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폭력 악순환’ 누가 책임지나

 

작년에 나는 이라크에 있었다. 미국 대통령 부시가 항공모함 위에서 멋지게 종전 선언을 했건만,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폭격에 무너진 것은 건물들만이 아니라 이라크인들의 삶이다. 전투가 끝나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가난한 순서대로 무너진다. 예컨대 바그다드 변두리 ‘알 카마리야’ 주민들은 수도관이 낡아 수돗물이 간신히 나온다 해도 오염되어 끓여먹어야 하는데, 전쟁 이후 가스 공급이 끊겨 그럴 수마저 없으므로 이웃 마을에서 물동이로 물을 받아다 먹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도 역시 가난하여 그 물마저 오염되었다 했다. 한낮에는 섭씨 60도에 육박하는 가혹한 더위에 그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목이 멘다. 물가는 몇 배나 뛰는데 가난한 가장들은 태반이 일자리를 잃었고 식구들은 전염병과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쓰러진다. 전쟁은 무엇보다 반민중적이다.

-美깃발 아래선 모두 점령군-

전쟁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년 반이 넘도록 미군이 이라크를 재건하지 못하는 이유는 군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부 그레이브 감옥 고문’ 사건과 ‘팔루자 학살’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미군은 이라크인들을 위해 거기 있지 않다. 재건해야 할 이라크를 강압하고 해방시켜야 할 이라크 민간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군 깃발 아래 있는 모든 외국군은 점령군이요, 이라크인들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여러 갈래이고 그들 모두가 김선일씨를 살해한 ‘알 자르카위’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아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평범한 이라크인들의 애국심이야말로 저항세력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며, 점령이 폭압적일수록 이들의 저항도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건축장비와 의료품을 싣고 갔다 한들 한국 파병군은 군대이며, 이라크에서 하게 될 일은 다름 아닌 이라크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다.

한 시인이 “전쟁의 책임이 히틀러 같은 호전적 정치인들에게만 있겠는가, 그에 동조하거나 그를 묵인했던 대중들에게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 과반수가 파병이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과반수가 우리나라 사정상 피할 수 없는 일로 본다고 한다. 그 과반수라고 호전적인 성품은 아닐 것이다. 단지 지금처럼 평온한 일상을 원할 뿐. 그러나 그런 소박한 욕구의 대가가 전쟁이다. 이것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다. 이라크와 아랍 세계 전체의 증오와 보복으로부터 이제 대한민국 전 국민과 해외 동포들까지 안전할 수가 없다. 테러리스트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이유로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낸 횡포를 반성해야 한다. 그들도 사정이 있고 서구에 침탈당한 수십 년 동안 그렇게라도 항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야 무지무지 쌓였다. 이라크에 자원해서 간 파병부대 병사들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전쟁에 휘말려 들었고, 우리 땅이 바로 전쟁터가 되었다는 무서운 진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나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과연 정치인들은 어떤 책임을 질까. 히틀러가 2차대전 이후 독일 국민이 겪은 참담한 고난에 대해 무슨 책임을 졌으며, 미국 침공의 명분을 제공한 사담 후세인은 또 어떤가. 정치인이 자살하건 전범으로 처형당하건 개인적 불행일 뿐 전쟁을 겪은 국민들에게는 어떤 보상도 되지 못한다.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 정권의 명백한 실책이되, 대통령이 실각한다 해도 그 실수는 무마되지 않는다. 파병을 부추기고 주장했던 언론들, 파병을 가결시켰던 국회의원들, 파병의 논리를 꾸민 이른바 국방 전문가들, 그들 중 누가 자신들이 야기한 폭력과 피의 악순환에 대해 책임질 것인가. 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집권세력과 기득권층은 행운의 혜택은 제일 먼저 누리되, 국가에 닥친 불행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필경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뿐. 책임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

-명분없는 파병 철회 마땅-

모든 인간은 평온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도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내가 평온하기 위해서는 남이야 그렇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결국은 국가간 전쟁으로 비화한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은 국가라는 추상적 권력이 아니라 평온하게 살기만 바라는 너고 나고 우리다. 평화는 의지가 필요하다. 국가의 위험한 결정을 막아야 한다. 국가는 책임지지 못한다. 국민의 힘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한국군을 되돌려야 한다.

〈오수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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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지 못할 「정은임의 영화음악」
월간 『말』 1월호, "올드 걸 올드보이를 만나다"

 

이오성 기자 dodash@digitalmal.com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던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4일 저녁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고인이 진행했던「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습니다. 고인은 MBC 노동조합 여성부장과 업무혁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방송 현실 개선에도 앞장서 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월간 『말』 1월호 문화인물탐험에 실렸던 아래 기사는 고인이 살아 생전에 했던 마지막 인터뷰입니다.

올드 걸, 올드 보이를 만나다

글 이오성 기자

사진 허태주 기자

지난 12월 5일 저녁,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2003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한 여성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정은임 누나다!"

삼십대 중반은 돼보이는 영화인의 입에서 터진 '누나' 소리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이 정은임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정은임(35). 1992년 11월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매일 새벽 1시면 대중들 앞에 목소리를 드러낸 이래 그와 그의 방송은 하나의 '물결'이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 위주의 영화 소개로 일관하던 당시의 영화음악 방송 풍토에서 FM 영화음악은 날카로운 사회비판, 새로운 영화읽기로 1990년대 문화빅뱅의 시대를 진보적으로 지킨 상징이었다.

영화 「파업전야」가 특집으로 편성되는가 하면, 「인터내셔널」가 공중파를 타고 흘러나와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고정 패널로 출연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정은임씨의 대화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보적 영화읽기'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되곤 했다. '정영음'이란 고유명사로 불리우기도 했던 이 방송은 이념이 사라진 시대, 문화적 열정과 감수성을 배출할 길 없던 청년들에게 소중한 안식처였고 정은임은 그 안식처를 지키는 누이요, 연인이었다.

그가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던 날 어느 중학생은 수학여행길에까지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가 여관방에서 들으며 눈물지었다. 그날 방송에서 정은임은 "꽃 지는 날 만났다가 꽃 피는 날 헤어진다"며 이별의 회한을 달랬다. 1995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달갑지만은 않았던 방송복귀

그리고 8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20일. 다시 「정은임의 영화음악」(MBC FM)이 돌아왔다. 매일 새벽 3시부터 4시, 그의 말처럼 '청취율의 사각지대'인 탓에 신경 쓸 것 없어 더욱 편한 심야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겨울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동숭아트센터에서 만난 그에게 던진 첫 마디는 "꽃 피는 날 떠났다가 꽃 지는 날 돌아온 소감을 말해달라"는 말이었다. 감개무량의 감회를 기다렸던 기자의 기대와 달리 그는 "영화음악을 별로 맡고 싶지 않았다"고 답했다. 의외였다.

   
"걱정되는 일이 많아서 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면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MBC에서 없애려고 했거든요. 지금 영화음악이라는 게 독자적인 무엇이 있는 게 아니고, 이런저런 음악을 삽입하는 수준이잖아요. 전세계적으로도 영화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이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안 돼요. 그걸 몇몇 피디가 몸으로 막아내서 그나마 버텨왔죠."

걱정되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8년 전 그가 영화음악 진행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애청자들이 '정은임 복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최초의 대중매체 소비자운동인 셈이었다. 이들은 정영음의 사회비판적 내용과 진행자의 적극적인 노조활동 때문에 방송사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와 중도하차하게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해 왔지만, 당시 입사 4년차의 방송 노동자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쏟아졌던 유형무형의 '파장'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쉽게 가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와 영화음악을 연관지으며 회사 밖의 사람들과 달리 회사 안에서는 뭐랄까, 당시 그 사건을 해사행위 비슷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어요. 마치 제가 바깥의 사람들을 움직여서 어떻게 한 것처럼 사시를 뜨고 쳐다보는. 제가 결벽증 같은 게 있는 데 그런 오해가 부담스럽고 싫어서 '나는 정당하다, 차라리 방송진행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한번은 영화 관련 홈페이지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적이 있어요. 내가 하는 어떤 사소한 일조차도 소영웅주의로 바라보는 식이었죠.

사실 2년 전에도 영화음악을 하기로 했다가 회사 내에서 잡음이 일어나 그만둔 적이 있어요. 손석희 부장님이 와서 '네가 영화 일을 안 하는 건 인력낭비다'라며 진행을 제안해서 하기로 했는데 또 주위에서 무슨 끈을 잡았다는 둥 하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그때 제가 발끈해서 '나 그렇게 사는 사람 아니다 안 하겠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손석희 부장님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졌어요. 이미 보도자료까지 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시 관 밖으로 나오다

예기치 않은 파장과 그로 인한 부담 속에 영화음악으로의 복귀를 주저할 무렵,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또한 정영음을 사랑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관 뚜껑을 열지 말아달라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스스로 시체가 됨으로써 정영음을 사랑하던 많은 이들을 결국 '네크로필리아'로 만드는 일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가운데 지난해 정영음과 관련한 다큐를 찍게 됐어요. 거기에 함께 참여하면서 옛날 그 청취자들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달라졌지요. 게다가 이제 일 핑계대고 영화는 실컷 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미끼를 덥썩 물었죠."

그렇게 영화음악실로 복귀한 지 2개월여. 11년 전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터. 그에겐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니 어쩌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디오가 굉장히 어려졌어요. 가끔씩 무슨 이야기만 하면 '너무 이념적이지 않아요? 요즘 애들은 듣기 싫어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나와요. 무조건 청취자들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 것 같은데 라디오는 솔직하잖아요. 요즘 다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얼마나 사적인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 같은 멘트를 많이 하나요? 그런데 왜 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안돼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제 일상 중의 하나거든요. 세상이 얼마나 모순적인데, 방송에선 여전히 예쁜 말만 골라서 해요. 그리고 우리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굉장히 즐기지요."

정은임은 가령 창사특집방송이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코너에 아나운서들이 차출되어 나눔의 정을 호소하고 돈을 모으는 일을 동료들끼리는 '앵벌이 뛴다'라고 표현한다며 종국에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방송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의 정영음이 그랬듯 방송과 사회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그의 목소리도 함께 떨리곤 한다. 복귀한 뒤 두 번째 방송을 하던 날의 오프닝 멘트를 듣고 기자는 가슴이 떨렸다.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는 스스로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겨우 매달린 기분으로' 청취자들에게 말을 건넨다. 최신유행의 피곤한 수다로 점철되는 FM 방송에서는 물론, 여느 개혁적이라는 매체에서도 이처럼 애틋한 멘트는 듣기 힘들다. 단순히 싸구려 감수성으로 포장할 수 있는 깊이가 아닌 탓이다. 적지 않은 양의 방송 멘트를 써내려가는 일도 때때로 그의 몫이다. 그런 만큼 그에 따른 부담도 함께 돌아온다.

노동자, 그리고 8학군 기자들

"오늘은 이 이야기 안 하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힐 것 같다는 날은 꼭 직접 써요. 영화도 시선이 다르면 달리 보이듯이 어차피 방송을 진행하는 제 시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굉장히 비난 많이 받았어요. 나더러 노동자에 대해 뭘 아느냐. 육체노동자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해 뭘 아느냐고 이야기하더군요. 거기에 방송이나 언론의 허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 세상은 마이크나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거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SF 영화 같은 세상 아닌가요. 모든 것이 나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이미 짜여진 세상. 너는 중산층이고, 한 달에 얼마 버니까 얼마 버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라는 거죠.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손배가압류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보면 괴롭고, 고민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고 다른 세상을 꿈 꿀 수 있는 거잖아요.

난 비록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할 수 없나요? 왜 '8학군 기자들'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방송국에도 정말 8학군 출신 기자들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점점 뉴스에서도 시선이 한쪽으로만 흐르게 돼요. 노동자, 농민 이야기는 그들의 생리나 환경과 맞지 않아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눈도 돌리지 않고. 말은 심각하지만, 그게 일상으로 돌아가면 전혀 심각한 게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 옆에서 투명인간화되어 버리는 청소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인데."

   

MBC 입사와 관련해 정은임씨에게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그가 입사했던 1992년은 MBC가 방송민주화를 내걸고 한창 파업 중이던 시기였다. 수습사원들에게 예의 노조불가입 각서가 강요됐고, 그는 입사동기 중 유일하게 방송사 간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파업에 참여한 '강성'노동자였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네 살배기 아이의 엄마이자 노조의 간부(여성부장)로 재임 중인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직장 탁아소를 설립하는 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그가 관련 법률까지 직접 챙기며 일을 벌이자 주변에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MBC 쯤 되는 거대 방송사조차 그와 같은 악바리가 나서지 않는 한 여느 직장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MBC에서 그를 만난 날도 저녁에 노조회의가 잡혀 있다며 굵은 서류뭉치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행복한 영화 읽기

1998년에 그는 방송활동을 잠시 접고, 미국으로 영화공부를 떠났다. 그가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제목은 '한국의 영화마니아'. 1990년대 초반 정영음을 통해 일군의 영화마니아를 배출했던 당사자이기도 한 그에게 한국 영화와 영화마니아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일단 영화판이 엄청나게 커졌죠. 영화라는 것의 속성이 어차피 상업적이에요. 어떻게 보면 상업성 일변도로 가고 있긴 하지만. 대중들은 예전과 크게 차이 나는 건 없다고 봐요. 예전에도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계층이 20%밖에 되지 않았죠. 문제는 커다란 강이 있으면 거기에 맑은 물을 공급하는 지류가 있어야 문화적 자생력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일 테죠. 그런 지류들의 움직임이 아직은 제 기를 못 펴지만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영화 같은 데서 그런 움직임을 발견해요.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수일지라도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려야죠. 그게 미디어의 기능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엄청난 사명감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자연스레 말하고 전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행복하게 느껴져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게 중요해요. 가령 박찬욱 감독 같은 경우 평론가 시절에 만났을 땐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빌빌거렸거든요(웃음). 그런데 지금 보면 저렇게 훌륭한 감독님이 돼 있잖아요. 그런 성장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정은임씨는 최근 본 영화 중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수작으로 꼽는다.

"「올드보이」를 보면서 송두율 교수를 떠올렸어요. 괴물이란 존재는 어떤 사회나 집단에서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걸 뜻해요. 외적인 측면이 아니라 생각이나 사상 모든 것들이. 영화 마지막을 보면 결국 최민식에게 근친상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으로 나오거든요. 말하자면 괴물로서의 그 삶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최면을 거는 사람이 어쩌면 감독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감독은 최민식이 괴물인지, 혹은 그를 괴물이라고 규정하는 우리 사회가 괴물 같은 것인지 말이죠.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해석의 시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 영화가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는 건 당연하고요, 심지어 어떤 관객에게는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마저도 좋게 느껴지더군요."

올드 보이와 올드 걸의 연대

이 쯤에서 '올드 보이와 관련해'(?) 정영음과 『말』독자들에게 한 가지 '뉴스'를 알려야겠다. 그건 올 1월부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도 정영음에 '복귀'한다는 사실이다. 정영음의 방송재개 이후에도 꾸준히 "정성일씨를 출연시켜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정영음의 극성팬들에겐 더없는 희소식일 터. 그런데 정성일씨가 복귀하게 된 과정엔 정은임씨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이를테면, '소녀, 소년을 꼬시다' 정도가 될까.

"복귀하면서 정성일씨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돌아온 답장이 '나는 이제 올드 보이다'라며 고사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무슨 소리냐, 나는 관 속에서 기어나온 사람이다. 나야말로 '올드 걸' 아니냐고요(웃음). 그렇게 곡절 끝에 일단 한 달 동안만 함께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 한때 "한국에서 영화광의 여러 단계 중 그 첫 번째 단계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때 영화광의 1단계에 진입했던 '올드 보이'들은 영화광의 나머지 단계의 진입에 성공했을까. 그리고 한국영화판을 바꾸기 위한 '올드들의 연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거기까진 알 수 없지만,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겨 '올드 걸'의 반열에 오른 정은임씨의 경우 '열린 영화광'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것은 또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전엔 바보였어요. 절대적인 진리를 믿었죠.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이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남들을 용납하지 않았아요. 누군가는 그걸 매력이라고 했지만요. 그게 아이를 기르면서 달라졌어요. 과거에 나는 너무 나만의 언어로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언어를 하나둘씩 이해해 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세계가 있고, 그런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 하는 게 소중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정말요."

   

 

2004년 08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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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stella.K 2004-08-0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

balmas 2004-08-06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러세요.
 

버스간에서 저를 글썽이게 한, 바로 그 글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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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몇번씩 폭발음 죽음조차 점점 무감각
[한겨레 2004-08-03 17:28]
[한겨레] 테러와 교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참극의 땅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이라크인들을 위한 평화교육센터 사업을 벌이고 있는 평화운동가 한상진 hansangj@hotmail.com씨가 한국 자이툰 부대 선발대가 이라크로 떠난 3일 현지 사정을 전해왔다. 한씨가 몸담고 있는 평화운동단체 ‘함께 가는 사람들’( www.ihamsa.net)의 허락을 얻어 이를 싣는다.

어제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두 건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를 상대로 한 폭탄 공격이었습니다.

이라크 전체에서 교회를 상대로 모두 다섯건의 폭탄공격이 있었는데 그 중 두건이 제가 살고있는 동네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제 집에서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에서 발생했습니다. 거리의 가까움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겨냥한 것으로는 제가 본 첫번째 공격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자못 컸습니다.

종교갈등 불안감 확산 “무장세력이 드디어 이 전쟁을 종교전쟁으로 끌고 가려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 양상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아마도 일부 아랍계의 단결과 지지를 모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종교박해로 이어지면서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갈등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더군요.

제가 아는 이슬람은 평화와 포용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아랍문화와 이슬람 종교를 기반으로 한 평화교육센터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저녁부터 그 자신감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까지 절망하면 안되는데...”하면서 스스로를 부추겨 보지만, 힘이 들군요.

어제 저녁에 한 기자가 그러더군요. “여기서 도대체 누구를 돕겠다는거냐 지금 보고 있지 않느냐 목숨걸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도 조만간 나갈거다. 제발 빨리 여기서 떠나라.” 모두들 이라크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 기자들마저 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떠나지 않으면 언젠가 여기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나면 소위 ‘연합군’이라고 불리는 침략군과 무장 저항세력 그리고 속절없이 죽어갈 이라크 민간인들만 남겠죠.

운이 좋아 여기서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여기서 겪었던 아픈 기억들을 또다시 모두 끄집어내서 증언하는 일을 해야겠죠. 그 역시 죽음만큼 힘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시 기억하기 싫을만큼 아픈 기억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려고 인터넷 카페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폭발음이 들리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건 정도로 들리던 폭발음이 이제는 하루에도 몇번씩 들립니다. 이번 폭발에서는 또 몇사람이 죽어 갔을까요.

분노 대신 두려움 커져
어제 폭발사고 직후에, 폭발지점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변함없이 장사를 하고 있더군요. 사람들이 이런 폭발과 죽음에 이제는 무감각해져가고 있습니다. 몇사람 붙들고 “차라리 분노해라. 분노보다 무감각이 더 무서운거다”라고 호소해 보지만, 소용없는 짓입니다. 사실 저도 점점 무감각해져 가고 있으니까요. 두렵습니다. 이렇게 계속 무감각해져가다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서도 더이상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될까봐서요. 두려움 속에서 몇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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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8-06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들 읽고 퍼가고 전하시길,
한상진 씨의 노력이 의미있는 정치적 결과로 나타나도록 ......
 


 

 

동성애자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는 법원
     
인천지법, 동성애자 커플 사실혼 관계 불인정

 이이내 기자
 2004-08-02 01:04:38


최근 동성애자 커플의 사실혼 관계에 대해 재판부가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한 사건이 있었다. 소송을 제기한 여성은 42세의 레즈비언으로, 상대 여성과 20여 년간 여느 이성애자 부부와 다를 바 없이 함께 생활해 왔고 재산을 함께 모으고 관리해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대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인해 관계 해소를 원했으며, 이에 따라 파트너 여성을 상대로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법원은 이들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소송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우리 사법부가 기본적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결정이다. 법적 부부가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부부와 마찬가지로 생활하고 있는 이성애자 동거 커플의 경우, 법원은 ‘사실혼 관계’를 인정해주고 있다. 그런데 분명히 존재하는 동성애자의 사실혼 관계가 사법기관에 의해 부정되었다는 것은, 한국의 사법기구가 동성애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국가가 동성애자를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시민권을 가진 자’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7월 27일 인천지방법원 제2가사부가 내린 판결 이후 국내 여러 성적소수자 인권운동단체들이 항의성명을 냈다. 성명서의 내용들을 보면, 이번 사법부의 판결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조항과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애자 커플의 사실혼 관계는 인정해도, 동성애자 커플의 사실혼 관계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분명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이다.

동성애자를 이성애자와 마찬가지의 권리의 주체로 보지 않는 시각으로부터 비롯된 이번 판결을 보며, 사회문화적 차원에서건 법제도적 차원에서건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고민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을 뼈아프게 느끼게 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 인권향상을 위한 실로 어마어마한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번 소송을 제기한 여성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자. 그녀는 자신과 파트너의 ‘성정체성’ 때문에, ‘파트너에 의한 구타’라는 가정폭력 피해자로서 온당히 받아야 마땅한 법적 권리보장을 받지 못하게 됐다. 폭력범죄에 관해 소송한 것은 아니지만, 가정폭력을 견딜 수 없어 사실혼 관계를 청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 피해자가 사실혼 관계 해소로 인한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을 때, 법원이 내려야 할 결정은 과연 무엇인가.

재판부는 소송인의 상황과 구체적인 요구들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혼인이라 함은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는 남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며, 동성간의 동거관계는 사회관념상 가족질서적인 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기 때문에 법률혼에 준하는 보호를 할 수 없다”고 했을 뿐이다. 재판부는 그들의 이성애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동성애자의 인권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가정폭력 피해를 방치하는 결과마저 낳은 것이다.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은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등 어떤 피해에 대해 법적 절차를 통해 구제 받고자 할 때, 유관법률과 기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고하거나 소송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상담이나 조사, 소송 과정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은 헌법이 정하고 있는 권리 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동성커플의 ‘사실혼’ 관계를 무시한 이번 판결을 통해, 실상 삶의 전반에 걸쳐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총체적으로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우리 법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법제정과 적용이 필요한 것이지, 성소수자를 차별해 온 ‘사회통념’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이 그들 위에 군림해도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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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8-06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애자를 이성애자와 마찬가지의 권리의 주체로 보지 않는 시각으로부터 비롯된 이번 판결을 보며, 사회문화적 차원에서건 법제도적 차원에서건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고민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을 뼈아프게 느끼게 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 인권향상을 위한 실로 어마어마한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balmas 2004-08-06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 참 ...
어쨌든 가십거리로나마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는 건 이 문제가 그만큼 우리사회에서 현재화되고 있다는 한 가지 방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관심들을 교정하고,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증할 수 있는 방안들(사실은 엄청난 실천적, 이론적 쟁점들을 담고 있는 일인데)을 모색해보는 게 우리들의 과제겠죠.

balmas 2004-08-06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남자 맞나???^^
 

추모, 정은임 FILM2.0(2003년 10월, 149호) '돌아온 DJ 정은임'
[필름 2.0 2004-08-04 22:40]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4일 결국 숨을 거뒀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2004년 8월 4일 저녁, 5천 여명이 넘게 다녀간 그녀의 미니홈피를 비롯해 각종 포털 사이트에는 수많은 추모 댓글들이 붙고 있다. 이젠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게된 정은임 아나운서를 추모하며 지난해 10월 방송복귀 소감을 밝혔던 FILM2.0 기사를 다시 싣는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8년 6개월 만에 MBC FM 영화음악 진행을 다시 맡는다. 그 소식이 전해진 10월 23일은 1995년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이 막을 내린 지 꼭 3,117일째 되는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그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과연 축하할 일일까요?"

복귀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 여의도 MBC 본사 7층 라디오 스튜디오 앞에서 만난 정은임은 지나는 사람들이 건네는 축하 인사에 꼬박꼬박 그렇게 되묻고 있었다. "당연히 부담되죠. 복귀라면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건데. 지금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때'라면 1992년 11월 2일에 첫 방송을 시작해 1995년 4월 1일 정영음의 마지막 전파를 쏘아올리던 때를 말한다. 소녀 취향의 닭살 멘트가 난무하는 심야 방송에서 4.3 제주 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강제 철거의 부당함에 격분하는 오프닝 멘트가 화제를 모은 건 당연했다. 볼세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와 시위 현장에서 대학생들이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음악이라며 틀어주던 이 프로그램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듣게 해준 방송이었다.

2년 반 만에 맞이한 드라마틱한 마지막 방송. 이 때부터 독실한 애청자들이 정영음을 실패한 혁명으로, 정은임을 요절한 게릴라로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라고 눈물의 작별 인사를 고하던 마지막 방송은 MP3 파일로 저장되어 지금도 인터넷을 떠돈다.

"안 그래도 내가 그랬지. 정은임은 전설로 남겨두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고.” 정은임의 복귀를 축하하는 점심을 함께하며 홍동식 편성부장(당시 정영음 PD)은 끝내 자신의 충고를 새겨 듣지 않은 담당 PD를 은근히 대견해 했다. 그러면서 오는 2005년 정영음 종영 10주년을 맞아 화려하게 복귀시키려던 자기 복안이 틀어졌다며 정은임의 때이른(?) 복귀를 아쉬워하기도 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평론가 정성일은 "지금도 마치 커밍아웃하듯이 '저도 한때 정영음의 청취자였습니다'라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만난다"고 말한다. 정은임은 그렇게 청취자들 사이에 은밀한 연대의식을 고취시키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설익은 대학생의 세계관으로 방송하고"도 박수받던 호시절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제 마이크 너머엔 영화에 담긴 진심을 믿는 충성스런 관객들 대신 박스오피스 성적을 더 믿는 변덕쟁이 관객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페널티 킥을 맞이하는 골기퍼처럼, 지금 정은임은 11년 전 입사 4개월 만에 덜컥 영화음악 진행을 맡던 그 때처럼 불안하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엔 너무 몰라서 불안했고 지금은 너무 잘 알아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모두들 군대 가 있는 어느 선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뭐, 완전히 신화적 인물이더라고요. 짱돌의 달인에, 강철 같은 사상. 제가 4학년 때 그 선배가 복학하는데 아, 그 신화가 산산히 깨졌다는거 아닙니까. 모든 신화의 속성이란 다 그런 거예요."

92년 11월 2일 첫 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정은임은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 방송국이라는 직장에 대해 내심 실망하고 있었다. MBC 파업에 즈음해 입사한 이 수습 사원은 파업에 참여한 선배들을 대신해 일기 예보에 투입됐다. 찌푸린 날씨를 예보할 때면 잔뜩 먹구름이 끼여 있는 자신의 미래도 함께 예보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의 중심에서 호흡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방송은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저 순진한 대학생 마인드였음이 속속 드러나는 순간, 87학번 아나운서의 가슴속에 회의가 밀려들었다. 특히 '앵무새'라고 지탄받던 아나운서의 한계가 뼈아팠다. 못다 이룬 기자의 꿈을 실현할 대안이라고 믿었던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머지 않아 '아나운서' 정은임은 기자가 되었다면 절대 누리지 못했을 꿈같은 시절을 만끽하게 된다.

종영 전까지 매주 한 통씩 꼬박꼬박, 70여 통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내 제작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구의 서영무(38)씨와 숙직하는 ‘은임이 누나’와 밤새 수화기를 붙들고 영화를 논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민철호(33)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혈 청취자 중 빨리 기억나는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직관으로 청소년의 가슴을 할퀴던 정은임을 모두가 예뻐한 건 아니었다. 95년 4월 1일, 정영음은 봄 개편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정은임의 인생에도 개편의 계절이 도래했다.

영화음악 종영 후 몇몇 프로그램을 오가며 영화 코너에 얼굴을 비추던 정은임은 98년, 결혼과 동시에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정영음의 마지막 방송에서 영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던 속내를 털어놓은 터였다. 항간에는 영화 연출을 공부하러 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로부터 2년 뒤. 가슴속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안고 팔에는 아이를 안고, 정은임이 돌아왔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그게요, 아이 참. 그러니까 막상 가보니까 영화학과가 아닌거예요. 미디어학과인 거 있죠?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거야" 뭘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하는 건 정은임의 특기다.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도 그랬고, 정영음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그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팔자에도 없는 경영학 수업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비로소 영화라는 텍스트 바깥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세계관을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거창한 자평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2년이나 유학하고 돌아온 사원에게 1년 내내 이렇다 할 프로그램 하나 맡기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영화 볼 시간은 자꾸 줄어들었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남편을 남겨두고 먼저 들어와 혼자 아이를 키우니까 그럴 수밖에.

"영화를 보지 못하는 환경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밤 12시까지 아이 뒤치다꺼리 하더라도 꼭 새벽 3시까지 영화 1~2편씩 보고 나서 잤어요" 연애 시절 유학중인 남편과 6개월에 한번씩 만날 때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건만, 영화는 아니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지 못하며 사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정은임은 지금도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가 가까운 극장으로 간다. 보고 싶은 영화를 빨리 보지 못하면 목에 가시가 돋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이 불치병은 정은임의 아버지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 부친은 어린 정은임의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를 일삼았다. 고등학교 때 정은임의 증세가 더 심해졌다. TV 영화를 빼놓지 않고 보고 난 후 영화 제목, 제작 연도, 제작사, 남녀 주인공, 영화 줄거리, 그리고 나름의 감상을 공책에 빼곡히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영향을 받아(?) 들어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학부 시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앞에 잠시 흥미를 잃기 전까지 그의 이런 식의 영화 보기는 계속됐다.

정은임을 열혈 영화광의 세계로 최초로 인도한 안내자는 사실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약사 엄마를 대신해 집안 일을 돌봐주던 가정부 언니였다. 장롱 가득 영화 잡지를 쌓아놓고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는 가정부 언니를 보고 어린 정은임은 생각했다. "가정부가 되면 참 좋은 거구나, 영화도 많이 보고 과자도 마음대로 먹고, 참 좋은 직업이구나.” 가정부가 되고 싶다는 장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정은임은 그 때부터 영화 사랑의 한 길을 걷게 된다.

"연변에서 오신 아줌마가 먹고 자면서 애를 봐주세요. 근데, 웃긴 게 제가 난생처음 사용자가 된 거잖아요. 그 미묘한 갈등, 임금 인상을 둘러싼 대립을 겪어요. 근데 저도 별 수 없이 기만적인 기업들이 쓰는 ‘패밀리’ 논리를 내세우게 되더라고요. 우린 한 가족이다, 이러면서 인간적 정을 내세워 무마하는 거예요"

입사 11년 차 정은임의 나이도 벌써 서른여섯이다. 일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 '브레인 서바이버' 아나운서 특집에 출연했더라면 입사 동기 김지은 아나운서와 함께 가운뎃줄, 일명 낙엽줄에 앉을 나이다. 이제 그는 정영음을 진행하던 시절 ‘내 인생의 영화’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던 <로저와 나>를 얼마 전 슬그머니 목록에서 빼버렸다. 그때는 거대 자본가에게 끊임없이 문전박대당하는 감독(마이클 무어)이 존경스러웠지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까 재기발랄함과 무모함,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정은임은 신입 아나운서 시절 한 인터뷰에서 어느 간부가 "정은임은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다"고 말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었다. 당시 한 선배가 그 간부를 지칭해 “그 인간은 세모와 네모밖에 없다"고 말한 것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정은임에게 여전히 당신에겐 동그라미와 가위표밖에 없느냐고 물었다. 정은임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날카로운 것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연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남편이 돈 많이 벌어서 재단이나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란다.

잃어버린 줄 알고 새로 신청하고 또 잃어버린 줄 알고 신청해 현재 주민등록증만 4장을 갖고 있을 만큼 제 물건을 간수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정은임은 입사 당시 품은 초심만큼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올해 MBC노조 여성부장직을 맡았다. 직장내 탁아소 설립이 당면 과제다. 또한 여전히 노조 노래패 소속이기도 하다. 최근 노조내 그룹 사운드의 공연을 보고 의기소침해 있긴 하지만.

그가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다음 카페 '정은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한때 정은임 복귀 추진 모임(이하 정추임)이 결성될 만큼 열성 청취자를 거느린 프로그램의 종영 이후 8년. 사실상 복귀 운동을 포기하고 간간이 서로의 안부나 묻던 회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제 살을 꼬집어 보겠다는 글이 올랐고 벌써 꼬집어 봤는데 꿈은 아니라는 리플이 달렸다. 복귀 후 첫 방송 전날인 10월 19일 저녁 '정영음 부활 전야 정모'를 열기로 하면서 카페의 축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이 카페 회원이면서 그 옛날 숙직하는 정은임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애청자 민철호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정은임 개인의 복귀가 고마운 게 아니라 진지하게 영화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부활하는 게 고마운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 70통의 주인공 대구의 서영무(38)씨는 "그동안 정은임씨도 변했겠지만 듣는 우리도 많이 변했다"면서 그냥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투사(鬪士) 정은임이 아니라 삶을 투사(透寫)하는 영화 이야기를 들려줄 인간 정은임일 뿐이다.

정영음이 막을 내린 지 3,119일째 되는 지난 10월 15일. 게시판에 오른 한 청취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어린 감수성을 자극하고, 때로는 쓰다듬어주던 그 라디오, 지금은 낡은 옷가지들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낡은 라디오를 창고에서 꺼내 깨끗이 사과하고는 탁탁, 경쾌하게 먼지를 털어내야겠습니다." 부디 그래주기를.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와 함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탁탁, 경쾌하게 털어내주길, 정은임은 바라고 있다.

사진 조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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