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번역 검토-1
몇 사람에게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겠다고 약속을 한 뒤 몇달 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제서야 간단하나마 서평을 쓰게 되었다. 이처럼 늦어진 이유는 물론 이런저런 다른 일들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또 다시 말도 안되는 오역으로 점철된(그럴 것이라고 예상되는) 데리다 번역본을 원문과 하나하나 대조해가면서 짜증내고 분노하고 한숨쉬고 하는 지겨운 일을 될 수 있는 한 피해보려는, 자연적인 심리적 또는 생리적 거부반응 때문이었다(그럴 걸 왜 약속을 했던가 ... 무용한 정열이여!).
그 약속을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더 미루면 결국 쓰지 못할 것 같아서, 엊그제 집에서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다(원래는 구내서점에서 이 책을 읽을 생각이었으나, 며칠 전 원서를 끼고 구내서점에 가보니, 아뿔싸! 한 권 있던 책이 이미 도서관에 납품되었단다. 이런!! 그러니 어쩌겠는가, 약속을 이미 해놓았으니, 책을 사서라도 읽어야지 ... 그래서 결국 3만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이 책을 사고 말았다. 제발 번역이 괜찮아야 하는데, 제발 그래야 하는데라고 되뇌이면서 ...).
그래서 책을 읽었는데(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 읽고 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역시 실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사실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많이 썼다는 점이다. 사실은 출판사 쪽에서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 같은데, [역자 후기]에 따르면 일본어 번역본에 실린 역주(140여쪽에 달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존경할 만한 자세다)를 번역해서 역자에게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애를 쓴 결과, 70여쪽을 읽어본 것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그래도 읽을 만한 번역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혀 말도 안되는 오역들이 매쪽마다 나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 해도 이 번역본은 여전히 불만스럽고 문제가 있는 번역본이다. 몇 쪽에 한 두번씩 상당히 중대한 오역들이 발견되고 있고, 이 오역들은 데리다의 논의의 핵심 내용과 관련되어 있어서, 비록 한 두 개의 오역이라 할지라도 2-3쪽에 걸친 논의 내용을 충실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번역본은 사소한 몇 가지 잘못들을 범하고 있는데, 이런 잘못들이 번역본만 읽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큰 불편함을 준다는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가령 이 번역본에서는 “écriture”라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을 어떤 경우에는 “에크리튀르”로 표기하고, 어떤 경우에는 “문자”나 “문자 언어”로, 또 어떤 경우에는 “기호표기”나 “글쓰기”로 번역하고 있다. “문자기록”이나 “기록” 같은, 이 개념의 의미를 훨씬 충실히 살려낼 수 있는 번역어가 있음에도, 이처럼 한 단어를 여러 개의 번역어로 표현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이렇게 해서는 개념의 통일성을 제대로 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번역본만 읽는 독자로서는 그때그때마다 원어를 상기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더 나아가 역자는 어떤 경우에는 “inscription”을 “문자 언어”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혼동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자는 “production”이라는 단어를 앞부분에서는 줄곧 “창출”이라고 번역했다가 30여쪽 뒤에서부터는 다시 “생산”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 경우 누가 이것들 모두가 “product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어라고 생각하겠는가? 더욱이 데리다는 관념, 이념, 의미 등과 같은 사유활동의 결과들은 어떤 신학적이거나 정신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물질적인 기록작용의 결과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produ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창출”이라고 번역한다면, 데리다의 의도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또한 역자는 “renvoi”나 “renvoir”, 또는 “renvoir à”라는 말들을 “되돌려보내기”(21), “...으로 귀결된다”, “...으로 되돌아가며”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문장의 의미가 전혀 이해될 수 없다. 이 책에서 사용된 “renvoi”라는 단어는 기호들이 외부의 사물을 가리키지 않고 기호들끼리 서로서로 참조하는, 또는 지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곧 차이들의 체계로서의 기호체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다. 아울러 “renvoir”나 “renvoir à”는 “되돌려보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에 준거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각각의 논의 맥락들이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자주 쓰이는 “effacer”라는 단어도 이 책에서는 “소멸하다”로 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역시 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effacer”라는 단어는 “écriture”라는 개념, 곧 “기록”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로, “지우다”, “삭제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소멸하다”로 번역하게 되면 독자들이 데리다 논의의 의도와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아직 고작 70여쪽을 읽어봤을 뿐이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그래도 뒤로 갈수록 번역이 나아진다는 점이다. 읽어갈수록 계속 더 번역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
이제 이 책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오역의 사례들을 제시해볼 생각인데, 여기서는 가벼운 오역은 놔두고 논의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오역들만 검토해보겠다.
10쪽
“[루소의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제1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제시된 명제들에 긴밀하게 종속되어 있다.] 이 명제들이 요구하는 바는 독서를 할 때 최소한 그것의 중심축은 역사의 고전적 범주들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사는 사상사와 문학사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철학사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축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는 고전적인 규범들을 존중해야만 했다. 아니면 적어도 존중하려고 애썼다. 비록 시대라는 말이 이러한 고전적 규범들이라는 결정 요소들로 완벽하게 규명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역사적 총체성과 마찬가지로 구조적 형태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분은 큰 문제는 없는데, 두 가지 정도가 눈에 걸린다. 우선 독서의 “중심축은 역사의 고전적 범주들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와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축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는 고전적인 규범들을 존중해야만 했다. 아니면 적어도 존중하려고 애썼다” 사이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이 양자의 관계를 좀더 분명히 밝혀야 독자들이 논의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마지막 문장이 잘 이해가 안되는데, 이는 역자가 원문의 “이 규정들ces déterminations”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을 보자.
원문 p. 7
“Cellis-ci exigent que la lecture échappe, au moins par son axe, aux catégories classiques de l'histoire: de l'histoire des idées, certes, et de l'histoire de la littérature, mais peut-être avant tout l'histoire de la philosophie.
Autour de cet axe, comme il va de soi, nous avons dû respcter des normes classiques, ou du moins tenté de le faire. Bien que le mot époque ne s'épuise pas en ces déterminations, nous n'avions à traiter d'une figure structurale autant que d'une totalité historique.”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점을 감안해서 다시 번역하면, 위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이 수정될 수 있다.
“이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곧 독해는, 적어도 그 중심축은 역사―사상사 및 문학사는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철학사를 포함하는―에 대한 고전적인 범주들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중심축 주위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고전적인 규범들을 존중해야 했다. 또는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시대라는 단어가 하나의 구조적 형태와 하나의 역사적 총체라는 규정들로 소진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러한 규정들을 다루어야 했다.”
그 다음 문장을 보자.
15쪽
“이러한 부적절함은 언제나 이미 운동을 야기시키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무언가가 이 부적절함을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이를테면 책임지는 것을 [16쪽]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 문장에서는 “부적절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분명치 않다. 이는 우리가 앞의 문장들을 인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역자가 “inadéquation”이라는 단어를 “부적절함”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리고 “운동을 야기시키기 시작했었다”라고 했는데, <어떤 것>의 운동인지가 분명치 않다. 이 역시 번역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모호성이다. 마지막으로 “책임지는 것을 [16쪽]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역시 불어 단어의 뜻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다. 원문을 보자.
p. 13
“Cette inadéquation avait toujours déjà commencé à donner le mouvement. Mais quelque chose aujourd'hui la laisse apparaître comme telle, en permet une sorte de prise en charge ...”
이 문장들 전체를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문자기록의 표음화가 세계 문화를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시점에 과학의 진보는 문자기록의 표음화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것]의 운동은 항상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어떤 것이 이러한 불일치의 운동에 대해 일종의 부하(負荷)prise en charge를 허락함으로써, 이 운동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만들고 있다.”
보다시피 역자는 “불일치”라고 번역해야 할 “inadéquation”을 “부적절함”이라고 번역해서 논의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더 나아가 역자는 “donner le mouvement”이라는 숙어를 너무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불일치가 <다른 어떤 것의> 운동을 야기시키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현재의 문장에서 이는 불일치 자신의 운동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prise en charge”라는 어구 역시 “책임지다”는 뜻을 가진 “prendre en charge”라는 숙어와 혼동하고 있는데, 이 어구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미 작용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동력원이 공급되었다는 것, 곧 부하를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