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특별법 반대” 내건 인터넷신문 창간
 



지난 9월23일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실시된 가운데 성매매방지특별법 반대를 기치로 내건 내건 온라인신문 <한국인권뉴스>(www.k-hnews.com)이 창간돼 눈길을 끈다.

한국인권뉴스는 지난 18일 오후 2시 “인천옐로하우스 성노동자 대표, 한터여종사자연맹 성노동자 대표, 미아리 성노동자 대표, 기독민중연대, 성매매특별법을 반대하는 시민모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홈페이지 개통식과 출범식을 열고 “기층 민중들의 인권을 외면하는 언론계와 여성계에 저항하기 위해 한국인권뉴스를 창간한다”고 밝혔다.

한국인권뉴스는 최덕효 대표를 비롯해 취재와 편집기자 3명이 기사와 칼럼, 논평을 주로 담당하게 되며, 이를 통해 성노동과 관련된 왜곡된 보도와 시민사회단체의 성명의 허구성을 짚어낸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한국인권뉴스는 현재 성매매특별법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논객을 상대로 시민기자단을 모집하고 있다.

“성매매특별법은 못배운 성노동자들의 인권 무시해 생존권 빼앗아는 악법”

최덕효 대표는 “한국인권뉴스는 기층 민중의 인권을 외면하는 현실에 저항하고 서민, 빈민의 인권을 대변하기 위해 존재하며 빈민인권의 한 분야로 성노동자 문제를 당면과제로 삼았다”며 “성매매특별법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우지 못한 것이 죄인 성노동자들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고 끝내는 생존권마저 빼앗아버리는 악법으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여성단체에 대해 “성매매특별법을 제안하고 시행에 앞장 선 한국의 여성단체와 여성부는 한국사회 학벌 카스트의 최정점에 서있는 기득권층으로, 그들은 사회진보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진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정치세력화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며 “이는 성노동자들의 여의도 단식농성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그녀들의 애틋한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여성단체와 여성부의 자세에서 보듯 여실히 증명된 만큼 성노동자를 제1의 테마로 삼고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에 대해 최 대표는 “집창촌 1만명, 공식 33만명, 비공식 150만명의 성노동자들을 성매매 피해여성이라 일컬으며 그녀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여성계는 모든 정치권력을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도록 했다”며 “성매매특별법 반대여론을 무시하는 여성계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유교적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어 융단폭격을 감행했고 결과는 성노동자들에게서 시민권과 노동권을 빼았았고 동시에 한국 남성들을 예비 성범죄자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한국인권뉴스는 창간에 맞춰 83개 성매매업소 285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응답자들의 55%(157명)은 집창촌에 오게 된 이유로 ‘순수 생계유지’를 꼽았으며, 그 다음으로 가족병원비 20.4%(58명), 빚청산 15.8%(45명), 가족학비 8.8%(25명) 등을 들었다.

한편 <한국인권뉴스> 창간과 관련해 여성단체 관계자와 성매매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굳이 논란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며 언급하기를 꺼렸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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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2-2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신문이 다 있군요 ...;;;

MANN 2004-12-2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런... (욕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막다)



성매매로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온존시키겠다고?

모모 2004-12-26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신문> 류인가 하고 클릭했더니, 이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_- 다른 단체들은 잘 모르겠고, 사회진보연대라니.. 정신이 나간 걸까.



성매매특별법에 한계가 있다.. 그거 알만한 사람들 다 아는 얘기 아닌가요 -_- 그럼 그 한계를 넘어설 생각을 해야지, 아예 법을 없애자고 날뛰다니요. 성매매특별법을 '성매매여성의 생존권 박탈'로 만드는 것은, 여성단체가 아니라 이 이상한 신문을 창간한 그 사람들 아닌가요. 어이가 없군요 정말..

balmas 2004-12-2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좀 모호하긴 하지만 홈페이지에 가서 보면 나름대로 경청할 만한 주장들이 있더군요.

MANN 2004-12-28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처음에 성매매 지지 또는 합법화의 움직임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질 정도가 되었나하고 화가 치밀어서 좀 흥분했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여전히 저런 방식(어법?)에는 동감할 수가 없군요.



첫 번째는, 포주와 남성 성구매자의 이해관계는 쏙 빼 버리고 성매매특별법과 관련된 대립을 '여성계'와 '성노동자'의 대립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구요. 두 번째는, 성노동자들의 인권을 오랫동안 침해해온 것은 바로 성매매 구조라는 사실은 삭제하고, 마치 지금 성매매특별법의 시행으로 인해서 침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처럼 쓰고 있다는 거죠. 그건 반대의 대상이 '성매매 구조'가 아니라 '성매매 특별법'이라는 데에서 드러난다고 봅니다.



최원님은 '성매매 노동자들에게 싸늘한 눈길대신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 신문을 지지하신다고 하던데... 그제서야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충분히 성매매 여성들을 범죄자로도, 수동적인 피해자로도, 잠재적인 반성매매 투쟁가로도 보지 않고 그녀들의 말을 들으면서 연대해 왔던 현장활동가들의 목소리가 최근의 성매매특별법과 관련된 논쟁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목소리가 들렸으면 최원님같은 사람들이 성매매 합법화론자들에게 지지표명을 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말이에요.



지금 논쟁에서 포주행위, 즉 여성들을 '고용'하여 남성구매자들에게 판매하고 거기서 이윤을 챙기는 행위와 자신의 성을 파는 행위가 모두 '성매매'라고 지칭되고 있는데, 제 생각엔 일단 그걸 분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의 성매매특별법은 포주행위를 금지하지만, 자신의 성을 파는 행위 역시 금지하지요. 포주행위에 의해 자신의 성을 팔게 된 경우만 처벌대상에서 제외되구요.



이런 모호함 때문에 성매매합법화론자들은 합법화하길 원하는 것이 어느 것인지 모호해지고 만다고 봐요. 저는, 그것이 성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투쟁에서 나온 것인 한에서, 성노동을 하되 적절한 환경에서 적절한 보상을 받으려는 운동도 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 신문을 만든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위 신문은 포주행위든 자신의 성을 파는 행위든 상관없이 '성매매만 온존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지지자로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위 신문을 보고 동지를 만났구나, 라고 생각했을 테지요.



비범죄화 노선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성매매 자체의 비범죄화'를 목표로 하는 것 같던데... 이것 역시 '성매매'라는 말때문에 모호해지는 것 같아요. 여기서 비범죄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성을 파는 행위겠죠?

모모 2004-12-28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그 신문을 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도 이런 류의 주장을 처음 접해보는 건 아니고, 거기에 경청할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주장들이, 미약하게나마 제가 알고 있는 성매매 여성들의 고통 --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고통이겠지요 -- 을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을 (당장은 아니라도) 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특별법을 반대한다’는 식의 이야기에 그들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을 모르겠어요. 물론 성매매 여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 그런 말들이 최소한 일면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겠습니다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여성단체를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노동자/민중 자신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투쟁’이라는 멋지지만 종종 위험한 환상에 빠진 결과가 아닐까 싶군요.



게다가 “성매매특별법 반대여론을 무시하는 여성계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유교적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어 융단폭격을 감행했고 결과는 성노동자들에게서 시민권과 노동권을 빼았았고 동시에 한국 남성들을 예비 성범죄자로 몰아갔다”는 이젠 아예 클리셰로만 보이는 주장을 펼치는 건 우스꽝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한쪽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섹스에 환장한 여자들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유림들이라고 하니.. 대체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적어도 그들이 여성 단체의 주장을 비판하되 한국 사회의 마초이즘과도 대립각을 긋고 싶었다면, 방금 말한 저런 상투적인 주장을 하거나 “성매매특별법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논객을 상대로 시민기자단을 모집하”겠다는 순진한 발상은 재고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NA 2004-12-2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최원입니다. Mann님께 답변드리면, 다른 분들은 모르겠고, 제가 말하는 '성매매 그 자체의 비범죄화'는 성판매 여성은 물론이고 성구매 남성까지도 비범죄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저도 성구매 남성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단지 적대감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법적 처벌주의, 억압적 국가장치에 의한 처벌주의가 과연 답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고, 저의 답은 부정적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법을 무시하자거나 혹은 국가 등에 의한 예방적 대항-폭력을 아예 고려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중심적인 해결방법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예전에 이탈리아에서 국민투표 발의를 통해서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강간범 등에 대한 형량을 극단적으로 높이는 안을 발의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고 이에 대한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의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사회진보연대 기관지가 한 번 소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저는 보복주의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쪽과 동의합니다). 따라서 성노동자들의 시민권, 무엇보다도 그녀들의 저항권을 인정하면서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자신들을 극단적인 인권유린 행위들로부터 보호하게끔 지원하면서(그리고 국가에 의한 대항-폭력은 이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성의 빈곤화에 대한 투쟁의 일주체로 함께 투쟁전선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한 편, 탈성매매를 원하는 분들이 탈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갖가지 지원을 해야하며, 경제적으로 대안이 될 수 있는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서 이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제가 진정한 성매매의 궁극적 폐지라면 일방적으로 법령 하나 만들어서 접근할 수는 없으며, 매우 복합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해야만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성매매를 허용한다면 무조건 지지한다는 멍청한 인간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 즉자적으로 반대하기 위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정부의 성매매 특별법을 지지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한국정부는 이제껏 포주의 역할을 단단히 해왔습니다. 물론 노무현 정부야 그러한 한국정부의 유산을 단지 이어받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엄연히 국가권력으로서 역대 한국정부 전체의 연대책임입니다. 그런 한국정부가 성매매 특별법을 새로 만들었고 그것이 예전의 윤락행위 방지법에 대해서 아주 조금 진일보한것 같은 부분이 있는 법안이라고 해서 그것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저는 한국 인권 뉴스의 모든 글들과 내용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무엇보다도 저는 합법화론자가 아니라 형법적 판단 보류/유보라는 의미에서의 비범죄화론자이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초로 그것이 성노동자들의 노조건설 및 시민권을 위한 투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지합니다. 그리고 이 분들의 투쟁은 정말 걸음마의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전술적으로, 또 활동상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점이 있다면, 냉소적으로 보기 보다는 따뜻하게 충고를 해주는 것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balmas 2004-12-2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댓글들을 남겨 주셨는데, 간단하게 답글을 달려니 왠지 성의가 부족하다는 자책감이 들지만(^^;;;), 저로서는 아직 유보적인 입장입니다. 논쟁의 지형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한국인권뉴스]의 주장들에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워서요.

어쨌든 긴 댓글들을 달아주신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NA 2004-12-29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문제인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도 한국인권뉴스의 주장을 보면서 착잡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여성들 간의 연대가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여성주의자 vs 성노동자 식의 왜곡된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가 아마 그 안에 결합하려고 하는 분들, 예컨대 사회진보연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올려주신 스피노자 관련 글도 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biosculp 2004-12-29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매매 관련법안에 대해 애기를 듣자면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애기만 나오는것 같군요. 실제적으로 성매매에 얽매인 여성들의 인권이 신장되어야 할텐데. 그런 부분은 글쎄요 라고 갸유뚱할수 밖에 없군요.

선배중 화류계에 발을 담근 분 애기로는 이번 성매매법안의 주된 타켓은 미아리와 용산의 집창촌이라고 하더군요. 미아리는 벌써 집창촌 주위로 아파트 촌이 들어선지 오래고 용산도 용산역의 개발과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그 자리에 시청이 옮기기로 되어있는데 이때 개발에 가장 껄끄러운 부분이 집창촌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밀어부치면서 집창촌을 집중으로 단속하는대신 강남이나 기타 성매매업소부분은 무풍지대로 남아있죠.

약간은 음모론적인 시각이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매매 특별법을 거론하기전에 기존의 법만 제대로 시행해도 그리고 대한민국 경찰력만으로도 충분이 제대로 잡을것은 잡을수 있을것 같은데. 그게 안되는것이 문제고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선배말이 술집에 잡힌 여자중 150만원에 묶여있는 여자들도 있다더군요.

이론적으로나가면 별로 와닿지를 않네요.

balmas 2004-12-30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아마 현장(?)에 직접 몸담고 있는 분들만큼 속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겠죠. 그 사정들을 잘 아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원칙에 관해서 논의해보는 것들도 의미가 전혀 없지야 않겠죠. 저야 두 가지 다 잘 알지 못하니까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

따우님은 오랜만에 오셨군요. 이제 방학이시니 홀가분하시겠습니다.^^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힘이 생깁니다”
국보법 폐지 단식 53일, 송현석 위원장

 

이태준 기자 ltj@digitalmal.com

 

12월 24일 성탄절 전날. 송현석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정책위원장이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농성을 시작한 지 53일째 되는 날이다. 송 위원장은 지난 11월 2일부터 국회 앞에서 작은 컨테이너를 감옥처럼 개조해 그 안에서 지금까지 국보법 폐지 단식 농성을 벌여왔다. 22일에는 촛불시위에 참여했다가 쓰러져서 결국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사는 입원을 권유했지만 송 위원장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병원에서 그는 수액주사 한 방울조차 맞기를 거부하고 나왔다. 1평 남짓한 ‘감옥’에서 단식중에 있는 송 위원장을 찾아갔을 땐 밖에선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천주교 연대회의 사제들이 단식 농성단원들과 함께 성탄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바짝 말라있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나직한 어투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 살이 많이 빠졌다.
"이 얼굴이 내 대학교 때 얼굴이다.(웃음) 그때 얼굴로 돌아왔다."

- 쓰러졌다고 들었다.
"22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광화문으로 가던 도중 종묘에서 촛불점화하고 다시 걸으려 할 때 쓰러졌다. 정상인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 날씨도 춥고, 아직 수액주사도 맞지 않았으니 체력에 한계가 온 것 같다. 악으로 걷고 있던 거였다."

- 힘들지 않나. 50일 넘게 수액도 안맞고 단식을 하는 건 생명에도 위험한 거 아닌가.

"그렇게 물어보면 ‘힘들어 죽겠어요, 한 번 굶어보실래요?’ 할 수도 없고...그냥 겉으론 괜찮다고 해야지. 단식이 40일이 넘어가니 물을 마시기도 힘들다. 임계점에 다다른 거 같다. 단식한 뒤 40일이 지날 때 처음 누워봤다. 50일 전 까지 등을 땅에 댄 게 3번이다. 지금도 대부분 눕지 않고 앉아서 책을 본다. 버터야 한다는 생각이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미음을 먹으면서 끝낼 싸움이 아니라고 판단해서다. 의사한테 '기본치료를 거부하겠으니 수액주사 놓지 말라'고 얘기했다. 의사가 피검사와 오줌검사를 하고 입원하라고 했지만 ‘생사를 초월한 문제니까 그냥 놔둬라’고 했다."

- 국보법 폐지 단식을 하는 취지를 말해달라.
“국보법 폐지가 갖는 의미는 우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다. 미국은 2006년이면 동북아에서 미사일방어망과 군사재배치를 두 축으로 전쟁시스템을 완비한다. 이 시스템이 구축되는 근본요인이 분단체제다. 미국의 전쟁체제 구축을 막고 분단체제극복-한반도 평화구축-동북아평화체제로 넘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남북 당국간 정치경제 교류, 민간 사회문화 교류, 그리고 한반도와 한반도 밖 사람들 사이 교류와 결합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결합을 위한 한 방법이 국가보안법 폐지다. 남북협력기금같은 건 상황에 따라 끊길 수도 있다. 남북 민간교류를 활발하게 만들려면 분단체제 자체를 뚫는 움직임을 북한에게 보여줄 필요도 있다. 그게 바로 국보법 폐지다"

   
▲ 12월 24일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 53일째인 송현석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정책위원장
"국가보안법 폐지는 분단체제를 뚫는 움직임"

죽음을 무릅쓰고 국보법 폐지 단식을 잇는 까닭에 대해 그는 힘겹지만 길게 설명했다.

“민가협 자료를 보니 노무현 정부 들어 9개월 동안 300여명 정도가 국보법 때문에 구속됐다. 이 법은 민주화, 인권, 통일을 가로막고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1천만 이산가족이 교류를 못하게 가로막아 그들의 원한이 쌓여있는 법이다. 이 법은 지난 50여년 동안 통일, 민주, 사회균형을 얘기했던 사람들을 억압했다. 사람이 가진 생각을 자유롭게 나타내는 것도 억압했던 법이다. 이 법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 연내 처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지금은 연내처리를 위해 정치적인 전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금 1000여명이 노상단숙을 하고 있다. 단식자 가운데 젖먹이 엄마도 있다. 이 사태를 두고 내년으로 넘어간다는 건 정치적 판단에 앞서 도덕적 판단의 문제라고 본다. 열린우리당이 이 사안을 내년으로 넘긴다면 정체성을 의심받을 것이다. 여야 모두 자기 함정에 빠지고 있다"

"이철우 의원, 비루했다"

- 이철우 의원 파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이철우 의원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심하게 말해 ‘비루했다’고 본다. 자기 입으로 민주화 운동 경력을 자랑스럽다고 했는데, 그럼 당시 군부독재 최고부역자 정형근이나 공안검사 출신 주성영한테 ‘군부독재에 붙어 민주주의를 유린한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서 입을 놀리느냐’고 단호하게 대응했어야 한다. 국민이 뽑은 입법기관이 그만한 배포와 사리판단이 없나. 기껏 조찬기도회에서 울면서 참회기도나 할 일인가.
그 사람이 과거에 맑시즘이건 주체사상이건 지금은 자유주의건 어떤 사상을 갖든 그걸 뭐라 할 수 없다. 차라리 유시민 의원처럼 ‘과거엔 그랬어도 지금은 나 자유주의자인데, 왜 안돼냐’하고 당당하게 굴면 된다. ‘그때 잘못했다해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그게 축적돼서 지금 내가 있다’고 당당하게 얘기하면 될 일이다. ‘그 시간의
가치'와 ‘자신의 가치'를 당당하게 지켜야 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사람은 힘이 생긴다"

1평 남짓 좁은 공간엔 사회과학 책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어제 응급실에 누워서 논문을 하나 읽었다. 그러다 <칼의 노래>를 보고 하룻 만에 1권을 다 읽었다. IMF가 내년도 경제계획과 관련해 자료를 쭉 내놓고 있는데 그것도 검토하고 있다. 북한의 리상호가 번역한 <열하일기>도 봤는데 번역이 예술이더라"

- 그 몸으로 책을 읽을 수 있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평소 원래하던 공부량이다.(웃음) 내가 원래 정책 쪽 일을 맡기 전까지는 ‘쇠파이프’를 잡던 ‘무관’ 출신이었다. 이 정도 기개는 보여 줘야...”

50여일을 넘게 단식을 한 사람치고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는 좋아보였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계속 힘이 없어서 빌빌거리고 있었는데 조금 전 대학교 후배들이 찾아왔다. 99-00학번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데,  힘이 나더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은 힘이 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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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2-25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목소리가 맑으시더라구요. 더 쇠약해지시기 전에 끝나야 할 텐데...

balmas 2004-12-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강이 많이 걱정이 됩니다. 평소에 건강한 몸이었다 해도 말이 54일이지 ...

날도 추워지고 ...
 

첫날이 제일 힘든데 추운날 와서 어떻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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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겨울. 여의도 국회 앞 농성장에는 국가보안법 연내폐지를 위한 국민 단식농성당이 두 달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가자만 벌써 1천명이 넘었다. 오랜 배고픔과 함께 겨울의 찬바람을 비닐천막 하나로 이겨내고 있는 농성단. <오마이뉴스> 기자가 그들을 찾았다. 다음은 지난 20일~21일 1박 2일간 농성단과 함께 생활한 <오마이뉴스> 사회부 박상규 기자의 일일단식 동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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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일(수) 오전 10:00]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 여의도 국회 앞. 국가보안법 연내폐지를 위한 국민 단식농성당(단식농성단) 600여 명이 또 하루의 농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장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할 때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농성자들은 하얗고 파란 비옷을 꺼내입었다.

그 대열에서 감잎차를 마시는 20대 젊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이름은 황임봉. 올해 스물여섯살. 부산여성회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지난 12월 6일 서울로 올라와 단식 농성단에 합류했다고 한다. 단식 열흘째를 맞는 황씨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배고픈 단계는 이미 지났고, 어지러워서 계단을 잘 오를 수가 없네요." 황씨는 겨울비를 맞으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당시 나는 단식농성단을 오전동안 취재해 기사 하나를 출고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황씨의 말 한마디는 당초 계획을 깨끗이 접게 만들었다.

열흘 동안 굶어 "어지러워 계단을 오를 수 없다"는 600여명의 사람들을 단 2시간 취재해서 기사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단식농성단 일원으로 황임봉씨와 같이 굶으며 생활한 내용을 쓰기로 결심했다. '일일단식' 체험기라고 할까. 그리고 닷새가 지났다.

[12월 20일(월) 밤 11:00] 천막없는 '비닐농성장'

'일일단식'에 들어갈 맘으로 단식농성단 천막이 있는 여의도에 도착한 건 20일 밤 11시. 이날따라 겨울 바람이 더 매섭게 귓전을 때렸다. 우선 상황실부터 찾아갔다. "아까 연락드린 박상규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사를 쓰다가..."라며 첫 인사를 건넸다.

담당자는 "첫날이 가장 힘든데 이렇게 추운 날 와서 어떡하느냐, 오는 날이 장날이네요"라면서 침낭 하나를 건넸다. 침낭을 들고 노동자 단체 소속 농성자들이 있는 천막으로 갔다. 그러나 천막 농성장에 '천막'은 없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막기 위해 농성장 사방을 둘러친 건 얇은 '비닐'이었다. 모두 18개 동의 '비닐농성장'에서 1천여 명으로 늘어난 단식농성단은 숙식이 아닌 '숙'만을 하고 있었다.

비닐농성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석유냄새가 확 몰려왔다. 모두 10개가 설치된 열풍기에서는 온기와 함께 매연, 굉음까지 나왔다. 곳곳에는 농성단의 빨래가 널려 있었고, 동 마다 하나씩 설치된 생수통 옆에는 소금과 감잎차, 마그밀(초기 단식 농성자들의 배변을 돕는 약품)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농성장 풍경을 찍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1시간여를 돌아다닌 뒤 잠자리로 돌아왔다.
 
▲ 농성자 대부분은 점심 시간에 주로 천막에서 잠으로 휴식을 취했다.
ⓒ2004 오마이뉴스 박상규


[12월 20일(월) 새벽 0:30]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사람들

배고픔과 추위에 지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소등이 된 천막은 어두웠다. 몇몇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여의도 공원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거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상황실에서 받은 침낭 속으로 몸을 넣고 누웠으나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내가 쓰러지면 우리가 간다. 목숨 걸고 끝장낸다. 국가보안법 끝장내는 날 웃으면서 춤을 추리라". 벽에 붙어있는 '국보법 폐지 무기한 단식농성단의 노래' 가사를 보며 눈을 감았다. 이들이 웃으며 춤을 추는 날은 언제일까.

추위 때문에 새벽 내내 자다 깨다를 되풀이했다. "모든 사람들이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단식 16일차 김기호(울산 민주노동당원)씨의 말이 실감났다. 추위에 심하게 뒤척였는지 옆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말을 건넸다. "우리 추운데 같이 붙어서 잡시다." 그래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단식동지' 옆으로 바짝 붙었다. 따뜻했다.


[12월 21일(화) 오전 7:00] "우린 이미 배고픔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단식농성단의 기상은 오전 7시. 주변 농성자들이 일어나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졸립고 추웠다. 그리고 석유냄새 때문에 머리가 무척 아팠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농성자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여의도 공원 인근 주민들이 나와 아침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식 농성자들은 맨손체조를 하거나 걷기 등으로 몸을 풀었다. 며칠씩 굶은 그들에게는 달릴 힘이 없다.

20분 정도 운동을 한 뒤 물이 나오는 가까운 화장실로 갔다. 농성자들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있었다. 모두들 찬물에 세면하는 것이 익숙한지 말끔히 씻고 있었지만, 나는 얼음장 같이 찬 물이 엄두가 나질 않아 포기했다. 이만 닦고 화장실을 나왔다.

▲ 혈압을 측정하고 있는 단식단원,
ⓒ2004 오마이뉴스 박상규

 

[12월 21일(화) 오전 7:30] 출근길 선전전

잔뜩 움츠러든 몸으로 아침 출근길 선전전을 따라나섰다. 출근길 선전전은 릴레이단식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 100여명은 매일 아침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과 영등포역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국가보안법을 폐지합시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홍보물을 일일이 나눠줬다.

일일단식을 위해 보건의료노조 강원본부에서 올라온 이현경(31)씨는 여의도역 3번 출구에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씨는 "안녕하세요, 이거 좀 읽어보세요"라며 출근길 시민들에게 홍보물을 건넸다.

그러나 추운 날씨 탓인지 많은 시민들은 주머니 속에 들어간 손을 꺼내지 않았다. 출근길 선전전은 1시간 30여분 가까이 이어졌다.

[12월 21일(화) 오전 10:00] "배고픔보다 추위가 더 힘들어"

오전 9시 천막으로 돌아왔다. 오전 10시가 되자 농성단은 털모자와 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채 조별로 열을 맞춰 국회 인근 국민은행 앞 농성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각자의 침낭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중무장을 한다고 해도 추위와의 힘겨운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매일 하루에 두 번씩 국회를 바라보고 앉아 농성을 한다. 농성 중에는 자유발언과 각계각층의 방문이 이어진다. 이날은 천영세, 노회찬 등 민주노동당 의원 5명과 이미경, 우원식 등 열린우리당 의원 12명이 차례로 농성단을 찾았다. 이들은 일찌감치 와서 농성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연내폐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하며 돌아갔다. 과연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 농성자 대부분은 점심 시간에 주로 천막에서 잠으로 휴식을 취했다.
ⓒ2004 오마이뉴스 박상규
침낭으로 하체를 덮고 스티로폼 위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오전 농성을 하니 "배고픔보다 추위를 견디는 게 힘들다"는 단식농성자들의 말이 실감났다.

"굶은 지 5일이 지나면 배고프다는 감각은 없어집니다. 그 후부터는 추위 속에서 어지러운 증상을 이겨내야 합니다. 연내까지 꼭 폐지됐으면 좋겠는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웃음)." 단식 16일째의 임승관(36. 인천시민문화센터)씨가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한 말이다.

방학 이후 농성단에 결합한 대학생들은 아직 배고픔의 고통을 호소했다. 단식 5일째를 맞은 김연(한양대 3학년)씨는 일명 '김떡순'이 가장 그립단다. "김밥, 떡볶이, 순대가 제일 생각나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포장마차 옆을 지나갈 때면 거의 쓰러질 지경입니다. 그래도 여기 있는 어르신들하고 국보법 폐지의 순간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12월 21일(화) 오전 11:30] 2시간 동안의 낮잠

낮 동안의 휴식을 위해 천막으로 다시 돌아왔다. 바깥의 찬 바람에 2시간을 있다가 천막에 들어오니 그나마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로 졸음이 몰려왔다.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농성자 대부분은 점심 시간에 주로 천막에서 잠으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뜨자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깜짝 놀랐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12월 21일(화) 오후 2:00] 빠뜨린 침낭

국민은행 앞 농성장으로 급히 뛰어갔다. 다른 농성자들은 이미 열을 맞춰 앉은 채 농성을 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대열 맨 뒤에 끼어 앉았다. 앗차! 급히 나오다가 침낭을 빠뜨리고 나온 것이다. 큰일이다. 침낭 없이 이 찬바람을 어찌 견딜꼬. 배고픔도 잊은 채 추위 걱정이 앞섰다. 조용한 침묵과 함께 한 시간이 흘렀다.

[12월 21일(화) 오후 3:00] 황임봉씨 하혈로 병원에 실려가다

정적을 깨뜨리는 사회자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여왔다. 사회자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환자가 발생했다"며 "차량운전이 가능한 단식자는 앞으로 나와달라"고 당부했다. 오들오들 떨며 연단 천막 옆에 황임봉씨가 앉아 있었다.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아 단식을 포기한 줄 알았던 황씨는 16일의 단식과 추위로 하혈을 하는 '위급한 환자'가 되어 있었다.

24시간 차가운 노상에서의 천막생활. 26세의 젊은 여성이 견디기에는 쉽지 않았을 터다. 결국 황씨는 자신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16일간 굶으며 투쟁한 농성현장에서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됐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21일 오후 3시의 일이다.

황씨를 병원으로 후송한 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4자 회담'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황씨 소식에 안타까워하던 농성단은 모두들 "저것들이 또 배신하는구나"라며 "너희들이 정말 우리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농성단은 바로 영등포구 당산동 열린우리당사로 향했다. 40여분을 걸은 뒤 열린우리당사에 도착했다.

[12월 21일(화) 오후 3:40] 우리가 가장 먹고 싶은 것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열린우리당사도 아니고, 한강의 겨울바람도 아니었다. 이미 200여명의 전경이 당사 앞을 가로막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성단은 '4자회담 중단'을 열린우리당에 촉구하며 지도부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묵무부답이었다. 3시간 넘게 시위를 벌였다. 자유발언도 하고 노래도 했다. 대학생들은 춤도 췄다.

지역별로 나와서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것'을 얘기하기도 했다. 부산 지역은 "오뎅 국물에 소주", 전라도 지역은 "삼겹살에 김치 구운 것", 경기지역은 "그냥 김치찌개", 강원지역은 "생태찌개" 대학생들은 "떡볶이, 순대와 김밥" 등을 꼽았다. 음식 이름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미칠 것 같다"고 외쳤다. 며칠씩 굶은 사람들이 목청은 여전했다.

▲ 털모자와 장갑 등으로 '중무장'을 한 농성자들. 하지만 추위와의 힘겨운 싸움은 배고픔보다 더 어렵다.
ⓒ2004 오마이뉴스 권우성

[12월 21일(화) 저녁 7:00]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의 야합을 중단하라"

저녁 7시부터는 1시간 동안 촛불집회를 열었다. 평소에는 광화문 교보문고 앞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밤 9시에 조별 평가를 마쳐야 단식농성단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날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도부의 '4자회담'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한나라당과 야합을 중단하고 국보법을 폐지하라"는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날 단식농성자들은 오후 2시부터 밤 8시까지 6시간 동안 휴식 없이 추위 속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날 농성단을 찾은 민중가수 손병휘씨의 노래를 통한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12월 21일(화) 저녁 8:00] 무거운 발걸음

밤 8시. 촛불집회를 마치고 여의도 농성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척 무거워 보였다. 특히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내릴 때 힘차게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농성단 모두는 계단 중간에서 꼭 한 번씩 쉬었다. 단식 7일째인 황나은(23)씨는 "너무 어지러워 도저히 한번에 계단을 오를 수 없다"고 말했다.

[12월 21일(화) 밤 9:00] "국보법이 끈질기게 살아남는 게 더 괴롭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비닐농성장으로 돌아오니 병원으로 후송됐던 황임봉씨가 돌아와 있었다. 황씨는 "의사가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 거래요. 호르몬 주사 맞으니 단식을 더 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5시간 동안 밖에서 투쟁할 때 저는 이곳에서 쉬었잖아요"라며 미안해 했다.

황씨는 16일 단식을 하는 동안 5kg이 빠졌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미 배고픔도 사라졌다. 이젠 허리 통증과 손발 저림이 황씨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도 황씨는 "국보법이 끈질기게도 살아남는 게 더 괴롭다"고 했다.

"기자 아저씨는 괜찮아요? 내가 겪어보니까 하루 굶을 때가 가장 힘들어요. 처음이라 먹고 싶은 게 많이 생각나잖아요. 빨리 돌아가서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기자 아저씨는 좋겠네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니까요. 난 언제나 갈 수 있으려나...(웃음)" 황씨는 애써 웃어 보였다.

▲ 오마이뉴스 사회부 박상규 기자가 20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국가보안법 연내폐지 국민단식농성단과 함께 1일 단식체험을 하고 있다.
ⓒ2004 권우성
[12월 21일(화) 밤 11:00]

단식 끝나자 마자 밥 두 그릇을 해치우다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보고 기자는 단식농성단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밤 10시부터 1시간 정도 농성단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참의료실천단'에 대한 취재를 끝낸 것은 밤 11시.

여의도 농성장을 나서는 순간,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달려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혼자서 두부찌개를 먹으며 하루동안의 허기를 달랬다. 그날 공기밥 하나를 더 추가해 두 그릇을 먹었다.

[12월 22일(수) 오전 10:00]

1천여명의 농성단은 언제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지금은 배고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다. 따뜻한 사무실에서 난 이 글을 쓰고 있다. "국보법의 끝장을 보겠다"는 황씨와 1천여 단식농성단이 집으로 돌아갈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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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그런데 네그리 같은 사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론󰡕에서 처음으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개념이 단지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윤리학󰡕을 포함하는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 전체를 재정초하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네그리에 따르면 대중들의 역량 개념은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국가imperium omnino absolutum”라고 부른 이유를 해명해줄 뿐만 아니라, 󰡔윤리학󰡕 1, 2부에서 볼 수 있는 사변적인 존재론을 넘어서 스피노자 철학이 실천적인 구성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주춧돌을 마련해 준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스피노자 철학의 혁신적인 의의(스피노자 철학의 “야생의 이례성” 또는 “야생의 별종”으로서의 스피노자)를 집약하고 있고,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을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에 대한 평가에서도 네그리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운데, 이는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대중들의 역량 개념이 󰡔정치론󰡕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개념은 󰡔정치론󰡕에서 총 4차례 사용되고 있는데, 우선 국가의 권리 또는 통치권에 대한 정의에서 등장하고 있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1)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 다음 3장 2절에서는 대중들의 역량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TP 3장 2절).


이 두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통치권 또는 주권을 정의하는 매우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의 경우 주권을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정치론󰡕의 이 두 구절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치권의 기초로 명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전개한 “역량의 존재론”과 좀더 부합하는 정치학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실제로 󰡔정치론󰡕 2장 3-4절의 논의는 두 저작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자연 실재들이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은 충만하게 현존하는 신의 역량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권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신이 모든 실재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고, 신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된 신의 역량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자연적 실재는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적으로 지닌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각각의 자연적 실재가 실존하고 활동하는 역량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의 역량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권을 자연의 법칙들 자체로, 또는 모든 실재가 생산되는 규칙들, 곧 자연의 역량 자체로 이해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전체의 자연권 및 따라서 각 개체의 자연권은 그것의 역량이 미치는 곳까지 연장된다atque adeo totius naturae, et consequenter uniuscujusque individui naturale Jus eo usque se extendit, quo ejus potentia. 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자연]의 법칙들에 따라 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최고의[주권적] 권리에 따라 하는 것이며, 그는 자연에 대해 자신의 역량만큼의 권리를 갖는다.(TP 2장 3-4절)


이 구절의 핵심 논점은 신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연권의 존재론적 기초로 제시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1편에서 살펴봤듯이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자의 권리가 주권자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말함으로써, 홉스 주권 개념의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역량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과 자연권에 대한 규정 사이의 체계적 연관성이 분명히 해명되지 않고 있는 데 반해, 위의 구절에서는 이를 연역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 따라서 이처럼 자연 전체의 역량이 신의 역량과 다르지 않고 인간을 포함하는 각각의 자연적 권리가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자연적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면, 대중들이 한 사회, 한 국가의 통치의 권리를 규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더 나아가 2장 17절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인민의 역량”으로 이해하게 하고,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을 민주주의 자체와 동일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인민의 역량, 인민 자신의 통치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 또는 적어도 그 기초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스피노자는 위의 구절에서 분명히 통치권의 기초로서 대중들의 역량과 이러한 통치권을 실행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역량 자체가 아니라, 통치권이 실행되는 세 가지 형태 중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곧 통치권이 한 사람의 군주에 의해 행사되면 군주정이고, 법적으로 명문화된 규정이 아니라 주권의회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특정한 사람들(반드시 소수일 필요는 없다)에 의해 행사되면 귀족정2)이며, 반대로 법적 규정들에 따라 선출된 사람들이 통치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민주정이다. 역으로 대중들의 역량은 민주정 국가만이 아니라 귀족정 국가 및 군주정 국가의 통치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중들의 역량 자체는 스피노자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이러한 분류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 법적 규정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이런 근거 위에서 대중들의 역량과 민주정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일리가 있는데, 이는 특히 8장 3절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고려해볼 때 그렇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앞에서 우리가 말한 것과는 달리 대중들의 역량을 민주주의의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귀족정이 의지해야 하는 기초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단 한 사람에게 양도된 통치권imperium과 충분히 큰 규모의 회의체로 양도된 통치권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실로 상당히 큰 차이점이다. 첫째, (우리가 6장 5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 한 사람의 역량으로 통치의 부담을 전부 감당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큰 규모의 회의체concilio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의체가 충분히 큰 규모다라고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통치의 부담을 감당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에게는 자문관들consiliariis이 필요하지만 회의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 왕들은 유한하고 회의체들은 영속적이다aeterna. 따라서 일단 회의체로 양도된 주권은 결코 대중들로 복귀하지 않는다atque adeo imperii potentia, quae semel in concilium satis magnum translata est, numquam ad multitudinem redit. 우리가 7장 25절에서 보여준 것처럼 군주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셋째, 왕의 통치는 왕의 연소(年少)함이나 질병, 연로함이나 다른 원인들 때문에 종종 취약한 경우가 있는 반면, 이런 종류의 회의체의 역량은 항상 하나로 동일하게 유지된다. ...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에 부여된 통치권은 절대적이라고, 또는 이러한 조건에 아주 근접한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만약 절대적인 통치권imperium absolutum이 실존한다면, 이는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quod integra multitudo tenet일 수밖에 없다.(TP 8장 3절)


이 구절에서 스피노자는 집약적으로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경우를 비교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볼 때 군주정의 취약점은 왕들의 유한성에 있는데 비해, 귀족정의 강점은 회의체들을 통해 영속적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지는 한에서 절대적 통치권에 근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처럼 충분한 다수가 절대적 통치권에 접근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면,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은 당연히 절대적 통치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은 민주정과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면, 민주정은 곧 절대적인 통치권, 절대적인 정체의 실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사회계약론을 사용하지 않은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제시될 수 있는 듯하다. 곧 사회계약은 어떤 식으로 제시되든 간에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권의 양도, 곧 자신의 역량으로부터의 소외와, 법적으로 형성된 초월적 권력인 주권자에 대한 예속―노예와, 신민 또는 시민 사이의 차이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을 함축하고 있는 데 반해, 방금 제시된 구절들의 논의에 따르면 󰡔정치론󰡕은 적어도 경향적으로나마 초월적인 주권적 권력에 대한 개인들의 예속을 전제하지 않는 정체, 곧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권력”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으며, 이를 “완전하게 절대적인 국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소 성급한 결론인데, 대중들의 역량 개념의 나머지 두 가지 용법들을 검토해보면 그 이유를 좀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가장 강력하고 자신의 권리를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국가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 설립되고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리는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처럼 인도되는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들의 연합은, 만약 국가가 건전한 이성이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바에 따라 최대한 운영되지 않는다면 결코 인식될 수 없다(TP 3장 7절).


국가의 권리가 대중들의 공통적인 역량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국가의 역량 또는 권리는 시민들 대부분이 국가에 맞서 결탁할 만한 이유들을 제공하는 한에서 감소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TP 3장 9절).


대중들의 역량을 직접 민주정과 일치시키고, 이로써 대중들의 역량을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스피노자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항상 유지하고 있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주권자는 꼭 인간 개인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차이를 대립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및 인간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일차적인 문제는 존재론에서부터 인간학,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 철학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하지만 결코 각각의 영역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은, 포텐샤potentia와 포테스타스potestas 개념3)의 구분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제한된 지면 안에서 이 두 가지 개념이 지니는 모든 차이점을 다 해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들은 지적되어야 할 듯하다. 우선 존재론적으로 볼 때 포텐샤/역량은 어떤 것을 생산하는 현행적이고 실제적인 힘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 이 힘의 실행의 필연성을 가리키는 데 반해, 포테스타스/권능은 초월자(이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초월적 인격신을 의미하지만,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를 함축하기도 한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거나 실행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곧 존재론의 영역에서 두 개념의 핵심적인 차이는 역량 개념의 경우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관계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데 반해4), 권능 개념은 이러한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초월적) 주체의 의지의 무한성을 함축한다는 점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당대의 신학 및 존재론(특히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리 17의 주석이나 1부 정리 33의 따름정리 2 같은 곳에서 역량의 관점에서 권능의 신학ㆍ 존재론에 대해 매우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초월적 권능을 중심으로 자연 또는 실재를 설명하게 되면, 자연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인과관계 및 그 일부로서 인간 자신의 본성을 적합하게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움직이는 초월적 신이나 주권자에 대한 맹목적인 예속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윤리학󰡕 1부 「부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학의 영역(또는 독특한 실재들로서의 “유한 양태들”의 영역)에서 역량은 코나투스 개념으로 표현된다5). 이처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차원에서 유한 양태들의 차원으로 옮겨올 경우 역량은 현행성actuality과 잠재성virtuality(또는 “영원성”)으로 분화되며, 능동과 수동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기입된다. 현행성과 잠재성의 차이 또는 잠재성으로부터 현행성의 분화, 독립은 개체들의 개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량의 형상적 한계를 수반하며, 이러한 한계 내에서 역량의 양적 차이, 강도의 변이가 전개된다. 따라서 능동과 수동의 경향적인 분화는 현행성과 잠재성의 분리가 산출한 강도적 차이의 공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능동과 수동의 구분은 또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생겨날 때, 곧 (앞의 정의 1에 따라)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나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어떤 것이 따라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한다[능동적이다]nos tum agere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따라나올 때, 나는 우리가 활동을 겪는다[수동적이다]nos pati라고 말한다.”(E III D2)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 볼 때 이 정의의 요점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1부의 마지막 정리 36이 말하듯이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실재는 그것이 실존하는 한 항상 원인으로서 어떤 결과들을 생산하며, 이것이 그의 역량을 구성한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최소의 능동성을 함축하고 있다. 둘째, 하지만 이러한 역량의 실현은 적합하거나 부적합하게, 곧 “우리의 본성만으로” 이루어지거나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방식으로(또는 “완결적”이거나 “단편적이고 혼합적[곧 부분적]으로mutilus & confusus”) 이루어진다. 따라서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원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이 우리를 통해 산출된 결과들과 맺는 관계들의 차이를 가리킨다. 우리가 이 결과들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전유(專有)할 때 우리는 수동적이며6), 우리가 완결되게 전유할 때(“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능동적이다. 따라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또는 그 이전에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운동은 해방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존재론적ㆍ인간학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는 역량 개념을 (네그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학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이 경우 󰡔정치론󰡕에 나타나는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자의 권력 사이의 차이는 역량과 권능 사이의 차이로 이해되어, 역량은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힘으로 나타나며 주권자의 권력은 부정적이고 기생적인 지배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문제가 있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론이나 인간학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역량 개념을 부지불식간에 “주체/기체(基體)subjectum” 또는 개체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 관점은 “신의 역량”이나 독특한 실재/인간의 역량에 대해 사고할 때 (자생적으로) 개체를 모델로 삼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신이나 독특한 실재들을 고립된 개체들로서, 그리고 신의 역량이나 실재들의 역량은 개체 또는 주체의 능력(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으로 사고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에 고유한 관계의 존재론(또는 오히려 비(非)존재론meontology7))과 어긋나는 관점인데, 이러한 개체론적 관점은 처음부터, 개체에 구성적인, 그리고 개체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들로부터 개체를 분리시켜 사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령 네그리 같은 사람들이 “다중”을 구성의 “주체”로 설정할 때 문제가 되는 것8)은 단지 이러저러한 문헌학적 문제점들이나 네그리의 관점이 함축하는 막연한 낙관적 전망만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자칫 주체의 목적론에 빠져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학이 함축하는 진정으로 혁신적인 의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9).

  따라서 이러한 주체의 목적론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체나 주체의 모델에 따라 파악된 역량론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관계론의 관점에서 역량 개념을 다시 사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정치의 영역은 역량 개념을 관계론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한 특권적인 장소가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국가의 기초를 더 이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의 기초 위에서 사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신학정치론󰡕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정치론󰡕 2장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전개된 전자의 관점은 법적 형식주의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규정하지 않고 역량의 관점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와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초월(론)적 정치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10). 하지만 이 관점은 역량의 문제를 여전히 개체론의 틀에 따라 사고한다는(또는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아직 일관된 관계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여러번에 걸쳐 “주권자의 권리는 주권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학정치론󰡕은 주권의 문제를 주권자 개인(또는 집합적 개체)의 역량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는 반면, 󰡔정치론󰡕에서는 주권자의 역량이 아니라 대중들의 역량에 따라 주권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나오게 된다11). 이런 의미에서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가 근대 자연권 이론과 단절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표일 뿐만 아니라 관계론적 관점에서 역량의 문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스피노자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역량 또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는 지배권력에 맞선 인민대중의 비판적인 힘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라는 좀더 근원적인, 그리고 좀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 개념은 그 자체로 능동적인 것도 실정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현사실적인faktisch”, 곧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이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실존적(이 경우에는 사회의 실존이겠지만) 사태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대중들(의 운동)이란 정서적ㆍ관념적 연관망들의 집합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중들의 역량은 항상 능동성과 수동성의 갈등적인 경향 속에 들어 있으며, 항상 희망과 공포의 정서적 동요를 보여준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정치적인 의미의 역량, 곧 어떤 국가의 제도적 틀 안에서 존재하고 행사될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 법적ㆍ정치적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힘(또는 폭력)이며, 이러한 힘은 항상 제도를 동요시키거나 전복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역량은 결코 안정된 지속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유지와 보존을 위한 기초로 사용될 수도 없다12).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자연적 역량이 실효성 있는 정치적 역량으로 표현되려면 항상 제도적 매개가 필요하다13)

  그러므로 이러한 법적ㆍ제도적 매개는 스피노자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법적ㆍ제도적인 매개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자생적으로는 정념적이고 갈등적인 존재들로 남아 있는 개인들 및 대중들이 마치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행위하듯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행위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으며, 스피노자는 이를 “마치 ~처럼veluti”이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것은, 대중들은 본성적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정신에 의해 실제로 인도되지는 않지만, 대중들의 역량이 국가의 보존과 안전을 위해 적절하게 활용되기 위해서는 대중들은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법적ㆍ제도적 매개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국가의 근본 과제를 “국가의 평화와 안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국가의 평화와 안전은 “국가 형태의 보존imperii formam conservandam”(TP 6장 2절)에 달려 있으며, 국가 형태의 보존을 위해서는 대중들의 (정념적) 동요가 낳는 불안정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이라는 개념들은 상호 대립하는 개념들이 아니며, 주권은 초월적이고 기생적인 지배권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처럼 두 개념을 상호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홉스가 설정한 구도의 (거울반영적인) 전도에 그칠 우려가 있다. 곧 홉스가 정치 권력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이를 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중들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하여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몰아내야 했다면, 반대로 이와 같은 관점은 대중들 자체를 해방적인 주체, 또는 진정한 정치의 주체로 만듦으로써, 제도적인 정치의 공간 자체를 해체하고 말소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코 주권이라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폄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홉스 정치학의 핵심 원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개조하려고 노력했다14).

  이러한 노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론󰡕에서 집요하게 나타나는 (數)의 논리, 또는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통계학적/국상학적(國狀學的)statistical 활용이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97b 참조). 통계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중들은 다수, 더욱이 하나의 통일된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독특한 실재들, 개인들을 의미하며, 한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주민들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다수는 국가의 생존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기초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통치권 내지는 주권의 정치적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곧 이러저러한 주권자(그리고 이 주권자가 구현하고 있는 각각의 정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대중들 중 가장 큰 부분maximae partis multitudinis의 분노”를 자극해서는 안되며(TP 3장 9절, 7장 2절, 10장 8절 참조), 주권이 대중들의 손에 넘어가도록(“대중들로의 복귀”) 해서도 안된다(이에 관해서는 7장 25절 참조). 이는 사회적 관계, 국가 형태의 해체로 귀결되거나, 또는 적어도 국가 형태의 안정과 역량의 강화가 아니라 동요와 역량의 감소를 낳을 뿐인, 한 국가형태(또는 정체)에서 다른 국가형태로의 교체로 귀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통계학적/국상학적 관점에서 파악될 때 민주주의란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정체(政體)regime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나아가려는 운동, 곧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치 영역 안에, 회의체 안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이는 예컨대 군주정에서는 군주 개인(또는 실질적으로 그를 조종하는 조신(朝臣)들과 권력가들)의 독단과 무능력에 따라 통치가 좌우되는 것을 막고, 민회에 심의권을 부여해서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들을 수합하고 왕은 결정권을 보유함으로써 주권의 통일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표현된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TP 6장 18-19절 참조. 그리고 7장 1절에 나오는 사이렌의 유혹에 맞서 자신의 몸을 묶은 율리시즈의 사례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평 참조). 그리고 귀족정의 경우에는 “충분한 다수로 이루어진 회의체”를 구성해야 하며, 심지어 “대중들 전체integra multitudo가 귀족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TP 8장 1절)는 거의 모순적인 주장에서 이런 사고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주권은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존재론적 기초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대중들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대할(또는 절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지만, 대중들의 역량을 합리화하고 그것에 결여된 유사-통일성(“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한 것처럼”)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정치, 곧 국가 형태의 보존의 기술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 정치학의 강점 중 하나는 이러한 대중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가 모든 국가의 근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쉽게 보수주의적인(또는 엘리트주의적인) 결론으로 나아가거나 홉스식의 인공주의적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또 더 나아가 그 이후의 혁명주의적인 전통과 달리 대중들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으로 지성의 비관을 보충하려고 하지도 않고서도,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변증법을 통해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또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장치의 변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하게 절대적인 정체”(11장 1절)로서의 민주주의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결론: 사회계약론의 해체와 정치학의 새로운 과제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의 모호성을 정정하면서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 원리, 곧 인간의 본성적 사회성이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있다. 2) 이런 측면에서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윤리학󰡕 3부 정리 27 이하에서 등장하는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정서적 관계망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들의 사회화 경향은 항상 이미 반사회화 경향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원초적 계약이라는 관념은 처음부터 성립 불가능하며,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중요한 문제는 사회계약론과는 달리 사회의 원초적 구성이나 법적 정당화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기초지음과 동시에 위협하는 정서적 관계, 곧 대중들의 운동을 조절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게 된다. 3)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치론󰡕에서는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중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을 수용하는 주요한 이론적 동기는 우중의 이성적ㆍ정치적 무능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정치론󰡕에 등장하는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그가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완전히 포기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이론적 기초 위에서 사고하려고 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이론적 노력의 핵심은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의 변증법을 통해 민주주의를 국가장치 변혁의 과정으로서 파악하려고 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정치론󰡕에 이르러 󰡔신학정치론󰡕에 남아 있던 당대의 자연권 이론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치학의 과제를 재정립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원초적인 개인 대 국가라는 추상적인 이원적 관계로 설정된 고전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구도는 해체되며, 이러한 정치철학의 핵심 요소로서 부르주아 법이데올로기가 은폐하는 자유주의 정치의 근본 과제, 곧 개인(주체)들의 생산과 재생산15)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스피노자 정치학은 아직 또다른 대결을 남겨 두고 있는 셈이며, 아마도 이러한 대결 이후에야 우리는 대중들의/대중들의 공포의 아포리아를 넘어선 스피노자 철학의 좀더 근본적인 이론적 기여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

1) 스피노자가 “주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대개 “숨마 포테스타스summa potestas”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특히 󰡔정치론󰡕에서 “imperium”이라는 용어(이 용어는 대개는 “국가”를 의미한다)를 “주권” 내지 “통치권”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이 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summa potestas”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imperium”을 “통치권”으로 번역하겠지만, 양자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정치론󰡕에서 “imperium”의 번역 문제에 관한 좋은 논의는 Ramond 2002 참조.

2)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대중들 가운데 선발되고selecti 우리가 이제부터 “귀족들Patricios”이라고 부를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의 수중에 통치권이 놓여 있는 국가를 귀족정이라 불렀다. 나는 분명히 일정한 숫자의 선발된 사람들의 수중에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이 국가와 민주정 국가의 주요한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귀족정 국가에서 통치에 참여할 권리는 오직 선출에 의존하는 반면, 민주정 국가의 경우에는 특히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권리나 우연(우리가 적절한 장소에서 설명하게 될 것처럼)에 의존한다.”(TP 8장 1절) “민주정과 귀족정 국가의 차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곧 귀족정에서는 어떤 사람이 귀족위원이 되는 것은 오직 최고의회의 의지와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도 세습적인 투표권이나 공직담임권을 갖지 못하며, 우리가 이제 논의하려는 국가에서처럼 누구도 이러한 권리를 스스로 법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TP 11장 1절)

3) potentia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역량”이라는 용어의 원어고, “potestas”는 우리말로는 “권능”, “능력”, “권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고전 라틴어나 중세 라틴어의 용법에서 이 두 가지 용어는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 없이 함께 사용되었으나, 스피노자(및 홉스)에서는 상당히 뚜렷한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 개념들이 어떻게 다르고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견해가 다소 다르다. 들뢰즈의 경우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구분은 변용들을 생산하는 힘과 변용들을 수용하는 능력의 구분에 해당한다(특히 Deleuze 1969, 14장 참조). 네그리의 경우 이 두 가지 구분은 “다중”의 구성적이고 생산적인 힘 대 지배세력의 기생적이고 소외시키는 권력의 구분에 상응한다(Negri 1990; 1994). 그리고 최근의 몇몇 연구자들은 좀더 문헌학적으로 엄밀한 검토에 기초하여, 스피노자 철학 전체에 걸쳐 이 두 가지 개념이 구분되는 양상들을 해명하고 있다(특히 Terpstra 1994; Ramond 1998; Barbone 1999; Rice & Barbone 2000; Zourabichvili 2002 등 참조). 반면 영미권 연구자들은 (라이스와 바본을 제외한다면) 이 두 가지 개념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연구자들의 구분 노력에 대해 이전에는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던 에드윈 컬리Edwin Curley 같은 이는 최근 들어 이 두 가지 개념들이 존재론 및 정치학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Curley 1997). 이하의 논의는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에 관한 간단한 고찰이다.

4) 이런 의미에서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니체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5) “각각의 실재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스스로 존속하려는 노력은 이 실재 자신의 현행적 본질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E III P7) “충동appetitus ... 은 인간의 본질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 따라서 욕망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충동을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의 사람들과 관련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충동과 욕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E III P9s)

6) 따라서 수동성의 극한은 (들뢰즈가 말하듯이) 우리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곧 이러저러한 타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량이 전유될 때다.

7) 이에 관해서는 Balibar 1993; 1996의 시사적인 언급들을 참조.

8) 대중들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네그리의 입장에 관해서는 Negri 1990; 1994 참조.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multitudo”라는 스피노자의 용어는 “다중”이라는 용어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스피노자 정치학에 관한 이러한 입장은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제국󰡕 및 󰡔다중󰡕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9) 사실 네그리 자신은 이러한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다중” 개념을 항상 “독특성” 개념과 결부시켜 사고하려고 한다(특히 Negri 1994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다중”을 “주체”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10)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97a pp. 72-78 참조.

11) 하지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에 단면적인 단절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5장, 7장)은 스피노자가 이미 󰡔신학정치론󰡕에서 당대의 자연권 이론과 달리 관계론적 관점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단절 관계가 성립한다면, 이는 경향적이고 다면적이지, 확정적이고 단면적인 단절 관계는 아니다. 

12) 󰡔신학정치론󰡕에서부터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스피노자가 당대의 대중운동들, 특히 폭군의 제거와 군주정의 폐지 등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인 운동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3) 스피노자가 “대중들 전체가 보유하는 통치권/권력”이라고 말할 때, “포텐샤potentia” 대신 “임페리움imperium”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4) 반면 󰡔신학정치론󰡕에서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원리는 세속 권력과 구분되는 영적 권능의 공간을 마련하고(“국가 속의 국가”), 이에 기반하여 새로운 신정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당대의 칼뱅주의 신학자들에 맞서 종교적 권력을 정치적 권력에 종속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동원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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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b). Ethik, trans. Wolfgang Bartuschat, Felix Me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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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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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urabichvili, François(2002). Le consérvatisme paradoxale de Spinoza, 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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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12-2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이 글에는 각주 15번이 빠져 있네요.

릴케 현상 2004-12-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을 쓰시느라 그렇게 뜸하셨군요. 저도 하루하루 들어오는 태클들을 피하느라 좀 뜸한 편입니다만^^

balmas 2004-12-2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떤 태클들을 당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크리스마스 연휴에 조금 있으면 연말연시인데, 아무쪼록 애인분과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건강하고 직장생활 잘 하시기를 ...


2004-12-25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의 의미


  󰡔신학정치론󰡕에 대해 󰡔정치론󰡕이 보여주고 있는 핵심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의 등장이다. 이는 이 개념들이 정치체의 존재론적 기초에 관해 새로운 문제설정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주권 개념의 의미와 기능을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선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서 볼 수 있는 용어법상의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저작의 용어법상의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대중을 가리키는 용어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곧 󰡔신학정치론󰡕에서는 우중vulgus, 평민plebs 같이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용어들이 다수 사용되고 있는(불구스는 총 42번 사용되고 있고, 플레브스는 총 21번 사용되고 있다) 반면, 시민들의 집합으로 이해된 인민populus이라는 개념은 좀더 드물게 사용되고 있으며(총 13번), 대중들이라는 용어는 훨씬 더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단어는 단 세 차례(「서문」, 17장, 18장) 등장할 뿐이다.1) 하지만 이와 달리 󰡔정치론󰡕의 경우에는 제일 경멸적인 함의를 지니는 불구스는 단 두 차례만 사용되고 있고(두번 모두 7장 27절에 나온다) 플레브스는 21번 사용되고 있는 반면2), 물티투도라는 단어는 총 69번 등장하고, 대중들의 역량, 곧 포텐샤 물티투디니스potentia multitudinis라는 개념은 총 4번, 2장 17절에서 한 차례, 그리고 3장 2절, 7절, 9절에서 세 차례 사용되고 있다3). 따라서 용어법에서 볼 때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두 저작의 실질적인 내용상의 차이점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네그리와 발리바르의 연구4) 이후 많은 연구자들(특히 유럽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5),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신학정치론󰡕에서는 빈도가 적을 뿐 아니라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처럼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이 개념을 중심적인 개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나아가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이 발전 또는 “진화”하고 있다는 것(예컨대 Matheron 1990을 보라), 또는 적어도 모종의 이론적 단절이 발생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신학정치론󰡕에는 사회계약론이 현존하는 반면 󰡔정치론󰡕에는 부재한다는 사실과, 그 대신 󰡔정치론󰡕에는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중심 개념으로 부각된다는 사실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론󰡕에서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네그리가 말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며, 󰡔신학정치론󰡕에서 우중이나 평민 개념의 용법과 유사하게 부정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지적ㆍ정치적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만약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이로운 것을 욕망하도록 인간 본성이 이루어져 있다면, 화합과 신의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술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성향들은 전혀 다르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에, 국가는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피통치자들도 포함되는 모든 사람이―내키든 내키지 않든 간에―공공의 복리를 위해 중요한 것을 할 수 있도록 규제되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든 아니면 힘이나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이성의 계율에 따라 살아가게 만들어야 한다(TP 6장 3절).


따라서 전체 대중들multitudo integra이 자기자신과 화합할 수 있다면, 대규모 회의에서 늘 일어나는 논쟁들이 소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대중들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소수의 사람들이나 한 사람에게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 (TP 7장 5절)


또한 다음과 같은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본성상 적대적이며, 그들을 통합하고 연결시키는 법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본성을 보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귀족정으로 변화하고 다시 이는 군주정으로 변화한다고 믿는다. 사실 나는 귀족제 국가들 중 다수는 민주제 국가로 출발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믿는다(TP 8장 12절).


  이 구절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대중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의 결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근본적인 인간학적 원리, 곧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되며, 또한 각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 따라, 곧 자신의 인정하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고 자신이 거부하는 것은 그들도 거부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하려고 욕망한다”(TP 1장 5절)는 원리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 정서들에 따라 규정되는 한에서 인간들은 안정적으로 화합과 일치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종의 강제나 규제가 없이는 사회적 관계가 제대로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론󰡕에서도 여전히 스피노자는 대중들이 보여주는 정서적 동요들과 비합리성 및 이것이 불러올 수 있는 국가의 혼란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6).

  발리바르는 대중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두려움과 근심을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을 통해 훌륭하게 규정한 바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이 개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인용하고 있는, 그리고 발리바르가 자신의 논문의 제사(題詞)로 사용하고 있는 타키투스의 󰡔사기(史記)Annales󰡕 1권 27장의 한 구절은 이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7) “대중들의/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소유격의 이중적 용법이다. 곧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대중들이 통치자들에 대해 느끼는 공포만이 아니라 대중들에 대한 공포, 곧 대중들이 통치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라는 원리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인간들의 삶(개인적인 삶과 정치적인 삶)에서 정서들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 삶을 합리적(또는 능동적)으로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드러내준다. 

  하지만 우리가 위에서 인용한 󰡔정치론󰡕의 구절들은 󰡔신학정치론󰡕 및 󰡔윤리학󰡕과 관련하여 얼마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위의 구절들에서는 더 이상 정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중이나 평민으로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6장 3절)이나 “사람들”(8장 12절)과 같이 훨씬 일반적인 명사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우중과 지식인들이라는 엘리트주의적인 인간학적 분할에 의거하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곧 우중이나 지식인, 통치자나 피통치자 모두는 사람들인 한에서 똑같이 정서들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지, 정서적 영향력이 반드시 우중에만 한정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7장 5절과 같이 자기자신과 화합하지 못하는 존재를 “대중들”로 한정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통치자들보다는 피통치자들로서의 대중들이 좀더 정서적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8).

  또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는 달리 더 이상 우중 또는 대중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규율과 복종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우선 2장 17절의 규정이 잘 보여주듯이 󰡔정치론󰡕에서 대중들(의 역량)은 국가의 기초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대중들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는 법/권리를 보통 통치권/주권imperium이라 부른다. 공동의 동의에 따라 국정의 책임을 맡은 이가 이 통치권을 절대적으로 보유한다.(TP 2장 17절)” 그리고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는 달리 대중들을 정념에 예속되어 갈등과 분열에 시달리는 존재로만 규정하지 않고, 적어도 몇 군데에서는 “자유로운 대중들libera multitudo”로 규정하고 있다(5장 6절 둘째줄과 넷째줄, 5장 7절, 7장 26절).  

  그리고 󰡔신학정치론󰡕에서도 엿보이는 관념, 곧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조리한 일이 발생할 우려는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전체의 다수 성원―이 전체가 상당히 큰 규모라면―이 어떤 부조리한 일에 일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TTP 16장 9절; 모로판, 516)라는 관념은 󰡔정치론󰡕에서도 지속될 뿐만 아니라 좀더 정확한 이론적 토대를 얻게 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나의 전체―만약 이 전체가 충분한 크기를 갖고 있다면―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 다수가 어떤 부조리한 일에 동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TP 6장 1절)


인간 본성은 개인 각자가 항상 매우 열렬히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추구하고 [...] 자신의 처지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다른 이의 대의를 옹호하도록 이루어져 있다. [...] 그리고 비록 매우 많은 수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이 회의기구는 필연적으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 이 회의기구의 다수는 결코 전쟁을 벌이려는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평화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고 이를 항상 선호할 것이다. [...](TP 7장 4절))


따라서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치론󰡕에서 대중들은 국가의 기초, 토대라는 위상을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신학정치론󰡕이 다수의 합리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낙관적 태도가 경험적 교훈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정치론󰡕에서 제시되는 거의 동일한 견해에 대해 좀더 일관된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준다. 곧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충분한 숫자의 다수가 보여주는 합리성에 대해 신뢰를 보내고 있다면, 이는 그가 󰡔정치론󰡕에서 개인적 합리성과 제도적 합리성을 󰡔신학정치론󰡕보다 좀더 정확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구분은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통해 정서 개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정서들이 더 이상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역량의 관점에서 합리성을 실현하기 위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식된다면, 그리고 정서들의 상호개인적 성격이 분명히 인식된다면, 합리성은 더 이상 정서들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며, 따라서 인간들 또는 대중들이 정서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 집합적ㆍ제도적 합리성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주)

 

1) 󰡔신학정치론󰡕 및󰡔정치론󰡕에서 대중들, 우중, 평민 개념의 용법 및 의미에 관해서는 Balibar 1997b와 Chaui 1998을 각각 참조.

2) 하지만 이 때 플레브스는 󰡔신학정치론󰡕과 같은 부정적인 함의로 사용되고 있다기보다는 귀족과 대비되는, 고유한 의미의 평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빈도의 차이만으로는 중요성과 의미의 차이를 평가하기 어렵다.

3) 이에 관해서는 󰡔정치론󰡕의 용어들의 빈도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은 Spinoza 1978의 「부록」을 참조하라.

4) Negri 1990; 1994; Balibar 1997a; Balibar 2004 참조. 그 외에 대중들 개념을 스피노자 정치철학 해석을 위한 근간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저작으로는 특히 Bové 1996을 들 수 있다.

5) 반면 영미권 연구자들은 스피노자 정치철학에 대한 연구에서 대중들이나 대중들의 역량 개념이 지니는 중요성을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영미권 연구자들이 그로티우스와 홉스에서 시작되는 자연권 사상의 흐름 속에서 스피노자 정치철학을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고(이 경우 스피노자 정치철학에서 사용되는 법적 개념들, 곧 권리와 법, 자유, 정체 같은 개념들이 주요한 검토 대상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영향에 따라 󰡔신학정치론󰡕이 좀더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미권의 연구자들 중 전자의 경향을 보이는 연구로는 Curley 1991, 1995; Den Uyl 1984, 1987를 꼽을 수 있고, Bagley 1999; Smith 1994, 1997은 후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이다. 반면 Montag 1998은 유럽의 연구 경향과 매우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영미권 연구자들 중 일부는 󰡔신학정치론󰡕과 󰡔정치론󰡕 사이의 이론적 차이점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리 라이스와 스티븐 바본의 개별 연구 및 공동 연구에서 잘 나타난다(Rice 1990; Rice & Barbone 2000).  이들의 논의에 대한 좀더 상세한 비판은 필자의 학위 논문 11장을 참조하라.  

6) 이에 관해서는 TP 1장 3절; 7장 25절; 8장 4절-5절; 8장 13절; 9장 14절 등을 참조.

7) “Terrere, nisi paveant.” 󰡔정치론󰡕 7장 27절.

8)  이에 관한 좋은 논의는 Montag 1998, pp. 78-81 및 Chaui 1998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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