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시험을 본 다음날이면 선생님께선 정답을 적은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그 시험지에 적혀 있는 빨간 정답들의 마력은 기이했다. 그 답이 내 것과 같으면 안도가 되고, 틀리면 좌절한다. 혹여나 내 것과 틀릴까,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그 정답들의 행진을 따라가게 하는 묘한 힘도 있다. 사람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당황하지 않고 준비된 ‘정답’들을 주루룩 읊는 사람 말이다. 그래서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렇게 논리정연하게 정리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마침내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품게 된다. 각종 조사에서 한국 사회를 이끌 ‘차세대 뉴 리더’로 자주 꼽히는 김기식(38) 참여연대 사무처장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올해로 참여연대가 생긴 지 만 10년이 됐다. 지난 10년 동안 참여연대는 한국 사회에 참으로 많은 의제를 설정해 왔다. 1997년 시작한 ‘작은권리찾기운동’을 비롯해 한국의 대표 기업 삼성전자도 불편해하는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2000년 ‘총선시민 낙선연대’ 등 정재계를 아울러 참여연대는 무서운 존재다. 그런 참여연대와 늘 동급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김기식 사무처장이다. 93년 참여연대의 전신인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연합’을 만든 후, 94년 9월 지금의 참여연대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지닌 시민운동의 산물, 참여연대
지금이야 참여연대가 무서운 존재로 자리 잡았지만,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 진보운동의 시각에서 참여연대는 ‘개량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이단아’로 여겨졌다. 그 역시 그런 비판과 싸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의 시민운동들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여타 민주화 운동과 구분지으며 보수세력에 빌붙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시민운동’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쉽게 참여연대를 폄훼하기 어려웠던 건, 많은 부분 그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투철한 운동가와 견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걸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하던 시절, 연세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광주를 알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어요. 공부고 뭐고 다 내팽개쳤다가, 오로지 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대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입학식날 선배에게 말해 그날로 언더서클에 들어갔고요.” 그날 이후, 80년대 대학을 다닌 많은 이들처럼 그도 대학 시절 내내 수배와 감옥생활을 반복하며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80년대 후반엔 인천지역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 80년대 말, 회의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가 관여한 노동조합이 기본적인 임금협상을 하다 무참히 깨져 해고자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해고 후 생활고를 겪자, 단순히 자신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그들을 책임질 수도, 그 상황을 합리화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적으로 자족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키느냐가 제 운동의 판단 근거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조금이라도 세상을 낫게 변화시켜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는 운동을 하자고요.”
여기에 하나 더 얹어진 게 30대에 대한 설계였다.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니, 운동을 열심히는 했지만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에 끌려 다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얻은 결과물이 당시 시각에선 파격적이었던 참여연대였다. 때문에 20대 끄트머리에 있던 그는 “참여연대는 나의 30대 운동의 설계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참여연대를 만들면서 내세운 키워드는 2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 그리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그것이다. 80년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대안적 체제에 대한 고민의 답을 얻지 못하면서 그는 이 2가지에 자신의 30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어떤 체제가 들어서든 간에, 시민사회가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지 못하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또 한편으론 역시 어떤 체제가 들어서든, 인권과 복지·환경과 같은 가치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을 풀어가는 방법으로 그는 ‘의도된 애매모호함’이라는 전략을 택했다. “하나의 분명한 입장보다는 넓게 포용하면서 진보적 가치를 세우겠다는 거죠. 운동이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막겠다는 반성적 측면도 있고, 우리 현실에선 중도우파적 주장도 충분히 개혁적일 수 있으니 이들을 포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때문에 참여연대 회원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이데올로기로는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까지, 계층으로는 노동자에서부터 전문직까지 아우른다. 때문에 두 쪽에서 비판과 지지도 사안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단체를 이끌어야 하는 그에겐 이런 점이 훨씬 힘들 수밖에 없다. “전 참여연대의 포지션을 ‘무시당하지 않는 비주류’라고 이야기하곤 해요.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에 항상 서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주류사회가 참여연대 정도는 끊임없이 끌어 당기고 싶어하는데, 그러는 순간 우리 운동성은 약화되죠.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비주류화하면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사회를 못 바꾸니까 실력을 갖춰야 하고요.” 하지만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이 계속 바뀌다 보니 참여연대 역시 계속 그 경계를 따라 변화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스스로의 위치와 목표를 고정시키지 않고 계속 사회에 맞춰 움직여야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운동상품도 마케팅이 중요하다
여기서 뭔가 익숙한 이야기가 떠올려지지 않는지. 바로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함께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기업의 논리와 꼭 같다. 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 사회에서 무시되지 않으려면 3가지가 필요해요. 우리가 내놓는 문제제기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킬 합리성, 그리고 그들의 지지, 마지막으로 그런 문제제기를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이요. 기업에서의 마케팅 전략처럼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여연대가 하나의 벤처기업처럼 여겨진다. 그 기업은 지난 10년 동안 변화하는 기업환경 속에서 계속 필요한 상품을 내놓으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팔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는 그 기업의 CEO다. 대표가 있기는 하지만, 조직운영이나 활동 방향 등을 판단하는 것은 모두 사무처장인 그의 몫이다. 하지만 그는 반성도 잊지 않는다. 그간 각종 전투 속에서 화려한 승리는 거두었지만, 정작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예컨대 그토록 복지운동을 했지만 정작 사회의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게, 그에겐 짐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그는 앞으로 이 기업이 팔아야 할 상품을 고민하고 있다. 요즘 화두는 2가지다. “현재 우리 사회 수구보수 세력의 핵심적 이데올로기가 성장주의와 한미동맹론이에요. 이게 사회 곳곳에 퍼져 우리를 지배하고 있거든요. 특히 우리 정신세계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개혁에 정말 중요할 것 같아요.”
원래 그의 40대 계획은 따로 있었다. 40대 초반에 2년 정도 외국에 나가 그간의 고민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뒤, 40대 중반쯤 사무처장을 하다 그 뒤엔 시민운동가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사무처장이 되는 바람에 인생 설계가 다 어그러졌다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걱정은 없어 보인다. 한 장의 정답지와도 같은 이 사람은 아마도 조만간 또 다른 정답을 만들어낼 것 같기 때문이다.
글 =김윤지 기자 yzkim@economy21.co.kr
사진 =이주노기자 jooroad@economy21.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