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20세기, 야만의 얼굴을 한 평화 - 국지전

20세기 세계의 국지전 그 뿌리와 결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중심으로
 
글쓴이 :  바람구두

*이 글은 제가 지난 2002년 계간 황해문화 봄호(통권34호) 특집 "전쟁없는 21세기를 위하여"에 총론 성격의 글로 쓴 글입니다. 책을 보시면 실명을 확인하실 수 있겠지만... 구태여 이곳에 실명으로 올릴 필요는 없을 듯 해서요. 6-7회 정도로 나눠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세기, 야만의 얼굴을 한 평화 - 국지전
 
  전쟁을 기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정된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사전적 정의에 맞게 지역별로 대표적인 국지전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아시아에서의 국지전 -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베트남전

  추축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패망으로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을 지원함으로써 공산당의 정권 장악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물량 지원에도 불구하고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1949년 중국 본토를 장악하자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고 패전국 일본을 재건해 아시아의 군사·경제적 거점으로 삼고자 한다. 미국은 한국전쟁(1950-1953)이 발발하자 1951년 서둘러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고 승전국으로서의 배상 취득을 포기하고, 일본의 반성 없는 주권 회복을 인정한다.

  이후 미국의 일본을 이용한 중국 봉쇄 정책은 현재 일본의 재무장화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의 전략적 패배와 1949년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은 미국의 냉전적 사고에 더욱 불을 당겨 50년대 초에는 미국 전역을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에 휩싸이게 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을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통치하고자 한다. 앞서 베트남 민족지도자 호치민의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베트남의 민족지도세력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 그들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기대를 품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반제민족해방 세력은 프랑스 식민정부와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은 베트남에서 불편한 공존관계를 지속하던 프랑스 식민정부와의 관계를 끊고 무력으로 이들을 굴복시켰다. 80년간 계속되던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잠시나마 종결되었으나 일본은 베트남에서 자신들을 대리할 세력으로 이미 오래 전에 무력화된 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를 즉위시킨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일본의 베트남 왕정 복원이 결코 베트남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간파하고, 연합군과 협력하여 베트남에서 일본군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한다. 8월 6일 일본에 핵공격이 가해지자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깨달은 베트남독립동맹(Viet Nam Doc Lap Dong Minh, 越盟)은 즉각적인 총궐기를 선언하고, 8월 19일에는 하노이, 같은 달 25일엔 사이공을 장악하고,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후 연합군은 베트남의 독립 열망을 저버린 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북위16도선을 경계로 영국과 중국의 군대를 진주시키고, 뒤이어 프랑스가 식민정부를 복원시키면서 독립은 깨졌다.
 
  베트남 전쟁은 크게 3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45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와의 전쟁, 제2기는 1954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제3기는 미군 철수 후인 1973년부터 1975년 남베트남의 패망기이다. 미국이 완전한 자주 독립을 원한 베트남보다 프랑스를 지원한 까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불확실한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유럽에서 점증되는 냉전 체제의 확고한 우방인 프랑스를 지지하고, 이들에게 전비를 지원8)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이 확실해질 때까지 그들로 하여금 대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대만, 필리핀, 일본, 남한을 연결하는 태평양 연안의 군사적 요충지를 차지하고, 인도차이나의 풍부한 자원을 지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의 패권 장악을 노렸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민족해방 세력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의 패전으로 독립을 쟁취할 듯이 보였던 베트남은 1954년 프랑스와 제네바 협정을 맺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임시 분할되고 협정에 의거하여 남북베트남간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예상되는 선거 결과는 호치민 정부의 승리9)였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이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CIA를 통해 베트남에서 여러 비밀 공작들을 수행하여 조약을 파기하고, 고딘 디엠 정권이 수립되도록 했다. 고딘 디엠 정권은 태생적 한계와 실정, 부패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1963년 CIA의 공작에 의한 쿠데타로 제거된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일련의 정책들은 미국이 다른 제3세계 국가에서 수행한 일련의 정책들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 댐과 병원, 학교를 건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전역에서 소모한 폭탄의 2배 이상을 남·북베트남 구분없이 골고루 투하했다.(참고로 남베트남은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가 통치했고, 북베트남은 국제법상 독립국가였다.) 이 시기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다이옥신 등 각종 화학무기를 실험한 것은 물론 CIA의 피닉스 공작을 통해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닉슨 대통령 시절에는 북베트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와 시간을 벌기 위해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공급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미국이 대외에 선전한 것은 낙후되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제3세계의 빈민국가에 문명의 혜택(?)을 전하는 전도사였다. 이런 미국의 교만한 정책은 결국 밀라이(My Lai)10)에서 347명의 민간인을 학살한다. 이런 미국의 군사전략은  피해당사자였던 제3세계 민중은 전세계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67년 버트란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아이작 도이처 등과 같은 세계의 지식인들이  '베트남전쟁범죄에 관한 국제재판소'를 조직해 베트남에서 미국의 행위가 민간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무차별 대량 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side)라는 전쟁범죄를 포함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이 재판소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증언을 청취했고, 베트남 민간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최종적인 평결문에서 당시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가 "(베트남에서)우리는 우리를 방위하고 있다"고 한 말에 주목하며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 목적이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런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허명을 내세워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제노사이드라는 의도적인 무차별 살상 즉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만장일치로 결론지었다.11)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전쟁은 미군 58,000명의 전사자, 153,000명의 부상자를 내며 끝났지만 베트남 민중의 인적·물적 손실은 계량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이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의 교사'를 자청하며 일으킨 결과였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게 된 원류는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발견한 원주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했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디언들이 가꾸고 생육하지 못한 땅을 자신들이 문명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그와 똑같은 논리로 1848년엔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텍사스, 유타 등 서부 지역을 빼앗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미국은 세계를 미국식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계속 팽창해야 하고, 그것은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12)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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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50년까지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체의 프랑스군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한 분량인 약 30만 정의 소형무기와 기관총, 10억 달러의 군사비를 프랑스에 지원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비용 중 약 80%를 부담했다.

하워드 진, 조선혜 옮김, 「베트남전쟁」, 『미국민중저항사2』, 일월서각, 1986, 220쪽

9) CIA의 전신인 OSS의 윌리엄 도노반 국장은 소련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는 유럽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철학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은 소련만큼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정치적, 사회적 철학이 없다." 10여 년 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도 이와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았으며, 인도차이나 사태가 악화됐을 당시에도 미 정부 당국자들은 같은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노암 촘스키, 오애리, 「남-북, 그리고 동-서」,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0, 이후, 121쪽에서 재인용. 그리고 이런 불안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의 토지개혁 과정과 쿠바 혁명의 성공이 제3세계 민중들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성있는 시도로 보이는 것 자체를 불안 요소로 여기고 미리 차단하려는 반혁명, 예방혁명 시도로 이어진다.

10)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내 TV뉴스에서는 영국 BBC방송의 한 프로듀서가 미 국방부 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노근리를 포함한 전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조직적 민간인 살상에 대한 명령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이 소개되고 있었다.

11) 이삼성, 「미국의 세기와 베트남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한길사, 1998, 211~212쪽에서 발췌 인용

12)) 이 말은 1837년 멕시코와의 전쟁에 즈음해서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존 어 설리반(John L. O'Sullivan)이 쓴 신문 사설에서 멕시코는 "앵글로 색슨족의 월등한 기력에 융합되거나 굴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패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긴 말이다.  최웅, 김봉중, 「해외팽창」, 『미국의 역사』, 1997, 조합공동체 소나무,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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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5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직 [법의 힘]을 안 사셨단 말씀입니까? 이런, 섭섭해라 ... ^^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당연히 독어본을 번역했지요. 물론 불역본에서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영역본은 오역이 더러 있는데,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준거로 삼고 있는 불역본은 아주 번역이 정확하더군요)^^.
그런데 수업에서 좋은 글들을 많이 다루네요. 좀 너무 많은 걸 다룬다 싶기도 하지만 ...
인세에 보탬을 주신다면, 언제든 환영이죠. ㅋㅋ
 
 전출처 : 노부후사 > <퍼온글> [인터뷰] 유인종 전 서울시 교육감

▲ 유인종 전 서울시 교육감.
ⓒ2004 권우성

"서울 강남의 경우 엄마, 아빠가 세니까 애를 꽉 채워서 대학에 보낸다. 더 들어갈 여지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풍선에 바람이 덜 차 쭈굴쭈굴한 학생이 온다. 어느 쪽이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당연히 후자다."

서울시 교육감을 지낸 유인종 건국대 석좌교수(72)는 20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와 만나 '풍선론'이라는 재미있는 논리를 펼치며 고교등급제를 적용한 대학들을 비판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풍선에 바람이 꽉 차 더 이상 들어갈 여지가 없는 강남학생보다 바람이 덜 찬 강북이나 지방학생이 더 발전가능성이 많다.

유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학력은 국·영·수 성적으로 줄세우는 학력이자 입시준비를 위한 테크닉에 다름 아니다"라며 "대학은 자꾸 수능점수가 높은 학생만 뽑으려고 하지 말고 보통사람을 선발하더라도 잘 가르쳐 내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학생선발 패러다임의 변화'를 대학쪽에 요구했다.

유 교수는 '강남의 H고 1등과 전남 H고 1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미국에서는 시골이든 도시든 내신 1등 학생은 무조건 받아주는 사립대가 많다"며 "사회정의 차원에서 전남 H고 1등 학생을 우대해줘야 옳다"고 답했다.

유 교수는 일선 고교의 내신부풀리기에 대해 "소문처럼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라며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면 상대평가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3불정책의 법제화' 주장에 대해선 "법제화를 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일관성있게 정책을 수행하면 해결될 것"이라며 정부의 의지를 강조했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는 엘리트단계와 대중화단계를 거쳐 보편화단계에 와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성향 언론과 인사들이 엘리트단계나 대중화단계에서 교육문제를 논하고 있어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4년제 대학이 160여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고교서열화에 찬성하는 곳은 10개대 이내일 것"이라면서 "이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며 사회를 지배하는 게 문제다, 정부가 흔들리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대학선발권 논쟁과 관련해 "지금도 대학에 학생선발권을 다 주고 있다"며 "그럼에도 그걸 이용하지 않고 자꾸 다른 기준으로 학생을 뽑으려고 하는 게 문제"라고 반박했다. 수능폐지론에 대해서는 "수능은 실시하되 그 반영비율은 대학자율에 맡기면 된다"며 "경우에 따라선 수능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내신만 가지고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특히 "현재 사립대가 90% 이상인 상태에서 대학평준화를 당장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도 "대학에 대한 지원을 늘리면서 적절하게 통제하는 '컨트롤 위드 서포트' 방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학평준화로 넘어가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 교수는 지난 8월 퇴임한 이후 건국대와 서울교육대 대학원에서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을 강의하고 있다.

다음은 유인종 석좌교수와의 인터뷰 전문.

"매스컴이 교육언어를 함부로 써... '평준화'가 아니라 '보편화'

ⓒ2004 권우성
- 일부 대학들의 고교등급제 적용 논란을 어떻게 보나.
"저는 평준화라는 말을 안쓴다. 보편화(universalization)라고 말한다. 매스컴이 교육언어를 함부로 쓴다. 매스컴이 평준화란 말을 썼는데 정부가 따라 썼다. 그러니 하향평준화니 상향평준화니 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수쪽은 하향평준화라고 얘기한다.

고교등급제는 세계적 추세와 동떨어진 것이다. 등급제를 할 수 없는데도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고교등급제는 두가지 면에서 불가능하다. 하나는 고교를 자유롭게 선택한 게 아니라 배정돼 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걸 차별하면 어떡하나. 모순이다. 또 우리나라는 법규에 따라 일정기준을 충족할 때 고교를 인가해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안전문제만 해결하면 정부에서 강제하는 항목은 몇개 안된다.

서울의 경우 질적인 면에서 거의 균형이 잡혔다. 강북은 학교규모가 작고 강남은 크다. 세칭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수는 강남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학교규모를 고려한 명문대 진학) 비율은 강북도 적지 않다. 그리고 대학이 자꾸 수능점수가 높은 학생만 받아서 자랑하는 경향은 없어져야 한다. 대학은 수능점수가 좋은 사람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보통사람을 받아 잘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시골학생들 턱걸이해서 들어와도 잘한다. 서울학생들은 풍선이 꽉 차서 발전성이 없다. 국·영·수 성적으로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다. 팀웍과 창의력, 학습의 자기주도성이 진정한 경쟁의 요소다. OECD에서 발표하는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가 과학에서 1·2등 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꼴찌 하는 부분은 팀웍과 창의력, 학습의 자기주도성이다. 언론에서 이런 걸 보도한 적이 없다.

세칭 일류대의 경우 자기대학 출신비율이 90%가 넘는다. 미국의 대학은 14~15%밖에 안된다. 학사는 자기대학에서 하고 석박사는 다른 대학에서 한다. 오늘날의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와서 대학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동종번식을 하는 경우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좋은 학생 받는다는 S대학도 세계 몇백등 아니냐."

- 대학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고교간 학력차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빌리티(ability: 능력)보다 퍼텐셜리티(potentiality: 잠재능력)가 중요하다. 서울 강남의 엄마, 아빠는 세니까 애들을 꽉 채워서 보낸다. 바람이 더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바람이 덜 차) 쭈굴쭈굴한 놈이 온다. 어느 쪽이 더 발전가능성이 있겠는가. 후자가 더 발전가능성이 있는 것 아닌가. 어느 나라든 국가시험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최대화해서 평가하는 나라는 없다. 즉 수능점수 같은 것은 최소화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드대에는 5가지 선발기준이 있다. SAT와 리더십, 스포츠, 사회봉사, 그리고 지역안배다. 수능으로 변별력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나올 수 없다. SAT 점수를 받은 한국학생이 하버드 의대를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항의하니까 교수들이 '당신은 기본적으로 의대에 지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며 '의사는 봉사하는 직업인데 고교와 대학의 사회봉사란이 공란'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이게 진짜 변별력 아닌가.

신학대 학생은 지식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등을 가지고 뽑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나라는 신문에서 크게 떠들면 수능을 어렵게 내거나 쉽게 내거나 해마다 왔다갔다 한다. 수능은 무조건 쉽게 내고 만점이 많이 나와도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

"사회정의 차원에서 전남 해남고 1등을 우대해주는 게 옳다"

ⓒ2004 권우성
- 한국사회에서 '학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국·영·수 성적으로 줄세우는 걸 학력이라고 한다. 입시준비를 위한 테크닉이라고 할까. 나이가 든 분들은 지금 학생들을 보고 한문도 제대로 못하는 게 대학생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분들한테 컴퓨터 줘봐라. 이미 교육의 내용과 정도가 달라졌다. 지식반감기가 지금은 3년으로 단축됐다. 그렇게 변하는 지식을 아이들은 배우고 있다. 전통적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 예를 들어 강남의 현대고 1등과 전남 해남고 1등이 똑같은 대학의 수시모집에 응시했다고 한다면 두 학생을 어떻게 대접(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미국은 도시든 시골이든 내신 1등은 무조건 선발하는 대학이 많다. 수능점수와 상관없이 내신으로만 선발하는 것이다. 포항공대를 한번 취재해 봐라. 내신 좋은 사람이 압도적이다. 왜 포항공대가 한국의 넘버원 대학이 됐는지 생각해보라. 서울대처럼 했다면 결코 넘버원 대학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지능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창의력과 문제해결능력이 있어야 영재다.

하버드대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와 공부를 잘하는 학생 두명이 지원했다고 했을 때 학교는 어느 학생을 뽑을까. 하버드대는 정치적 리더십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왕자를 선발할 것이다. 수시모집의 취지는 잠재력을 발굴하자는 것 아닌가. 사회정의 차원에서 전남에서 올라온 학생을 우대해줘야 옳다.

일본의 한 유치원에서 원생을 뽑는데 낮은 시렁과 높은 시렁에 있는 물건을 빨리 집도록 했다. 빨리 하는 아이도 있고 늦게 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과연 누구를 뽑았을까. 늦게 하는 아이를 뽑았다. 빨리 하는 아이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게 교육철학이다."

- 그럼에도 대학측은 고교간 학력차가 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대학의 임무는 잘 가르쳐 내보내는 것이다. 그런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 고교등급제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거세지자 대학들은 일선 고교들이 내신을 부풀리고 있다며 관련자료를 일부 언론에 흘리며 맞서고 있는데, 실제 일선 고교들의 내신부풀리기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나.
"소문처럼 심하지는 않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면 상대평가를 통해 보완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 사회가 신의사회라면 절대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아직은 불신의 사회이기 때문에 상대평가를 가미할 수밖에 없다."

- 대학들은 일선 고교에서 내신부풀리기를 하기 때문에 고교등급제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데.
"과거에는 수능성적으로 변별력을 판단했다. 그런 시대는 갔다. 총점주의는 사라져야 한다. 총점으로는 변별력이 안나온다. 미국의 한 배우 아들이 하버드대 수석을 했다고 해서 학교에서 사과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는 수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영역이 수천개인데 어떻게 수석이 나올 수 있나. 특정분야가 특출하다는 평가만 있을 뿐이다."

ⓒ2004 권우성

"비평준화지역이 평준화지역보다 학력이 높다는 근거는 전혀 없어"

- '3불정책'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법제화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일관성있게 정책을 집행하면 해결될 수 있다. 기여입학제의 경우 미국에서도 일부 사립대에서만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전체인양 얘기하면 안된다. 한국은 돈으로 바꿔치기하니까 사회에서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학의 수업료가 한계에 도달했다. 한 학기 등록금이 4백~5백만원이다. 언제까지 올릴 것인가. 여기서 국가가 개입해줘야 한다.

일본도 사학재정의 50%를 국가에서 지원해준다. 국가가 개입하면 기여입학제는 실시할 필요가 없어진다. 현재 우리나라는 사립이라도 중학교까지 100% 국가에서 지원받는다. 고등학교도 70~80%로 지원받는다. 이것이 대학으로까지 올라갈 차례다."

-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3불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하며 학생선발권을 완전히 대학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지금도 대학에 학생선발권 다 주고 있다. 대학에 자유가 다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고 자꾸 다른 기준으로 학생을 뽑으려고 하는 게 문제다."

- 대학의 자율권을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하나.
"현재 절충형으로서 거의 인정되고 있다. 입학문제는 사회정의와 연관돼 있기 때문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커리큘럼 운영이 중요하다. 그것은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나. 교육방법 개선 등 잘 가르치라는 자율권은 100% 인정하고 있다. 정부가 본고사를 없앤 이유는 일선학교에 서울대반, 연세대반, 고려대반, 이화여대반 등이 생기면 초중고의 교육과정이 비정상화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초중교까지 특목고반이 있다고 하더라."

- 정 총장은 평준화가 계층간 이동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준화기 때문에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오는 게 자유롭다. 평준화 전에는 몇백만원 줘야 전학갈 수 있다. 또 평가를 해보면 평준화지역이 비평준화지역보다 학력이 높다.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평준화지역의 학력이 평준화지역보다 높다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평준화지역 전체와 비평준화지역 일부 학교만 비교해서는 안된다. 전체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 30년 동안 평준화를 실시하는 동안 사회가 많이 변한 만큼 재검토해야 하다는 의견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취학율과 관련 엘리트단계(elite stage: 0∼15%)→대중화단계(mass stage: 15∼50%)→보편화단계(universal stage: 50∼100%)를 거친다. 엘리트단계는 귀족주의, 대중화단계는 능력주의, 보편화단계는 평등주의다. 우리는 엘리트단계와 대중화단계를 벗어난 보편화단계다.

서울의 경우 취학율이 104%다. 대학진학율은 72%로 세계 최고다. 문제가 있다면 보편화단계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 일부 보수성향 언론이나 인사들은 우리가 보편화단계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단계나 대중화단계에서 교육문제를 논하고 있다. 논설을 쓰는 분들이 이런 틀에서 교육문제를 논하니까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보편화단계에서 모든 헌법은 기회균등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학도 모두 평등주의다. 여기에서 고교를 분리하느냐 통합하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있는데 통합하는 게 세계적 추세다. 고교에 계층이 형성되기 때문에 고교를 제도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영국도 64년 의회의 명령으로 통합했다. 대신 통합한 다음 커리큘럼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통합되면 이동의 자유가 생긴다. 문제는 학교을 선택할 것이냐 커리큘럼을 선택할 것이냐다. 커리큘럼을 선택하면 기회가 많다. 예를 들어 수학을 더 많이 교육하는 학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커리큘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교장과 교사를 리모델링해야 한다. 그래야 변별력문제도 해결된다."

"수능은 실시하되 그 반영비율은 대학에 맡기자"

ⓒ2004 권우성
- 지난 2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학벌타파를 위해선 대학평준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는데.
"15년 정도 후에 국가가 자신 있을 때 할 수 있다. 현재 사립대가 90% 이상인 상태에선 불가능하다. '컨트롤 위드 서포트'(control with support), 즉 돈을 주면서 통제하는 방법이 있고, '서포트 위드아웃 컨트롤'(support without control), 즉 돈은 주되 통제하지 않은 방법이 있다. 후자는 미국식인데 우리는 전자로 해결해야 한다. 지원을 늘리면서 적절히 통제도 해야 한다. 대학의 평준화가 지금은 시기상조이지만 앞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해야 한다."

- 대학의 서열화를 타파하지 않는 한 어떤 입시제도안도 한국사회에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4년제 대학이 160여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고교서열화에 찬성하는 곳은 10개대 이내일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은 사실 고교서열화에 반대한다. 자기들 학교에 바로 영향을 미치니까 그렇다. 사실 문제가 되는 학교는 몇개 안된다. 이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며 사회를 지배하는 게 문제다. 정부가 흔들리면 안된다."

- 수능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수능은 실시하되 반영비율을 대학자율에 맡기면 된다. 경우에 따라선 수능은 아예 반영하지 않고 내신만 가지고 학생을 뽑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가장 바람직한 학생선발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신과 거기에 수능을 보태고, 특기적성을 개발해 선발하면 충분하다. 대학이 자율적으로 선발했으면 수능과 연계시켜서는 안된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인터뷰를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인터뷰가 형식적이다. 면접관이 최소한 너댓명은 들어가야 하는데 두세 명 정도만 들어간다.

80년대에 싱가폴의 한 대학에 간 적이 있다. 여기 의대와 법대는 무시험이다. 이곳 판검사들의 인격이 엉망이다 보니 정부가 결심을 해서 의대와 법대는 지필고사 대신 인터뷰로 학생을 선발했다. 인터뷰에는 7명의 면접관이 들어간다. 이렇게 인터뷰를 실질적으로 해야 변별력을 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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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04-10-24 0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감동했어요. 제 서재와 블로그에 퍼갑니다. =)

balmas 2004-10-2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인종 교수 같은 분이 좀 많이 계시면 좋을 텐데 말이죠 ...
 
 전출처 : 노부후사 > <퍼온글>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이 정권의 큰 착각 하나는 자신이 한나라당과 비대신문의 수구 신성동맹으로부터 영일(寧日) 없이 두드려 맞는 이유가 여권과 신성동맹 사이의 이념적ㆍ정책적 차이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최근 생뚱맞은 물타기로 개혁 법안들을 멀겋게 만듦으로써 그런 시각을 또렷이 드러냈다.

그러나 웬걸, 신성동맹의 공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신성동맹이 여권을 두드려 패는 이유는, 적어도 결정적 이유는, 이념이나 정책 층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과 올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겼더라도, 지금까지 현정부가 펼쳐온 정책과 크게 다른 처방을 선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인들 무슨 수로 지금 정부보다 더 화끈하게 대미 종속과 가진 자 옹호를 실천하겠는가. 정권 출범 당시에야 여권과 신성동맹 사이에 이념 차이가 없지 않았겠지만, 이 정부는 지난 한 해 반 동안 그 차이를 실천으로 입증한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신성동맹은 왜 여권에 끊임없이 말의 팔매질을 해대는가? 여권의 존재 자체가 그냥 싫기 때문이다.

마땅히 자기들이 꿰차야 했을 자리를 잇따른 선거 패배로 빼앗긴 것이 짜증스럽고, 게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평소에 깔보아왔던 무지렁이들이라서 더욱 짜증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정권이 같잖다는 것이다.

여권에 대한 신성동맹의 감정은 맞수에 대한 미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가당찮은 멸시의 감정이야말로 멸시하는 주체의 천격(賤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접어두자. 아무튼 신성동맹이 바라보는 현 정부는 프랑스 왕당파 귀족들이 바라보았던 제1제정과 비슷하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 역시, 코르시카의 미천한 신분 출신 황제처럼, 근본 없는 집안 출신의 ‘왕위 찬탈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동맹이 여권을 지칭하며 애용하는 ‘좌파’라는 말도 ‘그냥 싫은 놈’이라는 뜻일 뿐이다.

신성동맹이 이런 알량한 귀족주의로 여권을 대하고 있는 이상, 이 정부가 설령 가상의 한나라당 정권 이상으로 우향 돌진한다고 해도 이른바 ‘상생’의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여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신성동맹이 싫어하도록 내버려두고 제 갈 길 가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정권은 출범 이후 지지자들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신성동맹 눈치를 살피느라 끊임없이 우경화의 길로 매진함으로써 제 지지기반을 허물어왔다.

그러다가 사면초가다 싶으면 사소한 ‘껀수’를 잡아 온 나라가 들썩이도록 신성동맹과 각을 세우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의 조잡한 정치공학을 되풀이해 왔다.

여권이 무슨 일을 하든 신성동맹이 거기 딴죽을 걸 준비가 돼 있는 한, 신성동맹의 영향 아래 있는 보수적 유권자들이 여권의 새로운 지지자로 충원될 가망은 거의 없다.

여권이 살 길은 정권 출범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며 두 차례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다.

게다가 출범 이래 줄곧 좌파 정권이라는 ‘욕’을 들어온 바에야, 본때 있는 좌파는 못 되더라도 좌파 흉내쯤은 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개혁 피로증? 만약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은 신성동맹의 악선동 때문만이 아니라 아무런 실천 없이 허공에 지겹게 난무하는 여권의 개혁 담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개혁은 개혁이라는 구호 안에 있지 않다.

지금 개혁 법안이라고 불리는 것도 무슨 대단한 공사가 아니라 그저 우리 사회를 정상화하는 최소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여권이 이 정도 일을 하면서 입으로 개혁 유세(有勢)를 떨어 덤의 반발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온건할수록 좋고, 실천은 어기찰수록 좋다.

지난 대선 때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2007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 후보 찍을까 아니면 기권할까 고민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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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4-10-2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머리속의 논리로 풀수 없다는것을 알면서 점점 괴롭게 되는군요.
지난 토요일 일로 강남 기득권자라고 할까(서울대 나오고 의사로, 제 기준에 이정도면) 한분과 애기하는데 내년쯤 체제 변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더군요.
이런 분들 애기들으면 밖에서 보면 이너써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다들 경기, 서울고 나와 서울대 나온분들 모임에서 이런애기저런애기하는게 이런것인데 이분들 현실인식이 이렇더군요. 그리고 이런분들이 현실적인 힘인 권력과 돈을 쥐고 있고.
애기를 듣는순간 암담해지더군요.
답이 없어보입니다. 실천이라는것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도 맘대로 못하는것이 참.
정말 내년에 김정일 하수를 받아 체제변혁이 일어날것인지.
무얼해야할지

balmas 2004-10-2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 기득권자들, 특히 상류층 지식인들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터무니없이 허약하다는 점은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지난 50여년 동안 미국과 군부독재의 호위 아래 온갖 편의와 특혜 속에서 풍요를 누려왔지요. 문제는 자신들의 풍요를 가능하게 했던 그 조건들(미국과 군부독재)이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이라는 점을 성찰하고 교정할 만한 능력을 이들이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자기인식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는 그 조건들이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조건이라고, 곧 민주주의적인 것(이 때의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풍요의 자유 보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이런 판단 위에서는 이 조건들을 개조하고 교정하려는 노력들은 모두 반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런 노력들은 모두 좌파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행태들을 단순한 전술적 선동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그들 스스로가 이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체제전복의 위기의식을 느낄 만하지요. 전문지식은 갖추고 있지만 사회적 인식(특히 한미관계나 남북관계에 대한)은 초중등학교 수준을 넘지 못하는 고급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오늘의 남한사회죠.
그렇다고 노무현 정권처럼 여기에서 타협하게 되면 아무것도 안되고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싸우고 깨뜨리고 사회적 조건들을 개조해야죠.

릴케 현상 2004-10-25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무속인 협회에서 노무현은 내년에 급살 수가 있다고 했댑니다. 그리고 미국선거는 부시 당선으로 점치더군요

balmas 2004-10-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무속인 이야기를 들으니까, 동국대 정치학과 황모 교수가 생각나는군요. 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로 자처하다가 90년대에는 비판적 하버마스 연구자로 나서고, 다시 00년대에 와서는 김대중 대통령 자문 교수의 한 사람으로 속해 있다가, 최근에는 점성술 정치학으로 돌아서서 대통령의 사주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고, 올해에는 대통령 탄핵안을 이론적으로 기초했다가, 결국 조선일보 칼럼의 필자로 등단한, 그 황모 교수 말이죠.
암만 해도 무속인들이 황모 교수의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있는 듯 ... 아니면 그 반대인가???

릴케 현상 2004-10-2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 교수가 그렇게 재주가 많은 줄은 몰랐군요

biosculp 2004-10-2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모교수는 사상의학을 정치학에 적용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주워들은 견문으로는 이분이 일급의 맑스정치학자라고 들었었는데 배우고 아는것과 늙어가면서 처신하는것이 이렇게 괴리가 되나 그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김문수 한나라당의원을 봐도 사는게 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배우고 행동하는것 그리고 늙어서 추하게 되지 않는것 참 힘들어 보입니다.
 

출처: 진보누리
이름 자유석공 (2004-08-17 16:58:17, Hit : 208, 추천 : 5)


제목
Judicial Reveiw


1, Malbury v. Madison
1800년도 초기 우리나라 순조 임금시기 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미 대법원에 하나의 소송이 올라왔다. Writ of Mandamus 우리말로 억지로 번역하자면 금관청원이라고 해야 겠지만 간단이 말하면 국가 공무원에게 어떤일을 하도록 아니면 어떤일을 하지말도록 하던지 둘중 하나를 서민이 요구할때 올리는 청원이다. 몇사람의 원고가 같이 소송했지만 대표청원자의 이름은 말버리였고 피고는 당시 국무장관이던 Madison이 지목됐기 때문에 Malbury v. Madison 사건으로 부른다.

2. Facts Behind the Facts
내용은 간단했다. 국무 장관에 의해 추천되어 아담스 행정부에 의해 워싱턴 디씨 지방법원의 판사로 임명받은 임명장이 수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고는 대통령에 의해 추천되어 상원의 인준을 무사이 통과한 임명장 수여를 거부한 것은 잘못이라며 대법원 명령으로 임명장 수여를 강제 집행하게 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임명장 수여는 왜 거부되었을까? 아담스 대통령은 당시 제퍼슨과 경쟁관계였고 제퍼슨에게 자리를 내주며 물러나게 된다. 제퍼슨 내각이 들어서기 하루전 아담스는 마지막으로 전격 인사를 단행해 판사를 포함한 백여명의 연방관리를 새로 임명했는데 원고는 그중의 한명이었다. 새로 들어선 제퍼슨 내각이 전임 행정부에 의해 하루전 임명된 관리들을 곱게 봐줄리 없었고 그중 반 제퍼슨 성향을 보이던 소위 악질적 인사 몇사람에게는 사소한 기술상의 문제를 이유로 임명 무효화를 선언해 버렸다. 즉 행정부가 임명했으니 행정부가 보류 내지는 파직하겠다는 것이다. 원고인 말버리가 이에 반발, 판사 임명장을 꼭 받아야 겠다면서 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제퍼슨 정부의 임명장 거부 조치는 다분이 감정적 정서가 배어난 정쟁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말버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원래 부터 지방법원 판사직 따위는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조지 워싱턴의 사업 파트너였으며 아담스의 개인적 친구였고 연방주의자들에게 정치 자금을 스폰서했던 그는 워싱턴 정계에서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돈줄이자 거물이었다. 소송 자체도 새로 들어선 제퍼슨 행정부에 스캔들을 더해서 이들의 정치적 위상이나 신용도를 실추시키려는 목적이었을 뿐 정말 판사로 잡범들을 상대하며 종신 근무할 생각은 꿈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더우기 원고 말버리는 법이외의 이유로도 자신만만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사건의 심의를 맡은 연방 대법원의 최고 수장이 바로 존 마샬로 마샬이야 말로 말버리와 같은 연방주의자였으며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였고 더우기 바로 자신을 아담스에 추천해 아담스로 하여금 상원의 인준을 받게 만들었던 전임 행정부의 국무 장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마샬은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정적에 의해 임명장을 받지 못한 케이스의 소원을 다루게 된 것이다.

3. Simple Issues and Answers, but…
사건심의를 시작한 대법원장 마샬은 판결문 서두에 세가지 이슈를 내놓는다.
1. 과연 전임 행정부에게 원고를 판사로 임명할 자격이 있었는가?
2. 과연 신임 행정부는 원고에게 법관임명장을 수여해야 하는가?
3. 행정부의 임명장 수여를 연방 대법원이 판결로 강제할수 있는가?

물론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었고 관련 법도 없었지만 상식적으로 보자면 사실 어려울 것도 없는 이슈였다. 전임행정부에서 헌법에 따라 연방관리를 임명한 것이고 임명 자체에 하자가 없을 뿐더러 임명장도 이미 전임 대통령의 사인이 다 들어 있는데 이를 백악관에서 보관하며 배달만 안한 것이다. 1번과 2번에 대해 마샬은 간단이 Yes 라고 답한다. 그런데 3번이 문제 였다. 물론 마샬은 여기도 Yes 라고 답한다. 간단한 이슈 그리고 간단한 답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샬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다. 즉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는 행정부에 임명장 수여를 강제할 판단을 내릴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대법원은 아예 이사건을 심의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했다. 심의자체가 부당하다고 잘라 버린 것이다. 절차법상의 이유였다.

4. Procedural Faults?
절차법이라 함은 간단히 말해 jurisdiction, 즉 관할권상의 문제로 대법원은 지방법원 판사의 임명에 대해 1심부터 가타 부타 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헌법상 대통령에 의해 임명받는 사람들은 외교관등 몇몇 주요 보직( principal officer) 으로 이들은 상원인준을 통해 임명된다. 만일 지방법원 판사가 헌법에 명시된 주요 보직중 하나라면 모르지만 아니라면 설사 상원 인준을 받았다 해도 이는 대통령 직권 임명이므로 지방법원에서 행정 소송을 해야지 대법원으로 이를 가져올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 헌법은 대통령과 행정부 부처장이 직권으로 필요에 따라 상원 인준 없이 하급관리( inferior officer) 를 임명할수 있다고 되어 있다. 마샬은 같은 사법부 관리라도 연방 대법원 판사는 헌법에 명시된 principal officer 이므로 연방대법원 판사직의 임명이 헌법의 문제가 된다면 헌법기구인 Federal Supreme Court로 문제를 가져올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방법원 판사의 경우 헌법 조문에 직책이 명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는 행정법상의 이슈는 될지언정 헌법상 심의할 이슈가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과 상관없는 주제 이므로 그 임명과 관련된 법적 타당성 문제는 1심부터 연방 대법원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며 만일 소송 절차를 밟아 올라온 케이스라면 모르되 이사건은 1심부터 연방 대법원에 소를 제기한 것은 잘못 이라는 논리였다. 즉 임명장 수여를 거부받은 사람이 만일 지방 법원을 통해 소송을 했고 지방법원 소송이 불만족 스러웠다면 소정의 절차를 거쳐 어필하는 과정을 택해야 했었다는 것이다.

‘…원고 말버리의 임명장은 법적 효력이 있으므로…임명장 전달에 실패한 신임정부의 행동은 잘못… 원고는 임명장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지방법원에서 다루었다면 충분이 임명장 전달을 강제할수 있었을 것…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상기의 이유로 이문제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므로 원고의 Mandamus 청원을 거부한다…

판결 자체 즉 Holding은 한줄로 요약될수 있는 내용이었다. [연방 대법원은 원고의 소를 심의할 관할권이 없으므로 원고의 Mandamus 청원은 각하 한다. ( dismiss) ] 한마디면 될 것을 마샬은 쓸데 없이 세개의 질문을 이슈로 던진후 자문자답 형식으로 장장 40 페이지에 걸쳐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이다. 당연이 판결문 전문은 임명장 전달에 실패한 정적 제퍼슨 행정부에 대한 암시적 비판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도 결론은 원고 패소니 사법부가 행정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보자면 치고 빠지기 전술을 한 것으로도 볼수 있다. 물론 충분이 제퍼슨을 괴롭힌 말버리는 다시 소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단순했을까?

5. The Issue within the Issues
존 마샬은 개인적으로 말버리, 아담스와 친구였으며 같은 연방주의자 진영에 속해 있었다. 그의 모친은 제퍼슨과 사촌이었다고 하니 사실 마샬은 정적이던 제퍼슨과도 친척 관계였다. 그러나 이같은 사소한 개인배경과는 별도로 이판례가 오늘날에도 미 연방 대법원의 헌법 소원 판결의 기본이 되는 Seminal Case 로 강력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이유는 마샬이 판례에 담아놓은 견해였으니 이를 Marshall’s View라고 한다.

그당시 미국은 건국 초기였고 법관들이 가진 법이라곤 영국의 전통법인 Common Law 그리고 고대의 Justinian Code 와 함께 미국 헌법 Constitution 밖에는 없었다. 물론 소소한 지방법이나 정부관련 법들이 있었지만 당장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이같은 법들은 새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연방정부의 권력을 둘러싸고 별 도움이 안되었을 뿐 아니라 Malbury 케이스에서도 보이듯 오히려 갈등의 단초만을 제기했다. 더우기 마샬과 제퍼슨의 갈등은 단순 정파적 이해관계만은 아니었다. 미국이라는 신생국가의 정부 조직이나 권력 구조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심각했다. 마샬은 연방 정부론을 제기한데 비해 제퍼슨은 유럽식 중앙 집권적 정부에 대한 비젼을 갖고 있었으며 제퍼슨 행정부 시대에는 심지어 사법부를 행정부안의 일개부서로 편입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Marshall 의 견해는 새로운 연방정부 내부의 권력 분할과 상호견제에 대한 대법원의 위상과 사법적 심의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말버리 케이스에서 마샬은 대통령이 관리를 임명할수 있다고 확인하며 그 근거로 헌법의 조문을 들었다. 그는 대통령이나 의회 그리고 대법원은 모두 헌법상 기능과 조직이 명시된 헌법기구라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미 헌법에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 삼권분립이란 단어를 개념적으로 투사해 이에 따른 상호 견제관계를 분명히 인정했다. 흔히 법이라고 하면 조문이나 Prima Facie case 를 위한element (조각요소) 만을 생각하지만 사실 조문이나 element는 실제 법리 해석에서는 15% 정도만 복무할 뿐이다. 하나의 케이스가 Reasoning에서 Prima Facie( 모든 조각요소를 만족한 경우) 를 논리적으로 깨고나면 그 케이스는 그 성격에 따라 overruled case 나 distinguished case가 되어 새로운 판례법이 생기는 과정이 연속되는 것이다.

6. Supervisory Power
그런 의미에서 마샬의 견해는 Judicial Review: Supervisory Power라는 룰을 새로 만든 것이었다.

미 행정부나 의회의 권한은 헌법에 의해 주어진 것이듯 헌법에 대한 심의권한은 헌법에 따라 대법원에게 부여된 고유권한이므로 입법부던 행정부던 헌법을 넘어서는 행동을 할 경우 대법원은 이를 교정할 권한, 즉 감독하고 심의할 권한- Supervisory Power를 <헌법에 의해 갖고 있음>을 밝힌 것이었다. 특히 말버리 케이스에서 마샬은 Dicta 를 통해 < 의회가 헌법에 위헌적 입법권을 행사할 경우 대법원은 이같은 법을 Overrule 할 권한이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혔는데 이는 <행정부의 대통령이 위헌적 행정권을 행사할 경우 대법원은 이같은 행정권 행사를 막을 권한도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한 부분이었다. 오늘날 미국 대법원 판사들에게 위헌 소원 판결의 전범을 보여주는 마샬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부분 이었다. 제퍼슨 이라는 신임 대통령과 대립이 심화되던 시절 그는 아무 상관없는 의회를 판결문에 끌어들여 의회가 잘못하면 대법원이 교정한다고 했지만 사실 진짜 메시지는 행정부가 잘못할 경우 대법원이 교정할수 있다는 Supervisory Power를 곁두리로 선언한 데 있었다. 정치적 갈등을 피해 행정부 수장이던 제퍼슨을 직접 자극하지 않으면서 사법부를 행정부에 복속시키기를 꾀하던 제퍼슨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개척민 측량사의 아들이던 마샬은 어린 시절 공식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12세 무렵에 어느 교황의 교서집을 암송함으로써 라틴어를 독습했다고 하는데 그의 판결문의 문장이 고전적인 것은 아마 그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윌리엄앤 매리 대학을 나와서 변호사가 되었는데 옷을 하도 남루하게 입고다녀서 길에서 그를 본 어느 사업가가 저런 촌스런 인간은 절대 내 사무실에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나중에 그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게된 이 실업가는 저런 변호사는 분명 엉터리 일 것이라며 나중에 소송이 생기자 당시로써는 최고 비싼 수임료인 100불을 부르던 금단추 양복의 변호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금단추는 소송에 이기지 못했다. 마샬이 최고라는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사업가는 법정을 찾아 마샬이 다른 사건에서 변론하는 것을 듣고 그의 변론에 반하게 된다. 그리고 마샬을 찾아와 제발 사건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는 이미 파산 직전이었고 변호사 비는 단돈 5불 밖에 낼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마샬은 아무말 없이 5불로 이 사람을 위해 변론해 소송에서 이겼다는 말이있다. 그가 공직에 발을 들여놓기 전의 이야기다. 장관을 역임했지만 마샬은 대법원 판사시절 보조 판사였던 조지 워싱턴 조카의 권유로 선금을 받고 내키지 않는 자서전을 썼을 정도로 돈에 쪼들리며 살았던 주변머리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7. Holy Trinity v. Ultimate Source of Power
로크와 몽테스키외를 판결문의 각주로 삼았던 마샬이 추구했던 권력구도는 삼권 분립의 조화된 정부 였다.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가 하나의 삼위일체를 이루어 권력을 교환하며 상호 견제를 통해 수립, 집행, 심의 기능을 나누는 체제였다. 마샬은 특히 사법부에 위헌 심의권을 삽입함으로써 삼위일체를 운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샬이 수립한 대법원 심의권은 1940년대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을 수립하면서 도전을 받게 된다. 뉴딜 정책에는 국가의 경제 개입이 전제되어 잇었는데 보수적이던 대법원은 국가의 경제 개입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뉴딜관련 입법을 번번히 무산시켰다. 그러나 콜롬비아 법대 출신의 루스벨트 역시 헌법 조문주의의 맹점을 잘 알았고 대통령으로써 자신에게 부여된 헌법상의 권한을 십분 활용해 대법원 판사의 정원을 늘리며 우호적인 정치 판사들을 대거 충원한다. 내부의 의견차이로 법원이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법리의 일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지경에 이르자 대법원은 마침내 행정부에 백기를 들고 사법적 일관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행정부의 법안을 인정하기로 일종의 신사계약을 맺는다.

즉 삼권 분립이라는 삼위 일체는 어느정도 깨진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1차적으로 대법원 판사 임명권을 대통령에게 귀속시킨 헌법 조문상의 근거조항이었고 이를 적절히 활용할줄 알았던 루스벨트의 두뇌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대법원이 심의기능을 시대와 민의에 역행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루스벨트가 민의에 역행하는 입법안과 정책을 추진했다면 의회의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고 탄핵까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루스벨트는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황 시절 미국은 너무도 비참했던 것이다.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는 이 비참했던 기록의 증언이다. 일례로 당시 소련에서 5천명의 철강 노동자 이민을 받겠다고 제안했을때 25만명이 지원해 소련은 1만 5천명으로 이민 정원을 늘렸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정책적 경제 복구와 사회보호가 필요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미 대법원은 Commerce Clause 의 한계를 심의하며 무엇이 Commerce 이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탁상공론만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이 Commerce 가 아니면 연방 정부는 그같은 정책을 추진할수 없으며 Non Commerce 법안은 주 자치 기구인 지방정부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심각한 필요에 직면했던 정부 정책에 대한 급박한 현실과 민의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논리였고 결국 가진자가 유리한 자유 무역 주의나 개인주의적 지평의 경제복구라는 구시대적 전제를 확인하는 논리였다. 민심을 등에 업은 루스벨트 행정부를 이길수 없었다. 사법부는 행정부에게 진것이 아니라 민심에 역행하는 길로 들어가 스스로 패한 것이었다. 삼위일체에만 연연한 나머지 궁극적 권력의 원천은( Ultimate Source of Power) 백성들에게 있다는 Constitutional Preamble을 망각한 댓가였다. 여론과 투표권이 결부된 정치적인 이슈는 가급적 Substantive Law 의 지평에서 다루지 않는 관행이 생긴 것이 이즈음이다. 그리고 이같은 관행은 오늘날로 이어져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위헌 소원을 대법원은 <정치적 문제>라는 이유로 답변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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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22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이 몰래 저에게 퍼다주셨는데, 저 혼자만 보기가 아까워서 공개합니다.
퍼온 분께는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전출처 : 로쟈 >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2)

(11)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1928-1940). 드디어 불가코프! 그의 작품집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또 희곡들은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되기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스탈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탄압 받고 금지됐던 작가였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생전에 발표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어쨌든 <불가코프 백과사전>까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사전과 같이 나올 정도의 지명도를 그는 갖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었지만(그는 <몰리에르의 생애>란 전기도 썼고, 몰리에르가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도 썼다), 그가 뒤늦게 누리는 영광은 몰리에르에 뒤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불가코프도 제법 적지 않다. 혁명을 풍자한 <개의 심장>, <운명의 알> 등의 중편들에서 <백위군> 같은 소설, 그리고 <극장>, <위선자들의 밀교> 같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투르빈가의 나날들> 같은 대표 희곡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출간예정이라는 소문은 있다), 여러 러시아 교수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거장과 마르가리타> 또한 현재로선 품절이다. 우리에게서 불가코프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걸로 봐서 우리의 불가코프 수용에는 어떤 장벽이 있는 듯하다.

 

(12)이반 부닌의 <어두운 가로수길>(1937-1945). 러시아에서는 얼마전에 이반 부닌의 새 전기가 출간됐는데(아직 구경하진 못했다),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부닌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능한 시인/작가의 한 사람이다. 부닌은 그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양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부닌은 지극히 동양적이다(특히 불교적이다). 러시아나 서구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문학이 우리에겐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나의 도식적인 이해에 의하면, 부닌은 체홉, 고리키와 함께 거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문학적 계승자의 한 사람인데, 체홉이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그리고 고리키가 민중성을 이어받았다면 부닌은 그의 종교성을 계승하고 있다.

 

내 기억에 <어두운 가로수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으며(<비밀의 나무>란 제목으로 나왔던가), 기타 그의 단편들(<사랑의 문법>으로 번역돼 있다) <마을> 같은 중편들도 번역돼 있다(그의 단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이며, <일사병>이란 단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견주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아르세니예프의 삶> 같은 자전적 대표작은 번역되지 않았다. 더불어 지적하자면, 나보코프도 그랬지만 부닌도 문학적 출발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도 번역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가능할는지  

 

(13)A. 트바르도프스키의 <바실리 테르킨>(1941-1945). 드디어 내가 처음 듣는 작품이 나왔다. 사실 트바르도프스키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962년에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을 수 있도록 한 편집장 트바르도프스키로서이다(또 다른 트바르도프스키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가 솔제니친에 맞먹을 만한 작가였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제목으로 봐선 바실리 테르킨의 일대기를 다룬 듯싶은 장편소설인데, 아마도 그가 혁명과 내전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수히흐 교수는 죽음과 전쟁, 운명, 조국에 대하여란 장제목을 달았다.

 

(14)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1945-1955).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1956년에 이 작품을 해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서 1958년에 (다소간 정치적인 선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다소간 은둔적인 성격에 걸맞지 않은 문학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걸 포기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1960년에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이 작품 때문에 그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재촉한 것이다. 지바고 때문에!(지바고는 러시아어 의 고어(古語) 형용사형이다)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사실 소설로 씌어진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그런 의미에서 푸슈킨의 시로 씌어진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과 마주보고 있다), 지바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유고시 25편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참조물이 아니라 핵심이다(이걸 빼놓은 번역서들도 있었는데, 좀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말은 소설미학적인 기준에서 이 작품을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이 작품에는 어이없는 우연들이 남발되고 있다). 푸슈킨이 특이한 소설을 썼다는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특이한 시를 쓴 것이며, 러시아 소설의 전통은 그렇게 열리고 닫힌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망명작가에 의해서.

 

<닥터 지바고> 1988년쯤에야 해금되며(그 이전에는 그의 초기 시들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그맘때쯤 저명한 러시아 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편집하에 간행된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에는 빠져 있다(나는 이 전집과 <닥터 지바고>를 따로따로 샀다). 굳이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포함된 전집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생계를 위해서 옮긴 번역작품들(그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을 주로 번역했다)은 요즘 따로 출간돼 있다. 우리말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외에, <나의 누이, 나의 삶>이란 번역시집(그의 시들은 상당히 난해하지만, 좀 이해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옮겨진 그의 자전적 기록 정도(마야코프스키와의 교우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라라의 모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의 회고록 정도.

 

(15)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58-1968). <수용소군도>가 출간된 건 1972년 겨울 파리에서였고, 이 때문에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비에트로부터 망명을 강요받게 된다(그에겐 강제출국 당하거나 망명하거나의 선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 분위기를 타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출간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는 이미 (해빙은 물 건너 간) 브레즈네프의 시대였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라고 고발하는 작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수용소군도>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책이 출간된 프랑스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는데, 과거 소련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 결정타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해야 했다(상당수는 스탈린주의의 수용소 대신에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선택하며, 한편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비판하는 신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에서도 기술되어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솔제니친이 망명지로 안착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의 시골마을이었으며, 거기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연설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곧 여론의 관심밖에 놓이게 된다(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이다. 다만 그의 공산주의는 종교적 공산주의일 따름. 현대인은 신을 잊었다!는 게 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한때의 신화였던 작가였지만(한 문학작품이 한 시대의 표정이 되고, 한 시대의 좌표를 바꾼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그는 너무 뒤늦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좀 무례한 말이지만) 너무 오래 살고 있다. 몇 번 추진되던 한국방문이 무산될 정도로 건강이 썩 좋은 건 아니면서도 나름대로 장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신화와의 작별>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분량의 평전까지 출간됐는데,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화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드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망명문학으로서의) 러시아문학이 푸슈킨에서 시작해서 파스테르나크에서 끝난다고 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의) 소비에트 문학은 고리키에서 시작해서 솔제니친에서 끝난다. ,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수용소에서 끝난다. 솔제니친 이후의 소비에트 문학은 잠시 농촌문학(발렌친 라스푸친)과 일상문학(유리 트리포토프)에 의해 채워지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종말을 맞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군도>(5권이던가?)를 비롯하여 아주 많다. <암병동> <1>, <붉은 수레바퀴>(이 대작도 나오다 만 것 같다)까지가 그의 주요 장편들이라고 한다면, <마트료나의 집> 등과 같은 초기 단편들도 여럿 번역돼 있고,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라게리수용소란 뜻이다) 같은 희곡작품도 번역돼 있다(오늘 헌책코너에서 산 그의 희곡집에는 안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그는 희곡작품도 꽤 여럿 쓴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집까지. 

 

(16)B. 샬라모프의 <콜르임 이야기>(1954-1973). 샬라모프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이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지는 몰랐다. 콜르임은 수용소가 있었던 지명이고(그러니까 아마도 시베리아 어디일 것이다), 콜르임 이야기는 콜르임을 배경으로 한 연작이다. 웬만한 작품집에 들어가 있는 <콜르임 이야기>가 다 발췌인 걸로 봐서 이 연작으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사실, 샬라모프 자신이 15년간(1937-1951) 거기에서 유형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그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꼬박 20년이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되새김질하는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예의상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라모프에 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번역본들도 곧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안드레이 비토프의 <푸슈킨의 집>(1964-1971, 1978) 최근에 비토프의 2권짜리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물론 장편 <푸슈킨의 집>은 제외한 것이다(원제인 푸슈킨스키 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학연구소로 보통 푸슈킨연구소라고 부른다. 거기엔 푸슈킨의 데드마스크가 많은 육필 원고와 함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푸슈킨의 집>은 작가가 계속 버전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연도를 아직 표시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나마 작년인가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된 것인데, 현재까지는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프의 이 소설 역시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다(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이다). 그건 각종의 텍스트들이 교직되어 새로운 텍스트를 축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나보코프의 소설에서와는 달리, 진정한 문학적 유희, 텍스트의 즐거움(바르트의 용어)이 실현되고 있는 것. 물론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그것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은 푸슈킨의 집이다. 푸슈킨의 문학적 유산으로서의 러시아문학 전체가 이 소설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이거나 잠재적 인자들이다. 실제로 비토프는 나름대로의 푸슈킨 연구자이기도 하며, 푸슈킨에 관한 두 권의 책, 1825년의 푸슈킨, 1836년의 푸슈킨을 편집하기도 했다(1825년은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난 해이며, 1836년은 푸슈킨의 생애 마지막해이다. 그는 1837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물론 내가 아는 한, 비토프의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바 없다(어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수년 전에 한국 펜클럽 초청으로 방한할 뻔했으나 역시 무산됐다(그러니까 그는 아직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고 있지 않다). <푸슈킨의 집>에 대한 연구서들은 이미 러시아와 미국 등지에서 나오고 있으며, 국내에도 연구논문들이 있다. 작품도 번역돼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다.  

 

(18)바실리 슉쉰의 <성격들>(1973). 짐작에 <성격들>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슉쉰의 문학을 총괄하는 작품집인 듯하다. 또 그래야 말이 된다. 그의 문학은 그의 삶 전체로 웅변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농부 같은 (한 성격 할 것 같은) 인상의 슉쉰은 70년대 초반 소비에트 문화계의 간판이었다(우리 작가로는 딱 황석영 같은 타입이다. 황석영이 영화감독도 겸했다면).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감독으로도 유명하다), 1973년에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맡은 영화 <칼리나 크라스나야>(사전적 의미로는 빨간 까마귀밥나무란 뜻이다)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수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대학원 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 줄 몰랐다). 그건 그만큼 슉쉰이 러시아 나로드(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수히흐 교수의 장제목은 한 영혼이 아프다. 작가-예언자란 평까지 듣는 슉쉰은 러시아의 영혼이면서 한 시대의 영혼이었던 것.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얼마 전 그의 사망 30주년을 맞는 특집기사들을 보고 새삼 작품집과 영화CD 등을 사두었고, 엊그제 헌책코너에서 우연히 그의 전기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러니 알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인 것. 한국에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몇 편의 단편이 소개돼 있는 게 전부이다. 스첸카 라진의 농민반란을 소설화한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러 왔노라> 같은 대표적 장편소설은 한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을 듯하므로, 한번 기다려봄 직하다(이 작품의 번역은 오래 전에 한번 추진되었다가 무산됐던 걸로 안다. 분량 때문에). 참고로, 슉쉰을 추모하는 기고문에서 한 작가는 러시아문학에서 다섯 명의 위대한 작가를 꼽았는데,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슉쉰이 그 다섯 명이다.    

 

(19)발렌친 라스푸친의 <마쪼라의 이별>(1976)(20)유리 트리포토프의 <노인>(1978)은 한꺼번에 언급하기로 한다(막간이 너무 긴 것 같으므로).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은 농촌문학 (도시의) 일상문학이었는데, 라스푸친과 트리포노프는 각각 이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지명도에 있어서는 라스푸친이 한 수 위인데(제정 말기의 괴승 라스푸친과 성이 같지만 무관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중학교(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들이 다수 수록돼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라스푸친>이란 책도 나올 정도이다. <마쪼라의 이별>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소련동구문학전집>), 댐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농촌마을 사람들의 얘기이다.

 

라스푸친은 농촌문학에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 걸로 평가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유사한 지킴 신앙 등이 다뤄지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게 읽힌다. 라스푸친의 작품으로는 <마쪼라의 이별> 외에도, <마리아를 위하여>(원제는 마리아를 위한 돈), <마지막 기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트리포노프의 작품으론 <긴 이별>, <또 다른 삶> 등이 번역돼 있다(<소련동구문학전집>에 실려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페테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문학, 혹은 포스트-소비에트의 문학은 선정에서 빠져 있다. 그건 걸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음 세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20명의 작가와 작품 목록에 (국내에서 다소 과대평가된) 친기스 아이트마토프(<하얀배>, <백년보다 긴 하루>, <처형대> 등이 번역돼 있다)가 빠진 것이 반갑고, 블라지미르 보이노비치(<병사 이반 촌킨의 모험>, <2040> 등이 대표작이다)가 빠진 것이 아쉽다. 또 하지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선정이 편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04. 10. 20.

 

P.S.1. 대략 본문에서 나열한 목록을 볼 때, 시의 경우가 제외되긴 했지만,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결코 다른 나라에 뒤질 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19세기와 비교해 보면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인데(이건 1910-20년대 시인들의 목록이 추가돼야 카바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문학사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19세기를 금세기라고 하고 20세기를 은세기라고 한다. 그런 논리에 따르자면, 21세기는 동세기가 된다. 아직은 거의 출발선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세기라고 해서 (경쟁이) 널널한 건 아니다. 무릇 작가라면 상당한 재능과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무장하고 목숨을 걸고 써야 동세기 문학사에라도 이름을 걸 수 있을까 말까이다(물론 내 생애에는 그 문학사의 종결을 보지 못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근대문학 100년을 갓 넘긴 한국의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축복 받은 편이다. 적어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상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보코프나 불가코프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일까?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적당한 재능과 적당한 문제의식으로 무장하고 팔릴 만한 것에만, 혹은 사소한 것에만 목숨 걸며 써대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한국문학의 황금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언제? 언제였단 말인가?..

 

P.S.2. 지난 통신문 (46), (47)에도 이런저런 오류/오타들이 있었는데, 중요한 내용상의 오류들만 교정한다. 먼저, (46)에서 푸슈킨 동상에 새겨진 <기념비>의 시구가 1연과 3연이라고 했는데, 3연과 4연이다. 3연은 확실했고 나머지는 미심쩍었는데(그래서 내 기억이 맞다면이란 단서를 달았었다) 지난주에 근처에 간 김에 확인해봤다. 동상의 받침대 왼편에 새겨진 것이 3, 나의 명성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 가리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리라,/ 자랑스러운 슬라브족의 자손과 핀족, 지금은 야만적인/ 퉁구스족, 그리고 초원의 친구인 칼미크족까지.이고, 오른편에 새겨진 게 4,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내가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우고,/ 이 가혹한 시대에 자유를 찬양하고,/ 쓰러진 자들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므로.이다  

그리고 통신문 (47)에서 노벨문학상 후보가 될 만한 동시대 러시아 작가들을 거명하면서, 드미트리 피로고프, 레프 루빈슈타인 등의 개념주의 시인/작가들이라고 했는데, 피로고프가 아니라 프리고프이다. 피로고프는 고골의 <넵스키> 거리에 나오는 속물 장교로 그 이름의 어원은 피로기(고기만두란 뜻)이다. 가장 저명한 개념주의 시인을 고기만두로 만들 뻔했는데, (음성학적으로) 두 이름이 헷갈릴 만하지만 그건 실례라고 해야겠다. 참고로, 프리고프는 수년 전에 방한해서 문학강연을 한바 있는데, 마치 무슨 주술사처럼 신들린 듯한 시낭송을 겸했었다(하지만, 무당은 아니고 상당히 똑똑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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