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시민들을 위한 글 하나

 

질서

적지 않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역대 최고의 깡패 부시가 패배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떤 교수는 외국의 사회포럼에까지 가서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의 진심이야 이해안가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류의 순진한 저항이 낳는 폐해는 꽤 오랜 세월 진정한 진보를 갉아먹는 사이비로 기능해온 것도 사실이다.

클린턴이 TV쇼에서 색소폰을 불면서 뒤통수 때리는 타입이라면 부시는 텍사스 석유로 찌든 트럭을 몰면서 정면으로 전진해오는 타입이다. 이 덕분에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은 '음모론' 쯤으로 치부되던 미국의 악랄한 대외정책의 본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역시 부시와 같은 녀석은 없는 게 낫다. 일단 얼굴 자체가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_-;

이번 선거에서는 누가 승리할까? 부시일까 케리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정답은 '둘 중 누구도 아니다' 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선거의 승리자는 자본이 될 것이다. 국경과 국가를 원치 않으면서도 가장 힘이 센 국가의 패권을 중시하는 자본, 바로 다국적 기업이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임에 선거 결과는 어찌 보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할지라도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파병국익론자들의 파병 논리 가운데 하나로 파병철회로 인한 경제제재 내지는 손실을 들고 있다. 이는 자본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이미 외국자본에 안방을 내준 남한의 사정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이다. 이미 그들이 안방을 차지했는데 무엇 때문에 자신들의 안방을 포위하겠는가? 주한미군 재배치 발표 이후 무디스가 신속하게 남한의 국가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시티은행의 한미은행 인수에서 또 한번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 자본들은 이제 남한의 땅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오히려 섣부른 한반도 위기론은 저들의 수익감소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시기적으로 거칠게 나눠 보자면 군사력으로 유지해오던 한반도 내 미국의 패권이 슬슬 자본에 의한 패권으로 옮겨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현 정부를 지지하는 사이비 개혁세력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미국으로부터의 자주(물론 이러한 입장은 여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보다 급진적인 성격을 갖는 집단이지만)를 외치는 이들이 정작 자본의 침탈에 대해서는 순진하다라고 할 정도로 관대하다는 거이다. 작위적이든 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든 그들이 보여주는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뛰어 넘은 경제적 민주주의에는 무서우리 만치 무관심한 - 또는 역행하는 -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 잘못된 세계관은 역사적 흐름에 역류하여 또 다시 정치적 민주화와 자주를 침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미국과의 FTA를 위해 스크린쿼터의 폐기를 정당화하고, 반(反)시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분양원가 공개라는 공약을 철회하고, 금융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하에 시중은행을 외국자본에게 도매금에 넘긴다. 이미 잃을 것은 다 잃으면서도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파병을 하는 거란다.

'전쟁'과 '(자본의) 세계화' 이는 이란성 쌍둥이다. 둘은 때로 의견차를 보이기도 하지만 형제이기에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전쟁은 인간세계의 우연한 폭력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빈틈없이 계산된 정치적이자 경제적인 행동이다. 세계화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갈긴다. 굳이 나눠보자면 석유-군수-건설 자본이 전쟁을 선호하는 반면, 금융-주식-서비스 자본은 세계화를 선호한다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대상국가(먹이)를 빈대떡 앞뒤로 뒤집듯이 골고루 요리해 먹을 것이다.

탄핵반대 시위로 광화문을 뒤집는 그 열기는 파병 철회를 위한 열기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 열기는 자본침탈에 반대하는 열기로 그대로 전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세계에서는 그러한 전이를 막는 '저항'이 곳곳에 존재한다. '탄핵은 안되지만 파병은 어쩔 수 없다', '파병은 싫지만 반(反)노무현은 아니다', '전쟁은 싫지만 세계화는 대세다' 등등... 이것이 사이비 개혁 세력의 패악질 이다. 개혁적 정치 사이트의 사장이란 자가 민주노동당의 깃발이 싫어서 집회에 안나간다는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해대고 있는 것이 사이비 개혁세력의 본질인 것이다.

진보세력의 과제는 그 불순한 저항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 무식한 저항을 걷어내는 것이다. 한 예로 파병 반대집회에서도 시민과 함께 하니 깃발을 내리랄지, 구호를 순하게 외쳐야 한다랄지 하는 뻘소리만 해대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어정쩡한 개념인 '시민(대체 시민은 무엇일까? 정치적 무오류의 순수결정체?)'이 반세계화로 나아가는 길은 너무나 요원할 것이다. 결국 시민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그 세력 또한 불순하거나 무식한 저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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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진보누리]에서 퍼왔습니다.

가을산 2004-07-0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대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말하는 '불순한 저항을 걷어내는' 방법으로, 어떤 방법이 현명한지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노무현 지지자가 아니고, 더이상 실망할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목표가 '파병철회'이니만큼 '파병철회'의 목소리를 가장 커지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노무현의 퇴진을 주장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소모적인 일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집회때마다, 토론회마다, 진보적인 매체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번 사태의 배경이 되는 경제세계화 체제의 폐해, 전쟁과 세계화의 양면성, 현 체제의 지속불가능성 등을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이 공유되어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구호와, 깃발을 앞세우는 것은 선명성을 부각시키는 데는 성공하겠지만, 오히려 귀기울여 듣고자 하는 마음들은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아주 '선명하게' 외치는 사람들 말에 귀를 기울이나요? ^^

마음은 급해도 실을 바늘 허리에 매어 바느질할 수는 없습니다. 일일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야지요.
아.... 또 말만 해서 죄송합니다.

balmas 2004-07-0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이 점과 관련해서는 가을산 님과 약간 이견이 있는데요. 우선 원칙은 좀더 분명하게 설정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파병철회를 위해 연대한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의 통합기구라면, 가능한 한에서 파병을 철회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파병반대 국민행동]은 실제로 파병을 철회시킬 수 있고, 또 어떻게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지를 거의 보여주지 못한 채, 정치권에서 논의해주면 좋고 안해주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탄핵반대 집회나 파병철회 집회는 성격이 매우 다른 데도 불구하고, 탄핵반대 집회와 거의 동일한 기조로 집회를 진행하는 것이나 여러 단위들이나 개인들이 제기하는 <파병강행, 노무현퇴진>의 구호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파병강행, 노무현퇴진>의 구호는, 파병철회의 굳은 의지와 결속력을 높이고, 실제로 노무현을 퇴진시키느냐 않느냐, 퇴진운동을 전개하느냐 아니냐 여부의 문제를 노무현 정권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파병철회 국민행동]이 마땅히 채택해야 할 구호라고 봅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구호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이 구호를 <노무현탄핵>의 구호와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노무현탄핵>과 <파병강행, 노무현퇴진>의 구호는 성격이 많이 다르지요. 저는 이 후자의 구호가 하나의 경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호를 수용하지 않은 채 파병을 철회하겠다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파병철회의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힘만 빼고 그들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후자의 구호라면 여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말한 제 대학 동기인 여선생도 <노무현 퇴진>과 <노무현 탄핵>의 구호의 차이를 이해하더군요.

가을산 2004-07-0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님의 의견 잘 보았습니다. ^^

balmas 2004-07-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너무 싱겁게 그냥 가시네요 ...^^
 

 

보스톤 학살을 잊었는가

 

우선 7월4일, 미국 독립 228주년을 축하한다. 미국인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불꽃놀이를 하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병사를 보낸 부모 등 가족들은 휴가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라크 참전군인 중 많은 사람도 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지낼 것이다.

몇년 전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 들렀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자유의 길’을 따라 걸었다.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독립전쟁의 시발점인 역사유적을 둘러보았다. ‘보스턴 학살’의 현장에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이렇게 배웠다. 종주국인 영국이 이주민인 미국인들의 차세 인상 저항에 대해 보스턴 주민을 학살한 것이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됐다고. 나는 역사의 현장에 설 때까지 적어도 수십, 수백명이 죽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섯 명이었다. 대영제국에 대항한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되고 명분이 된 대학살의 희생자는 정확히 5명이었다. 미국인들의 조상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고 하면서 본국인 영국의 중과세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228년 전 7월4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 선언서는 인류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지금 이라크에선 최소한 수만명의 민간인이 죽고 다쳤다. 수적으로만 보아도 수천배가 넘는다. 1776년 영국과 미국인의 관계 ,그리고 2003년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는 어떤가. 우선 23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대륙의 차이가 있다. 또 서로 다른 인종, 종교, 문화를 갖고 있다는 큰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의 독립전쟁은 종주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라크전쟁의 명분은 무엇인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9·11 테러를 핑계로 이라크가 테러조직을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230년 전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영국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이라크를 유혈 점령하고 있다. 230년 전 식민지 백성으로 살 수 없다면서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선 당시의 미국인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며칠 전 한국의 한 젊은이가 공포에 떨면서 울부짖었다. “당신의 목숨은 소중하다. 그러나 나의 목숨도 소중하다. 나는 살고 싶다”고. 이 젊은이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었다. 왜였을까. 물론 한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부시와 미국 정부에 있다.

한국인과 이라크 민중은 어떠한 민족적 감정도 원한도 없다. 부시 미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며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끌려들어간 결과일 뿐이다. 최근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반미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를 가장 많이 만들고 가장 많이 팔아먹는다.

이제 선량한 미국인들이 답할 때다. 이라크 민중에게, 아랍 민중에게, 세계 인류에게 답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이라크에선 사람들이 죽어간다. 전쟁이냐 평화냐 부시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해라. 그럴 수 없다면 그의 재선 운동이라도 포기시켜라. 그래야 당신들은 대통령을 잘못 뽑은 책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이덕우/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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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영석의 거짓말, 열린우리당의 체포동의안 가결 등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고, 언론에서도 연일 큰 뉴스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성향으로 볼 때 이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서영석 같은 사람의 성향으로 볼 때 그보다 훨씬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어느 정부에서든 일어날 수 있고, 어느 실세든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파병철회라는 정말 중요한 쟁점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또는 적어도 이 문제가 현재의 정국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몇 달이 갈지 몇 년이 갈지 모르는 문제이지만, 이 점을 늘 기억해두기로 하자.
 

 

파병론의 허구, 솔직해지자

 

김선일씨의 비극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큰 슬픔을 안겨줬지만, 이라크 파병 뒤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스런 현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막연히 생각하던 이라크 파병이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엄중한 문제임을 새삼 실감케 된 것이다. 평화재건론, 경제실익론, 국제사회 약속, 이라크 민주화론, 한-미 동맹 강화론 등 각종 파병옹호론이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임이 김씨의 죽음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우선 정부가 그토록 내세운 ‘평화재건론’의 허구성이 부각됐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미군과 달리 이라크 주민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일방적 선전이 여지없이 깨졌다. 우리가 제아무리 이라크 재건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해도, 그곳에서는 증오의 대상인 미군을 도우러 온 군대로 보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이라크 민주화를 위해서, 또는 앞으로 중동지역에서 경제적 실익이 클 것이라는 말 따위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거짓말이다.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테러에 굴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국민 뜻을 거스르며 졸속으로 파병을 결정한 근본적 잘못을 호도하는 궤변일 뿐이다.

이제 파병옹호론자들은 정직해져야 한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할 게 아니라 파병 문제의 본질을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 ‘한-미 동맹’ 운운하며 서로 어려울 때 도와야 한다고 얼버무리지만, 미국 말을 듣지 않을 때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니 눈 딱 감고 파병하자는 것 아닌가. 상대를 이토록 겁박하는 것이 진정한 동맹관계인가. 고민의 핵심은 두가지일 터이다. 안보 위협과 경제 불안심리다. 둘 다 만만치 않은 문제다. 그만큼 우리의 약한 고리를 미국이 쥐고 있다. 심리적 불안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면 뾰족한 대처 방법이 없다. 의연하고 당당해져야 한다.

안보 걱정은 북한 핵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조지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이 한반도 문제를 난폭하게 다루며 긴장을 높일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6자 회담을 통해 간신히 평화적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강경파들이 언제 또 위기를 증폭시킬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 문제와 맞물려 한-미 동맹의 심각성이 더 커졌다. 경제 불안 심리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틀어버리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흔들린다는 걱정이 나온다. 민간 투자가들은 원칙적으로 경제논리에 따라 투자 여부를 결정하겠지만, 부시 정부가 신용평가회사들에 입김을 넣어 신용등급을 낮추거나 통상 압력을 가하면 어찌 감당할 것이냐고 불안감을 부추긴다.

아이엠에프와 북한 핵 위기를 겪은 터이기에 이런 우려를 가벼이 넘길 수는 없다. 하지만 심리적 불안감에 젖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 알아서 기는 식으로는 올바로 대처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은 정치·군사·경제·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쪽에 피해를 주면 자신도 버금가는 상처를 입어야 하는 구조다. 미국의 파병 요구가 한-미 관계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할 만큼 무게를 지닌 것이냐는 냉철한 가늠이 있어야 한다. 그에 걸맞은 지렛대를 확보해야 한다. 평소 얼마나 자주적 태도를 보이고 외교력를 발휘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부시 정부와 미국을 동일시하는 잘못에서 벗어나야 한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미 국민들이 계속 늘고 있다. 더구나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이다. 북한과 화해·협력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꾸는 동맹국 남한을 무시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 위기를 부풀려 온 부시의 강경정책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라크 전쟁 뒤치다꺼리를 도맡으며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하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어리석은 단견이다. 정직하게 말해 민족의 재앙인 한반도 전쟁 위험이 다소나마 누그러진 것은 부시 정권이 이라크에서 발목이 잡혔기 때문 아닌가. 수렁으로 빠져드는 이라크 전쟁에 발을 내딛는 잘못을 범해선 안 된다. 용기를 내야 할 때 내지 못하면 굴종과 모멸의 길만 남을 뿐이다.

이원섭 논설위원실장 ws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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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파병할 능력이 있는가

 

김선일씨의 피살사건은 우리에게 외교안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나아가서 3천여명의 이라크 추가 파병을 앞두고 있는 정부가 과연 현지 정지작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라크 파병으로 한국은 이라크 침략전쟁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들어감을 의미한다. 교민 한사람의 실종사실조차 20여일 동안이나 파악할 능력이 없는 정부가 과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위기국면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파병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과연 우리가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병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정지작업 부실뿐만 아니라 김씨 피살사건은 추가파병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지 1년이 다되가지만 주무부서인 국방부를 비롯해 국정원, 외교부 등 관련부서가 현지의 정확한 정세파악에 필수적인 정보수집 네트워크를 전혀 구축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파병을 그토록 열망했던 국방부가 실제로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해외정보수집에 역점을 두겠다는 국정원은 이라크 현지 정보수집망을 확보한 것인지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중동지역은 이라크 분쟁을 떠나서도 한국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공급의 확보라는 국가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다. 따라서 국정원이 이 지역에 정보수집 네크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제이다. 하지만 국정원은 현지 대사관에 불과 2명의 요원을 파견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그리고 활동도 미미했다. 정보 관계자들은 박정희 정권 때에도 이보다 수십배 많은 정보요원들을 파견해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외교안부정책을 총괄조정토록돼 있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역시 무력한 한계를 드러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을 사실상 전담보좌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파병이후 벌이질지도 모르는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들에 주도면밀하게 점검했다는 흔적을 찾기 힘들다.

파병에 관한 한 정부당국만이 허술했던 것이 아니다. 추가 파병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의 논의 역시 “파병을 해야한다” “하면 안된다”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아마도 정치권이 보다 구체적으로 파병관련 준비태세를 추궁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 모른다.

이라크 파병의 정당성 여부는 제쳐두고, 한미군사동맹의 유지여부, 북한핵문제, 동북아시아의 안보 환경 등 여러 복잡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해야 하는지도 납득하기 힘들다. 이라크에 1천여명의 자위대 병력을 파병한 일본의 경우는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일본은 파병결정에 앞서 수십회에 걸친 자위대 조사단을 현지에 보내 현지 정세와 여건 등을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국정원에 해당하는 내각정보조사실의 요원들도 대거 현지에 파견돼 정보수집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각종 민간단체들까지 나서서 이라크의 유력한 부족장들과 커넥션을 형성하는 등 전방위적 네트워크 구축에 총력을 벌이고 있다. 3명의 일본인 인질이 무사히 석방된 배경에는 이같은 노력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은 또 경제적 실리까지 챙겼다. 일본은 파병의 대가로 지난 2월 20억달러를 투자해 추정 매장량 250억배럴로 중동 최대 유전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란의 아자데간 유전 개발권 계약체결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미국은 핵무기 개발 의혹을 이유로 일본의 이란 아자데간 유전 투자을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해 왔으나 자위대 파병의 대가로 묵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은 파병결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은커녕 주한미군기지 이전협상에서 보듯이 일방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전후 재건사업에서 파병국에 걸맞는 몫을 배당받을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다. 명분도 실리도 다 놓치고 있는 것이다.

장정수 편집부국장 jsj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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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실적용' 출판 범람...5백부만 넘겨도 대박
반론 : 학술출판에 대한 저자들의 오해

2004년 06월 24일   박성모 소명출판 

박성모 / ‘소명출판’ 대표

지금 우리에게 학술출판은 어떤 의미일까. 어느 일방의 측면과 범박한 오해로 누더기가 되고 또 고정관념으로 뭉뚱그려져 각주 달린 책 또는 그럴 듯한 제목으로 학문의 외피를 입은 출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학문과 출판이 만나서 하나를 이루는 일, 그 현장에 대한 이해는 진정 없는 것인가. 6월 7일자 ‘교수신문’의 ‘안목 갖춘 편집자와 소통하고 싶다’를 읽고 새삼스레 드는 생각이다. 오해의 첫 단추는 어디서 시작됐으며 또 지금 여기의 학술출판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답답함에 몇 가지 생각을 추슬러 본다.

번역자의 역할과 출판사의 역할을 구분해야

먼저, 가장 긴밀해야 할 출판사와 저자 사이에 건너기 힘든 깊은 강이 가로 놓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저자와 출판사가 서로의 역할에 대한 엇갈린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들은 출판사의 전문교정능력 부재를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내가 근무하는 ‘소명출판’ 역시 이 문제는 늘 더부룩한 체증과 같은 부담이다. 그럼에도 해법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일부의 저자는 전문적 원고내용에 편집자가 감히 어디 손을 대느냐고 질타하기도 한다. 반면 또 다른 저(역)자는 교정 차원을 넘어 고난도의 교열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극과 극의 요구는 출판 현장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번역의 경우 출판사로서 감당키 어려운 요구도 따른다. 우리 출판사만 해도 공동번역된 원고에 대한 출판을 진행하다가 반려한 경우도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이랬다. 중국학 전문가들이 일정 부분씩 나눠 번역한 원고였는데 일관된 원칙에 따라 음가를 통일하는 과제를 출판사가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노신’을 ‘루쉰’으로 통일하는 일은 간단할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자 스스로에게도 낯설고 또 무수한 고유명사가 출현하는 원고에 대한 적확한 음가를 적용하는 일은 중국학 전문가 사이에도 이견이 있을 수 있는 감당키 어려운 난제라 여겨, 출판사에서는 정중히 번역자들의 통일안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출판사는 뭘 하는 곳이냐는 질타가 돌아왔다. 번역자보다 더 높은 수준의 교정과 교열 요구를 출판사로서 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원고 교정이 끝없는 원고 수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레이아웃을 거쳐 조판을 뜨고 교정쇄가 나가면 양상은 달라진다. 끝없는 원고 수정이 그때부터 이뤄진다. 오자와 탈자에 대한 교정이나 최소한의 문장에 대한 의견을 달고 손보는 ‘교열’의 개념이 아니다.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하는 원고는 말 그대로 편집자를 과로하게 만든다. 깔끔한 교정쇄를 보면 연구 당사자로서 새로이 단점이나 결함이 보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수정하고 다듬어야 한다. 그런 의미의 교정은 출판사에서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몫이다. 그러나 초교에서 수정된 2차 교정지를 다시 초교 만큼 많이 고치는 저자들이 적지 않다면 문제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너무 쉽게 쓰여진 원고이거나, 자신감 없는 원고다. 이럴 때 출판사로서는 나름의 출판 결정이라는 판단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들만큼 난감해진다. 학술출판에 대한 천박한 이해가 급기야 천박한 출판 풍토를 낳고야 마는 것이다.

‘필요’와 ‘공급’의 우울한 곡선

이렇듯 출판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너무 의존하려 드는 양극단의 입장들이 있다. 그럼에도 학술출판사에 대한 이런 시선과 요구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출판사에 따라 요령껏 저자 성향별로 눈치를 살피고 탄력적인 적용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게 문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의 순수 학술출판은 그 무엇보다도 자생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매스컴을 횡단하는 일부 소수 명망가를 제외하고 본연에 충실한 거의 대부분의 학문 종사자들의 연구 결과를 순수하게 출판한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매우 회의적이다. 말 그대로 자생력을 상실한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거니와 이 문제는 학술출판사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그 어떤 오해와 불협화음이 저자와 출판사간에 존재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우선 순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학술출판은 최소한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현실적 ‘필요’와 어쩔 수 없는 ‘공급’이라는 기형적 법칙이 언제부턴가 학술출판가의 현실이 돼버린, 그러니까 이렇듯 우울한 현실이 문제다. 공급은 출판사가 하되 ‘수요’가 없다 보니 ‘필요’에 의해 출판한다는 것이다. 필요는 무엇을 말하는가. 시장의 수요가 없는 상태에서 저자만이 책이 필요한 현실을 말한다.


이런 현실에서 전문 교정능력을 확보하는 일은 거대한 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인 다역으로 출판사 사장이 혼자서 또는 직원 한두 명과 함께 운영하는 출판사의 경우는 사장이 그나마 어느만큼 전공영역을 감당할 만한 경우에 해당한다. 특정 전공분야의 범주 안에서 출판하는 경우가 이 예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술출판사는 교정능력 하나에 있어서도 좌절의 쓴맛을 보고 있다. 그나마 자본력과 전문인력을 확보한 대형 출판사가 학술출판을 성실하게 감당해 주는 길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출판 상업주의에 매몰돼 갓 쓰고 장사한다는 눈초리를 피하기 위한 체면치레에 머무는 정도다. 순수 판매율 5백부를 넘기면 대박인 현실에서 교정은 고사하고 누가 어떻게 학술출판을 감당할 것인가.


사실, 순수 학술출판은 취업용이나 연구 실적용 책을 발간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저자로서 학술출판과의 첫 만남은 대부분 박사논문을 출판하는 일로부터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취업용’을 위해 출판사를 찾는다. 또는 이런저런 기회에 발표한 논문들을 한 데 모아 찍는 논문모음집의 형태가 있다. 단단한 주제아래 하나의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내 놓는 경우도 있으나, 책을 위한 책이 많다. 또 고도의 연구결과가 집적된 것이 아닌 ‘거기서 거기’인 학습교재들이 있다. 이런 교재성 책은, 다 알다시피 연구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특정 시점에 맞춰달라는 주문이다. 취업용이나 연구 실적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책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다. 장사는 안되면서 학술출판사가 가장 바삐 움직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연구는 길고 출판은 짧다.


안에서 싸워야하고 밖에서는 방어해야 하는 학술출판의 현실, 참으로 진퇴양난이다. 과연 지금 여기에서의 학술출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원죄’를 안고 있기는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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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올린 [교수신문] 6월 7일치 기사에 대한 출판사 쪽의 반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