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서 쓰면 손가락질 당해…원서 사용 오히려 증가
진단_과학 교양교재 출판의 현황과 과제

2004년 08월 30일   권기호 과학칼럼니스트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물질세계는 양방향성을 강화해 가고 있으며, 이것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상품화와 보편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세계나 지식세계의 한편에서는 양방향성이 약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아는 것이 힘, 곧 권력이므로 먼저 많이 알고 독점하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20세기에 들어서 과학?기술은 드디어 권력을 쥐게 되었고 세계는 치열한 과학기술 전쟁을 벌여 왔다. 권력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므로 급격히 늘어난 과학기술자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선취권과 독점주의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젊은 교수들일수록 원서 의존도 높아

더구나 우리나라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만 받아들여 ‘지식인’이 아닌 ‘전문가나 기술자’만 양산하고 그들을 이용하는 데 골몰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철학과 역사 같은 근본 문화가 없는 사상누각이며, 과학기술자들에게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동참하라고 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근본 문화를 제대로 교육받은 적이 없을뿐더러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할 의지도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리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인문학자들의 ‘지적 사기’를 신랄하게 꼬집었지만, 사실 그러한 지적 사기를 야기한 데에는 자연과학자들의 잘못이 크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발견하거나 발명한 사실을 책이나 강연을 통해 쉽게 설명하기보다 현학적 아우라를 씌워 고답적인 것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할머니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정통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난해함은 단절과 오해와 왜곡을 낳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출판을 비롯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침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국가 정책이다. 과학기술을 이 시대 문명과 생활의 일부로서 인식하지 않고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한, 과학기술은 교과서와 실험실의 장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다. 편향된 교육 제도는 말할 것도 없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학문인데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주체인 인간을 빼고 나머지만 가르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과학기술이나 그 산물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하거나 사회와 문화를 해석하는 일 따위에 관심이 없다.
이제는 많은 교수와 학생이 그 못된 타성에 젖어 있다. 유학파 젊은 교수들일수록 원서와 외국어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학생들은 마지못해 또는 환상에 젖은 채 따라가고 있다. 자연히 우리말로 된 교재나 교양서는 줄어들고, 범람하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이 번역되지 않은 채 고착화되는 현상도 폭증하고 있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 언어의 문제로 이어진다. 언어는 인식의 출발점이므로 언어 자체가 혼란스럽거나 난해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후손은 외국어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안은 채 과학기술을 더 기피할지 모른다.

‘수준 낮은 독자’ VS ‘역량 부족 저자’

최근 과학 교양서 번역물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몇몇 소장파 과학 저자들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해 왔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과학 교양서 시장의 성장을 논하기는 이르다. 우선 번역물의 경우, 교양서의 종수는 늘었지만 평균 판매 부수는 줄어들었고,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는 교재나 학술서도 원서 사용의 증가로 오히려 줄었다. 국내 저술의 경우도 초·중·고교생을 위한 에듀테인먼트 내지 부교재만 늘었지 대학생이나 일반인을 위한 고급 교양서는 여전히 드물다.
읽을 만한 과학책이 없어 못 읽는다는 독자와, 읽어 주는 독자가 없어 과학책을 못 내겠다는 저자나 출판사 중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 한다면 지금은 독자의 편에 가깝다. 재미있고 쉽게 또는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쓸 만한 지식 인프라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저자나 출판사의 외침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저자나 출판사가 독자의 수준과 기호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책을 펴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준 낮은 독자’ 탓만 하는 저자가 있는가 하면 ‘역량 부족인 저자’ 비난만 하는 독자도 적잖다.
또한 교수나 전문가 집단에서 ‘대중을 위한 책’을 펴내는 것이 ‘딴전’을 부리는 것으로 낙인찍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진지한 순문학 작가의 조금 경쾌한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작가가 문학적 순수함을 잃은 것으로 내몰리듯, 대중을 위한 교양서를 쓰면 학문적 순수함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손가락질당하는 풍토는 과학 교양서 출판 활성화에 큰 걸림돌이다.
그렇다면 얼핏 대학출판부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출판부는 대학 부설 편집·인쇄소나 다름없다. 대학출판부장이라는 자리도 대개 교수들이 번갈아 가며 임기만 채우기 때문에 눈여겨 볼만한 출판 콘텐츠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 부족, 도서관 부족, 불법 교재 복제 같은 눈앞의 주요 장애가 먼저 해소되고 과학 교육이 혁신되어야만 과학 교양서 출판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권기호/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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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8-3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엿듣기로는 인문학 교수들은 오히려 교양서 써서 잘 팔리면 우쭐하는 분위기던데요^^

balmas 2004-08-30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교수들과 자연과학 교수들이 성향이 좀 다르겠죠.
그런데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네) 사실은 교양서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드문 편이죠.
그러니 우쭐해 할 만합니다.^^
 
 전출처 : mannerist > [펀글] 고종석 선생, 대놓고 욕설 쓰다.

[이런 생각] 신기남 사태의 미적 효과
고종석 논설위원

신기남 의원의 여당 의장직 사퇴가 일차적으로 야기한 ‘미적’ 효과는 코믹함이다.

긍정적 함의만 담긴 것은 아닌 ‘탈레반’이라는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정도로 윤리적 원리주의를 뽐내던 그가 무슨 대단한 정치적 과오가 아니라 개인 윤리 문제로 낙마했으니,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맥락이 다르기는 하나, 그저께 이 난에서 강병태 논설위원이 지적했듯 신 의원은 제가 던진 부메랑에 맞은 셈이다.

원리주의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특히 언어 차원의 원리주의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탈레반’은 신 의원에게 사뭇 어울리는 별명이다.

민주당 분당을 선동하며 “호남에서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야 영남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과격한 언사로 지역주의 타파의 챔피언을 자임한 이래, 그는 현실의 복잡다단한 매듭을 선명한 언어의 칼날로 단번에 베어내며 한국 정치의 주관적 해결사 노릇을 해 왔다.

신 의원의 급진적 말버릇이 어떤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한국 정치의 오묘한 파동방정식에 힘입어 여당의 대표까지 되었다.

지적해야 할 것은 신 의원의 언어적 원리주의가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1월 윤영관 당시 외교부 장관 낙마를 전후해 “숭미주의(崇美主義) 사고로 가득한 외교부 대미 라인 간부들을 즉각 경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그는 6개월 뒤 미국을 방문해서는 “미국말고 우리에게 동맹이 어디 있느냐”며, 김선일씨 살해 위협을 무시하고 이라크 추가 파병 원칙을 재확인한 정부의 ‘결단’을 잘한 일이라고 추켜세워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런 언어 수준의 반미 원리주의와 친미 원리주의 사이의 왕복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보여주었거니와, 신 의원의 어지러운 행보 역시 그의 언어적 원리주의가 기회주의적 원리주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회주의적 원리주의자가 여당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여권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그가 일본제국 군대 헌병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선친의 과거를 숨기고 외려 미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과거의 친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총궐기한 수구ㆍ보수 담론에서 주로 나왔다는 사실은 그 지적의 옳고그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전 당시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는 선친의 경력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신 의원의 천박한 역사인식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친일 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가 어떤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설령 여러 증언대로 신 의원 선친의 일제 협력 행위가 사뭇 ‘악질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기남 사태의 미적 효과는 단지 코믹일 뿐인가? 오마이뉴스는 의장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하고 고향으로 선친 묘를 찾은 신 의원을 취재해, 그와의 인터뷰 기사에 곁들여 그의 선친 묘역 사진을 큼직하게 실었다.

한 눈에도 호사스럽게 조성된 이 묘역과 고인의 비문 뒤에 이름을 새긴 자녀들의 면면은 신기남 사태의 미적 효과가 단지 코믹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씁쓸히 보여주었다.

코믹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수 겸 무대예술가, 국회의원 겸 변호사, 의학박사 등으로 잘 장성한 자식들이 선친의 묘비에 구태여 제 미끈한 직함들을 밝혀놓은 데서는 어떤 ‘봉건적’ 촌스러움이 느껴졌고, 그것은 코믹의 한 영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고인의 자식들이 해방 뒤 어려운 상황에서 저렇게 버젓하게 자란 것이 오로지 재능과 노력 덕분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후손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이 봉건적 촌스러움은 더 이상 코믹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에선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온 지랄 같은 비극의 냄새가 배어나왔다. 글피가 아흔네 번째 맞는 국치일(國恥日)이다.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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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제외하고 내가 이제까지 접한 고종석 선생의 글에서 나온 감정섞인 가장 과격한 표현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에서 대머리 XXX 전통을 가리켜 '파시스트 두목'이라고 쓴 것이다. 지랄 같은 비극의 냄새. 선생이 수위가 한계까지 올라간 만큼, 저 작자들이 판치는 한국은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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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TK지역주의 주민들 의식속 내면화

“TK지역주의 주민들 의식속 내면화”
[한겨레 2004-08-26 17:58]
[한겨레] ‘황해문화’ 가을호
영남지역주의 해부

“권위주의, 성장 제일주의, 안보 지상주의, 대북 적대주의를 원형 그대로 간직”한 곳, “박정희 패러다임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살아서 작동”(홍덕률 대구대 교수)하는 곳. 그런 곳이 대구·경북이다.

대구·경북 연고있는 교수들이 분석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주도하는 국가 정체성 논란의 이면에는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영남 지역주의’의 오묘한 결합이 있다.

“박근혜는 대구·경북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과거를 표상하는 기표”이며, “한나라당의 반공주의와 대구·경북의 지역주의가 서로 볼모로 잡고 변화와 개혁에 저항”(김동춘 성공회대 교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문화〉 가을호가 영남 지역주의를 본격 해부하며 그 핵심을 파고들었다.

김명인 편집장은 “이러다가 영남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왕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이번 특집을 마련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 일은 “지역정서로부터 자유로운 인천에서 내는 전국 규모의 종합계간지 〈황해문화〉가 가장 적임”이며 “(정치권의 선거전략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적기”라고 덧붙였다.

대구·경북에서 태어난 김동춘 교수, 이 지역 대학에 재직중인 이윤갑(계명대)·홍덕률(대구대) 교수, 오랫동안 대구 지역 대학에서 봉직했던 최원식 인하대 교수 등이 여기에 기꺼이 참가했다.

이들이 보기에 현단계 영남 지역주의의 본질은 “권력엘리트와 보수언론이 유착해 20여년 이상을 형성한 결과, 지역주민의 의식 속에 내면화”(이윤갑)됐다는 데 있다.

이런 영남지역주의는 ‘대구·경북 지역주의’로 다시 집약된다.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이 좌담을 통해 “지난 총선 때 부산에서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40%에 육박한 결과는 참 놀라운 변화”라고 평가할 정도로 부산·경남의 변모 양상이 뚜렷한 반면, 대구·경북은 “박근혜 대표가 방문하면 갓쓴 노인들이 길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권기홍 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후보)을 정도로 요지부동에 가깝다.

홍덕률 교수는 ‘내면화’된 대구·경북 지역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추출했다. 그것은 대구·경북이 나라의 중심이라는 ‘대구·경북 우월주의’ 또는 ‘소중앙의식’,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선호와 향수로 대표되는 ‘국가중심주의’, 그리고 남북화해 정책에 배타적인 ‘반공주의’ 등이다. 이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핵심요소이기도 하다.

우월주의·국가중심주의·반공주의
지역주의는 특정 정당이 국회의원은 물론 지자체장과 지방의회까지 독식하는 일원적 정치구조, 지역의 언론·대학·종교는 물론 유난히 발달한 계(契) 형태의 자발적 소집단과 관변단체를 통한 보수 이념 확산 등을 통해 재생산된다. “오늘날 이 지역이 겪고 있는 정치·행정적 무능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낙후”는 “기존 질서에 대한 맹목적 집착, 변화에 대한 저항, 현실 안주”의 결과다.

김동춘 교수는 대구·경북 지역주의가 “중앙권력을 싹쓸이하자는 패권적 지역주의로부터 힘을 결속해 장차 권력을 되찾자는 방어적·자기보호적 지역주의로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 남부주민들과 닮았다
“경상도 정권의 혜택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간직한 지역민들은 이제 “지역 기업이 망한 것도 경상도 죽이기라고 이해”하면서 “한국경제 침체 등 일반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지역 경제의 위기와 개인의 고통을 지역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읽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정서는 미국 남부 주민들의 그것과 닮았다. “열악한 경제적 처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정당인 공화당을 지지하고, (진보하는) 북부의 산업문명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며, 노예를 부리며 백인의 자존심을 지켰던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구·경북 지역주의의 더 큰 문제는 그런 기억을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주’하며 ‘확장’시키려 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영남은 원래 ‘저항’의 중심지
박정희정권뒤 대세 바뀌었다

영남지역주의 극복의 실마리는 ‘역사’에 담겨 있다. 이윤갑 교수는 근대 이후 이 지역의 ‘저항역사’를 살핀다. 영남은 동학이 창도되고 의병전쟁과 국채보상운동, 실력양성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등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1930·4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을 비롯한 좌익의 영향력이 다른 지역을 능가했다.

그 결과 해방정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및 좌익정당의 세력이 가장 강하게 뿌리 내려, 1946년 10월1일 대구의 ‘인민항쟁’으로 이어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대구에서는 진보당의 조봉암이 10만여표를 얻어 3만8천여표를 얻은 이승만을 압도했다. 1960년 4월 혁명을 이끈 2·28학생시위와 교원노조운동이 일어난 곳도 대구였다. 박정희 독재시절 인혁당 관련자 대부분은 대구·경북 출신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대세’가 바뀐다. “이북 출신 중심의 이승만 정권의 유산을 걷어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신라를 상징조작의 대상으로 삼으며 영남 중심의 정체성을 확립”(최원식)했고,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전두환 정권이 박정희 정권 때 탄생한 영남 출신의 권력 엘리트를 지역 연고주의에 이용”(이윤갑)한 결과다.

김동춘 교수는 이 지역의 문화전통에서 수구와 저항의 가닥을 동시에 길어올렸다. “지역맹주를 중앙권력에 진출시켜 집단의 이익을 도모했던 영남학파의 세도·붕당정치”가 그 시원이다.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가 많이 배출된 것도 조선 후기 사화를 거치며 중앙정치로부터 소외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유교문화는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흐름과 씨족중심주의를 지키려는 흐름으로 이어져오다, 박정희 정부를 고비로 “대의명분 지향성은 사라지고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만 창궐”하게 된다.

이윤갑 교수는 “동학·사회주의·진보당 등이 당대의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사상체계를 제시했듯이 보수적 지역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상·문화운동이 필요하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시대적 모순에 맞서 보편적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 (영남의) 진보적 전통과 건강한 잠재력”을 일깨울 이념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홍덕률 교수는 당면한 과제로 “정치·행정적 독점구조를 위에서부터 해소하고, 시민사회 내부의 지역주의·보수주의의 순환고리를 해체하는 ‘이중적 민주화’”를 제시했다. 특히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정치적 독점구조를 깨고 ‘다원적 정치경쟁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봤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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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상처 속에 쟁여 둔 아름다움-이정록 관련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어 살고 싶다>> 이 세 권의 시집을 두고 우리는 90년대 적인 새로움을 얘기하기는 힘들다. 젊은 시인이 과히 새롭지 않다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소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정록이 전통적인 시쓰기의 양식을 지키며 관찰을 통찰로 바꿔나가는 과정을 통해 시읽기의 즐거움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정록의 시에 처음 주목한 것은 그렇게 문학사적인 이유나 보편적인 문학의 문제를 보는 시각 때문은 아니었다. 시를 보는 눈을 현혹시키는 수많은 시인들의 감수성의 광휘와 개성의 숲을 피해가다보니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갈고 닦은 성실한 시가 어떻게 빛날 수 있는지를 밝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이정록의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쓰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어 그의 기본기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세기말에도 변함 없는 목소리로 말해주는 시인의 목소리가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정록의 시들은 상처를 이야기한다. 그의 상처는 특별한 천재의 표식으로서의 상처가 아니다. 우리는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의 '서시'를 통해 그가 말하는 상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서시> 전문

 

 

그는 자신의 몸에 상처가 적음을 반성한다. 상처란 인간 사회 속에 파고들 때 생기는 성실성의 증표다. 그는 상처 없이 해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상처란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기에 그것을 온 몸에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의 상처에 대한 이해는 두 번째 시집 <<풋사과의 주름살>>의 첫 시 '자두나무'에서 다시 등장한다.

 

개망초 꺽으며 너에게 간다

짱짱, 햇살을 쟁이는 푸른 자두들

 

바닥에 때 이르게 물러 떨어진

열매들, 모두 벌레 먹은 녀석들이다.

 

벌레가 들자, 성한 놈 제쳐둔 채

온 몸으로 단물을 올려주고

씨알 여물게 해준 자두나무

 

낮술에 골아떨어진 호주에게

부채를 부쳐주던 여자가, 저 자두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있었다

 

늙은 몸통, 갈라진 홈마다

붉은 눈물 솔아 있다

 

땅바닥 쪽으로 쏠려 있는

한 여자의 오래된 눈길

 

<자두나무> 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벌레 든 자두에 먼저 단물을 올려주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늙은 몸통, 갈라진 홈마다/붉은 눈물 솔아' 있는 모습을 '오래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상처에 대한 이정록의 꾸준한 시선은 '풋사과의 주름살'에서 한 정점을 이루는 것 같다.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탑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낙과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놓는다

식탁에서 냉장고 위로, 다시

세탁기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어디로 갔나

몸 안을 비워 단물 쟁여났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내부로 가는 길이구나

연 살처럼, 내면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풋사과의 주름살>

 

노파와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의 주름살의 연결이 놀라울 정도로 평이한 진술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 풋사과의 쟁여놓은 '단물'이 노파의 '가마솥' '갱엿'이 되고 주름살이 '내부로 가는 길'이 되는 이 인식의 힘. 결국 '인간의 내면을 버팅켜주는 힘줄'이 주름살 혹은 상처인 것이다. 이 상처에 대한 시인의 오랜 시선은 결국 흔하지만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번째 시집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에서 '눈사람의 상처'를 보자.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살집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눈사람의 상처>

 

'삽날에 잘린 눈사람'이 아름다우면서도 무섭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가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힌다는 '눈송이'란 이 시인의 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세 권의 시집을 통해서 시인의 상처에 대한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 인식은 첫 시집의 상처 없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시작해서, 상처란 내면의 단물이며 버팅기는 힘이라는 인식으로 한 봉우리를 보여주고 , 다시 상처를 아름답고도 무서운 어머니의 기억으로 내면화시켜내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시인의 이러한 내면의 흐름을 사랑한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행복한 시읽기의 길이다. 이러한 서정성과 인식의 깊이를 함께 가진 시인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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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 코엘료가 뜨는 이유
꿈을 향해 다가가는 '희망적' 동화, 그러나…

2004년 08월 26일   강성민 기자 

요즘 문화계의 최대 화제는 단연 파울로 코엘료다. 파란 우주를 향해 걸어가는 양치기 소년이 예쁘게 그려진 자그마한 양장본 소설 '연금술사'(문학동네 刊)가 올 여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문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먼저 주목할만한 현상은 코엘료 말고도 각기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랭크된 '다빈치코드'(댄 브라운 지음, 베텔스만 刊), '단테 클럽'(매튜 펄 지음, 황금가지 刊) 같은 인문스릴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늘 푸른 '나무'(열린책들 刊), 영화로 먼저 소개된 '냉정과 열정사이'(쓰지 히토나리 지음, 소담출판사 刊) 등이 모두 '외국소설'이란 점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나무 刊)만이 17위에 올라 한국문학의 자존심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 이런 승승장구하는 외국소설과 침체일로에서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한국소설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새삼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코엘료의 책은 '연금술사' 말고도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이상 문학동네 刊) 등 3권이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있을 정도로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다. 그의 정신세계와 문학적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연금술사'는 우화라는 '낡은' 문학적 장치를 도입한 매우 전략적인 작품이다. 코엘료의 가장 큰 특징은 '동화적인 공간설정'이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어린왕자'를 떠올려보자. 설준규 한신대 교수(영문학)는 최근 나온 '창작과비평' 가을호에서 "'연금술사'가 '어린왕자'에 흥미로운 인물들을 삽입하고, 중간중간에 경구들을 박아넣은 아류작"이라고 평하며 "작품 스토리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는 경구들은 군더더기라는 식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인색한 평가이고 오해에 가까운 견해다.


'연금술사'는 그런 차원보다, 삶의 고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쉽고 평이하고 간결한 구성으로도 본격적인 소설적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문학적인 것의 역류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어린왕자'는 어린이와 그 부모들이 즐겨서 읽었다면, '연금술사'를 읽는 건 성인들이다. 그것도 경쟁이 치열한 기업사회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퍼지고, 선물용으로 증정되고 있다. 이것은 '독자층'의 변화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지표로 여겨진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외국문학의 주요 독자들은 논술을 앞둔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중심추가 사회활동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30∼40대 성인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이른바 386들인 셈인데, 그들이 젊었을 때 읽었던 책들은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이나, 황석영, 조정래 류의 대하역사소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연금술사'를 선택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해봐야 하지 않을까.


먼저 이 조그만 소설에 그려진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양치기 소년의 아름답고 회화적인 세계는 삶에 지친 이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우화'라는 낡은 틀은 전혀 식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윤기의 '그리스 신화'가 왜 요즘 인기를 끌겠는가. '신화'와 '우화'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현실을 인식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세밀한 재현보다는 현실을 잘 다룰 수 있는 눈을 키워주는 게 필요하다. 그 마음의 눈이 바로 상상력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정신병원에 드나든 소년기, 히피문화에 심취했던 청소년기, 좌파잡지 활동으로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이력의 소유자다. 코엘료는 보통사람보다 '멍울'와 '그림자'가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정신세계는 이미 현실을 따사롭게 껴안은 채 먼 곳의 어떤 유토피아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이후로 가장 순수한 백색의 세계로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은 '아사다 지로'가 야쿠자의 암흑세계에서 작가로 변신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진정한 밑바닥을 본 사람들이 창조해낼 수 있는 평화로운 표정이 아닐까. 이것이 아마도 동시대 모든 작가들과 코엘료가 갖는 차별점인지도 모른다.


'연금술사'와 '11분'은 상상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11분'은 한 여성이 창녀로서 직업적인 섹스를 통해 내면의 빛을 얻어나가는 과정을 그렸는데, 그 배경은 술집과 도서관, 호텔 같은 도시화된 공간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소설의 공간은 서로 닮아있다. 어떤 편안함으로 말이다. 그것은 코엘료가 일종의 중용적 자세를 지키기 때문인데, 삶에서 극단은 '특별한' 손님이다. 하지만 하루키에서 요시모토 바나나까지 이어진 일본 개인주의 소설과 현대 프랑스 소설들은 극단을 현실과 착각해왔다. 타인과 단절된 단자화된 개인들의 천국인 한국소설도 마찬가지다. 코엘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청년기를 걸었던 한국의 386들은 이런 작가들의 '개인주의'에 대해 차디차게 고개를 돌리는 대신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삶이 등장하는 코엘료의 소설에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회변혁이라는 목적이 있었듯이, 진정한 자아라는 또 다른 목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소설들은 여전히 삶의 목적은 구 소련과 함께 무너졌다는 핑계를 대며 휴가철 아이쇼핑을 하듯이 현실을 보고 있다.


'11분'에서 창녀 마리아는 서로 부대끼면서 닮아가는 아름다운 타협의 정신을 배운다. 이것이 코엘료의 메시지다. 이것은 노동쟁의의 일방적 파업방식이 통하지 않는 요즘의 세태에 뭔가를 시사한다. 그것은 '11분'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안다. 이 책을 읽은 내 친구는 "2프로가 부족해, 뭔가 애절한 절망감이 없어"라고 나한테 말했다. 나는 "왜 없다고 생각하냐. 작가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그것을 짐작하게 하지 않느냐"라고 대답해줬다. '11분'은 창녀의 삶을 그렸다기에는 너무 단아한 통찰과 군더더기 없이 제작된 고급 퍼니처처럼 꽉 짜여진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다. 설준규 교수는 코엘료의 소설이 "멜로드라마적 구성과 큰 차이가 없다"라고 지적한다. 그의 생각은 문학은 고민하게 만들어야지 고민을 풀어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지적은 빨갱이에게 딱지를 붙이는 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우 편안하고도 이분법적이고, 또한 권위적인 비평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이 바닥을 기는 요즘, '이념형'이나 '향수'로서 존재하는 본격문학을 기다리기보다는 멜로적 냄새가 다소 풍기더라도 겸손하게 그 가치를 먼저 찾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코엘료를 멜로와 본격의 경계에서 살피지 말았으면 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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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8-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가 그렇게 인기인가?
트렌드에 무심한 것(또는 무심한 척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닌데 ...

starrysky 2004-08-27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는 별 재미 없는 우화 소설 하나로 끝없는 고공비행을 하는 덕분에 다른 책들까지 덩달아 재간, 급발매되고 있지요. 물론 개중에 괜찮은 책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범작 수준이라고 보는데요.. 근데 저 기자분은 아무래도 제일 유명한 '연금술사'와 미친듯이 광고 때린 '11분'밖에 안 읽으셨나 봐요.

balmas 2004-08-27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별총총하늘님(^^) 오랜만이시네용.
'연금술사'와 '11분'은 괜찮은 책에 못끼는가 보죠?
그럼 어떤 게 괜찮은가요??

superfrog 2004-08-2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는 출판계의 찜닭같은 존재죠. 다른 히트상품이 나와 주질 않으니 코엘료라도 계속 비굴한 명맥을 유지해 줘야 그나마 출판계에 어설픈 관심들이 생기니까요.. 저는 <연금술사>는 못 읽고(하도 요란스러워서요..;;) <11분>과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었는데 <베로니카, ..> 그중 낫다고 생각해요.. 흐, <11분>은 정말 지겹고 짜증났어요..

릴케 현상 2004-08-2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가 젤 먼저 나왔다고 하던데, 주변에 읽은 사람은 정말 지루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연금술사 하나밖에 안 읽었지만 것도 지루하죠. 어찌보면 전에도 얘기했듯이 독자들이 소설을 읽어도 쉬우면서도 경제경영서적인 자기발전혹은 변화를 담고 있기를 바라는가 봐요. 어느정도는 바람몰이기도 하지만...
근데 표지 그림이 우주를 향해 가는 거였나요? 밤하늘을 등지고 있는 피라미드를 향해 가는 것 같은데. 소설 내용에 그대로 나오듯이...

balmas 2004-08-27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금붕어님,
표현이 재미있네요. "출판계의 찜닭"이라 ...
그런데 전 닭고기를 안먹어서 실감이 잘 안오는데용.^^
두 분 평가를 보면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이유가 없을 듯한데, 그것 참 이상한데요 ...^^

balmas 2004-08-3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답변 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나네요.
(1) 베스트셀러도 읽는 사람,
(2) 베스트셀러만 읽는 사람,
(3) 베스트셀러도 안읽는 사람,
(4) 베스트셀러는 안읽는 사람,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요?^^
그런데 도대체 책은 왜 읽는 걸까요???

balmas 2004-08-3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1,2,3,4번을 다 ...
저는 "그냥" 읽습니다.^^

릴케 현상 2004-08-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2번과 4번은 도저히 한 배를 탈 수 없을 듯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