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과 한반도 군축

 

함택영(경남대 교수·정치학, 평화네트워크 자문위원)
2004년 7월 1일



이 글은 7월 1일 한국 국방연구원 주최로 열린 국방 NGO 포럼에서 평화네트워크 자문위원이신 함택영 선생님이 발표하신 글입니다. 협력적 자주국방이 국방 정책의 핵심 과제로 등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군비 증강 논리가 힘을 얻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의 본래적 의미와 한반도 군축의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커서 소개드립니다. 표는 생략했습니다. 한글 파일은 군축 자료실에 올려두겠습니다.

서 론

상호방위조약 체결 50년이 지난 오늘날 한미동맹은 전환기에 처해 있다.  미국은 대중 견제를 주목적으로 하는 지역동맹을 원하는 한편, 보다 대등한 동맹관계를 원하는 한국은 또한 동맹이 한반도의 안보에 국한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반미감정이나 안보의식이 해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과거 어려웠던 시기에 전적으로 한미동맹에 의지했던 ‘무조건안보’에서 이제는 군사주권이나 대등한 한미관계를 포함하여 이른바 ‘안보의 질’도 추구하는 의식의 성숙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국의 주한 미군 재배치 및 감축계획 발표는 한국민의 안보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국민의 상당수가 주한미군 재배치나 철수 이야기만 나오면 불안해 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해외주둔 미군의 재배치계획은 한국군의 방어능력에 대한 신뢰와 GPR이라는 새로운 국방정책에 의거한 것이지, 한미관계의 변화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반미정서를 지켜본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내지 재배치계획을 발표하면서 한국민들의 대미 의존심리를 십분 활용하였다.

오늘날 자국의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자력국방’을 할 수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시작된 ‘자주국방’에도 불구하고,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의 주한 미 지상군을 근간으로 하여 한미동맹이 국가안보의 필수적이라는 뿌리 깊은 대미 안보의존의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최근 정부의 자주국방정책은 미군 재배치와 12,500명 감축에 대응하는 한국의 독자적인 전략기획 및 작전수행능력 배양보다는 미 첨단무기 구입이라는 군비증강책으로 변질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자주국방을 논의함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다.  한미동맹은 한미 우호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수단인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화해협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사력균형(가능하다면 우위)을 통한 국가안보를 추구하는 비관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군사적 접근보다 군비통제 및 군축을 통해 ‘공동안보’를 모색하는 ‘포괄적 안보’ 접근방식이 탈냉전기의 시대적 요청이다.

남북한 군사력균형

국민들은 북한의 안보위협이 상존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주한미군 감축에 대응하고 자주국방을 구상함에 있어서 먼저 (남북한) 군사력균형을 새롭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국군은 교육훈련, 장비지원, 병참보급, 대비태세 등 조직적 역랑에서 세계적 수준으로서 인민군을 압도한다.  특히 최근 신기술(ET) 혹은 군사기술혁신(RMA)의 결과 정보화전력이 전력평가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력승수(force multiplier)가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태적 분석의 기본 모델로 널리 이용되는 ‘란체스터 기하급수법칙’(Lanchester Square Law)도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화력×기동력×정보력’의 공식을 개념화한 것이다.  인민군이 기계화수준에 있다면, 한국군은 지금 C4I를 중심으로 한 ‘정보화’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정보화전력을 경시하고 단순화력을 중시한 ‘전력지수’가 부적절한 방법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주한미군이다.  1988년 기준 주한미군의 전력지수는 인민군의 5%(한국군의 8.3%)로 평가되었으나, 군사투자 재고는 1990년대초 159-160억불로서 국방부가 추정한 1990년 북한 투자비누계의 36.5%에 달하는 규모였다.  주한미군의 조기경보 등 정보화전력을 높이 평가하나, 이를 전력지수에 반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력지수는 또한 시간 개념이 배제된 일정시점 화력의 유량(flow, 電力의 KW)이지 지속성을 포함한 화력의 저량(stock, 電力의 KWH)이 아니다.

한편 군사력균형에 대한 동태적 분석은 전쟁/갈등의 시나리오에 의하여 결과를 예측하는 워게임(war game)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는 전투력의 각종 승수효과를 입력하고 교전쌍방의 사상자수 및 이에 따른 전선의 변화를 예측하는 방법이다.  정교한 워게임은 기밀로 분류되어 있으나, 통상적으로 기후·일기·지리·지형 등의 환경요인과 작전 임무, 공격·방어 간의 차이, 기습 효과 등 작전요인을 종합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산악과 구릉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이 방어에 유리하고, 결정적인 병과는 포병의 지원을 받는 보병임을 일깨워준다.  ‘병력 대 공간의 비율’(space-to-force ratio)을 볼 때 전선이 정비되고 인접부대와 연계가 공고한 현재 남북의 대치상황은 한국전쟁 후반처럼 진지전이 될 것이다.  설령 인민군이 돌파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근접공중지원·이동식 대공방어·병참보급의 결핍 등으로 인해 소련식의 작전기동군(OMG)의 운용이 어렵다.  

한편 한반도의 상황에서 남한은 수도권이 DMZ에서 가까워 전략적 종심이 짧다는 약점을 안고 있어 기습에 의한 인민군의 전격전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인민군의 성공적 기습이나 화학전 감행은 ‘최악의 시나리오’로서, 남한의 성공적 방어를 위해 기습에 대비한 ‘조기경보’ 능력이나 대비태세는 충분하다.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전방의 보병군단들로만 공격을 감행해야 하기에 충격이 약하고, 돌파력을 위하여 제2선의 기갑/기계화부대를 동원할 경우에는 기습의 효과가 사라진다,  다만 수도권이 전선에 인접해 있어 북한은 장사정포와 같은 전술무기로도 수도권을 파괴할 수 있는 전략무기 효과의 이점을 누리고 있다.
군비투자는 군사력의 정태적 비교를 위한 보다 객관적인 척도이다.  국방부도 단순개수비교와 전력지수 외에 투자비누계, 즉 ‘군사자본재’(military capital stock) 비교를 이용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첫째, 한국군의 투자를 오랫동안 책임진 미 군원을 배제하고 ‘율곡사업’에 의한 전력증강계획만을 투자로 치부했다.  둘째, 북한의 국방비를 과대평가했다.  셋째, 군사자본재의 감가상각을 고려하지 않았다.  본 연구자는 ‘국방비+군원’을 총국방비로 규정하고, 북한의 총국방비를 여러 가지 가정하에서 추정하였다.  그 결과 연간 남한이 총국방비에서 1976년경부터, 그리고 투자비누계에서는 1980년대에 우위를 점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한의 군비증강에 필적할 수 없었다.  경제쇠퇴 및 공산권붕괴에 따른 군사원조의 감축 때문에 1990년대 북한의 군비지출은 크게 감소하였다.  북한의 무기수입액은 1990년대 연평균 1억불 미만으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북한은 군사력의 현대화·정보화에 착수하지 못하였으며, 소련의 말기와 같이 각종 구식 무기를 비축해 놓았을 뿐이다.  더욱이 심각한 에너지난과 외화부족 때문에 노후화된 무기나마 효과적으로 운영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감퇴되었다.  그 결과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남한은 북한에 비해 잠재적으로는 물론 전쟁수행능력에서도 우위에 있다.  사실 남한은 근래 주변국의 잠재적 안보위협에 대처하는 미래지향적 군비증강도 도모하고 있으며, 계획중인 상당수의 첨단무기는 북한보다는 향후 일본 등 주변강국의 군사위협에 대비한 것이다.  주한미군 감축 결정은 이러한 군사력균형 판단에도 기초를 두고 있다.  군사력에서 남한이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부문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북한 따라잡기’ 식의 양적 증강에 치우치는 한편 미국에 의존하는 이른바 ‘독자적 전략기획 및 작전능력의 부재’일 것이다.

북한은 남한의 자본집약적 증강에 대처하여 병력증강이라는 ‘노동집약적 군비증강’을 추진했고, 최근에는 전쟁수행능력보다는 재래식 및 비재래식 대량살상/파괴무기 등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억지전력에 치중하는 등 ‘비대칭적 군비경쟁’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최후수단으로서의 비재래식 억지능력 외에도 적어도 남한에 대하여는 또 다른 재래식 억지력을 지니고 있다.  북한은 특히 제1차 핵위기 이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즉 수도권을 타격할 수 있는 240mm ‘방사포’와 170mm 자주포 등 500문의 대구경포대를 전진배치하고 있다.
요컨대 남북한간에는 남한의 재래식 ‘전쟁수행능력’ 우위 대 북한의 ‘억지력’이라는 ‘비대칭적 군사력균형’ 혹은 ‘위협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정보화를 중심으로 하는 남한의 재래식 군사력증강이 대북 억지의 측면에서 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예컨대 서울을 타결할 수 있는 장거리포대 및 미사일의 위협은 군비증강만으로써 해소하기 어렵다.  모든 북한의 위협이 제거된 ‘절대안보’란 달성하기 어렵다.  절대안보를 위한 남측의 군비증강은 북으로 하여금 더욱 다량의 값싼 공포무기를 갖추도록 부추기게 된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주한미군은 1953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한미군사동맹의 상징이자 전쟁억지력의 핵심으로서 한반도의 안보와 동북아의 안정에 필수적인 요인이 되어 왔다.  앞으로 주한미군의 역할과 관련하여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한미동맹체제의 장래 비전을 정립하는 일이다.  한미 양국은 동맹의 성격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세계전략 및 아시아전략과 한국의 국지전략을 조화하여 양자간에 일치된 이익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과거 수차의 주한미군 감축이 모두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따라 추진되었다.  앞으로는 이 문제를 한미 양국이 긴밀한 협조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미 지상군 재배치 및 감축은 한국의 안보에 큰 영향이 없다.  한국군의 증강과 경제난에 따른 북한의 군사력 쇠퇴로 인해 주한 미군은 ‘과잉 억지력’의 측면이 강하게 되었다.  또 병력은 철수하더라도 장비는 ‘사전배치’ 상태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을 겨냥하는 북의 장거리포대에 대한 대응책 외에는 한국군의 대체전력 확보 논의는 시급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오히려 한국군의 자주의식 배양과 독자적인 전략기획 및 작전수행능력 제고의 기회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남북한 군비통제 및 군축을 추진하는 기회로 선용할 수 있다.

일부 국민들이 우려하는 군사안보위협이나 나 체제불안 등 ‘안보공백’은 ‘마음 속의 공백’이다.  물론 국가안보에는 심리적인 차원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허위의식은 과감히 불식되어야 하며, 만약 북한측이 남한의 능력이나 의지를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현실을 보다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

향후 한미동맹의 성격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정세와 밀접히 연관된다.  국가간 힘의 구도를 중심으로 향후 동북아 안보환경을 살펴보면, 비록 한국이 세계 12위의 중진 경제강국으로 부상했지만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약소국이다.  남북한과 타이완 3약국이 높은 병력비율이나 군비부담을 유지하더라도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균형자(balancer) 역할도 하기 어렵다.  동북아의 열강이 힘의 정치와 군비경쟁에 나설 경우, 그 최대의 피해자는 한국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국력신장과 이에 따른 중·일간의 갈등 및 나아가 미·중간의 패권경쟁은 한국의 군사안보전략에 시련과 도전이 될 것이다.  한국은 미·중간의 군사적 갈등이 발생할 경우 참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중국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위하여 미·일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참여하여야 한다.  중국이 2015-2025년경 경제총량에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는 <표 2>의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또 비록 경제총량에서 앞선다 할지라도 군사력에서는 여전히 열세이며, 보다 중요하게는 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이 보여주듯이 경제생산성·과학기술의 우위·사회문화적 가치에서 다른 나라들을 이끌지 못한다면 헤게모니를 누릴 수 없다.
그러나 한·미동맹에 주로 의존하여 왔던 한국의 안보전략은 장기적으로 보다 다변적인 안보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은 남북한 및 동북아의 군비통제와 군축을 적극 주도하여야 하는 한편 주변국에 대한 최소한의 자위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잠재역량의 배양, 특히 연구개발 사업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이 앞으로 전개될 미중대결에서 균형자의 역할을 택하든가 혹은 중립국이 되는 개연성은 매우 낮다.  장기적으로 한국은 대중 갈등은 물론 통상압력이나 방위비분담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미동맹 및 주한미군에 대한 냉철한 비용대비 효과 분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주한미군 없는 한미동맹’은 얼마든지 가능한 대안이 될 것이다.

결 어

자주국방의 기본은 자주의식에 있다.  자주국방은 자력국방은 아니다.  자주국방의 요체는 대미의존을 극복함으로써 통일조국의 독자적이고도 평화지향적인 정책과 철학을 갖추는 것이다.  현재의 비대칭적 한미 동맹구도와 대미 안보의존 심리는 과도하다.  한국민과 정부 모두의 ‘위기관리’ 체제와 안보외교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대미의존을 극복해야 한다.  향후 한미 동맹체제, 특히 미군의 재배치에 따라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등 동맹군 지휘체계, 무기개발 및 구매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시기가 올 것이다.  나아가 자주국방은 ‘주한미군이 없는 한국의 안보’를 구상하고, 궁극적으로는 한미동맹의 유용성도 냉철하게 재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주국방은 남한이 독자적인 전쟁억지력을 확보해야 하나, 이와 동시에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자극하여 새로운 군비경쟁을 야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북한은 군사대립과 군비경쟁을 극복하고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및 군축을 통한 ‘공동안보’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대승적인 정치적 해결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남북한의 독자적인 안보정책은 비생산적인 적대와 군비경쟁을 낳을 뿐, 결국 각자의 안보를 증진시키지도 못했다.  GDP 15-20%로 추정되는 북한의 군비지출에 비해 3% 미만인 한국의 군비부담이 높은 편이 아니자만, 근비증강에 이미 한계효용의 체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성 공단 사업의 진척과 2004년 6월 장성급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장기적으로 군비통제 및 군축이 진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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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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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비핵화는 '말보다 실천'이 관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3차 6자회담이 지난 6월 26일 베이징에서 막을 내렸다. 과연 이번 회담의 성과는 무엇인가. 북핵 문제 해결은 가시권 안에 들어온 걸까.


북한 핵포기 선언 용의 시사

6자회담 참가국들은 대체로 '의미있는 진전'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북한이 2003년 1월 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 북핵 공방이 재연된 이후 처음으로 핵동결을 위한 행동계획이 마련되고 논의된 게 이런 평가의 근거다. 중국 외교부의 장치웨(章啓月) 대변인은 "(북핵 동결과 보상에 관한 논의가)실질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북핵 공방'이 3차 6자회담에 들어 실질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음을 역설한 것이다. 한국측 대표단장인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당사자들이 안을 낸 것은 처음이고 이견 차이도 크다"면서 "논의해볼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됐음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3차 6자회담을 정리하는 의장성명에서도 실질적인 성과에 대한 기대감이 배어나온다. 의장성명에서도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말 대(對) 말'에서 '행동 대(對) 행동'의 단계적인 과정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실무그룹회의를 열어 비핵화를 위한 첫단계 조치들(First steps)의 범위와 기간, 검증, 상응조치를 정의한다"고 사후 계획도 밝혔다.

이런 대화 분위기 조성은 무엇보다 미국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의 핵폐기)원칙'을 탄력적으로 적용한 데 기인한다. 미국은 'CVID원칙' 대신 '포괄적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최종목표는 CVID이지만 중요한 것은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접근법"이라고 강조했다. 실질적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술적 후퇴란 의미다. 결과적으로 "만약 미국이 CVID를 고집한다면 어떤 결과물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6월 15일 외무성 논평)해온 북한의 체면도 살려준 셈이다. 미국의 융통성에 북한도 즉각적으로 호응했다. 북측은 "조선반도의 비핵화가 최종목표임을 밝힌다"면서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면 모든 핵무기 관련 계획을 투명성 있게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조건을 달았지만 핵포기 선언 용의를 시사한 것이었다.

북핵 타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북핵 해결을 위한 제안에서도 북한과 미국이 다른 화법을 쓰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하나같이 조건부 수용론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협상의 여지는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6자회담의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선 북한의 핵폐기가 이뤄져야 한다. 첫 단계가 핵동결이다. 핵동결은 검증이 수반된다. 이것이 바로 6자회담의 중요한 의제다. 비핵화 실현을 위해서 핵시설 사찰 범위와 방식이 주요 논란거리다. 핵동결에 따른 상응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미국과 북한 사이의 '모순'이다. 북한과 미국이 제시한 해결방안을 비교해보면 이런 관계는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핵사찰 범위와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계획을 동결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북한은 이에 반대한다. 평화적 핵활동은 동결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은 종전엔 핵위기의 출발점이 된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다만 북한은 5MWe 원자로와 더불어 방사화학실험실(핵재처리시설), 이 실험실에서 추출한 플로토늄을 동결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했다. 북한은 그동안 이 부분은 동결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계획을 동결대상에 포함시키지 않고, 평화적 핵활동은 동결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협상 진전을 막을 수 있는 요소다.  북한이 HEU계획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 미국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핵동결 검증방법도 논란거리가 될 전망이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에 반대하고, 6자회담 참가국에 의한 사찰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은 IAEA 시찰의 근거가 되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다시 가입하지 않고, 핵동결에 대한 검증을 받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항구적으로 핵활동을 감시받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 제한적으로 핵사찰을 수용하겠다는 계산이다. 반면 미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IAEA 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제안은 북한 의지 시험용?

북한은 핵동결 대가로 요구한 보상안도 만만치 않다. 2백만㎾ 상당의 에너지는 열량 기준으로 중유 4백만t에 해당한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이 연간 제공했던 중유 (50만t)의 8배 규모다. 북한의 요구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제공을 약속한 경수로 발전소 2기의 발전량에 해당한다. 미국의 참여없이는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규모의 에너지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을 제외한 한-중-일-러가 에너지를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대신 보상안으로 ▲테러국 제외 ▲경제제재 완화 ▲외교관계 정상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타결이 불투명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국이 요구한 핵폐기 입장을 '동결과 보상안'의 실시 뒤에나 가능하다고 밝힌 점은 북핵협상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미국은 북한이 핵폐기 입장을 먼저 밝혀야 하고, 또 핵동결은 핵폐기의 일시적 과정이 돼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6자회담의 결과가 북한과 미국의 외교적 간격을 좁혔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뒤늦게 제기되는 이유다.

여기에서 정작 궁금증을 낳게 하는 것은 미국의 태도다. 미국이 북한에 제시한 제안 내용은 사실상 한국안을 상당히 존중한 것이다. 다만 핵동결 기간과 관련, 완전한 핵폐기 준비기간으로 '3개월 이내'라는 조건을 달았을 뿐이다. 켈리 차관보는 "미국안은 한국안을 기초로 만들어졌다"면서 "단 핵폐기를 위한 사전 준비기간은(동결기간)은 3개월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연한 태도 변화는 북핵 해결을 위한 한국 정부의 설득과 한반도 주변의 압력이 주효한 것일까. 미국의 제안은 북한의 핵폐기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용이라는 측면도 있다고 미국 관리들은 전한다. 1, 2차와는 달리 3차 6자회담에서 대표단의 본국 브리핑조차도 중국 현지로 자리를 옮겼다. 이 의미는 종전의 협상전략과 전혀 변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뉴스메이커 5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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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를 밝힌다는 게, 깜빡했네요.^^
[뉴스 메이커]에서 퍼왔습니다.
 

프랑스 석학 자크 데리다 강연회 현장 중계
‘말’이 배반한 진실을 캔다

ⓒGAMMA
‘소유권 없는 텍스트의 저자’로 유명한 자크 데리다는 말과 글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독자에게 ‘전이’한다.
지난 6월9일, 프랑스 동북부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크 블로흐 대학의 한 강의실. 강의실에 10여 분 늦게 나타난 강연자는 우선 급한 대로 문가에 놓인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한 교수가 이 날 수업 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던 터였다. 책상에 쭈그리고 앉은 이는 다름아닌 자크 데리다.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에 자신의 권위를 각인한 해체주의의 거장이다. 이 날 강연의 주제는 ‘자크 데리다 주변에서’였다.

곧바로 한 여학생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이 날 초청 강연자가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철학계의 거두인 만큼 거창한 소개가 있을 법한데 생략. 문간에 앉아 있던 데리다는 얼른 가방을 뒤져 수첩을 꺼낸 뒤 학생의 말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드나들어 정신 없고 옹색한 자리인데도 데리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중간에 누군가 귓속말을 건넨 뒤에야 그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앉을 자리는 여러 사람이 일어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계단 강의실의 긴 의자 한 구석. 그는 훌쩍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어 빈자리에 착지했다. 순간 좌중에서 웃음이 일었다.

‘해체’는 그의 텍스트에서만 아니라 이미 그의 몸짓에서, 그가 참석한 수업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거추장스런 의식과 절차를 해체한 것이다. 주최측도 마찬가지였다. 초대된 인사를 위해 굳이 따로 좋은 자리를 마련하거나 챙겨주지 않았다.

무신경은 자유로움이었다. 적어도 오늘날 프랑스 대학생이라면 데리다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의자 등받이를 뛰어넘었을 때, 1968년 이후 프랑스 사회에 스며든 ‘반권위’에 탄복해서 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젊은 날 한때 지네딘 지단 같은 축구 선수를 꿈꾸었던 73세 노인의 놀라운 운동 신경에 감탄하며 웃었을 것이다.

이 날 강연에는 학생과 선생이, 저자와 독자가 따로 없었다. 자크 데리다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였다. 아니 듣기 위해 말하는 자였다. 오전 11시30분부터 시작해 저녁 7시30분까지 계속된 이 날 강연의 주요 발표자들은 그의 쟁쟁한 동료 철학자들이 아니라 데리다를 공부하고 데리다를 배우려는 학생들이었다.

석사 및 박사 과정 대학원생 4명이 높은 강단에 올라 서로 돌아가며 주제를 발표했고, 데리다는 이들의 발치 아래에서 그 어떤 학생보다 열심히 발표를 받아적었다. 그의 말마따나 ‘소유권 없는 텍스트’의 작가, ‘쓰되 내것이라고 굳이 서명하지 않는’ 작가 자크 데리다와 그의 철학이 있을 뿐이었다. ‘네가 데리다를 알아?’라고 누가 딴죽을 걸고 이죽거리겠는가.

“얼굴보다 글이 낫다”


ⓒ류재화
지난 6월 초순 자크 데리다를 초청해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라는 강연회를 개최한 작은 서점 클레베(맨 위). 위는 서점에 쌓여 있는 자크 데리다의 저술들.
자크 데리다의 이 날 강연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라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다. 첫날은 고등학교 학생·교사 들과 함께 ‘가르치다’와 ‘전수하다’ 개념을 놓고 토론했다. 데리다가 개인적으로 갖는 두 가지 고유한 경험, 즉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책으로써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저자로서의 경험을 토로하며, 말과 글의 경계에 관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일방적 전달 대신, 그는 ‘전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저자란 텍스트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다. 항상 무엇인가 벌려진 틈을 찾는 그의 철학적 변주는 ‘해체’의 가장 원천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자신이 하는 강연의 대부분을 미리 글로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가 행한 강연과 심포지엄은 현장에서 녹음되어 바로 출판된다. 그의 저서가 100 권이 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트라스부르 시와 클레베 서점이 함께 주관하는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대화’는 몇몇 테마를 가지고 매달 다양한 작가들이 독자들과 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클레베 서점은 시골의 한 작은 서점이지만 단순한 서점은 아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 서점에는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을 르네 지라르·레지스 드브레·르 클레지오·아멜리 노통·줄리아 크리스테바·아시아 제바르·아민 말루프 등 프랑스 인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인사들이 다녀갔다.

자크 데리다는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책에도 사진을 거의 넣지 않는다. 사진거부증에 대해 하도 많은 질문을 받은 터여서, 데리다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얼굴보다 글이 낫다는 판단에서다”라고 농을 친다. 사진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 ‘저자’ 개념에 대한 각별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스트라스부르는 인구 30만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유럽의 심장부 구실을 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입법·사법 기관 및 유럽 인권위원회가 모두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자크 데리다가 결성한 작가국제회의와 철학자국제회의 사무실도 모두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스트라스부르 시가 내놓은 각종 안내 책자를 보면 네거리·교차로라는 뜻의 ‘스트라스부르’를 유난히 강조한다. 갖가지 이질적인 사고와 철학이 만나는 교차로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 한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스트라스부르가 ‘의회’의 도시라는 점을 부각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밑줄을 긋는 ‘의회(parlement)’란 의원들의 집무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서로 부딪치고 논박되는 ‘말하는(parler/parlementer)’ 공간이라는 의미다. 어떤 한 단어의 이면에서 철학적 주제를 곧잘 이끌어내곤 하는 자크 데리다는 일반 시민들과 가진 토론회에서도 스트라스부르를 은유해 자신이 최근 강조하는 ‘주도권(주권)’ 개념을 언급했다. 즉, 무엇인가 ‘교차’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권이란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주도권’이 아니라 상호의 적 혹은 상호 교섭자가 동시에 갖는 주도권을 뜻한다. 1인이 갖는 주도권이 아니라, 2인이 동시에 갖는 주도권이 현실 정치에서 가능할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유럽과 미국 문제, 세계화 문제 등을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견해도 이 ‘주도권’ 개념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이 뜸했던 자크 데리다가 최근 다시 바빠진 것은 9·11 테러 이후 세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독일의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와 나눈 대담집 <9·11이라는 개념>이 최근 프랑스어판으로 출간되었는데, 데리다는 9·11을 어떤 ‘사건’이 아니라 ‘개념’이라고 정의한다. 9·11 테러라는 재앙적 사건은 그것이 과거가 되면서 트로마티즘(외상)을 유발한다. 그러나 9·11은 미래에서 오는 트로마티즘이다. 무엇인가 더 오리라는 것이다.

불가능의 가능성 역설하는 ‘마지막 검객’

알제리계 유태인인 데리다는 반유태주의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칼날을 들이댄다. “오늘날 가장 참아줄 수 없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은 이스라엘 샤론의 정책을 더 이상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유태주의만 문제 삼지 반유태주의가 왜 생기는지 자성하지 않는 미국과 시나고그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정치는 더 공고해지고 있다”라고 그는 일갈한다.

최근 데리다는 ‘문화와 독립’이라는 프랑스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심하게 말하면 냉전 시대가 오히려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늘날의 세계는 최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트랑작시옹(교섭·transaction)’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그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도권이란 단순화하면 교섭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다”라고까지 말했다. 그가 말하는 트랑작시옹은 깃발을 내리고 투항하는 식의 교섭이 아니다.

아카데미즘과 권위 체계에 정면 공격을 가했던 1960년대의 ‘검객들’(라캉·알튀세르·푸코·바르트·들뢰즈 등)이 모두 사라진 지금, 자크 데리다는 그 마지막 생존자로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시대적 예언자도, 메가폰을 들고 외치는 ‘사르트르’도 아니다. 다만 그는 회의하고, 주저하고, 우회하며 끝없이 ‘진실’을 찾아 나서고 있을 뿐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더듬거리면서라도 끝없이 파고들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우리가 파야 하는 우물은 ‘바닥 없는 우물’일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2004/07/08 767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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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근황을 전해주는 반가운 기사가 있어서 퍼왔습니다. 작년 말 데리다가 오늘내일한다고 해서(실제로 프랑스 신문들은 데리다 추모 특집호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군요.
한 가지 더. [법의 힘]은 다음 주 월요일 쯤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알라딘에까지 이 책이 언제 나오는지 문의를 하셨다고 하는데, 이처럼 늦어져서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마침내 출간된다는 소식이 와서, 저도 오랜 짐을 벗게 되어 후련하기 그지 없습니다.
 

유시민의 자기반성은, 사실 호도의 문제에 앞서, 그 정치적 기민함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시민의 반성문의 논지는 두 가지다.

첫째, 인사청탁 파문과 장복심 의원 공천의혹의 문제는 사실을 따져보면 아무런 기사거리나 문제거리도 아닌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를 사건으로 만들었고, 열린우리당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둘째, 따라서 사실 문제거리도 아닌 것을 문제거리로 삼고 있는 언론들 및 여론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리에 휘말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앞으로 언론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연일 언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발표된 한길 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한나라 29.5%, 우리당 27.1%, 민노당 18.1%의 지지도를 보여주고 있고, 국민의 21.8%가 '노무현 대통령 복귀후 최근 지지 정당을 바뀌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또 열린우리당 지지층 이탈자 가운데 28.4%가 한나라당으로, 45.5%가 민주노동당으로 옮겨갔다.

나는 유시민의 '반성문'은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가 보여주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지지도 하락에 대한 매우 공세적인 대응이라고 본다. 유시민은 자신이 잘못 했다, 열린우리당이 잘못 했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보기에 열린우리당과 그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의 술수에 놀아났다는 것, 경계의 실패를 통해 그들이 공격할 여지를 주었다는 잘못이 있을 뿐이다. 서영석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에 대한 적개심'([한겨레] 신문)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유시민의 반성의 논리와 일관성이 있는 태도다.

그들의 태도는 열린우리당이 택한 전술적 지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열린우리당의 당면 목표는 더 이상의 지지도의 추락을 막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택한 방법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경계선을 더욱 확실히 하는 데 있다. 이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첫째, 열린우리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에게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각인시킴으로써, 그들의 동요를 차단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둘째, 최근의 문제들을 수구언론의 정치적 술책의 (기만적) 효과로 부각시킴으로써, 열린우리당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도덕적 비난을 무마하고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조선일보]의 술책에 손쉽게 말려든 언론의 동업자 의식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는 이 더러운 족속들아! 악의 화신인 [조선일보] [동아일보]와의 위대한 투쟁을 망각하고 너희들이 나를, 우리 열린우리당을 비난할 수 있느냐? 너희들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하기 전에 다시 수구언론, 수구세력과의 성전에 나서라!' 그의 반성문에서 이런 성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왜 이런 반성문이 나왔을까? 상식적인 생각에 따르면 사과 한 마디라도 담겨 있는 게 정상적일 텐데, 왜 유시민은 이런 공세적인 '반성문'을 썼을까? 그가 상식을 몰라서 그랬을까? 그가 원래 비도덕적이어서 그랬을까? 이 질문은 결국 위에서 내가 제시한 열린우리당(적어도 그 지배적 분파)의 전술적 지향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다.

우선 사과 또는 잘못에 대한 시인은 무언가 바로잡을 것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유시민이 반성문에서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은 이유 또는 경계의 부족을 반성하고 있는 이유는 유시민이나 열린우리당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정세에서 바로잡아야 할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다시 두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 노무현 정권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핵심 정책을 생각해보자.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거부나 삼성의 후견인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기업도시 건설방안, 파병강행에 이르기까지 최근 열린우리당이 추구하고 있는 핵심 정책들은 사실 지배 계급, 독점자본의 정책 바로 그것이다. [조선]이나 [동아] 또는 [중앙]이 이 문제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들에 관해 열린우리당에서 거의 아무런 재검토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열린우리당=개혁정당(?)이라는 등식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다음 유시민의 '반성문'을 이끌어낸 직접적인 사안들을 보자. 이 사안들은 사실 최근 대중적인 분노를 가장 크게 불러일으킨, 또는 언론의 선정주의적 취향을 가장 자극한 사안들이기도 하다. 장영달 체포 동의안 부결이나 장복심 공천의혹, 서영석 인사청탁 파문 같은 사안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사안들은 말 그대로 각 개인이나 정당의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로, 어느 나라, 어느 사회, 어느 집단이든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또한 적을 가장 편하고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니 [조선]이나 [동아] 등이 이 문제에 불을 켜고 매달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따라서 유시민이나 열린우리당이 이 문제들에 관해 공개적으로 사과한다면, 그건 사실 [조선]이나 [동아]가 원하는 결론을 스스로 매듭지어주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시민이 보기에는 꼬리 한 토막을 잘라냄으로써 정권 핵심부로 파장이 번지는 것을 막고, 이 문제는 사실은 적들에 의해 만들어진 또는 과장된 문제임을 지적함으로써 적과 우리 사이의 경계선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는 것이 현재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적절한 방안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어떤 것인가? 결론은 유시민에 대한 질문으로 대신하겠다. 당신은 정말 [조선] [동아]와 선을 긋고 싶은가? 그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싶은가?(그는 5년 동안이나 [조선]과 일체의 대화나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파병철회안을 제기하지 않는가? 왜 아파트 분양원개 공개를 거부하는가? 왜 기업도시 방안을 추진하는가? 바로 이 정책들이야말로 [조선] [동아]와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쟁점들인데, 이를 통해 당신은 [조선] [동아]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셈이 될 텐데, 당신은 왜 고작 [조선]을 제대로 경계하지 못했다고, 웃기지도 않는 반성문 나부랭이를 쓰고 있는가? 도대체 [조선] [동아]와 당신이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당신들이야 사실은 이복형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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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6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저런 사람들이 국가의 중요한 정책들을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이겠죠.
그리고 정치는 원래 그런 거야하고 달관하듯 방관하거나, 저런 사람들의 정책들이 그래도 낫다고 쉽게 면죄부를 던져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역시 문제입니다.

메시지 2004-07-0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켜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협오스럽습니다. 특히 한동안이라도 기대를 했던 세력들이 사이비로 판명되는 모습을 보면서 더 협오스럽게 보입니다. 그래도 쭈욱 지켜보겠습니다.

릴케 현상 2004-07-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우리당 이탈자들 중의 반 가까이가 민노당으로 간 것은 지지층 조정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걸로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지금 보니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민노당의 지지율이 내려간 것도 인상적이군요. 한때 민노당이 한나라당과 소수점자리에서 접전했는데...
어쨌든 열린우리당에 자꾸만 왜 진보적인 제안을 하지 않냐는 질문은 할 필요 없지 않을까요? 개혁과 진보가 다르다는 건 잘 아시면서 왜 그런 걸로 공박하는지 가끔 이해가 안 됩니다. 약올리려고?
조선동아와 열우당이 다를 게 없다고 자꾸 말씀하시면 뭐가 좋아집니까? 조선동아식으로 해서 6자회담 자체가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열우당이 하는 거 보다가 조선동아가 하는 얘기 들으면 그나마 세상이 훨씬 살벌하게 느껴집니다. 열우당 얘기를 다시 들으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무능하게 느껴져 답답하지만 그만큼의 차이가 있는 거 아닐까요?
열우당이 지지율 떨어지는 것만 거론하고 민노당도 떨어졌다는 것(열우당 이탈자가 그만큼 민노쪽으로 갔는데도 그렇다는 건...) 한나라당이 올라가는 것을 종합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것은 발람스님이 편향된 입장인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물론 공적인 논평을 하는 거 아니다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배운 사람에게는 좀 더 요구하는 게 인지상정이니 저로서는 이런 불만을 얘기하게 되는군요.

balmas 2004-07-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시지 님의 말씀에는 저도 동의를 하고, 여름아이 님은 특유의(^^) 비판적인 글을 달아주셨는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는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의 변화추이에 대해 주관적으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 변화추이에 대해 두 정당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이러한 반응이 현재의 정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조선동아와 열우당이 다를 게 없다고 자꾸 말씀하시면 뭐가 좋아집니까?"라고 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양자가 그래도 차이가 있다', '그래도 열우당이 있으니 이만큼 하지 않느냐'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양자의 차이를 점점 더 없앤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개혁정당'이라는 게 원래 기회주의적 성격을 다분히 가지기 마련이고, 이런 기회주의적 성격은 객관적인 강제를 통해 교정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사실 이런 글은 제가 쓸 게 아니라 여름아이 님 같은 분들이 쓰셔야지요. 님 같은 분들이 너무 오냐오냐해주니까 노무현 정권이 점점 더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것 아닙니까?

릴케 현상 2004-07-0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민노당이 더 잘해서 열우당이 교정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가요? 발람스님은 열우당이 한날당과 같지 않지만 더 잘하라고 같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럼 사실을 호도하는 거죠. 그러니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거구요.
솔직히 열우당에 실망해서 저도 신경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실망한 측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열우당에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도 양다리로 진보정당에 미련을 보이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저랑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열우당에 실망하는 거야 그래도 되지만 진보정당에도 실망하면 저 같은 사람은 그냥 생활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정치에 관심을 끊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진보주의자들은 기껏 열우당 까는 데나 열올리고 있으니 갑갑합니다.
왜 저 같은 사람이 더 열우당을 강제해야 합니까 진보주의자들이 해야지요. 그런데 진보주의자들은 열우당 까는 걸로 강제한다고 하지만 그게 진실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발람스님은 지지율의 변화추이에 보이는 정당들의 반응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 진보정당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열우당을 너무 봐줘서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하던가요?
 

[창비 웹 매거진]

김선일씨 피랍-살해 사건의 의미    
  추가파병결정 철회와 한미동맹의 치수조정을 위해

 

 한기욱    

탄핵국면 못지않은 위기


 김선일씨의 피랍-살해 사건은 여러가지 의혹에 휩싸여 있다. 이런 의혹들은 미국의 요청(강압)에 따른 한국의 이라크 파병(간접적으로는 주한미군 재배치와 북핵문제)이라는 국가의 중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견해, 그리고 타자와 민족에 대한 입장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기로에 선 한미동맹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어쩌면 파병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사태는 얼마 전의 탄핵국면 못지않은 위기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태에서 소중한 교훈을 배우고 그 위기 국면에 지혜롭게 대처하면 한미동맹의 일방적 예속관계를 상당히 교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두 번 죽임을 당한 김선일씨에 대한 국민적 애도

김선일씨 피랍-살해 사건이 한국인들에게 왜 이렇게 큰 충격과 비감을 안겨주었는지 한번 차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경위가 어떻든 김선일씨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고 처참하기 때문에 동포로서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대학원에 진학할 학비를 벌기 위해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라크에서 미군의 도급업체인 가나무역 직원으로 일하다가 불행하게도 이라크 저항세력들 가운데 가장 과격한 알 자르카위(Al-Zarkawi) 그룹에 납치되어 20일 이상 감금되었다가 참수당했으니 그 안타까운 사연에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하지만 김선일씨의 죽음에 국민들이 애도의 감정과 더불어 엄청난 울분을 쏟아낸 것은 무엇보다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노무현 정부의 무책임하고 안이한 대응 때문이다. 추가파병 결정을 선언한 정부로서는 이 사건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지만, 24시간의 말미를 받아놓고 대통령,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그리고 외교통상부 장관이 연달아 추가파병 결정 재확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김씨를 얼른 죽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추가파병 결정을 철회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알 자르카위의 반감을 촉발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응했어야 하는데, 정부 당국자들은 협상 전에 이미 김씨를 포기한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김선일씨를 죽인 것은 알 카르자위 집단이지만 노무현 정부 역시 김씨의 죽음을 방관하다시피함으로써 그 죽음에 동조했다. 김씨는 두 번 죽임을 당한 격이다. 국민들의 절절한 애도는 두 번 죽은 김씨의 억울한 사연 때문이며,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것은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김선일씨 사건은 한국의 9ㆍ11

어떤 면에서 김선일씨 사건은 한국의 9ㆍ11이다. 비록 소규모이지만 하나의 국민적 비극을 통해 타자와 타민족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시험받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국의 경우 부시 행정부의 매파세력은 9ㆍ11로 말미암은 국민적 애도감을 편협한 애국심으로 전화하여 타민족을 침략하는 받침대로 사용했다. 김선일씨 사건의 경우 국민들의 애도와 분노가 편협한 애국심으로 전화될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싸이버 공간에서 국군의 전투력을 증강하여 김선일씨를 죽인 테러리스트 집단을 응징ㆍ보복하자는 의견이 강력하게 대두되었고 지금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부 있는 듯하다. 또 노무현 정부의 일각에서도 한국군의 안전을 위해 전투력을 보강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의 반응은 미국의 9ㆍ11의 경우와 달리 이라크인들한테 보복하자는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번의 국민적 애도와 분노가 타자와 타민족에 대한 포용으로 나아갈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김선일씨의 잔혹한 피살에 흥분하여 이라크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고 보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김선일씨의 비극과 같은 것을 매일 당하고 사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김선일씨의 죽음에만 광분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반응이 균형잡힌 것인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규탄하듯 알 자르카위의 납치 및 살해가 천인공노할 '반인륜적'인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그런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하루에도 몇번이나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미국을,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의 이라크 포로에게 온갖 고문과 수치를 안겨주고 무고한 이라크 민간인을 대수롭지 않게 죽이는 미군을 돕기 위해 미국,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병력(3000명)을 증파할 예정인 것이다.

미국의 반인륜적 행위들

 미국이 얼마나 반인륜적인 행위를 일삼는지 예를 들어보자. 김선일씨뿐 아니라 미국인도 참수한 알 자르카위를 살해하기 위해 미국은 두 차례에 걸쳐 표적공격을 감행했다. 자르카위가 이라크의 민가에 숨어있다는 첩보에 의거해 전투기로 무자비한 공격을 단행했는데, 두 번 다 알 자르카위를 잡는 데는 실패하고 무고한 이라크 민간인들만 10명 이상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이런 표적공격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저항세력 지도자를 죽이는 방식에서 배워온 것인데, 당하는 민간인들 입장에서 이것은 정말 테러 중에서도 테러인 것이다. 이 민간인 피해자들은 미국의 군사용어에 따르면 'collateral damage'(부수적인 피해)에 불과하다. 공격을 명령한 사람들은 이라크인들의 이런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라크 민간인의 목숨은 별 것 아니니까 표적공격이 자르카위를 잡지 못하고 애꿎은 민간인들만 죽여도 손해볼 거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인이 살해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미국인의 이런 표적공격은 인종주의적 발상에 의거한 테러이며, 그 잔인함이 알 자르카위의 테러 못지않을 뿐만 아니라 강자(점령군)가 약자(피점령국 시민)에게 가하는 것인 만큼 더욱 가증스럽다.

김선일씨의 불행한 죽음에 대한 한국인들의 비상한 애도는 정부의 잘못된 파병정책과 안이하고 무책임한 대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선일씨의 죽음을 파병과 관련된 한국의 정치적 문맥에서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의 비극이라는 문맥 속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애도는 좀더 뜻깊은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2002 월드컵과 촛불시위를 통해 '열린 광장의 민족주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번 사태는 우리의 태도가 타자나 타민족에 진정으로 열려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두가지 의혹

 
이 사태에는 크게 두가지 의혹이 있다. 하나는 우리 정부가 21일 알 자지라(Al-Jazeera) 방송이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김선일씨의 모습을 처음 방영했을 때까지 정말 김씨의 피랍사실을 모르고 있었는가이다. 이 부분은 현재 감사원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고 조사에 착수하고 있으니 간단히만 짚어보자. 수상쩍은 부분은 김선일씨가 피랍된 이후 가나무역 사장이 이라크주재 한국대사관에 4차례나 방문했지만 김선일씨 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지 교민들은 알 자지라 방송 이전에도 이미 소문을 통해 김선일씨 피랍사건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대사관쪽에서 몰랐다는 것이 납득이 안되고 만약 정말 몰랐다면 이는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은 여러번 말을 바꾸었는데 처음에는 미군 쪽에서 알려줘서 피랍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이를 부인했다. 진실의 일단은 김천호 사장이 쥐고 있는 듯하다. 외교통상부가 김선일씨의 피랍사실을 21일 알 자지라 방송을 본 카타르(Qatar) 대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 대목도 수상쩍다. AP통신사는 김씨 비슷한 인물의 피납사실을 6월 3일 외교통상부에 문의했다고 주장하는데 며칠 전 AP통신사의 문의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이 바람에 문의전화의 사실 유무를 두고 AP통신사와 설전을 벌인 한국 외교통상부는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외통부 직원 2명이 AP통신사로부터 문의전화를 받고서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겼다는 것은 그것이 만약 진실이라면 중대한 직무유기죄가 아닐 수 없다.

미군이나 미정보국은 테이프의 공개싯점에 개입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가장 큰 의혹은 AP통신사가 6월 초 피랍초기에 찍힌 '부시야말로 정확히 테러리스트'(Bush is exactly a terrorist)라는 김씨의 주장을 담은 테이프를 입수하고도 그 사실을 한국 외교통상부나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에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피랍초기 테이프를 20여일 동안 가지고 있으면서도 김씨의 죽음이 알려진 후에야 공개한 사실이다. 이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AP통신사의 주장대로 김씨가 피랍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어서 한국의 외교통상부에 문의했고 거기서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더이상 한국정부 기관에 문의하거나 통고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김씨가 억류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테이프를 20일 이상 공개하지 않은 것은 정말 요령부득이다(한국 외교통상부에 문의한 AP통신사가 그 동안 미군이나 미정보부에 문제의 테이프에 관해 문의하지 않았을까?  문의하지 않고 테이프를 가지고만 있었다면 특종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김선일씨의 신원이 분명히 알려진 후에도, 심지어 21일 절규하는 김선일씨의 테이프가 방영된 후에도 이 테이프를 공개하지 않은 점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런 의혹의 진상은 한국의 감사원이 AP통신사를 조사하기 힘들기 때문에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몇가지 가능성을 추측할 수는 있다. 가령 AP통신사가 처음부터 김선일씨의 피랍사실을 알면서도 향후 자신을 위한 알리바이로 대한민국의 한심한 외교통상부에 슬쩍 문의하고는 침묵해버렸을 가능성이다. 더욱 가공할 가능성을 생각해본다면 AP가 이 테이프를 공개하려 할 때 미군이나 미정보국이 개입하여 한국정부가 추가파병 입장을 확인하는 성명을 낼 때까지 공개를 보류해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다. 혹자는 이를 터무니없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부 그라이브 고문사건의 테이프를 입수한 CBS측이 팔루자(Falluja) 대공세를 앞둔 미군측(미합창의장)의 요청으로 2주 동안 문제의 테이프 공개를 보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몇몇 의혹에 기반하여 다분히 가설적인 가능성을 늘어놓았지만, 이 모든 가능성들이 한국의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의 재확인 이전에 이 사건이 불거져나오지 않도록 서로 공조한 듯한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령 1) 김천호 사장이 조금만 더 빨리 피랍사실을 알렸어도 2) AP 쪽이 24일에야 공개한 김씨의 피랍초기 테이프를 조금만 더 빨리 공개했어도, 3) AP 쪽이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이나 외교통상부에 김선일씨의 신상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가령 이런 테이프가 있는데 피랍된 거 아닙니까 혹은 테이프에서 확연히 밝혀진 김씨의 국적, 이름, 생년월일을 들이대는 식으로--문의했어도 4) 이라크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의 외교통상부 직원이 좀더 직무에 충실했어도 김선일씨는 살아 있을지 모르고 18일의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 재확인 성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김선일씨 사건의 여러 의혹들은 단 한가지를 가리킨다. 한국의 이라크 파병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는 쪽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향방과 치수조정

추가파병 결정의 천명이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 따라서 김선일씨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또 있다. 노무현 정권이 세계사의 흐름을 좀더 냉철하게 읽고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면 미군의 만행--이라크 포로 고문사건과 민간인 폭격 사건 등--과 이라크 저항세력의 격렬한 항전으로 사실상 전쟁터로 변한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을 철회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미뤘을 것이다. (한국군 추가파병 예정지 에르빌Erbil은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쿠르드Kurd족의 도시이므로 재건을 위해 파병한다는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권이양 이후 쿠르드족과 수니파Sunni/시아파Shi'a 간의 종족분쟁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결코 안전한 지역은 아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시민들이 반전평화운동에 좀더 확고히 나섰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노무현 구출작전의 의미도 있었던 탄핵반대투쟁만큼 파병반대 데모에 열심히 나갔더라면 추가파병을 이렇게 서두르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라면 김선일씨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그만큼 높은 것이다.




대한민국 외교의 관점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자

어쨌거나 김선일씨의 피랍-살해 사건을 계기로 파병반대운동이 본격화될 계기는 주어졌다. 한미관계를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을 실천하지 않는 대통령을, 김선일씨 피랍사실이 알려지자 말자 추가파병 입장을 재천명한 대통령을, 이번에는 국민들이 탄핵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르는 듯하다. 적어도 이번 기회에 친미 엘리뜨 의식에 젖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세계사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간파하지 못하는 한국 외교통상부는 전면적으로 뜯어고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반기문 장관부터 시작해서 이라크 대사 그리고 문제의 직원 모두를 해고하고 직무유기의 책임을 물어야 함은 물론 대한민국 외교의 관점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둑에서 접바둑을 둬본 사람은 '치수조정'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우리와 미국 사이는 이제껏 우리가 9점을 깔고 접바둑을 두었다면 이제 6점이나 4점만 깔고 두는 식으로 치수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치수(6점 혹은 4점)에서 전시 군사작전권을 되돌려 받아야 할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9점에서는 몰라도 6점에서는 이런 바보 같은 이라크 파병은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외교통상부가 9점 바둑에 젖어 있어서 국민들의 역량이나 국가의 경제적 능력이 적어도 6점 바둑을 둘 수 있는데도 치수조정을 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참 답답한 것이다.

이번 김선일씨 사태가 미국의 공작이나 영향력 없이 가나무역 사장의 오판과 한국 외교통상부의 아둔함과 직무유기로 야기된 비극이라 해도 이제 한미관계는 치수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진짜 실력은 줄어들면서 오만함은 늘어나는 형국인 것이다. 만약 이번 사태에 미국이 개입하여 뭔가를 은폐했다면 한미관계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오히려 격렬한 반미에로의 질주가 우려된다. 한미동맹을 결딴내는 것--바둑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은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공작이나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나 미국의 지위가 약화된다면 그야말로 치수조정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김선일씨 사건은 한국의 외교적 역량을 시험하는 중요한 계기인 것이다. 한국은 이제 미국의 힘에 지레 주눅들기보다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이 혼돈의 세계에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를 지킬 수 있으며 제2, 제3의 김선일씨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창비 웹매거진/2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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