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이 아니라 관제방송이라고 해라
자이툰 부대 출국보도 침묵한 KBS와 MBC 뉴스책임자는 답하라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양문석  본지 전문기자

이제는 솔직히 탄핵방송에 대한 공영방송의 뉴스프로그램의 진정성도 의심스럽다. 적어도 공영방송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빼면 뉴스 프로그램은 관제방송이라고 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아니 공영방송이 아니라 아예 관제방송으로 스스로 선언하여야 한다. 이런 선언이야말로 수구언론과 다르다는 최소한의 차별적 행위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PD연합회보 최근호에 따르면, MBC 보도국 강성주 국장은 자이툰 부대의 파병사실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국방부의 보도자제 요청 때문이었음을 인정했다. 언제부터 MBC가 국방부의 '오더(order)'에 그렇게 성실의무를 다했는지 묻고 싶다. 그런데 가관은 KBS 보도국장의 답변이다. KBS보도국 이정봉 국장은 "인터넷 언론이나 다른 언론사를 통해 파병 사실이 알려져도 KBS는 국가 안보와 자이툰 부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보도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자이툰 부대원들의 안정을 위해 보도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과연 합당한 '변명'인가.

첫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CBS 등이 국방부의 보도자제 요청을 거부하고 파병사실을 즉각 보도함으로써 저녁 뉴스가 부대원 안전 운운하며 보도하지 않을 이유가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둘째, AFP통신과 아랍위성방송 알자지라 등 해외 언론이 자이툰 부대원들의 이라크로 향한 출국을 주요 뉴스로 전 세계에 타전했고, 특히 알자지라는 연일 한국군 파병소식을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다.

셋째, 당일 보도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비밀에 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파병 다음날인 지난 4일 50여명의 파병반대 국회의원들이 파병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며 기자회견을 했다.

도대체 하루만에 다 들통날, 아니 이미 다른 매체에서 공개한 내용을 '자이툰 부대원들의 안전'운운하며 시청자들이 알아야 할 권리, 들어야 할 권리, 그리고 보아야 할 권리를 짓뭉개고 나선 그 대담함과 그 꼴 같지 않은 변명거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손가락으로 달을 가렸으면 가렸지, KBS가 MBC가 보도하지 않는다고 이것이 자이툰 부대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그 오만과 교만은 그들의 몸통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정녕 국가기관방송의 뉴스책임자로서 그토록 자이툰 부대원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죽음의 땅 이라크로 가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알려 파병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리라.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국가시책을 충실히 보도해왔고, 항상 파병반대 관련 보도는 배제하거나 최소한의 생색내기에 그쳐 왔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 소위 '공영방송뉴스'는 더 이상 언론의 자유니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이니 국민의 알권리니 시청자 중심 보도니 하는 낯간지럽고 혐오감만 키우는 표현은 더 이상 사용하지 말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이들 공영방송뉴스의 탈을 쓴 관제방송뉴스들이 할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탄핵정국 때, 방송뉴스 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 보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후에도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 보편적 가치 옹호 등을 보도하는데 인색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탄핵방송 이후 이들 방송뉴스는 과연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과연 이들이 탄핵방송뉴스를 진정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기 위해서 그렇게 보도했는지, 아니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며 특정정당과 정치세력의 편들기를 위해서 했는지에 대한 그 진정성 조차 이제는 의심스럽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공영방송의 뉴스를 옹호하고 수구언론들의 집중적인 매도공세를 온 몸으로 막아냈건만, 이들의 공정한 뉴스 사실적 뉴스에 대한 바람을 저버리고 관제방송으로 회귀한 공영방송의 뉴스프로그램을 오늘에서 또 다시 목격한다. '땡전뉴스'와 무엇이 다른 지 공영방송의 탈을 쓴 관제방송의 뉴스책임자들이 답해야 한다.

 

2004년 08월 05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류와 비주류 경계선에 서다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시험을 본 다음날이면 선생님께선 정답을 적은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그 시험지에 적혀 있는 빨간 정답들의 마력은 기이했다. 그 답이 내 것과 같으면 안도가 되고, 틀리면 좌절한다. 혹여나 내 것과 틀릴까,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그 정답들의 행진을 따라가게 하는 묘한 힘도 있다. 사람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당황하지 않고 준비된 ‘정답’들을 주루룩 읊는 사람 말이다. 그래서 지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렇게 논리정연하게 정리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마침내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품게 된다. 각종 조사에서 한국 사회를 이끌 ‘차세대 뉴 리더’로 자주 꼽히는 김기식(38) 참여연대 사무처장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올해로 참여연대가 생긴 지 만 10년이 됐다. 지난 10년 동안 참여연대는 한국 사회에 참으로 많은 의제를 설정해 왔다. 1997년 시작한 ‘작은권리찾기운동’을 비롯해 한국의 대표 기업 삼성전자도 불편해하는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2000년 ‘총선시민 낙선연대’ 등 정재계를 아울러 참여연대는 무서운 존재다. 그런 참여연대와 늘 동급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김기식 사무처장이다. 93년 참여연대의 전신인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연합’을 만든 후, 94년 9월 지금의 참여연대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지닌 시민운동의 산물, 참여연대

지금이야 참여연대가 무서운 존재로 자리 잡았지만,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 진보운동의 시각에서 참여연대는 ‘개량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이단아’로 여겨졌다. 그 역시 그런 비판과 싸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의 시민운동들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여타 민주화 운동과 구분지으며 보수세력에 빌붙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처음 그가 ‘시민운동’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쉽게 참여연대를 폄훼하기 어려웠던 건, 많은 부분 그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투철한 운동가와 견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걸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하던 시절, 연세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광주를 알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었어요. 공부고 뭐고 다 내팽개쳤다가, 오로지 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대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입학식날 선배에게 말해 그날로 언더서클에 들어갔고요.” 그날 이후, 80년대 대학을 다닌 많은 이들처럼 그도 대학 시절 내내 수배와 감옥생활을 반복하며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80년대 후반엔 인천지역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 80년대 말, 회의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가 관여한 노동조합이 기본적인 임금협상을 하다 무참히 깨져 해고자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해고 후 생활고를 겪자, 단순히 자신이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그들을 책임질 수도, 그 상황을 합리화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적으로 자족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키느냐가 제 운동의 판단 근거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조금이라도 세상을 낫게 변화시켜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는 운동을 하자고요.”

여기에 하나 더 얹어진 게 30대에 대한 설계였다.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니, 운동을 열심히는 했지만 시대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에 끌려 다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얻은 결과물이 당시 시각에선 파격적이었던 참여연대였다. 때문에 20대 끄트머리에 있던 그는 “참여연대는 나의 30대 운동의 설계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참여연대를 만들면서 내세운 키워드는 2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 그리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그것이다. 80년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대안적 체제에 대한 고민의 답을 얻지 못하면서 그는 이 2가지에 자신의 30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어떤 체제가 들어서든 간에, 시민사회가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지 못하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또 한편으론 역시 어떤 체제가 들어서든, 인권과 복지·환경과 같은 가치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을 풀어가는 방법으로 그는 ‘의도된 애매모호함’이라는 전략을 택했다. “하나의 분명한 입장보다는 넓게 포용하면서 진보적 가치를 세우겠다는 거죠. 운동이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막겠다는 반성적 측면도 있고, 우리 현실에선 중도우파적 주장도 충분히 개혁적일 수 있으니 이들을 포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때문에 참여연대 회원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이데올로기로는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까지, 계층으로는 노동자에서부터 전문직까지 아우른다. 때문에 두 쪽에서 비판과 지지도 사안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단체를 이끌어야 하는 그에겐 이런 점이 훨씬 힘들 수밖에 없다. “전 참여연대의 포지션을 ‘무시당하지 않는 비주류’라고 이야기하곤 해요.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에 항상 서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주류사회가 참여연대 정도는 끊임없이 끌어 당기고 싶어하는데, 그러는 순간 우리 운동성은 약화되죠.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비주류화하면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사회를 못 바꾸니까 실력을 갖춰야 하고요.” 하지만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이 계속 바뀌다 보니 참여연대 역시 계속 그 경계를 따라 변화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스스로의 위치와 목표를 고정시키지 않고 계속 사회에 맞춰 움직여야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운동상품도 마케팅이 중요하다

여기서 뭔가 익숙한 이야기가 떠올려지지 않는지. 바로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함께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기업의 논리와 꼭 같다. 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다. “한국 사회에서 무시되지 않으려면 3가지가 필요해요. 우리가 내놓는 문제제기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킬 합리성, 그리고 그들의 지지, 마지막으로 그런 문제제기를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이요. 기업에서의 마케팅 전략처럼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여연대가 하나의 벤처기업처럼 여겨진다. 그 기업은 지난 10년 동안 변화하는 기업환경 속에서 계속 필요한 상품을 내놓으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팔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는 그 기업의 CEO다. 대표가 있기는 하지만, 조직운영이나 활동 방향 등을 판단하는 것은 모두 사무처장인 그의 몫이다. 하지만 그는 반성도 잊지 않는다. 그간 각종 전투 속에서 화려한 승리는 거두었지만, 정작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예컨대 그토록 복지운동을 했지만 정작 사회의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게, 그에겐 짐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그는 앞으로 이 기업이 팔아야 할 상품을 고민하고 있다. 요즘 화두는 2가지다. “현재 우리 사회 수구보수 세력의 핵심적 이데올로기가 성장주의와 한미동맹론이에요. 이게 사회 곳곳에 퍼져 우리를 지배하고 있거든요. 특히 우리 정신세계의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개혁에 정말 중요할 것 같아요.”

원래 그의 40대 계획은 따로 있었다. 40대 초반에 2년 정도 외국에 나가 그간의 고민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뒤, 40대 중반쯤 사무처장을 하다 그 뒤엔 시민운동가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사무처장이 되는 바람에 인생 설계가 다 어그러졌다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걱정은 없어 보인다. 한 장의 정답지와도 같은 이 사람은 아마도 조만간 또 다른 정답을 만들어낼 것 같기 때문이다.

글 =김윤지 기자 yzkim@economy21.co.kr
사진 =이주노기자 jooroad@economy21.co.kr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08-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시민운동의 한 가지 자기인식을 볼 수 있는 기회인 듯해서 퍼옵니다.

로드무비 2004-08-0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사람 참 좋던데요. 믿음직하고...

balmas 2004-08-0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차세대 뉴리더라고 불리겠죠.
그런데 저는 솔직이 사람은 별로 믿는 편이 아닙니다. 사람한테 많이 속아봐서 그런 것도 아니고(사실 가끔 속긴 하지만^^) 원래 의심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냥 사람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해왔고, 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걸 중시하는 편입니다. 또 그래야 실망도 덜하구요.
김기식 씨는 시민운동의 대들보 같은 존재인 듯한데, 글쎄요, 앞으로는 국내에서 시민운동 하기가 좀더 어려워질 텐데, 그걸 어떻게 해쳐나가는지 한번 지켜봐야죠.
 

 

 

[시론] ‘폭력 악순환’ 누가 책임지나

 

작년에 나는 이라크에 있었다. 미국 대통령 부시가 항공모함 위에서 멋지게 종전 선언을 했건만,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폭격에 무너진 것은 건물들만이 아니라 이라크인들의 삶이다. 전투가 끝나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가난한 순서대로 무너진다. 예컨대 바그다드 변두리 ‘알 카마리야’ 주민들은 수도관이 낡아 수돗물이 간신히 나온다 해도 오염되어 끓여먹어야 하는데, 전쟁 이후 가스 공급이 끊겨 그럴 수마저 없으므로 이웃 마을에서 물동이로 물을 받아다 먹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도 역시 가난하여 그 물마저 오염되었다 했다. 한낮에는 섭씨 60도에 육박하는 가혹한 더위에 그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목이 멘다. 물가는 몇 배나 뛰는데 가난한 가장들은 태반이 일자리를 잃었고 식구들은 전염병과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쓰러진다. 전쟁은 무엇보다 반민중적이다.

-美깃발 아래선 모두 점령군-

전쟁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년 반이 넘도록 미군이 이라크를 재건하지 못하는 이유는 군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부 그레이브 감옥 고문’ 사건과 ‘팔루자 학살’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미군은 이라크인들을 위해 거기 있지 않다. 재건해야 할 이라크를 강압하고 해방시켜야 할 이라크 민간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군 깃발 아래 있는 모든 외국군은 점령군이요, 이라크인들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여러 갈래이고 그들 모두가 김선일씨를 살해한 ‘알 자르카위’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아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평범한 이라크인들의 애국심이야말로 저항세력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며, 점령이 폭압적일수록 이들의 저항도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건축장비와 의료품을 싣고 갔다 한들 한국 파병군은 군대이며, 이라크에서 하게 될 일은 다름 아닌 이라크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다.

한 시인이 “전쟁의 책임이 히틀러 같은 호전적 정치인들에게만 있겠는가, 그에 동조하거나 그를 묵인했던 대중들에게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 과반수가 파병이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과반수가 우리나라 사정상 피할 수 없는 일로 본다고 한다. 그 과반수라고 호전적인 성품은 아닐 것이다. 단지 지금처럼 평온한 일상을 원할 뿐. 그러나 그런 소박한 욕구의 대가가 전쟁이다. 이것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다. 이라크와 아랍 세계 전체의 증오와 보복으로부터 이제 대한민국 전 국민과 해외 동포들까지 안전할 수가 없다.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이유로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낸 횡포를 반성해야 한다. 그들도 사정이 있고 서구에 침탈당한 수십 년 동안 그렇게라도 항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야 무지무지 쌓였다. 이라크에 자원해서 간 파병부대 병사들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우리 땅이 바로 전쟁터가 되었다는 무서운 진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나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과연 정치인들은 어떤 책임을 질까. 히틀러가 2차대전 이후 독일 국민이 겪은 참담한 고난에 대해 무슨 책임을 졌으며, 미국 침공의 명분을 제공한 사담 후세인은 또 어떤가. 정치인이 자살하건 전범으로 처형당하건 개인적 불행일 뿐 전쟁을 겪은 국민들에게는 어떤 보상도 되지 못한다.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 정권의 명백한 실책이되, 대통령이 실각한다 해도 그 실수는 무마되지 않는다. 파병을 부추기고 주장했던 언론들, 파병을 가결시켰던 국회의원들, 파병의 논리를 꾸민 이른바 국방 전문가들, 그들 중 누가 자신들이 야기한 폭력과 피의 악순환에 대해 책임질 것인가. 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집권세력과 기득권층은 행운의 혜택은 제일 먼저 누리되, 국가에 닥친 불행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필경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뿐. 책임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

-명분없는 파병 철회 마땅-

모든 인간은 평온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도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내가 평온하기 위해서는 남이야 그렇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결국은 국가간 전쟁으로 비화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은 국가라는 추상적 권력이 아니라 평온하게 살기만 바라는 너고 나고 우리다. 평화는 의지가 필요하다. 국가의 위험한 결정을 막아야 한다. 국가는 책임지지 못한다. 국민의 힘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한국군을 되돌려야 한다.

〈오수연 소설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시 듣지 못할 「정은임의 영화음악」
월간 『말』 1월호, "올드 걸 올드보이를 만나다"

 

이오성 기자 dodash@digitalmal.com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던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4일 저녁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고인이 진행했던「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습니다. 고인은 MBC 노동조합 여성부장과 업무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방송 현실 개선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월간 『말』 1월호 문화인물탐험에 실렸던 아래 기사는 고인이 살아 생전에 했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올드 걸, 올드 보이를 만나다

글 이오성 기자

사진 허태주 기자

지난 12월 5일 저녁,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2003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한 여성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정은임 누나다!"

삼십대 중반은 돼보이는 영화인의 입에서 터진 '누나' 소리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이 정은임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정은임(35). 1992년 11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매일 새벽 1시면 대중들 앞에 목소리를 드러낸 이래 그와 그의 방송은 하나의 '물결'이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위주의 영화 소개로 일관하던 당시의 영화음악 방송 풍토에서 FM 영화음악은 날카로운 사회비판, 새로운 영화읽기로 1990년대 문화빅뱅의 시대를 진보적으로 지킨 상징이었다.

영화 「파업전야」가 특집으로 편성되는가 하면, 「인터내셔널」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나와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고정 패널로 출연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정은임씨의 대화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적 영화읽기'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되곤 했다. '정영음'이란 고유명사로 불리우기도 했던 이 방송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고 정은임은 그 안식처를 지키는 누이요, 연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던 날 어느 중학생은 수학여행길에까지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가 여관방에서 들으며 눈물지었다. 그날 방송에서 정은임은 "꽃 지는 날 만났다가 꽃 피는 날 헤어진다"며 이별의 회한을 달랬다. 1995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달갑지만은 않았던 방송복귀

그리고 8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20일. 다시 「정은임의 영화음악」(MBC FM)이 돌아왔다. 매일 새벽 3시부터 4시, 그의 말처럼 '청취율의 사각지대'인 탓에 신경 쓸 것 없어 더욱 편한 심야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겨울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그에게 던진 첫 마디는 "꽃 피는 날 떠났다가 꽃 지는 날 돌아온 소감을 말해달라"는 말이었다. 감개무량의 감회를 기다렸던 기자의 기대와 달리 그는 "영화음악을 별로 맡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의외였다.

   
"걱정되는 일이 많아서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MBC에서 없애려고 했거든요. 지금 영화음악이라는 게 독자적인 무엇이 있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음악을 삽입하는 수준이잖아요. 전세계적으로도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안 돼요. 그걸 몇몇 피디가 몸으로 막아내서 그나마 버텨왔죠."

걱정되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8년 전 그가 영화음악 진행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애청자들이 '정은임 복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최초의 대중매체 소비자운동인 셈이었다. 이들은 정영음의 사회비판적 내용과 진행자의 적극적인 노조활동 때문에 방송사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중도하차하게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해 왔지만, 당시 입사 4년차의 방송 노동자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쏟아졌던 유형무형의 '파장'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와 영화음악을 연관지으며 회사 밖의 사람들과 달리 회사 안에서는 뭐랄까, 당시 그 사건을 해사행위 비슷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마치 제가 바깥의 사람들을 움직여서 어떻게 한 것처럼 사시를 뜨고 쳐다보는. 제가 결벽증 같은 게 있는 데 그런 오해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나는 정당하다, 차라리 방송진행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한번은 영화 관련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어떤 사소한 일조차도 소영웅주의로 바라보는 식이었죠.

사실 2년 전에도 영화음악을 하기로 했다가 회사 내에서 잡음이 일어나 그만둔 적이 있어요. 손석희 부장님이 와서 '네가 영화 일을 안 하는 건 인력낭비다'라며 진행을 제안해서 하기로 했는데 또 주위에서 무슨 끈을 잡았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그때 제가 발끈해서 '나 그렇게 사는 사람 아니다 안 하겠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손석희 부장님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졌어요. 이미 보도자료까지 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시 관 밖으로 나오다

예기치 않은 파장과 그로 인한 부담 속에 영화음악으로의 복귀를 주저할 무렵,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또한 정영음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관 뚜껑을 열지 말아달라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스스로 시체가 됨으로써 정영음을 사랑하던 많은 이들을 결국 '네크로필리아'로 만드는 일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정영음과 관련한 다큐를 찍게 됐어요. 거기에 함께 참여하면서 옛날 그 청취자들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달라졌지요. 게다가 이제 일 핑계대고 영화는 실컷 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미끼를 덥썩 물었죠."

그렇게 영화음악실로 복귀한 지 2개월여. 11년 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 그에겐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니 어쩌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디오가 굉장히 어려졌어요. 가끔씩 무슨 이야기만 하면 '너무 이념적이지 않아요? 요즘 애들은 듣기 싫어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무조건 청취자들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라디오는 솔직하잖아요. 요즘 다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얼마나 사적인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 같은 멘트를 많이 하나요? 그런데 왜 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안돼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제 일상 중의 하나거든요.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인데, 방송에선 여전히 예쁜 말만 골라서 해요. 그리고 우리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굉장히 즐기지요."

정은임은 가령 창사특집방송이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코너에 아나운서들이 차출되어 나눔의 정을 호소하고 돈을 모으는 일을 동료들끼리는 '앵벌이 뛴다'라고 표현한다며 종국에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방송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의 정영음이 그랬듯 방송과 사회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그의 목소리도 함께 떨리곤 한다. 복귀한 뒤 두 번째 방송을 하던 날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기자는 가슴이 떨렸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스스로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겨우 매달린 기분으로' 청취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신유행의 피곤한 수다로 점철되는 FM 방송에서는 물론, 여느 개혁적이라는 매체에서도 이처럼 애틋한 멘트는 듣기 힘들다. 단순히 싸구려 감수성으로 포장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닌 탓이다. 적지 않은 양의 방송 멘트를 써내려가는 일도 때때로 그의 몫이다. 그런 만큼 그에 따른 부담도 함께 돌아온다.

노동자, 그리고 8학군 기자들

"오늘은 이 이야기 안 하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힐 것 같다는 날은 꼭 직접 써요. 영화도 시선이 다르면 달리 보이듯이 어차피 방송을 진행하는 제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굉장히 비난 많이 받았어요. 나더러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 육체노동자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뭘 아느냐고 이야기하더군요. 거기에 방송이나 언론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마이크나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SF 영화 같은 세상 아닌가요. 모든 것이 나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이미 짜여진 세상. 너는 중산층이고, 한 달에 얼마 버니까 얼마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라는 거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손배가압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보면 괴롭고, 고민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고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할 수 없나요? 왜 '8학군 기자들'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방송국에도 정말 8학군 출신 기자들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뉴스에서도 시선이 한쪽으로만 흐르게 돼요. 노동자, 농민 이야기는 그들의 생리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눈도 돌리지 않고. 말은 심각하지만, 그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옆에서 투명인간화되어 버리는 청소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인데."

   

MBC 입사와 관련해 정은임씨에게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그가 입사했던 1992년은 MBC가 방송민주화를 내걸고 한창 파업 중이던 시기였다. 수습사원들에게 예의 노조불가입 각서가 강요됐고, 그는 입사동기 중 유일하게 방송사 간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파업에 참여한 '강성'노동자였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네 살배기 아이의 엄마이자 노조의 간부(여성부장)로 재임 중인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직장 탁아소를 설립하는 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가 관련 법률까지 직접 챙기며 일을 벌이자 주변에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MBC 쯤 되는 거대 방송사조차 그와 같은 악바리가 나서지 않는 한 여느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MBC에서 그를 만난 날도 저녁에 노조회의가 잡혀 있다며 굵은 서류뭉치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행복한 영화 읽기

1998년에 그는 방송활동을 잠시 접고, 미국으로 영화공부를 떠났다. 그가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제목은 '한국의 영화마니아'. 1990년대 초반 정영음을 통해 일군의 영화마니아를 배출했던 당사자이기도 한 그에게 한국 영화와 영화마니아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일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커졌죠. 영화라는 것의 속성이 어차피 상업적이에요. 어떻게 보면 상업성 일변도로 가고 있긴 하지만. 대중들은 예전과 크게 차이 나는 건 없다고 봐요. 예전에도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계층이 20%밖에 되지 않았죠. 문제는 커다란 강이 있으면 거기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지류가 있어야 문화적 자생력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일 테죠. 그런 지류들의 움직임이 아직은 제 기를 못 펴지만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영화 같은 데서 그런 움직임을 발견해요.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수일지라도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려야죠. 그게 미디어의 기능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엄청난 사명감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자연스레 말하고 전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행복하게 느껴져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해요. 가령 박찬욱 감독 같은 경우 평론가 시절에 만났을 땐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빌빌거렸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 보면 저렇게 훌륭한 감독님이 돼 있잖아요. 그런 성장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정은임씨는 최근 본 영화 중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수작으로 꼽는다.

"「올드보이」를 보면서 송두율 교수를 떠올렸어요. 괴물이란 존재는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걸 뜻해요.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생각이나 사상 모든 것들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결국 최민식에게 근친상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말하자면 괴물로서의 그 삶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최면을 거는 사람이 어쩌면 감독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감독은 최민식이 괴물인지, 혹은 그를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우리 사회가 괴물 같은 것인지 말이죠.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해석의 시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 영화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는 건 당연하고요, 심지어 어떤 관객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마저도 좋게 느껴지더군요."

올드 보이와 올드 걸의 연대

이 쯤에서 '올드 보이와 관련해'(?) 정영음과 『말』독자들에게 한 가지 '뉴스'를 알려야겠다. 그건 올 1월부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도 정영음에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정영음의 방송재개 이후에도 꾸준히 "정성일씨를 출연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정영음의 극성팬들에겐 더없는 희소식일 터. 그런데 정성일씨가 복귀하게 된 과정엔 정은임씨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이를테면, '소녀, 소년을 꼬시다' 정도가 될까.

"복귀하면서 정성일씨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나는 이제 올드 보이다'라며 고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무슨 소리냐, 나는 관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다. 나야말로 '올드 걸' 아니냐고요(웃음). 그렇게 곡절 끝에 일단 한 달 동안만 함께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 한때 "한국에서 영화광의 여러 단계 중 그 첫 번째 단계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때 영화광의 1단계에 진입했던 '올드 보이'들은 영화광의 나머지 단계의 진입에 성공했을까. 그리고 한국영화판을 바꾸기 위한 '올드들의 연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겨 '올드 걸'의 반열에 오른 정은임씨의 경우 '열린 영화광'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또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전엔 바보였어요. 절대적인 진리를 믿었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이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남들을 용납하지 않았아요. 누군가는 그걸 매력이라고 했지만요. 그게 아이를 기르면서 달라졌어요. 과거에 나는 너무 나만의 언어로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언어를 하나둘씩 이해해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세계가 있고, 그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 하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정말요."

   

 

2004년 08월 05일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드무비 2004-08-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stella.K 2004-08-0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balmas 2004-08-0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버스간에서 저를 글썽이게 한, 바로 그 글이올시다...
===============================================================================

하루에 몇번씩 폭발음 죽음조차 점점 무감각
[한겨레 2004-08-03 17:28]
[한겨레] 테러와 교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참극의 땅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이라크인들을 위한 평화교육센터 사업을 벌이고 있는 평화운동가 한상진 hansangj@hotmail.com씨가 한국 자이툰 부대 선발대가 이라크로 떠난 3일 현지 사정을 전해왔다. 한씨가 몸담고 있는 평화운동단체 ‘함께 가는 사람들’( www.ihamsa.net)의 허락을 얻어 이를 싣는다.

어제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두 건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를 상대로 한 폭탄 공격이었습니다.

이라크 전체에서 교회를 상대로 모두 다섯건의 폭탄공격이 있었는데 그 중 두건이 제가 살고있는 동네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제 집에서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에서 발생했습니다. 거리의 가까움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겨냥한 것으로는 제가 본 첫번째 공격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자못 컸습니다.

종교갈등 불안감 확산 “무장세력이 드디어 이 전쟁을 종교전쟁으로 끌고 가려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아마도 일부 아랍계의 단결과 지지를 모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종교박해로 이어지면서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더군요.

제가 아는 이슬람은 평화와 포용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아랍문화와 이슬람 종교를 기반으로 한 평화교육센터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저녁부터 그 자신감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까지 절망하면 안되는데...”하면서 스스로를 부추겨 보지만, 힘이 들군요.

어제 저녁에 한 기자가 그러더군요. “여기서 도대체 누구를 돕겠다는거냐 지금 보고 있지 않느냐 목숨걸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도 조만간 나갈거다. 제발 빨리 여기서 떠나라.” 모두들 이라크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 기자들마저 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떠나지 않으면 언젠가 여기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나면 소위 ‘연합군’이라고 불리는 침략군과 무장 저항세력 그리고 속절없이 죽어갈 이라크 민간인들만 남겠죠.

운이 좋아 여기서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여기서 겪었던 아픈 기억들을 또다시 모두 끄집어내서 증언하는 일을 해야겠죠. 그 역시 죽음만큼 힘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시 기억하기 싫을만큼 아픈 기억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려고 인터넷 카페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폭발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건 정도로 들리던 폭발음이 이제는 하루에도 몇번씩 들립니다. 이번 폭발에서는 또 몇사람이 죽어 갔을까요.

분노 대신 두려움 커져
어제 폭발사고 직후에, 폭발지점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변함없이 장사를 하고 있더군요. 사람들이 이런 폭발과 죽음에 이제는 무감각해져가고 있습니다. 몇사람 붙들고 “차라리 분노해라. 분노보다 무감각이 더 무서운거다”라고 호소해 보지만, 소용없는 짓입니다. 사실 저도 점점 무감각해져 가고 있으니까요. 두렵습니다. 이렇게 계속 무감각해져가다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서도 더이상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될까봐서요. 두려움 속에서 몇자 적었습니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08-06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들 읽고 퍼가고 전하시길,
한상진 씨의 노력이 의미있는 정치적 결과로 나타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