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가레 글의 두번째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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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정신의 생성에 필수적인 계기이며―하지만 헤겔은 이 이행 안에서/이행에 대해 거의 우울증적인 애석함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의 누이/누이 자체[역주: “그의 누이/누이 자체”의 원문은 “la/sa soeur”이다.]에 대한 (피들이) 뒤섞이지 않은(불순하지 않은, san mélange) 애착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이다. 종과 성별(젠더, genre)이 아직 생겨나지 않고, 이 통일체, 이 개인성, 아직 살아있는 이 피의 주체가 단순하게[곧 종이나 성별 없이―역자] 발생했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행의 향수 속에서 그는, 분명히 성차화된sexué 관계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만expose, 성적 욕망의 현실화를 통해 이 욕망을 이행시키지는 않고 있다. 성적 욕망은 피의 주기 안에 통합되어 있는 조화를 깨뜨리게 될 텐데, 이러한 조화 안에서 오빠와 누이 사이의 구별은 피의 순환의 각 국면들phases, 곧 들숨/날숨, 유동적임/딱딱함,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역주: apprehension은 “파악”이나 “포착” 같은 의미 이외에도,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의미들은 “흡수résorption”와 달리, 바깥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바깥에 대해 거리두기”로 번역했다.]/바깥의 흡수―이들이 아직 동물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국면들은 거의 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그/녀)가 내쉴 때 타자는 들이마시기 시작하고, 그/녀가 붉은 피가 될 때 타자는 자신의/자신들의 정맥(들)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미 되돌아가고, 그/녀가 혈구(들)의 원자적 개체성으로 긍정될 때 타자는 림프로 남아 있고, 그/녀가 재가 되어 대지로 돌아갈 때, 타자는 이제 겨우 휴지 상태에서 빠져나와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등등. 하지만 이들은 소화digestion 과정에서는 이미 치유할 수 없게 분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하나가 [남성적인] 하나 안에서 자신을 재인지reconnaître할 수 있을지 몰라도―따라서 이 경우 [남성적인] 하나는 [여성적인] 하나를 이미 동화시켰을 것이다―그 반대의 경우는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안티고네가, 이 외부, 그녀에게는 도시 바로 그것인 이 외부를 향해/외부에 맞서 자율적인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용기와 마음씨coeur[역주: 여기서 “coeur”는 “심장”, “마음”, “마음씨”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리가레가 글의 서두에 제사로 인용한 헤겔의 『자연철학』에 나오는 “중추”를 뜻하기도 한다.], 분노를 입증해주고 있다면, 이는 바로 그녀가 남성적인 것을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한 순간은. 하지만 아마도 이는 그녀가 오빠를 애도할 때에만, [여성적인] 죽음la mort으로 인해 상실한 남성성을 그에게 되돌려주는, 그의 영혼에 다시 양분을 제공해주는, 그리고 그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d'en mourir 시간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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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미 피의 균형은 와해되고 변질되고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소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유동성을 부여하는, 자기 자신을 자극하고 자기 자신의 운동 중에 자신을 동요시키는,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불순함이 뒤섞이지 않은 [남성적] 행복le bonheur은 동등하게 분유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살아있는 통일성 안에서 존립하고 있는 한에서 누이는, 오빠가 자기로 복귀하기 위해 동화시키는 이러한 실체―피―의 자기-표상적인 지주(支柱)가 될 수 있다. 아들이 그를 낳은 부부로부터 독립해서 대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보증(담보, gage)인 그녀는 살아 있는 거울, 곧 그녀의 반사를 통해 [오빠의] 자기[역주: 여기에서 “자기”는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헤겔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 “자기”는 “주체”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의 자율성이 확립되는 원천이다. 붉은 피와 그것의 외관상 유사물이 서로 안에서 조화롭게 (혼)융되는 특권적 장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혼)융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타자 안에서 자기를 비추기auto-spéculation에 관해 도시가 오빠와 누이 각각에게 부여한 상이한 재인지[인정]의 권리는 항상 이미 그들의 결합을 도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록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공개적인pubblique 재-표시를 기다려야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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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여성[아내]-어머니는 양분을 전달하고 유동화하는[용해시키는] 림프쪽에 전념하게 되고, 주기적인 출혈로 인해 피를 상실함으로써 거의 백색에 가까워지며, 사회의 다양한 성원들 및 기관들이 체화하여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중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된다. 남자(아버지)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외부의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체화를 진전시키고, 이렇게 해서 자신의 활력, 성마름, 활동성을 강화하게 된다. 자신의 체내에 타자를 흡수하는 순간에 특별한 승리감을 맛보는 것이다. 아버지-왕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살아 있는) 교환의 단절을 자신의 담론 속으로 지양함으로써 반복한다. 법의 텍스트의 기록 속에서 피를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그는 동시에 이 텍스트(자신)를 분신(으로서)―하지만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그의 부인 안에서 각각 상이하게―생산하며, 외관상 유사한 것들, 상이한 방식으로 피를 잃어버린 개별적 자아들의 원자들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함으로써 피의 색깔을 더욱 더 퇴색시킨다. 이 과정에서 어떤 실체가 상실된다. 곧 자신을 살아 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함으로써 피가 상실된다.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역주: hypochondria와 melancholia는 둘 다 우울증의 증상이다.]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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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어떤 담론도 간단히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역주: “봉합하지/다시 메우지”의 원어는 “re(n)fermée”이다. “renfermée”라면 “봉합하지”의 의미이고, “refermée”라면 “다시 메우지”의 의미이다.] 못할 상처를 낳는 이러한 타격, 가격이 불가피하게 가해지는 윤리적 계기로 되돌아가봐야 한다. 오빠와 누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소위) 평등한 인정[재인지] 안에, 두 본질들 사이의 비폭력적인 상호 삼투 안에 존재하며, 이러한 인정과 상호 삼투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각각]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안에서 자신들의 보편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 일치는, 아직 청춘들인 전자와 후자가 행위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집 안의 수호신들의 축복 속에 전쟁에서 벗어나 있는 유년 시절이 마치 낙원처럼 계속 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가적이고 오염되지 않은immaculées―또는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목가적인―유아적 사랑은 어떤 시기 동안에만 존속될 수 있다 ... 그리고 각자는 곧바로, 동등한 자신의 맞짝 안에는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자신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와 타자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공정하게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공동의 분유départage 속에서는 법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양심, conscience)은 자신의 단순성 그대로, 의무에 대한 파토스라는 온전한 성격 그대로 재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양심]은 자신에게 드러난 윤리적 본질의 이 부분, 하나의 성에게 자연적으로 속하는 것에 상응하는 부분에 따라 행위하도록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는 의식[양심]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범하게 만들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 편파적인 작용에 의해 공격을 받은 타자와 대면하게 되는 사후에야 비로소 의식[양심]에게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제 다른 쪽이 대립물과 적대자로 나타나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범행이 이루어질 때 분출하는 어두운 잠재적 힘, 자기[의] 의식conscience de soi은 이러한 행동 속에서 이 힘을 깨닫게 된다. 의식은 또한 이러한 무의식을 갖는다는 것, 또는 이러한 무의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식에게는 낯선 일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의식이 내리는 결정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살해된 공공의 적대자는 아버지임이 밝혀지고, 결혼한 여왕은 어머니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역주: 여기에서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힘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의식[양심]”의 원어가 “la conscience éthique”라는 여성형 명사로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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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하나의 삼단논법이 이루는 경탄할 만한 악순환. 여기에서는 무의식이 계속 무의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의식―의식은 무의식을 몰라도 무방하도록 허락받고 있다―의 법들을 인식하고 있다고 가정되어 있으며, 이 법들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더 억압받게 된다. 하지만 두 개의 윤리적 법, 성적으로 다른 두 현존재를 아래층/위층으로 나누는 것―게다가 이는 오빠와 누이의 죽음 속에서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은 자기Soi에서 유래한다. 정신이 끊임없이 자신을 지양하는 운동은 이러한 층화를 필연적이게 만들며, 타자가 구덩이로 더욱 깊이 매장될수록[우물 속으로 더 깊이 잠겨들수록] 더 쉽게 자신의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처럼 [남성적] 하나는 타자로부터 새로운 힘, 새로운 형태를 다시 끌어내기 위해 타자와 결합하는(성교하는, copule) 반면, 타자는 아무런 독특성의 표시 없이 자신을 소비하는 어떤 실체가 거주하는 땅 속으로 항상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성적] 타자에 대해 계속 자행되는 강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지조차 확실치 않은데, 왜냐하면 이러한 [강간] 작용은 여성이 점점 더 뒤로 물러나 자신의 납골당으로 자신을 밀폐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경우에는, 너무나 “다른” 본질이 생겨나서 이 본질이 자신을 “외부로부터 생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본질을 동일자로, (인간적인 법만을 의식하는 [남성적] 무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은) 어떤 무의식으로 환원시킨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범행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자행될 수 있고, [강간] 작용은 사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항들 각자를 근본적으로 이중화하여, 하나의 변증법만으로는 이 항들의 결합을 표현하는(접합하는, articuler) 데 충분치 못하게 만들지 않는 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한 성격과 다른 성격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분할되고 각자가 스스로 이러한 대립을 야기시킨다는 점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무의식의 법들이 의식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고, 소위 신의 법들은 철학의 법들로, 여성성의 법들은 남성성의 법들로 번역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정신의 다음 운동에서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로 이행하게 되는가? 또는 오히려 정신의 운동은 이 차이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정신은 사후 효과effet d'après-coup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 차이에 관해 입법하고 차이의 생성을 언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차이를 해소하지만, 실은 이미 모종의 언표 과정(언표의 소송, procès d'énonciation)이 동일자로 복귀하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러한 차이를 배제해버렸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남성적인 것은 자신의 담론 기획의 법칙이 전개된 과정을 되밟아갈 수 있지만, 여성적인 것은 자신을/자신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의 법을 규정해 놓은 것은 바로 남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관념상으로는, 전자와 후자 모두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의식적인 것은 오히려―또는 훨씬 일찍부터?[역주: 불어에서 “plutôt”는 “오히려”, “차라리”를 의미하는데, 이 단어와 발음이 같은 “plus tôt”는, “plus”가 “더 ~한”을 뜻하는 비교급 부사이고, “tôt”는 “일찍, 빨리”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훨씬 일찍부터”을 의미한다.]―남성쪽에 속하고, 무의식은, 모성적인 것과의 분리 불가능성 때문에 억압된 채로 여성쪽에 속하게 된다. 이는 남성성―남자쪽에 존재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쪽에도 존재하는―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성에 대한 자신의 관계들 및 모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모성에 대한] 소속성을 변증법화할 수 있는 반면(여기에는 모든 여성적 독특성에 대한 부정 작용이 포함된다), 여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는 점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존재로서의) 존재 자체l'être라는 추상적 직접성이나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역주: “하나의(하나로서의) 존재”의 원문은 “un (comme) être”이다. 괄호를 빼고 읽으면 “하나의 존재”라는 뜻이고, 괄호를 함께 읽으면 “하나로서의 존재”, 곧 “존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종류”로 되어 있지 않으며 “존재는 한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에 대한 거부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성 및 심지어 남성과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자기로서의 하나un comme soi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보편화될 수 있는 연계를 긍정하는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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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그녀를 [그녀] 자신(과 같은 것)으로 정체화할―자기 자신으로 복귀할―수 있게 해주고, 그녀를 자연적인 거울 반영 과정에 대한 속박에서 떼어내고 [자연적인]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사변화 과정에 대한 시각이나 담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여자는 역사Histoire의 생성에서 능동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여자는 여전히 무차별적이고 불분명한 감각적 질료에 불과하며,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내지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역주: "[남자가 처음에 지니고 있는 감각적] 자기",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존재", "지금 여기 존재함(또는 존재했음)을 본질로 갖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모두 지양되어야 할 즉자적 상태들이다.]의 지양을 위한 실체(의) 저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곧 여자는 언표작용이 이루어지는 어떤 하나의 현재 순간의 복제물redoublement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가 이 현재 순간에 자기 자신의 유사-주체성으로 도래할 때, 이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보편적인 현재 자체로 이행한 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재 순간의 복제물은 [여자의] 자기 의식으로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나는 결코 나와 같지 않으며(않을 것이며), 여자는 주인이 전유하는 이 독특한 의지에 불과하고, 동일자에 대한 주인의 정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너무] 감각적이고 저항적인 물질성의 잔여, 또는 달리 말하면 그의 대역 배우doublure에 불과하다. 여자는 그 자신만으로는 역사Histoire의 담론의 언표 과정을 성취하지 못하며, (동일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결여된 노예로 머물러 있다. 곧 자신의 주인에 대해 소외되어 있듯이 이러한 역사의 담론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타자, 곧 말하는 존재인 당신Toi[역주: 여기서 “Toi”는 한편으로는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신분이 높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밀접하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어 표현인데, 우리말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당신”이라고 번역했다.]―또는 그분Il―안에서만 자신의 본질적인 자기―자아―에 대한 직관을 가질 수 있다. 그녀의 고유 의지는 이러한 주인에 대해 겪게 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의 부정성[쓸모없음]에 대한 내밀한 감정 속에서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타자, 이 대타자Autre를 위한 그녀의 노동은, 그녀 자신에게 종별적인 어떤 욕망의 비현실성(비실효성, ineffectivité)을 구성한다.
        하지만 여자가 욕망의 소유를 이처럼 포기함으로써 외부 사물들은 실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데, 이 사물들의 형태는 어떠한 독특한 파토스, 어떠한 우연적 자의성에 의해서도 재-표시되지 않는 어떤 자기에 의해 규정되며, 이 사물들 속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적 실재성으로 재-직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자에게 제기되는 복종의 요구, 곧 여전히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여자의] 자연 본성의 비본질적인 변덕스러움은 보편적인 의지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구의 궁극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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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피의 수호자이다. 하지만 피와 여자 모두가 피의 실체로부터 보편적 자기 의식을 양육해야 했기 때문에, 피와 여자는 핏기 없는 그림자들―무의식적 환상들―이라는 형태로 기저에서 영속적으로 존립하고 있다. 대지에 대해 무기력한 그녀는, 발현하는 정신이 자신의 어두운 뿌리를 두고 자신의 힘을 길어내는 땅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자기―남성성, 공동체, 통치―의 확실성은, 망각의 물 속에 무의식적이고 침묵한 채 억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이 실체 속에서 남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자신의 말과 서약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성은 본질적으로 대지의 품[자궁]으로 죽은 남자를 다시 안치하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다시 선사해주는 데 있음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que)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알고 있는 매개이며, 이를 통해, 묻혀 있는 있는 가장 독특한 생명체로부터 이러한 모든 [독특한] 자기이기를 그만 둔 어떤 현존재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러한 매개적 계기를 기억함으로써, 적어도, 망각 속에 소실되어 버린 남자 및 공동체의 영혼을 보존해줄 수 있다. 그녀 자신을 망각함으로써 자기 의식의 기-억[내면-화][역주: “기-억/내면-화”의 원어는 “Er-innerung”이다. 이 독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기억”, “회상”을 뜻하는데, 이처럼 분철된 형태로는 “내면-화”를 의미한다.]를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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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러한 지하의 힘들의 세계, 밝은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여 적대적으로 변화된 이 세계가 솟구쳐올라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겠노라고, 뒤집어 엎겠노라고 위협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연을 양육하는 무의식적인 대지이기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은 스스로 쾌락plaisir, 향락jouissance의 권리, 심지어 현실적인 능동성의 권리를 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보편적 운명을 배반한다. 더 나아가 여성성은, 보편적인 것만을 사고하는 나이든 시민을 조롱하고 미숙한 젊은 여자의 경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의 소유[속성]을 도착시킨다. 여성성은 나이든 시민에게 아들, 오빠, 젊은 남자의 젊음이 지닌 힘을 대립시킴으로써 이렇게 하는데, 여성성은 이들에게서 정부의 권력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주인, 동등한 자, 연인을 인지하고 있다. 공동체는 이러한 요구들을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타락의 요소들이라고 억압함으로써만, 이러한 요구들에 맞서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반항의 씨앗들은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시민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목적들로부터 분리된 것들로서 이미 무로 환원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는 젊은 남자들―여자의 욕망은 이들에게서 쾌락을 얻는다―이 피흘리는 갈등 속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고 서로를 살해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 힘들을 자신의 무기들로 전환시켜야 한다. 여전히 살아 있는 자연의 실체는 바로 이 힘들을 통해, 형식적이고 공허한 보편성에게 자신의 최후의 자원들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결코 친밀한 가족의 동굴[역주: 이는 '자궁'의 은유적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속으로 다시 모아들일 수 없는 다수의 점들로 자신의 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뿌림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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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역주: 원어는  “se/s'en relever”이다. ] 대표적인repré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적어도 절대적으로는―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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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번역해서 올립니다.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책의 일부인데, 이리가레의 텍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 텍스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다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독해하는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리가레의 텍스트가 상당히 난해하고(또는 암시적이고) 매우 실험적인 문체(나쁘게 말하면 괴퍅한 문체^^)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번역이 썩 신통치 못해서 더욱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리가레의 불어 문장은 주어와 접속사가 거의 없고, 분사 구문이 많은 데다, 중의적인 어휘 사용이 빈번하고, 의미 전달 방식 자체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번역이 정말 쉽지 않더군요.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불어 텍스트를 읽어볼 것을 권해 드립니다. 번역에는 영어 번역본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몇 가지 오역들도 있고 이리가레의 문장들을 너무 평범한 문장들로 바꾸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내용 전달을 위해서는 얼마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글은 이번 학기에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주제로 제가 하고 있는 수업에서 학생들하고 같이 읽기 위해 번역한 글입니다. 소포클레스에서 헤겔,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로 이어지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상징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고찰인데, 이리가레의 논의를 빠뜨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텍스트하고 [성적 차이의 윤리]라는 텍스트(이 두 글은 모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입니다)를 번역해서 한번 읽어보자고 말했는데, 막상 번역을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서 사실은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습니다(^^).

고학번 학생들이 꽤 많아서 한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교재로 선택하긴 했는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됩니다.

별로 재미 있지는 않겠지만, 재미 있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들이 있으면 지적도 해주시구요.

 

Luce Irigaray, “l'éternelle ironie de la communauté”, in Speculum de l'autre femme, Minuit, 1974, pp. 266-281.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


  수컷 안에 있는 자궁이 단순한 분비기관으로 퇴화되는 것처럼, 암컷 안에 있는 고환은 낭소 안에 갇혀 있으며, 대립물로 이행하지 못하고 대자적으로(자기 자신을 위해, pour soi) 능동적인 두뇌가 되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다. 그리고 클리토리스는 수동적인 감정 일반을 표상하고 있다. 반대로 남성 안에는 능동적인 감정, 부풀어오른 중추coeur가 존재하며, 비어 있는 신체의 부분들 및 요도의 해면조직의 틈새들을 메우는 피가 존재한다. 남성 안에 있는 이러한 피의 분출에 상응하는 것이 여성의 월경에서 피의 상실이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보관용) 수용기로서의 자궁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에서는 생산적인 두뇌의 실체와 외부로 분출하는 중추로 분화된다. 이러한 분화의 결과로 남성은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반면, 여성은 수동적인 원리가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은 전개되지 못한 자신의 통일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산출물이 두 형태[형상] 또는 두 형태의 부분들의 재결합인 양, 산출을 [암컷의] 난소와 수컷의 정자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그게 아니라 여성 안에는 물질적 요소가 존재하며, 남성 안에는 주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수태는 단순한 통일체 안으로, 자신의 대표 안으로 개체 전체가 농축되는 것이다. 씨앗[정자]은 이러한 단순한 대표 자체이다. 곧 이름으로서의 이고, 자신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는 자기인 것이다.

죄머링이 말하기를, “정맥은 눈에 이르러 가장 가느다란 혈관, 붉은 피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혈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 [자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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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족parent par le sang[역주: 이 글에서 “sang”, 영어로는 “blood”는 매우 다양한 의미(“피”, “혈연”, “핏줄”, “혈족”, “가문” 등)를 지니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살리기 위해 모두 “피”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피”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약간씩달라지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gue)를 돌보는 것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의 내생적 의무는 죽음mort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정신적 행위로 전환시킴으로써 죽은 이(죽은 남자, le mort)[역주: 불어에서 “la mort”는 “죽음”을 뜻하며, 정관사 la가 붙는 여성 명사이다. 그런데 이리가레는 “le mort”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이는 원래는 “시체”, “죽은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가레는 le mort의 경우 “죽음”과는 달리 여성 명사가 아니라 남성 명사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단어를 단순히 “시체”나 “죽은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죽은 남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의 묘지를 안전하게 돌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처럼 단순한 보편성의 평화로 고양된 남성을, 우연적인 생명 및 분산되어 있는 그 현존재의 계승의 불안함에서 벗어나서 완수된 남성의 형상화figuration 속으로 맞이하는 일이 피[혈통]의 장소의 수호자인 여성성에게 귀착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은 그녀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되는 일체의 악조건을 무릅쓰고서, 이 시신, 자신의 순수 존재의 상태로 존재하는 남성인 이 시신을 매장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1) 남성은 분명 아직도 (자연적)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독특한 개인에게 돌발적으로 일어난 이러한 [자연적 죽음이라는] 우연적 사고accident, 자신의 자연적 성격 때문에 의식을 의식 자신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의식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여 자기 의식이 되지 못하도록 의식과 자기 복귀를 절단시키는 이러한 우연적 사고를 정신의 운동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virilité이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예컨대 전쟁에서) 이러한 부정성을 윤리적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면, 여성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파괴의 작업opération을 감행함으로써―이는 정신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일이다―죽은 남자를 그 자신과 화해시켜 주는 효과적이고 외재적인 매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죽은 존재―분명히 보편적이지만, 독특하게도 힘을 박탈당하여 비워진 채 수동적으로 타인에게 내맡겨진―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중에 그를 그녀 자신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모든 저속한 비합리적 개체성으로부터,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보다 더 강력해진 추상적 물질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로부터 무의식적 욕망들의 불명예스러운 작업들 및 자연적 부정성을 떼어냄으로써―아마도 그를 그녀의 욕망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그녀는 이 부모의 자식을 대지의 품[자궁]sein de la terre으로 되돌려보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불멸의 원소적인 개체성과 재통합시킨다. 또한 그를 하나의―종교적―공동체로 재결합시키는데, 이 공동체는 이 죽은 남성을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결국 그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독특한 물질의 폭력들 및 하층의 생명운동을 통제한다.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
.(2) 성원들에게 그들이 이 총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오직 이 총체 안에서/이 총체로부터만 자신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시킴으로써.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특수한 개별 목적들(부의 획득이든 향락의 추구든 간에)을 위해 설립된―가족을 포함하는―결사(結社, association)들은 개별 성원들의 친밀한 삶을 동요시키고, 독립된 그들의 삶을 뒤집어엎고, 그들의 독자적인 삶을 침해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전체를 해체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독특한 개별성의 질서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인, 곧 죽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곧 이들이 자연적인 현존재에 밀착하지 못하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또는 의식적인 자기가 전유할 수 있는 모든 술어를 결여하고 있는 몰아적인 피안으로 도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의 숭배죽음의 문화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접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적어도 윤리적 차원으로 고양된다면―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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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은 이러한 관계는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들은 같은 핏줄이지만, 핏줄은 이들에게서 정지와 균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ê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3)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통일을 이루어 각자가 타자로 이행하게 될 만큼 이들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서로 각자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길래 이들이 이처럼 서로간의 교환으로 이끌리는 것인가? [혈연]에 대한 인정인가? 같은 피[혈연]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공통의 헌신인가? 모권제 유형의 계보에 의해 좀더 순수하고, 좀더 보편적인 존재로 보증받는 피의 영속성 및 존립을 이들이 공모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가문은 매우 모범적인데, 왜냐하면 남편의 어머니는 또한 부인이기도 하며, 이는 이들의 결합에서 나온 자식들―무엇보다 폴뤼네이케스와 안티고네―에서 핏줄의 연계를 재-표시[역주: “재-표시”의 원어는 “re-marque”이다. 불어의 remarque는 원래는 영어의 remark와 마찬가지로 “언급하다”, “지적하다” 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이리가레는 데리다의 특수한 용법에 따라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에게 “marque”는 기록(inscription이나 êcriture)의 흔적, 표시를 가리키며, “re-marque”는 로고스, 이성, 사유 등의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록의 작용이 계속 되풀이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곧 계속 기록 작용을 하지 않고서는 로고스나 사유, 정신 따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합의 흔적, 표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re-marque”는 이러한 결합의 흔적이 그 자식들에게서 “다시-표시됨”, “다시-나타남”을 가리킨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외삼촌―어머니의 남자형제―은 여전히 부권적인 권력의 대표자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역주: “consanguité”에는 “혈족관계”와 “근친교배”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4) 하지만 사실은―오랫동안 그렇게 생각되어오긴 했지만―정자는 피와 결합되지 않고 오히려 난자와 결합되며, 만약 이러한 결합이 자신의 모든 “현실성”을 부여받았었다면, 이는 이미 정신과 인륜적 실체의 통일성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열시켰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합은 비순수하게 맺어진 남편과 아내의 결혼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빠와 누이의 화합accord은 같은 이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곧 이들이 같은 자궁[같은 모계 혈통][역주: “같은 자궁/같은 모계혈통”의 원어는 “co-utérine”이다. “utérine”은 “자궁”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를 가리키기도 하며, “모계혈통”을 뜻하기도 한다.]에 이끌리는 것은, 아버지의 성(姓)으로 대표(재현되는, représentée) 상징적 규칙들―이 규칙들은 핏줄의 위력을 이어받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이미 가족 공동체를 도시에서 시행되는 법률의 유형으로 고양시킨다―에 대한 복종을 통해 벌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떤 순간 오빠와 누이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곧 타자 안에서/타자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각자의 능력(권력, pouvoir)―붉은 피의 능력[권력] 및 이를 재흡수하는 능력[권력], 그리고 명명의 언어행위를 통한 이 능력[권력]의 지양―에서 기인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서로를 인지[역주: “인지”의 원어는 reconnaissance이다. 이는 “인정”, “재인지” 등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헤겔이 사용하는 독일어 Anerkennung(이는 “인정” 또는 “인지”의 의미는 갖고 있으나, “재-인지”라는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에 비해 의미론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하게 된다. 유사한 자(동류, semblant)를. 이는 모권제 및 부권제의 (인륜적) 실체가 상호 공존하면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평화, 욕망 없는 관계 속에서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존립을 회복시켜 주는 이상적 분배이다. 여기서 성들간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순간은 신화적인 순간이며, 이러한 헤겔의 몽상은 이미 부권제의 담론에 의해 생산된 변증법의 효과이다. 위무해주는 환상이고, 불균등한 군대들이 벌이는 투쟁의 휴전이고, 이미 정신의 생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죄의식에 대한 부인이며, 각각의 성이 타자[다른 성]와 관계를 맺고 타자[다른 성]로 이행함으로써 각각의 성에 대해 보증되는 양성성의 미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성―남성 또는 여성―은 이미 각각의 성에 대해 상이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운명에 묶여 왔다. 비록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 강간, 살해, 침탈, 상해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중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역주: 이 문장의 의미는 좀 모호한데, 뒷부분에 나오는 “유년시기의 낙원”에 대한 언급과 관련된 내용인 듯하다. 곧 헤겔의 몽상은 아직 성적으로 발달된 주체들로 되기 이전의 오빠와 누이 관계, 따라서 비폭력적이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동류의 관계를 성들 사이의 인륜적 관계의 전범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헤겔 자신이, 누이에 대해 오빠는 인정의 가능성이지만 어머니이자 배우자로서의 누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누이와 오빠의 이러한 처지는 상호 교환 가능하지 않다[역주: 곧 오빠는 누이에 대해 누이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반면, 누이는 오빠에 대해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는 점을 긍정하면서 시인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중지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오빠는 이미 누이에 대해 하나의 가치를 투여받고 있지만, 누이는 이러한 가치를 오빠에게 되돌려 베풀어줄 수 없으며,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오빠에게 의례를 베풀어줌으로써만 겨우 이를 해낼 수 있을 뿐이다.   

***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소포클레스에서는 확실히 아직 사태가 그렇게 명료하지 못하다. 여기에서는 아직 어느 쪽이 더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기에서 피는 이미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버지는, 적어도 일정한 시간 동안에는 왕이었다. 이 시간 동안 왕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리들을 주장하고 있고, 따라서 (부권제적인) 가장의 권력과 국가의 권력이 서로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비극은 피[혈연]에 대한 취향이 빚게 되는 징벌을 극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유한 이름[고유명사]의 특권은 아직 순수하지 않다. 곧 만약 아버지의 이름의 권능이 이미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면, 이는 오이디푸스가 살해와 근친상간을 범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욱이 형제들 각자, 자매들 각자가 여기서 이중화된다는 사실은 또한 그리고 아직 양 극단들―이는 나중에 또하나의 남성 또는 또하나의 여성(곧 에테오클레스와 이스메네)으로 드러날 것이다―이 거의 희화적인 것들로 나타나는 하나의 이행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만약 이스메네가 안티고네와 같은 핏줄에 속하는 여동생으로 특징지어진다면, 폴뤼네이케스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오빠로 특징지어진다면, 에테오클레스는 같은 아버지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서 특징지어진다.
       또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언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메네는 그 연약함과 겁많음, 고분고분한 복종, 눈물, 광기, 히스테리로 인해 이론의 여지 없이 “여성”으로 보이며, 게다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왕으로부터 얕보이고 멸시를 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른 여자들, 곧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용기를 꺾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다른 여자들과 함께 궁 안에 유폐되는 처분을 받게 된다. 안티고네의 경우는 상황이 이처럼 간단치 않아서, 왕은 그녀가 죽음으로 오만방자함의 댓가를 치르지 않을 경우 자신의 남성다움이 그녀에게 찬탈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정말이지 이제 나는 사내가 아니고, 이 계집이 사내일 것이오.”[483행] 안티고네는 도시의 법, 도시의 주권자의 법, 가족의 가부장, 곧 크레온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핏줄의 유대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분신을 개와 맹금의 먹잇감으로 방치하여 끊임 없이 고통받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처녀로 죽기를 선택할 것이다. 신의 법에 봉사하는 것을 포기하느니, 지하의 신들에 대한 소명을 저버리느니[지하의 신들에 대한 애정을 그만두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향락jouissance은 좀더 잘 인정받게 될 텐데, 왜냐하면 지하에 속함으로써 인간들의 고안물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데스에 대한 관계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에 맞서는 것이다. 어두운 세계에 대한 정념passion 속에서 그녀는―적어도 왕의 말에 따른다면―사람들(남자들, hommes)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굴복하고 마는 이 비열한 범죄들과는 전혀 다른 도착적 행위들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이 일을 포기하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더 좋은doux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더욱이 왕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까지 선언한다. 따라서 그녀는 카드모스의 후예들, 식자alphabètes 후예들 중에서 이처럼 사고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적어도 공공연히 말하는(높은 목소리로 말하는, à haute voix)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를 통해 주인의 권위에 맞선 반역을 숨죽여 낮게, 은밀하게 웅얼거리고 있을 뿐인 백성들, 노예들의 동조를 끌어낸다. 친구들 없이, 배우자 없이, 눈물 없이 그녀는 이 망각된 길을 따라 산 채로 바위 틈의 구멍 안에 유폐되고 결코 태양빛을 볼 수 없게 된다. 권력을 보유한 자들은 자신의 납골당, 감옥, 태내(胎內)에 혼자 갇힌 그녀에게 겨우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먹을 것을 주어 부패된 그녀의 더러움, 수치가 도시를 훼손시키지 않게 하려고 한다. 그녀가 숭배하는 지하의 신들과 혼자서만 대면하도록 만들었을 때 그녀가 과연 이 고독한 의식(儀式)에서 살아남게 될지―다시 한번―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é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ève) 수 없다.(5) 그녀는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기 어머니의 저 불행한 결혼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저 끔찍한 포옹들(교미들, étreintes)에서 태어난 죄를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저주받은 그녀는, 정말 부당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불가피한 고통을 감내하기로 마음먹는다.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ê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6) 권력이 자신에게 내린 처형 명령을 선취한 것인가? 이를 복제(배가, redoublant)함으로써? 이미 순응함으로써? 아니면 반항함으로써?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하지만 피는 흘리지 않은―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녀가 도시의 법과 현재 어떤 논쟁을 벌이고 있든 간에, 또다른 법은 그녀가 걸어가게 될 길로 이미 그녀를 인도해 왔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역주: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는 “sa/la mère”의 번역이다. 원문에서 “sa mère”는 안티고네의 어머니, 곧 이오카스테를 뜻하고, “la mère”는 이런저런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와의 동일시(정체화, identification)가 바로 그 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여자, femme),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자신의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한 어머니의 불행한 패러다임이 있는 데 말이다. 그리하여 누이는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멜 것이다. 그녀는 자기 오빠, 그녀의 어머니의 욕망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기 위해, (한) 무덤의 그림자로, 죽음(의) 밤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허리띠의 베일로 숨―말, 목소리, 호흡, 피, 생명―을 끊게 될 것이다. 결코 아내(여자, femme)가 되지 못한 채. 하지만 배타적으로 팔루스적 관점에만 중심을 두고 볼 때 생각할 수 있듯이, 그녀가 남성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은 [여성적] 애정과 연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막혀 있는, 결코 뚫린 적이 없었던 어떤 욕망의 길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폴뤼네이케스, 두 형제 중 더 여성적인 폴뤼네이케스 안에서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발견하게 될 것은 무엇인가[재발견하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 더 젊은? 어쨌든 그는 더 연약한, [매장을] 거부당한 인물이다.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7) 한 여자, 결혼한 한 여자를 위한 사랑/그 여자의 사랑으로 무장을 한 그는, 이 낯선 결합(외국인과의 결혼, hymen étranger) 때문에[역주: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드라스토스의 딸 아이게이아와 결혼한다.] 그의 누이가 산 채로 매장되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적어도 피에 대한 자신의 정념 때문에 자기 형제―에테오클레스―의 통치의 권리를 소멸시키고, 자기 형제―이름상으로는 형인?―가 권력과 이성, 소유 및 부권의 계승과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생명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통치의 실행양식이 변화되지는 않았다. 또다른 남자, 곧 크레온이 통치권을 이어가기 위해 등장했다. 그 역시―안티고네처럼―고립무원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법이라는 도구를 지니고 있다.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그는 모든 권력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한다.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음으로 이끌어갔지만 그는 사랑 없이 왕좌에 다시 등극하며, 이 왕좌의 왕권sceptre은 그의 수중에 들어온다. 죽음에 사로잡힌 그는, 하지만/그리고 통치권을 엄격하게(가혹하게, rigides) 집행한다. 전혀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서. 냉혹하게 이성적으로. 부수기 쉬운 만큼 부서지기도 쉬운 그 연약한 강함은 그로 하여금 쾌락에 지배당하는 것, 하나 또는 여러 여자들에 지배당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기 아들이 대표하는 젊음의 열정, 백성들의 연합, 노예들의 반란, 심지어 욕망에 굴복한 끝에 서로 갈라진 신들, 그리고 따라서 신성한 것들 및 “원로들”에 조심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말과 진리, 지성과 이성, 곧 소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들에 대한 유일한 보호자로서의 특권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가, 예컨대, 여성 및 신성과의 관계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가문의 모든 사람의 죽음 속에서―이스메네는 황금 감옥, 주권의 변화로 인해 평범한 사적 주거지로 변모될 위험에 처한 황금 감옥에 격리되었다―, 이 전반적인 피의 분출 속에서 그는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다. 하지만 그는 불행을 자초하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그는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로서[역주: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는 “homme en trop”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en trop”는 “과도한”이라는 의미와 “여분의”라는 의미, “쓸모 없는”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신에 대해 무모하게 도전하는 남자”와 함께 “가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 또 “혹독한 불행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하고 쓸모없는 남자”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견딜 수 없는 운명에 무겁게 짓눌려 있으며, 이제 그에게 각각의 모든 사람은 똑같이 우연적인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과, 내용(혈통의 실체) 없는 대자적 존재의 엄격한 주권성, 자기 자신에게 낯선(이질적인, étrangère) 엄격한 주권성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으며, 독특한 개인들 사이의 (피의) 유대를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해소시킨 어떤 법을 집행함으로써만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곧이어, 유사한 외관semblant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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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illjoy >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칸다하르]를 촬영하던 어느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 팀은 손전등을 비추며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곳곳에 마치 사막에 버려진 양떼처럼 무리 지어 죽어 가는 난민이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콜레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볼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러나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사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면서 나는 자신이 무엇인가 먹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 .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관련해 UN에서 인도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말 호세인 박사가 2000년 여름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10년 동안을 계속에서 UN에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말했다. . .

불법 이민자로 가득 찬 자볼 근처의 한 난민촌에 갔을 때였다. 그곳은 난민촌인지 감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기아를 피해서 혹은 탈레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친 아프간 인은 다 수용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모두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절차 같았다. 어떠한 이유는 불법 입국자로 입국이 거부당한 사람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아로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거기서 영화에 등장할 엑스트라를 골랐다. 난민촌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 예산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 주일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한 달 된 아기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은 어린이들로 어머니의 품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기절해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울면서 빵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당국은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예산이 승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난민의 수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자신의 자연, 역사, 경제, 정치 그리고 이웃의 몰인정에 의해 파괴된 한 나라의 이야기이다.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된 한 아프간 시인은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다하르] 삼인 2002 (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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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5-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아프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군요 ...
 

* 계속 이어지는 글들입니다.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주의자
  글쓴이: marishin(신기섭)
  작성일: 2004. 04. 28. Wed 16:36
  조회수: 228
좌파 남성들의 여성주의 비판이 심심치 않게 논란을 일으킵니다. 이 논란이 거듭되면서 저는 날로
자신을 잃어갑니다.

김규항님의 글과 델라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좌파 남성들은 '좌파 여성주의' 또는 '사회주의 여성주의' 또는 '맑시즘
여성주의'에서 앞의 수식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좌파는, 사회주의는, 맑시즘은 모두 같다며
여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보수, 부르주아 비판에 동조하기를 기대합니다.

반면 여성주의자는 '여성주의'라는 데 강조점을 둡니다. 좌파 남성의 반 여성주의에 주목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좌파 여성주의자들의 '피해의 기억'이 한몫하는 듯도 합니다. 그동안 좌파
남성들은 좌파 여성들에게 수많은 아픔을, 고통을 주는 가해자였는데, 그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주의자들의 시선 차이가 논란을 증폭시키고, 그래서 둘의 간격은 날로
확대되는 것같습니다.

저는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게 날로 자신없어집니다. 그래서 요즘은 여성주의에 대해 침묵하는 게
최선이라고 느낍니다.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존경과 말없는 지지', 이 땅의 진보적, 또는 좌파,
또는 맑시스트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침묵에 앞서 딱 한가지는 질문하고 싶습니다.
남성은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는 걸까요?

여성주의자들이 '때때로 마초성을 드러내는 아직 불완전한 여성주의자'도 보듬어 안아줄 때가,
제가 침묵을 깨는 때가 될 겁니다. 

 

질문이 이상하군요.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8. Wed 17:36
  조회수: 223
신기섭님하고는... 전에도 이런 논쟁을 잠깐 한적이 있지요.
신기섭님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아니라 그 질문을 '화두'로 하여 보다 
일반화된 '진보적인 남성'을 상대로 이야기를 조금더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래 제가 2인칭으로 쓴 것은 꼭 신기섭님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점은 오해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좌파 남성과 좌파 여성 간의 '(연대의) 미래'를 얘기하기 전에 
토론의 '전제'와 '태도'를 먼저 문제삼고 싶은데 말이죠,

맑시즘 여성주의건, 사회주의 여성주의건... 여성주의 앞의 '수식'에만 
관심을 쏟는 것에 대한 '섭섭함'을 하소연하는게 아니라,
뒤의 말에 '아예' 존재감이 없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 저 남자들, 뒤의 말이 무엇이건 관심없는 거 아냐? '좌파' 여성주의, '좌파' 
인권운동, '좌파' 이주노동자운동, '좌파' 비정규직 운동... 앞의 말이 한식구기만 
하면 좋은 것 아냐? ... 
... 그럼 여성주의 고유의 고민, 이주노동자 고유의 모순, 이 모든 것은 어디서
고민하나? ... 알아서들 하겠지. 아무튼 좌파기만 하면 되지.
... 이게 연댑니까?

즉,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주의'라는데 강조점을 찍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쩐지 문제가 우리가 당신들을 수용하지 않아서 발생한 것 같은
화법을 쓰시는 걸 종종 보는데, 혹은 이 사태에 대한 해결의 책임이 여성들에게
있는 것 같은 지적을 종종 듣는데 (나를 계몽시켜봐)
문제는 당신들이 우리를 배제한 것으로부터 시작한 거죠. 

... 저도 연대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가 '태도' 문제라 한 건 이런 거죠. 아니,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을 
투명인간 취급하면 안되지 않겠어요? 나는 좌파인 것 같지만, 여성이기도 한데, 
한쪽 정체성은 쳐주지도 않으면서 "좌파란걸 보여봐"라니 처참하지 않겠어요? 
여기서 좌파란게 대체 뭡니까? 

대강말해 말이죠, 사회주의와 민중주의에 대한 지향 아닙니까? 그런데
'여성'이란 말은 말이죠, (제 입장에선 말이죠,) '민중'이란 말만큼 얼마나
피눈물이 느껴지는지 몰라요. '여성해방'을 외치며 분신한 열사는 없어도 수많은
여성들이 지금도 맞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정말로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그냥 인간적으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 가부장주의 양쪽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민중속의 민중이란 말이죠.
(그리고 역사의 동력이기도 하죠.)
게다가 그게 바로 '먼' 민중이 아니라 나 자신이면서 내 친구이면서 내 어머니면서 
내 할머니란 말이죠. 
그러니 제 입장에선 민중과 여성은 동격인데 말이죠, 당신들의 태도는, 한쪽을 
있지도 않은 걸로 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본인들이 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좌파 안의 우리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 느끼지도 못하면서) 충고까지 하고 나선걸 보니, '좌파'라는 
명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죠. 대단한 프라이드 아니겠어요? ... 아니 사실은
오만과 무모함의 극치죠. 현단계 좌파의 참 한심한 수준을 보이는건 아닌가 싶어서, 
착잡하단 말이죠. 

역사속에서 '진보'와 '인종' 혹은 '진보'와 '장애'를 함께 고민했던 이들은 어떤 
고민을 했었을까요? 단지 '진보운동' 안에 '껴주는 것'? 좌파 '일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부문운동으로 세 불리는 것? 머릿수 늘리는것?
... 그게 좌파의 연댑니까? 
사람의 정체성이란 말이죠, 그렇게 간단히 무자르듯이 되는게 아니라서 말이죠, 
저는 정체성에 대한 완벽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수평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당연히 '기존' 전제와 태도 가운데 도전받을 것들도 있겠죠.
그럴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앞에 꾸미는 말이 무엇이건간에 말이죠, 일단
그 뒤의 본명사가 말이죠, 앞의 수식어 만큼, 아니 때로는 그이상 생명력을 
갖고 펄펄 뛰고 있다는 걸 진심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걸 왜 없는 것(모순)으로 
치부합니까? 
혹시 그 모순이 당신의 정체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불편한거 아닙니까?
(저는 본인들이 의식하지 못해도 상당부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성폭력 
사건에 있어 '구체적인 사실'을 듣기도 전부터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려는 준비를
잔뜩 취하는 진보적 남자들을 볼때면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여성주의와 연대하자는 진보적 남성들 가운데 '구체적으로'
여성문제 해결을 고민하는 사람 만나본적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연대하자는
거죠?
여성이 어떻게 해야 해방되는지 '일반'적인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보수니
좌파니 재단해서 됩니까? 이게 좌파적 태도입니까?

그렇게 앙상한 '좌파'를 붙잡고 있을때,
뒤의 본명사 - 여성 뿐 아니라 수많은 소수자들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추상적으로 여성-장애인-비정규직-이주노동자... 모두 좌파의 품으로
오라고 말할지 몰라도,
사람들이 바봅니까. 존재감 없이 사는데는 지칩니다.
민중 속의 민중 -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다기한 모순을 '좌파'라는 추상적 단어 
속에 수렴시키고 굴복시키려고 할때, 더이상 좌파는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건 좌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성은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는 걸까요?"라 물으셨나요?
오히려 묻고 싶네요.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될 수 있나요?
한국인은 이주노동자가 될 수 있나요?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될 수 있나요?
... 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죠

... 되는게 중요한가요? 여기에 집착해서 양심을 편안히 하고 싶습니까?
(역으로 "그래 나 마초야"하는게 양심을 편안히 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군요.)
근데 저는 제가 이땅에서 이주노동자일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비장애인이다가 장애인이 되거나 정규직 노동자이다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는 
있겠군요. 그러나 내가 비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장애인이거나 정규직 노동자인 
동시에 비정규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게 정체성의 정치입니다.

중요한 건, 정체성 언명에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죠.
그보다, '아닌' 상태라 하더라도 연대가 가능하게 하는게 우리 숙제 아닙니까?
그리고 해답은 우리에게 있는게 아니라 당신들 쪽에 있는 겁니다. 

일단, 수렴주의부터 버리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류의 질문을 진보적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던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하세요.
비정규직 노동자더러 "나하고 친하고 싶어, 안친하고 싶어? 힘 빌려 줄까, 
말까? ... 그럼 내가 동하게끔 설득시켜 봐"라고 말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 책임을 이전하고 있습니다... 당하는 입장에선 
"억압이나 하지마."라는 말 밖에 나올게 없습니다. 자기 숙제들을 하세요.

                                                    무슨 불을 밝혀둘까 

 

정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글쓴이: marishin(신기섭)
  작성일: 2004. 04. 29. Thu 10:35
  조회수: 156
다 좋은데요....
제 질문은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남성이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는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한국인은 이 땅에서 이주노동자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이주노동자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장애인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될 수 없느냐가 아니고 비정규직주의자가 될 수 없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침묵하기로 한 마당에 델라님의 제 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델라님마저 저의 마지막 질문을 오해하신다면, 아마 여성 문제에 대해 저는 영원히 침묵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아이의 맑은 눈빛처럼 

 

여성과 여성주의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9. Thu 13:42
  조회수: 210
저도 여성과 여성주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신기섭님의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서 연상되는 조금 다른 문제에
의도적으로 집중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따로 대답을 할까...도 생각했는데,

이상하네요.
왜 저의 '설명'이 어떠느냐가 당신이 침묵하느냐 마느냐 여부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거죠? 
저는 답변 안하겠습니다. 침묵하시던지 마시던지 맘대로 하세요. 
연대하시던지 마시던지 맘대로 하시구요,
-- 무엇보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태도가 연대스런 태도인지 의구심이 드네요.

연대 여부가 저의 태도에 달려있는 거였군요. 
제가 싹수있는 남성 여성주의자 하나를 이렇게 적대시하다니, 큰일이군요.
...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무슨 불을 밝혀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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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네트워크 참세상 [김규향의 야간비행] 게시판에 실린 글입니다. 매우 신랄하면서도 여러 가지를 사고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좀더 논의를 맥락화하기 위해 관련된 글들도 함께 실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제가 붙인 것인데, 비방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제 주제에 누굴 비방하겠습니까?

그외 다른 글들 역시 다음 주소로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go.jinbo.net/column/gyuhang.php

 

[한겨레 신문]  편집 2004.04.21(수) 19:42

‘여성운동 보수화’에 침묵을 깨라


다시 말문 연 칼럼니스트 김규항씨

여성 의원 39명. 전체 의원 수의 13%. 제17대 총선에서 여성들이 거둔 놀라운 약진은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밤낮없이 뛴 여성계에 나름의 ‘성과’를 안겨줬고,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바랐던 여성 유권자들에게도 ‘희망’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2년 전 ‘중산층 페미니즘’과 여성계 일부에서 나온 ‘박근혜 연대론’을 비판했다가 여성계로부터 마초로 낙인찍힌 뒤 페미니즘은 물론 다른 주제로도 “제도권 매체에 글이나 강연을 사절”해 왔던 칼럼니스트 김규항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20일 그가 펴내는, 전태일 전기를 만화로 싣는 어린이용 진보잡지 〈고래가 그랬어〉 편집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는 총선 과정에서 나타난 여성계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입장은 2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밝혔다.

“두 해가 지났는데 박근혜 논란이 다시 일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여성주의 운동이 발전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정체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씨는 이번 총선에서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보수·여성계 언론이 박근혜를 앞세워 ‘여성 정치리더 시대’라고 표현한 데 대해 “우리 여성운동의 ‘불건전’하고, 퇴행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박근혜씨는 박정희식 정치, 보수와 수구의 상징입니다. 호주제 폐지에도 유보적 입장을 비친,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이기까지 한 정치인입니다. 진보적이어야 할 여성주의 운동이 보수·수구와 절충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불륜’ 발언 등을 꺼낸 일부 정당의 여성 대변인에 대해서도 “천박함을 견딜 수 없었다”며 “수구·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이기까지 한 여성 정치인 다섯명보다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 한명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수구·보수의 상징 박근혜
여성정치 리더로 받들고
하층인들은 돌보지 않으니‥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권
총선 계기로 힘은 세졌다
하지만 진보는 어디 있나?

김씨는 “이번 총선에서 중산층 엘리트 여성운동권이 여성 국회 진출 확대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는 대개 그들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점을 말하는 것일 뿐이지, 전체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며 다시 ‘중산층 엘리트 페미니즘 운동의 지나친 주류화’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여성들의 의회 진출이 양적으로 늘었다고 해서 질적으로도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 마나 한 얘기”라고 돌렸다.

그는 또 올해 초 일부 여성계 인사들이 앞장섰던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에 대해서도 “여성주의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은 지난 1월께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사후에 부인 현정은씨와 정씨 일가 사이에 벌어진 경영권 쟁탈 공방에서 여성계가 현씨를 지지하고 나선 모임이다.

“현정은과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발언권을 갖고 있는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이, 여성이면서 비정규직이라는 두 가지 억압을 받고 있는 여성들을 외면한다면 이는 여성주의 운동이 보수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수많은 하층 여성에게 또다른 억압을 가져오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김씨는 이번 총선과정에서 나타난 여성계의 이런 ‘보수화’에 대해 여성주의자·여성운동권 내에서 활발히 토론을 벌이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만일 다른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면 “아마 큰 일 났을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 보수화에 대한 여성계의 ‘침묵’의 배경으로 그는 ‘여성들의 독특한 연대의식’을 지적했다. “서로 잘못을 보호해주고, 남성들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여성주의자들 사이의 정서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남성 정치인보다 여성 정치인이 낫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중산층 엘리트 여성주의 운동이 다른 영역의 진보적 시민운동이 품고 있는 운동의 보편성, 즉 ‘더 많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과 지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생략한다면 많은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로부터도 존중받지 못할 것입니다.”

글 김성재 기자 seong68@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도저히 못참겠다
  글쓴이: 들레꽃(della)
  작성일: 2004. 04. 27. Tue 14:00
  조회수: 276
나는 사실 씨네21 정기구독자일 당시 당신을 꽤 좋아했다. 아무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당신은 꽤 많이 앞서서 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백인위를 언급한 점 때문에 
나는 당신이 진보적 남성 치고는 꽤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그 점에서 2년전에도 
나는 입장이 있었으되, 발표는 유보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사회(운동)에 진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선배들의 의식화 
때문이 아니라) 내가 노동자가 되면서부터였고
내가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성폭력을 여러번 당했기 때문이다.
... 말하자면 나는 '학습'이 아니라 '몸'으로 나의 정체성을 구성해 왔다. '몸'은 
나의 계급성이 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엄밀히 말해 노동자는 아니지만) 나는 당시 나의 정체성에서 
'여성'과 '노동자'를 분리하기 어려웠다. 회사 간부에게 티셔츠가 이쁘니 
벗어달라는 둥 성희롱을 당하면 이것이 몇퍼센트 노동자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고 
몇퍼센트 여성이기 때문에 당한 일인지 누가 정확히 나눌 수 있을까.
어떤 유색-여성-소수민족-장애 노동자가 있으면 누가 그의 가장 큰 모순이 
무엇인지 떼어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최근 논의되어 온 맑시즘 페미니즘의 고민이라 생각한다.

1. 당신은 여성 모순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기사의 말미에 언급된대로 당신은 '남성 정치인보다 여성 정치인이 낫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 때문입니다'라고 '고명'처럼 얹어 
말하긴 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여성성이 주는 이득(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나는 당신의 다른 글들에서 본 적이 없거니와,
"수구·보수적이고 반여성적이기까지 한 여성 정치인 다섯명보다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 한명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당신 생각의 핵심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걸 좀 물어보자.
살아오면서 단언컨대, 나는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은 커녕 '여성주의적인 
남성' 그 자체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가사와 육아를 50% 이상 분담하는 남성은 
희귀동물에 가깝다. 당신은 보았는가?

당신은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이 가능할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이 "사실은" 여성주의에 관심이나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민주노동당? 나는 당원이지만 안타깝게도 이점에 대해서는 남성 정치인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혹은 당신이 '여성주의적인 남성 정치인'을 육성할 기획이라도 갖고 있는가? 설마. 
당신은 여성운동 근처에도 갈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당신이 여성주의에 관심이 없다는 점, 이것이 당신이 비판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당신은 그저 '수구 보수'가 미울 뿐이고, 여성들 중 일부가 '수구 보수라도 
좋다 여성만 되어다오'라고 했다니 기가 막혔을 뿐이다. 
즉 당신은 네가티브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포지티브까지 운운하려고 나서니 
내가 기가 막힌 것이다. 

2. 그리고 여기에 바로 당신의 오만이 있다.

나는 중산층 여성운동을 비판하는 입장이다. 
(물론 군산에서 성매매 여성이 열두명 타죽었을 때 민중운동이 관심갖지 않은 
그들을 장례지내 준 것은 그 '보수적인' 여성운동 밖에 없긴 했다. 성폭력과 
성매매 문제는 다른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여성 모순이다.)

그러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의 자격은 여성운동 그 자체로부터 나올때 가장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비판이 여성모순에 고민도 없고, 여성운동에서 현재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는 자가 하는 비판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내지는 평소 장애인 운동 근처에도 안가본 진보적 인사)이 장애인 운동이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 진출을 앞두고 보수화되고 있다고 당신처럼 신문에 대고 
비판했다고 생각해봐라. 화려한 말빨을 자랑하면서. 일부 주장에는 수긍이 갈만한 
대목도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자기 자신이 장애인 운동할 생각이 꿈에도 없으면서, 
그저 장애인 차별만 안하면 고맙겠는, 명백한 계급적 우위에 서서 씹으면 그게 
지탄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지독한 오만이다.
나아가 바로 이런 것이 사회구조적 권력관계를 경제적 계급관계로 환원하면서
다른 모든 모순을 은폐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하면 당신은 (아래아래 당신의 글도 그런 기조이다)
"어, 여성운동 내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왜 내 귀에 안 들리지? 좀 
소문나게 싸워보지"
그렇게 말한다.

분하다. 
여성운동 내에도 진보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없는 듯이 말하는 것은 사실은, 의도적인 방기이다.
적어도 고은광순과 조이여울의 논쟁은 보았을 것 아닌가?

아니, 당신은 모를수도 있다. 우리의 목소리가 적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관심이 
없어서.
언론엔 커녕 진보적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늘 그 존재를 헷갈리게 하는 좌파가 
한무리 한무리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당신, 이것보다는 더 잘 알 것이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제도언론에서는 제대로 그 목소리가 보도되지 않은 사회당 입장을 
열심히 설명해주던 모습을 기억한다.

강조한다.
여성운동 내에는, 적어도 당신이 예의를 갖출 만큼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주 노동자 운동, 장애인 운동 ... 모든 운동 안에서 논쟁이 있다. 그 안에서 
더욱 큰 진보를 이루어 가려는 치열한 운동이 존재한다. 물론 나는 때로 이들 중 
일부 입장을 지지 격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운동의 분화에 대해 함부로 비평하지 않는다. 동지적 예의를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주 노동자가 아니고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주 노동자 운동을 직접 하고 있지 않고 장애인 운동에는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추상적' 지지를 보이는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비장애인과 한국인으로서 
그들을 차별하는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는가?

장애인 운동이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면서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함부로 평론하(거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진보적 남성을 
지겹게도 보고 있다.
이것은 여성 개인에게 비평하던 남성 개인의 습성의 연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존' 사회구조적 권력 관계를 웅변한다. 
여성(개인 혹은 운동)에 대해 남성이 비평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여성운동은 이주노동자 운동이나 장애인 운동보다 나은 형편이라고?
아니, 전혀! 1%쯤 나갔을 뿐이다. 수많은 여성 모순 가운데 가장 명백하고 노골적인 
성폭력 얘기 조금 시작했을 뿐이다. 흔히 거론하는 '국제적 기준'에서도 여성 
노동자 임금, 여성 정치 참여, 가사육아분담율 등 모든 면모에서 아직도 형편없는 
수치다. 아니, 이번 대거 배출로 여성 정치 참여는 '이제 겨우' 평균수치에 
근접했다. 그래서 불안한가?
조금만 흔들려도 백배쯤 과장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성하려는 것, 그것이 
수구보수 아닌가? 여성문제에 관한한 진보적 남성들은 '수구 보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 당신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는가?

나는 XX노총이 임금 받아먹는 운동한다고 비판당할 때도 "그 비판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대응이 달랐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비판할때는 동의하고 함께 분노했지만, 조선일보나 다름 없는 
놈들이 그런 얘기를 할때면 개처럼 달려들곤 했다. 

'현정은을 지지하는 모임'에 대해서 당신은 "여성주의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자, 이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다고 해보자.

"조갑제씨는 정규직의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서 노동운동의 끔찍한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느낌이 어떠한가. 그래, 나도 끔찍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지금 누가 
누구더러 끔찍하다고 하는가. 조갑제가 이 말을 할 자격은 있는가. 당치않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만큼의 혐오를 느낀다.

그렇다. 비판에도 '계급성'이 있는 것이다. 세련되게 말해서 '맥락'이다.

"현정은과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중산층으로서의 (여성운동의) 출신성분이 신체에 각인되고 의식을 좌우한다고 
비판하면서
당신은 남성이라는 당신의 출신성분이 신체에 각인되어 당신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에는 관대하다.
웃기는 모순 아닌가? 아니면, 남성이란 출신성분이 중산층으로서의 출신성분보다 
'덜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좋아하며 언급한 '여성 노동자' 입장에서 볼때는 둘다 똑같을 것이다. 

당신은 만일 다른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보수화 경향이 나타났다면 "아마 큰 일 
났을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고 했다... 
시민운동에서 보수화할때, 안에서 치열하게 싸울때, 당신처럼 밖에서 오만하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는지부터 먼저 성찰하라.

4. 마지막으로, 당신의 변명도 지겹다.

'슬픈 마초'에서 보이는 것은 권력자가 순교자로 포장하여 말하는 화법이다. 
이른바 '노무현식 화법'이라고 하겠다. 자신이 '솔직함' 때문에 모든 포화를 
(때로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맞는 것으로 포장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권력자 계급, 때로는 권력자 그 자신이라는 걸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발 '딸키우는 아빠'라는 레토릭은 쓰지 않으면 좋겠다.
'딸키우는 아빠'라는 것은 많은 보수적 남성들의 레토릭이 된지 오랜데, 그 의미는 
이렇다. "나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꽤 고민해."
그러나 이땅의 전근대+근대의 아버지들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여성들을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 주변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따라서 이런 변명 좀 그만 하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진보적 남성들이 오만을 버리지 않는 이상,
"당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진보적 여성들은 진보운동과 멀어질 것이다.
진보적 여성운동은 이미 99-00년 여성노조들의 출범에 즈음하여 한차례 이에 
대한 논쟁을 했던 바 있다. 그때 많은 여성노동운동가들은 남성-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나는 가슴이 아팠고, '몰성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사실 나는 그때 여성문제에 추상적으로 접근하면서 많은 오류를 
저질렀고 비판을 받았다) '일반' 진보-민중운동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았지만,
요즘은 나도 점점 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으며, 설명하는 힘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 68 이후 영국 사회운동계가 맑시즘-페미니즘 논쟁을 겪으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맑시스트들과 결별하고 또 많은 맑시스트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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