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최근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좋은 번역이야말로 철학/이론적 논의에 맥락을 부여할 수 있는 기초작업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좋은 번역>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론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편의상 <번역본만으로도 철학적/이론적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번역> 정도로 규정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정도의 규정을 기준으로 평가해본다면, 국내에 번역된 책들 중 상당수는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주기 어렵다는 것이, 또 아쉬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동안 상당히 많은 좋은 책들이 좋은 번역(적어도 위의 기준을 충족시켜 주는)으로 소개되었고, 이 번역본들은 상당수의 고급 인문사회과학 독자들을 형성해왔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물론 경험적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간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를 지탱하는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이 번역본들 덕분에 생겨난 독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두어달 전에 프랑스에서 철학으로 학위를 하고 돌아온 젊은 연구자 한 분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제가 그 분에게 전공한 철학자의 책을 번역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 철학자(이 철학자가 누구인지 밝히면 그 분의 신원이 곧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가 되서, 그냥 그 철학자라고 하겠습니다. 그 철학자가 과연 누구인지는 독자분들의 상상력에 맡기겠습니다. 죄송^^)는 20세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이고 최근 외국에서는 그에 관한 국제적인 전문 학술지가 만들어져 매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철학자입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 철학자에 관한 책들이 거의 번역되지 못해, 그저 무성한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 이 사람의 주저가 번역되긴 했지만 번역에 문제가 많아서 제대로 논의를 따라가기 어려워,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공자는 번역에 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군요. 그 철학자의 스타일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을 들여야하는 데 비해 제대로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책을 번역할 바에야 그 시간에 여러 편의 논문을 써서 업적을 남기면, 그만큼 학계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취직에도 더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실 번역본 한 권은 논문 두 편의 가치로 평가받는데(이것도 뜻있는 분들이 우리나라 학술분야의 정책을 총괄, 집행하는 학술진흥재단에 여러 차례 건의하고 방안을 제시한 끝에 최근에 이루어진 개선의 덕택입니다), 중요한 철학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는 적어도 1년 이상, 또는 대개는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전공자의 생각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잘 번역된 한 권의 좋은 철학책은 두 편의 논문, 또는 심지어 몇십편의 논문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국내의 철학 논문은 공개적으로 출판되기보다는 대개 비매용 학회지에 수록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반 독자들이 제대로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한 편의 논문의 독자는 많아야 수십명을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반면 좋은 철학책의 경우는 적어도 수백명, 많은 경우는 수천명의 독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독자들 중에는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전문가들도 있겠지만, 관심은 있는데 원서로 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그 동안 이 책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전공하지만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 하지만 역시 원서로는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또 직업적인 학자는 아니지만 철학이나 이론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쌓고 계속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독자분이 바로 그런 분이죠),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와서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 책 저 책을 탐독하는 장래의 학자들도 있을 테고, 또는 얼마간 막연하게 교양을 쌓으려는 목적으로(또는 남들이 입만 열면 푸코, 들뢰즈, 데리다, 지젝 운운하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어서, 이 놈들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길래^^ 그렇게 떠드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등등) 책을 사는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좋은 책을 한 권 잘 번역하면 논문 몇 편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학자이지만 그동안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했던 사람의 경우, 또 그 사람의 철학이나 이론을 전공한 전문가의 경우, 좋은 책을 한 권 번역하는 것은 그만큼 쉽고 빠르게 이 철학, 이 이론을 소개하고 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죠. 어느 학회에 가서 지금까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한 학자에 관해 연구논문을 발표하면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소수의 학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또 소통이 가능하겠지만, 위에서 말한, 수천명의 독자들에게 이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의미가 없게 됩니다. 예컨대 저는 국내에 라캉에 관한 관심이 많지만, 이러한 관심이 내실 있는 연구나 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라캉의 저작들이 번역되지 않은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깡의 재탄생]이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독자분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라캉에 관한 논의라면 당연히 먼저 라캉의 저작들이 존재하고 독자들이 이를 읽을 수 있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텐데, 라캉은 부재한 가운데(그야말로 유령, 허깨비죠) 많은 사람들은 영역본으로, 어떤 사람들은 독역본으로, 매우 소수의 사람들은 불어본으로 라캉을 읽고서 이야기를 하니, 불어본이나 영역본, 독역본으로 라캉을 읽을 수 없는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라캉의 저작(들)이 잘 번역되어 나온다면(그렇게만 된다면, 역자(들)에게는 정말 감사해야 마땅한 일일 텐데), 라캉에 관한 논의들로는 얻을 수 없었던 독자들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수의 전문가들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라캉의 이론, 라캉의 철학이 훨씬 넓은 지식과 공론의 광장으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는 오히려 라캉의 이론이 이러한 광장을 단단히 다지고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광장에서는 (때로는 매우 의심스러운) 어학 능력의 소유 여부에 따라 한 철학자, 한 사상가, 한 이론가가 독점되거나 평가되는 게 아니라, 그의 철학, 사상, 이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을지, 우리를 어떻게 변모시켜 줄지에 따라 평가받고 전유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라캉은 더 이상 프랑스의 이론가, 철학자가 아니라, 또는 적어도 프랑스의 이론가, 철학자로만 남지 않고, 한국의 이론가, 철학자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의 노력이 라캉과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최선의 소통 방식, 교통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말하는 맥락이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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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6-0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잘 번역된 한 권의 좋은 철학책은 두 편의 논문, 또는 심지어 몇십편의 논문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You are right. That's it!..

balmas 2004-06-0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든든한 원군이 나타났군요.^^
그런데, 노파심이긴 하지만, 절대로 제가 논문을 쓰지 말자, 논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좋은 논문을 쓰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죠.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논문쓰는 일이 이론, 철학을 우리의 맥락 속에 들여넣는 일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맥락, 우리의 지적 광장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좋은 철학책, 이론책을 번역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MANN 2004-06-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번에 발표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던 게 한국어로 된 참고할만한 책이 정말 없구나, 하는 거였어요. 하긴 이번에만 느꼈던 것도 아니고... 몇 년 전에(수능 끝나고;;) 철학책을 좀 읽어보겠다고 이것저것 찾아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 칸트, 후설 등 꽤나 유명한 철학자들의 책, 또 그에 관련된 유명한 2차문헌이 번역된 게 거의 없다는 것에 놀랐던 것이 기억나네요. 철학자들의 주요 저작들은 번역되지 않고 그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담론들만 있는 것은 정말 해괴한(!) 상황인 것 같아요.

balmas 2004-06-0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중요한 걸 하나 깨우쳤군.^^
좋은 책들 열심히 읽고, 나중에는 MANN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책들을 소개해줘야지.
 

대화의 또다른 중심 주제는 “철학의 맥락”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철학회에 나가보면 재미도 없고 실망만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헤겔 철학이든 스피노자 철학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철학이든 간에 철학은 항상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고, 철학은 자신의 환경, 자신의 맥락에 대한 긴장과 갈등, 성찰로부터 형성되고 발전되기 마련인데, 국내의 철학회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을 보면, 철학이 현실 맥락과 맺고 있는 긴장 관계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나쁜 의미에서 추상적이고 몽롱한 논의들로 가득차 있다는 거지요.

  더 나아가 외국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온 몇몇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면 결국 그 나라 철학계의 하청작업만 해주고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되어 씁쓸하기 짝이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예컨대)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얼마간 필요한 문헌학 작업이지만 정작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어서 그 나라에서도 그 일을 수행할 만한 연구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 나라 사람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그 일을 대신 해주고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그 나라는 구하기 힘든 고급 노동력 하나를 잘 구해서 아쉬운 부분을 메울 수 있지만, 그 연구자가 몇 년 걸려 해낸 그 작업이 우리나라 철학계에, 우리나라 지식계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나쁜 것, 더 심각한 것은 본인들은 정작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학문 선진국에서 (얼마간) 인정받은 논문이니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 아니냐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학문적 사대주의”로 비판받을 만한 이런 태도는 사실은 국내의 철학계(꼭 철학계에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겠지만)에 상당히 팽배해 있는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난 것은 국내의 학자들은 국내에서, 자신이 유학한 나라의 철학적(또는 학문적) 경향을 그대로 대변하는 투사 노릇을 한다는 점입니다. 독일 철학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영미 철학을 무시하고 프랑스 철학은 아예 철학 취급도 하지 않거니와, 영미 철학자들 중 상당수는 독일 철학을 공허한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프랑스 철학은 여자들에게나 적합한 철학”(원문 그대로! 무슨 뜻인지는 발언자에게 물어보셔야 할 듯)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철학이 덜한 건 아닙니다. 아직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고 “통일된 대오”(?)를 갖추지 못해서 그렇지, 프랑스 철학자들도 독일 철학이나 영미 철학 못지 않은 “애국심”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프랑스 유학자들의 경우 주로 공격 대상이 프랑스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이제는 국내에도 얼마간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랑스의 제도권 철학계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보통 사람들이 프랑스 철학의 대표자들이라고 알고 있는 인물들, 곧 알튀세르,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 등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고,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학위 논문 주제로 삼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유학자들이 학위 논문 주제로 가장 많이 택하는 철학자는 베르그송이고, 그외 메를로-퐁티나 사르트르, 레비나스 같은 현상학 계열의 철학자들, 아니면 멘 드 비랑을 비롯한 군소 유심론 철학자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국내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물론 이 경우도 일부가 문제입니다). 그들을 가르친 프랑스 강단 학계의 선생들이 이 사람들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철학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드는 논거들은 그건 철학이 아니라느니, 너무 많이 쓴다드니, 저자 사인회를 하면서 책을 팔더라느니 등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일제 합병 이후 우리나라의 학문의 맥이 끊어졌고, 여기에서 비롯한 빈 공백이 아직도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를 잘 표현해주는 용어가 바로 국학이라는 단어일 겁니다)에서 유래하겠지만, 공시적으로 본다면 학문, 또는 철학을 맥락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들이 아닐까 합니다. 철학을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철학을 사회경제적 조건의 결과로 봐야한다는 것도, (불변적인) 민족성의 정수이자 한 결과로 봐야한다는 것도,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철학자의 삶의 조건과 관련시켜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겠지요(그런데 “맥락”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context? circumstances? surroundings? environment? conjuncture? exteriority? ...).
이 문제는 좀더 다듬어진 생각으로, 좀더 개념적인 논의에 따라 고찰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철학 또는 이론적 논의에 맥락이 부재한다는 점 또는 적어도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은 경험적 차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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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유/여성 젠더] 후반부 번역본입니다. 전반부 번역과는 달리 "peuple des hommes"를 "남성들로 이루어진 사람들"로 하지 않고 "남성들로 이루어진 인민"으로 번역했습니다(그리고 "peuple"은 모두 "인민"으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croissance"는 "성장"이라고 하지 않고 "생장"이라고 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번역본은 인용의 대상이 아니므로, 인용을 원하는 분은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유/여성 젠더

***

  오늘날 우리는 자주 의무와 의무의 희극적 충돌―여기에는 제도들을 수단삼아 이루어지는 것도 포함된다―에 직면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동성/수난passion, 정념들passions에 새로운 길을 부여하고, 파토스 또는 오히려 좀더 윤리적인 감각적 정신을 정련하는 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의무에 대한 경쟁적인 선호는 애처롭고 가련하며 추상적이다. 사실 도덕이 감각적인 이것[“감각적인 이것”은 “un ceci sensible”의 번역이다. “ceci”는 개별적인 “이것”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이리가레의 논점은 감각적인 것을 추상적인 도덕적 의무와 대립시켜서는 도덕의 희극적 순환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감각적 보편성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에 맞서 [도덕적 의무를] 보존하려고 하는 곳에서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여성 젠더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때, 여성 젠더는 너무나 자주 권리들의 평등에 대한 주장에 자신을 위치시키는데, 이는 자신의 젠더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 이 경우 권리들과 의무들의 충돌은 희극적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충돌은 대립 속에 있는 절대자의 모순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 비극적인 희극은 아마도 전쟁의 파생물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절대자를 전유하고 있으나, 자신이 직접적인 것/무매개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젠더에 속하는 전쟁 말이다. 광적인 학살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웃는 게 더 낫다! 하지만 [양자 사이의] 경계는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경각심을 풀지 않고서 웃어야 하며, 최악의 것을 멀리하고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직접적 폭력을 피하고 기다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웃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자기le soi가 자신을 둘이 아니라 하나와 같게 만들면, 만약 자기가 타자로서의 타자를 무시하고 동일자même 및 그것의 분열과 자신을 같게 만들면, 모든 작용은 무위에 그치고 만다. 이 질서에 따른다면 작용 없이 남아 있는 것만이 결백하다. 헤겔이라면 아마도 바위, 식물이 그렇다고 말했으리라. 여성들은 자주 자신들의 작용을 박탈당한 채, 바위처럼 식물처럼 존재해 왔다. 남성/인간을 형성하고, 남성 젠더에 동화된 작용들은 결백하지 않다. 또는 더 이상 결백하지 않다. 이 작용들은 심지어 두 개의 젠더들에 대해 유죄이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행동의 내용, 성들에 따라 가변적인 그 내용은 말소되고 있다. 남성들에 의해 관리되는régi 우주는 감각적인 것을 파괴함으로써 사고의 내용을 제거하고 있다. 평등하다고―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에 대해 동일하다고―주장하는 어떤 세계 역시, 모든 작용의 독특한 내용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이는 [여성적인] 한편에게는 범죄행위가 아닌가?) 감각적인 것을 파괴한다. 분명히 유죄인 것은 특수한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민이며, 보편성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특수한 의무들과 결부된 쟁점들과 전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보편자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런 의무들은 보편자 내에서는 somme을 이루지도 못한다. 한쪽 편에서 보편적으로 입법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죄이고 범죄다. 전리품, 강간, 중죄의 몫을 나눠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왜냐하면 그런다고 해서 그림자가 덜 커지는 것은 아니며, 그와는 정반대다. 차이의 한 부분은 훨씬 더 억압되고 부정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젠더들 사이의 차이에서는 진리의 절반은 더 이상 다른 절반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직 한 부분만이 자신의 유령들, 자신의 그림자들, 자신의 가면들, 자신의 죄들, 자신의 두려움들 ... 과 맞서 투쟁을 벌일 뿐이다. 적수의 실체 없음inconsistance은 그를 너무나 절망스럽게 만들어 그는 대립물들을 발명하고 야기하고 격화시켜 기어이 전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행위는 너무나 명백하게 파괴적인 게 되고 범죄는 너무나 분명하게 완수되어, 다시 정적이 찾아든다. 죄의식이 자신과 맞서 있는 한 대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태는 말하자면 전도되었다. 곧 개인성은 작용 일반의 형식적 계기이며, 내용은 법률들과 습속들moeurs에 의해 구성된다. 일단 태어난 이후 개인은 법률들 및 습속들에 의해 두 번째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 두 가지 탄생은 서로 다른 것 안에 끼워맞춰질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오늘날 인간/남자를 문제삼는 이들이 끊임없이 맹목적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 탄생은 유전적, 자연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인가? 이 질문은, 헤겔이 인간의 이중적 탄생 및 성들에 따른 이러한 탄생의 배분에 관해 우리에게 기술해준 것을 우리가 다시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질문은 두 개의 젠더에게 부여된 운명 및 과제에 관해 제기되어야 한다. 사실 질문이 이처럼 제기되지 않는 한, 각각의 젠더는 범행 및 죄에 대한 혐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곧 보편자가 [남성적] 대자pour-soi에 대한 관심을 정당화할 수 있다. 보편자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윤리를 변형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두 젠더는 하나의 주형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운명 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모델, 하나의 빌려온 정체성은 이들이 진리를 지각하고, 자신을 진리로 지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누구에게도 죄가 있지는 않다 ... 보편자는 생명을 그 형태들 안에서 완성시켜 주는 게 아니라 생명을 죽이거나 살상하는 규범들의 강제로서 존재한다. 자연적 보편자와 법적, 관습적, 진리적 보편자 사이에는 이행, 교차, 생성이 결여되어 있다.
  두 성의 이른바 자연적 운명은 이미 더 이상 자연적이지 않다. 법률들 및 습속들은 이미 한쪽편에 의해 제정된 보편자를 추구함으로써 자연을 도착시켰다. 인간/남자가 언어를 불가침적이고 중립적이며 보편적인(그러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된다. 언어는 한쪽편의 진리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중성[ 이리가레는 예컨대 “on” 같은 단어를 “중성”으로 사고하고 있는 듯하다. “on”은 영어로 하면 “one”이나 “they”처럼 불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블랑쇼의 저작들이나 초기 푸코의 문학 비평에서 익명적인 중성에 관한 탐구를 엿볼 수 있는데, 이리가레가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이 이론적 위신을 얻고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희극적이다. 이는 또한 비극적이기도 하며, 폭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 왜냐하면 각각의 젠더는, 하나의 중성, 그 자신의 중성이 문제이지 절대적 중성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중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개의 중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하나는 특히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아이이며, 다른 하나는 일신론의 신, 특히 육화되지 않은 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유래한 어떤 의무이다. 성들 간의 전쟁 바깥에서 윤리적이고 싶어하는, 중성적인 것의 이 고립된 땅들은, 성들 간의 차이의 비극 및 그 수태 능력fécondité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한에서, 기술통치technocratie의 지배권 및 지배영토―이것들이 충동적 통치이든 로고스에 따른 통치이든 또는 도구들, 기계들의 효과이든 간에―와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예컨대 첨단 기술의 힘을 빌려 이루어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중성적인 것을 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에너지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등급들 내지는 질적 차이들을 지니지 않은 동일한 유형의 에너지, 곧 사람들on, 무책임한 다수, 양적인 것 안에 멈춰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 전체, 인민들 전체 및 이들의 산출과 재산출, 이들의 발생적 원리에 맞서 아무런 정당한 객관성도 주체성도 없는 파토스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 의심할 여지 없이 논쟁―또는 중성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견상의 화해―의 은밀한 열쇠인 아이로 되돌아가보자. 아이는 특정한 언어, 예컨대 프로이트의 언어나 헤겔의 언어 같은 특정한 언어들 안에서만 중성적이다. 따라서 국제 정신분석학회―이 문제를 둘러싼 분쟁지들 중 하나만 언급하자면―가 자신의 중립성/중성성을, 중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아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는 모종의 공언어주의bilinguisme를 댓가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공언어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으며, 내가 보기에 이는 성들의 차이에 대한 실어증 내지는 무기력증과 관련해 본다면 척추교정술과 비길 만한 것이다. 예컨대 안나 O는 자신의 대화 치료talking-cure에서[안나 O는 프로이트와 브로이어가 공저한 『히스테리 연구』에 나오는 히스테리 환자 중 한 사람의 명칭이다. 그녀는 정신분석의 치료법에 대해 “대화치료talking-cure”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어들이나 표상들이 떠오르지 않을 때 자신의 정서들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다. 비록 중성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는 하지만―genre라는 단어를 희랍어에서는 [중성으로] 토 게노스to génos라고 하듯이. 타자에 대한 윤리와 관련하여 내가 다시 읽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관련 구절에서 이 두 가지 중성 단어 사이의 관계를 확립해 보는 일은 흥미로울 것 같다―아이는 항상 성별화되어 있다. 아이를 중성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이에 대해 영속적으로 자행되는 대범죄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영속되는 범죄인가? 신? 정신? 양자 모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성별화되어 있고, 성별화로부터 태어난다. 따라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죽음을 아이에게, 젠더에게, 산출에게, 생명에게, 성에게 강요하는 것인가? 어떤 권리로, 어떤 어둠을 틈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언어, 남자들의 언어는 중성적인 존재로서의 아이를 덮어싸고 조르고 질식시키는 것인가? 실존하지 않는 중성적인 신의 이름으로? 또는 성들 사이의 분유partage에 대한 무능력 내지는 분유의 거부의 이름으로?

  언어 안에는 중립적인 것의 두 가지 다른 저장소들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단지 내용(들)일 뿐만 아니라 형식(들)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보기에는 의무권리의 저장소에 상응하는 것 같다. 이는 그리스-로마 문화 시기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이것이 우리의 개별적, 집합적 의식에 미친 충격에 관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법, 권리는 중성/중립적으로 말해지지만, 이것들은 한쪽편에 따라 제정되었으며, 따라서 실제로는 중성적/중립적이지 않다. 이러한 비중립성은 성인 개인의 내용을 정의하는 법의 내용과 형식 안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중성성/중립성은 심각한 결과들을 낳고 있으며, 언어 및 주체의 지위의 변동을 수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대한 저항의 보루를 대표하고 있다. 남자들 사이의 전쟁들 및 논쟁들을 사면하기 위한 영토로서 이 중립 지역은 남성 젠더와 여성 젠더 사이의 위계라는 문제 및 그것들의 불의,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언어들 및 가치들의―개인적이고 집합적인―병리적인 중립화/중성화라는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중성성/중립성은, 적어도 불어에서는 남성과 동일한 대명사로 번역된다는 점(곧 elle faut가 아니라 il faut인 것이다[“il faut”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불어 숙어이다. “il”은 원래는 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중성적인) 비인칭 주어로 사용된다. 이리가레가 “il faut”, “~해야 한다”의 예를 든 것은 법이 지정하는 의무와 명령, 권리의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을 덧붙여두고 싶다.
  거의 체계적인 자연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심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연의 왕국/지배권l'empire de la nature 역시, 천둥치다il tonne, 눈내리다il neige, 바람불다il vente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성으로 표현된다[이 경우에도 역시 “il”은 비인칭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우리의 동양의 뿌리 및 그 분맥들에서는, 우주는 젠더들에 따라 배분되었고, 젠더들은 때로는 갈등을 겪으면서도 함께 우주의 요소들을 통치했다. 인간들의 세계는 단지 오늘날 이야기하듯이 별들에 의해 규정된 것만이 아니라, 그것 자신이 별들을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두 개의 젠더/유 덕분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의 사회 윤리의 몇 가지 토대들이 표현되고,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 상실되면서 그 법칙들에 대한 존중심의 상실이 언급되고 있는 장소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빛과 어둠, 뿌리들과 꽃들 사이의 차이들이, 사회적 의무들―이것들을 창조한 죄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에게 있다―에 대한 준수라는 명목 아래 더 이상 지켜지지 않으면서, 그들은 미시적 우주 및 거시적 우주에 대한 통치를 상실했는데, 다른 젠더/유하고만, 다른 유의 잔여나 그 그림자 뒷면이 아니라 여성 젠더하고만 이 우주들을 통치할 수 있다. 두 개의 젠더 사이에 미시적 우주 및 거시적 우주에 대한 통치가 배분된다. 이러한 운명은 중성적이지 않으며 유일한 젠더/유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위대한 문화는 이처럼 말했다. 왜 오늘날 이를 잊어버렸는가? 우주의 질서 및 우리 자신의 육체chair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 긴급하면서impérieux 또한 더 부드러운doux 의무가 우리에게 있단 말인가? 우리를 이러한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중성적으로/중립적으로 우리를 뿌리로부터 밀어내는 모든 것은 감각 및 사상, 예술, 윤리의 내용을 이루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의 신체 및 세계의 생명을 소멸시킨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는 남자의 행위의 밤과, 아직 여성의 밤 안에 있는 것 사이의 대결에 있다. 우리는 다른 기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분명히 문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근친상간이나 그것의 금지일 뿐만 아니라, 같은 나이에 속하는 두 개의 젠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이들이 생명, 감성, 형태 및 신과 사고에 대해 상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의식에 관한 물음을 몰아낼 이유가 되지 못하며, 무의식의 형성을 이중화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한다. 무의식은 작용 안에서 생산되어야지, 영속적이고 부동적(不動的)인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무한한 반복은 작업oeuvre 안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이 경우 타자성은 동일한 것 안에 머물지 않고 타자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추구해나가야 할] 하나의 극한점이지만, 이러한 방향은 우리가 윤리적 감각의 순수성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헤겔은 안티고네 범행의 순수성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이보다 훨씬 더 거대한 순수성이 존재할 것이다. 왜 이 추정된 범행이 금지되는 것인지 아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이러한 범행이 남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운명에게만 봉사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게 되면 외관상의 대립이 제거될 것이며, 여성으로서는 긍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성은 고유한 윤리적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에게 낯설게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즉자, 그녀의 본질이다. 하지만 여성성은 더 이상 자신의 즉자, 자신의 본질이 다른 성, 다른 젠더에 의해 정의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여성성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정의, 남성성의 실효성의 일부를 이루는 정의와 단순히 대립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성 젠더는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측면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생성되기 위해 자신의 윤리적 생성의 질서에 따라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자기 자신과 투쟁한다. 이러한 생장, 한편으로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무매개성과 매개들 사이에서, 어머니와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기도 한 이러한 생장은 여성 젠더를 위해, 그리고 여성 젠더 안에서 열린 상태로 무한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장은 두 개의 젠더 사이의 만남을 위해 필수적이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가장 커다란 죄는 하나의 젠더로부터 그의 윤리적 의식 및 젠더로서의 실효성을 박탈했다는 데 있다. 이는 실체로부터 현실성(실행성, effectivité)을 분리시켰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철학자인 타이 그레이스 애트킨슨Ty Grace Atkinson은―내가 그의 분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이러한 행위를 “형이상학적 흡혈주의”라고 불렀다. 나로서는, 그리고 그 결과들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이고 싶다. 
  만약 여성들이 다른 성의 확실성들에 따라 정의된 의무를 수행한다면, 여성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몫이 빠져 있는, 고유한 윤리적 목표가 빠져 있는 의무에 대한 파토스 말고는 어쩔 수 없이 우연적인 현실성 안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들의 목표, 그들의 목표의 현실성은, 비록 그들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이 제거된 목표로 머물고 말 것이다. 사회, 노동하는 세계, 전쟁이 아이와 남편을 그녀들로부터 앗아갈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행동 목표를 절단당한 채로, 선택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한 채 무관심하게 금욕적으로 남아 있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몇몇 신비가들이나 현인들이 금욕[“금욕”은 “renoncement”의 번역인데, 원래의 내용상으로는 “자기를 버림”, “무욕” 등이 더 어울릴 듯하다.]의 과정으로 기술한 것이 그들의 일상의 운명이 된다. 하지만 어떤 인민에게, 다른 인민의 목표라는 명목 아래 성인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실―헤겔은 이 점을 매우 잘 간파했다―인민도 전쟁도 [단일한] 하나가 아니다. 반대로 그들 중 한 부분[이 경우에는 남성]은 자기 자신을 위해 윤리적 의식의 권리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부분[곧 여성]은 목표와 현실성을 박탈당한 상태에서―자신의 분신까지는 아닐지 몰라도―자신의 그림자로, 자신을 회복시켜 주는 존재로 남겨둔다. 인간 유는 두 개의 젠더가 아니라 두 개의 기능, 두 개의 과업으로 분배되는 것이다. 여성은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은 “sous peine de mort”이다. 이 숙어는 일상 어법에서는 별 혼란이 없지만, 이 경우에는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곧 이 숙어는 본문처럼 “죽음을 맞지 않으려면”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후자의 경우는 물론 안티고네를 지칭하는 말이 될 것이다.] 자신의 젠더를 포기해야 했다. 남성도 마찬가지이지만, 여성과는 상이한 의미에서 그렇다. 남성이 자신과 벌이는 논쟁은 자신의 젠더의 신 또는 정신과 벌이는 논쟁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에게 남성과 여성이 각자 상이한 젠더를 주장하게 되면, 양자가 소통할 수 있을지 묻곤 한다. 아마도 그들은 결국은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간에 가능한 이행이 부재한 가운데, 상이한 의식과 정신, 인민의 모습들 안에 서로 분리된 채 갇히게 것이다.        

***

  오늘날 가장 선진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 중 다수가 근친상간을 성적 관계―무의식적 관계이든 의식적 관계이든 간에―[의 모델]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유/젠더와 그것의 배분이라는 문제를 해소시키지는 않는다. 근친상간은 세대간의 간격 및 젠더의 생식(산출, procréation)과 작용하지, 젠더의 정신과 작용하지는 않는다. 항상 나이, 생장, 세대의 간격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근친상간 및 그것의 위반을 문화적 운명의 극복으로 간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내가 이미 언어의 기능방식에 관해 말한 것처럼, 일차적으로 실체는 여성들, 어머니들에 의해 주어진다. 남성은 이 실체에 표시를 하고 자신의 흔적들을 새겨넣고 재단하며, 기호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 실체를 용해시킨다. 하지만 그 다음 그는 이 기호들은 일의적(一義的)인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존재했던 양의성(兩義性, équivocité)은 반드시 기호 내지는 합급(合金) 내의 전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안티고네 자신은 양의적인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녀는 이미 단 하나의 [젠더] 쪽으로 끌려가고 있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두번째의 토양, 곧 젠더와 무관한다고 하는 의미의 실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들은 이 실체를 하늘을 향해,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기호들의 원천인 그들의 하늘을 향해 거의 동어반복적으로 열어 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타자, 여성의 개입을 금지하지만, 또한 그들은 여성을 성스러운 것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경외한다. 남성은 언어의 실체 내에서 여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닫아걸으면서, 이 실체에 대해 말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실체로 머물러 있되,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도록 요구한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들,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말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여성에게는 생명의 집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그는 여성의 과업은 죽은 [남]자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는 어머니로서, 모체로서, (살아 있는 [영혼의] 보호막-무덤인) 신체로서, 영양 공급원으로서의 여성이 필요하다. 외관상으로는 그에게는 어머니이자 성처녀로서의 여성만이 필요하고 때로는 아주 애매한 방식으로 누이도 필요한 것 같지만, 여성으로서, 다른 젠더로서의 여성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근친상간은 젠더들 사이의 관계라는 물음을 해소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생명체의 산출 안에 또는 그것에 대한 부인(否認, dénégation) 안에 머물러 있으며, 젠더의 물음은 제기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은 맹목적이다. 정말이지 젠더에 맹목적이다! 내가 보기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근친상간에서] 그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한 여자도 문제된다는 사실에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적 차이에 무지하다. 담론과 주체의 분열, 파트너 없는 그 모순들은 분명히 근친상간의 욕망 및 그 금지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근친상간의 욕망 및 금지는 두 개의 젠더로 분할되어 있는 인간 유의 현실성에 상응하는, 감각적인 것에 대한 관계를 조절하지는 못한다. 근친상간은 의미의 이중적 토양 및, 여전히 항상 우리의 의미로 남아 있는 편파적인partiel 의미의 장벽을 위반하지만, 은폐되어 있는 전쟁polemos인 성적 차이의 물음을 제거하지는 못하며, 이 차이의 가능한 풍요성(수태, fécondité)를 제거하지도 못한다. 근친상간은 언어 및 자연과 작용하지만, 항상 그것들 사이의 분열 내에서, 그것들의 비-동맹 내에서, 그것들의 비-동시적인 생장 내에서 그것들과 작용할 뿐이다. 근친상간은 형태론morphologie은 위반하지만, 이는 수액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수액으로부터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주체가 열매로서 나무에서 떨어진 한에서 또는 나무로부터 분리된 한에서, 이 수액은 아직 또는 더 이상 주체의 수액이 아니다. 이는 아직 또는 더 이상 주체의 뿌리들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성별화된 두 인간을 현재, 현행적으로 현존시키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결함이야말로 인간/남자를 기술적 존재가 되게끔 운명지은 것이 아닐까? 가능한 일이다. 산출적으로, 성별화되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기계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시대는 이를 경향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의 뿌리들을 탈취하고 거기에 기생하는(이는 이 뿌리들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박해하는 것이다) 순간부터, 한 성이 자신의 뿌리들을 상실하고 유한자로서 자신의 생장이 불확실한 상태임에도 불멸적이거나 영성적인 존재로 치켜 세워진 순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우리 문화의 퇴락의 원천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거기까지 나아가 봐야 하리라. 
  따라서 윤리적 죄가 발생한 곳으로 되돌아가, 남성들과 여성들이 복종해온 이러한 이중적 뿌리상실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 남성들과 여성들이 생장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그 순간은 양자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 이는 근친상간을 젠더에 관한 질문의 해결책 또는 해소책으로서 사고하려는 미혹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설명해준다. 사실 여성은 물질/질료적인 물과 하늘 사이에, 자연적인 대지와 태양 사이에 머물러 있던 데 반해, 남성은 그가 생명체로서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던 때에는 우주의 생장의 작업자이자 조직자가 되었다. 하지만 자주 그의 반항과 그의 권력은, 유한자로서 자신의 생성 및 [여성] 젠더에 대한 자신의 빚을 부정하면서 물질/질료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물질[질료]를 탈취하곤 했다. 또는 탈취한다고 믿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두 개의 극 사이에 충분한 분절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인공적이면서 불균형적인,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세계를 건립했는데, 이 세계는 중성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남성 자신의 세계이며, 토양 전체를 그 자신과 동화시키려고 하는 세계이다.
 
  최근 우리 시대는 양성성이 젠더들 사이의 분할에 대한 윤리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해왔다. 이러한 해결책은 자주 [여성 젠더에게] 관대한 선택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묻거니와, 어떻게 다른 젠더를 젠더로서 정의하지 않고서 다른 젠더와 자신을 동일화할 수 있는가? 문제는 단지 하나의 역할을 모방하는 것일 뿐인가? 과업들을 배분하는 것일 뿐인가? 아니면 다른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일 뿐인가? 그리고 오늘날 어떤 남성이 여러 세기 이래 계속 되어온 여성 젠더의 사회적 운명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권력을 기꺼이 포기하려 하겠는가?
  게다가 관념론적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다소간 미혹을 불러일으키는 정신적mentale 형태들 속에서 형태론을 새롭게 제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우리가 다른 젠더에 우리 자신을 영성적으로spirituellement 완전히 동일화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양성성이 젠더들 사이의 윤리를 위한 도정을 구성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도정이 존재한다면, 이는 성적 차이에서 출발하고 성적 차이에 도달해야 하며, 이를 영성적인 발견과 긍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양성성이란 환상들 및 사변들에 젖어 있는 퇴락의 유토피아를 그려낼 뿐이며, [우리의] 문화를 생산하는 신체들에게 훨씬 더 이질적인 문화를 생산해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역시 인민들 중 매우 적은 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유형의 정체성과 사회적 스타일―여기에는 패션 및 패션산업을 수단으로 한 것도 포함된다―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본다. 다시 한번 더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의 젠더를, 젠더, 젠더들이라는 질문을 확정적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중성적인] 사람들on, 양적인 것, 사이비 중성성의 에너지를 증대시키고 있는 기술적으로 통치되는 우주의 평준화 효과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날 직면해 있는 가장 심각한 전쟁일 텐데, 왜냐하면 이 전쟁은 다른 전쟁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에게 어떠한 저항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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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03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오역이 하나 발견되어서(-.-;;;;) 하나 지적해 둡니다. 맨 앞에 세 차례에 걸쳐 나오는 "결탁"이라는 단어는 사실은 "충돌"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제가 collision을 collusion으로 잘못 읽었습니다.
벌써 복사하시거나 퍼가신 분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읽기 위해 번역한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올린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와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및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글인데,  지난 번 글이 매우 함축적이고 난해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글은 훨씬 평이하고 명시적인 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번역자에게는(-.-;;) 여간 까다로운 글이 아닙니다. 참고할 만한 다른 외국어본을 갖고 있지 못해서 오역이 적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수정할 생각입니다.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도 두어 군데 수정한 곳이 있는데, 나중에 따로 올릴 생각입니다.

이 글은 원래 글의 전반부에 해당하며, 후반부도 곧 올릴 생각입니다.

 

Luce Irigaray, “Le Genre féminin”, in Sexes et parenté, Minuit, 1987.


여성의 유/여성 젠더

[이 글의 제목에서 “genre”라는 단어는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는 문법에서 명사나 형용사의 “성(性)”을 가리키는 단어이면서 젠더를 의미하기도 하고, “유類”(또는 속(屬). 영어로 하면 genus)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계la machine는 성을 갖고 있지 않다. 자연, 그녀는 항상 성별화되어sexuée 있다. 분명히 기계는 때로는 성을 모방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녀(기계, elle)는, 특히 자신의 도구로서의 지위 때문에 한 성보다는 다른 성의 경제에 더 관련되어 있다apparenté. 기계, 그 생산 활동에서 성이 없거나 하나의 성만을 가지고 있는 기계는 때로는 생명을 보충[“보충”의 원어는 “protège”인데, 불어에서 “protéger”는 어떤 결함을 인공물로 보충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철이나 의족, 의수 등이 이러한 보충의 사례들이다.]하거나 보완한다. 그녀는 생명을 창조하지도 산출하지도 않는다.
  인간 정신은 성들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만큼 이미 너무나 기술의 명령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들 사이의 차이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사람은 때로는 수구주의자, 반동, 순진한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과학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남자들 또는 어떤 여자들은 분명히 수구주의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는 성적으로 차이화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죽어 있는 셈이다. 담론의 성별화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가? 기계, 기계론 및―주체의 제어에서 벗어나는―어떤 에너지로 환원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살아 있는가? 우리는 생명, 형상, 정신을 산출하고 창조할 수 있을 만큼 아직 충분히 살아 있는가? 생명체로 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생명체로서 재산출할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는 성적 차이가 필요하다.
  이러한 차이는 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 모순이다. 서툴게나마 위치시킬 수 있는 상호보완성도 없고, 획득된 객관적 위치도 없고, 대상도 모습도 없는 [차이이므로]. 성들 사이에는 분명 생리학적, 형태론적morphologique 상호보완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성은 증식에 도움이 되도록 자리잡아야s'habiter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성/되기에서는 주체적인 성적 차이는 존재했던 적이 없다. 이는 특히 사유 속에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기회다.
  우리는 다른 환경으로 넘어가는 중에 있는데, 이 환경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연적 여건milieu이 된다. 기술의 여건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정상적인 환경으로 부과되는 것이다. 땅과 태양, 식물, 물, 공기가 존재하던 곳에 이제 콘크리트, 전기, 실내 공기 조절 장치, 기차, 비행기, 기차역, 주유소 등이 존재한다 ... 이처럼 보고, 들이마시고, 만지고, 맛보는 데서 [이전과] 차이가 존재하는 것 이외에도, 또한 소음bruit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 소음은 시계의 초침에 따라 규칙적으로 표시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음악가들은 소음에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이 소음은 더 이상, 예컨대 계절이나 풍경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므로 제멋대로 발생하는 셈이다. 기계의 소음은 일년의 절기나 지역 또는 세계 각 나라에 따라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정도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항상 거의 동일하다. 여기에서 지각 능력의 쇠퇴가 생겨나는 것일까? 오늘날 교대로 일어나는 것은 소음 또는 그것이 정지할 때 나타나는 정적이다. 하지만 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대는 인공적이고 거칠다. 참된 교대는 기계의 소음과 자연의 소음bruit[자연의 경우에는 “bruit”를 “소리”로 이해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기계나 자연 모두 똑같은 “brui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존중하여 모두 “소음”이라고 번역했다.] 사이에 존재한다. 자연의 소음에는 리듬이 담겨 있다. 게다가 이 소음은 리듬의 차이들을 존중한다. 이 소음은 형상을 부여한다informe. 이 소음은 항상, 그리고 여전히 최초로 일어나는 소음이다. 이 소음은 또한 항상 젖어 있다.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이 소음은 또한 항상 젖어 있다. 곧 상처를 주지 않고 접촉할 수 있다”의 원문은 “Il est aussi toujours humide, c'est-à-dire capable de toucher sans blesser”이다. “humide”는 “축축한”, “습도가 높은” 등의 의미를 갖고 있고, “toucher”는 “접촉하다”, “만지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또한 “타격을 가하다”, “상처를 주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기계의 소음은 항상 동일하다. 이는 그것의 실효성의 조건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음은 반복하도록 기능한다. 기계는 반복적일 경우에만 신뢰할 수 있다. 반복되지 않을 때 기계는 손상되고 고장난 게 된다. 자연, 그녀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생성한다. 비록 자연의 주기들 내에 유사성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녀는 결코 동일하게 반복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뿌리들 및 자신의 꽃들을 통합하면서 성장하고 생성한다. 그녀는 소리son 및 모든 감각들을 통해 그치지 않고 형상을 부여한다.
  자연은, 항상 도처에서 성별화되어 있다. 우주적 질서cosmique에 충실한 모든 전통은 성별화되어 있으며, 자연의 역량/잠재력들을 성별화된 항들에 따라 고려한다. 자연의 역량/잠재력들 역시 교대에 따라 규제되지만, 모순적이지는 않다. 봄은 가을이 아니고 겨울은 여름이 아니며, 밤은 낮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우리의 논리에서 알고 있는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곧 하나가 다른 하나와 대립하거나 모순되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고 그리하여 열등한 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증식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서 두 극은 필수적이다. 겨울은 여름을 파괴하지 않으며, 수액(樹液)이 땅 속으로 들어가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 수액이 나무의 꼭대기에서 항상 열매를 맺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게 가능한가? 이는 확실치 않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 반대를 말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교훈을,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peuple des hommes은 잊어버린 듯하다. 이 인민은 정상으로 올라가 거기 머물러 있으려고 하며, 타자, 예컨대 여자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길을 상실한 채 땅 위에 매몰되어 있도록 내버려둔다. 어쨌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과제, 성장하기 위해 자신들의 뿌리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 과제를 잊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항상, 자신들의 최초의 모성의 뿌리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지만, 그들은 문화 안에서 이러한 향수를 살해한다. 또는 직접성[무매개성]을 반박한다(모순화해서 지양한다, contredisent)[“contredire”는 단어의 의미대로 하면 “반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리가레는 여기서 이 단어를 “contradiction”, 곧 “모순”과 관련시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contredire”는 시초에 주어져 있는 직접적인 자료(여기에서는 모성의 뿌리)를, 모순의 매개를 통해 지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질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꼭대기와 뿌리 사이의 이러한 교대들은 문화의 발흥과 퇴보를 통해,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전쟁, 많은 경우 기술의 확대에서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전쟁은 부정의 부정일 것이다. 이는 감각적 직접성으로의 복귀로 이해될 수 있는가? 감각적인 것을 자신에게 고유한 것으로, 자신의 정신의 본성으로 육성하는 대신, 남자―좀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이 감각적 직접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이를 자연의 타자에게, 특히 다른 젠더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각에 대한 의무obligation sensible는 사적이고 공[개]적인 삶에서, 사적이고 공[개]적인 전쟁에서 그에게 다시 돌아온다. 공[개]적으로 볼 때 남자는 자신과 같은 젠더하고만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다른 젠더와 비공개적으로 벌이는] 또다른 전쟁은, 마치 이 전쟁이 절대 지식 또는 절대 정신 안에서 이미 해결된 것처럼, 은폐된 채로 비밀스럽게 남아 있다. 이 전쟁이 절대 지식 또는 절대 정신 안에서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완성된 정신 역시 부정의 부정처럼 보인다. 정신의 완성 역시, 부정되었던 것 또는 변증법화되지 못했던 것이 감각 경험 안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서 복귀함을 의미한다. 감각 작용의 절대적 성격은 개념화의 절대자 안에서 복귀하는가? 절대자는 직접적인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그렇다. 절대자는 지식 안으로 감각적인 것의, 그리고 감각적인 것 안으로 지식의 회고적이며 포괄하는 복귀이다. 절대자는 정신 안에 들어 있는 감각적인 것의 쟁점이고 지평이며 목표이고 가면을 쓴 이행이며, 위상학적 총체성의 형태 아래, 잠재적으로 폐쇄된 우주의 형태 아래 감각적인 것의 복귀이다. 절대자는 또다른 세계, [기술적으로] 제작되고fabriqué, [자연의 대지로부터] 뿌리뽑힌 세계의 분신(分身, double)을 성취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절대자는 가장 개연성 있는 우주적 리듬과는 반대로 살해하고 탈생명화하는데, 왜냐하면 절대자는 자연으로부터 시간화 과정temporalisation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적어도 절대자가 젠더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표시된다. 정신은 자신을 완성하면서 땅 속에 자신의 뿌리를 더 깊이 박아두지 않는다. 정신은 자신의 일차적 뿌리들을 없애버린다. 문화, 역사가 정신의 땅이 되며, 이는 정신이, 인식하는 것의 신체적 규정들déterminations incarnées을 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특정한 문화들이나 종교들이 무어라 예견하든 간에, 죽은 [남]자들은 그 자체로 부활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부활한다면, 이는 절대 정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감각적으로 상이한 세계 안에서 그렇다. 죽은 자들을 땅에 맡기는 것은 여성이다. 만약 그녀가 이러한 윤리적 의무를 아직 박탈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인간 유genre humain라고 불리는 남성이라는 유/남성 젠더는 자신의 타자와 유희하지만, 타자와 짝을 맺지는 않으며, 타자의 젠더를 망각함으로써, 이 젠더의 뿌리를 파괴함으로써 [타자와의 관계를] 끝맺는다. 아마도 그는 타자와 만나느니, 스스로를 변질시키려고 할 것이다. 스스로를 변질시키고 고통받고 죽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와 그의 모든 화신들avatars은 가능하겠지만, 타자는 그렇지 못하다. 왜? 절대자를 원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작동시키기 위해 직접적/무매개적 대자성을 포기하는 것이 함축하는 욕구불만과 결핍, 절제를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주체, 한 유[젠더]의 절대 지식은 부정적인 것의 노동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육화된, 성별화된 신은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것의 노동을 수락하는 것, 자기 자신을 신성화하기 위해, 완전성을 얻기 위해 신체를 얻어야 하는 필연성을 가리킨다. 한 쌍으로 된 신은 이를 좀더 변증법으로 말하지 않을까? 또는 말하게 되지 않을까? 어떤 신도 자신의 젠더 안에서 또는 이 젠더를 통해서는 절대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각각의 신은 일시적으로나마 젠더들 사이의 항상적인 접합으로, 성적 차이로 표상되는 생명체의 두 가지 모습 또는 구현incarnations 사이의 변증법으로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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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들의 해방, 상이한 정체성에 대한 긍정을 둘러싼 질문들은, 자주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윤리적 비극이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쟁점들을 회피하곤 한다. 헤겔은 이 쟁점들을 감지했으며, 인륜적 질서는, 특히 인간의 법과 신의 법, 각자 남성과 여성의 의무(이자 운명?)로 귀속되는 두 법 사이의 해소할 수 없는 대립에 의해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리라고 예견했다, 또는 진단했다. 이처럼 제시된 [남성과 여성의] 과업들―여기에는 가족과 생명체, 신들을 보호하는 일이 포함된다―의 배분은 이미 신적인 것이 남성 젠더에 속하고 여성 젠더에서 제거된 세계에서는 낯설게 보인다. 두 젠더의 정신적 의무 사이에서 성취되는 변증법 대신에 헤겔은 우리에게 이중의 책략을 지닌 감금[“이중의 책략을 지닌 감금”의 원어는 “enfermement à double tour”이다. 이는 또한 “이중의 망루로 이루어진 감옥”, “이중의 여정으로 이루어진 폐쇄”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을 제시한다. 이로부터 헤겔 체계의 위력이 나오며, 내가 보기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이를 풀어내지 못했다.
  왜 이 체계는, 적어도 이중의 책략/이중의 망루에 따라 닫혀 있는가? 왜냐하면 여성이 자연과 유[젠더]를 주재하는 한에서, 여성이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 중 죽은 [남]자들에 대한 제례를 존중하는 한에서, 여성은 신의 법과 함께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안티고네에 의해 완성된 법의 행사는 이미 남성적 보편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빛과 화덕, 자신의 신들 및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여성이 아니라, 두 오빠가 논란을 벌이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빚어진 가족의 파괴에 일시적으로 대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이미 남성들의 신, 남성들의 파토스에 봉사하고 있다. 그녀는 죽은 [남]자들의 신을 달래고 살아있는 [남]자들로부터 범행의 흔적을 씻어내기 위해 범행을 사죄하고 죄를 없애려고 시도한다. 이미 문제는 여성 젠더에 속하는 한에서의 그녀의 과업이 아니다. 국가의 권력 및, 희생 위에 수립된 인간의 권리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가가 [죽은 [남]자들로 하여금] 흘리게 만든 피를 없애려고 안티고네가 시도하는 이상, 그녀는 이미 국가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le féminin은 이미 더 이상 자신의 젠더, 자신의 변증법에 봉사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남성 지시대명사][“여성[이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는 “il”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il”은 남성 지시대명사를 가리키고 “elle”은 여성 지시대명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불어에서 여성에 해당하는 “le féminin”은 남성 정관사 “le”가 붙는 남성 명사이다. 이 문장에서 이리가레는 “le féminin”을 받는 남성 지시대명사 “il”을 사용함으로써, 안티고네가 남성적인 권력에 봉사하고 있음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il”을 “여성[이라는 남성적 지시대명사]”으로 번역했다.]은 신의 법, 자연의 법, 생명으로부터 남성적인 인간의 법으로의 이행 속에 감싸여 있고 말려 있다[“감싸여 있고 말려 있다”의 원어는 “enroulé, roulé”이다. “rouler”이라는 동사는 “말다”, “구르다” 등을 의미하며, 구어로는 “말려들다”, “속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런 이중적 의미가 모두 표현되고 있다.]. 안티고네는 이미, 동일자의 타자를 대표하는 여자, 대표하는 [남]자이다[이 문장의 원문은 “Antigone est déjà la représentante, le représentant, de l'autre du même”이다. 이 중에서 “le représentant”은 “대표자”라는 뜻을 가진 남성 명사이며, “la représentante”는 이것의 여성형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이리가레는 같은 뜻을 가진 명사를 성만 바꿔 두 번 사용함으로써, 안티고네의 행위의 남성적 성격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곧 안티고네는 남성이라는 동일한 젠더의 질서 내에서 표현된, 또는 이 질서 안으로 이미 포섭되어 있는 여성적인 타자라는 의미이다. “동일자의 타자”란 이를 가리킨다.]. 화덕(가정, foyer)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과업에 충실하고, 화덕의 불꽃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그녀는, 남성적 질서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전진하도록 해주는 일과 연결되어 있는, 화덕의 어두운 쪽만 담당하고 있다. 범행을 사죄함으로써 안티고네는 자신의 과업, 윤리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 관계, 자신의 신들에 대한 봉사를 더 이상 지키지 않고 있다. 여성 젠더의 독특성은,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적 신들 및 남자들 사이의 전쟁에 대한―모성적?―충실성[헌신]에 굴복하고 있는 이 인물에서 상실되어 버린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남자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신들에 충실하며, 이 신들 때문에 죽는다. 하나의 [여성적인] 과업une tache을 다시 말소하기 위해. 어떤 과업? 근본적으로는 여성의 의식(양심, conscience)이라는 과업, 여성 젠더에 소속되는 과업, 자신의 모성적 혈통filiation이라는 과업이다. 여성 젠더에 대한 이중적으로 은밀한 이러한 소속에서 박탈당한 안티고네는 또한 남성의 잃어버린 뿌리들에 대한 충실성[헌신성]이라는 점에서도 소멸되어 버렸다.
  개념의 분열은 동일자 내부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개념 안에서 분열은 여성 개념과 남성 개념의 분열로 남는다[이 때 여성과 남성은 언어학적인 의미의 여성과 남성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 언어는 이러한 분열을 전도시키는 경향이 있다. 언어는 [분열의] 표시marque를 여성에게 유보시키고, 남성은 이러한 표시 아래에 있는 언어의 질료, 언어의 친숙한 실체로, 그리고 표시 위에서는 절대 정신으로 또는 신으로 존재하게 한다. [남성적 변증법 안에서] 남성은 [여성을] 포함하는 기체(基體, substrat), 여성[의 존재]을 보증해주는 원천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는 반대의 것이 발생한다. 곧 여성은 원천, 기체, 포함하는 것(용기, l'englobant)으로 남고, 남성은 (음성학적, 음운론적, 언어학적인 본성[자연]을 포함하는) 자연 및 자연으로서의 여성적 젠더에 대해 알지 못하는 표시이다. 하지만 전자는 표시, 부적절한 가면, 타자가 덮어씌운 겉치장으로 환원되고, 후자는 질료, 주체(기체, sujet), 포괄하는 절대자가 된다고 가정되어 있다. 언어는 변증법이 기술하는 것을 전도시키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원환은 이러한 전도, 비변증법적이지만, 담론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전도에 의해 닫혀진다. 언어는 보편자의 도구이다. 언어[라는 여성명사]는 하지만 보편자가 아니다. 자연과 결부된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무매개적으로immédiatement 보편적이다. 분절articulation을 경유하는 것은 매개적으로만 보편적이다. 이러한 보편자는 가족의 정신, 성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들 중 하나로 삼고 있다. 보편적 도구는 시민들이 가족의 독특성의 시각에 대해, 가족의 법들 및 그것의 필연적인 성적 차이의 시각에 대해 중립적/중성적이기를 원한다. 성들 사이의 평등에 대한 옹호는 많은 경우 국가 및 국법들의 이익을 위해 가족 및 성적 독특성을 중성화하려는 기획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결국 기술로 귀착되는 우리 시대의 유물론적 전복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법들은 공개적으로 여성을 희생시켰으며, 보이지 않게 남성을 희생시켰다.
  가족의 목표는 독특한 사람, 개인이지만, 이는 우연적인 개인이 아니라 더 이상 가족에 속하지 않게 될 미래의 시민이다. 가족, 젠더, 성욕sexualité의 목표는 보편자로서의 개인이며, 다이몬, 영혼 또는 개인은 우연적인 것들로서 부정된다. 비우연적인 이 개인은 전통적으로 여성, 유/젠더의 보호자에게 귀착된다. 여성들을 어떤 [남성적] 전체의 부분들([여성] 하나 +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불어에서 “un”은 남성 부정관사이고, “une”은 여성 부정관사다. 따라서 “un tout”는 “남성적 전체”이고, “une + une + une ...”은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 여성 하나 ...”가 된다.]로 정의하는 이론적 또는 실천적 사실은 여성들 각자의 고유한 젠더, 그들의 개인성에게 보편적 소명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성들은 보편적 독특성/전칭 단수le singulier universel에 상응한다. 자신들의 개인성 안에서 여성들은 가장 독특한 것과 가장 보편적인 것을 결합한다. 여성들의 정체성은 자연과 정신의 체계적인 비-분열 안에서, 자연과 정신이라는 이 두 가지 보편자들의 수정/재결합retouche[불어에서 “retouche”는 “수정”, “가필”을 뜻하지만, 단어를 분철하면 “re-touche”, 곧 “다시 접촉함”, “다시 결합함”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안에서 성립한다. 여성은 온전하고 보편적이며, 너무나 온전할 정도로 보편적이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도 사물들의 질서를 전도시켜 왔다. 이는 우리의 문화에서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낯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여성들은 [남성적] 인간들hommes이라기보다는 다이몬, 비우연적인 개체들이다. 또는 그렇게 머물러 있다. 단지 어머니만이 아니라 이미 여성도 문제가 된다. 여성에게 바쳐질 숭배는 우리의 문명에서는―처녀성에 대한 자주 잘못 해석되어온 숭배를 제외한다면―반드시 다이몬, 곧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서, 근원적으로 분열되지 않은 자연과 정신으로서의 여성 자신인 다이몬에 대한 숭배인 것은 아니며, 드물게조차 이런 숭배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분명 헤겔에 따르면 죽은 [남]자는 마침내 평화를 발견한 자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지 않고 계속적인 투쟁 상태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또다른 평화, 식물적인 생명력의 성장이라는 평화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더욱이 헤겔의 체계 전체는 몇 가지 오류나 근거 없는 논변들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평화와 유사하다. 그의 철학의 일반 모델은 은밀하게 식물적인 모델이 아닌가? 하지만 체계의 내부에서 이 체계의 의식적 전개의 질서를 따를 경우, 독특성에서 벗어남은 죽음의 질서, 죽은 [남]자의 질서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념 또는 신념은 신체와 정신의 분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분열은 여성이 국가에 희생될 때, 남성이 시민성 및 젠더의 관점에서 보면 중성화되어 있는 문화에 진입할 때 작동하게 된다. 사실 독특성의 지양은 성장에 대한 복종에 의해, 자연적인 보편적 리듬에 대한 귀속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 이러한 귀속은 심지어 독특한 죽음보다 더 보편적이다. 분명히 자연의 보편성은 복합적이지만, 자연은 끊임없이 완성되고 생성 중인, 완성되고 열려 있는 모습이며, 자신의 완성 속에서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가족에 빚진 게 없으므로, 생명에 대한 성별화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직접적/무매개적으로 생성된 자연의 존재는 죽음이다. 자연에 빚진 게 없으므로, 자연에 대한 복귀는 죽음의 질서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곧 자연적이고 가족적이며 여성적인―또는 원한다면, 한밤중의nocturne―정신의 희생은 뿌리내린 존재enracinement의 밤을 개념의 시대의 맹목으로 대체했다. 의식의 대자를 소멸시킨 다음, 남자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감각적인 것의 즉자, 감각적인 것이 즉자대자로 생성하는 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파괴는 정신의 내용을 파괴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축소시킨다. 감각적인 것 그 자체는 정신의 생성에서 거의 사고되지 않고, 사고된다 하더라도 정신의 파토스[“파토스pathos”는 “passion”과 마찬가지로 “정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수동”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후자의 경우 “정신의 파토스”는 정신이 완전히 개념화해서 포섭할 수 없으며, 사고활동을 위해 정신이 항상 의존하고 복귀해야 하는, 개념의 타자, 사고의 원천이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가 아니라 정신의 질료 내지는 실체로서의 감각 지각으로 사고되는 것 같다. 만약 분명하게 선언되고 벌어진 전쟁이 인민을 파괴한다면, 이 전쟁은 또한 의식이 정신의 가능한 내용으로서 감각적인 것의 파괴로 이끄는 좀더 은밀한 전쟁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이는 소음이 우리의 신체 균형에 미치는 충격에 의식이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의식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과거나 미래의 전쟁은 의식이 생명의 자양분이자 생명을 위한 피신처로서의 자연의 파괴에 직면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의식의 주의를 분산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은밀한 파괴는 전쟁을 초래하거나 아니면 전쟁과 맹목적 폭력, 물자부족을 조장할 것이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결백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의 명석한 부분을 대표하기(또는 대표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기?[“대표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기?”의 원어는 “représentrait?”이며, 이는 “représenter”라는 동사의 조건법(영어로는 가정법) 형태이다. 이런 의미를 고려해서 “이라고 가정되어 있기”라는 말을 추가했다.])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쪽을 억압한다. 웃으면서, 공손하게 의무에 따라 남자들은 상처를 입히거나 죽인다. 그들은 악에 대해 무의식적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문화를 완결하는 데 도구로 삼았던 절대적 의식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영속시키는 순간에, 그들은 악에 대해 무의식적이다. 하지만 무의식에게 모든 권리를 부여하고, 모든 면죄부를 부여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나는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의 답변, 정신분석학의 입장도 포함하는 나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세계 전체/모든 사람들tout le monde[불어에서 “tout le monde”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숙어이지만, 말 그대로 하면 “세계 전체”라는 뜻이다.]는 코드화된 언어 현상인 무의식에서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무의식은, 부분적으로는 남성에 의해 다른 젠더 및 자신의 젠더의 그림자, 이 양자가 무의식 안으로 감금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범죄이기도 한 이 밤의 파토스에 대한 권리를 왜 무의식에게 부여하는가? 다른 젠더가 우리 문화의 경제 안에서 동일한 행동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데, 왜 그렇게 하는가? 여러 세기 동안 세계의 [여성적] 일부une partie는 헤겔의 관점에 따르면, 타자에 대해 범죄적이었다. 이는 이 일부분이 세계의 다른 절반의 윤리적 법칙을 깨뜨리거나 침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러 세기 동안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윤리적 의식을 점거/탈취하고서s'empare, 윤리적 의식을 절대적으로 밝혀낼 수 있고, 그것의 진리, 모든 진리를 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여러 세기 동안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인간의 유[젠더]를 그 유의 파토스와 혼동해왔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여정은 우리 문화에서 정신의 이러한 생성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두 개의 유로서 실제로 인지하는 대신, 다른 젠더에서 유래하는 통찰―즉자적이고 대자적인 통찰―을 받아들이는 대신,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은 자신들이 모든 진리를 지니고 있고 전체에 관해 입법할 수 있는 권리(철학, 법, 정치, 종교, 과학 ...)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자기 의식은 행위하자마자 유죄라는 사실, 그것은 분명히 그렇다. 그것은 특히 유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행위를 규정하고, 다른 젠더를 자신의 그림자 안에다 놓아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양가성을 부정하면서 또는 다른 젠더를 이러한 양가성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단순성을 주장하고 본질이 존재하는 그대로 자신에게 발현된다고―하지만 이러한 발현은 사실은 자기 의식이 어떤 대자 안에서 자기로 복귀하는 것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주장할 때, 자기 의식은 유죄이다. 게다가 종교적 계시révélation의 내용은, 이러한 계시를 종결/폐쇄시켜야clôture 할 필연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젠더는 자신에게 어떤 신, 아버지 신, 아들 신, 성령 신을 필연적으로 부여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해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계시에 대해 어떤 것도 덧붙여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 역시 증거해준다. 여성에게는 보호하는 게 범죄였던 반면에, 남성에게는 덧붙이는 게 범죄가 될 것이다. 그녀는 보호할 수 없는 반면, 그는 [덧붙이지 않고] 오직sans plus 보호[보전]해야 한다. 의무는 항상 동일하며, 심지어 언어 안에서도 그러하다. 실체 및 첫 번째 토포스topos[“토포스”는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질료”라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된 것 같다. 곧 존재자들이 형성되기 위한 원초적 기반, 모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여성인 반면, 육화[신체화]되고 발현된 기호는 남성이며, 어떤 것도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러한 구분은 닫혀 있어야 한다. 여성이 덧붙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종결/폐쇄는 언어의 불가침성으로서 진리의 계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인민의 정신에 대한 관점에 따를 경우, 이는 궁극적으로 최초의 운동자le premier moteur와 제일 질료la matière première[“최초의 운동자”는 순수 능동성을, “제일 질료”는 순수 수동성을 함축한다. 게다가 전자는 남성 명사이고 후자는 여성 명사이다.]가 서로, 신과 여성이 서로 접촉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인가?
  하지만 남성-신은 남성 젠더의 언어와 마찬가지로comme la langue du genre masculin, 여성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훼손되지 않고 찬양받는 어떤 질료―이 질료가 다양한 장식들로 치장되기는 하지만―로부터 탄생했다. 둘 사이에서 인간/남자가 성립한다. 만약 인간/남자가 자신의 그림자들과 빛들 사이에서, 자신의 밤들과 밝음들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면, 여성은 아무런 표시도 지니지 않은 제일 질료와 남성이 이 제일 질료를 치장하고 가리는 기호들 내지는 표장들 사이에서, 남성 및 그의 세계에 의해 분할되어 있다. 여성은 결코 자신을 재통합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이러한 재통합은 아직도 도래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재통합은 아마도 기원에서는 발생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 또는 여러 여성들의 입술들/음순들 사이에서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탄트라 문화를 비롯한 몇몇 문화들이 이를 증거해준다. 히브리 문화, 적어도 카발라는 입술들을 전도된 이중의 yod[ “yod”는 히브리어의 10번째 알파벳 문자이다.], 전도된 이중의 언어로 표시한다.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의 어머니에게서 침묵의 기호의 중요성을 통해, 그녀의 처녀성이 지닌 신성한 성격을 말하고 있으며, 입술들을 결합함/닫음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침묵 이외에,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문자는 m이다. 이 자음은 다른 모든 자음의 기원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하면서 또한 가장 모호한 자음이다. 이러한 m의 음성은 인도 문화에 따를 경우, 특히 aum이라는 신성한 음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발현되지 않은 것[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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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에 [타인의 사고]에 실었던 여성주의적 비판에 대한 김규항 선배의 (중간) 답변입니다.

 

편지와 답장

진보넷 게시판에서 일어난 여성주의 문제와 관련한 얼마간의 논란을 위해 쓴 '정리 글'. 나와 여성주의 문제에 대한 그간의 논란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 글'로도 읽혀지길 바란다.


그제 밤 어느 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편지는 근래 이 게시판에서 불거진, ‘여성주의에 대해 저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면서 저에게 비판적인’ 분들의 생각을 저에게 사려 깊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급하게 씌어졌음에도 편지는 그런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담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제 생각을 폭넓게 개진하는 것도 좋지만, 불거진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해명하는 게 ‘연대와 존경’을 위해 좀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애초 쓰려던 글을 뒤로 미루고 편지에 답을 다는 방식으로 제 생각을 적어 봅니다. 문장 앞의 이름은 ‘읽기 좋으라고’ 제가 단 것입니다.


(고유미) 안녕하세요? 저는 고유미 라고 합니다.
저는 그저 김규항 님의 독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근래 진보넷 독자게시판에서 일고 있는 소모적인 '소동'을 김규항 님이 그만 종식시켜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다소 뜬금없는 메일을 보냅니다.
더욱이 내일까지 입장 글을 올리겠다는 글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김규항)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고유미) 2년 전부터 계속된 김규항 님을 둘러싼 여성주의 관련 논란을 지켜보면서 제가 한 생각이며, 가능하면 내일 입장 글에 이에 대한 입장 혹은 해명이 실리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김규항 님이 여성주의자들의 비판 지점을 비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히려 제 글이 김규항 님에게 그야말로 헛다리 긁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합니다. 다만 진정으로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 싶습니다.

(김규항) 저는 2년 전 ‘그 페미니즘’과 그 글을 보충하는 ‘그년들과 그놈들’을 쓰고 여성주의 문제에 대해 침묵해왔으니, “계속되었다”기 보다는 재연되었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하겠지요. 어쨌거나 한번은 짚고 넘어갈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고유미) 김규항 님의 여성주의 비판 내용의 타당성을 떠나서, 김규항 님은 김규항 님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지점이 김규항 님의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에 대한 문제제기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규항) 제가 ‘감정적인 비난과 인격적인 재단’ 속에서 그런 섬세한 비판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만일 고유미 님처럼 “제 비판의 타당성”을 별개로 인정한다면 그런 비판에 귀 기울이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예 “제 비판의 타당성”을 무시하는 상태에선 제가 귀 기울일 방법이 없습니다. 제 비판이 ‘여성주의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라 악의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구분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유미) 즉 김규항님은 스스로를 '마초'라고 명명하는 대신 '여성주의자'로 명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성으로서 생물학적인 혹은 사회적인 한계 때문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여성주의자'로 명명하는데 주저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김규항) 말씀 그대로 ‘자괴감’ 때문입니다. 여성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여성의 억압을 실제 갖지 않는 내가 ‘여성주의자’를 자처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유미) 그러나 김규항님의 평소 여성주의 지지자로서 자신을 규정한 태도를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저도 근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유미) 여성주의 지지자와 여성주의자가 다른 겁니까? (사회주의 지지자와 사회주의자가 다른가요? 혹은 인종차별주의 지지자와 인종차별주의자가 다른가요?) 남성 지식인들은 노동자가 아니면서도 노동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김규항) 개념적으로 다르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의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밝혔듯이 저는 “좌파는 당연히 소수자주의자이며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고유미) 이런 생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김규항님이 스스로를 '마초'라고 명명하는 것은 논쟁에 있어서 '무책임하고 비겁한' 태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여성주의를 비판하면서, 비판 내용에 대한 여성주의자 당사자로서의 책임은 회피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마초'로서 이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훌륭한 것이 되고 맙니다.

(김규항) 정확한 지적이고 제가 분명히 반성할 부분입니다.
그와 별개로 우리가 함께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비판한 게 과연 ‘여성주의의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여성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주의 영역에서 유발되었으나 이미 전체 사회로 비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영역의 문제가 그 영역을 넘어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이유는, 그 문제가 그 영역 전체의 것이거나 적어도 그 문제가 그 영역에서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문제에 대한 비판의 자격을 제한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둘째는, 모든 여성주의가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하나인가, 하는 것입니다. 90년대 이후, 말하자면 ‘절차적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전체 사회운동은 빠른 속도로 보수화합니다. 사회운동의 주류는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다시 말해서 주류 사회운동의 대상은 ‘민중’에서 ‘시민’으로 바뀌었습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민운동이 ‘시민들의 일상문제’에 천착하듯이 90년대 이후 여성주의는 여성이 갖는 두 가지 억압(계급, 여성) 가운데 ‘여성’에 좀더 집중해왔습니다. 물론 그런 경향은 여성의 억압이 계급 문제에 가려지거나 생략되는 일을 바로잡는 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이 ‘계급’ 문제를 희석화하는 경향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처럼 주류 여성주의의 대상이 갈수록 중산층 지향적일 경우 중산층 이하의 여성에 좀더 집중하는 대상으로 하는 좀더 진보적인 여성주의가 주류와 분명한 긴장을 이루는 건 당연합니다. 그럴 때 두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라는 건 대등한 두 갈래가 아니라 단지 ‘보수에 편입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알다시피, 이런 문제는 서구에서도 페미니즘이 백인 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비판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고유미) 대신 김규항님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로 명명했다면 여성주의자 당사자로서 비판의 내용이 훨씬 정밀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고유미) 또한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성들은 진정한 여성주의자가 아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일군의 여성주의자들을 반대한다." 이렇게 주장했다면, 불필요한 '주류' '비주류'에 대한 오해는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김규항)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범주 문제’에 대해 조금 부연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을 비판한 게 아니라 ‘그런 여성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침묵’을 비판한 것입니다. ‘주류’라는 표현도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사실 ‘여성의 이름으로 박근혜지지’ 같은 엉뚱한 주장은 어느 소수자 운동에서나 나올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에게서, 혹은 ‘소수자의 정서적 연대감을 악용하는 보수파’에 의해서, 좀더 정확하게는 그 둘의 결합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대개 그 소수자 영역 내부에서 비판과 성찰을 통해 해결되기 마련입니다.
지난번 어느 분이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 글을 올려주셨는데, 장애인 운동으로 가정을 해보지요. ‘파시스트의 정치적 자식’이 장애인이라 해서 ‘장애인 운동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진보적 장애인운동가들이 말 그대로 난리를 냈겠지요. 의견을 담은 매체나 사회적 영향력이 한계를 갖는다면 (그들이 늘 하는 대로) 몸을 묶고라도 시위를 하겠지요.
만에 하나 ‘광범위한 침묵’을 보인다면, 역시 장애인운동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 문제가 됩니다. 반민중적 주장은 어떤 소수자의 이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내 외부를 막론하고 ‘장애인운동을 위하여’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비판을 “장애인 운동 전체를 비난했다”고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제 비판이 “전체 여성주의를 비난했다”는 해석은 제 비판의 대상인 보수적 여성주의자들이 제 ‘비판의 타당성’을 흐리기 위해 해온 말입니다. 그런데 제 비판의 대상이 아닌 여성주의자들이 제 비판을 “비판의 타당성”은 제쳐둔 채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에 대한 문제제기“만 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요. 게다가 감정적인 반감에서 “전체 여성주의를 비난했다”고까지 비난하는 게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 소수자 운동의 보수 부분은 언제나 소수자들의 ‘정서적 연대감’을 악용합니다. 보수적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 내부의 비판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미약한 수준인 데다, 사회적 비판 역시 ‘정서적 연대감’을 통해 흐려버리니, 결국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2년 전의 박근혜 지지론이 여전히 활개 치는 상황은 바로 그 결과인 셈입니다.
‘박근혜 지지론을 말하는 방식’에 대한 지적을 수용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 지지론을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박근혜 지지론’인 것입니다. 그런 보수적 주장의 확산이 가져올, 여성주의의 보수화, 즉 중산층 이하 여성들의 ‘배제’와 ‘고통’인 것입니다.

(고유미) 여성조차도 여성주의자로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성주의에 대한 외부의 '논평'이 필요한 게 아니라, '링' 안에서의 치열한 자기 연마와 올바른 여성주의를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규항님은 줄곧 여성주의 비판 내용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초점을 맞춰 해명합니다. 김규항님은 여성주의자 당사자로서 논쟁에 임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는 내부 외부를 가를 수 없습니다. 진보적인 여성주의가 보수적 부분을 견제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전까지는 얼마간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진보적 여성주의자들이 비판을 제기하고 저 같은 사람은 ‘비판의 존재’를 부각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전략은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된 이후의 문제겠지요.

(고유미) 둘째 김규항 님 같은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지식인이 스스로를 너무나 당당하게 '마초'라고 명명하는데 놀랐습니다. 그건 마치 김기덕이 여성에 대한 소름끼치는 폭력을 능청스럽게 영화로 만들어 놓고 그러게 애초에 '나쁜 남자'라고 했잖아 라고 물러서는 비열함이 연상됩니다. 여성들이 어떤 단어에 대해 감성적으로 느끼는 적대감을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규항) 앞서 말했듯, 그 말은 저의 자괴감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단어 자체가 가질 거부감을 좀더 감안하지 못한 건 사려 깊지 못했습니다. 그 단어에 상처를 받은 분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고유미) 다음으로 김규항님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여성주의자들의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한 방관 내지 침묵에 대한 것입니다. 그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성들은 경악했으며, 여러 매체에 열심히 여성 혹은 여성주의를 팔아 박근혜를 지지하는 경향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가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수없이 접했던 그런 비판들을 김규항 님은 하나도 읽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김규항) 당시 상황은 ‘광범위한 침묵’이라 말하는 게 좀더 보편적입니다. 물론 침묵은 ‘지지’와 다릅니다. 그러나 ‘반대’ 보다는 ‘공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수없이 접했던 그런 비판들”이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저는 그걸 빌미로 여성주의 전체를 비판한 게 아니라 그런 부당한 현실, 침묵과 공감을 표시하는 여성주의 부분만 부각되고 비판적인 여성주의 부분은 존재 자체가 철저히 배제되는 현실에 주목한 것입니다.
제 비판에 대한 일정한 ‘사회적 공감’이 여성주의 전체에 대한 반감을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의 모호한 상태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거의 모든 한국 교회’(‘주류 교회’도 아니고)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빙자한 상점”이라고 공공연하게 비판해왔는데, 그런 비판에 해당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에게서 단 한번도 ‘교회 전체에 대한 비난’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비판의 방식이나 자격 이전에 그런 비판에 해당하지 않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거의 모든 한국교회’를 내부는커녕 교회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성주의자들의 반감이 고유미 님 말씀대로 “제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반감이 전적으로 그것에서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런 반감은 오히려 그런 반감을 갖는 분들의 모호한 상태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제 비판의 타당성”을 인정하거나 제 비판을 ‘사회적 연대’라 파악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많다는 건 그 사실을 반증합니다.

(고유미) 물론 '한겨례' 같은 유력 일간지에 실리지 않았을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여성주의로 밥을 먹고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여성주의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 마이크를 갖다대지 않고, 김규항님처럼 가끔씩 툭툭 던지는 비판을 우선적으로 실어줄 만큼 김규항 님의 사회적 발언력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규항) 저에게 얼마간의 발언력이 있는 건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저의 “사회적 발언력”이 아니라 “고민하고 실천하는 여성주의자들”을 압도하는 보수화한 여성주의자들의 “사회적 발언력”입니다.
내부인가 외부인가 여성인가 남성인가, “비판을 둘러싼 전제 혹은 기저”가 어떤가를 얼마나 바람직한가를 떠나서, 의견의 타당성이 어떤가를 중시해야 할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떻게든 압박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부인한다면 자신의 건전성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유미) 여성주의가 동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해방, 인간해방과 본질적으로 연결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진정한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김규항님이 여성주의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봅니다.

(김규항) 앞서 말한 대로 “좌파는 당연히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고유미) 솔직히 남성진보주의자들보다 일반 혹은 '중산층 여성들'에게 내 문제를 훨씬 공감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들과 연대하지 않으면 여성주의를 진정한 진보주의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남성 진보주의자들의 그 몰이해와 편협함에 커다란 벽을 느끼기도 합니다.

(김규항) 여성에게 계급적 억압과 여성의 억압이 동시에 존재하고 좌파남성들의 의식이 아직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런 ‘공감’은 당연한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좌파운동과 진보적 여성주의가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운동은 억압에서 해방하는 싸움이고, 운동이 가장 집중한 부분은 억압이 가장 심각한 부분입니다. 좌파는 ‘계급’에서 출발하고 여성주의는 ‘여성’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가장 억압이 심한 부분은 같습니다. 가장 하층계급이면서 가장 많은 여성적 억압을 갖는 게 누구입니까. 바로 ‘가난한 여성’입니다.
여성주의가 가난한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가난한 여성을 우선으로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건 모든 소수자 운동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건전한 장애인운동이 가난한 장애인, 특히 ‘가난한 여성 장애인’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여성주의에서 ‘진보’가 뗀다면 그 원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보수적 여성주의는 그 원칙에서 적대적입니다.
좌파남성과 진보적 여성주의자들이 연대와 존경을 향해 나가는 도정에 있다는 사실에 피차 더욱 진지해져야 합니다. 좌파남성들이 보이는 문제들은 그들의 의도나 입장이라기보다는 오래 시간 길러온 가부장적 관습, 말하자면 ‘못된 버릇’이 대부분입니다. 그게 자신의 이념과 관련이 있다는 걸 미처 모르는 것이지요. 관습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치기 어렵다는 건 고칠 수 없다는 것과 다릅니다. 보다 분명한 건 고쳐서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좌파남성을 불신과 적대감으로 대하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저도 소속한 단체가 있지만 현재 좌파 남성 가운데 공공연한 성차별 의식을 드러내는 경우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게 불과 최근 몇 해 동안의 변화입니다. 성폭력 사건처럼 뚜렷하게 불거진 문제에 대한 변화는 좀더 잠복한 문제들의 변화가 임박했음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여성주의자는 좌파남성의 현재 상태에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좌파남성이 더욱 변화할 테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그 변화의 어려움을 배려해야 합니다. 여성주의자에게 좌파남성은 적이 아니라 ‘미숙한 동지’입니다.

(고유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내가 지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당사자로서의 심층적인 문제를 아직 인식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한 접근 혹은 비평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비판이 당사자들에게는 뜬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동감합니다. 오해의 책임이 누구인가를 떠나서 오해를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제 책임입니다. 아울러 어떤 사회적 의견을 제출하는 데 있어, 부정적 부분을 비판하는 방식(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보다는, 건전한 부분을 부각하고 힘을 실어주는 방식을 사용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고유미) 급한 마음에 두서없이 작성한 글에 제가 염려하는 부분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걱정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입장 글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규항)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제 의도는 여성주의에 대한 ‘연대와 존경’입니다. 결국 이 공간에서 불거진 문제는 그 의도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 의도를 수용하는 방식 사이의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문제로 서로의 의도를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고유미 님이 권유하신 대로 제가 제 자신을 ‘여성주의자’라 명명하는 건 그런 노력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급하게 씌어졌지만 매우 일목요연한 편지였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모든 기자들께 : 이 글을 맥락과 관계없이, 혹은 맥락을 생략한 채 인용하거나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Posted by gyuhang at 2004.05.27 12:3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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