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1)

몇 달 전 통신문에서 잠깐 언급한바 있는데, 막간을 이용해서(이래저래 무거운 머리도 비울 겸)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을 꼽아본다. 선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대학의 이고르 수히흐 교수가 한 것인다. 그는 체홉 전공자로서, <체홉 시학의 제문제>(1987, 박사학위논문)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시간, 장소, 운명>(1995)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학자이다(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 망명했던 작가 도블라토프는 이미 클래식 작가의 리스트에 올라 있고, 4권짜리 전집과 함께 대부분의 작품이 문고본으로 나와있다. 그 자신은 작가 체홉을 가장 닮고 싶어했다고).

 

러시아의 체홉 연구에 있어서는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히는 수히흐 교수는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출판사 아즈부카에서 나오는 문고본 클래식의 편찬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이 문고본의 체홉 등은 그가 편집하고 해설을 붙였다). 그는 올 초에 <20세기의 책 20>(544/ 5,000부 발행)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말 그대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 20권을 선정하고 각 작품에 대한 자신의 품평을 곁들인 에세이이다. 물론 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는 선정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듯하며, 따라서 우리가 외국문학으로서의 20세기 러시아문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하다(이와 다르게 참고할 만한 것은 이곳의 문학 교과서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로선 그의 목록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와 작품이 없지 않으며, 절반 정도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다소간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극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목록에 없는 작품들을 읽었다고 변명하는 수밖에). 20권의 목록을 차례로 나열하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국내 소개현황도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러시아문학사전>을 현재 안 갖고 있기 때문에 작가들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달지 못하며, 그저 떠오르는 몇 가지 인상만을 적는 식이 되겠지만).  

 

(1)안톤 체홉의 <벚꽃동산>(1903). 체홉 전공자답게 체홉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을 제일 처음으로 꼽았다. 그리고 <벚꽃동산> 20권 가운데 유일하게 드라마 작품이기도 하다. 나머지 19권의 작품들은 전부 장편소설이거나 단편소설집들이다(그러니까 이 20에 시는 빠져 있다). 사실, <벚꽃동산> 20세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다(정확하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다). 물론 <벚꽃동산>은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간혹 <벚나무동산>으로 번역/공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작의 제목이 벚꽃이나 벚나무 둘 다 의미하기 때문에 오역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벚꽃동산>이라고 옮겨야 한다. <벚나무동산>이라고 옮기는 건 미적 가치보다는 경제적/실용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로파힌으로 볼 경우에나 유력한 번역이다(그건 독창적인 해석이지만, 상식적이지는 않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라예프스카야(=귀족계급)의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그걸 고작 벚나무동산으로 간주하는 로파힌(=상인계급)에게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동산을 별장지로 개발하고자 하며, 4막의 배음(背音)으로 이 벚나무들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로, 작가 체홉은 객관적인 관찰자였지만 인간 체홉은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다.   

 

곁다리로 말하자면, 체홉의 (성공한) 첫 장막극인 <갈매기>는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음으로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어제 날짜 <문학신문>의 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데, <갈매기>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물론 체홉 원작의 <갈매기>가 있고, 이걸 비틀어서 트레플료프가 (체홉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에 실패하지만, 나중에 누군가에게 타살 당한 걸로 이야기를 다시 쓴 보리스 아쿠닌의 희곡 <갈매기>(2001)가 있다. 주로 탐정소설을 쓰는 아쿠닌은 드물게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동시대 작가이다(그의 작품들은 연극으로 공연될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오페레타 버전의 <갈매기>가 있으며, 이건 알렌산드르 주르빈의 작품이다. 그는 1990년부터 12년간 미국 뉴욕에서 살다가 왔으며(그러니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먼저 공연된 그의 <갈매기>는 이번 시즌에 러시아에서 초연된다. 이 세 <갈매기>를 나란히 무대에 올리는 곳은 극단 <슈꼴라 사브레멘노이 삐에스이>(동시대 희곡학교란 뜻)이며, 연출자는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스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하여간에 이번 시즌 안에). 안톤 팔르이치(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을 그렇게도 줄여 부른다)가 당신의 작품을 본다면, 이란 질문에 주르빈은 이렇게 말한다. 아주 만족할 겁니다!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1906-1907). 물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는 빠져나간 듯하지만,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평가 또한 예전에 못 미치지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란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란 뜻이어야 한다(때문에 <어머니> 1980년대 우리의 대학가에서 필독서였다. 대학가 축제 때면 <파업전야>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당시의 문화였고).

 

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품이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개인적으론, 어떤 작품에 들어맞는 시대/시점이 있는 것이지 시대를 넘어선 작품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닌 이상. 그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베스트로 꼽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당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너무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어머니>도식적이었던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며, 우리의 80년대는 도식적인 시대였다).

 

한 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정식으로 공포되는 것은 1934년이다)의 효시로도 평가되는 작품이지만, <어머니>에는 종교성도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수히흐 교수가 <어머니>에 대한 장의 제목을 마르크스와 성모 사이라고 붙인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새로운 시대의 복음서였다). 그와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 고리키의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이었다(그에게 인간은 언제나 대문자 인간이었는바, 그는 인간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의 최대치는 그가 쓴 드라마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밑바닥에서>(1902)에서 선언된다. 체홉의 섬세한 드라마들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리키의 이 드라마에는(특히 4) (유머 대신에) 박력과 (페이소스 대신에) 에너지가 넘친다. 해서, 나는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벚꽃동산이 아닌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고리키는 국내에 꽤 소개돼 있는 편이다. <어머니>만 해도 최소 2종의 번역서가 있다. <밑바닥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인가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번역/공연돼 온 걸로 안다(작품의 배경은 빈민굴이다). 고리키의 자전 3부작(<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부터 미완의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까지 어지간한 고리키의 작품들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물론 30여권에 이르는 그의 러시아어 전집에 비한다면 약소한 것이겠지만. 참고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고리키의 본명은 페슈코프이며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쓰라린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막심맥시멈이란 뜻이고. 해서 막심 고리키그토록 쓰라린이란 뜻이 된다. 젊은 시절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던 페슈코프의 삶이 바로 그토록 쓰라린 삶이었으며, 그는 권총자살까지 시도한바 있다(폐에 구멍이 뚫렸지만, 다행히 살아난다).  

 

고리키의 문학적 삶은 레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리키는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대표한다). 레닌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시대의 고리키는 사회주의 작가로서라기보다는 문학적 전통의 보호자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소련문학의 얼굴 마담 역과 작가들의 후견인 역이었다. 스탈린 시대 숙청 리스트에 올랐던 작가들 가운데 여럿이 그의 구명(救命) 운동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명은 연장할 수가 없었는데, 한편으로 그의 죽음(1936)에는 스탈린에 의한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었다.

 

참고로, 올해 러시아에서 나온 고리키 연구서는 고리키연구소(=세계문학연구소)에서 출간한, 젊은 연구자의 <고리키: 새로운 시선>(264)과 지난 2002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개최됐던 국제학술회의의 발표논문들을 모은 <막심 고리키와 20세기 문학의 모색>(669)이 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볼가강변의 항구 도시인데(고리키 초기 단편들의 주된 배경이다), 고리키 사후에 고리키시로 개명되었던 곳이다. 한데, 사회주의 몰락 이후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듯이, 니즈니 노브고로드도 고리키란 이름을 벗겨냈다(그래도 학술대회는 거기서 하는 모양이다). 레닌과 고리키는 그런 사후의 운명까지도 나눠 갖고 있다.  

 

(3)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1-1913). 나보코프가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소설에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이어서 나보코프가 꼽는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산문작가로서 벨르이는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의 최대 작가이며, <페테르부르크>는 그의 대표작이다(더불어 그는 고골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를 갖고 있다).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문학적/문화적 신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거쳐서 완결되는 작품이 또한 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도록 하겠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물론 영역은 돼 있다), 조만간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시적이고 장식적인 그의 문체가 얼마만큼 우리말로 옮겨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벨르이의 소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건 <은빛 비둘기>(3문학사)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러시아문학에서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에 대해서는(이전에 나도 짤막한 기고문을 쓴 적이 있다) 블라지미르 토포로프 교수의 연구가 독보적이다(그의 소개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이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러시아문학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616)란 책이 페테르부르크 30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된바 있다(물론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도 다루어진다). 더불어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필독서는 솔로몬 볼코프가 쓴 <상트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이다. 원래 영어로 먼저 씌어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이 지난 여름에 출간됐다. 볼코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술가로 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과 함께 역시 지난 여름에 나온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본래 음악 전공자였다).

 

(4)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1920). 자먀찐(혹은 자먀틴)으로도 읽히는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흔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원조(元祖)가 되는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멋진 신세계>와 나란히 묶은 러시아어본도 있다). 내전의 와중이던 1920년에 이미 혁명의 불행한 종국을 예견하고 있는 이 작품은 29세기 단일제국이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유토피아, 즉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극단을 예시해 보인다. 같은 러시아문학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히는 작품(수정궁 비판과 2*2=4란 테마). 자먀친은 다른 단편들과 함께 에세이들도 남기고 있지만(단편 두어 편이 우리말로 더 번역돼 있다), 역시나 기억되는 건 <우리들>의 작가로서이다. 우리말로는 두 차례(중앙일보사, 열린책들) 출간된바 있지만, 지금은 모두 품절된 걸로 보인다. 몇 년 전에 개최되었던, 자먀친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보니까 한국에서의 자먀친이란 발표문도 실려 있었는데, 석사학위 논문까지 총동원됐지만 (당연하게도) 몇 건 되지 않았다.

 

(5)이삭 바벨의 <기병대>(1923-1925). 바벨은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오뎃사(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도시) 출신의 유태계 작가로서 <기병대>는 내전(1918-1920) 시기를 다룬 연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이 연작의 화자가 내전에 참전한 유태계 지식인이다). 우리말로는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으며, 조만간 그의 선집이 다시 나오는 걸로 안다.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베진초원>의 시나리오를 썼던가?),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테마와 문체를 갖고 있다. 다른 연작 <오뎃사 이야기>의 경우(오뎃사 마피아 이야기쯤 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나리오도 따로 썼던 것 같다. 그의 문학세계는 2권짜리 전집에 다 수록될 만큼 간명하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좀 두꺼운 한 권에 다 정리되는 자먀친, 그리고 같은 오뎃사 출신의 유리 올레샤가 있다). 우리말 선집이 출간된다면, 좀더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A. 파제예프의 <궤멸>(1925-1926). 역시 내전 시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바벨의 <기병대>처럼 좀 삐딱한 시각의 작품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자인 수히흐 교수가 아마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궤멸>을 꼽은 듯하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궤멸>(예문출판사)은 아주 오래 전, 내가 대학 2학년 때인가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지금은 당연히 품절된 책이다. 작가 파제예프는 역시나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바벨과는 달리 소위 메인 스트림에 속해 있던 작가이며, 작가동맹의 의장인가 부의장을 역임한 문학권력자였다.

 

(7)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1926-1929). 요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연출가 레프 도진의 레퍼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도 재발견된 작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다(그러니까 러시아에서도 소개/해금된 건 내가 알기에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작가로 미하일 불가코프와 비교되기도 하는 플라토노프이지만, <체벤구르> <거장과 마르가리타>만큼 폭넓게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출판되는 걸 보아도 그렇고, 공연되는 걸 보아도 그렇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역시 우리말로 번역중이라는 풍문은 있다), 이 작가의 몇몇 단편들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돼 있는바 참조해 볼 수 있다(책세상에서 단편집이 나와 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포투단강>이란 단편. 철도노동자 출신의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히려 소비에트 권력층에 부담을 주었던 작가였으며(스탈린이 싫어했다던가), 한편으론 작품의 매우 형이상학적인/유토피아적인 주제들 때문에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린다.       

 

(8)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적인 이야기들>(1923-1930). 조셴코 혹은 조시첸코로 표기될 수 있는데,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단편모음집 이름이고, 장편소설(roman)을 쓰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굳이 어떤 한 작품을 거명하기는 어렵다. 플라토노프가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조셴코는 20세기의 고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말로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정식화하자면, <조셴코=고골+체홉>이다(이 세 작가를 사소한 것들의 시학으로 묶어서 다룬 연구서도 있다). 나는 단편 몇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되어도 좋은 작가이다. 거꾸로 말하면, 조셴코의 단편들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건 미스터리라 할 만하다.   

 

(9)블라지미르 나보코프의 <재능>(1937-1938). <재능> 혹은 <선물>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시절은 마감하는 장편소설이다(러시아어 다르Dar재능이란 뜻과 선물이란 뜻 모두를 갖고 있다. Gift란 영어 단어가 그렇듯이). 주인공이 시인으로서 성장해가는 자기발견적 이야기이면서 나보코프가 러시아문학의 전통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으로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시절을 마감하고 영어로 언어를 바꿔서 작품을 쓴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이다(원제는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이며,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전에 감상문을 쓴바 있다). 나보코프에 대해서는 작품을 읽지 않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선 간단히 줄이도록 한다.

 

우리에겐 <롤리타>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과 에드리안 라인에 의해 두 번 영화화됐다. 영어로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롤리타>를 비교하는 사전까지 나와있고), 그리고 간혹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계보에 속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그는 언어를 다루는 작가적 재능에 있어서 조이스 정도를 질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이스는 러시아어로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적어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작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텍스트의 유희/게임을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면 말이다. 나보코프의 문학세계는 진정으로 신적인 작가 나보코프에 의해서 자신을 작가로 착각하는 주인공들이 징벌받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대단히 유희적이지만, 포스트모던적 유희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까지 나온 나보코프의 전기로 가장 방대하며 탁월한 것은 브라이언 보이드의 영어본이다. 그는 나보코프의 삶과 문학을 러시아 시절미국 시절로 구분하여 두 권의 책으로 상술했는데, 얼마 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나왔다(여기서의 평가도 최고의 전기라는 것이다). 두툼한 양장본 2권의 가격이 4만원 안팎(나는 영어책을 복사했었다). 나보코프 애호가나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소설 가운데는 <마셴카>(<첫사랑>으로 번역됨), <루진의 방어>(단행본으론 나오지 않고 한 문예지에 소개됐었다) 등이 우리말로는 번역돼 있는데, <재능> 이외에도 <절망>, <단두대로의 초대> 등이 모두 번역될 만하다. 하지만, 저작권이 까다로운 작가이기 때문에(물론 번역도 까다롭다) 정말로 번역될지는 미심쩍다. 영어소설 가운데는 <롤리타> 외에도 <어둠 속의 웃음소리>(언젠가 오래 전에 TV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바 있다. <창밖엔 태양이 빛났다>란 제목이었던가. 기억에, 황인뢰 PD의 작품이었다), <투명한 물체들>, <, , >, <창백한 불꽃>, <아다> 등이 번역돼 있다. 전문가 수준이었던 그의 나비수집에 대한 얇은 책도 한 권 번역돼 나온바 있고. 물론 나보코프에 대한 학위논문들은 상당수에 이르며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도 있다.

 

러시아에는 물론 각종의 너무 많은 나보코프가 있다. 2개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돼 있다. 그 중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번역/주석(이 작품에 대한 주석으로는 러시아의 기호학자/문학연구자 유리 로트만의 것과 쌍벽을 이룬다)과 함께, 러시아어로는 3권으로 나온 문학강의가 기록해 둘 만하다(그는 <롤리타>의 인세 덕분에 팔자가 피기 전까지는 코넬대학 등지에서 문학선생 노릇을 했다. 미국 작가 토마스 핀천이 그의 강의를 들은바 있다). 3권은 각각 <러시아문학강의>, <서구문학강의>, <돈키호테에 대한 강의>이다. 나는 이 강의들도 우리말로 번역되길 바라지만, 가능할는지

 

(10)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1925-1940). 요즘은 대학에서의 러시아문학사 전공강의에서도 빠지는 수가 많지만(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교되기도 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당연히 영화화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 TV에서 시리즈로 나왔다). 나는 학부에서 20세기 문학사 강의를 들을 때 읽었는데, 우리말로는 7권으로 번역돼 나와 있었다(러시아어로는 보통 2). 지금은 품절이지만. 한 권짜리 만화로도 나와 있었고(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때 만화를 본 게 도움이 되었다). 수히흐 교수는 <고요한 돈강>을 다룬 장의 제목을 카자크 햄릿의 오딧세이라고 붙였는데,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 햄릿의 이름은 물론 주인공 그레고리이다.

 

숄로호프의 다른 작품으론 <인간의 운명>, <돈강 이야기> 등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 나는 읽지 않았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문학권력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요한 돈강>을 정말로 그가 썼는지에 대한 의혹들도 그래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반 부닌에 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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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국내출판 유감

『에릭 호퍼 자서전』에는 호퍼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외울 정도까지 탐독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호퍼가 그렇게까지 열광했다는 건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얼마 전에 박홍규 교수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를 출간하셨기에, 나중에 수상록과 함께 구입해서 읽어볼 요량으로 알라딘에서 '몽테뉴'로 검색을 했더니 비교적 최근 것으로 99년 혜원출판사, 96년 청목사에서 나온 수상록이 있다. 그런데 먼저 것은 324쪽, 나중 것은 430쪽에 불과했다. 호퍼는 자서전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이 엄청나게 두껍다고 설명했기에 뭔가 이상해 아마존에 가서 다시 검색을 해봤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검색된 수상록 원본은 1400쪽에 육박한다. 영어판이 폰트를 대략 30정도로 잡고 자간과 행간을 어린이 책 마냥 지나치게 늘리지 않았다면(당연한 얘기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제로다), 국내에서 출간된 수상록은 모두 요약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소규모 출판사로서는 1400쪽의 엄청난 분량을 번역, 편집해서 고가의 가격을 붙여 내놓을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출간했더라도 국내 독자층을 고려해 볼 때 얼마 팔지도 못했을 것이다(최근 승산출판사가 '파이만의 물리학 강의'를 내놓아 출판관계자와 독자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을 1/3, 1/4로 확 줄여서 출간해도 되는 걸까? 국내 요약본이 국내 출판사에서 편집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게 영어판 중에도 국내본과 비슷한 분량의 요약본이 몇 권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본도 아닌 요약본을 그대로 가져와서 번역만 한 것이다. 번역의 질은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김화영님, 이세욱님 말고는 제대로 된 프랑스어 번역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아무튼 나는 요약본 수상록은 청소년용 '토지'나 '장길산'처럼 불쾌하지 그지없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국내 출판은 거의가 외국서의 번역 일색이고(번역의 질은 둘째치고라도)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연구하고 투자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어떤 학자가 혼자 죽도록 연구해서 이룩한 결과물을 출판사 이름만 붙여서 출간하는 게 전부다. 우리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할 만한 기획물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국내 출판사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책 중에 호평을 받으며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책이 있는가? 원래 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건지, 도무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계에서 1년 동안 출간되는 수많은 책 중에 명저를 100권만 추려낸다고 했을 때 국내서가 그 안에 한 권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대답 못하겠다. 이게 국내 출판의 현실일 것이다. 세계 출판시장에 변방이 있다면 바로 우리 나라가 변방이다. 물론 내가 좋은 책 정성스레 번역해서 내놓는 출판사들의 노고를 폄훼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작업과 더불어 독자적인 출판 영역을 개척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변방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양자역학의 모험'이라는 책이 있다. 550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누가 썻는지 아는가? 일본 TCL이라는 단체에서 10주 동안 양자역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썼다. 이렇게 말하면 TCL이 물리학 단체인 줄 알겠지만, 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7개 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그럼 책의 질이 좀 떨어지지 않느냐고? 안타깝지만 국내에서 출간된 양자역학 관련 책들 중에 전공책을 제외하면 이 책보다 뛰어난 책은 없다. 이게 바로 일본과 우리의 차이이다. 하늘과 땅이 아닐 수 없다. 정보화 시대, 인터넷 시대 하는 말들이 많지만 제대로 된 책이 없는 나라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결코. 제대로 된 책을 내려면 우선 요약본 수상록 같은 책은 아예 만들 생각을 말아야 하고, 독자들도 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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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

천지왕(2)
부도덕한 인간(人間)과 권위의 신(神) 싸움

천지가 생겨나고 인간들이 일어섰으나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생과 사도 제대로 구분이 안됐으며 짐승과 나무잎들도 말을 했고 귀신이 말을 하면 사람이 대답하고 사람이 불러도 귀신이 대답하던 시절이었다.
땅에는 천하거부로 잘 사는 「쉬멩이」라는 자가 있었다.
욕심많고 방자한 쉬멩이는 하늘을 향하여서도 『나를 이길 자 누가 있으랴』하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
쉬멩이는 아버지가 60세를 나는 해부터 하루에 한 끼밖에 대접하지 않았다.
『웬일로 하루에 한 끼밖에 주지 않느냐』
『사람은 한 대가 설흔인데 아버지는 금년으로 예슨 두해째를 사니 너무 많이 살았습니다. 죽어 삼년상에 제사 명절 안 지내도 좋으면 대접을 잘 하겠습니다』
그래서 쉬멩이 아버지는 죽은 후 대접을 안 받기로 하고 산 때 대접을 잘 받고 죽었다.
쉬멩이는 장래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아버지를 바다에 띄워 보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이었다.
명절을 맞은 저승의 귀신들은 제사를 받아먹기 위해 모두 이승으로 올라갔는데 쉬멩이 아버지만 혼자 어둠 속에 앉아 흐느껴 울었다.
『어데서 옥퉁소를 부는 소리가 들리느냐』 괴이하게 여긴 저승대왕이 물었더니 쉬멩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래도 명절때는 그러는 법이 아니라고 타이르고 올려보냈으나 쉬멩이 아버지는 물한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를 전해 듣고 노한 천지왕은 쉬멩이를 잡아오라고 군졸들을 보냈다.
그러나 군졸들은 쉬멩이의 집을 지키는 개·말·소따위에 쫓겨 문전에도 못 가보고 돌아왔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천지왕은 쉬멩이를 처벌하기 위해 벽력같이 달려 내려왔다.
그러나 집어귀에 당도하자마자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달려들어 물려는 개들이 있는가 하면 말들은 발길질을 하고 소들은 뿔로 받으려 했다.
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천지왕은 올래밖 멀구슬나무 가지 위에 올라 앉아 군사들에게 열두가지 흉험을 내리도록 했다.
쉬멩이집 부엌에는 갑자기 개미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쉬멩이는 놀라지 않았다.
느진덕 정하님[여자 하인]이 『솥앞으로 개미가 기어 다닙니다』하고 말했다.
『거 뭐 대수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집이 폐가가 된 듯 습기가 차고 「용달」버섯이 무수히 생겨났다.
『솥뒤에 용달버섯이 났습니다』
『허허 반찬이 떨어져 가니 초기대신 용달이 나는구나. 반찬으로 볶아라』
쉬멩이 기세가 죽지를 않으니 천지왕은 솥이 걸어다니게 했다.
『큰 솥이 밖에 나가 엉기덩기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부잣집에서 매일 불을 때 놓으니 더위 먹어 식히러 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니 천지왕은 가축들이 미쳐 날뛰게 했다.
『황소가 지붕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부잣집에서 잘 먹이니 힘이 넘치는 모양이구나』
아무리 흉험을 내려봐도 끄덕을 않으니 천지왕은 급기야 쉬멩이의 머리에 쇠철망을 내리 씌워 버렸다.
머리가 깨지도록 아픈 쉬멩이는 아들들에게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감히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종년을 불러 명령을 하니 종년은 차마 주인의 머리를 찍지는 못하고 옆에 있는 대문 지방을 덜커덕 내리찍었다.
도끼를 찍는 서슬에 놀란 천지왕은 엉겁결에 쇠철망을 거두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천지왕은 화덕진군(火德鎭君) 해명이를 불렀다.
해명이는 사람의 모양으로 변장하고 쉬멩이집으로 가서 『곡식과 옷을 준비하여 한 일년 밖에서 생활할 각오로 바람위로 피난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쉬멩이는 『대궐같은 집을 버리고 어데로 나간단 말이요』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칠대도록 쌓은 재산을 모두 거두어 가겠다. 불여막심한 죄를 단 한번에 깨닿게 하겠다』
해명이가 집지붕 네 귀퉁이에서 새 한줌씩을 빼어 천지왕에게로 가니 천지왕은 바람을 일으켜 집에 불을 질렀다.
궁궐같은 집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뒤늦게 후회를 한 쉬멩이는 박우왕의 집에 가서 빈 방을 빌려달라고 애걸을 했으나 박우왕은 『실화(失火)한 사람에게는 방을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한 쉬멩이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우리는 이제 다 살았구나』하고 통곡을 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천지왕이 나타나 『앞으로 부모 제사날이 오면 경건하게 지내시오. 가난한 사람에게 밭을 빌려주면 병작을 하시오. 죽은 곡식을 빌려주고 받을 때는 여문 곡식으로 받지 마시오. 금전을 타인에게 빌려주어도 이자를 너무 많이 받지 마시오. 노인을 존중하고 아들 칠형제를 잘 가르치시오. 일생을 타인게 부드럽게 대하고 마음씨를 곱게 먹으면 후손들도 안락하게 될 것이요. 나는 천지왕이니 잘 기억하시오』하고 말했다.
천지왕은 하늘로 올라가고 쉬멩이는 천지왕이 지시한 말을 잘 따르니 다시 부자가 되어 오래도록 살았다.


◇그림=김재경(서양화가)
미니해설
인간에 대한 신(神)들의 권위획득ㆍㆍㆍ 지상(地上)에 도덕률 세워

천지창조의 이야기는 세상에 아직 권위를 못 세운 신들과 비도덕적이고 욕심이 많은 인간과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신들은 자신의 권위를 획득하고 세상에 도덕률을 세우기 위해 패륜아 「쉬멩이(壽命長者)」를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쉬멩이의 죄는 채록본에 따라 세가지로 나타난다.
어떤 본에서는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본에서는 천지왕에게 식사를 대접할 쌀에 모래를 섞어 빌려줬다는 것.
또 다른 본에서는 『이 세상에 날 잡아갈 이 있느냐』고 할 정도의 호언으로 신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것이었다.
쉬멩이의 잘못은 신화의 구도상 신이 인간세계에 개입하기 위한 빌미를 주고 있으며 이를 징치한다는 구실로 신은 인간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은 지상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도덕률이 확립된다.
천지왕은 쉬멩이에게 신의 존제를 인식시키기 위해 열두가지 흉험을 준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부엌에 개미가 꼬인다」는 징조는 제주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나쁜 징조중 하나이다.
두번째의 용달버섯은 습기가 많이 차고 썩은 곳에 자라는 식물로 폐가가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징후에도 불구하고 쉬멩이가 각성을 하지 않자 천지왕은 쉬멩이집에 큰 솥이 걸어다니는 흉험까지 준다.
끝내 쉬멩이가 반성을 하지 않자 파멸시킬수 밖에 없어지는데 바람과 불을 이용하여 처벌한다.
채록본에 따라서는 천지왕이 벼락장군·우뢰장군을 불러서, 즉 벼락을 치고 불을 붙여서 처벌하고 쉬멩이의 가족들은 벌레가 돼 버린다는 얘기도 있다.
또 다른 본에서는 쉬멩이 하인의 기지로 쇠철망이 벗겨져 신이 결국 처벌을 하지 못하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을 연상케 하는 이 사건의 목적은 인간들이 신을 두려워하고 경배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아 여기서는 신의 처벌을 받은 다음 각성하여 순화된다는 내용의 「풍속무음」상의 줄거리를 따랐다.
마음이 착해진 쉬멩이는 그후 3천8백년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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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헌재의 권위는 누가 지켜주는가-다리미

1. 이번 헌법재판소의 인용(위헌)결정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유방임주의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적극적인 정부개입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초초초 극보수 성향의 미국 대법원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습니다.  정부개입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헌법재판소가 없고, 대법원이 법률의 위헌심사권을 가집니다.) 이에 당하고 당한 행정부 쪽이 사법부에 대해서 초강경 대책을 준비하자, 화들짝 놀란 사법부가 그때부터 고개를 숙이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1937년인데, 그 이전의 꼴보수 사법적극주의 시절의 법원을 old court라고 부르고, 그 이후의 상대적 진보입장의 사법소극주의 법원을 new court라고 부릅니다.  (진보, 보수의 입장과 사법적극,소극주의는 크게 관련은 없습니다.  서로간에 상대적으로 결정될 문제입니다.)
 
이번 헌재의 인용결정도 대공황시기의 꼴보수 미국 대법원과 꼭 닮아 있습니다.  사법적극주의 중에서도 초초강경 사법적극주의로 기록에 남을 것입니다.  정부 추정 50조 관련예산 100조가 넘고, 시행기간만 20년이 넘을 것이라는 국가정책에 대해서, 국회 3분의 2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통과한.. 그 법률안에 대해서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리다니...  그것도 관습헌법이라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헌법논리를 들고 나와서 말입니다.
 
사법적극주의가 옳으나, 사법소극주의가 옳으냐는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둘다 일장일단이 있고, 서로간에 적절히 보완해서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느쪽 입장을 지지하건 간에,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법적극주의의 한계는 "권력분립"입니다.  사법부는 특히 입법작용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권력을 남용할 경우, 이는 사법부가 직접 법률을 제정하는 수준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성문법을 우선시하는 해석을 해야 합니다. 법조문만 들고파는 법조인들을 답답하게 여기지만, 함부로 법조문을 무시할 경우 이는 입법권을 침해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깐깐하고 보수적인 태도는 칭찬받을 점도 있습니다.
 
사법소극주의의 한계는 "국민의 기본권"입니다.  명백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률에 대해서 침묵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할때, 이는 사법소극주의의 한계일탈입니다.  이제 곧 역사적 산물이 될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면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이를 행사해온 법원은 이런 의미에서 또한 사법소극주의의 한계 일탈로 그 권력적 임무를 방기해 온 것입니다.
 
이번 헌재 판결은, 사법적극주의의 한계일탈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극단적 방법으로 입법권을 침해하였습니다.  이번 헌재판결에서 위헌 이유로 제시한 것이 바로, "관습헌법의 존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법원이 법률제정권을 침해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헌법제정권까지 행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헌법재판소에 관습헌법권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습니까?  어느 누가 수도서울이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것이 관습헌법적 사항이라고 규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법률의 위헌판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할 가치도 아까 제시한 두가지입니다.  바로 권력분립과 기본권 보장입니다.  헌법재판소는 권력분립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하면서 법률의 위헌성을 판단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헌재나 법원이 법률의 위헌판단권이 아닌 법률제정권까지 가지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함 때문입니다.  기본권 보장은 다른 편의 가치기준입니다.  아무리 입법권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명백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판단이 나올 경우, 이를 더이상 존중해 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그 두가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양쪽에서 한꺼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입법권 정도가 아니라 헌법개정권력에 대한 무지막지한 침해를 통해서 스스로 관습헌법 제정권을 부여받고, 이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국민투표권을 혼자 상정하여 실질적인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처사입니다.  아, 한번의 판결로 두가지 가치를 이렇게 철저히 박살내는 판결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주 오랫동안 역사에서 기록될 것입니다.
 
2. 헌법재판소의 정당성 확보.
 
헌법재판소의 정당성확보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첫째로 헌법재판소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구성은 9인의 재판관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9인의 재판관 중 누구도 국민의 투표 등을 통한 직접적인 의사개입이 없습니다.  3인은 행정부(대통령), 3인은 국회, 3인은 대법원에서 지명을 하고, 형식적으로 9인 모두를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이처럼 그 임명방식이 투표를 통한 선거방식을 거치지 않은 경우,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진다고 표현을 합니다.  아무리 헌재의 권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는 결국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음으로서 간접적으로만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대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선출방식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다른 국가기관(대통령, 국회)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법원이 그 권력적 기반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다른 권력기관의 자발적 동의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특히 헌법재판소는 집행력이 없습니다. 법원의 경우.  판결문이 나오면, 이걸 가지고 사람을 감옥에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집달관을 시켜서 압류를 해버릴 수도 있고, 물건을 경매에 붙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당장 어떤 법률을 위헌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가 막무가내로 시행을 한다손 치더라도, 헌재는 이를 막을 실질적인 힘이 없습니다.  (헌재에 군대나 경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달관이 있는 것도 아니까요.) 
그러나, 이런 사태가 정말로 발생한다면 국가의 권력적 기반이 정당성을 몽땅 잃어버리는 사태가 될 것이므로 이는 최대한 자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행력이 없는 헌법재판소가 자기정당성을 확보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방법에 의해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위헌판결이 난 법률안을 강행하는 행정부가 있다면 국민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민주주의적 공감대가 있을 때에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오늘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바로 지난 10여년간 헌법재판소가 쌓아온 자기정당성을 자기손으로 박살내는 일입니다. 
 
도대체 누가 헌법재판소에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까?  대통령 선거공약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 국민들이 이를 동의하여서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승인하였고,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하여서 또한 민의를 대변한 바로 이 사안에 대하여, 그 두가지 민주적 정당성을 한방에 깨어버릴 만한 힘이 헌재에 과연 있는 것입니까?   대통령 선거와 국회에서의 승인, 더 나아가 총선에서 다시한번 행정수도 이전을 내건 정당을 원내다수당으로 뽑아준, 이 국민적 의사를 이렇게 개무시할 수 있는 정당성이 헌재에 있는 것입니까?  이는 민주주의 위반입니다.  이제 헌재는 반민주주의적 집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지난 10여년간 헌재가 스스로 쌓아온 그 민주적 정당성을 스스로 부수었습니다.
 
이번 헌재결정문에 대해서, 도대체 어떻게 일반국민들이 이를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관습헌법이라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론을 끌고 들어와서 위헌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에 대해서 누가 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겠습니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는 재판부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헌재의 권위는 법전에다가, 헌재의 권위를 존중해 주세요~ 제발요~ 라고 적어 둔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헌재 스스로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항해 싸워 줄때, 국민들이 이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저부터도 헌재의 판결문에 대해서 싸늘한 냉소를 보낼 터입니다.  이렇게 식어버린 헌재에 대한 기대를 어떻게 회복하실 것입니까? 
 
사법부의 독립은 사법부 혼자 독립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독립시켜 주는 것입니다.  정파적 이해에 복속되지 않고, 헌법과 법률과 자신의 직무적 양심에 기대어 소신있는 판결을 하고, 이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줄 때, 바로 그 때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법부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판결처럼 그 스스로 헌법제정권자임을 선언하면서 거드름을 떨며, 정파적 이해에 휘말려 헌법을 무시하면서 반민주주의적 판결문을 써 내릴때!!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이렇게 당신들에게 냉소보낸다 할때, 당신은 나의 태도에 대해 또다시 위헌이다~ 하고 호들갑을 떠시겠습니까?  우리는 주권자이며, 헌법제정권자이며, 이나라의 주인입니다.  우리의 기본권을 위해 당신들이 존재하는 것.  우리의 권력을 위해 모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존재하는 것.  이것을 망각하는 국가기관에게 던져줄 동정의 권위는 없습니다.
 
오늘의 냉소는 내일의 분노가 될 것입니다.  주권자가 왜 주권자인가는 역사적 경험이 말하는 것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요.  저 낡은 건물안에 쳐박혀 옹알거리는 헌법재판소 판관 나으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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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2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숨어계신 님, 이렇게 좋은 자료를 그렇게 살짝 저에게만 보이도록 숨겨놓으시면
제가 미안하죠.^^ 제가 공개적으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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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는 읽었어요~하하하(우쭐, 해도 되는 건가?)
혹시『시네 퐁주』(민음사, 1998)는 번역에 문제가 많나요?(문제가 많으면 좋겠다-_-) 제가 퐁주를 좋아해서 예전에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장렬히 전사한 적이 있어서...

에레혼 2004-10-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를 추모할 권리는 하나도 없지만...ㅠㅠ
그래도 데리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오래 전부터 그의 저명한 이름만 알고 정작 그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과 추모의 마음을 가졌었지요

이 글, 찬찬이 읽고 님이 추천한 입문서부터 하나씩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제 방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봐도 될까요?

balmas님, 첫인사를 이렇게 드리네요

2004-10-2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퍼가기 미안해서....

3910033

어느새 1만이 넘으셨네요.


biosculp 2004-10-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인데요. 철학을 전공한분인 강유원님의 사이트에서 이런글을 쓰셨더군요.

언젠가 데리다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학생이 있었다.
초록 발표회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데리다를 학적 연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까. 요즘
프랑스에서 나온 것들은 일견 에쎄이 수준 아닌가."

"프랑스가 수필의 전통이 깊지 않습니까"

"하긴 빠스칼부터..."

"에쎄이"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이들을 보면
꽤 오래 전의 이 대화가 떠오르곤 한다.

이 분은 헤겔로 학위하셨던데 독일과 프랑스의 학풍이 다른것인지. 독일철학자들을 전공하신분들은 요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사시눈을 뜨는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balmas 2004-10-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biosculp님, 제가 그런 말에 대해 굳이 논평을 해야합니까?^^
'철학 동네'에 있다 보면 그 정도 이야기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데,
대개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하는 이야기들이니 거기에 정색 하고 나서서
뭐라고 대꾸한다는 게 그렇죠.
더욱이 제가 직접 듣거나 본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다가
강유원 씨는 이름은 여러번 들어봤지만 글은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가타부타 함부로 말하기가 무엇하군요.
말씀하는 걸 보니 강유원 씨는 헤겔로 박사논문을 쓰고
아마 프랑스 철학사까지 꿰뚫고 계신 분 같은데,
직접 가셔서 궁금한 점을 여쭤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balmas 2004-10-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에게만 말씀하신 분께는, 좋은 점을 지적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데리다에게 관한 제 (독자적인) 견해를 물으셨는데, 아직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 할 만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데리다를 잘 알고 있는 처지도 아닌 데다가,
데리다는 일단 좀더 정확히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그나마 갖고 있는
약간의 견해도 아껴두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우선 읽을 만한 주요 저서들이 네댓 권은 되어야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입니다.
어쨌든 님 덕분에, 앞으로 데리다에 대한 제 견해를 세워봐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네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좀 많이 해주세요.

balmas 2004-10-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자명한 산책님과 라일락와인님, 가을산님께 답글다는 걸 잊어버렸군요.
자명한 산책님, 저도 [시네 퐁주] 번역본은 조금 읽어보다가 말았는데, 번역이 별로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군요. 이 책 자체가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워낙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책입니다. 좀 위안이 되셨나요?^^
라일락와인님은 처음 뵙는군요.
퍼가신다면 저야 고마울 따름이죠, 뭐.^^
앞으로 종종 뵙기를 ...
가을산님, 글쎄 어느덧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어버렸네요. 1만회에서 이벤트를 하나 할까
했는데, 요즘 경황이 없다 보니, 좀 미뤄야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캡처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2004-10-22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나나 2004-10-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이었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balmas님께서 나중에 꼭 좋은 데리다 연구서를 하나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라는 분의 이야기는 그분의 뛰어난 학식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더 황당하네요. 그분과 대화를 직접 나누어 보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balmas님의 데리다 해설은 초기 저작 부터 후기의 윤리 정치적 저작까지 다 포괄적으로 그 핵심을 설명해주고 있어 앞으로의 balmas님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번역 글 부탁드립니다.

2004-10-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어계신 분이 또 한 분 오셨군요.^^
[글쓰기와 차이](동문선)은 [불량배들]보다는 낫지만 같은 동문선에서 얼마 전에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보다는 못한 수준입니다. 답답하겠지만 원서나 영역본 같은 책을 놓고 같이 읽는다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목소리와 현상]은, 한 달여 전에 [단상들]에서 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에 유학중인 제 후배가 지금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다 끝나서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 중이니까 내년 중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읽기 쉽게 써놓은 책이지만, 논변이 좀 단순하고 느슨한 편이죠. 그러니 이런 책을 굳이 번역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도 충분히 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데리다에 관한 해설서를 번역한다면, 그 책보다 훨씬 좋은 책들이 더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번역해야죠. 제 생각에는 Geoffrey Bennington과 Derrida가 공저한 [Jacques Derrida]야말로,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데리다 해설서는 당분간은 지금 나온 몇 권의 책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먼저 번역되(고 개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나나나님은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가쉐 교수에게 배우고 계신다구요? 가쉐 교수에게는 모든 데리다 연구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죠. 언젠가 사진으로 봤더니, 백발의 수염이 덥수룩한 게 도인같은 풍모를 풍겨서 좀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가쉐 교수처럼 세련된 글을 쓰는 양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이야 ...^^
격려의 말씀은, 앞으로 번역을 좀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알겠습니다. 아야!
ㅋㅋ

딸기 2004-10-2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허락도 없이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ttalgi21.com)에 퍼갔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데리다의 ㄷ의 한 획도 모르는 제가 '테러시대의 철학'을 서평이랍시고 써서 발마스님께 보인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자판을 두드리는 저의 손을 덜덜거리게 만드는군요.

balmas 2004-10-24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허락도 안받고 옮기시면 안되는데 ...

딸기 2004-10-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안 되는 거였나요?
그럼... 원고료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엔화 결제도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 카드...
...크리스마스 때 카드 보내드릴께요...

허락없이 퍼가놓고 농담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퍼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얘기해주세요. 지울께요.

balmas 2004-10-2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 퍼가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지만, 굳이 원고료를 주시겠다면 사양하진 않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