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펴내는 학술지 [코기토] 88호 (2019.6.30 발간) 에 실릴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이 논문을 인용하거나 토론하실 분들은 학술지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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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하여: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1. 머리말: 촛불시위는 어떤 혁명인가?

 

우리가 지금 비상한 시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지난 2016년 가을부터 약 3년여의 기간 동안 한반도, 그리고 남한 사회는 한국사의 획기적인 시기가 될 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우선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 시민들의 거대한 촛불시위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이 촛불시위의 열망 위에서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20175.18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로운 정권은 5.18 광주의 정신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촛불시위에 힘입어 탄생할 수 있었고, 문재인 정부는 그 정신의 핵심을 국민주권으로 이해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자마자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해 커다란 군사적정치적 위기 정세가 조성된 바 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와 미국의 대통령 사이에서 전개된 살벌한 말의 전쟁은 마치 한반도에서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험악한 사태가 2018년 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한과 북한 사이의 교류 및 정상회담을 통해 놀라운 반전 속에서 판문점선언 및 평양선언으로 탈바꿈되었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교 전쟁도 우여곡절 끝에 역사적인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이처럼 평창 동계올림픽이 최근 한반도의 새로운 정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평창 임시평화체제로 지칭하면서 이러한 정세 변화를 분석하는 연구로는 구갑우, 평창 임시평화체제의 형성원인, 과정, 결과: 한국의 트릴레마, 󰡔평화 가제트󰡕, No. 2018-G22 (한양대학교 평화연구소, 2018); 평창 임시 평화체제에서 판문점 선언으로: 북한의 개혁 · 개방 선언과 제 3차 남북정상회담, ‘연합적 평화의 길, 󰡔동향과 전망󰡕 103 (한국사회과학연구소, 2018)를 참조. 그에 따르면 평창 임시평화체제는 “201822일부터 325일까지 유효했다는 점에서 임시적이고, 군사적 분쟁의 중단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이며, 지속성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체제로 명명하기 어렵지만, 한반도정세의 극적 반전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유엔총회 휴전결의안이 작동하는 기제를 뜻한다. 구갑우, 평창 임시평화체제의 형성원인, 과정, 결과: 한국의 트릴레마, 󰡔평화 가제트󰡕, 1.] 그 이후 많은 기대를 모았던 2019년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귀결되면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이 쉽지 않은 과제임을 다시 한 번 드러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촛불시위에서 촉발된 일련의 사태 전개가 한반도의 역사적 비핵화 및 북미 수교로, 아울러 평화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진다면, 이 시기는 실로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로 기록될 것이다.


이처럼 수십 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역사적 사건들이 채 3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연이어 전개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연 우리가 정말 거대한 전환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까, 우리가 정말 혁명의 시기에 놓여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미 2016년 말~2017년 초의 탄핵 국면을 경과하면서 일부 언론과 정치학자들은 촛불혁명또는 촛불시민혁명같은 표현을 과감하게 사용한 바 있다.[특히 손호철,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참조. 하지만 손호철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정확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동진은 촛불시위가 신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을 공고하게 만드는[진태원 외, 기획좌담: 촛불집회, 󰡔인문저널 창󰡕 2(인문한국연구소 협의회, 2017), 79.] 결과를 낳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곧 한국 사회에서 1987년 자유주의 체제가 확립된 이후 정치의 유일한 목적은 정권 교체가 되었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재구성하기 위한 어떤 것으로서의 정치는 최종적으로 소멸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촛불시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시위에서 놀라운 점은 오히려 연인원 1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모였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같은 곳.]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필자가 보기에 서동진의 이러한 견해는 최근 몇 년 간 그의 이론적정치적 관점의 일관된 표현이다. 곧 그의 관점은 다분히 교조적인 (더욱이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다르지 않다. 서동진, 󰡔변증법의 낮잠󰡕, 꾸리에, 2015 참조. 다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교조적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비난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통적이라는 의미, 따라서 자신이 이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원리에 충실하고자 하는 태도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촛불시위에 관해 혁명이라는 개념 내지 용어를 손쉽게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문제에 관해 성찰적인 계기를 제공해주는 장점도 존재한다. 사실 촛불시위는 연인원 1000만 명이 넘게 참여하는, 역사상 보기 드문 거대한 대중운동의 양상을 보여주었지만, 과연 촛불시위의 결과 어떤 성취를 얻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존재한다.


첫째, 국민주권을 표방하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이 정권은 집권 1년 반이 지난 시점까지 60%에 가까운 지지율을 바탕으로 강력한 사정 드라이브(‘적폐 청산이라고 불리는)를 추진하면서 이전 정권들(특히 이명박, 박근혜)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또한 현 정권은 을의 눈물을 닦아 주겠습니다라는 표어 아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나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같은 친노동, 친서민적인 정책들을 전개하고 있다(또는 그렇다고 자처하고 있다). 또한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취지 아래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게시판을 마련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크게 후퇴했던 남북관계의 발전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정권 초기에 이전 정권들과의 차별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특히 반부패라든가 경제개혁’(물론 이 카멜레온 같은 용어들의 실제 함의의 차이에는 유념해야겠지만) 같은 정책들을 추구하는 것은 이전 모든 정권들에서 나타난 공통점이었다. 따라서 정책의 방향에서 이전 정권들과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것이 과연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2018년 봄 국회에서 통과된 최저임금법 개정안은 노동계의 주장을 무시한 개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의 진행 속도도 매우 더디고 불투명하게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2018년 여름 서울 및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면서 현 정권이 과연 주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이것이 원내 과반 의석에 미치지 못하는 세력관계의 결과 때문인지 아니면 정권의 의지나 능력이 부족 때문인지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하지만 경제개혁이나 남북관계에서 앞으로 주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것이 과연 촛불시위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지금까지의 정책이나 노력은 말하자면 을을 위한 민주주의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과연 을에 의한 민주주의인지, 또는 (자신)의 민주주의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국민을 위해, 국민 중 약소자들을 위해 올바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처럼 위에서 아래를 위해 추진되는 정책은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후견적 민주주의일 수 있고, 현명하고 유덕한 군주가 (어리석은) 아랫사람들을 위해 펼치는 선정(善政)에 더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다.[물론 이것이 유능한 지도자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그리고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면, 모처럼 극적인 화해의 국면에 접어든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 더 일반적으로는 한반도 정세에 새로운 파국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존재할 것이다. 이른바 남남 갈등이라고 하는 것이 정권의 지지도가 약해지면 언제든지 재연되고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남남 갈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무철, 북한문제의 과잉정치화와 극단적 양극화 분석: 갈등전환(Conflict Transformation)의 제도화 모색, 󰡔한국과 국제정치󰡕 101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8) 참조.]


셋째, 촛불시위가 됐든 아니면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획기적인 전환이 됐든, 이것이 과연 현 정권 및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인지, 아니면 극히 이례적인 우연적 힘들의 작용 속에서 발생한 우발적 결과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과연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핵심 증거물을 담고 있는 최순실의 태블릿 피시가 입수되지 않았다면, 과연 2016년의 거대한 촛불시위가 가능했을까? 또한 만약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의 변화가 가능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북한의 김정은이나 미국의 트럼프(또는 중국의 시진핑이나 러시아의 푸틴 같이) 같이 민주주의적 절차에 입각한 의견 수렴과 합의를 중시하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통 크게 결단하는지도자들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나라들을 통치하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급격한 사태 전환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해볼 만하다.


이러한 여건들을 잘 활용하여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문재인 정권의 중요한 능력이고 업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우발적인 행운들이 작용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 아울러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에서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성립이 결국 타자(외적인 타자든 내적인 타자든)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따라서 매우 불확실하고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재 한반도 평화체제 성립에서 가장 중대한 고비가 되는 비핵화 협상이 오직 북한과 미국 사이의 쟁점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기존의 한일 삼각 동맹을 고수하려는 미국 동맹 세력들에게 북미정상회담은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여졌다는 분석이 있다.[이혜정, 트럼프 시대의 미국 패권과 북핵, 󰡔성균 차이나 브리프󰡕 47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2018). 또한 일본의 입장에 대해서는 길윤형, 구조적 위기 위의 한일관계, 󰡔황해문화󰡕 103 (새얼문화재단, 2019) 참조.] 1993년에 있었던 이른바 ‘1차 북핵 위기2002년에 있었던 ‘2차 북핵 위기가 남북 관계 및 한반도 정세의 화해 분위기가 좌초되는 데 중요한 빌미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불안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이른바 노딜로 귀결된 것은 이러한 불안이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입증해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구갑우가 평창 임시 평화체제가 안고 있는 삼각 모순내지 트릴레마라고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구갑우, 평창 임시평화체제의 형성 원인과 전개: 한반도 안보 딜레마와 한국의 삼중 모순, 󰡔한국과 국제정치󰡕 101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2018).] 그것은 한국이 한반도 비핵화, 한미동맹의 지속,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란 정책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것을 가리킨다. 평창 임시평화체제가 성립하게 된 동기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강한 의지였고, 이것이 한미 동맹의 잠정적 수정(한미 합동 군사훈련의 연기)을 이끌어냈으며, 다시 이것이 북한의 호응(핵 실험 및 미사일 발사 실험 중단)과 대화 참여를 이끌어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을 가능케 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잠정적이거나 임시적인 선순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서 다양한 부정적(그리고 상호 충돌 가능성이 높은) 변수들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앞으로 독자적으로 한미 동맹을 일정 부분 거스르면서, 심지어 해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과정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그때 미국이 이러한 전개 과정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또한 그 과정에서 남쪽의 보수 세력의 반발 및 대중의 불안(이는 다시 전통적인 국가안보 담론으로의 회귀를 촉진할 것이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등등. 이것의 향방은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국내에서 정치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상당 부분 달려 있을 것이며, 이는 다시 현 정부가 촛불시위의 동력을 얼마나 이끌고 갈 수 있을지, 또는 촛불시위의 동력을 얼마나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발전시키고 구조화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2.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1. 이등 국민으로서의 을

 

이제 내가 말하는 을의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간략하게 소개해보겠다.[이 절은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서울, 그린비, 2017) 가운데 서문 내용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수정확장한 것이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은 을이라는 허구성을 가진 단어써야만 하는 당위가 보충되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히고 있는데, 내 생각에 을이라는 용어는 아직 학문적으로 개념화되지는 않았어도 허구적인 것은 아니다. 2장의 논의만으로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논거가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다면, 필자의 󰡔을의 민주주의󰡕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우선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는 갑과 을에 관한 담론이 나에게는 흥미롭다. 갑과 을이라는 말은 몇 년 전만 해도 아주 평범한 말이었다. 그것은 주로 계약관계에서 계약의 쌍방을 가리키는 말 이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갑질’, ‘을의 눈물같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이 말해주듯, 이 용어들은 더는 중립적인 관계의 쌍방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지배와 복종, 우월함과 열등함, 모욕과 혐오, 억압과 배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부당한 횡포에 시달리는 가맹점 점주와 역으로 그 점주의 횡포에 신음하는 알바생들, 자본의 억압과 폭력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과 갑질에 고통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원청 업체의 부당한 요구와 전횡의 희생자인 하청업체 및 직원들, 교수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무차별적인 혐오의 대상인 여성들과 소수자들, 가혹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는 어린 학생들 같이 어느덧 이라는 말은 부당한 억압과 폭력, 차별과 따돌림, 모욕과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적절히 표현한 바에 따르면 을은 몫 없는 이들과 다르지 않다.[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정치와 철학󰡕 (서울, 도서출판 길, 2015) 참조.] 그리고 10 : 90, 1 : 99 같은 표현이 말해주듯, 몫 없는 이들로서 을의 위치에 놓여 있는 이들은 바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대다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처럼 갑과 을에 관한 담론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대개 지난 1997IMF 외환위기가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히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라 재편되었으며, 그 결과는 한편으로 양극화의 심화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등 국민으로서의 을들의 확산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장하성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까지 상위 10%의 고소득층은 전체 소득의 29%를 차지했는데, 2012년에는 44.9%까지 치솟았으며, 이것은 상위 5%, 상위 1%의 고소득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장하성, 󰡔한국 자본주의󰡕 (서울, 헤이북스, 2014); 󰡔왜 분노해야 하는가󰡕 (서울, 헤이북스, 2015) 참조.] 이는 또한 고용불평등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2014년 기준 비정규직 비율은 정부 통계에 따르면 32%이고, 노동계 통계에 따르면 45%이다. 문제는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이 절반에 불과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 격차도 이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대기업 대비 90%에 해당하던 중소기업 임금 수준은 1990년대에는 70%대로, 2014년에는 60%대로 떨어졌다. 그런데 2014년 기준 중소기업은 전체 노동자의 81%를 고용하고 있고 대기업은 19%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기업에 근무하는 일부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은 심각한 소득 불평등과 고용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 실제로 한국은 OECD 국가들 가운데 저임금노동자 비중이 두 번째로 높고, “월 임금이 100만 원 이하인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 1874만 명의 3분의 1을 넘는다.”[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310.] 결국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외환위기 이후 저임금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면서 소득 불평등과 고용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것이 여러 통계 수치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다.


노동운동가 김혜진의 󰡔비정규사회󰡕라는 책은 한국 사회에서 을들이 이등 국민의 처지에 놓여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김혜진, 󰡔비정규사회󰡕 (서울, 후마니타스, 2015).현장 활동가답게 저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결과 어느덧 비정규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면모를 드러내준다. “은행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아이를 한 명 더 낳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김혜진, 󰡔비정규사회󰡕, 170.] 왜 그럴까? 비정규직일 때는 출산휴가를 쓰기도 어렵고 직장 보육 시설이나 탁아 시설을 사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아이를 더 낳기 어렵다가 정규직 일자리를 얻으면서 이런 여건들이 갖추어지지 아이를 더 낳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는 배제되었던 권리 안에 다시 편입되는 순간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관계망에 들어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김혜진, 󰡔비정규사회󰡕, 170.]


조금 더 넓혀 말하면, 우리가 흔히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키워서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든 뒤, 적절한 시점에 은퇴하여 여생을 누리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적인 사회는 우리가 보통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삶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저자는 우리 사회에 편재해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예를 통해 매우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비정규 체제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들이다”[김혜진, 󰡔비정규사회󰡕, 7.]라고 역설한다. 비정규 사회는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보통 정상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사회, 실로 그것을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만드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령화 사회를 지나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지만 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우리 사회에서 이는 더욱 절박하게 체감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비정규직이 우리 사회에서 점점 늘어가고 실로 보편적인 고용 형태로 바뀌어가는 것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일자리 문제, 또는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사회경제적 문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국민 내에서 구조적인 차별을 제도화하는 문제이다. “비정규직은 고용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고용 형태로 말미암아 삶이 불안정해지고 희망을 잃은 채 불안에 떨며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 국민이 되고 있다.”[김혜진, 󰡔비정규사회󰡕, 76~77. 강조는 인용자.] 이등 국민으로서의 을은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몫 없는 이들로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 다수를 포함하는 용어다.

 

2.2.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따라서 갑과 을에 관한 이러한 담론을 해방 이후 7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한 가지 증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 또는 정치공동체가 과연 어떤 국가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류사에서 매우 오래된 질문이며,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상충하는 답변들을 산출해온 질문이다. 따라서 이 소론에서 이 질문에 대한 엄밀하고 체계적인 탐구를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세 가지 측면만 지적해두겠다.


우선 국가는 그 구성원들의 공동선 또는 공동의 이익 및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 공동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왕이나 황제를 주권자로 하는 국가이든 아니면 귀족들의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이든 또는 넓은 의미의 민주정 국가이든 간에,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가 오직 소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는 없다. 또는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 국가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늘 그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 가치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그럴 경우에만 유지되고 존속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아니면 민주정이든 간에 국가의 권리 또는 주권자의 권리는 자연의 권리와 다르지 않으며, 각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듯한 대중들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에 의해 규정된다[Benedictus de Spinoza, Tractatus Politicus, 32, in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III (Heidelberg: Carl Winter, 1925), 284~85.]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또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분할되는, 넓은 의미에서의 계급적 공동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국가는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표방하지만, 그것은 늘 지배하는 계급의 이익에 의해 매개되는(또는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대체보충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최인호 외 옮김,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서울, 박종철 출판사, 1991), 402.]이라고 간주했지만, 우리가 굳이 이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이 자본가 계급(특히 재벌과 같은 대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관철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대 재벌의 명칭을 딴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종종 쓰이거니와, 무엇보다도 갑질’, ‘을의 눈물같은 용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는 현상 자체가 우리나라가 재벌 및 권력자들과 같은 갑의 이익을 옹호하는 계급적 국가의 하나라는 점을 방증해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대중이 우리나라의 계급적 성격을 사무치게 자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세월호 참사였다. 세월호 참사에서 대중들이 경험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검은 구멍[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109.]이라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통 국가는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가장 단단한 현실이라고 여겨지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대중들이 목도한 국가는 충격적이게도 너무나 허망한 어떤 것이고 커다란 공백[같은 책, 110]이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눈앞에서 침몰해가는 배 안에 갇힌 학생들을 구조하는 데 무능력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학생들을 구조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게 나라냐하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같은 곳]는 자각이 이루어졌다. 만약 배 안에 갇힌 학생들이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아니라 외국어고나 과학고 또는 강남의 명문고 학생들이었어도 정부가 그렇게 대응했을까라는 의문이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는 복종을 명령하는 환유적 표현으로 간주되어 분노를 자아냈다. “국가는 그들의 편’”[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2.3.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

 

하지만 국가의 또 다른 특성이 존재한다. 국가는 한편으로 공동의 이익과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지배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치안기계이기도 하지만, 국가는 또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표현을 빌리면 상상된 공동체이기도 하다.[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2006 (3rd Edition);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윤형숙 옮김, 나남, 2002.] 앤더슨 자신도 지적하고 있거니와, 이때의 상상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국가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은 상상적인 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상상적인 것은 그것을 걷어내고 깨뜨려야 비로소 우리가 국가의 실체 내지 진상(眞相)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주관적인 공상이나 착각 또는 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상적인 것은 국민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다면 국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적인 것으로서의 국가의 특성은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근대 국가는 보통 국민국가라고 한다.[국민’(nation)이라는 말을 민족’(ethnicity)이라는 말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20세기 중반까지 네이션이라는 단어는 정치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뜻과 혈통 및 문화 공동체로서 민족이라는 뜻으로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했지만,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논의를 고려한다면 양자를 잘 구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 (역사비평사, 2011) 참조.] 이는 국민이 자연적인 공동체(곧 혈통에서 유래하거나 에스니시티를 기반으로 하는)가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진 특수한 종류의 문화적 인공물(cultural artefacts)”[B.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p. 35;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56~57.]임을 뜻한다. 그리고 앤더슨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적 인공물로서의 국민은 인쇄 매체들에 기반을 둔 근대에 고유한 시간,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하나의 국민을 이루고 있는 성원들은, 대부분의 경우 서로 아무런 개인적가족적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가령 나는 서울 관악구 성현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나는 이 아파트의 다른 주민들과 극소수를 제외하면 아무런 면식 관계가 없다. 더욱이 같은 성현동의 다른 주민들과는 더더욱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러니 같은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구체적인 면식 관계나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한국 전체로 범위를 넓혀보면 더욱더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수많은 이런저런 사람들을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더 나아가 때로는 나와 피를 나눈 한민족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나와 개인적으로 매우 가깝거나 어쨌든 이런저런 친분을 지닌 일본 사람, 프랑스 사람 또는 캐나다 사람을 나는 나와는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구별한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본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혐오하는 일도 일어난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사람 또는 재일 조선인을 비롯한 한민족을 대할 때도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상상적 정체성과 상상적 일체감이 없다면, 국민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국민주의(nationalism)는 일부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서구 유럽 같은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사라진 것이며 후진국들이나 3세계 국가들에서나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다. 국민주의는 국민국가라는 정치 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상상적 지주(支柱). 마이클 빌리그(Michael Billig)라는 영국의 사회심리학자가 󰡔일상적 국민주의󰡕에서 잘 보여주었듯이,[Michael Billig, Banal Nationalism (London, Sage, 1995).]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을 비롯한 서구의 이른바 선진국들역시 정치 공동체로서 존립하고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일체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국기나 국가(國歌), 축구대표팀 같은 것, 역사 교육이나 국가의 영웅들에 대한 기억과 숭배 따위는 모든 국가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일상적 국민주의의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그렇다면 국민주의를 제3세계 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는 후진적인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주의 가운데서도 민족적 국민주의(ethnic nationalism)우리가 보통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의 줄임말이다가 강한 나라다. 민족적 국민주의의 특징은 인종적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민족과 정치적 정체성으로서의 국민이 거의 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가령 프랑스나 미국 같이 이민자들에 기반을 둔 이민자 국민국가는, 같은 미국 국민 또는 프랑스 국민이라 하더라도 민족적 출신들은 지극히 다양하다. 이 나라들은 수십 개 이상의 상이한 민족 출신들이 모여서 동일한 국민을 형성해서 살아가는 나라들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최근에는 좀 달라지고 있지만, ‘단군의 후손으로서의 한민족이 한국 국민과 거의 동일시되는 나라다. 따라서 광대뼈가 좀 나오고 머리가 검고 무슨 가문의 무슨 후손인 사람들, 어느 지역 어느 출신이라는 것이 금방 밝혀질 수 있는 사람들만이 국민으로 간주되고 또한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이처럼 국민적 정체성이 민족적 정체성과 거의 동일시되는(말하자면 국민=민족 등식)[에티엔 발리바르는 근대 시민성 개념의 한계를 탐색하는 작업에서 그것을 시민성=국적”(citizenship=nationality) 개념으로 표현한 바 있다. 곧 시민성을 특정한 국민 공동체에 속한 성원들에게만 허용한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배제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정치의 재발명󰡕 (서울, 후마니타스, 2010) 참조.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등식을 과잉결정하는 국민=민족 등식도 문제가 된다. 국민들도 민족적인 국민일 경우에만 정상적인 국민으로 표상/재현/상연되는 것이다.] 나라일수록, 그러한 동일성이 강조되는 나라일수록 소수자들 및 개인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되거나 존중되기 어렵다. 전근대 사회에서 전해진 강고한 가부장제적 질서가 더욱 권위를 부여받게 되고, 개인보다는 가문, 공동체, 국가의 정체성이 더욱 중요성을 얻게 되며, 피부색이 다르고 민족적 출신이 다르고 젠더 정체성이 모호한 이들은 정상적인 국민으로, 또는 시민이자 인간으로 대접받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갑과 을의 위계 및 차별 구조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국민=민족 등식을 매우 자연스러운 집합적 정체성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민족적 국민주의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질곡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등식은 시민성의 탈국민화를 사고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민족의 상상적 정체성에 기초를 둔 통일의 지상명령에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평화의 실천들을 종속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를 단순히 시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간주할 수도 없고 지배 계급의 이익이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계급 국가로만 사고할 수도 없으며, 그와 더불어 국가에 본질적인 상상적인 것의 측면을 유념해야 한다. 2016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촛불시위의 뜨거운 함성이 전국을 뒤덮을 때, 그 한 편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나와 국정농단을 자행한 주범인 전()대통령과 그 일당의 무죄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탄핵이 이루어진지 2년이 더 지난 현 시점에서도 독재자와 그 딸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최고 재벌의 이익에 자신이 이익이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 따라서 자신과 비슷한 을들과 일체감을 느끼고 연대하기보다는 그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은 여전히 탄핵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를 도모하고 있다.


김남주는 이라는 유명한 시에서 낫 놓고 자도 모른다고 / 주인이 종을 깔보자 /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 버리더라 / 바로 그 낫으로라고 노래했지만, 사실 종의 낫이 다른 종의 목을 겨누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김남주 이후, 󰡔을의 민주주의󰡕, 앞의 책 참조.] 이것은 주관적 착각이나 기만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에 앞서 국가의 본질적인 상상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1 : 99, 10 : 90이라는 구호들이 가리키는 심각한 양극화의 현실 속에서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을들 사이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동일한 계급의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공동의 이해관계의 정치적 추구로 이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을의 민주주의가 문제적인 화두인 것이다.

 

2.4. 국민주권을 넘어서

 

2017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하면서 마침내 5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촛불은 518 광주의 정신 위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라는 점을 역설했다.


518, ‘촛불혁명’, 국민 주권이라는 세 개의 단어를 연결하고 더 나아가 이것들 사이의 등가성을 선언한 기념사의 핵심은 국민 주권이다. 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 주권이라는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기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한 헌법 조문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조문으로 남아 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통치자(또는 지배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만 제한되어 있었던 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들로 인식되었으며 또 스스로 그렇게 처신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고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다는 말은 국민이 단순히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통치자를 통제하거나 적어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그러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 또는 인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민 주권이라는 말은 일종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주권의 주체로서 인민 내지 국민과 같은 것은 실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의 실물 내지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현존한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성과 젠더로 구별되고 지역출신학벌 등으로 나뉜다. 특히 우리가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국민은 지배자와 복종하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몫을 가진 이들과 몫 없는 이들, 갑과 을로 분할된다.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범주에는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 1퍼센트의 국민과 99퍼센트의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 이러한 은폐가 우연적인 사태이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아니라, 보편적 평등을 표현하는 국민 주권 개념의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문제적이다. 더욱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다른 주권자 국민들과 맞서는 범주일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있는 국민 아닌 이들을 시민 아닌 이들로, 따라서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아닌 이들로 배제하는 개념이다.[한나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관해서는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 1(파주, 한길사, 2005) 중 특히 9장을 참조.] 국민이라는 말이 정상성의 기준이 될 때 그것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배제와 차별, 무시의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역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단일한 개념 안에 이처럼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또한 지배와 피지배, 인정과 차별, 포함과 배제의 다양한 관계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 공통의 이름으로 호명된다는 사실은,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개념이 보편성을 표현하고 있음을 말해주지 않는가? 이것을 허구적 보편성 또는 어느 정도까지는 기만적인 보편성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성을 참칭하는 특수성(특정한 계급이나 젠더 또는 인종이나 민족 등이 이해관계를 함축하는)의 표현이라고 고발할 수 있지만, 이러한 공통의 이름으로 호명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정치적 주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인민이든 국민이든, 아니면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든 또는 다중이나 기타 어떤 것이든 간에 정치적 주체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떤 공동체의 공통적인 틀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 구성/제도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개념의 허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쉽게 포기하기는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을의 민주주의는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범주를 완전히 폐기하거나 무효화하려는 기획이라기보다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이라는 기초 위에서 국민이나 인민을 개조하려는 기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의 몫, 곧 몫 없는 이들의 정치적 주체들로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인민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으로(la partie supplémentaire),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Paris: Gallimard, 2004), 234;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서울, 도서출판 길, 2013), 217. 랑시에르의 이 테제에 대한 주석과 논평은, 자크 랑시에르, 진태원 옮김, 󰡔불화: 정치와 철학󰡕 (서울, 도서출판 길, 2015) 용어해설, 276 이하를 참조.]

 

국민 전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 곧 각각의 계급, 집단에 대한 셈을 대체보충하는 부분으로서의 을들이 국민 전체와 동일시될 수 있을 때, 계급적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시민들의 공동의 이익,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적 정치공동체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아포리아적인, 그리고 그만큼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획이지만, 해방 이후 7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 역사적인 전환점에 도달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미래를 가늠할 기획이기도 하다.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러한 새로운 발명을 위한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11장을 참조.그리고 이러한 기획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다.

 

3. 한반도 분단 체제에 관한 담론들

 

3.1. 세 가지 담론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두고 현재 한반도 분단 체제를 둘러싼 담론들을 한번 조망해본다면, 1953년 휴전체제가 성립한 이후 오늘날까지 남한 사회에서 전개되어온 한반도 분단 체제를 둘러싼 담론들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하나는 제일 전통적인 담론이고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담론이며, 두 번째는 평화지향적 안보 담론, 세 번째는 평화담론 또는 그 한 가지 변용으로서 평화국가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분류는 구갑우,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서울, 후마니타스, 2007); 󰡔국제관계학 비판󰡕 (서울, 후마니타스, 2008)에 주로 의존했다.]


첫째, 국가안보 담론은 휴전체제의 성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담론은 국제정치학에서 신현실주의라고 불리는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케네스 월츠, 󰡔국제정치이론󰡕, 박건영 옮김 (서울, 사회평론, 2000).] 신현실주의는 국제관계를 기본적으로 무정부의적 체제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 상태에서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군사력에 기초를 둔 힘의 균형이 국제체제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강대국의 군사력에 기초를 둔 이 체제에서 개별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의 여지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으며, 현실적으로는 두 강대국을 중심으로 동맹을 맺어 자신들의 국가안보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간주한다. 남한이 미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북한은 중국 및 소련과 동맹을 체결하는 것이 그 전형적 방식이다. 이 상황에서 남한과 북한은 적대적인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나타나게 되며, 양자 사이에는 적대 관계 및 흡수통일의 지향만이 존재할 뿐, 상호 이익을 공유하는 제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각 국가의 최고 가치가 국가의 보존, 곧 국가의 안보에 있기 때문에 내부의 민주주의는 극히 제약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냉전 체제가 해체된 이후 소련이라는 강대국 중 하나가 소멸한 상태에서 더 이상 신현실주의의 기본 가정이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고, 따라서 여기에 기반을 둔 국가안보 담론도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상실했지만, 국가안보담론은 여전히 보수파의 주도적인 담론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냉전 체제가 해체되고, 국내적으로는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이 시작되면서 말하자면 평화지향적 안보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안보담론이 출현했는데, 이것의 기점이 된 것이 1991년 남한과 북한 사이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이며, 그 정점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6.15 북 공동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점을 인정한 가운데,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상호 적대와 비방 행위를 중단하면서 정전상태를 남북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할 것,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할 것 등을 약속했다.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국가안보 담론에 기초한 상호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상태를 추구하며 민족 공동의 존엄과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남한과 북한 관계가 독자적인 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의 종속변수”[구갑우, 󰡔국제관계학 비판󰡕, 417로 존재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1차 북핵 위기가 터지면서 북한과 미국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자 좌초하고 말았다. 더 나아가 기본합의서 체결 당사자였던 노태우 정권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정권이었다는 점, 나아가 보수 진영 내부에서 냉전의 해체에 따른 새로운 대북관계 전환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따라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한과 북한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공존의 시기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품고 있으나, 여전히 국가안보 담론 및 그에 기반을 둔 동맹관계를 해체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2000년 김대중 정권에서 추진하여 성사된,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및 여기에서 도출된 6.15 공동선언은 많은 연구자들이 인정하듯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으며, 대략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처음으로 남한과 북한이 상대방을 국가적 실체로 인정했으며, 둘째, 1항에서는 자주적 통일원칙을 확인하고 2항에서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규정했다. 남한과 북한이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각자의 통일 방안 사이에 존재하는 수렴적 요소에 기반하여 통일을 지향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셋째, 또한 6.15 공동선언 이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공동의 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장관급 회담이 정례화되고 3대 경협 사업(금강산 관광, 개성공업지구 건설, 남북의 철도도로 연결)이 추진되며, 이산가족 상봉을 활성화하는 것 등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 교류하고 상호 이익의 폭을 넓혀가는 것을 안정적인 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 및 10.4 남북공동선언으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겠지만 안보 담론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 정책을 이끈 담론이 한편으로는 냉전 질서 및 신현실주의 이론에 토대를 둔 국가안보담론에서 탈피하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 테두리 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편으로 남한과 북한 사이의 경제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 인도적 차원의 교류 등이 활성화되고 남북 상호 간의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지만, 다른 한편 북한은 북한대로 여전히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대칭적인 핵전력 개발에 몰두했으며, 노무현 정부는 “21세기 선진 정예 국방을 위한 국방개혁 2020()”에서 볼 수 있듯이 매년 국방비를 11% 증액하여 군사력을 질적으로 강화하는 군사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구갑우,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61-62.]따라서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경제문화사회적 교류와 협력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발전시키려고 하면서도 군사적 측면에서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의 진전을 가져온 것이 두 번째 담론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본래적 의미의 평화지향적 안보 담론이 추구하는 지역안보 내지는 공동안보 그리고 인간안보에 관한 적극적인 관심을 결여하고 있는 것도 두 번째 시기 안보담론의 한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2018년 초 평창임시평화체제를 기점으로 시작된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의 새로운 전개를 세 번째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앞으로의 역사가 규정해줄 것이다. 어쨌든 4.27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서는 이전의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보다 더 진일보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인 것으로 보인다.[판문점 정상회담 및 평양 정상회담, 그리고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로는 전재성, 판문점 선언 이후 새로운 도전들, 󰡔EAI 논평󰡕 (동아시아 연구원, 2018.5); 고유환, 2018 남북정상회담과 비핵평화 프로세스, 󰡔정치와 평론󰡕 22 (한국정치평론학회, 2018); 구갑우, 평창임시평화체제에서 판문점 선언으로; 김창희 한반도 평화정착과 4.27 판문점 선언, 󰡔한국정치외교사논총󰡕 401(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8); 천정환, 다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4·27 판문점 선언과 북미회담 전후 통일평화 담론의 전변, 󰡔역사비평󰡕 124 (역사비평사, 2018); 황지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귀환: 미국우선평화 대 병진평화, 󰡔한국과 국제정치󰡕 104 (극동문제연구소, 2019) 등을 참조.특히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나갈 것이다라는 3항이 중요하다. 3항을 통해 최초로 비핵화와 더불어 평화체제 구축이 남북정상회담의 의제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3항의 정전협정평화협정으로 전환할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으며, 는 상호 불가침과 아울러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해가자는 약속을 최초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판문점 선언은 이전 시기의 남북 정상회담이나 합의서에서도 나타났던 경제문화사회적 교류와 같은 기능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새롭게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한반도 분단체제를 둘러싼 세 번째 담론인 적극적 평화담론에도 상당히 부합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한에서 평화담론은 2000년대 이후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및 평화네트워크 같은 시민단체를 비롯하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한양대 평화연구소 등과 같은 대학연구기관, 그리고 중견소장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한국의 평화 담론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구갑우,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국제관계학 비판󰡕 이외에 윤홍식 엮음, 󰡔평화복지국가: 분단과 전쟁을 넘어 새로운 복지국가를 상상하다󰡕 (서울, 이매진, 2013); 이병천 외 엮음,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서울, 사회평론 아카데미, 2016) 등을 참조.요한 갈퉁을 비롯한 국제적인 평화학의 기조와 일치하게 국내 평화 담론도 두 가지 평화 개념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논의를 조직하고 있다. 첫째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둘째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는 갈퉁의 입론에 따르면 폭력이 부재한 것, 특히 직접적 폭력 이외에도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이 부재한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다.[요한 갈퉁, 이재봉 외 옮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파주, 들녘, 2000).]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 평화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무엇이 평화인가라는 물음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평화를 전쟁의 타자로 규정했던 데서 더 나아가 폭력의 타자로 규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전쟁의 부재로서 소극적 평화를 문자 그대로의 전쟁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갈퉁이나 평화학의 관점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이병수, 한반도 평화실현으로서 적극적 평화, 󰡔시대와 철학󰡕 7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 참조.] 오히려 소극적 평화를 적극적 평화의 관점에서 다면적으로 규정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령 국제 평화학의 표준적인 교재 중 한 권에서는 소극적 평화의 측면을 외교, 협상이외에도 군비축소와 군비통제, 국제협력, 공동 안보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다.[David P. BarashChalres P. Weble, 송승종유재현 옮김, 󰡔전쟁과 평화󰡕 (서울, 명인문화사, 2018).] 더 나아가 비도발적 방어나 방어적 방어 같은 개념도 소극적 평화의 주요 측면 중 하나로 간주된다. 소극적 평화가 갈등연구와 관련이 있다면 적극적 평화는 발전연구와 관련이 있다는 갈퉁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적극적 평화 개념에는 전쟁과 같은 직접적 폭력 이외에 구조적 폭력이나 문화적 폭력에서의 자유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평화의 내용이 훨씬 더 확장된다. 갈퉁은 특히 4가지 인간 욕구에 기반을 두고 적극적 평화 개념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그는 생물학적 욕구인 생존(Survival)의 욕구, 복지(Well-being)의 욕구와 더불어 정신적 욕구인 정체성(Identity)의 욕구와 자유(freedom)의 욕구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이해하고,[요한 갈퉁,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398 이하.4가지 욕구의 실현을 방해하거나 좌절시키는 것을 모두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착취나 억압, 차별 같은 것은 구조적 폭력 속에 포함되며, 문화적 폭력은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올바른 것으로서 또는 적어도 잘못된 것은 아닌 것으로서 보이게 하거나 심지어 느껴지게 만”[같은 책, 413]드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3.2. 적극적 평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론

 

이렇게 되면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복잡한 문제가 된다. 가령 한반도 평화체제는 소극적 평화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단순히 군사적 충돌이나 갈등, 긴장 등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 군비 축소나 군비 통제를 비롯하여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교류와 협력을 제도화하는 것까지 포함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의 남북관계의 쟁점 및 지난 판문점 선언의 조항들이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라고 하는 것도 모두 사실은 소극적 평화 실현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적극적 평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것은 한반도의 전쟁 및 군사적 충돌과 긴장관계의 해소를 넘어서,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까지 해소하려는 새로운 체제 내지 질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가령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같은 것은 단순히 직접적 폭력을 유발하는 분단체제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을 함축하는 원천으로서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분단체제를 남북의 국가 간이나 상반된 이념간의 대립 위주로 인식하기보다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작동하는 어떤 복합적인 체제와 그에 따른 다수 민중의 부담이라는 차원 위주로 이해하고 있고,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체제라고 불릴 만큼의 일정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파주, 창비, 2006), 45.]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분단체제는 하나의 구조적 폭력이자 문화적 폭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그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평화체제란 이러한 직접적구조적문화적 폭력의 복합체로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 따라서 갈퉁 식으로 말하면 적극적 평화를 구현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0187월 강연에서 촛불혁명과 관련하여 최근 남북관계 발전과 북미 관계 전환의 물꼬를 튼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장래, '헬조선'의 존속과 확대를 거부한 혁명이며, ‘낮은 단계의 연합을 포함하는 한반도의 점진적단계적창의적 재통합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혁명이다[백낙청,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 한반도평화포럼 강연(2018.7.12.) (http://www.koreapeace.co.kr/pds/issue_view.php?notice_seq=9875&start=0&key=title&keyword=&table_gb=issue, 2019.5.25. 검색)] 라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요한 갈퉁과 백낙청의 입론을 결합하여 마음의 분단을 극복하고 분단의 아비투스를 해체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핵심임을 주장하는 박영균의 논의도 분단체제의 극복과 적극적 평화의 형성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박영균,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평화구축의 전략,󰡔통일인문학󰡕 68(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6.]


그런데 백낙청의 주장에서는 분단체제 및 그것이 표현하는 분단모순과 관련하여 애매함이 나타난다. 곧 분단모순은 계급모순이나 젠더모순 또는 생태계적 모순 등과 같은 다른 모순들(또는 갈등)과 병렬적인 하나의 모순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급진적으로는 이러한 다른 모순들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분단모순은 적극적 평화의 관점에서 이해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한 가지 쟁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후자와 같이 이해한다면 분단모순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쟁점 전체일뿐더러, 다른 모든 쟁점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 쟁점, 이를 테면 최종 심급을 이루는 것으로 표상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분단체제(또는 분단모순)의 궁극적 극복으로 이해된 통일은 다른 모든 모순의 종합적인 해결 내지 적어도 그 해결을 위한 조건으로 나타난다. 반면 전자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분단모순의 극복 및 그 형태로서의 통일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한 가지 조건이자 결과로 이해될 것이다. 백낙청의 주장은 후자의 이해방식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매우 환원주의적인 관점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반면 최장집의 경우는 분단체제의 문제를, 따라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말하자면 소극적 평화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다.[최장집, 통일인가 평화공존인가?, 󰡔정치의 공간󰡕(서울, 후마니타스, 2017);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 󰡔시사인󰡕 588(2018.5.28.).] 분단 이후 70여 년이 지나면서 남한과 북한은 독립적인 두 개의 국가가 되었으며, 분단이 행사하는 폭력적인 측면이 존재하지만, 두 개의 국가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자율성을 지닌 국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백낙청과 달리 최장집에게 분단은 구조적문화적 폭력의 차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통일과 평화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고 심지어 분리되어야 하는 쟁점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 또는 평화공존이다. 이에 따라 그는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평화체제 구축의 문제는 남한과 북한 두 나라가 분단이 주는 장애를 넘어서 좀 더 효과적으로 개별 국민국가로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계기로 삼는 것이 중요하며, 상호 교류와 신뢰 쌓기 및 상호 발전의 과정을 거쳐, 필요하다면 차후에 국가연합이 됐든 연방제가 됐든 그 이후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가 한 번도 갈퉁 식의 적극적 평화론을 거론하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증적 사회과학자로서 그의 관점에서는 남북한 각자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쟁점이자 목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최장집은 백낙청과 달리 평화체제 구축(또는 탈냉전)의 문제와 한국의 국내 정치의 문제를 독립적인 쟁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자는 말하자면 국가의 대외적인 문제, 따라서 일종의 외교 내지 국제정치적 쟁점으로 이해하는 반면, 후자는 국내적인 쟁점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낙청의 환원주의적 관점에 비하면 이러한 입장이 지닌 현실주의적 장점이 있지만, 최장집의 관점은, 4장에서 제시하려고 하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의 쟁점으로서 착취와 배제, 리프리젠테이션의 쟁점을 고려하는 데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일련의 연구자들은 역시 적극적 평화의 관점에서 평화국가내지 평화복지국가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주 39)에서 언급한 문헌들 참조] 이들은 그동안 한반도 분단체제의 현실과 그 담론에 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안보국가 내지 반공(反共)개발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상으로 평화국가 내지 평화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은 한편으로 그동안 제시되었던 국가안보 담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군비축소 및 방어적 군사 개념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고, 또한 동아시아 차원에서 그동안의 냉전적 동맹 체제를 해체할 수 있는 공동안보와 협력안보, 더 나아가 인간안보 개념을 발전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적극적 평화의 차원에서는 반공 내지 반북한의 억압적 토대 위에서 재벌 중심의 경제발전을 추구했던 개발국가의 한계를 넘어서 평화체제의 토대 위에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재편한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다.

 

4. 을의 민주주의와 평화체제 담론의 ()구축

 

나의 개인적 입장을 밝히라면, 이 세 번째 논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사와 제일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의 작업은 다소 두루뭉술한 것 같다. 그것은 요한 갈퉁이 말하는 적극적 평화라는 관점 또는 그와 비견될 수 있는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는 구조적문화적 폭력의 문제에 대해 이들 논자들이 다소 막연하거나 일반적인 논지에 그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윤홍식의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한반도 평화구축이 그렇듯이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철저하게 정치적인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평화복지국가는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윤홍식, 한국 복지국가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바라보기,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133.]그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구의 경험을 보면 노동계급이 복지국가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계급이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고 불안정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본다면 평화복지국가의 주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반세기가 넘게 지속된 분단과 (권위주의적) 개발국가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집단이다. 분단과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리고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여성, 농민, 청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평화복지국가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과 필요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은 권위주의에 대항했던 민주화 투쟁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위험, 즉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싸워온 연대의 역사적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바로 이들이 현실 생활문제에 대해 타협하고 연대해 반북개발국가와 맞서는 연대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역사적 과정이 될 것이다.” [윤홍식, 앞의 글, 134]

 

어떻게 보면 이 인용문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쟁점을 첨예화하기 위해,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제기되어야 하는 세 가지 일반적인 쟁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보고 싶다.[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이라는 세 가지 개념이 담고 있는 이론적 쟁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네 가지 신화와 세 가지 쟁점, 󰡔인문학 연구󰡕 30 (인하대 인문학연구소, 2018)을 참조.] 

 

4.1. 착취

 

첫 번째는 착취라는 쟁점이다. 알다시피 착취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며, 따라서 그만큼 매우 무거운 역사적 부담(곧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과 더불어 이론적인 약점도 지닌 개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우리가 현실에서 나날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들을 착취라는 개념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기존의 남북관계 및 앞으로 예상되는 평화체제 구축 이후의 남북관계에서도 착취라는 문제가 더 심각한 쟁점으로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개성공단은 남북 경협의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되었지만, 과연 그것이 정의로운 경협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소지가 있다. 개성공단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업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한 노동자들을 저임금착취해온 사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더욱이 앞으로 북한이 개방되고 남한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자본주의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게 되면, 아마도 정상적인 착취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초과착취가 나타날 확률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적 관계의 심화와 더불어 계급적 불평등도 심화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북한은 근면하고 솜씨 좋은 저임금 북한노동자들을 최대의 자산으로 삼아 단기간에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추구할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처럼 근면하고 솜씨 좋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활용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바로 착취 과정이 아닌가? 그리고 순조로운 경제발전(착취과정)이 이루어질 경우 생겨나게 될 필연적인 불평등의 심화는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이런 문제들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경협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북한의 번영과 남한의 성장 동력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거나 은폐될 가능성은 없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지금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쟁점으로 표상되고 재현되고 있는가?

 

4.2. 배제

 

또 다른 중요한 쟁점은 배제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현실에서 경제적 착취가 경제만의 문제로 국한된 적은 없다. 그것은 항상 정치적 지배와 더불어 인간적 소외 또는 예속적 인간의 생산 및 재생산과 배제라는 문제를 수반했다. 이 때문에 루이 알튀세르는 말년의 몇몇 글에서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에서 벗어나, 착취를 노동과정의 냉혹한 제약들(시간, 강도, 파편화)과 분업 및 노동조직 규율의 냉혹한 제약들 속에서 사고하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의 재생산조건(소비, 주거, 가족, 교육, 보건, 여성 문제 등) 속에서 사고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런데 착취를 이렇게 이해하면, 착취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착취 내지 수탈을 전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이 수탈하는(비전유하는) 이들의 예속(subjection), 자본이 착취하는 이들의 자유를 위한 숨겨진 가능성의 조건”[Nancy Fraser, “Roepke Lecture in Economic Geography: From Exploitation to Expropriation”, Economic Geography, 94: 1, 2018, 4. 강조는 원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서 착취하는 이들의 자유란 마르크스가 말했던 노동자들의 이중의 자유를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분적 예속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또한 생산수단의 소유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유로운 노동자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 곧 생명체로서 탄생해야 하고 양육되어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성장해야 하며, 또한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동을 맡아서 수행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후자의 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따라서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의 회로 바깥에 존재한다. 또한 중심부 자본주의 노동자들 및 그의 가족들이 생필품을 싼 값에 구입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부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회로 안팎에서 저임금과 초과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다는 다른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프레이저는 착취와 구별되는 수탈/비전유(expropriation)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다름 아닌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과정 속에서 남한 노동자들의 착취를 위해 북한의 노동자들이 수탈/비전유되는 일, 역으로 북한 노동자들과의 저임금 경쟁 속에서 남한 노동자들이 초과착취에 시달리는 일, 또는 북한 여성들이 남북한 남성 노동자들의 착취과정 속에서, 그러한 착취의 전제 조건으로서 더욱 수탈/비전유되는 일은 없을까? 단연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지금 거의 누구도 이 문제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쟁점으로 표상하지도 재현하지도 또한 대표하지도 않기 때문에(북한 노동자들 및 수탈/비전유되는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착취와 배제를 재현하고 대표하는 일은 언제 가능하게 될까?), 더욱 더 노골적이면서 또한 은밀하게(다시 말하면 문제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자본주의 구조 자체, 곧 노동력이나 생산력이라는 개념과 생산과정 자체가 규율권력의 작용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진태원,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 󰡔철학사상󰡕 68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8) 참조.] 더욱이 푸코는 규율권력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예속적 주체화 (assujettissement)의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푸코는 규율권력의 특징 중 하나를 여백이나 잔여를 만들어내는 데서 찾는다. 곧 규율 권력은 단순히 사회 또는 자본주의 체계의 기능을 위해, 그것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기능적 요소들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들을 함께 생산해낸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을이나 을의 을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많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잔여 또는 잔여 중의 잔여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모색되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는 혹시 새로운 종류의 을들 또는 을의 을들을 양산하는 체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는 평화체제 구축의 쟁점으로 표상되고 재현되고 있는가? 이러한 주변화와 배제를 상연하고 대표하는 이들이 존재하는가?

 

4.3. 리프리젠테이션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 절에서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암묵적으로 사용한 바 있는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쟁점을 제기해보자. 리프리젠테이션은 정체성의 ()구축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지난 20여 년 동안 자신이 수행해왔던 정의의 두 가지 차원, 곧 재분배와 인정을 넘어서 세 번째 차원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낸시 프레이저, 김원식 옮김, 󰡔지구화 시대의 정의󰡕 (서울, 그린비, 2009).] 그것은 곧 정체성의 차원인데, 여기에서 정체성이란 일차적으로 사회정치적인 정체성을 가리키며, 이는 국민적 정체성이나 계급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또는 여성적 정체성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리프리젠테이션이라는 문제로 제시하면서 프레이저는 이때의 리프리젠테이션을 틀 짜기”(framing)의 문제로 개념화한다. 곧 다양한 종류의 정체성들은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과 변형, 재구성의 산물이며, 이 작용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틀 짜기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이다.


아울러 이 글에서 representa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이 단어의 일반적인 번역어들인 표상이나 재현 또는 대표 같은 용어들로 번역해서 사용하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리프리젠테이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이 표상, 재현, 대표 및 그 이상의 복합적 의미들(가령 상연이라는 의미)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연관망이기 때문이다. 가령 데리다는, 재현으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 이전에 이미 객관적 실재가 그 자체로 현존해 있고, 언어적 표상이나 미학적 재현은 자신에 선행하는 이러한 실재를 정신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다시-제시하는 것(re-present)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로고스중심주의라고 부른 바 있다. 하지만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적 통찰 이후, 더욱이 데리다 자신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기록(écriture) 개념 이후 현존의 형이상학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개념이 되었다. 실재의 현존은 사실은 (언어 및 기록에 의한) 재현 작용에 의해 성립하며 그것에 의존한다.


이러한 통찰은 정치사회적인 대표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대표로서의 리프리젠테이션 이전에 이미 성립해 있는 정치적 주체 내지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주체나 행위자는 리프리젠테이션에 의해 구성되고 변형되며 재구성됨으로써만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Sofia Näsström, “Representative Democracy as Tautology”,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5: 3, 2006; Nadia Urbinati/Mark Warren, “The Concept of Representation in Democratic Theory”,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11, 2008; Lisa Disch, “The ‘Constructivist Turn’ in Democratic Representation”, Constellations, 22: 4, 2015 등을 참조.] 가령 오랫동안 여성들은 정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만 존재해왔을 뿐 공적인 행위자들로 재현되지도 표상되지도 않았으며 대표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19세 이하의 시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들인데, 이는 그들이 정치적 행위자들로 재현되지도 표상되지도 대표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에서 리프리젠테이션의 문제가 긴요한 이유는, 앞에서 제기된 착취의 문제나 배제의 문제에서 그 문제의 당사자들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바로 리프리젠테이션이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 사람들과 관련된 착취나 배제의 문제는 갈퉁이 말하는 의미에서 구조적 폭력이나 문화적 폭력의 문제로 쉽게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관련되지 않은 착취나 배제의 문제는 그것이 한국의 국경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해도 전자와 동일한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처럼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미 정해진 경계나 척도를 문제 삼지 않은 가운데 착취 및 배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러한 범위 바깥에 놓인 이들에 대한 폭력 내지 부정의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 정의의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 자체가 또 다른 부정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018년 내내 뜨겁게 전개된 미투 운동에서도 그 당사자들은 늘 한국 여성들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여성들, 또는 이주 여성들이 한국 여성들에 비해 성적 폭력 및 차별과 무시에서 더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언어 사용 능력이 뒤떨어지고 고용 안정성이 취약하며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외국인 여성이나 이주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 폭력과 차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교류가 증가하고 북한에 대한 남한 기업들의 투자가 증가할수록 현재 한국 사회 내에서 외국인들이나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북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제기해볼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과 같은 국민인가? 곧 남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주권을 구성하고 동일한 법률과 제도에 따라 재현되고 표상되고 대표되는 법적정치적사회적 주체들인가? 아니면 그들은 같은 국민은 아니지만 같은 민족인가? 같은 국민은 아닌데 같은 민족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들은 당장은 같은 국민은 아니지만 잠재적인 국민으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는 국민보다 더 근원적이고 더 본래적인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는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민족적 국민주의의 표현, 곧 민족=국민 등식의 또 다른 재현이자 표상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다른 민족적 국민주의들과 마찬가지로 한민족의 민족적 국민주의가 외부적으로는 배타적이고 내부적으로는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것, 그것도 이번에는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에서 작용하는 것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가?[따라서 이는 한국의 다문화주의의 문제점과 연동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시원, 한국 다문화주의 담론의 문제점에 관한 고찰, 󰡔코기토󰡕 69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1).] 가령 한편으로는 같은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주민과 북한 주민 사이에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 있는 정체성의 내적 위계화, 말하자면 1등 한민족과 2등 한민족 사이의 차별은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국민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민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여기에 기반을 둔 통일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체제의 목적이자 완성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천정환이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사실은 두 개의 헬조선이 합쳐서 더 크고 나쁜 헬[천정환, 다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 - 4·27 판문점 선언과 북미회담 전후 통일평화 담론의 전변, 󰡔역사비평󰡕, 369.]이 되는 것, 곧 남한의 헬조선에 북한의 또 다른 헬조선을 가중시키는 것을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5. 결론을 대신하여

 

내가 지금까지 특별한 설명이 없이 여러 차례 사용해왔던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표현에 대해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해명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내가 구축도 아니고 탈구축’(deconstruction)도 아닌 ()구축이라는 표현을 이 글의 제목으로 삼고 또 여러 차례 사용해온 것은 무엇보다,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시도 및 그에 관한 논의들이 평화라는 말의 다면적인 함의를 충실히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은 단지 법적제도적 구축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좀 더 나아가 탈구축적인 구축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탈구축적인 구축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구축을 가리킨다. 곧 한반도의 약소자들, 을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차별하고 (리프리젠테이션에서) 배제해온 다양한 종류의 폭력들의 완화와 변형 또는 종식을 가져올 수 있는 구축이야말로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평화체제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축은 필연적으로 탈구축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구축되어 있는 법적제도적 질서들을 무한한 정의[주지하다시피 데리다에게 정의란 타자들의 독특성을 뜻한다. 이 타자들은 필연적으로 약소자들, 곧 을들일 것이다.]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탈구축하고 재구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아직 구성되지 않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탈구축해야 할 적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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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제가 번역한 루이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가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출간됩니다. 여기 "역자 후기"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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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

 

루이 알튀세르는 우리에게 한편으로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또는 정신병으로 고통 받다가 끝내 아내를 살해했던 비극적인 철학자로, 또는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와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등과 같은 여러 철학자들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또한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에 깊은 알튀세르 효과를 낳았던 철학자였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까지 그는 한국 사회 성격 논쟁에서 이른바 ‘PD의 이론적 준거가 된 바 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주의가 위기에서 파국으로 나아갔던 시기에, 알튀세르는 다소 역설적이게도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복권과 현실적 실천을 위한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서 부인을 목 졸라 살해한 이후 알튀세르는 이론적·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라짐은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예고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는 더 역설적인 (하지만 의미가 없지는 않은) 작업이었다.


작년에 국내에 출간된 알튀세르의 유고 󰡔검은 소󰡕에 부친 한국어판 서문에서 나는 루이 알튀세르가 누구였고, 누구인지, 그리고 앞으로 누구이게 될 것인지 이제는 더 이상 그리 자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진태원,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 󰡔검은 소󰡕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이는 무엇보다도 지난 1990년 알튀세르가 사망한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 출간되고 있는 방대한 분량의 유고가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사상의 면모들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생전에 출간했던 저작들에 남아 있는 공백 및 행간들을 더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발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같은 용어들은 오늘날 말년의 알튀세르의 비의적秘義的인 사상을 상징하는 용어로 통칭되지만, 최근에 출간된 유고들은 그가 이미 1960년대부터, 곧 그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당시부터 그것에 대한 반경향으로서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 마주침의 유물론에 관한 사유를 전개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1960년대의 왕성한 저술 작업에 비하면 1970년대 알튀세르의 작업이 매우 단편적이고 간헐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어서, 왜 그가 이처럼 급격하게 지적 생산성을 상실하게 되었는지 늘 궁금하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역시 최근 출간되고 있는 유고들은, 비록 당시에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알튀세르가 매우 많은 분량의 원고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집요하게 모색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유고들 중 일부는 정치철학에 관한 알튀세르의 강의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 출판하는 이 강의록과 더불어 루소에 관한 또 다른 강의록이 대표적인 것인데,[Louis Althusser, Cours sur Rousseau, Le Temps des Cerises, 2012; 󰡔알튀세르의 루소 강의󰡕, 황재민 옮김, 그린비, 근간.] 이 강의록들은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치사상사에 대한 면밀하고 독창적인 해석가로서의 알튀세르, 그리고 교수로서의 알튀세르의 구체적인 면모들을 보여 준다.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해석이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1990년대 초에 알튀세르 사상이 국내에서 짧은 전성기를 누릴 때 근대 정치철학에 관한 알튀세르의 여러 글들을 편역한 책이 출간된 적이 있고,[루이 알튀세르,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이 책에는 원래 프랑스어로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1959)를 비롯해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관한 논문, 마키아벨리에 관한 강연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유고도 번역된 바 있다.[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1972), Editions Tallandier, 2009; 󰡔마키아벨리의 가면󰡕, 김정한·오덕근 옮김, 이후, 2001.] 하지만 무엇보다 번역의 문제점으로 인해 이 책들은 근대 정치철학에 관한 알튀세르 해석의 논점과 의의를 충실히 전달해 주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국내의 논의에도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강의록의 특징은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를 비롯하여 몽테스키외, 콩도르세, 엘베시우스 같은 18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들,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철학과 같이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흥미롭고 독창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알튀세르의 강의는 내용의 독창성과 아울러 청중을 사로잡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읽다 보면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개별 사상가들에 대한 강의 내용도 눈길을 끌지만,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포착하는 독창적인 능력도 돋보인다. 특히 12장에서 제시된 몽테스키외에서 콩도르세, 엘베시우스를 거쳐 루소에 이르는 18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사에 관한 개관은 알튀세르 강의의 간결함과 깊이, 독창성을 잘 보여 준다.


알튀세르의 근대 정치철학 강의의 특성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이 강의의 제도적 배경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가 1948년에서 1980년까지 무려 32년 동안 재직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는 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기관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교사(사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를 모두 교수’professeur라고 부른다)를 선발하는 시험을 아그레가시옹agrégation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고등사범학교에서는 더 많은 학생들을 이 시험에 합격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위한 시험 준비 강의를 진행한다. 아그레가시옹, 곧 교수자격시험은 필기시험(주제에 대한 논술과 고전에 대한 주해)과 구두시험(강의)으로 이루어지며, 매년 초 올해의 시험 주제가 발표된다. 대개 철학사의 고전적인 몇 가지 텍스트들이 시험 주제가 되는데, 가령 2018년 철학 분야의 필기시험은 노동, 기술, 생산이라는 주제 중 한 가지를 고르거나 결합해서 논술하는 것과 스토아학파 및 라이프니츠에 관한 철학사 논술로 이루어져 있고, 구두시험은 프랑스 고전의 경우 콩디약Etienne Bonnot de Condillac󰡔인간 인식 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connaissances humaines과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그리고 그리스, 라틴 고전 텍스트 등이 주제였다.


이 책의 내용을 이루는 근대 정치철학 강의 역시 교수자격시험을 위한 강의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알튀세르 강의의 일차 목적은 시험 주제가 되는 텍스트들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확하게 소개하는 것이지, 자신의 시각에 입각하여 텍스트를 재해석하거나 변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특히 이 책의 2부를 이루는 마키아벨리 강의와 3부의 루소 및 홉스와 로크에 대한 강의, 그리고 4부의 홉스 강의 등에서 잘 드러나는 특징이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홉스의 󰡔시민론󰡕, 로크의 󰡔통치론󰡕,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사회계약론󰡕 같은 근대 정치철학의 고전들의 내용과 주제를 상세하게 제시하면서, 한편으로 각각의 텍스트의 논리적 구조를 재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텍스트들을 17~18세기 서양 정치철학의 흐름 속에서 조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특히 2~4부의 논의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사에 대한 충실한 교과서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강의의 객관적 제약 속에서도 알튀세르는 수동적으로 텍스트를 요약정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앞서 언급했던, 12장의 18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에 대한 개관이 흥미롭다. 이러한 개관은 17세기 절대주의의 등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알튀세르는 17세기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전개과정 및 논쟁은, 귀족의 퇴락과 제3신분의 흥기를 나타내는 절대주의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곧 한편으로 그 이전의 중세적 질서를 옹호하는 이들로 페늘롱, 불랭빌리에, 보방 같은 이들이 위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키아벨리, 홉스,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같은 이들, 곧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대표자들이 절대주의의 옹호자들로 제시된다. 이러한 대립은 18세기에도 이어져서 중세적 자유를 옹호하는 몽테스키외의 입장과 그의 반대편에 위치한 백과전서파, 곧 발흥하는 제3신분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관점과 달리 이러한 대립을 선명히 하면서 후자와 같은 입장을 진보적인 부르주아의 입장으로 옹호하는 데 주력하기보다, 그들 각각의 사상을 내재적 논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결과 한편으로 18세기 프랑스 정치사상의 전개과정을 해석하는 그의 고유한 입장이 나오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각 사상가들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그들 사상의 독특성에 주목하고 이를 자신의 이론적 관심으로 재전유하려는 노력이 나오게 된다.


이미 알튀세르는 1959년에 몽테스키외에 관한 저서인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를 출판한 적이 있는데(이 작은 책은 몽테스키외 연구의 필독서로 평가받고 있다), 본 강의록에서는 정체(政體) 또는 사회를 분류하는 몽테스키외의 독특한 이념형적 유형론(카시러가 이미 주목한 바 있는) 이외에 풍토라는 개념이 나타내는 물질적 규정성 이론에 주목한다. 이는 이념적인 역사(또는 헤겔 식으로 말하면 이성으로서의 역사)와 더불어 물질적 규정의 전개로서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또한 콩도르세의 경우 알튀세르는 그가 오류의 심리학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주목한다.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한편으로 보면 계몽주의에 고유한 이성의 진보의 역사철학을 보여주며, 따라서 헤겔의 이성의 역사철학을 예비하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목할 만한 오류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 오류 이론의 출발점은 계급 분할과 그에 따른 두 개의 인간의 분리다. 곧 잉여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계급이 출현하는데, 이들은 여가 시간에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지식을 획득하고 이를 자신들의 지배에 이용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두 개의 교리를 만들어내는데, 하나는 자신들의 지식을 소통하기 위한 교리였고, 다른 하나는 민중을 위한 교리였다. 그런데 이 후자의 교리는 전자의 교리와 달리 자신들이 획득한 지식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지 않고, 그것을 왜곡하고 단순화한 것이었다. 지식은 권력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민중에게 감추어야 하는 것이었고, 그들에게는 진리가 아니라 왜곡된 진리를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오류를 가르쳐야 한다는 역설적인 테제가 나오게 된다. 오류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이 테제가 이후에 알튀세르가 발전시킨 그의 이데올로기론과 공명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흥미로운 논의는 엘베시우스의 저작에 대한 강의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프랑스 유물론자 중 한 사람으로 간단하게 알려져 있는 이 사상가의 저작에서 알튀세르는 17세기의 회의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철학, 곧 인간의 이익추구 및 이기심에 관한 부정적인 비판을 전도시켜서 그것을 인간 행동의 보편적 동력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18세기 도덕적 유물론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을 발견한다. 따라서 엘베시우스는 공리주의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알튀세르는 오히려 그의 사상의 흥미로운 점을 인간에 대한 아주 새로운 관점에서 찾는다. 그것은 인간을 절대적 가소성(可塑性)을 지닌 존재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는 인간이 유기체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던 디드로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에게 원초적인 도덕적 자유의 능력을 부여했던 루소와도 구별되는 엘베시우스 사상의 독창적인 면모다. 그는 인간을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로, 곧 환경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존재로 이해했으며, 누군가가 바보가 되거나 천재가 되는 일, 또는 미치광이가 되는 일은 모두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특히 인간은 어린 시절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정 환경 및 사회 전체의 환경에 의해 규정되며, 따라서 교육의 문제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역으로 말하면 엘베시우스에게 교육은 인간 존재를 생산하고 변형하는 활동 일반으로서 확장된 의미를 얻게 된다.


알튀세르는 엘베시우스의 이러한 사상이 인간 생산의 역사로서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만약 인간의 발전이 환경의 영향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면,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 자신의 역사에 의해 전체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변형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전에는 결코 천명된 적이 없는매우 급진적인 사상이다. 내가 알기로 알튀세르는 생전의 다른 저작에서 엘베시우스에 관해 상세하게 언급한 적이 없지만, 이 강의록에서 그가 재구성하고 있는 엘베시우스 사상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어떤 특성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험적인 본성(또는 천부적 권리로서의 인권같은 것조차도)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는 태어날 때부터(또는 그 이전부터) 죽을 때까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고 변형되는 존재라는 점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호명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 호명 이론은 인간은 그 계급적 정체성(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등)만이 아니라 그 개인적 실존에서까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재생산되고 변형된다는 것, 따라서 이데올로기 바깥에서의 인간의 삶, 인간의 사회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엘베시우스의 반()자연주의적 인간학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가능한 또 다른 원천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엘베시우스는 자신의 인간학의 급진적인 함의를, 당대 계몽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적도덕적 개혁주의로 봉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나 스피노자 또는 루소만큼 알튀세르의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이 강의록에서 알튀세르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는 사상가는 루소다. 알튀세르는 이미 1967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관한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알튀세르의 루소 강의는 그의 논문이 오랜 시간 공들여 진행된 강의 작업의 결과였음을 증언해 준다. 또한 1962년에 이루어진 마키아벨리에 관한 강의는 1972년에 작성된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제목의 유고에 집약된 마키아벨리 해석의 기원을 이룬다. 따라서 이 책은 알튀세르의 사상이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조회 위에서 형성되고 변형되었음을 알려 준다. 특히 마키아벨리와 루소에 대한 알튀세르의 독해를 살펴보지 않고서 우발성의 유물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 책을 번역하면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루소의 경우 󰡔인간불평등기원론󰡕이 특히 중요하다. 알튀세르는 1950년대 국가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인간불평등기원론󰡕을 부()논문 주제로 택했을 만큼 이 책을 각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지금은 국가박사학위 제도가 사라졌지만, 과거에 이 제도가 있을 경우 국가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을 담은 주()논문과 함께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담은 부논문을 제출해야 했다. 가령 들뢰즈의 경우 󰡔차이와 반복󰡕이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이었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가 부논문이었다.] 그것은 이 책이 “18세기 전체를 지배”(본서, 150)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이처럼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은 역사에 대해 그 시대에 속한 가장 심오한 고찰”(본서, 같은 곳)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며, 특히 역사의 전개, 사회의 전개를 그 물질적 조건들과 변증법적으로 연결돼 있는 전개로서 체계적으로 인식”(본서, 158)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이러한 언급이 뜻하는 바는 루소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 계몽주의 사상의 내부 반대자였다는 점이다. 루소는 다른 계몽 사상가들과 함께 역사를 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만, 다른 사상가들과 달리 이를 이성의 발전 과정 내지 이성의 자기 실현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루소가 보기에 이는 역사의 실제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몽주의 시대 자체의 본질적 모순인 어떤 객관적 모순, 곧 자연적 인간의 탈자연화[변질]”(본서, 437)이라는 모순을 인식하는 것,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사로잡고 있던 문제를 사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자연 상태의 상실은 인간 사회의 본질을 구성하는데, 이는 어떤 점에서는 홉스나 로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루소는 인간 사회의 본질을 사고하기 위해 자연 상태에서 이미 주어져 있는 것, 자연법에 기반을 두고 사회의 본질을 사고하지 않는다. 오히려 루소는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사실은 사회적 인간의 모습을 자연 상태 속으로 투사한다고 비난한다. 이는 단지 인식론적 오류나 착각일 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알튀세르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는 사실은 단순한 자연 상태가 아니라 순수 자연 상태)를 상실한 사회적 인간의 모습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함으로써, 자연 상태라는 기원의 상실로 인해 인간이 겪게 되는 소외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계몽주의 사상을 비롯한 인간과학 자체가 소외의 원환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자신도 모르게 당대의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된다.


알튀세르는 루소 역시 이러한 원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계몽주의의 한계와 역설을 날카롭게 드러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는 다른 사회계약 이론가들과 달리 사회계약이 부자들의 고안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성은 부자들의 이성이며, 사회계약은 만인의 자유를 목표로 하는 합리적 기획이라는 외양 아래 부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기획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계약의 본질은 이상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성과 현실 사이의 관계, 곧 이상적인 계약이 그 이상성 자체로 인해 계급적 성격을 띠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 역으로 말하면 (계급 지배의) 현실의 한 요소를 이루는 이상적 합리성의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루소는 이러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알튀세르에 따르면 그 자신의 고유한 이데올로기, 곧 소생산자의 유토피아라는 이데올로기에 의거하는 것을 넘어서 이 문제를 사고하지는 못했다. 이를 매우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관한 알튀세르의 유명한 논문, 그리고 이 책 35장의 강의 대상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스피노자에 관한 강의가 포함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발리바르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알튀세르의 고등사범학교 강의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가 스피노자에 관한 이구동성으로 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스피노자에 관한 강의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사실 알튀세르에게 스피노자는 마키아벨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철학자였으며,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 또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 곳곳에 스피노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알튀세르는 생전 스피노자에 관한 독자적인 저술을 남긴 적이 없지만, 그의 스피노자 해석과 마르크스주의적 전유는 들뢰즈와 더불어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알튀세르의 작업 방식의 특성을 볼 때 이는 그가 오랫동안 스피노자에 관해 연구하고 강의했음을 시사해 주는데, 그의 정치철학 강의록들을 묶은 이 책에서 그 강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아쉽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에 수록된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록들은 충분히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튀세르 사상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마키아벨리나 루소만이 아니라 홉스에 관한 강의를 읽어 보면, 철학자들을 독해하는 알튀세르의 독법이 얼마나 개성적인 것인지 넉넉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

 

이 책을 내는 데 특히 많은 도움을 준 황재민 선생과 이찬선 선생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두 사람은 초역된 원고를 꼼꼼히 원서와 대조하여 여러 가지 사항을 바로잡아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이 책의 공역자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오역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번역이 나오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 준 후마니타스 여러분께도 죄송하다는 말씀과 더불어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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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우 2019-06-1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예약구매 했습니다. 번역 수고하셨고 감사드립니다.

balmas 2019-06-14 13:47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하시길 바랍니다.

Comandante 2019-12-15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가 하는 ‘고시특강‘이라니 후덜덜하네요^^
늦었지만 번역 감사드립니다.

balmas 2019-12-15 22:38   좋아요 1 | URL
하하, ˝고시특강˝이라고 하니 더 확 실감이 오네요.^^

현자의돌생윤 2021-07-1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본 구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21-07-12 12:4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현자의돌생윤님.^^ 이렇게 인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이 진전된 사유를 위한 좋은 촉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황해문화 103호, 곧 이번 여름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이번 여름호 특집은 "청년 문제"입니다. 


자랑같아서 쑥스럽지만, 아주 시의적이고 유익한 글들이 실렸습니다. 


한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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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권두언 : 우리 사회의 증상으로서의 청년

 

 

작년 어느 무렵 편집회의에서 청년 문제를 한번 다뤘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은 과연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였다. 이른바 ‘386’ 또는 ‘586’ 세대에 속하는 나는 몇 년 전부터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대학의 학과에 속해 있지 않고 꽤 오랫동안 대학 연구소에 근무해서 생긴 궁금증이었다. 학과 소속의 교수였다면 자연스럽게 대학생들과 자주 접하고 그들의 생각과 고민, 욕망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대학의 연구소에 있다 보니 평소에 접하는 이들이 대개 내 나이 또래의 연구자들이나 아니면 선배 연구자들, 또는 젊다고 해도 이미 30대를 훌쩍 넘긴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소장 연구자들이었다. 간혹 대학의 강의를 맡게 되어도 주로 대학원 강의를 하다 보니 역시 젊은 학생들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비교적 동질적인 생각을 가진 비슷한 세대의 연구자들과의 생활과 교류는 학문적 연구를 진작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의 범위를 한정하고 시야를 고정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년 세대에 대한 이런 관심은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는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3포 세대, 5포 세대, N포 세대 같은 자조적인 담론이 유행했으며, 그와 더불어 한남, 메갈리아, 워마드 같이 젠더 전쟁을 상징하는 어휘들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 왔다. 주로 20대 청년들이 발신한 이 담론과 어휘들은 내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이 내가 (또는 우리) 막연하게 청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랄까 기대랄까, 아니 오히려 환상 같은 것들을 무자비하게 깨뜨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청년은 늘 진보와 저항의 상징이었다.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 독재에 맞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이들, 그리고 전두환 군사 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싸워서 끝내 역사적인 민주화의 성과를 이룩한 이들이 바로 청년 아닌가? 자신들의 빛나는 젊음을 반독재투쟁으로 보낸 청년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청년은 내게는 (또는 우리에게는) 늘 진보와 저항의 등가어였다.


그러나 이제 청년들 스스로 이러한 표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조소와 경멸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 곤궁할뿐더러,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기 때문일 터이다. 2000년대 이후 청년 실업의 문제는 늘 정치권과 사회의 주요 관심사였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거와 복지, 사회적 관계와 문화에서 청년들의 삶은 열악한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사회가 점차 초고령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미래에 청년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눈덩이처럼 증가하고 있다. 현재의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못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전 세계적인 불평등의 심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지없이 관철되고 있어서, 청년들 사이의 양극화는 깊어져만 가고 있다. ‘금수저청년들이 탄탄한 경제적사회적 배경 덕분에 이른 나이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면, ‘흙수저또는 동수저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알바를 전전하면서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거나 아니면 반강제로 창업 전선으로 밀려나고 있다. 혹 일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가중되는 육체적정신적 피로에서 기인하는 무기력 증상을 뜻하는 번아웃’(burn-out)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실천할 만한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 및 특히 성적인종적문화적 소수자들은 아마도 더욱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강고한 가부장제 문화와 관행이 여성들을 차별하고 있고, 요즘은 다양한 방식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 물질적 차별에 상징적 모욕까지 당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들의 고통과 분노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정상적인) 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한국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소수자들의 고통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의 보수화나 무기력함을 걱정하고 타일러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올해 2월 한 정부 자문기구에서 나온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에 관한 정책 보고서에서 20대 여성을 집단 이기주의감성의 진보 집단으로, 20대 남성은 반페미니즘적인 보수화 집단으로 지목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청년을 다분히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보수진보개념에 입각하여 재단한 것도 문제이지만, 청년을 대상화하거나 심지어 도구화하는 발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흔히 청년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바라보곤 한다. 어떤 점에서는 당연하고 또 필요한 관점일 수도 있지만, 청년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그것은 청년 문제를 특정한 생물학적 연령기에 고유한 문제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청년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 곧 고용문제, 주거 문제를 비롯한 복지 결여의 문제, 그리고 노동에서 겪는 비인간적 착취의 문제, 문화적 관계의 빈곤함의 문제, 젠더 차별의 문제, 지방 청년들의 소외 문제 가운데 청년들에게만 고유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 체계의 구조적 문제점으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들이며, 따라서 구조적 차원의 해법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풀리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더 나아가 청년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청년들을 대상화하기 쉬운 접근법이다. 청년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성숙했으되, 아직 사회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기에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우선 일정한 일자리를 얻음으로써 사회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음을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이는 청년들을 주체적인 이니셔티브에 따라 발언하고 판단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주체들이 아니라, 일단은 보호받고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피후견자의 지위로 격하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청년을 진보와 저항의 주체로 간주하는 기성 세대의 환상은 이를 상상적으로 은폐하고 봉합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또한 청년들을 간단히 세대로 묶을 경우, 청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립과 갈등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는 문제적이다. 하지만 특집의 여러 글이 지적하듯이 단수로서의 청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의 청년들이 존재할 뿐이며, 그 청년들은, ‘금수저 흙수저담론이 말해주듯 계급적으로 분할된 청년들이고, 또한 젠더 상으로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청년들이다. 아마도 서울(수도권)과 지방의 대립, 국민과 비국민의 대립 역시 청년들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갈등(충분히 인지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절박할 수 있는)의 축일 터이다.


따라서 우리가 청년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청년의 문제를 단지 세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증상으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청년 문제를 증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청년들을 주체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스스로 발언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이니셔티브를 부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청년 문제는 청년들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며, 대상으로서의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한다고 해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들을 우리 사회의 실패한 시스템을 함께 고민하고 그 개혁의 방향을 함께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할 때,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전환을 이끄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청년들에 대한 자기중심적 환상에서 벗어나 청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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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다루는 이번 호 특집은 다섯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편집위원회가 특별히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이 다섯 편의 글은 청년 문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장기적인 전망에 입각하여 해법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요컨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증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먼저 이승윤 선생은 노동시장에서 청년들이 처해 있는 불안정한 상황을 촘촘한 자료를 통해 상세히 보여주면서 20세기 이후 100여 년 동안의 복지국가의 형성과 전개, 재편의 흐름 속에서 청년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선생은 디지털 자본주의와 플랫폼 경제의 발전은 저임금 일자리의 확산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존의 고용 중심 정책으로는 청년들의 불안정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복지국가의 역사적 전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복지제도의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추구할 만한 주체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 실질적인 복지국가 경험을 하지 못한 청년 세대들이 앞으로 복지제도의 개혁과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이는 청년 문제의 해법은 청년들의 주체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승윤 선생의 글이 거시적인 흐름에 주목한다면, 이충한 선생은 좀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청년노동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 선생은 전방위적 엉망감이라는 흥미로운 용어로 청()년들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엉망감은 경쟁의 상위나 하위가 아니라 중간에 놓여 있는 대다수의 존재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 시스템 내부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려고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열정노동의 착취를 당하고 그 결과 의욕 상실과 비노동 지향의 니트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 바로 엉망감인 셈이다. 그렇다면 니트 청년은 취업취약계층도 은둔형 외톨이도 아니며, 열악한 노동환경과 이상한 조직문화 속에서 소진되어버린 다수의 청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올바른 질문은 청년 니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조건이 청년을 니트(비노동) 상태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이다.


선생은 서구 선진국들이 탈고용사회에 접어드는 시대에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낡은 고용 시스템에 매달려 있는 것이 상황을 더욱 가중시킨다고 본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데, 특히 인간학적으로 본다면 노동과 비노동 사이에 중간 단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욕망을 공공화하는 것이 긴요한 과제다. 소외된 노동을 강요하고 그것을 소비주의적 욕망으로 벌충하도록 만드는 것은 청년들을 더욱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다양한 탐색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정책과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임윤서 선생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포토보이스 기법을 활용하여 우리 시대 청년들의 삶과 고민, 욕망과 희망의 내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청년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신들의 생각이 담긴 사진들을 촬영하고 그 사진들에 담긴 의미를 공유하는 포토보이스 기법은 통계 자료나 설문조사 등으로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청년들 자신의 속생각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선생은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청년들의 마음을 탐색하고 있다. 청년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의 부재를 겪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성공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지, 또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바람직한 성공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남는 것은 막막한 피로감과 탈출의 욕구일 것이다. 그것은 소확행이나 덕질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국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과 피로, 혼란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세습화된 불평등 사회와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며, 서열화된 신자유주의 대학이 이끄는 것이다. 이처럼 불안의 일상화 속에서 생존주의 윤리를 습득하도록 내몰리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청년 문제는 단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필자들 가운데 청년이라는 범주에 생물학적 연령상 가장 가까운 최성용 선생은 올해 들어 정치권과 언론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른바 ‘20대 남성을 둘러싼 담론의 허와 실을 날카롭게 따지고 있다. 이 글은 청년이라는 기표, 특히 ‘20대 청년이라는 기표가 허구적이고 맹목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허구적인 이유는 중성적인 청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청년은 다른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젠더적인 차이가 기입된 세대라는 점, 따라서 20대 여성과 20대 남성은 엄연히 다른 존재자라는 점을 삭제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이유는 청년은 진보적이며, 따라서 민주적이고, 따라서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 내지 소망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러한 허구성과 맹목성이 세 가지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여성을 정치적 주체에서 배제한다는 점,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20대 남성을 20대 청년으로 과대 대표화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는 청년에 대한 외부적 시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청년 세대 자신의 시각에서 청년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망하는 관점에서 청년 세대를 재현하는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외부적 시각에서 청년들을 재현하는 이 자신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장기 386세대. 이런 의미에서 장기 386세대와 20대 남성은 남성 연대를 통해 가부장제를 수호하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에 관해 장기 386세대를 필두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세대론 프레임은 문제를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남성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은 20대 남성들에게 동료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고통에 대해 정직하게 인식하고 분노하면서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그들의 길을 함께 따르는 길만이 20대 남성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효관 선생은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사회 전환의 전망에서 청년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 실패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이 시스템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이른바 ‘4차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적 변화에 대해서도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강고한 카르텔 구조는 청년들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해 왔다. 20대 국회에 40대가 19%에 불과하고 30대는 1%에도 미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를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이러한 시스템 실패는 청년들 내부에서 을들 사이의 갈등을 키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생은 정부와 달리 지자체들이 시행하고 있는 청년 거버넌스 정책을 확대하고, 근본적으로는 청년들의 이니셔티브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은 사회적 상상력의 전환과 일상적인 관행과 규범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청년들이 사회적문화적 재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다. 단지 청년을 위해서가 아니라 청년과 함께문제를 인식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첩경인 것이다.

 

***

 

특집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여러 가지 논의들이 지면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우선 특집과 관련된 박정훈 선생의 비평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난 222일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는 포용국가와 청년정책: 젠더갈등을 넘어 공존의 모색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는데, 이 글은 이 토론회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것의 한계를 짚고 있다. 선생은 토론회가 젠더와 청년이라는 두 가지 주제의 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도 양자가 서로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청년 정책의 틀에 입각하여 젠더 문제를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청년 문제 해법의 핵심으로 제시된 당사자성의 한계를 짚고 있는 부분이다. 그 한계는 청년 문제들을 청년 당사자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라는 해법이 오히려 청년들의 도구화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더 나아가 청년 당사자에서 말하는 청년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선생이 보여주듯 이때의 청년은 주로 남성 청년으로 재현되며, 따라서 남성 청년은 과잉대표되는 반면 여성 청년은 과소대표됨으로써 재현과 대표 수준에서의 또 다른 차별을 낳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젠더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계급과 지역 등의 차원에서도 과잉대표와 과소대표의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청년 담론과 그 해법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여성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20대 남성문제의 진정한 해법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의 변화, 공정성 및 능력주의 담론에 대한 분석, 그리고 징병제의 전환 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찾아야 하리라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또한 아시아의 작가들이 평화에 관해 나눈 좌담도 눈길을 끈다. 2018년 한 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회자된 용어는 미투라고 할 수 있다. 사법부와 정치권에서 시작되어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전역으로 확산된 미투 운동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어온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드러냈으며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저항의 연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사건이었다. 서구의 식민 지배를 공통의 유산으로 지니고 있는 아시아 작가들의 대담은 미투 운동을 확장된 시야 속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방글라데시 작가인 샤힌 아크타르가 방글라데시의 독립전쟁과 로힝야족의 대량 학살에 관해 생생히 증언하듯이 여성들과 아이들은 늘 폭력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며, 이는 깊은 육체적정신적도덕적 상처를 남긴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서구적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에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의 식민지적인 현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저항과 투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프리야 바실은 여성들이 연대하기 위한 조건이 인종적국민적 차별과 위계에 대한 명철한 자각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배경과 조건 속에서 활동하는 이들 작가들의 목소리는 미투 운동의 진전을 위해서는 인종, 계급, 젠더, 종교, 교육, 능력 같은 분할과 차별화의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교차적인 투쟁의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이 김남일 작가의 스토리텔링 아시아연재다. 선생은 이번 회에서 하노이와 관련된 스토리를 감동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하노이라는 이름은 얼마 전 우리에게 깊은 실망을 안겨준 기억이 있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최초의 북미정상회담 이후 두 번째 정상회담이 개최된 하노이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곳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의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지만, 허무하게도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생의 글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는 하노이를 우리의 평화를 위한 장소로 기대했지만, 사실 그 이전에 하노이, 곧 베트남은 우리가 두 차례, 아니 그 이상의 폭력을 가했던 장소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군대는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바 있으며, 이러한 학살은 베트남인들의 가슴에 폭력과 고통의 기억을 새겨놓았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베트남 처녀들은 우리나라 농촌 총각들의 결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수입되었다. 선생이 상기시키는 베트남,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국제결혼 전문”, “천생연분 결혼정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초혼, 재혼, 장애인 상담 환영. 후불제같은 국제결혼 안내 현수막들은 우리가 베트남, 그들의 청년에게 어떻게 (상징적인) 폭력을 가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 들어온 수많은 베트남 여성들은 청년 문제의 대상인가 아닌가? 우리는 그들을 청년 문제의 당사자로 인식하는가 아닌가? 그리고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길윤형 한겨레신문 기자의 한일관계에 관한 조망도 눈여겨 볼만한 글이다. 현재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에 있는데, 이는 지구상의 최후의 냉전 지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미래에 관한 한국과 일본의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이다. 일본이 냉전의 해체 이후 부상한 중국에 맞서 자국의 안보를 위해 기존의 미일 동맹을 고수하는 가운데 한국을 그 하위 파트너로 견인하려고 시도한다면, 한국은 남-북과 미-중이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동아시아의 현존 질서를 타파하여 새로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양국의 해법의 차이와 연결되는데, 일본이 존 볼턴과 같은 강경파와 더불어 이른바 리비아식 모델을 지지한다면, 한국은 톱다운 방식으로 북핵 문제 해결과 종전 선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선생은 현재 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여 동아시아 냉전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대일 외교에 대한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라는 현안을 풀어내는 것이 가장 긴급한 문제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과제는 김대중 정부 시절 이루어졌던 한일 간의 우호협력 관계에 버금가는 새로운 양국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언론 문제를 다루는 세 꼭지의 문화비평은 진정한 언론적폐의 청산을 위해서는 시민 중심의 미디어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의 언론은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와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에 편승하여 퇴행을 거듭했으며, 최근에는 유료방송 및 글로벌 미디어 산업의 국내 시장 잠식으로 인해 한층 더 언론의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언론개혁의 과제도 한층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채영길 선생은 기술관료적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개입적 전략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다섯 가지 조직화 원리에 기반을 둔 이러한 전략은 언론개혁의 철학적 기반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또한 정수영 선생은 소극적 자유가 아닌 적극적 자유에 기반을 둔 언론자유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저항에 직면한 일본의 언론사 사주 및 경영관리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집권이라는 개념은 1960년대 도입된 이후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선생에 따르면 이 개념은 오늘날에는 언론사 사주와 경영진의 배타적인 권능으로 변질되었으며, 오히려 언론 민주화를 탄압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외부권력-미디어-시민시민사회라는 3자 구도에 기반을 둔 자유롭고 어카운터블한(accountable)” 언론자유 개념을 확립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이밖에도 이수경 작가의 소설 크라운공장노동자가족과 윤성희 작가의 김용균의 세계는 우리 사회의 참담한 노동의 현실을 묵직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하나 선생의 르포 이 땅의 방 한 칸은 거주의 대상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신도시 아파트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시와 문화비평, 서평 역시 [황해문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값진 소품들이다. 독자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

 

새 정부가 들어선지 2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던 한반도의 평화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고, 노동개혁 및 경제개혁은 오히려 주춤거리다가 뒤로 물러서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법개혁과 정치개혁의 과제도 답답하게 막혀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수구세력은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면서 호시탐탐 탄핵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는 야수의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청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혹시 한가한 조개 줍기의 태도로 비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특집의 필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듯이 청년 문제를 기존의 과제들에 병렬적으로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부차적인) 과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앞서 말한 과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정부 및 기성세대의 방식이 지닌 맹목과 모순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청년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과 규범, 인식틀을 살펴보는 문제이며,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호 특집이 이를 납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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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2019-06-19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년이 연구 대상인듯하네요. 청년의 대상화, 나 청년의 재현, 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서, 도서관에 가 읽어봐야할것 같아요.

balmas 2019-06-20 01:39   좋아요 0 | URL
ㅎㅎ 예 맞습니다. [황해문화] 이번 호 특집이 바로 청년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오는 5월 24일 ~ 26일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제9회 맑스 코뮤날레가 개최됩니다. 


이번에도 알차고 유익한 발표들이 많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저는 24일 열리는 <한국사회와 포퓰리즘> 세션의 사회를 맡게 됐습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전체 프로그램 및 이번 대회의 취치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http://marxcommunnale.net/board/bbs/board.php?bo_table=pro&sca=\\\\\%EC%A0%9C9\\\\\%ED%9A%8C&mx_ver=9&wr_i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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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재단 사람은 박래군 선생을 비롯해서 오랫동안 인권운동에 헌신해온 인권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인권운동을 지원하고 인권운동가들의 활동에 보탬이 되고자 만든 단체입니다. 


다른 사회운동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사정이 넉넉치 못한데,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인권운동가들의 도움이 필요한 현장과 사람들, 문제들이 


숱하게 존재합니다. 조금씩 인권재단에 후원을 해주신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아래는 인권재단 사람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한번씩 구경해보십시오. 


http://www.hrfu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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