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에 출간될 [황해문화] 110호 권두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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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1: 불안전한 세계, 안전에 대한 욕망
황해문화 이번 호 특집은 “안전”을 주제로 하고 있다. 안전이라는 주제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의되어온 주제이며, 계간지에서 특집으로 다루기에는 이제 약간 식상해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황해문화에서 다시 안전을 주제로 한 특집을 기획한 것은, 다소 진부해 보이는 주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보기 위해서다.
우리는 안전이라는 주제를 21세기 인간의 조건이라는 좀 더 큰 화두 속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유행은 우리 시대가 거대한 이행의 시기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해방의 정치의 역사적 실험으로서 사회주의 체제의 종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 국민국가 체계의 쇠퇴와 난민의 일반화, 생태적 재앙의 예고와 탄소경제의 종말, 포스트 휴머니즘의 도래 등과 같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몇 가지 문구들을 열거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이행의 시대에 우리가 질문해봐야 할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주제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재로서의 인간은 불변적인 본질을 지닌 존재자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를 재규정해온 생성과 변화 속의 존재자라는 점을 전제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거대한 이행의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본질이 이전과 동일하게 남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안전의 문제를 비롯한 우리 시대의 다양한 쟁점들을 깊이 있게 재고찰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인간 조건의 근본적인 변화에 관해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황해문화는 거대한 이행의 시대로서 21세기에 인간이 처해 있는 조건은 어떤 것인지, 이러한 조건의 변화가 인간의 본질 규정에 대해 어떤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질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을 황해문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설 위에서 제기해보려고 한다.
첫째, 우리는 오늘날의 인간의 조건을 타율화의 조건 속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강제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한다. 여기서 ‘타율화의 조건’이라는 말은, 근대적인 인간을 근대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던 조건이 이제 쇠퇴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는 주체의 시대이고, 주체는 자율성을 근본적인 특성으로 한다. 신분적 예속, 정치적 예속, 인간학적 예속(인종적ㆍ성적ㆍ지적 예속)에서 벗어나 각각의 개인, 민족, 인종, 젠더가 자율성의 이념에 입각하여 평등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고 천명한 것이 근대성의 정치적ㆍ이념적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 위에서 수립된 것이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근대의 사회ㆍ정치적 질서였으며, 그것의 가장 진보적인 표현이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 체제였다. 복지국가 체제는 근대적 인간이 그 정치적ㆍ이념적 약속에 걸맞은 인간적 자율성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ㆍ제도적 조건을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체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는 모순적인 이중의 효과를 산출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적 자율성의 물질적ㆍ제도적 조건으로서 복지국가의 기본 구조를 와해시키면서 사람들, 특히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소수자들이자 약소자들이라는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을’)로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더 이상 국가도, 노동조합도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지 않으며,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추구하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또한 사람들이 고도의 자율적 주체로서 행위하도록 강제한다. 급변하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모든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기업가 주체(미셸 푸코)로서 모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학업과 취업, 연애, 결혼, 이주는 물론이고 취미생활, 건강관리 같은 일상적인 생활도 모두 투자의 관점에서 이해되며, 그 성패 여부는 기업가로서 각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된다. 아울러 부동산투자, 금융투자는 신자유주의적 기업가 주체로서 각 개인의 필수적인 투자 활동이자 덕목이 된다. 고도로 자율적인 주체들만이 기업가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바, 오늘날의 인간들은 타율성의 조건 속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강제 받고 있다는 가설의 의미다.
둘째, 우리는 탈인간주의의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ㆍ윤리적 규범을 발명해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는 것을 두 번째 가설로 제시하고 싶다. 근대성의 시대는, 하이데거와 알튀세르가 각자 개념화한 바와 같이 인간주의(humanism)의 시대였다. 즉 근대성은 단지 인간은 신분적ㆍ종교적ㆍ젠더적ㆍ인종적ㆍ민족적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자들이라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던 것을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라는 말로 새롭게 변형했고, 그것은 다시 헤겔 또는 루카치에 이르러 인간은 역사의 주체라는 테제로 지양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율적 주체이며 각자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이라는 테제의 이면에는 인간은 우주와 자연, 역사의 주인이라는 또 다른 테제가 놓여 있다. 인간주의는 바로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했던 근대성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가 거대한 이행의 시기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주의가 더 이상 자명한 해방의 이념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퇴행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뜻을 함축한다. “인간이 먼저다”는 말은 사회ㆍ경제적 영역에서조차 진부하고 쓸모없는 문구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국가 경제의 발전’, ‘국제적 경쟁력 강화’, ‘성장 동력의 발견’, ‘디지털ㆍ그린 뉴딜’ 같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표어를 얼마간 완화하거나 감춰보려는 자위적인 소심한 수사법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먼저다”라는 말은 갑질에 대해서도, 여성이나 성 소수자, 장애인 또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효과를 산출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말은 생태학적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퇴행적인 측면을 지닌다. 자연 환경의 파괴나 동물에 대한 과도한 착취의 기저에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주인이라는 인간주의 이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들의 양가적 반응, 즉 과도한 두려움과 전능함에 대한 환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 역시 인간주의의 이념이다.
따라서 근대성을 지배해왔던 인간주의의 이념에서 벗어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의 을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발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주권적이지만 배타적인 주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어떻게 타자들과의 공존 및 공생의 규범을 창안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21세기 인간의 조건이라는 황해문화의 화두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황해문화 특집인 “안전”이라는 주제 역시 이러한 화두에 입각하여 마련되었다. 안전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 모순적인 측면이다. 한편으로 안전은 프랑스혁명 이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선언」 2조에 나오듯이 자유, 소유권, 압제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안전에 대한 요구는 민주주의적 자율성에 대한 권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전은 치안의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안전에 대한 요구는 많은 경우 사회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는 모종의 세력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요구로 표현된다. 이에 따라 안전에 대한 요구는 가령 쾌적한 환경, 편안한 주거, 안심 귀갓길, 이동의 권리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혐오시설 철거, 불법이주자 추방, 여성, 성적 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요구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안전에 대한 요구를 특징짓는 이러한 모순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래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난다. 안전에 대한 권리는 일차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성적ㆍ경제적ㆍ사회적 약소자들의 절박한 생존에 대한 요구를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정체성의 인정에 대한 요구이자 정상성에 대한 욕망으로, 차별과 배제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적인 각자도생의 논리가 삶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만큼 안전에 대한 권리는 더욱 더 배타성과 차별화의 권리라는 모습을 띠게 된다. 국민이자 정규직 남성 이성애자이고 비장애인이자 수도권에 거주하는 시민들이기도 한 이들의 안전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체성의 배타적 권리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번 호 특집에는 모두 5편의 글을 수록했다. 먼저 정정훈 선생은 안전의 변증법이라는 주제로 안전이라는 권리에 내재한 모순을 해명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홉스와 로크를 거쳐 프랑스혁명 인권선언과 미국 독립선언에 이르는 서양 정치철학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바탕으로 선생은 안전의 권리가 근대 시민혁명의 핵심적인 성취 중 하나로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선생은 푸코와 아감벤에 대한 독해를 통해 안전에 대한 권리는 사실 신체에 대한 권력의 통제와 조절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안전에 대한 권리는 생명에 대한 권력의 장악 위에서 비로소 성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안전은 치안에 속하는 개념인가? 선생은 발리바르의 논의를 참조하면서 치안적인 안전과 구별되는 시민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인권의 정치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다음 오랫동안 환경운동에 헌신해온 김현우 선생은 코로나 팬데믹, 기후 위기, 핵에너지 위기라는 3중의 위기를 ‘위험사회’라는 개념에 기반하여 분석하고 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제안한 위험사회 개념은 근대성의 실패가 아니라 그 발전 자체로 인해 위험이 중심을 이루게 된 사회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선생은 코로나19와 기후변화, 핵폐기물은 위험사회가 인류의 삶의 기본 조건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위험사회라는 시각에서 보면, 코로나19 위기는 인류가 직면한 좀 더 근원적이고 다중적인 위기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되고 있는 그린 뉴딜이라는 해법은 과연 적절하고 충분한 것일까? 선생은 좀 더 근본적인 ‘정의로운 그린뉴딜’이라는 해법을 제안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위험사회들에 직면하여 우리의 삶의 조건과 근거에 관한 실존적인 토론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승윤 선생은 ‘안전의 상품화와 위험불평등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불안정노동과 안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글의 제목에 나오는 ‘안전의 상품화’와 ‘위험불평등 사회’라는 두 개념이 선생의 논지를 근사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안전에 대한 욕구는 본질적인 특성이지만, 선생은 이는 늘 사회적ㆍ계급적 조건에 따라 변이하고 굴절되기 마련이며, 안전이 상품화되고, 사회 성원들이 위험에 대하여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 있는 현실이 이를 집약해서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선생은 다양한 통계 자료를 통해 위험의 불평등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다중적으로 구조화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선진국과 원청기업은 안전에 대한 내적 투자보다 위험의 외주화를 통해 저렴한 값의 안전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고 있으며, 결국 이렇게 외주화된 위험을 감당하는 것은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적 욕구이자 기본적 권리로서의 안전은 가격에 따라 판매되고 구매되는 허구적 상품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위험이 사회의 특정한 집단 및 개인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안전에 대한 권리는 이러한 구조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전제하고 요청한다는 것이 선생의 진단이다.
한국 장애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김도현 선생은 안전의 문제는 사회 성원 전체에게 결코 균등하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장애인들이 직면한 현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장애인을 우리 사회의 을 중의 을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장애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적인 행위인 것들이 장애인들에게는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장애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려다 목숨을 잃거나 수도관 동파로 인해 얼어죽는 또는 스스로 체위를 바꿀 수 없어서 욕창으로 숨지는 이들에게는 일상이 바로 재난이고 참사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 장애인들을 범죄화하는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장애인들은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따라서 안전에 대한 욕구가 우리 사회를 ‘시설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게 된다. 선생은 문제는 위험이 아니라 위험에 대처할 수 없는 무능력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일상의 수많은 위험과 재난에 직면해 있는 장애인들의 무능력은 사실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을들이 경험하는 무능력을 범례적으로 대표/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말하듯 장애운동은 어떤 존재가 ‘장애화/무력화’(disablement)되는 관계를 문제 삼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정치성을 지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종주의에 관한 면밀한 연구자로 잘 알려진 염운옥 선생은 안전의 문제는 배제의 정치학과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이주민들이 이른바 ‘K 방역’에서 철저하게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예외적인 사실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저에 존재하는 배제의 정치학을 단적으로 드러낸 증상이었다. 미등록 체류자들이 마스크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 중국동포들이 코로나19의 근원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과 2020년 홍수 당시에 이재민의 80%가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던 이주노동자였다는 사실,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망률이 정주 노동자의 4배에 이른다는 사실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 우리 사회의 이주민들은 위험의 외주화에 더하여 ‘위험의 이주화’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결국 선생이 강조하듯 ‘친밀한 이웃’의 안전에 대한 염려는 왜 ‘낯선 이웃’의 안전에 대한 염려로 확장되지 못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낳는다. 안전에 관한 성찰, 안전을 위한 연대의 실천은 결국 이 문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평에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오랫동안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해 헌신해온 김혜진 선생은 지난 1월 8일 국회에서 통과된 중대재해처벌법의 의미와 한계를 짚고 있다. 우리 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겪었고 또한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며, 산업 현장에서 중대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산재사망률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라의 경제 규모나 경제적ㆍ사회적 발전의 정도에 비춰볼 때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사실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구조적인 요인이 우리 경제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늦게라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선생은 이 법 자체에는 여전히 많은 한계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가 소규모 사업장에서 집중 발생하고 있음에도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3년간 적용이 유예되고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공무원의 관리감독 책임 조항이 삭제되고 기업에 대하여 입증 책임을 지우는 조항도 삭제되었다는 점,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는 점 역시 이 법의 제정 의의를 삭감하는 대목들이다. 선생이 말하듯,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의미는 무엇보다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 중대재해의 발생 원인이 구조적인 것이며, 이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법의 개선과 연대의 실천을 통해 산업재해 및 위험의 외주화가 사라질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해본다.
정신건강의학 전문가인 박한선 선생은 ‘코로나 블루’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코로나19가 산출한 우울증의 문제를 유려하게 살피고 있다. 선생은 우울증을 뜻하는 ‘블루’라는 단어가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원격근로에 종사하면서 어떤 점에서는 이전보다 더 나은 여건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밝은 블루라면, 의사, 간호사, 경찰, 소방관, 농민, 운전기사 등과 같이 이른바 필수근로자들은 조금 어두운 블루일 수 있다. 반면 실직자나 자영업자 등은 짙고 칙칙한 블루일 것이고, 수용 시설에 있는 이들이나 장애인들, 노숙자들과 같이 잊히고 배제된 이들은 보이지 않는 블루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코로나19로 인해 사망한 이들 역시 잿빛의 ‘보이지 않는 블루’라고 지칭할 수 있다. 명쾌한 색채의 현상학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글에서 특히 기억할 만한 부분은 코로나 블루에 대하여 일괄적이고 확실한 처방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부분이다. 아마도 선생은 정신건강 전문의로서 무언가 뚜렷한 처방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당위적 강박에 시달렸을 터인데, 뜻밖에도 결론은 그런 처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 코로나19가 드러내는 패러독스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질병, 정의로운 사람과 악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질병, 누구는 끝없는 고통에 빠뜨리고 누구는 대박의 수익을 거두게 하는 질병, 선생이 말하듯 코로나19는 우리 인간 실존의 패러독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번 호 미디어비평 특집에서는 방송 비정규노동의 실태를 다루는 두 편의 글이 실렸다. 화려한 방송가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고투는 갑과 을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특정한 분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을의 민주주의가 우리 시대의 화두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 밖에 새로운 시와 소설, 남재희 선생의 기고, 문화비평 코너의 글들은 황해문화가 자랑하는 유익하고 다채로운 읽을거리들이다. 이번 호에는 특히 평소보다 많은 다섯 편의 서평이 실렸다. 우리들 각자를 서로 고립되게 만들고 사회의 여러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코로나19의 와중에서도 많은 연구자와 필자들이 사유와 성찰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 할 만하다. 인문사회과학은 위기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위기가 엄중할수록 연구자들의 성찰과 사유는 문명과 사회의 깊은 뿌리까지 내려가기 마련이며, 또한 그러한 작업만이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게 해주고 새로운 전망을 가능하게 해준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