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국민의 분노는 무장세력 아닌 정부를 향해 있다"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16> 국회, '파병 연기안'이라도 제출해야
이라크 파병과 관련하여 한국 민간인이 납치 살해의 위험에 처하는 악몽이 현실화되었다. 이라크에서의 민간인 납치 살해의 성격과 함의에 대해 이 연재에 게재한 앞 글("이라크 저항세력의 '이지메의 군사학'")에서 자세히 논한 바가 있으니, 이 글에서는 현재의 급박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결의 방향에 대한 논점만을 짧게 제시하고자 한다.
어처구니없는 '백지 파병안'
현재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시민 한 사람의 납치로 인하여 파병이라는 국가 정책이 좌우될 수는 없다"는 안이한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 "중대한 국가 정책"인 파병을 결정하고 집행해 온 현재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파행적이었는가를 전혀 보지 않음으로서, 현재의 사태로 인하여 그렇게 파병을 결정한 국가 권력 전체(노무현 정권 뿐이 아닌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여야)가 지금 정당성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는 더욱 근본적인 위험성을 완전히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 국가란 기본적으로 국민 전체의 안녕과 국익을 지키는 집단이다. 그리고 '파병'이란 한 나라가 그 행위에 따라오는 모든 위험과 자신의 국익에 대한 철저한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무겁고도 비장한 결정이다. 따라서 그 국가의 개별 성원들 몇몇의 개인이 위기에 처한다고 해서 국민 전체를 생각하여 내린 그 '파병'이라는 상위의 정책이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시비 여하를 떠나서 이러한 보수적인 논리가 정치 외교에 있어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해왔음은 분명하다.
현재의 문제는, 그 '심사숙고'의 과정이라는 것이 국민들 모두가 보았고 게다가 수 많은 이들이 숱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얼마나 엉터리로 이루어져왔는가라는 데에 있다. 대통령은 대중적 토론과 국민 여론 형성을 원천적으로 막아오다가, 논의 시작 하루 만에 파병 결정을 내려버렸고, 몇몇 관변 제도 언론들은 파병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쟁점들을 명시적 암묵적으로 호도하여 토론 형성을 저해하였고, 그 와중에서 예산도 구체적 계획도 파병 목적지도 관련 법률 근거도 모호한 전대미문의 '백지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해버렸다.
쿠르드 지역에 파병을 하면서도 '21세기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저 일촉즉발의 쿠르드 민족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은 아예 묻기조차 쑥쓰러운 지경이다. 도대체 파병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국익'이 무엇인지 묻는 의회 석상의 질문에 대해 NSC에서 나온 정부 관료는 "국익은 애매한 문제"이며 또 "자세히 말하기 힘든 예민한 문제"라고 하면서 답변을 사실상 거부해 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정부의 오만과 독주를 질책하고 들어갔어야 마땅한 여의도의 '국민의 대표들'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오히려 파병 찬성으로 돌아서 버렸다.
"국민의 분노는 정부를 향해 있다"
파병이라는 그 '중대 결정'이 이렇게 파행적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생겨난 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원래 국민들은 파병이라는 국가의 결정에 동의하고 진행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부와 똘똘 뭉쳐 헤쳐나가는 일 주체로서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한 준비에 필요한 정보가 조직적 체계적으로 차단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평화로운 지역에의 비전투병 파병"이라는 식의 반복되는 정부와 관변 여론의 선전으로 인하여, 국민들은 이라크 파병이 그저 "마을 회관 지어주고 예방 주사 놓아주러 가는" 정도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따라가는 호송 병력도 기껏 경계 근무나 서다 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벌어진 국내의 파병 논쟁이라는 것도 마치 "국익이냐 평화 인권이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같은 고담준론 차원에서 벌어졌지, 그 누구도 내 아들이 내 아버지가 톱에 목이 잘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는 차원으로 논의를 걸지 않았다. 요컨대, 파병되는 젊은이들은 물론 심지어 김선일씨 같이 평범한 '우리' 조차 '참수'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은 한 번도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제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허술한 준비 속에서 파병이 진행되고 현재의 사건이 터지게 되었으니, 국민들은 이번 김선일씨의 일에 정말로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분노는 지금 이라크 무장 세력에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일을 진행시키고나서 일이 터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파병 결정 변함없다"를 외치는 정부에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도 안전하지 않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지만, 만에 하나 불상사가 터지고 이전의 미국인들의 경우처럼 그 광경이 전세계에 보여지게 될 경우 어떤 일이 생길까. 나아가, 한국의 국민들은 100% 안전한가. 스페인의 끔찍한 전례는 절대 없을 것인가. 그런 악몽이 현실화될 경우, 그 때에 사람들은 누구에게 분노할 것이며 무엇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국민들 다수의 여론과 감정이 "이러한 위기일수록 한마음으로 뭉쳐 정부와 함께 저 이라크 원수들과 싸우자" 쪽으로 갈 것으로 보는가. 아마도 어제 만두 파티에서 "한 사람 죽는다고 파병을 뒤집는단 말인가"라고 발언했던 유시민 의원 같은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상황을 풀어 나가는 열쇠는 의회가 그래서 의회가 쥐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그래도 소중한 자산은, 민주 노동당 의원들 전원을 위시하여 여당인 열린우리당에도 야당인 한나라당 민주당에도 적극적인 파병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포진하여 의회 내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신속하고 적극적인 단합된 행동으로 상황을 주도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파병 철회를 이루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최소한 '파병 연기안'을 시급히 제출하여 임박한 파국은 막아야 한다. "이라크가 안전한 상황"이라는 국방부 등의 상황 보고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기존의 파병안 통과는, 전황이 악화되고 파병도 이루어지기 전에 민간인들의 생명이 위태로와지는 현재의 시점에서 충분히 재검토할 이유가 있다.
이것을 받아 안아 상황을 풀어나갈 열쇠는 과반수를 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있다. 열린우리당은 그러한 발의를 신속하게 공론화하고 의회 내의 방향을 '연기' 쪽으로 주도하여 안으로나 밖으로나 한국의 파병 여부를 일단 유동화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밖으로는 이라크 무장 세력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행동을 일단 유보하도록 이끌어야 하며, 안으로는 경악에 질린 국민 감정을 달래어 안정시키고 다시 이성적인 논의의 실마리가 찾아질 수 있도록 상황을 다듬어야 한다.
"국회, 신속한 파병 연기안 처리해야"
"파병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촌각을 다투는 현재의 상황에서, 도저히 접점이 보이지 않는 파병 철회론과 고수론의 호각을 지켜볼 여유가 없다. 파병이 국익을 위하여 여전히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 쪽도 또 거기에 반대하는 쪽도 그 다음에 자신들의 의견을 차근차근 대중들 앞에 공개하고 설득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면 그만이다.
파병 지역인 쿠르드에 지금 급박한 상황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김선일 씨의 '참수'의 가능성을 끌어안으면서까지 예정대로 파병을 진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연후에 파병을 통해 어떤 '국익'을 얻게 되는지 혹은 잃게 되는지를 충분히 논의하면서 국민들은 그제서야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진 논의와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부나 열린우리당 또 한나라당은 결코 이러한 파병 연기의 제안을 이라크 무장 세력에의 굴복이나 국가의 권위 실추라고 받아들여서는 아니된다. 이렇게 납득할 수 없던 과정으로 나온 파병안은 어차피 진즉에 원점으로 돌렸어야 했던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이라크 파병 문제는 그래서 국제 문제가 아닌 우리 내부의 문제로 변해 있었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파병안 연기는 현재 이상의 사태 악화의 가능성에 처한 현 시점에서 근본적인 위기에 처한 국가의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예방조처이다.
요약하겠다.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은 김선일 씨의 생명 뿐이 아니다. 파병 선택의 대가가 이토록 값비싼 것임을 뒤늦게 깨닫게된 일반 국민들의 안전도 위험해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험해진 것은, 기상천외와 임기응변의 정치 기술로 '파병'이라는 중대사마저도 뜻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현 정권과 국가의 도덕성 정당성이다. 신속한 파병 연기안의 통과야말로 김선일 씨의 생명과 분노하고 당혹한 국민 그리고 돌연 일대 위기에 처한 정권 모두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의 최소한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