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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2-0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나는 가지 못하지만,

혹시 시간되는 분들은 많이 참석하시길 ...

모모 2004-12-0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호선 안암역이 아니라 6호선 안암역입니다;

balmas 2004-12-01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7호선이 아니라 6호선이군요.
 
 전출처 : 딸기 > 한류.

또다시 배용준 때문에 난리다, 일본은. 하긴, 지난 3월 일본에 온 이래, 지금껏 텔레비전만 틀면 한국드라마, 음식코너에선 한국요리 소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으니, 새삼 '난리다'라고 하기도 어색하지만. 그런데 어제 오늘 방송 분위기는 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도 그럴것이, 그넘의 '욘사마'가 뭔지... 10명이나 다쳤다고 하니 언론들이 떠들어댈만도 하다.
이제부턴 '한국 헐뜯기'로 돌아가는 거냐고? 그렇지는 않다. 일본이란 나라, 우리나라와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고, 서로간에 구원(舊怨)도 많다면 많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고, 욘사마 하나로 모든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어제오늘 여기 방송 분위기를 보자면- 후지TV에선 한국의 방송보도를 잠깐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MBC에서 서울 시민 인터뷰 한 내용. "사실 여기선 배용준씨 가지고 그렇게는 (난리를 치는 건) 아니잖아요. 잘 이해는 안 가요"라는 서울 아줌마의 코멘트. "한국에선 배용준 갖고 그렇게 난리를 안 친다"는 것이 후지TV 뉴스에서 하고팠던 얘기였을 것이다. 신문들도 어제의 '불상사'를 떠들어댔고, 몇몇 신문에선 유감을 표현한 배용준의 기자회견을 '사죄회견'으로까지 지칭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후지TV는 토요일마다 '천국의 계단'을 내보내고 있고, 아사히 TV건 뭐건, 일본 방송들 경쟁적으로 한국드라마 방영하는데 아주 웃겨 죽겠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며칠전 세어봤더니, 지금 일본에서 방영하고 있는 한국드라마가 여덟개인가 그렇다. 배용준이 드라마에 그렇게 많이 출연했는지, 일본 와서 알았을 정도니깐. 후지TV 등등이 어제오늘 욘사마 열풍을 조금 '꼬아서' 보도한 것도, 내가 보기엔 그닥 마땅찮다. NHK에서 하도 겨울연가를 팔아먹으니깐 그거 꼴보기 싫어 저러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좀 든다. 자기들끼리도 경쟁을 하고 있으니깐.

한국에 있을 때 동남아 한류 어쩌구 하면 그냥 그저그런 정도인줄만 알았다. 아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욘사마 열풍, 한류 붐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을 못할 것이다--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 겨울연가 포스터는 일본 전역에 몇장이나 깔려있는 것이기에, 어딜 가든 욘사마 얼굴을 보게 되냐고 -_- 며칠전 큐슈에 갔다가, 오르골 가게에 들렀다. 역시나, 또 겨울연가 포스터. 그리고 "겨울연가 주제가 오르골 있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판.
이런 정도는 너무나너무나 당연한 거라서 이젠 신기하지도 않다. 늘 만나는 아줌마 친구들이 있는데, 배용준은 기본이고 원빈 권상우 이병헌 얘기 다 나온다. 서울에 있는 언니들하고 권상우가 좋네 원빈이 좋네 떠들다가 여기 아줌마들 만나면 대화가 그대로 이어진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국  얘기를 하다보니 탤런트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요사이 한국드라마 모르면 일본사람들하고 못 논다. 오죽하면 내 주변 일본아줌마들 사이에선 내가 기무라 타쿠야를 좋아한다는 것이 '뉴스' 취급을 받을까. 아줌마들끼리 욘사마 얘기 실컷 하다가, "이치고상(내 일본이름)은 기무라 타쿠야 드라마를 본대요, 글쎄!" 자기들끼리 이러면서 웃는다. 기무타쿠 예전 드라마들 너무 재미있는데, 솔직히 요샌 일본 드라마들 재미 없다. 현재 TV에서 방송해주는 드라마는 한개도 안 보고 있다. 일본어가 딸리기도 하지만 재미가 영 없거든. 그도 그럴 수밖에. 온통 한국드라마 수입해다 내보낼 뿐, 자기네들 드라마에는 신경 안 쓰고 있으니깐.

'겨울연가'. 서울에 있을 때 물론 나도 이 드라마를 열심히 봤었다. 좋아하냐고? 안 좋아한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저 드라마, "재밌었다" 혹은 "화면이 이뻤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언정 '좋은 드라마' '훌륭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가지도 얘기 안되는, 진정 말안되는 스토리. 사람의 기억이 무슨 포스트잍이냐, 떼었다 붙였다 하게.. 후까시도 한두번이지,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는 드라마에, 해도해도 너무하는 감독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어쩌랴. 저것이 '효자'인 것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발산한 효과 덕에 나의 일본생활이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단 주변 사람들이 우호적이고, 한국에 대해 관심들이 많고, 자기들 입으로도 '요즘 한국 붐이라서 관심이 많이 생겼다'고들 한다. 한국 얘기 해주면 재밌어하고, 특히나 한국 연예인들 얘기를 해주면 재밌어한다. 한국에서 온 내가 해주는 얘기가 아줌마들한테는 나름대로 '특종'인 셈이니깐.
그래서 나는 종종 아줌마들한테 한국 연예인들 얘기를 해주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얘기, 예를 들자면-- 이영애는 한국에서 톱스타다, 이영애 데뷔했을 때 진짜 이뻤다, 원빈은 꽃미남이다, 요새 권상우 잘나간다, 최지우는 발음이 안 좋다, 뭐 이런 거. (웃기게도 여기 사람들도 최지우 혀짧은 것을 안다. 혀짧은 발음은, 언어가 달라도 구별이 가는 모양).

이렇게 한류는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궁금한 것은, 한류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겠슴둥? 분명한 것은, '욘사마'로 시작된 한류가 일본에서 적어도 한국 꽃미남 탤런트/배우들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요리,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분명 높아지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 구구절절이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는 드라마 때문이다. 초난강(요샌 일본 사람들도 '쿠사나기 츠요시'가 아니라 '초난강'이라고 부른다)이 방금전 한국말로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늙은 엄마 품에 안기는 장면이 나왔다. 자이니치, 즉 '재일 조선인'을 주인공으로 한 단막극인데 초난강이 조선인 역할을 맡았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한류는 필히 '역사'에 닿을 수 밖에 없다. 몇달전 이곳 TV에선 재일조선인이 겪는 차별과 사랑을 다룬 연속극이 방송되기도 했는데, 꽤 유명한 여자탤런트가 주연을 맡았지만 드라마 자체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도(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자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겨울연가'는 확실히 말도 안되는 드라마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드라마를 통해 한류가 형성되고, 그 흐름이 결국 일본 내에서 '터부'를 건드리고 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역사문제가 터부였듯이, 일본인들에게도 자이니치 문제(총체적으로 역사문제)는 분명 터부였을 것이다. 그 금기가, 겨울연가 혹은 욘사마라는 희한한 계기를 통해 깨지고 있는 것이다.

철벽같던 모든 금기들은 아주 작은 균열로 인해 깨지기 마련이다. 일본에서 한류가 그런 균열을 확대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의 욘사마열풍을 아마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의 언론들도 양국에서 터부를 건드리는 작업을 좀 해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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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와 노동] 제 246호 2004년 11월 25일 목요일



동요함을 공격하고, 단호함을 조직하라!
- 현 시기 총파업 투쟁의 방향에 부쳐






'피할 수 없는 조직의 명운을 건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만이 비정규직 법안을 막을 수 있다'던 민주노총의 약속이 다시금 주저 않을 위기에 놓여있다. 어제, 11월 24일은 올해 총파업을 가늠하는 두개의 중요한 행동과 결정이 내려진 날이다. 하나는 비정규노동자 자신들이 그 동안의 단사 차원의 투쟁을 넘어 전국적인 투쟁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11월 26일 전면파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부파업을 결의하는 날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까지 전면적인 총파업을 호언하였던 민주노총 지도부가 제6차 총력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통해 '11월 26일은 비정규 개악안 철회 등 5대 요구안 쟁취를 위한 총파업에 돌입한다'와 '11월 29일 국회 환노위에서 법안강행 기도가 구체화될 시 투본대표자회의의 결정에 따라 12월 2일 총파업에 돌입한다'한다고 결정한 날이다. 무기한 총파업이 6시간 시한부 파업으로 바뀐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변화된 정세에 따라 총파업 전술이 바뀐 것이라 설명하지만, 법안 상정 유보가능성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총파업투쟁 일정을 조정한다는 것은 비정규 개악안이 철회될 때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던 애초의 취지를 찾아볼 수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번 투쟁방향에 대한 변화는 우리가 그토록 우려해왔던 대중투쟁에서의 후퇴이다. 우리는 지난 시기 민주노총의 총파업선언 철회와 유보, 그리고 4시간 내지 하루파업이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파업이 대중운동을 어떻게 피폐화 시켰는지 잘 보아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키고 노동자운동의 실리주의 강화하며 패배주의 확산을 가져온 과정을 잘 보아왔다. 그래서 이번 민주노총의 결정은 조합원 대중의 역동성과 잠재성을 신뢰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직접 이야기한 노동운동의 명운에 찬물을 끼 얻는 행위를 스스로 자임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공무원노조 구속법'이라고 불리는 공무원노조 특별법 법안 상정이 예정되어 있는 현실에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인 것이다.

올해 총파업투쟁의 동력은 자동차와 금속노조, 일부 화학과 현안투쟁이 걸려있는 사업장을 중심으로 17만명 정도의 규모로 진행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진행된 파업투쟁의 규모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규모이다. 하지만 단위 사업장 차원에서 전면파업에 돌입하지 못하고 부분파업이나 태업을 준비하고 있는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대중은 이번 민주노총 지도부의 역할을 더욱더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힘있게 총파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감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가고 패배주의는 확산될 것이다. 현 시기 민주노총 지도부는 현장에서 도도히 흐르는 노동자대중의 정서를 투쟁이라는 공간으로 끌어올리려는 의지와 계획을 보여주어야 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진행되어온 민주노총의 총파업처럼 현 시기 총파업이 무산된다면 이제 조합원과 민주노조를 포함한 지도부들간의 괴리는 더욱더 심화된 형태로 등장할 것이다. 노동자대중들이 단결과 투쟁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도 구조조정 당할지 알면서도 각자가 잔업과 특근, 자격증 획득 등을 통한 개별적인 경쟁의 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현 시기 절망을 부르는 동요는 노동자운동의 무기력에 숨은 비밀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스스로 공언해온 약속을 지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번 파업이 아니면 언제 반신자유주의 투쟁과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진행할 것인가? 이번에 주저앉게 된다면 노동자대중운동은 앞으로 몇 년간 총파업이란 단어를 꺼내기도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 시기 비정규 개악저지 투쟁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앞장서 지도부와 조합원과의 괴리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실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갈림길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의 칼날이 정규직 노동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은 김대중 정권에 이어 시종일관 추진되어온 노무현 정권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해서 충분히 알려져 왔다. 노무현 정권은 소위 참여민주주의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국정과제로 출범한 정권이다. 특히 현정권의 노사관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에게 규제가 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재편(완화)하여, 자본투자(투기)를 자유화하고 노동유연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이 그 목표이다. 그러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겠다고 나선 노무현 정권은 출범 첫 해, 노동자민중의 요구에 대하여 어김없이 구속과 손배가압류의 족쇄를 채웠으며, 많은 노동자대중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작년에는 정리해고 요건을 대폭 완화하여 모든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우고, 파업권을 무력화하여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노사관계로드맵(이정표)을 발표한 바 있었다. 따라서 현재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파견허용 업무의 확대와 파견기간 연장', '기간제 노동의 확대'는 일련의 노동유연화의 흐름을 가속화하고, 전면화 하기 위한 시도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투쟁은 직접적으로 정권의 비정규노동법 개악시도를 분쇄하고 수년간 거침없이 추진되어온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에 파열구를 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법안의 통과여부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중요하다. 그러나 또 한편 이 투쟁의 성패는 법안 개정의 '수위'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력적인 투쟁을 통해서 폭주하는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을 멈추고 수년간 개별사업장으로 분산되어 진행된 투쟁에서 계속 패퇴해왔던 노동자대중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 이를 통해 계급적 단결을 형성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이번 투쟁의 성패를 가늠하는 준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비정규개악저지 투쟁은 전국적인 규모에서 조직되고 진행하는 투쟁사안이다. 따라서 이번 투쟁의 특수한 성격에 비추어볼 때, 이번 투쟁을 법안 상정 일정을 고려한 투쟁으로 국한시켜 놓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이번 비정규노동법개악이 왜 추진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 투쟁의 요구가 어느 방향으로 확장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이번 투쟁은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에 대한 투쟁이면서 동시에 법안을 상정한 정권과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에 대한 반대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투쟁의 요구는 당면한 비정규노동법 개악저지와 신자유주의 반대, 노무현정권 반대로 확장되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계급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노동자 대중이 이 투쟁의 정치적 성격을 인식하고, 신자유주의 제반요소가 어떻게 작동하면서 노동의 불안정화를 강제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투쟁의 쟁점을 보다 확장시키고 정치적인 쟁점과 연동시키는 것은 단지 법안의 상정여부, 통과여부로 이번 투쟁을 좁히지 않고 계급투쟁의 한 계기로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번 투쟁과 같이 전계급적인 사안에 대해 전국적으로 조직되는 투쟁은 각 단위 사업장에서는 하나의 기회이다. 조합원 대중에게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교육하고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이를 통해서 대중과 조직 모두가 변화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올해 비정규노동법 개악안 저지투쟁 같은 전국적이고 전계급적인 쟁점이 위력적인 파고를 그려낸다면 그 성과는 계급 내적으로 분할을 막고 단결과 노동기본권쟁취에 충분한 기여를 할 것이다. 개별화된 사업장의 요구가 아니라 전계급적인 요구, 계급투쟁의 쟁점이 가장 첨예하게 격돌하는 지점에 대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계급적 단결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반기 투쟁은 전국적으로 단일한 쟁점으로 진행되는 연대투쟁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조직화'의 과정으로 확장될 경우 많은 성과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투쟁의 성과를 법안 내용의 일부 개정 등 실리적인 것으로 제한할 때 개별노조에서도 쟁점은 실리적인 것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투쟁의 전체 목표를 계급적 역관계의 변화,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비정규, 여성, 이주, 하청 등 모든 불안정 노동자의 조직화에 복무하는 것으로 배치해야 한다. 현 시기 확대되는 노동자계급의 균열을 막고 오히려 분할을 심화시킬 선택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상급단체와 단위노조, 현장활동가의 수준에서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올해 하반기 투쟁은 나날이 확대되어 가는 노동의 불안정화 공세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투쟁임과 동시에 노동자운동이 스스로의 체질을 개선해 갈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인 것이다. 노동자 운동은 이 투쟁을 통해서 정권과 자본의 비정규직노동법 개악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실리주의도 분쇄해야하는 당면 목표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만이 현시기 반신자유주의 전선은 올곧이 형성될 수 있다.

몰락해가는 세계자본주의의 마지막 발악이 신자유주의 공세이다. IMF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자본주의는 더욱더 깊이 세계자본주의에 흡수되어 가고 있다. 한국과 같은 신흥시장(EMERGING MARKET)에 투자되는 대부분의 자본이 경제발전과 하등 관계없이 오로지 금융적 축적을 위한 투기성 자본이라는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자본주의 자화상 속에서 충분히 발견된다. 주변부 국가에서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공격으로 인하여 대량 해고와 불안정 노동, 사회복지 축소 등이 진행되고, 외환/외채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권리는 부정되었다. 현재에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세계기구들, 특히 IMF(국제통화기금)는 한국의 노동시장경직성에 대해 지적하면서 '정규직노동자의 과보호를 줄이고, 비정규직 처우를 정규직 수준으로 올리는 것은 잘못'이라며 공격하고 있다.(2004년 IMF 연례협의단 정책권고) 따라서 현 시기 투쟁은 이러한 자본축적의 위기로부터 출발하여 노동자대중의 독자적인 전망을 열어가는 투쟁의 관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만이 힘찬 투쟁을 예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핵심은 노동에 대한 총체적인 공격이다. 구체적으로는 비정규직 확대와 정리해고 자유화 등 '노동의 유연화'에 있다. 그래서 정권과 자본은 이 문제만큼은 타협하지 않는다. 97년 정리해고 법제화, 98년 파견법 제정, 02년 경제자유구역법 제정, 03년 주5일제를 빌미로 한 근로기준법개악, 04년 비정규 노동법 개악을 출발로 하는 노동법 개악 공세 등 지난 수년간 어느 정권을 불문하고 한 치의 양보도, 후퇴도 없이 몰아쳤다. 따라서 이번 총파업은 작년 열사 투쟁처럼 일부만이 참여하는 총파업 투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6시간 부분파업과 어정쩡한 집회 몇 차례로 끝내는 형식적인 하루 총파업은 기만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정규직 노동자들의 결의가 필요하다. 우리의 파업대오가 빈틈을 보인다면 저들은 파죽지세로 깨고 들어올 것이다. 사업장으로부터 단호한 결의로 노동자대중을 조직하고, 위력적인 총파업과 집회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또한 사업장별 비정규 노동자와 공동투쟁, 공동파업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공동파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공동실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정규직-비정규직노조와 공동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이번 총파업이 형식적인 총파업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단결을 통한 실질적인 투쟁을 꾀해야 할 것이다.

현 시기 노동자운동의 전진의 관건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저임금·무노조·무권리 상태에서 정권과 자본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비정규, 여성, 이주, 저임금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해 내부의 분할을 극복하고 이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이런 투쟁에서 비껴선 노동자 운동과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서만 진행되면서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확대재생산하는 투쟁, 그리고 국회 안에서 청원운동의 대리인 역할에 그치는 지도자의 활동 역시 모두 사이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운동의 오래된 대의 중 하나인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통한 비정규직 철폐를 향해 총진군하자. 절망을 부르는 투항주의를 극복하고,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자운동의 정방향을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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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팽개친…문학은 끝장났다”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말’선언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오래 전에 확인된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의 의연한 생존을 확신하는 이들에게 그런 선언은 양치기 소년의 되풀이되는 거짓말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문학의 죽음에 관한 풍문이야말로 거꾸로 문학의 생존 근거이자 양식이라는 주장조차 나오는 판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살아 있는가. 여기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글이 있다. <문학동네> 겨울호에 실린 일본의 문학평론가 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3)의 <근대문학의 종말>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을 풀어 쓴 것이다.

가라타니의 논리는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하자면 정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혁명의 핵심을 문학이 담당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체적 비평과 포스트모던 문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근대문학’은 이런 혁명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은 일본의 경우에 ‘1980년대에 끝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미국은 더 일러서 1950년대로 시점이 올라간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2000년 서울에서 열린 한 문학행사에 참석해 ‘일본에서 문학은 죽었다’고 발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문학평론가인 자신이 평론을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인데, 그러면서도 한국에서만은 문학의 역할이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전망해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한국에서도, 미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끝장이 났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문학이 사소해졌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가라타니는 문학은 자신에게 부여되는 지적·도덕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문학으로서 존립할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면, 문학은 단지 오락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학’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나아가 일본 만화처럼 세계적인 상품으로 팔리는 문학을 권장하기조차 한다. 다만, 거기에다 본디 의미의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본디 의미의 문학에 충실한 사례로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문학을 그만둔’ 두 사람의 사례를 든다. 부커상 수상작인 <작은 것들의 신>의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리고 <녹색평론> 발행인인 ‘전직’ 평론가 김종철씨가 그들이다. “위기의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 따위를 쓸 수는 없다”는 로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문학이 지극히 협소한 것만 다루게 되었”기 때문에 문학을 그만두었다는 김종철씨야말로 “‘문학’을 정통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반대로, “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밖에는 읽히지 못할 통속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나 “그 존재가 문학의 죽음을 역력하게 증명할 뿐인 패거리”는 문학의 생존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그는 일갈한다.

그는 “역사적 이념도 지적·도덕적인 내용도 없이 공허한 형식적 게임에 목숨을 거는” ‘일본적 스노비즘’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고 결론 삼아 제안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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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04-11-27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고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고 그의 이름만 몇 번 들어보았을 뿐인데, 이 주장은 동의의 여부를 떠나서 매우 감동적이군요. 고작 신경숙 -- 내가 읽은 건 한권뿐이지만 그게 워낙 어이없어서.. -- 같은 작가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상황이라는 게 참.. 물론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웅변하는 게 아닌, 그저 사소함 속에서 안주하고 그것을 변명하는, 그런 태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윤리와 정치를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을지.. (문단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제가 알기로 신경숙 등을 띄워주는 데 앞장섰던 <문학동네>에 이 글이 실렸다는 게 재밌군요. 어떤 생각을 하고 실었을까..) 어쨌든 이것저것 고민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지금 컴퓨터 상태가 이상해서 제 블로그에 글이 씌어지질 않는데, 블로그가 정상화되는 대로 이 글을 퍼가겠습니다. 미리 양해 =)

balmas 2004-11-2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모모님이 딱 꼬집어서 말씀하시는군요. [문학동네]도 식성이 참 다양하죠. 그만큼 고진이 만만하다는 뜻인지도 ...
 


 


의료 붕괴로 가는 지름길













세계에서 의료 수준이 제일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언뜻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면 노벨의학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 1901년의 베링부터 올해의 액설과 버크까지 179명의 의학자가 노벨의학상을 차지하였는데 미국인이 91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의료비 역시 미국이 국내총생산(GDP)의 15% 가량을 지출하여 압도적인 1등이다. 프랑스, 영국, 일본 등과 우리나라는 대체로 6~7%를 의료비로 지출하여 미국의 절반 이하이다. 그렇다면 국민들의 건강 상태도 미국이 으뜸일까? 영아 사망률, 이환율, 평균수명 등 여러 건강지표를 살펴보면 미국은 1등은커녕 선진국들 가운데 뒤쪽에 처져 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는 1명도 없고, 의료비 지출액수가 미국의 1/30도 안 되는 쿠바 국민들의 건강 수준보다 별로 나을 바가 없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로 의료의 공공성이 확립된 나라일수록 국민들의 건강 수준이 높고, 반대로 의료를 시장에 의존하여 양극화가 뚜렷한 나라일수록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 역사와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45%에 머물고 있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0%까지 확대할 것과 8%에 지나지 않는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을 30%로(OECD 나라들은 평균 75%이다) 높일 것을 보건의료 분야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하였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출범 2년이 다 되도록 실현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방향키를 거꾸로 잡은 듯하다.

그러한 우려를 낳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 가지만 살펴보자.

지난 16일 국무회의는 〈경제자유구역법〉의 ‘외국인 전용의료기관’ 유치의 어려움을 핑계로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외국병원은 국내병원과 동일한 환자를 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병원보다 5~6배 비싼 진료비, 건강보험 제외, 영리법인 허용, 세제 및 자금지원 혜택, 환경 및 고용조건 규제완화 등 각종 특혜를 받게 된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의료시장이 개방되는 것인데, 정부의 왜곡과는 달리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의료의 공공재적 특성 때문에 의료시장 개방에 부정적이다.

이러한 외국병원이 누리게 될 특혜에 대해 국내병원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지금보다 획기적인 수준의 의료수가 인상과 규제완화를 요구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나아가 국내병원의 영리법인화와 건강보험 제외를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만족스럽지만 그나마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던 건강보험제도의 기반이 붕괴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민간의료보험의 등장이 필연적이다. 일각에서는 영리병원과 민간의료보험의 장점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의 선도국인 미국의 몇가지 실례를 보더라도 그것이 허구임은 명백하다. 영리병원의 진료비는 비영리병원보다 3~11% 비싸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보다 의료진에 대한 인건비 지출이 적은데, 그만큼 의료진의 노동조건이 더 열악하며 그 결과는 환자들에게 전가된다. 그에 따라 중증 환자의 영리병원 사망률은 비영리병원보다 7~25% 높다. 우리나라 어느 생명보험회사는 지난해 2조원의 수입을 올렸는데, 보험가입자에게 지출한 돈은 6천억원뿐이다. 나머지는 회사와 투자자의 몫으로 돌아간 것이다. 원리적으로나 실제로나 민간의료보험이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해외원정진료를 흡수하리라는 점도 원정진료의 70% 가까이가 외국(특히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한 원정출산인 현실에서 설득력이 없다.

외국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은 경제자유구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의료제도를 완전히 붕괴시켜 국민의 건강 수준을 더욱 악화시킬 최악의 조치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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