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쪼개내기 관행, 이대로 좋은가
'자기표절'을 규율할 객관적 합의 필요하다

2004년 08월 21일   최철규 기자 

논문 하나로 학술지 게재와 교수임용 그리고 연구과제 지원까지 풀코스로 우려먹는 관행이 학계의 무관심속에 방치되고 있다. 중복게재와 쪼개내기로 나타나는 이러한 관행들은 결국 ‘자기표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거론되는 논문의 질적 하향화와 연구지원비 낭비 현상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표절이나 논문 쪼개내기가 교수업적 평가 제도의 강화와 학술지원 제도의 확산과 맞물린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학계에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단어 하나로 쌓는 업적

자기표절의 유형은 다양하다. 동일한 논문을 제목과 목차만 약간 수정하여 여러 학회지에 투고하는 ‘기본형’부터, 동일한 이론틀과 방법론에 사례의 다양성만 첨가하는 ‘복제형’도 있다. 지역 연구의 경우 사례비교를 통한 일반화를 명목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 수만큼 논문을 쓸 수도 있다. 특히 이공계에서 흔한 경우인데, 해외 저널에 게재한 외국어 논문을 그대로 번역해서 국내 저널에 게재하는 것도 자기표절 시비에 걸릴 수 있다.
논문 쪼개내기의 경우 지난 학기 지방의 모 대학 사학과 교수임용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이 전형적인 예다. 한 지원자가 실적으로 제출한 총 11편의 논문 중 최소 8편이 제목이나 목차의 단어만 다를 뿐 표, 지도, 사료 등의 기초 자료뿐만 아니라 구성과 인용, 전개에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장이나 절별로 쪼개낸 것이라는 것. 중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라는 표현이 단지 ‘청말’, ‘민초’라는 용어로 변경되는 식으로 새로운 업적이 만들어졌다니 할말을 잃는다. 현재 이 교수는 임용이 된 상태인데,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편법을 부추기는 업적 평가 시스템

개인의 양심이 기대야 할 최후의 보루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업적평가 시스템과 관련된 다양한 제도가 학자들의 양심을 위협하고 있다는 교수들의 지적을 간과할 수 없다. 상명대 김영미 교수는 “교수나 대학별 업적 평가 시스템이 연구를 독려하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지나치게 양적으로 흐르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특히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평가 제도가 지나치게 양적인 경쟁위주라고 덧붙인다.
신소재공학을 전공하는 지방대의 이 모 교수는 획일적 업적 평가 시스템과 다양한 지방 이공대 육성 사업이 결합해서 자기표절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원생 절대 감소를 겪고 있는 지방 이공대의 실정상 각종 사업을 수행하며 연구논문을 작성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표절이 교내 업적 평가에서 좋은 평점을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 또한 연간 업적 평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년간 프로젝트 이외에도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유혹에 흔들릴 위험이 있다.
해외저널과 국내저널에 평점 차이를 두는 평가 방식이 ‘속 빈 강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SCI 급의 외국 저널을 선호하고 국내지의 경우 학진 등재지나 등재후보지만 공인하다보니 기타 국내 저널에는 실릴 논문이 없다. 학회 편집인의 입장에서는 해외에 낸 논문이라도 약간만 수정해서 국내 저널에 게재하는 것으로 타협하기 쉽다고 손진훈 충남대 교수는 지적한다.

‘전문성’에만 의존하는 주먹구구식 관리 체제

다른 한편, 학회의 주먹구구식 심사 체계가 자기표절이 기생할 토양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한국 NGO학회에는 작년에 게재되었던 논문이 약간만 수정돼 재제출되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편집간사에 의해 우연히 적발돼 게재 불가 판정을 내렸지만, 중복게재 등을 엄격히 걸러내는 체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다른 학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감성과학회나 한국행정학회를 비롯한 많은 학회들이 논문의 독창성을 요구하고 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게재가 불가하다는 방침을 투고 규정에 못 박고 있지만, 문제는 이런 규정을 관철시킬 기초 체계가 없다는 것. 게재 신청자의 업적 리스트가 완벽하게 DB화 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검색할 수 있는 유용한 툴도 없다. 결국 심사위원의 개인 역량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분야가 좁을 경우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이 막강한 통제력을 발휘하지만, 대단위 학회인 경우 심사할 논문의 양과 촉박한 심사 시간에 의해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시스템 개혁과 비판문화 함께 가야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작 자기표절을 판단할 객관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과학재단의 한 관계자는 주어진 하나의 테마에 여러 개의 실험 단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각 단계별 연구결과를 독립적으로 발표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히 건수 중심이 아니라, 연구 특성을 감안하여 상황을 봐야 한다는 얘기다.
황성우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단순히 원문을 게재하지 않는 이상 “크게 서론-본론-결론으로 나뉜 박사 논문을 쪼개서 발표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학계의 전반적인 관행이기보다는 무모하고 비양심적인 소수의 일이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 시각이다.
그러나 주명철 한국교원대 교수는 인문학 분야 해외 박사들의 논문 쪼개내기 관행이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다. 그는 이런 관행이 연구지원비의 낭비며, 장기적으로 학계에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지적 불능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생의학 분야 저널의 투고 요령을 관리하는 인터내셔널 커미티 오브 메디컬 저널 에디터스(ICMJE: International Committee of Medical Journal Editors)의 경우 일차출간과 이차출간 편집인들의 공동 승인, 다른 독자층 겨냥, 일차출간에 대한 명시 등의 여러 요건을 정해 중복게재의 허용 범위를 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복게재를 판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표절을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 관행을 근절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인 셈이다.
학자들의 업적 리스트의 엄격한 DB화와 업적 평가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 등 굵직한 과제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현저한 자기표절 사례를 실명으로 비판할 수 있는 문화적 여건의 조성이 필요하다. 내 식구 감싸기 식 온정이 만연한 한국 지식 사회에서 자기표절에 대한 공론화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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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8-2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표절... 정말 심각한 문제이지요.
그 책이 그 책인 선생님들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balmas 2004-08-21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의 평가 체계는 참 문제가 많죠. 좀더 정교한 평가 체계를 구축해야 할 텐데 ...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느끼고 있으니까 조만한 해결 방안이 나오리라고 기대합니다.

MANN 2004-08-2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둥...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 같은데요.

balmas 2004-08-2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가 크지. 하지만 전혀 해결 불가능하거나 그런 유의 문제는 아니야. 제도를 좀더 합리적으로 개선하면 많이 줄어들 수 있는 일이지.
 

스피노자 [윤리학] 불어본에 관해 질문해온 분이 계셔서 몇 가지 판본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지금도 판매되고 있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스피노자 [윤리학] 불어본에는 5종류가 있습니다. 출간된 순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맨 앞의 이름은 번역자의 이름입니다).

1. Charles Appuhn, Oeuvres de Spinoza vol. 2. L'Ethique, Flammarion. 1953(초판은 1906).

2. A. Guerinot, L'Ethique de Spinoza, Ivrea, 1993(초판은 1930).

3. Rolland Caillois, L'Ethique, Gallimard, 1994(초판은 1954).

4. Bernard Pautrat, L'Ethique, Seuil, 1999(초판은 1988).

5. Robert Misrahi, L'Ethique, PUF, 1990.

이 다섯 가지 판본은 모두 스피노자 전문가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판본들입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장단점들은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1번과 3번, 4번이 문고판이기 때문에 추천할 만합니다. 다만 4번의 경우 불어 번역과 라틴어 원문 대역판이어서 1번과 3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값이 좀 비쌉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온 판본 중에서 제일 번역이 정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라틴어 원문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많이 사용하지요.

2번의 경우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사용한 판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993년에 재출간되었습니다. 유려한 번역문으로 정평이 있는 판본입니다.

5번의 경우는 저명한 스피노자 연구자가 번역한 가장 최근의 번역본인데, 해설이 풍부한 것이 장점입니다. 매우 긴 서문이 있고, 풍부한 역주들이 달려 있습니다. 다만 연구자 개인의 관점이 좀 많이 반영되어 있어서,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좀 있지요.

 

현재 프랑스에서 제일 많이 사용되는 판본은 1번의 아푕판과 4번의 포트라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 두 가지 판본, 특히 포트라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윤리학] 번역본이 준비 중인데, 이 판본은 1999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새로운 스피노자 고증본 전집(PUF에서 간행 중)의 한 권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번역자의 역량으로 볼 때 지금까지 나온 판본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뛰어난 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출간되었으면 좋겠는데, 정확히 언제쯤 나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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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08-2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니까^^ 추천

balmas 2004-08-2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는 계속 정보를 올려야겠군요.^^
 

"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율스님 여동생의 호소문

 

다음은 지율 스님 여동생이 19일 천성산 대책위 홈페이지에 올린 호소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저에게는 언니가 둘이 있습니다. 사실 말이 언니지,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들은 저에게는 엄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 언니는 저를 먹이고 입혀서 키웠고, 다른 한 언니는 제게 산과 강으로 여행을 시켜주며 자연을 보여주고, 어린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문학과 음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엄마 같은 언니가 지금 50일이 넘는 단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니가 얼마나 천성산을 사랑하는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노력하며 싸웠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언니를 보면 애가 타지만 겉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속상해하면 저를 집으로 보내려고 할 것이란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설마 죽게까지야 놔두겠냐고 생각하면서 버티기를 50여일, 속살에는 여름장마에 습기가 차 생긴 피부병과 영양부족으로 검버섯 같은 까만 점들이 수없이 박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걷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뒤에서 뭘 먹고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30일 정도만 단식을 하고 바로 다른 음식을 삼켜보라고. 아마 죽지 않으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3번의 단식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하는 것보다 단식이 끝난 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식이 끝나도 바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여러 잡곡을 푹 끓여서 꼭 짜내고 국물만 먹었습니다. 제철에 나는 채소와 다시마 끓인 국물 정도로 일주일정도는 속을 다스려야 죽이라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긴 단식 중에는 물 종류 이외에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단식을 해본 분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언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억지로 등을 떠밀어 집에 오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속상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맡겨놓은 아이들을 데려올 생각도 않고 펑펑 울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울만큼 울면 속이 시원해지는데, 왜 울면 울수록 답답해지는 것일까요? 누구를 원망할까요? 단식을 하는 언니를 원망할까요, 아니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청와대를 원망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늘을 원망할까요?

제게 언니는 내가 죽으면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니가 꼭 가족장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안심을 시켰지만,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이없는 환경영향평가로 산과 계곡을 마구잡이로 훼손시키는 사람은 죄가 없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죽음 앞에 서야하는 게 우리의 자연보호 현실이었습니다. 지키는 것 역시도 우리의 몫입니다. 모든 분들이 공이 적고 많음을 따지지 말고 한마음으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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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미국, '돈 없으면 아플 권리도 없다'?

[해외리포트] 한 이민자의 죽음으로 본 미 의료체계
강인규(foucault) 기자  

 

 

"전국민의료보험이란 사회주의적인, 혹은 국영화된 의료체계로서, 억압적인 전제국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악한 것이다. 국민의료보험은 미국의 전통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로 가는 첫 발걸음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 의술의 상징인 황금뱀. 본래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집트를 탈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뱀에 물렸을 때 이 막대를 쳐다보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 의술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만큼 값비싼 것이 되었다.
ⓒ2004 강인규
실없는 우스개소리나 풍자극의 대사가 아니다. 위 글은 1948년 12월 미국의사협회보에 실렸던 사설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면 '사회주의'를 들먹이는 못된 버릇은 미국의 보수층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한데, 어쨌든 이들의 '애국충정' 덕택에 현재 4500만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아무런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의료보험의 비수혜층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2400만명이 무보험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매분마다 5명이 보험혜택을 잃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850만명에 이르는 어린이들이 아무런 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의료비용을 생각할 때, 미국에서 보험 없이 병원을 찾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고가의 의료서비스는 무보험자뿐 아니라 보험의 수혜자들에게도 적잖은 고통을 주고 있다. 지난 해 임금증가율은 4%에 머물렀던 반면, 의료보험료는 15%나 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2006년이면 한 가족이 의료보험을 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1만4500불에 이를 예정이다. 한국의 대학졸업자 평균 연봉에 가까운 금액을 미국인들은 의료보험에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서민들이 직장의 도움 없이 개인적으로 보험을 갖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기업들이 지불하는 의료보조비라고 하더라도 임금의 잠재적 인상분인 경우가 많고, 그밖의 초과비용은 상품가격에 포함되어 판매되므로, 의료보험에 따른 제반 비용은 피고용인과 소비자들이 부담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미국의 직장 의료보험은 관리보험(managed care)이 대부분이다.

관리보험은 일종의 네트워크 형태로서, 이 보험에 가입해 있는 사람들은 보험사에서 정해준 특정 병원의 특정 의사들에게만 치료를 받도록 되어 있다. 의료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현재 1억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이 보건조직보험을 통해서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는 상태다.

이처럼 환자들에게 주치의를 할당해 주는 '에이치엠오(HMO)' 등의 관리보험체계는 보험수가는 낮지만, 제한이 너무 많고 의료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나 수술의 경우, 환자가 보험사의 사전 허락을 얻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사들 역시 할당된 비용 이상을 초과해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환자 치료에 소극적이 되기 쉽다.

이처럼 미국의 의료보험은 사적인 부문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다. 물론 공적 성격의 의료보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일정한 소득 이하의 극빈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서비스인 '메디케이드(Medicaid)'가 있고,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메디케어(Medicare)'도 있다.

그러나 엄격한 자격심사로 이루어지는 공공보험마저 한도와 기간에 제한이 있을 뿐 아니라, 사후 비용처리가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료기관으로부터 냉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극빈자층에는 속하지 않지만 개인보험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서민들을 위한 아무런 보호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대규모 제조업체의 수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으며, 그 자리를 소규모 서비스업이 채워가고 있다. 이 때문에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게다가 장기적인 경제침체로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아무런 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연소득 7만5000불 이상의 고소득자들 가운데에서 의료보험을 잃은 사람들이 28% 증가했으며, 대졸자 가운데서 보험을 잃은 사람이 29%나 늘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말해준다. 이들보다 경제 상황이 어려운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보건이 2004년 대선의 핵심 이슈로 부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이민자의 안타까운 죽음

▲ 한 미국병원에서 의사들이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고 있다.
ⓒ2004 강인규
미국에서 의료보험의 수혜계층과 비수혜계층간에는 명확한 인종적 경계가 존재한다. 예컨대 백인들 가운데서 보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11%인 반면, 아시아인들은 이의 두 배에 가까운 18%이고, 흑인과 라티노(히스패닉)들은 각기 20%와 32%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말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한인 교포의 안타까운 사망소식은 미국의 국민보건체계가 가진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뉴욕주의 퀸즈에 살던 한국인 문철선씨는 운동 중 머리를 다쳐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단층촬영을 마친 병원측은 특별한 치료 없이 김씨를 퇴원 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병원은 문씨가 처음 실려갔던 의료원에서 추천해준 두 번째 병원이었다.

병원측에서는 촬영 결과 문씨에게 뇌출혈의 징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흘 후 다시 오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병원측이 한 말은 "타이레놀을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흘 후 다시 찾아간 문씨는 '95불을 내지 않으면 의사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그가 돈을 내자 '오늘은 검사를 할 수 없으니 사흘 뒤 다시 오라'는 말이 전해졌다.

다시 병원을 찾은 문씨의 가족은 "단층촬영 한 번에 552불이고, 최소한 절반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진찰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촬영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김씨는 며칠 후 다시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측은 그에게 '95불을 내라'는 이야기와 4500불짜리 청구서를 내밀었다.

문씨는 빈곤층에게 주어지는 의료혜택인 '메디케이드'에 신청할 수 있었으나, 자녀들이 영주권을 얻는 데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사양했다고 한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영주권 취득에 영향을 미치느냐는 문씨의 질문에 병원 관계자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한 답변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문씨는 스스로 치료비를 모아 볼 생각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공사장에 나섰다가, 일하는 도중 통증이 악화되어 다시 응급실로 실려갔다. 문씨를 처음 진찰했던 이 병원에서는 문씨의 머리에 뇌출혈로 인한 혈종이 발생한 것을 알아내고는 급히 다른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시작했으나, 문씨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병원측에서는 "왜 더 빨리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고 문씨 가족을 꾸짖었다고 한다. 문씨에게 단층촬영만 한 후 돌려보낸 병원측에서는 '우리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측에 '메디케이드'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으며, 후속 진찰 날짜까지 알려줬지만, 문씨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미국의 의료체계

<뉴욕타임즈>는 문씨의 죽음에 대해 구멍 뚫린 미국의 의료체계와 문화적 차이 및 의사소통의 오해가 결합된 불행한 결과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문씨의 불행은 결코 언어소통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문씨의 변호사인 엘리자베스 벤자민의 견해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환자들을 다루는 것이 미국 병원의 일상적 업무인 데다가, 문씨를 그냥 돌려보낸 병원측은 매년 7천만불 이상을 자선의료 비용으로 보조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병원측에서는 되돌려받지 못하는 치료비가 년간 1억2천만불에 이르고 상황에서 문씨 같은 환자들을 지속적으로 돌보기는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무보험자의 증가는 환자들뿐 아니라 의료계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장기간 치료를 받지 못한 무보험 환자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응급실로 들이닥치기 마련인데, 이 경우 병원은 환자를 아무런 보상대책 없이 치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주에서 병원은 환자의 지불능력과 상관 없이 응급실로 실려온 환자들을 치료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철선씨와 같이 보험이 없는 환자들의 경우,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귀가하고 나면 이후에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후속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와 약속을 잡아야 하지만, 막대한 금액의 청구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일정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 한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국민보건은 미국대선에서 핵심적인 이슈로 부상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결국 환자와 의료계 모두 잘못된 사회의료체계의 희생자인 셈이다. 보험을 가질 능력이 없는 국민들은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에 응급실에 실려가야 하고, 병원측에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이들을 의무적으로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의료체계의 한계는 오래 전부터 문제점으로 지적 되어왔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상태다. 전국민의료보험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이것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양한 사회계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가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금이 필요하지만, 터무니 없이 높은 미국의 의료수가는 이 비용 마련 자체를 어렵게 한다. 이미 고가의 훌륭한 보험 서비스를 받고 있는 계층은 세금을 통한 자금충당에 반대하고 있으며, 이미 사적 부문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는 의료보험시장은 정부가 자신의 몫을 빼앗으려는 움직임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의무보험'이라는 발상 자체를 불온시하는 경향 때문에 미국의 정당은 쉽게 전국민의료보험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보수정당인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마저 전국민의료보험을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부시행정부가 부유층에게 베풀었던 세금감면혜택을 서민들에게 돌려 의료보험 보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민주당 후보인 케리의 입장이다.

그러나 미국사회는 이러한 점진적인 개혁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 보인다. 이미 고령사회인 미국은 수명연장으로 노년층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으며, 전후 등장한 베이비붐 세대가 조만간 노년층으로 대거 진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조업의 쇠퇴와 계약직 및 시간제 고용 증가로 인해 직장의료보험 수혜층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더불어 장기간의 경제난으로 인한 실업증가는 국민보건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돈이 없으면 아플 수도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은 국민의료보험이라는 '사악한 사회주의적 발상'에 맞서 '의료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지켜낸 셈이다. 그러나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이 이 '성공'을 기뻐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집에 누워 비처방약으로 연명하는 환자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2004/08/19 오후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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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8-1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이 오리지날인걸 깜빡했습니다. --; (금붕어님 서재에도 같은 내용을 올렸어요...)

2001년 여름 미국에 갔을 때, 미국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그 자원봉사자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 Medical system here is a disaster." 라고 하더라구요.
'재앙'이라지요.
----- 근데요..... 이런 미국도 '공공병원'이 30퍼센트나 된답니다. 각종 구호 재단들이 있구요.
나이가 들면 노년층을 위한 의료제도인 medicare 가 있구요....

우리 나라는? 공공 병원 10 빠센또! --;; 그나마 자꾸 공사화, 민영화 해서 줄으려고 하는...
노무현 공약이던 공공병원 30%는 도대체 어디로 분해되어 버린 것인지?

balmas 2004-08-20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겨우 10퍼센트밖에 ...
 
 전출처 : 바람구두 > [출판가쟁점/12] 굶어 죽어도 공장에서 일하는 건 싫다고?

북에디터 사이트에 실린 "당대비평" 변정수 편집위원의 「출판가 쟁점」을 퍼오려고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실제 출판가 현장 분위기는 어떠한지? 여러분들이 읽는 책을 만드는 출판노동자들의 현실은 어떠한지가 제법 잘 드러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외로 출판계 현실은 일반 독자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일단 변정수 편집위원의 글을 퍼 나른 뒤에 제 나름대로 정리해서 한 번 올려보도록 하지요. 음, 자꾸 이런 글 쓰다보면 제 정체가 드러나서 안 되는데.... 흐흐. 참고로 저는 "당대비평"이랑은 거의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입니다.
 

굶어 죽어도 공장에서 일하는 건 싫다고?

변정수(당대비평 편집위원)

출판업이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지칭하는 이른바 3D 업종의 하나라는 자조의 목소리도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써야 하는 '위험한' 일들의 근처에도 못 갈 정도로 '안전한' 일인 데다가, 고상하게 텍스트를 만지작거리는 게 고작일 뿐 산업 폐기물이라 봤자 종이뭉치가 나오는 게 고작이니 오히려 '깨끗한' 편에서 헤아리는 게 빠른 일이라는 것을 설마하니 몰라서 이런 과장어린 수사로 엄살을 떠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로 하자면, 워낙 대한민국의 산업안전 수준이 엉망인 나머지 '위험한' 일이라고 명함을 내밀기에 멋쩍어서 그렇지 출판업도 절대적인 기준에서 그리 '안전한' 편은 아니다. 아무리 편한 일을 한다고 해도 하루 12시간 이상씩을 간혹 휴일도 없이 일해야 한다면 건강을 해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잘난 '정신 노동'을 하는 덕분에 '업무 관련성'을 입증하기만 더 어려울 뿐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위험에 직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더럽다'거나 '깨긋하다'는 것이 순수하게 미감의 문제라면, 시쳇말로 '견적을 내기'조차 난감할 만큼이나 '지저분한'(!) 문장들에 파묻혀 '욕지기'를 참아가면서 머리를 싸매고 씨름하느라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을 두고 굳이 '더럽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장된 자조가 출판 산업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그에 대한 출판 노동자들의 분노의 일단을 표현하고자 하는 저항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런 측면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지만, 그 이면에 매우 불순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깔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은 가령 우리 시대에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 직업군에 속하는 의사나 변호사들이 자신의 직업을 '3D 업종'이라고 지칭할 때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적지않은 불편함에 비교될 만하다.

나는 물론 타 업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박봉과 격무로 점철된 출판업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분노한다. 하지만 출판업이 아무리 '어렵고 더럽고 위험하기'로서니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유관 업종 중의 하나인 인쇄업에 비할 수 있을까. 예컨대 도대체 출판인들, 특히나 영업 부서조차도 좌천 부서쯤으로 생각해서 영업부로 발령을 내면 나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편집자들의 직업적 준거 집단은 어디인가? 막말을 하자면 '먹물'깨나 먹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가. 출판 편집이 '인간의 창조적 정신 활동'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그에 걸맞는 노동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당한 요구와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다른 제조업들보다 고귀하다는 식의 비뚤어진 우월감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 출판업은 분명 제조업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물론 벽돌 공장에서 벽돌을 찍어 내는 일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출판사를 가리켜 지식과 정보를 생산해내는 공장이라고 한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노동 가치 이론에 관한 한 국내의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인 정운영 선생이 오래 전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주는 글에서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공장 노동자와 전혀 다르지 않은 '먹물'들이 자신의 일터를 '공장'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발끈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자신들의 일은 너무나 고귀해서 '가치'를 생산하지 않아도 분배가 보장되는 일이라는 듯일까?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아주 점잖은 말로 '도씨'라고 부른다!

최근에 북에디터의 구인 게시판을 한 바탕 뜨겁게 달구었던 어느 출판사의 구인 광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저희 공장에서 편집 일꾼을 한 명 구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차라리 정겹게만 들릴지언정 도무지 '비하'나 '폄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이 광고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 중의 압권이 바로 이 글의 제목이다. "굶어 죽어도 공장에서 일하기는 싫어요." 나는 묻고 싶어졌다. 공장에서 일하기 싫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일하고 싶은가. 아니 그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것보다도 못한 삶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공장이 아닌' 출판사(그런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에 보란 듯이 취업해서 '책'을 만들게 될까봐 더럭 겁이 났다. 그가 만드는 것은 그의 정신적 노동력을 실현하여 정신적인 가치를 담아낸 '책'이 아니라 아마도 아무런 가치도 담고 있지 않은 그저 종이에 먹물을 묻힌 '쓰레기'일 가능성이 크다. 보라. 스스로 악을 쓰며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굶어 죽을지언정 가치를 생산해 내는 일에 종사하기는 싫다고!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기우이기 쉽다. 죽어도 공장에서 일하기는 싫다는 사람에게 일을 맡길 '공장'은 없을 것이며, 제대로 된 출판사 치고 '공장'이 아닌 곳도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때로 아예 발가벗고 '사(詐)'자와 '도(盜)'자를 내걸고 덤비는 얼치기들이 이 동네라고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비자들도 바보는 아니다. 정직하게 노력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기에도 몫이 모자라서 늘 '책 공장의 일꾼'들이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양서(良書)'를 사 주는 데도 인색하기 짝이 없어 출판 산업을 구조적 불황에 시달리게 하는 독자들이 하물며 '쓰레기'에 지갑을 열지는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이 사건은 실은 자신의 일터를 '공장'이라고 표현한 어느 '작업반장'이 고귀한(?) 출판업을 비하하고 폄훼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발끈한 고귀하신 분들이 '공장 노동자'를 비하하고 폄훼하는 돼먹지 못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발이지 그런 고귀하신 분들은 '책'이라는 인류의 정신적 자산을 만들어내는 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란다. 그 자산은 궁극적으로 자기의 일터('공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실현함으로써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꾼'들(전문적인 용어로 '노동자') 공동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앙금이 남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쐐기를 박아 두고 싶다. 우리가 근로기준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기 일쑤인 터무니없는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하는 최종적인 근거는, 벽돌 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는 사람의 한 시간 노동의 가치와 출판사에서 교정지를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의 한 시간 노동의 가치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노동력 제공의 대가를 셈할 참인가. 유감스럽게도 흔히 착각하듯 '실현되지 않은 교환 가치'에 목을 매고 무한 경쟁 속에 자신의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한 당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이며, '자본가'를 위한 노동 조건 따위는 없다. 굶어 죽어도 공장에서 일하기는 싫다는 잘난 '먹물'의 허위의식부터 벗어 던지지 않는 한, 자신이 생계를 위해 노동력 말고는 처분할 것이 없는 노동자라는 것을 자인하지 않는 한, 최소한 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 조건조차도 요원한 일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싶다.

그리고 이 시간에도 숱한 '책 공장'에서 '공장의 불빛' 을 밝히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고 있을 수많은 출판 산업 '일꾼'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동료애로 분투를 기원한다. 우리들이 연대의 손을 굳게 맞잡을 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 손을 놓지 않을 때, '책 공장'들에서도 법이 정한 최소한의 노동 조건을 보장받으며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송인소식 200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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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8-1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이 이 글에 붙인 댓글입니다. 허락을 받고(^^) 퍼왔습니다.

 

이 작업반장과 나도 개인적으로 엮인 바가 있다. 이 작업반장의 글을 읽으며 사실 처음에는 재미있었고 유쾌했다. 하지만 거기에 무지막지하게 올라온 댓글들을 보며 사람들의 분노의 방향에 대해 얼떨결에 생각해 봐야 했다. 나는 변정수씨의 지당한 말들이 '노동자' 의식을 과잉의식하는 지식인의 입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작업반장은 '공장이니 야근이 있는 것도 당연하겠죠 '하며 유쾌하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편집 노동자들은 '야근'이라는 단어에서 고통스러운 그늘을 느꼈던 것이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에 대해 가지는 '느낌'들을 가난에 대해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진짜 노동자들이 노동에 대해 가지는 느낌을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변정수씨는 그런 면에서 진짜 노동자가 아닌 것 같다. 지식인인 것이다.
내가 이해한 사람들의 분노는 이런 것이다. 대놓고 야근 운운한 작업반장에게 사람들은 '공포심'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야근에 대한 보상-'야근수당'이라든지 하는 것이 없을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 진짜 노동자들은 작업반장의 '야근' 운운하는 말에 뻔뻔스러움을 느낀 것이다.
솔직히 이 작업반장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도 없고 그가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인 집단적인 분노는 집단적인 공포였고 그것은 어느 개인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나라도 그런 회사에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속더라도 노동조건이 좋다고 말하는 회사에 들어가지 노골적으로 야근 수당도 없는 야근을 뻔뻔스레 요구하는 회사에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대부분의 출판사가 다 그런 줄 뻔히 알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쳇! 12시간 좋아하네. 17시간씩 휴일없이 일하면 틀림없이 죽는다. 어떻게 다른 직종보다 덜 위험하냐?

 


릴케 현상 2004-08-1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 님 혹시 이 작업반장이 누군지 알고 계시나요? 궁금

balmas 2004-08-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전 모르죠. 자명한 산책 님은 아시지 않나요?

로드무비 2004-08-19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저는 영화공장, 책공장 그런 표현이 쌈빡해서 좋던데...
휴가 갔다 오느라 조금 늦게 글을 읽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balmas 2004-08-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다녀오셨군요, 피곤하시겠네요.
역시 집이 좋죠?^^

로쟈 2004-08-2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공장'들에서도 법이 정한 최소한의 노동 조건을 보장받으며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What an irony! Why not right now?

balmas 2004-08-2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