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현대 비평과 이론』, 1997년 가을/겨울호에 그 때까지 출간된 데리다 저작 및 국내의 데리다 연구에 대한 주제서평의 형식으로 발표된 글입니다. 좀 개략적인데다가,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점들도 있긴 하지만, 국내의 데리다 수용 현황을 점검하고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문제설정을 고찰해보는 데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 생각돼서 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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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비평과 이론󰡕, 1997년 가을․겨울호



차이에서 유령론으로: 국내의 데리다 수용에 대한 하나의 반성을 위하여1)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입장들󰡕 (박성창 옮김, 솔).

󰡔해체󰡕 (김보현 옮김, 문예출판사).

󰡔다른 곶󰡕 (김다은, 이지혜 옮김, 동문선).

󰡔마르크스의 유령들󰡕 (양운덕 옮김, 한뜻).

󰡔데리다 읽기󰡕 (이성원 엮음, 문학과 지성사).


진 태 원

(서울대 박사과정․철학)



                                            1


  데리다의 논문이 하나둘씩 번역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잡는다면 이제 국내에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지도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여러 연구자들의 소개와 연구 덕분에 10년 전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데리다의 사상이 이제 교양대중들에게까지 비교적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라마톨로지󰡕나 󰡔입장들󰡕 같은 초기의 저작들에서부터 󰡔해체󰡕에 실려 있는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포함하여 󰡔다른 곶󰡕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최근의 저작들에 이르기까지 다섯 권의 국역본이 출간되었다2).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이러한 노력과 성과는 분명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내의 데리다 연구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데리다의 국내 소개와 연구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우선 번역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 문제는 현재 국역되어 있는 다섯 권의 저작 중 󰡔입장들󰡕과 󰡔곶󰡕을 제외한 나머지 세 권의 경우 역자들의 기본적인 이론적, 어학적 소양이 의심스러울 만큼 번역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번역은 외래사상을 소개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어떤 한 저서에 대한 번역은 기계적인 1 : 1 산출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부가적인 문화적, 교육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데리다 저작의 국역본 중 절반 이상이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국내의 데리다 연구의 수준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지표로 간주될 수 있다.

  번역의 문제 이외에도 국내의 데리다 연구는 그의 저작들 중 비교적 ‘초기’3)의 것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 시기 동안 데리다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과 요소들이 형성된 것은 분명하며, 따라서 데리다 수용의 초기 단계에 놓여 있는 국내에서 이 시기의 작업들이 집중적인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연구양상이 데리다 또는 다른 탈근대적 사상가들의 국내 소개의 조건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또한 더 나아가서는 최근 데리다 작업의 일정한 변모를 평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의 데리다 연구의 굴절과 공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데리다 연구에서 국내 소개의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데리다나 다른 탈근대적 사상가들이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위기와 붕괴라는 정세를 배경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리다를 포함한 탈근대적 사상의 국내도입은 충분한 이론적 검증과 정당화를 거쳐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외재적인 역사적 사건의 효과에 편승한 측면이 많으며, 이 때문에 오히려 탈근대적 문제설정(problématique)의 관여성 자체가 반감되어 한때의 유행이나 이데올로기적 가면으로 치부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 문제는 최근 데리다의 작업과 관련해 볼 때 더욱 커다란 맹점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80년대 이후, 특히 90년대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유령들󰡕), 정치4), 법5), 유럽공동체(󰡔곶󰡕) 등과 같이 그가 이전까지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계속 출간함으로써 ‘윤리적 전회’ 또는 ‘정치적 전회’를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비해, 국내의 데리다 연구자들은 도입조건의 제약에 의해 이에 대해 적합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그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최근 작업들은 그의 사상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해체의 문제설정이 지니고 있는 비판적, 정치적 함의들을 보다 구체화해 줌으로써 그의 사상이 ‘우리의 문제’(이것을 근대화라고 하든, 해방이라고 하든 간에)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좀더 분명하게 평가해 볼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10여년 간의 데리다 소개와 연구에 대한 반성을 겸하여 최근 데리다의 작업이 이전의 작업과 어떤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여주는지 검토해 보는 것은 앞으로 보다 진전된 연구를 위해 다소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위해서는 우선 초기 데리다 작업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데리다 자신은 자신의 작업을 어떤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에 따라 명명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데리다 작업의 기본적인 성격과 방향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유용한 출발점은 「차이」라는 강연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리다의 차이는 의미론적으로 볼 때 차이화하고 지연하는 이중작용을 의미한다. 즉 차이는 서로 구분되는 것들, 다른 것들을 구분되고 다르게 만드는, 간격, 거리, 공간을 만들어내는 공간내기(espacement)와 함께 예정되고 계산된 목적, 결과를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는 시간내기(temporisation)의 결합작용이다. 따라서 (차이의 체계 이전에 존재하는 실증적인 항은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차이의 작용은 여전히 어떤 “중심을 갖는 체계”라는 관념, 그러므로 어떤 초월론적 기의의 (자기)현전이라는 관념을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간에) 전제하는 데 비해, 데리다의 차이는 현재를 중심으로 이전에 현재했던 과거-현재와 앞으로 현재하게 될 미래-현재의 계기적 연속과정인 선형적 시간화(temporalisation)가 자신의 은폐되고 억압된 근거로서 시간내기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언어학적․인류학적 구조주의(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철학까지도 포함되는 모든 현전(現前, Anwesenheit/présence)의 철학, 로고스중심주의의 철학을 해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동일성이나 그러한 동일성을 갖는 존재자는 단지 다른 존재자와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차이일 뿐 아니라, 또한 시간적 타자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흔적이며, 궁극적 기원 자체는 비기원으로서의 원초적 흔적(archi-trace)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리다는 차이가 “기원적 차이”(󰡔해체󰡕, 130(번역은 수정))6)라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의 작업과 관련하여 이러한 차이의 문제설정이 내포하는 비판적․정치적 함의를 좀더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차이의 문제설정을 이중경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7). 차이의 작용은 이중경제의 관점에서 고찰되면 제한경제와 일반경제 사이의 의사초월론적(quasi-transcendental) 관계로 나타난다8).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라는 용어는 바타이유의 원래 용어법에서는 생산과 축적, 금욕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전통적인 경제체계(제한경제)와 경제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을 소비하는 데 중점을 두는 미개사회의 낭비와 주권적 위신의 경제체계(일반경제)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를 보다 일반화시켜 제한경제를 의미와 현전, 전유/고유화(appropriation)의 체계 일반으로 설정하고, 일반경제를 이러한 제한경제의 은폐되고 배제된 근거, 다시 말해 제한경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제한경제의 내부에서는 억압되고 배제되어 그 자체로 현전할 수 없는 이타성의 관계로 체계화한다9). 그러나 일반경제의 타자들은 이렇게 억압되고 배제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제한경제의 근거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한경제 내부로 다시 복귀하게 되며, 이 때문에 모든 목적론적 희망에도 불구하고 제한경제는 완성될 수 없고 종결될 수 없다. 따라서 일반경제는 제한경제를 (성립)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완결)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제한경제의 의사초월론적 근거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차이는 모든 현전과 로고스의 체계, 형이상학적인 지배의 체계로서의 제한경제와, 그것의 은폐된 전제를 구성하는 일반경제(흔적, 기록, 대리적 보충, 은유 등과 같은 표지로 표현되는)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경제의 문제설정에서 본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의 일반전략”10)은 우선 제한경제의 메카니즘을 해체시키고, 그 안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어 있는 일반경제의 이타성을 복권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전복). 하지만 이것이 제한경제의 완전한 소멸과 일반경제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데리다 자신이 말하듯 일반경제는 “무의미와 죽음, 절대적 손실”의 공간 또는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의 공간이며, 이러한 공간의 완전한 실현은 삶 자체, 존재 자체의 순수한 소멸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전복의 전략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전략이 필요한데, 데리다가 “긍정적 전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전위의 전략은 우리와 적, 선과 악, 법과 폭력 및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를 포함하는 모든 이원적 대립질서 자체에 대한 해체와 전화(轉化, transformation)를 목표로 한다. 이는 데리다가 말하듯 “타자의 이타성이 [어떤 입장(position)으로] 정립된다면(posée), 단지 정립되기만 한다면, ... 이것은 동일자로 귀착”(󰡔입장들󰡕, 129)되어 버리므로, 이러한 역설을 막기 위해서는 타자를 타자로서 동일화하는 메카니즘 자체의 전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의 근본적 목표는 입장의 자기해체, 자기전화를 통해 해방의 퇴락의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의 일반전략은, 적어도 정치적 문제들에서는, 아직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제한경제와 일반경제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인가? 입장의 자기해체, 자기전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또는 도대체 이것이 하나의 정치적 전략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11) 등과 같이 위의 내용으로부터 당연히 따라나올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 데리다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면서 제대로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곤란은 단순히 정치라는 하나의 특수한 주제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전략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초기 데리다 작업의 기본적인 ‘한계’ 또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데리다의 해체의 문제설정은 강한 의미에서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지배체계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야 하며, 또한 정치적 비판이 근본적이기 위해서는 그 형이상학적 토대에 대한 해체와 전위에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적어도 초기의 작업에서는 이 양자가 긴밀한 상호연관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초기작업의 한계 내지는 공백을 넘어서는 것은 데리다 철학 내부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지만, 이는 특히 최근의 정세와 관련하여 보다 긴급한 과제로 제기된다. 80년대 말 이후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근원적 위기에 빠져든 현재 세계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어 어느 때보다 해방의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데리다의 작업들은 그의 초기작업의 공백을 메운다는 의미에서나 해방의 정치의 새로운―즉 탈근대적인―형상들을 모색한다는 의미에서 데리다 사상의 전개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1) 이 글에서는 󰡔입장들󰡕의 국역자인 박성창씨의 제안에 따라(󰡔입장들󰡕 (서울: 솔, 1991), 31쪽, 각주 10) 흔히 사용되어 온 차연 대신 차이를 différance에 대한 역어로 사용하겠다. 

2) 다음부터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들은 본문 중에 다음과 같은 약어로 표기하고, 인용의 경우에는 약어와 쪽수를 괄호 속에 병기하기로 하겠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그라마톨로지󰡕; 󰡔입장들󰡕 (박성창 옮김, 솔)→ 󰡔입장들󰡕; 󰡔해체󰡕 (김보현 옮김, 문예출판사)→ 󰡔해체󰡕; 󰡔다른 곶󰡕 (김다은, 이지혜 옮김, 동문선)→ 󰡔곶󰡕; 󰡔마르크스의 유령들󰡕 (양운덕 옮김, 한뜻)→ 󰡔유령들󰡕; 󰡔데리다 읽기󰡕 (이성원 엮음, 문학과 지성사)→ 󰡔데리다󰡕

3) ‘초기’라는 표현은 데리다 작업의 시대구분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기보다는 주로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즉 󰡔조종󰡕(Glas) 이전까지)의 저작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4) 특히 대표적인 것으로 Politiques de l'amitié (Paris: Galilée, 1994)를 꼽을 수 있다.

5) Force de loi (Paris: Galilée, 1994).

6) 이하 한 두 단어를 제외한 모든 인용문은 필자가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다.

7) 제한경제와 일반경제라는 이중경제의 문제설정은 원래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에게서 유래한다(La part maudite (Paris: Minuit, 1967)). 데리다는 󰡔기록과 차이󰡕에서 지양 없는 헤겔주의라는 관점에서 바타이유의 이중경제론을 재해석한 바 있는데, 최근에는 마르셀 모스 및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증여(don/gift)라는 관점에서 이를 재고찰하고 있다. Derrida, “De l'économie restreinte à l'économie générale: Un hegelianisme sans réserv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Donner le temps (Paris: Galilée, 1991)를 각각 참조.

8) 데리다 자신은 한두 번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은 의사초월론이라는 개념에 대한 체계적 가공은 데리다도 인정하다시피 로돌프 가쉐(Rodolphe Gasché)에 의해 이루어졌다. The Tain of the Mirror: Derrida and the Philosophy of Reflec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참조.

9) 데리다는 「차이」에서 이중경제로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바타이유에 대한 독해에서 예비물 없는 소비와 죽음, 무의미로의 노출 등에 전혀 관계하지 않는 “제한경제”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비예비물을 계산하고(고려하고, tenant compte), 비예비물을 예비하는(tenant en réserve la non-réserve) 일반경제 사이의 엄밀하고―새로운 의미에서 ―“과학적”인 관계설정(mise en rapport)이 어떤 것일 수 있을지 지적해 보려고 했다. 이는 이윤을 획득하는 어떤 차이와 이윤을 얻지 못하는 어떤 차이 사이의 관계이며, 절대적 손실, 죽음에의 투자(mise)와 혼합되는 순수한, 손실 없는 현전의 투자이다. 제한경제와 일반경제 사이의 이러한 관계설정에 의해 헤겔주의라는 특권화된 형태를 띤 철학의 기획 자체가 전위되고 재기입된다”. (󰡔해체󰡕, 145)

10) 데리다에 따르면 해체의 일반전략은 우선 “전복”의 단계, 즉 “어떤 주어진 순간에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것”(󰡔입장들󰡕, 65)을 필요로 한다. 이는 “전복의 단계를 무시하는 것은 대립의 갈등적이고 종속적인 구조를 망각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사실상 이전의 영역을 현상 유지시키고 이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박탈”(󰡔입장들󰡕, 65)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복이 기존의 체계 내에서 대립항들의 전도에 그치게 된다면 계속해서 지배구조 자체를 재생산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해체는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입장들󰡕, 66), 지배구조에 대한 “긍정적 전위(轉位)”(déplacement affirmatif)(󰡔입장들󰡕, 93)를 시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11) 해체의 정치적 의미를 부인하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리차드 로티이다. 그런데 󰡔데리다󰡕에 수록된 「타자성에의 개방」이라는 글에서 유홍림교수는 로티를 따라 “데리다의 노력은 정치적으로는 무용한 시도이며, 개인의 자아 완성에의 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데리다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관점에 국한되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데리다󰡕, 114). 이러한 평가의 문제점은 로티나 유홍림교수 모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이라는 자유주의적 전제가 당위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데리다 역시 이것을 옹호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반면(예를 들어 유교수는 해체가 “자유주의의 정치적 이상을 옹호함에도 불구하고”(󰡔같은 책, 111) 그 실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그 자신이 로티에 반대하여 분명히 진술하고 있듯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을 해체하고 넘어서는 것을 해체의 정치적 목표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로티]가 나의 작업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방식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구분을 분명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 두어야겠다. ... 외관상으로는 보다 문학적이고 자연언어의 현상들에 보다 결부되어 있는 󰡔조종󰡕이나 󰡔우편엽서󰡕 같은 텍스트들은 사적인 것으로의 후퇴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구분에 대한 수행적 문제제기들(problematizations)이다”. Jacques Derrida, “Remarks on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Chantal Mouffe ed., Deconstruction and Pragmatism (New York: Routledge, 1996) pp. 78-79(강조는 데리다). 로티는 미국사람이므로 별문제로 한다면, 데리다의 정치적 작업에 대한 유교수의 평가는 국내의 데리다 연구가 아직 도입조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12) 80년대 이전까지 정치 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데리다가 계속 침묵을 지켜 온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과 개조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1988년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열린 알튀세르 고희기념 학술회의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대담에서 60년대(특히 68년 이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지적 세력관계 및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정치적 문제에서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Politics and Friendship: An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E, A, Kaplan & M. Sprinker eds., The Althusserian Legacy (London: Verso, 1993)/부분국역: 「데리다와의 대담」, 󰡔이론󰡕 1993년 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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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번역은, 이번이 두번째지만, 참 힘겨운 일이다. 마슈레의 번역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법의 힘』 교정을 시작해서 더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번역과 교정은 더 힘든 것 같다. 이미 후배들과 공부를 하면서 몇 차례 검토를 했지만, 여전히 오역들이 발견되고 미심쩍은 구절들이 눈에 띈다. 더욱이 편집자의 교정을 일일이 다시 교정해야 하는 일이 더해져서, 교정은 영 진척이 되지 않고 가슴 속에 울화만 쌓여간다.

국내에 데리다 연구자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데리다와 관련된 유능한 편집자를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데리다 편집자는 엄밀한 의미의 편집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첫번째 독자에 가깝다. 이 때문에 그가 해 놓은 여러 가지 교정 표시들은 내게는 장래의 독자들의 외침으로 들린다. “아, 잘 모르겠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왜 불어 단어는 하나인데, 번역은 이렇게 여러 단어로 표현하지?”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데, 반복되는 단어들은 좀 다른 말로 고치든가 삭제하든가 하면 더 읽기가 좋지 않을까?” “어려운 말 대신 일상어로 고치면 읽기 좋지 않나?” “도대체 결론이 뭐야?” “뭐 글을 이딴 식으로 쓰냐?” 그러다 보면 새롭게 추가하고 보충해야 할 역주들이 늘어가고, 교정은 점점 더 힘들게 지연된다. 여기에 부록으로 함께 엮은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데리다의 [독립선언들]까지 덧붙여져, 이건 말 그대로 différance다. 남들은 20일 정도면 책 한 권 번역한다던데 교정도 못 끝내고 있으니 ...

어쨌든 아직도 『마르크스의 유령들』 번역을 마쳐야 하고, 그 외 몇 권이 될지도 모르는 다른 데리다 책들을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제발 이것만은 피해갈 수 있기를!!)이, 지금으로서는 너무 끔찍하기만 하다. 데리다의 『기록과 차이』 및 『철학의 가장자리들』, 『우편엽서』 등을 영역한 앨런 배스(Alan Bass)나 『회화 속의 진리』나 『정신에 관하여. 하이데거와 질문』 등을 번역한 제프리 베닝턴(Geoffrey Bennington), 또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알리바이 없이』 등을 번역한 페기 카무프(Peggy Kamuf) 등이 얼마나 힘든 노력을 기울였을지, 정말, 실감이 난다. 그러나 그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고투가 없었다면 아마도 데리다가 오늘날처럼 영미권에서 위세를 떨치기는 어려웠으리라.

국내에서 데리다가 의미있게 논의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데리다의 저작들이 유용한 이론적 도구로 사용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데리다의 담론이 국내의 지식 제도들을 개조하는 데 힘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이 번역과 교정의 différance가 이런 사건들을 도래시키기를, 이 사건들의 도래가 이 différance를 더 깊고 넓게 확산시키기를. 이것이야말로 différance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의 유일한 희망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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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1-26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힘내십시오.
제가 데리다를 많이 읽지도 못했고 공부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가 지식 제도의 개조와 관련하여 어떤 시사점을 줄는지는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만
제 관심사와 연관시키자면 '해체'에 대한 그의 사고가 '국가소멸'이라는 마르크스적 테제를
무정부주의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국가주의적이지도 않은 방식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식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시간의 복잡성 및 그것의 '메시아적 중단'
이란 테마가 '(대중)봉기'라는 문제를 대할 때 아주 긴요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를 사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보자면, '구성'과 '봉기'에 관한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데리다는 항상-아직 유효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느끼시는 외로움과 고단함에는, 데리다의 사고를 받아들일
'좌파'들의 부재도 한몫을 하지 않나 합니다. 물론 그게 단기간에 극복되진 않겠지만...
선생님의 노력에 못지 않게 저희 역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4-01-26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 힘>이 교정중이라면, 올해안으로 볼 수 있겠군요. '법의 힘'이란 텍스트만 번역하신 건가요, 아니면 '법의 힘'이란 제목으로 나온 방대한 불어본 텍스트를 완역하신 건가요? 아무튼 지젝의 주저들과 함께 올해 가장 기다려지는 번역 텍스트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제대로 번역된,유일한 데리다 텍스트일 거란 예감에 기대가 증폭되는군요^^

balmas 2004-01-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관심들을 보여주시니 절로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법의 힘]은 빠르면 3월 이전에,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출판될 것 같습니다(물론 교정의 différance가 제일 변수이긴 하지만요^^). 국역본 [법의 힘]에는 프랑스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법의 힘] 외에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데리다의 [독립선언들]을 함께 수록했습니다. 하지만 [법의 힘] 원본이 얇은 책이고, [독립선언들]도 매우 짧은 글이어서, 전체 분량은 200여쪽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법의 힘]이 매우 중요한 책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나 [독립선언들] 역시 매우 심오한 글들입니다. 특히 [독립선언들]은 10여쪽에 불과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치학에 관한 데리다의 글 가운데서도 가장 심오한 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널리 읽히는 것도 좋겠지만, 성실히, 주체적으로 읽히는 게 더 중요할 듯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번역이 문제겠지요. 원래는 상당히 긴 해제를 붙일 생각이었는데, 출판사 쪽에서는 관례가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시하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해제는 최대 40매 이내로 줄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좀더 상세하게 논의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있겠지요.

포월 2004-01-2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마슈레의 책을 어제 주문하고나니 [법의 힘] 출판이 기다려집니다. ^^ 빠르면 3월 이전에는 나온다니 기대가 큽니다. 아쉬운 것은 '상당히 긴 해제'가 '관례' 때문에 줄어든다는 건데... 사실 데리다에 대한 제대로(?)된 논의가 부재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관례'가 한심하기조차하군요. '원래의 긴 해제'를 이곳에 실어보시면 어떨까요? ^^

balmas 2004-01-30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슈레 책만 아니라, [법의 힘]에까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언급했던 <관례>에 대해 심하게 질책하시니까 또 필화(?)에 말려드는 게 아닐까 무서운데요(^^), [법의 힘]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처음에는 <스펙트럼 문고> 중 한 권으로 넣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독립선언들]이 포함되면서 분량이 상당히 늘게 되어, <우리 시대의 고전> 중 한 권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출판사 쪽에 해제를 200-250매 정도 쓸 생각이라고 했더니, 상당히 난감해 하더군요.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출간된 책들 중에 이렇게 긴 해제를 넣은 책이 없다는 거지요. 이전에 다른 역자 몇분도 긴 해제를 붙이려다 결국 짧게 줄였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좀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출판사 쪽 나름대로의 사정과 방침이 있으니까 그건 존중해줘야겠지요.
사실 해제를 목적으로 150매 가량 써놨는데, 처음 계획한 해제의 내용을 다 다루려면 아마 2배 이상의 글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너무 긴 글이 되지 않을까 좀 고민하고 있던 참입니다. 논문 업적에도 들어가지 않을 글을 길게 쓰느라고 이렇게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다른 논문 발표나 다음 학기 강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이 일에 너무 많이 여력을 빼았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아직 쓰던 글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결정이 이루어지면, 다른 분들의 코멘트도 받을 겸 이곳에 한번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책값이 비싸서 놀란 분들이나 불만스러워 하는 분들도 꽤 있을 것 같은데, 괜히 제가 죄송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가재는 게편이라고(^^) 출판사 쪽 편을 좀 들어보자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출판사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인문학 분야 출판사들은 작은 출판사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출판사 관계자분들 말을 들어보면 20대 인문학 독자들을 거의 찾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원래 상업성이 떨어지는 인문학 분야의 책들을 내는 출판사들로서는 경영의 어려움이 더 가중될 수밖에 없지요. 어떤 분이, 한국에서 인문학 분야 종사자들과 독자들은 어차피 고통을 분담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출판사 사장님들은 대부분 집을 저당잡혀가면서 근근이 출판사를 운영해야 하고, 인쇄소 쪽은 대금 결제가 밀려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저자나 역자는 많은 노력을 들이고도 적은 인세 수입밖에 얻지 못하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고, 독자들은 점점 오르는 책값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지요. 저도 전에는 출판사들이 쓸데 없이 하드커버로 책을 내면서 값만 올려받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많았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니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책값 때문에 마음이 상하신 분들께는 출판사를 대신해서 제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도 좀 할 말이 있긴 한데,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요.
 

différance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데리다 독자들 중에는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으리라. 먼저 세 사람의 가상적인 대화를 들어보자.

갑돌: différance는 당연히 <차연> 아닌가? différance가 <차이>와 <지연>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이 양자를 모두 표시하기 위해서는 <차연>이라는 번역어가 제일 좋은 것 아니야?

병순: 그것도 일리가 있긴 있는데, 과연 그걸로 충분히 différance의 뜻이 표현될 수 있을까? différance는 <차이>와 <지연>이라는 뜻을 동시에 표현하기도 하지만, 불어에서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différence라는 단어와 음성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또다른 중대한 의미도 함축하고 있지. 다시 말해 데리다가 différance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는 근본 목적은 <e>라는 알파벳 모음을 <a>라는 다른 모음으로 대체해서, 두 단어의 차이를 음성상으로는 알 수 없고 기록을 통해서만 식별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다고 봐야 해. 그래야 이 신조어가 서양의 형이상학이 내포하는 음성중심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차이>라는 단어와 음성상으로 곧바로 구분되잖아? 이 경우 데리다의 원래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겠어? 더욱이 <차연>은 일본에서 사용하는 번역어를 그대로 갖다 쓰는 것에 불과하고.

갑돌: 그러면 이걸 어떻게 번역하자는 거야?

병순: 몇 가지 제안이 있었지. 어떤 사람은 <차이>라고 번역하되, <이>자를 다르다는 뜻의 <異> 대신 “이동하다”, “옮겨가다”는 의미의 <移>자로 쓰자고 제안하지. 곧 <차이>라는 단어와 <差移>라는 단어는 음성상으로는 식별이 안되고 문자상으로만 식별이 가능하니까, 데리다의 원래 의도하고도 잘 부합이 되고, différance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차이>와 <지연>의 의미도 함께 살릴 수 있으니까, <차연>이라는 역어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지.

갑돌: 그~래? 그런데 과연 <差移>라는 번역어가 편의성이 있을까? 네 설명대로라면 différance가 나올 때마다 항상 한자어로 된 <差移>라는 번역어를 써야 할 텐데, 이건 너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어색하지 않을까?

병순: 뭐, 그런 약점이 있긴 하지. 그래서 <差移> 대신에 <차이>나 <차> 같은 번역어를 쓰자고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어. 이 경우 différance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차이>와 <지연>의 의미를 동시에 표현해 주기는 어렵겠지만, 문자상으로만 식별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차연>이라는 번역어보다 데리다의 의도에 더 부합한다는 거지.

갑돌: 의미론적 함축을 희생하는 대신 기록학적 함축을 중시한다, 이거군. 그런데, 어차피 <차연>이나 <差移>, <차이> 또는 <차>나 différance가 지니고 있는 모든 함의들을 온전히 표현해 주지 못한다면, 그래도 기존에 널리 써왔고, 사람들이 그래도 제일 익숙해져 있는 <차연>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가뜩이나 데리다를 어려워하고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니까.

병순: 네 말도 일리가 있어. 사실 데리다 국역본의 질이 대부분 형편없어서 읽을 만한 게 별로 없지.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데리다를 더 낯설어하고. 그런 마당에 그나마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신감있게> 안다고 생각하는 <차연>이라는 번역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서면, 사람들이 더 혼동을 느끼게 되겠지.

그런데, 만약 <차연>이라는 말이 거리감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편의적이라는 장점이 있다면, 이건 <차연>이라는 번역어의 유통기한은 제한되어 있다는 이야기인가? 다시 말해 앞으로 좀더 좋은 번역본들이 많이 나오고, 그래서 사람들이 데리다를 좀더 잘 알게 되고, 그러면 <차연>이라는 번역어는 쓸모가 없어지는 건가?

사람들은 데리다를 낯설어하거나 어려워한다기보다는 사실은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국내에도 데리다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적어도 글줄깨나 읽은 지식인이라면 데리다에 관해 한두 마디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제대로 번역된 책을 찾기가 어려우니 뭐라고 할 말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지식인으로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데리다 철학에 관해 이런저런 상세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깎아내리는 방법을 택하지. 데리다도 철학자냐, 데리다는 미국애들이 키운 애다, 데리다는 하이데거 아류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언어유희에만 골몰하는 댄디다, 쓸데없이 말만 어렵게 하지 데리다가 구체적으로 해주는 게 뭐가 있느냐 등등. 이처럼 단도직입적인 판단에는 사실은 두려움이 있는거지. 두려움을 해소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무시하는 거고, 관심을 두지 않는 거니까. 따라서 내가 볼 때는 <차연>이라는 번역어를 많은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데에는 편의성보다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두려움이 큰 동기로 작용하는 것 같아. 데리다를 어떻게든 좀 쉽고 간편하게 정의하고 싶어하는 거지. 모르는 것은 자꾸 두려움을 주니까.

갑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게 <차연>이라고 번역하면 안되는 충분한 이유가 될까? <차연>으로 번역했을 때, différance가 지니는 함의들 중 빠져나가는 부분은 différence와 음성상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뿐인 것 같은데. 다시 말하면, <차연> 대신 <差移>, <차이> 또는 <차>라는 번역어를 택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이 사라질까? 이렇게 번역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지? 데리다에 대한 두려움과,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이 데리다를 자꾸 한 마디로 폄훼하려고 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데리다가 충분히 소개되고 연구되는 것밖에 없는 거 아냐?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적>일지도 모르지만, <차연> 같은 번역어를 통해 사람들이 갖는 거리감을 없애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을식: 그런데, 데리다가 누구야? 데리다가 누구길래 그렇게 이상한 말을 쓰지? <철학자들은 원래 다 그렇게 비싼밥 먹고 이상한 소리만 하니?> [내 강의를 들은 학생 중 하나가 수업중에 실제로 했던 충격적인 말이었음.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철학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해준 아주 값진 기회였음. ]

* 2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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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1-1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부가 아주 궁금하네요.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balmas 2004-02-0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2부에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과연 이게 2부에서 끝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2부에서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니까(마치 무협지 소개같네요^^), 한번 기대해 보시죠.
 

번역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번역 문제에 관해 한 마디 해두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미 고전이 된 발터 벤야민의 [번역가의 과제]에서처럼 심오한 언어철학에 관한 논의는 아니며, 또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이미 진부해진 문구를 되풀이하면서 번역의 어려움에 관한 개인적 소회를 털어놓자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스피노자 철학의 몇 가지 중심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것이 나름대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하는 점이다.

 

최근 들뢰즈나 네그리, 또는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등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이들의 스피노자에 관한 저작이나 논문이 번역,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로서, 이들의 스피노자 연구는 이들 각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꼭 소개,연구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들의 저술이 주로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번역,소개되다 보니까 번역의 질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번역에서도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물론 스피노자에 관한 책들을 번역한 사회과학자들의 개인적 역량을 폄훼하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만 그 분야의 책을 번역하거나 저술하려고 할 때는 그 분야에 관한 좀더 충분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또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처럼, 스피노자 연구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책들의 번역이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중요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국역된 스피노자 관련 서적들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 철학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지만, 그 개념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걸맞게 제대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용어들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스피노자의 다른 개념들의 번역 문제라든가, 국역본들의 번역의 문제점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자리에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스피노자의 저서나 스피노자에 관한 저서를 번역할 때 유념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도 비슷하겠지만, 특히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된 책들을 번역할 때는 다음과 같은 원칙은 필수적으로 지켜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역사적,이론적 맥락을 고려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철학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요 철학자들의 번역에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이는 좀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철학자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자신만의 고유한 용어 또는 개념들을 전혀 만들어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려서부터 당대의 철학적, 지적 흐름과는 동떨어진 교육을 받았고 늦은 나이에야 거의 독학으로 당대의 선진 학문을 습득한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매우 독특한 글쓰기 전략과도 관련이 있다.

 

스피노자는 스타일이 없는 철학자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 늦은 나이에 라틴어 문법을 익히고,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이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려다 보니―실제로 스피노자는 자신의 모국어로 글을 쓸 수 있다면 훨씬 더 자신의 사상을 잘 표현했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매우 초보적이고 교과서적인 표현법만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들뢰즈가 잘 간파한 사실이지만, 겉보기에는 매우 건조한 수학적 논증방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윤리학』의 경우에도 정의와 공리, 정리 등으로 이어지는 엄격한 합리적 논증의 글쓰기 외에도, [서문]과 주석, [부록] 등에서 나타나는 매우 격렬하고 풍자적인 논박의 글쓰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성교정론』과 『소론』,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및 『형이상학적 사유』, 『신학정치론』과 『윤리학』, 『정치론』 같은 스피노자의 저작들은 각 저작마다 상이한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의 저작 안에서도 부분별로 상이한 스타일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스피노자의 글쓰기가 매우 의도적이고 고도로 계산된 것임을 잘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사용할 수 있는 언어나 어휘에 관해 매우 제한적인 선택의 여지밖에 없었지만, 이를 매우 적절하게, 또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철학자였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 많은 철학적 어휘들을 빌려오지만, 논증과정에서 이것들을 상이하게 활용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실제로는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전환시킨다. “실체”와 “속성”, “양태” 같은 개념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형상적formalis-표상적objectivus”이라는 개념쌍이나 “적합한adaequatus”이라는 개념, “원인 또는 이유causa sive ratio”라는 개념 등도 그 사례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그의 철학의 성격과도 매우 잘 들어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홉스처럼 창시적인 철학자, 곧 철학사에서 어떤 새로운 혁명적 단절을 이룩한 철학자로 볼 수는 없지만, 대신 그는 이 혁명 속에서 이 혁명을 개조하려는 철학자, 또는―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혁명 속에서 혁명을 수행하려고 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고유한 점은 데카르트나 홉스가 이룩한 혁명을 환영하고 여기에 동조하면서도[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들에 거스르는 중세 철학의 모습을 보려는 일부 해석가들의 관점은 지극히 부적절한 생각이다], 이들이 원래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위해 이를 활용할 줄 알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데카르트나 홉스가 사용하는 어휘들과 동일하면서도 어떻게 의미가 달라지는지를 세심하게 따져봐야 하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그의 철학에서 어떤 독자적인 규정들을 부여받고 있는지 잘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여러 개념들은 그의 후배 철학자들에게 전승되면서 또한 새로운 굴절과 변화를 겪게 된다. 뒤에서 우리가 살펴볼 “adaequatio”나 “adaequatus” 같은 개념이 그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스콜라철학에서 매우 전형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 개념에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지만, 다시 이 개념은 라이프니츠를 거치면서 스피노자가 부여한 것과는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데카르트에서 스피노자, (아르노의 매개를 거쳐) 라이프니츠 및 로크에 이르는 adaequatio 개념의 의미 변용의 역사는 대륙 합리론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그리고 경험론과의 쟁점을 이해하는 데―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에서도 아직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라이프니츠 이후 adaequatio 개념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후설의 현상학에서 다시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는 이유에 대한 해명은 근대 철학사를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본문에서 마슈레가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는 “규정” 개념이나 “자기원인” 개념이 헤겔에서는 매우 상이한 의미를 얻게 되는 것도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후의 이론적,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면, 스피노자의 철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철학사 속에서 스피노자의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울 것임은 자명하다.

 

둘째는 스피노자 철학 체계 전체를 고려해서 번역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스피노자의 글쓰기 스타일에 관해 언급했지만, 스피노자 철학은 『지성교정론』에서부터 『윤리학』이나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변화하지 않고 처음부터 똑같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윤리학』으로 축소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윤리학』으로 완성되거나 완결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용어들이나 개념들은 각각의 저작들에 따라 상이한 의미로 쓰이는 때도 있고, 한 저작 내에서도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하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스피노자의 사상 자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notio communis”―보통 “공통 개념”이나 “공통 관념”으로 번역되는―라는 개념은 스토아학파나 데카르트에서 나타나는 같은 단어들과 어떻게 다른지, 또 『신학정치론』에서 사용되는 이 개념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이 개념의 의미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사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potentia”(많은 경우 “역능”으로 번역되는) 및 “potestas”(많은 경우 “권력”이나 “능력”으로 번역되는) 개념은 『지성교정론』에서 사용될 때와 『윤리학』에서 사용될 때, 또 『신학정치론』이나 『정치론』에서 사용될 때 같은 의미를 갖는가 다른 의미를 갖는지, 또는 이 개념들은 『윤리학』 1부에서 사용될 때와 『윤리학』 5부에서 사용될 때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또는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religio”와 “pietas”는 『신학정치론』에서 사용되는 이 개념과 동일한 의미인지 아닌지, 또 차이가 있다면, 이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는 것인지, 이런 점들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면, 스피노자의 철학이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마지막 세번째 원칙은 우리말로 된 번역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말 번역이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해서 굳이 원칙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이 세번째 원칙이 위의 두 가지 원칙보다 더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 철학과 관련하여 우리말에 없는 용어들이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쉽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스피노자의 “potentia/puissance” 개념을 사람들은 자주 “역능”이라는 말로 옮기는데, 이 번역어가 스피노자의 개념이 지닌 의미를 정확히 제시해 주는지 여부―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제쳐두더라도,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은 이 단어를 우리말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affectus”를 “정동”으로 옮긴다든가 “appetitus”를 “욕동”으로 옮기는 것, “essentia singularis”를 “특이적 본질” 등으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가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또 이를 옮겨줄 수 있는 적절한 단어가 우리말에 없다면, 이는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새로운 용어를 전혀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기존에 사용되던 철학어휘들을 빌려 사용하면서 이 어휘들에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굳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는 억지 단어들을 만들어내어―그런데 이것들 중 상당수는 일본식 용어들이다―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스피노자 철학용어들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낸다면, 대중들에게 그의 철학을 널리 이해시키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 철학이 이전의 철학 및 이후의 철학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도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이전의 철학자들이 쓰던 어휘들을 계속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는 이를 전혀 다른 용어로 번역한다면, 스피노자의 개념이 어떤 철학을 어떻게 변용시키고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스피노자 후대의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또 어떤 식으로 차용해서 어떤 식으로 변용시키는지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스피노자와 관련된 철학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면 말이다.

 

이런 원칙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두 가지 용어만 고찰해 보기로 하자. 내가 살펴보고 싶은 것은 “singulraritas”나 “essentia singularis”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singularis”라는 개념과, “adaequatio”나 “adaequatus”라는 개념이다[이외의 다른 개념들은 역주나 <용어해설>을 참고할 수 있으며, 스피노자의 인간학 및 정치철학과 관련된 개념들, 곧 “potentia” 및 “potestas”, “multitudo” 등과 관련된 문제는 발리바르의 『대중의 공포.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실린 <용어해설>에서 좀더 자세히 논의할 생각이다].

 

“singularis”라는 용어는 편지를 포함하는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주로 “사물”이라는 의미의 res와 결합하여, 복수 형태인 “res singulares”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singulraritas”나 “essentia singularis”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singularis”라는 용어는 『윤리학』에서 총 94번(2부에서만 57번) 사용되고 있으며,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과관계 이론이나 유한양태 및 개체 일반에 관한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선 이 개념을 “특수한”이나 “특수한 사물들”과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번역은 『윤리학』에서 단 두 차례 사용되고 있는 “res particulares”라는 표현에 어울리지, “res singulares”라는 스피노자의 고유 개념을 표현하는 데는 부적합하다[“res particulares”라는 표현은 스피노자 저작 전체에서 불과 4차례(『형이상학적 사유』에 1번, 『윤리학』에 2번, 『신학정치론』에 1번) 사용되고 있을 뿐이며, “particularis”라는 단어는 『윤리학』에 한 차례, 그리고 스피노자 저작 전체에는 불과 10번 등장할 뿐이다. 아울러 그 용례 역시 스피노자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표현하는 데는 쓰이지 않고, 데카르트 철학을 가리키거나 비전문적인 논의 맥락에서 등장할 뿐이다]. “특수한 사물들” 같은 표현은 보편, 특수, 개별이라는 스콜라철학적 분류법을 따르고 있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분류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 “res singulares” 같은 개념들은 이러한 분류법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뒤에서 그 이유를 살펴 보겠지만, 이 개념을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 국역본에서처럼 (일본식 용법을 따라) “개체”로 번역하거나 강영계 교수의 『에티카』에서처럼 “개물”로 번역하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번역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라는 들뢰즈 책의 국역본에서 이진경 교수와 권순모 씨는 스피노자 개념의 불어식 표현법인 “singularité”나 “essence singulière”라는 개념을 “특이성”과 “특이적 본질”로 번역하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과 들뢰즈(가타리) 자신의 철학은―긴밀한 연관성이 있긴 하지만―별개의 문제이니까, 여기서는 “특이성”이나 “특이적 본질”이라는 번역어에 관해서만 논의를 한정하면, 나로서는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 이 개념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특이성”이나 “특이적”이라는 표현은 매우 “낯설고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사실 불어의 일상 어법에서 “singularité”나 “singulière”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하지만 많은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이 개념은 일상적인 어법에서 쓰이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을 뿐더러,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의 의미와는 더 거리가 멀다[들뢰즈의 경우에는 수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사용하는 “singularity” 개념을 자신의 철학 안으로 적극 수용하는데, 국내 자연과학계에서는 이를 “특이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얼마간 애매성이 있긴 하지만, 들뢰즈 철학에서 “singularité”를 번역할 때는 “특이성”이라기보다는 “독특성”으로 이해해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에서 “독특한 사물들res singulares”이라는 개념은 사실은 중세적인 “실체적 형상” 개념 및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근대적인 개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며, 따라서 스피노자의 개체화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자연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가장 단순한 물체들”corpora simplicissima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전통적인 원자 개념 또는 개체 개념과 동일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내포를 갖는다는 데 있다.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명칭 자체가 가리키듯이,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분할이 불가능한 원자 또는 개체―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us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고려할 때―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스피노자에게 이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비실재적인 것, 따라서 사고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에게 개체란 오히려 항상 복합적인 물체들이다. 여기서 아주 역설적인 결론이 나온다.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가장 단순하지만 비실재적이고, 반대로 복합 물체들은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지만, 그것을 분할할 경우 그보다 더 하위의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분할-불가능한 것, 곧 개체들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부분과 전체 관계에 대해 기계론적인 합성 모델―본문에서 마슈레가 구축 개념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대신 동역학적이고 상대론적인(물리학적 의미에서)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결과다(『윤리학』 2부 정리 13 이하의 자연학 소론과 편지 32 참조. 따라서 이를 좀더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이 물리학이 이룩한 혁신과의 관련 속에서 논의해야 하지만, 이는 다른 논문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스피노자는 (애매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연을 일종의 위계적 체계,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에서부터 하나의 개체로 표상되는 자연 전체에 이르기까지, 복잡성의 정도에 따라 순서적으로 배열되는 개체들의 체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장extensa을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는 특성(스피노자의 의미에서)에 따라 동역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 안에 내적 역동성을 부여하고, 개체들을 원초적 요소가 아닌 인과연관connexio의 (잠정적인) 결과들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위와 같은 결론,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은 비실존적인 사고상의 존재이며, 개체들은 항상 이미 복합적이라는 결론을 역설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기계론적인 관점이나 목적론적인 관점으로밖에는 자연을 설명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의 한계―스피노자에게 이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데카르트를 의미한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학적 관점을 철학적으로 좀더 정밀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독특성 개념이다.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독특한 사물에 대해 제시하는 정의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사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사물들을 독특한 사물들로 이해한다. 만약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동일한 활동에 협력하여 그것들 모두 하나의 동일한 결과의 원인이 될 때,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이런 한에서 동일한 하나의 독특한 사물로 간주한다.”

 

스피노자의 이 정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다. 1) 이 개념은 개념적인 또는 의미론적인 층위에서 볼 때 유일한 것, 단독적인 것, 개체인 것은 원초적인 실재가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원인들, 따라서 어떤 규정된 관계들에서 파생된 결과라는 점을 지시한다. 곧 두번째 문장이 가리키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독특한 사물, “res singularis”란 다수의 개체들이 동역학적 인과관계 속에 개입해서 어떤 결과를 산출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2) 더 나아가 이 정의는 인식론적(또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는 res singulares, 곧 독특한 사물들이나 개체들을 원초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것,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결과들만을 표상하고 원인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상상적 사유에 불과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이를 “개체”나 “개물”과 같이 번역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독특성 개념이 함축하는 비판적 효과를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올바른 번역으로 볼 수 없다.

 

3) 이 정의는 또한 화용론적인 측면에서는 singularis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바로 이러한 사용을 통해 이 단어의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전제의 가상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라틴어에서 singularitas나 singularis는 말 그대로 하면 “홀로 있음”, “단독성”, “따로 떨어진”, “단 하나의” 등을 의미하며, 여성명사로 쓰인 singularis는 “과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정의에서는 이러한 일상적인 의미가 지닌 가상적 성격이 두 개의 문장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독특한 사물” 개념을 적절하게 번역하려면 이러한 효과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스피노자 철학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의 글쓰기의 고유성 역시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여기서 스피노자 철학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곧 이러한 내적 균열의 전략은 결국 계속해서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여기에 손상을 줄지는 몰라도 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전체적으로 데카르트와 홉스라는 근대 철학의 두 시조가 만들어놓은 이론적,이데올로기적 지반 위에서 출발하여 이를 내재적으로 교정하고 개조하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없었다면,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또는 적어도 그 합리적인 표현방식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이들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또한 스피노자가 비록 이들과는 매우 상이한 철학적 노선을 잠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그는 아직 그것을 현행적으로 전개하고 표출할 만한 개념적 장치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피노자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이론적 잠재력을 발굴해서 온전하게 전개시키려는 이론적 노력이 바로 알튀세르나 들뢰즈, 또는 발리바르나 네그리 등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 철학을, 그것의 고유한 한계로부터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스피노자 철학은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파악할 수 있을 때, 스피노자 철학을 독자적으로 전유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adaequatio 또는―이 명사는 스피노자 저작에서 나타나지 않으므로―adaequatus나 adaequate라는 개념을 살펴 보자. 강영계 교수가 번역한 『에티카』에서 이 개념은 “타당한”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는 “적실適實한”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다른 한편 이 개념은 후설의 현상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국내의 현상학자들은 이를 “충전성充全性”, “충전적充全的”이라고 옮기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일본식 번역어로서[이를 우리말의 “충전充電”, 곧 “전기를 축적한다”는 단어나 “충전充塡”, 곧 “빈 곳이나 공간 따위를 메움”이라는 단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일본에서는 현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윤리학』 번역에서도 이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상학의 경우라면 몰라도, 적어도 『윤리학』 번역에서 이런 식의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윤리학』 국역본에서 쓰이고 있는 “타당한”이라는 번역은 매우 특이해서, 역자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옮겼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반면 “적실한”이라는 말은 얼마간 절충적인―내가 왜 절충적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다―번역어인 것으로 보인다. 곧 이 번역어는 『윤리학』 국역본의 “타당한”이라는 용어나 국내에서 일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적합한”이라는 용어를 피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적합한”이라는 용어를 피하는 이유는 이 번역어가 스피노자의 adaequatus라는 개념이 거리를 두는 “대상과의 일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적합”이라는 말보다는 “內實”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적실”이라는 말이 스피노자의 adaequatus 개념을 표현하기에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적합”보다는 “적실”이 더 적절한 표현일까? 여기에 관해 역자들은 아무런 해명이 없는데, 사실 이는 대부분의 번역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을 번역한 박기순 씨는 예외다. 그가 제시한 몇 가지 번역어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는 “역주”나 <옮긴이 해제>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개념 번역에 관한 좋은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adaequatus나 adaequate는 “적합한”이나 “적합하게”로 번역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며, 이 번역본에서도 줄곧 이 역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이 역어가 적절한, 또는 적합한 번역어인가?

 

서양 철학사에서 adaequatus나 adaequatio 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관한 전통적인 규정에서 유래한다[물론 관념과 대상, 언어와 실재 사이의 일치에서 진리의 본성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오래된 일이다. 여기서는 다만 adaequatio 또는 adaequatus라는 용어가 도입된 유래를 고려하고 있을 뿐이다]. 곧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를 “사물과 지성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De veritate q.1, a.1; De veritate: Premiere question disputée de la vérité, Vrin, 2002, p.54)로 규정하는데, 이 때의 adaequatio라는 단어는 ad-aequare, 곧 “동등하게 만들다”는 뜻을 지닌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들뢰즈나 이 책에서 마슈레는 마치 adaequatus가 스피노자에게만 고유한 개념인 것처럼, 또는 데카르트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또는 그런 인상을 주고 있지만), 사실은 데카르트에서도 이 개념은 매우 체계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 다만 데카르트에서는 이 개념이 『성찰』이나 『철학원리』 같은 핵심 저작들에는 나타나지 않고, 『“성찰” 반박에 대한 답변』이나 『뷔르만과의 대화Entretien avec Burman』 같은 곳들 또는 일부 편지들에서 드물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는 이 개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데카르트는 이 개념을 아퀴나스처럼 “동등하게 만들다”, 또는 “적합하다”는 의미로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물에 대한 적합한 인식cognitio adaequata rei”은 대상이 되는 사물과 완전히 일치하는 인식, 곧 “알려진 사물 속에 실존하는 모든 특성들을 포괄”(『“성찰” 네번째 논박에 대한 답변』; AT판 7권, p.220)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경우에만 인식과 인식된 사물 사이에는 완전한 동등성adaequatio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근원적 양의성equivocité이라는 관점에서 이 개념에 고유한 신학적 규정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결성completio과 완전성perfectio 개념의 구분이다. 곧 데카르트는 유한한 피조물에게 적합한 인식, 사물이 지닌 특성들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의미의 적합한 인식은 오직 신에게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적합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유한한 지성에게 참된 인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 참된 인식을 위해 꼭 적합한 인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은 얼마든지 완결된 인식, 곧 다른 관념들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AT판 7권 p.223 이하 참조).

 

따라서 데카르트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적합한 인식을 여전히 사물과 관념, 사물과 표상을 “동등하게 만들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만, 신과 피조물 사이에 적합한 인식과 완결된 인식, 또는 명석판명한 인식의 차이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경우는 『지성교정론』 같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말년의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곳은 『윤리학』 2부 정의 4이다. “나는 대상과의 관계 없이 그 자체로 고려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내생적 특성 또는 특징을 갖고 있는 관념을 적합한 관념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는 이 정의에 다음과 같은 “해명”을 덧붙이고 있다. “나는 외생적 특징, 곧 관념과 그 대상 사이의 합치를 배제하기 위해 내생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우선 “적합한adaequatus”이라는 개념과 “합치convenientia”라는 개념을, 각각 참된 관념의 내생적 특징과 외생적 특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적합한 관념은 대상과의 합치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미 1부 공리 6에서 “참된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관념은 참된 관념인 한에서 대상과의 합치라는 특성을 항상 이미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이를 합치와 구분하여 말하려는 바는, 합치는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곧 스피노자의 적합성 개념의 핵심은 참된 관념을 참된 관념으로 만들어주는 내생적 특징, 또는 내재적 원인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마슈레가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이를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만, 데카르트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좀더 지적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먼저 스피노자가 adaequatus 개념과 관련하여 데카르트가 공유하고 있는 점은 이 개념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동등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적합한 인식, 곧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는 점 역시 공유하고 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 2부 정리 22 이하에서 전개하고 있는 부적합한 인식에 관한 논의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유한한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일차적으로 데카르트가 신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을 설정하고 있는 데 비해, 스피노자는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무한자와 유한자, 실체와 양태 사이에 일의성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에 가깝게 말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지성이 적합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원인으로서의 무한 지성과 “동등하게 됨”으로써, 곧 적합한 원인causa adaequata(3부 정의 1)이 됨으로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인식의 문제는 항상 윤리의 문제, 곧 능동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은 또한 그 나름대로의 난점을 지니고 있지만,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adaequatio 또는 adaequatus 개념은 원래 이 개념에 부여된 의미, 곧 “동등하게 만들다”는 의미를 계속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이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사물과 표상, 또는 사물과 개념이 동등하게 되는지, 적합하게 되는지, 또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지에 관해서 그럴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철학사적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러한 흐름에서 스피노자의 입장이 지닌 독특성을 적합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용어상의 통일성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두 개의 개념에 관해 얼마간 장황하게―또는 너무 간략하게―논의했지만, 우리가 이처럼 긴 지면을 할애해서 이 문제를 논의한 목적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폄훼하자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스피노자라는―또는 다른 어떤 철학자나 이론가이든 간에―서양의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받는 한 철학자, 하지만 국내에는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못해온 철학자를 좀더 의미있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간략하게나마 점검해 보자는 데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외국의 사상, 특히 서양의 사상을 소개하고 전유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값진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덕분에 국내의 지적인 환경이 놀랄 만큼 풍요로워졌다. 이제 그 노력들을 스피노자를 비롯한 다른 사상가들을 수용하고 전유하는 데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믿는다.

 

이 책을 번역하는 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사장님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3년 전에 초역을 마쳤지만, 그 동안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다가 전응주 사장님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 철학과 관련하여 상업성을 노린 졸속 출판과 엉터리 번역이 횡행하는 세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좋은 책을 엄선하고 정성스러운 편집을 고집하는 전사장님의 이해와 배려가 없었다면 이 책이 이처럼 빛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이북스 직원 여러분들, 특히 서영심 편집장님과 김현경 씨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처음 이제이북스에서는 원전을 일일이 대조해서 교정을 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으레 내세우는 말이거니 했지만, 실제로 교정을 보면서 이 말이 전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실감했다. 국내에 생소한 스피노자 철학의 원고를 붙들고 오래 고생했을 이 분들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1999년 겨울에서 2000년 여름까지 이 책과 관련한 공부모임에 참석해서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번역과 관련해서도 매우 유용한 제안을 해준 김문수, 김은주, 박상욱, 안소현, 이찬웅, 조현수, 한형식에게도 감사드린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루한 번역과 힘에 부치는 공부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처음 구입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책에 한 문장씩 서툴게 번역하던 게 1992년 여름이었고,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쁨이 결국 스피노자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기쁨을 많은 독자들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는 그보다 큰 보람이 없겠다.

 

 

200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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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문제설정

 

 

이러한 지적,제도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의미를 좀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출간된 1979년의 프랑스는 매우 첨예한 갈등이 지배한 시기였다.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좌파 내부에서도 유로공산주의의 지지자들과 이에 대한 비판자들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구조주의 진영 내부에서 신철학파를 둘러싸고 푸코와 들뢰즈가 결별하고, 구조주의자들(특히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격렬하게 제기되고, 다시 알튀세르에 대한 마오주의적 비판(바디우를 중심으로 한)이 체계적으로 전개되는 등 여러 전선에 걸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슈레가 속해 있던 알튀세르의 노선 내부에서 보면 이 시기는 60년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가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노력이 실패로 귀결되는 시기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도래했음을 선언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의 시도와 다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하려는 새로운 문제설정이 막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마슈레와 발리바르는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이론적 정세에 대한 개입의 시도로 읽어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기본 화두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구분되는 유물변증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데 있다.

마슈레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헤겔 자신에 의해 재구성된 스피노자의 모습을 검토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마슈레는 이처럼 헤겔의 재구성에 따라 제시된 이 세 가지 쟁점, 곧 기하학적 방법의 문제와 속성의 문제,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정식의 문제를 2부에서 4부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검토를 통해 마슈레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헤겔식의 변증법과 구분되는 새로운 변증법의 가능성이다. 곧 헤겔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궁극적인 잠재력을 끝까지 전개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마슈레는 이러한 비판은 헤겔 자신의 무의식적 가상에 따라 투사된 상상적인 스피노자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헤겔은 스피노자라는 이 유령, “헤겔 자신의 체계를 의문시하는” 어떤 사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상에 의해 드러난 자신의 체계의 한계를 상상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상상적인 스피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슈레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 나타나는 위계적 종속관계에서 이러한 쟁점을 해명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다. 곧 헤겔에서 사유는 “자신의 총체화의 운동 안으로 다른 모든 질서를 결집하고 흡수하는 절대적인 합리적 질서”이며, 이러한 질서 안에 통합된 모든 요소들은 종국적인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시간적,논리적 관계에 따라 위계화된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목적론적 관점을 스피노자에 거꾸로 투사하여, 스피노자의 체계는 절대자를 시초에 정립하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퇴락해가는 유출의 체계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헤겔이 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스피노자의 개념은 바로 속성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모순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곧 이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에 의해” 그처럼 지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속성이 실체의 본질일 수 있는 것은, 지성이 그처럼 지각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절대자인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지성에 의해 조건화될 수 있는가? 헤겔은 바로 여기서 스피노자의 비일관성의 징표를 발견한다.

 

그러나 마슈레에 따르면 헤겔의 주장은 텍스트상의 전거도 희박할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독창적인 속성이론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마슈레가 특히 강조하는 점이 속성들의―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외연적 무한의 중요성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한다. 왜 이 “무한하게 많음”이 중요할까?

 

  1) 이는, 헤겔이 해석하듯이 속성들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의 관계로 간주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겔은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이 존재하며, 이것들은 지성이 실체를 반성하는 추상적 형식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속성들이 이렇게 이해되면, 절대적 실체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자신의 외재적 본질들로 분산되고 해체되어 버리며,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자의 통일성은 추상적이고 외양적인 통일성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지만 속성들은 무한하게 많기 때문에,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두 가지 대립물의 관계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이처럼 각각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음”은 『윤리학』 1부 정의 6에서 말하고 있듯이, 일체의 부정을 제거함으로써 실체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로 만들며, 따라서 실체를 절대적 통일체로 만들어준다.

 

  2) 또한 이러한 외연적 무한성은 우리가 실체에 대한 인식에서 수적 관점을 배제할 수 있게 해준다. 곧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유일”하며 이 “유일성”은 실체의 한 특성을 이루지만, 이를 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수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실체가 유일한 것은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체계를 “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실체의 통일성이나 속성들의 상이성은 하나나 둘, 여럿 같은 숫자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이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파악하는 적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유출론적 “이행”의 관계도 “위계적 종속”의 관계도 아니며, 게루 같은 사람이 주장하듯 “구축construction”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스피노자 자신이 강조하듯 “구성constitution”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구성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슈레가 제시하는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동일성이라는 테제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하는 게 중요하다. 이 테제는 속성들의 “실재적 상이성”과 동시에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통일성”을 뜻하는데, 이러한 난해한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마슈레는 2부 정리 7의 이른바 “평행론” 정리, 곧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는 정리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우선 피해야 할 오해는 이 정리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평행성, 그리고 두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곧 관념들과 물체들 사이의 일치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정리에서 “사물”은 관념들 및 물체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있다. 이는 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속성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실체의 절대적 통일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 있다. 곧 각각의 속성은 그 자신의 형식/형상에 따라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을 표현하며, 이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이 속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하고 있는 해석상의 오류―속성들을 지성이 절대자를 반성하는 외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속성들은 두 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관계로 해석하고, 속성들과 실체의 관계를 퇴락하는 이행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는 부정적인 매개의 운동을 통해서만 무한자의 구체적인 보편성과 유한자의 실재성을 얻을 수 있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마슈레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4부에서는 “부정”과 “규정”의 관계가 논의되며, 여기에서 쟁점은 스피노자에서 유한자의 실재성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따라서 무한자의 구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천재적인 정식을 발견해 놓고도 이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스피노자가 모든 유한한 규정들을 지양의 운동으로 이끌어가는 부정적인 것의 실정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게 규정은 단지 부정에 불과할 뿐, 또다른 상위의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실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유한한 규정들, 곧 유한한 양태들은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못한 외양, 가상에 불과하며, 역으로 절대자는 이러한 유한한 규정들과 외재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내용없는 절대자에 불과하게 된다. 요컨대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에는 아무런 실정적인 이행의 매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슈레는 이 문제를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하고 있다. 첫번째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절대자와 유한자의 관계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는 곧 스피노자에서 무한양태의 지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헤겔이 생각하듯, 유출적인 퇴락의 중간 단계, 곧 유출적 이행의 매개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두번째 문제는 유한자, 유한양태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헤겔이 생각하듯 스피노자에서 유한양태는 외양, 가상에 불과한가? 아니면 유한양태는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가? 또 그렇다면 유한양태는 어떻게 이러한 실재성을 얻게 되는가?

 

첫번째 문제는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된다. 1) 직접적 무한양태(사유의 경우는 “신의 관념”, 연장의 경우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속성과 양태를 매개해 주는 것인가? 하지만 이름이 가리키듯이, 그리고 스피노자 자신이 분명히 “신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 따라나오는 것”(『윤리학』 1부 정리 28의 주석)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직접적 무한양태는 매개로 간주될 수 없다. 이것들은 실체 또는 속성이 자기자신을 직접 표현하는 “방식modus”, 곧 양태이며, 이런 한에서 “일종의 무조건적인 것들”이다.

 

2) 그러나 그렇다면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은 일종의 매개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는가? 마슈레가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개적 무한양태는 사실 다수의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소산적 자연으로서의 이 매개적 무한양태를 “하나의 개체” 내지는 하나의 전체로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마치 자연에는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부터 복합 물체들을 거쳐, 이 물체들의 총합으로서의 우주 전체의 모습에 이르는 위계적 계열, 또는 합성의 질서/순서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슈레는 이러한 인상은 그릇된 것이며,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과관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겨나는 가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곧 위와 같이 스피노자의 자연을 개체들의 위계적 질서/순서로 제시하는 것은 자연의 인과관계를 기계론적인 타동적 인과성의 관점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론적 관점은 사물들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해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맞짝으로서 목적론적,섭리론적 관점을 불러오게 된다(『윤리학』 1부 부록). 따라서 이러한 타동적 인과성의 관점이 아니라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파악해야 기계론적/목적론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주 전체의 모습을 개체들의 위계적 총합으로서 표상하는 관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바로 두번째 문제와 연결된다.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을 내재적 인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결국 독특한 사물들이 내재적인 인과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함축하며, 이는 곧 유한양태들에게 고유한 실재성이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4부의 [독특한 본질들] 장은 이 책의 철학적 결론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 장은 스피노자 철학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이 장에서는 매우 밀도높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핵심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제시해볼 수 있다. 마슈레는 바로 앞장인 [대립이 아닌 차이]의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 철학과 헤겔 철학에 나타나는 공통점, 곧 “모순은 주어/주체 속에서만, 그리고 주어/주체에 대해서만 파악되고 해소될 수 있다는 관념”을 도출해낸다. 양자에게 차이가 있다면, 데카르트는 유한한 이성의 범위를 모순율의 한계로 제한시키는 반면, 헤겔은 모순율을 전도하여 이 유한한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이를 절대적 주체의 운동으로 변모시킨다는 데 있다. 그러나 마슈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철학은 주어/주체 또는 개체를 실존의 영역에 위치시키고, 따라서 모순의 문제 역시 사물들의 실존의 영역, 곧 타동적 인과성의 영역에 위치시킨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게 두 개의 상이한 질서, 상이한 세계―하나는 본질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들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내재적 인과관계와 타동적 인과관계가 두 개의 인과관계가 아니듯이, 본질의 질서와 실존의 질서 역시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질서가 아니며, 단 하나의 동일한 현실에 대한 상이한 표현들일 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가상적인 인식―현대적인 용어로 하면 이데올로기―역시 합리적인 인식 못지 않게 실재적인 하나의 인식이며, 따라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슈레의 도발적인 표현을 따르자면 “극단적으로는 이 인식의 종류들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참되다”(만약 우리가 진리와 적합성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면)고 긍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종류들은 자신들이 기능하는 체계 속에서는 똑같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는 독특한 사물들은 본질의 수준에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 안에서in se” 존재함을 의미한다. 곧 독특한 사물들의 본질은 외재적 대립은 물론이거니와 내적 모순에 의해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certo et determinatio modo” 이 독특한 사물들 안에서 행위하는 신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독특한 사물들은 그것들이 신의 역량을 어떤 규정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바로 “그만큼quantum”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코나투스 개념, 곧 “각각의 사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고 추구”(『윤리학』 3부 정리 6)한다는 개념의 의미이며,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각각의 사물의 현행적 본질로 정의하고 있다(『윤리학』 3부 정리 7).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유한자의 고유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 또는 독특한 사물들은 어떻게 독특한 본질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는 모든 독특한 사물들 안에서 신의 활동, 신의 역량의 표현을 보기 때문에, 일종의 기회원인론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마슈레에 따르면 이는 신과 독특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여전히 외재적인 관계, 제약과 구속의 관계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하며, 신 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를 하나의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에 불과하다. 마슈레가 강조하듯이 신은 하나의 전체Tout가 아니며, 독특한 사물들은 개체들이 아니고[ 이 때문에 “res singulares”를 “개체들”이나 “개물들”로 번역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res singulares”의 번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뒤에 나오는 <번역에 관하여> 절을 보라], 속성들 또는 무한양태들은 이 양자의 매개가 아니다. 속성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실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듯이, 각각의 독특한 사물들 역시 환원 불가능한―왜냐하면 모든 본질은 영원하기 때문에―본질을 보존하면서 실체의 무한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와 독특한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모순들에 따른 매개의 관계로 보지 않고 직접적 동일성의 관계로 본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게는 주체의 변증법도 목적론적 변증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유물론적 변증법으로서의 “실체의 변증법”이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궁극적인 평가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알튀세르의 작업과 관련하여 간단히 몇 가지 함의만 지적해 두겠다.

 

 마슈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사실 알튀세르가 『자기비판의 요소들』[L. Althusser, “E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UF, 1998]에서 제시한 한 가지 자기비판과 관련이 있다. 알튀세르는 이 책에서 60년대 자신의 작업은 (형식주의적,조합적) 구조주의가 아니라 스피노자주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인하면서, 자신은 마르크스가 유물변증법을 이론화하기 위해 헤겔을 우회해야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 다시 스피노자를 우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우회는 모든 관념론의 핵심적인 개념쌍이 주체와 목적임을 밝혀줌으로써, 마르크스의 시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여기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유보를 달고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는 헤겔이 마르크스에게 준 것, 곧 모순이 결여되어 있기”[같은 책, p. 188(강조는 알튀세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슈레의 이 책은 알튀세르의 이러한 자기비판에 대한 응답이자 내재적 교정의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처럼 스피노자주의를 변증법과 무관한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스피노자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다른, 유물변증법을 가공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슈레의 이러한 답변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에서 전개되었던 구조 인과성 개념의 풍부한 함의들을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에 맞서) 계속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일관된 노력의 표현이다.

 

그런데 사실은 알튀세르 자신도 『자기비판의 요소들』이 출간된 다음 해 발표한 강연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인가?]에서는 『자기비판의 요소들』의 주장과는 다른 방향에서 변증법 문제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좀 길지만 알튀세르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렇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가까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강조는 알튀세르-인용자] 이유에서, 변증법에 선행하는 이유에서 ... 그러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모든 기원과 주체의 철학 ... 에 대한 헤겔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코기토와 감각론적-경험론적 주체와 초월론적 주체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따라서 지식의 이론이라는 사고에 대한 그의 비판 때문에 헤겔과 가까웠다. ... 요컨대 주체에 관한 모든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비판 때문에 헤겔과 가까웠다. ... 그리고 만약 이 비판적인 주제들을 재편성해서 고려해 본다면, 마르크스가 헤겔과 가까운 것은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공개적으로 물려받은 것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에서 이미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에피쿠로스에서 스피노자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유물론의 전제를 구성하는 이 심원한 친화성에 대해서는 경건한 침묵으로 지나치고 있다. ... 그리고 사람들은 마르크스-헤겔의 관계 전체가 단지 변증법에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의 자기의식에 기초해서 판단해서는 안되며 의식의 배후에서 이 의식을 산출하는 과정 전체에 기초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 마르크스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 나는 사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문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강조는 알튀세르]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리고 이 유물론이 변증법이 되기 위해서 변증법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를 아는 조건 아래에서만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변증법에 관해 저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인용자] 마르크스의 침묵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변증법의 결론들로부터 그 유물론적 전제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으며, 그 전제들에 기초하여 그것들이 야기시킨 (강한 의미에서) 새로운 범주들을 사고해야 했기 때문이다[『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46-147쪽; 위의 책, pp.210-211(별도의 표시가 없는 강조는 인용자의 강조다)].

 

매우 함축적이고 중요한 이 구절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좀더 체계적으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알튀세르가 변증법의 유물론적 전제―에피쿠로스에서부터 발원하는―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변증법을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기로 하자. 이는 달리 말하면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알튀세르는 모순의 문제를 부차적인 문제로, 유물론적 전제에서 파생된 한 가지 결과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바로 이 책에서 마슈레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 관해 하나하나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내리고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여전히 유물변증법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모순 개념을 “역사화”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순 개념 자체를 새롭게 사고하는 것도, 최종심급 개념을 복잡화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순 개념을 제거하거나 말소하는 것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모순을 부차화하는 것, 그리고 모순을 하나의 계기로 포함하고 있는 관계의 이론을 사고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대한 실천적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바로 여기에 이 책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중요한 이론적 의의 중 하나가 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영향: “또는”에 대하여

 

 

언젠가 발리바르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 책은 유럽의 철학계, 특히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이 책은 당연히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곧 기하학적 방법에 관한 문제나 실체와 속성의 관계 문제, 무한양태에 대한 해석의 문제 등과 같이 이 책이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서 이 책은 표준적인 하나의 입장을 제시해 주었으며, 이 때문에 이 책은 게루나 들뢰즈 등의 저서와 함께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권위있는 해설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아울러 마슈레의 이 책은 스피노자와 독일철학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그 이후 스피노자와 독일관념론에 관한 여러 연구들을 낳는 산파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사실 빅토르 델보스나 마르샬 게루 등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저서들을 낸 적이 있지만[Victor Delbos, Le problème moral dans la philosophie de Spinoza et dans l'histoire du spinozisme, Félix Alcan, 1893; Martial Gueroult, L'evolution et la structure de la doctrine de la science chez Fichte, Olms, 1982(19321) 참조], 그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연구는 오랫 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이 분야에서 다수의 주목할 만한 저작들이 출간되었으며, 이 저작들은 스피노자와 독일 관념론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특히 Sylvain Zac, Spinoza en Allemagne. Mendelssohn, Lessing et Jacobi, Meridiens Klincksieck, 1989; Manfred Walther ed., Spinoza und der deutsche Idealismus, Konigshausen & Neumann, 1991; Gabriel Albiac, La synagogue vide: Les sources marranes du spinozisme, PUF, 1994; Jean-Marie Vaysse, Totalité et subjectivité. Spinoza dans l'idealisme allemand, Vrin, 1994 참조].

 

하지만 스피노자 연구에서 이 책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스피노자 철학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현재화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방식은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해 주듯이 대결confrontation의 문제설정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헤겔이냐 스피노자냐』의 의미로 이해했다. 곧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양 근대철학의 두 대가 사이의 대결이며, 이 대결의 쟁점은 변증법, 다시 말해 관념변증법이냐 유물변증법이냐 사이의 쟁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결에 대해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논평을 했다.

 

헤겔 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에서는 마슈레의 말이 옳지만, 헤겔 철학은 스피노자 독해로 모두 환원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곧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에서 헤겔 철학의 한계의 증상을 읽어내려는 마슈레의 시도는 성급한 과장이라는 것이다[이러한 독해의 사례로는 André Doz, “Spinoza lecteur de Hegel?”,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1984/1; George L. Klein, “Pierre Macherey's Hegel or Spinoza”, in Spinoza. Issues and Directions. The Proceedings of the Chicago Spinoza Conference(1986), ed. Edwin Curley and Pierre-Francois Moreau, E.J. Brill, 1990을 참조].

 

반면 헤겔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슈레의 시도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한다. 가령 네그리 같은 사람은 1981년에 출간된 『야만적 별종』에서 마슈레의 저작이 헤겔 철학의 한계를 잘 드러내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서 유물변증법을 위한 새로운 이론적 자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오히려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일체의 매개, 따라서 일체의 변증법을 거부하는 새로운 구성적 존재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야만적 별종』 이래 “반(反)근대성”의 문제설정 아래, 홉스-루소-헤겔로 이어지는 근대성의 중심적 노선에 맞서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의 노선을 진정한 유물론의 노선, 대중의 정치학의 노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동시대의 구조주의 사상가들 또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영역에서 역시 대결의 문제설정에 따라 스피노자 철학을 이해해 보려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들, 헤겔 독자들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독자들을 하나의 대결로 초대한 셈이며, 또 국내의 독자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대결에 초대장을 받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대결은 누구를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대결인가? 곧 이 대결은 헤겔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대결인가 아니면 이전까지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스피노자의 극적인 승리를 확인하기 위한 대결인가? 또 아니면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를 결정짓기 위한 대결인가?

 

마슈레는 1990년에 붙인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 중 “ou”―곧 영어의 or나 독어의 oder―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곧 이는 한편으로 “...이냐aut ...이냐aut”를 뜻하기도 하지만, 또한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잘 알려진 스피노자의 표현이 가리키듯 “즉”, “다시 말해”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다면, 이 책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오해, 오독에 맞서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헤겔철학을 재비판하려는 시도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책은 헤겔과 스피노자가 공유하고 있는 것, 이 양자의 철학 안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읽어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왜 이러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슈레가 말하는 대결은 외재적인 대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너무 비(非)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 반대로 마슈레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대결―하이데거라면 오히려 Auseinandersetzung이라고 말했을 것이다―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헤겔이냐 스피노자이냐도 아니고, 헤겔 스피노자도 아니며, 헤겔 또는 스피노자, 곧 철학(함)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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