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기술, 꿈인가 악몽인가?       
나노기술의 위해성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

김명진

나노기술의 어두운 측면

 몇년 전부터 『네이처』(Nature) 지는 매년 연말마다 그 해의 주요 과학계 소식을 선정해 이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작년 연말에 나온 합본호에도 '2003 in context'라는 제목으로 2003년을 뒤흔들었던 과학계 소식 열 개를 선정해 특집기사로 실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과학계에 미친 영향, 사스(SARS) 공포와 중국의 유인우주선 발사, 컬럼비아호의 공중폭발 사고, 기후변화 협약의 후퇴 등이 주요 소식으로 뽑혔는데, 나노기술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로왔던 점은, 이 기사가 나노기술의 새로운 발전과 그것이 내포한 '혁명적 잠재력'에 주목하는, 우리 눈에 제법 익숙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기사는 나노기술의 위해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중적 우려의 증가, 그리고 이에 대한 과학계의 대응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우리의 미래를 바꿔놓을 21세기 첨단기술 중 하나로 상찬되곤 하는 나노기술이 사회와 환경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무척 생소한 얘기일 것이다. 게다가 바로 그런 내용이 2003년의 10대 뉴스 중 하나였다니, 작년에 갑자기 무슨 큰일이라도 났던 것인가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노기술의 발전이 내포한 '어두운' 측면에 대한 우려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 기술이 주목을 끌기 시작한 1980년대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은 관련 NGO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나노입자의 위해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연구성과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러한 우려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해였다.

'회색 점액질'(grey goo) 시나리오

나노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처음 제기된 싯점은 나노기술에 대한 유토피아적-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뒤섞은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의 책 『창조의 엔진』(Engines of creation)이 출간된 198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오늘날 '나노기술의 전도사'로 통하는 드렉슬러는 이 책에서 '어쎔블러'(assembler)라고 불리는 초소형 나노머신이 원자나 분자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저렴하게 만들어내는 미래가 머지않아 도래할 거라는 장밋빛 예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나노기술이 빚어낼 수 있는 파국적 미래상도 아울러 제시했는데, 자기복제하는 '나노봇'(nanobot)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마치 꽃가루처럼 바람을 타고 이동하면서 주위 환경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지구 생태계를 불과 며칠만에 회색 먼지 내지 '회색 점액질'(grey goo)로 바꿔버릴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드렉슬러의 전망은 2000년 4월에 발표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빌 조이(Bill Joy)의 글 「미래에 왜 우리는 필요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에서 보다 강력한 형태로 반복되었다. 썬 마이크로씨스템즈(Sun Microsystems)의 공동 설립자이자 수석 과학자였던 조이는 일명 'GNR 기술'(유전공학ㆍ나노기술ㆍ로봇공학)의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적 결과에 대해 경고하면서 드렉슬러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나노기술이 군사적으로(혹은 테러 행위를 위해)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드렉슬러와 조이의 경고는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나노기술에 대한 대중적 상상력의 영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과학계 내에서는 SF의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별다른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저명한 화학자 리처드 스몰리(Richard Smalley)는 자기복제하는 나노머신 따위는 그 원리상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하면서 드렉슬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GNR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한 조이의 글은 기술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이자 미래에 대한 예단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드렉슬러와 스몰리는 최근까지도 논쟁을 이어가고 있고, 작년 말 썬 마이크로씨스템즈를 사임한 조이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독성학 분야의 연구들

 이러한 상황에서 작년에 나노기술에 관한 논란에 불을 지핀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첫번째는 주로 생명공학 분야에서 활동해 온 캐나다의 NGO인 'ETC Group'이 작년 1월 'The Big Down'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나노기술 분야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ETC Group은 드렉슬러의 '회색 점액질' 시나리오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나노기술과 유전공학이 결합한 나노바이오기술 (nanobiotechnology)이 전례가 없는 새로운 위험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새로운 생명체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일명 '녹색 점액질(green goo)' 문제를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역설했다. 또한 ETC Group은 나노기술의 군사적 이용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으며, 합성 나노입자가 인체에 유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ETC Group의 주장은 작년들어 화장품이나 전자공학 분야에서 쓰이고 있는 나노입자들이 피부 등을 통해 인체에 직접 침투해 위해성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독성학 분야의 연구성과들이 속속 보고되면서 구체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작년 3월 NASA의 연구팀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장치 등에 응용되고 있는 신소재인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를 용액 형태로 쥐의 허파에 주입했을 때 폐조직을 손상시키는 등의 독성을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프라이팬 표면 등에 사용되는 테플론(teflon) 입자를 나노미터(nm) 사이즈로 만들어 쥐에게 흡입하게 한 결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는 연구결과도 비슷한 시기에 보고되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마이크로미터(μm) 이상의 크기에서는 별다른 독성을 보이지 않던 물질이 나노미터 크기로 작아지면 독성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충격을 주었다. 또한 나노입자가 지렁이의 피부를 통과해 체내로 흡수될 수 있음을 보여준 미발표 연구도 있었고, 올해 초에는 코로 흡입된 탄소나노튜브가 뇌로 들어갈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러한 독성학 분야의 연구들은 SF의 영역이거나 적어도 먼 미래에나 나타날 사회적 문제로 간주되곤 했던 나노기술에 대한 문제제기를 당장의 현실적 규제 문제로 탈바꿈시켰다. ETC Group이나 그린피스(Greenpeace)와 같은 NGO들은 현재 모든 나노기술 연구에 대한 모라토리엄(일시중지)과 전지구적 나노안전성의정서의 채택을 요구하고 있다.

구미 과학계의 발빠른 대응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에 대한 구미 과학계의 발빠른 대응이다. 많은 수의 나노과학자들은 드렉슬러나 ETC Group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로 인한 대중적 이미지의 악화를 크게 경계하면서 자발적인 규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네이처』같은 학술지 역시 나노과학자들이 나노기술에 대한 과장된 선전을 자제하고 대중의 우려에 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으며, 영국의 왕립학회 같은 독립적 과학자단체와 각국의 규제기구에서는 나노기술이 미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에 이미 착수한 상태다.

이들이 이렇게 기민한 대응을 하게 된 배경에는 유럽에서 GM(유전자 변형)식품이 겪은 실패가 준 교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농업 생명공학 회사들과 과학자들이 GM식품에 대해 초기에 제기된 문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중의 우려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했다가 불신을 자초해 결국 시장에서 전면 거부되었던 전례를 나노기술이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이는 생명공학이나 나노기술과 같은 첨단기술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개발 일변도로 치달아 최근 과학기술과 환경 간 갈등이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창비 웹매거진/2004/6]

※ 창비 웹매거진 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주)창비 양측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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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가레의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를 같이 읽으려고 수업게시판에 올려 놓았더니, 발제를 맡은 학생들 중 한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곳들이 있다고 질문을 보내왔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해서 보내줬는데,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지 학생들만의 어려움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답변이지만, 얼마간 읽는 데 도움이 될 듯해서 그 학생이 보내온 질문 내용과 그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답변을 같이 올립니다.

각 질문에 묻고 있는 구절은 제가 따로 원문에 밑줄과 번호 표시를 해두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 질문들

1) 2p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休止)(또는 보편성과 휴지)이다(왜냐하면 이는 순수 진리를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여전히 너무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 무엇이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인지…주어를 잘 모르겠어요. =_=;; 주어를 '매장'이라고 본다면, '휴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걸리거든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이라는 보편성을 휴지(하던 것을 그치다, 라고 국어사전엔 나오던데)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매장은 보편성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환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했거든요. 즉 생물이라면 누구나 죽게 된다는 죽음의 보편성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간존재의 보편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매장을 통한 보편성의 고양이라고 (줄친 것 뒤 문장은) 읽었었는데 줄친 문장에서 말하는 보편성이 어떤 보편성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가서 문맥이 연결이 안돼요.=_=;; "보편성의 휴지"와 "보편성과 휴지"도 해석이 달라질 것 같은데 주어 문제랑 보편성 문제가 걸려서 말로 잘 설명을 못 드리겠네요.=_=;;

2) 2p  "이러한 지고한 의무가 신의 법, 또는 독특한 개인에 대한 실정적인positive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법은 독특한 개인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다. 사실 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성원은 독자적인 존립과 고유한 대자적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정신은 여기서 자신의 실재성 또는 자신의 현존재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신은 전체의 힘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정신은 이 부분들[각각의 성원]을 부정적인 일자(一者, un) 안으로 결집시킨다."
: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의무)가 "positive한 윤리적 행동을 구성한다"고 나온 것으로 보아 그것과 대조를 이루기 위해 negative를 썼다고는 생각이 되는데, (물론 선생님이 번역하신 것처럼 '실정적인'의 뜻으로 positive를 읽는다면 '부정적인'이 positive의 대구가 아닐 수도 있지만요=_=;;)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_=;; 생산적인 권력이 아니라 금지하는 권력으로 작용하는 일자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건가요? 그렇다면 '지고한 의무'가 positive로 평가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행위성의 다른 관점-하느냐/하지 못하느냐- 때문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_=;;;; 선생님 번역하신 대로 '실정적인'이라고 읽는다면 첫 문장은 이해가 가는데, '부정적인'의 의미를 잘 모르겠어요.

3)3p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이러한 대자적 존재 tre-pour-soi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체성들로 존재한다."
: 줄친 부분 이해가 안 가요.=_=;; '이러한'이 나오면 뭔가 앞에 설명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인데 설명될만한 문장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ㅠ.ㅠ 이 글에서 '대자적 존재'가 많이 나오는데 그 뜻을 명확히 파악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대자적 존재'(간단히 말해서 의식화된 존재, 라고 이해했는데)는 아닌 것 같고, 어머니와 자식 간의 이자적 존재가 아닌, 이미 상징계로 진입해서 소외된 상태인 존재들 간의 관계(원초적인 연결고리가 없는)라고 이해해도 되는 건가요? =_=? 하지만 이 정도 이해만으로는 오누이 사이에 대자적 존재를 주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ㅠ.ㅠ

4) 3p "또는 오히려 이는 오빠와 누이가 동일한 정자를 공유하고, 이에 따라 혈족관계[근친교배]에 (또다른)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정념(수난, passion)을 통해 마법적인 정념[수난]과 균형을 맞춤으로써 결국 혈족관계가 마법적인 정념[수난]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드는 것인가?
: '마법적인 passion'이 무슨 의미인지…ㅠ.ㅠ 다른 정념은 또 뭔지…ㅠ.ㅠ "동일한 정자를 공유"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선 생명을 만드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 같고, (나아가 부권적인 혈통을 강조하는 것 같고) 이렇게 해석한다면 '마법적인 정념'이란 생명을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관점, 혹은 모계혈통(이나 모권제혈통)을 의미하고 혈족 관계가 결국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온다는 얘기는 모계혈통에서 부계혈통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제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어요.=_=;;

5) 5p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 repr sentations)만 지니고 있어서 그녀의 욕망은 이러한 징벌을 견뎌낼(지양할, rel ve) 수 없다."
: 어째서 그녀에게 사랑이 연약한 표상들만 지니고 있는지, 연약한 표상들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요.=_=;;

6) 5p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se donnant elle-m me la mort) 자신의 향락의 애도(또는 이 애도는 바로 그녀의 향락이 아닐까?)를 받아들인다."
: 제가 아직, 안티고네가 주이상스를 중심으로 읽는 논의들이 잘 납득이 안 가서(중간대체 레포트에도 그 혼란이 고스란히 있지만) 이해를 잘 못 하는 걸 수도 있는데요,
① 그녀의 죽음이 주이상스를 애도하는 것, 이라 읽는다면 결국 그녀는 주이상스에 다다르지 못했고 주이상스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써 죽음을 선택했다는 얘기인가요? '애도'라는 개념이 끼어든다면 죽음으로써 그녀가 주이상스와 만나는 낭만적인(?) 결과 따윈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② 애도가 곧 그녀의 주이상스라면,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죽음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한 이유를 주이상스를 통해서 읽을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래도 혼란스러워요. 제가 그동안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주이상스 개념이 다 엉터리였던 것 같기도 하고…-_-;; 안티고네를 어떻게 주이상스와 죽음충동으로 읽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세요.

7) 6p "더 성마르고 더 충동적이며, 노여움에 못 이겨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rouvrir les veines de son sang 인물이다."
: 핏줄들을 열어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질문이 너무 간단한가=_=;; 이 문장 자체를 이해 못했어요.=_=;;)

8) 7p "곧이어,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자아Moi)의 지위stase 안에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 이외에 다른 욕망을 지니지 않은 신이 도래할 것이다."
: "응고된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어요. 안티고네가 옹호한 신의 법, 혈족을 위하는 욕망을 뜻한다고 읽는다면, 국법보다 가족법을 우위에 둔 신이 도래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뭔가 역사가 흘러온 과정상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 이리가라이가 이런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하기가 애매하고=_=;;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바로 앞 문장들은 크레온이 상징하는 공적 권력이란 것이 어떤 것들을 희생시키고 어떻게 은폐해서 이루어진, 사실은 개인적인 권력임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곧이어"라는 접속사로 따라 나올 문장들은 그러한 공적인 권력의 도래를 의미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저 위문장을 해석해야할지 혼란스러웠거든요.

9) 8p "환원 불가능한 변증법의 히포콘드리아, 멜랑콜리아. 이는 피흘리는 십자가를 상기시키는 응혈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변증법의 보좌를 보장해주지만, 동시에 절대 정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무(한)정한 어떤 액체의 거품이 고난의 술잔에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혈전(들), 림프(들)은, 만약 이것들이 아무런 분비물 없이도 치유될 수 있었다면, 정신을 (단지) 바위와 같은 고독과 결백함으로 남겨 놓았을 (뿐일) 것이다. 바위가 자신의 둘레 안에 여성성의 죽음을 감싸안고 입회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 여기서 얘기하는 히포콘드리아나 멜랑콜리아는 억압되어 응고된 피, 혹은 여성성(이리가라이는 피와 여성성을 자꾸 같은 것으로 놓고 읽히게 만든다고 생각되는데) 으로서 이전 단락에서 남성성이 자신을 "살아있는 자율적 주체성"으로 구성하는 변증법적 작용을 일으킬 동안 그 변증법을 지탱해주는 동시에 그것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 줄친 문장은 이해가 안 가요.=_=;;

10) 9p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말하자면 필연적으로 여성성이 저지른)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현실성과 순수한 파토스로의 타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 왜 여기서 '죄'라는 표현을 쓰는지, 왜 여성성이 저지른 죄가 가장 순수한 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기서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쓴 건 선생님이 설명하신 것에 덧붙여서, 남성성/여성성의 관계가 의식/무의식의 관계와 유사점을 가진다는 이유도 있었을 거라고 이해했거든요. 이 앞 단락에 나오는 남성의 죄-유죄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상징계 내의 주체가 가지는 비극성("하지만 곧바로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독특한 [남성] 존재가 유죄라거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보편적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자신 안에서 단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범행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으로 이해를 했는데, 여성성과 윤리적 의식의 연결 관계, 그 죄에 대해서는 감이 안 잡혀요.=_=;;

11) 12~13p "그리고 만약 이 점들 안에서, 곧 정액, 이름, 온전한 개체 안에서 이것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이것들이 자신을 지양할 수 있는 대표적인repr sentatif 지주를 발견하는 게 가능하다면, 자율적으로 유동하는 피는 재통합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눈은 보기 위해서 (적어도 절대적으로는)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정신 역시 (자신을) 사유하기 위해 피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 눈과 정신이 여기에 나온 이유(시각중심주의나 로고스 중심주의와의 연결?), 피를 요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왜 눈과 정신이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문맥을 이해 못하겠어요. 아울러 피를 여성과 연결시켜 읽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그건 또 나름대로 여성들에게 가부장제가 할당해온 자리는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고요.

II. 답변들

질문이, 정말, 많네 ... ^^ 그렇지만, 이게 *** 씨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번역이 불명확한 곳도 있고, 텍스트가 워낙 난해한 데다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도(또 보부아르의 헤겔 해석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면서도) 텍스트 안에서 이를 명료하게 밝히지 않고 논의를 전개하는 이리가레의 죄(^^)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고.
  책을 같이 보면서 답변을 해야 좀더 친절한 답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책을 학교에 두고 와서 일단 번역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답변을 해보도록 합시다.
   
  1) 이 문장에서 주어는 "문제는 자기의 의식적 본질의 보편성의 휴지 ... 라고 주장함으로써"이고 술어는 "이러한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라고 봐야지요. *** 씨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주어'는 여성 또는 안티고네라고 봐야죠. 그리고 "휴지"는, 지금 책이 없어서 원어가 뭔지 확실치 않긴 하지만, 아마도 "repos"인 것 같아요. 이 단어는 영어로 하면 "rest"에 해당하는데, "정지", "중단" 같은 뜻이죠. 여기서 정지되고 중단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의식이 자기 의식으로 전환되는 보편성의 운동이고, 여성은 자연적 죽음 때문에 이러한 운동을 완성하지 못한 죽은 남자가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헤겔에 따르면 매장은 자연적 죽음을 맞은 남자(폴뤼네이케스)가 우연적인 자연적 죽음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개체성을 얻게 되는 계기이죠. 여자(안티고네)는 죽음을 무릅쓰고서 이러한 매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인륜성의 필수적인 계기가 되는 거고요.  
  
  2) "실정적인"이라는 말은 "실정법"에서 쓰이는 것처럼 "한번 확립되어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도 있고, "긍정적인"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실정적인 윤리적 행동"이라는 말은 이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군요. 반대로 다음 문장의 "부정적인"이라는 말은 국가의 법, 곧 크레온의 법이 이처럼 독특한 개인에 대한 매장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뜻이죠. 말 그대로 매장이 필수적인/긍정적인 윤리적 의무다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부정적인 일자"라는 말은, 전체의 힘으로서의 정신은 각각의 독특한 개인의 권리를 뒷받침하는 이러한 실정적인 윤리적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전체의 고유한 권리, 전체의 통일성("일자")을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일자"는 정치적 공동체로서 도시국가를 가리키는데, "부정적인"이라는 말은 공동체의 법(공동체의 반역자인 폴뤼네이케스는 매장될 수 없다)에 따라 개인/가족의 의무(적이든 우리편이든 모두 같은 가족의 성원이므로 매장해줘야 한다)를 거부하고 억압한다는 뜻이고, "일자"라는 말은 공동체가 이처럼 개인의 다양한 요구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죠.  

  3) "대자적 존재"는 헤겔철학의 전문 용어이고, 현재의 맥락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헤겔에게 "즉자적 존재"란,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직 독립적인 자기로 확립되지 못한 즉물적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를 가리키죠. 따라서 어떤 존재가 즉자적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아직 독자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반면 "대자적 존재"는 독립성을 획득한 존재, 그런 상태를 가리키죠.
  그런데 이렇게 존재가 대자적 상태에 도달하면, 바로 타자의 문제가 제기되겠죠. 독립성을 획득한다는 말은, 자기 아닌 다른 것과 자기를 구분한다는 뜻이니까, 어떤 존재가 독립성을 획득하고 대자적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자신과 다른 타자들과 직면하게 되지요. 그래서 대자적 존재는 항상 이미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되고, 이 타자와의 관계를 해결해야 합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바로 두 개의 대자적 존재가 벌이는, 생사를 건 투쟁이지요.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일차적으로 승리한 주인은 노동에서 벗어남으로써 보편적인 즉자-대자적 존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을 통해 부정의 힘을 획득한 노예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존재로 지양됩니다.
  그런데 헤겔은 오빠와 누이동생의 관계는 이런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거지요. 대자적 존재를 주거나 받아들인다는 말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처럼) 서로가 대자적 존재로서 모종의 갈등 관계에 들어서고 투쟁을 통해 이러한 갈등 관계를 해결한다는 말인데, 오빠와 누이동생의 관계는 이런 관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4) "passion"이라는 말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철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정념"이라는 뜻이예요. 특히 17세기 철학에서 "관념"(idea)과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로 부각되고 많이 연구되는데,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미움", "희망", "공포", "열정", "회한" 등과 같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을 통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로는 "감정"이라고 이해해도 상관은 없어요.
  이 경우에는 "수난"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합니다. "passion"은, 알다시피, "수동성"을 가리키고, 수난이라는 것은 따라서 타자로부터 겪는 고통을 가리키죠. 이 경우 "마법적인 수난"은 오이디푸스가 신들로부터, 또는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으로부터 겪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다른 수난"이란 오빠와 누이 동생, 특히 안티고네가 또한 겪게 되는 고통, 크레온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5) 이건 번역이 잘못 되었네. "매우 연약한 표상들(대표들)"이 아니라, "너무나 숙명적인fatale 표상들(대표들)"이라고 해야겠네.

  6) 이건 이 맥락에서는 너무 어렵게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향락의 애도"라는 것은 좀더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태(곧 죽음의 다른 표현)를 가리키고, 반대로 이러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따라, 또는 "어머니의 아들을 구하려는" 어머니의 욕망과의 동일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니까, 결국 어머니의 욕망을 실현하는 향락으로 읽을 수 있다는 뜻으로 보면 되겠지요.
  이러한 향락이 상징계, 상징적 질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이 문장 자체만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데다가, 부권적 혈통과 구분되는 여성의 계보의 (상징적) 가능성이라는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야 하니까, 한 문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7) "자신의 핏줄들을 다시 열어놓으려고 할"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좀 모호한 표현이죠. 불어에서 "s'ouvrir les veines"는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정맥을 끊다"는 숙어인데, 이 문장에서는 "s'ouvrir", 다시 말해 "열다ouvrir"는 동사의 재귀형("스스로 열다/끊다")을 쓰는 대신, "rouvrir", 곧 "다시 열다"는 표현을 쓴다는 점이 다르죠.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이런 경우에는 "다시 열다"는 단어 대신 "다시 끊다"라고 번역하면 좀더 의미가 분명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 이런 경우는 폴뤼네이케스의 격정적인 행동이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가문의 파멸을 이끌게 되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겠죠.

  8) 이 문장은 번역이 의미를 충분히 못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좀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곧이어 신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신은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 자아 의 지위 안에 응고되어버린 피의 법에 각각의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욕망말고는 아무런 욕망도 지니지 않은 어떤 [남성적] 신un dieu이다." 이렇게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좀더 분명해질 것 같군요. (1) "유사한 외관을 지닌 것 자아 "은 상징적 질서, 곧 국법에 따라 포섭된 (상상적) 개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개인들은 국법에 의해 자신들의 원초적인 자연적 독특성(혈연관계, 피의 유대에서 성립하는)에서 분리되고 해체된 개인들이지요. (2) 이런 사태를 이리가레는 "지위 안에 응고되어 있는 피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곧 국가의 법, 부권적인 상징적 질서는 혈연관계를 국법/상징적 질서에 포섭하고, 이렇게 포섭된 혈연관계 속에 각각의 개인을 종속시킨다는 뜻이지요.

  9) 이 문장은 정말 상당히 모호한 문장이네 ... 문법적으로도 시제상으로도. 이 문장은 좀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10) 여기도 번역이 약간 잘못되어 있는데, 새로 고쳐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가장 순수한 죄는 윤리적 의식[양심]이 저지른 말하자면 불가피하게 여성성이 저지른 죄인데, 이 의식[양심]은 자신이 불복종하는 법과 힘을 사전에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윤리적 본질이 자신의 신적, 무의식적, 여성적인 측면에서는 모호하게 남아 있다면, 인간적, 남성적, 공동체적 측면에 존재하는 윤리적 명령들은 충만한 빛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범행을 용서해줄 수 없고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감금 자체에서, 비행위성과 순수한 파토스[수동성]로의 전락 자체에서 여성은 자신의 유죄의 정도를 온전히 인지해야/인정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가장 순수한 죄"라는 표현은 법과 힘을 사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저지른 죄라는 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점에서 바로 윗구절에 나오는 남성의 경우와 잘 대비가 되죠. 그리고 "윤리적 의식"은 안티고네가 국법에 맞서 가족의 성원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뜻하겠지요. 헤겔 입장에서 보면 이 윤리적 의식, 이 의식에 따른 행위는 국법에 맞선다는 점에서 허용 불가능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죽은 남자인 폴뤼네이케스를 자연적인 무매개적 보편성으로부터 지양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계기이고, 안티고네가 바로 이를 수행한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뒤에 나오는 문단은 이를 부연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고.

  11) 눈과 피를 연결하는 것은 이 글 맨 앞에 나온 헤겔의 인용문을 가리키는 거죠. 그리고 피를 여성과 연결시키는 것 역시 헤겔의 논의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이걸 이리가레 자신의 견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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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부분을 약간 더 보충했습니다. (1)과 (2)에서 고딕체로 밑줄친 부분이 추가된 부분입니다. 추가한다고 좀더 나아질지는 모르겠지만 ... ^^
 

 

한국 교회의 가혹함을 회개합니다

교회개혁운동가가 본 여호와의 증인과 병역거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권리를 존중한다


△ 지강유철/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사진/ 이용호 기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이자 여호와의 증인인 김연경님!

법률가들의 양심에 경종을 울리고, 대법원의 판결을 맹종하던 법원으로 하여금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적인 심판’의 첫발을 내딛게 한 역사적인 판결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이정렬 판사의 이번 판결로 우리 사회는 양심의 자유와 국가의 의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시작했고, 2001년 보수적인 기독교의 반대로 좌절됐던 대체복무제 입법 운동도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말없이 견뎌낸 연경님과 같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기쁨엔 동참하기가 어렵군요. 그러기엔 저와 제가 몸담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너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헌정 사상 초유의 일로 받아들여진 5월21일 판결의 기사와 칼럼 등을 읽으면서 저는, “과거에 대한 기억처럼 양심을 광범위하게 찌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존 스토트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5월21일의 판결 소식으로 인해 잠시 환해졌던 얼굴은, 연경님과 같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지난 수십년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가운데 당한 차별과 고통을 상상하면서 일그러졌습니다. “2002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 다음에야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인권 현안으로 등장한 것”을 들어 지난 몇십년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은 ‘빨갱이’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었다”는 한홍구 교수의 지적 앞에서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2001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실태가 <한겨레21>에 의해 공식 제기될 때까지, 감옥에 갇힌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자 수를 국방부가 실제 투옥돼 있는 1600여명과는 비교도 안 될 10여명으로 파악할 정도였다는 점은,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종교와 지식인의 무관심이 얼마나 뻔뻔한 수준이었는지를 방증하는 것 같아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이자 여호와의 증인인 김연경씨. 최근 수형생활을 마쳤다.

김연경님께서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옆에서 거지 나사로가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갔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서는 부자가 거지를 강탈하거나 착취했다는 그 어떤 암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부자가 이야기 속에서 매우 사악하게 언급되는 것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그 이유를 부자가 거지의 궁핍함을 경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 다시 말해 경제적인 엄청난 불평등의 상황을 묵인했다는 점, 그러므로 그 거지는 불평등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채 죽어갔다는 점을 꼽더군요.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부자가 적극적으로 약자를 착취하거나 강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한 살인적인 무관심 때문에 지옥에 갔음을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지난 60년간 양심적 병역거부나 집총 거부로 인해 온갖 수난을 겪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우리 시대의 거지 나사로였다고 말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아와 가난한 자, 억눌린 자와 외국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누가복음의 부자처럼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했고, 그러면서도 이단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여호와의 증인들을 경멸적으로 바라본 한국 기독교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악덕한 부자와 어떻게 다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정통 기독교를 주장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심이 너무 완고해서 1976년 3월과 같은 해 12월에 양심적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헌병대 입창과 논산훈련소장에서 김종식씨와 이춘길씨가 맞아죽었음에도 저들과 슬픔을 나누기는커녕 그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위해 기꺼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를 조화시키는 일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열정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신의 음성을 들은 게 아니라 유행과 첨단을 걷는 모든 문화에 편승하면서 세속적인 성공과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바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노자 교수의 말처럼 남북한 정권이 일제식의 “군국주의적·국수주의적 세뇌장치들”을 이어받아 “국가를 위한 살생도 종교적·도덕적 죄”라는 세뇌장치를 무분별하게 이용할 때, 교회가 어떻게 국가권력과 똑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정통과 이단에 관해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는 지난 5월15일에 있었던 초등학교 교사 최진씨의, “저의 병역거부는 군대만을, 전쟁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폭력과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라는 발언과 지난날 한국 교회가 여호와의 증인들 앞에서 보여준 가혹함을 비교하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정말 어쩌다 한국 교회의 가슴은 젊은 초등학교 선생님의 가슴보다 작아졌을까요? 작아진 것이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연민만이라면 이처럼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한국교회는 그들을 경멸만 할 것인가.(사진/ 박승화 기자)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 의하면 1969년 1만명이던 ‘증인’(단순 집회 참석자가 아닌)의 수는 2004년 현재 9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중에서 지난 4년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젊은이들이 매년 500~800명 이상임이 확인됐습니다. 특기할 만한 상황은 1993년까지 양심적 병역거부가 2년형을 선고받다가 1994년부터 3년형으로 늘었지만 거부자 수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2002년 서울지법 남부지원 박시환 판사에 의해 병역거부자 이경수씨가 신청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이후, 법정 최소 형량인 1년6개월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자 수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감옥행은 물론이고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직업 선택에서 엄청난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하다면 이런 억압과 차별이 3대에 걸쳐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 수도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 앞에서 저는 깊은 충격을 느낍니다. 정통과 이단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몇십년 동안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감옥에 가고, 직업 선택에 엄청난 차별을 당하고, 평생을 전과자로 낙인 찍혀 산다고 할 때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과연 여호와의 증인처럼 한국 기독교도 한해 1%에 해당하는 10만의 젊은이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을까? 만약 정통임을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기독교의 더 많은 청년들이 감옥행을 택하지 못하거나 그 비슷한 수준에 머무른다면, 과연 정통과 이단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당신들의 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러나 저는 서둘러 제가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바의 진리와 구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이렇게 눈에 드러나는 통계에 의해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없다는 점도 서둘러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볼테르의 저 유명한,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란 말로 저의 확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감옥행을 선택하고 평생 전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로 현재의 여호와의 증인 또는 한국 기독교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현실 탓에 부모의 눈에서 피눈물나는 것은 물론 91살의 할머니를 매월 감옥으로 면회를 오게 할 수밖에 없던 김연경님. 힘든 영창 생활이지만 근무 수칙을 준수하는 가운데 수감자인 우리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고자 했던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이 지면을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셨던 김연경님. 님께서 고난의 현장에서 말한 “예수가 자기를 미워하고 증오한 사람에게도 보여준 사랑이 나를 감동시켰다”는 한마디가 솔제니친의 표현을 빌리자면 천하보다 무겁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조국이 이 사랑으로 새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계시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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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최근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좋은 번역이야말로 철학/이론적 논의에 맥락을 부여할 수 있는 기초작업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좋은 번역>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론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편의상 <번역본만으로도 철학적/이론적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는 번역> 정도로 규정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정도의 규정을 기준으로 평가해본다면, 국내에 번역된 책들 중 상당수는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주기 어렵다는 것이, 또 아쉬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동안 상당히 많은 좋은 책들이 좋은 번역(적어도 위의 기준을 충족시켜 주는)으로 소개되었고, 이 번역본들은 상당수의 고급 인문사회과학 독자들을 형성해왔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물론 경험적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얼마간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를 지탱하는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이 번역본들 덕분에 생겨난 독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두어달 전에 프랑스에서 철학으로 학위를 하고 돌아온 젊은 연구자 한 분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제가 그 분에게 전공한 철학자의 책을 번역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 철학자(이 철학자가 누구인지 밝히면 그 분의 신원이 곧 드러나지 않을까 염려가 되서, 그냥 그 철학자라고 하겠습니다. 그 철학자가 과연 누구인지는 독자분들의 상상력에 맡기겠습니다. 죄송^^)는 20세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이고 최근 외국에서는 그에 관한 국제적인 전문 학술지가 만들어져 매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철학자입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 철학자에 관한 책들이 거의 번역되지 못해, 그저 무성한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 이 사람의 주저가 번역되긴 했지만 번역에 문제가 많아서 제대로 논의를 따라가기 어려워,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공자는 번역에 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군요. 그 철학자의 스타일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을 들여야하는 데 비해 제대로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책을 번역할 바에야 그 시간에 여러 편의 논문을 써서 업적을 남기면, 그만큼 학계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취직에도 더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실 번역본 한 권은 논문 두 편의 가치로 평가받는데(이것도 뜻있는 분들이 우리나라 학술분야의 정책을 총괄, 집행하는 학술진흥재단에 여러 차례 건의하고 방안을 제시한 끝에 최근에 이루어진 개선의 덕택입니다), 중요한 철학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는 적어도 1년 이상, 또는 대개는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전공자의 생각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잘 번역된 한 권의 좋은 철학책은 두 편의 논문, 또는 심지어 몇십편의 논문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국내의 철학 논문은 공개적으로 출판되기보다는 대개 비매용 학회지에 수록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반 독자들이 제대로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한 편의 논문의 독자는 많아야 수십명을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반면 좋은 철학책의 경우는 적어도 수백명, 많은 경우는 수천명의 독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독자들 중에는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전문가들도 있겠지만, 관심은 있는데 원서로 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그 동안 이 책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전공하지만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 하지만 역시 원서로는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또 직업적인 학자는 아니지만 철학이나 이론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쌓고 계속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독자분이 바로 그런 분이죠),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와서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 책 저 책을 탐독하는 장래의 학자들도 있을 테고, 또는 얼마간 막연하게 교양을 쌓으려는 목적으로(또는 남들이 입만 열면 푸코, 들뢰즈, 데리다, 지젝 운운하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수 없어서, 이 놈들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길래^^ 그렇게 떠드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등등) 책을 사는 독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좋은 책을 한 권 잘 번역하면 논문 몇 편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학자이지만 그동안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했던 사람의 경우, 또 그 사람의 철학이나 이론을 전공한 전문가의 경우, 좋은 책을 한 권 번역하는 것은 그만큼 쉽고 빠르게 이 철학, 이 이론을 소개하고 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죠. 어느 학회에 가서 지금까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못한 학자에 관해 연구논문을 발표하면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소수의 학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또 소통이 가능하겠지만, 위에서 말한, 수천명의 독자들에게 이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의미가 없게 됩니다. 예컨대 저는 국내에 라캉에 관한 관심이 많지만, 이러한 관심이 내실 있는 연구나 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라캉의 저작들이 번역되지 않은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깡의 재탄생]이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은 독자분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라캉에 관한 논의라면 당연히 먼저 라캉의 저작들이 존재하고 독자들이 이를 읽을 수 있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텐데, 라캉은 부재한 가운데(그야말로 유령, 허깨비죠) 많은 사람들은 영역본으로, 어떤 사람들은 독역본으로, 매우 소수의 사람들은 불어본으로 라캉을 읽고서 이야기를 하니, 불어본이나 영역본, 독역본으로 라캉을 읽을 수 없는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라캉의 저작(들)이 잘 번역되어 나온다면(그렇게만 된다면, 역자(들)에게는 정말 감사해야 마땅한 일일 텐데), 라캉에 관한 논의들로는 얻을 수 없었던 독자들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수의 전문가들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라캉의 이론, 라캉의 철학이 훨씬 넓은 지식과 공론의 광장으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는 오히려 라캉의 이론이 이러한 광장을 단단히 다지고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광장에서는 (때로는 매우 의심스러운) 어학 능력의 소유 여부에 따라 한 철학자, 한 사상가, 한 이론가가 독점되거나 평가되는 게 아니라, 그의 철학, 사상, 이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을지, 우리를 어떻게 변모시켜 줄지에 따라 평가받고 전유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라캉은 더 이상 프랑스의 이론가, 철학자가 아니라, 또는 적어도 프랑스의 이론가, 철학자로만 남지 않고, 한국의 이론가, 철학자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의 노력이 라캉과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최선의 소통 방식, 교통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말하는 맥락이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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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6-03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잘 번역된 한 권의 좋은 철학책은 두 편의 논문, 또는 심지어 몇십편의 논문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You are right. That's it!..

balmas 2004-06-0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든든한 원군이 나타났군요.^^
그런데, 노파심이긴 하지만, 절대로 제가 논문을 쓰지 말자, 논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좋은 논문을 쓰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죠.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논문쓰는 일이 이론, 철학을 우리의 맥락 속에 들여넣는 일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맥락, 우리의 지적 광장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좋은 철학책, 이론책을 번역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MANN 2004-06-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번에 발표 준비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던 게 한국어로 된 참고할만한 책이 정말 없구나, 하는 거였어요. 하긴 이번에만 느꼈던 것도 아니고... 몇 년 전에(수능 끝나고;;) 철학책을 좀 읽어보겠다고 이것저것 찾아봤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 칸트, 후설 등 꽤나 유명한 철학자들의 책, 또 그에 관련된 유명한 2차문헌이 번역된 게 거의 없다는 것에 놀랐던 것이 기억나네요. 철학자들의 주요 저작들은 번역되지 않고 그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담론들만 있는 것은 정말 해괴한(!) 상황인 것 같아요.

balmas 2004-06-05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중요한 걸 하나 깨우쳤군.^^
좋은 책들 열심히 읽고, 나중에는 MANN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책들을 소개해줘야지.
 

대화의 또다른 중심 주제는 “철학의 맥락”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철학회에 나가보면 재미도 없고 실망만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헤겔 철학이든 스피노자 철학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철학이든 간에 철학은 항상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고, 철학은 자신의 환경, 자신의 맥락에 대한 긴장과 갈등, 성찰로부터 형성되고 발전되기 마련인데, 국내의 철학회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을 보면, 철학이 현실 맥락과 맺고 있는 긴장 관계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나쁜 의미에서 추상적이고 몽롱한 논의들로 가득차 있다는 거지요.

  더 나아가 외국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온 몇몇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면 결국 그 나라 철학계의 하청작업만 해주고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되어 씁쓸하기 짝이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예컨대)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얼마간 필요한 문헌학 작업이지만 정작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어서 그 나라에서도 그 일을 수행할 만한 연구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 나라 사람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그 일을 대신 해주고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그 나라는 구하기 힘든 고급 노동력 하나를 잘 구해서 아쉬운 부분을 메울 수 있지만, 그 연구자가 몇 년 걸려 해낸 그 작업이 우리나라 철학계에, 우리나라 지식계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더 나쁜 것, 더 심각한 것은 본인들은 정작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학문 선진국에서 (얼마간) 인정받은 논문이니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것 아니냐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학문적 사대주의”로 비판받을 만한 이런 태도는 사실은 국내의 철학계(꼭 철학계에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겠지만)에 상당히 팽배해 있는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난 것은 국내의 학자들은 국내에서, 자신이 유학한 나라의 철학적(또는 학문적) 경향을 그대로 대변하는 투사 노릇을 한다는 점입니다. 독일 철학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영미 철학을 무시하고 프랑스 철학은 아예 철학 취급도 하지 않거니와, 영미 철학자들 중 상당수는 독일 철학을 공허한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프랑스 철학은 여자들에게나 적합한 철학”(원문 그대로! 무슨 뜻인지는 발언자에게 물어보셔야 할 듯)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 철학이 덜한 건 아닙니다. 아직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고 “통일된 대오”(?)를 갖추지 못해서 그렇지, 프랑스 철학자들도 독일 철학이나 영미 철학 못지 않은 “애국심”을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프랑스 유학자들의 경우 주로 공격 대상이 프랑스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이제는 국내에도 얼마간 알려진 사실이지만, 프랑스의 제도권 철학계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보통 사람들이 프랑스 철학의 대표자들이라고 알고 있는 인물들, 곧 알튀세르,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 등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거의 연구되지 않고 있고,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학위 논문 주제로 삼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프랑스 유학자들이 학위 논문 주제로 가장 많이 택하는 철학자는 베르그송이고, 그외 메를로-퐁티나 사르트르, 레비나스 같은 현상학 계열의 철학자들, 아니면 멘 드 비랑을 비롯한 군소 유심론 철학자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국내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립니다(물론 이 경우도 일부가 문제입니다). 그들을 가르친 프랑스 강단 학계의 선생들이 이 사람들을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철학적인 논거를 들어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드는 논거들은 그건 철학이 아니라느니, 너무 많이 쓴다드니, 저자 사인회를 하면서 책을 팔더라느니 등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일제 합병 이후 우리나라의 학문의 맥이 끊어졌고, 여기에서 비롯한 빈 공백이 아직도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를 잘 표현해주는 용어가 바로 국학이라는 단어일 겁니다)에서 유래하겠지만, 공시적으로 본다면 학문, 또는 철학을 맥락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들이 아닐까 합니다. 철학을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철학을 사회경제적 조건의 결과로 봐야한다는 것도, (불변적인) 민족성의 정수이자 한 결과로 봐야한다는 것도, 철학사의 흐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에 따라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철학자의 삶의 조건과 관련시켜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겠지요(그런데 “맥락”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context? circumstances? surroundings? environment? conjuncture? exteriority? ...).
이 문제는 좀더 다듬어진 생각으로, 좀더 개념적인 논의에 따라 고찰해봐야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철학 또는 이론적 논의에 맥락이 부재한다는 점 또는 적어도 상당히 부족하다는 점은 경험적 차원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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