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리가레의 글을 하나 번역해서 올립니다.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책의 일부인데, 이리가레의 텍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 텍스트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다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재독해하는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리가레의 텍스트가 상당히 난해하고(또는 암시적이고) 매우 실험적인 문체(나쁘게 말하면 괴퍅한 문체^^)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번역이 썩 신통치 못해서 더욱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리가레의 불어 문장은 주어와 접속사가 거의 없고, 분사 구문이 많은 데다, 중의적인 어휘 사용이 빈번하고, 의미 전달 방식 자체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번역이 정말 쉽지 않더군요.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불어 텍스트를 읽어볼 것을 권해 드립니다. 번역에는 영어 번역본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몇 가지 오역들도 있고 이리가레의 문장들을 너무 평범한 문장들로 바꾸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내용 전달을 위해서는 얼마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글은 이번 학기에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주제로 제가 하고 있는 수업에서 학생들하고 같이 읽기 위해 번역한 글입니다. 소포클레스에서 헤겔,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로 이어지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라는 상징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고찰인데, 이리가레의 논의를 빠뜨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 텍스트하고 [성적 차이의 윤리]라는 텍스트(이 두 글은 모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입니다)를 번역해서 한번 읽어보자고 말했는데, 막상 번역을 해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서 사실은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습니다(^^).
고학번 학생들이 꽤 많아서 한번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교재로 선택하긴 했는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됩니다.
별로 재미 있지는 않겠지만, 재미 있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오역이나 어색한 문장들이 있으면 지적도 해주시구요.
Luce Irigaray, “l'éternelle ironie de la communauté”, in Speculum de l'autre femme, Minuit, 1974, pp. 266-281.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
수컷 안에 있는 자궁이 단순한 분비기관으로 퇴화되는 것처럼, 암컷 안에 있는 고환은 낭소 안에 갇혀 있으며, 대립물로 이행하지 못하고 대자적으로(자기 자신을 위해, pour soi) 능동적인 두뇌가 되지도 못한 채 머물러 있다. 그리고 클리토리스는 수동적인 감정 일반을 표상하고 있다. 반대로 남성 안에는 능동적인 감정, 부풀어오른 중추coeur가 존재하며, 비어 있는 신체의 부분들 및 요도의 해면조직의 틈새들을 메우는 피가 존재한다. 남성 안에 있는 이러한 피의 분출에 상응하는 것이 여성의 월경에서 피의 상실이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보관용) 수용기로서의 자궁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성에서는 생산적인 두뇌의 실체와 외부로 분출하는 중추로 분화된다. 이러한 분화의 결과로 남성은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반면, 여성은 수동적인 원리가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은 전개되지 못한 자신의 통일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산출물이 두 형태[형상] 또는 두 형태의 부분들의 재결합인 양, 산출을 [암컷의] 난소와 수컷의 정자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그게 아니라 여성 안에는 물질적 요소가 존재하며, 남성 안에는 주체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수태는 단순한 통일체 안으로, 자신의 대표 안으로 개체 전체가 농축되는 것이다. 씨앗[정자]은 이러한 단순한 대표 자체이다. 곧 이름으로서의 점이고, 자신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는 자기인 것이다.
죄머링이 말하기를, “정맥은 눈에 이르러 가장 가느다란 혈관, 붉은 피는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혈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 [자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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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족parent par le sang[역주: 이 글에서 “sang”, 영어로는 “blood”는 매우 다양한 의미(“피”, “혈연”, “핏줄”, “혈족”, “가문” 등)를 지니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살리기 위해 모두 “피”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피”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 약간씩달라지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은 피 없는 남자(과다출혈한 남자, l'exsangue)를 돌보는 것을 행위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의 내생적 의무는 죽음mort이라는 자연적 현상을 정신적 행위로 전환시킴으로써 죽은 이(죽은 남자, le mort)[역주: 불어에서 “la mort”는 “죽음”을 뜻하며, 정관사 la가 붙는 여성 명사이다. 그런데 이리가레는 “le mort”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며, 이는 원래는 “시체”, “죽은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가레는 le mort의 경우 “죽음”과는 달리 여성 명사가 아니라 남성 명사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단어를 단순히 “시체”나 “죽은 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죽은 남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의 묘지를 안전하게 돌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처럼 단순한 보편성의 평화로 고양된 남성을, 우연적인 생명 및 분산되어 있는 그 현존재의 계승의 불안함에서 벗어나서 완수된 남성의 형상화figuration 속으로 맞이하는 일이 피[혈통]의 장소의 수호자인 여성성에게 귀착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성은 그녀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되는 일체의 악조건을 무릅쓰고서, 이 시신, 자신의 순수 존재의 상태로 존재하는 남성인 이 시신을 매장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1) 남성은 분명 아직도 (자연적)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독특한 개인에게 돌발적으로 일어난 이러한 [자연적 죽음이라는] 우연적 사고accident, 자신의 자연적 성격 때문에 의식을 의식 자신으로부터 추방시키고, 의식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여 자기 의식이 되지 못하도록 의식과 자기 복귀를 절단시키는 이러한 우연적 사고를 정신의 운동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virilité이 도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예컨대 전쟁에서) 이러한 부정성을 윤리적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면, 여성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파괴의 작업opération을 감행함으로써―이는 정신이 생성되기 위해서는 생략할 수 없는 일이다―죽은 남자를 그 자신과 화해시켜 주는 효과적이고 외재적인 매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죽은 존재―분명히 보편적이지만, 독특하게도 힘을 박탈당하여 비워진 채 수동적으로 타인에게 내맡겨진―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중에 그를 그녀 자신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모든 저속한 비합리적 개체성으로부터, 그리고 이제는 그 자신보다 더 강력해진 추상적 물질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로부터 무의식적 욕망들의 불명예스러운 작업들 및 자연적 부정성을 떼어냄으로써―아마도 그를 그녀의 욕망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그녀는 이 부모의 자식을 대지의 품[자궁]sein de la terre으로 되돌려보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불멸의 원소적인 개체성과 재통합시킨다. 또한 그를 하나의―종교적―공동체로 재결합시키는데, 이 공동체는 이 죽은 남성을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결국 그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독특한 물질의 폭력들 및 하층의 생명운동을 통제한다.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2) 성원들에게 그들이 이 총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환기시킴으로써, 오직 이 총체 안에서/이 총체로부터만 자신들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시킴으로써.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특수한 개별 목적들(부의 획득이든 향락의 추구든 간에)을 위해 설립된―가족을 포함하는―결사(結社, association)들은 개별 성원들의 친밀한 삶을 동요시키고, 독립된 그들의 삶을 뒤집어엎고, 그들의 독자적인 삶을 침해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전체를 해체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독특한 개별성의 질서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인, 곧 죽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곧 이들이 자연적인 현존재에 밀착하지 못하고, 감각적인 영역으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또는 의식적인 자기가 전유할 수 있는 모든 술어를 결여하고 있는 몰아적인 피안으로 도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어야 한다. 따라서 죽음의 숭배와 죽음의 문화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접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적어도 윤리적 차원으로 고양된다면―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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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것이 섞이지 않은 이러한 관계는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들은 같은 핏줄이지만, 핏줄은 이들에게서 정지와 균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ê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3) 그렇다면 이들이 서로 통일을 이루어 각자가 타자로 이행하게 될 만큼 이들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은 서로 각자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길래 이들이 이처럼 서로간의 교환으로 이끌리는 것인가? 피[혈연]에 대한 인정인가? 같은 피[혈연]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공통의 헌신인가? 모권제 유형의 계보에 의해 좀더 순수하고, 좀더 보편적인 존재로 보증받는 피의 영속성 및 존립을 이들이 공모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의 가문은 매우 모범적인데, 왜냐하면 남편의 어머니는 또한 부인이기도 하며, 이는 이들의 결합에서 나온 자식들―무엇보다 폴뤼네이케스와 안티고네―에서 핏줄의 연계를 재-표시[역주: “재-표시”의 원어는 “re-marque”이다. 불어의 remarque는 원래는 영어의 remark와 마찬가지로 “언급하다”, “지적하다” 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이리가레는 데리다의 특수한 용법에 따라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에게 “marque”는 기록(inscription이나 êcriture)의 흔적, 표시를 가리키며, “re-marque”는 로고스, 이성, 사유 등의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록의 작용이 계속 되풀이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곧 계속 기록 작용을 하지 않고서는 로고스나 사유, 정신 따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합의 흔적, 표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re-marque”는 이러한 결합의 흔적이 그 자식들에게서 “다시-표시됨”, “다시-나타남”을 가리킨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외삼촌―어머니의 남자형제―은 여전히 부권적인 권력의 대표자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역주: “consanguité”에는 “혈족관계”와 “근친교배”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4) 하지만 사실은―오랫동안 그렇게 생각되어오긴 했지만―정자는 피와 결합되지 않고 오히려 난자와 결합되며, 만약 이러한 결합이 자신의 모든 “현실성”을 부여받았었다면, 이는 이미 정신과 인륜적 실체의 통일성을 회복 불가능하게 파열시켰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합은 비순수하게 맺어진 남편과 아내의 결혼에서만 산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빠와 누이의 화합accord은 같은 이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곧 이들이 같은 자궁[같은 모계 혈통][역주: “같은 자궁/같은 모계혈통”의 원어는 “co-utérine”이다. “utérine”은 “자궁”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를 가리키기도 하며, “모계혈통”을 뜻하기도 한다.]에 이끌리는 것은, 아버지의 성(姓)으로 대표(재현되는, représentée) 상징적 규칙들―이 규칙들은 핏줄의 위력을 이어받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이미 가족 공동체를 도시에서 시행되는 법률의 유형으로 고양시킨다―에 대한 복종을 통해 벌충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떤 순간 오빠와 누이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곧 타자 안에서/타자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각자의 능력(권력, pouvoir)―붉은 피의 능력[권력] 및 이를 재흡수하는 능력[권력], 그리고 명명의 언어행위를 통한 이 능력[권력]의 지양―에서 기인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각자의 독특한 자기에서 서로를 인지[역주: “인지”의 원어는 reconnaissance이다. 이는 “인정”, “재인지” 등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헤겔이 사용하는 독일어 Anerkennung(이는 “인정” 또는 “인지”의 의미는 갖고 있으나, “재-인지”라는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에 비해 의미론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하게 된다. 유사한 자(동류, semblant)를. 이는 모권제 및 부권제의 (인륜적) 실체가 상호 공존하면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평화, 욕망 없는 관계 속에서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존립을 회복시켜 주는 이상적 분배이다. 여기서 성들간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러한 순간은 신화적인 순간이며, 이러한 헤겔의 몽상은 이미 부권제의 담론에 의해 생산된 변증법의 효과이다. 위무해주는 환상이고, 불균등한 군대들이 벌이는 투쟁의 휴전이고, 이미 정신의 생성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죄의식에 대한 부인이며, 각각의 성이 타자[다른 성]와 관계를 맺고 타자[다른 성]로 이행함으로써 각각의 성에 대해 보증되는 양성성의 미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성―남성 또는 여성―은 이미 각각의 성에 대해 상이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운명에 묶여 왔다. 비록 오빠와 누이 사이에서 강간, 살해, 침탈, 상해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적어도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중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역주: 이 문장의 의미는 좀 모호한데, 뒷부분에 나오는 “유년시기의 낙원”에 대한 언급과 관련된 내용인 듯하다. 곧 헤겔의 몽상은 아직 성적으로 발달된 주체들로 되기 이전의 오빠와 누이 관계, 따라서 비폭력적이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동류의 관계를 성들 사이의 인륜적 관계의 전범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헤겔 자신이, 누이에 대해 오빠는 인정의 가능성이지만 어머니이자 배우자로서의 누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누이와 오빠의 이러한 처지는 상호 교환 가능하지 않다[역주: 곧 오빠는 누이에 대해 누이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반면, 누이는 오빠에 대해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는 점을 긍정하면서 시인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중지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오빠는 이미 누이에 대해 하나의 가치를 투여받고 있지만, 누이는 이러한 가치를 오빠에게 되돌려 베풀어줄 수 없으며,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오빠에게 의례를 베풀어줌으로써만 겨우 이를 해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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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소포클레스에서는 확실히 아직 사태가 그렇게 명료하지 못하다. 여기에서는 아직 어느 쪽이 더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기에서 피는 이미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아버지는, 적어도 일정한 시간 동안에는 왕이었다. 이 시간 동안 왕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리들을 주장하고 있고, 따라서 (부권제적인) 가장의 권력과 국가의 권력이 서로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비극은 피[혈연]에 대한 취향이 빚게 되는 징벌을 극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유한 이름[고유명사]의 특권은 아직 순수하지 않다. 곧 만약 아버지의 이름의 권능이 이미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면, 이는 오이디푸스가 살해와 근친상간을 범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욱이 형제들 각자, 자매들 각자가 여기서 이중화된다는 사실은 또한 그리고 아직 양 극단들―이는 나중에 또하나의 남성 또는 또하나의 여성(곧 에테오클레스와 이스메네)으로 드러날 것이다―이 거의 희화적인 것들로 나타나는 하나의 이행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만약 이스메네가 안티고네와 같은 핏줄에 속하는 여동생으로 특징지어진다면, 폴뤼네이케스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오빠로 특징지어진다면, 에테오클레스는 같은 아버지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서 특징지어진다.
또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언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메네는 그 연약함과 겁많음, 고분고분한 복종, 눈물, 광기, 히스테리로 인해 이론의 여지 없이 “여성”으로 보이며, 게다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왕으로부터 얕보이고 멸시를 당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른 여자들, 곧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용기를 꺾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다른 여자들과 함께 궁 안에 유폐되는 처분을 받게 된다. 안티고네의 경우는 상황이 이처럼 간단치 않아서, 왕은 그녀가 죽음으로 오만방자함의 댓가를 치르지 않을 경우 자신의 남성다움이 그녀에게 찬탈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정말이지 이제 나는 사내가 아니고, 이 계집이 사내일 것이오.”[483행] 안티고네는 도시의 법, 도시의 주권자의 법, 가족의 가부장, 곧 크레온의 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핏줄의 유대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분신을 개와 맹금의 먹잇감으로 방치하여 끊임 없이 고통받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처녀로 죽기를 선택할 것이다. 신의 법에 봉사하는 것을 포기하느니, 지하의 신들에 대한 소명을 저버리느니[지하의 신들에 대한 애정을 그만두느니] 차라리 죽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향락jouissance은 좀더 잘 인정받게 될 텐데, 왜냐하면 지하에 속함으로써 인간들의 고안물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데스에 대한 관계에 의해,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에 맞서는 것이다. 어두운 세계에 대한 정념passion 속에서 그녀는―적어도 왕의 말에 따른다면―사람들(남자들, hommes)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굴복하고 마는 이 비열한 범죄들과는 전혀 다른 도착적 행위들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이 일을 포기하는 것보다 죽음이 훨씬 더 좋은doux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더욱이 왕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까지 선언한다. 따라서 그녀는 카드모스의 후예들, 식자alphabètes 후예들 중에서 이처럼 사고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적어도 공공연히 말하는(높은 목소리로 말하는, à haute voix)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를 통해 주인의 권위에 맞선 반역을 숨죽여 낮게, 은밀하게 웅얼거리고 있을 뿐인 백성들, 노예들의 동조를 끌어낸다. 친구들 없이, 배우자 없이, 눈물 없이 그녀는 이 망각된 길을 따라 산 채로 바위 틈의 구멍 안에 유폐되고 결코 태양빛을 볼 수 없게 된다. 권력을 보유한 자들은 자신의 납골당, 감옥, 태내(胎內)에 혼자 갇힌 그녀에게 겨우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먹을 것을 주어 부패된 그녀의 더러움, 수치가 도시를 훼손시키지 않게 하려고 한다. 그녀가 숭배하는 지하의 신들과 혼자서만 대면하도록 만들었을 때 그녀가 과연 이 고독한 의식(儀式)에서 살아남게 될지―다시 한번―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é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ève) 수 없다.(5) 그녀는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기 어머니의 저 불행한 결혼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저 끔찍한 포옹들(교미들, étreintes)에서 태어난 죄를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저주받은 그녀는, 정말 부당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불가피한 고통을 감내하기로 마음먹는다.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ê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6) 권력이 자신에게 내린 처형 명령을 선취한 것인가? 이를 복제(배가, redoublant)함으로써? 이미 순응함으로써? 아니면 반항함으로써?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하지만 피는 흘리지 않은―을 반복한다. 그래서 그녀가 도시의 법과 현재 어떤 논쟁을 벌이고 있든 간에, 또다른 법은 그녀가 걸어가게 될 길로 이미 그녀를 인도해 왔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역주: “그녀의 어머니/어머니 자체”는 “sa/la mère”의 번역이다. 원문에서 “sa mère”는 안티고네의 어머니, 곧 이오카스테를 뜻하고, “la mère”는 이런저런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와의 동일시(정체화, identification)가 바로 그 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여자, femme),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자신의 남편의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한 어머니의 불행한 패러다임이 있는 데 말이다. 그리하여 누이는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멜 것이다. 그녀는 자기 오빠, 그녀의 어머니의 욕망이 영원히 살아남게 하기 위해, (한) 무덤의 그림자로, 죽음(의) 밤으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허리띠의 베일로 숨―말, 목소리, 호흡, 피, 생명―을 끊게 될 것이다. 결코 아내(여자, femme)가 되지 못한 채. 하지만 배타적으로 팔루스적 관점에만 중심을 두고 볼 때 생각할 수 있듯이, 그녀가 남성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은 [여성적] 애정과 연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막혀 있는, 결코 뚫린 적이 없었던 어떤 욕망의 길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폴뤼네이케스, 두 형제 중 더 여성적인 폴뤼네이케스 안에서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재발견하게 될 것은 무엇인가[재발견하게 될 사람은 누구인가]? 더 젊은? 어쨌든 그는 더 연약한, [매장을] 거부당한 인물이다.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7) 한 여자, 결혼한 한 여자를 위한 사랑/그 여자의 사랑으로 무장을 한 그는, 이 낯선 결합(외국인과의 결혼, hymen étranger) 때문에[역주: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인 아드라스토스의 딸 아이게이아와 결혼한다.] 그의 누이가 산 채로 매장되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적어도 피에 대한 자신의 정념 때문에 자기 형제―에테오클레스―의 통치의 권리를 소멸시키고, 자기 형제―이름상으로는 형인?―가 권력과 이성, 소유 및 부권의 계승과 맺고 있는 관계를 파괴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생명도 잃고 말았다.
그렇지만 통치의 실행양식이 변화되지는 않았다. 또다른 남자, 곧 크레온이 통치권을 이어가기 위해 등장했다. 그 역시―안티고네처럼―고립무원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는 법이라는 도구를 지니고 있다.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그는 모든 권력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한다.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음으로 이끌어갔지만 그는 사랑 없이 왕좌에 다시 등극하며, 이 왕좌의 왕권sceptre은 그의 수중에 들어온다. 죽음에 사로잡힌 그는, 하지만/그리고 통치권을 엄격하게(가혹하게, rigides) 집행한다. 전혀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서. 냉혹하게 이성적으로. 부수기 쉬운 만큼 부서지기도 쉬운 그 연약한 강함은 그로 하여금 쾌락에 지배당하는 것, 하나 또는 여러 여자들에 지배당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기 아들이 대표하는 젊음의 열정, 백성들의 연합, 노예들의 반란, 심지어 욕망에 굴복한 끝에 서로 갈라진 신들, 그리고 따라서 신성한 것들 및 “원로들”에 조심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말과 진리, 지성과 이성, 곧 소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들에 대한 유일한 보호자로서의 특권을 옹호한다. 하지만 그가, 예컨대, 여성 및 신성과의 관계에서 분별력을 잃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가문의 모든 사람의 죽음 속에서―이스메네는 황금 감옥, 주권의 변화로 인해 평범한 사적 주거지로 변모될 위험에 처한 황금 감옥에 격리되었다―, 이 전반적인 피의 분출 속에서 그는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다. 하지만 그는 불행을 자초하고 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그는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로서[역주: “과도한/여분의/쓸모없는 남자”는 “homme en trop”의 번역이다. 불어에서 “en trop”는 “과도한”이라는 의미와 “여분의”라는 의미, “쓸모 없는”이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신에 대해 무모하게 도전하는 남자”와 함께 “가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 또 “혹독한 불행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하고 쓸모없는 남자”라는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견딜 수 없는 운명에 무겁게 짓눌려 있으며, 이제 그에게 각각의 모든 사람은 똑같이 우연적인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과, 내용(혈통의 실체) 없는 대자적 존재의 엄격한 주권성, 자기 자신에게 낯선(이질적인, étrangère) 엄격한 주권성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으며, 독특한 개인들 사이의 (피의) 유대를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해소시킨 어떤 법을 집행함으로써만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곧이어, 유사한 외관semblant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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