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반대하는 그 전쟁에

 

나의 작은 취미 중 하나는 새로 나온 책들을 소개한 신문기사를 보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서 갖고 다니는 거다. 단골 서점이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은 후론 책을 자주 사지도 못하는데다 바쁘단 핑계로 그중 반도 소화 못해낸 채 볼 책들을 쌓아놓는 곳엔 ‘대기 중’인 것들이 항상 열 권이 넘는다. 그런데 요샌 네 살짜리 딸아이까지 책맛을 알기 시작해서 아이 책까지 살피느라 신간서적 소개하는 날이 더 기다려진다. 그러던 어느날, 어린이들에게 헌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 놨다는 어떤 새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책을 소개한 기자는 2004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거리에 아이들이 몰려나온 일이라면서 탄핵 반대와 이라크 파병 반대 촛불시위에 나선 뜻있는 엄마 아빠라면 어른들에게도 힘든 법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이 책을 아이들에게 꼭 보여줘야 할 거라는 얘기였다. 귀가 솔깃해지는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책이기에 우리 아이에겐 맞지 않지만 우선 법에 무지한 나부터 일단 읽어보고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 녀석에게 선물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 기자는 법치국가인 나라에서 헌법을 다룬 어린이 책이 없었다는 건 난센스라며 책 내용을 소개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의 뜻으로 대한민국을 다스린다.’ 헌법 1조 1항이란다. 가슴이 뻐근했다. ‘남북의 통일과 평화를 지향한다.’(헌법 4조) 우리의 아이들이 읽을 생각을 하니 기특한 책이지 싶다.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헌법 10조) 그 딱딱한 책에 이렇게 낭만적인 얘기도 실려 있나 싶다. 풀어서 쓴 것이겠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얘기라 나중에 상처받기 십상인 구절 같다. ‘양심은 내 마음 속의 진정한 재판관이다.’(헌법 19조) 음 …, 정말 멋진 조항이다. 이런 책을 읽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면 비전향 장기수나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건드린 대목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을 반대한다’(5조 1항)는 조항이었다. 눈물이 났다. 정말 헌법 책에 그렇게 나와 있다면 이라크 파병을 막아내지 못한 우리 국민 모두는 심각한 범법자가 된 꼴이 아닌가. 우리 어른들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에, 그것도 남의 나라 전쟁에 비굴하게 동참하면서 아이들보고는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다니….

글 쓰는 사람은 글로, 가슴이 더 뜨거운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파병 반대 뜻을 알렸다. 우리 ‘국민’들이 말이다. 심지어는 ‘국익’ 같은 말을 정말 좋아하던 한나라당의 일부 의원들마저 ‘잘못된 전쟁’이라더라, 우리도 그만두자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주인’인 국민이 목 터져라 반대하는데 … 국민의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헌법에 나와 있거늘 … 침략적 전쟁엔 동참하지 않겠다 해놓고 … 그렇게 얘기하는 ‘국익’을 입을 당사자인 우리들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지난 대선 때 타는 가슴으로 텔레비전을 지켜보다가 이른바 ‘바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으로서 대통령이라는 ‘처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애써 봤다. 하지만 김선일씨의 울부짖음 앞에 작은 ‘액션’ 하나 없이 ‘고!’를 외친 그를 보고는 정이 뚝 떨어진 게 솔직한 심정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어느 문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ROH’가 아닌 ‘NO’로 표기를 해서 작은 말썽이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실수가 아닌가 싶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가 ‘ROH’무현이 아닌 ‘NO’무현이 되는 것만은 막아보고 싶으므로 내가 오늘 신간서적 목록에 올린 이 어린이 서적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다. 가만 있자, 청와대 주소가 어떻게 되더라 참! 그의 전직이 변호사였다지 이런! 이렇게 민망할 데가 ….

오지혜/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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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파병을 반드시 막읍시다



정부는 8월 초 자이툰 부대 파병을 계획대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어제는 이라크로 보낼 군수물자가 선적되었습니다. 파병재검토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않은 채, 15일이면 임시국회가 폐회됩니다. 이라크 파병을 막기 위한 마지막 투쟁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라크 추가파병 재검토'를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장에게 "의장직권으로 재검토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해달라"고 요청하며 국회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는 14일 수요일 이라크 파병 결사 저지를 위한 결의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피스몹' 등 파병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평화 행동이 진행 중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가 절실합니다. 힘을 내어 파병을 반드시 저지합시다.

이라크 파병 결사 저지를 위한 결의대회
- 주최 : 파병반대 국민행동
- 일시 : 2004년 7월 14일 (수) 오후 7시 (민주노총은 오후 6시에 사전대회)
- 장소 : 광화문 열린시민마당 (1박 2일 투쟁 준비를 해오시기 바랍니다)
(촛불시위는 매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김원기 의원 홈페이지에 글쓰기
- 의장 직권으로 '이라크 추가파병 재검토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라!
- 국방위에 계류되어 있는 이라크 추가파병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을 조속히 심의의결하라
- 정부와 여당은 선적물자의 출항을 중단하라
-
http://www.ok-ki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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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13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니까 열린우리당은 박정희와 [조선] [동아]를 조사대상에 포함시키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14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행정수도 이전만으로는 한나라당, [조선], [동아]와 구별짓기가 잘 안되는지, 다시 또다른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다.
한나라/[조선] [동아]와 노무현/열린우리당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해 근심하던 사람들을 위해 확실한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아마도 보름만 버티면 사람들은 파병에 관한 건 까맣게 잊게 될 거고, 다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서, 그야말로 눈터지는 경계선 긋기에 국민 모두가 혈안이 될 것이라는 계산과 확신이 깔려 있으리라.
아, 나는 왜 이렇게 사소한 파병 문제에만 집착하지? 대범하게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지 못하고, 수구와 개혁도 구분하지 못하고 ...... 미안해, 노무현 씨 ...
 

[프레시안]

 

교사 1만6천여명 파병철회 선언, 교육부 "엄중처벌"

교육부 "실정법위반 처벌", 전교조 "지금이 독재시대냐"

 

2004-07-13 오후 1:47:40

 

  1만6천6백여명의 교사들이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는 헌법정신과 평화를 교육해야하는 교사의 양심에 따라 이라크 파병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공무원집단행동금지 규정에 벗어났다며 징계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교사 1만6천6백38명, 파병재검토 시국선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위원장 원영만)은 13일 오전 영등포 전교조 회의실에서 '이라크 추가파병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제목의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번 시국선언은 전교조가 지난 6일부터 전국 초·중·고 교사 대상으로 실시한 서명운동에 전국 학교 1천8백56개, 교사 1만6천6백38명의 동참으로 성사됐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13일 오전 이라크파병전면재검토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프레시안


  

 

전교조는 시국선언문에서 "위정자들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합리화했다"며 "대다수 민중들은 자신과 무관한 전쟁에 끌려들어가 처절한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강요당해 왔다"고 주장했다. 전교조는 이어 이라크 전쟁관련 "미국이 내걸었던 '대량살상무기'와 '테러배후지원'의 증거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처럼 명분이 사라진 전쟁터에는 오로지 추악한 국가 이기주의와 패권주의만이 난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교조는 또 "이라크 추가 파병은 침략전쟁을 금지한 우리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라며, 정부 파병논리인 '국익론'에 대해서도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가담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추악한 국가주의'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고 비판했다. 또 '동맹국과의 신뢰'를 지켜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교조는 "미국의 패권에 기대어 우리 민중을 전쟁터로 내모는 '죽음의 행진곡'에 다름아니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교조는 변화된 상황에서 파병재검토 촉구는 정당한 요구임을 재차 강조했다.
  
  송원재 전교조 대변인은 "미 CIA 정보조작을 인정한 미 상원의 보고발표, 파병철회결정에 의한 인질석방을 이뤄낸 필리핀 사례 등은 이라크 전쟁과 한국군 추가파병에 대한 근본적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에 크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며 "여전히 한-미동맹과 국익 재론하며 추가파병을 정당화 한다면, 이라크에는 결국 우리 병사들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실정법위반 처벌", 전교조 "지금이 독재정권시대냐?"
  

 

원영만 전교조 위원장. 원 위원장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는 헌법정신에 기초한 전교조의 파병재검토 시국선언은 정당하다"며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서명참여 교사들에 대한 징계방침을 반박했다. ⓒ프레시안


  이같은 전교조의 '파병재검토 시국선언'에 대해 교육인적자원부는 "시국선언에 서명한 교사를 법과 원칙에 따라 조치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교육부는 13일 "전교조의 교사 시국선언이 집단행동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했기 때문에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엄정 대처할 것"이라며 "가담 정도에 따라 징계 등의 조치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교육부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전교조는 '과도한 법률적용'이라며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이다.
  
  차상철 전교조 사무처장은 "20여년 전에는 공무원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법적 제재가 가해졌지만 그 이후로는 법원에서 공무원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법적 처벌을 하지 않았다"면서 "이번 시국선언은 평화를 교육해야 하는 교사의 양심과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는 헌법정신에 기초로 진행된 만큼 교육부의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원재 전교조 대변인도 "교사로서의 기본 임무를 방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재검토하라는 주장마저도 정부 당국이 봉쇄한다면 이는 독재정권과 다름없다"며 반박했다.
  
  "교육부가 나서서 테러와 납치를 기정사실화하나"
  
  한편 이날 전교조 기자회견에서는 12일 전국 초·중·고교에 배포된 이라크 관련 교육부 교육지도자료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차상철 사무처장은 이와 관련,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자국민의 테러와 납치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대응방법을 설명한 (교육부) 지도자료는 정부의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차 사무처장은 이어 "전교조는 7차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계기수업실시지침'에 따라 이라크 전쟁 관련해 반전·평화의 내용이 담긴 훈화자료를 일선 학교에 배포한 바가 있다"며 "이를 두고 '편향됐다'는 주장은 오로지 파병론자의 눈에서만 그러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교육부는 지난 12일 전교조가 배포한 '반전-평화 훈화자료'가 편향된 측면이 있다며 일선 초·중·고교에 '테러범들에게 억류·납치됐을 때 행동수칙' 등이 담긴 교과서 보완 지도자료를 작성 배포했다.

   
 
  김경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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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론’이라는 극단주의

파병에 대해 “무조건 어쩔 수 없다”… 김선일씨 비극은 국민적 ‘울분’으로 남을 것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무조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우리 안의 극단주의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의 말이다. ‘뭐가 어쩔 수 없는지’에 대해서 토론하지 않고, 한-미동 맹 때문에 파병은 무조건 불가피하다는 ‘숙명론’은 민주주의를 죽이는 또 다른 ‘극단주의’라는 주장이다. 이태호 실장은 “3천여명의 대규모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서 국회에서 토론한 시간이 국방위원회, 본회의를 합쳐 고작 4시간이었다”며 “대미 협상력이 떨어지니까 논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고 한숨을 지었다. 그는 “이라크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조차 국회가 럼즈펠트 국방장관 등을 불러 청문회를 하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그는 예측의 실패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 정치권의 무책임한 태도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 실장은 “정부는 이라크가 곧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예측이 틀렸지만 정부는 인정하지 않고, 국회는 예측의 실패에 대해 따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17대 국회도 파병이 16대 국회의 결정이어서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는 발뺌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또 “김선일씨의 비극은 한국인의 가슴에 ‘한’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참수의 비극 앞에서 파병 강행론이 힘을 얻어도, 장기적으로는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우리 국민이 원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국민적 ‘울분’으로 남을 것이라는 얘기다. 같은 민간인 참수를 당했지만, 비교적 자발적으로 파병을 한 이탈리아의 경우와 참수의 효과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협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파병 강행을 고수한 정부의 정책이 남근주의적 극단론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희진 성공회대 여성학 강사는 “오직 파병 강행만을 되뇌는 정부의 모습에서 타협의 기술도, 의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며 “타협을 곧 굴욕으로 여기는 남성적 이분법 사고의 극단론”이라고 지적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이기느냐 지느냐’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무고한 시민의 희생에 한몫을 거들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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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과 극단의 피흘리는 공존

제국주의와 테러가 상부상조하는 ‘폭력의 질서’… 외부의 극단주의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파괴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김선일씨의 피살 소식이 전해진 6월23일 새벽 3시. 텔레비전을 통해 김씨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회사원 정기호(32·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씨는 분노조차 치밀지 않았다. 함께 있던 친구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그저 멍한 무기력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떨군 김선일씨의 모습도 가슴 아팠지만, 핏발 선 목소리로 성명서를 읽는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팠다. 그는 “테러리즘을 결코 지지하지 않지만, 이슬람 저항세력을 미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해왔다”며 “참수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동정마저 거두게 됐다”고 말했다.


△ 공격당하는 바그다드. 한국도 파병 고수를 통해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됐다.(사진/ GAMMA)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끔찍한 질서의 체제였다. 부시라는 악의 축과 테러리즘이라는 악의 축을 중심으로 피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암흑의 세계였다. 양극의 극단주의가 만들어내는 폭력의 질서 앞에서 절망했다. 그리고 자문했다. ‘도대체 누가 김선일씨를 죽였는가?’

“이라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

같은 날 오후 7시께 정씨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김선일씨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장을 들어서는 순간, 피켓에 적힌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부시와 노무현이 김선일씨를 죽였다’. 명쾌한 논리였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던 꼬마가 피켓을 쳐다보며 물었다. “엄마, 정말 노무현 대통령이 죽였어?” 어머니는 대답을 하는 대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씨는 그 아이가 던진 ‘순진무구한’ 질문을 옆에 있던 시민사회 활동가인 친구에게 다시 던졌다. “미국의 책임만을 묻는 것도 극단주의 아니냐?” 친구는 “물론 테러도 용납할 수 없다”며 “테러리스트에게 온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호소할 대상이 노무현 정부와 미 대사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부시 책임론’이 터져나오는 집회장 바깥 세계에서는 ‘테러 보복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시와 노무현을 미워하거나 테러리스트를 증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시의 제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는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파견하는 ‘종군문인’의 자격으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소설가 오수연씨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 초기만 해도, 테러리스트는 이라크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오히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선동만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세력으로 여겨졌다. 오씨는 “당시 다수의 이라크인은 후세인의 반미 독재도, 사우디아라비아식의 친미 정권도 아닌 이라크인의 자존을 지키는 합리적인 사회를 바라고 있었다”고 전했다. 점차 미군의 점령군으로서 성격이 드러나면서 이라크인의 불만은 커졌고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다. 오씨는 “김선일씨의 희생도 더없이 안타깝지만,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이 차단되고 목숨 건 투쟁의 외길로 내몰린 이라크인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도 파병을 통해 미국의 극단주의에 힘을 실어줘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양 극단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다.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은 이라크의 테러리즘의 토대가 되고, 이라크의 테러리즘은 부시의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한다. 실제 양 극단주의 세력은 곤경에 빠질 때마다 ‘상부상조’해왔다. 우선 알카에다의 ‘9·11 테러’는 이라크 침공의 명분을 제공했다. 최근에는 부시가 ‘9·11 보고서’로 궁지에 몰리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인 폴 존스를 참수해 다시 한번 대테러전쟁의 ‘명분’을 살려주었다. 부시는 알카에다와 후세인 정권 사이에 연계가 없다는 조사결과를 담은 ‘9·11 보고서’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폴 존스가 참수당하자 부시는 침공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했고, 들끓던 미국의 이라크 철군 여론은 힘을 잃었다. 극단주의가 서로를 부추기면서 합리주의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알카에다는 부시 재선을 원한다?


△ 제국주의와 테러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룬다. 6월17일 부시-체니 진영 선거기금 모금 행사장에서 부시 대통령이 손을 흔들고 있다.(사진/ GAMMA)

테러리스트는 평화운동의 훼방꾼이다. ‘세계사회주의 웹사이트’(wsws.org)의 편집자 배리 그레이는 “(김선일씨를 숨지게 한) 살인자들은 잔혹한 학살 행위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혼란의 씨를 뿌리게 될 뿐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이들은… 국제적 반전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집단이 목표로 삼는 것은 아랍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아랍 지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레이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아랍 세계의) 지배 엘리트를 다른 지배 엘리트로 교체하는 것이며, 이들이 대변하는 것은 아랍의 지배 계급 중 비교적 소외된 세력의 야망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빈 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였고, 일부 테러리스트는 아랍 지배층과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알카에다는 부시의 재집권을 원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저항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미군이 이라크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한 팔루자의 비극처럼 날마다 점령군이 폭력과 살상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점령군을 향해 총을 드는 것을 똑같은 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처럼 이스라엘 정규군의 중무장과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빈곤한 화력을 같은 ‘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명분과 무장력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의 저항폭력은 우발적인 저항이 아니라 체계적인 질서가 됐다. 당초의 저항정신은 상실한 채 폭력의 질서에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평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테러는 쉬운 방법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평화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즘이 제국주의를 몰아내는 데 성공할지라도, ‘해방된’ 국가 안에서 국가주의는 신성시되고 민주주의는 압살당하기 십상이다.

테러와 대테러는 마찬가지 살상

테러리즘은 피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미국은 김선일씨가 참수당한 뒤, 이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팔루자를 공습했다. 미군은 팔루자에 김선일씨를 참수한 테러집단인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의 은신처가 있다고 주장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았다.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는 또다시 터키인을 인질로 잡고 참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들의 ‘보복’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인 박순성 동국대 교수는 “참수 장면을 공개해 ‘충격’을 줌으로써 파병국에 ‘공포’를 조장하는 행위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때 작전명인 ‘충격과 공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리스트는 테러의 충격을 통해 파병국의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내 아들은 못 보낸다”는 파병국의 가족주의를 자극해 여론을 극단의 분열로 몰고 가려는 의도다. 테러를 통해 그들이 얻으려는 것이 ‘파병 철회’라면, 폭력의 질서 속에서 파병 철회를 외치는 평화운동마저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외부의 극단주의는 내부의 민주주의도 파괴한다. 9·11 이후, 미국의 애국주의는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검열을 강화했다. 테러의 여파로 2001년 제정된 미국의 ‘애국자법’(Patriot Act)은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전화와 전자우편의 감청을 광범위하게 허용했다. 한국에서도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고 불린 ‘테러방지법’의 입법 시도가 있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득세는 여성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옥죄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슬람 여성들을 차도르 안에 가두고,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이고, 민주주의를 압살했다. 한국에서도 김선일씨가 참수당한 다음날, 이슬람 사원에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취객의 난동이 벌어지는 등 이슬람에 대한 혐오 범죄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한국 내 이슬람 이주노동자들의 삶도 위태로워질지 모른다.


△ “정부와 부시가 김선일씨를 죽였다.” 6월26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촛불시위.(사진/ 박승화 기자)

하지만 테러리즘에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폭력의 질서를 해체하지 못한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바뀌지 않으면 이슬람 테러리즘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박순성 교수는 “폭력 질서의 근본 원인 제공자인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중간 원인 제공자인 테러리스트만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 뒤, 미국에 대한 비판 없이 “테러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테러에 대한 보복론까지 판치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테러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테러전쟁을 역설하는 부시의 논리와 똑같다.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는 “부시의 ‘대테러’는 전쟁을 불러와 테러보다 더한 인명 살상을 낳았다”며 “폭력의 관점에서 보면 테러와 대테러는 마찬가지 살상 행위”라고 지적했다.

파병 철회로 악순환 끊어야

극단의 세계에서 이성이 발붙일 공간은 협소하다. 하지만 박순성 교수는 폭력의 질서를 넘어설 희망이 여전히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80년대 초 미국 패권주의가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했지만, 80년대 말 미국 패권주의는 다시 부활했다”며 “거꾸로 지금은 미국의 패권주의가 영원할 것 같지만 머지않아 제국의 몰락이 찾아올 것”고 낙관했다. 그는 세계 시민사회의 반전 여론과 유럽 국가의 견제를 낙관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는 또 “테러리즘은 역사적으로 패배했다”고 덧붙였다. 1960년대 세계를 뒤흔들었던 적군파의 테러도, 70~80년대 여러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소수민족 분리주의자의 테러도 결국에는 잦아들었다는 것이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역설적으로 이라크에서 미국의 실패는 세계에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며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있지만, 아주 완만하게 이성의 힘이 승리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6월22일 발표된 민족문학작가회의 긴급성명 ‘이라크 파병을 철수하라-전쟁도 테러도 우리는 싫다’는 폭력의 질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라크 사태가 증명하는 것은 이 지구상의 어떤 전쟁도 국지적 분란이 아니라 모든 국가와 인류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전쟁 범죄라는 뼈아픈 진실이다. 우리는 이 시대 인류의 불신 체제가 연속적으로 만들어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이 전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폭력의 질서가 내 삶을 침탈할지도 모른다. 김선일씨의 죽음처럼. 그래서 파병 철회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일상의 평화를 지키는 절박한 행동이다. 피로 물든 극단주의 세계의 동조자가 될 것인가, 무자비한 폭력의 질서에 저항하는 시민이 될 것인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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