분류법 또는 어구에 따라 말할 수는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11)

 

거기서 범주들유사범주들은 문법용어로 말하자면, 실사(實辭)와 허사(虛辭)를 말한다. ,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단어결합)에서 해체 가능성 정의가 실사(=실질형태소)이고, 가 허사(=형식형태소)이다. 역자는 그리고 정관사 la -라고 옮겼는데, 이 꼼꼼한 번역서에서 옥의 티라 할 만하다. 그리고는 물론 불어의 et(영어의 and)를 옮긴 것일 테지만, et에 해당하는 것이 이며, 정관사 la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번역어구에 대응어를 갖고 있지 않다(이 제목의 불어문구 자체가 제시돼 있지 않다. 그러니 번역할 필요가 없는 단어이다). 데리다의 말은, 자신이 해체 정의 가능성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그걸 다 결합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에 대해서 말하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흔히 하는 말로 주최측의 농간이라는 것).

 

그는 잠시 자문자답을 하던 끝에 이 문제를 이렇게 일단락을 짓는다: 이 최초의 허구적인(=가상적인) 의견 교환에서부터 이미 법과 정의 사이의 애매한 미끄러짐들이 예고된다. 해체의 고통, 해체가 겪는 고통이나 또는 해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은 아마도 법과 정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과 규범, 그리고 확실한 기준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는 규범이나 규칙, 기준이라는 개념들에 관한 문제다.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12)   

 

자신이 기조연설자로서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을 숙고/강조하면서 데리다는 (데리다답게) 이 언어의 문제로부터 연설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 그는 불어에는 없고 영어에만 있는 관용표현 두 가지를 인용하는 것에서 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것. 그 하나가 to enforce the law인바(다른 하나는 address란 동사이다), 법을 집행하기(법 집행)이란 내용을 영어/불어/한국어는 각각 to enforce the law(직역하면 법을 강제하기)/appliquer la loi(직역하면 법을 적용하기)/법을 집행하기라고 표현한다. 이 셋은 동의어이다. 하지만, to enforce the law란 영어표현에서 데리다가 끄집어 내고자 하는 내용은 불어에도 우리말에도 없는데, 그건 바로 힘(force)이다. 이 법과 힘의 관계는 오직 영어표현만이 명시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적용이라거나 집행이란 표현에는 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고로, 이 녀석들이 힘/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해서, to enforce the law를 불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에 대한 직접적인 문자상의 암시를 상실하게 된다.(나의 강조)

 

어쨌든 이 영어표현에서 강하게 암시되는바, 적용 가능성이나 강제성은 법에 대하여() 외재적이거나 부차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법으로서의 정의 개념 자체에, 법이 되는 것으로서의 정의, 법으로서의 법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힘이다.(15) 요컨대, 힘과 법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칸트의 <법론>에서도 환기되는 바이지만,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 가능성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16)

 

역자가 계속 적용가능성으로 옮기고 있는 건 우리말의 집행을 뜻한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참에 언급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최상의 텍스트이다(데리다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해체도 시도한 바 있지 않은가. 나는 푸슈킨과 법이라는 테마의 논문도 준비중인데, <자에는 자로>에 대한 분석은 거기에서 일부 다루어질 것이다. 다른 논문을 먼저 써야 하지만, 내 희망은 봄이 오기 전에 그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데리다에 좀 익숙한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법의 힘폭력이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식의 해체가 이후에 진행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암시를 데리다는 이번엔 독어에서 가져온다. 게발트(Gewalt)란 단어에서. 2부에서 그가 자세하게 다룰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의 제목에도 쓰이고 있는 단어가 바로 이 게발트인바, 이 단어는 독어에서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게발트는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모두를 뜻한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과,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기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17-8)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데리다는 영어에서 =이라는 등식을 가져오고, 독어에서는 =폭력이란 등식을 끌어온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폭력?! 법에 대한 이런 사전정지작업 이후에 데리다는 해체에 대한 사전정지작업에 들어간다.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 왜냐?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시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21)이기 때문이다.

 

해서 가설상 이러한 해체가 고유한 (하지만 불가능한) 장소를 갖고 있다면, 그건 철학이나 문학부라기보다는 법학부, 혹은 신학이나 건축학부가 될 거라고도 데리다는 말한다(그런 이런 관점에서 비판법학이나 스탠리 피시 등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까 데리다를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쪽은 나 같은 문학도가 아니라 법학도이고, 신학도이고, 건축학도이다. 그게 데리다의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해체라는 이름을 지닌 가장 잘 알려진 작업들에서 해체가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24)

 

그리하여, 데리다가 이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 해체 일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의의 문제를 전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해체 일반이 해온 일은 오직 이 문제를 전달하는 일이었는지(25)이다. ,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시작이다. 아니 시작도 아니다(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파스칼과 몽테뉴의 단장을 인용하면서, 그걸 해석하면서부터이다. 데리다가 <팡세>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스칼의 단장은 이것이다.

 

정의,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Justice, force Il est juste que ce qui est juste soit suivi, il est necessaire que ce qui est le plus fort soit suivi.)

 

이 대목은 브륀슈빅판의 단장 298번으로 돼 있는데(대부분의 우리말 <팡세>도 이 브륀슈빅판을 옮긴 것이다), 역자가 역주에서 참고로 제시하고 있는 국역본(셀리에판을 옮긴 서울대출판부본)의 번역은 이렇다: 정의, 정당한 것이 추종받는 것은 정당하다. 가장 강한 것이 추종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번역을 비교해 보건대(그리고 러시아어본을 참조해보건대), 아무래도 역자(혹은 데리다)가 이 문장을 독특하게 읽은 듯하다. 내 불어실력이 고등학교 때보다도 못하지만, 그걸로라도 판단해 보건대, 역자가 지속되다로 옮긴 것은 soit suivi이며, 그 경우 이걸 (영어로 치자면) <be+형용사>(사전을 보니 suivi라는 형용사가 있다. 연속적인이란 뜻)로 본 듯한데, 나로선 <be+과거분사>, 곧 수동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국역본에서처럼 말이다). suivr란 동사의 과거분사 역시 suivi이니까 나는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그러니까 suivi는 그 과거분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모양이다). suivr의 뜻은 따르다이다(국역본은 추종하다로 옮겼고, 러시아어본은 복종하다로 옮겼다). 가장 큰 차이는 따르다가 타동사인 반면에 (be+형용사를 동사로 본다면) 지속되다는 자동사라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에 하자가 없다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문맥일 텐데, 나는 타동사(수동태 구문)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옮기면: 정의, 정당한 것(=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불가피하다).

 

이어지는 단장의 내용은 이렇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27)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그런데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힘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정의)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것(=)을 정당한 것(=정의)으로 간주했다는 것. 아주 냉소적인 단장인데, 곧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의해서 힘이 정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알다시피, 미국이 무한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정의 덕분이 아니라 때문이다).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국회의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정의 없는 힘이라면, 파병(연장) 반대힘없는 정의이다. 어떻게 하면 정당한 것이 강해질 수 있을까?

 

파스칼은 다른 단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28) 러시아어본은 마지막 문장을 관습을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라고 옮긴다.

 

즉 권위의 신비한 토대는 관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법에 대한 상당히 래디컬한 관점이다. 거기에 견주면, 관습법(불문법)과 성문법을 구분하는 상식(적인 관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사실, 관습법이란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가로막는 알리바이는 아닐까? 마치 관습으로서의 법 말고 다른 법이 또 있다는 듯이 암시하는? 비유컨대, 관습법과 성문법의 관계는 니체에게서 은유와 개념의 관계와 같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파스칼-니체적 견해에 따를 때, 행정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에 따라 위헌이라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생각보다 래디컬한 결정이다(이 재판관들을 무슨 8 운운한 김용옥의 견해야말로 상식적이지만 보수적이다). 우리의 재판관들은 법적 권위의 신비한 토대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성문)헌법이란 그저 닳아빠진 관습헌법에 다름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니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어쨌든 우리의 재판관들은 ()의식적으로 법에 대한 자기-해체를 감행했던 것. 해서, 한국은 경이롭게도 (프랑스에도 없을 법한) 해체주의적 재판관들을 보유하고 있다!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표현은 파스칼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몽테뉴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정당하게도 몽테뉴에게 관심을 돌리는데, <수상록>(혹은 <에세>)의 저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법들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법들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며, 그것들은 이것 외에 다른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28)

 

이 대목은 <수상록> 3 12장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수상록>은 전3권의 방대한 텍스트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13(마지막장)에 나온다(러시아어본은 <경험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3권이 모두 완역돼 있다. 2권짜리와 4권짜리로 두 종류). 신용을 얻으면서란 표현은 아마도 credit가 들어간 어구를 번역한 듯싶은데, 그냥 신뢰를 얻으며 준수되며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개인적으로 신용불량자의 경험이 있는 나는 신용이란 말을 싫어한다). 하여간에 몽테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거창한) 정의와 무관하다. 비록 법은 정의를 요구하며 정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해서 이러한 관점은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끌며, 그러한 비판을 넘어선다.

 

정의와 법의 돌발(=우발적인 출현)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더 내재적이고 좀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31)

 

사실 나는 첫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법을 만드는 작용은()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의 의미를 간취하지 못하겠다. 걸리는 건 해석적인 힘, 해석적인 폭력이란 표현이다. 그게 해석적인이 힘/폭력의 수식어인지, 아니면 해석과 힘/폭력이 등가적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해석적인 폭력의 짝개념은 무엇인가? 기술(記述)적인 폭력인가? 해석적인이란 말은 그냥 (오스틴의) 수행적인이란 말로 이해하면 되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어떤 정당화하는 담론도 창설적인 언어활동의 수행성 또는 이 수행성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대하여 메타언어적인 역할을 보증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32) 지배적 해석? 데리다의 메타언어는 없다는 테제는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지만, 이 구절의 정확한 이해는 나로선 장래의 것이다(이해란 패러프레이즈하는 것인데, 나는 이 대목을 아직 내 식으로 패러프레이즈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후의 내용들이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정초의 순간에는 불법적이지도 비적법하지도 않다.(32-3) 같은 지적은 이해하기 쉽다.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또 다른 법)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폭력(게발트)이다. 르네 지라르가 얘기하는 정초적 폭력 같은 게 여기에 대응할 것이다.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적 권의)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이다.

 

이러한 법의 구조가 해체 가능한 것은 그것이 궁극적 토대에 정초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건축학적으로 어떤 건물이 해체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부실해야 한다). 이러한 법, 혹은 법으로서의 정의와는 대조적으로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해체 그 자체 역시 해체 불가능하다. 해서, 해체는 정의다.(33) 이걸 좀 어렵게 말하면,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34)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이것이(=이러한 정식화가) 명료하리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나는, 확신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곧 좀더 명료해지리라고 희망한다. 그것은 또한 성마른 독자인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릴케 현상 > 법의 힘 독해-소조(펌)

"치료에서 번역으로" : 데리다 <법의 힘> 독해 (2004. 12. 31)
글쓴이:  소조(SoZo)
날짜: 2005/01/01 12:07
    
 

 일찍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란 철학적 모순에 빠진 문제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의 철학 역시 세계를 해석하거나 변혁한다기보다는 겉으로는 건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처음부터 안에서 곪아 곧 치명적이 될 종양을 발견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일종의 ‘치료의 철학’이라 볼 수 있다. 비록 후기 데리다의 모습에 이 이상의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사회적 발언은 분명 텍스트 분석에서 보여준 모습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 발언 자체를 놓고 볼 때는 지나치게 상식적인지라, 그것을 둘러싼 현란한 수사를 제거하면 평범한(물론, 논리적 복잡함은 존재하지만) 그리고 당연한 원리적인 주의주장으로 요약되고 만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왜냐면 영향력 있는(행동을 추동시킬 수 있는) 사회적 발언이란 모순을 끝없이 피해가는 논리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감수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ꡔ법의 힘ꡕ은 환(幻)의 저서로 이야기되어 왔다. 나도 그에 대한 글을 여러 곳에서 읽었고, 작년 우연한 기회에 그 책을 읽게 되었다. 그때의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제 1부를 읽을 동안은 실망 반, 기대 반이었다. 실망 반이라는 것은 그의 사유의 힘이 생각보다 난삽하고 평범하다는 이유에서였고, 기대 반이라는 이유는 이것이 1부, 즉 맛보기(맛보기는 대개 싱겁기 마련이다)이기 때문에, 2부에서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부는 나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해 버렸다. 2부를 읽으면서 내가 얻은 것은 벤야민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는 정도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ꡔ법의 힘ꡕ의 역자인 진태원도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ꡔ마르크스의 유령들ꡕ이나 ꡔ우정의 정치들ꡕ 같은 저작들과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저서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또는 전에 외국어 판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량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살펴봐도 이 책이 왜 그렇게 높게 평가되고 많이 논의되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는 이 책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어온 독자들로서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204쪽)


 이런 노파심의 표현은 역자 자신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역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중요한 저작인 이유로 몇 가지를 든다. 예를 들어 이 책이 발간된 시기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된 것은 물론, 하이데거와 나치즘이 문제되던 때였기 때문에, 데리다는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알리바이는 증명해 줄지 모르지만, 정작 ꡔ법의 힘ꡕ이라는 책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또 역자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철학적 전회’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데리다 자신은 이러한 전회 자체를 부정해 왔다. 다시 말해, 데리다는 자신의 철학은 초기부터 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문제를 건드려 보기로 하자. 우선 데리다는 이 글에서 자신이 외국어(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어떤 철학적 문제(타자의 문제)를 자꾸 상기시키는데, 이는 타자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어떤 유리한 입지점 위에 서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아 비위에 거슬렸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그가 당연시 여기는 모국어/외국어도 탈구축되어야 한다. 오늘날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구분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명한 것이 아니다. 외국어는 모국어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것은 발화행위에서 생기는 사고와 표현의 간극의 정도를 어느 정도 감지하는가에 달린 문제다. 한데 사고와 표현은 모국어로 발언될 때에도 항상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국어를 말할 때에도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 사람이 영어로 말한다고 해서, 영어가 외국어는 아닌 것이다. 프랑스 철학교수가 프랑스 초등학생에서 헤겔에 대해 강의한다고 할 때, 초등학생에서 프랑스 철학교수의 말은 외국어인 셈이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외국어는 지역적(민족적)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문제이다. 

 이상 신화화의 갈림길에서 최재서와 대립했던 김문집은 일어로 쓰고 일본에서 출판된 소설집 한 권을 남기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귀국에 비평을 했던 것은 모국어로 소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모국어가 도리어 외국어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국어/외국어의 문제는 타자의 문제라기보다는 번역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들 대부분은 바로 이 문제와 맞닥뜨리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들은 모국어로 소설이나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외국어(일어)로 사유하고 쓴 글을 모국어(한국어)로 번역했던 것이다. 번역은 ‘외국어에서 모국어로’라는 정식 이상의 문제를 유발시킨다. 이 문제는 거꾸로 세운다(모국어에서 외국어로)고 해도 마찬가지다.

 제 1부 타이틀은 ‘법/권리에서 정의로’라고도,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상 후자가 보다 정확하다. 왜냐면 데리다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정의’ 자체라기보다는(만약 그렇다면 책 제목을 ꡔ정의의 힘ꡕ으로 했을 것이다),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법이 계산-가능한 적용에만 힘을 쏟는 일반성이라면, 정의는 이와 같은 일반성을 이탈하는 과잉성,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정의가 정의이기 위해서는 항상 ‘결단’을 필요로 하며 이것은 법으로서만 나탈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데리다는 3가지 아포리아로 정리하고 있다. 1) 정의는 법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탈구축(해체)는 결정불가능한 것에 의지하여 결정하는 것이지만, 그 불가능한 것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탈구축은 적극적으로 행동함과 동시에 그것이 마치 타자로부터 도래하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3) 결단이라는 사건은 타자에 대한 무한책임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여기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데리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착한다. 탈구축은 정의다.

 우리가 위와 같은 데리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데리다는 계산가능성에 근거한 법을 비판하면서 정의를 우위에 놓지만, 그렇다고 그가 법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우린 그가 말하는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되물을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대해 그는 ‘법의 중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순간은, 이것이 없다면 사실은 어떤 해체도 가능하지 않을 정지의 순간이며, 판단중지의 순간이다. 이는 그저 하나의 순간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모든 책임의 실행이 독단적인 잠에 빠져들지 않고, 따라서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순간의 가능성은 모든 책임의 실행에 구조적으로 현전해 있어야 한다. 이때부터 이 순간은 스스로를 초과하게 된다. 이는 더욱더 고뇌를 겪게 된다. 하지만 누가 감히 고뇌를 생략한 채 정의롭게 되고자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고뇌에 찬 정지의 순간은 또한 법적-정치적 변혁들, 심지어는 혁명들이 발생하는 공간-내기의 간격을 열어놓는 것이기도 한다. (44-45쪽)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이념적 지향점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법적 결단의 순간에 행해지는 ‘고뇌’(계산-가능한 법과의 내적 갈등)를 통해 새로운 법을 구성해내는(계산가능성을 파괴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그는 법을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 밑에서 동물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계산-가능한 법은 바로 이와 같은 동물의 희생(배제)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와 같이 배제된 동물, 즉 타자와 대면함으로 고뇌하고, 넘어서 그것들을 딛고 서있는 계산-가능한 법을 파괴하고 새롭게 만드는 ‘결단’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주장이다. 한데, 데리다의 법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렇다. 그는 이 이상은 나가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 책을 단순히 서론으로만 작성을 했다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주장들이다. 그것은 그의 주장이 대단하고 새롭다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아닐까? 또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법과 정의에 대한 논의는 유치원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우선, 그는 ‘법 = 계산-가능한 법’이라는 공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러한 법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또 법은 ‘결단’을 문제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이고, ‘고뇌’의 문제라기보다는 ‘받아들임’의 문제이다. 데리다는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자꾸 어떤 ‘결단’과 ‘고뇌’ 쪽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이것은 정의의 문제를 재판관의 입장에 놓기 때문이다. 한데, 진정 정의의 문제는 ‘재판을 받는 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닐까? 법을 둘러싼 정의가 문제될 때 문제의 핵심은 어떤 고뇌어린 영웅적 재판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재판관 앞에선 이들의 법에 대한 해석과 수용에 있다. 바로 이점에서 데리다는 카프카와 정반대의 놓인다.

 데리다는 항상 타자에 대해 타자가 아닌 자의 행위를 촉구하는데, 다시 말해 주체로서의 인간인 우리가 동물에 대해 고뇌하고 ‘결단’을 내리길 촉구하는데, 그것은 똑같이 법을 둘러싼 희생의 문제를 삼고 있으면서도, 지라르와 정반대로 갈라지는 이유다. 데리다의 또 다른 개념어인 ‘환대’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환대를 하는 자이지, 환대를 받는 자가 아니다. 환대를 받는 자는 동물처럼 ‘행위’의 기회가 완전히 박탈되어 있다. 지라르가 ꡔ폭력과 성스러움ꡕ에서 ꡔ희생양ꡕ, ꡔ욥ꡕ 그리고 최근의 ꡔ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ꡕ에서 문제 삼고 있는 것도 법에 의한 희생이다. 그러나 그는 법을, 그리고 정의를 희생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에게 ‘고뇌’나 ‘결단’은 법이나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즉 진정한 ‘정의’의 문제는 희생자의 입장에서, 동물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인 것이다.

 지라르의 니체 비판은 이와 정확히 연결된다. 니체는 희생양(노예)에 대한 근심이야말로 영웅적 ‘결단’(법을 바꾸는)을 방해하고 서구문화의 퇴폐를 촉진시키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에 의해 개인은 아주 대단하게 취급되고 하나의 절대인 양 제시되어왔다. 그 결과 사람은 더 이상 ‘희생’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인류는 인간의 희생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다. 진정한 박애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희생을 요구한다. 이 박애는 인류가 스스로에 의해 지배받기를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라고 이름 붙은 이 가짜 인류는 ‘아무도 희생되어도 안 된다’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니체, <니체전집>(유고편), ꡔ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ꡕ, 김진식 옮김, 문학과 지성사, 218쪽에서 재인용. 참고로 위 구절이 들어있는 유고집이 최근 책세상 니체전집 중 한 권으로 번역되었는데, 참고하지 못해 재인용한다. 강조는 인용자)


 20세기 후반의 니체주의가 이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게 대세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루카치의 ꡔ이성의 파괴ꡕ와 같은 저작에 대해 소홀하게 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변증법이란 노예의 논리이고, 노예적인 감정(원한)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만약 이것들을 인정한다면, 자랑스럽게 니체주의자임을 공언한다면, 김영하의 소설이야말로 초인의 소설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원한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의 형태를 취한 ꡔ검은꽃ꡕ에서 인정투쟁 따위는 조롱당하고, 역사는 핀볼 게임기로 변하고 있다. 지라르는 바로 이러한 니체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나치에 대해 적대적이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허무적이고 니체에 의존해 있는 2차 세계대전 이래의 모든 새로운 지적 흐름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이 사상가가 나치의 모험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궤변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다.

 하지만 나치의 극악무도함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글의 저자는 여전히 니체다. 나치 운동의 정신적 핵심이 있다면 그것을 표현한 사람이 바로 니체다. (위의 책 220쪽)


 그럼 왜 오늘날의 니체연구가들은 니체를 나치즘과 연관지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일까? 혹 이야기했더라도 힘을 얻지 못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지라르의 답변은 거기에 ‘하이데거의 금지’가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니체연구 거의 전부가 하이데거 해석(금지)을 경유한 연구라는 말이다. 그럼 프랑스의 하이데거인 데리다는 이로부터 과연 자유로울까? 물론, 데리다는 한 일본인의 질문(니체가 나치를 위해 직접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치에 의해 오용될만한 여지를 주었다면, 나치의 범죄에 대해 니체 텍스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결단’의 부족이나 ‘환대’의 부족의 문제로 보았다면, 그 역시 지라르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법에 있어 진정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이 방대한 물음에 대해 여기서 답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예컨대 그것은 ‘계산-불가능성’을 받아들여 어떤 ‘결단’에 이르는 것이라기보다는 , 역설적으로 법의 ‘계산-가능성’을 최대한 잘 지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법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왜곡에 있으며, 그것을 잘 지키지 않고 섣불리 ‘자기기만적으로’ 행해지는 ‘결단’에 있는 게 아닐까? 법은 그 자체로 충분히 해석과잉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고뇌’의 문제이기 이전에 ‘해석’의 문제이자, 해석을 둘러싼 공동투쟁의 문제이다. 데리다는 법을 해체하기 위해 ‘법’을 ‘계산-가능한 제도’ 정도로 너무 단순하게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법의 내용과 형식에는 눈을 감는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법이 바로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이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또는 무시하고), 법을 거대한 전자계산기 정도로 여긴다. 그는 환자를 배를 가르지 않고 치료하길 원하는, 요컨대 ‘결단’을 통한 배치변경을 통해 치료하길 원하는 한의사와 같다.

 그는 이 책 여러 군데에서 프랑스인인 그가 미국 법률학자 앞에서 영어를 구사할 때 가지는 ‘외국어에 대한 감각’(타자의 언어)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사실 영어가 능숙한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엄살이다. 19세기 러시아 귀족이 일상생활에서 프랑스어를 말하면서, 프랑스어를 말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엄살처럼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제는 그 반대며 이상이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때 느꼈을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외국어(타자의 언어) 감각이다. 나는 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법에 대한 문제는 언어이며, 정의의 문제는 바로 그 외국어인 ‘법’을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이 ‘정신적 고뇌’나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외국어와 모국어를 잇기)’과 ‘고통의 감수(외국어와 모국어 사이에 발생하는 이질감을 포용하기)’인 것처럼 정의도 그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 그것은 법(외국어)에 의해 내팽개쳐지면서도 끊임없이 모국어(타자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과정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한 ‘치료가 치료를 막는 사례’(ꡔ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ꡕ, 이덕하 옮김, 도서출판 b, 320쪽)가 되지 않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철학은 모순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번역’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4. 12. 3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5-01-0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도 여기저기서 [법의 힘]을 읽으려는 시도들이 있군요.

로쟈님 글에는 제 번역에 대한 언급도 있고 해서 코멘트를 몇 개 달까 하다가 시간이 없으니 그냥 퍼오기만 합니다.

다만 SoZo란 분의 "법과 정의에 대한 논의는 유치원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은 실소를 자아내는군요.^^

무슨 소리를 하든 필자의 마음이겠지만, 다른 사람(특히 대가)을 일단 깎아내리고 보면 자기 주장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군요. 데리다가 유치원 수준이라면, 그는 과연 어떤 수준일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릴케 현상 2005-01-0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혀 모르는 얘기지만^^ 발마스님 보라고 퍼왔어요

balmas 2005-01-0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서 퍼왔습니다.^^
 

데리다의 꿈-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자크 데리다가 마지막에 나의 발목을 잡는다. 데리다가 죽기 전에 계몽을 말하는 걸 읽는 건, 하이데거가 죽기 전에 신이 있을지 모른다고 고백했다는 소리를 전해듣는 것보다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 후기 자본주의의 타락한 정신쯤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데리다를 변명하기 위해 기꺼이 잠깐 침묵을 깬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2004년 10월9일 숨을 거뒀다. 말년에 그는 지옥으로 향하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광야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앙숙인 하버마스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2004년 5월엔 높이 솟은 반세계화의 깃발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년 기념식에서 유언과도 같은 연설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말은 "비록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 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였다.

*----------*

계몽, 과거의 계몽과 앞으로 올 계몽(Enlightenment past and to come)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11월호

2004년 10월9일 숨진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작업은 최근 벌어진 일들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지난 5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 50년 기념식에 우리가 그를 초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행사는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그가 이날 행사에서 한 연설을 요약했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50돌을 맞아 그 무엇보다 국제적인 범위에서, 반 세계화의 깃발 아래 모인 사회 운동 세력들이 참고하는 핵심 매체가 됐다는 게 너무나 기쁘다. 물론 이 사건이, 냉전시대의 승리자들 (아이엠에프[국제통화기금], 오이시디[경제협력개발기구], 더블유티오[세계무역기구] 같은 사악한 약어들로 대표되는 것들)을 제거할 거대한 혁명이 눈앞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반 세계화 운동 세력과 전세계 일반 대중들의 지속적인 압력이 이들 기구를 약화시키고 개혁을 강제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똑같은 강도의 압력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들 곧 유엔(국제연합)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기구에도 개혁을 강제할 것이다.

1954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창간호 사설에서 위베르 뵈브-메리는 전통적이고 애국주의적이며 심지어 국수주의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을 썼다. 그는 "국제 관계의 평화적인 진전에 힘쓴다"는 게 우리의 공통된 임무인 상황에서 "(여기에 봉사하는) 신문 (실제로는 잡지: 옮긴이)의 고향은 너무나 당연히 파리여야 하며 언어는 프랑스어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

그 이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진정으로 국제적인 출판물이 됐다. 18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됐고 전세계에서 참고하는 잡지로 평가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 잡지는 파리에 터를 잡고 있다. 나에게, 이 점은 뿌리깊은 유럽인 성향(Europeanness)을 보여준다.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대륙에서 이 잡지만큼 자유롭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잡지가 성공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상상이 안된다. 이는, 우리 유럽인들이 독특한 정치적 의식과 의무감을 갖는다는 걸 암시한다. 물론 이 말이, 이 잡지와 이 잡지가 지지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유럽 중심적이거나 프랑스 중심적인 전망에 얽매여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보다는 도리어, 이 잡지는 반세계화 운동에서 유럽의 구실을 상기시키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미국의 헤게모니와 중국의 떠오르는 힘, 그리고 아랍/이슬람의 신권 정치 사이에 낀 유럽은 독특한 책임을 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유럽 중심적인 지식인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지난 40년동안 나는 이와 정반대에 해당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믿는다. 한치의 유럽 국수주의도 없이, 그리고 우리가 지금 파악하는 모습으로서의 유럽연합에 대한 한치의 신뢰도 없이, 오늘날 유럽이 의미를 갖는 그 지점을 위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걸 말이다. 여기에는 계몽의 전통이 포함된다. 또 과거의 전체주의적인 범죄행위, 대량학살, 식민주의적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과 이 사실에 대한 겸허한 인정도 포함된다. 유럽의 전통은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세계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걸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유럽이라는 존재가 단지 단일 시장으로 축소되도록 그냥 둬서는 안된다. 단일 통화, 신국가주의적 집단 또는 군사 세력을 뜻하는 것이 되도록 그냥 둬서도 안된다. 하지만, 마지막 지점에 가면 나는 유럽이 공통의 방위력과 외교정책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동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런 힘은 유엔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유엔이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불량배 국가인 미국과 타협하지 않고, 미국의 일방적 편의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가운데 자신들의 결의를 실행할 수 있는 유럽에 기반을 둔 기구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창간 50돌 기념호인 지난 5월호에 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 옮긴이)가 쓴 사설 '저항'을 인용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이 지지하는 것, 반대하는 것 하나 하나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게 한가지 있다. 시장에 덜 지배되는 유럽을 지지한다는 대목이다. 나로서는 이 말이, 단지 다른 초강국과 경쟁하는 데 만족하고 마는 유럽을 뜻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초강국들이 원하는 걸 하도록 그냥 두고 보는 유럽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리는 유럽은 유럽을 반세계화의 요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헌법과 정치적 태도를 지닌 곳이요, 자신의 추진력과 대안 정신이 전세계로, 예를 들면 이라크 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도 뻗어나가는 근원지가 되는 곳이다.

과거 계몽 정신의 자랑스런 후손이자 새로 다가올 계몽의 전령으로서의 유럽은, 세계에 대해 자신의 정치가 단순한 이분법적 반대 이상의 어떤 더욱 세련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리라.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의 혐의를 받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정책, 특히 아리엘 샤론이 주도하고 조지 부시가 지지하는 정책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팔레스타인이 자신들의 권리와 땅과 국가를 위해 벌이는 정당한 투쟁을 지지하는 게, 자살 폭탄 공격을 지지하는 걸 뜻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이 지지는, 시온의 장로들의 의례라고 할 형편없는 거짓말에 힘을 실어주는 (슬프게도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반유대 선전선동에 동의하는 걸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부상하는 것과 이슬람 혐오증이 떠오르는 걸 동시에 우려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샤론과 그의 정책들이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부각되는 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가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불러모으는 구실로 이 현상을 이용해먹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사담 후세인과 그의 정권에 동조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부시, 체니, 럼스펠드, 월포이츠의 정책을 비판하는 게 가능하다. 또 이런 모습의 유럽에서는, 용감하게 목청을 높이는 미국인,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합한다는 것 때문에, 반미주의자라고, 반이스라엘주의자라고, 반팔레스타인주의자라고, 이슬람 혐오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이 것이 내 꿈이다. 내가 이런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다. 내 꿈은, 라모네가 말한 것처럼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꿈꾸는 데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내 꿈은 다른 세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이룰 힘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이 꿈은 전세계 수십억의 여성, 남성과 내가 공유하는 꿈이다. 비록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어느땐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영어 번역본: http://mondediplo.com/2004/11/06derrida
번역: 신기섭
트랙백(0)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marishin/?pid=112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12-3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섭님이 번역하신 데리다의 연설문 하나를 퍼왔습니다.

데리다의 마지막 말로, 지난 한 해 동안 찾아주신 분들께 드리는 감사 인사와 새해 인사를 대신하고 싶은데, 데리다가 허락해줄지 모르겠네요.^^
 
 전출처 : stella.K >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

 

#사계

 

1. 고드름 낙수 소리

2. 얼음장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3. 동굴 낙수 소리
4. 여름 폭포 소리
5. 몽돌 파도에 휩쓸리는 소리
6. 대나무 부딪히는 소리

7. 천둥 소리

8. 장마 비바람 소리
9. 우박 떨어지는 소리
10. 가시연꽃밭의 폭우 소리
11. 불어난 계곡물 쏟아져내리는 소리
12. 벼이삭 부딪히는 소리
13. 낙엽 지는 소리
14. 싸리비로 낙엽 쓰는 소리
15. 낙엽 밟는 소리

16. 바람에 낙엽 구르는 소리
17. 억새 부딪히는 소리
18. 갈대 부딪히는 소리
19. 눈보라 소리

20. 설피 신고 눈 밟는 소리
21. 겨울 얼음장 깨지는 소리

 

 

#향토

22. 할아버지 잔기침 소리
23. 달집 태우는 소리
24. 논두렁 태우는 소리
25. 소울음 소리
26. 소여물 먹는 소리
27. 가마솥 끓는 소리
28. 우시장 소울음 소리
29. 모내기하는 소리
30. 밭가는 소리
31. 장닭 우는 소리
32. 산나물 캐는 소리
33. 베틀짜는 소리
34. 시골장터 소리
35. 족타기로 벼 터는 소리
36. 탈곡기로 탈곡하는 소리
37. 키질하는 소리
38. 콩도리깨질 소리
39. 콩깍지 타는 소리
40. 멧돌 가는 소리
41. 절구 찧는 소리
42. 떡치는 소리
43. 어시장 경매 소리
44. 오징어 물 뿜는 소리
45. 숭어잡이 소리
46. 재첩 캐는 소리
47. 꼬막 잡는 소리
48. 해녀 숨비 소리
49. 연평도 풍어제 소리

 

 

#울림

50. 에밀레 종소리
51. 보신각 종소리
52. 가을 바람에 풍경 우는 소리
53. 법고 소리
54. 목어 소리
55. 운판 소리
56. 범종 소리
57. 성당 종소리

 

 

#추억

58. 학교종 소리
59. 풍금 소리
60. 아이들 전통놀이 소리
61. 가을 운동회 소리
62. 대장간 소리
63. 참숯 익는 소리
64. 노젓는 소리
65. 개울가 빨래 소리
66. 염전 수차 소리
67. 통방아 소리
68. 물레방아 소리
69. 디딜방아 소리
70. 다듬이질 소리
71. 마지막 비둘기호 정선선

 

#생명

72. 괭이갈매기 우는 소리
73. 가창 군무 소리
74. 둥지 떠난 새끼 제비들의 소리
75. 딱따구리 나무구멍 파는 소리
76. 보리밭 종달새 우는 소리
77. 백로 새끼 키우는 소리
78. 소쩍새 우는 소리
79. 둥지 떠난 꾀꼬리 새끼 어미찾는 소리
80. 큰유리새 새끼 키우는 소리
81. 삼광조 새끼 키우는 소리
82. 붉은배새매 새끼 키우는 소리
83. 파랑새 새끼 키우는 소리
84. 겨울 들판 두루미 구애하는 소리
85. 참매미 우는 소리
86. 쓰릅매미 우는 소리
87. 애매미 짝 찾는 소리
88. 왕소똥구리 경단 굴리는 소리
89. 토종벌 일하는 소리
90. 귀뚜라미 짝 찾는 소리

91. 여치 우는 소리
92. 방울벌레 노래소리
93. 베짱이 우는 소리
94. 긴꼬리 우는 소리
95.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96. 개구리 울음 소리
97. 두꺼비 우는 소리
98. 맹꽁이 울음 소리
99. 섬진강 동자개 우는 소리
100. 남대천 연어 돌아오는 소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