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금요일) 낮에 일이 있어서 문학과지성사에 들렀는데, 마침 [테러 시대의 철학]을 한 권 줘서(공짜밝히기는 ... -_-;;;) 조금 읽어봤다. 생각대로 번역이 괜찮더군. 아직 책을 못본 분들을 위해 한 대목을 맛보기로 인용해 보면(저작권 시비에 말려들지는 않겠지???) ...

 

보라도리: 9.11은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목도하게 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인상을 말이죠. 세계대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렇죠?

데리다: Le 11 septembre[이하 9.11]라고, 혹은 우리가 두 언어로 말하는 데 동의한 이상, "september 11"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나중에 우리는 이 같은 언어의 문제로 되돌아와야 할 겁니다. 또한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딱 날짜만을 말하는 이러한 명명 행위의 문제로도 되돌아와야 할 거구요--당신은 '9.11'이라 말하면서 이미 인용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이에 대해 제가 뭔가를 말하도록 권유하려고 당신은 지금까지 5주 동안 우리의 공적 공간과 사생활을 점령하고 있는 어떤 날짜 혹은 날짜 기입을 마치 따옴표 안에서인 듯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프랑스 숙어로 말하자면, 뭔가가 날짜를 만듭니다fait date. "날짜를 만들다, 획기적 사건이 되다", 이는 늘 두드러지게 각인되는 사건, 유일무이한 사건, 여기 식으로 말해, "전례 없는" 사건으로 느껴지는--외견상 직접적으로는 그런 사건으로 [인식된다기보다는] 최소한 느껴지는--무언가에 의해 가해진porte 일격이며, 이것이 남긴 효력portee 자체입니다.

물론 저는 "외견상 직접적"이라 말했습니다. 이 '느낌'이란 게 보기보다 덜 자생적이거든요. '느낌'이란 대부분 조종된 것이며, 짜맞춰진 건 아닐지라도 구성된 것, 어쨌든 경이적인 기술-사회-정치적 기계로 매개된 것, 매체화된 것입니다. 하여간 "획기적 사건이 된다는 것"은 '뭔가'가, 아직 어떻게 정체를 부여하고 규정하고 인지하고 분석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망각할 수 없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뭔가'가, 보편력calandrier universel의 공용 문서고에 남게 될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입니다. 물론 이는 가정상의 보편력인데, 왜냐하면 우리에겐 가정과 전제들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시작에서부터 강조하고 싶군요. 이러한 가정과 전제는 유치하고 독단적인 전략이거나, 아니면 심사숙고되고 조직되고 계산된 전략이거나, 그도 아니면 둘 다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날짜를 가리키는 색인, 날짜만을 부르는 수식 없는 벌거벗은 행위, 극소적 지시사, 이것이 겨냥하는 극소주의적 표적, 이는 또한 뭔가 다른 것을 표시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뭘까요? 그건 바로, 방금 일어난 이 '것', 이 가정상의 '사건'을 어떻게든 달리 명명할 수 있는 개념이나 의미가 없다는 사실, 바로 그겁니다. 가령, '국제 테러리즘'이라는 행위--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는 우리가 말해보려는 어떤 것의 독특함을 파악케 하기에는 결코 엄밀하고 만족스러운 개념이 아닙니다.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도래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느끼지만, 이 '것'은 특정한 귀결들을 부인할 수 없도록 펼쳐냅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 이 '사건'의 장소와 의미는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개념 없는 직관처럼, 지평에 아무런 일반성을 지니지 않는, 심지어는 어떠한 지평도 수반하지 않는 유일무이함처럼, 이것은 언어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언어는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게 되고, 결국 어떤 날짜를 기계적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이 날짜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해버립니다. 일종의 제의적 주문처럼, 이와 동시에 축귀의 시처럼, 저널리스트적 연도(連禱)나 자신이 뭘 말하는지 모르고 있음을 자백하는 수사적 상투어처럼 말이죠.

사람들은 9.11, 9.11, 9.11이라고 말하거나 명명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무엇을 말하거나 명명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호명이 간결한 건(9.11, 9.11) 단지 경제적 필요나 수사적 필요 때문만은 아닙니다. 환유--어떤 이름, 어떤 숫자--의 전보문은 사람들이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거나 재인하지 못한다는 것, 심지어는 인지하지도 못한다는 것, 아직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스스로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재인지함으로써 규정 불가능한 어떤 것을 털어놓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계산되었든 아니든, 잘 계산되었든 아니든) 9.11,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 가져온 최초의 효과, 논란의 여지 없는 최초의 효과입니다. 즉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아주 잘 알지는 못하기에 오히려 더더욱 그것을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단번에 두 번의 푸닥거리를 하기나 하려는 듯, 곧 한편으로는 '사물' 자체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주술적으로 몰아내기 위해서(반복은 늘 정신적 외상traumatisme을 중화시키고 무감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보호해주는 효과를 낳으니까요. 텔레비전 이미지의 반복도 마찬가지 경우인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하기로 하죠),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 그 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명명하고 규정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단순히 날짜를 지시하는 것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9.11, 뭔가 끔찍한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을 가능한 한 이 같은 언어 행위 및 진술 행위 가까이서 부인하기 위해. 실상 우리가 폭력에 대해 아무리 분노한다 한들, 다른 모든 분과 더불어 저 역시 그렇듯, 숱한 사망자에 대해 진심으로 비탄해 마지않는다 한들, 문제가 되는 것이 결국 이런 거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나중에 이 문제로 되돌아올 겁니다. 당분간 우리는 다만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주 동안 뉴욕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사실은 제가 9월 11일 날 머물렀던 중국에서, 그 다음 9월 22일 가 있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이미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약간은 맹목적으로 이 날짜에 준거하지 않고서,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서, 아무 것으로나 말을 시작한다는 건 단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금지되어 있다고,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고, 이미 사람들은 느끼고 있으며 또한 당신에게도 그렇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특히 공개석상에서 말이죠. 저는 어김없이 이 명령에 따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어떤 의미에선 당신과의 이 우애로운 인터뷰에 참여함으로써 저는 또다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충격과 가장 충심 어린 연민을 넘어, 9.11, 여기 맨해튼의 코앞에 있고 워싱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막 일어난 일에 대해, 일어난 듯 보이는 일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기를, 그리고 "사유하기"를 호소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름을 붙이고 날짜를 기입하는 이 같은 언어 현상을, (수사적이면서도 주술적이고 또한 시적인) 이 반복 강박을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늘 믿고 있습니다. 이 강박이 무엇을 의미하고 나타내고traduit 혹은 누설하는지trahir[이건 "기만하는지"나 "왜곡하는지"로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인용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성급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하고 싶어하듯 언어 속에 빠져들어 감금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는 바로 언어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그리고 뭘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9.11, 9.11, 9.11, 9.11"이라 반복하도록 부추기는지를, 언어와 개념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른바 사건이 가져온 이와 같은 일차적 효과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좀더 알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여유를 가지고서 자유롭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결국 아직 알지 못하는데도, 그리고 당신이 부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9.11' '9.11'이라 명명하라는, 반복하라는, 또다시 명명하라는, 그 자체 위협적인 이러한 명령. 도대체 어디서 이러한 명령이 우리에게 도래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명령에 강제될까요?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이 위협적 지시를 내렸을까요?(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는 테러리스트가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테러를 가하는[공포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 말에 동의합니다. 즉 의심의 여지없이 이 '것', '9.11'은 "우리에게 대사건major event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 경우 인상이란 뭘까요? 사건이란 또 무엇입니까? 특히 '대사건'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저는 하나 이상의 주의 사항을 강조하려 합니다. 물론 경험주의를 넘어서기를 겨냥하면서도 저는 이를 외견상 '경험주의적' 스타일로 수행할 겁니다.  분명 18세기 경험주의자라면 문자 그대로 이렇게 말하겠죠. 거기 어떤 '인상'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이는 당신이 영어로--이는 우연이 아닙니다--'대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준 인상이라고. 저는 영어를 강조했는데, 물론 이는 영어가 당신의 언어도 저의 언어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뉴욕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반복하라는] 명령이 무엇보다도 영어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지 미국의 거의 두 세기를 거치는 동안--정확히 말해 1812년 이래로--처음으로 제 국토에서 표적이 되고 습격당하고 침범당했다 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가 이 폭력의 표적이 되었다고 느끼는 세계 질서가 대부분 앵글로-아메리카 고유어idiome[이런 경우에는 "방언"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 같다-인용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 질서에서 이 고유어는, 세계 무대를 지배하는 정치적 담론과, 국제법, 외교 관례, 미디어, 그리고 가장 거대한 기술과학적, 자본주의적, 군사적 권력과 불가분하게 연계되어 있죠. 그리고 지금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헤게모니가 지닌 여전히 수수께끼같으면서도 결정적인critical 본질입니다. 결정적인''이라는 말을 저는 '결정하는' '잠재적으로 결정하는' '결정을 내리는'의 의미로 사용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며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이 '인상'이 정당하든 아니든, 이 '인상' 자체가 하나의 사건입니다. 바로 이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확실히 분화된 방식으로 고유하게 세계적인 효과일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인상'은, 그것을 숙고하고 소통시키고 '세계화'한,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그것을 우선적으로 형성하고 산출하고 가능케 한 일체의 정서와 해석 및 수사법들과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상'은 그것을 산출한 "바로 그 사물 혹은 사태"와 닮게 되죠. 이른바  '사태'가 '인상'으로, 따라서 사건 자체가 '인상'으로 환원될 순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건은 (일어난 혹은 도래한) '사태' 자체와, 이른바 '사태' 자체가 부여하고 남겨두고 만들어낸 (그 자체 '자생적'이면서도 '조종된') 인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인상이 'informee[형식을 부여받는다/정보화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좀더 인용했으면 좋겠지만, 타자치기 싫어서(;;;), 사실은 저작권법에 저촉될까 두려워서(;;;) 이만 줄인다. 하지만 데리다의 전형적인 논변(또는 이 경우에는 즉흥적인 대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로 씌어졌을 경우에는 훨씬 더 다양한 수사법적 장치가 동원되고 논변의 가닥이 좀더 복합적이겠지만, 인용한 이 구절만으로도 데리다 특유의 논변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논변과정에서 중요한 한 문장이나 한 문단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면, 그만큼 데리다의 논변의 의미, 그것이 낳는 의미효과를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데, [시선의 권리]를 포함한 많은 국역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 문단을 찾기가 더 어렵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리다의 난해함의 8할은 바로 이런 오역 때문에 생겨나는 난해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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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하는 '역사시평' <1>과거사 규명과 현대사 연구                                                                                          2004-09-01 오후 3:24:38

  오늘부터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역사학자가 쓰는 '역사시평'을 연재합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1988년 창립된 진보적 한국사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현재 4백40여명의 역사학자들이 연구활동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넓고 긴 안목을 통해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역사학자가 쓴 '담배이야기' 연재도 곧 시작될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편집자
  
  과거사 청산 논란과 관련해 기자들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 통화의 빈도수가 최근 부쩍 늘었다. 질문 내용 가운데 과거사 청산의 대상과 방법, 청산을 담당할 기구 구성 등에 대한 질문이 많고, 여론 조사도 국민 다수가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보아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거사 정리를 학계에 맡기자는 주장이 일부 야당의 공식 입장으로 제기되는 형편이니 과연 그 당위성과 필요성에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 의문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나라당은 김영삼 정부 때 정신문화연구원에 설치되었다가 김대중 정부에 와서 사라진 현대사연구소를 모델로 현대사연구소를 새로 만들되 정부기관이 아닌 학술원 산하에 두고, 그 연구소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정리’를 하는 방안을 한나라당의 공식 입장으로 삼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학자들의 중립성에 기대는 외양을 취함으로써 학자들의 식견을 존중하고 학자들을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한나라당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 연구와 과거사 청산을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과거사 청산을 물타기 하려는 시도로 비칠 뿐이다.
  
  과거사 청산은 불가피하게 진상 규명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진상 규명이 먼저고 청산은 국민에게 물어보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부터 정리해야겠다. ‘과거사’란 무엇인가. 역사면 역사고, 현대사면 현대사지 과거사는 또 무엇인가. 과거의 사건(過去事)을 의미하는가, 과거 역사(過去史) 전체를 의미하는가. 과거사 청산의 경우 ‘청산’의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관계 사항 또는 주의, 사상, 과오 등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이다. ‘정리’의 사전적 정의는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이 되었든 ‘과거 역사 일반’이 되었든 정치가들이 타협한다고 해서 이미 흘러간 과거사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인가. 또 무엇보다 진상이 규명되어야지 청산을 하든 정리를 하든 할 것이 아닌가.
  
  지금 논란이 되는 과거사 청산이 우리 국민들의 역사 지식이 부족하고 역사 인식이 천박하기 때문에 전국민을 향해 근현대사를 재교육하려는 국민적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이때의 ‘과거사’는 이 시대에 고유한 맥락과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과거사는 ‘우리 근현대의 어떤 시점에서 마땅히 해명되었어야 할 현실적, 역사적 과제가 당시의 억압적 사회구조와 정치상황으로 인해 미처 해명되지 못하고, 현재로 이월되어 새로이 역사적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들’이다. 그런 면에서 과거사 규명작업은 사실 자체에 대한 해명과 함께 그 사실이 제대로 해명될 수 없었던 사정의 규명과 시정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즉 과거사 청산에서 과거사는 결코 역사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진상 규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기된 것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정치적 음모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여당 대표가 선친의 친일 전력 때문에 정치적으로 낙마하는 것으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또 경제상황을 들어 과거사 청산을 미루자는 말이 있지만 듣기에도 딱한 것이 과거사 청산이 어디 경기 봐가며 하고 말고를 정할 일인가. 호황인지 불황인지 따져서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도대체 어떤 과거사이고, 그런 식으로 하자면 어느 세월에 과거사를 청산할 것인가. 결국 청산하지 말자는 소리 아닌가. 경제 걱정을 하는데 지난 봄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적 유행가가 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정치인들은 경제에 신경 쓰지 말고, 불법 정치자금 걷을 생각을 거두는 것이 이 나라 경제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점은 이제 국민적 상식이 되지 않았는가.
  
  과거사 청산은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과거사 청산의 타이밍과 관련한 이런 식의 논란을 보노라면 그동안 우리 사회의 역사적 감각이 얼마나 무디어지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하였는가를 보는 것 같아 씁슬해진다. 우리 현대사에서 과거사 청산은 나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정부수립 후 어렵게 구성된 반민특위가 끝내 좌절함으로써 일제 식민지기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고, 4.19 이후 거창 민간인 학살 등 6.25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나 했더니 그것 역시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경찰과 친일관료를 정권기반으로 했던 이승만 정권 시기는 물론이고 다카키 마사오라는 창씨개명 이름을 가졌던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 ‘친일파’의 친일경력을 문제삼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한국사회는 그 이후 정권에서도 과거사 진상 규명이라는 과제를 정면에서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면에서 지난 겨울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성금 모금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나마 이 과제가 대중적 차원에서 제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음을 반증한다. 지난 겨울 16대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이 삭감되자 시민들의 호응으로 불과 1주도 안되어 성금 목표액을 달성하고, 친일진상규명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을 때 이미 지금의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란을 예감했어야 했다. 큰 지진은 사전에 여러 번 신호를 보내지 않는가. 왜 이 시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기되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이제 이 사회가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들을 시정하고, 과거 역사의 잘못들을 바로잡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더 전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이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역사라는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한다.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과거사 청산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제기될 것이 분명하다.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과거사 규명을 위해 나서야
  
  과거사 청산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정치인들이 학계에 책임을 떠넘기는 데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노력 부족을 탓하기 위한 것이라면 학자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고, 그 동안 역사가 누워서 쉬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세워주려는 것이라면 그 충정은 이해하지만 제발 참아 주었으면 좋겠다.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예산 지원을 삭감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계속 할 수 없게 만든 때는 언제이고, 정치적 공방이 가열되니까 학계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또 무슨 태도인가.
  
  그렇게 학계의 의견을 중시했으면 친일인명사전 편찬 같이 국가적 사업이 제기되었을 때 지원을 대폭 강화해서 학계가 이 사업을 성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해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반민특위가 실패하고 그 동안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중립적인 학계가 참여하지 않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과거사 진상규명이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학계가 모두 나서서 풀어야 할 일이지 어디 학자들에게만 맡길 일인가. 소를 잡기 위해서는 소 잡는 칼을 써야 하고, 닭을 잡기 위해서는 닭 잡는 칼을 써야 한다. 탄핵사태가 닭 잡기 위해 소 잡는 칼 들고 설친 사례라면 학자들에게 과거사 청산을 맡기는 것은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 쥐어주는 격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방자치단체들도 모두 현대사연구소 하나쯤은 만들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현대사연구소를 여럿 만들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바로 인력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학계의 연구역량을 강화하고, 과거사 청산 문제는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학계가 모두 나서서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풀어갈 일이다.
  
  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이태 전 이맘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한국에서도 거의 4백명이나 되는 대규모 참가단이 참석했는데, 그곳에 다녀온 이로부터 흥미 있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한국 대표단이 머문 숙소에서 대회장까지는 불과 20-3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내내 아침마다 대회장에 가는 데 두세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어정거려서가 아니라 한국 대표단이 탄 버스의 흑인 기사가 길을 몰라 두세 시간씩 헤매기가 일쑤였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는 서울만큼 크고 복잡한 도시가 아니고, 호화주택이 즐비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인종분리 정책 하에서 대중교통 수단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분리 정책이 철폐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소웨토라는 제한 구역에 살아야 했던 흑인들은 거리감각이 전혀 없고 길눈이 어두운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한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질곡이 되는지, 또 과거 청산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아공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화합과 진상 규명을 시도하였지만 가해자들이 여전히 실질적 권력을 지니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상태에서 진실 규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사의 미청산 때문에 버스 기사가 길을 못 찾아 헤맬 정도는 아니라고 위로하려 들지 말라. 과거를 망각하거나 제때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복수하는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세인의 뇌리에서 사라졌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 박기서라는 버스 기사가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찾아가 병석에 누워 있던 그를 ‘정의봉’으로 타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결국 살인죄로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는데, 이 평범한 시민을 살인으로 내몰고 결국 감옥으로 보낸 것은 의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적 망각증과 미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때문이었다. 그가 안두희를 타살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안두희의 배후를 추적해서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혔더라면 그런 희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의로운 시민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김영삼에 대해 IMF 사태와 경제위기를 초래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일각에 존재하지만 만약 그가 재임 중 백범 암살의 진상을 규명했더라면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았겠는가.
  
  과거사 규명 없이는 온전한 백범ㆍ장준하 강의도 불가능하다
  
  백범과 장준하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두 분의 강렬한 민족애와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의(剛毅)함이 그렇고, 두 분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한 역정을 보여준다. 또 두 분의 활동과 사상이 통일민족주의로 비약한 순간 모두 죽음을 맞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분의 죽음은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활동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지만 우리는 이 두 분의 죽음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백범과 장준하에 대한 강의는 반쪽강의가 될 수밖에 없다. 두 분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 이르러서는 쓸데없이 열을 내거나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느냐는 식의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도대체 이 눈망울 초롱초롱한 젊은이들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래의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이들에게 나는 역사적 자긍심 대신 역사적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전 어느 세대보다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한 이 시대 젊은이들이 역사적 망각증과 선택적인 기억상실증을 극복할 때 비로소 세계인도 이들을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 또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그 어느 사회보다 높은 문화민족으로 대우하지 않겠는가.
  
  새학기에는 백범 암살의 진상과 장준하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길이 열려서 강의실을 메운 학생들에게 이게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우리 사회의 저력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이 정도의 자기 교정 능력은 있는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히딩크 식으로 표현하면 나는 백범과 장준하의 죽음의 진상까지 낱낱이 해명된 제대로 된 백범 강의, 온전한 장준하 강의에 목이 말라 있다. 해방된 지 60년이 다 되가는 이 시점에서조차 과거사 규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후대 사가의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배운 춘추필법이 그랬고, 우리가 후손들에게 가르칠 역사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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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9-1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같은 광기어린 수구세력(한마디로 파시스트들)을 제어할 수 있는 보수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마도 현재 남한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기회주의와 무능함을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로드무비 2004-09-11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아니겠습니까.
그 기회주의와 무능함을 합리니 실용이니 우겨쌓는 그들을 보면......
조금 미안한 기색도 없는 것 같아요.

balmas 2004-09-11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릴케 현상 2004-09-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우리당이 과거사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요? 어떤 점이 기회주의고 무능함인가요?( 며칠전에 아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그 사람은 성대에서 학생회 활동을 했었는데 자기가 아는 선배가 청와대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요.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그것만 봐도 노무현 정부가 얼마나 문제가 많냐? 당연히 서울대출신들로 포진해야 되는데 내가 아는 사람을 쓰고 있다는 것부터가...')

balmas 2004-09-1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사 규명과 친일 청산을 위한 노력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그런 노력에 의혹과 불성실함이 보인다는 거지요. 국가보안법 폐지만 해도, 국가보안법을 대체하겠다고 내놓은 새로운 법안이 국가보안법 못지 않은 악법이 되리라는 게 뻔하지 않습니까?

릴케 현상 2004-09-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혹과 불성실에 대해서 진보적인 분들이 좀더 비판은 하셔야겠지요. 그건 각자가 할 몫이라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안타까운 건 시민들에게 여론 조사를 해도 완전 철폐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대체입법이라도 내서 시민들을 안심시켜야 국보법 철폐를 밀어붙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대체입법의 내용을 가능하면 악법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진보적인 단체들이 영향력을 행사해야겠고요...
 
 전출처 : 바람구두 >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이 무섭다

며칠전 "푸른역사"에서 한 권의 신간을 냈다. "나의 천년 - 발칙한 후손의 내 역사 찾기"란 책인데, 이 책의 저자는 표정훈이란 사람이다. 표정훈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아직도 이 사람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인 사람에겐 그의 직업이 출판평론가라는 사실을 넌즈시 일러주어야 한다. 그제서야 아하, 하는 표정이라면 당신도 책을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낸 이 책을 지난 2004년 9월 3일자 "조선일보"에서 서평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를 쓴 이한우 기자는 최장집 교수의 제자라고 한다. 나는 이한우 기자 덕에 출판평론가 표정훈에 대해 좀더 자세한 가계를 알게 되었다. 물론 이제부터 내가 독후감을 올리고자 하는 표명렬 선생에 대해서도 함께 말이다.

"나의 천년"은 한 집안의 가계사를 추적해간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책이다. 그의 고랫적 선조 이야기는 빼고, 그를 기점으로 3대를 거슬러 이한우 기자의 서평 기사를 읽다보니 내용이 이랬다(알라딘에도 올라 있으미 참고하고 싶으시면 읽어보시라). 그의 할아버지 표문학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다. 할아버지는 인촌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았고, 중앙고보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준 인촌을 분명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말을 무척 아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표명렬 장군은 보도연맹원에 남로당 출신의 아버지를 둔 그는 육사출신이었지만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즐겨 읽던 '삐딱한' 군인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런 빛나는 가계를 둔 3대의 맨마지막 손자인 표정훈은 그런 가계 3대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이 되지 못했고, 대신 플라톤을 즐겨읽는 문화주의자로 남았고 그런 당당한 관찰자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단다.

참 대단한 "조선일보"고 대단한 "조선일보" 서평이다. 최근 나는 "조중동"의 서평기사들을 읽으면서 묘하게 꼬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왜 꼭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참 치사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는 듯해서 말이다.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쓴다. 나역시 종종 독후감을 빙자한 논설문을 작성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늘 안타깝지만, 최소한 내 의중을 교묘히 감추려고 하지는 않는데, 이 기사를 읽은 표정훈 씨와 표명렬 장군의 표정이 어떨지를 상상해보니 입맛이 더욱 씁쓸해진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아버지 표명렬 장군의 책에 대해서는 리뷰 기사를 올렸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표명렬 장군은 책을 발간한 뒤에 "한겨레"와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서 그럴까? 에이, 설마 그래서 그런 건 아닐 거다. 다른 좋은 책들을 서평하다 보니 빠뜨렸을 게다. 난 틀림없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세계 어느 선진군대도 '주적'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냉전수구세력이 주적 개념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지만, 이건 전쟁의 원리를 모르는 말입니다. 전쟁은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정신으로 하는 겁니다. 수구세력은 국가보안법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는데, 이 법 때문에 국가안보가 유지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권 탄압의 대명사인 이 악법을 지키고 있는 건 문명사회의 수치입니다."

이 책의 저자 표명렬 장군의 약력에는 이채로운 점이 많다. 우선 그가 전남 완도 출신이라는 것, 육군사관학교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우리나라 군인으로는 최초로 대만의 정치심리전학교를 수료한 최고의 심리전 전문가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베트남전에 전투 부대 제1진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그는 엘리트 장교가 걸어가는 길 대신에 정훈 병과를 택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군대엔 정치위원이라는 특수집단이 있다. 그들은 당원이고, 일반 병사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정훈병과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표 장군이 정훈병과를 택한 이유는 베트남전에서 목도한 우리 국군의 실상에 충격을 받은 탓에 우리 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은 이 책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의 필자 약력 소개에 따른 것이다.

군사학 혹은 전쟁사 관련 서적들을 들춰볼 때 종종 "그렇게 전쟁이 좋아?"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막막함이란... 평화네트워크의 활동가 정욱식 씨가 MD관련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전쟁이 좋아서 쓸리 없지 않은가. 우리 전체 국민의 3분의 1이 군대에 다녀온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서는 그간 변변히 군대 문제를 다룬 책 한 권이 없다. 세계에서 몇 째가라면 서러운 출판대국에서 군사학 관련 코너는 물론 다른 분야를 다 뒤져봐도 우리 군에 대한 비판서적 한 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혹자는 "군에 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혹은 "원래 군대란 게 다 그렇다"고 치부해버린다.

어쩌다 신문에서 군대내 구타로 인한 사망, 자살사고, 혹은 성추행, 오발사고 거기에 최근 불거진 자이툰 부대에 지급된 철모, 방탄복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달이 멀다 하고, 이런저런 군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이런 문제들은 그저 변죽만 울릴 뿐 기획 기사로 다뤄지는 법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군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성역이자,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군만이 국가안보를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명예를 먹고 사는 직업군인들과 군 장성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선 안된다. 그 결과 주간 "미디어오늘"의 이번 주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엔 한국 특파원이 없다"는 기사가 나와도 할 말이 없어진다. 지난 7월초 KBS와 MBC가 외교통상부의 권유로 이라크에서 철수한 뒤 이라크 현지에는 한국 언론의 취재진은 단 한명도 없고, 다만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PD 한 명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앞장 서 보도 자제를 요청했기 때문이란다.

구멍이 뻥뻥 뚫리는 철모와 방탄복을 입혀 자국 군대를 내보내고 이에 대해 우리 군의 안전을 위해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정부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철학이 있는 개혁이 아름답다'에서 그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이 웅장하게 서 있는 이 땅의 현실을 꼬집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친일 청산, 과거 청산 문제는 다시금 나온다. 1987년 10월 29일 제장된 우리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 육군사관학교는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지 못했고, 광복군이 우리 군의 주축을 이루지 못했다.

'2부 1950년에 멈춘 시계'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주적논쟁, 4ㆍ3사건 등과 같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국가보안법 문제 등 현재에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이다. 앞서 이한우 기자의 기사에도 드러나고 있듯, 이 책의 저자 표 장군이 진보주의자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표명렬 장군은 매우 민족적인 보수주의자이다. 문제는 그가 진짜 민족주의자이고, 진짜 보수주의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비판조차 우리 사회 일각에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건 우리가 아직도 삐뚤어진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대표적인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는 반대했지만, "미국의 독립"엔 찬성했다). 표 장군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간 우리 가 행했던 “무자비한 학살이라는 반인권,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반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냉전 수구 정치 세력들이 정치 군인들을 동원하여 저지른 특수한 역사적 사안에 대해 마치 군이 저지른 양, 군을 볼모로 하는 획책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표 장군은 우리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냉전 수구 세력이 어디에서 작별을 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총은 쏘라고 있는 것이고 총도 쏘지 못하는 군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서 연평해전이나 서해교전 등에 그야말로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난리치는 수구 언론이야 말로 군과 국민 사이를 이간질하는 이적행위자들이라고 규정한다 .

'3부 개혁의 나침반은 언제나 양극을 가리킨다'에서 그는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이상한 충고에 반기를 든다.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은 “군 생활을 통해 불합리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무조건 체념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비판력을 무디게 하는 소극성을 장점으로 둔갑시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라는 거창한 말” 구호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정작 제복을 입은 국민인 병사들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얼차례나 일삼는 장교들의 리더십을 비판한다. '4부 우리 시대, 새로운 군대를 향하여'에서 표 장군은 '군대에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모교이자 군의 미래를 건설할 육군사관학교의 개혁을 요구한다. 입으로는 늘 정의의 편에 선다고 말하면서도 현실 정치 속에서는 선후배 관계를 통해 늘 강자의 편에 서 왔던 선배 군인들과 동기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그는 12.12 쿠테타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김오랑 소령을 참 군인의 귀감으로 삼는 육사교육을 꿈꾸는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무렵의 나는 특수전사령부(일명 특전사)가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12월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총성(종종, 야간사격 연습이 실시되곤 했지만)에 깨어났다. 그때의 내가 그 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날 밤이 무섭다. 그날 밤이 무섭기에 우리는 오늘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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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데리다 저서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올해 이미 출간된 책만 해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와 [시선의 권리](아트북스) [법의 힘](문학과 지성사),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 지성사)가 있고, 조만간 출간될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까지 하면 다섯 권이 출간되는 셈이죠.

지난 번에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번역 상태에 관해 간단한 글을 올린 적이 있고(그런데 후속 글은 계속 감감무소식 ... -_-;;;), [시선의 권리]가 출간되었을 때에도, 번역상태에 대해 불안감이 든다는 지적을 했습니다(7월 10일 마이페이퍼).

오늘은 간단하게, 최근 번역된(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세 권의 책, [테러 시대의 철학], [목소리와 현상](출간예정)과 [시선의 권리]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먼저 좋은 소식(아마도)에 관해 말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 주 초에 [테러 시대의 철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오반나 보라도리라는 철학자가 데리다와 하버마스를 각각 초빙해서 인터뷰를 하고, 이 사람들에 관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데리다와 하버마스라는 동시대의 두 거장, 더욱이 그동안 상이한 철학적 입장을 보여온 두 사람이 9, 11 테러라는 중대한 사건에 관해 견해를 밝힌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되기 전부터 영미권과 유럽 철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모은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데리다가 직접 저술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데리다가 현재의 국제정세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고, 또 하버마스의 견해와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섣불리 단정적으로 좋은 번역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또 번역자들 중 두 사람(한 분은 지방국립대의 전임교수로 재직중인 선배고, 다른 한 사람은 제 후배입니다)이 저하고 가까운 사람들이어서 오해를 살 염려도 있지만, 번역자들이 꼼꼼한 사람들이고 이미 다른 책들을 잘 번역한 경험들이 있어서 이 책의 번역도 잘 되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에 유학 중인 제 후배 한 명이 [목소리와 현상]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번역은 다 끝나고 이제 교열을 보고 있는데, 저에게도 원고를 보내줘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친구는 원래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했고 석사논문으로 데리다의 후설비판을 다루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다 잘 하는 데다가 [목소리와 현상]이라는 책을 석사논문 주제로 삼았으니, 국내에서는 이 책의 번역자로 더 이상의 적격자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원고를 읽어보니, 실제로 번역도 매우 공을 들인 좋은 번역이더군요. 덕분에 신뢰할 수 있는 데리다 한글본을 한 권 더 얻을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이상이 좋은 소식(아마도)이고, 다음은 나쁜 소식입니다.-_-;;; 지난 8월 20일경에 [한국출판인회의]에서 내는 [북 앤 이슈]라는 서평전문지에서 서평을 하나 부탁받았습니다. 바로 [시선의 권리]에 관한 서평인데요, 알고 보니까 이 단체는 한달에 한번씩 인문, 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대중문화와 예술, 실용, 청소년, 어린이 등의 분야에서 이 달의 책을 선정해서, 선정된 책에 관한 서평을 싣더군요. 인문 분야에서는 매달 6-7권 정도의 책을 선정하고 대중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는 2종 정도를 선정하던데, [시선의 권리]는 마침 9월의 책으로 선정되어, 저에게 서평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밀려 있는 일들 때문에 서평을 거절했는데, 담당자가 계속 권유하고, 또 지난 번에 마이페이퍼에서 이 책의 번역상태를 한번 점검해보겠노라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번역을 검토해볼까 하는 생각에 서평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쁜 일들 먼저 해결하고 지난 주부터, 강의 준비하는 틈틈이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참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지난 번에도 "역자 소개를 보니 번역한 분은 미술사를 전공하고 영국에서 공부한 분이더군요. 번역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정황상 번역의 상태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 때의 예상, 그 때의 불안감은 그대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시선의 권리]라는 책은, 혹시 벌써 구입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벨기에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대해 데리다가 상당히 긴 '해설'을 붙인 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리다의 이 '해설'이 상당히 난해하다는 점이지요. 데리다가 수사법과 논증을 교묘하게 뒤섞어서 활용한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지적한 적이 있지만, 이 '해설'은 이런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해설'은 문자로 된 텍스트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문자와는 상이한 이미지들의 연속적인 배치에 관한 '해설'이기 때문에, '해설'을 번역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움이 가중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데리다의 철학에 관해 상당한 식견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불어에 관한 충분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데리다의 언어유희에 관한 섬세한 주의력이 있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까,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불어의 기본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제대로 번역될리가 있겠습니까? 데리다의 '해설'은 가상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짧은 문단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번역은 정말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는 게 아니라, 오역이 없는 문단을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한 가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역자가 달아놓은 70여개의 역주인데, 이 주들 대부분은 데리다의 논의맥락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내용이더군요. 겉보기에는 무언가 데리다의 심오한 논의를 전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현학적인 주이지만, 실제로는 데리다의 논의와 무관하고 오히려 내용을 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역주들이었습니다.

역자도 문제이긴 하지만 출판사 역시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광고(사실은 터무니없는 광고이긴 하지만.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를 낼 정도로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그리고 역자에게 거의 불어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이를 몰랐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요), 적어도 불어전공자 한 사람에게 외주교열이나 교정을 맡겨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이런 번역을 버젓이 "데리다의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허위과장광고 아래 팔아먹으려는 그 저의가 정말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한국출판인회의라는 단체의 공신력 역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한다는 발상 자체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책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누가 보상할 건가요?

이래저래 1년만에 또다시 엉터리 데리다 번역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어쨌든 서평을 모레까지 써서 보내고, 조만간 알라딘을 비롯한 몇 군데 인터넷 서점에 또 한번 험악한 서평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걱정이 되는 건,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이제 데리다 번역본은 읽을 만한 게 못된다는 생각을 아주 굳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섣불리 서평을 실으려고 하지 않고, 이런저런 도서선정기관에서도 데리다는 아예 처음부터 선정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니 차라리 점잖게 한 마디 하는 걸로 그칠까요?

---그러길래, 뾰족한 도움도 못되고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철학자에 뭐하러 그렇게 관심을 두고 혼자 분통을 터뜨리고 하냐? 모른 척하고,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소개하고 읽으면 될 것을, 쯧쯧 ...

---"쉽고 유익한 이론가들"? 누구? 네그리? 지젝??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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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0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마스님, 험한 평을 하시든, 점잖은 평을 하시든, 발마스님 응원합니다! ^^

참, 그리고 지난번에 지나는 말로 하신 주제의 강의록, 정말 궁금합니다.

balmas 2004-09-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이 응원해주시면 든든하죠.^^

그리고 [현대의 철학적 문명론]이라는 강의에 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_-;), 다음에 한번 말씀드릴게요.

hoyami 2004-09-09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is name is Boradori? Really? Is he one of the Teletubbies? Haha. I've sent you an email, so please chek it!

balmas 2004-09-09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사실은 Borradori야. r자가 하나 더 붙지. 텔레토비 출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메일은 잘 받았어. 그런데 부탁할 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얻었으니까,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aporia 2004-09-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일도 많으신데 분통 터질 일이 생기셔서 걱정이군요.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불어를 못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리다를 번역하겠다고 나섰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네요. 그나저나 선생님의 불길한 예감은 그냥 예감에 그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목소리와 현상" 번역본이 나온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었거든요.
결국 선생님과 동료분들이 힘내시는 수 밖에 없겠군요. 저는 허접한 독자리뷰나마 올려서 이 책은 훌륭하다고 열심히 추천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법의 힘" 독자리뷰를 써야 하는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계속 미뤄지네요. 어쨌든 힘내세요!

릴케 현상 2004-09-1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나 문제가 많다니...

balmas 2004-09-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좀 문제가 많죠.
전 데리다 번역에서 이런 게 전형화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예요.

릴케 현상 2004-09-1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번역서만 읽는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얘기 들으면 좀 불안해져요. 그동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도 다 문제가 있는 것인데 내가 모르고 있나보다 하는...

balmas 2004-09-1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서 내용이 잘 이해가 되고 잘 넘어가면, 대개 그 책은 좋은 번역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거나, 이해가 되다가 어느 대목에서부터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가 없다거나 하면 그건 대부분 오역 때문이죠.
그나저나 이런저런 번역본들 비판하면서 저도 늘 사람들에게 공연히 불안감만 주는 게 아닌지 마음에 걸립니다. 쉽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비판이 오히려 사람들의 독서의욕을 꺾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의 생산 및 소개와 유통이 겪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저런 번역본들(특히 고전이거나 좋은 책들)의 문제점과 좋은 점들은 전문가들이나 관련된 단체들에서 공정하게 평가를 해주어야 하는데, 신문 서평은 실용서나 취미교양서 위주로 흐른지 오래되었고, 전문가들은 업적에 들지도 않는 이런저런 서평들을 외면하고 있고, 책을 내는 (몇몇) 출판사들은 저작권을 전매하고서 형편없는 오역본들을 양산하고 있고 ... 그러니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통받는 건, 누가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책들을 읽어보겠다는 갸륵한 마음을 품은 교양독자층이죠.
전문적인 서평지가 하나 시작되어서 모범적으로 자리잡는다면, 이런 상황이 좀 타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누가 총대를 메야 하는데 ...

릴케 현상 2004-09-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하긴 읽다가 모르겠는 부분이 나오면 그냥 내가 이해 못하나 보다 하고 피동적으로 읽는 태도를 고칠 수 있는 자극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능동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을 체크해서 번역에 이상이 있는 건지 나한테 이상이 있는 건지 한번 이상 생각해 볼 기회를 주니까요 앗! 추천했습니다.

balmas 2004-09-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긍정적인 자세 ... ^^
 

 

 

 
 
 
 
■진단: 고구려사 문제, 이렇게 돌파하자
'내것 네것' 역사인식 버려야…‘공동교과서’로 돌파 가능

2004년 09월 02일   김조영혜/강성민 기자 

요즘 언론을 보면 한중간 고구려 쟁탈전이 가파르게 전개되는 듯 보인다. 고구려 유적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중국이,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삭제하는 사건을 벌임으로써 한국의 반중정서가 폭발했고, 이에 따른 민족사 수호의 담론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고구려사가 전혀 정치쟁점화 돼있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모종의 프로젝트에 돌입해 있고, 고구려 유산 유네스코 등재시도를 했으며, 외교부 홈페이지 ‘삭제’ 사건을 벌였다는 것뿐이다. 이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교육사학)는 “중국에 비해 한국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라며 “문제가 됐던 북경대 교재는 교수들이 집필한 것으로, 시각의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중고교 교과서에는 고구려사 왜곡은 발견된 바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교수가 올해 초 동북공정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경사지 연구센터 대표와의 면담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물론 이것을 중국을 대변하는 입장으로 간주할 수는 없고 당연히 고구려사를 탐내는 중국의 정치적 시도도 충분히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得’보다 ‘失’이 많은 반중담론

문제는 지금처럼 ‘과열된’ 반중담론으로는 문제가 더욱 꼬인다는 점이다. 우선 고구려사와 관련해 우리 사회에 정확한 정보를 추구하는 ‘공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설과 추측을 바탕으로 중국의 입장을 해석하고 즉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보민주주의가 진척된 나라가 취할 태도인지 의문스럽다. 둘째, 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점이다. 무역량과 상호투자가 가장 활발한 인접 교역국인 중국은 동북아 경제단위를 위한 교섭의 대상이기도 한지라 앞으로 ‘대화’할 일이 많은데 너무 무모하게 중국을 압박해서는 곤란하다. 셋째, 고구려는 우리 것이라는 인식이 갖는 위험성이다. 역사는 언제든지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모든 역사적 문헌이 역사가의 선택과 배제에 의한 ‘기록’이며, 근대 이후에 확립된 우리의 ‘민족사’ 역시 이런 ‘기록’들의 얼개에 철학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덧입힌 ‘창조적 해석’의 산물이라는 것은 홉스봄이나 이성시 같은 학자들의 책을 통해 무수히 제기돼온 주장이지만, 이에 대한 사회 일반의 학습수준이 매우 낮다는 점은 불행한 일로 비치기도 한다. 특히 두 민족이 맺어온 ‘관계사’를 논하는 것은 가장 뜨거운 해석의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음을 세계 각국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음에도, 변경사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무조건 ‘역사왜곡’ 내지 ‘약탈’로 간주하는 태도는 합리적으로 비치지 않을 뿐 아니라, 국익적 차원에서도 올바르지 못하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역사이론)는 “민족의 틀에 맞춰 고구려사를 봐서는 안 된다”라며 “국가의 개념이 없었던 동아시아 고대사는, 동아시아의 범주에서 봐야한다”라고 강조한다.


사실 고구려사가 한국사로 편입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중국의 무관심 때문일 공산이 크다. 과거에는 고구려가 한국 것이든 아니든 상관않던 중국이 최근 들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한국 측에서 ‘역사’ 차원이 아닌 ‘영토’ 차원의 문제제기가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지난 2001년 만주를 한국땅으로 회복하려 했던 한국 민간단체의 움직임이 대표적 사례다. 현재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문제를 촉발한 것이 만주 회복 운운했던 한국”이라는 것이며, “고구려사 문제는 학술문제이므로 학술적으로 해결하자”라는 것이다. 간도니, 만주니 하며 타국 학자들이 자국의 영토에 들어와 역사유적을 뒤지고 다니니, 변방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아온 ‘통일제국’으로서는 옛날의 콤플렉스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에 대한 타진은 현재 학계나 언론계 어디에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학술적 문제’라는 중국의 선언은 상당히 위협적 발언이다. 지금부터라도 ‘고구려’라고 불리는 영역에 대한 고고학적 역사탐사를 시도해 자신들 민족사의 허술한 빈틈을 메우겠다는 것인데, 고구려 유적들이 중국의 영토에 속해있는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사수 작전’으로 한국이 중국을 방어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유럽의 역사분쟁 해결을 모델로 삼아야

이에 따라 한국의 과민대응은 외교적으로 유리할 게 없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학술적으로 해결할 일을 국가간의 외교문제로 돌려놓으면, 급한 쪽이 손해를 본다”라는 것.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인도사)는 “영국의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인도가 민족주의 운동을 펼쳤던 20세기사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지만, 인도에서는 영국 교과서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자국의 역사는 자국이 기록하면 되지, 타국 교과서가 어떻든 관심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것. 굳이 인도의 예가 역사왜곡 해결의 정답은 될 수 없어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최영태 전남대 교수(독일사)는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에 갖게 된 반일감정을, 고구려사 문제에 끌어들여 동일한 비중의 반중감정으로 국민정서를 몰아갔을 때, 한국은 인접국가 사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최 교수는 또한, 역사논쟁을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해 정치분쟁화 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들이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충동시키는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는 한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며 설명했다. “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불신풍조”가 문제라는 것. 한중일은 한자 문화권이란 공통점과 지리적 근접성이 있음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상호존중과 평화공영을 지향하는 문화적 신뢰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전쟁 가해자인 독일이 나서 평화의지를 천명하고 역사왜곡 등의 문제를 해결한 유럽연합에 비해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과민반응’에 대한 합리화가 국익을 챙겨줄 수는 없다. 중국이 ‘공식적’ 입장으로 제시한 ‘학술적 해결’을 일단 액면 그대로 수용해, 학술적 대화의 틀과 구조를 우리가 먼저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가 더 이상 정치쟁점화되는 것을 막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에 전문가들의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가 오랜 역사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문화협정’을 맺고 오랜 시일에 걸쳐 ‘교과서 공동 출판’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는 역사 및 지리 교과서 개정을 위해 공동위원회를 구성, 20여년에 걸쳐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양국 학자들의 빈번한 학술교류로 공동 교과서를 집필한 바 있다. 또한 유럽사 연구와 관련해, 국가마다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1992년 유럽 12개국의 교수들이 모여, ‘새 유럽의 역사’(프레데리크 들루슈 지음, 윤승준 옮김, 까치 刊, 2000)를 펴내기도 했다.


이를 볼 때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는 자신들의 ‘민족사’를 벗어나 ‘동아시아사’를 함께 창출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대화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물론 중국과 일본이 그에 협조적일 지는 모르지만, 학계나 민간 차원에서는 충분히 그런 교섭을 시도할 기반이 있다. 실제로 한중일 3국의 역사교과서 공동집필은 이미 진행중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익적 관점의 역사교재 출판에 대응하기 위해 3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 역사 공동 독본’이라는 중학교 역사 교재를 개발 중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내년 5월 한중일 3개국 언어로 동시에 출판, 발행될 예정이다.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제한국문화홍보센터에서는 오는 7일부터 북경사범대학 출판사 관계자들을 초빙해 중국 교과서 개선방향에 대해 집중 논의할 계획이다. 역사왜곡 문제를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해결하기보다 ‘심의제’인 중국의 현 교과서체제에 맞게 각 지역과 출판사별로 직접 접촉, 구체적 협의를 나누고 장기적인 협의체를 구성하는 게 양국의 역사충돌을 막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의 언론들이다. 여론 부추기에만 여념이 없는 감정적인 칼럼들, 학자들조차 행동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들을 펼치고, 중국의 움직임을 무슨무슨 '작전'이라는 듯 군사행동을 떠올리게 하는 어휘들을 사용해 '일'을 키우기만 하고 있다.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학계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런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얼마나 널리 알려지고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유럽의 사례에서 엿본 역사분쟁의 해결
학문적 대화로 풀어야

2004년 09월 02일   김조영혜 기자 

세계 어느 곳도 역사분쟁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국경은 세계사의 전개와 더불어 무수히 바뀌어왔고 그에 따른 밀고 당기기는 과거에는 전쟁의 형태로, 오늘날에는 외교적 분쟁으로 끊이지 않는다. 20세기 초반의 유럽도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독일-폴란드, 독일-프랑스 사이에 오랜 영토마찰이 있었고, 각국 교과서에서 자국 중심의 역사서술을 하면서 수많은 왜곡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현안을 놓고 인접국들과 협력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역사를 갖고 마냥 싸울 순 없었다. 득보다 실이 많은 탓이다. 앞날을 계산해본 독일, 프랑스, 폴란드는 서로간의 합의를 모색하게 됐다.


그 합의의 시나리오는 이렇다. 일단 각국의 학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만나서 문제가 되는 쟁점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 국정교과서 체제가 아니었던 당시의 사정을 볼 때 이는 수많은 교재들을 상호검토해서 서로 다른 부분을 찾아내, 그것을 절충하거나 양보하는 일이었다. 독일-프랑스 같은 경우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1789년부터 1925년까지의 양국 관계사에서 39개 부분을 합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또 그 합의안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었다. 독일-폴란드는 10여년에 걸친 지난한 신뢰 구축기간이 필요했다. 대표단이 구성돼서도 17년 동안 9번 회의를 했고 1977년에야 양국어로 된 ‘서독과 폴란드의 역사 및 지리교과서를 위한 권고안’이 마련됐다. 여기엔 문제가 되는 교과서의 ‘각 부분’을 양국의 합의 아래 ‘재서술한’ 구체적인 예시가 담겨져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치적 합의는 이뤘지만, 그걸 문화적 합의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권고안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온 학자들은 자국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했는데, 교과서를 집필하는 학자들, 출판사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고맙다’며 권고안을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각국에서 또 ‘말도 안된다’는 식의 다양한 불만이 제기됐고, 문제는 더욱 불거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 및 뜻있는 학자들은 지치지 않고, 새롭게 도출된 논의사항들을 가지고 만났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민간차원에서의 정례화된 학술적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해가 되풀이 되면서 ‘권고안’ 초판은 여러차례 수정을 거듭했고, 바뀌어진 내용들은 교과서에 반영돼 갔다. 볼프강 야콥마이어의 ‘권고안 발표 이후 독일에서의 역사교재 변화’라는 논문을 보면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 간 역사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유럽은 EU체제를 추진하면서 ‘공동교과서’의 필요성을 더욱 느꼈는지, 이런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2년에는 ‘새 유럽의 역사’라는 유럽연합판 새 역사교과서를 펴내기도 했다. 이는 12개국 역사학자들이 모여 유럽의 역사를 균형감 있게 서술한 것이다.


이런 결과는 유네스코의 중재가 개입한 상태였지만, 분쟁 당사자들의 열린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역사를 '소유물'로 바라보던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했고, 역사라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더 넓은 차원의 동의를 얻어 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유럽의 사례는 한국의 상황에 비춰볼 때 매우 시사적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경제공동체 추진, 최근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의 활발해진 교류 등의 상황을 지켜볼 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이 꼭 ‘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참고자료 : 한국교육개발원 ‘독일-폴란드 교과서 협의사례연구, 정영순 외 2인 2002년 / 한일간 역사왜곡 갈등과 유럽에서의 평화를 위한 역사교육, 정영순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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