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의 힘]에 들어갈 역주를 하나 더 올립니다. 이 역주는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사용하는 전미래 시제의 독특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이는 [법의 힘]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논문이나 책으로 정리해야 할 내용인데, 일단 하나의 역주라는 형식을 빌려 소묘해 봤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잘 확신이 들지 않아서, 역주로 제시해도 되는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망신은 각오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

 

여기서 데리다가 전미래적인 표현을 두 차례 사용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정의의 태초에 로고스, 언어활동 또는 언어가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는 원문의 “Au commencement de la justice, il y aura eu le logos, le language ou la langue”라는 문장의 번역이고, 두번째 “태초에 힘이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는 원문의 “Au commencement il y aura eu la force”라는 문장의 번역이다. 

  이 책에서 데리다의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중 하나는 법이나 제도, 국가의 정초라는 사건이 갖는 시간적 역설을 부각시키는 것인데, 데리다는 이를 위해 전미래 시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불어에서 전미래 시제는 미래에 앞서 있는 어떤 시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그녀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J'aurai fini ma traduction, quand elle reviendra.” 이 문장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quand elle reviendra’는 미래 시제를 가리키고, 이 시제 이전에 완료될 어떤 행위, 곧 ‘나는 내 번역을 끝마쳤을 것이다J'aurai fini ma traduction’의 시제가 바로 전미래 시제가 된다. 이처럼 통상적인 용법에서 전미래는 미래 이전에 완료되는 어떤 시점을 가리키며, 따라서 과거와는 무관한 시제라고 할 수 있다(물론 어떤 과거의 상황에서 그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이루어질 행위를 염두에 두고 전미래 시제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선형적 시간관을 전제하고 있는 일반적 용법과는 달리 전미래 시제를 과거에 대해 소급적, 구조적 영향을 미치는 시제로 파악한다. 다시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련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그 때까지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보자(데리다는 『에코그라피』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런 사건의 한 가지 예로 들고 있다). 이를 사건 X라 부르기로 하자.

 (1) 이러한 사건 X의 ‘발생’(또는 뒤에서 데리다가 사용하는 단어대로 하면 ‘돌발surgissement’)은 그 때까지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 이전의 시간적 흐름 또는 인과적 흐름 속에서 파악 불가능한 것이다.

(2) 그런데 이처럼 사건 A가 발생한 다음, 이 사건은 자신의 과거의 시간적 흐름에 대해 소급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곧 사건 A가 일단 발생한 다음에는 이 사건은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곧 A 이전의 시간적 흐름이나 인과적 흐름의 합리적(또는 인식 가능한) 결과로 제시된다. 이렇게 되면 사건 X의 발생은 더 이상 돌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 적어도 합리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 A 이전의 시간적, 인과적 흐름과 A라는 사건 사이에는 필연적이거나 합리적인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목적론적인 관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합리적으로 예견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어떤 사건이 사후에 필연화되는 소급적, 구조적 메커니즘이다. 


  이제 본문의 문장을 살펴보자. “정의의 태초에 로고스, 언어활동 또는 언어가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Au commencement de la justice, il y aura eu le logos, le language ou la langue.” 이 문장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듯이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는 문장의 변용이다. 두 문장의 차이점 중 하나는 후자의 경우 과거 시제가 사용된 반면, 전자에서는 전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후자의 문장이 외관상으로는 “말씀이 있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했던 사태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실제로 존재했던 사태는 어떤 사건 X가 발생한 결과로, 또는 이 사건 X가 어떤 특정한 세력에 의해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전유된 결과로, 사후에 재구성된 사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곧 태초라는 것, 기원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사태, 또는 더 나아가 가장 먼저 존재했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억압되고 전위(轉位)되어displaced 드러나지 않는 어떤 우발적 사건 X의 사후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시간적이거나 인과적인 흐름이 이런 식으로 재구성되면, X라는 사건의 우발성은 말소되고 대신 X라는 사건은 재구성된 서사의 과정 속에 편입되어 태초의 어떤 기원, 근원적인 원인이 산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통상적인 전미래 시제의 용법과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의 용법 사이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 X(이는 예견되어 있는, 또는 적어도 예측 가능한 사건이다)를 전제한 다음, 이 사건 이전에 이루어질 행위나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데리다는 전미래 시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어떤 사건 X가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지시하기 위해 전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 용법은 이중적임을 의미한다. 곧 데리다의 용법에서 (1) 완료에 해당하는 부분(“했던 게”)은 과거에 대한 소급작용 및 그 결과를 가리키며 (2) 미래에 해당하는 부분(“될 것이다”)은 이러한 소급작용의 구조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소급작용은 어떤 특정한 사건의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언젠가는 소멸하게 될 일시적인 역사적 불운도 아니다. 이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다(따라서 위에서 말한 ‘특정한 세력에 의해 특정한 목적에 따라 전유된 결과’라는 표현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전미래 시제 용법은 선형적인 시간관을 전제하는 일상적 용법과 달리―말하자면―시간의 시간화 내지는 역사의 역사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 80쪽에서 데리다가 “법이나 국가가 정초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미래라는 문법적 범주는, 실행되고 있는 폭력을 기술하기에는 현재의 변형과 너무 유사하다. 이 범주는 정확히 말하자면 현전 또는 현전의 단순한 양상화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 용법의) 전미래 시제에 따라 소급적으로 구조화된 시간의 흐름에서는 선형적인 시간, 곧 순간적인 지금의 연속만 존재할 수 있으며(이 경우 과거와 미래는 각각 ‘지나간 현재’와 ‘오지 않은 현재’일 것이다), 과거에 대해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은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전미래 시제는 이외에도 7번 더 사용되고 있는데, 이 문장들은 모두 이런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정의]은 항상 이것, 이 도래-하기를 지닐 것이며, 항상 이것을 지녔던 게 될 것이다elle l'aura toujours, cet-à-venir, et elle l'aura toujours eu.”(p. 57])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하지만 또한 인간에게만 명명의 힘을 선사함으로써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은 ‘신의 폭력’이 아닌가?N'est-ce pas la ‘violence divine’ qui aura toujours précédé mais aussi donné tous les prénoms, en donnant à l'homme seul le pouvoir de nommer?”(p. 69)
“피의 혼합이 아니라 서출, 곧 피흘리게 만들고 피로써 보답하게 만드는 법을 근저에서 창조했던 게 될 서출인 것이다non pas mélange des sangs mais bâtardise qui au fond aura crée un droit qui fait couler le sang et payer par le sang.”(p. 118)
“신의 폭력은 모든 이름에 항상 선행했던 게 될 테지만, 또한 모든 이름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La violence divine aura précédé mais aussi donné tous les prénoms.”(p.119)
“사실은 나는 이미 이를 갖고 있었던 게 될 텐데,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 이를 선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en vérité je l'aurai déjà eu puisque j'ai pu me le donner.”(p. 168)
“나는 서명의 위임(委任)을 통해 나에게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능력/권력’, 서명할-수-있음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능력/권력’을 선사했던 게 될 것이다je me serai donné un nom et un ‘pouvoir’, entendu au sens de pouvoir-signer par délégation de signature.”(같은 곳)
"정확히 말하면 최종심급의 자리에서는 ... 신만이 서명했던 게 될 것이다Précisément à la place de dernière instance ... Dieu seul aura signé."(p. 183)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전미래 시제가 함축하는 이중적 양상을 모두 나타낼 수 있도록 다소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il y aura eu”를 “존재했던 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뒤에 나오는 전미래 시제 문장들의 경우에도 이처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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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법의 힘]에 수록될 역주 중 하나입니다. 지난 번 <différanc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1>의 후속글을 쓰겠다고 예고한 뒤 벌써 1달이 넘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때 후속글을 쓰지 못한 이유는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얘기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différance 개념 하나를 넘어선 번역 일반에 관한 논의로 확대되어, 제대로 논의를 정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지긋지긋하던(정말로!!^^) 교정이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후속글을 써야할 텐데, 지난 번 글의 결론이 어떤 것일까 얼마간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우선 <간주곡> 삼아 이렇게 역주의 내용을 올립니다. 이 역주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신다면, 시간이 거의 없긴 하지만, 최대한 반영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différance라는 데리다의 신조어는 데리다의 용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심각한 오해의 대상이 된 용어 중 하나다. 이 용어는 국내에서는 주로 ‘차연差延’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는 불어에서 différer라는 단어가 한편으로는 ‘차이나다’, ‘다르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이’에서 ‘차’라는 음절과 ‘지연’에서 ‘연’이라는 음절을 합성해서 만든 번역어다. 이는 différance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이중적 의미를 표현해준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번역어의 심각한 문제점은 데리다가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노리고 있는 다른 효과들―내가 볼 때에는 오히려 이것들이 더 중요하다―을 제거한다는 데 있다. 우선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différence라는 불어 단어(이는 ‘차이’를 의미한다)와 음성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양자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직접 써보든가 아니면 별도의 지적을 덧붙이든가 해야 한다는 사실(“‘e’가 아니라 ‘a’가 붙는 디페랑스 말입니다.”와 같은 식으로)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데리다에게 이처럼 두 단어가 음성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는 (초기) 데리다 작업의 근본 관심 중 하나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함축되어 있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이 알파벳 문자기록écriture, 곧 표음적인 문자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différance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기존에 널리 쓰이던 différence라는 단어에서 e라는 모음 대신 a라는 모음을 하나 바꿔 넣음으로써, 음성과 이것의 기록, 기호와 사물(또는 사태), 인위적 제도와 자연의 질서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는 일치와 호응의 관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데서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둘째, 이 번역어는 마치 différance의 의미, 또는 이것이 산출하는 의미 효과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의 결합에 국한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데리다의 의도와는 달리 différance라는 용어를 어떻게든 명확하게 한정지음으로써 이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différance가 산출하는 의미 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사실 데리다는 [différance]라는 논문(이는 1968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데리다가 했던 강연원고이며, différance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유일한 글이기도 하다)에서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소쉬르와 니체, 프로이트, 레비나스, 하이데거의 작업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고, 또 이들의 작업을 어떻게 변용하고 심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다(Marges-de la philosophie, Minuit, 1972 참조). 이 논의를 여기서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 différance라는 신조어는 소쉬르를 따라 체계 내의 항들은 실정적인 내용,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항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갖게 된다는 점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소쉬르가 문자기록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음소phonème를 중시한 데 비해, différance는 음성상의 차이의 조건이 기록상의 차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문자기록이야말로 ‘차이의 경제’를 (불)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2) 더 나아가 데리다는 “기원적 différance”에 관해 말함으로써 différance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différence différance 차이나,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의 의미의 결합이 아니라, 기원 및 (존재론적) 근거의 해체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쉬르의 차이의 체계가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해, différance는 모든 차이는 ‘지연’ 내지는 ‘시간내기temporiser’와, ‘차이’ 내지는 ‘공간내기espacement’의 운동의 산물임을 보여준다(시간내기와 공간내기 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는 뒤의 주 59를 참조하라). 이는 곧 기원은 기원으로서 단일하게,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자기 자신과의 차이, 이중화, 다수화를 통해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기원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뜻한다. 기원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다른 결과들을 산출해내기 위해서는 정초와 보존의 (기술적) 지주support로서 원-기록archi-écriture 안에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différance가 ‘다르다’와 ‘지연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결합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인위적 합성이나 기계적 조합이 아니라, 로고스 내지는 말씀으로서의 기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의 운동임을 보여주려는 목적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기원의 해체가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는, 더 이상 차이 또는 차이들의 체계는 정태적인 공시태에 머무를 수 없으며(이는 궁극적으로 기원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항상 자기-차이화의 운동 속에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차연이라는 역어는 différance의 의미 효과를 너무 확정적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번역어로 보기 어렵다.    


  셋째, 더 나아가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différance라는 신조어가 산출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어 사용한 목적 중 하나는 서양 문명, 서양 학문, 서양의 지적 제도에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적 관점을 일종의 의도적인 조작, 해프닝을 통해 환기시키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différance는 ‘e’ 대신 ‘a’라는 모음 하나를 바꿔 써넣음으로써, 당연한 것으로 가정된 글쓰기 규칙을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의 문명에 내재한 음성중심주의, 로고스중심주의적 전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데리다 자신이 [différance]에서 직접 지적하고 있는 점이며(“이[이처럼 차이différence라는 단어의 기록 안에 문자 a를 도입하는 일―옮긴이]는 기록에 관한 기록/글쓰기 중에, 또한 기록 안에서의 한 기록 중에 일어났으며, 따라서 이러한 기록의 상이한 궤적들 모두는 매우 엄격하게 규정된 몇몇 지점들에서 중대한 철자법 실수를 범하고, 기록을 규제하는 철자법 교리와 문서écrit를 규제하고 법도에 맞게 규율하는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Marges-de la philosophie, p. 1), 특히 『목소리와 현상』(1967) 6장에서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주의 없이 différance라는 단어를 불쑥 사용하고 있는 데서 잘 엿볼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반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이런 효과를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내에서는 차연이라는 역어 이외에 다른 역어들도 제시되어 왔다. 『입장들』(솔, 1991)의 번역자인 박성창 씨는 ‘차이’라는 고딕체 표기를 différance에 대한 번역어로 제시했고,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는 차이(差異)라는 한자어와 구분되는 ‘차이(差移)’라는 한자어를 제시했으며(이성원, [해체의 철학과 문학 비평],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 60쪽 주 10 참조), 역자 자신은 『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에서 역시 기록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차’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différance의 번역어로 김남두/이성원 교수가 제안한 ‘差移’를 쓰기로 결정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역어는 différance라는 개념의 기록학적 측면을 표현하면서도 ‘차이’나 ‘차’라는 역어와 달리 différance가 지닌 두 가지 의미의 결합 역시 어느 정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역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단어 또는 합성어라는 점에서도 différance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낯설게 하기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도 ‘差移’라는 역어는 다른 역어들보다 더 différance에 충실한 역어로 볼 수 있다. 물론 ‘差移’라는 역어 역시 différance가 함축하는 모든 측면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며 독자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준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제시된 역어들 중 différance에 가장 충실한 역어라고 판단해서 이 책에서는 줄곧 ‘差移’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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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2-1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던 결론이네요^^ 번역어로서 '차연'이 갖는 문제점들에 대해선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한자어로 차이라고 써주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의문입니다(중국어의 경우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충실성'을 위해서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지요? 더불어, 우리말에 대한 '충실성'은 관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요? 사실 번역은 번역의 불가능성에 기대고 있는 것인데, 그러한 불가능성을 승인한 이후라면, 보다 타협적인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데리다를 읽는 독자라면, 상식적으로 디페랑스가 어떤 것이고, 그 번역에 어떤 문제점이 개입하는지 정도는 안다고 봅니다. 제가 '차연'이란 번역어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balmas 2004-02-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했다고 하시니까 쑥스러운데요^^. 저는 지적하신 내용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디페랑스의 내용,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그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번역어의 편의성이나 효율성 문제는 또 다른 것 아니냐?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충실성도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이 두 가지 지적에 대해 다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계속 생각을 해본 끝에(하지만 토론은 계속 열려 있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잠정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데리다가 디페랑스라는 원어를 사용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낯설게 하기의 효과, 또는 일종의 해프닝의 성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차연>보다는 <차이>라는 한자 조어가 좀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라는 조어가 좀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2) 디페랑스는 사실은 불어가 아니지요. 불어인 difference에서 e라는 모음을 a라는 모음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페랑스가 불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이 말이 쓰인지가 벌써 40여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 불어사전에 나오지 않으니까 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디페랑스라는 말이 지닌 신조어의 성격,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성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차연>도 한자어로 된 조어인 <차이>도 모두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둘 모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차이>라는 조어는 발음상으로는 <차이>라는 우리말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아주 중요한 장점을 지니고 있고, 이 때문에 <차이>라는 조어를 선택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편의성과 효율성의 문제가 남는데, 이 문제는 1번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는 아무래도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차이>라는 한자 조어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구요. 그렇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새로운 번역어를 제안한 이유는 결국 디페랑스에 관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간단하게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게 아닌가라는 불만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차이>라는 한자 조어의 낯설음, 불편함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디페랑스라는 불어 원어가 이런 낯설음과 불편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두고, 또 이런 점들을 우리말 번역에서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제기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번역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결국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겠지요. 하지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장원리를 한번쯤은 불편하게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반론을 해주셨으니까 한번 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재촉은 안하지만) 왜 원고를 안보낼까 하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출판사에게는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로쟈 2004-02-1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답변을 주셨네요. 제 요지는 한자어 <차이>는 <차연>보다 '의미상' 더 낫지만, 한글전용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차이>로 옮길 만한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불어의 디페랑스는 정말 아주 작은 '차이'(e를 a로 바꾸어줌으)로써 어떤 전복적 효과를 의도하는 것인데, 한자어 <차이>는 너무 '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차연>은 그런 의미에서, 차선이긴 하지만, '겸손한' 것이기도 합니다(불가능성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balmas 2004-02-21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평을 또 달아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자꾸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점점 설득당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런데 몇 개 반론을 제기해보자면 그렇습니다.
1) <차이>를 한자어로 표기한다고 해서 한글 전용 원칙이 포기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디페랑스가 불어가 아니듯(또는 <아직은>) 한자어로 표기된 <차이>나, 또는 <차연>도 한글은 아니지요. 그리고 한글 전용 원칙을 준수하느냐 포기하느냐 문제가 실제로 여기서 중요한 쟁점인지도 조금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올린 역주에서 인용한 데리다 글에서 잘 나타나듯이, 데리다가 e를 a로 표기한 데는 문법규칙이라든가 글쓰기 규범에 대한 위반이 의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데리다는 때로는 텍스트 안에 한자어를 기입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데리다가 일종의 <불어 전용 원칙>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요. 다만 알파벳 문자기록에 내재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보자는 뜻일 겁니다.
2) 그리고 e를 a로 표기하는 게 <작은 차이>라고 하셨는데, 한편으로 맞는 지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차이를 좀 과소평가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컨대, difference-differance 사례와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차이>를 <차아>로 표기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본다면, e와 a의 차이라는 게 그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가벼운 건 아니라는 게 좀더 분명히 드러나리라 봅니다. (사실 저는 예전부터 <ㅇ> 대신 <ㅇ>의 고어식 표기를 한다면,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e와 a의 차이와 좀더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글 컴퓨터로 그런 표기가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고, 이건 정말 <장난하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기도 해서 '감히' 뭐라고 말은 못하고 그냥 <이>자를 고딕체 표기로 하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3) 그리고 <겸손>과 <불가능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을 듯합니다. 이렇게 연결시킨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성>은 좀더 실존주의적인,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뜻하는 개념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데리다의 불가능성 개념은 좀더 구조주의적인 것 같습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학적>이라고 해야겠지요. 따라서 <불가능성> 개념은 <겸손>과 관련되기보다는 '전략'과 'engagement' 또는 'en-gage'개념(이 개념은 물론 사르트르식의 의미보다는 데리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개념입니다)과 관련될 것 같습니다.
4) 결론적으로 (사실은 좀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서 끝을 맺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연>이냐 한자어로 된 <차이>냐의 선택의 문제는, 제가 갑돌이와 병순이의 대화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실용적인 편의성을 좀더 중시하느냐 아니면 디페랑스에 대한 좀더 원칙적인 충실성을 중시하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로쟈님은 전자에 가까운 입장이신 것 같고, 사실은 저도 로쟈님 때문에 이쪽으로 점점 많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가 <차이>라는 한자어 표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적어도 한번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공적으로 해보고, 그래서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어서 논쟁 또는 토론을 유발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냥, 제 생각은,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좀더 끌어당기신다면 넘어갈지도 모르죠(^^).

로쟈 2004-02-2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어오실 거 같지는 않지만, 한마디만 덧붙입니다. 예전에 몇몇 분들이 차이(고딕체)로 디페랑스를 번역하시면서도 유사한 이유들을 제시하셨는데, 그 경우에서도 제 입장은 마찬가지입니다. 차이(고딕체)가 차연보다 '원칙적인 충실성'을 보여준다는 건 마치 현전의 형이상학이 갖는 환상 같다는 것이죠. 디페랑스는 단지 글자체만의 차이가 아니라 철자상의 변이를 동반하는 것인데, 차이(고딕체)는 그 아주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면서 '부정직한' 차연에 대한 도덕적(!) 우위성을 강변합니다. 저는 그런 태도가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충분한 역주를 통해서 '차연'의 (번역어로서의) 부족함을 지적하신 후에, 그럼에도 '차연'이라고 옮기시면 됩니다. 한글전용이 파괴되는 건 아니라고 하시는데, 한글과 한자는 서로 다른 표기체계입니다. 데리다가 e 대신에 a를 쓴다고 할 때, 그는 다른 표기체계를 가져온 게 아니라(예컨대 한자를 가져온 게 아니라) 체계 내의 다른 철자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요는, 음성으로는 드러나지도 않는 작은 차이가 갖는 전복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한자어 '차이'는 그런 전복성을 보여주기엔, 너무 폼이 크고 요란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balmas 2004-02-2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한번 더 논평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님 덕분에 이 문제를 좀더 세심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런데 답변이 좀 길어질 것 같고 마침 글을 하나 써야 할 게 있어서, 오늘은 그냥 인사로 대신합니다. 1-2일 뒤에 <마이 페이퍼>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한림대 철학과 교수인 장춘익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재기가 넘치면서도 매우 신랄한 분류법인데, 이걸 읽으면서 나는 어디에 속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철학자 유형>

 

산까치형 - 여기저기 찍어 보는데, 끝까지 먹는 게 없다. 이 놈 때문에 멀쩡하게 남는 주제가 없다.

암벽등반가형 - 어렵지 않으면 하지도 않는다. 부상은 곧 명예다.

두더지형 - 이 놈이 뭐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놈이 뭐 내놓을지 모른다고 기다리다가 다들 지친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또 꿈틀거린다.

미식가형 - 제 딴에는 핵심만 골라 공부하고 말하는데, 영양실조(지식실조)에 걸린다.

(오만한) 광산가형 - 저 혼자 금 캐고 남들은 다 석탄 캐고 있단다.

(착한)연탄집주인형 - 달동네 사람도 연탄 써야 한다고 나르듯이, 힘들고 돈 안 되는 작업(예를 들어 안 팔리는 책 번역하기) 만 골라서 한다.

해외특파원형 - 딴 나라에서는 뭘 하는지 열심히 전한다. 독자수준이 낮을 때는 남의 것을 슬그머니 자기의 창작으로 둔갑시켜서 내놓기도 한다.

목욕탕주인형 - 제 속은 안 보여주지만, 딴 놈들 껍데기 속을 다 안다.

때밀이형 - 열심히 논평해서 남의 잘못 고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안다. 너무 빡빡 밀었다가 항의도 자주 받는다.

영웅적 순교자형 - 철학해서 저 빼놓고 세상을 다 구하겠다고 한다.

소심한 순교자형 - 한 번 틀린 것을 가지고 평생을 후회한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필을 선언한다.
 
마를린 먼로형 - 수준은 낮은데, 이상하게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는다.

타이거 우즈형 - 그에게는 굿샷과 배드샷만 있다.

 

* 이 유형은 사실 아래 글에 딸린 일종의 부록입니다.

 

<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인문학자의 바람직한 태도라는 것이 있을까? 좀 황당하고 위험하기조차 한 질문이다. 이런 물음은 자칫 인문학을 지식체계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로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지식체계라면, 그것이 정확히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그 지식을 얻는 데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인문학적 지식이 소위 정상과학과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측면이, 일급의 인문학자들의 경우를 빼놓고는, 인문학에 (그리고 인문학자들에게도) 득이 되기보다는 (자주 치명적인) 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을 인문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인문학이 인문과학이 못되어서 너무나도 아쉽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좋은 인문학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내가 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윤리로서의 인문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의 발전에 보탬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내가 최근에 생각하게 된 것은 지도를 그리는 자세이다.

지도를 그리려면 전체를 효과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의 고안부터, 특정지역과 대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까지, 여러 가지 종류의 노력이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 노력은 정말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전체를 개관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특정지역에 대해 세밀한 지도를 그리는 사람도 필요하다. 지도를 그리는 방법은, 또 어느 정도로, 어떤 면에 치중한 세밀한 지도를 그릴지는 필요와 역량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도는 실제지형에 바탕하고 또 실제지형을 추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식의 다름이 지식의 지식적인 성격을 위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도 그리기에서는 지식의 우열문제보다 지식의 결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야말로 - 내가 실제로 그려보지 않았지만 - 다른 사람들의 작업이 자신에게 불가결한 도움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인문학에서 모험적 광산업자의 태도가 가장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금을 캐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셔보고 다니는데, 어디 하나 정교하게 작업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 혹시, 혹은 좀더, 금이 많이 나올 것 같은 곳이 보이면 즉각 옮겨버린다. 그 바람에 환경만 오염되고, 후속자의 작업도 빛을 잃는다. 또 혹시 무언인가를 발견하면, 자기는 금을 캐고 있는데 남들은 석탄이나 캐고 있다고 비웃으며 남의 작업의지마저 꺾는다.

나는 인문학에서 모험적 광산업자의 태도가 그저 개인의 기질만이 아니라 인문학의 성격<과> 환경에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과학성의 부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 연구비든, 학자의 명예든, 대중성이든 간에 - 소위 히트를 쳐야 하는 부담, 그리고 일반인의 인문학에 대한 기대가 결합하여, 광산업자의 태도를 갖도록 유인하고 또 종종 성공으로 이끈다. 과학성 검증이 잘 안 되니, 또 인문학에 대한 일반의 기대가 정확한 지식보다는 어떤 암시 같은 것이기에, 주제의 선점이 곧 주제의 소유자 내지 그 주제를 다루는 학자로 만들어 준다. 게다가 이제 인문학자도 연구비를 위해서든 지식엔터테이너로서의 성공을 위해서든, 자신을 부각시켜야 하겠으니, 광산업자적 태도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성공의 확률은 높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지식의 탐사에 나선 사람의 실수로 용서받으면 된다. 최악의 경우조차 별로 나쁘지 않다. 무엇 무엇을 밝힌 것이 아니라 무엇 무엇을 <다루었다는 것>을 공공연한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의 실정이니 말이다.


(후기: 내가 그린 지도?: 나는 어렸을 때 이불에다 지도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주로 술집지도만을 그렸지.. 또 뭘 그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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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발표 예정인 논문의 축약본입니다.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이 글에 관해 지적할 사항이 있으신 분은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기원인 개념

 

1. 자기원인 개념의 수용

자기원인(causa sui) 개념은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 또는 코나투스(conatus) 개념 등과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이는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원인 개념을 스피노자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자기원인 개념은 형용모순이거나 또는 적어도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신비적이고 불가해한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는 것이다(니체 『선악을 넘어서』,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 헤겔의 『회의주의와 철학의 관계』).
  이 글에서 우리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자기원인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이다. 이 개념에 대한 통상적인 수용방식들은 이 개념이 보여 주는 외양적인 형용모순적 성격에만 치중함으로써 이 개념이 스피노자 철학, 특히 『윤리학』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와 기능을 간과해 왔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의미와 기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이 개념이 『윤리학』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꼼꼼한 문헌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먼저 자기원인 개념의 정의 및 이 개념의 활용방식이 매우 특이하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이성의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윤리학』 이전의 저작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 및 데카르트의 『『성찰』의 반론에 대한 답변들』에서 이 개념의 의미를 검토할 생각인데, 이러한 검토는 이러한 특이성이 사실은 자기원인 개념의 비신학적 용법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은 초월성에 대한 비판과 내재적 관계론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설정된 개념이며, 이는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들 및 인과론, 그리고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함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2. 자기원인 개념에 대한 텍스트 분석

1) 자기원인 정의의 독특성

자기원인 개념은 『윤리학』 1부 [신에 대하여De Deo]의 첫번째 정의로 제시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 특히 헤겔은 이 개념이 절대자, 또는 신을 표현해 주고 있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윤리학』의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는 주목할 만한 문법적,의미론적 비규정성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나는 자기원인을, [1]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으로, 또는 [2]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밖에는 인식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Per causam sui, intelligo id, cujus essentia involvit existentiam, sive id, cujus natura non potest concipi, nisi existens.” 문법적인 차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우리가 “것”으로 번역한 “id”라는 중성지시대명사다. 이는 완전히 비규정적인 표현으로서, 단어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자 또는 실체만이 아니라, 양태, 곧 사람이나 기타 사물 중 그 어떤 것이든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스피노자가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으로 신 또는 절대자를 표현하려고 했다면, 왜 그는 곧바로 “나는 자기원인을,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신으로, 또는 ~인 신으로 파악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자기원인 정의와 관련하여 첫번째로 제기되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규정성은 우리가 자기원인 정의의 내용을 살펴볼 경우 또다른 측면을 드러낸다. 문제는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제시된 내용을 자기원인 개념의 정의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자기원인 정의에 나오는 두 가지 규정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정의에 고유하게 부여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데카르트가 『성찰』이나 『『성찰』 반론들에 대한 답변들』에서 신존재증명 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규정들이기 때문이다(AT VII, 65-68). 따라서 이처럼 다른 맥락에서 제시된 규정들을 첫번째 정의로 제시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경우 스피노자 정의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2) [신에 대하여]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이례적인 용법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은 1부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도 단 6차례, 곧 정의 1(G II 45), 정리 7의 증명(G II 49), 정리 12의 증명(G II 55), 정리 24의 증명(G II 67), 정리 25의 주석(G II 68), 정리 34의 증명(G II 77)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은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독특한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자기원인 개념은 네 번의 증명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정리 7의 증명이다. 정리 7은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Ad naturam substantiae pertinet existere”이며, 그 증명은 “[A] 실체는 다른 사물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앞의 정리의 따름정리에 따라). [B] 따라서 이는 자기원인일 것이다. [C] 곧 (정의 1에 따라)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 또는 그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Substantia non potest produci ab alio(per Coroll. Prop. praeced.); erit itaque causa sui, id est(per Defin. 1), ipsius essentia involvit necessario existentiam, sive ad ejus naturam pertinet existere”이다. 이 정리의 증명의 특징은 제대로 된 증명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실체는 다른 사물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고 말한 뒤에 곧바로 “따라서 이는 자기원인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의 1에서 표현된 자기원인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당한 증명이라면 오히려 A에서 어떻게 C라는 내용이 논리적으로 따라나오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마지막에 B, 곧 “따라서 이는 자기원인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얼마든지 증명의 형식에 맞는 증명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둘째, 자기원인 개념이 보여주는 또다른 변칙적 성격은 이 개념이 신존재증명에서는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곧 『윤리학』에서 신의 실존에 관한 네 가지 증명이 제시되고 있는 정리 11의 증명과정에서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데카르트에서 이 개념의 용법이나 『윤리학』 이전의 저작에서 이 개념의 용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변칙, 이례성이다.

3) 『윤리학』 이전 저작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

『윤리학』 이전의 저작에서 자기원인이라는 표현은 여러번 사용되고 있다. 『지성개선론』에서는 단 한 차례(92절) 사용되고 있고(G II 34)), 『윤리학』이 저술되기 이전의 서신교환에서도 한 차례 사용되고 있지만(G IV 11), 네덜란드어 번역본만 남아있는 『소론』에서는 라틴어의 “causa sui”에 해당하는 “oorzaak van zich”라는 표현은 8번 등장한다.
  이중 주목할 만한 용법은 첫째, 우리가 위에서 자기원인에 대한 통상적인 관점이라고 부른 것, 곧 니체가 조롱하고, 헤겔이 사변화한 자기자신에 대한 자기의 시간적 선행성이라는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소론』 2부 17장 5절의 용법이다.
  둘째, 좀더 주목할 만한 것은 자기원인 개념이 선험적 신증명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소론』에서 자기원인에 관해 비교적 명시적인 규정을 제시하고 있는 두 가지 용례(1부 1장 10절(G I 18); 1부 7장 12절(G I 47))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이 두 용례는 모두 후험적 신증명에 대한 선험적 신증명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용례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선험적 증명은 후험적 증명보다 우월한데, 이는 선험적 증명은 자기원인으로부터 증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런데 역으로 스피노자는 후험적 증명의 열등성은 외적 원인으로부터 진행한다는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원인 개념의 중요성은 이것이 바로 내적 원인이라는 데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데카르트와 자기원인 개념의 발명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의 특이성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용법을 고찰해 보는 게 필요하다. 자기원인 개념을 처음으로 실정적으로 사용한 데카르트는 『성찰』에 대한 [논박]에 답변하면서 이 개념을 [첫번째 답변]과 [두번째 답변], [네번째 답변] 세 차례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의 용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데카르트는 [답변들]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시간적 선행성이라는 관점을 배제하고 원인 개념을 생산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어떤 것이 자기자신의 작용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 원인의 개념은 엄밀히 말하면 단지 원인이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하는 한에서만 적용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앞서지 않는다.”(AT VII, 108―강조는 인용자) 이는 왜 스피노자가 『소론』 2부 17장 5절에서 시간적 선행성이라는 의미에서 자기원인 개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2) 데카르트는 일종의 충족이유율의 최초형태를 제기하면서, 작용인으로서의 자기원인 개념은 최초 원인의 가능성을 근거짓기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최초 원인은 자기원인의 형태로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무한소급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하지만 나는 아주 거대하고 소진될 수 없는 권능을 소유하고 있어서, 최초로 실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의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고, 지금도 자신의 보존을 위해 어떤 도움도 요구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원인인 어떤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AT VII, 108-109)고 주장한다.
  두번째 측면은 데카르트 철학 체계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이는 이 정식이 인과율을 피조물의 영역에 한정시키지 않고, 신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따라서 존재의 가장 보편적인 원리로 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답변들]의 데카르트를, 아퀴나스와 구분시켜 줄 뿐만 아니라, 인과성의 범위를 관념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성찰』의 데카르트와도 구분시켜 주는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더 나아가 데카르트는 이처럼 최초로 자기원인 개념을 실정적으로 사용함으로써 1630년 이래 자신의 형이상학의 숨은 원리로 작용해 온 영원진리 창조론과 갈등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영원진리 창조론의 형이상학적 핵심이 일체의 가지성의 원리를 넘어서는 신의 파악 불가능한 초월성에 있다면, [답변들]의 자기원인 개념은 이처럼 인과율 또는 근거율을 신 자신을 포함하는 보편적 원리로 격상시킴으로써, 신 자신조차도 이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아르노에 대한 [네번째 답변]에는 자기원인이라는 개념이 유비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여전히 인과율의 적용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4.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의 독특성: 이례성의 해명

이러한 우회는 우리가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용법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1) 초월성 비판과 내재적 관계론의 확립

『윤리학』에서 자기원인 개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학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곧 스피노자는 이 개념을 신존재증명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자기원인 개념이 실체(정의 3)나 신에 대한 정의(정의 6)가 제시되기에 앞서 정의 1에 제시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신과 결부되어 제시되지도 않는다(정리 12의 증명에서 비로소 자기원인과 신은 결부된다. 그러나 이는 신의 실존이 증명된 이후의 일이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자기원인 개념을 반박한 철학자 또는 신학자들 모두는 단지 이 개념이 자기모순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 개념이 신의 초월성이나 신의 무한성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를 반박했으며, 데카르트는 선험적 신존재증명의 가능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원인 개념을 실정적인 개념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존재증명의 두번째 길에서 자기원인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자기자신의 작용인이라는 것은 발견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자기자신보다 선행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용인들을 따라 무한하게 소급해 가야 한다면, 최초 원인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신이라 부르는 최초의 작용인이 실존한다는 점을 긍정해야 한다.”(신학대전』 1부 두번째 문제 제 3절 Iª q. 2 a. 3 co.)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이 세계, 이 세계에서 발견되는 작용인의 질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를 근거짓는, 또는 적어도 이를 시작하는 최초의 원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게 아퀴나스의 논변이다. 이는 아퀴나스의 논변은 다른 신존재증명과 마찬가지로 근거의 정초라는 맥락, 곧 논리적 요청이라는 맥락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독창성이 존재한다면, 그는 『성찰』에서는 관념들의 인과성에 따라, 그리고 ⌈답변⌋에서는 보편적인 인과성에 따라 선험적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은 정의, 그것도 첫번째 정의로 제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체의 증명의 맥락, 논리적 요청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스피노자에서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의미한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이다. 따라서 자기원인 개념의 사용에서 스피노자에게 독창성이 있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이 개념을 신존재증명이라는 맥락에서, 어떤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논거라는 기능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는 우연과 무질서만이 남지 않는가? 스피노자 철학에서 거듭 강조되는 필연적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이에 관해 스피노자는 주목할 만한 일관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스피노자의 근거율의 독특성에 있다. 스피노자는 정리 11의 신의 실존 증명에서 주목할 만한 근거율 테제를 제시한다. “모든 사물에 대해, 그것이 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실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원인 또는 이유(causa seu ratio)가 존재해야 한다.”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자연과 은총의 원리] 7절)라는 라이프니츠에 고유한 근거율과 비교해 볼 때, 이 테제의 고유성은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는 게 아니라, 비실존, 곧 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무는 가능한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 논리적 근거, 인과적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있음이라는 사태, 곧 자기원인의 사태 이후에 적용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왜 정리 11에서 자기원인이 증명의 근거로 사용되지 않고, 대신 이것에서 파생된 근거율 테제가 사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왜 스피노자에게 필연적 질서가 존재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자기원인과 근거율이 제시된 이후에는 내재적 관계만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가 내재성을 줄곧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소론』의 [대화]에서부터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스피노자의 어휘법이다. 곧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causa immanens)과 타동적 원인(causa transiens)을 계속 구분하면서, 신 또는 실체는 내재적 원인(자신의 결과를 자신 안에서 생산하는 원인)이지 타동적 원인(자기 바깥에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스피노자는 『소론』 이후에야 비로소 실체-우유라는 전통적인 용어법 대신 실체-양태 또는 실체-변용이라는 용어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내재성에 대한 강조를 말해 준다. 곧 우유가 “실체 없이 존립할 수 있는 것”인데 반해, 양태는 항상 “실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체와 양태 또는 변용이라는 용어법은 자기원인에 동반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eo senus)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불려야 한다”(1부 정리 25 주석)는 스피노자의 주장 역시 내재적 관계의 형성과 결부되어 있다.  

2) 인간학적 함의

  자기원인 개념의 인간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신은 자기원인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불려야” 하며, 따라서 신이 모든 사물에 내재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필연의 법칙에 구속시킴으로써 이 사물들의 자유 또는 능동성의 여지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 사물들의 능동성의 근거가 된다. 정의상 강제하거나 구속한다는 것은 외재적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따라서 일체의 외재성을 허용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강제하거나 제약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한한 사물의 “자기”, 곧 능동성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유한한 사물은 본질과 실존이 불일치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절대적” 자기, 절대적으로 능동적인 존재자일 수는 없으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덕분에 원초적인 능동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말하자면 3인칭의 관점이다. 곧 1인칭의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의 세계는 의미의 상실을 가져 온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목적론적 관점은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인간은 “왕국 속의 왕국”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가상의 투사에서 생긴다. 궁극적 목적에 따른 자연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스피노자는 1인칭의 가상으로 폄훼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가상 속에서, 스피노자가 상상이라고 부르는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이를 3인칭의 관점에서 폄훼하는 것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스스로 이를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실천철학적 과제는 자기원인에서 비롯하는 이 두 가지 인간학적 함의들을 어떻게 결합시키는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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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데리다의 최근 작업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유령들󰡕이다. 이는 이 책에서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인 분석을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치철학의 주요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령들󰡕 (및 최근의 작업 전체)은 데리다 자신의 초기 문제설정의 ‘내재적 정정’과 마르크스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 상속’이라는 이중적 관점에서 읽혀져야 한다. 

  󰡔유령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데리다의 철학적․정치적 문제설정은 유령론(hantologie)으로 집약된다. 차이가 차이와 음성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론(ontologie)과 음성상으로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유령론’은 차이의 문제설정의 핵심을 계승하면서 이를 정치의 해체를 위한 요소들로 재가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유령론은―차이가 현전의 철학을 해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생생한 현재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revenant) 유령들(spectres/revenants)을 몰아내고자 하는 존재론(“존재론은 하나의 푸닥거리이다.”(󰡔유령들󰡕, 283))을 해체시킨다. 이때 유령은 살아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계속 출몰하고 되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소멸해 있는 것도 아니며, (면갑 속에 가려져 있어) 그 동일성을 확인할 수 없는 “어떤 한 타자로서의 어떤 /하나”(quelqu'un comme quelqu' un d'autre)(󰡔유령들󰡕, 18)1)로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탁월하게 차이적인 것이다. 하지만 유령론은 시간내기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차이의 문제설정과 상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즉 차이의 문제설정에서는 시간내기의 작용이 생생한 현재의 시간화, 특히 목적론적 시간화를 해체하기 위해서 예정된 목적을 지연시키고 일탈시키는 작용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비해, 유령론에서 시간내기는 근본적으로 (의사-)종말론적인 도래(à-venir)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시간성, 또는 “메시아주의없는 메시아적인 것”(󰡔유령들󰡕, 110)의 구조는 󰡔유령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데리다 정치철학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며2), 마르크스주의의 유산들에 대한 “선별적 상속”의 기본 원리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좀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령들󰡕에서 종말론적 시간성에 대한 고찰은 “The time is out of joint.”라는 햄릿의 탄식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문맥대로라면 “시대가 제멋대로이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문장을 데리다는 시간에 대한 하이데거의 고찰 및 벤야민/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관련시켜 복합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때 핵심적인 것은 ‘out of joint’가 이중적 함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out of joint/aus den Fugen/hors de ses gonds'는 한편으로는 원래 진행되어야 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연결고리, 이음매(joint/Fuge/gond)가 빠져 있는 것, 따라서 불의(adika)를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정된 시간적 진행이 현전의 질서이면서 동시에―정의와는 구별되는―법적 질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out of joint’는 ‘현재’들의 선형적 연속에서 은폐되고 억압되어 있는 시간내기의 “증여 사건”이 드러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현재, 현재, 미래-현재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화에서 의사초월론적 근거를 구성하는 것은 현전하는 것들을 이어주는 이음매로서의 joint인데, ‘증여의 사건’은 선형적 시간화에서는 현재들의 연속 속에서 억압되어 있다가 ‘out of joint’의 순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out of joint’는 폭력과 일탈을 의미할 수 있는 반면, 그 자체 독점된 폭력에 다름아닌 법적 질서의 연속이 해체되고 전위될 수 있는 기회, 즉 (벤야민적 의미에서) “메시아적 정의”가 도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out of joint’가 한편에서는 불의와 폭력, 다른 한편에서는 정의라는 두 가지 가능성의 동시적 개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들의 선별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불의와 폭력의 위험 속에서 ‘out of joint’를 정의가 도래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는가? 데리다는 이 문제가 전적으로 우리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타자와의 관계가 곧 정의이다.”(󰡔유령들󰡕, 44)라는 레비나스의 함축적인 테제에서 유래한다. 레비나스적인 정의관에 따를 때 타자와의 관계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타자와 동등하게 맺는 관계가 아니라, 타자와의 “무한한 비대칭성”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탈-정립(ex-position)”하면서 타자에게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또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은 또한 자기의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데리다에게서 이러한 타자에 대한 책임, 환대(hospitalité)는 일반적인 윤리적 요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적 쟁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례로 데리다는 󰡔곶󰡕에서 유럽적 동일성의 상속과 비유럽적 이타성에 대한 개방의 문제를 상호연관된 문제로 취급하고 있으며3), 󰡔유령들󰡕이 간행된 직후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서는 환대의 대상 중 하나를 유럽의 이민노동자로 명시하고 있다4).  따라서 유령론의 종말론적 시간성 역시 종교적인 것으로의 복귀나 칸트적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 도래하고 도래해야 하는 “[해방의] 약속의 형식적 구조 ... 해방의 약속의 특정한 경험”(󰡔유령들󰡕, 110)을 의미하며, 타자의 도래라는 정의의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환대할 것을 요구하는 실천적 명령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자의 도래는 차이의 조건 자체이다. “이타성 없이는 차이도 없고, 독자성(singularité) 없이는 이타성도 없으며, 지금-여기 없이는 독자성도 없다.”(󰡔유령들󰡕, 60)

  이러한 타자에 대한 책임, 자기동일성의 해체는 마르크스를 포함한 근대적인 해방의 정치를 ‘선별적으로’ 상속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데리다의 유령론이 푸코나 들뢰즈 등과 같은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과 더불어 탈해방적(post-emancipatory) 정치 또는 탈혁명적 정치의 문제설정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적 해방의 정치가 한편에서는 자율적 주체의 구성, 다른 한편에서는 지배구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했던 것에 비해, 유령론의 탈해방적 정치는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역설, 즉 해방운동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과 지배로 전도되는 역설의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적인 해방의 정치는 현전의 존재론과 순수한 동일성의 인간학에 기초하여 유령과 현실, 적과 우리, 선과 악, 폭력과 해방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그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5). 그리고 해방의 정치는 지배구조의 전화(이것이 곧 혁명인데)를 통해 이러한 지배와 폭력이 소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리다에게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폭력과 저항의 관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경계, 비대칭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인 악, “원초적 폭력”(󰡔그라마톨로지󰡕, 226)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고유성, 자기보존이 불가피하며, 이에 따라 또한 타자의 배제와 억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데리다가 볼 때 유령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마르크스의 시도는 오히려 (혁명적 주체의) 순수한 동일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의 유한성, 자신의 폭력성을 혁명의 목적론, 즉 지양의 목적론을 통해 삭제하려는 원초적 폭력의 간지(奸智)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현재’처럼 폭력적인 세계화의 질서 속에서 해방의 정치와 마르크스의 유산을 상속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말하지만, 또한 이러한 상속은 항상 비판적 선별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유령들은 항상 “하나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가 아니”(le plus d'un)6)(󰡔유령들󰡕, 6)며, 우리가 그 유산을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존재한다면 또한 마르크스가 몰아내려고 했던 마르크스 자신의 유령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령들󰡕에서 이러한 선별적 상속의 과제는 데리다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교통(communication), 또는 차이들 사이의 개방적 관계설정의 과제로 집약된다. 이는 분명 쉬운 과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제는 한편으로 구조적인 착취와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대항폭력의 조직이 불가피하다는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해방운동의 역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폭력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폭력이어야 한다는 요구 모두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신분과 직위, 호칭 없이, 은밀하지는 않지만 거의 공적인 것도 아니며, 계약을 맺지 않고 “이음매 없이”, 조정(調整) 없이, 당과 조국, 민족 공동체, ... 공동시민성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 소속 없이 이루어지는 비동시대적인 연대”(󰡔유령들󰡕, 151)는 폭력적인 세계화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수단 중 하나이며, 새로운 해방의 정치의 불가결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점이다.


4


  데리다는 이전에 그가 구체코슬로바키아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직면했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어떻게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이들의 요구를, 이러한 철학소들은 형이상학적인 또는 로고스중심적인 전통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중재시킬 수 있을 것인가?”7) 이러한 데리다의 고민은 ‘우리’에게 데리다라는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즉 데리다라는 유령을 어떻게 ‘공정하게 대우’(do justice to)할 것인가에 대해 중요한 시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숙고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의 데리다 연구는 지난 10여년 동안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데리다의 다양한 면모를 다루고 있는 글들을 묶은 󰡔데리다󰡕와 그외의 몇몇 저작들은 앞으로 보다 진전된 연구를 위해 필수적인 준거점의 구실을 해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실 데리다는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의 허깨비, 유령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상당한 명망을 지닌 역자들이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이 20세기 후반에 인류의 중요한 지적 성과를 산출해 낸 철학자를, 기본적인 논리나 조리 있는 문장력도 갖추지 못한 얼치기 철학자로 탈바꿈시키는 한에서, 그리고 한 권의 책, 한 편의 글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몇몇 상투어들을 읊조리면서 데리다라는 허깨비를 푸닥거리해 내려고 하는 한에서, 또한 우리라는 ‘동일성’에 집착하여 그 동일성이 지니는 위험과 폭력을 일깨워주는 철학자를 우리와 무관한 타자, 심지어 우리에게 해로운 타자로 몰아내려고 하는 한에서, 데리다는 허깨비 이상일 수 없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계속해서 되돌아오기 마련인 이 유령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시달릴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데리다라는 유령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길은 내가 보기에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타자를 위해 던졌던 질문을 이번에는 우리가 우리의 타자인 그에게 돌려주는 길이다. 어떻게 타자의 폭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우리의 과제를,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책임 아래 절대적으로 우리를 개방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요구와 중재시킬 것인가?  


1) 하나(일자, un)는 그것이 어떤 하나로 정립되고 인식되면 ‘같은 것’(동일자, même)이 된다. 이러한 하나의 자기자신으로의 원초적인 복귀운동, 따라서 ‘같은 것’의 생성운동이 곧 자기현전 또는 전유/고유화의 운동이며 이를 통해 어떤 개체, 하나의 자기동일성이 구성된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유령이, 자기로 복귀한 하나로서의 같은 것이 아니라 타자, 즉 자기동일성에서 이미 차이화된 어떤 것/하나라고 말함으로써 유령이 탁월한 차이적 사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사실 여기에는 󰡔유령들󰡕 1장에서 나타나듯이 레비나스의 정의 개념과 후기 하이데거의 존재사건(Ereignis)에 대한 사유,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유령들󰡕을 󰡔법의 힘󰡕과 󰡔위조화폐󰡕, 󰡔아포리아󰡕(trans. Thomas Dutoit Aporias: Dying-Awaiting (One Another at) the 'Limits of Truth'(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와 관련하여 읽어야 하지만,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3) “유럽에 대한 기억의 소환에 대답해야 할 의무 ... 이 의무는 ... 유럽이 아닌 것, 한 번도 유럽이었던 적이 없는 것, 앞으로도 절대 유럽이 되지 않을 것을 향해 유럽을 개방하라고 명령한다. 동일한 의무는 또한 외국인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이타성을 인식하고 수용하기 위해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명령한다. 이러한 환대의 두 가지 개념은 오늘날 유럽적인 동시에 민족적인 우리의 의식을 분열시키고 있다.”(󰡔곶󰡕, 64(강조는 데리다))

4) “The Deconstruction of Actuality”, Radical Philosophy 68, 1994 Autumn 참조.

5)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차이의 유한하고 무한한 과정들로서 관념성의 근원성과 그에 고유한 효력, 그것의 자율화와 자동화(...)를 존중할 것을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유령적 모사물에 대한 그의 비판 또는 축귀(逐鬼, exorcisme)를 하나의 존재론 ... 현실적 실재이자 객관성으로서 현전의 존재론 ... 위에 근거 지으려고 한다”(󰡔유령들󰡕, 299). 즉 “그들[슈티르너와 마르크스]은 살아있는 육체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살아있는 육체를 재현하는 모든 것, 살아있는 육체는 아니지만 계속해서 그것에 되돌아오는 것, 즉 보철물이나 대리물, 반복, 차이에 맞서 끝없는 전쟁을 치른다. 살아있는 자아는 자기 면역적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유령들󰡕, 245-246).

6) le plus d'un은 국역본에서처럼 “하나 이상”이라고 번역되어서는 안되며 “하나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 아님”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불어에서 plus는 영어의 more처럼 “~이상”의 의미를 가지면서 또한 ne ... plus 용법에서는 “더 이상 ... 아님”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현재의 맥락에서 “하나 이상”은 유령들의 복수성을 의미하며, “하나 아님”은 주 13)에서 말했던 것처럼 유령들이 자기동일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는 󰡔기억들: 폴 드만을 위하여󰡕에서 le plus d'un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하나의 언어 이상이자 더 이상 하나의 언어 아님”(plus d'une langue―both more than a language and no more of a language), Mémoires: for Paul de M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p. 15(강조는 데리다).

7) P. Lacoue-Labarthe, et al., Le retrait du politique (Paris: Galilée, 1983), pp. 203-204; Simon Critchley & Peter Dews eds., Deconstructive Subjectivitie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6), p. 2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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