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항 선배의 말을 마지막으로 이제 현재의 정국과 관련된 글을 퍼오거나 쓰는 것은 그만하고, <서재> 본래의 기능에 맞는 일에 일로매진(?)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어떤 이가 나에게 왜 여의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냉소하느냐 말했다. 좌파가 ‘관념적 냉소로 가득찬 인간’ 취급을 받는 세상이긴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들을 냉소하겠는가. 그들은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에 사느라 좀더 나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래서 욕심도 적을 뿐이다. 그들은 고작 축구팀이 세계 4강에 드는 일로 조국에 대한 첫 자부심을 느끼고, 개혁이라는 식인체제의 새로운 대변자가 처한 곤경을 한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코 그들을 냉소할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울고 뒤론 웃는 놈들’을 냉소하기에도 벅차다.)


언젠가 이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우파 과잉의(좌파 결핍의) 사회임을 두고 한 말이다. 우파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거나 옹호하는 세력이며, 좌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단지 혁명적인 방법만 말하는 게 아니라) 세력을 말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보여주듯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혹은 좌파의 견제가 없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체제’일 뿐이다. 흔히 자본주의를 “인간의 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라고 말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탐욕만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식인 체제’였다. 분단과 6.25전쟁 체험을 빌미로 하는 강력한 반공 파시즘은 대한민국에서 좌파의 씨를 말렸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노동자와 농민과 민중을 내키는대로 마음껏 잡아먹었다. 물론 그런 식인 체제에 민중들이 당하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수많은 죽음과 희생을 무릅쓴 끈질기고 빛나는 저항 운동이 있었다. 그 운동은 단지 ‘제도 민주주의’를 얻는 것을 넘어 반공 파시즘이라는 ‘식인 체제’를 부수는 데 목표를 두었다.(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원 가운데 대부분은 변혁을 좆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제도 민주주의’가 마련되자 그 운동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성원들 가운데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동의 종결’을 선언하는 일이 생겼다. 물론 그 선언은 거짓말이었다. 반공 파시즘이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별 문제없이 작동되었다. 그러나 그 선언은 그 운동의 보다 평범한 성원들이 갖는 자괴감(현실 사회주의 몰락의 충격에서 비롯한, 제 지난 운동의 관념적 급진성에 대한 자괴감. 처음에 순수했으나 점차 비뚤어진 좌파 혐오로 발전한다.)과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대세가 되었다.

그런 거대한 기만을 비판하는 좌파는 갈수록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좌파를 공공연하게 ‘철 지난 이야기나 하는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 무렵, ‘운동의 종결’을 선언한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의 후반작업’이자 ‘수구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을 내세우는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과 강준만 씨를 비롯한 안티조선운동,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이런저런 네티즌 운동들이 그것이다.

좌파가 대중들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운동은 ‘패러다임이 변화한 시대의 좌파운동’으로 포장되어, ‘수구기득권 세력’의 악취에 넌더리가 난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협잡과 공갈로 행세해 온 정치인들은 처음으로 위기를 맞게 되고, 위세가 영원할 것 같던 파시스트 신문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서 존경받지 못하게 되었다. 개혁운동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 ‘개혁 정권’을 만들어냈다.

개혁이 만들어낸 사회적 변화들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그런 변화가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이란 한국 사회를 실제로 유지하는 대대수의 사람들, 노동자 민중들이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개혁이 가져다주었다는 변화가 지니는 의미를 판단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기준이다. 그렇게 볼 때 개혁이 가져다 준 변화는 그 휘황한 겉모습에 비해 믿을 수없이 초라한 것이다. 그 변화가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왜 한국사회의 실제 성원들은 왜 전보다 조금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왜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기만 하는가.

그게 다 개혁의 지도부가 늘 말하듯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그렇다면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것도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에 순진한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는 것도 역시 ‘수구 기득권 세력’ 때문인가. 우리는 그런 현실들이 전적으로 ‘개혁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혁이 한국 사회의 실제 성원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은 이유는 개혁의 지도부가 미숙해서거나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 아니라, ‘개혁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좌파 운동’이 아니다. 개혁은 그 식인 체제가 내뿜는 악취를 제거하는 ‘우파 운동’일 뿐이다. 개혁으로 위기를 맞은 건 ‘식인 체제’가 아니라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들’(제도 정당과 언론, NGO 따위)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이미 효용성을 다한, 극심한 악취로 더 이상 대중들과 젊은 세대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을 서둘러 교체하는 중이다. 그들은 ‘개혁적 외양을 가진 대변자’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실체이자 진실이다. 오늘 많은 선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분노하는 ‘탄핵 사태’ 역시 그런 교체의 와중에서 나온 사건이다. 교체 위기에 빠진 기존의 대중적 대변자들은 어차피 죽을 거면 싸우다 죽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그들이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식인체제의 '대중적 대변자’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좀더 분명하게 했다. 그들은 노무현 씨를 탄핵함으로써, 수구기득권 세력과 싸운다는 강력한 명분을 가지면서도 졸렬한 실무 능력으로 지리멸렬하던 노무현 씨와 열우당을 단숨에 ‘민주주의의 순교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열우당 의원들이 ‘앞으론 울지만 뒤론 웃고 있다’는, 아니 기뻐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순교자’는 머지않아 강력한 대중적 호응을 업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이다.

하여튼 개혁 우파는 좀더 빨리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의 '대중적 대변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대변자는 교체된 대변자의 전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고, 적어도 중간 계급 이상의 한국인들은 좀더 ‘상식적인 시민 사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한국인들, 한국사회의 실제성원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갈수록 고단해지고 강퍅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을 뿐인 농민과 노동자들이 30년 전 어느 청년 노동자가 남긴 것과 똑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배를 가르고 몸을 불사르는 일도 계속될 것이며, 순진한 청년들이 더러운 제국주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서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수구기득권 세력의 저항’이라는 설명은 ‘한국적 현실’이라는 좀더 전통적인 설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식인 체제는 오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속속 여의도로 모여드는 선한 사람들을 보며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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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의 래디칼리즘은 언제나 '감동적'이지만,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가장 기만적이며, 가장 효율적인 식인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는 단언에서 볼 수 있듯이, 대책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일은 이미 어떤 초월적 지평을 점유하고 있기에, 그것을 구현한 사회(단 한 사람도 불행해서는 안되는 사회?!), 그리고 역사는 지구상에 존재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의 칼럼은 (산문적이 아니라) 시적인데, 사실 '식인 체제'라는 은유(?)부터가 그런 식이지요. 저는 '시'보다는 '산문'을 신뢰합니다...

balmas 2004-03-1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 시적인 <마음>에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그에게 '산문'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저에게는, 그는, 그냥 그대로도 좋습니다.
 

* 아는 분들도 있을 텐데,  최원 씨의 제안들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 탄핵정국에서 민중진영이 해야 할 일]-3/12

지금 현재의 상황은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닙니다. 계속 말하지만, 헌재에서의 결정은 노무현 말마따나 "법률적 결정"일 뿐입니다. 법률이 정치를 대신해 주지도 않고, 권력 찬탈을 막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반주변부의 남한과 같이 정치적 불안정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곤 하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헌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총선에서 민주, 한나라가 참패를 한다고 해도, 이 사태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은 쿠데타가 아니지만, 쿠데타까지도 '가능성'으로 고려하기 시작해야 할 위기가 도래했습니다(양진영 사이의 대타협이 성사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속에서 대중정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질식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친노 반노의 극단적인 대립이 야만적인 사태로도 흘러갈 수 있고, 따라서 진보세력의 일차적인 과제는 대중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중을 보호하는 것은 단 하나의 방식, 즉 대중들의 힘의 결집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대중들이 갖기 쉬운 친노반노의 허구적 대립구도의 환상을 깨고 새로운 대립구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주아 대 민중의 대립구도를 대중적으로 각인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중들이 스스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는 사태, 혹은 국가적 비국가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서, 현재의 국면은 단순히 한나라, 민주로 대변되는 부도덕한 집단의 일시적인 미친짓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가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미친짓은 제정신이 들면 사그러들일이지만, 이것은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단순히 사그러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모순들이 하나도 해결이 안되는데, 그냥 이게 눈감고 며칠 있다보면 없어지고 이제껏 지내던 대로 세상도 제자리로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한 관념적 사고일 뿐이고 진정 주관적인 희망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보세력은 이 사태의 본질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파탄에 기인하며, 따라서 한나라, 민주당, 우리당, 노무현 등 부르주아지들 전체의 연대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민중적 대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적 대안을 중심으로 대중을 결집해 나가야 합니다.

민노당 총선에서 눈 띠어 주세요! 지금 한가롭게 극장표 몇장 팔았나 세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대중들이 불난 극장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지금 극장표 계산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장석준 동지도 '탄핵취소, 노동자 농민의 평화 국회'라는 식으로 타협하던데, 그러면 안됩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부르주아 정치 자체가 붕괴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국회에 노동자 농민이라는 말만 달면은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들의 직접 행동들을 조직해 나가야 합니다. 부르주아 전체를 비판하는 싸움들을 조직해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민중민주주의의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총선에 들어가서 어떻게 반노-친노의 허구적인 대립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대중의 공분을 반노-친노 대립 구도 안에 그냥 가두어버리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총선 보이콧! 신자유주의 하의 부르주아, 의회정치 파탄 선언! 민중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

이것이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탄핵정국 요점정리 노트]-3/12


1. 현 탄핵정국 사태는 단순히 한나라-민주당의 당리당략 때문에 일어난 사태가 아니다. 노무현도 못지않게 올인을 하고, 도박을 해왔다. 유시민이 오늘 국회의사당에서 절규를 했단다. "이건 정치가 아냐!" 정확히! 그렇다. 의회 안에 더이상의 정치는 없어진지 오래다. 민중의 의사들을 관철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정치도 없다.

2.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주도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족국가의 위기, 민족적 공동체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민주권이 더 이상 의회를 통해서 관철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운신의 폭이 너무나 제약되어 있고, 사실상 개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너무나 제약되어 있기 때문에, 당들 사이의 차별성도 내용적 차별성이 아니라, 이미지 조작,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기(그것이 지역주의이던, 아니면 80년대의 망령이든, 후자는 386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에만 의존하고 민중들의 권리와 삶 등의 문제는 정치에서 유리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어떤 진중권스런 사람은 노통의 개인적인 도박사 기질과 한나라민주당의 당리당략 등이 이 사태를 몰고왔다고 본다. 그러나 노통이라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가 내용 없는 인민주의적 동원체계에만 기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형해화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거기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이 노무현이라서 노무현이 뜬 거지, 반대로 노무현의 도박기질이라는 것이 포퓰리즘적 동원정치를 지배적인 정치적 모델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론자와 관념론자는 정확히 여기서 갈라진다. 이게 차라리 철학의 문제라면 철학의 문제다. 영웅은 (진중권도 전에 얘기 했듯이) 시대를 잘못타고 나면 동키호테일 뿐이다. 영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시대고 그 시대의 모순이고 그 정세적 조건들이다.

4. 신자유주의하에서 인민주권이 배제되기 시작하고 의회가 단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하고 관철시키는 장소로 전락되고, 사실상의 계급대립 계급대의의 어떤 간접적인 기능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남은 건 뭔가? 깜짝쇼를 벌려서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시키는 것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나라 민주당의 탄핵이 노무현의 재신임 깜짝쇼하고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가? 노무현 재신임 깜짝쇼도 국민에 대한 위협이었고, 니네들이 더 이상 까불면,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가겠다는 것 아니었나? 동시에 사조직인 노사모, 국민의 힘 등을 다시 조직해서 총선을 장악하겠다는 잔꾀아니었나?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것인가? 다른 점은 없다. 둘다 실체적인 내용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온갖 국가 장치들을 전부 사적 정쟁의 도구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물질적 필연성이 생기고 지네도 어쩔 수 없이 그럴수밖에 없어진거다.

5. 그렇다면, 민중진영은 현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을 선전선동하고, 이번 16대 국회 뿐 아니라, 국회를 통한 정치 일반으로서의 의회정치가 파탄났음을 선언하면서, 민중발의권 등의 제도화를 요구하고 인민주권을 다시 보다 직접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경로들을 요구하고, 새로운 민중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선전해 나가야 한다.

6. 총선에 참여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의회정치의 파탄을 선언할 수 있나?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번 총선만큼은 보이콧을 하고, 의회정치의 파탄을 선언하고, 민중발의권을 비롯한 직접적인 인민주권 관철경로의 제도화 없는 총선은 그나물에 그밥으로 다시 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나가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7. 국회의원 전원소환은 노무현의 동시 소환 없이는 노무현에 손들어주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것이 의도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효과는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동시 소환 없는 국회의원 전원소환에 명확하게 반대한다.

8. 그러나 노무현의 동시소환도 여전히 문제를 갖는다. 이는 국회 그 자체, 의회정치 파탄 그 자체를 이슈로 삼는것이 아니라, 현 국회만을 이슈로 삼는 것이고 기껏해야 노무현까지를 이슈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발의권의 명확한 제도화가 없는 국회의원전원소환 및 노무현 동시 소환도 나는 반대한다.

9. 이 두가지, 즉 노무현 소환과 민중발의권의 중심적인 이슈화를 조건으로 해서만, 나는 국회의원 전원소환투쟁이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10.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친노 대 반노의 그 대립구도의 허구성과 반민중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 점이 전제가 되어야만 모든 정치적 행동이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의 기본적인 방향, 그리고 부탁]-3/15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은 의회의 파괴가 아니라 의회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 나는 그 권리들을 의회정치에 대한 '보충물'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보충물'이란 영어로 말하면, complement가 아니라 supplement이다. complement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지칭한다면, 오히려 supplement는 그 양자가 모순되고 갈등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발의권은 '일차적으로는' 인민의 특정 수 이상의 결의로 발의하여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등에 의해 의사를 관철시킴으로써 새로운 입법을 할 수도 있고, 국회가 이미 결정한 것을 폐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국민투표나 주민투표 등에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다른 한 편 소환권은 국회가 특정한 입법을 하려고 할 경우, 국회의원들에 대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을 이룰 것이다. 이는 의회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 반대로 '단순히'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탈구성하고 혁신할 수 있다. 당연히 민중발의와 소환은 의회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갖겠지만,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며, 사회운동들이 자신의 주장들을 관철시키고 국가장치의 개조를 통한 국가의 민주화를 강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경로를 이루며, 동시에 사회운동 자신의 역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제를 이룬다.

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사고하는 민중발의권, 소환권은 사회적 합의를 제도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계급 코퍼러티즘(혹은 사회적 협조주의, 사회적 합의주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제도화시킴으로써 계급적이거나 비계급적인 적대들에 입각한 집단성들을 국가장치들을 통해 충돌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반정치(anti-politics)를 비판하고, 이에 따른 대중들의 정치적 사기저하를 극복하며, 대항-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대항-권력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외부라기 보다는 갈등적 내부이며 권력과의 투쟁의 영속화로서의 정치의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채택된 표현이다. 즉 그것은 권력-외부에서 사회운동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며, 계급투쟁과 기타 다른 투쟁들을 국가적 제도들, 국가장치들에 관통시키는 방식으로 싸움을 조직해 내는 것이다.

아직, 국외의 사례들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럽의 몇몇 국가들에서 민중발의권과 소환권은 제도화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한 점검을 해나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전공분야와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지적인 협조들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분야에 대한 다른 분들의 많은 조사와 의견들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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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5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선 보이콧! 신자유주의 하의 부르주아, 의회정치 파탄 선언! 민중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건설!" 이런 '관념적인' 구호들을 다시 보게 되는군요. 가뜩이나 수세에 몰려 있는 한나라나 민주당이 가장 반길 만한 구호가 아닙니까?(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친북좌파들의 책동!)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걸 신물나게 보아왔건만. 문제는 (무책임한) 구호의 선명성을 좌파의 특권처럼 내세우면서 (억압받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태도입니다. 도나 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총선을 보이콧하자는 주장은 총선일만 되면 유유히 해외여행을 나가는 태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aporia 2004-03-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초면에, 그것도 진태원 선생님 개인 게시판에서, 이런 식으로 첫 대화를 하기 시작하는 게 좀 안타깝군요... 제가 어리기 때문에 위의 저 구호들이 과거의 그 '관념적인' 구호들과 얼마나 닮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떤 반복에도 차이가 새겨져 있는 것처럼, 위의 구호가 과거의 단순반복은 아닐 뿐더러, 한-민당이나 반길 구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poria 2004-03-1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위의 구호에서는 '부르주아, 의회정치' 일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고, 그 이유는 부족하지만 앞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중)민주주의'의 경우에도, 이를 이른바 '일반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국한시키자거나, 87년으로 끝이 난 민주/반민주 전선을 지양하는 개혁(또는 진보)/보수 전선(이는 우파도 좌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를 구축해야 한다는 식의 90년대 사고를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라지는 매개자' 정도로 폄하하지 말고 '갈등적 보편성'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토론 하에 '재영유'된 것입니다(물론 '민중민주주의'가 동어반복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제안자도 그냥 '진정한 민주주의' 정도면 된다고 입장을 선회했지요).

aporia 2004-03-15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총선 보이콧'의 경우도, '총선 일반'을 문제삼은 게 아니라 정확히 이번 총선에 국한시켜 얘기한 것입니다. 혹자가 지금을 '제2의 6월항쟁'이라고 말하는데, 지금은 6월항쟁에도 미달하는 것이, 왜냐하면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제도개혁(이를 위해서 최소한 '헌법'을 건드려야 하는) 논의는 전혀 거론되지 않은 채, 기존 세력들 중 어느 한 분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 정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손을 들어주려 하는 분파가 '신자유주의적 개혁분파'(지난 IMF 이후 대중들을 가장 괴롭혔던)이기 때문에, 이는 87년 당시의 '자유bg'의 손을 들어주는 것보다 더 퇴행적인 면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87년 6월항쟁을 반복하는 수준을 위해서라도, 총선에 갇히지 말고 발본적인 제도개혁 및 (그것이 좋은 안을 내는 문제는 아닐 것이기에) 그를 위한 대중적 역량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이는 각자가 '전술적으로' 이견을 가질 수 있는 문제겠지요.

aporia 2004-03-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길어졌네요. 제가 말하려 했던 것은 이 입장이 맞다 틀리다 가 아니라 최소한 이것이 과거의 '관념적' 구호(저는 거기에도 진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를 단순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현 사태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개입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대우받을 권리 정도는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입장의 선명함'만을 주장하는 좌파의 고질병... 확실히 위의 구호는 지금 정세에서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제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좌익소아병이라기보다 '막대구부리기'로 얘기해 볼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무슨 '혁명' 하자는 얘기 한 마디도 없고 기껏해야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속/확장하기 위한 조건을 사고하고 확보하자는 얘기를 한 것 뿐인데도 이 정도의 (제가 느끼기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걸 볼 때, 오늘날 민주화가 됐다지만 실제로는 지젝 등이 말하는 '좌표를 문제삼는' 사고가 얼마나 불리한 역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효과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글쎄요, 지젝이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물론 그가 자유주의자들과의 전술적 연대를 말하지만, 그가 연대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중도좌파적) 자유주의자들과 남한의 신자유주의자들을 '자유주의'라는 이름만으로 동급에 놓을 수는 없을 테고, 더구나 위의 요구가 (민주주의라는) '대타자와의 과잉-동일화'라는 노선 위에 있는만큼, 위의 입장을 최소한 '유물론적'인 것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을까요?

aporia 2004-03-1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져서 두 분께 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비단 이 문제만 아니더라도, 항상 선배님들께 '너희들은 왜 그리 변한 게 없냐?'란 얘기를 들어서, 우리도 사고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운동 다 망한 후에 그래도 한번 뭣좀 해보겠다고 끙끙대는 후배들에게, 비판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라, 좀만 더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주십사 하는 'acting out'으로 너그럽게 봐 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04-03-15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려놓고 한참 뒤에 와보니 두 가지 의견들이 붙어 있군요. 어정쩡한 입장인 것 같아서(부끄럽긴 하지만, 또 사실이 그렇긴 합니다) 뭣하긴 하지만, 로쟈님이나 아포리아님 이야기 둘 다 경청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데리다가 [에코그라피]에서 좌파와 극우파의 <객관적 동맹>에 관해 말했던 게 생각나는데, 로쟈님은 이 점을 우려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아포리아님의 논평은 현재 좌파들이 이론적, 실천적으로 직면해 있는 어려움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하고, 최원 씨의 글을 이러한 난점을 돌파하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도 공감이 갑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논평을 달아준 분들 덕분에 조금 눈이 트이는 것 같아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별로 도움이 못되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발리바르의 글들을 비롯한 몇 개의 글을 번역해서 실을 생각인데, 그게 얼마간 면피의 구실을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 오늘자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어제 낮에 기자가 전화를 해서 [교수신문]에 실린 기사에 관해 몇 가지 묻길래 2-3분 정도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기사를 봤더니 대략 논점은 전달한 것 같은데, 초점을 "일급 필자들"의 오역에 맞추고 있더군요. [교수신문] 기사(아래 [동문선 출판사에 관한 두 개의 기사]에 실려 있습니다)에서 지적한 것처럼 제 논점은 오역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체계를 고치고 개선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있는데, 이 기사만 읽으면 제가 마치 "일급 필자들"의 오역을 고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좀 동의하기 어려운 발상입니다.

이름 있는 필자나 역자들일수록 번역에 좀더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건 당연한 개인적 윤리이겠지요. 그리고 <특히> 김성도 교수의 번역본들은 알아볼 수 없는 오역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그가 그런 오역으로 <번역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국 지식계의 대표적인 코메디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욱이 저는 제가 오역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 책들에 관해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누구누구가 오역을 했고, 어느어느 출판사에서 오역본을 냈더라는 게 아니지요.  오역은 누구나 범하기 쉬운 일이고, 또 국내 출판사들 중 오역에서 자유로운 출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민음사 같은 국내의 대표적인(물론 <규모>면에서) 단행본 출판사에서도 여러권의 오역본들을 냈다가 그 중 일부(특히 들뢰즈의 저작)는 재번역 중에 있고, 문학과 지성사 같은  전통있는 인문학 전문 출판사의 책들 중에도 심한 오역을 범하고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역을 범했을 경우, 책임을 지고 재번역을 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 오역인 줄 알면서도 그대로 묵혀 두거나 개역하는 시늉만 한 채 값만 올려받는 출판사들에 비해서는 정직한 태도지요. 하지만 이처럼 개역본을 낸다 해도 독자들 개개인이 이미 입은 피해는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제가 아는 한 오역본 구입한 독자에게는 개역본을 무료로 준다고 말한 출판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오역의 가능성은 항상 상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저런 오역본의 개정본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역본이 출간되기 전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거지요. 다시 말해 한 개인에게는 오역이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지만, 적절한 출판 체계를 갖춘다면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지는 오역을 걸러내고 바로잡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좁은 의미의 출판방식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지식체계를 어떻게 개조하고 지적 역량을 어떻게 축적해나갈 것인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를 읽는 사람들이 이런 저의 생각을 고작 "일급 필자들"의 오역을 겨냥하는 고발로 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시각] 다시 불거진 '오역' 논란
"1급 필자들 글도 誤譯투성이"…'벼락치기 번역' 언제까지?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오역(誤譯)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진태원(서울대 강사)씨가 최근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예스24’ 독자 서평에 자크 데리다의 ‘불량배들’(휴머니스트)이 “너무하다 싶을 만큼의 오역으로 점철돼 있다”고 비판하고 이를 ‘교수신문’이 보도하자 번역자 이경신(박사 과정)씨가 반박문을 올렸다. “데리다 특유의 문체를 살리려는 시도였으므로 ‘모든 페이지가 오역’이라는 말은 잘못됐다”고 반박했지만 “번역 기간이 짧은 데 따른 부주의에서 (일부 오역이) 기인했다”고 했다.

진씨는 이 책에서 오역의 예를 10개나 들었다. 예를 들어 79페이지 “저는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종종 악용되는 결합의 특징을 아랍적, 그리고 차례로 이슬람적이라고 말합니다”는 “아랍-이슬람적이라는 식으로 자주 악용되곤 하는 붙임표를 쓰지 않기 위해 저는 차례차례 아랍 그리고 이슬람이라고 말합니다”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씨의 초점은 ‘불량배들’의 오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역)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역)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이진경 등 역) 등 국내 인문학계의 ‘일급 필자’들이 번역한 책에 대해서도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등 오역이 많다”며 “난해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서를 서둘러 번역해서 내놓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번역이 있는 한 오역은 피할 수 없는 멍에일까. 한 유명 출판사가 펴낸 미국여행기는 ‘주유소’란 뜻으로 쓰인 ‘스테이션(station)’을 ‘역(驛)’이라고 썼고, 이름난 관광지인 ‘사우전드 아일랜드’를 ‘1000개의 섬’이라고 직역하기도 했다. 영미문학연구회는 최근 기존 영미 고전 번역본들이 오역 투성이란 연구를 내놨고, 이름난 작가의 ‘삼국지’ 번역에도 오역이 많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오역(誤譯)’의 근본 원인으로는 번역자에게 시간을 너무 짧게 주는 출판계의 고질적인 관행이 지적된다. 또 번역이 학술 업적으로 인정되지 않아 연구자들에게 ‘과외의 일’쯤으로 치부되는 것도 문제다. 김지원 한국번역학회장(세종대 교수)은 “번역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다른 전문가나 외국인과 토론해야 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드러내길 싫어한다”고 말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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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3-1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회성 기사의 한계라고 봐야겠지요. '일회성', 그리고 '기사'(=저널리즘). 중요한 문제제기가 일회적으로 휘발되어선 곤란하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제도적인 개선방향을 시급하게 모색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계속 '발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공부하는/공부한다는 사람들에겐 있는 것이겠구요(물론 '조선일보'에 대한 '발언'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balmas 2004-03-1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전화를 받자마자 퍼뜩 <내가 이 전화를 받아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것도 일종의 기고에 해당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석고대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반성해야겠군요.
 

한국일보

[출판] 인문출판 20년 동문선 신성대 사장

[속보, 생활/문화, 연예] 2004년 02월 02일 (월) 18:39
‘신학이란 무엇인가’(데이비드 F 포드 지음, 강혜원 등 옮김), ‘코란이란 무엇인가’(마이클 쿡 지음, 이강훈 옮김), ‘푸코와 문학’(시몬 듀링지음, 오경심 등 옮김)….관련 전공자가 아니면 들춰보지도 않을 만큼 난해한 내용, 표지엔 저자 사진 한 장 달랑 넣은 단순한 디자인으로 일관된 동문선의 ‘문예신서’ ‘현대신서’시리즈는 사흘이 멀다 하고 한두 권씩 나오고 있지만 판매와 거리가 멀다. 문예신서는 1988년, 현대신서는 98년부터 선보이고 있다.신성대(50) 동문선 사장은 20년간 이처럼 ‘안 팔리는 책’을 만들어온 괴짜 출판인이다. 84년 ‘뭣 모르고’ 출판사를 인수한 후 지금까지 500종가까이 책을 내면서 그에게 남은 건 수 억원의 빚과 팔리지 않은 수십 만권의 재고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표정은 밝기만 하다.

‘자선사업을 하는 것인가’란 물음에도 “이윤 따지려면 진작에 배추장사로 나섰다. 웬만한 책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에둘러 말했다. 그래도 책을 엄선해서 낼 수 있지 않느냐고 하자 ‘태산은티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으로 응답한다. “팔릴 만한 책을골라서 내는 것은 자기 집에 정원을 꾸미는 것에 불과해요. 보기 좋은 정원수를 가꾸기보다는 자연을 흉내내고 싶다고 할까요.”그의 뚝심과 옹고집에 원고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판매 걱정을 해준다고 한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 중에 99%가 초판만 찍었고, 그것도 팔리지않아 대부분이 창고에 쌓여 있으니 그럴 만하다. 일산에 있는 60평짜리 농가 창고 3개 동에 보관된 책들은 관리비만 한 달에 270만원, 1년이면 3,000만원이 들어간다.그러나 ‘소도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는다’고 했던가. 그 동안 많은 책을내다보니 베스트셀러도 있긴 있었다. 2000년 처음 출간된 ‘느리게 산다는것의 의미’(1~3)는 30만부가 팔려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려운 책들을 다루다 보니 답답해서 머리 식히려고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이끝나고도 6개월이나 묵혀두었고 초판도 2,000부만 찍었죠.”여기에 소설가 이외수씨의 작품 ‘말 더듬이의 겨울수첩’을 비롯해 10여권이 그의 빈 주머니를 그나마 채워주고 있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들과 함께 상경한 신 사장은 신림동 판잣집에서 새벽엔 신문배달, 밤엔 지게를 지고, 주말에는 소와 돼지를 키우는 등 해보지 않은일이 없을 만큼 고생도 실컷 했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해양대 부설 해양전문학교를 졸업, 7년간 외항선 기관사로 세계를 누비며 돈을모아 출판사를 냈다.

서울 마장동 전셋집에서 살다가 최근에야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했다는 그는 가난이 지긋지긋하기도 할 법한데 여유만만하다. 쪼들리는 생활속에서도 중학교 때부터 배운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1년에 2,000만~3,000만원씩 지원금도 내고 있다.IMF 외환위기 후에는 회사 사정이 더 어려워졌지만 출판에 대한 열정은더욱 뜨겁다. 지난 해에는 86권을 냈는데 올해에는 100권, 앞으로 하루에한 권씩 내는 게 목표이며 조만간 각종 사전 편찬에도 뛰어들 예정이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작업에 방해를 받을까 봐출판사 간판도 없애버렸다.“‘동문선’ 책들은 기초 인문도서인 1차 저작물입니다. 이런 분야의 저작이 쌓여야 인문학이 살고 그래야 출판이 발전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는대부분 이런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3차 저작물입니다. 언론도 대중들의눈높이에만 맞추지 말고,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서울 종로구 관훈동 사무실 한 켠에 적힌 ‘꾸준함을 이기는 경쟁자는 없다’는 글귀가 동문선의 꿋꿋한 자세와 신념을 함축하고있다.

/글 사진 최진환기자 choi@hk.co.kr

 

교수신문

외국서적 번역 이대로 좋은가...짧은 시간에 졸속 양산
프랑스 철학서들 오역논란 빚어

2004년 02월 26일   강성민 기자 이메일 보내기

최근 철학계에 오역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 논란은 진태원 서울대 강사(철학)가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데리다의 '불량배들'(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刊)에 대한 독자서평을 올리면서 불거졌다. 진 씨는 '불량배들'이 "거의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으며, 개념을 잘못 옮긴 부분도 많다"라며 예를 들어가며 지적했다.

또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옮김, 민음사 刊),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옮김, 한뜻 刊)도 오역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진 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진경·권순모 씨가 옮긴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 刊)도 "매 쪽마다 심각한 오역이 하나씩 나온다"라고 지적하는 등 "학술적 인용을 위한 전공도서로는 문제가 많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철학서적의 번역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프랑스 철학일수록 오역논란이 그치질 않는다. '믿음에 대하여'(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를 비롯한 지젝의 책들, '진보의 미래'(도미니크 르쿠르 지음, 김영선 옮김) 등이 구설수를 타고 있다. 특히 '진보의 미래'는 읽을 수도 없을 지경이라는 후문이다. 그러다보니 프랑스 철학서들을 많이 펴내는 동문선, 인간사랑 출판사는 '오역 공장'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다.


동문선의 신성대 대표는 "우리 책이 오역이 좀 있죠. 고쳐야죠"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줄일 지는 대책이 서지 않고 있다. 동문선은 거의 4일마다 책을 한권씩 내는데 "실용서 개발로 경영손실을 충당하면서 학술번역은 좀더 신중을 기하면 어떤가"라는 질문에 "전공자의 번역기피가 심각한 상황에서 마냥 역자를 기다릴 순 없다. 올해는 3일에 1권씩 내야 먹고살 것"이라고 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좋은 책이 죽는다는 것도 문제다. 안 팔리다보니 금방 절판돼, 불명예를 안고 죽어가는 책들은 보는 識者들의 한숨을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오역을 막기 위한 공동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프랑스학회, 프랑스학회, 한국불어불문학회 등 관련 학회에서는 필요성만 인정할 뿐 구체적 고민은 없는 상태다. 최근 '영미문학연구회'가 학진 지원연구로 광복 이후 2003년 7월까지 발간된 번역본 573종을 평가한 사례는 꽤 고무적이다.


학술지에서 '서평'란이 없어지는 것도 번역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학진의 학술지 평가나 대학의 연구업적 평가에서 서평에 점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글쓰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학술진흥재단 측은 "학술지평가의 평가 항목 중 편집위원 연구실적 부분에서 서평을 연구실적으로 일정비율을 인정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제 지식인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진태원 씨는 번역에 대한 토론영역을 섹트별로 나눠서 차례차례 접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식인을 활용하는 출판시스템의 문제, 오역과 스타일의 구분, 분석철학·정치철학·형이상학 등 분과별 참조점의 차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하는 문제, 많은 인적자원을 거느린 대학출판부의 역할강화 문제 등을 논해서 번역에 대한 지적 公準을 마련하는 일 말이다.


이번 '불량배들'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런 비평문화의 부재 위에서 제기됐다. 이 책의 번역자인 이경신 씨는 "모든 페이지가 오역이라는 비판은 잘못됐으며, 짧은 기간과 薄利라는 어려운 여건에서 번역에 나선 역자에게 치명타를 안겨주는 발언"이라며 자기성찰적인 비판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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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4-03-0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 책들은 기초 인문도서인 1차 저작물입니다. 이런 분야의 저작이 쌓여야 인문학이 살고 그래야 출판이 발전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는대부분 이런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3차 저작물입니다. 언론도 대중들의눈높이에만 맞추지 말고,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아연실색입니다!!
이만하면 필화사건(?)으로 불붙은 건가요? ^^; 당연히 중요하게 지적되었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혹 어려움 겪고 있다면 힘내세요. ^^

balmas 2004-03-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좀더 문제가 널리 알려지고 검토되고 해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동문선 출판사라는 한 출판사의 문제는 아니지만, 동문선 출판사는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 사회 지식-출판 시스템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증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관해 조만간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점들을 간단히 적어서 올려놓겠습니다. 한번 같이 토론해 보지요.
 

로쟈님께

로쟈님께서 이번에 달아주신 논평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마이 페이퍼>로 답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좀 길게 써볼 생각이었는데, 밀려 있는 다른 일들 때문에 제대로 짬을 내서 글을 쓰기가 어려워서 간단히 몇자 적겠습니다. 로쟈님의 논평은 네 가지 논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différance의 번역에서 <차이>나 <차> 또는 <差移>라는 번역이 내세우는 ‘원칙적인 충실성’의 주장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갖는 환상과 유사한 환상에 빠져 있다. 더욱이 이는 <차연>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강변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있다.
    2) <差移>라는 번역은 한글 전용 원칙을 파괴할 우려가 있으며, 더 나아가 différence와 différance의 차이가 e와 a 사이의 차이인 데 비해, <차이>와 <差移>의 차이는 문자 체계 자체의 차이인 만큼, différence와 différance의 차이를 옮기는 데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3) 디페랑스는 단지 글자체만의 차이가 아니라 철자상의 변이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나 차 같은 고딕체 번역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차연>이 더 낫다.
    4) <차연>이 번역어로서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이 때문에 <차연> 대신 차이나 차, 또는 差移라는 번역어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충분한 역주를 통해서 <차연>의 (번역어로서의) 부족함을 지적한 다음, 그대로 <차연>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이 논점들 중에는 제가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이 점들에 관해 논의할 수는 없을 듯해서,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쟈님 지적을 보고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제가 문자 체계의 차이라는 문제를 좀 가볍게 여겼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차이>와 <差移>의 차이는 différence와 différance의 차이와는 좀 성격이 다르고, 또 différance라는 신조어의 용법이 함축하고 있는 위반의 함의를 인정한다 해도, 이것이 상이한 문자 체계에 속하는 <差移>라는 역어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차연>이라는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적절한 해결책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différance에 관한 역주에서 지적한 내용이 이미 <차연>이라는 역어의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고 또 아직 생각이 확정된 것도 아니지만―로쟈님의 지적을 일부 수용해서 <差移>라는 역어 대신 <차이(差移)>라는 역어를 사용할까 합니다. 이런 역어를 택한 이유는 제가 보기에는 différance의 번역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음성적인 식별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며, 또 로쟈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e와 a의 차이를 문자 체계의 차이로 확대하는 비약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로쟈님은 차이나 차 또는 差移 같은 역어를 사용하려는 시도가 현전의 형이상학의 태도가 갖고 있는 환상과 유사하고 또 도덕적인 우위를 부당하게 참칭한다는 점에서 부당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런 역어들을 사용하려는 시도들을 현전의 형이상학과 연결시키는 것은, 데리다 철학에 대한 얼마간 부적절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욱이 이는 지난 번에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다소간 실존주의적으로 제시하신 것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역어들을 사용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도덕적 우위를 강변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각각의 경우에 대한 좀더 정확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겠지요. 제가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지금 여기서 뭐라고 답변드릴 처지가 아닌 듯합니다. 유물론자라면 의도나 의식에 근거해서 (도덕적, 이론적) 결백을 주장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졸지에 이런 도덕적 비난까지 당하게 돼서 상당히 당혹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좀더 시간을 갖고 검토를 해본 뒤에 다시 논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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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2-2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적 비난까지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차이(한자)'로 하시겠다는 데 대해서는 저도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차연'을 배제한다면,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번역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역능'이란 역어가 제거된 것인데('역능'은 '권능'이란 단어만큼 저에겐 역겨운 단어입니다), 그만한 역량을 데리다 번역에서도 계속 발휘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balmas 2004-03-0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혹스럽긴 합니다만, 어쨌든 문제를 좀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인식은 바깥으로부터의 충격, 불편함에서 시작한다는(맞나? 예전에 [차이와 반복]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좀 가물가물하군요) 들뢰즈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리고 아직 이 문제는 계속 남아있으니까 좀더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사실은 [차이]라는 글 및 이 글이 수록된 [철학의 여백]이 번역되어야 좀더 논의가 구체적이고 생산적일 텐데, 언제 이 책이 번역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