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3)

 지난 두 차례에 걸친 금동반가사유상을 통하여 나름대로 미적 기준에 따른 감상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가지 문화재에 대한 미적 감상기준이 있지만 반가사유상이 주는 미소는 정말로 오묘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가사유상이 국내에는 지천에 널려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각도 어찌나 잘 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방금 땅속에서 꺼낸듯 온몸에는 황녹을 입고 나타난 금동반가사유상... 이게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미륵불은 지난번에 말씀드린대로 56억 7천만년후에 중생구제를 위해 나타날 미래불이며 메시아이고, 또 구세주입니다. 56억 7천만년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계산이 되지 않지만 하여간 먼 미래에 중생 구제를 위해 나타난다니 기독교나 불교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구제가 될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법상종의 주불로서 주전인 미륵전이나 용화전에 모셔지는 불상으로 중국에서 다양한 크기의 반가사유상이 수입이 되고 있는것입니다.


 좌측의 반가사유상은 어느날 밤에 급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혹시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확인을 하기 위해 먼길을 달려서 확인을 해야했던 반가사유상입니다.

  밤 10시경 청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주의 과수원에서 반가사유상이 출토가 되었는데 6억원에 거래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연락을 받고 속으로는 가짜일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약간은 기대도 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다른곳도 아닌 경주의 과수원에서 많은 비가 온 후에 땅밑에서 드러나는 바람에 발견이 되었다는 말은 "정말 또 다른 반가사유상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서울에서 경주가 바로 이웃도 아닌데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밤 11시경에 차를 몰았습니다. 청주 I/C에서 일행을 만나기로 하고 무조건 달리는 제 마음속에는 정말 진짜라면 세상이 떠들썩할것이라는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청주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동안 내내 "제발 진품이기만 해라..."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경주까지는 너무 먼 거리라서 연락을 하여 칠곡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왜관 톨게이트에서 차를 돌려 칠곡 휴게소로 향했습니다. 칠곡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가 되어서였습니다. 경주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반가사유상을 봉고차의 뒤에 있는 짐칸에서 꺼내는 것이었는데 컴컴한 휴게소의 한 쪽에서 차에서 내려지는 반가사유상을 보며 기대감으로 가슴은 들 떠 있었습니다.

  가져간 손전등으로 요모조모를 살펴보니 이 불상은 가짜였습니다. 적어도 만들어서 3년 정도는 땅속에 뭍어두고 화학비료를 부어 녹을 입힌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대를 하기는 했지만 그 확율은 몇 십만분의 일 정도였습니다. 만약 진품이라면 금액을 정하기도 어렵거니와 최소 100억대가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품이라고 밝혀지게 되는 경우에는 학계는 물론이고 정확한 발굴 위치를 알 수 있어 신라것인지 백제것인지의 논란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측은 얼굴부분입니다. 물론 가짜의 얼굴부분인데 진품과 거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머리에 쓴 삼산관이나 얼굴 표정도 진짜와 거의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불상에는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진품에서 보여주듯 겨우 손가락 하나가 얼굴에 점으로 닿아 있는데 이 불상은 세 개의 손가락이 얼굴에 닿아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진품 반가사유상과 같은 자세에서 손가락이 얼굴에 닿으려면 허리를 많이 구부리거나 손가락이 아주 길다거나, 또는 팔의 길이가 길지 않으면 진품 반가사유상과 같은 자세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진품 반가사유상처럼 한번 해 보시면 얼굴에 손가락 하나(검지)가 점으로 닿으려면 허리를 상당히 구부려야 하는데 실은 불상에서는 그리 많이 구부리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국보가 가진 아름다움입니다. 이 불상을 제작한 장인은 그 부자연스러운 구부림을 허리를 잘룩하게 함으로써 완벽하게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며 반가사유상은 허리 곡선만으로도 아름다운 선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보로 지정된 반가사유상의 축소상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보인 반가사유상은 한 때 잠시 우리나라를 떠난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미술 오천년展>이라는 전시회를 위한 해외 나들이였습니다. 그 때 진품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축소상을 몇 개 만들어 관련국의 국가원수나 중요인사에게 선물을 한적이 있었는데 제가 운이 좋아서인지 그 중 하나를 소장하게 되었는데 책꽂이 앞에 놓여있는 30cm가 조금 넘는 반가사유상은 보면 볼수록 그 오묘한 미소가 신비스럽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진품도 아닌 모조품으로 축소형이지만 원형 그대로를 축소한지라 원형을 보는 느낌과 크기만 다를뿐 똑 같은 느낌이 가슴속에 와 닿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굴은 진품의 미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녹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국보가 보여주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없습니다.

  저는 이 불상을 팔겠다고 가져온 사람을 추궁했습니다. 우선은 문화재보호법상에 명시되어 있는 문화재의 거래위반과 신고의무 불이행, 그리고 원형의 변경 등은 바로 형사범으로 처벌이 됨을 알려주었습니다. 가짜라는 말은 안하고 발견 동기부터 물어보니 큰 비가 온 뒤에 과수원에 가보니 뭔가 머리부분이 보여 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런 불상이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수원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니 1년전에 구입을 했다는 것입니다. 진짜 그 사람이 1년전에 구입을 했는지는 또는 이 전의 소유주가 뭍어두었던 것이 큰 비에 흙이 쓸려가면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수원은 사실 이런 금동불상이나 청동불상을 뭍어두고 녹을 입히기에 딱 좋은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과수의 종류가 어떻하든 매번 비료와 농약을 주니 이 약품이 당연히 밑의 흙으로 스며들게 될것이며 밑에 뭍어 둔 이런 불상은 자연스러운 화학반응에 의하여 녹이 슬게되니 점점 녹이 많이 슬면 파내고는 우연치 않게 발견한 불상이라고 하면 자칫 속아넘어가기 쉬운 것이지요. 제가 가짜임을 밝히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다그치니 정말 이 사람은 1년전에 구입을 했고 큰 비가 온 뒤에 발견하여 발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그 사람의 봉고차에는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도 동승을 하였었는데 아마도 우연치 않게 발견하게 되어 한 몫을 잡았다고 생각하여 같이 동행을 하였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불상이 왜 가짜인지를 설명을 해 주고, 주변의 또 다른 상황도 알려달라고 했더니만 자기네 과수원에서 있었던 일을 대강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발견이 되니 우선은 깜짝 놀랐고, 혹시 이 과수원 지역이 예전에 신라시대의 절 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금속탐지기를 빌려와서 과수원 지역을 탐지해보니 이런 물체가 7개 정도가 더 있었답니다.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있어 캐어보니 그것은 종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신이 산 과수원을 황금밭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로 판매하고자 했던 불상이 가짜라고 판명되니 허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먼저 주인이나 그와 관련된 사람이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기 위해 뭍어두었던 것인데 큰 비로 인하여 밝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가짜 불상을 무수히 많이 보았는데, 특이한것은 명문이 있는 불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명문에 의하면 불상의 조성연대는 1700년대였습니다. 물론 이 명문도 일부러 양각한것으로 판단되지만 중국인들이 무엇때문에 우리의 국보를 공산품처럼 마구 찍어내는지는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것도 동일한 크기가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아주 큰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중국을 방문하여 제작 과정을 한 번 정도 살펴 볼 예정입니다만,  이러한 중국산 반가사유상은 미륵종의 본산인 법상종의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며, 경기도 안성의 쌍미륵사에는 다양한 크기의 반가사유상을 중국에서 들여와 보관하고 있으니 가까운 곳에 계시다면 한 번 정도 들려보시기 바랍니다.

  반가사유상이 가짜임이 밝혀진 후에 오는 피로감은 내려갈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해야하는데 결국은 가짜를 보려고 야밤에 잠도 못자고 그 먼길을 다녀 온것인데, 만약 진품이었다면 아마도 피곤이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설령 귀찮아서...또는 멀어서...라는 이유로 확인을 하지 않는다면 만에 하나일수도 있는 진품을 놓치게 되기에 제보가 들어오면 기를 쓰고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청주의 제가 아는 지인에게 거래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기에 구매의사를 가졌던 사람은 가짜를 비싼 금액을 들여서 사지 않게 되었는데, 만약 진품으로 속고 샀어도 이런 불상은 쉽게 세상에 들어나지 않기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 모두가 자신들의 거래품이 진품으로 알기 쉽상이지만, 문화재는 우연히 발견을 하더라도 반드시 신고를 해야하며(모든 문화재는 국가가 주인이며 다만 소유자에게 위탁관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 소장품은 예외이며 만약 거래가 성사되어 소유주가 바뀌게 되면 반드시 문화재청에 신고토록 되어 있습니다)  종종 신문에 나듯 어부가 바닷속에 그물을 담궜다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난파선의 자기류도 모두 신고를 해야 합니다. 정부에서는 신고된 문화재에 대하여는 그 가치에 따라 적정 금액을 보상해 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어떤류의 문화재가 새로 나왔다...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그것이 정말 진품이라면 그 고귀한 진품을 세상에 빛보게 하는 보람을 느끼기에 말입니다. 그러기에 진품일 확율이 무척 낮은 반가사유상 같은 경우에도 먼길을 마다않고 달려가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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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기 2013-02-1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한테 금봉불상 반가사유상 3개있습니다 감정좀 부딱함니다 전화 213-222-5552

JAMES 2013-02-1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화 213-222-5552
 

 

'정치적 외로움'

 

몇년 전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한의 ‘미녀’응원단에 열광하는 남한 남성들을 보면서 난 정신 분열 상태였다. 반북 이데올로기가 극복되기를 열망하지만, 그 방법이 남성 주체의 시선과 욕망을 위한 여성의 몸이라니…. 그런 식으로라면, ‘못생긴’ 북한 사람이 오면 반북 정서는 더 악화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맹위를 떨치는 억압 이념 중 하나는 외모주의일 것이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영화처럼, 간첩이나 페미니스트도 ‘예쁘면’ 용서가 되는 사회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자면서 ‘진보’적이기는 매우 어렵다. 아마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지방’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존의 진보 개념이 이들의 고통을 사소하고 부차적인 문제로 비정치화, 비가시화 해왔기 때문이다.

며칠 전 ‘청와대 패러디’ 사건에서도 난 몹시 괴로웠다. 행정 수도 이전에 찬성하면서도, 그 패러디에 반대하는 나는 설 자리가 없었다. 외로웠다. 이 사건에 관한 나의 어떠한 의견도 여성주의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 사건을 비판하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요, 침묵하면 현 정권을 옹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전 제주도 도지사의 성추행 사건도, 성별 권력의 문제는 사라지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싸움이 되었던 것처럼, 남성의 여성폭력은 피해 여성이 속한 남성 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의미화된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가 남성과 남성의 갈등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전선은 좌/우, 진보/보수 등 남성들 간의 투쟁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나의 정치적 입장은 그러한 전선 외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남성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원, 활용된다.

사실, 그 패러디는 패러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패러디는 기존 언어의 존재를 전제하는데, 그 언어를 남녀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패러디 효과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 사건은 남성에게는 패러디지만, 여성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들이 이 사건에 왜 그토록 분노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성애자 남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사적인 것이지만, 여성이나 동성애자에게 성은 너무나 정치적인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성적인 존재지만, 여성에게 성적인 이미지가 부과되면 남성의 경우와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대상이 되면, 가장 낮은 계급의 남성이라도 모든 여성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남성 섹슈얼리티가 여성에게 그토록 위협적인 권력인 이유다. 이 패러디의 정치학은 20여명을 살해했다는 연쇄 살인 사건과 연속선상에 있다. 이 사건의 용의자도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살해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회 문제가 한 가지 원인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을 때, 단 하나의 정치적 올바름만을 주장하게 된다. 원래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말 자체가,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권 시절, 올바르게 살기 힘들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약간 비웃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다. 근대의 본질이 ‘실제에 대한 열정’이라면, 결국 현실은 이미 ‘포스트모던’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실은 언어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복잡한 이유들로 매 순간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유일한 올바름이 아니라 다원적인 올바름이 요구된다. 남성과 다른 올바름의 판단 기준을 가진 여성의 입장과 이해가 정치적인 것으로 인정될 때, 실천은 풍요로워지고 진보는 폭넓어진다. 이번 패러디 사건처럼, 남성은 피해여성이 소속한 집단에 따라 혹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따라 투쟁 여부를 결정하지만, 여성은 피해 여성이 ‘강금실’이든 ‘박근혜’이든, ‘성매매 피해’ 여성이든 ‘일반’ 여성이든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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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7월8일은 이북의 김일성 주석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훌쩍 흘렀건만, 우리 사회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어릴 때부터 김일성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배워왔는데, 이미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났건만 통일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니 그가 적어도 통일의 걸림돌은 아니었다는 점은 확인된 것일까?

‘김일성 가짜설’이 고개 숙인 이유


△ 사진/ AP연합

1987년 6월항쟁 이후 여러 민족민주 운동단체들과 대학가에서는 한국 사회에 관한 이러저러한 교양강좌나 학교가 많이 개설됐다. 당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방송 프로그램도 없었기 때문에 현대사에 대한 욕구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모든 교양강좌나 민족민주 운동단체가 개설한 학교에는 현대사 강좌가 빠짐없이 들어가게 되었다. 나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업의 일환으로 청년학교를 개설하고 거기서 상근하게 되었는데, 현대사 강의 의뢰가 오면 ‘동업자’로서 의리 때문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여기저기 바쁘게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어디 가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박정희 얘기를 하든, 학생운동사를 강의하든, 해방 직후의 민중운동에 대해 얘기하든, 한국 군부의 형성사를 강의하든 상관없이- 첫 번째 나오는 질문은 신기하리만큼 일정했다. “김일성, 진짜예요, 가짜예요?”

1999년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강단에 섰을 때만 해도 학생들은 모두 ‘가짜 김일성설’- <한겨레21> 381호의 역사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을 배우며, 그렇게 믿고 자란 세대였다. 그런데 2002년경부터 ‘가짜 김일성설’을 처음 들어본다는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올해에는 그 수가 절반이 넘는 것 같다. ‘김일성 가짜설’을 처음 들어보는 학생이 늘어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김일성 가짜설 같은 천박한 이야기를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일이 적어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구분단 세력 입장에서 볼 때 살아 있는 김일성에 비해 죽은 김일성은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황 히로히토(裕仁)가 죽었을 때 총리를 조문 사절로 보내는 것에는 아무 말이 없던 한국 사회는 1994년 7월8일 김일성의 죽음으로 ‘조문 파동’에 휩싸이고 말았다. 보름 정도 뒤면 김일성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던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있던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승계할 것이 이미 기정사실화된 지 오래인데, 김영삼이 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할 것이었다면 상주이기도 한 김정일을 만나 어떤 말로 첫인사를 하려 했을까? 정상회담을 하려던 상대방이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떴는데, 당시 한국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상사태에 당황하지 말고 밟아야 할 조치를 규정해놓은 프로그램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유고시에 취할 조치를 규정해놓은 이 프로그램이 혹시 실미도 부대를 운영하던 시절에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남쪽의 특수부대가 북쪽의 최고지도자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북쪽이 군사적 보복을 취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이었다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에 이어 조문 파동이 일자, 북의 태도는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조문 파동이 있고 한 2년쯤 지나서 내가 공부하고 있던 워싱턴대학에도 이북 사람들이 방문하여 공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핵 문제와 조-미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된 질문에 능란한 화술로 여유만만하게 답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여부에 대해 묻자 갑자기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딱 한마디 했다. “우리 조선 옛말에 절대로 상종하지 못할 놈을 상갓집 앞에서 춤추는 놈이라 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김영삼이 물러나고 김대중이 새로이 대통령이 된 뒤에야 추진될 수 있었다.

김일성,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오죽하면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길이 없는 ‘가짜 김일성설’이 나왔겠는가? 갈라진 조국의 한쪽에선 그는 민족의 태양인 반면, 다른 한쪽에선 극악무도한 전범이었다. 한쪽에서는 그를 더 이상 떠받들 수 없을 만큼 떠받들었던 반면, 한쪽에서는 무슨 일만 있으면 화형식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 1930년대에 우리 민족은 분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때도 조선 사람임에도 김일성을 공비, 폭도로 매도하고 그를 토벌하러 다닌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갈린 것은 아니다.

그는 과연 ‘괴뢰’였는가


△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국경지대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김일성 장군처럼 자라라” 하고 빌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우리 겨레의 염원에 대해서 무한한 용기와 기대, 그리고 신념을 솟구쳐주는 원천이며 그 상징”이었다. 이런 평가가 사실이라면 그런 인물에게 ‘민족의 태양’이라는 호칭은 과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이북의 김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북의 김일성을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표인 이명영이 진짜 김일성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1970년대에는 술 한잔 걸치고 어릴 때 인민군에게 배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흥얼대던 사람들은 죄다 ‘막걸리반공법’에 걸려 감옥에 가야 했다. 심지어 무허가 판잣집을 때려 부수는 철거반원을 향해 “야, 이 김일성보다 나쁜 놈아”라고 외쳤던 아저씨도 반공법의 고무찬양죄- 지금은 국가보안법 속에 버티고 있고, 말 많은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잡아들인 조항도 바로 이 조항이다- 로 걸려들었다.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란 말이 어떻게 고무찬양이 되냐고? 김일성은 인류가 출현한 이후 가장 나쁜 놈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을 감히 김일성보다 나쁜 놈이라 하였으니 그만큼 김일성을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논리는 물론 좋은 학교 나와서- 영문법에서 최상급과 비교급을 같이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제대로 배웠음에 틀림없다- 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검사들이 만들어냈다. 다행히 이 사람은 1970년 8월 대법원에서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과장된 표현을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북괴의 활동을 고무하는 등 그를 이롭게 하려는 범의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기는 하였지만 유치장, 구치소 구경하며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이북에서 “김일성보다 나쁜 놈아”라고 욕을 했다면 감옥에 가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남쪽에서도 정반대의 이유로 무사하지 못했다. 이런 일을 과거의 코미디라 치부하며 웃어버리는 것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김일성은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던 1937년 보천보전투를 통해 혜성같이 나타났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에서는 민족의 태양에서 괴뢰집단의 괴수로 전락했다. 괴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꼭두각시란 뜻이다. 제 민족을 가리키는 말 중에서 가장 고약한 괴뢰란 말을 남과 북은 서로에게 마구 써먹었다. 지금도 수구언론은 ‘국방백서’가 ‘북괴’를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있다. 김일성을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로 모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남쪽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1950년대 중반부터 주체를 앞세우고, 자주노선을 추구했음에도 ‘괴뢰’란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 ‘꼭두각시’는 소련의 해체로 자신을 조종할 배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혼자서 춤을 추는 ‘괴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괴뢰였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의 웃기는 폄하

김일성은 참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항일무장 투쟁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아니, 모든 조선 사람의- 소중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항일무장 투쟁 시절 이래 김일성의 꿈은 조선민족 누구나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었다. 쌀밥에 고깃국은 김일성에게는 사회주의 건설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춘 직후부터 그를 어버이로 섬기던 이북 주민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일치될 수 없다. 아니, 남쪽 사회 내부에서도 김일성을 놓고 평가가 일치할 수 없다.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해도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데, 그는 분단과 전쟁을 거쳐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첨예한 남북 대결의 주역이었다. 이북의 역사가들은 항일영웅 김일성의 업적을 너무나 과대포장했기에, 이북 밖의 학자들은 김일성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이북 학자들에 비하면 그를 깎아내린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또 그 주된 원인을 설사 미국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이북의 경제난과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김일성에 대한 평가가 남쪽 사회 내에서 갈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단 하룻밤이라도 한데서 새어본 적이 없는 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단 한번도 발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자들이,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 속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샌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 항일투사 김일성에 대한 폄하는 곧 1930년대 후반 이래의 우리의 항일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폄하가 된다.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규탄하는 일은 친일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탈출구였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25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 우리가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일제의 압제하에서 누가 일제의 앞잡이였고, 누가 항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군대를 동원한 자가 모두 뒤집어쓰는 그런 게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도 상관이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민족의 태양에서 소련의 괴뢰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전범으로 추락해갔다. 분단된 조국에서 그가 계속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가 북쪽에 있는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형제들의 수령,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양은, 아니 전 이북이 흐느꼈다. 물론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착한 백성들은 연도에 나가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똑같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 독재자들의 세뇌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가족국가의 가부장이었던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의사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 김일성 주석이 10년 전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이북이 흐느꼈다.


△ 남한 언론은 조문논쟁을 일으키며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려놓았다.

귀족영웅 아닌 자수성가형 민족영웅

김정일의 출생을 두고는 이북의 이데올로기들이 백두산에 샛별이 솟았다느니 하면서 여러 가지 초자연적 현상을 늘어놓지만, 김일성의 출생은 그렇게 미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영웅이었지, 출생부터 신비스럽게 미화돼야 할 귀족영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제 동원이 극심해지던 때 사람들은 김일성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으로 가버렸고, 그의 활동을 공비의 살인·방화·약탈 만행으로 폄하하면서도 전해주었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던 차에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나타났다. 그것은 죽은 줄 알았던 홍길동이나 홍경래, 또는 로빈 후드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어 그의 이름으로 땅을 나누어주고, 각종 조직을 만들어 주민들을 참여시켰다.

김일성이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처음 내린 정령은 연필 생산에 관한 것이었다. 배우지 못한 한을 품은 사람들을 김일성은 감동시킬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실시된 개혁을 통해 수백년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봐도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을 갖게 되었고, 인민위원회다 농민동맹이다 여성동맹이다 하는 각종 조직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 석자를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이북의 역사가들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일본군을 삼대 쓸 듯 물리치며 군사적 해방을 쟁취한 짜릿한 순간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세계사에서 이 수준의 혁명을 달성한 지도자는 몇 안 된다- 분명히 혁명의 창건자로서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혁명의 창건자, 이는 스탈린이나 덩샤오핑도 넘볼 수 없는, 한 나라에서 오직 한명의 혁명가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 덩샤오핑과 만나는 모습.(사진/ AP연합)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였지만, 또한 민족주의자였다. 1920년대나 1930년대에 소련인이 아니라면,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소련의 권위는 소련이 잘해서 생겼다기보다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대의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각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제기하자, 국제주의자를 표방하는 각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소련을 보위하는 것이 되었다.

민족주의자, 그리고 실용주의자

민족주의자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 땅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김일성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과 갈등, 특히 조선인 항일투사가 최소 500명 이상 희생된 민생단 사건을 통해 남다른 민족주의를 체득할 수 있었다. 전후의 공산국가 지도자로서는 특이하게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감옥을 모두 체험한 김일성은 약소 공산국의 지도자 수업을 온몸으로 단단히 치렀다. 원래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지의 전유물로 보면서 비판해왔고, 이북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북의 평가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전복’이라 부를 만큼 달라졌다. 종래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면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이북은 1999년에 간행된 조선대백과사전에서 민족주의는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긍정적으로 보았다.

민족주의에 대한 사전상의 정의의 변화는 김일성 자신이 민족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 김정일의 ‘조선민족제일주의론의’ 제기나 1990년대에 들어와 단군릉을 거대하게 지은 것도 다 민족주의자로서 김일성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아예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 앞에도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붙였지만, 공산주의 앞에도 역시 ‘진정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국가 단위로 진행되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하에서 식민지 나라들에서의 진정한 민족주의와 진정한 공산주의 사이에는 사실상 깊은 심연도 차이도 없다. … 진정한 공산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이며 또 진정한 민족주의자도 참다운 애국자라고 보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공산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


△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 상상도.

김일성은 1992년 자신의 80살 생일을 맞이하여 <세기와 더불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펴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고록은 1945년 항일투쟁 시기를 다루는 8권에서 중단됐다. 그는 책 제목과 관련하여 “20세기와 더불어 흘러온 나의 한생은 그대로 우리 조국과 민족이 걸어온 역사의 축도”라고 말했다. 이 회고록의 1권과 2권은 민족주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 김일성이 자신의 선배이자, 자기 아버지의 친구이자 후배들이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바치는 따뜻하며 가슴 에이는 헌사였다.

<세기와 더불어>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김일성은 20세기의 인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덩샤오핑은 쥐를 잘 잡는다면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떻냐는 흑묘백묘론을 설파하여 유명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이 그보다 25년 전에 밥만 잘 먹을 수 있으면 되었지 왼손으로 먹건 오른 손으로 먹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작은 나라 이북에서 그의 말은 법이 되고 그의 경험은 철학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와 권력을 누렸고, 유례가 없는 권력승계를 이루었다. 나도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부자간의 권력승계가 탐탁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비난만 하다 보면, 정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20년가량 북을 다스린 사실을 잊게 된다.


△ 평양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사진/ 연합)

레닌이나 호치민이 되기에는…

어버이 수령이라는 봉건적으로 보이는 권위로 무장한 그는 분명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유형의 지도자는 아니다. 대통령 씹는 것이 일상화된 남쪽의 시각으로는 장군님의 사진이 비 맞고 있다고 금방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이북 사람들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북 사람들이 보기에 저기 멀리 있는 대통령은 잘근잘근 잘도 씹어대면서 사장님은 고사하고 부장님, 과장님 앞에만 가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며 얌전히 <애모> 노래만 불러대는 우리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김일성, 그는 레닌이 되기에는 너무 오래 집권했고, 호치민이 되기에는 일가친척이 너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역사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나중에 비록 왜곡됐을지언정, 그가 세운 나라에는 분명 동학농민군의 꿈과, 의병과 독립군의 꿈과, 항일 빨치산의 꿈이 담겨 있었다. 어린 누이가 빚에 팔려 첩살이 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당 간부가 되고, 장군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그런 나라였다.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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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7-20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양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I can understand it(the relation). But is it right?

balmas 2004-07-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만에 로쟈 님이 댓글을 달아주셨군요.
그런데 질문이 좀 감이 잘 안 잡히는군요.
조금만 더 분명히 표현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

로쟈 2004-07-2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rry.^^ I think the relation is pathological (and religious). "소수의 빨치산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구성원이 건국 반세기 이후에 한국전쟁 때보다 더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 10년이란 세월은 아직 형제들의 수령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것일까?" is overestimation. He was one of the dictators in 20th century (as Park). Han's view is disappointing to me...

balmas 2004-07-2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저는 한홍구 교수의 글을 이렇게 읽었는데요.

"김일성 주석에 대한 그간의 평가, 특히 남한의 평가는 대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틀 위에서 조성된 맹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제 김일성 주석에 대한 평가는 좀더 내재적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김일성 주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매우 실용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던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였다. 둘째, 김일성 주석에 대한 평가는 50년간 초강대국인 미국과 맞서 싸워온(하지만 동시에 중국이나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북한 역사, 고난에 찬 그 역사에 대한 평가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홍구 교수의 평가는 매우 온건하고 현실주의적인 입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온건하다는 것은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관점 어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고, 현실주의적이라는 것은 통일의 관점, 그것도 통일을 실행할 행위자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저는 한 교수의 이야기에 대해 크게 시비할 만한 점은 없다고 봅니다.

김일성 주석을 독재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북한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인식론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실천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이런 분류법에는 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독재"나 "전체주의" 같은 용어들이 매우 애매하고 모호한 통념들이어서 이론적 조건들을 매우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은 가운데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실천적 관점, 다시 말해 통일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류법들은 국내외 수구반동세력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쉽게 활용당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김일성 주석이나 북한의 정치적 지향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북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참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좀더 엄밀하게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조사 없이는 발언권도 없다고 하지요), 최소한 이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것 뿐입니다. 


로쟈 2004-07-2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저는 한 교수의 이야기에 대해 크게 시비할 만한 점은 없다고 봅니다." "이런 분류법들은 국내외 수구반동세력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쉽게 활용당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Is it your tolerance or political sense?...

balmas 2004-07-23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쟈님의 질문은 때로는 선문답처럼 느껴져서 당혹스럽군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처음부터 한홍구 교수의 글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않았는데, 로쟈님은 뭔가 마땅찮은 게 있는 듯하니, 로쟈님이 한 교수의 글에 대한 생각을 한번 써보시죠. 거기에 대해 내가 무언가 답변할 만한 게 있다면, 답변을 해보죠.
 

 

미 ‘수정헌법 1조’ 힘의 뿌리

“의회는 발언의 자유, 언론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 권리, 불만을 시정하기 위해 정부에 청원하는 권리를 박탈하는 입법을 할 수 없다.”

유명한 미 수정헌법 제1조의 일부다. 건국 초기 헌법을 만들 때 시민의 기본권이 빠져있는 걸 발견한 시민 대표자들은 10개의 조항을 헌법에 새로 추가했다. 그 첫번째가 바로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이 조항이다.

20세기 들어 수많은 대법원 판례를 거치면서 이 조항은 미국 정치, 사회, 문화 발전의 한 상징이 됐다.

최근에도 이 조항에 근거한 연방대법원 판결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어린이를 인터넷 포르노로부터 보호하려는 ‘어린이온라인보호법안’에 관한 판결이다. 대법원은 이 법이 위헌이라고 판시하진 않았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으니, 정부와 의회는 다른 방식의 규제방안을 찾아보라고 권고했다.

어린이들이 인터넷 유해사이트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건 미국에서도 큰 사회문제다. 당연히 이걸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의회는 위헌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인터넷 포르노사이트를 무조건 폐쇄하는 게 아니라, 신용카드번호 입력 등 성인인증을 철저히 하도록 강제하자는 게 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수정헌법 제1조를 비켜가지 못했다.

새 법의 위헌소송을 제기한 이는 포르노업계가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인권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이다. 시민자유연맹이 옹호한 건 포르노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였다. 판결은 5대 4 한표 차이로 갈렸다.

찬성 또는 반대한 대법원 판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9명의 연방대법원 판사 중 진보 성향은 4명, 보수 성향은 5명으로 분류된다. 가장 왼쪽(진보)에 존 폴 스티븐스 판사가 있고, 가장 오른쪽(보수)에 클래런스 토마스 판사가 서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시민자유연맹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진보 쪽의 세명과 중도보수인 앤소니 케네디 판사, 그리고 가장 보수적이라는 토마스 판사였다.

사상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한국에도 없다. 그러나 그걸 지키려는 철저함에서 미국은 한국보다 저만치 앞서 가 있는 것 같다.

연방대법원 판결은 결과적으로 인터넷 포르노를 더 활개치게 할 수 있다. 판결이 옳은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표현의 자유’란 때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혼란을 용인하면서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중 일부분만 떼내 강조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요즘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많은 사안들이 그런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싶다. 지금의 미국을 있게 한 힘의 근원이 바로 수정헌법 제1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찬수 워싱턴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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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개념, 법이 규정할 필요없다
     
가족개념의 발상전환을 위하여’ 토론회

 문이정민 기자
 2004-07-04 23:57:36


“가족의 범위를 법에서 정의할 필요 있나.”

민법개정안과 건강가정기본법의 ‘가족’ 개념 규정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지난 2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가족위기? 가족변화? -가족개념의 발상전환을 위하여’ 토론회에서 이재경 교수(이화여대 여성학과)는 “가족에 대한 정의가 과연 필요한가”라고 문제 제기했다.

복지의 대상은 가족이 아닌 ‘개인’

2003년 국무회의를 통과한 민법 개정안을 보면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는 가족으로 한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 또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에선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가족 규정은 실제 현실 속의 가족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재경 교수는 “우리는 흔히 가족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잠시 주춤한다. 왜냐하면 누구를 포함시키고 누구를 제외해야 하는지 쉽게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을 그 외부와 경계가 분명한 단위로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가족을 정의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가족의 다양성 담론에 확산되면서 그동안 비정상 가족으로 범주화됐던 가족들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진정한 다양성의 수용이라기 보다 정상가족을 기준으로 한 변이 현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면서, 건강가정기본법과 민법개정안의 가족개념 규정을 비판했다. 즉 “다양성의 수사가 민법개정안의 가족범위 규정이나 건강가정기본법의 ‘건강/비건강 가족’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면, 이미 다양성은 담보되기 어렵다”는 것. 이 교수는 “가족의 범위나 경계, 가족원의 역할을 출계, 혈연, 성별 등에 근거해 규범적으로 정의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개인이 선택하고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생활이 제도적으로 지지되고 지원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면서, 가족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어떻게 정책지원 대상을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사회적 보호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즉 복지의 대상은 가족이 아닌 개인이 되어야 하며 개인을 통해 가족은 간접적으로 지원의 혜택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별 가족실태 파악부터 해야

한국여성개발원 변화순 수석연구위원은 “가족의 범위를 규범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일상적으로 가시화될 때 어떤 형태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표시했다. 또 ‘가족’을 단위로 국가의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는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향성과 당장의 시책마련 사이에는 괴리가 있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에는 보다 깊은 논쟁과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현숙 교수(상명대학교 가족복지학과)는 “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이념적 정의와 일반시민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이념적 정의는 다르다”면서, “핵가족만을 고수하는 단일개념에서 벗어나 한부모, 재혼, 입양가족을 가족의 형태로 점차 수용하는 경향을 나타내지만 여전히 동성애, 공동체가족, 친지들과 동거하는 노인단독가구는 가족으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부부관계와 부모자식관계를 필수조건으로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런 이념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요구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가족정책을 위한 가족에 대한 정의도 각 국가의 가족정책의 방향과 가족에 대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정책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건강가정기본법에 대해 “가족에 대한 기본법이 생겼다는 데 의의를 두고, 사회적 관심환기를 통해 좋은 방향으로 수정, 유의미한 지원법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유경희 상담소장은 건강가정기본법에 대해 “가족에 대한 기본법이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면서, “기존의 안정된 틀을 고수하기 위한 단편적 대응책보다는 가족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읽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족현실을 바탕으로 한 각각의 개별가족 실태파악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과 현실의 괴리

박순덕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복지위원회)는 “가족을 법에서 개념 지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법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 남편은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나지 않은 자녀도 부인의 동의 없이 남편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남편의 혼인 외 자식은 비록 법적으로는 부인과 다른 자녀들의 가족이지만 그들의 인식 속에는 가족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부모가 이혼해 엄마가 자녀들을 키우는 경우 비록 자녀들은 아빠의 호적에 그래도 남아 아빠와 계모의 법적인 가족이 되지만,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자녀들은 엄마나 계부와 호적이 함께 되어 있지 않아도 엄마나 계부를 가족으로 인식한다는 것.

박 변호사는 “아무리 법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규정하고 싶어하고 규정한다고 해도 현실상 개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은 개인마다 그 차이가 많으므로 법과 현실이 괴리될 수밖에 없고 개개인이 인식하는 가족의 형태를 법에서 모두 개념 지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법은 보호가 필요한 개인이 있으면 그 개인을 통해 가족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한편 윤홍식 교수(전북대 사회복지학과)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빌미로 등장한 서구의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가족위기’ 담론임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가족위기 담론의 정치적 의도는 가족위기 담론을 통해 전형적 가족을 강화하는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시민의 복지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가족에게 강제함으로써 소위 비생산적 자원의 소모를 완화하자는 전략적 목적 속에 배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가족위기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세계적 신자유주의 질서의 재편 과정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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