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urblue >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

추측컨대, 당신들은 백만장자인 모양이다.

당신들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 ─ 미래가

당신들 앞에 환히 보인다. 당신들의 부모는

당신들의 발이 돌멩이에 부딪히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러니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

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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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프랑스 사회학자가 쓴 책을 읽었는데, 그는 이 책 첫머리에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더 나은 장래를 거부당한 이들에게" 그 책을 바친다고 써놓았다(그 책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대작이었다).
내일을 거부당한 사람들, 내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단순한 정서적 연민을 넘어, 도덕적 책임을 넘어, 심지어 정치적 입장을 넘어,
한 가지 존재론적 관점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만큼 지배와 규율, 포섭과 착취의 그물망은 편재적이고 촘촘하다. 브레히트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

릴케 현상 2004-10-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늘 공부 안하는 애들한테
'죽어 봐야 저승을 알지' 하던 게 생각나네요
 

 

법공부 헛한 모양이다


확실히, 나는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 네티즌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즉석 투표’에서, 내가 던지는 표는 소수에 속한다. 특히 대미관계나 북한에 대한 생각,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네티즌들 의견은 나를 놀라게 한다. 일하는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주변의 생각을 좇아 조로한 탓이라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나이든 변호사들과 네티즌들이 한편이다.

그러나 파견근로 업종을 확대하는 파견법 개정과 관련한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나도 다수 편이 되었다. ‘다음’의 인터넷 즉석 투표에서는 68.6%가, ‘네이버’에서는 59.61%가 파견법 개정에 반대하였다. 파병에 찬성하고 파업을 매도했던 그들이, 파견 확대에는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왜? “같은 일 하면서 반 토막 연봉 받고 언제 잘릴지 몰라 눈치 보는 게” 눈물나도록 힘들고 “정규직 시켜준다는 말에 하루 12시간씩 일해도 2년 만기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게 파견직의 현실”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만나본 일도 없는 파견회사가 월급 일부를 가져가고, 같은 직장에서 몇 년을 같이 일해 왔지만 원청에 속한 ‘그들’과는 달리,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노동환경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누구나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회사의 인력구조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울긋불긋’이어서 정확히 아는 데만 여러 시간 걸린다. 정부 예산지원을 받아가며 선심 쓰듯 인턴으로 채용하거나 기약 없는 수습기간이라 하다가, ‘위촉직’이라는 정체불명 계약서에 사인하라더니, 듣도보도 못한 파견 업체를 중간에 끼고 파견으로 사용하면서 법이 정한 2년 기한이 지나면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서 몇 달 쉬다가 다시 오라고 한다.

나는 무엇보다 이러한 ‘파견의 일상화’가 무섭다. (성공하는 예는 거의 없지만), 큰 공장의 사내 하청이나 방송사 비정규직처럼, 노조가 만들어지거나 이슈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엄연히 파견금지 업종에서 상시적으로 행해지지만 누가 알려 주지도 않고, 혹 문제를 알더라도 이를 제기하다가 실업자가 되느니 그나마 ‘파견직’ 일자리라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런 그들에게 어차피 법원에서 이길 수도 없으니, 파견기간 연장 방법이나 상담하고 있는 엉터리 변호사-내가 싫다.

무엇보다 이렇게 당연한 현상이니, 아예 법으로 정하자는 사람들이 겁난다.

일자리보다 구직자가 많은 현실에서 누가 정규직을 쓰겠냐며, 파견을 널리 허용하는 것이 고용을 창출하는 길이라고 한다. 노동부 사무관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기업이 근로자를 어떤 식으로 뽑는지는 자기 맘이고 간접고용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 노동법 공부를 새로 시작해야 할까 보다. 나는, 한 사람의 노동의 대가를 다른 사람이 중간에서 받는 일을 막고, 직접 사용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는 ‘중간착취 금지’는 노동인권의 역사가 처음 쓰여질 때 생긴 원리라고, 우리 헌법·근로기준법·직업안정법이 오랜 기간 선언해 온 것이라고 배웠다. 더욱이 차별을 통해 임금을 깎고 해고를 손쉽게 하기 위해 간접고용을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땅을 팔고 회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노동을 팔고사는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강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법이라고 알고 있다. 그게 노동법이라고, 다른 법 아래 있는 법이 아니라 우리 법 체계의 두 기둥 중 하나라고 했고, 그래서 다른 법보다 노동법에 특히 경외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나는, 공부 역시 헛한 모양이다.

억울하다. 내가 사랑해온 노동법이 고작 이거였다니. 억울하다. 당연히 파견법을 폐지하자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개정에 반대”하면서 지금 파견법이라도 지키자는 글을 써야 하다니.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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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07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애절하게 들리네요 딴 경우지만 제 직장은 요즘 구조개편중-_-

balmas 2004-10-07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조개편은 구조조정과 다른 것인가요??

릴케 현상 2004-10-0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리는 사람이 있지는 않으리라, 믿어 보아요~

딸기 2004-11-09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김진 변호사의 글이로군요!
 
 전출처 : 딸기 > 기다렸던 책.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야 할 '테러시대'라는 것에 대해 나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지 W 부시가 선언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됐고, 결국 이라크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논란, 김선일씨의 피살 등의 사건들을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테러시대'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9.11 사건 이후로 나의 의식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고 이라크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중동' '이슬람'이라는 단어들이 맴돌았다. 신경과민증 혹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와 마음으로 중동을 찾아 헤맸다. 중동 내지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안목이 생긴 것도 있지만 언제나 머리가 '고팠다'고 할까,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9.11 이 있은 직후에, 선배 한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몇년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인 분석들이 쏟아져나오겠지, 이 사건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될지 궁금하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책이었다. 미국 바싸르대학 교수라는 저자는 9.11 테러가 일어나고 두 달 뒤, 뉴욕에서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책은 두 사람과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두 '석학'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버마스, 데리다. 얼마나 저명한 '철학자들'인가!

하버마스의 이야기는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데리다와의 대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터뷰 스타일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하버마스가 간결하게 '신사처럼' 얘기했다면, 데리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스타일이랄까. "9.11은 대사건이 되겠지요"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무엇이 '대' '사건'인가"를 되묻는다. 9.11이라는 숫자들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테러/테러시대/테러시대를 불러온 모순들을 마치 '종결된 사건'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데리다,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해체'다. (데리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데리다는 우선 9.11 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무엇이 공포(terror)인가. 이 '공포'의 원인은, 그것이 미래에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냉전이라는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어진 뒤에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9.11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미국'이라는 안전판을 강타하고 부숴버린 것이었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 것임을 지적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데리다는 이를 특유의 '자가-면역' 논리로 해석한다.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적인 교조주의에서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데리다라고 해법을 알까. 철학자에게 '현실적 해법'을 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족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말이 유행을 했던 것 같은데, 재미난 것은 '관용'에 대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정반대되는 평가다. 하버마스는 비록 '관용'이라는 말이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그 한계가 다수의 뜻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관용'의 유효성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데리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성격을 지적하는 동시에, 관용은 어디까지나 '문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저러하지만, '너'의 행동도 이러저러한 수준까지는 봐줄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관용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다. '봐줄' 수 있는 한도,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데리다가 내놓는 것은 '환대'라는 개념이다. 네가 비록 이러저러할 지라도 나는 받아들인다- 보라도리는 데리다가 말한 '환대' 혹은 '초대'의 개념을 '용서'와 연결짓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책임.
내 집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한다면-- 반가운 손님이 올 수도 있고,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찌를 수도 있다. 환대는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져다주는 그런 개념이다. 관용을 넘어선 '완전한 환대'는 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데리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기존의 논리를 해체하고 새롭게 상상하지 않는 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해체주의자의 지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결국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를 향해 간다. 이성, 합리화, 이런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근대화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할 것인가.
타리크 알리 같은 사람은 "9.11 이후에 변한 것이 과연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9.11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평가절하한다. 과연 9.11은 어떤 사건이었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미-소 양극체제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10년만에 일어난 9.11은 미국 일극체제를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었다. 빈 라덴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을 '적'으로 명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에 반기를 들었다. 빈라덴의 선전포고를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통칭해서 '아브라함적 종교'라 부른다. 하버마스는, 이 아브라함적 종교들 중에서 '구미'의 종교에 해당되는 기독교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여러가지 역사적, 경제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같은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모순이 축적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경(근본주의의 발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찾는 것, 합리화와 근대화(표현이 좀 이상하군)는 더더욱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는 데리다 또한 문제의식이 일치한다. 미국에 맞서는 (척하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유럽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두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선언문'이 실려있다.

9.11의 의미와 계몽주의의 문제-- 이것은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이기에,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던진 짤막한 이야기는 그저 '분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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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이미도는 누구인가

이미도

영화 번역에 관한 한 국내 1인자.
공군장교 출신에 주민등록번호 1자로 시작하는 엄연한 남자인데 이름 가운데 아름다울 ‘美’자가 있다는 이유로 여자로 오인되곤 한다.
좌우명은 영화인답게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의 명언.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기라)”.
영화와 골프, 등산으로 현재를 즐기느라 아직 미혼

외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막 끝난 극장에 앉아 마지막 여운을 감상하고 있을 즈음, ‘번역 이미도’라는 한 정형화된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가운데 부각된 이 마지막 자막은 대개 화면에 떠오른지 1초도 안 되어 사라지지만 번역가 이미도란 이름은 우리에게 퍽 친숙하다. 그건 이름만 대면 알만한 블록버스터를 포함해서 통상 1년에 40여편 이상을 번역하는 그의 왕성한 작업량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한두 편씩 수입된 애니메이션은 전부 그가 번역했다. 가장 최근의 「글래디에이터」를 비롯하여 「아마겟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인생은 아름다워」, 「러브 오브 시베리아」, 「와호장룡」, 「아메리칸 뷰티」등등 흥행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쳤다. 한석규가 한국영화의 보증수표라면 이미도는 외화흥행의 보증수표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셈이다.

미국 미, 건널 도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 매니아였다. 「벤허」를 개봉하던 날은 마치 시네마천국의 토토라도 된 듯 극장에서 살았다. 토요일에는 주말의 명화를, 일요일 밤에는 명화극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번역가로서의 끼가 있었는지 아주 어렸을, 때에도 영화를 보면서 누가 번역했는지는 유독 기억에 남았다(당시 국내에 소개된 외화는 번역 1세대인 김승호 선생이 전담하다시피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군에서 통역일을 하셨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한 아버지는 유난히 미국을 좋아하셨다. 오죽하면 아들 이름을 미국 美, 건널 道를 합쳐 ‘美道’라고 지으셨을까. 무엇이든 풍요로운 미국에서 살라고 그렇게 지어주셨다. 당시만 해도 그 세대에게 미국은 ‘꿈의 땅’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일찍 영어를 생활화했다. 그러고 보면 90년대에 들어 일기 시작한 ‘영어만이 살길’이란 표어의 선구자는 그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영어 시간이 시시하기만 했다. 철이 들면서 막연히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술을 천하게 여기셨던 아버지에게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말은 입도 뻥긋 하지 못했다. 결국 대학에서는 스웨덴어를 전공했고 공군 교육장교를 제대하고 광고를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떠났다.
본격적으로 영화일을 시작한 건 서른이 조금 넘어서였다. 94년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후 그는 영화 수입 중개업을 하는 선배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2년간의 미국생활은 그가 영화일을 하기에도 좋은 경험이 됐다.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우수한 작품을 사들이거나, 제작중인 영화 가운데 될성부른 작품들을 골라 배급권을 따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들여온 영화를 직접 번역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마침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발음과 재기 넘친 언어감각을 알아본 주변에서도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때가 정확히 9년 전. 줄리엣 비노쉬가 주인공인 「블루」를 시작으로 그는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첫작품 「블루」는 아트영화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많은 관객을 얻었다. 곧이어 블루의 연작시리즈 「레드」, 「화이트」를 번역해 연달아 히트시키자 헐리우드 직배사들은 앞다퉈 그를 찾기 시작했다.

헐리우드산 활어를 요리하는 남자

그는 자신을 ‘헐리우드산 활어를 요리하는 남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올 여름 펴낼 책 제목으로 물망에 올려놓았다. 이 책에서는 외화번역가라는 직업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번역과정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을 생각이다. 영화 한 편 번역하는 데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1주일 정도가 고작. 우리나라는 개봉일이 임박돼 수입되는 경우가 많아 번역가에게 허락되는 시간은 최소한이다. 그 짧은 시간에 법조계나 스포츠, 동성애 등 전문분야를 다룬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기란 역부족이다. 이럴 때를 위해 영화계 ‘인맥’보다는 전문분야 종사자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쓰는 편이다. 그 시대의 정보에 어두우면 좋은 번역은 불가능하다. 골프영화 틴컵(Tin Cup)은 가까운 선배중에 골프 전문가가 없었다면 마감에 맞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깔끔한 번역은 이미 할리우드 직배사들로부터 정평이 나 있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게, 언어의 미묘한 맛을 살린 번역을 그것도 ‘단시간내’에 가장 훌륭하게 번역하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 허락없이 그의 번역에 함부로 손을 댔다간 그와 거래를 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완벽을 기한다. 그는 한 달 평균 세 편을 번역한다. 여름이나 명절 ‘성수기’에는 한 달에 네다섯 편씩 처리할 때도 있다. 그 동안 그가 번역한 영화들은, 매년 외화 흥행순위 10위까지를 석권한다.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원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번역한다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보다 더 영화를 사랑하기에 번역 과정에서 원작이 훼손되는 건 스스로 견딜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가장 좋은 번역은 영화를 보면서도 뭔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푹 빠지게 하는 것. 그렇게 되려면 대사가 길어선 안 된다. 자막은 2줄 이상을 넘지 않을 것, 길어도 원고지 1줄 분량을 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전후사정으로 이해될만한 대사는 과감히 건너뛴다. 배우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다 옮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는 또 한국식 정서에 맞는 대사를 창출하는 것을 최상의 번역이라 생각한다. 감독이 웃기려는 의도가 열 번 있을 때 번역된 작품을 보고 우리 관객들도 열 번 웃게 해주는 게 가장 힘들다. 나라마다 유머의 코드가 다르고 문화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완벽한 자막을 얻기까지 그는 시사회를 포함해서 일곱 번 정도 영화를 본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번역 때문에 흥행했다는 칭찬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외화번역가의 ‘업’이다. 영화에 감동받고 나온 사람들 중에 만 명에 한 명도 “정말, 훌륭한 번역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판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어 추가 개런티로 환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외화를 번역하는 건 공중에 뜬 무수한 말 중에 하나를 잡는 일이다. 관객이 화면 속 배우의 움직임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자막을 보는 세 가지 행위가 동시에 무리 없이 수행될 수 있도록 문장을 압축하고 다듬는 일. 그러나 우리 나라는 선진국들에 비해 아직 ‘번역가’에 대한 인식이나 대접이 터무니없이 낮은데다가,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제 살 깍아먹기식 경쟁을 하고 있다. 그나마 그의 등장 이후 번역가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 엔딩 장면에 번역가의 이름을 넣자고 주장해 관철시킨 것도 그이고 비디오에 번역가 이름을 넣게 된 것도 그가 발벗고 나선 일이다.
그는 개봉 첫날 첫회 상영분을 관객과 함께 본다. 자신이 숨겨둔 웃음과 진실의 여정을 찾아가는 관객들 속에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한 재치있는 번역에 관객들이 박장대소할 때 그는 또 해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스텝들의 장구한 행렬 뒤로 낙관처럼 떠오르는 ‘번역 이미도’를 확인하며 극장을 나선다.


(http://www.applebook.co.kr/old_applebook/month/april01/03-4.htm)

일단 다 퍼왔구요..
저도 영상물 번역을 해봤었는데, 거기 설정에 맞게 다 조사를 해야한답니다. 가끔 맞지 않는 번역이라도 올라갈때가 있는데, 이유는 한 스크린에 40자 이상이 한꺼번에 떠서는 안돼기 때문이죠. (다 일고 지나갈수가 없는 양이기때문에) 그리고 각 언어의 비어나 은어등은 그냥 상황에 맞게 저희가 바꾸기도 하지요. 물론 나중에 검수하시는 분이 바꾸는경우도 허다하고요.

 

가장 대표적인 멋대로날림번역의 일례로는 위에도 언급된 '반지의 제왕' 이 있죠. 마지막 장면, "샘, 난 이대로 멈출 수 없어"라는 대사로, 졸지에 프로도를 모험왕으로 만들어 버렸다죠... 보다 자세한 반지의제왕 오역 리스트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http://morgoth.egloos.com/201770

  이미도씨의 오역 리스트는, 아래 사이트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영화계의 악의 축으로 불릴 만도 하군요.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65/mo1065sp_901.htm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1073/mo1073sp_9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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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영상번역계의 비리 - 이미도의 책임?

이미도-미리내
 
이미도씨 자막 이야기야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니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사실 저도 그전에는 '이미도 번역공장' 이랄지 '하청준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좀 믿고 있었죠. 유명 영화를 도맡아 하다보니 당연 보이는 이름은 '이미도' 뿐이고, 실망스러운 자막들도 분명히 존재했으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미도씨가 '공적' 취급당하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의 자막 과정에 참여하신 금숲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도씨는 혼자서 작업을 하고, 사실 작업하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더라- 하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덕에 일단 이미도씨 '개인'에 대한 오해는 풀렸고, 그전보다 좀더 너그럽게 볼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하청하는 주제에 자기 이름 다 걸고 자막도 그따위면 아마도 제가 먼저 나서서 안티를 걸지 않았을까요.) 일단 제가 금숲님 이야기를 믿는것은 실제 금숲님이 이미도씨와 같이 반지 3부작의 작업을 해 보셨고, 제가 간접적으로 그 과정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단 이미도씨 개인을 믿고, "아 혼자서 하시는구나." 하고 나니- 자막의 문제가 이미도씨 개인을 넘어 영상번역계 자체의 문제로 보이더라구요.

일단 영상번역과는 좀 다르지만, 책의 번역 과정을 살짝 살펴보자면- 역자분이 번역을 하고, 출판사에서 그걸 맡아 편집자분들이 교정을 하고, 그 분야에 관련된 분들이 감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을겁니다. 교정 과정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번역서의 품질이 확 달라진다는것은 제가 몇년간 체험해서 알고 있구요-같은 역자가 시간차를 두고 번역한, 전혀 다른 출판사의 도서가 번역의 질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번역에서는 번역 이외에 '사후처리' 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번역자도 인간이니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라는 매체를 출판하는 과정은 번역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겠지요. 그 출판사에서 책을 맡아 출간하기로 했다면, 번역의 품질에 있어서는 출판사도 공동의 책임이 있는겁니다. 그래서 책에 문제가 있으면 출판사와 역자가 함께 비난 및 비판을 받는거겠지요.

이건 영상번역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번역에서 어떤것이 어렵고 쉽냐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사실 책의 번역보다 영화의 번역이 더 까다롭다고 봅니다. 영화에서는 영상을 계속 보면서 맥락을 찾아야 하고,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대사의 미묘한 어조도 파악을 할 수가 없으니- 영화 자막을 만드는데는 필연적으로 그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가 필요할 겁니다. (실제 인터넷에 떠도는 '디빅' 자막들 중엔 영어에 짧은 제가 보기에도 한심한 지경인 자막들이 많죠) 그리고 책과 마찬가지로, 정말정말 시간이 없더라도 그 자막을 다른 이들이 검토하고 수정할 시간이 있어야 할겁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 실수가 존재할테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영화 자막들은 그런 꼼꼼한 절치는 거치지 않는것으로 보여요. 혹 거친다고 해도 영화사 마음대로 자막을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었구요.(제가 잘못 알고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물론 이미도씨에게 어떠한 면죄부를 주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확실히 이미도씨의 자막을 보면서, 영어에 짧은 제가 비웃을 때도 있었고, 너무 오버한 번역을 보며 민망했던 적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영화의 의미를 오도하는 자막이 나와 원성이 자자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미도씨의 장점도 분명히 존재하고, 현재의 영상 번역계에서는 안타깝게도 프로로 활동하는 분들중에 이미도씨만한 분들이 없는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그족 종사자도 아니고- 제대로 아는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뭔가 기형적인 영상번역계의 문제 자체가 '이미도'라는 인물 하나로 대별되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대안없는 안티보다는 비판적 지지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미도씨에 대한 무조건적 '안티' 보다는, 이미도씨를 지지하지 않는 분들의 모임이 하나의 번역 모니터링과 개선을 위한 집단이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반적인 번역의 질도 개선이 되겠고, 아마추어 번역자들이 프로 무대로 진입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이미도 싫다!" 만 외칠게 아니라, "이미도가 싫으니까 이러이러하게 해서 이러이러한 점을 개선되게 하자." 가 더 바람직해보이는건 저만이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덧)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방송국의 외화 번역에 대해서는 뭔가 만들어주실 분 없는지? 제가 하나 만들까요^^; 추석날 두개의탑 번역이야말로 영화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는걸요.
# by 미리내
 
 
영상번역계의 비리 - 이미도의 책임?-금숲

트랙백 : 닉슨님 블로그의 포스트 - 이미도의 번역

이글루에 말 나온 김에, 반지의 제왕 자막작업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리오.

맨날 이름 걸린 번역자만 가지고 '우선 눈에 띈다고' 막 말 하는데
그게 다 엄청 크게 불려진 거품 안티 !

+ 소문에 소문에 점점 공룡화되는 거짓 정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건 다 '추측'일 뿐.

++ 혼자만 잘 알고 있다고 < 생각 >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 목격 >한 영화사와 DVD사의 번역에 대한 눈 깔아내림. 그 심각함은 상식 이하입니다.



영화계 번역에 대한 회사의 관심도가 제로인 것이 더 큰 문제.

요점은, 자막이야 어떻든,'그래도 팔리니까'가 정답.
번역자가 애써 해 보내면 괴악한 짓을 하지 않나,
기껏 제대로 하라고 2, 3 수정본 보내면 멋대로 초안 걸지 않나,

특히~~~~
시장 형성된 지 얼마 안 된 DVD가 날림은 가장 극심하지. ('시청한'것이 아닌 '당해본' 사람으로서, 이가 갈리오)


싸게 하청주어서 극장 자막에 번역자 이름도 안나오는 그런 영화가 수두룩한데
(반 헬싱도 이름 안나오더라;)

솔직히 자기 이름 걸 정도면 욕을 '듣겠다'는 건데, 사람들이 모른다.

왜 이미도 '만' 있는가?
답은 다른 자들이 대부분 이름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한 루머가 도는 거고
모든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미도의 문어발 공장의 책임이 되고

코카콜라 한 종류만 있어서 아프리카에 팔면 자본주의의 침략이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 코카콜라의 맛 - 과연 좋은가? "
내지는
" 코카콜라 - 건강에 나쁘다? "
" 코카콜라 - 이빨이 썩는다? "
펩시콜라가 나오기 전에 저런 소리는 별 의미가 없다.

솔직하게 '이빨에 나쁘다' 정도는 사실이지만, 저 모든 것이 사실보다 거대하게 부풀려지고, 시장 바닥에서 파는 짝퉁 '고가골라'의 문제도 코카콜라에게 보내진다고 비유하면 될 것 같다.

(* 덤으로 이미도씨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

* 실제로 이미도씨가 한달에 하는 영화 편수는 얼마 안 되며 (한달에 한 편 꼴도 안 된다고 기억합니다.)
* 일정 배급사의 영화만 주로 맡는다.
* 그런데 하지도 않은 영화를 했다고들 말하는 판이다.
* 그리고 이미도씨는 DVD 안 한다. (자막이 같은 경우는 극장판 자막을 DVD회사에서 그대로 갖다 쓰는 경우)
* 그리고 히어링만으로 영화 번역 하지 않는다. 어디나 극장 영화는 대본이 꼭 온다. 그럼에도 잘려나가는 부분들은 < 두 줄에 빈칸 포함 열여섯 글자 >의 제한 때문이다. 하물며 가로자막이 아닌 세로자막인 경우 가독성이 떨어져 제한은 더욱 심해진다.
* 외국에 많이 나가는 분이다. 우물안 개구리로 그저그저 사전만 붙들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영화 종류에 따라 의외로 자료조사도 많이 하는 편이다. 배급사가 많이 맡기려 하는 것은 경험이 많으므로, < 매우 단순하게 > 안심하여 맡기는 것이지 뭔가 비리가 있는게 아니다.


영양가도 안 나오는 (대부분이 루머에 불과한) 안티만 찌르지 말고,
그런 거 할 시간에 펩시콜라부터 찾아서 내 놔 보슈.
훨씬 관심 많고 영화 열심히 보는 멋진 리뷰어들이 좀 해주길 지극하게 바랍니다.
기본적인 히어링 안 되는 리뷰어는 제발 손대지 말아달라. 당신의 '오역 지적'자체가 오역이다.

그리고 영상계 회사들 제발 좀 영상번역에 대해 관심 좀 가져라!!!!!!!! 무심하기가 찬란하기 이를 데 없어!!!!! 그따위로 찍어내니까 번역계의 건전한 자극과 발전이나 경쟁이 전혀 없잖아!!!!!!!!(이게 더 급해! 그래야 펩시콜라가 나오지! 펩시콜라가 나와야 코카콜라도 맛있어지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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