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P? 우린 '국민총행복'을 믿는다

작은 왕국 부탄의 의미있는 정책, 그리고 자존심

 

지오리포트 <georeport@georeport.net>
          
GNP 몇 만 달러, 국가경쟁력 세계 몇 위,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 세계가 각종 지표와 산술로 국가간 서열을 매기기에 분주한 사이,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당신들은 행복한가요?"
최근 러시아 언론 <엔떼베(NTV)>는 '국민총생산을 국민총행복으로 바꾼 나라(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행복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번역기사)'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부탄이 '국민총행복'이란 지수를 토대로, 공동체의 '진정한 삶'을 꾸려가려는 의미있는 '실험'을 다루고 있다. 부탄은 왜 GNP란 지수를 버렸을까? 기사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편집자>



▲ 부탄 어린이들의 해맑은 미소.
출처 www.newsru.com  
아시아의 한 작은 왕국, 부탄은 GNP(Gross National Product,국민총생산)라는 지수를 쓰지 않는다.

국민총생산보다 이 나라에 더 적합한 지수를 부탄은 도입했다. 바로 'GNH(Gross National Happiness,국민 총 행복)'이다.

5년전 타쉬 반기얄씨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캐임브리지 대학 철학 석사학위, 예쁜 여자 친구, 런던 컨설팅 회사의 스카우트 제안까지. 그러나 반기얄은 세상과 동떨어진 부탄에서 120달러를 받는 직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반기얄씨의 대학 동기들, 특히 외국에서 고소득의 직장을 찾는 것이 꿈인 인도나 네팔 친구들은 이 부탄 친구의 결정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반기얄씨가, 다른 부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추구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행복이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행을 많이 하고 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그럴수록 우리나라에 있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라고 반기얄씨는 말한다.

부탄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지만 해외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 거의 전부가 고국으로 되돌아 온다. 이유는 한가지다. 부탄의 정부는 국민보건, 교육, 환경 개선에 힘쓸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부탄의 정부는 '일반적인 발전'의 지표가 되는 국민총생산을 새로운 모델인 '국민총행복'으로 대체해 전 세계의 경제 연구소, 연구자들로부터 이목을 끌었다. '국민총행복'의 개념을 규정하기는 물론 어렵지만 부탄에서는 자연자원의 보호부터 민족문화의 선전, 민주적 행정 체제까지 국민 행복에 밑받침이 되는 모든 것들을 '국민총행복'에 포함시키고 있다.

"부탄은 행복을 국가의 발전 전략으로 세우는 매우 드문 나라입니다. 어쩌면 유일한 나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탄 사람들은 장기간의 사회적 건강을 위해서 눈앞의 이익을 희생합니다."
삶의 질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애틀랜틱 GPI의 회장인 론 콜먼씨의 말이다.

물론 포괄적인 충족감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복리만으로 '복지'를 평가하는 것에 의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부탄만은 아니다.

국제 사회과학자 그룹 '세계 가치 조사'는 지난해 세계 각국을 행복의 순위로 매긴 바있다. 여러 가치와 믿음이 한 나라의 정치, 사회에 반영되는 정도를 여러 질문을 통해서 분석한 이 연구에 따르면, 행복한 나라 1위로 나이지리아가 꼽혔다. 미국은 16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일리노이대의 애드 다이너 심리학 교수에게 국민 복지 지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텔레비전의 한 구석에서 다우 존스의 지수와 함께 보여질 수 있는 지수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지난 18년 동안 행복과 복지의 관계를 연구해 온 다이너 교수는 사회가 일정 정도의 복지 수준에 도달하면 수입은 더 이상 삶의 만족감을 주는 지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정신 건강은 통장 잔고 등보다는 인간 관계, 작업의 만족도, 끊임없이 할 일이 있다는 것, 인권, 민주적인 제도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신적 복지는 부탄의 국왕 드룩 기얄로 지그메 싱기예 왕축이 1972년 왕위에 오른 이후 신민들을 위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다이너 교수와 마찬가지로 국왕은 국민총생산의 대체 지수를 오랫동안 탐색해 왔다.

국왕은 국내총생산이 한나라의 진정한 부와 큰 관계가 없으며, 진정한 지도자란 물질적 복지뿐 아니라 정신적 만족감을 키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총행복'의 개념이 부탄에서 공식적으로 다듬어진 것은 지난 1998년의 일이다. 그때 국왕은 국무총리인 리온포 쥐그미 틴리에게 '행복의 네 기둥' 이라는 정부의 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 네 기둥이란 안정적인 경제 발전, 자연 환경의 보호, 민족 문화의 증진과 좋은 통치를 일컫는다. 틴리 총리는 이 네 기둥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과 성공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우선 총 인구수가 828,000명인 작은 왕국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한다. 이 개혁의 구도에 의하면 보건, 교육, 사회 경제 분야의 서비스가 다른 분야보다 우선시된다. 이 목적에 따라 국가 예산의 25퍼센트 이상이 병원과 학교에 배분되었다.

두번째 기둥인 자연 환경의 보호 역시 국가 성장 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탄은 외국 자본에 문을 활짝 열거나 천연 광물들을 팔아 넘기지 않는다. 비가공 원목의 수출을 금하고 입국 관광객 수를 연 6천 명으로 제한함으로써 투자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됐지만 자연 환경은 천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다.

세번째 기둥인 문화 지원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 국민이 종교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 이 계획의 하나다.

마지막 기둥은 좋은 통치이다. 1998년 국왕은 민주주의를 가속화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권한을 제한했다. 현재 국무회의는 선거로 선출되며 국왕은 행정부의 권력을 각 부처에 안배했다.

국왕은 틴리 총리에게 행복 창조의 전략 뿐 아니라 국민총행복의 개념을 다른 국가들에도 널리 알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리에게는 버거운 주문이었다.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도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대체 이 개념을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라고 틴리 총리는 회상한다.

그러나 전 세계는 행복에 굶주려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틴리 총리는 1998년 서울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의 발언을 비롯, 전 세계를 향하여 국민총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탄이 유토피아 인것만은 아니다. 5년전 부탄에는 최초의 정신과 의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인 첸초 도르쥐씨는 "신경 불안 증세를 보이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한다. 꾸준한 일자리 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건 상태의 개선으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요.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와 첨단 기술들도 최근 들어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은 1998년 처음 시청이 가능하게 됐고 작년에는 이동 통신 전화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가 물질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됐습니다"라고 도르쥐씨는 말한다.

스트레스와 알코올 중독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부탄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부탄 사람들이 정말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하냐고. 대답은 한가지, '그렇다' 이다.

종교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텔레비전과 이동전화 등 세속적인 삶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탄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 교리를 듣기 위해 불교 사원을 찾는 사람들은 전에 없이 늘어나고 있다.

부탄이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덫은 있다. 세계 은행의 한 관리 엔리케 판토야 씨는 "한 국가로서 부탄의 성장은 부탄의 정체성에 기반합니다. 만약 부탄에서와 같이 진지한 철학, 성장에 대한 확고한 생각들이 없다면 다른 나라들이 부탄과 경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라고 주장한다.

반기얄씨의 월급은 정부 관리의 평균 월급과 맞먹는다. 그러나 반기얄씨가 기쁜 이유는 그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무부 분석가인 반기얄씨는 좋은 통치, 정치 개혁, 무상 의료 서비스와 무상 교육이 있는 한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는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부탄은 어린 아이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는 사실이다. 소꿉친구 데첸 방모씨와 결혼한 반기얄씨는 세살 된 딸을 두고 있으며 직장에 오래 있으면 집 생각이 자꾸 난다고 말한다.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경력을 쌓느라 바쁘죠. 부탄에서는 공동의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도와줍니다."

부탄에서도 부족한 것은 있다. 해외 여행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과 자동차를 살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반기얄씨의 자산 중에서 가장 값비싼 물건은 300달러짜리 산악 자전거이다. 그는 매일 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또 한가지 모자라는 것이 있다.

"여기는 스타벅스 커피가 없어요, 정말 마시고 싶어요." <번역 이혜승>

200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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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0-1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서두름에는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김광수 <afrikaans@netsgo.com>
          
▲ 나무 아래 내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프리카인. 그에게는 시간도 정지돼 있는 듯하다.
출처 www.allafrica.co.kr  
아프리카에서 현지인들과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약속을 하면 제시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만난 외국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인들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특히 시골지역으로 가면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아프리카인들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보다는 ‘해시계’와 ‘달시계’를 신뢰한다. 그리고 토막 난 시간들보다 ‘동 트고, 해 지는’ 하루라는 '묶음'을 더 중요시한다.

아프리카인들에 대해, 정말 시간개념이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약속시간 도대체 언제인데!", "빨리 하자!"라며 따지고 재촉하면,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웃음 짓는다.

그러고는 점잖게 한마디를 던진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haina baraka).”

‘서두름에는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말을 하면서, 귀가 빨개질 정도로 화가 치민 상대방에게 오히려 한 수 가르친다. ‘오늘 못한 일이 있으면, 내일 하면 되지’...‘인생을 왜 그리 팍팍하게 살아가느냐‘며.

그 말 뒤에 흔히 덧붙이는 또 한마디. “폴레 폴레 은디오 무웬도(Pole Pole ndio mwendo).” ‘천천히 해도 결국은 간다’는 말이다.

되레 측은하게 바라보며 던지는 그 말 앞에서,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묘한 ‘최면’에 걸린 듯한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때론 아프리카어를 아는 외국인이 단어 하나를 살짝 바꿔 반박할 때가 있다.
“하라카 하라카 ‘이나’ 바라카(Haraka haraka ina baraka, 서두름 속에 축복이 있다)”라고. 그럴라치면, 아프리카인의 눈동자에는 또 다시 ‘연민’이 스친다. ‘거참, 딱한 사람이로고...’

서구인들이 ‘시간을 지킨’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때를 맞아들인’다

▲ 사람도 말도 한가롭게 보이는 풍경.
출처 www.allafrica.co.kr  
아프리카의 시간개념에는 서구사회의 시계와 전통사회의 시계가 혼재한다. 정확한 시간 개념을 추구하기 보다는 상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늦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가기는 간다’라는 말에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철학이 함축돼있다.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 ‘늦다’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외국인이라면, 우선 그 사고방식부터 존중하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화만 내고 다닐테니까.

물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리고 공공기관 그리고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비교적 시간이 잘 지켜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인관계 속에서는 시간과 약속에 대해 관대한 정서가 큰 흐름이다.

이 같은 정서에 대한 외국인의 거부감은 자칫 인종차별적인 생각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에게 ‘함께 어우러질 사람’으로 인식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아프리카인들로부터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훌륭한 비즈니스를 하고자 한다면 공식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비공식적 관계도 그에 못지않다. 특히 공동체의식과, 개인이 맺는 ‘관계’를 중시하는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비공식적 관계가 일을 아주 쉽게 풀어가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방법은 그리 힘든 게 아니다. 아프리카인들의 삶의 철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인들의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단선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낯설다.

서구적 시각에서 시간은 생산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24시간의 시간은 생산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쪼개고 또 쪼개서 효율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늘 어떤 목적을 갖게 된다. 그러기에 '시간의 노예'라는 자조마저 나오지 않던가. 하지만 아프리카인에게 시간은 고무줄과도 같다. 자신의 주관으로 늘였다가 줄였다가 하는 것이다.

24시간, 그리고 시, 분, 초는 그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시간은 ‘인위적 변화’와 ‘목적 달성’을 위한 준거 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누군가와 어울려, ‘그냥’ 보낸 시간은 왠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서구인들이, 또는 현대인들이 시간을 '지킨’다면, 아프리카인들은 ‘때를 맞아들인’다. 동 트면 아침을 맞아들이고, 해 지면 저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만날 사람이 있으면, 그가 있는 곳으로 길을 나서는 것이다. 딱히 ‘몇 시까지’랄 것 없이.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개념은 자연현상을 중시하고, ‘사람’을 모든 활동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철학적 종교적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거스르고 거부하며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의 대척점에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을 대하는 입장이 어떤 게 온당한지 단정 짓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때때로 떠올려 봄 직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삶 속에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우리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것일까?

200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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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어릴 땐 우리도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를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했잖나요? 그런 거 보면 우리는 참 모범생들이에요^^

balmas 2004-10-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시간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요?

로드무비 2004-10-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갑니다.^^

urblue 2004-10-1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속 시간 지키지 않는 친구들에게 무진장 화를 내곤 했습니다만, 어느 순간엔가, 그럴 것 까지 또 뭐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가끔, 어린 시절 지나치게 잘(!) 교육받은게 문제라고 느낍니다.

chika 2004-10-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시계가 없는 나라'라는 책 소개를 보고 그 책 읽어볼까, 싶었는데 말이지요. ^^

balmas 2004-10-1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모두 아프리카인들에 감명받으신 듯.^^

딸기 2004-11-0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결국 세계관의 반영인가봅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이라크전쟁 말입니다. 그 전쟁과 관련된 저의 사적인 어떤 경험 때문에, 저는 미국의 가장 큰 폭력은 이라크인들에게 자신들의 시간관념을 박아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아프리카인들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분명 다르죠. 어느 한 쪽을 칭찬하고픈 마음은 없고, 저는 아프리카인들을 동경하지도 않고, 그들의 시간에 특별히 감명받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다이내믹함, 냄비근성, 저는 이런 걸 아주아주 좋아하거든요. 즐겁고 재밌자나요. 너무 바쁘게 사는 것이 행복을 갉아먹을 수도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의 시간이 더 살만하다 이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들의 문화에서 이어져내려온 시간 개념을 지키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200년 카우보이들이 7000년 이라크 문명에 자기네식 시간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이라크인들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 못잖은 폭력이지요.
 

지난 10월 10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에 Jonathan Kandell이라는 자유기고가가 쓴 데리다 부고기사가 실렸습니다. [난해한 이론가 데리다, 74세로 사망 Jacques Derrida, Aastruse Theorist, Dies at 74]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공정한 정론지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뉴욕 타임즈]의 위상에 전혀 걸맞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이 필자는 철학에 거의 문외한인 데다가 데리다를 싫어하는 미국 우파 지식인들의 편견을 공유하는 인물이어서,  글 전체가 비아냥과 조롱투의 문장들로 가득차 있더군요. 이런 글을 부고기사로 실은 신문도 문제거니와, 저명한 인물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간에 방금 사망한 사람을 위한 기사에 그런 류의 내용을 실은 기고자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군요. 미국의 저명한 지식인들, 대학교수들, 작가들, 영화제작자들, 대학원생들이 이 부고기사에 반대하여 항의 사이트를 만들고, [뉴욕 타임즈]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는 듯합니다.  영국에서도 테리 이글턴이 [가디언]에 데리다 사망 이후 촉발된 영국의 일부 지식인들의 "속물적이고" "얼빠진" 반응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군요.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시면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원래의 부고기사와 이 기사에 항의하는 사이트 및 항의 서명자들 명단, 테리 이글턴의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즈] 부고기사

http://www.nytimes.com/2004/10/10/obituaries/10derrida.html?ex=1098072000&en=185f90b5481cdce6&ei=5006&partner=ALTAVISTA1

항의 사이트

http://www.humanities.uci.edu/remembering_jd/

 

테리 이글턴의 기사

http://education.guardian.co.uk/higher/artsandhumanities/story/0,12241,1327932,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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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딸기 2004-11-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네요. 뉴욕타임스 부고기사는 굉장히 수준이 높은데, 유독 데리다의 부고에서 그런 일이 빚어졌다니요. 저는 뉴욕타임스 부고기사를 예전에 꼼꼼히 봤었는데, 뉴욕타임스는 다른 것도 다 수준 높지만 과학기사하고 부고기사가 특히 빛났었거든요. 우째 저런 일이.
 


 

데리다에 대한 언급들

자끄 데리다가 2004년 10월 10일 타계하였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휴머니스트이자 차연이라는 개념을 인류에게 알려준 해체론의 사상적 모험가로서의 생애를 마쳤다. 그가 췌장암에 시달리면서도 테러와의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게 될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했던 것, 맑스주의를 유령으로 규정하면서 새롭게 재구성될 것을 희망했던 것, 동독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던 맑스엥겔스저작선 MEGA 작업이 제정적인 파산상태에 놓이자 전세계의 지성에 호소하며 모금하였던 것들은 데리다가 맑스주의자로서의 생애를 살아가면서도 유령이 된 맑스를 전면에 걸지 못했던 당대의 상황을 알려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괴기한 인기가 미국에 데리다 열풍을 만들었을 때조차 그는 그것을 자신도 무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데리다는 포스트모던이즘과는 사실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오해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제는 데리다를 맑스주의를 상실한 맑스주의 세대의 한 인물로 재조명해야 할 때가 왔다.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새로운 철학적 기반은 그의 삶에서도 만들어내지 못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위대한 석학의 죽음 앞에서, 유령이 된 맑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또 하나의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언가?

 

노동자의 책(http://www.laborsbook.org) 홈피로 가셔서 회원가입하시면 [데리다에 대한 언급들] 영어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pdf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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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가 사망하고 난 후 외국의 몇 군데 신문기사들을 읽어봤는데, 프랑스에서는 역시 좌파 신문들이 대대적인 추모특집을 실었더군요. 프랑스 공산당에서 내는 [뤼마니테]도 그렇고 [누벨 옵세르바퇴르]도 여러 사람의 추모글을 싣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발리바르가 [뤼마니테]에 기고한 10월 11일치 추모글의 번역본입니다. 번역은 최원님이 해주셨습니다.

 

 

최원 번역

고 자크 데리다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이 갑작스런 죽음에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이제껏 아무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어떤 분이 고맙게도 저에게 발리바르 선생의 추모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원래 글은 l'humanité에 실려 있습니다(http://www.radio-universfm.com/lapens%C3%A9e.htm 에는 또 다른 추모사들이 있습니다). 제가 급하게 대충 번역해 봤습니다. 혹시 오역을 찾으시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게시한 후에 약간 수정을 했습니다.)


À bientôt, Jacques Derrida
곧 만납시다, 자크 데리다.

par Étienne Balibar
philosphe.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Quelques heures après la disparition de Jacques Derrida, je ne veux pas tenter de caractériser son oeuvre en quelques mots. Je veux encore moins l’enfermer dans une étiquette. Seulement me remémorer quelques moments d’une vie et d’une pensée que j’ai eu la chance de rencontrer comme élève, collègue et ami.

자크 데리다가 사라진지 몇 시간이 안된 지금 나는 그의 작업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하나의 명칭 안에 가두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학생으로, 동료로, 친구로서 만날 수 있었던 삶과 생각의 몇몇 순간들을 회상하고 싶을 뿐입니다.

Je me souviens de son arrivé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ù nous préparions l’agrégation. Précédé de sa réputation de « meilleur phénoménologue de France », Derrida était surtout, pour nous, l’auteur d’un essai éblouissant sur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Husserl, dans lequel la question de l’historicité de la vérité était arrachée aux débats entre le sociologisme et le psychologisme. Il y allait d’emblée au plus difficile : la question des conditions de possibilité de la démonstration, en la faisant passer d’un problème de garantie formelle à un problème de reproduction dans le temps, anticipant sa grande thématique de la « trace », ou de la connexion entre l’activité de la pensée et la matérialité de l’écriture. Ses cours étaient - éloquents, mais surtout rigoureux dans l’établissement des concepts et la lecture des textes (comme ils le resteront toujours, il suffit de lire Politiques de l’amitié). Je découvris des années plus tard que j’en avais mémorisé des développements entiers grâce à la clarté et à la force de ses interprétations.

저는 그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자격시험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프랑스의 더 나은 현상학자”라는 그의 명성에 앞서, 무엇보다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눈부신 에세이의 저자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역사성과 진리의 질문을 사회학주의와 심리학주의 사이의 논쟁에서 빼앗아 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강의들은 웅변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개념들의 성립과 텍스트 읽기에 있어 엄격했습니다(이 강의들이 항상 참으로 그렇게 남아있으리라는 것은 <우정의 정치>를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수년 후 저는, 그의 해석의 힘과 명쾌함 덕분에 제가 강의들의 모든 전개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À cette pratique de grand enseignant, je veux rattacher une leçon plus générale. Derrida qui, dans le monde entier, est devenu une figure très médiatique, n’a jamais cessé de travailler dans l’université et d’y voir le lieu fondamental de l’activité philosophique (même si, dans son pays du moins, elle ne lui a concédé que chichement la reconnaissance). Par des initiatives telles que les états généraux de la philosophie de 1979, ou la création du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en 1983, il a tenté de l’aider à sortir de son carcan hiérarchique, de son exclusivisme disciplinaire et de son nationalisme (d’autant plus stérilisant lorsque, comme en France, il se croit assuré de porter les valeurs « universelles »). Il est vrai que l’université dont il s’agit là est ce que, dans une conférence à Stanford de 1998, il appelle une université sans condition, s’assignant par-delà les frontières et les contrôles du pouvoir, la tâche de repenser tous les travaux humains et d’énoncer le possible (et même l’impossible) à l’époque de la mécanisation et de la mondialisation.

위대한 가르침의 이러한 실천에 저는 더욱 일반적인 교훈을 관련시키고 싶습니다. 세계적으로 상당히 미디어적인 인물이 되어온 데리다는 대학에서 작업하길 결코 멈추지 않았고 철학적 활동의 근본적인 장소를 대학 안에서 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비록 대학은 그를 단지 초라하게만 인정해 주었을 뿐이며 자기 나라의 대학은 그나마 인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1979년 철학의회 혹은 1983년 국제철학대의 창설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그는 대학이 자신의 위계제적인 굴레와 분과들 사이의 배타주의와 민족주의(이는, 프랑스에서처럼, 스스로 “보편적” 가치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민족주의堅?때문에 더더욱 [대학을] 불모로 만드는 민족주의입니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시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학이 그가 1998년 스탠포드 컨퍼런스에서 조건 없는 대학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점은 사실입니다. 권력의 경계선들과 통제들을 넘어 인간의 모든 노동들을 다시 사고하고 기계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가능한 것을 (그리고 심지어 불가능한 것을) 발언하는 과제를 떠맡는 대학 말입니다.

Je me souviens de la publication en 1967 des trois manifestes de cette nouvelle méthode qu’on appellerait plus tard la « déconstruction » : la Voix et le Phénomène, De la grammatologi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et de leurs subtils croisements entre philosophie et littérature. Je me souviens des grandes controverses avec Lévi-Strauss sur la lecture de Rousseau, avec Foucault sur celle de Descartes, qu’on peut relire aujourd’hui comme autant de « querelles » fondatrices du structuralisme philosophique, où se joue sa démarcation avec la métaphysique et, déjà, la virtualité de sa transformation en un « post-structuralisme ». C’est-à-dire en une critique interne de l’idée de structure (en particulier de sa prétention à représenter des « totalités »). Cette critique, toutefois, ne se fait pas du point de vue de l’humanisme ou de la liberté du sujet, mais du point de vue des différences qui compliquent notre idée de l’homme (donc des « fins de l’homme » et de ses droits), et en soulignent l’ambivalence : la conscience et l’inconscient, le corps et la lettre, le masculin et le féminin (et le neutre). Car, elles comportent toutes un excédent irréductible aux oppositions binaires, formelles. Un tel excédent de sens (qu’il appelle le « supplément d’origine ») ouvre aussi bien à la violence des mécanismes identitaires et des stratégies d’appropriation du monde qu’au recommencement et à la multiplication des interprétations. On trouvera là le germe des grands thèmes de sa maturité, en particulier sa conception de l’événement comme un « à venir » incalculable, dans lequel la responsabilité individuelle ou collective est portée à l’extrême, non parce que nous serions capables de maîtriser « performativement » les conséquences de nos actes et de nos paroles, mais parce que nous savons déjà qu’ils entraîneront à l’infini la relance et la reformulation du problème du droit et de la justice.

저는 사람들이 이후 “해체”라고 부를 이 새로운 방법론에 관한 세 가지 선언인 <목소리와 현상>, <기록학에 관하여>, <기록과 차이>의 1967년 출판 및 이들의 철학과 문학 사이에서의 미묘한 교차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가 행한] 루소의 독해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와의 논쟁, 데카르트에 관한 푸코와의 논쟁 같은 대논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이를 오늘 다시 그만큼의 철학적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논쟁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철학적 구조주의는 형이상학과 자신의 구별을 행하고, 따라서 이미 자신을 “후기-구조주의”로 전화시킬 잠재성, 즉 자신을 구조라는 관념(특히 구조가 “총체성”들을 표상한다는 주장/오만)의 내적인 비판으로 전화시킬 잠재성을 유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나 주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행해지지 않고 인간에 관한(따라서 “인간의 목적들”과 권리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것의 양가성(의식과 무의식, 육체와 정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차이들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차이들은 모두 이원론적 대립들로 환원할 수 없는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의미의 이 같은 초과(데리다가 “기원적 보충-대체”라고 부르는)는 해석의 재개와 증식 뿐 아니라 동일성의 기계주의의 폭력과 세계 전유의 전술들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성숙기의 위대한 테마들, 특히 계산 불가능한 “도래할 것”으로서의 사건이라는 인식의 맹아를 봅니다—이 사건이라는 인식 안에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책임성이 극단화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발언의 결과들을 “수행적으로” 지배/제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와 발언이 무한히 권리와 정의라는 문제의 재활성화 및 재정식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nfin je me souviens de toutes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 depuis le secours aux intellectuels « dissidents » de Tchécoslovaquie au sein de l’association Jan Hus jusqu’aux prises de position pour les droits du peuple palestinien et la réconciliation entre les adversaires dans le conflit israélo-palestinien, en passant par la défense du droit d’asile en Europe contre les politiques sécuritaires et la stigmatisation des « étrangers », j’en passe évidemment - nous avons tenté de contribuer, en tant qu’intellectuels sans attaches sinon sans engagements, à l’émergence de ce qu’il a appelé un « nouvel internationalisme ». Non pas que nous ayons toujours été entièrement d’accord dans nos analyses et dans nos références historiques. Mais, là encore avec beaucoup d’autres, et souvent à son initiative, nous avons partagé la conviction que les intellectuels et les artistes ont un rôle propre à jouer dans la constitution d’une résistance multiforme et multipolaire à l’emprise des souverainetés d’État ou de marché qui engendrent la violence de masse et s’en nourrissent en retour. Ce qui passe par la déconstruction de leurs discours et par le dialogue constructif entre leurs adversaires (comme il venait d’en donner l’exemple en joignant ses forces avec celles de son vieil « ennemi » Habermas pour démonter la machine de propagande de la guerre sans fin contre le terrorisme et les « États voyous »).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저는 이에 관해 대충 지나가고 있습니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담론들의 해체와, 그리고 자신들의 적들/경쟁자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과합니다(데리다는 얼마전에 테러리즘과 “불량배 국가들”에 대한 항구적 전쟁을 선동하는 기계를 분해하기 위해 자신의 오래된 “적”인 하버마스와 힘을 합침으로써, 여기에 실례를 제공했습니다)

Tout cela, qu’il s’agisse de l’avenir de l’université ou de la philosophie de l’« à venir », de la responsabilité des intellectuels et de leur place dans le monde des communications globales, est plus difficile à réfléchir sans sa contribution, mais ne cessera pas de sitôt de chercher des ressources de pensée dans son exemple et ses écrits. Adieu, cher Jacques, ou plutôt à demain.

대학의 도래 혹은 “도래할” 철학, 지성인들의 책임, 지구적 교통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의 문제인 이 모든 것은 데리다의 기여 없이는 반성하기 한층 어려운 것입니다만,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범과 글 안에서 사유의 원천들을 구하길 그리 빨리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잘 가요 자크. 아니 차라리, 곧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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