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혐오하는 사회
     
연쇄살인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

 조이여울 기자
 2004-07-26 08:32:51


지난 한 주는 고통스러웠다. 딱 일주일 전, 연쇄살인범이 시체를 유기한 장소가 <일다>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이 근처가 아니냐는 문자 메시지 등을 받고서 기사 마감을 하던 상근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새벽까지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두려움과 분노로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노인과 여성들을 상대로 살인행각을 벌여놓고 자랑스럽게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과 ‘여성혐오’를 논하는 살인자의 태도와, 그를 뒷받침해주기에 급급한 언론의 보도행태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록 손을 쓰지 못하고 있던 경찰 행정력에 대한 불신과 ‘엽기살인’이라며 흥미롭게 바라보는 뭇 남성들의 시선,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나보다도 훨씬 더 공포에 떨고 있을 ‘매매되는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갑갑함이 한데 겹쳤다.

‘여성들의 죽음’은 너무나 가볍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사건은 얼마든지 다르게 포장된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십여 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이 떠올랐다. 소위 ‘부유한 자’에 대한 계획적인 살인사건이자, 인육을 먹는 등의 잔인한 사건으로 알려진 ‘지존파’ 멤버들의 발언과 행각은 놀랍게도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어필했다. ‘빈부 격차’가 심각한 사회 부조리를 거론하면서 이들을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일각에선 살해 당한 피해자가 알고 보면 그렇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는 식의 소극적인 반격을 했다. 그러나 당시 누구도 이들이 자신들의 살인 시스템을 ‘시험해보기 위해’ 살해 명단에 없는 한 여성을 강간하고 죽였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이들의 맹목적인 살인에 절대로 면죄부를 줄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주위 분위기는 동정론이 우세했다. 게다가 감옥에 있는 살인범을 그의 어머니가 찾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여론이 생기는 등, 내 기억 속에 ‘지존파’ 사건은 해당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으로 인해 더욱 괴로웠던 일로 새겨져 있다.

십여 년이 지나 맞닥뜨리게 된 연쇄살인 사건과 이를 둘러싼 여론은 그 때보다도 더 큰 공포와 분노, 절망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이혼 경력 등으로 인해 한 여성에게 청혼을 거절 당한 것이 ‘여성혐오’의 동기이자 살해동기라는, 말도 안 되는 살인범의 주장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읊어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여성들은 함부로 몸 놀리지 말고, 부유층은 각성하라”는 살인범의 말을 논평도 없이 전달해주는 언론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남성이 ‘부르면 그 장소로 가야 하는’ 처지에 있는 여성들의 대책 없는 위험한 실상에 절망감을 느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언론에서 ‘부유층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문제이며, 살인범은 이 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한다’는 정도를 짚었다는 점일까. 그러나 살인범의 자작시와 그림을 보여주며,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거나 “'살인마'의 가슴에 무엇이 물결쳤던가를 '증언'한다” 등의 언급을 하는 모습은 여전했다. 진정 범인이 사랑에 목이 말라서 노인과 여성들을 살해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연쇄살인범이 노인과 여성들을 살해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이 ‘죽이기 쉬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보도방을 통해 매매되는 여성들은 익명을 보장 받으며 얼마든지 유인해낼 수 있고, 대부분 가족 등과 멀리 떨어져있어서 사라진다 한들 누구도 찾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실종신고를 해도 경찰이나 검찰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집단이기 때문에 범행대상으로 삼기엔 ‘너무나’ 쉽다.

세상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성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선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불만을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터뜨리는 이들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불합리하다.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분노로 인해 옆집 여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남자, 어른의 꾸지람에 대해 앙갚음을 하려고 그 집 어린 딸을 때려 죽인 소년 등을 보며, ‘가족사랑’ 타령을 하는 언론과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가장 취약한 집단이 희생양이 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가. 힘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가 어떻게 정당화되거나 동정 받을 수 있는가.

여성혐오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번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보도나 이야기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여성혐오’라는 단어다. 사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의 ‘여성혐오’는 '성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남편들이 아내를 쥐어 패고 있으며, 더욱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매매하고 학대하고 강간한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자유롭게 걸어 다닐 자유조차 없다. 아내폭력, 성폭력, 성매매로 대변되는 이 같은 대 여성폭력들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실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범인의 살인행각에 대해 ‘여성혐오’를 논하는 맥락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마치 ‘여성혐오’가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때로는 정당방위라도 되듯이 언급하고 있다. 살인범이 ‘여성혐오’를 할만한 근거가 있다는 식이다. 가해자의 정신병적 기질이 확인되지 않는 한, 살인행각에 대해 ‘여성혐오’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범죄를 감싸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성들을 혼내 줘야 한다’는 살인범의 태도는 기실은 너무도 익숙한 레퍼토리다. 최근 속칭 “원조교제” 대상이 되는 미성년자 여성 4명을 강간한 혐의로 잡힌 남자와, 바로 며칠 전 노래방 도우미들만을 대상으로 33차례 강도, 강간을 한 일당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여성들을 무려 122차례나 강간했지만 16건에 대해서만 징역을 살았다고 자랑하듯 진술했다”.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 되는 여성들은 취약 계층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이고, 법과 정의가 이들을 포용해주지 않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를 논하는 강간, 살인 가해자들은 이들에 대한 혐오감을 자랑스럽게 표출한다. 아니, 사실 상당히 많은 남성들이 그 논조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의 근저엔 여성의 몸이 당사자의 것이 아니라 남성의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한 남성의 소유여야 할 여성의 몸이 여러 남성에게 공유될 때 해당 여성에 대해 적개심을 표하는 것이다. 성매매 현장에서 여성인권을 위해 오랜 기간 활동해 온 한 활동가는 “성매매 현장에는 늘 폭력과 강간이 뒤따른다”고 말한 바 있다.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고 매매되는데, 한편으로 남성들은 이들 여성에게 ‘적개심’을 갖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순을 본 적이 있나.

이번 사건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가. 지난 한 주간이 만약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한 가지만 제안하고 싶다. 단 한 번이라도 살인범의 집에 일주일간 갇혀있었던 여성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그리고 나서 살인범과 그를 비추는 언론과 이번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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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3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매매 현장에서 여성인권을 위해 오랜 기간 활동해 온 한 활동가는 “성매매 현장에는 늘 폭력과 강간이 뒤따른다”고 말한 바 있다.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고 매매되는데, 한편으로 남성들은 이들 여성에게 ‘적개심’을 갖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순을 본 적이 있나.>

<이번 사건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가. 지난 한 주간이 만약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한 가지만 제안하고 싶다. 단 한 번이라도 살인범의 집에 일주일간 갇혀있었던 여성의 입장이 되어보라고.>

이거야말로 타자의 부름, 타자의 얼굴이 아닐까,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호소하는, 명령하는 ...
 

개발과 세계화, 전쟁의 이면을 들추다
     
평화운동가 아룬다티 로이의 세계

 김윤은미 기자
 2004-07-18 17:38:02


건축가에서 소설가로 변신,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데뷔작으로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 한 인도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빅토리아 베컴과 나란히 영국여성이 뽑은 이상형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명성을 기쁘게 누리기는커녕 불안하고 낯설어 했다. 그녀는 부자가 된 죄의식에 대해 “마치 내가 이 세상의 돈이 돌아가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에 구멍을 뚫었고, 그래서 돈이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그 엄청난 속도와 힘에 부딪쳐 내 온 몸이 멍드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흔히 노엄 촘스키나 하워드 진과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지식인들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그녀가 작가로서의 명성과 안락함을 버리고 전위적인 활동가로 나선 만큼, 대중적인 관심 또한 높다. 그러나 인도의 환경과 빈민문제, 핵 문제부터 전쟁 반대까지 그녀가 써낸 글들은 한 명의 소박하고 용감한 시민이자 여성의 것에 가깝다.

<생존의 비용>서 댐 건설과 핵 실험 비판

물론 그녀의 글 역시 많은 자료와 통계들이 인용되지만, 자료와 통계들 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에서 문제를 명확하게 밝혀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드는 저자의 힘이다. <생존의 비용> 중 ‘공공의 더 큰 이익’에서 로이는 가뭄해소와 관개라는 미명 하에 마구 지어지고 있는 댐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가난으로 내몰고 있다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현재 인도 전역에 지어진 대규모 댐은 3천6백 개이며, 1천 개가 넘는 댐이 만들어지고 있다. 댐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몇 천 명의 사람들이 수몰 지구에서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보상 받지 못하거나, 농사짓기 불가능한 거친 땅을 배당 받는다. 할 수 없이 수몰지역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지만, 숲과 강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기에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결국 빈민가에 정착하게 된다. 댐이 실제로는 그다지 큰 효율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선진국에서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데, 왜 인도 정부와 주정부는 계속해서 댐을 지으려고 할까?

로이는 서구 자본과의 결탁에 눈을 돌린다. 댐을 짓는 자본은 서구의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과 국제은행들은 댐을 짓도록 국가에 돈을 제공한 뒤, 대가로 무기를 사도록 종용하며 댐 건설 이후 관개 수로와 기타 설비에 필요한 돈을 빌리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 어떤 언론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댐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서구 자본이 행한 일들은 모두 가려진다.

‘상상력의 종말’은 인도가 핵 보유국임을 선포한 후 발표된 글이다. 핵 문제에는 핵으로 인해 증폭하는 전쟁의 위협, 핵의 위험성에 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지배계급의 파시즘, 핵무기를 통해 ‘진정한 인도’를 만들겠다는 위험천만한 민족주의 의식과 이를 통해 민중들의 권리 주장을 억누르려 하는 흐름,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로이는 이 복잡한 얽힘을 쉬운 문장과 힘찬 비판, 작가다운 절묘한 비유로 하나하나 풀어낸다.

그녀는 ‘진정한 인도’를 만들고 싶다면 “고추, 토마토, 감자와 같은 외국에서 들어온 요리재료와 크리켓, 영어, 민주주의도 금지하고 병원과 신문사를 폐쇄하라”고 비꼬면서, 3억의 인구가 문맹인 인도라는 나라에서 누가 핵 무기의 무서움에 대해 알고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한다.

세계엔 기억해야 할 9.11이 너무도 많다

<9월이여, 오라>는 인도에서 인도 바깥으로 문제의식을 넓혀나간다. 그녀는 중동, 남미, 동아시아를 종횡무진하며 침략한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폭로하고, 전쟁을 통해 돈을 버는 기업과 현실을 조작하는 언론, 미국을 신화화하는 영화, 침묵하는 유엔을 비판한다. ‘9월이여, 오라’에서 로이는 미국인들이 9.11사건으로 인해 3천 명이 넘는 희생자를 가지게 된 것은 애도해야 할 일이지만, 세계에는 기억해야 할 9.11이 너무도 많다고 지적한다.


1922년 9월 11일은 영국정부가 아랍인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신탁통치를 선포한 날이며, 1973년 9월 11일은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미국CIA 지원 하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칠레인들을 죽인 날이다. 그녀는 자살 폭파범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중동에서 일어난 기나긴 전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며, 테러는 개인적 절망의 극단에 처했을 때 나온 행동이지 혁명적인 전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때문에 죽은 자들에 대한 슬픔을 상품화해서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야만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즘을 자처하며 전쟁을 합리화하는 것에 대해 로이는 “폭격을 통해 여성해방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습니까?”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결국 개발 프로젝트, 전쟁, 세계화라는, 개인의 일상에 폭력을 불러오는 이 거대한 흐름은 미 정부와 IMF와 같은 권력을 지닌 기구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을 뿐, 개인의 의지가 하나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폭로한 거대한 현실에 독자들은 망연자실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망연자실함을 저항에 대한 의지로 이끌어 간다. 로이의 저항에 대한 의지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녀는 ‘작가와 세계화’에서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사람이 가정과 땅, 일자리와 인간적 존엄성,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어야 합니다”라고 단언한다.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소설 제목처럼, 역사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이는 개인의 일상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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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경직성을 넘어서자
     
도식화된 ‘정치적 올바름’은 위험

 문이정민 기자
 2004-07-26 01:18:38


“여성주의는 이래야 하는 거 아니야?”

무심코 이런 반문을 종종 접하곤 한다. 어떤 상황, 사안에 대해 판단할 때 여성주의적으로 올바른 방식과 태도, 관점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반문이 상황과 사안에 상관없이 ‘여성주의라면 이래야 한다’는 도식적인 틀을 요구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한 여성단체 상근자를 만났더니 고민을 털어놓는다. 요즘 단체활동 속에서 ‘여성주의/반여성주의’를 가늠하는 판단의 근거들이 일방적이라 답답할 때가 많다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단체 활동가들의 의견을 수렴해와서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한 사람이 전혀 논의를 하지 못한 채 참석했다. 이유는 이랬다. 활동가들이 의견을 말하지 않아 한 사람씩 의견을 물었더니, 한 활동가가 “말하기 싫다”면서 “이렇게 모두에게 의견을 묻는 것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이고 상처 받았다”고 항변했다는 것이다. 이후 모임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이 권위적인 방식인가에 대해 물으면 또 한번 ‘권위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으니 논의는 진전이 안되고 그저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된다고 했다. 여성운동단체의 활동가라면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할 의무와 책임도 일면 있는 것인데, “말하기 싫다”는 무책임한 발언이 ‘여성주의는 권위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목 하에 정당화되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여성주의’적 방식일까.

이런 방식은 여성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여주어야 여성주의적이라는 식의 믿음으로 이어져, 더 나아가면 자칫 온정주의가 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여성주의자들이 ‘상처’를 말하는 방식이 그리 낯설지 않다. 논쟁이 일 때 서로를 비판하기보다 자매애로 감싸 안아야 한다거나 ‘왜 같은 여성주의자들끼리 상처를 주냐’는 식의 안타까움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정작 비판에 대해 ‘상처주지 말라’고 답하는 것은 여성주의와 상반되는 주장이다. 여성주의는 필연적으로 비판적인 자세를 피력하게 되는데, 그러한 비판을 ‘상처’로 받는다면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어떻게 전달하고 설득하고 궁극적으로 타인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나.

경직된 올바름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힘을 갖기 어려우며 문제해결에 다가서기 힘들다. 여성주의에 대한 도식적인 원칙에 경도돼 있는 것은 위험하다. 정황을 보지 않고 단 하나의 원칙에만 매달리는 태도는 성희롱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접하게 된다. 성희롱 사건은 사안마다 그 상황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책이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실제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 때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희롱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느낌과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 해결에 있어서 피해자의 모든 요구나 언행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안에 따라 현실적으로 무리하다고 판단하는 이에게 ‘여성주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하는 등 경직된 방식으로 표출된다면 곤란하다. 이런 태도는 논의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도 발전적이지 못하다.

한편, 여성주의는 결혼제도를 비판하니까 여성주의자라면 결혼해선 안된다거나, 여성주의자는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야 하니까 성관계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들이 정작 자신의 느낌, 경험들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여성주의는 도식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엄숙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원칙과 여성주의 속에 자신이 어디 즈음 존재하는지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설명하고 책임질 수 있는 언어로 여성주의를 구성해야 한다.

여성주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치열하게 판단되고, 만들어지고, 논의되며, 그러면서 담론을 생산해왔다. 여성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비판에 직면하고 강하게 이겨내고 움직여야 한다. 하나의 정답에 기대어 좌우에 눈을 감기 보다 자기 것으로,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여성주의를 사고하고 부딪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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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추한 정체성 논쟁 넌더리난다

 

1주일이 넘게 계속되는 정치권의 추한 정체성 논란이 넌더리가 날 정도다. 삼복의 무더위에 정치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무 실체도, 실익도 없는 말싸움에 골몰하고 있는가. 그것도 정치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인지 묻고 싶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까지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는 정체성 논쟁에 직접 가세,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됐다. “지금 정치전선은 과거 유신시대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로 나아갈 것이냐의 기로에 서있다”는 노대통령의 지적에 몇 사람이나 공감할지 의문이다. 유신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게다가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30년 전의 유신 망령을 끄집어내 국민들을 유신 대 반유신 세력으로 패를 갈라 어쩌자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제 의문사위 보고에서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이 있다”고 야당의 정체성 시비를 정면 반박했다. 야당의 공세에 그런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야당이 정체성 시비를 벌이는 것 자체가 뜬금없는 짓이다. 역사적 잘못을 바로잡자는 데 반대할 명분은 없다. 그렇더라도 최근의 ‘NLL사건’과 의문사위의 결정에 대해 야당 대표로서 얼마든지 문제제기를 할 만한 사안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시하면 그만이다. 의문사위가 독립적 기관인데 대통령이 일일이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여야가 죽고살기로 싸우면 당내 리더십이 확립되고 떨어진 지지율이 올라가는지는 몰라도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후안무치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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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전집’ 50년 걸려 나왔다


△ (좌로부터)1.모스크바에 머물렀던 박헌영이 1929년 부인 주세죽,딸 비비안나와 함께했다. 2.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한 박헌영이 여운형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3.남북단독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6월24일,북에 머물던 박헌영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관련기사

  • ‘박헌영 전집’ 주도적 참여 임경석 교수


  • 각계 100여명 11년에 걸쳐 공동작업
    사건·기록·저술 등 9권에 담아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 지평 넓혀

    〈박헌영 전집〉(전 9권·역사비평사)이 나왔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새 이정표다. 이제 이 분야의 연구는 〈박헌영 전집〉 완간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각계 인사 100여명이 11년에 걸쳐 전집 편집위원회에 참가한 과정도 그렇거니와, 책이 나오기까지 50년의 ‘숙성’을 기다려야 했던 역사의 무게를 따져봐도 그렇다.

    〈박헌영…〉은 ‘민족주의적 좌익’ 인물에 대한 조명을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로 대신했던 관성에 대한 결정적 일침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박헌영(1900~1956)을 전면적으로, 그리고 정면으로 다룬 것이다. 한국전쟁 정전 51주년(7월27일)을 즈음해,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것은 물론, 반세기 동안이나 “은밀하고 공포스럽게 유지돼온 박헌영에 대한 기억을 역사로 부활시켜야 할 때”(편집위원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혁명을 선동한다거나 북한 체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연구자들은 전집 9권 빼곡하게 무미건조한 날짜와 사건, 기록과 저술을 담았다. 1~3권은 박헌영의 저작, 4~7권은 신문기사 등 자료, 8권은 회고와 증언, 9권은 화보와 연보로 구성됐다. 전집 편집위원회 책임 대표인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박헌영에 대한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객관’을 유지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밴 자평이다.

    거기에 논평과 감상이 서 있을 자리는 없다. 이를 읽으며 어떤 울림을 얻을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전집의 ‘행간’에는 격동하는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자료와 문헌을 따라가다 보면, ‘민족 배반자’와 ‘미제 간첩’으로 그를 몰아세운 남과 북의 정치권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실을 뒤틀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결국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힘이다. 1918년 한인사회당 건설 이후 30여년 한국 근대사의 중심을 이뤘지만, 결국은 남과 북으로부터 철저히 폄하당한 공산주의 운동의 본류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풍토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편제’한 북한을 논외로 하더라도, 남쪽 역시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척박하기 그지 없다. 김준엽과 김창순이 함께 지은 〈한국공산주의운동사〉(전5권·1963~1976), 서대숙의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영문 1967·국문 1985),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이 쓴 〈한국의 공산주의〉(1972) 등이 대표적 저작이지만, 냉전체제 아래 영미권의 시각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1987년, 20여명의 소장학자들이 한국역사연구회 안에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반’을 만들어 10여년 공동연구를 펼쳐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집단적·체계적 연구활동은 사라졌다. 전국 각 대학의 역사학 교수 가운데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사를 전공한 이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젊은 학자들은 ‘자리’를 잡지 못해 연구교수 등에 머물러 있다.

    임경석 교수(성균관대)는 “사회적 금기를 넘어 역사인식의 공감을 넓혀 사회구성원의 가치를 통합하고 그 정체성의 외연을 넓히는 구실을 한다”며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의미를 평가했다. 〈박헌영…〉은 그 길을 가로막았던 어떤 ‘금기’를 깨고, 온전한 역사인식으로 가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셈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박헌영 전집’ 주도적 참여 임경석 교수


    “아직도 독자의 가슴속에
    검열 시스템이 있다”

    냉전적 잣대로 휘둘려온 한국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 대한 임경석 교수(성균관대)의 신념은 확고하다. “역사적 사실, 그대로 톺아보는 학문 연구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역사 연구와 다를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데, 근거 없는 경계심 아니면 턱없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한국적 상황’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다.

    그는 1993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다시 펴내, 이 분야의 맥을 잇고 있는 소장학자다. 〈박헌영 전집〉 편찬 과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특히 그 일부인 〈이정 박헌영 일대기〉를 직접 집필했다. 박헌영의 일생을 돌아보는 작업조차도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에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을 주목하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박헌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지원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 그는 이념적 열정 대신 학문적 냉철함으로 한국 사회의 금기를 잇따라 넘어서고 있다.

    그런 그에겐 ‘냉전체제’조차도 학문 연구자가 극복해야 할 하나의 과제에 불과하다. “냉전 시기에는 이념적 금기에 도전한다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냉전 구조가 붕괴된 뒤에는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1차 자료를 폭넓게 접할 수 있어, 오히려 유리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의 책임도 학계 내부에 먼저 돌린다. “지금까지 이 분야의 역사서술이 무미건조하거나 지나치게 이념적 편향을 보였기 때문에, 대중들과 폭넓은 소통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활발한 사회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매력적인 역사 서술을 꿈꾸고 이를 실현하는 게 역사학자들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대안도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다. 다만 “학문의 자유가 많이 확장됐지만 아직도 연구자와 독자의 가슴 속에 내면적인 검열 시스템이 있고, 한국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아직도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임 교수의 작업은 “역사적 불화를 거쳐 이리저리 분열된 사회적 심리상태를 통합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사회적 금기를 연구해 이를 정상적인 담론구조에 소통시키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까지 보듬어 우리의 20세기를 온전히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 그의 필생의 과제다.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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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oria 2004-07-3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글 하고는 상관없는 얘긴데 적당히 쓸 곳이 없어 여기 적습니다. 어제 주신 Linda M. G. Zerilli(이름 참 복잡하군요...) 글을 대충 한번 훑어 보았습니다. 무척 재밌군요! 확실히 세상 참 넓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듯 한데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되네요.
    이 글에서도 '공화주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네요. 볼수록 흥미있는 사상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번에 말씀해 주신 Bonnie Honig의 작업에 특히 관심이 생겼습니다. 아렌트와 데리다를 접목시킨다는 점도 그렇지만, 특히 이를 페미니즘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안타깝게도 도서관에는 책 한권 밖에 없던데, 그래도 아렌트에 대한 페미니즘적 해석을 주제로 한 책이라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책 하고 어제 말씀하신 Penelope Deutscher의 책이 어떤 내용인지 정말 궁금하군요.
    요새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사람들은, 한명한명이 다 세계란 느낌입니다. 이러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죠? ^^ 감사합니다!

    balmas 2004-07-30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다니 다행이군 ...
    그나저나 박헌영 전집은 아직 안 나오고 [이정 박헌영 일대기]만 나온 셈인가 ...

    aporia 2004-07-3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가 최근 기사라면 전집은 곧 나올 겁니다. 사실 이 전집은 박헌영 선생 탄생 100주년에 맞춰 나올 예정이었고, 그 기간을 놓친 다음에도 매년 나온다는 말이 무성했는데, 이제 이렇게 신문기사까지 난 걸 보면 출판 직전이 아닌가 싶네요. 원래 [이정 박헌영 일대기]도 전집의 일부로 기획되었는데, 전집이 늦게 나왔고 또 이 책을 빨리 출판해야 할 현실적 필요가 있어서 먼저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9권이니까 최소 20만원은 할 텐데, 선생님의 경제에 다시 한번 큰 타격이 되겠군요. ^^ 그러나, 남 걱정 할 때가 아니지요. 저는 이걸 어떻게 마련하죠??? TT

    aporia 2004-07-3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다른 기사를 찾아 봤더니 가격이 60만원이라는군요...! 한권이 6만원 꼴인 셈인데, 물론 고생들도 많이 하셨을 테고 나갈 부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밥 굶는 식으로는 어림도 없겠군요. 전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TT

    balmas 2004-07-3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0만원이라 ...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MEW)보다 더 비싸군!!!
    목돈 생기면 사야지 별 수 없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