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
자크 데리다 지음,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 사진, 신방흔 옮김 / 아트북스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데리다는 현재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심지어 영미 학계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관한 논의가 하나의 독자적인 하위학문(sub-discipline)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데리다의 이론적 작업은 여러 학문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서는 데리다의 작업을 소개하고 이해하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의 중요한 예술론 저서 중 한 권인 [시선의 권리](아트북스)의 출간은 원칙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 없다. 데리다는 문학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회화에 관해서도 여러 권의 책(La vérité en peinture(1978), Mémoires d'aveugle(1990), Atlan: Grand format(2001), Artaud le Moma(2002))을 낸 적이 있지만, 사진, 포토로망에 관해 이처럼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벨기에 출신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관해 데리다가 긴 ‘해설’을 붙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격조 높은 사진들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데리다가 덧붙인 탁월한 ‘해설’은 이 책을 통상적인 사진집(과 해설)의 차원을 넘어, 이미지와 문자, 보기와 말하기/쓰기, 장르와 젠더, 현전/현상과 환영/유령 및 더 나아가 시선과 감시, 법과 권력 등에 관한 예술적, 철학적 논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번역이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이루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는 대부분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전설, 신화일 따름이다. 사실 국내의 데리다 독자들은 이미 이같은 사실과 소문, 현실과 신화 사이의 참담한 괴리를 여러번, 너무나 자주 경험한 바 있다. 아쉽게도 이는 이 번역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인데, 이 책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나 [해체](문예출판사, 1996), [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 등과 더불어 데리다 저서의 최악의 오역본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저런 기회에 지적했던 것처럼 데리다는 현대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도 보기드문 문장가(그에 비견할 만한 현대의 이론가는 라캉 정도일 것이다)여서, 이론적인 논증과 수사학적인 어법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글을 쓰며,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 중요성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이 산출해내는 의미효과들에 있다. 따라서 데리다 저서에 대한 번역의 성패는 이러한 의미효과들을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충실하게 옮겨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의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프랑스어의 초보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의 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격자구조”나 “액자구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en abyme”를 줄곧 “심연 속으로”라고 번역하거나 “독촉”과 더불어 “총합”이라는 의미를 지닌 “sommation”이라는 단어를 줄곧 “독촉”이라고만 번역하는 등의 일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이며, 더 나아가 복잡하게 뒤얽힌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을 풀어내어 이해 가능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는 이 번역본은, 데리다를 신비스러운 인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데도 외국에서는 놀라운 명성을 누리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물로 만드는 데 기여할 뿐, 독자들이 미묘한 논의들을 통해 산출되는 놀라운 의미효과들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데리다의 이론적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번역본의 상태가 어떤지 다른 독자들도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에서 좀 길긴 하지만,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처음에 제시된 것은 번역본에 나온 번역문들이고, 그 다음은 해당 원문, 마지막은 이 서평의 필자가 수정한 번역문들이다. 그리고 번역본의 번역문들에 내가 추가한 [원문 그대로]라는 표시는 원본의 불어 단어를 잘못 옮기거나 우리말 맞춤법이 잘못된 것들이다.



101쪽 번역문: 당신은, 그리고 당신들은 내가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이야기들을 결코 모를 것이다.

원문 I 페이지: Tu ne sauras jamais, vous non plus, toutes les histoires que j'ai pu encore me raconter en regardant ces images.

수정 번역문: 자네는, 그리고 당신/들 역시, 내가 이 이미지들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결코 알 수 없을 걸세.


이 문장은 데리다의 해설의 첫 번째 문장인데, 여기에서 문제는 시제가 잘못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불어 시제는 “ai pu”라고 해서 복합과거로 되어 있는데, 역자는 이를 “계속해서 말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문장 이외에도 이 번역본에서는 간단한 불어 시제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경우가 여럿 보이는데, 이는 역자가 불어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소한 것 한 가지를 지적하자면 역자는 “tu”라는 불어 단어를 “당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tu”라는 단어는 같은 또래의 친구 사이나, 선생과 학생 같이 나이 차이나 지위의 차이가 있지만 친숙한 사이에서 쓰이는 단어다. “tu”를 “당신”이라고 번역하는 게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데리다의 ‘해설’은 신원이나 성별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둘 이상의 사람들이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구어체 문장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tu”라고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vous”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tu”라고 부르는 경우는 “자네”나 “너”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위의 문장에 대한 대화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보자.


101쪽 번역문: 이 이미지들? 그러니까 이 이미지들은, 플롯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보거나 알아차리게 되는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플롯을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원문 I 페이지: Ces images? Il faudrait alors qu'elles donnent quelque chose à voir ou à reconnaître, flnalement, à l'instant où une intrigue se dénoue. Or, j'en ai du moins le sentiment, on s'ingénierait plutôt à nous dissimuler quelque chose.

수정 번역문: 이 이미지들? 그렇다면 결국 이 이미지들은, 하나의 플롯이 결말을 짓게 되는 순간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또는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선사해주어야 하겠지. 그런데 나는 [이처럼 이미지들에 이야기의 구조를 부여함으로써―인용자 삽입]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히려 무언가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 같다는 생각, 또는 적어도 느낌이 드는데.


  여기서 대화 상대방은 앞 문장의 화자가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연계시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곧 이야기라는 것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목적론적 구도에 따라 전개되기 마련이며, 따라서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미지들에 대해, 처음부터 이미지들과 상이한 질서에 속하는 이야기/언어의 구조를 외재적으로 강제하는 셈이 된다. 이 문단의 두 번째 문장은 바로 이런 의도를 문법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불어에서 “il faut que”는 “해야 한다”나 “일 수밖에 없다”는 뜻을 갖는 비인칭적 표현인데, 이 문장에서는 조건법에 따라 “il faudrait que”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문장은 ‘그처럼 이미지들을 이야기들과 결부시키면, 이미지들은 이야기에 고유한 목적론적 구도에 따라 확정된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화자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지들에 이야기의 구조를 부과함으로써 이미지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들on”, 곧 불특정한 어떤 사람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은폐하기 위해 제시하는 술책에 말려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번역본에서는 이런 논의의 의미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번역이 되어 있다. 같은 쪽의 다른 문단들도 유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이를 일일이 지적할 필요는 없고, 이제 다음 쪽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102쪽 번역문: 일견 시퀀스들의 엄청난 비가역성이 바라보고, 묘사하고, 판독하는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결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 I~II 페이지: Au premier regard, une rigoureuse irréversibilité des séquences commande à qui regard, décrit, déchiffre, elle sous-entend du moins, car jamais rien n'est dit ... 

수정 번역문: 처음에는 사진들의 진행séquences을 규제하는 어떤 엄격한 비가역성이 바라보고 기술하고 판독하는 사람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지. [또는]―왜냐하면 [사진들에서는] 결코 어떤 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적어도 이 비가역성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이 문장에서 잘못 번역된 것은 세 가지이지만, 제일 핵심적인 것은 “그러나 결국”이라는 접속사 부분이다. 사실은 원래의 불어 문장에는 명시적인 접속사가 존재하지 않으며, 콤마와 “적어도du moins”라는 숙어가 접속사 구실을 하고 있다. 번역본처럼 접속사를 이처럼 번역하게 되면, “사진들의 진행을 규제하는 엄격한 비가역성의 지휘”와 “비가역성의 암시” 사이의 관계가 역접의 관계로 잘못 이해될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오는 “왜냐하면 결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의 뜻은, 우리가 이 사진집 또는 포토로망을 처음 볼 때에는, 마치 시퀀스들, 또는 사진들의 진행을 규제하고 있는 어떤 엄격한 비가역적 규칙이 우리에게 사진들을 바라보고 기술하고 판독하는 모종의 객관적인 규칙이나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본다면, 사진들은 결코 어떤 것도 언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에(“결코 어떤 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문”), 이런 종류의 객관적인 해석의 규칙이나 근거가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다만 적어도 어떤 서사 가능하고 판독 가능한 내용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고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du moins”로 연결되는 두 문장, 두 절 사이의 관계는 축소나 제한의 관계에 있지 역접이나 대립의 관계에 있지 않다.

  이 문장에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역자가 이 문장에 붙인 다음과 같은 역주다. [역주: 사진이(시선이) 무엇인가를 암시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달리 말하면 침묵 속에서만 사진의 시퀀스들은 암시되고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데리다는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데리다가 언어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다고 우선적으로 지적하려는 것이다. 언어는 워낙 그 속성이란 것이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말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데리다는 생각한다. 즉 언어는 어떤 한 단어로 말해질 때 그 단어 이외의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서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해진 것에는 더 많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담지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언어에서나 사진에서나 데리다가 그토록 자주 침묵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사진에서 데리다는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을 것을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진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하여서만, 바로 말이 결하고 있는 것을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63-164쪽)]

  이 역주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번역본에 달려 있는 대부분의 역주들은 독자들이 문장의 의미나 데리다의 수사학적 어법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데리다의 논의를 더욱 막연하고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제대로 명료하게 이해는 되지 않지만 무언가 신비하고 심오한 것을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갖게 만드는 번역문, 그리고 이를 더욱 조장하는 역주들, 데리다가 선사(禪師)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 다음 문장을 보자.


103쪽 번역문: 미장 드뫼르mise en demeure는 번역 불가능한 표현이다. 그것이 법에 관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법성을 고려하는, 어떤 사람이 바라보고 자신의 시선 안에 배치하고 붙잡아두고 시야에 간직하거나 사진으로 ‘찍을’ 권리, 즉 이 책의 제목인 시선의 권리droit de regard[원문 그대로-인용자]에 관여한다. 문제의 이미지들의 텍스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시선의 권리, 오직 바라보기의 권리만을, 혹은 여러분이 그 시점에 대해 순응할 권리만을 허용한다.

원문 페이지 II: Mise en demeure, expression intraduisible, parce qu'il y va de la loi. Il y va de la légitimité, il y va du titre qu'on peut avoir à regarder, à disposer sous son regard ou à détenir par le regard, à prendre en vue ou à "prendre" des photographies, il y va donc du titre: droit de regards. Un texte d'images à regard vous accorde, comme à ses "personnages", un droit de regarder, seulement de regarder ou de vous approprier par la vue ...

수정 번역문: 미장드뫼르는 번역이 불가능한 표현인데, 왜냐하면 여기서는 법이 문제되기 때문이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적법성이며,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눈으로 배치할 수 있는, 또는 시선으로 붙잡아두고 시야에 두거나prendre en vue 사진들을 “찍을prendre” 수 있는 자격titre일세. 따라서 제목titre,『시선들의 권리/감시권』이 문제인 셈이야. 바라보아야 할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한 텍스트는, 텍스트 내의 “인물들”에 대해 그렇게 하듯이 당신/들에게 하나의 시선의 권리/감시의 권리를 부여하지. 단지 바라볼 권리만을, 또는 당신/들이 시각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이 문단의 번역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droit de regards”의 번역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은 “시선” 또는 “감시”라는 의미를 갖는 “르갸르regard”가 단수로 쓰이지 않고 복수로 사용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단수냐 복수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데리다의 해설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복수의 시선들 사이의 관계―권력 관계일 수도 있고 성적 관계일 수도 있고, 지각과 기술의 관계일 수도 있는―라는 점을 감안하면(이는 해설이 진행될수록 더욱 문제가 된다), 복수로 쓰인 “regards”와 단수로 쓰인 “regard”를 잘 구분해서 번역하는 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regard”는 단순히 “시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감시”를 의미하기도 하며, 특히 이 문단처럼 법, 적법성, 권력 등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는 “regard”가 지닌 “감시”라는 의미를 좀더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마지막 문장처럼 “단지 바라볼 권리”와 “당신/들이 시각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권리”가 구분되는 경우에는 “regard”를 각각 “시선”과 “감시”로 파악해야 데리다의 논의가 이해될 수 있다.

  이 문단과 이어지는 다음 문단을 보자.


103쪽 번역문: 그것은 분명 법칙에 관한 문제이나 또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는 시간에 관한문제이기도 하다. 사물들은 질서에 의해 감시당한다. 시선의 권리의 시간은, 마치 사진의 기호체계 안에서처럼 심연을 향한 연속 반복, 즉 사진 속의 사진, 다른 연작 속에 재편입된 연작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준엄한 기한délai de rigueur에 입각해서 전개된다. 미장 드뫼르는 시간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결코 넘치지 않을 시간이고, 계산되고 운율이 있는 일직선적인 시간이자 극적인 시간이다.

원문 페이지 III: Il y va certes de la loi mais aussi d'un temps réglé par la loi. Un ordre le surveille. Le temps du droit de regards se développe, comme on dit dans le code de la photographie, non seulement par la répétition de génériques en abyme, une photographie dans l'autre, une série dans l'autre réinsérée, mais comme le délai de rigueur. La mise en demeure donne le temps, mais un temps à ne pas déborder, un temps mesuré, rythmé, cadencé, un temps dramatique.

수정 번역문: 분명 여기에서는 법이 문제되지만, 또한 법에 의해 규제되는 하나의 시간이 문제되기도 하지. 하나의 질서가 이 시간을 감시하고 있지. 시선들의 권리/감시의 권리의 시간은 사람들이 사진술의 용어법에 따라 말하듯이, 현상/전개되네se développe. 단지 도입장면들génériques을 격자구조[액자구조, en abyme]에 따라 한 사진을 다른 사진 속에 담고 사진들의 한 연속장면을 다른 연속장면 속에 재삽입하는 식으로 반복함으로써 현상/전개될 뿐만 아니라, 엄격한 기한으로서도 현상/전개되는 것이지. 미장드뫼르는 시간을 선사하지만, 이 시간은 결코 어겨서는 안되는 시간, 박자가 있고 리듬이 있고 운율이 있는 극적인 시간이야.


  이 문단에서 특히 잘못된 점은 “en abyme”를 “심연을 향한”이라고 번역하고 “répétition de génériques”를 “연속반복”이라고 번역한 점이다. 이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것은 역자가 이 두 용어 사이의 체계적인 연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en abyme”는 “en abîme”, 곧 “심연 속에서”와는 달리 “격자구조” 또는 “액자구조”를 뜻한다. 격자구조란 원래 어떤 무늬나 모양 안에 같은 무늬나 모양이 들어 있는 것을 뜻하는데,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를 삽입하는 기법을 가리킨다(액자소설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따라서 “en abyme”는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서 사용되고 있는 기법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지, “심연 속에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데리다는 이를 부연하기 위해 바로 뒤에 “한 사진을 다른 사진 속에 담고 사진들의 한 연속장면을 다른 연속장면 속에 재삽입하는 식으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서 이러한 격자구조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곳은 사진들의 한 계열이 끝나고 새로운 계열이 시작되는 곳이다. 곧 플리사르는 새 등장 인물이 앞 장면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바라보는 장면으로부터 새로운 계열을 시작하는 기법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génériques”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로 이처럼 새로 시작되는 장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도입장면들”로 번역되는 게 적합할 것 같다. 사실 “génériques”는 이 책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 중 하나인데, 이는 이 단어가 “유(類)”나 “속” 같은 의미 이외에도 영화 첫머리에 제목, 제작자, 배역, 감독 따위의 이름들을 표시해놓는 자막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맥락에서는 라틴어 어원인 “genus”의 의미, 곧 “시작” “기원”이라는 의미를 직접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단어가 “유”나 “속”과 같이 집합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génériques”는 “사진들의 계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뒷부분에 가서 이 단어는 “genre”나 “génération”과 같이 같은 어원을 갖는 다른 단어들과 함께 수사법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이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용어의 적절한 의미와 상호연관성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이 번역본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제 서너 문단을 건너 뛰어서 다음 문장을 보기로 하자.


104쪽 번역문: 당신은 반복하기를 좋아하고, 그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데, 마치 그 전체가 형성되지 않을 듯이 그러하며, 그것에 당신을 굴복시키지도 않는다.

원문 페이지 III: Mais tu aimes à le répéter, tu en fais toute une histoire, comme pour marquer que la sommation n'aura pas lieu, et que tu n'y céderas pas.

수정 번역문: 하지만 자네는 그 말[결코 모든 이야기들을 알 수 없고, 심지어 하나의 이야기조차 전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말―인용자]을 기쁘게 되풀이하면서, 시시한 이야기를 계속 대단한 이야기인 양 늘어놓고 그것만으로도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만들어내고 있군. 마치 [이야기들의] 총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자네에게는 독촉이 제기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고 자네는 거기에 기꺼이 불응하겠다는 듯이 말이지.


  이는 겉보기에는 간단한 문장같지만, 사실은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문장이다. 번역본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첫째, 원문에는 “aimes à le répéter”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반복하기를 좋아하는”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되며, “le”라는 지시대명사가 가리키는 것, 곧 “반복”, “되풀이”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다음 구절인 “tu en fais toute une histoire”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번역본에서처럼 “그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데”라고만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가 이해되지 않고, “전체 이야기를 만들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다음 불어에서 “en faire toute une histoire”는 숙어적으로는 “시시한 이야기를 대단한 것처럼 늘어놓다”는 것을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온전히 만들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데리다의 논의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것"은 앞 구절에 나온 “le”를 가리킨다. 따라서 첫 구절의 “le”를 정확히 파악해야 두 번째 구절의 의미도 좀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번역본은 “sommation”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불어에서 “sommation”은 영어의 “sum”과 같이 “총합”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또한 영어의 “summons”처럼 “독촉” “소환”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sommation”은 여기에서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결합해서 파악한다면, 지금 이 문장의 화자는 앞 문장의 화자, 곧 “결코 모든 이야기들을 알 수 없고, 심지어 하나의 이야기조차 전체적으로 알 수 없다”고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이 목적론의 위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화자의 태도에서 은연 중에 드러나는 자기기만의 위험을 비꼬듯이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다음 두 문단을 연속해서 보기로 하자. 이 두 문단은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문단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



104쪽 번역문: 나, 너, 당신, 그, 그녀, 사람들on, 우리, 너희들, 그녀들, 그들―모두와, 무대에 올려져 있고mise[원문 그대로―인용자] 지금 여기ici meme[원문 그대로―인용자]서 작동되고 있는, 지정하고mandés 요구하고demandés, 명령하는commandes[원문 그대로―인용자] 모든 것은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말해지도록 서로를 독촉한다. 그리고 하나의 금지를 겸하는 그와 같은 명령이 오직 하나(의 이야기)로부터만 비롯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신은 하나뿐인, 신중하게 순서매겨진 포토그람들의 병치, 포즈들의 불연속적인 연속을 이해한다. 또한 각각의 내적인 ‘말해지는 것들adresse’, 각각의 생략부호는 단수든 복수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당신’과 ‘너’라는 양태사들 모두 하나의 사진적인 문법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문 페이지 III-IV: Je, tu, vous, il, elle, on ,nous, vous, elles, ils ― tous et toutes mis en scène et en jeu ici même, mandés et demandés, commandés, mis en demeure de se raconter presque toutes les histoires possibles, et l'ordre aussitôt doublé d'un interdit semble venir d'une seule, tu entends, d'une seule juxtaposition, discrètement ordonée, de photogrammes, d'une série discontinue de poses. Et chaque "adresse" implicite, chaque apostrophe, au singulier ou au pluriel, au masculin ou au féminin, dans toutes les modalités du “vous” et du “tu” paraît conjuguée par une grammaire photographique.

수정 번역문: 나, 너, 당신, 그, 그녀, 사람들, 우리, 너희들, 그녀들, 그들 ― [따라서] 남성 모두tous와 여성 모두toutes는 무대 위, 바로 여기에서 연기하도록 올려져 있으며, 가능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서로에게 이야기하도록 소환되고 요구받고 명령받고 독촉받고 있지. 그런데 하나의 금지와 더불어 곧바로 이중화되는 명령/질서ordre는 [이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 자네도 이해하겠지만, 은밀하게 질서지어진/순서화된 포토그람들의 단 하나의 병치, 포즈들의 단 하나의 불연속적 계열로부터 도래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단수나 복수, 남성이나 여성 가릴 것 없이 “당신/들”과 “너”의 모든 양상들 속에 암묵적으로/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부름adresse”, 각각의 돈호법apostrophe은 사진의 어떤 문법에 의해 활용되는conjuguée 것처럼 보이지. 


104쪽 번역문: 사진의 문법 대신 나는 차라리 특정한 사진기구의 수사 혹은 호색성에 의해서, 그것의 렌즈의 권력, 그것의 앵글 범위,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몽타주들, 이미지의 객관화와 사취, 시선의 권리, 침묵하는 내적 질서/명령, 주체의 위치에 당신들을 지정하는 잠재적 몸짓, 움직임, 상황, 위치 들[원문 그대로-인용자]에 의해서 굴절된 말을 사용하겠다. 차례로 바라보기 또는 바라보여지기, 하지만 항상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닌 ...... .

원문 페이지 IV: Au lieu de photogrammaire, je dirais plutôt déclinée par la rhétorique ou aussi bien l'érotique d'un certain appareil photographique, par le pouvoir de son objectif, l'écart de ses angles, les montages auxquels il peut donner lieu, objectivation et captation d'images, droit de regard, ordre intimé en silence, autant de gestes, de mouvements, de situations et de positions possibles vous assignant telle place de sujet: regardant ou regardé, tour à tour et point toujours seul.

수정 번역문: 사진의 문법[에 의해 활용된다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어떤 사진 장치의 수사법에 의해 또는 그것의 에로티시즘에 의해서도, 그리고 그 렌즈objectif의 권력에 의해 곡용(曲用)된다déclinée고 말하겠네. 렌즈의 각도의 범위, 사진 장치가 산출할 수 있는 몽타주들, 이미지들의 렌즈화/객관화objectivation 및 포착, 시선/감시의 권리, 침묵하고 있는 내밀한 질서/명령, 당신/들을 특정한 주체 위치로 지정해 놓는 태도들, 움직임들, 상황들, 가능한 위치들 모두에 의해 곡용되는 것이지. 차례차례 [다른 이를] 보거나/감시하거나 [다른 이에게] 보이거나/감시되거나 하지, 결코 항상 혼자서만 [보거나 보이거나/감시하거나 감시되거나] 그러는 건 아닐세.  


  이 두 문단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은 “활용”과 “곡용”이다. 앞 문단의 화자는 사진들 속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 단 하나의 계열, 병치에 따라 질서지어진 어떤 명령과 금지의 구조, 따라서 권력의 구조를 발견하며, 사진의 문법에 따라 "너" “당신/들”이 활용되는 방식(알튀세르식으로 말하자면 호명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속에서 사진의 장치에 내재한 권력의 구조가 다른 많은 이야기들, 질서들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따라서 첫 번째 화자에 따르면 사진에 고유한 권력, 사진에 고유한 시선/감시의 메커니즘은 초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문단의 화자는 활용보다는 곡용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곧 어떤 타자(또는 대타자), 어떤 권력이 자신의 예속자들을 이렇게저렇게 배치하고 위치시키고 포섭하는 일방적인 메커니즘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고/감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도록/감시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 경우 권력의 메커니즘은 초월적이라기보다는 횡단적/평면적이고, 이원적(“너”, “당신/들”)이라기보다는 다원적이며, 인격적이라기보다는 익명적이다.

  왜 이러한 차이가 “활용”과 “곡용” 사이의 대비로 나타날까?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대비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인도유럽어에서 활용은 동사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어/주체의 변화에 따라 같은 동사/같은 행동이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가령 불어에서 “가다”라는 의미의 “aller”라는 동사는 각각의 주어에 따라 “나는 간다je vais” "너는 간다tu vas", "그/녀가 간다il/elle va" "우리가 간다nous allons" "너희들이 간다vous allez", "그/녀들이 간다ils/elles vont" 등으로 활용된다. 반면 곡용은 명사류가 성, 수, 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활용의 경우 문제는 각각의 주어/주체들이 단독으로 수행하는 행위/동작인 데 반해, 곡용의 경우에는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또는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른 주어/주체의 변화양상이 문제라는 점이다. 격변화가 상당히 소멸한 불어보다는 격변화가 좀더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는 독일어의 예를 들면, “나”라는 의미의 대명사 “ich”는 주격(1격)은 “ich” 소유격(2격)은 "meiner" 여격(3격)은 “mir” 대격(4격)은 “mich”로 변화된다. 그래서 각각의 명사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형태가 바뀌게 된다. 예컨대 “나는 너를 사랑한다Ich liebe dich”에서 “나ich”는 주격으로 쓰이고 “너du”는 대격인 “dich”로 쓰이지만, 반대로 “너는 나를 사랑한다Du liebst mich”에서는 “너”가 주격으로 쓰이고 “나”는 대격인 “mich”로 사용된다. 따라서 곡용에서는 활용과는 달리 주어/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 주어/주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활용이 초월적/이원적/인격적인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데, 그리고 곡용은 평면적/다원적/익명적 관계를 나타내는 데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첫 번째 문단과 두 번째 문단의 차이가, 두 문단의 화자가 각자 파악하고 있는 사진의 권력의 메커니즘의 차이가 “활용”과 “곡용”의 차이로 대비되는 것이 (충분히는 아닐지 몰라도)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단을 더 보기로 하자.


105쪽 번역문: 아니, 여기서 말하기를 강요당하는 침묵, 다시 한번 우리로서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가능한 발화parole에 다른 방식으로 부합한다. 그것이 가진 침묵으로서의 전략은 다른 예술 매체를 통해서는 조금이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진의 사건은 일종의 또다른 구조를 가지는데, 이것이 내가 말하라는 명령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바로 그것이다.

원문 페이지 IV: Non, le mutisme don't il est ici demandé de parler, et nous ne savons pas encore à qui, se rapporte autrement à la parole possible. La stratégie de son silence n'a rien à voir avec le médium de ces autres arts. L'événement photographique a une autre structure, c'est ce que je devrais vouloir dire sous sa loi.    

수정 번역문: 아니, 여기에서 말하도록 요구되고 있는, 그리고 누구에게 이러한 요구가 제기되는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침묵작용mutisme은 가능한 말과 다른 식으로 관계맺게 되지. 그 침묵의 전략은 이 다른 예술 매체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사진의 사건은 다른 구조를 갖고 있고, 내가 이 구조의 법칙에 따라 말해보아야/의미를 전달해야 할 것devrais vouloir dire이 바로 이러한 구조이지.


  이 문단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고 번역하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 문단은 우리가 인용하지 않은 바로 앞 문단의 화자가 이 사진집, 포토로망에 언어/담론이 부재하는 것을 “목소리 없는 예술들, 곧 회화, 조각, 음악”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이 사진집, 포토로망에 나타나는 침묵작용은 다른 비언어예술과 다른 고유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단에 대해 역자가 붙인 11번 역주를 한번 보자. “침묵은 말해질 수 없는 것 혹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사진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부분들과 시퀀스, 롤들이 반복되고 그 반복의 연속성이 순서를 바꾸어 역전의 구도를 가능하게 하므로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더욱 말해질 수 없었던 것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가 여기에서 침묵은 사진의 특성상 부분과 부분 사이에 항상 분절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빈 공간과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빈 공간은 사진 시퀀스의 불연속적인 연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이후 데리다가 사진 속의 사진, 혹은 전체와 부분으로서 시간의 가역적인 플레이를 주장하게 하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가역성, 전체가 부분들로 다시금 재삽입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하여 역전되는 이야기, 서술 등의 특성은 사진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으로서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후 명령에 딸, 즉 필연성을 가지고 데리다는 설명하겠다는 것이다.”(164쪽)

  이 역주의 내용이 올바른 것인가 여부는 둘째치고라도 이런 식의 역주가 과연 이 맥락에서 필요한 것인지, 이는 또 하나의 (불필요한) 선문답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음 두 개의 문단을 보자. 앞의 문단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문단은 상당히 긴 편이다.


105-106쪽 번역문: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기술하기 시작한다.

                  

                  아니, 아니. 나는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당신의 응시를 바라보고 그것을 따르고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단어라고 불리는 이것들[역주 16: 이미지들]이 누구에게 말해져야 할지 모른다. 후자(이러한 것)는 분명 망설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지만 개개의 사람들personnes 사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역주 17]은 아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 쓰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지금 오직 당신만을 위해 말하고자 애쓰는 가장 중요한 내용도 알고 있다. 나는 오직 당신과 더불어 바라보고, 당신만이 여기서 내가 감수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시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직 우리만을 바라보며, 그로부터 시대착오l'anachronie적 성격을 띠며, 결과적으로 보아야 할 어떤 것과도 무관하며, 그런 것을 제시하지도 않는 것, 그리하여 아마도 이 사진 연작과 무관한 채로 남아 있는 이 단어들의 자리바꿈이 존재하게 된다[역주 18]. 그것은 오히려 여러 가지 의미의 범주들 사이에서 수신자에게 생기는 망설임이다. 그러므로 수신이 통보된 지역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망설임인 것이다. 여기서 사행(事行)procés[원문 그대로-인용자]이 발생한다: 그러니 말이란 게 한 번의 호흡으로du même coup 하나 이상의 남자와 하나 이상의 여자를 호명하므로 나는 동시에 (남성) 청중un spectateur와 여성 청중la spectatrice[원문 그대로-인용자]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원문 페이지 IV-V: Voilà qu‘on commence à raconter, au moins à décrire.

                  

                  Non, non je renvois aux images, je regarde et suis vos regards. Je l'ai dit, je ne sais pas à qui il aurait été demandé d'adresser ces choses qui sont des mots; cela peut signifier l'hésitation, certes, mais non pas entre des personnes singulières ― tu sais que j'écris, moi, pour toi, et que de l'essentiel en ce moment je ne parle qu'à toi seule, je ne regarde qu'avec toi, toi seule a droit de regard sur ce que je risque ici, cela ne regarde que nous, d'où l'anachronie, le déplacé de ces mots qui n'ont et ne donnent finalement rien à voir, demeurant peut-être sans rapport avec ces suites photographiques ― mais une hésitation entre plusieurs catégories de destinataires, et donc de lieux pour accusés de réception. Voilà le procès: vais-je du même coup, car on s'adresse toujours à plus d'un et plus d'une, parler pour un spectateur, pour une spectatrice?

수정 번역문: 이제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적어도 기술하기 시작하는 것이군.


            아니, 아니 나는 이미지들에 준거하고 있고, 당신/들의 시선들을 바라보고 따르고 있어.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단어들이라는 이 사물들이 누구에게 전달되도록 요구받고 있는지 알지 못해. 이는 분명 망설임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개별 인물들/단수 인칭들 personnes singulières 사이에 존재하는 망설임은 아니지(자네는 내가 자네에게/자네를 위해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순간 본질적인 것은 내가 자네에게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고 있지. 나는 자네하고만 관계하고 있고/자네하고만 바라보고 있고je ne regarde qu'avec toi, 자네 혼자만이 내가 여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시선의 권리/감시의 권리를 지니고 있지. 이 일은 우리에게만 관계된 일이고/이것은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고cela ne regarde que nous, 바로 이로부터 이 단어들, 볼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결국 아무런 볼 것도 선사하지 못하고qui n'ont et ne donnent finalement rien à voir, 이 연속적인 사진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마도 관계가 없는 채로 남아 있게 될 이 단어들의 비시간순서적anachronie 성격, 제자리에서 벗어난/부적절한déplacé 성격이 나오게 되지). 이는 오히려 여러 가지 범주의 수신자들destinataires 사이에서, 따라서 소환장 수령자들을 위한 장소들lieux pour accusés de réception 사이에서 존재하는 망설임이지. 바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소송이 시작되지. 나는 동시에 ―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하나의 남성 이상, 그리고 하나의 여성 이상에게/더 이상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에게plus d'un et plus d'une 자신을 전달하기 때문이지 ― 한 남성관객과 한 여성관객에게 말을 하게 될까? 


  이 두 문단도 매우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단들이다. 우선 첫 번째 문단에서 원문의 “on”을 “우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on”은 상대방 화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이 문단의 뜻은 “사진과 담론, 언어와 이미지의 차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이 사진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니, 이제 너도 어쩔 수 없이 이 사진들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말 어법에서는 “너”나 “자네”라는 주어를 생략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에, 수정 번역문에서는 주어 없이 번역을 했다.

  두 번째 문단은 이러한 반응에 대한 재반론이다. 곧 이 문단의 필자는 자신이 담론활동, 이야기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강조하면서, 자신(및 상대방 화자)이 말하는 단어들/언어의 수신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이어서 제대로 파악해내기가 어렵다.

  우선 (1) 나와 너/미지의 수신자들 또는 소환장 수령자들의 대비, (2) 단수 인칭들/범주들의 대비, (3) 이미지들/단어들 사이의 대비가 이루는 체계에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문단의 논의에 따르면 “나”와 “너” 같은 개별적인 인물/인격들 사이에는 시선/보는 것만이 문제될 뿐이며,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데리다는 “ne regard que”라는 어구를 여러번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만을 바라보다”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고만 관계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이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나와 너 같이 대면하고 있는 사이에서는 “regard”만 요구될 뿐 단어들/언어는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당연히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된다). 반면 단어들/언어는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또 이 사진집에 대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수신자들, 소환장의 수령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단의 화자는 자신이 이 수신자들이 누구인지, 또 소환장을 수령하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한 채 말을 하고, 단어들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망설임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말해주듯이 이 망설임은 성별의 문제, 젠더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수사법적 표현은 “car on s'adresse toujours à plus d'un et plus d'une”라는 문장, 특히 “plus d'un et plus d'une”이다. 불어에서 “plus”는 “보다 더”라는 의미를 갖는 부사인데, 이것이 “ne”라는 단어와 함께 “ne ... plus”라는 형태로 쓰이게 되면, “(더 이상) 아니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따라서 “plus d'un”은 “하나 이상”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가 아님”이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에서는 “un”과 “une”가 번갈아 사용되었다는 점인데, “un”은 남성명사나 관사(“한 남자un homme”에서처럼)로서 “하나”를 가리키며, “une”은 여성명사나 관사(“한 여자une femme”)로서 "하나"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맥락에서 “plus d'un et plus d'une”이라는 어구는 단지 “하나 이상의 남성과 하나 이상의 여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가 이 두 번째 문단의 대략적인 의미인데, 이 문단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을 두고 꼼꼼히 대화의 전후 맥락들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는 지금까지 살펴본 번역문들의 두 배 가량 되는 내용들을 검토하고 수정하려고 했지만, 지루하고 힘들기도 하거니와 이 일에만 매달려 있을 여유가 없어서, 번역문에 대한 검토는 이 정도로 그치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시 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정도의 검토만으로도 이 번역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리고 데리다를 번역하는 일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다시피 이 번역본은 매쪽마다 오역이 나오는 게 아니라 거의 매 문단마다 오역이 나올 정도로 번역에 문제가 많으며, 병기된 불어 철자들에 다수의 오류가 있고 상당수의 비문들도 존재한다. 이는 출판사 쪽에서 거의 교열이나 교정을 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역자만이 아니라 출판사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의 하나”―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라고 광고할 만큼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더 나아가 역자가 불어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면, 데리다 전문가나 적어도 불어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외주를 줘서 이 책의 번역을 꼼꼼하게 교열하고 교정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상태는 출판사에서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이 책을 출간했음을 잘 말해준다. 그런 마당에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재판을 찍을 경우에는 아예 [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라는 민망한 제목을 빼고 대신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 시선의 권리]라는 제목으로 고쳐내는 게 옳을 것이다. ‘포토로망의 번역본’이라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어이없는 점은 [북 앤 이슈]라는 서평 전문지를 내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이런 참담한 오역본을 이 달의 우수도서로 선정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 쪽 이야기로는 “책의 출간에 의의를 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단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고질적 문제점 중 하나가 오역의 문제라는 점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 출판인들의 모임이 한국 출판계의 실정을 그처럼 모른다면, 누가 한국 출판계의 실정을 자각하고 바로 잡겠는가?

  따라서 한국출판인회의의 공신력 역시 이 책으로 인해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고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데리다의 책이 이처럼 우수도서로 선정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오역본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과연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이래저래 이 책의 출간과 우수도서 선정은 한국 출판계 및 인문학계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건, 또하나의 해프닝으로 기록될 것 같다. 제발 이런 류의 참담한 사건, 이런 식의 어이 없는 해프닝은 이번으로 끝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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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2004-10-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지금 마구 졸음이 와서 글을 끝까지 못 읽었어요; 나름대로 옆에 사전도 펼쳐놓고 열심히 읽어보려고 했는데 -.- 여튼 참 힘드셨겠어요;

그리고 궁금한 것 하나 : 맨 첫 문장에 나오는 "...j'ai pu encore..."에서, pu는 어떤 기능을 하나요? pouvoir의 과거분사인 듯한데, 책의 번역과 balmas님의 번역 모두 pouvoir에 해당하는 의미는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요. pu를 고려한다면, "나 자신에게 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되지 않는지...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

balmas 2004-10-01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맞습니다. "pu"는 pouvoir의 과거분사죠.
그러니까 그대로 번역한다면 "나 자신에게 할 수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할 수 있었던"과 "했던" 사이에 큰 의미상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읽기 쉽게 "했던"이라고 옮긴 거죠.

가을산 2004-10-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 그럼 '추천할 만한 번역서'로는 어떤 것이 있나요?
데리다, 그람시, 들뢰즈, 네그리 이런 사람들 책으로요.
정말 모르겠어요.... ㅜㅡ

딸기 2004-10-0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에 관심이 많으시구나...가 아니고,
리뷰와 페이퍼에 철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네요. 무서워졌어요. ^^

paby 2004-11-02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진태원으로 검색해 보세요. 바로 balmas님 자신의 번역!

마냐 2005-04-08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악의 오역으로 꼽힌 책들의 출판사들, 이름값은 하는 줄 알았는데...꼭 그런건 아닌 모양이군요. 저 책을 그저 휙휙 사진만 구경하고 데리다 글은 보는척 마는척 한 인간도 있슴다. 뭐, 사진만으로도 인상적이었슴다만...^^;
암튼, 지성을 유머로 감춘 발마스님의 이중성, 넘 좋아요. ^^

balmas 2005-04-0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지성하면, 역시 박지성이죠. ㅋㅋ

zelatop721 2010-08-14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번역본으로 추천할만한 책들 리스트를 부탁드립니다. 아주 개인적인 리스트로요.
 
 전출처 : 메시지 > 조선일보, '자세'를 잃다.

조선일보, ‘자세’를 잃다

 

 

내 보기에 노무현 정부는 왼쪽 깜박이를 켜고는 줄곧 우회전해 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보수층은 그 왼쪽 깜박이마저 성가시고 신경 쓰이는가 보다.

하긴 왼쪽 깜박이가 계속 켜져 있다 보면 언젠가 한번쯤 좌회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진보진영에 속한다는 사람은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보수층은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요즘 보수층이 느끼는 불안은 과도한 것이다.

‘할 말을 하는 신문’이라 주장해온 <조선일보>가 막말하는 신문이 된 것을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7월 말에 여당의 사립학교법 개정 움직임에 대한 사설의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면서부터다. “이제 이 나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우리의 아들 딸들은 조국의 부끄러운 모습만 집중적으로 교육받고, 6·25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의 사람 목숨을 앗아간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학습하고, 미국 등의 동맹국이 추악한 나라라는 교육을 받으면서 대한민국의 ‘신(新) 국민’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 나라 학교는 ‘인간개조(改造) 공장’이 된다는 이야기다.” 시쳇말로 ‘오버도 한참 오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8월 초에는 시민단체에 대한 국고 지원을 문제 삼다가 우스운 꼴을 당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아둔한 기사라는 걸 깨달았음을 자인하는 듯이, 며칠 뒤에는 “NGO에 대한 국가지원은 정당하며 우리의 경우 액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론을 실었다. 코메디 아닌가.

국보법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조선일보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다시 꺼내 읽은 것 같았다. 현재를 내전의 전야라 우기고 우익 총궐기를 외치는 듯한 글귀들이 지면 여기저기에 등장했고, 급기야는 전두환 빼고는 얼추 다 모인 것 같은 5공인사 중심의 선언문을 70, 80년대 독재에 항거하며 발표되었던 시국선언의 전통에 연결하는 창의력을 보이기까지 했다.

8월에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나라 전체가 남의 족보를 뒤지고, 자기 족보를 점검하느라 고문서 더미를 헤치고, 때론 이 나라를 강탈했던 일본 국회의사당 서고까지 찾아가 일제의 헌병 명단과 순사 명단을 챙기며 6·25 부역자 재판기록을 다시 읽는 이 시대착오의 참담한 국가파괴 행위”라고 몰아부쳤다. 그리고는 9월 들어서 그들이 그려준 가계도만 보아도 가족사적 아픔이 적지 않았을 김희선 의원 집안의 내력을 대문짝만하게 기사화함으로써 자신들이 과거사 진상규명법을 비판하며 예단했던 폐해를 몸소 실천하기까지 했다.

이런 조선일보를 두고, 증오심이
기승을 부려 예전의 교활함과 노회함을 잃었다고밖에는 달리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예전의 조선일보는 신중함에 더해 신속함을 가지고 있었고 의뭉스러움과 독살스러움을 겸비했으며 그 양면을 내보임에 있어 솜씨 있고 자재로웠다. 그러나 지금 조선일보는 포효하고 있기는 하되 덫에 걸린 짐승처럼 보인다. 한 마디로 스탠스를 잃었다.

조선일보의 이런 허둥거림은
오래 전 예고된 것이었다. 조선일보가 80년에 ‘올인’했던 전두환 독재정권이 87년 민주항쟁으로 물러났던 바로 그때 조선일보의 정오는 이미 지나 버렸다. 89년 베를린 장벽과 함께 냉전이 무너져 내리고 더불어 자신을 나라를 세운 세력으로 참칭할 수 있게 해준 반공이라는 깃발이 세계사적 문맥을 상실했을 때, 조선일보의 시계는 늦은 오후 시간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호적인 국가권력에 이어 의회권력마저 잃게 되자 오래된 불안과 초조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자라났고 그것이 지금 조선일보가 내비치는 흥분과 공격성의 뿌리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렇게 공격성을 무분별하게 표출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몰락의 진행을 증거한다고 할 수 있다.

김종엽/한신대 교수·사회학 [한겨레신문, 200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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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1백년만에 대출된 책 반납

 

 

[노컷뉴스 2004-09-29 14:55]
영국 스코틀랜드의 한 도서관에서 대출된 책이 100여년 만에 반납되었다고 27일(현지시간) 영국의 BBC인터넷 판이 보도했다.

100 년이나 연체된 이 책의 연체료를 따지면 5000파운드(한화 약 천만 원)에 달하지만 고서의 귀환을 반갑게 여긴 도서관측에서는 이 엄청난 연체료를 면제해주었다고.

해리엇 앤더슨이 쓴 '1901~1904 년 인버네스 스케치(Inverness Sketches 1901 to 1904)' 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인버네스의 주민이었던 스타우트 톰슨(Stuart Thomson,63)씨에 의해 남아프리카의 벼룩시장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지난 1971년 인버네스를 떠나 이민을 간 그는, 3개월 전 요하네스버그의 한 벼룩시장에서 자신이 살던 지역의 도서관 이름이 찍힌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아무리 비싸더라도 이 책은 꼭 사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구입했다며 " 이 책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밝혔다.

인버네스 도서관의 한 직원은 " 이 책은 1908년 책의 저자가 인버네스 도서관에 기증한 책으로 참고서적 코너에 제대로 반납되었어야 할 책이었으며 그에 앞서 외부대출이 불가능한 책이었다"고 전했다.

도서관 사서인 에드윈 버리쥐는 "우리 도서관에서는 이자벨 앤더슨이 쓴 도서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며 "100년 만에 돌아 온 이 책을 '앤더슨 컬렉션' 코너에 추가할 것 " 이라고 덧붙였다.

노컷뉴스 전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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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9-2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선배 한 분이 졸업하면서 8달 연체된 책 몇 권을 반납하는 걸 지켜보며 비웃어준 적이 있는데, 정말 그건 새발에 피군요.^^

로드무비 2004-09-2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모르게 연체하고 있는 책은 없는지 책꽂이에 시선이 가네요.
재미있는 뉴스입니다.^^

릴케 현상 2004-09-2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네요 저는 도서관책반납은 기한을 지키는데 고의로 안 돌려 준 책은-_-음

balmas 2004-09-2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 놈들도 몰래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들 좀 빨리 반납해야 할 텐데.
이상한 놈들이야, 정말 ...

chika 2004-09-2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우리도 연체료 감해줄 수 있는데 말이죠~ !

balmas 2004-09-3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hika님은 마음이 참 넓으시군요.
저는 연체료에 이자까지 씌워버릴 생각인데 ...^^

릴케 현상 2004-09-3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책을 보다 보니 예전에 프랑스에 있는 모나리자(맞나?) 그림을 이태리 사람이 훔쳐서 이태리에 반납했는데 이태리측에서는 프랑스에 다시 돌려준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러면서 그게 프랑스에 있는 게 낫다는 논평을 하더군요. 빨리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할 수는 없는 걸까요?

balmas 2004-09-3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저는 금시초문인데 ...
어쨌든 프랑스 놈들(꼭 프랑스 놈들만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때 보면 아주 정나미 떨어질 때가 있죠 ...

릴케 현상 2004-09-30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첸의 세계명화 비밀탐사>의 모나리자 편에 보면^^1910년대에 모나리자를 이탈리아인이 훔쳐서 "나폴레옹 시대에 도둑맞은 국가 보물들 중 하나를 고국에 돌려주고 싶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는 군요. 뭐 어쨌든 그 사람은 체포됐고,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돌려줘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고," 하고 있네요.
 

지율 스님 추석 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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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한국의 출판기획자>(15)도토리 심조원 대표

출판코너를 채우기 위해 그간 나름대로 찾다보니 "문화일보"에서 괜찮은 기획을 진행했었더군요. 기획 제목은 "한국의 출판기획자를 찾아서"인데, 출판에 있어 기획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겁니다. 책을 구해 읽다보면 작게는 단행본 한 권의 기획, 크게는 총서나 전집과 같은 시리즈 기획물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편집을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따른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자는 직접 글을 써서 자신의 의중을 전할 때도 있지만 이렇듯 "선택과 배제"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의중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현대 출판 100여년의 역사에서 '기획'은 가장 뒤늦게 발견된 분야이기도 합니다. 70년대말에야 비로소 기획자란 이들이 등장한 셈이니까요.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기획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면서도 정작 기획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 시리즈를 읽다보면 저절로 문리가 트이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하면서 새로운 시리즈의 퍼 나르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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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출판기획자>(15)도토리 심조원 대표
 
 
 
오승훈기자 oshun@munhwa.co.kr 
 
“자네 시골가서 6개월 동안 할머니들과 얘기나 하다가 돌아오지.” 89년 겨울 서울 합정동 보리출판사 사무실. 입사원서를 들고 찾아온 스물네살의 신출내기 편집자 심조원(37·현 도토리 대표)씨에게 윤구병(57·현 변산공동체 대표)사장은 다짜고짜 낙향을 엄명했다. “듣기만 하라”는 주문도 보태졌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뒤 을지로 출판동네를 전전하다 “배우고 싶습니다”라며 입사를 간청했던 심씨는 도리없이 고향인 경북 청송으로 내려가야 했다.

동네 할머니들의 옛얘기와 넋두리를 듣고, 녹음까지 했다. 심씨는 ‘유배’같은 생활을 하면서 윤사장의 뜻을 헤아렸다. 사회변혁이 지식인의 가장 큰 임무라고 생각했던 시절, 그때까지 지식인은 민중보다 먼저 말하고 가르치려 했다. 하지만 바른 관계는 민중이 말하고 지식인은 그것을 담아서 전달하는 역할이어야 한다. 출판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자각토록 한게 윤사장의 의도였다. 외적 성장에 비해 내실을 다지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 어린이 출판분야에서 자연생태·환경 그림책의 전문기획자로 입지를 다진 심씨. 출판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담금질’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88년 설립한 보리출판사는 한국적인 어린이 그림책을 추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린이 책 시장은 위인전과 외국서적 번역물이 주류였고, 전집류의 방문판매에 의존했다. ‘천사주의’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마냥 예쁘고, 환상을 심는 그림책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움트고, 어린이 교육이 갖는 중요성과 ‘국적있는’ 어린이 도서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다양한 출판이 모색된다. 보리출판사는 그런 새 흐름을 주도했다.

심씨는 보리출판사가 선보였던 ‘올챙이 그림책’(91년 완간)의 제작에 참여하면서 어린이 책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다. “미혼인데다, 특별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품도 아니었는데 새롭게 어린이들을 보기 시작한거죠. 집단화가 안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대상이지만 그들의 세계에도 논리가 정연하고 다툼에도 이유가 있지요.” 어린이에게 한국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다룬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었던 심씨는 ‘달팽이 과학동화’(전 50권)를 만들면서 그 구상을 현실로 옮겨갔다.

우선 일러스트레이션이 달라져야 했다. 자연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그림이 아이들의 인지구조에 맞도록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 세밀화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각종 식물, 동물 도감이 많았지만 그림에 느낌이 없거나 외국 것을 베낀게 태반이었던 실정에서 ‘이쁜 그림’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담은 표현기법을 개발해야 했다.

접근 방식도 달라야 했다. “당시 식물도감에는 대개 우리가 먹는 벼, 보리가 없었어요. 또 동물도감에는 한국인과 가장 친숙한 개, 돼지가 없고 코끼리, 사자, 기린 등 열대동물들만 가득했어요. 아이들이 낯선 자연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죠.” 심씨의 문제의식은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자연을 담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품을 파는 일이 시작됐다. 자동카메라를 들고 산, 강을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며 찍어댔다. 통바지와 고무신 차림으로 1주일에 3~4일은 ‘출장중’이었다. 한겨울 계곡을 넘다 폭설을 만나기도 하고, 모기알을 떠다 사무실에서 키우는 일도 감수해야 했다.

특히 그림과 글쓰기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은 기획자의 주요한 몫이었다. 그림책의 종류에 따라 글의 역할이 다르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그림을 보는데 글이 방해되면 비켜줘야 해요. 그림으로 모자라면 글이 받쳐줘야 하지요. 글은 그 자체로 그림이 되기도 하고, 때론 캡션(사진설명)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겁니다.” “내 글로 모두 보여줘야 한다”는 작가들을 설득하는 일, 아이들의 언어발달 과정을 고려한 문장을 어른 작가들이 이해하는 것 등이 난제였다.

독특한 것은 집단창작 방식이었다. 심씨는 이를 ‘우르르 시스템’이라고 지칭했는데,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듯 경험을 축적해야 하는 상황인터라 난제가 등장할 때마다 함께 머리를 맞대야 했던게 출판기획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96년에는 보다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씨, 화가 이태주씨 등이 편집기획자집단인 ‘도토리’를 설립해 보리출판사에서 독립했다. 그런 역량을 모아 ‘보리 아기그림책’(5세트·1994년)에 이어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1997년),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동물도감’(1998년)을 내놓았다.

이들은 기존의 도감과 형식부터 색달랐다. 학문적 분류법을 따르지 않고 생활에서 서로 연관성을 가진 주제별 분류법을 시도했다. ‘보리 아기 그림책’은 10만 세트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가 됐고, 식물도감과 동물도감은 각각 3만부 정도 팔렸다. 이달초에는 제작하는데 6년이 걸린 ‘나무도감’이 출간됐다. 조만간 ‘곤충도감’도 선보인다. 생태그림책 ‘갯벌에 뭐가 사나 볼래요1’을 시작으로 갯벌살림, 산살림, 들살림 등을 주제로 묶어 약 50여권을 출판할 예정이다.

심씨가 기획출판한 책은 약 100여권. “딱히 히트작이랄 건 없지만 모두가 판을 거듭하며 살아있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는 심씨의 말처럼 어린이 책시장에서는 스테디셀러가 중요하다. 그는 어린이 책시장에 대해서 “출판시장의 의미를 공간에서 시간으로 바꿔야 한다. 당장 보이는 시장보다 멀리 내다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1년에 10만부가 팔릴 책을 만들게 아니라 1000권씩 10년 동안 팔리는 책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이 출판의 특성상 육아일기를 쓰는게 의무이고, 신입사원 모집때는 ‘시골출신 우대’라는 이색 조항이 추가되는 도토리. 현장취재를 책에 반영하고, 박제화된 자연이 아니라 생활과 교류하는 오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편집기획원칙은 도토리 기획의 차별화를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다.

<오승훈 기자 oshun@munhwa.co.kr>

<문화일보  2001/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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