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말]

 

인간을 ‘왕따’시킨 글로벌 경제권력의 ‘접속’

 

세계시민사회속으로16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박성원 신학박사 세계개혁교회연맹 협력과 증언부 총무

20세기 자락을 접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을 신호로 유럽의 지정학적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냉전시대로부터 소위 ‘평화배당금’(peace dividend)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조금씩 인류의 마음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희미한 희망은 곧 절망의 무덤에 묻혀야 했다. 세계의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사회운동들은 예상치 못한 변화에 넋을 잃고 거의 5년을 지낸 후, 서서히 ‘세계화’(globalization)를 냉전 후기의 세계 갈등요인으로 지목하고 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이 ‘세계화’ 화두를 앞세우고 견제자가 완전히 없어져버린 세계로 마차를 몰고 있다. 마치 그 옛날 백인들이 서부개척을 하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근거를 밀어버리고 그 위에 자신들의 가치를 심었듯이 지금 세계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가 과거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로 전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결과 세계는 경제적 불평등, 테러리즘, 군사주의, 가치관의 붕괴, 문화식민주의, 자연의 파괴 등 엄청난 지정학적, 지경학적, 정신적, 경제적, 생태계적 허리케인의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포스트 냉전시대에 경제세계화를 앞세우고 미국이 벌이고 있는 지정학적 드라이브는 세계와 아시아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세계화’란 훨씬 복잡해진 상황 속에서 우리의 지정학(geo-politics)적 시각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시공간의 제약에서 출발한 지정학의 변화

지정학을 말할 때 우리는 세계가 처해 있는 시간(time)과 공간(space)의 이해 및 현실에서 출발한다. 역사 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와 상황이 여러 가지로 변천되어 왔다. 옛날에는 인간이 자연과 지역이란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왔다. 이때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자연적이고(natural) 지역적(local)이었다. 또한 시간과 공간도 임의적으로 정의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자연과 삶이 위치한 지역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정의되고 통제되었다.

땅에 근거를 둔 농경생산물은 지역의 공간과 자연의 시간에 의존했다. 공동체의 구성은 자연을 필수적 연계로 하는 이 원초적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형성되었다. 부족공동체가 바로 이런 예일 것이다. 정치적으로 봉건주의와 전체주의적 왕국들은 자연적인 지정학적 상황과 농경경제에 의존했다. 문화의 발전도 종교적 신앙도 이 자연적 시간과 공간 속에 형성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산업문명으로 인해 이 패러다임은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지정학의 본질이 전혀 새롭게 바뀐다. 산업지정학(industrial geo-politics)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절대적인 공간과 절대적인 시간 개념이 산업사회를 지배했다. 삶을 근본적으로 기계라는 눈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시간과 공간은 산업사회의 필요와 지시에 따라 운영되었다. 산업경제는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의 지정학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것이 근대성의 핵이다. 이 문명의 추진이 바로 근대화로 간주되었다. 서구 계몽주의가 세계철학을 지배했고 서구 계몽주의가 산업사회의 구조를 형성했다. 과학과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중심이 지역의 봉건 지정학에서 국민국가(nation-state) 지정학으로 옮겨갔다. 근대산업 지정학에서는 자유시장의 개념과 근대 국민국가, 다윈의 사회진화론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지정학에서는 개인이 절대적 정체성을 가진다. 사회적 관계는 개인 사이의 계약(Contracts)에 의해 규정된다. 문화적으로는 자유와 사유재산이 지고의 가치로 숭상된다. 인간 공동체의 자연에 대한 관계는 지배와 정복의 개념이었다.

이 산업시대의 지정학에 있어서 권력의 중심은 서구산업국가였다. 근대 산업지정학은 서구문명이 비서구문명권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식민지주의는 서구의 산업문명이 비서구사회로 그 시장 확장을 기하기 위해 생겨난 지정학적 구도이다. 서구자본과 서구 시장이 근대산업 지정학에 포함되어 확장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훨씬 발전된 과학과 고도의 기술개발 덕택으로 새로운 사이버 과학기술전자정보시대의 새로운 지정학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지정학을 과학기술전자정보지정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새로운 지정학은 시간과 공간을 무한의 개념으로 변화시켜 버렸다. 이전의 지정학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이제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부시 정권은 ‘반테러 전쟁’을 종종 무한전쟁(unlimited war)이라고 정의한다. ‘무한’이란 개념은 종래에는 철학이나 종교적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무한전쟁’, ‘무한경쟁’ 등 중요한 지정학적·지경학적·군사적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레이건이 시작한 ‘별들의 전쟁’과 부시 정권이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 개념은 바로 공간을 무한화하는 것이다. 시간의 무한화는 이미 코소보 전쟁 때부터 사이버상으로 전쟁을 끝낸 경험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과학기술전자정보지정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화되어 버렸다.

지정학의 주 플레이어도 달라졌다. 근대 지정학에서는 국민국가가 지정학의 주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기술전자정보시대의 지정학에서는 거대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금융기관이 주 플레이어이다.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한 오늘의 지정학

이런 새로운 상황 속에서 과거 지정학의 대상과 역할도 크게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수단’이 ‘목적’으로 바뀐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사람과 삶이 목적이었다. 농경사회의 지정학은 권력을 소규모로 행사하긴 했어도 사람의 삶과 부족공동체의 유지가 목적이었다. 근대산업사회에 와서는 비록 시간과 공간이 산업적 목적에 의해 정의되고 통제되긴 했어도 사람과 삶이 목적이었다. 지정학의 주체가 봉건체제에서 국민국가로 바뀌었지 그 권력이 지향한 것은 사람과 삶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권력이 지정학의 핵으로 작용했다. 이 권력은 지배와 정복이란 개념과 결합하여 식민주의를 낳았고 역사 속에서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권력 확장의 과정을 끊임없이 산출했으며, 이에 의해서 세계가 견딜 수 없는 억압을 지역사회에서부터 국제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몰아붙여지는 오늘의 세계화 속에서는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한다. 경제는 삶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부의 축적이 목적이 되었다. 금융도 자본도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경제적 수단이 되어야 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땅도 노동도 부의 축적이란 목적으로 둔갑했다. 삶이 노예화되고 있다. 지정학의 주체인 국민국가도 이 세계화시대에는 ‘국민과 국민의 삶에 대한 봉사’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초국적 자본과 국제금융기관들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의 안보가 그 본래의 목적인 군대도 세계화의 상황 속에서는 시장 확장, 시장 보호 등이 그 목적으로 변해 버렸다.

미국이 ‘반테러 전쟁’이란 이름으로 일극주의에 의해 다자주의를 완전히 폐기시키고 세계가 어렵게 일구어 온 국제사회 텃밭을 황폐화시켜 가면서 심지어 교토 의정서도 실종시키며 온갖 국제법을 무력화하면서 벌이고 있는 전쟁도 사실은 지정학적·지경학적 확장을 통한 자원전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의 지정학적 상황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지구적 군사지배에 의해 규정지어지고 있다. 미국은 미국 영토 이외에 세계에 7백25개의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협력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다른 군사동맹체들이 여기에 힘을 더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전략 변화도 바로 냉전 이후의 일극주의 세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 곳곳의 주둔 미군의 증가와 천문학적 숫자의 군비증가는 2002년 9월에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미국은 내년에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군비 중 절반을 차지하는 비용을 쓸 것으로 예상된다. 최소한 4천6백억 달러가 쓰일 것이라고 한다. 미국 군비는 지난 3년 동안 엄청나게 증가했다. 가장 큰 폭의 증가는 연간 미군의 군사예산이 유엔(UN)의 연간 예산인 14억 달러의 50배인 7백억 달러로 증가한 점이다.

미국의 군사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이 첫 번째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테러의 위협이다. 그러나 사실 미군의 군비 중에서 테러를 척결하기 위해 쓰는 비용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 세계가 1년에 개발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5백억 달러에 불과하고 군비로 쓰는 돈은 1조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군비가 전 세계가 쓰는 군비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돈을 개발에 쓴다면 테러는 사전에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으며 추진 중인 군사화의 더 근본적인 이유는 테러가 아닌 다른 데 있다. 그것은 9·11 이후의 새로운 상황 때문이 아니다. 이미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설정된 ‘군사주둔을 통한 세계시장 지배의 영향력 증가 및 유지’라는 미국의 세계 지배 비전의 끊임없는 실천이 군사주의 확대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지정학의 본질이다.

이에 덧붙여 석유수입에 의존적인 미국 경제, 아주 제한된 예비비, 엄청난 무역적자로 점점 미국 경제가 불안해지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미국 경제의 안정은 석유나 달러의 우위성을 지켜야 가능하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주요 무역 파트너들이 미국 채권을 사주어야 재정균형을 맞출 수 있다. 거기다가 현 정권과 끈끈한 유착관 계속에 있는 석유산업의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군산복합체뿐만이 아니라 군산학(Military-Industrial-Academic) 복합체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세력을 극대화하려고 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의 이면에는 초국적 기업의 목적을 위해 군대나 학문까지 동원되어 봉사하고 있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존재한다. 흔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그 국가는 이제 초국적 기업의 자본과 부의 축적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아시아

세계 곳곳에 군대를 파견하고 소형 핵무기(mini-nukes), 미사일방어시스템을 비롯하여 우주의 군사화, 사이버 전쟁 시나리오 등 신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볼 때 세계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로 전쟁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전쟁 상황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져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프리카는 오일, 다이아몬드, 목재 등 자원착취 외에는 세계 지정학적·지경학적 지도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다. 세계 무역라인이나 금융시장라인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사회주의권의 종주국인 구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인 동구권이 무너졌으므로 더 이상 이 지역도 세계갈등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자연히 미국은 아시아를 새로운 갈등 파트너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종교적으로 아랍권은 미국이 견제해야 할 첫 번째 상대이다. 여기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핵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이 중동에 개입하는 것은 거의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숙제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숙제인 셈이다. 아랍 달러에 대한 제어 및 지배는 숙명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랍 달러권과 대등하게, 오히려 더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교자본이다. 중국의 경제는 가까운 미래에 미국 경제에 타격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황해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지역은 미국의 세계지배 야욕과 유럽의 자기이익에 엄청난 도전이 되기도 하며 동시에 먹이가 되기도 한다. 서구는 동북아를 경제협력 파트너로 허울 좋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서구에 도전세력이 되지 않도록 이 지역을 적절히 묶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조작을 통해 접근하고 있고 유럽은 경제협력이란 미명하에 지금 결사적으로 중국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 중요한 개입원인이 되기도 하는 북한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접근이 목적을 같이 하면서도 방법이 다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접근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의 끈질긴 경제협력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북이 핵프로그램을 개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있고 유럽은 여러 나라가 북한과 수교를 하는 등 경제협력의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국민적 희망과 정반대인 한반도의 지정학

시장자유화란 이름아래 구조적 권력을 장악하거나 그 권력의 혜택 속에 들어가기 위한 결사적인 경쟁문화가 조성되고 있다. 개인이나 사회, 국가는 만약 자신들이 지금 세계의 금융과 자본 정보와 상품을 장악하고 있는 이 글로벌경제권력에 접속되지 않으면 영원히 도태될 수 있다는 절망감 때문에 어떤 국가는 매춘부처럼 눈을 흘기면서 어떤 국가는 눈물을 머금고 여기에 매달리고 있다. 딴 생각이 있어서 저항하거나 미온적이면 베네수엘라, 아이티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정치적 역학관계로 보았을 때는 극도의 경쟁문화가 조성되면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가 사회적 참여와 배제의 싸움터가 될 수 있다. 권력에 속한다고 하는 강력한 상징이 동원되거나 심지어 새롭게 조작되고 이 상징 속에서 자신을 남과 구분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여러 가지 정치적·종교적 조건들을 내놓는다. 지금 미국은 테러라는 기준을 가지고 ‘반테러전쟁’이란 상징을 내걸고 여기에 민주주의, 자유 등의 가치관으로 옷을 입히고 미국 편에 서는 국가와 문화, 그리고 그 편에 서지 않는 국가와 문화를 구분하고 차별하며 억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반테러전쟁’이란 결국,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으로 자신의 편이 아닌 편을 악(Evil)으로 규정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구태여 이쪽 편을 들지 않아 악의 편이 됨으로써 수없는 불이익을 감수하기보다는 이쪽 편에 속해 선의 편이 되고 거기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떨어지는 이익의 떡고물이라도 받아먹는 것이 삶의 지혜인 것으로 간주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한미동맹이란 상징에 연결해서 자기는 선의 자리에서 선한 일을 한다고 자기최면을 걸고 전혀 계산이 되어 있지 않는 국익이란 이름으로 파병을 적극 추진하려는 세력들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우리나라가 이라크에 인질로 잡힌 한 국민이 공개적으로 파병을 자제하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신앙고백처럼 파병의지를 거듭 천명하는 것은 겉으로는 한미동맹이란 의리를 앞세우지만 속으로는 혹시 항명하다가 감당치 못할 불이익을 당할까 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파병의지를 재천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청와대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우리가 파병하지 않음으로써 한미관계가 악화되면 한국 경제가 초토화될 수 있다는 논지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이례적으로 공개되었다.

이는 우리 정부가 바로 항명으로 받을 불이익에 대해 두려워 떨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집권여당의 파병에 대한 궁색한 논리전개를 보면 울며 겨자 먹기 식의 파병이 아니라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한 파병으로 태도가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 대부분의 바람이나 희망과는 정반대 방향의 지정학이 한국에서 행사되고 있다. 새로운 지정학의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다. 그 새로운 지정학적 패러다임은 과연 무엇일까? 누가 새로운 지정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명이 보장되는 새로운 지정학의 창출이 진정 민주화를 위한 완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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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과 ‘묶임’의 딜레마

 

국제정치학에서는 유달리 딜레마를 많이 얘기한다. 국가안보를 위한 정책은 어느 것이나 비용이 따르게 마련이고 원하지 않는 부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에 선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맹의 딜레마’도 이러한 딜레마 중 하나이다.

동맹은 기본적으로 유사시 국가안보에 도움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동맹관계를 맺었는데도 막상 유사시에 동맹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동맹국이 인명피해와 정치경제 비용을 무릅쓰면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버림’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맹국을 단단히 묶어 두는 ‘묶임’이라는 수단이 등장하고 ‘묶임’은 국가안보의 든든한 동량이 된다. 그러나 이 ‘묶임’이 단단하면 할수록 또 다른 안보위험이 제기된다. 이제는 동맹국의 전쟁에 끌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동맹관계는 ‘버림’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묶임’의 위험성을 견제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명제는 적어도 한국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지난 50여년간 한-미관계는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한국을 튼튼히 묶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일색이었다. ‘남침’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한국에게 ‘묶임’의 위험은 사치일 뿐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기지를 공여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고, 주한미군의 지위와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이것도 모자라서 주한미군 방위비를 분담하고, 월남에 파병하고, 이라크에 파병하는 등 미국을 한국에 묶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냉전시기 소련이 유럽을 공격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소련을 공격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해도 ‘묶임’의 위험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과거 ‘버림’에 대한 공포는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한국의 국방비는 북한보다 6배가 많을 정도로 한국 군사력이 성장했다. 한국 군사력이 북을 능가한다는 평가들도 나오고 있다. 이미 199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나왔던 것도 이러한 군사력 평가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국은 이제 ‘버림’ 받아도 혼자 설 수 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정보력과 대포병화력 능력 등에서 공백이 생긴다는 것은 전쟁발발시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작전계획 5027을 이행하는 능력에 부족분이 생긴다는 것이지 남침저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서 ‘묶임’의 위험은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1994년 여름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직전에까지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이 공격을 감행했다면 한국은 당연히 그 전쟁에 끌려 들어갔을 것이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현 부시 행정부도 북한과 같은 국가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공식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도 ‘묶임’의 위험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은 미국과의 묶임을 더 튼튼히 하기 위해 아프간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강행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인을 수입까지 해와서 한국 기지에서 주한미군 일부가 이라크 전쟁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곧 이라크로 투입된다. 그 결과 김선일 사건이 보여준 것과 같이 테러의 위협이 늘어나고 있다. ‘묶임’이 한국의 안보에 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묶임’의 위험은 미래의 시나리오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대만해협에서, 또는 동남아시아 남사해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주한미군이 투입되고 한미연합사가 동원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에 묶여있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분쟁에 끌려 들어가고 톡톡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내주 한-미 두 나라는 포괄협정과 이행합의서에 가서명할 예정이다. 349만평이나 되는 땅을 제공하고 3조6천억~6조원에 달하는 이전비용을 한국이 전액부담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이 미국의 전쟁에 끌려들어갈 ‘묶임’을 자초하면서 말이다. ‘버림’이라는 과거의 강박관념 때문에 한국을 미국의 전쟁에 묶어 놓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적어도 ‘버림’과 ‘묶임’의 딜레마를 인식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서재정/미 코넬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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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국보법 폐지 원년으로

 

〈오동석/아주대 교수·법학〉

56년 전 태어난 국가보안법 원판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쏙 빼닮았다. 치안유지법은 ‘국체 변혁’ 목적의 단체 조직을 중심으로 그에 가입하거나 협의, 선동·선전, 재산상 이익 제공 등의 주변행위를 처벌하는 법이었는데, 국가보안법 역시 ‘국가 변란’의 표현 정도를 제외하면 별로 다르지 않았다.

치안유지법이 악법인 이유는 식민지 지배를 위해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의 독립이든 사회주의든 특정 사상에 체제비판의 목적을 덮어씌워 그 단체와 관련된 광범위한 활동 일체를 처벌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현행 법률은 그보다도 적용범위가 넓다. 반국가단체에 대한 가입 권유, 형법상 100여 종류의 목적수행행위, 잠입과 탈출, 찬양과 고무, 이적단체 구성과 가입, 이적표현물 소지, 회합과 통신, 불고지 등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논의의 최소한 합의선으로 볼 수 있는 개정론은 대표적인 독소조항인 제7조의 찬양과 고무, 이적단체 가입, 이적표현물 소지 그리고 제10조의 불고지죄 등을 삭제하자는 의견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사건 90% 이상이 제7조 위반임을 감안하면, ‘국가보안법의 꽃’이라는 제7조가 없는 국가보안법은 그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머지 조항의 적용대상행위는 대부분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으며,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행위는 국가안보에 별 영향이 없어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일제하 치안유지법 빼닮아 -

한편 대체입법론은 예컨대 ‘민주질서수호법’으로의 개명론이다. 하지만 수호대상인 민주질서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정의하더라도 비폭력적인 체제비판행위를 포괄하여 처벌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여전히 사상·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미 연방대법원이 예이츠 사건(1957년)에서 폭력행위의 이론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물론 즉각적으로 폭력혁명이 실현되지 않는 한 그 주장 자체를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명제를 인용하며 방어적 민주주의를 국가보안법의 방패로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의 적’은 프랑스 혁명 직후 공화국을 부인하는 왕정복고세력이었다. 독일기본법상 ‘자유로운 민주적 기본질서’와 그에 위배되는 정당의 강제해산제도 또한 나치즘의 부활을 꿈꾸는 파시스트들을 염두에 둔 헌법보호장치였다. 독일공산당이 1956년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받기도 했지만, 12년 만에 정당활동을 재개한 것이 그 증거이다. 결국 비폭력적 체제비판에 대한 민주주의 체제의 물리적 방어란 아직 헌법질서가 제자리를 잡기 이전의 과도기에서 수구세력으로부터의 방어 차원 혹은 과거청산을 위한 재발방지 차원에 한정된 논리이다.

한참을 양보하여 국가보안법 제정 당시 법무장관의 말처럼 건국과정에서의 혼란 때문에 일시적으로 국가보안법이 필요했다고 치더라도, 1953년 형법 제정시 당시 대법원장이 형법과 중복되니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형법도 전혀 손보지 않고 국가보안법만을 폐지한다고 이적단체가 창궐하고 이적표현물이 난무하며 북한에 대한 찬양·고무행위가 빈번하게 그리고 버젓이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인 북한에 대한 현실적 판단과 평화적 협력 그리고 건전한 비판을 둘러싼 설득과 토론이 자리잡아갈 것인가. 대답의 관건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헌법체제와 그것을 움직여 갈 국민에 대한 신뢰 여부에 달려 있다.

- 형법만으로 체제수호 가능 -

이미 1948년에 ‘사상에는 사상을 가지고 극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정신을 몰각하고 인민을 극도로 속박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면, 3일이 못 되어 후회하고 자손만대에 죄를 짓는 일이며 정치력 0점의 정치인’이라고 자기비판한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제17대 국회가 56년 만에 ‘국가보안법 폐지 원년’의 월계관을 쓸 수 있도록 주권자의 이름으로 다그칠 일이다. 치안유지법의 잔재인 국가보안법을 청산하는 일은 의외로 간결하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보안법은 이를 폐지한다”는 조문만 만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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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케리의 미국도 파병 압력 행사할까?

[심층기획 : 미국 대선과 한반도-중(2)] 이라크 파병과 한미동맹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정욱식(cnpk) 기자

 

세 차례에 걸쳐서 연재될 이번 기획에서는 한반도 정책을 중심으로 부시와 케리의 외교정책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가 선택해야 할 대안은 무엇인지를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중편에서는 한반도와 관련된 케리의 외교정책을 북핵문제(1편)와 이라크 파병 및 한미동맹(2편)으로 나눠 분석합니다... 글쓴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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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가 당선될 경우 북핵 문제 못지 않게 관심을 끄는 문제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동맹 재조정이다. 이 문제들과 관련해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로 우리는 심한 몸살을 앓아왔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파병 문제는 별반 차이가 없는 반면에, 한미동맹과 관련해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동맹 재조정과 관련해 케리의 정책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병과 한미동맹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종속변수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존 케리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산만한 일방주의(erratic unilateralism)'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외교노선으로 '진보적 국제주의(progressive internationalism)'을 내세워왔다. 그는 "강하고 존경받는 미국"을 외교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외교정책을 수행할 때, 근본적인 가치와 차분한 자신감에 바탕을 둔 진보적 국제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특히 미국과 국제사회의 안보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집단안보를 추구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우방을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가 부시의 일방주의를 비난하면서 새로운 동맹체제의 건설을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닿아 있다. 부시가 '나홀로'를 고집했다면, 자신은 국제사회와 '함께' 해보겠다는 것이다. 케리 진영은 이 점이 바로 부시의 외교정책과 가장 큰 차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케리가 내세우고 있는 외교안보의 목표는 부시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승리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이라크에서의 평화정착을 시작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번영, 그리고 자유를 확산시키는 것을 핵심적인 외교정책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동맹의 창출과 지도 ▲새로운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의 건설 ▲군사력뿐만 아니라 외교력, 정보력, 경제력, 미국식 가치와 사상의 활용 등 이용가능한 미국의 힘을 총동원하는 것 ▲중동 석유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의 탈피 등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케리든 부시든, 파병 문제는 계속될 듯

2004년 대선에서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이라크 정책에 있어서 침공을 지지한 원죄 탓인지, 케리는 이렇다할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이라크 정책과 관련해 주목을 끌고 있는 부분은 이라크 주둔 미군은 대폭 감축하는 한편, NATO를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정치적·군사적 부담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와 지도력에 대한 불신으로 동맹국들이 이라크 파병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이라크 주둔 미군 수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케리가 집권하면, 미국의 동맹·우방국들은 대규모의 이라크 파병 요청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고, 여기에는 한국도 예외가 아닐 공산이 크다. 부시가 재집권하든, 케리가 되든 미국 대선 직후에 있을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 처리와 맞물려, 한국이 또 다시 파병 몸살을 앓게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다만, 파병을 요청하는 스타일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편에 설 것인지, 적의 편에 설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며, 국제사회에 줄서기를 강요했던 부시와는 달리, 케리는 동맹·우방국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예방전쟁 : 예방외교

미국 군사력과 관련해서는 "제4세대 전쟁, 즉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비대칭적인 적과 맞서 싸우는 전쟁에 대해 준비하고 이해해온 당사자는 민주당"이라는 케리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부시 행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해온 군사력 변형(military transformation)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이 직면한 각종 도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정보력과 통신수단, 그리고 장거리 투사 능력과 신속한 이동배치가 가능한 군사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케리는 육군 병력 4만명을 늘리고, 특수군의 능력을 강화하며, 전후 작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민사작전 부대와 군 경찰을 대폭 늘리겠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디지털 사단"과 "반(反) 확산 부대"를 창설해 대량살상무기와 테러 등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아울러 군 처우 개선도 주요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무력사용과 관련해서는 부시 행정부보다 훨씬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 이란 등과 직접 대화를 공언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력사용이나 강압외교에 의존하는 부시 행정부와는 달리 '대화 우선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즉, 부시 행정부처럼 특정 국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불필요한 적을 만들기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잠재적인 적국들을 미국식 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위협을 해소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예방전쟁(preventive war)에 입각해 일방적인 무력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케리는 불필요한 적과 위협을 만들지 않는 예방외교(preventive diplomacy)에 대외정책의 기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외부로부터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기다리지 않겠다"고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적국이나 테러집단에게 선제 무력사용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9.11 테러 이후 달라진 미국의 안보관과 부시 행정부의 정치 공세를 의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 감축, 조정될 가능성 높아

주한미군 재배치 등 한미동맹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큰 틀에서 볼 때, 주한미군 일부 병력을 감축하고 안정적인 주둔 여건을 확보하기 위해 기지를 재배치하며, 주한미군의 역할을 '지역군화'하는 것에 있어서는 부시 행정부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 감축의 규모와 시기는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 부시는 2005년까지 1만2500명을 감축시키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케리는 육군 병력 4만명을 늘리고 이라크 주둔 미군수도 줄이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한편, 주한미군의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시 행정부처럼 노골적으로 한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참여를 압박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미동맹 및 새로운 위협에의 대응 차원에서 케리 역시 MD와 관련해 한국의 협조를 원하겠지만, 부시와 비교할 때 그 수준이나 비중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대중국 정책 "전략적 경쟁자"에서 다시 "전략적 파트너"로?

케리가 집권할 경우 미중 관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리의 입장에서도 미중관계는 북핵 문제 및 한미동맹의 변화와도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북핵 문제와 함께 양안관계가 동북아의 최대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미국과는 군사동맹관계를, 중국과는 우호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차기 미국 정부의 대중국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단 중국은 북핵 문제와 대만 문제를 연계시켜왔다. 즉, 미국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확고히 하면서 대만의 독립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보이면,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입장을 많이 고려해주고, 반면에 미국이 대만에 무기 수출 의사를 밝히는 등 대만 독립을 부추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양상을 띠어온 것이다.

이에 따라 관심의 초점은 케리가 집권할 경우 대중정책의 변화 가능성이다. 큰 틀에서 볼 때, 부시든, 케리든 대만이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것 자체에 반대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의 확산은 미국의 '초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가 대만의 무기 수출에 적극적인 반면, 케리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차이를 드러낼 공산은 크다. 양안관계와 관련해 케리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보면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하고, 미국이 대만 방어를 돕는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한 것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부시는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보는 반면에, 케리는 '전략적 동반자'로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중국을 겨냥한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정책을 갖고 있는 반면에, 케리는 MD의 조기 구축에 부정적이고 안보 정책에 있어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케리의 미국이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을 좌시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클린턴 행정부가 1996년 3월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시위에 대해 항공모함 전단을 파견해 응수한 것이 보여주듯,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 저지는 '초당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시는 대만 무기 수출 및 중국을 겨냥한 MD 구축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양안간의 긴장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지만, 케리는 대만 무기 수출 및 MD 구축을 '조절해' 양안간의 분쟁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임할 공산이 크다.

반면에,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케리의 당선이 중국에게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중산층과 서민을 주된 지지 기반으로 갖고 있는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대중국 무역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가 중국으로부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협력을 이끌어낸다는 이유로 무역적자 해소에 미온적이었다고 비판하면서 매년 1천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적자가 미국의 실업난의 한 원인으로 보고 이를 시정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케리가 집권할 경우 미중 사이에 무역 마찰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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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타오르는 유에스에이, 잠 못드는 세계

타오르는 USA, 잠 못드는 세계

민주당 전당 대회 뒤에도 미 대선 박빙 승부… 왜 여건 유리한 케리가 부시를 따돌리지 못하나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나도 케리는 부시를 따돌리지 못했다. 미 대선은 예전과 달리 뜨거운 여름부터 한껏 달궈질 것으로 보인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박빙 승부. 모든 여건이 케리 편인데도 이런 아찔한 승부가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워싱턴= 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민주당 전당대회 다음날인 7월30일 오후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태운 버스와 조지 부시 대통령을 태운 버스가 펜실베니아에서 조우할 뻔했다. 두 무리의 긴 버스 행렬은 40마일 거리를 두고 펜실베이니아 서쪽의 70번 고속도로를 각각 지나갔다. 넓디넓은 미국 땅에서 두 후보가 같은 지역을 방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올 여름 두 후보의 일정은 자꾸 겹친다. 박빙의 싸움 속에서 양쪽 모두 일찍부터 접전 지역에 온 힘을 쏟는 탓이다.



△ 7월29일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후보 수락연설을 하는 케리 후보(맨위)와, 7월21일 워싱턴에서 열린 기금마련 행사에 참석한 부시 대통령. 세계가 가슴을 졸이며 이들의 승부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GAMMA)

7월26~29일 보스턴의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날 때까지 부시 대통령은 고향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상대방이 잔치를 할 때는 판을 벌이도록 비켜주는 게 도리다. 또 그때 선거운동을 해봐야 언론의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전당대회가 끝나기 무섭게 부시 대통령은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부 공업지대인 미시간,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등 4개 주를 버스로 돌았다.

전당대회 끝나기 무섭게 뜨거운 선거전

존 케리 민주당 후보 역시 전당대회 다음날부터 15일 동안 22개 주를 도는 버스 투어를 시작했다. 워싱턴에서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미 대륙을 종단한다. 대개 이런 먼 거리는 전세기를 이용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케리와 그의 러닝메이트 존 에드워즈는 오로지 버스와 기차만 이용할 계획이다. 밑바닥을 샅샅이 훑어나가겠다는 전략이다. 한표라도 더 끌어모으는 지상전의 중요성은 2000년 대선 이후 더욱 커졌다.

이번 대선은 어쩌면 2000년보다 더욱 치열한 접전이 될지 모른다. 부시와 케리 양 진영은 8월에 과거 어느 때보다 공세적인 선거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과거엔 9월 초 노동절이 돼야 선거운동이 본격화했지만, 이번엔 선거전이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나흘간의 전당대회 기간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후보의 지지율은 당연히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과거에도 그랬다. 문제는 지지율 상승의 폭이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 부시의 최측근 참모인 칼 로브는 “케리 지지율이 15%포인트 정도 상승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정도면 8월30일~9월2일의 공화당 전당대회를 통해 충분히 만회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민주당은 펄쩍 뛰었다. 로브의 이런 말엔 정치적 엄살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선 부동층이 별로 없다. 케리나 부시나 이미 지지층을 결집시켰기 때문에 전당대회를 통한 지지율 상승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칼 로브의 주장이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가 결과에 실망하게 만들려는 정치적 술책이란 게 민주당쪽 주장이었다.

민주당 결집해도 지지율은…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 발표된 여러 여론조사 결과들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7월29일 발표된 ‘조그비’ 여론조사에선 케리가 부시를 48% 대 43%로 5%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보다 케리의 지지율 상승폭이 크지는 않다. 전당대회 전, 같은 여론조사에서 케리가 부시를 2%포인트 앞섰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3%포인트가 더 벌어졌을 뿐이다. 더 재밌는 점은 두 후보 지지층의 견고함이다. 케리 지지율은 전당대회 전이나 후나 똑같다. 부시의 지지율만 3%포인트가 내려앉았다. 그게 케리가 아니라 부동층으로 옮겨지면서 부동층 비율이 그만큼 늘어났다.


△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리 지지 연설을 하기 위해 참석한 클린턴 부부. 민주당이 유례없이 결집하고 '정치 스타'들이 지원을 호소해도 승부는 박빙이다. (사진/ GAMMA)

이건 의미심장하다. 케리는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을 확실하게 결집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케리의 잠재적 라이벌로 여겨졌던 힐러리 클린턴은 전당대회장에서 케리를 추어올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워드 딘과 민주당 좌파인 데니스 쿠시니치 하원의원도 케리에게 한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최근 수십년 동안 이렇게 단합이 잘 이뤄진 대회는 없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조그비’ 여론조사대로라면, 케리는 부동층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는 데는 아직 역부족이다.

8월1일 발표된 <뉴스위크> 여론조사에서도 케리의 지지율 상승폭은 그리 크지 않다. 랠프 네이더까지 포함한 3자 대결에서, 케리는 49%의 지지로, 부시(42%)를 7%포인트 앞질렀다. 네이더는 3%포인트였다. 3주 전 같은 여론조사에서 케리가 부시를 3%포인트 앞선 것과 비교하면, 전당대회가 4%포인트의 상승 효과를 가져다준 셈이다. <뉴스위크>는 “이런 상승폭은 뉴스위크의 역대 전당대회 여론조사 가운데 가장 작은 수치”라고 밝혔다. 심지어 공동 여론조사(8월1일)에선, 전당대회에도 불구하고 부시(50%)가 케리(47%)를 오히려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기까지 했다. 이것이 공화당 주장처럼 전당대회 효과가 미미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민주당 주장처럼 “유권자들의 양극화 현상”을 반영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격차가 그 정도밖에 벌어지지 않은 게 공화당으로선 다행이다. 그러나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다. 박빙의 상황에선 언제나 상대방을 바짝 따라붙어야 한다. 한번 밀리면 다시 만회하기 힘들어질지 모른다. 공화당의 8월 대공세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케리는 전당대회를 통해 ‘베트남의 가장 위험한 전투지역을 자원해서 간 군인 출신’이란 점을 효과적으로 부각시켰다. 그는 이 경력을 국가안보 지도력과 연결시켜 유권자들에게 다가갔다. 공화당은 케리의 이런 이미지를 지우는 대신에 ‘너무 진보적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란 딱지를 붙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 열쇠는 케리의 19년간의 상원의원 생활에 있다. “케리는 19년간의 상원의원 생활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왜 1년도 채 안 되는 베트남 참전 경험만을 떠드느냐”는 게 공화당 공격이다. 부시는 직접 케리를 가리켜 “내 적수(존 케리)는 상원의원 19년 동안 수천번의 투표를 했을 텐데 특별한 업적을 남긴 게 별로 없다. 그가 훌륭한 의도를 갖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부시 국정지지율은 계속 추락

사실, 여러 외부적 여건은 케리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뉴스위크> 여론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3주 전의 48%에서 45%로 다시 떨어졌다. 지속적인 지지율 추락에도 불구하고 케리와 박빙의 싸움을 벌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부시의 고정표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지만, 국정지지율 추락은 그에겐 적신호와 같다.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 펜실베이니아와 오하이오를 방문한 케리의 유세장엔 가는 곳마다 1만명 이상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정권교체를 향한 민주당원들의 뜨거운 열망을 반영한다고 현지 언론들은 평했다. 같은 무렵 역시 오하이오 도버를 방문한 부시를 마중 나온 건 두 자매의 현수막이었다. 그 현수막엔 “할아버지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젠 당신 차례다”라고 써 있었다. 2000년 대선에서 부시를 지지했던 오하이오는 부시 치하에서 20만개의 일자리를 잃었다. 4년 전 부시를 지지했던 다른 주들도 대개 상황이 비슷하다. 부시는 “경제가 바닥을 쳤다. 앞으로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유권자들은 느끼지 못한다. 올 4월부터 일자리 수는 계속 증가 추세에 있지만, 대부분이 임시직이라 아직 유권자들의 피부엔 와닿지 않는다. 부시 집권기간에 200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부시에겐 커다란 짐이다.


△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동안 미국의 한 시민단체가 보스턴에 군화를 전시했다. 이 군화는 이라크전에서 사망한 미군들을 상징한다. (사진/ GAMMA)

여기에 미군의 이라크 주둔 문제가 맞물리면서, 2000년 대선에서 부시가 이겼던 주들 가운데 상당수가 접전지역으로 돌아서거나 케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라크에 많은 병사들을 보낸 플로리다나 노스캐롤라이나, 웨스트버지니아 등은 모두 부시가 반드시 이겨야 할 지역들이다.

7월24일의 선거인단 조사를 보면, 부시가 케리보다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부시에게 유리하진 않다. 부시와 케리가 접전 중인 플로리다, 미시간, 위스콘신 등 11개 주 가운데 펜실베이니아(선거인단 23명)와 오레곤(〃 7명) 등 2개 주는 머지않아 케리쪽으로 넘어올 것 같다고 은 전망했다. 또 케리 우세 주 가운데 접전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는 주가 메인, 미네소타, 워싱턴 등 3개 주(선거인단 총 25명)인 데 반해, 부시 우세 주 가운데 접전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는 주는 노스캐롤라이나, 콜로라도 등 7개 주(선거인단 총 73명)에 이른다. 주별 선거의 승자가 그 주에 걸린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미국의 독특한 ‘선거인단 제도’에서, 이런 상황은 케리에게 상당한 이득을 안겨주고 있다.

카리스마 부족이 케리의 아킬레스건

그런데도 전당대회까지 치른 케리가 부시와의 지지율 격차를 크게 벌리지 못한 건 뼈아픈 대목이다. 물론 미국 사회가 워낙 당파적으로 갈라져 부동층이 매우 적은 게 근본 이유다. 그러나 대중을 끌어모으는 카리스마의 부족은 여전히 케리에겐 아킬레스건이다. 호감도에서 부시는 케리를 앞선다.

<뉴욕타임스>는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취재기자 153명을 대상으로 비공식적인 여론조사를 했다. 언론이 케리에게 우호적이라는 공화당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누가 더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워싱턴의 취재기자들은 12 대 1의 비율로 케리를 꼽았다. 비워싱턴 취재기자들도 3 대 1의 비율로 역시 케리를 꼽았다. 그러나 케리와 부시 중 누구를 담당하고 싶으냐는 질문엔 77명이 부시를, 67명이 케리를 꼽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케리는 재미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평가가 올 11월 미국 대선을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불꽃 튀는 접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와 앨 고어가 승리한 주]

조지 부시 승리 지역 30개 주(271명)
앨 고어 승리 지역 20개 주와 워싱턴DC(267명)


앨 고어가 승리한 주 캘리포니아 코네티컷 워싱턴DC 델라웨어 하와이 아이오와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메릴랜드 메인 미시간 미네소타 뉴저지 뉴멕시코 뉴욕 오리건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워싱턴 위스콘신

조지 부시가 승리한 주 알래스카 앨라배마 아칸소 애리조나 콜로라도 플로리다 조지아 아이다호 인디애나 캔자스 켄터키 루이지애나 미주리 미시시피 몬태나 노스캐롤라이나 노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뉴햄프셔 네바다 오하이오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사우스다코타 테네시 텍사스 유타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와이오밍

[조지 부시와 존 케리의 주별 우세 현황]


부시 우세 지역 (25개 주 217명)
몬태나 노스다코다 사우스다코다 아이다호 와이오밍 네브래스카 유타 콜로라도 캔자스 애리조나 몬태나 오클라호마 텍사스 아칸소 미시시피 테네시 앨라배마 조지아 인디애나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루이지애나 알래스카

케리 우세 지역 (14개 주 · 워싱턴DC 193명)
메인 버몬트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일리노이 미네소타 캘리포니아 워싱턴 델라웨어 하와이 메릴랜드 워싱턴DC

접전 지역 (11개 주 128명)
플로리다 오하이오 아이오와 네바다 뉴햄프셔 뉴멕시코 위스콘신 미시간 웨스트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오리건

 

 

2지선다형, 부시냐 반부시냐

미 유권자들의 표심은 어디에… 변변찮은 정책대결, 오직 부시 지지와 혐오로 엇갈려

▣ 로스앤젤레스= 신복례 전문위원 boreshin@hanmail.net

민주당의 ‘미국에 대한 믿음’(Believe in America)이냐, 공화당의 ‘미국의 마음과 영혼’(Heart and soul of America)이냐.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을 향한 벼랑 혈투가 서막을 올렸다. 지난주 민주당은 보스턴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존 케리-존 에드워즈의 ‘존-존 커플’을 후보로 선정했다. 오는 8월30일 뉴욕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이 후보로 결정되면 11월2일 대통령 선거일까지 건곤일척의 맞대결이 펼쳐지게 된다. 관전자들에게 이번 선거만큼 재미없는 싸움은 없을 것 같다. 인물도 변변찮고 무기도 신통찮다. 거창하게 내건 명분도 고리타분하기만 하다. 주인공인 유권자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도대체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고 불평한다. 귀를 혹하게 하는 공약조차 없다.



△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민주당 케리 후보(맨위)와 공화당 부시 대통령. 양 진영 모두 이번 선거의 테마인 안보에 대해 어떤 정책을 내세울지 고심하고 있다. (사진/ GAMMA)

‘안보’만이 문제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이번 대통령 선거만큼 중요한 선거는 없었다. 벌어질 대로 벌어진 빈부격차와 갈라질 대로 갈라진 국론으로 미국은 현재 중병을 앓고 있다. 다음 4년간 병이 깊어진다면 더 이상 치유할 길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번 선거결과에 따라 미국의 앞길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모든 언론과 지식인들은 근심과 초조함으로 판세를 지켜보고 있다.

이번 선거전의 특징은 답이 나와 있는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다. 선거전의 테마는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안보’다. 현재 미국은 9·11 이후 테러전쟁과 그에 이어진 이라크 전쟁의 와중에 있다. 애국심이 뼈 속에 박혀 있는 미국 유권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또다시 9·11 같은 끔찍한 테러가 일어날 것이냐는 데 쏠려 있다. 더구나 이미 더러운 전쟁이 돼버린 이라크에서 수많은 자국 군인들이 희생되고 미국이 지구촌의 공적이 되면서 안보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다.

선거전에서 안보 테마의 위력은 한국의 유권자들이 가장 잘 안다. 폭발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어떤 반대 주제도 먹히지 않는다. 목숨과 재산이 날아갈 위기감 앞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갖은 실정과 심각한 이라크 전쟁 후유증에도 부시가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유는 미국의 심장 뉴욕을 강타한 9·11을 경험한 미국인들이 충격을 잊지 않은 덕분이다. 지난 1992년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시골뜨기 빌 클린턴에게 참패한 것과 지금은 분명히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 경제는 심각한 상황이다. 실업자들은 넘치고 각 지역을 지탱해온 전통 제조업체들은 망한 지 오래다. 경제지표들은 그럭저럭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바닥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빈부격차가 커져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가구 수가 전국적으로 300만 가구가 넘는다. 그러나 이런 경제 문제는 이번 선거전에서 2순위로 밀려났다. 전통적으로 미국을 떠받쳐온 중산층 유권자들은 수입보다 많은 고지서들을 손에 들고서도 ‘안보’를 더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

케리 진영과 민주당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어차피 부시 진영의 선거전략은 ‘힘의 미국’을 앞세운 안보논리다. 미국 내에서도 ‘악당’으로 공인된 부시는 다른 전략은 고려도 않고 있다. 그에 차별화하려면 힘만 믿고 날뛰는 지도자가 아니라 든든하면서도 유능한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케리 후보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고작 상원 외교안보위원회 경력뿐이다. 유권자들에게 안보를 믿고 맡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게 케리 진영의 최대 숙제다. 하지만 이라크전 파병안에 찬성한 업보가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부시쪽의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 비난이 상당 부분 먹혀들었다. 부동층 유권자들은 케리에게 안보를 맡겨도 좋은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지난 30일(한국시간) 케리 후보는 50분간의 수락 연설에서 그동안의 유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단호하고도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연설 직후 비공식 여론조사에서 2%포인트의 상승 효과를 봤다. 그러나 효력은 아직 미지수다. 전당대회 다음날 전통적 민주당 지지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면 톱기사에 “케리 연설은 부동층을 흔들었으나 매혹시키지는 못했다”는 제목을 뽑았다.

지난 20일치 <월스트리트저널>은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고소득층에 지극히 편중됐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1면 머리로 올렸다. 5월 둘째 주 <타임>도 ‘일하는 빈민층(Working Poor)’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부부는 물론 온 가족이 일을 하지만 대부분은 의료보험도 없고 자녀가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도 갈수록 줄어든다는 게 요지다. 결국 빈민층들에겐 미래가 없는, 가난의 대물림이 불가피하다는 암시를 던졌다.

미국 언론 중 가장 보수적인 두 매체의 기사는 미국의 현주소를 잘 나타낸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선거전이 정책대결 양상을 넘어 화해될 수 없는 양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사설처럼 선거전의 표심은 극단적으로 갈려 있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시와 케리 후보는 46~48%의 고정표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같은 지지가 인물과 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부시 지지’와 ‘부시 혐오’ 두 부류로 나뉘어 있다. 부시의 기반인 중산층 이상 백인 유권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요지부동이다. 오로지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화당과 부시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동층 노린 네거티브 전략 득세

케리 지지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 외에 대다수 유권자는 ‘부시 반대자’들이다. 부시와 공화당 정권의 독선과 아집에 질린 사람들이다. 특히 4년 동안의 정책으로 고통받아온 저소득층과 소수계는 ‘부시가 싫어서’ 무조건 민주당에 표심을 내준 상태다.

이같은 경향은 선거전에서는 최악의 신호다. 결국 승패는 부동층이 가르기 때문에 이들을 자극하기 위한 네거티브 캠페인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이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주요 방송 전파를 타고 있는 부시쪽의 ‘케리 비난 광고’가 먹혀든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나오는 연사마다 부시를 강력하게 비난한 것도 같은 전략이다. 현재 부동층은 전체 유권자의 7% 정도로 추산된다. 750만명이 넘는다. 부시는 싫지만 케리도 미덥지 못하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결국 민주당의 운명은 이들에게 달린 셈이다.

사실 느닷없이 대통령 후보가 된 케리 진영의 최대 고민은 아직 그를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2400만명이 지켜본 것으로 집계된 전당대회 후보 수락연설로 많이 알려진 게 그나마 다행이다. 바로 다음날부터 전국 21개 주 버스 투어에 나섰다. 강행군을 하면서 유세 바람몰이를 하겠다는 전략이다. 어차피 부동층의 향배에 승패가 걸린 만큼 판세가 백중세인 지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찾아다니며 파고든다는 계산이다.

케리 진영은 경제와 세금, 의료보장, 에너지 자급자족, 안보 등 4개 테마로 공약을 잡고 부동층을 공략할 계획이다. 하지만 공약은 두루뭉술하게 짜였다. 사실 내놓을 정책도 딱히 뚜렷한 게 없는 형편이다. 경제 회생에는 묘안이 없고 세금은 부시가 감세 법안으로 선점한 지 오래다. 그나마 저소득층 의료보장이 관심사지만 연방정부의 적자투성이 재정 상태로 획기적인 정책을 세운다는 건 현실성이 없다. 케리쪽은 라틴계를 사로잡을 이민법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다.

케리는 정답을 찍을 수 있을까

결국 정책보다는 이미지 싸움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어차피 현 판세라면 지난 4년 전 대선처럼 득표율엔 앞서고 선거에선 질 가능성이 높다. 골수 지지층을 확보한 부시 진영에 비해 케리 지지층은 결속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일단 케리쪽은 공격 전술을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권의 실정과 이라크전 실패를 물고 늘어져 반사이익을 얻겠다는 네거티브 캠페인이다. 또 에드워즈 부통령 후보를 비롯해 힐러리 클린턴, 하워드 딘 등 인기 있는 당의 스타들을 총동원해 바람몰이를 할 계획이다. 하지만 케리의 전략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전쟁 상황에서 지나친 공격은 역풍을 맞을 공산이 크다. 또 경제든 의료보장이든 가슴에 와닿는 공약이 없이 부동층 유권자들이 표심을 내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케리 캠프는 더욱 수읽기가 복잡하다. 케리가 이미 나와 있는 모범답안 중에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번 미국 대선의 핵심 관전 포인트다.

 

2지선다형, 부시냐 반부시냐

미 유권자들의 표심은 어디에… 변변찮은 정책대결, 오직 부시 지지와 혐오로 엇갈려

▣ 로스앤젤레스= 신복례 전문위원 boreshin@hanmail.net

민주당의 ‘미국에 대한 믿음’(Believe in America)이냐, 공화당의 ‘미국의 마음과 영혼’(Heart and soul of America)이냐.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을 향한 벼랑 혈투가 서막을 올렸다. 지난주 민주당은 보스턴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존 케리-존 에드워즈의 ‘존-존 커플’을 후보로 선정했다. 오는 8월30일 뉴욕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조지 부시 현 대통령이 후보로 결정되면 11월2일 대통령 선거일까지 건곤일척의 맞대결이 펼쳐지게 된다. 관전자들에게 이번 선거만큼 재미없는 싸움은 없을 것 같다. 인물도 변변찮고 무기도 신통찮다. 거창하게 내건 명분도 고리타분하기만 하다. 주인공인 유권자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도대체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고 불평한다. 귀를 혹하게 하는 공약조차 없다.



△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민주당 케리 후보(맨위)와 공화당 부시 대통령. 양 진영 모두 이번 선거의 테마인 안보에 대해 어떤 정책을 내세울지 고심하고 있다. (사진/ GAMMA)

‘안보’만이 문제다?

하지만 미국 역사상 이번 대통령 선거만큼 중요한 선거는 없었다. 벌어질 대로 벌어진 빈부격차와 갈라질 대로 갈라진 국론으로 미국은 현재 중병을 앓고 있다. 다음 4년간 병이 깊어진다면 더 이상 치유할 길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번 선거결과에 따라 미국의 앞길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모든 언론과 지식인들은 근심과 초조함으로 판세를 지켜보고 있다.

이번 선거전의 특징은 답이 나와 있는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다. 선거전의 테마는 이미 정해져 있다. 바로 ‘안보’다. 현재 미국은 9·11 이후 테러전쟁과 그에 이어진 이라크 전쟁의 와중에 있다. 애국심이 뼈 속에 박혀 있는 미국 유권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또다시 9·11 같은 끔찍한 테러가 일어날 것이냐는 데 쏠려 있다. 더구나 이미 더러운 전쟁이 돼버린 이라크에서 수많은 자국 군인들이 희생되고 미국이 지구촌의 공적이 되면서 안보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다.

선거전에서 안보 테마의 위력은 한국의 유권자들이 가장 잘 안다. 폭발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어떤 반대 주제도 먹히지 않는다. 목숨과 재산이 날아갈 위기감 앞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갖은 실정과 심각한 이라크 전쟁 후유증에도 부시가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유는 미국의 심장 뉴욕을 강타한 9·11을 경험한 미국인들이 충격을 잊지 않은 덕분이다. 지난 1992년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에서 승리했음에도 시골뜨기 빌 클린턴에게 참패한 것과 지금은 분명히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도 미국 경제는 심각한 상황이다. 실업자들은 넘치고 각 지역을 지탱해온 전통 제조업체들은 망한 지 오래다. 경제지표들은 그럭저럭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바닥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빈부격차가 커져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가구 수가 전국적으로 300만 가구가 넘는다. 그러나 이런 경제 문제는 이번 선거전에서 2순위로 밀려났다. 전통적으로 미국을 떠받쳐온 중산층 유권자들은 수입보다 많은 고지서들을 손에 들고서도 ‘안보’를 더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

케리 진영과 민주당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어차피 부시 진영의 선거전략은 ‘힘의 미국’을 앞세운 안보논리다. 미국 내에서도 ‘악당’으로 공인된 부시는 다른 전략은 고려도 않고 있다. 그에 차별화하려면 힘만 믿고 날뛰는 지도자가 아니라 든든하면서도 유능한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케리 후보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고작 상원 외교안보위원회 경력뿐이다. 유권자들에게 안보를 믿고 맡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게 케리 진영의 최대 숙제다. 하지만 이라크전 파병안에 찬성한 업보가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부시쪽의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 비난이 상당 부분 먹혀들었다. 부동층 유권자들은 케리에게 안보를 맡겨도 좋은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지난 30일(한국시간) 케리 후보는 50분간의 수락 연설에서 그동안의 유약한 이미지와는 달리 단호하고도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연설 직후 비공식 여론조사에서 2%포인트의 상승 효과를 봤다. 그러나 효력은 아직 미지수다. 전당대회 다음날 전통적 민주당 지지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1면 톱기사에 “케리 연설은 부동층을 흔들었으나 매혹시키지는 못했다”는 제목을 뽑았다.

지난 20일치 <월스트리트저널>은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고소득층에 지극히 편중됐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1면 머리로 올렸다. 5월 둘째 주 <타임>도 ‘일하는 빈민층(Working Poor)’을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부부는 물론 온 가족이 일을 하지만 대부분은 의료보험도 없고 자녀가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도 갈수록 줄어든다는 게 요지다. 결국 빈민층들에겐 미래가 없는, 가난의 대물림이 불가피하다는 암시를 던졌다.

미국 언론 중 가장 보수적인 두 매체의 기사는 미국의 현주소를 잘 나타낸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선거전이 정책대결 양상을 넘어 화해될 수 없는 양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사설처럼 선거전의 표심은 극단적으로 갈려 있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시와 케리 후보는 46~48%의 고정표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같은 지지가 인물과 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부시 지지’와 ‘부시 혐오’ 두 부류로 나뉘어 있다. 부시의 기반인 중산층 이상 백인 유권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요지부동이다. 오로지 ‘미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화당과 부시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동층 노린 네거티브 전략 득세

케리 지지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 외에 대다수 유권자는 ‘부시 반대자’들이다. 부시와 공화당 정권의 독선과 아집에 질린 사람들이다. 특히 4년 동안의 정책으로 고통받아온 저소득층과 소수계는 ‘부시가 싫어서’ 무조건 민주당에 표심을 내준 상태다.

이같은 경향은 선거전에서는 최악의 신호다. 결국 승패는 부동층이 가르기 때문에 이들을 자극하기 위한 네거티브 캠페인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이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주요 방송 전파를 타고 있는 부시쪽의 ‘케리 비난 광고’가 먹혀든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나오는 연사마다 부시를 강력하게 비난한 것도 같은 전략이다. 현재 부동층은 전체 유권자의 7% 정도로 추산된다. 750만명이 넘는다. 부시는 싫지만 케리도 미덥지 못하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이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결국 민주당의 운명은 이들에게 달린 셈이다.

사실 느닷없이 대통령 후보가 된 케리 진영의 최대 고민은 아직 그를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2400만명이 지켜본 것으로 집계된 전당대회 후보 수락연설로 많이 알려진 게 그나마 다행이다. 바로 다음날부터 전국 21개 주 버스 투어에 나섰다. 강행군을 하면서 유세 바람몰이를 하겠다는 전략이다. 어차피 부동층의 향배에 승패가 걸린 만큼 판세가 백중세인 지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찾아다니며 파고든다는 계산이다.

케리 진영은 경제와 세금, 의료보장, 에너지 자급자족, 안보 등 4개 테마로 공약을 잡고 부동층을 공략할 계획이다. 하지만 공약은 두루뭉술하게 짜였다. 사실 내놓을 정책도 딱히 뚜렷한 게 없는 형편이다. 경제 회생에는 묘안이 없고 세금은 부시가 감세 법안으로 선점한 지 오래다. 그나마 저소득층 의료보장이 관심사지만 연방정부의 적자투성이 재정 상태로 획기적인 정책을 세운다는 건 현실성이 없다. 케리쪽은 라틴계를 사로잡을 이민법 개혁에 기대를 걸고 있다.

케리는 정답을 찍을 수 있을까

결국 정책보다는 이미지 싸움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어차피 현 판세라면 지난 4년 전 대선처럼 득표율엔 앞서고 선거에선 질 가능성이 높다. 골수 지지층을 확보한 부시 진영에 비해 케리 지지층은 결속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일단 케리쪽은 공격 전술을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부시 정권의 실정과 이라크전 실패를 물고 늘어져 반사이익을 얻겠다는 네거티브 캠페인이다. 또 에드워즈 부통령 후보를 비롯해 힐러리 클린턴, 하워드 딘 등 인기 있는 당의 스타들을 총동원해 바람몰이를 할 계획이다. 하지만 케리의 전략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전쟁 상황에서 지나친 공격은 역풍을 맞을 공산이 크다. 또 경제든 의료보장이든 가슴에 와닿는 공약이 없이 부동층 유권자들이 표심을 내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케리 캠프는 더욱 수읽기가 복잡하다. 케리가 이미 나와 있는 모범답안 중에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번 미국 대선의 핵심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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