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의 힘]이 왜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는지 의아해하실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에서, 역주에 집어넣은 내용들 중 상당수를 <용어 해설>로 따로 묶자는 제안을 했고, 저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역주들 중 용어와 관련된 내용들을 <용어 해설>로 묶고, 또 몇 가지 용어들을 새로 추가하고 하느라고,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까지는 원고를 넘길 생각인데, 그 전에(또는 그 이후라도 관계 없습니다. 이 원고를 넘겨도 아직 최종 교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수정할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논평을 받고 싶어서 <용어 해설>에 들어갈 항목 중 하나를 올립니다.  좋은 제안이 있다면 최대한 내용에 반영할 생각이니,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공짜로?^^).

 

대체 보충supplément

우리가 ‘대체 보충’이라고 번역한 supplément은 데리다의 초기 작업, 특히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에서 문자 기록écriture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언어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기 위해 비로소 목소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루소는 이 최초의 언어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조음적articulé이라기보다는 음량과 강세, 억양이 중시되는 소리였을 것이고, 자음보다는 모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단조로워지면서 자음이 증가하고, 강세와 음량이 줄어들면서 조음이 증가하게 되고, 감정표현보다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언어가 바뀌어가게 된다. 조음적인 언어가 등장하고 의사 소통이 언어의 주요한 기능이 되면서 사용된 것이 바로 문자 기록인데, 루소는 이 문자 기록을 ‘위험한 대체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원래 문자 기록은 목소리에 기초한 고유한 의미의 언어를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이 문자 기록은 점차 고유한 언어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루소의 이 개념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드러나는 루소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뿐 아니라, 플라톤에서 루소, 후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전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 중심주의의 맹점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개념이다. 곧 데리다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idros』나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및 『구조 인류학』에 대한 분석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서양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목소리나 말 또는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주고받는 대화를 진정한 언어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처럼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문자 기록의 존재를 완전히 말소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며, 이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이러한 양면적 태도는 사실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내재하는 아포리아의 징표라고 말한다. 곧 순수하고 충만한 현전이나 기원(목소리, 말, 대화, 로고스 등)을 인정할 경우 이를 보충해야 할 도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으며(왜냐하면 보충은 결함을 지닌 것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보충의 필요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결국 현전과 기원의 불완전성, 결핍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문자 기록의 위험성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supplément이라는 단어는 데리다에게는 존재나 구조, 또는 언어나 기타 다른 모든 체계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보여주는 개념이 된다. 요컨대 우리가 현전, 기원, 중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이(差移)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supplément 개념은 기원의 결핍과 (문자) 기록의 근원성을 보여주는 핵심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supplément은 국내에서는 ‘대리적 보충’이나 ‘보환’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이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해서 ‘대체 보충’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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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가 마슈레의 [넓은 의미의 철학] 세미나에 초대되어 했던 강연의 번역본입니다. 발리바르가 최근 여기저기서 언급했던 "정치의 비극적 차원"에 관해 궁금해한 분들이 많았을 텐데, 이 글을 읽어보면 궁금증이 많이 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매우 개략적이고 함축적인 데다가 마키아벨리 [군주론]으로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만(따라서 다른 식의 작업들이 기대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글인 듯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발리바르의 글을 읽고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사실 80년대까지 쓰여진 발리바르의 많은 글들은 극히 복잡한 문장들 때문에 읽기가 곤혹스러울 뿐더러 번역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는데(더욱이 직역 또는 오히려 <직문>(?)^^ 위주의 번역 때문에, 저처럼 문체가 망가져 오랫 동안 고생한 사람들도 꽤 많을 듯합니다(형편없는 문체에 대한 웬 낮뜨거운 변명?-_-;;)), 최근에 발표하는 글들이나 책들은 문장이 상당히 간결하고 명쾌해서, 읽거나 번역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은 내용만이 아니라 문체상으로도 탁월한 성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서툴고 서두른 번역으로 그 탁월함이 많이 훼손되었겠지만. 꼼꼼히 검토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고, 이 글을 읽어보기를 원할 분들이 여럿 있을 것 같아 먼저 올렸습니다. 좀더 읽어본 뒤에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고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공적 매체에서의 인용은 불허합니다.

 

 

Etienne Balibar, “Machiavel tragique”, in La Philosophie au sens large, Séminaires de Pierre Macherey, 2001. 4. 4. http://www.univ-lille3.fr/set/sem/BalibarMachiavel.html


비극적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바탕으로 자클린 리세Jacqueline Risset와 안 토레스Anne Torrès 및 그들의 동료들이 해낸 훌륭한 작업[이는 자클린 리세와 안 토레스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연극화한 것을 가리킨다―역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목소리, 비극적인 것(또는 비극), 잔혹몰락이라는 네 개의 단어와 결부되어 있는 네 가지 관념을 토론에 부치고 싶다. 나는 이 관념들을 순차적으로(selon une progression) 배열해볼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에 인위적인 체계성을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관념들이 가리키는 주제가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주제도, 주요 주제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가 본질적인 한 측면, 『군주론』에 대한 모든 독해 및 『군주론』이 제기하는 이론적 문제들에 대한 모든 토론을 어떤 식으로든 “과잉결정”하는 본질적인 한 측면―특히 우리가 여기 모이게 만든 상황에 의해 호출되는―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목소리

자클린 리세와 안 토레스의 기획의 난점 및 그 아름다움과 흥미를 이루는 것은, 내가 확신하기로는 『군주론』을 읽는 모든 세심한 독자가 생각할 만한 한 가지 직관을 [물질적 장치 안에] 구현하려(matérialiser) 했다는 데 있다. 그 직관은, 이 텍스트는 “일인칭으로”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이 텍스트를 서술하는(qui le signe) 유일한 인물이 다수의 목소리로 증가하고, 이 목소리들의 교대와 중첩은 그의 글쓰기에 독특한 복잡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직관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통사가 아무리 기묘하다 해도(마리 가이유Marie Gaille는 『군주론』의 글쓰기에서 파격문법anacoluthe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사람들은 그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품고 있는 “목소리들”은 들릴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 목소리들이 공명(共鳴)하게 해야 한다. 한 목소리에서 다른 목소리로의 이행이 감지될 수 있게 해야 하고, 한 대사에서 다른 대사로 이 목소리들이 전이하도록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연극의 정의 자체다. 목소리들[대사들]을 분리하는 간격들을 [물질적 장치 안에] 구현해야 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자신이 자신의 “목소리들”에 대한 장면분할이나 배역설정 등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목소리들을 부여할 수 있는 인칭들[인물들]의 성(性)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안 토레스의 알레고리적인 역할배정은 나에게는 완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런 식으로 역할 배정을 했는지 그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역량(la Vertu), 호기(好機, la Fortuna), 전쟁(la Guerre) [이 셋은 여성이다―역자] ... 또는 군주(le Prince)와 인민(le Peuple) [이 둘은 남성이다―역자]. 『군주론』 서두의 <헌정 편지>는 정치적 인식이 군주와 인민 사이에서 배분되고, 따라서 치유 불가능하게 분할되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또는 오히려 나는 이 모든 배역설정은 좀더 은밀하고 좀더 규정적인 한 가지 분할, 마키아벨리 자신의 두 개의 목소리의 분할, 자신의 텍스트를 수신자들(군주 및 아마도 그 뒤에 있는 인민. 이 양자 모두는 “도래해야 할” 존재자들이다)에게 전달하는 이가 그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는(se partage) 분할에 의해 지배되고 유지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글쓰기 안에서는 누가 말하는가? 『군주론』을 쓰면서, 그리고 이 글쓰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면서 『군주론』을 “말하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들은 어떤 것인가? 하나는 이성의 목소리이고 하나는 정념의 목소리,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하나는 사건들 및 역사적 상황들, 고대 및 근대의 정치적 활동의 인물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성찰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촉구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호명하고 권고하는 목소리, 곧 마지막 장 맨 마지막의 독립된 싯구에서 숨김없이 자신을 들려주는, 하지만 우리가 앞의 장들에서 그 대위법적 주제(le contrepoint)를 지각할 수 있는 목소리(이탈리아의 “구세주”에 대한 호소)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두 가지 목소리를 통합할 수도,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할 수도 없고, 역으로 이것들을 분리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군주론』은 지난 모든 시기에 걸쳐 그것이 제기한 해석의 문제들과 더불어서만, 이 목소리들의 중첩 안에서만, 그리고 이 목소리들이 계속 들릴 수 있는 한에서만 바로 그 저작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곧 마키아벨리가 분석한 사례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한에서만, 그리고 이 사례들이, 필요할 경우에는 명칭들을 바꿔가면서(가령 “이탈리아” 대신 “유럽”으로) 우리를 호명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 호소력을 지니는 한에서만 『군주론』은 바로 그 저작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비록 뛰어난 기교로 목소리들을 중첩시키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한 열쇠를 보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제는 텍스트 배후에 자신의 목소리들을 배치하고 상연하는 일종의 “초-마키아벨리”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들”로 갈등을 겪고 있는 텍스트―이 텍스트는 이러한 이해관계들의 증인이나 관객이기도 하다―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들의 중첩과 간격들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침묵의 밑바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향해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사물의 실제적인 진리에 관심을 경주하기andar dritto alla verità effetuale della cosa”라는 15장의 유명한 정식이 가리키듯이, 이는 “사물” 내지는 “사물 자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다음의 몇 가지 지적들을 통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사물”의 정체를 밝혀보고,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들의 연기(jeux)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해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만약 여기 내 앞에 있는 안 토레스의 시도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것

내가 “비극적 마키아벨리”라는 제목을 제시한 이유는 『군주론』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비극이론을 구성해 보거나, 마키아벨리를 이 미학 범주로 가두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의 저작(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군주론』)의 비극적 차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마키아벨리와 함께, 역사 및 정치 안에서 “비극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한 가지 성찰을 재개해 볼 수 있으리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클린 리세는 매우 정당하게도 『군주론』의 텍스트에 현존하는 “영웅들”에 준거하고 있는데, 『군주론』 텍스트는 대부분 영웅들의 발흥과 이들에 대한 평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이는 정체(政體)들에 대한 “분류” 및 그 실존조건들에 대한 연구와 대위법적 관계에 있다). 체사레 보르자가 이 영웅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이지만, “군주”의 이러저러한 행동 요령 및 이러저러한 성공과 실패의 조건들을 예시해주는 다른 영웅들도 존재한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최종 분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실패다. 영웅들은 그 자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체사레 보르자는 그 으뜸가는 사례이다.
  이는 어떻게 “군주”(아주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군주국”를 정초하는 “새로운 군주”)의 이상이 영웅주의 모델과 관계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군주의 이상은 영웅주의를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국 그것을 멀리해야 하는 것인가? 알다시피 이는 텍스트 해석의 중대한 난점들 중 하나다. “새로운 군주”는 반(反)영웅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비르투”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특징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 특징들을 합리적으로 통제하여 자신의 “도구들”로 삼는 방식(군주는 자기 자신의 도구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사적 인간에서 군주가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의 도구가 되고 이로부터 군주에 걸맞는 능력들을 길러내야 한다)을 통해서도 영웅주의의 형상들을 전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겉보기에는 매우 반마키아벨리적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영웅을 요구하는 나라는 불행하다”는 문장을 재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헤겔의 성찰들이 지닌 적합성(헤겔은 브레히트 및 그의 정식의 심원한 양가성의 원천이다)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곧 헤겔에 따르면 자신의 사적 행위를 통해 공적 질서의 변동이나 정초를 수행하는 국가의 인간(정치인, homme d'Etat), “위대한 인간”, 이 “범죄자”는 사실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를, 고대적이고 야만적인 역사에서 합리적인 역사와 근대성으로, 시초의 역사에서 목적/종국의 역사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사적 이행의 형상들 안에 기입하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장르”를 이루고, 주기적으로 비극을 재활성화시키는 질문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이 질문들은 행위를 문제화하는 커다란 반정립들의 작용에 따라 분석된다. 수단과 목적 또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마키아벨리는 이것들을 비르투와 포르투나 같은 원리들의 지반 위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군주들과 인민들 같은 세력들의 지반 위에서도 분석한다), 결정의 모델과 기예의 모델 사이에서 행위자(agent)(또는 영어에서 좀더 적절하게 말하듯이 agency, 곧 “대행자agence”)의 동요, 자비나 잔혹의 수단을 통해 주권이나 권능을 추구하는 권력의 양가성 등이 바로 그러한 반정립들이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후에도 비극을 재발명한 위대한 작가들, 곧 셰익스피어(『리처드 3세』)와 코르네이유(『시나』), 라신(『브리타니쿠스』, 『베레니스』, 『바자제』)은 항상 마키아벨리 및 그가 불러일으킨 논쟁들과의 긴밀한, 그리고 심원하고 성찰된 관계 속에서 이런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마키아벨리언”이거나 “반마키아벨리언”, 또는 “초마키아벨리언”이다. 하지만 만약 마키아벨리 자신이 정확히 『군주론』에서 내가 비극적인 것의 가장자리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곧 비극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하는 메시아적 구원의 질문(『오이디푸스』나 『햄릿』에서처럼)이나 이해관계들 및 열강들 사이의 갈등의 변증법에 관한 질문(브레히트라면, 다른 미학적-정치적 범주의 의미를 변경시키면서 “서사극”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잔혹 및 좀더 일반적으로는 악의 비애에 관한 질문과 조우하게 되는 분리와 만남의 경계선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에서는, 선행한 모든 새로운 군주의 약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구세주rédemteur(이 신성모독적인 명칭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목적들에 종속시키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주요한 권능puissance은 교회의 권능이기 때문이다)에 대한 “음화적(陰畵的)인” 소개와 권능들이나 “체질들humeurs”의 변증법(마키아벨리는 다른 저작에서 여기에 대해 체계적인 외연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 변증법의 쟁점은 항상 인민의 정념들의 부정성, 인민에게 고유한 “예종에 대한 거부”를 통치 내지는 국가의 삶의 실정적 조건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념들 및 그 정치적 효과들에 대한 분석론(특히 잔혹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데, 마키아벨리는 주목할 만한 “냉정함”으로 이를 다루고 있으며,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환각적인 기원invocation에 가까운 몇몇 [잔혹한 장면들의] “상연”을 제외한다면, 이는 스피노자 및 사드와 연결될 수 있다)이 서로 혼융되지 않는 가운데 중첩되고 있다. 비극적인 것, 어쨌든 마키아벨리식의 비극적인 것은 이 모든 차원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별도로 취해진 이 각각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잔혹

  이 세 가지 차원들 중 마지막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또는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분명 “잔혹의 정치”가 존재하는데, 이 정치의 수단들에 대한 서술 및 그 필연성에 대한 정당화가 『군주론』의 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이 『군주론』을―진지하든 아니면 가식적이든―거부하는 이유들 중 많은 것들을 해명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는 매우 독특하다.
  이는 외설적인 성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마키아벨리가 잔혹의 기술 및 통치 방법으로서 이 기술의 효력에 관해 제시한 논의들―여기서 사례exemplum는 단지 성찰과 분석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덕한” 행위의 모델로 나타난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생산할 수밖에 없는 효과는 사상사에서 매우 보기드문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볼 만하다. 나로서는 『규방철학』의 사드나 악덕의 번창을 “증명하는” 다른 텍스트들보다는 오히려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 및 원시적인 “금발의 야수”의 “순진무구한” 잔혹성에 관한 그의 논고들과 연결하고 싶은데, 그렇기는 해도 “선악을 넘어” 위치해 있는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과, “상위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개인들을 다른 사람들―이들은 이 목적들의 실현을 위한 대행자들이다―의 생명 및 존엄성의 “주인들”로 확립하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변론이 내포하는 도착성perversité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이에 관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며, 우리가 “인문주의humaniste” 시대―이 시대에는 르네상스 시대 못지 않게(또는 반대로 어쩌면 더 광범위하게) 폭력이 현실적으로 발생했지만, 더 이상 정치의 “순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의 원칙 내지는 선입견들에 따라 마키아벨리 텍스트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변론에 반발하고 있다고 논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정반대로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곧 마키아벨리는 그가 그 물질성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 [폭력의] 관행들이 편재해 있던(정치적 암살이 문제이든 고문 또는 배반이 문제이든 간에) 시공간의 맥락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그의 화두는 사실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의 화두는, 잔혹의 유효성의 조건들 및 이를 실행하는 전략들의 합리성,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목적들의 가치에 관해 계속 되풀이되는 문제제기라는 의미에서, 사실에 대한 “비판”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잔혹의 정치학은 고전적인 “실천적 지혜prudence” 이론을 권력을 획득하고 보존하는 데 유용한 수단들 전체로 확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으며, 전쟁을 정치의 영속적 지평으로 간주하는 홉스나 슈미트식의 관점 또는 폭력을 문화 및 제도들로 “변환conversion”하려는 헤겔식의 관점 역시 훨씬 뛰어넘는다. 사실 그의 정치학은 정치와 관계하는 폭력의 개념 자체를 파열시킨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마키아벨리 정치학을 사적 정념들과 공적 정념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와 관계시키면서, 초월적이거나 전통적인 정당성을 갖지 않는 권력의 “정초”로서 마키아벨리 정치학의 영속적인 목표를 “증오 없는 공포”의 제도화로 정의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폭력의 극단성과의 이러한 대면이 갖는 궁극적 역설을 간과했다고 믿는데, 이는 폭력이 모든 도구화를 초과하는, 또는 폭력의 결과들을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변용시키는―왜냐하면 이 결과들은 “만족”(또는 향락jouissance)과 공포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형태들 아래서 재현/상연되는 바로 그 순간에, 폭력이 온전하게 제어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의 부하 장수에 의해 억압받은 인민들에게 이 부하 장수의 시체를 두 토막내어 전시함으로써 그 억압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있는(『군주론』 7장은 인민들이 이것을 보고 “만족을 느낌과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저 유명한 간계scénario야말로 정확히 이것의 사례이다. 만성적인 내전 상태에서 폭력이 궁극적으로 권력의 독점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폭력은 “익숙해진” 형태들을 초과해야 하며, 이러한 초과는 여기서 (두토막난 시체의) 전시 광경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사적” 개인들 다수는 살이 떨리는 공포를 느낌과 동시에 일체의 동일화 가능성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고 모종의 합리성을 성취하고 있는지, 아니면 “효과적인” 정치의 목적들 및 수단들에 관한 자신의 체계 안으로 이러한 정치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사물이 침투하도록 방임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다. 『로마사론』은 믿음들(특히 종교)에 대한 조작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대중들은 오랫 동안 통제될 수 없다는 점에 관해 길게 논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정치”(또는 여론 정치)의 최초 판본과 동일시해 왔다. 공포의 효과와 함께 우리는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을 넘어서게 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기원”은 더 이상 신화나 제의의 형태로 재활성화될 수 없고, 대신 각자가 경험하고 억압하는 어떤 집합적 외상―이것의 결과들은 예견 불가능하다―에 준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체사레 보르자의 모험이 이루는 (또는 이탈리아에서 권력imperium을 재정초하는 데 거의 성공할 뻔했던 그의 이야기의 이면을 이루는) “파멸의 과정” 한 가운데 이 삽화를 기입함으로써 마키아벨리 자신이 수긍했던 바로 그 점이다.

몰락ruine

  이로부터 내가 오늘 끝으로 말하고 싶은 마지막 용어가 나온다. 이는 『군주론』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어휘들 중 하나―아마도 제일 많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이다. 잠시, 안정된 권력(나중에 스피노자는 이를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부르게 되겠지만, 그가 목표로 삼게 될 것은 정치 전략이 아니라 제도들의 체계, 심지어 헌정constitution이다)의 보증 수단들에 대한 논증 내지는 탐구라는 관념을 “중립화”하면서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어보자. 우리는 이에 관한 서술(구세주에 대한 호소는 정념 및 지성의 발휘에 의해서만 이러한 서술[의 차원]을 넘어선다)에서 모든 “군주국”은 몰락하고 만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또한 모든 군주들 역시 몰락하며, 군주들은 자신들이 정초할 수도 있었을 국가도 몰락시키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 국가는 그들의 비르투의 구현물, 실현될 법하지 않은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종말을 고하지 않을”(알튀세르), 따라서 영원으로 투사될 국가나 사회의 정초라는 관념―이는 주권에 관한 고전적인 신화와 분리될 수 없을 듯하다―에 맞서 마키아벨리와 함께 [모든 국가의] 정초들은 불가피한 몰락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사고해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초들은 가장 간교하고 가장 뛰어난 역량을 지닌 정치가들이, 겉보기에는 우연적(자신의 질병과 아버지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비했던 체사레의 계산상의 실수처럼)이지만 실제로는 불가피한 어떤 “오류”의 형태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양상들 및 기한들에 달려 있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곧바로 몰락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오류와 지성에 의해 대비되어 오랫 동안 지연되는 오류―이는 실제로는 성공과 혼동된다. 또는 그 본성상 시간이 항상 정치에 도래하는 것은 아니라면 혼동될 수 있을 것이다―사이에는 아무런 등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필수불가결하며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폭력의 과잉과 더불어―심원하게 비관주의적인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비극적 차원을 이루는 것이며, 활동적인 인간들 및 그들이 이끄는 대중들의 대담함과 젊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그것이 차례차례 빌려오고 있는 목소리들과 공유하는 기쁨 속에서 표현되지 않고 있는 『군주론』의 비밀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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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4-0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 거친 표현들이 몇군데 눈에 띄어서 좀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좀더 다듬어서 올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조금 바빠서 그랬다면 변명이 될까요?

2004-04-06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04-0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아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카이사르>는 <체사레>가 맞군요. [군주론]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지요. 그리고 연극적인 의미가 들어갈 경우에는 <영웅>은 <주인공>이라는 의미도 갖겠지요. 좋은 지적을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국내에는 코르네이유 비극 작품이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고, 라신의 경우는 몇몇 작품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에서 [라신 희곡선집]이 나와 있고, 장성중 교수의 [페드르] 번역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옛날 불어로 된 작품들이라서 그리 소개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은데, 코르네이유나 라신 작품들이 좀더 많이 번역된다면,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문화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balmas 2004-04-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출판상황을 보니까 제가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더군요. 코르네이유 작품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으로 [연극적 환상/오라스]가 번역되었더군요. 작가 이름이 <코르네유>로 되어 있긴 하지만요. 저도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오라스]는 코르네이유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번역되어 있어서 무척 반갑군요.
 

*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의 글입니다.  예리함은 변함이 없군요. 이제 국내에서도 헌법이 법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의 주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헌법에 관한 논의 없는 정치철학은 아무래도 속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때늦은 감이 듭니다. 이는 또 각자의 이론적 입장의 차이점이 좀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

 

헌법을 민주화하자

주말에 광화문 촛불집회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짐에 따라 촛불이 아름답게 피어올랐고, 〈너흰 아니야〉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구호가 거리를 메웠다.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1987년에 서울 거리에 울려 퍼졌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떠올랐고, 지금의 구호와 그때의 구호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연속성과 계승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헌철폐’는 ‘탄핵무효’가 되었는데, 실정법적인 의미의 헌법과 그것에 근거한 행위에 대한 국민적 거부라는 점에서 둘은 연속적이다. 더불어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쳤던 민주화 투쟁의 성과 덕에 이제 ‘독재타도’라는 구호는 ‘민주수호’로 바뀌었다. 이것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독재의 상태로부터 수호해야 할 민주주의의 상태로 옮겨왔음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 역설적인 것이 있다. 왜냐하면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이 무효라고 외치고 있는 그 탄핵이야말로 독재타도의 성과로 얻어진 87년 헌법에 입각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대중이 현재의 헌법 전체를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87년 민주화 운동과 동일시되는 헌법적 성과는 대통령 직선제에 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된 대통령을 탄핵한 의회의 행동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생각을 분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헌법에 의거한 행위와 헌법에 근거한 판결이 국민들 대다수에 의해서 존중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헌법의 제정 혹은 개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참여와 그것이 수반하는 학습과정이 있을 때만 헌법에 대한 존중이 국민 속에 확고하게 문화적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해방 후에 제정되고 개정된 헌법 가운데 이런 국민적 참여를 통해서 확립된 것이 없었으며, 이 점에서는 87년 헌법조차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87년 헌법 또한, 대중적 의지를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된 대통령 직선제라는 권력구조의 큰 틀은 수용하였으되, 그 외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87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를 배제한 채 당시 여당과 야당 간의 밀실협상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통일성의 뿌리가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사람들이 만든 사회란 언제나 적대와 갈등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통합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합의가 존재해야 하며,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오직 헌법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라면 그것은 오직 헌법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그 헌법이 국민의 민주적 참여 없이 만들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운영원리들이 헌법에 매개되어 있어야 한다는 감수성이 약한 것은 문제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의존해야 하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헌법 개정의 담론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2007년에는 87년 이후 20년 만에 대선주기와 총선주기가 일치하는 때가 된다. 그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정해온 87년 헌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통일 시대까지 대비하는 헌법을 구상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4년 동안 광범위한 국민적 토론과 숙고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국의 제단 앞에 바칠 만한 헌법을 만든다면, 이는 87년 민주항쟁과 최근의 촛불시위를 통해서 표현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헌법 자체의 민주화로까지 밀고 나가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를 향해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일이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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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Balibar, “Sed intelligere”, Lignes(nouvelle série) 4, 2001.

* 이 글은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리뉴』(‘노선’을 뜻한다)가 “혁명의 욕망”이라는 제목의 특집호를 내면서 실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기고문 중 한 편이다. 『리뉴』는 바타이유 연구자인 미셸 쉬르야(Michel Surya)가 편집을 맡고 있는 잡지로, 알튀세르 계열의 철학자들(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등)과 데리다 계열의 철학자들(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카트린 말라부 등)이 자주 글을 싣고 있다. 이 글 역시 복사나 퍼가기 등은 허락하지만, 공적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한다.

 

우선 인식하라

근본적으로는 『리뉴』의 관심사와 대의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여기 『리뉴』가 우리에게 성찰해보도록 제시한 정식들에 대해서는 얼마간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사실은 단어들에 관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내가 이 단어들에 물신fétiche과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게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또한 단어들(및 나 자신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념들, 곧 혁명과 욕망이라는 관념들을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덕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끝에서부터 시작하자면, 베를(Berle)의 정식의 의미에 관해 묻게 된다[베를이 제시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세계에 대해 정신이 대립시키는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refus pur et simple opposé par l'esprit au monde qui l'indigne”]. 우리처럼 [작가와는] 다른 “글쓰는 이들écrivants”(왜냐하면 나 자신을 “작가écrivain”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은 불어에서 관계사는 “서술”과 “한정”의 이중 용법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정식은, 세계는 그 자체로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를 거부함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은 어떤 세계, 정신이 거부하는 세계임을 뜻할 수도 있다. 세계는 그것의 실존 자체에 의해, 그 물질성(그것의 “산문”(散文), 그것의 공리주의)에 의해 정신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다는 관념은 전혀 부조리한 게 아니며, 이는 심지어 세계를 정의하는 관념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의미라고, 곧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어떤 세계(어떤 세계? 부르주아 도덕의 세계, 부르주아 세계 일반)라고 가정해보자. 정신[의 의미]에 대해 논란을 벌이기보다는(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신체 또는 대중이나 인민,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를 더 선호할 것이다 ... 하지만 이렇게 해서 본질이 변화될지는 확실치 않다)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자. 혁명에 대한 열망들의 “최소의 공통적인 특성”(“엄밀한 최소한의 것”)으로서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를 혁명에 대한 열망들의 “최소의 공통적인 특성”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불일치가 시작된다. 반대로 나는, 더 이상 어떤 구실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수용과 모든 용법, 모든 전통, 모든 강령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이라도, 우리에게는 엄밀한 의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처음에는, “욕망할 만한 것[바람직한 것, désirable]”이라는 관념을 단순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잡화하기 위해서, 혁명이라는 관념을 “혁명의 혁명”이라는 관념―이전에 레지 드브레가 대중화시킨 이 정식을 (많은 사람들 이후에) 전유해 사용한다면―과 분리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엄밀한 의미가 필요한 것이다. 
  나로서는 예컨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관념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념에 차이를 두고 싶다. 어떤 통속적인 생각에 따르면 전자와 후자는 부르주아 사회와 대립할 것이다. 서로 동일시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양자는 필연적으로 “단계들”이나 “국면들”로서 분절된다. 나는 양자를 대립시키지는 않더라도 분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이거나 “집산주의적”인 것도, “개인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는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와의 대립에 따라 순수하게 단적으로 정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의 세계(및 특히 이 세계 내에서 우리에게 참을 수 없고,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가 어떤 한에서 “부르주아” 세계인지 진지하게 질문해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자본주의적인 한에서라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밖에 다른 것들(성차별적, 인종주의적)도 더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이를 극복할 어떤 공산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앞의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가능한 것과 욕망할 만한 것[바람직한 것], 이 양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내게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확실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농지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만약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의 등의 투사들이 부여한 의미에서 [정관사 la가 들어간] “혁명la révolution”은 가능하지 않거나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는 아주 단순하게도, 사람들이 말하곤 했던 것처럼 혁명의 “주관적․객관적” 조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어떠한 과거에 대한 향수도, 어떠한 유토피아도 이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용어의 역사적 의미에서 혁명들은 단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며, 질문 전체는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하게 될까 알아보는 데 있다... 루소가 『에밀』(1762)의 유명한 구절―이는 회고적으로 볼 때 예견적인 구절로 드러났다―에서 “우리는 혁명들의 세기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이 말로써 통치형태와 사회질서의 급격한 변전을 지시했지만, 그 변전의 형태나, 특히 가치에 관해서는 예단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이 문장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혁명들의 역사(“망상들illusions”의 역사)로서의 역사l'Histoire의 종말을 보았다고 우쭐대거나 절망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둘 모두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도래할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인데, 이 혁명들은, (붉은 깃발과 함께 또는 그것 없이 이루어진) 과거의 혁명들 중 많은 것들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산업”혁명이거나 “민족”혁명, “보수”혁명이거나 “수동”혁명 등일 수도 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문제는 어떤 조건들 하에서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두 개의 정식을 대립시켜보고 싶다. 유명한 한 연설(1792년 11월 4일)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파를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시민들이여, 여러분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가?” 나는 이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쟁에서 이 정식을 인용했었다. 당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가 보기에는 자명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일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시에 혁명적 폭력(이는 항상, 최종 분석에서는, “내전”의 유형에 속한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든 달성하지 못하든 간에, 결코 자기 자신에 맞서 “파시스트 폭력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제 다른 정식을 보자. 아마도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욕망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나는 방금 이 표현을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이 표현이 이 선언의 의미,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다면,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양자를 다음과 같은 가설 속에서 결합시켜 보고 싶다. 곧 욕망의 혁명 없이는 혁명의 욕망도 없다! 따라서 특히 “혁명의 욕망”의 혁명 없이는 혁명의 욕망도 없다.
  이는 혁명의 욕망은 일차 수준에서 사고될 수 없고 그 자체로 “욕망될”(왜냐하면 의지의 의지가 존재하듯 욕망의 욕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 없다는 의미다. 다른 곳에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인용하면서(그에게 러시아 혁명의 근본 문제는 어떻게 혁명이, 자본주의와 국가로부터 유래한 그 자신의 “야만성”을 물리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이를 “혁명을 문명화하기civiliser la révolution”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는 혁명의 욕망은 동시에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시빌리테, 더 많은 상상력의 욕망이라고 제안하는 것인데, 이것들이 없다면 혁명은 그것이 “거부하는”, 그리고―혁명이 더 이상 그것의 도구가 되지 못할 때는―“그것을 무시해버리는l'indigne” 세계의 전도된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차 수준으로 올라간 욕망은 지연된 욕망, 자기 자신을 (재)부정하는 또는 자신의 실현을 두려워하는 욕망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증명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스스로를) 사고하는 것, 따라서―이 후자는 전자와 분리될 수 없는데―(스스로를) 사고하려는 욕망으로 되는 것은 바로 욕망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다. 1982년 에밀리아 지안코티(『스피노자 어휘집Lexicon Spinozanum』의 저자로, 1992년 사망했다)가 조직한 최초의 대규모 스피노자 회의[이 회의에서 발리바르가 발표한 논문이 바로 <대중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 스피노자, 반(反)오웰>이다]에 참석하러 우르비노에 갔을 때, 나는 회의장 벽에 그려진 그림에 “우리는 반역할 이유를 갖고 있다”는 마오의 구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여기에 에밀리아는 다음과 같이 써넣었다. “우선 인식하라Sed intelligere.” 타협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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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26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i, Mr. balmas, I read your paper in Moscow. Thank you for your keeping your post, but I'm in trouble in searching my post , my language^^

balmas 2004-03-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모스크바에 계시군요. 사정을 보니 아마도 한글 자판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답답하시겠습니다. 연구 때문에 가셨을 테니, 유익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Etienne Balibar, “Une philosophie politique de la différence anthropologique: Entretien avec Bruno Karsenti”, in Multitudes 9, juin 2002.

* 이 대담은 매우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정치철학에 관한 발리바르의 최근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읽을 수 있는 매우 시사적인 대담이다. 발리바르의 작업 스타일을 감안할 때, 여기서 가설적으로 소묘된 내용들은 다른 글들을 통해 좀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모습으로 제시될 것 같다. 제한된 분량 내에서 다면적인 문제들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려다 보니까 문장이 복잡해지고 때로는 매우 모호한 표현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감안해서 얼마간 풀어서 번역을 했는데, 좀더 검토를 해본 다음 오역이 있다면 바로 잡겠다. 이 글 역시 (당장) 출판할 목적으로 번역한 게 아니고 충분한 교열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한다. 

 

인간학적 차이의 정치철학: 브뤼노 카르젠티와의 대담


브뤼노 카르젠티: 『다중』(Multitudes) 창간호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정치철학 조류와 전혀 다른 지반 위에 정치에 관한 접근법을 위치시키려는 기획을 공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는 특히 정치에 대해 발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정치는 초월론적인 것(transcendantal)의 술책에 말려 들어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 사용될 수 있는 계약 장치들을 정비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면서 민주주의적 권력 제도의 적법한 조건들을 검토하거나 아니면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얼마간 기쁜 결혼들을 축복하는 데 머물러 왔기 때문에, 이런 성격을 지닐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 사상의 이러한 법적-제도적 전회는 70년대 후기 구조주의의 주요 성과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풍요한 유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에 비하면 분명 퇴보이며, 1995년 이래 등장한 새로운 투쟁 형태들 및 투쟁들의 급속한 연계는 이 전회의 한계들을 계속 비난해 왔습니다. 『다중』 편집진 사이에서는 우리가 이뤄내야 할 도약을 가늠해보기 위한 방편으로 들뢰즈적인 한 가지 구호가 자주 언급되곤 했습니다. 진정한 정치는 바로 존재론이다! 이 구호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의미가 있습니까? 이 구호는 선생님이 정치적인 것을 좀더 잘 정의할 수 있게 해줍니까, 아니면 반대로 혼란의 원천에 불과합니까?

에티엔 발리바르: 이 구호를 전도시키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겠군요. 알튀세르라면 오히려 이 구호를, 진정한 존재론은 바로 정치이다라고 굴절시켰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에게 본질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본질적인 것은 정치 그 자체의 환원 불가능한 성격을 경계짓고 위치짓는 것이며, 이론적 활동 그 자체를 정치로 다시 이끌어가는 것, 곧 이론적 활동이 가장 사변적이고 가장 형이상학적인 자신의 대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다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분명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주체에 관한 질문, 예속화와 주체화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은 전략적 차원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따를 경우, 정치에 관한 접근법들의 차이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담론을 존재론적 가정들로 유도하거나 역사철학으로 재기입하는 것―이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을 거부하는 것은, 정치의 형태들 및 쟁점들을 실체화함(hypostasier)으로써 정치가 생산되는 지반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의 새로운 모습의 출현을 준비하는 존재론으로 복귀하는 것은, 역으로 본다면 정치를 파악하는 한 가지 방식, 심지어 정치를 새롭게 실천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제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존재론 안에서 균열이 작용하게 됩니다. 투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 내부에서 사람들은 긍정적인 또는 구성적인 노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존재론적-정치적 관점의 위력은 전적으로, 스피노자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역량 개념의 내적 경제에 놓여 있습니다. 역량은 본질적으로 관계이며, 증대하거나 감소하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역량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미분(différentiel), 예속화와 주체화 사이의 영속적인 이행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량 개념은 결코 미리 구성되어 있는 정초적인 주체의 존재론화가 아닙니다. 이 개념은 또다른 존재론의 토대, 또는 적어도 그 존재론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정치적인 것의 환원 불가능성을 정의하려는 두번째 시도는, 선생이 질문에서 말한 것처럼, “초월론적인 것의 술책”을 실제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제시한 것과는 반대로 저는 이것이 반드시 정치의 뇌관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경향의 가장 흥미있는 대표자는 데리다입니다. 그가 “유령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초월론적인 것의 최후의 형상(figure)인데, 여기서 실천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변 이성을 압도합니다. 이 경우 모든 존재론적 관점은, 스스로 윤리적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필요한 경우에는 예언적이라고 말하는 어떤 “명령”을 위해 비판당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의 도덕적 정초라는 관점을 재생시키고, 이런 한에서 주체의 새로운 형상을 재확립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재확립은 실천적 주체를 실체화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비판과 분리할 수 없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쪽] 사람들은 스피노자주의의 현대적인 형태들에서 작동하고 있는 역량이라는 관념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형태의 정치철학에서 초월론적 극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긍정합니다. 곧 행위의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항상 아직 가능하며, 동일성 중심적인 태도 및 이것이 함축하는 “상상적 공동체”에 사로잡히지 않는 행위를 타인 및 자기에게 전달되는 호명의 행동과 연계시키는 것이 항상 아직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호명의 행동은 실천 주체 및 정의를 위한 행동이, 자신들의 고유한 존재론과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파스칼식의 내기(pari)의 몇몇 어조를 재발견하려는 태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치적 문제제기가 접합을 시도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극점 사이에서, 또는 이것들을 넘어서 또다른 관점을 구분해내는 게 가능한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제 작업이 위치해 있는 관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편으로 자율성 및 환원 불가능성에 대한 옹호와 다른 한편으로 어떤 규정된 사변적 담론에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정치적 담론이 끊임없이 겪게 되는 불안정성은, 우리가 정치와 인간학의 접합에 대해 질문할 때, 해소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좀더 인식 가능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의 맹목들 및 근본적으로는 마르크스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는 부인(dénégation)을 재검토해 본 이후, 인간학적 문제를 재정식화하고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학적 차이들을 기입하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분리하는―끊임없이 재정의되는―경계선을 따라 갈등의 질문을 규범의 질문으로 전환하거나 전치시킴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식별적인(critique) 인간학적 차이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적 관계들의 제도화나 변혁의 조건들을 열어 놓음으로써, 정치를 구성하는 난점들이 사변적으로 배가되는[거울반영적으로 복제되는, se redoublent spéculativement] 것은 바로 인간학적 수준에서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태를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포이어바흐에 관한 유명한 여섯번째 테제는 미완의 테제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 본질은 독특한 개체 안에 들어 있는 보편자가 아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화(ensemble)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들은 우리가 이것들을, 가변적인 형태들 하에서 항상 인간적인 것의 규범을 구성하고 고착시키며, 이에 따라 이러한 규범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까지 확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형이상학적 추상물로 대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니체에서 푸코, 캉귈렘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노선을 그리는 질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생명정치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러한 노선과 대면해보는 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사회적 관계들은 종(種)의 내부에 차이들―생명 자체 내의 실재적-상상적 차이들, 생명체 내의, 인간 개체군(populations) 내의 “본성”이나 “가치”의 차이들―을 정립함으로써 기능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한편으로] 이러한 차이들의 제약을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차이들의 궁극적 불가능성을 비난하도록 이끌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치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질문은 제가 보기에는 폭력의 질문, 곧 인간학적 차이의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규범적인(정상적인, normative) 또는 때로는 극단적인 폭력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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