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과학자 ‘23번째 門’ 박테리아 첫 발견
한국인 과학자가 바다눈을 만드는 과정에 관여하는 신종 미생물을 발견, 새로운 문(門·Phylum)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이번에 발견한 미생물은 150년의 미생물학 역사에서 23번째 문이며 한국 과학자가 분류체계의 2번째 상위단계인 ‘문’에 해당하는 큰 계통학적 가지를 발견한 것은 처음이다.
원핵생물계통분류국제위원회는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미생물학과 조장천 박사(35)가 발견한 ‘렌티스페레’를 박테리아 계(界·Kingdom) 아래 23번째 문으로, 렌티스페랄레스를 69번째 목(目·Order)으로 인정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 내용은 이 위원회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ijs.sgmjournals.org)의 ‘98번째 공인 리스트’에 올려져 있다.
조박사는 2003년 태평양 연안 오리건주 뉴포트 앞바다에서 점액성 물질을 생산하는 새로운 미생물을 발견, ‘렌티스페라 아라네오사’라고 이름붙였다. 우리말로는 ‘거미줄처럼 생긴 점액성 물질을 분비하는 둥근 모양의 세균’이라는 뜻이다.
조박사는 이 미생물의 DNA 정보를 분석한 결과 진화의 정도와 계통의 유사도가 기존의 문들과 현저히 달라 ‘렌티스페레’라는 새로운 문으로 명명했다. 한국 과학자가 종이나 속 단위의 미생물을 발견한 적은 있지만 문을 새로 만들어낸 것은 처음이다.
렌티스페라 아라네오사는 바다눈(심해에서 눈처럼 내리는 하얀 부유물질)의 기원으로 알려진 투명한 고분자물질(TEP)을 분비하는 특이한 미생물이다. 바다눈은 식물성 플랑크톤의 사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박사는 세균이 바다눈 형성에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한편 조박사는 2003년 7월에도 버뮤다 해역의 바닷물에서 ‘파벌라큘라 버뮤덴시스’를 발견해 새로운 목으로 인정받은 것을 비롯, 그동안 자연계에서 분리되지 않은 미생물들을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배양해왔다. 조박사는 서울대 미생물학과에서 미생물생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01년부터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 김상종 교수(미생물학과)는 “이번에 발견한 렌티스페레 문과 조박사의 이름이 미생물학 교과서에 실릴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 ejung@kyunghyang.com〉
- 계-문-강-목-과-속-종 생물분류체계 2번째 상위단계 -
‘門’이란 :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진핵생물, 박테리아(세균), 아케아(고세균)의 3가지 계로 분류된다. 계 아래는 문-강-목-과-속-종으로 이어진다. 박테리아 계에는 23개의 문, 69개의 목, 6,500여개의 종이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동물과 식물은 대부분 진핵생물계에 속한다.
‘바다 눈’ 형성 세균역할 첫 규명
지구는 ‘미생물의 행성’이라고 일컬을 만큼 수많은 미생물이 존재한다. 자연계에는 5만여종의 미생물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 미생물학자들이 밝혀낸 세균은 6,500여종뿐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4만3천여종이 아직도 자연에 묻힌 채 과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 오리건주립대학 조장천 박사의 연구는 ‘고효율 배양기법’이라는 새로운 배양법을 이용, 자연계에서 분리하기 어려웠던 난배양성 세균을 찾아내 새로운 ‘문’을 만들어냈다는 의미가 있다.
◇어떻게 찾아냈나=조박사가 속한 오리건대학 분자진화학연구실은 멸균한 바닷물을 이용해 미생물을 키울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상을 했다.
1880년대 세균학의 아버지 ‘코흐’가 영양소가 풍부한 배지를 이용해 콜레라균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이후 미생물학자들은 100년 이상을 평판영양배지에서 세균을 배양해왔다. 그러므로 ‘영양소가 많아야 세균이 잘 자란다’는 인식을 버리고 자연환경과 유사한 배지를 개발한 것이 주효했다.
조박사는 멸균한 바닷물로 여러개의 배지를 만들고 태평양에서 떠온 바닷물을 희석해 배지에 넣었다. 바닷물 1ℓ에는 1백만마리의 미생물이 있으므로 적절한 농도로 희석하면 배지 1개에 세균 1마리씩을 넣을 수 있다. 이들 세균을 키운 후 DNA를 추출, 기존의 세균들과 비교한 결과 DNA(16S 라이보좀) 유사도가 약 20% 차이가 나는 ‘렌티스페라 아라네오사’를 발견한 것이다.
조박사는 지난 6월 환경미생물학계의 권위지인 ‘엔바이런멘탈 마이크로바이올로지’에 ‘점액성 물질을 생성하는 렌티스페라 아라네오사-박테리아 계 렌티스페레 문의 기술’이라는 제목으로 연구 내용을 처음 발표했으며 한달여 만에 국제적인 분류위원회에서 공인받았다.
조박사는 세계적인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버뮤다 해역의 바닷물에서도 새로운 미생물을 분리해 ‘파벌라큘랄스’라는 목을 새로 등록(국제계통진화미생물학지, 2003년 7월)했다.
또 태평양 연안에서 아직까지 배양이 되지 않은 신종 미생물인 OMG그룹의 44개 균주 배양에 성공(응용환경미생물학지, 2004년 1월)하는 등 환경미생물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생태학적 의미=깊은 바닷속을 카메라로 들여다보면 마치 육상에서 눈이 내리는 것처럼 새하얀 물질들이 떨어진다. 이를 바다눈(marine snow)이라고 하는데 표층에 생성된 유기물질을 깊은 바다로 내려주어 해양생태계 내에 영양물질을 순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박사는 이번 논문을 통해 바다눈 형성에 세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조박사는 렌티스페라 아라네오사를 멸균한 바닷물에서 배양해 바닷물이 점액성을 띠며 끈끈한 액체로 변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세균에서 나온 끈끈한 물질들이 거미줄 모양으로 연결되면서 매트릭스를 형성한다.
조박사는 “바다눈에는 끈적끈적하고 투명한 물질(TEP)이 함께 있는데 어떤 경로로 형성되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번 연구로 세균이 바닷속의 TEP 생성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 ejung@kyunghyang.com〉
학계 “생태학적 가치 알아내 더 값져”
미국 오리건주립대학 조장천 박사의 연구 업적은 지난 6월 대구에서 열린 한국미생물학·생명공학회에서 일부 발표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학계에서는 ‘미생물 분류와 해양환경미생물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연구 성과’라고 평가했다.
미생물유전자은행사업을 담당해온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배경숙 박사는 “한국 과학자가 종이나 속 단계의 미생물을 발견한 적은 있지만 문을 새로 만들어낸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분류체계에서 ‘문’은 ‘계’의 바로 아래 단계로 현재 미생물 분류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는 가장 큰 단위인 셈이다. 서양 학자들이 만든 전체 생물분류체계 안에서 한국 과학자가 붙인 이름이 ‘문’으로 올라간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볼 때 이번 연구는 해양미생물학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해양연구원 이홍금 박사는 “미생물 배양이 극히 어려운 해양환경에서 새로운 미생물들을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신종을 찾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유전자원의 확보라는 국가의 주요 과제로서 이러한 미생물 배양방법의 확립과 순수배양이 적극 추진되고 권장되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박사는 “현재 국내 과학자들도 바다나 갯벌에서 많은 미생물들을 분리해내고 있다”며 “다양한 미생물의 발견은 새로운 생물 소재, 의약품 개발 등에 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박사의 연구는 또 새로운 종을 발견한 것뿐 아니라 생태학적 가치까지 알아내 더욱 의미가 있다. 서울대 미생물학과 김상종 교수는 “한국 출신의 생물학자들이 분자생물학 연구에 몰리는 가운데 생태학 분야에서 이같은 업적을 내서 기쁘다”며 “네이처,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조박사의 연구는 새로운 분류체계를 만든 것이므로 더욱 값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은정 과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