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한국영화, '아이들 쌈짓돈'에 눈독 들여 몰락 자초

 

'오동진의 영화 갤러리' <14> 할리우드 급상승, 한국영화 급락

 

우리가 할리우드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
  국내 여름시장 중간 점검: 할리우드 급상승, 한국영화 급속 추락
  
  올 여름 시장만을 놓고 보면 한국영화는 현재 분명히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 올 들어 한국영화계는 소수 몇편의 영화만을 제외하고 수준이하의 졸작들을 양산해내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듯 박스오피스에서도 신통찮은 성적을 내는데 그치고 있다. 중견배급사 아이엠픽쳐스가 최근 발표한 시장분석 보고서에서도 한국영화의 추락은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월별 시장점유율 분석에서 한국영화는 6월 한달동안 36%대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하락하기는 22개월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참고로 6월 직전까지 올 상반기 한국영화계의 시장점유율은 63%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관계자들은 지금의 추락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점점 더 깊은 곳을 향해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할리우드는 수개월 전 우리 영화가 들었던 얘기를 듣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한국영화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어왔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지난 5월부터 연속 홈런 내지는 장타를 치며 여름시장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5월말에 개봉된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는 전국 3백90만 정도의 관객을 모아 현재까지 올 한해 개봉된 외화 가운데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뒤이어 나온 <투모로우>도 마찬가지. 전국적으로 3백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두 작품 말고도 할리우드 여름영화들은 연속해서 빅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 영화는 현재까지 극장에 걸려있는 작품이 대부분으로 <슈렉2> <스파이더맨2> <해리포터-아즈카반의 죄수> <아이, 로봇> <반 헬싱> <본 슈프리머시> 등이 그것이다.
  
  할리우드 여름영화, 곧 블록버스터들이 큰 인기를 모으는데는 막대한 물량공세가 주효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지적이긴 하다. 지난 주말(7월31일~8월1일) 전국 관객 60만명 이상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반 헬싱>의 경우 수입가 50억원에 마케팅비만 18억원 이상을 들인 작품이다. 손익분기점만 하더라도 전국 관객 2백만명선. 하지만 수입사인 튜브엔터테인먼트(대표 김승범)는 개봉 첫주말의 흥행추이를 놓고 볼 때 전국 관객 3백만명 이상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크게 쓰고 크게 먹는 전략이 주효했다는 얘기일 수 있다.
  


 
<반 헬싱>의 한 장면. ⓒ프레시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헬싱>을 포함해 올해 개봉된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의 경우 단순히 자본과 조직을 동원한 물량공세만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올해의 할리우드 여름영화들은 유난히 작품성면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구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 로봇>의 경우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을 리들리 스콧이 1982년에 만든 걸작 <블레이드 러너>의 흑인판으로 만든, 묵시록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으며, 곧 개봉될 UIP 배급의 <본 슈프리머시> 역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여타의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와는 차별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얼마 전 예술영화전용관 백두대간에서 상영돼 한국관객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은 저주받은 걸작 <블러디 선데이>를 만든 인물이다.
  
  결론은 다양성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올 여름 유난히 한국시장뿐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먹혀들고 있는' 이유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작품을 할리우드 특유의 물량공세, 탁월한 CG기술력으로 포장해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한다면 올 한해,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한국영화들은 그야말로 초라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문제의식이라곤 거의 비쳐지지 않는 안이한 기획의 상업영화들만을 양산해 낸 결과다. 한마디로 한국영화는 현재, 기획의 철저한 실패를 시장에서 맛보고 있는 셈인데, 이들 작품은 대체로 10대 청춘스타들을 기용한 할리 퀸 소설류의 청춘멜로나 트렌디한 공포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청춘멜로의 대표격 영화로는 <그놈은 멋있었다>와 <늑대의 유혹> <돌려차기> 등. 공포영화의 경우 <페이스>를 시작으로 <령> <분신사바> <인형사> 등이 꼽힌다.
  
  올 한해, 특히 여름시장에 있어서 한국영화들이 흥행면에서나 비평면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게 된 결과는 국내 영화제작자들이 관객의식의 빠른 변화를 추동해내지 못하고 있는, 결국 시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 능력이 뒤처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영화기획과 실물 시장 간에 나타나는 이 같은 괴리감은 국내 극장문화가, 긍정적인 원인에서든 부정적인 원인에서든,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서도 나타났듯이 연령별 스펙트럼이 대폭 확장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의 기획은 여전히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관객층만을 겨냥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제작자들은 아직도 '어린 아이들의 쌈짓돈'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주5일 근무제의 정착으로 주말 여가시간이 늘어났고, 그렇다면 영화의 주소비층의 연령대가 좀더 넓어지고 있는데 그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0대후반의 어린 관객들을 겨냥한 작품들을 연달아 내놓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보면 백번 양보가 가능한 얘기일 수 있다. 지금은 바캉스 시즌, 무엇보다 여름방학 시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작품수준을 지나치게 하향평준화시키고 있는 것은 한국영화가 이대로 가다가는 자멸의 길로 나아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기대를 모았던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같은 경우 일본 공포영화 시리즈 <링>과 홍콩 팡브라더스 감독의 <디 아이>를 합친 듯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이는 작금의 우리영화가 독창성이 크게 뒤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영화는 올 한해를 경유하면서 자칫 급전직하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와 시네마서비스는 갈등 국면을 말끔하게 정리해 내지 못하고 있으며(프레시안 7월19일자 기사 '한국영화 패권 둘러싼 CJ와 강우석의 전쟁' 참조) 스크린쿼터제도의 개선 논의에 있어서도 지지부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한국영화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최근의 한국 영화계를 둘러싸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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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8-0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몇년 동안 '문화생활'과는 거의 무관한 생활을 해온지라, 사정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럴 듯한 말이군요.
 

 

“투기자본엔 영주권, 숙련노동자는 강제추방?”
이주노동자 투쟁, '영주권 논의'로 옮아가나

 

박권일 기자 kipark@digitalmal.com

 

7월 29일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는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저지를 위한 목요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약 20여명의 평등노조 소속 해고노동자와 학생들이 모여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항의하고, 그들에게 영주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6월 말 현재, 불법체류자 수는 16만 7천명으로 지난해 12월에 비해 5만 명 가까이 늘어난 상황. 정부는 8월 17일 실시되는 고용허가제를 앞두고 장기체류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심 중이다.

   
▲ 출입국관리사무소 앞 집회

그러나 몇몇 시민단체나 노동단체 등은 "5년 이상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해 온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만큼, 이들 장기체류자에게 노동비자를 발급하거나, 시민권(영주권)을 부여하는 등 노동자로서 대우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권사각지대에 놓인 채 불안한 도피생활을 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한국사회 내부로 편입시키는 것이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들을 위해서도 효율적이라는 주장이다.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은 "17만에 이르는 장기체류 노동자들을 무조건 추방한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임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은 오늘처럼 자신들의 집회에조차 참여할 수가 없다. 밖에 나서기만 해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잡혀가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주노동자, '인간사냥' 당할까봐 집회에 참석 못해

그는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의 행태를 '인간사냥'이라 묘사했다. 현행 제도 하에서 이주 노동자들은 입국 3년이 지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일단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면 해결되는 문제 아닐까. 하지만 임 위원장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 돈으로 수천만 원을 들여 겨우겨우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또다시 빚을 내서 재입국하라는 것은 사실상 영구추방이나 마찬가지다. 장기체류자들을 보면 7∼8년 넘게 한국에서 생활한 사람들도 많다. 사실상 한국 노동자나 마찬가지다. 한국경제발전에 공헌한 숙련노동자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

집회에 참석한 여우성 씨는 해고노동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법원에서 해고무효 확정판결을 받고도 복직이 안돼" 평등노조에서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을 하고 있다. 그는 "사실상 민주노총에 속한 대형사업장 노동자가 아니면 억울하게 해고당하고도 제대로 복직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다른 길에 그대로 내몰리게 된다"고 말했다. 여 씨는 이주노동자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같은 노동자이니까요.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들 해고노동자들 이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아닙니까. 미조직 노동자들은 가장 소외받는 노동자들입니다. 보호해줄 노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라도 이주노동자들을 적극 엄호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회차량의 마이크를 잡은 한 활동가는 '이주노동자에게도 영주권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해외 투기자본가들이 3년간 50만달러 이상을 한국에 투자하면 영주권이 주어집니다.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영주권을 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10년 일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가 없을까요? 투기자본이라도 영주권을 주는데, 왜 산업현장에서 일한 노동자한테는 영주권을 주지 않는 걸까요? 우리는 3년간 50만 달러를 투자하는 투기꾼 보다 이주노동자들이 더 큰 사회적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투기꾼들은 자신이 이익을 남기고 돈을 빼내서 이 땅에 나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투기자본가들에게만 영주권 주는 건 부조리"

사실 이주노동자들에게 영주권을 보장하는 문제는 관련 단체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민주노총은 정부의 고용허가제에 반대하고, 5년의 시한을 보장하는 노동허가제, 사업장 이동의 자유 등을 주장해 왔지만 영주권이라는 단어를 꺼내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안산 외국인 노동자센터 소장 박천응 목사가 최근 이주 노동자의 '시민권'을 제기한 바 있었다.

   
▲ 출입국관리사무소 앞 집회.
외국인 노동자 대책협의회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영주권을 거론하지 않지만, 최근 검토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정정훈 변호사는 '이주노동자의 시민권-법률적 문제에 대한 시론적 검토'라는 보고서에서 "일반적으로 국적취득(귀화)보다 영주권 취득이 더 쉬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영주권 취득이 귀화보다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고용허가제는 장기체류 이주노동자를 사회적 비용으로만 인식하는 차별적 시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며, 미숙련 노동자를 양산하여 질적인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을 원하는 기업계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미숙련 노동으로 인한 산재발생율의 증가 및 불법체류를 유인하는 요소로 작용해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 변호사는 "장기체류 이주노동자를 숙련노동자로서 사회적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결론맺는다.

이주노동자의 영주권 부여 논의는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이 문제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국제사회를 보더라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 전체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 서울 목동 출입국관리 사무소

 

2004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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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철회” 놀이와 저항 거리서 만나다


△ 이라평화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 5~6월 광화문 네거리에서 집중적으로 벌인 ‘박스맨 피스몹’ ‘평화공 피스몹’ ‘국화 피스몹’의 한 장면.이라크평화네트워크 제공

문화현장-지금 이곳엔
새 시위문화 ‘피스몹’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이 세상에 많지 않다. 광화문과 여의도에 신출귀몰한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급진적이면서도 영적인 구석이 있고, 집단적인데 조직적이진 않다는 알쏭달쏭한 평가도 따라붙는다.

지난 2월 만들어진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회원들은 정치와 문화의 경계, 재미와 저항이 만나는 지점에서 지금 한창 ‘놀고 있다’. 80년대 ‘저항문화’가 90년대 대중문화에 휩쓸려 사라진 지금, 이들은 새로운 저항문화의 등장을 예고한다.

이들의 정서구조를 이해하려면 우선 문제 하나 풀어야 한다. ‘박티스트’와 ‘박스맨’의 차이는 ‘이라크…’ 회원 최경송(37)씨가 직접 설명드리겠다. “아~, 그거요. 별거 아닌데. 박티스트는 ‘박(빡)세게’ 일하면서 괜히 부지런떠는 사람을 말하는 거고, 박스맨은 말 그대로 피스몹할 때 박스 뒤집어쓰고 나오는 사람이죠. 우린 박티스트 별로 안 좋아해요. 박스맨이야 많을수록 좋죠.”

꼬리를 무는 또다른 질문. 그런데 피스몹은 뭐지 피스몹은 플래시몹에 평화(Peace)의 개념을 덧씌운 것이다. 그럼 플래시몹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뭔가’를 하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군중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이 따분하고 고까운 네티즌들의 심심풀이 놀이다.

‘이라크…’ 회원들은 플래시몹을 차용해 피스몹이란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4월부터 지금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이 신기한 ‘저항 놀이’를 세상에 선보였다. 필수 준비물은 몸과 마음, 구호·연설·노래제창 절대 사절,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준비한다.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회원들
‘플래시몹+평화’ 하나로 묶어

광화문 네거리에 갑자기 몰려들어 ‘평화의 공’을 튕기며 놀거나, 국화꽃 하나 얼굴에 올려 바닥에 드러눕기도 한다.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는 박스맨 피스몹에 대한 첫 제안은 이랬다. “박스는 우리의 무기, 방위나 윤봉길의 도시락. 박스는 우리의 오브제, 미적 성취. 박스는 너희의 총칼보다 강하다. 하여 박스는 우리의 소리없는 단단한 저항. 박스는 자유다!” 이들은 결국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아 박스를 뒤집어쓰고 세상을 향해 ‘각’을 세웠다.

그러나 피스몹의 결정적 재미는 다른 데 있다. 대충 이런 걸 하자고 모였지만, 반드시 ‘딴 짓’ 하는 회원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 신경쓰지 않고, ‘알아서 놀면서 저항하도록’ 내버려두는 것까지가 피스몹의 핵심이다. “하나의 주장을 구호를 통해 집단적으로 외치는 게 아니라, 각자 스스로 표현하는 거죠. 우린 각자의 의지에 따른 저항을 꿈꾸는 겁니다.”(염창근 사무국장)

피스몹에 처음 참여했던 한 회원은 그 감상을 이렇게 전했다. “개인들의 작은 목소리의 만남.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지향점 하나. 파병철회와 평화를 위해 합쳐지는 목소리들의 하모니. 그 작지만 깊은 울림. 게다가 평화적이고 유희적인 형태로. 아주 오랜만에 ‘만남’의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이라크 평화네트워크 인터넷 게시판에서)

구호·연설·조직적 외침 대신 국화꽃 한송이 얼굴에
올린 채놓고 상자 뒤집어쓰고 침묵 항의


△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회원들이 7월22일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밤새도록 ‘널린노래방’을 열었다.

이들은 최근 또다른 놀이를 개발했다. 이른바 ‘파병반대 널린노래방’이다. 고독하고 지겨운 1인 시위문화의 새 버전이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띄운 노래방 개업 알림은 다음과 같았다. “노래는 무쇠를 녹인다. 24시간 풀가동. 폐장은 없다. 파병이 철회되거나 더 노래부를 사람이 없을 때까지.”

이 노래방은 82시간 동안 열린우리당사 앞에서 계속됐다. 연인원 60여명이 참가했다. 마이크도 없이 ‘생목소리’로 한사람당 1시간 이상씩 불러댔다. 트로트도 부르고 자장가도 부르고, 어떤 사람은 라틴어 경전을 들고 와서 줄기차게 읊었다. 부르고 싶은 노래 맘껏 부르고 나니 “이게 중독이 되더라”(최경송)며 앞으로 매주 이틀씩 정례화하기로 했단다.

이들은 지난 30일 ‘바그다드 카페-평화파티’도 열었다. “일일호프라뇨 절대 아니에요. 그냥 노는 거예요. 기왕이면 평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면서.”(회원 채리미영) 노는 것과 대드는 것에 두루 능통하다는 시중의 ‘꾼’들, 그 소문을 듣고 300여명이나 모였다. ‘블루마블’을 변형한 ‘평화 보드 게임’을 하고, ‘땡기면’ 무대에 가서 노래도 하고, 밤새 그냥 놀았다.

이들은 회원 규정도 따로 없다. 게시판에 자주 글 남기고, 피스몹에 얼굴 내밀면 그게 회원이다. 그렇게 따져서 한 70여명 정도가 핵심이라면 핵심이다. 고등학생부터 일반시민, 시민단체 활동가까지 망라돼 있다. 정치성향으로 보면,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사회당 당원에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녹색당 지지자까지 있고, 아나키스트 클럽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1인시위 넘어 ‘널린 노래방’ 고등학생부터 활동가까지 방라
“평화의 그날까지 쭉~놀자”

이들을 묶는 유일한 끈은 ‘새로운 저항문화’에 대한 갈증이다. 김어준 문화평론가는 이를 “심각하고 경건한 저항조차도 ‘유희화’하려는 문화흐름”이라고 평가했다. 그 흐름이 처음으로 현실화된 것이 인터넷 패러디였는데, 이제 ‘오프라인’까지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는 힘없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유력한 방법이고, 풍자는 그들의 ‘보복적 탄압’을 무산시키는 지혜로운 길입니다.”

모든 권위를 해체하려는 젊은 세대는 이제 ‘운동권 문화’까지 해체하고 새로운 ‘저항 문화’를 찾아 나서고 있다. 이들의 ‘문화실험’은 끝이 없다. 파병이 철회되거나 더 놀 사람이 없을 때까지.

‘난 다르다’는 그들의 말·말·말



△ (좌로부터)최경송·염창근·김박태식·채리미영

최경송(37)
화염병 던져봤지, 이젠 소통을 생각해

공부방 운영하는 ‘일반시민’. 널린노래방에 푹 빠져있다. “80년대 학교 다니면서 나도 화염병 던지며 싸웠다고. 발언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이제 그 ‘공간’은 있으니까, ‘소통’에 대해 고민해야 되지 않겠어”

염창근(29)
지속 가능한 감수성이 필요할걸

원래 회원 규정도 직책도 없는 모임이지만, 바깥 사람들 편하라고 그냥 ‘명목상’ 사무국장 맡고 있는 평화운동가. “저항의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하단 건 나도 알지만 말야, 정서적·즉자적 대응보다는 지속적으로 성과가 쌓이는 저항이 필요한 게 아닐까”

김박태식(32)
말 안하고 있으니 귀기울이잖아

대학 총학생회장 시절 ‘군중동원 문화’에는 이골이 났다. “가두시위와 군중집회 방식의 저항문화가 원래 목표했던 게 뭔지 다시 살펴볼 때가 왔어. 말이 넘치는 세상, 말 안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귀 기울이잖아.”

채리미영(29)
슬픈 우리, 차라리 재미있게 놀자!

부모성 함께 쓰면서 이름이 더욱 예뻐진 여성운동가. 반전평화를 위해 최근 ‘파티 플래너’로 거듭 났다. “8월3일날 추가 파병부대가 이라크로 떠난대. 무기력하고 슬픈 우리, 차라리 재밌게 놀자. 평화에 대해 수다 한번 떨자구. 파티도 결국 소통이잖아.”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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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출판 갈수록 ‘수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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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단행본 출판사로 매출액 순위 1, 2위를 다투는 랜덤하우스 중앙은 올해 상반기에 전년 대비 25%의 신장률을 보였다. 지난해 100억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한 ‘북21’의 경우는 지난해에 견줘 성장률을 무려 70% 정도 끌어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단행본 출판사 가운데 지난해 가장 많은 매출액을 기록한 실용서 전문 출판사 넥서스도 20%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출판계의 양극화 현상은 통계에서도 그대로 잡히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소장 한기호)가 국내 출판도매업체들의 판매추이를 집계한 결과를 보면, 단행본 출판사 가운데 상위 20개사의 매출액은 2000년 전체 매출규모의 61%였던 것이 2002년에는 71%로 꾸준히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올해에는 75% 이상을 점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상위 5개사의 경우 2000년에는 42%였던 것이 2002년에는 49%로 늘었으며, 올해는 50%를 훌쩍 넘어설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한기호 소장은 “출판시장의 양극화 현상 배후에는 유통질서의 문란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한 소장은 “도서 정가제가 사실상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각종 할인점과 인터넷 서점, 대형 서점들이 자본력이 있는 출판사들과 손잡고 큰 폭으로 책을 깎아 팔거나 경품을 끼워서 파는 할인·경품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런 요구를 맞출 수 있는 대형 출판사는 유통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독자 수가 많지 않은 책을 펴내는 소형 인문 출판사들은 계속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백원근 선임연구원은 “출판을 이대로 왜곡된 시장에만 맡겨둘 경우 신문시장의 독과점화가 가속화되듯, 소형 출판사들의 소외와 위축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며 “그렇게 될 경우 문화의 정신적 기반인 출판의 다양성이 크게 훼손되고, 돈 되는 책을 좇는 대형 출판사에 독점된 시장에서 작지만 꼭 필요한 책을 내온 출판사들은 퇴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야근 밥먹듯 해도 월급 배곯듯


    △ 한 인문 출판사의 사장이 창고 안에 쌓인 책들을 바라보고 있다. 대다수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출판 불황 한파 속에 많게는 50%까지 매출액이 떨어져 극심한 내핍을 강요당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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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끝 생존투쟁

    출판 불황의 땡볕에 내몰린 소규모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물이 말라가는 웅덩이에 갇힌 물고기처럼 힘겹게 숨쉬기를 하는 이 출판사들의 고군분투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진보적 사회과학 서적을 펴내는 책갈피 출판사는 지난해 6월 비슷한 유형의 책을 펴내던 북막스, 책벌레 출판사와 통합했다. 모두 1인 출판이었던 세 출판사는 사회과학 서적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줄어들고, 더구나 사회과학 이념서에 대한 외면은 찬바람 불듯 냉랭한 상황에서 출판사를 합쳐서라도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벌레 대표 최수연씨가 통합된 책갈피의 대표가 되고 북막스 대표 김희준씨는 영업부장이 됐다.

    2인 출판사로 다시 출발한 책갈피는 먼저 경비 절감책부터 실행에 옮겼다. 외부에 맡기던 표지 디자인이나 본문 조판을 가능한 한 안에서 처리하는 식으로 제작비를 최소 수준으로까지 절감했다. 100만~200만원이라도 아껴보자는 심산이었다. 두 사람이 된 만큼 발행 종수도 최대한 늘렸다. 새 출발 이후 지금까지 9종을 펴냈는데, 많이 팔리지는 않아도 여러 종을 내면 그만큼 수금액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정이 특별히 나아진 것은 아니다.

    김희준 부장은 “사회과학서적이 워낙 독자군이 적고 게다가 그 독자들마저 경기 침체로 떨어져나가는 상황이어서 출판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고 말했다. 책갈피는 초판 1500~2000부를 찍고 그 중 1000~1500부 정도가 팔린다. 김 부장은 “그 정도면 경상비와 재투자비가 빠지고 두 사람에게 최소 생활비가 떨어진다”며 “아직 둘 다 미혼이어서 ‘다행’”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좌파 출판의 명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는데, 우리마저 손놓아버리면 어쩌겠느냐”며 “벼랑끝에 선 심정으로 책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경영난에 회사통합·경비절가마 허리띠
    수금못해 인쇄중단까지‥‘빚방석’오르기도
    대출·할인 막힐까 힘들단 말도 ‘조심’

    소형 출판사들치고 사정이 어렵지 않은 곳이 없지만, 내놓고 힘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어느 출판사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은행 대출을 받기도 어렵고 어음할인을 받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출판사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출판사는 이 난국을 몸으로 때우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역사·문화가 전문인 이 출판사는 사장·편집장·편집자 세 사람이 꾸려가고 있는데, 교정·교열은 말할 것도 없고 본문 조판, 표지 디자인까지 모두 자체에서 해결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책이 지금까지 30권을 채웠다. 아는 사람은 모두들 이 출판사가 만드는 책의 충실도·완성도를 높이 산다.

    그러나 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해에 비해 40%나 매출액이 떨어졌고,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제작비와 경상비, 인건비를 다 건지려면 평균 3000부는 팔려야 하는데, 올해 나온 책 가운데 1000부를 넘긴 책은 한 권밖에 없다. 방법은 책갈피처럼 책의 종수를 늘이는 것뿐이다. 이들은 밤 10시까지 책상에 앉아 교정·편집 일을 보고 휴일에도 쉬지 않는다. 책 한 권을 최대한 공들여 만들기로 소문난 이 출판사의 올해 출간 목표는 지난해의 두 배인 8권이다.

    노동시간을 늘이는 것말고 딱히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편집자들의 모임이 무산되는 일도 나타난다. 저녁 시간에 퇴근을 못하고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니 밖에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2002년 출범한 출판사 뿌리와이파리의 정종주 사장은 지금까지 한 푼도 집에 가지고 들어간 돈이 없다. 정 사장은 “담뱃값·커피값·교통비 같은 최소한의 활동비를 받은 것말고 사장 월급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다”며 “친구들을 만나도 아예 돈 없는 사람으로 보고 술값 내란 말도 안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 출판사가 지난 6월에 펴낸 <해삼의 눈>은 7~8개 일간지 출판면에서 머리기사로 크게 소개를 했는데도, 지금까지 딱 1000부가 팔렸다. “이럴 땐 정말 울어버리고 싶다.” “한국 사회의 뿌리없음을 반성하고 어떤 공공적 룰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책을 내고 싶은데, 이렇게 사정이 험악해서야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그는 말했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직원 3명의 월급을 한번도 미루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경우는 심란하기로 치면 뿌리와이파리보다 더하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전 사장은 철학이 좋아 철학 출판을 시작했는데, 출판사 설립 3년 만에 이익을 내기는커녕 빚만 늘었다. 기획에서 번역까지 2년이 넘게 걸리고 그렇게 나온 원고를 원서를 대조해가며 일일이 교정·교열을 보고 가능한 한 튼튼하게 장정을 해 버젓이 내놓지만, 펴낸 책들의 평균 판매량은 600부를 넘지 못하고 그마저 지난해보다 25% 가량 줄었다. 최고로 공을 들여 지난 봄 낸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초판 1300부를 찍었지만 출고된 건 800부, 그나마 다행인 편이다. 생태·환경서 전문 출판사를 지향하는 그물코는 사무실 전화가 끊겨 애를 먹기도 했다. 서점에서 수금을 해야 사물실 운영비를 댈 수 있는데, 은행 잔고가 바닥나 버린 것이다. 돈이 없다보니 용지 회사에서 종이를 공급받지 못해 책을 찍지 못한 적도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책생태계’ 인문·문학 위기

    정부가 물주고 보살펴야

    정부라는 기관은 사회적 부가 한데 모이는 저수지의 수문지기다. 이 수문지기에게 맡겨진 임무 가운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물을 보낼지 결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수문지기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분야가 있다. 출판이라는 논이 바로 그곳이다. 아무리 가뭄이 심하게 들더라도, 그래서 이곳에서 지식과 교양이라는 벼를 정성껏 키우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더라도, 수문지기는 모르쇠했다. 우리 출판이 다양성과 깊이를 확보하지 못한 데에는 수문지기의 직무유기에도 그 원인이 있다. 공공영역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고 시장원리에만 의존해온 결과라는 뜻이다.

    지금 본격문학과 인문사회과학 도서들이 고사 위기에 있다. 책의 가치는 생각하고 비판하고 상상하는 힘을 키우는 데 있다. 영상의 시대에도 여전히 책을 옹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의 다양성을 지켜야 생태계의 파괴를 막을 수 있듯, 문화적 종의 다양성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나는 책이라는 생태계에서는 문학과 인문학이라는 종이 보호되어야 하며, 문화 일반에서는 책이라는 종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저수지에 모인 물을 무조건 퍼주라는 말은 아니다. 도서관이 제 구실을 한다면 꼬인 실타래는 풀려나갈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보호하고 옹호할 만한 정신이 담긴 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여기서 결정된 책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이즈음 정권 담당자들은 박정희라는 망령과 씨름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들에게 개발과 독재만이 박정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정치와 경제의 논리로 문화를 철저히 소외시킨 것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박정희의 유산이다. 위기에 놓인 책동네에 손길을 내미는 것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첫걸음이 될 터이다.

    이권우/도서평론가·한국도서관협회 독서진흥위원

     

    ‘혈혈단신 출판’ 불황늪 자맥질


    △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산처럼’ 데펴 윤양미씨
    몸집 가볍지만 모든일 감당 벅차

    윤양미씨는 소금쟁이처럼 가벼운 몸으로 출판 불황의 늪을 헤쳐나가고 있는 1인출판사 ‘산처럼’ 대표다. 1988년 출판계에 입문해 몇몇 유력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기량을 닦은 윤 대표는 2002년 산처럼을 세워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12권의 단행본을 펴냈다.

    10평짜리 조그만 공간에 컴퓨터 한 대, 전화 한 대, 팩스 한 대를 놓고 그 12권의 책을 혼자서 만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기획에서부터 교정·편집·영업까지를 모두 감당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성취감도 크고 회사를 운영하는 데 대한 부담감도 크지 않다.

    “인문 교양서는 실용서처럼 판매 규모가 크지 않고 영업도 큰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출판사 규모가 커지면 거기에 맞게 매출액에 대한 압박감도 커지게 됩니다. 1인 출판은 그런 걱정을 덜해도 돼죠. 내가 내고 싶은, 내 사이즈에 맞는 책을 펴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 ‘1인 출판사’는 빚에 쪼들리고 허덕이는 다른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 비하면 제법 큰 수익을 내는 등 사정이 한결 나은 편이다. 그가 낸 책 중에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는 9000부가 넘게 나갔고, 이오덕 에세이집 <나무처럼 산처럼>도 8000부 남짓 팔렸다. 책이 나가는 데는 ‘행운’도 따랐다. <테이레시아스의 역사>는 텔레비전의 책소개 프로그램 <티브이, 책을 말하다>에서 ‘올해의 책’으로 뽑혔고, <근대의 횡단, 매혹의 질주>도 같은 프로에서 소개됐다. 또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와 <나무처럼 산처럼>은 문화관광부 추천도서로 뽑히기도 했다.

    1인 출판이 몸집이 가볍다는 장점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있다. 윤 대표는 어떤 책을 펴낼 것인지와 같은 ‘큰’ 결정을 해야 할 때 상의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게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했다. 도매상에서 대금 결제를 미룰 때, 제작사와 마찰이 생길 때 혼자 풀어야 한다는 것도 고생거리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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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lmas 2004-08-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흑 ...
    어렵게 제 책을 내준 출판사의 안좋은 소식을 들으니, 더 가슴이 무겁군요.
    (아직 이 출판사에서 내야 할 책이 두 권 더 남았는데 ... )

    갈대 2004-08-0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이북스가 그정도인 줄은 정말 까맣게 몰랐습니다. 중소 출판사의 실정이 너무 어렵네요.
    근본적인 문제는 독자들에게 있지 않나 싶습니다. 책 사는 데 인색하고, 책을 읽지 않고, 읽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나 실용서만을 찾으니 말이죠. 에효~

    balmas 2004-08-0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줄은 알았지만, 저도 그정도인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ㅜ.ㅜ
    어디 이제이북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문,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이라면 하나같이 겪는 문제겠죠. 당장은 마음이 무거워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내일 위로전화라도 한 통화해야 할 듯 ...

    로쟈 2004-08-0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s the real horror!...

    balmas 2004-08-02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업자, 실직자들이 넘치고, 몇달째 월급을 못받아도 혹시 그나마 짤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해가면서 회사다니는 사람들이 숱한 마당에, 인문학 출판사들이 어렵다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냐라고 시큰둥하게 말씀할 분들도 있겠지만 ... 정말 참 큰일입니다.

    메시지 2004-08-02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장되었다고 좋아하던 친구녀석이 생각나네요. 얼마전에는 제2의 귀여니라도 건져야 살아남겠다고 푸념을 했었는데...

    balmas 2004-08-0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쯧쯧 ... 또 그렇게 힘든 날들을 보내고 계시는군요.
     
     전출처 : 바람구두 > 아룬다티 로이 - 전쟁이 미국에게 가져다준 것은..

    아룬다티 로이 - 전쟁이 미국에게 가져다준 것은..

    아룬다티 로이

    “수백만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 및 파키스탄 정부가 그들의 세뇌된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약속해온 핵 재앙의 공포 속에서 살면서, 그리고 '테러에 맞서는 전쟁' ― 부시 대통령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과업“이라고 비장하게 부르는 ― 이 수행되고 있는 곳 가까이 살면서 나는 시민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핵폭탄, 대형댐, 기업 세계화, 힌두 파시즘의 증가하는 위협에 관해 독자적인 견해 ― 인도 정부의 견해와 상충되는 ― 를 밝혀온 우리들에게는 '반민족적'이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별로 분개하지 않습니다. '반민족적'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일과 내 사고방식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민족적'인 사람이란 자기 민족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이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어떤 민족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주의를 깊이 의심스러워하고 반민족주의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반민족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저런 종류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집단학살의 원인이었습니다. 국기(國旗)라는 것은 정부가 처음에는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수의(壽衣)로 사용하는 색깔있는 천 조각입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 나는 여기에 언론기업은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 국기 아래로 몰려들고, 작가, 화가, 음악가, 영화제작자들이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면서, 민족과 국가를 위해 그들의 예술에 올가미를 씌울 때, 그 순간은 우리 모두가 벌떡 일어나 앉아 근심해야 할 때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런 일이 1998년 핵실험 직후와 1999년 파키스탄과의 전쟁 기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우리는 걸프전쟁 때 목격했고, 지금 '테러에 맞서는 전쟁'에서 또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 중국산(産) 미국 국기의 눈보라 말입니다.

    최근에, 미국 정부의 행동을 비판해온 사람들은 ― 나 자신을 포함해서 ― '반미적'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반미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신성화되고 있습니다.

    '반미적'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성 체제가 비판자들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정확하게 ― 사용하는 말입니다. 일단 누군가가 반미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의 발언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되며, 논리는 상처받은 국가적 자존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반미적'이라는 용어는 무슨 뜻입니까? 재즈에 반대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언론자유에 반대한다는 뜻입니까? 토니 모리슨이나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거대한 미국산 삼나무를 싫어한다는 것인가요? 핵무기에 반대하여 행진한 수십만 미국 시민들이나, 그들의 정부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압력을 넣은 수많은 반전 운동가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반미적'이란 모든 미국인들을 미워한다는 뜻인가요?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여기에 대해서는 미국의 '자유언론' 덕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슬프게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데)을 미국의 문화, 음악, 문학, 숨막히게 아름다운 땅,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즐거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하게 하는 것은 고의적이며, 극히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이것은 마치 퇴각하는 군대가, 적(敵)이 민간인을 향해 포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인구가 밀집된 도시 속에 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정책과 자신이 연관되는 것에 대해 모욕을 느끼는 미국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정책의 모순과 위선에 대한 가장 학문적이고, 신랄하고, 예리하며, 통쾌한 비판은 미국 시민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미국 정부의 속셈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면,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사이드, 하워드 진, 에드 허만, 에이미 굿맨, 마이클 앨버트, 찰머스 존슨, 윌리엄 블럼, 그리고 앤서니 에이무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수백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테러리즘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카시미르 계곡에서 자행된 국가적 테러리즘은 논외로 치더라도, 구자라트 주정부의 감독 아래 무슬림들에 대해 저질러진 최근의 학살만행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는 현재의 인도 정부의 파시스트적인 정책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 심히 부끄럽게 여기고 매우 분개할 것입니다. 인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인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인도 정부 자신은 주저없이 그렇게 나갈 것이지만 말입니다. '인도'나 '미국'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다거나,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밝힐 권리를 인도 정부나 미국 정부 혹은 그 누구에게라도 양도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반미적'이라고(또는 '반인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결핍입니다. 기성 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부시가 아니면 탈레반이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가 아니면 악마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들과 한패다. 이런 식입니다.

    작년에,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9 . 11 이후의 수사(修辭)에 대해 그것을 어리석고 교만한 것으로 무시하면서 비웃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전혀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잘못된, 위험한 전쟁을 위한 모병 작전이었습니다. 날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반대가 곧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에 경악하곤 합니다. 이 전쟁의 애초의 목표 ―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산 채로든 시체로든) ― 가 좌절된 것으로 보이는 지금, 과녁은 이미 다른 데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간 여성들을 '부르카'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합중국 해병대가 페미니즘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우리더러 믿으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인도에는 '불가촉 천민',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그리고 여성들을 억압하는 혐오스러운 사회적 관행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는 소수집단과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더욱 혹심합니다. 그러니, 거기에도 폭격을 해야 합니까? 델리와 이슬라마바드, 다카도 파괴해야 합니까? 인도의 저 완고한 관행을 폭격으로 퇴치할 수 있을까요? 폭격을 통해서 우리가 여성해방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습니까? 노예제는 어떻게 없어졌습니까? 미국은 수백만의 토착 아메리카인들을 학살하여, 그 시체 위에 건국을 하였습니다. 지금 산타페를 폭격함으로써 그 인종학살이 보상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끔찍한 기념일이 있는 달, 9월에, 여기 미국 땅에 서 있게 된 것은 다만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물론, 특히 여기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은 9 . 11이라고 알려진 끔찍한 사건입니다. 저 치명적인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거의 3천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 인한 슬픔은 아직 깊고, 분노는 아직 날카롭고,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상스러운 죽음의 전쟁이 세계 전역에 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전쟁도, 어떠한 복수행위도, 다른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그 아이들에게로 투하되는 어떠한 폭탄도,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거나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을 깊이 틀림없이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원수를 갚지 못합니다. 전쟁은 단지 그들에 대한 기억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 이번에는 이라크를 상대로 ― 사람들의 슬픔을 냉소적으로 조작하고, 세제(洗劑)와 조깅화(靴)를 파는 기업들이 후원하는 텔레비전 특집 프로를 위해 그 슬픔을 포장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슬픔을 싸구려로 만들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슬픔의 상품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까지도 가차 없이 약탈하는 야만주의입니다. 한 국가가 국민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은 끔찍한 폭력입니다.

    공개된 단상에서 이런 주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러나 정말 내가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상실감에 대해서입니다. 상실과 잃어버림. 슬픔, 실패, 망가짐, 감각의 마비, 불확실성, 두려움, 감정의 죽음, 꿈의 죽음. 절대적으로 냉혹하고, 끝없이, 습관처럼 반복되는 이 세계의 불공정함. 이러한 상실감이 개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전체 문화, 언제나 그것을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 전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9월 11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짜는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미국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날짜는 오랫동안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연 9월 11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반추는 비난이나 선동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짙은 안개를 조금 걷어보자는 거지요. 이것은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예의바르게,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계로 나오시기를“ 부탁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9월 11일은 중동에서도 비극적인 기억이 있는 날입니다. 1922년 9월 11일,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영제국이 1917년에 발표했던 '발포어 선언'의 후속조처였습니다. '발포어 선언'은 유럽의 유태 민족주의자들 ― 시오니스트 ― 에게 유태인의 국가를 건설해줄 것을 약속했습니다.(그 무렵,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학교에서 싸움대장이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구슬을 나눠주듯이 남의 땅을 제멋대로 낚아채서 나눠주고 했습니다.)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제국주의 권력은 세계의 오래된 문명을 갈갈이 찢어놓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카시미르는 제국주의 국가 영국이 현대세계에 가져다준 저주의 선물입니다. 두 지역은 모두 오늘날 들끓는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중략>

    중동의 또다른 지역에서 9월 11일은 좀더 최근의 기억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1세가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양원 합동회의에서 밝힌 것은 1990년 9월 11일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사담 후세인이 전범(戰犯)이며, 자신의 국민을 상대로 인종학살을 자행해온 잔인한 군사 독재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인물에 대한 꽤 정확한 묘사합니다. 1988년에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북부의 수백개 촌락을 유린하였고, 쿠르드족 수천명을 죽이기 위해 화학무기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해에 미국이 후세인에게 미국산 농산물을 구입하도록 5억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듬해, 후세인의 인종학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 미국 정부는 지원금을 두배로 늘려 10억달러를 주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또한 후세인에게 고품질의 탄저병균과 헬리콥터 이외에, 화학 및 생물무기 제조에 이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의 물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담 후세인이 가장 잔인한 악행을 자행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 정부는 그의 가까운 동맹자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요? 1990년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그의 죄는 전쟁을 일으킨 데 있다기보다는 주인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독자적인 행동은 걸프만에서의 힘의 균형을 뒤집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담 후세인은 제거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사랑을 더이상 받을 수 없게 된 애완동물 신세가 된 것이지요.

    이라크에 대한 최초의 연합군측 공격은 1991년 1월에 시작되었습니다. 세계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전쟁을 황금 시간대에 지켜보았습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CNN 방송을 보기 위해 별 다섯개짜리 호텔 로비로 가야 했습니다.) 수만명이 한달간 계속된 폭격 속에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 전쟁이 그때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에 찬 처음의 반전(反戰) 목소리는 베트남전 이후 한 국가에 대해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공중 포격 속에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과 영국 군대는 이라크에 대해 수많은 미사일과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전쟁 이후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경제봉쇄 속에서 이라크 시민들에게는 식량과 의약품, 병원 장비, 구급차, 깨끗한 식수 등 기초적인 필수품들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약 50만의 이라크 아이들이 경제봉쇄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유엔주재 미국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한 대가는 치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배격하는 데 사용된 용어가 바로 '도덕적 등가(等價)'였습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도덕적 등가' 때문에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노골적인 산수(算數)를 말했을 뿐입니다.

    10년간의 폭격도 '바그다드의 짐승',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조지 부시 2세 대통령은 다시 한번 같은 수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면전을 제안하고 있고, 그 목표는 명백히 이라크의 정권교체입니다. 뉴욕타임즈는 부시 행정부가 “사담 후세인의 위협에 대처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미국 국민과 의회, 그리고 동맹국들을 설득하기 위한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백악관의 참모장 앤드류 H. 카드 2세는 부시 행정부가 이번 가을을 목표로 전쟁계획을 어떻게 차근차근 밟아왔는지 묘사했습니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8월에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지 않는 게 좋다“고 그는 말합니다. 워싱턴의 '새로운 상품'은 곤경에 처해 있는 쿠웨이트 국민들이 아니라, 이라크가 대량파괴 무기를 가졌다는 주장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전 자문관 리처드 펄은 “평화 운운하는 도덕적 설교 따위는 무시하라. 그가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썼습니다.

    무기사찰을 수행한 사람들은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의 실상에 대해서 엇갈린 보고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의 무기고는 해체되었고, 이라크가 대량파괴 무기체계를 재건할 능력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얼마나 많은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혼란이 없습니다. 미국 정부가 무기사찰단의 방문을 환영할까요? 영국은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만약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때문에 미국의 선제공격이 정당화될까요?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핵무기고를 가지고 있고, 또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바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만약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정당화된다면, 어떤 핵 국가라도 다른 핵 국가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인도는 파키스탄을 공격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 수상이 미국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 미국은 선제공격으로 그를 '몰아낼' 수 있을까요?

    최근에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 발발 직전에 물러서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자신은 바로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요? 누가 도덕적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전쟁을 일으키면서 평화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조지 부시가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라고 한 미국은 지난 50년 동안 단 한해도 빠짐없이 이 나라 저 나라와 전쟁을 해왔습니다.

    전쟁은 이타적인 이유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대개 주도권 다툼이나 비즈니스 때문에 일어납니다. 물론, 전쟁 장사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세계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 확보는 미국 외교정책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발칸 지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최근의 무력개입은 석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이 앉혀놓은 아프가니스탄의 꼭두각시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미국의 석유회사 '유노칼'의 전직 직원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이 중동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이곳에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석유는 미국의 엔진이 부드럽게 돌아가게 합니다. 석유는 자유시장이 돌아가도록 해줍니다. 누구든 세계의 석유를 통제하는 자가 세계시장을 통제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석유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뉴욕타임즈의 논설위원 토마스 프리드먼만큼 우아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친 짓도 괜찮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미국은 이라크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인은 협상이나 망설임 없이, 혹은 유엔의 승인 없이도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충고는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뿐만 아니라, 유엔에 대해 미국이 거의 일상적으로 가하는 모욕을 보십시오. 세계화에 대한 그의 책《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맥도날드는 맥도넬 더글러스 없이는 번성할 수 없으며, 실리콘 밸리의 기술이 번창하도록 세계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주먹은 미합중국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라고 일컬어진다.“ 아마도 이것은 예민한 순간에 씌어진 것이겠지만, 프리드먼의 이 말은 내가 지금껏 읽어본 기업 주도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묘사임이 틀림없습니다.

    2001년 9월 11일과 '테러에 맞서는 전쟁' 이후, 보이지 않는 손과 주먹은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를 악문 채 거짓 미소를 지으면서 '개발도상국들'을 억압하는 미국의 또다른 무기 ― 자유시장 ― 를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결코 중단되지 않을 과업'은 미국의 완벽한 전쟁이자, 미 제국주의의 끝없는 확장을 위한 완벽한 수단입니다.

    지난 10년간의 고삐 풀린 '세계화' 속에서, 세계의 총소득은 연간 평균적으로 2.5퍼센트 증가해왔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빈민은 1억명이 더 늘어났습니다. 상위 100개 거대 경제 중에서 51개 경제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입니다. 세계의 상위 1퍼센트가 보유한 부는 하위 57퍼센트의 부를 합한 것과 맞먹고, 이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테러에 맞서는 전쟁'이 확대되면서, 이 과정은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정장을 입은 신사들이 볼썽사납게 서두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폭탄이 퍼부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크루즈 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동안에도, 또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핵무기가 쌓이고 있는 동안에도, 계약서가 만들어지고, 특허가 등록되고, 송유관이 설치되고, 자연자원이 약탈되고, 물이 사유화되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기업 세계화' 프로젝트의 '구조조정'이라는 목표가 사람들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습니다. '개발' 프로젝트, 대대적인 민영화, 노동 '개혁'들이 사람들을 자신의 땅과 일터로부터 내쫓고, 그 결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만적인 강탈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역에 걸쳐 '자유시장'이 서방(西方)의 시장은 뻔뻔스럽게 보호하면서, 개발도상국가들에게는 무역장벽의 철폐를 강요함에 따라,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있습니다. 민중적 소요(騷擾)가 지구촌 각처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볼리비아, 인도 같은 나라에서 '기업 세계화'에 대한 저항운동이 커가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정부는 통제의 고삐를 더욱 세게 죄고 있습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테러분자'라고 낙인 찍히고, 또 그렇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적 소요는 시위행진이나 데모, 세계화에 대한 항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또한 범죄와 혼돈, 그리고 온갖 종류의 절망과 환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고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보듯이), 점차적으로 문화적 민족주의, 종교적 완고성, 파시즘,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테러리즘과 같은 끔찍한 것들을 낳는 비옥한 온상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세계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유시장'이 국가간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화'의 궁극적 목적지가 일종의 히피 낙원 ― 여권도 필요 없고, 우리 모두가 존 레논의 노래(“국가 없는 세상 ?? “)처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 ― 이라고 하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위입니다.

    '자유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 ― 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 ― 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서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충성스럽고, 부패하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자유로운 척하는 언론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정의를 실현하는 척하는 법원을 필요로 합니다. '세계화'는 핵무기, 상비군, 보다 엄격한 이민법, 그리고 삼엄한 해안경비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화란 오직 돈과 상품과 특허와 서비스에 관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인권존중에 관한 것도, 인종차별이나 화학 및 핵무기, 또는 온실효과와 기후변화, 또는 정의에 관한 국제적 협약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약간의 제스처라도 있으면 '세계화'라는 사업 전체가 망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테러에 맞선 전쟁'이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속에서 공식적으로 깃발을 내린 지 일년 가까운 사이에 나라마다 차례차례로 자유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자유가 제한되고,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시민적 권리가 유보되고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반론은 '테러리즘'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반론을 다스리기 위해 온갖 법안이 통과되고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공중으로 사라져버린 듯합니다. 물라 오마르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피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사라져버렸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약식재판 제도는 뜻밖의 곳에서 부상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형태의 폭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미국, 중앙아시아의 모든 공화국,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는 동안 대형매장(mall)에서는 계절에 맞추어 바겐세일이 한창입니다. 모든 게 할인되고 있습니다 ― 바다, 강, 석유, 유전자, 무화과 말벌, 꽃, 어린시절, 알루미늄 공장, 전화 회사, 지혜, 야생지, 시민적 권리, 생태계, 공기 등, 46억년의 진화를 거쳐온 이 모든 것들이 싸구려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포장되고, 밀봉되고, 상표가 붙고, 값이 매겨지고, 선반에 진열됩니다. (반품사절.) 정의(正義)도 이 매장에 출시되어 있다는 얘기를 나는 들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아마 제일 좋은 것을 살 수 있겠지요.

    도날드 럼스펠드는 '테러에 맞선 전쟁'에서 자신이 맡은 임무는, 미국인이 미국식 생활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세계를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화난 임금이 미친 듯이 설칠 때에는 노예들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떱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에 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즉, '미국식 생활방식'은, 간단히 말해서, 지속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권력은 수명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아마 이 막강한 제국도, 앞선 여러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결국 안으로부터 폭발하게 될지 모릅니다. 벌써 구조적인 균열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테러에 맞선 전쟁'이 그 범위를 넓혀감에 따라, 미국 기업의 심장부는 대량출혈을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공허한 지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는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세 기관, 즉 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의 통치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기관은 모두 미국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비밀리에 이루어집니다. 이 기관들의 수장은 밀실에서 임명됩니다. 이들 수장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정치적 입장, 신념,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이들을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이 우리들을 대신해서 결정권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습니다. 그 누구에 의해서도 선출된 바가 없는 이러한 극소수의 탐욕스러운 은행가와 최고경영자(CEO)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것은 거기에 어떤 근본적인 악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극소수의 인간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도록 허용했던 결과입니다. 21세기의 미국식 시장자본주의도 똑같은 이유로 실패할 것입니다. 두 제도 모두 인간의 지성에 의해 구축되었지만, 인간본성에 맞지 않아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태는 더 나빠졌다가 조금씩 나아질지 모릅니다. 아마도 하늘에 작은 신(神)이 있어서 우리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과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이 여신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에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고요한 날, 주의깊이 귀기울이면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오는 게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면 ― 물론, 인도에서 본 것은 폭스(Fox) 뉴스입니다만 ― 마치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조지 부시의 복제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미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여기서 뵙고, 토마토가 내게 날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인간에 대한 저의 믿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Lannan Foundation 주최 초청강연, 2002년 9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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