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Balibar, “Sed intelligere”, Lignes(nouvelle série) 4, 2001.
* 이 글은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리뉴』(‘노선’을 뜻한다)가 “혁명의 욕망”이라는 제목의 특집호를 내면서 실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기고문 중 한 편이다. 『리뉴』는 바타이유 연구자인 미셸 쉬르야(Michel Surya)가 편집을 맡고 있는 잡지로, 알튀세르 계열의 철학자들(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 등)과 데리다 계열의 철학자들(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카트린 말라부 등)이 자주 글을 싣고 있다. 이 글 역시 복사나 퍼가기 등은 허락하지만, 공적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한다.
우선 인식하라
근본적으로는 『리뉴』의 관심사와 대의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여기 『리뉴』가 우리에게 성찰해보도록 제시한 정식들에 대해서는 얼마간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사실은 단어들에 관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내가 이 단어들에 물신fétiche과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믿게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마도 또한 단어들(및 나 자신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념들, 곧 혁명과 욕망이라는 관념들을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덕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끝에서부터 시작하자면, 베를(Berle)의 정식의 의미에 관해 묻게 된다[베를이 제시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세계에 대해 정신이 대립시키는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refus pur et simple opposé par l'esprit au monde qui l'indigne”]. 우리처럼 [작가와는] 다른 “글쓰는 이들écrivants”(왜냐하면 나 자신을 “작가écrivain”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은 불어에서 관계사는 “서술”과 “한정”의 이중 용법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정식은, 세계는 그 자체로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를 거부함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을 지닐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은 어떤 세계, 정신이 거부하는 세계임을 뜻할 수도 있다. 세계는 그것의 실존 자체에 의해, 그 물질성(그것의 “산문”(散文), 그것의 공리주의)에 의해 정신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다는 관념은 전혀 부조리한 게 아니며, 이는 심지어 세계를 정의하는 관념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의미라고, 곧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어떤 세계(어떤 세계? 부르주아 도덕의 세계, 부르주아 세계 일반)라고 가정해보자. 정신[의 의미]에 대해 논란을 벌이기보다는(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신체 또는 대중이나 인민,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를 더 선호할 것이다 ... 하지만 이렇게 해서 본질이 변화될지는 확실치 않다)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자. 혁명에 대한 열망들의 “최소의 공통적인 특성”(“엄밀한 최소한의 것”)으로서 “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순수하고 단적인 거부”를 혁명에 대한 열망들의 “최소의 공통적인 특성”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불일치가 시작된다. 반대로 나는, 더 이상 어떤 구실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수용과 모든 용법, 모든 전통, 모든 강령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이라도, 우리에게는 엄밀한 의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처음에는, “욕망할 만한 것[바람직한 것, désirable]”이라는 관념을 단순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잡화하기 위해서, 혁명이라는 관념을 “혁명의 혁명”이라는 관념―이전에 레지 드브레가 대중화시킨 이 정식을 (많은 사람들 이후에) 전유해 사용한다면―과 분리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엄밀한 의미가 필요한 것이다.
나로서는 예컨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관념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념에 차이를 두고 싶다. 어떤 통속적인 생각에 따르면 전자와 후자는 부르주아 사회와 대립할 것이다. 서로 동일시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이 양자는 필연적으로 “단계들”이나 “국면들”로서 분절된다. 나는 양자를 대립시키지는 않더라도 분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이거나 “집산주의적”인 것도, “개인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이러한 구분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산주의는 아마도 부르주아 사회와의 대립에 따라 순수하게 단적으로 정의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의 세계(및 특히 이 세계 내에서 우리에게 참을 수 없고, 어떤 점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가 어떤 한에서 “부르주아” 세계인지 진지하게 질문해볼 수 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자본주의적인 한에서라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밖에 다른 것들(성차별적, 인종주의적)도 더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거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이를 극복할 어떤 공산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앞의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가능한 것과 욕망할 만한 것[바람직한 것], 이 양자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내게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확실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농지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만약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정부의 등의 투사들이 부여한 의미에서 [정관사 la가 들어간] “혁명la révolution”은 가능하지 않거나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이는 아주 단순하게도, 사람들이 말하곤 했던 것처럼 혁명의 “주관적․객관적” 조건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어떠한 과거에 대한 향수도, 어떠한 유토피아도 이를 전혀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용어의 역사적 의미에서 혁명들은 단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며, 질문 전체는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하게 될까 알아보는 데 있다... 루소가 『에밀』(1762)의 유명한 구절―이는 회고적으로 볼 때 예견적인 구절로 드러났다―에서 “우리는 혁명들의 세기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이 말로써 통치형태와 사회질서의 급격한 변전을 지시했지만, 그 변전의 형태나, 특히 가치에 관해서는 예단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이 문장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혁명들의 역사(“망상들illusions”의 역사)로서의 역사l'Histoire의 종말을 보았다고 우쭐대거나 절망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둘 모두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도래할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인데, 이 혁명들은, (붉은 깃발과 함께 또는 그것 없이 이루어진) 과거의 혁명들 중 많은 것들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산업”혁명이거나 “민족”혁명, “보수”혁명이거나 “수동”혁명 등일 수도 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문제는 어떤 조건들 하에서 우리가 이 혁명들을 욕망할 만한 것들로 생각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두 개의 정식을 대립시켜보고 싶다. 유명한 한 연설(1792년 11월 4일)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파를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시민들이여, 여러분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가?” 나는 이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쟁에서 이 정식을 인용했었다. 당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가 보기에는 자명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일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시에 혁명적 폭력(이는 항상, 최종 분석에서는, “내전”의 유형에 속한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든 달성하지 못하든 간에, 결코 자기 자신에 맞서 “파시스트 폭력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제 다른 정식을 보자. 아마도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욕망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나는 방금 이 표현을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나는 이 표현이 이 선언의 의미,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다면, “정신”을 집약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양자를 다음과 같은 가설 속에서 결합시켜 보고 싶다. 곧 욕망의 혁명 없이는 혁명의 욕망도 없다! 따라서 특히 “혁명의 욕망”의 혁명 없이는 혁명의 욕망도 없다.
이는 혁명의 욕망은 일차 수준에서 사고될 수 없고 그 자체로 “욕망될”(왜냐하면 의지의 의지가 존재하듯 욕망의 욕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 없다는 의미다. 다른 곳에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인용하면서(그에게 러시아 혁명의 근본 문제는 어떻게 혁명이, 자본주의와 국가로부터 유래한 그 자신의 “야만성”을 물리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이를 “혁명을 문명화하기civiliser la révolution”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는 혁명의 욕망은 동시에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시빌리테, 더 많은 상상력의 욕망이라고 제안하는 것인데, 이것들이 없다면 혁명은 그것이 “거부하는”, 그리고―혁명이 더 이상 그것의 도구가 되지 못할 때는―“그것을 무시해버리는l'indigne” 세계의 전도된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차 수준으로 올라간 욕망은 지연된 욕망, 자기 자신을 (재)부정하는 또는 자신의 실현을 두려워하는 욕망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증명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스스로를) 사고하는 것, 따라서―이 후자는 전자와 분리될 수 없는데―(스스로를) 사고하려는 욕망으로 되는 것은 바로 욕망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다. 1982년 에밀리아 지안코티(『스피노자 어휘집Lexicon Spinozanum』의 저자로, 1992년 사망했다)가 조직한 최초의 대규모 스피노자 회의[이 회의에서 발리바르가 발표한 논문이 바로 <대중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 스피노자, 반(反)오웰>이다]에 참석하러 우르비노에 갔을 때, 나는 회의장 벽에 그려진 그림에 “우리는 반역할 이유를 갖고 있다”는 마오의 구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여기에 에밀리아는 다음과 같이 써넣었다. “우선 인식하라Sed intelligere.” 타협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