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 학살을 잊었는가

 

우선 7월4일, 미국 독립 228주년을 축하한다. 미국인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불꽃놀이를 하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병사를 보낸 부모 등 가족들은 휴가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라크 참전군인 중 많은 사람도 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지낼 것이다.

몇년 전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자유의 길’을 따라 걸었다.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립전쟁의 시발점인 역사유적을 둘러보았다. ‘보스턴 학살’의 현장에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종주국인 영국이 이주민인 미국인들의 차세 인상 저항에 대해 보스턴 주민을 학살한 것이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됐다고. 나는 역사의 현장에 설 때까지 적어도 수십, 수백명이 죽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섯 명이었다. 대영제국에 대항한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고 명분이 된 대학살의 희생자는 정확히 5명이었다. 미국인들의 조상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고 하면서 본국인 영국의 중과세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228년 전 7월4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 선언서는 인류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지금 이라크에선 최소한 수만명의 민간인이 죽고 다쳤다. 수적으로만 보아도 수천배가 넘는다. 1776년 영국과 미국인의 관계 ,그리고 2003년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는 어떤가. 우선 23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대륙의 차이가 있다. 또 서로 다른 인종, 종교, 문화를 갖고 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의 독립전쟁은 종주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전쟁의 명분은 무엇인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9·11 테러를 핑계로 이라크가 테러조직을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230년 전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영국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이라크를 유혈 점령하고 있다. 230년 전 식민지 백성으로 살 수 없다면서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선 당시의 미국인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며칠 전 한국의 한 젊은이가 공포에 떨면서 울부짖었다. “당신의 목숨은 소중하다. 그러나 나의 목숨도 소중하다. 나는 살고 싶다”고. 이 젊은이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었다. 왜였을까. 물론 한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부시와 미국 정부에 있다.

한국인과 이라크 민중은 어떠한 민족적 감정도 원한도 없다. 부시 미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며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끌려들어간 결과일 뿐이다. 최근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반미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를 가장 많이 만들고 가장 많이 팔아먹는다.

이제 선량한 미국인들이 답할 때다. 이라크 민중에게, 아랍 민중에게, 세계 인류에게 답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이라크에선 사람들이 죽어간다. 전쟁이냐 평화냐 부시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해라. 그럴 수 없다면 그의 재선 운동이라도 포기시켜라. 그래야 당신들은 대통령을 잘못 뽑은 책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이덕우/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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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영석의 거짓말, 열린우리당의 체포동의안 가결 등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고, 언론에서도 연일 큰 뉴스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성향으로 볼 때 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서영석 같은 사람의 성향으로 볼 때 그보다 훨씬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어느 정부에서든 일어날 수 있고, 어느 실세든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파병철회라는 정말 중요한 쟁점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또는 적어도 이 문제가 현재의 정국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몇 달이 갈지 몇 년이 갈지 모르는 문제이지만, 이 점을 늘 기억해두기로 하자.
 

 

파병론의 허구, 솔직해지자

 

김선일씨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큰 슬픔을 안겨줬지만, 이라크 파병 뒤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스런 현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막연히 생각하던 이라크 파병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엄중한 문제임을 새삼 실감케 된 것이다. 평화재건론, 경제실익론, 국제사회 약속, 이라크 민주화론, 한-미 동맹 강화론 등 각종 파병옹호론이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임이 김씨의 죽음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우선 정부가 그토록 내세운 ‘평화재건론’의 허구성이 부각됐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미군과 달리 이라크 주민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일방적 선전이 여지없이 깨졌다. 우리가 제아무리 이라크 재건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해도, 그곳에서는 증오의 대상인 미군을 도우러 온 군대로 보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이라크 민주화를 위해서, 또는 앞으로 중동지역에서 경제적 실익이 클 것이라는 말 따위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거짓말이다.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테러에 굴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국민 뜻을 거스르며 졸속으로 파병을 결정한 근본적 잘못을 호도하는 궤변일 뿐이다.

이제 파병옹호론자들은 정직해져야 한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할 게 아니라 파병 문제의 본질을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 ‘한-미 동맹’ 운운하며 서로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고 얼버무리지만, 미국 말을 듣지 않을 때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 눈 딱 감고 파병하자는 것 아닌가. 상대를 이토록 겁박하는 것이 진정한 동맹관계인가. 고민의 핵심은 두가지일 터이다. 안보 위협과 경제 불안심리다. 둘 다 만만치 않은 문제다. 그만큼 우리의 약한 고리를 미국이 쥐고 있다. 심리적 불안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면 뾰족한 대처 방법이 없다. 의연하고 당당해져야 한다.

안보 걱정은 북한 핵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조지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이 한반도 문제를 난폭하게 다루며 긴장을 높일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6자 회담을 통해 간신히 평화적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강경파들이 언제 또 위기를 증폭시킬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 문제와 맞물려 한-미 동맹의 심각성이 더 커졌다. 경제 불안 심리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틀어버리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흔들린다는 걱정이 나온다. 민간 투자가들은 원칙적으로 경제논리에 따라 투자 여부를 결정하겠지만, 부시 정부가 신용평가회사들에 입김을 넣어 신용등급을 낮추거나 통상 압력을 가하면 어찌 감당할 것이냐고 불안감을 부추긴다.

아이엠에프와 북한 핵 위기를 겪은 터이기에 이런 우려를 가벼이 넘길 수는 없다. 하지만 심리적 불안감에 젖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 알아서 기는 식으로는 올바로 대처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은 정치·군사·경제·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쪽에 피해를 주면 자신도 버금가는 상처를 입어야 하는 구조다. 미국의 파병 요구가 한-미 관계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할 만큼 무게를 지닌 것이냐는 냉철한 가늠이 있어야 한다. 그에 걸맞은 지렛대를 확보해야 한다. 평소 얼마나 자주적 태도를 보이고 외교력를 발휘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부시 정부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잘못에서 벗어나야 한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미 국민들이 계속 늘고 있다. 더구나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이다. 북한과 화해·협력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꾸는 동맹국 남한을 무시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 위기를 부풀려 온 부시의 강경정책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라크 전쟁 뒤치다꺼리를 도맡으며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하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어리석은 단견이다. 정직하게 말해 민족의 재앙인 한반도 전쟁 위험이 다소나마 누그러진 것은 부시 정권이 이라크에서 발목이 잡혔기 때문 아닌가. 수렁으로 빠져드는 이라크 전쟁에 발을 내딛는 잘못을 범해선 안 된다. 용기를 내야 할 때 내지 못하면 굴종과 모멸의 길만 남을 뿐이다.

이원섭 논설위원실장 w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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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파병할 능력이 있는가

 

김선일씨의 피살사건은 우리에게 외교안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나아가서 3천여명의 이라크 추가 파병을 앞두고 있는 정부가 과연 현지 정지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라크 파병으로 한국은 이라크 침략전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들어감을 의미한다. 교민 한사람의 실종사실조차 20여일 동안이나 파악할 능력이 없는 정부가 과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위기국면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파병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과연 우리가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병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정지작업 부실뿐만 아니라 김씨 피살사건은 추가파병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지 1년이 다되가지만 주무부서인 국방부를 비롯해 국정원, 외교부 등 관련부서가 현지의 정확한 정세파악에 필수적인 정보수집 네트워크를 전혀 구축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파병을 그토록 열망했던 국방부가 실제로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해외정보수집에 역점을 두겠다는 국정원은 이라크 현지 정보수집망을 확보한 것인지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중동지역은 이라크 분쟁을 떠나서도 한국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공급의 확보라는 국가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다. 따라서 국정원이 이 지역에 정보수집 네크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이다. 하지만 국정원은 현지 대사관에 불과 2명의 요원을 파견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리고 활동도 미미했다. 정보 관계자들은 박정희 정권 때에도 이보다 수십배 많은 정보요원들을 파견해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외교안부정책을 총괄조정토록돼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역시 무력한 한계를 드러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을 사실상 전담보좌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파병이후 벌이질지도 모르는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들에 주도면밀하게 점검했다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파병에 관한 한 정부당국만이 허술했던 것이 아니다. 추가 파병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논의 역시 “파병을 해야한다” “하면 안된다”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아마도 정치권이 보다 구체적으로 파병관련 준비태세를 추궁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 모른다.

이라크 파병의 정당성 여부는 제쳐두고, 한미군사동맹의 유지여부, 북한핵문제, 동북아시아의 안보 환경 등 여러 복잡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해야 하는지도 납득하기 힘들다. 이라크에 1천여명의 자위대 병력을 파병한 일본의 경우는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일본은 파병결정에 앞서 수십회에 걸친 자위대 조사단을 현지에 보내 현지 정세와 여건 등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국정원에 해당하는 내각정보조사실의 요원들도 대거 현지에 파견돼 정보수집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각종 민간단체들까지 나서서 이라크의 유력한 부족장들과 커넥션을 형성하는 등 전방위적 네트워크 구축에 총력을 벌이고 있다. 3명의 일본인 인질이 무사히 석방된 배경에는 이같은 노력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은 또 경제적 실리까지 챙겼다. 일본은 파병의 대가로 지난 2월 20억달러를 투자해 추정 매장량 250억배럴로 중동 최대 유전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란의 아자데간 유전 개발권 계약체결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핵무기 개발 의혹을 이유로 일본의 이란 아자데간 유전 투자을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해 왔으나 자위대 파병의 대가로 묵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은 파병결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은커녕 주한미군기지 이전협상에서 보듯이 일방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에서 파병국에 걸맞는 몫을 배당받을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다. 명분도 실리도 다 놓치고 있는 것이다.

장정수 편집부국장 jsj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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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실적용' 출판 범람...5백부만 넘겨도 대박
반론 : 학술출판에 대한 저자들의 오해

2004년 06월 24일   박성모 소명출판 

박성모 / ‘소명출판’ 대표

지금 우리에게 학술출판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일방의 측면과 범박한 오해로 누더기가 되고 또 고정관념으로 뭉뚱그려져 각주 달린 책 또는 그럴 듯한 제목으로 학문의 외피를 입은 출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학문과 출판이 만나서 하나를 이루는 일, 그 현장에 대한 이해는 진정 없는 것인가. 6월 7일자 ‘교수신문’의 ‘안목 갖춘 편집자와 소통하고 싶다’를 읽고 새삼스레 드는 생각이다. 오해의 첫 단추는 어디서 시작됐으며 또 지금 여기의 학술출판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답답함에 몇 가지 생각을 추슬러 본다.

번역자의 역할과 출판사의 역할을 구분해야

먼저, 가장 긴밀해야 할 출판사와 저자 사이에 건너기 힘든 깊은 강이 가로 놓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저자와 출판사가 서로의 역할에 대한 엇갈린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들은 출판사의 전문교정능력 부재를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소명출판’ 역시 이 문제는 늘 더부룩한 체증과 같은 부담이다. 그럼에도 해법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일부의 저자는 전문적 원고내용에 편집자가 감히 어디 손을 대느냐고 질타하기도 한다. 반면 또 다른 저(역)자는 교정 차원을 넘어 고난도의 교열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극과 극의 요구는 출판 현장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번역의 경우 출판사로서 감당키 어려운 요구도 따른다. 우리 출판사만 해도 공동번역된 원고에 대한 출판을 진행하다가 반려한 경우도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이랬다. 중국학 전문가들이 일정 부분씩 나눠 번역한 원고였는데 일관된 원칙에 따라 음가를 통일하는 과제를 출판사가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노신’을 ‘루쉰’으로 통일하는 일은 간단할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자 스스로에게도 낯설고 또 무수한 고유명사가 출현하는 원고에 대한 적확한 음가를 적용하는 일은 중국학 전문가 사이에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감당키 어려운 난제라 여겨, 출판사에서는 정중히 번역자들의 통일안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출판사는 뭘 하는 곳이냐는 질타가 돌아왔다. 번역자보다 더 높은 수준의 교정과 교열 요구를 출판사로서 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원고 교정이 끝없는 원고 수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레이아웃을 거쳐 조판을 뜨고 교정쇄가 나가면 양상은 달라진다. 끝없는 원고 수정이 그때부터 이뤄진다. 오자와 탈자에 대한 교정이나 최소한의 문장에 대한 의견을 달고 손보는 ‘교열’의 개념이 아니다.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는 원고는 말 그대로 편집자를 과로하게 만든다. 깔끔한 교정쇄를 보면 연구 당사자로서 새로이 단점이나 결함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수정하고 다듬어야 한다. 그런 의미의 교정은 출판사에서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몫이다. 그러나 초교에서 수정된 2차 교정지를 다시 초교 만큼 많이 고치는 저자들이 적지 않다면 문제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너무 쉽게 쓰여진 원고이거나, 자신감 없는 원고다. 이럴 때 출판사로서는 나름의 출판 결정이라는 판단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들만큼 난감해진다. 학술출판에 대한 천박한 이해가 급기야 천박한 출판 풍토를 낳고야 마는 것이다.

‘필요’와 ‘공급’의 우울한 곡선

이렇듯 출판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너무 의존하려 드는 양극단의 입장들이 있다. 그럼에도 학술출판사에 대한 이런 시선과 요구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출판사에 따라 요령껏 저자 성향별로 눈치를 살피고 탄력적인 적용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게 문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의 순수 학술출판은 그 무엇보다도 자생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매스컴을 횡단하는 일부 소수 명망가를 제외하고 본연에 충실한 거의 대부분의 학문 종사자들의 연구 결과를 순수하게 출판한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매우 회의적이다. 말 그대로 자생력을 상실한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거니와 이 문제는 학술출판사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그 어떤 오해와 불협화음이 저자와 출판사간에 존재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우선 순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학술출판은 최소한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현실적 ‘필요’와 어쩔 수 없는 ‘공급’이라는 기형적 법칙이 언제부턴가 학술출판가의 현실이 돼버린, 그러니까 이렇듯 우울한 현실이 문제다. 공급은 출판사가 하되 ‘수요’가 없다 보니 ‘필요’에 의해 출판한다는 것이다. 필요는 무엇을 말하는가. 시장의 수요가 없는 상태에서 저자만이 책이 필요한 현실을 말한다.


이런 현실에서 전문 교정능력을 확보하는 일은 거대한 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인 다역으로 출판사 사장이 혼자서 또는 직원 한두 명과 함께 운영하는 출판사의 경우는 사장이 그나마 어느만큼 전공영역을 감당할 만한 경우에 해당한다. 특정 전공분야의 범주 안에서 출판하는 경우가 이 예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술출판사는 교정능력 하나에 있어서도 좌절의 쓴맛을 보고 있다. 그나마 자본력과 전문인력을 확보한 대형 출판사가 학술출판을 성실하게 감당해 주는 길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출판 상업주의에 매몰돼 갓 쓰고 장사한다는 눈초리를 피하기 위한 체면치레에 머무는 정도다. 순수 판매율 5백부를 넘기면 대박인 현실에서 교정은 고사하고 누가 어떻게 학술출판을 감당할 것인가.


사실, 순수 학술출판은 취업용이나 연구 실적용 책을 발간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저자로서 학술출판과의 첫 만남은 대부분 박사논문을 출판하는 일로부터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취업용’을 위해 출판사를 찾는다. 또는 이런저런 기회에 발표한 논문들을 한 데 모아 찍는 논문모음집의 형태가 있다. 단단한 주제아래 하나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내 놓는 경우도 있으나, 책을 위한 책이 많다. 또 고도의 연구결과가 집적된 것이 아닌 ‘거기서 거기’인 학습교재들이 있다. 이런 교재성 책은, 다 알다시피 연구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특정 시점에 맞춰달라는 주문이다. 취업용이나 연구 실적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책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다. 장사는 안되면서 학술출판사가 가장 바삐 움직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연구는 길고 출판은 짧다.


안에서 싸워야하고 밖에서는 방어해야 하는 학술출판의 현실, 참으로 진퇴양난이다. 과연 지금 여기에서의 학술출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원죄’를 안고 있기는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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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올린 [교수신문] 6월 7일치 기사에 대한 출판사 쪽의 반론입니다.
 
 전출처 : 모모 > 이라크 파병반대를 위한 영화인 선언

어제 친구랑 교보 앞을 지나다가, 영화인들의 파병 반대 기자회견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박찬욱, 임순례 등 얼굴이 비교적 익숙한 사람들이 몇몇 있더군요. 선언문이 생각보다 '과격'해서 흠칫 놀랐는데, 흐, 아무튼 꽤 좋은 글이라서 퍼옵니다.

 

 

이라크 파병반대를 위한 영화인 선언


미국이 이라크침략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내세웠던 대량학살 무기는 애당초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9.11과 이라크가 아무런 관련도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확인 한 것은 더러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많은 거짓 정보들을 조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라크 민간인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최소한의 저항수단 조차 갖지 못한 민간인의 죽음을 우리는 거의 날마다 듣고 있습니다. 포로들에 가해진 미군의 조직적인 고문과 강간을 통해 우리가 본 것은 이 더러운 침략전쟁의 악마성입니다. 온갖 혐오스러운 방법을 동원하여 조직적인 고문과 강간을 자행한 미군에게 이라크인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갖은 역겨운 방법으로 이라크인을 조롱하고 무참히 살해한 미군 역시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자라면, 시작부터 더러운 음모로 점철된 이 침략전쟁이 당장 끝나길 바래야 합니다. 조그만 힘이라도 민간인의 학살을 막는데 보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일찍부터 파병을 외쳐댔고, 마침내 노무현 정부와 17대 국회는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파병의 정당성(?)을 외쳤습니다. 그들은 미친 것입니다. 미쳤다는 것 외에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라크 파병으로 우리가 얻게 될 경제적 이익을 이야기 합니다. 이라크 유전과 전후 복구사업으로 얻게 될 이득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며 들을 수 있는 가장 역겨운 이야길 것입니다. 이라크의 철없는 어린 아이들마저 무차별 폭격에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군대를 파병하자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외쳐 댑니다. 철저히 이라크의 석유와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로 침략전쟁을 시작한 미국조차 명분을 만들기 위해 온갖 정보를 조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는 자들에겐 이러한 거짓 명분조차 거추장스러워 보입니다.

보다 책임 있는(?) 자들은 북핵 문제를 들어 파병 강행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엔 늘 약소국, 주변국으로서의 한숨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북핵 문제 때문에 파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명백히 국민에 대한 공공연한 협박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시 정권의 북한에 대한 '악의 축' 규정과 북핵 문제에 있어서의 미국의 강경한 태도를 고려할 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파병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벼랑에 몰린 미국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한반도에서의 미국에 의한 무력사용의 가능성을 배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라크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한미간의 더러운 거래를 의미하는 것이며, 파병을 안 하면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고조된다는 대국민 협박인 것입니다.


베트남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파병을 하라면 파병을 하고, 돈을 내라면 또 그렇게 했던 그간의 역사에서 보듯 우리가 약소국임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파병을 통해 미국이 자행한 범죄의 공범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파병을 거부하고 국제적인 반전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할 것인지 선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범죄행위에 대항한국제적인 반전 운동만이 전 인류에 부끄러움 없이 정당한 결정이며,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보장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파병을 반대하다 파병 찬성으로 돌아선 국회의원들을 주목합니다. 그들은 마치 구국의 결단을 위해 자신의 양심을 배반한 듯한, 그래서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연출합니다. 그들은 마치 국민에게는 공개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절대적인 정보라도 갖고 있는 듯한 뉘앙스로 이야기하고 애매한 행동으로 국민을 기만합니다. 이 더러운 침략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숨겨야 될 비밀은 없습니다. 더 이상 정보를 숨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감행하기 위해 정보를 조작하고 자국민을 기만하였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정보가 밝혀지고 면밀히 검토되었다면 이번 전쟁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정부와 국회는 우리의 파병목적이 전투가 아니라 복구, 재건에 있음을 애써 강조함으로써 면죄부를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만 맴도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벌인 침략전쟁에 동참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세계 지형과 하등 무관한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침략전쟁의 근본적인 성격이 폭로되면서 세계는 급격히 반전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미 파병했던 국가들마저 전쟁의 부당성과 자국 군대의 보호를 이유로 철군하고 있습니다. 세계 대다수의 국가들이 미국의 침략 전쟁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을 국제사회 속에서 더욱 고립시키는 것이며,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이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파병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합니다. 이 결정은 국제사회 속에서 궁지에 몰리던 미국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며, 이라크 국민들의 희망을 짓밟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이는 보다 명확해 집니다. 미국은 애당초 전투부대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전투력에 도움도 되지 않을 복구 재건을 위한 군대를 미국이 지금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이라크에 보내려는 것은 복구 재건을 위한 건설업체가 아닙니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든 군대입니다. 우리가 뭐라 주장하든 외부에서 볼 때, 그것은 단지 파병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고 김선일씨의 죽음은 우선적으로 미국과 우리 정부. 국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고 김선일씨의 죽음은 파병 결정을 막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죽어가는 이라크 국민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많은 죽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미친 자들의 망동을 막기 위해 우린 나서야 합니다.
끝으로 파병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선 국민과 민주단체와 노동단체 그리고 특별히 직접적인 불편부당을 감수하면서 파병 수송업무 거부를 선언한 항공조종사노조 여러분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냅니다.


2004년 7월 1일
이라크 파병반대를 위한 영화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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